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열심히 하면”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고,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며,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증언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어느새 마음 깊은 곳에 이런 공식이 자리 잡습니다.
“내가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충성하면 하나님이 나를 더 사랑하신다.”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읽고, 봉사를 열심히 해야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다.”
겉으로 보면 그럴듯한 말처럼 들립니다. 실제로 교회는 이런 ‘열심 있는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생각이 복음의 중심이 아니라 종교의 언어라는 데 있습니다.
종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열심히 하면, 네가 정성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너에게 복을 줄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정반대로 말합니다.
“네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연약할 때, 하나님이 먼저 너를 위하여 행하셨다.”
우리는 흔히 ‘기독교도 종교’라고 부르지만, 복음 그 자체는 ‘인간이 하나님께 올라가려는 종교’와는 전혀 다른 길을 말합니다. 종교는 인간이 하나님께 올라가려 하고, 복음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려오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으로 생각하지만, 성경은 오히려 반대로 말합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이렇게 하면 의로워질 수 있다”라는 길이 아니라,
“너는 이렇게까지 해도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다”라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만약 우리가 율법을 통해 스스로 의롭다 할 수 있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굳이 십자가를 지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선언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값없이’ 입니다.
우리는 늘 뭔가를 “치르고 얻는 방식”에 익숙합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 사업을 열심히 하면 성과, 사람에게 잘하면 인정 등의 공식을 갖고 삽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대가의 구조’에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신앙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옮겨 버립니다.
“기도라는 영적 수고를 드려야 응답을 받는다.”
“헌신이라는 영적 비용을 지불해야 복을 받는다.”
“눈물과 금식을 쌓아야 하나님이 움직이신다.”
“기도도 쌓고, 헌신과 봉사도 쌓아야 한다”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너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너는 이미 사랑받는 자다.”
“너의 열심이 아니라,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 때문에 너는 이미 받아들여진 자다.”
여기서 우리는 깊은 충돌을 경험합니다.
종교적 습관과 복음의 진리가 충돌합니다.
입으로는 “은혜로 삽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여전히 “조금 더 열심히 해야…”라는 죄책감과 부담 속에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론 이것이 게으름을 합리화해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문제는 ‘열심’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열심의 동기와 방향입니다.
“더 사랑받기 위해” 열심을 내는가? “이미 사랑받고 있기 때문에” 기쁨으로 헌신하는가?
복음은 두 번째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조금 더 해라, 그래야 사랑해 주겠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미 독생자를 주실 만큼 사랑하셨고,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제대로 알면,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오히려 종교적 강박에서 자유로워질수록, 감사와 감격 때문에 기도하고 싶고, 말씀을 보고 싶고, 섬기고 싶어집니다.
“노력해야 사랑받는 신앙”에서 “가만히 있어도” 사랑받는 자이라는 생각의 전환, “이미 사랑받기에 기쁨으로 헌신하는 신앙”으로의 전환, 이것이 복음을 아는 첫 번째 회심입니다.
부담과 죄책감으로 신앙을 끌고 가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 위에 조용히 앉아 보십시오.
예수님이 이미 이루신 것들을 하나씩 묵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하나님, 제가 ‘더 해야 사랑받는다’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이제는, 이미 사랑받고 있다는 이 복음을 믿게 해 주옵소서.”
이 고백의 자리에서부터, 복음의 기쁨이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하면”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고,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며,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증언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어느새 마음 깊은 곳에 이런 공식이 자리 잡습니다. “내가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충성하면 하나님이 나를 더 사랑하신다.”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읽고, 봉사를 열심히 해야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다.” 겉으로 보면 그럴듯한 말처럼 들립니다. 실제로 교회는 이런 ‘열심 있는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생각이 복음의 중심이 아니라 종교의 언어라는 데 있습니다.
종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열심히 하면, 네가 정성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너에게 복을 줄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정반대로 말합니다. “네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연약할 때, 하나님이 먼저 너를 위하여 행하셨다.” 우리는 흔히 ‘기독교도 종교’라고 부르지만, 복음 그 자체는 ‘인간이 하나님께 올라가려는 종교’와는 전혀 다른 길을 말합니다. 종교는 인간이 하나님께 올라가려 하고, 복음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려오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으로 생각하지만, 성경은 오히려 반대로 말합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이렇게 하면 의로워질 수 있다”라는 길이 아니라, “너는 이렇게까지 해도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다”라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만약 우리가 율법을 통해 스스로 의롭다 할 수 있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굳이 십자가를 지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선언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값없이’입니다. 우리는 늘 뭔가를 “치르고 얻는 방식”에 익숙합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 사업을 열심히 하면 성과, 사람에게 잘하면 인정 등의 공식을 갖고 삽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대가의 구조’에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신앙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옮겨 버립니다. “기도라는 영적 수고를 드려야 응답을 받는다.” “헌신이라는 영적 비용을 지불해야 복을 받는다.” “눈물과 금식을 쌓아야 하나님이 움직이신다.” “기도도 쌓고, 헌신과 봉사도 쌓아야 한다.”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너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너는 이미 사랑받는 자다.” “너의 열심이 아니라,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 때문에 너는 이미 받아들여진 자다.” 여기서 우리는 깊은 충돌을 경험합니다. 종교적 습관과 복음의 진리가 충돌합니다. 입으로는 “은혜로 삽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여전히 “조금 더 열심히 해야…”라는 죄책감과 부담 속에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론 이것이 게으름을 합리화해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문제는 ‘열심’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열심의 동기와 방향입니다. “더 사랑받기 위해” 열심을 내는가? “이미 사랑받고 있기 때문에” 기쁨으로 헌신하는가? 복음은 두 번째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조금 더 해라, 그래야 사랑해 주겠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미 독생자를 주실 만큼 사랑하셨고,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제대로 알면,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오히려 종교적 강박에서 자유로워질수록, 감사와 감격 때문에 기도하고 싶고, 말씀을 보고 싶고, 섬기고 싶어집니다. “노력해야 사랑받는 신앙”에서 “가만히 있어도” 사랑받는 자이라는 생각의 전환, “이미 사랑받기에 기쁨으로 헌신하는 신앙”으로의 전환, 이것이 복음을 아는 첫 번째 회심입니다. 부담과 죄책감으로 신앙을 끌고 가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 위에 조용히 앉아 보십시오. 예수님이 이미 이루신 것들을 하나씩 묵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하나님, 제가 ‘더 해야 사랑받는다’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이제는, 이미 사랑받고 있다는 이 복음을 믿게 해 주옵소서.”
이 고백의 자리에서부터, 복음의 기쁨이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