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행연월일 2026-04-2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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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부산 고신교회)

 부활의 아침, 우리는 요한복음 20장에서 한 장면 앞에 서게 된다.

 

아직 해가 완전히 떠오르지 않은 이른 새벽,

누군가는 울며 달려왔고, 두 제자는 그 소식을 듣고 다시 달려간다.

숨이 차오를 만큼 급하게, 마음이 무너질 듯한 상태로, 그들은 빈 무덤을 향해 달려간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기록한 요한은 끝내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숨기고, 한 가지 이름만 남긴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이 이름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고백이다.

동시에 초대다.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의 품에 기대던 자리(13:23),

십자가 아래에서 끝까지 떠나지 않던 자리(19:26-27),

두려움 속에서도 빈 무덤을 향해 달려가던 자리(20:2-8),

그리고 부활하신 주를 가장 먼저 알아보던 자리(21:7).

그 모든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는 같은 이름으로 서 있다.

 

사랑받는 제자!”

 

요한은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그 자리를 비워 둔다.

그리고 우리를 그 자리에 앉힌다.

그래서 이 복음은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서게 된다.

 

우리가 예수의 품에 기대는 자가 되고,

우리가 십자가 아래에 서 있는 자가 되며,

우리가 눈물로 무덤을 향해 달려가는 자가 된다.

 

빈 무덤 앞에 도착했을 때, 사랑받는 제자는 베드로보다 먼저였다.

더 빨랐고, 더 간절했다.

그러나 그는 멈춘다. 무덤 안을 들여다보면서도, 들어가지 않는다.

숨을 고르며, 기다린다.

뒤늦게 도착한 베드로가 먼저 들어간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사랑받는 제자가 들어간다.

 

이 짧은 순간은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을 남긴다.

더 빨리 달려온 자가 먼저 들어가지 않는다.

더 뜨거운 마음을 가진 자가 스스로를 앞세우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열심을 내려놓고, 사도적 질서 앞에 선다.

 

신앙은 단순히 뜨거움이 아니다.

눈물이 많다고 해서, 더 빨리 달린다고 해서, 더 깊은 믿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종종 열심을 믿음으로 착각한다.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고 앞서 나아가는 것이 신앙의 깊이인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전혀 다른 길을 보여준다.

참된 믿음은 질서 안에 있으며, 사도들의 증언 위에 서 있다.

때로는 멈추는 것이 믿음이고,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다.

그리고 그 기다림 속에서 우리는 묻게 된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무덤은 어디에나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무덤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단 하나의 무덤만이비어 있다.

단 하나의 무덤만이생명을 품고 있다.

 

만일 우리가 사도들의 증언을 떠나,

교회의 고백을 떠나,

스스로의 열심만을 붙잡고 달려간다면,

우리는 다른 무덤에 도착할 수도 있다.

 

그곳은 여전히 죽음이 머무는 자리다.

아무리 열심히 달려갔어도, 그 끝이 죽음이라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16:18)라고 말씀하신 것은,

교회가 사도적 고백 위에 세워진 공동체임을 드러낸다.

 

우리의 신앙은 개인의 열심이나 감정이 아니라, 사도들의 증언과 교회의 고백 위에 세워져야 한다.

 

영적으로 보면, 베드로보다 먼저 무덤에 들어가는 것은 위험하다.

그것은 믿음의 열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이고 무질서한 신앙일 수 있다.

사도들의 질서를 떠나 스스로 길을 찾는다면, 우리는 잘못된 무덤에 들어갈 위험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배운다.

믿음은 속도가 아니라, 어디에 서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부활의 아침, 우리는 다시 그 질문 앞에 선다.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나는 정말 사도의 고백 위에 서 있는가?

아니면 나의 생각과 열심이 나를 다른 곳으로 이끌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회의 질서를 신뢰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것을 넘어 스스로 길을 만들고 있는가?

교회의 방법보다 나의 방법이 더 맞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혹시 나는 도리어 베드로에게 교회를 가르치려고 하는 자의 자리에 서 있지는 않은가?

 

믿음이 전혀 없는 것도 위험하지만, 잘못된 믿음 또한 치명적이다.

전자는 어떤 무덤에도 이르지 못하지만, 후자는 잘못된 무덤으로 이끈다.

 

그러나 복음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기다림 끝에,

사도적 질서 안에서, 베드로의 증언을 따라, 사랑받는 제자는 마침내 무덤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단순히 빈 공간만을 본 것이 아니다.

 

그는 보았고, 믿었다.

 

부활은 설명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부활은 믿음으로 열린다.

눈으로 확인하기 이전에,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건이다.

그 믿음이 절망을 생명으로 바꾸고, 눈물을 소망으로 바꾼다.

 

그래서 이 아침, 우리도 그 자리에 서게 된다.

달려왔고, 멈추었고, 기다렸고, 이제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복음은 우리에게도 같은 고백을 남긴다.

 

사랑받는 제자가 들어가 보고 믿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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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빈 무덤과 사랑받는 제자(요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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