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우리는 다시 한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주님의 발걸음을 따라간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던 환호 속에서, 마태복음 21장에 기록된 그 장면은 왕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 환호의 열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그분이 마주하신 것은 찬양이 아니라 뒤틀린 예배의 모습이었다.
주님은 성전을 보시고 이렇게 선언하신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이 말씀은 단순히 성전 앞에서 장사하던 행위를 향한 도덕적 비판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이 사건을 “교회에서 장사하면 안 된다”는 교훈이나 탐심에 대한 경고로 축소시킨다. 그러나 질문은 더 깊어야 한다. 왜 그들은 성전 앞에서 장사를 했는가?
그곳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였기 때문에 장사가 잘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들은 제사를 드리기 위해 필요한 짐승과 물품을 제공함으로써 예배를 “더 쉽게”, “더 편리하게” 만들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들의 행위는 예배를 방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돕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것을 “강도의 소굴”이라 부르셨다.
왜일까? 그 이유는 예배의 본질이 인간의 편리함에 의해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점점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이동할 때, 그 예배는 더 이상 거룩한 예배가 아니다. 편리함은 어느 순간 거룩함을 대체한다. 효율은 경외를 밀어낸다. 그렇게 성전은 기도의 집에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공간으로 변질된다.
이 장면 앞에서 우리는 오늘의 교회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교회는 얼마나 “편리한 예배”를 추구하고 있는가? 예배 시간은 성도들의 일정에 맞춰지고, 예배 순서는 사람들의 취향에 따라 조정되며, 설교는 듣기 좋은 메시지로 다듬어진다. 교회의 공간과 구조 역시 성경적 상징과 신학적 의미보다는 실용성과 효율성에 의해 결정된다. 초대교회로부터 이어져 온 예배에 대한 경외와 철학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호렙산에서 모세를 부르실 때,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셨다. 대제사장조차 1년에 단 한 번만 들어갈 수 있었던 지성소의 거룩함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예배 가운데 그 거룩함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과연 영적인 신을 벗고 하나님 앞에 서고 있는가?
어쩌면 우리는 이미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놓았는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단지 상인들의 행위를 지적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방식 자체를 뒤엎으셨다.
만약 오늘 주님께서 우리의 교회를 방문하신다면 어떨까? 우리의 예배와 신앙생활을 보시고 책망하시며 우리의 삶의 방식을 뒤엎으신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자리에 남아 있을까? 아니면 많은 이들이 떠나가게 될까?
불과 며칠 전까지 “호산나”를 외치던 무리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다. 이 극적인 변화는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자처럼 살아가지 못한다. 오히려 백 데나리온을 붙들고 놓지 못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우리는 은혜를 받았지만 여전히 자기중심적이다. 모든 것이 우리 마음에 맞아야 한다. 예배조차 우리가 편해야 하며,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쉽게 외면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인가? 바로 우리가 그 “강도”이다.
그러나 고난주간의 메시지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또 다른 장면을 본다.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강도들이 달려 있었다. 그들은 분명 죄인이었고, 심판받아 마땅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중 한 강도는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고백한다.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그때 주님은 그에게 말씀하신다.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것이 은혜다. 우리가 아무리 강도와 같은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우리가 만든 예배가 아무리 왜곡되었다 할지라도, 십자가 앞에서 주님을 향해 돌아서는 자에게는 여전히 길이 열려 있다. 강도의 소굴 속에서도 은혜의 통로는 막히지 않는다.
고난주간, 우리는 묻는다. 나는 지금 호산나를 외치고 있는가, 아니면 십자가를 외치고 있는가? 나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아니면 소비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가, 아니면 나 자신을 중심에 두고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의 끝에서, 우리는 다시 십자가를 바라본다. 그곳에서 강도였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는 은혜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