• 최종편집 2025-11-08(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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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목사 (탄자니아 아프리카연합대학교 총장)

종교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지만, 한 가지 인상 깊은 장면을 회상한 것은 기록되어 있다. 테아 반 힐세마(Thea B. Van Halsema)가 저술한 『This was John Calvin(이 사람 존 칼빈)』이라는 책을 보면, 칼빈은 어머니와 함께 짧은 순례길을 걸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골짜기를 따라 두 시간을 걸은 끝에 도착한 곳은 예수의 외할머니로 여겨지는 성 안나의 유골이 안치된 사당이었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들어 올려, 금으로 장식된 관 안에 누워 있는 유골에 입을 맞추게 했다. 사당 안은 촛불로 밝고 향기로웠으며, 숭배하는 순례자들의 눈빛은 경건으로 가득했다. 어린 칼빈에게 그것은 아마 신비롭고 감동적인 체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이 장면을 바라볼 때, 그것은 단순한 종교적 정서 이상의 것을 내포하고 있다.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말 세 마디가 끝나기도 전에 성당의 종소리가 울린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성읍 생활의 중심이 되었던 중세 말 교회의 풍경은 단지 아름답고 경건한 외양만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신앙의 본질이 흐려진 채 형식과 외적 숭배에 몰두한 영적 타락이 도사리고 있었다. 가톨릭 교회의 형식주의와 권위주의, 성유물의 과도한 숭배, 그리고 성직자들의 탐욕은 교회의 영적 본질을 흐리고 있었다. 성 안나의 유골만이 아니라, 세례 요한의 머리카락, 예수의 치아, 오병이어 사건의 빵 부스러기, 가시관 조각과 구약시대 만나의 조각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성유물이 사람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교회는 이러한 유물들을 통해 기적을 기대하고 은총을 얻으려는 사람들의 심리를 자극했고, 성직자들은 이를 통해 물질적 이익과 권력을 얻었다. 더 나아가 성당과 수도원은 특정 유물의 진위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다투었으며, 이 논쟁은 지역의 종교적 경쟁심을 자극했고, 프랑스 의회조차 이를 조정하지 못할 정도였다. ‘성인’의 이름을 붙인 성당이나 수도원은 유골을 소유한 장소로서의 권위를 주장했고, 이는 종종 종교적 신비주의를 이용한 경쟁과 탐욕의 장이 되었다. 말하자면, ‘거룩’은 거래되고, ‘은혜’는 판매되었으며, ‘경건’은 형식으로 포장되었다. 이 모든 모습은 한마디로 ‘거룩함의 상업화’였고, 진리 대신 형식과 기적, 외적 경건에 목을 매던 교회의 실상이었다.

이러한 부패는 개혁자들로 하여금 교회의 본질을 되묻게 했고,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잉태하게 했다. 칼빈은 단지 교리의 개혁자가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을 지닌 영적 개혁자였다. 그는 말씀으로 돌아가야 함을 외쳤고, 유골과 형상과 건물 안에서가 아니라, 성령의 조명 아래 말씀과 신앙의 참된 삶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함을 강조했다. 그의 신학과 실천은 교회의 본질을 새롭게 정의했다. 교회는 권위의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충실한 선포와 성례의 정당한 시행이 있는 곳이며, 무엇보다 복음이 살아 움직이는 믿는 자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문제는 과거의 부패가 오늘날에도 형태만 달리하여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교회는 더 이상 성인의 유골을 입맞추지 않지만, 또 다른 유물들을 만들어 숭배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 화려한 예배당, 웅장한 무대, 감정을 자극하는 조명과 음악, 유명 목회자에 대한 절대적 의존, 그리고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사역 성과들이 우리 시대의 새로운 성유물이 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때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상징처럼 여겨지지만, 실상은 인간의 욕망을 투영한 현대판 형식주의일 수 있다.

교회는 언제나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오늘날의 교회 안에도 ‘가시관 조각’이 있다. 그것은 더 멋진 무대, 더 화려한 예배당, 더 대형화된 사역과 같은 것들이다. 물론 이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이 중심이 되어 하나님을 도구화하고, 복음을 수단화하며, 인간의 만족을 위한 종교 행위로 전락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촛불 아래에서 거룩을 잃고 있는 것이다. 칼빈이 외친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는 외침은 시대를 초월한다. 이는 단지 제도 개혁의 구호가 아니라, 매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교회가 교회다워지기 위한 끊임없는 성찰과 순종을 요구하는 외침이다.

칼빈의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은 단지 과거의 회고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거울과 같은 통찰이다. 그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성유물 앞에서 입을 맞췄던 기억은, 우리가 누구의 손에 이끌려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를 묻는 물음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순례 중이며, 여전히 방향을 선택해야 하는 길 위에 서 있다.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지금 누구를, 무엇을 숭배하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멈추어 서는 것, 그리고 다시금 본질로 되돌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종교개혁의 정신이요, 오늘의 교회가 회복해야 할 신앙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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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칼빈의 추억 한 토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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