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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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재철 목사] 진짜 믿어지니?
    진짜 믿어지니? 500원의 헌금 이후, 안내받은 청소년부 주일예배에 찾아갔다. 긴장과 함께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 그리고 흥분으로 문을 열었다. 어린이예배에서 보았던 남자 전도사님의 격한 환영이 나를 더 긴장이 시킨다. 환영해 주시니 마음이 놓이면서도 긴장이 더해지는 것은 왜일까? 주변을 둘러보니 내 또래 남자 아이가 앞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외모도, 기타도, 노래도. 나이스하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평소에 노래를 즐겨 부르던 나에게는 너무나 멋진 모습이다. 흠모할만하다. 그리고 긴 의자에는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모여 앉아 앞에 선 남자아이의 가이드에 따라 노래를 부르고 있다. 뭔지 모를 흥분에 자리에 앉게 되었다. 모르는 노래를 따라 부르고, 모르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래도 상식이 있었기에 주머니에 천 원짜리 한 장 들고 온 것으로 헌금순서를 능숙하게 넘긴다. 문제는 사도신경이었다. 아주 어릴적 외웠던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 눈을 감고 조용히 친구들의 중얼거림을 듣는 것으로 OK. “진짜 왔구나? 반갑다. 중고등부 담당 전도사님이야.” 오전 주일학교 예배에서 만났던 분과 예배가 끝나고 나서야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20대 후반? 인상은 좋았는데 잘생긴 분은 아니다. 그리고 옆에는 예배 내 옆자리를 지켜주었던 분이 중고등부 선생님이라는 소개를 하셨다. 미소가 참 아름다운 분이다. 간단하게 나의 소개를 하며 주변에 있던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유난히 동갑이 많은 교회였다. 그리고 한 살 어린 여중생들이 많았다. “어? 오빠네? 반가워. 자주봐.” 아, 내가 오빠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는 것을 오랜만에 상기시켰다. 이곳에 오기를 잘했다. 등록이라는 절차를 안내받고는 ‘1’도 고민하지 않았다. 이곳 패밀리가 되어야했다. 무엇인가 내 삶에 밝음이 찾아오는 느낌이다. 그렇게 흔쾌히 등록을 마친 후 전도사님께서 갑자기 진지한 톤으로 질문을 하신다. “사영리를 알고 있니?” 태어나서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단어다. 모른다는 나의 대답에 전도사님은 나를 의자에 앉힌 후 옆에 앉아 작은 책자를 꺼내셨다. 글이 많은 것도 아니고, 길지도 않았다. ‘하나님, 예수님, 십자가, 관계.’ 처음 듣는 이야기다. 듣기도 하고, 생각도 하고, 같이 읽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던져지는 질문. “이 사실이 믿어지니?” 전도사님은 나에게 성경의 이야기를 전해 준 것 같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믿어야 할 것처럼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는 진짜로 믿어졌다. 오히려 오늘 소개받은 예수님께 감사와 사랑과 존경의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그런 분이라면 잘 따라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전도사님의 물음에 믿어진다는 힘찬 대답을 드렸다. 전도사님은 놀라셨다. 그리고 재차 물으셨다. “정말 믿어지니?” 아니, 믿으라고 지금까지 설명하셨던 분이. 내가 믿는다고 했더니 이분이 오히려 믿지 못하는 눈치다. 정말 믿어지고, 앞으로 더 잘 알고 싶다는 나의 말에 전도사님의 눈은 더 커져만 갔다. 그리고는 자신을 따라서 기도를 하자고 말씀하신다. 전도사님의 떨리는 음성을 따라 나는 또박또박 반복하며 따라한다. 그렇게 나는 짧은 시간에 예수님의 매력에 빠지면서 신자가 되었다. 당시 전도사님과 지금도 연락을 한다. 그분은 당시를 회상하시며 그 이후로도 나처럼 사영리를 소개받고 한 번에 영접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 사실 나도 사역을 하며 그런 학생을 만나본 적이 없으니. 사람에게 믿음이 생긴다는 자체가 은혜임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확신 있게 본인이 전하고도 그렇게 놀라던 전도사님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조금 우습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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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22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5
    I. 서언(序言)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언어를 배우면서 가장 어렵게 여기는 것 중의 하나는 외국어에는 거의 없는 존칭어와 낮춤말이라고 한다. 그것도 우리 국어의 존칭어가 극히 높임말, 예사 높임말, 예사 낮춤말과 극히 낮춤말 등으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경어 사용이 없는 외국인들로서는 너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언어 예절은 우리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만약 존칭어와 낮춤말을 잘못 사용했을 때는 예의를 중시하는 우리 문화에서는 말하는 자의 인격과 가문, 학력까지도 의심을 받게 된다. 이는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더군다나 목회자의 경우는 거의 모든 사역이 언어에 치중되어 있기 때문에 잘못 사용된 용어하나가 목회자의 전인격인 면을 판단 받을 수도 있다. 이에 본 호에서는 교회 안에서 잘못 쓰고 있거나 다소 듣기에 어색한 말의 사용 중에 ‘아내’에 대한 용어들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아내에 대한 용어 : “우리 사모(師母)입니다”란 말의 남용 1.아내에 대한 호칭들: 한자 문화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언어문화는 아내에 대한 호칭만 해도 아주 다양하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에게 아내를 소개할 때‘아내’ 혹은 ‘내자’라고 하거나 겸손하게 이르는 말로서‘집사람’이라는 말을 한다. 또 다른 사람의 아내를 높여 부를 때는‘부인’이라는 호칭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또한 자기 아내를 남에게 소개할 때‘우리 부인’이라고 하거나 우리 마누라’라는 말을 하는 경우들도 종종 보고 듣는다. 전자의 경우는 너무 높여서 부르는 것이기 때문에 합당하지 않고, 뒤의 경우는 너무 낮추어 부르는 비속어이기 때문에 올바른 호칭어가 아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장 통합교단에서는‘아내’라는 말로 통일하자고 교단 내 교회들에게 권장을 했든 적이 있다. 2.‘우리 사모(師母)입니다’란 말의 남용: 아내에 대한 호칭들 중에 가장 어색한 말 중의 하나는‘우리 사모(師母)입니다.’라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은 경어법으로 본다면 너무 어색한 말이다. 왜냐하면, 사모라는 말의 뜻은‘스승 사(師)’에‘어미 모(母)’자이다. 이렇게 볼 때 이 말의 1차적인 의미는 스승의 부인을 높여서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다. 요즈음에는 좀 더 넓은 의미로 확장되어서 2차적인 의미로는 직장의 윗사람이나 다른 사람의 부인을 높여 부르는 호칭어로도 겸하여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2차적인 의미는 사전적인 적합성의 의미로 본다면 다소의 문제는 있다. 그러나 이미 워낙 많이 사용되고 있는 사회 통용어가 되었기 때문에 2차적인 의미로 사용해도 현재로서는 별 무리는 없다고 본다. 사모라는 용어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곳 중의 하나는 교회이다. 흔히들 교인들이 목회자의 아내를 호칭 할 때‘사모님’이라고 한다. 이는 아주 자연스러운 좋은 호칭어라고 본다. 하지만, 목회자 자신이 자기 아내를 소개할 때‘우리 사모입니다’라고 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또한 목회자의 아내들도 스스로를 소개할 떼‘어느 교회 사모입니다.’라고 하거나, 모임에서는 스스로‘사모회’란 명칭을 정하기도 한다. 이는 너무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말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아내를 스승의 대열에 두거나 또한, 자신 스스로를 높여서 사모라고 호칭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왜 이런 경우가 범람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이‘사모’라는 호칭을 권사, 집사처럼 교회의 하나의 직책의 용어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모는 교회 직책의 명칭이 아니라 교인들이 목회자의 아내를 높여서 부르는 호칭어인 것이다. III . 결 어(結語) 이상과 같은 경우가 하도 많다 보니 아예 이 사모라는 호칭어를 교회의 통상적인 직책의 용어로 사용하자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이 사모라는 말은 이미 사회 일반 전체에 통용되고 있는 정상적인 사전적 표준어이기 때문에 이 호칭어를 교회의 직책 용어로 정할 수도 없는 일이다. 또한 잘못 남용할 때는 일반 사회인들로부터 지탄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흔히 하는 말로 좋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사모라는 말이 덕스럽고 예의를 갖춘 아름다운 존칭어로 보이지만, 이를 자칫 남용하면 오히려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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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22
  • [양대식 목사] 관계의 리더십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 고부간의 갈등이 많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가 좋아야 가정이 편안합니다. 과거에는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가정이 많아서 고부간의 갈등이 많았습니다. 고부간에 관계가 깨지면 고통이 커집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딸처럼 생각하고 며느리의 실수, 부족을 눈감아 주어야 합니다. 요즘은 시어머니가 며느리 눈치 보면서 사는 시대입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격려해 주고 부족한 점이 보이면 상처 받지 않게 부드럽게 대화해야 합니다. 서로간의 나쁜 감정이 커지지 않도록 지혜롭게 해결해야 합니다.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며느리라면 서로의 힘든 상황을 이해해 주어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 독립하여 따로 살면서 서로 보살피면서 사는 것도 하나의 지혜입니다. 시어머니는 아들을 생각해서라도 며느리와의 관계가 좋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고부간의 좋은 관계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재정문제로 갈등이 생기지 않도록 재정관리도 잘해야 합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부담스러워 하지 말고 이해해 주고 섬겨야 합니다. 부모공경의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나이가 들면 쉽게 속상해하는 심리를 이해해 주어야 합니다. 나이가 든 시어머니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약합니다. 서운한 감정을 쉽게 가지게 됩니다.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형편이라면 상황을 잘 받아 들이고 적응해야 관계가 유지 됩니다. 따로 산다면 자주 찾아 뵙고 인사하며 전화해야 합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가 쉽지 않습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미워질 때 ‘시’자들어가는 것이 다 싫다해서 시금치도 안먹고 시편을 읽지 않는다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볼 때 자신의 아들을 섬기고 손주, 손녀를 키우고 살림 하느라고 수고하는 며느리의 힘든 환경을 이해하고, 도움이 되고, 힘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며느리는 나의 남편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감사의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는 힘이 드나 지혜롭게 잘하면 관계가 깨지지 않게 됩니다. 서로 서로 양보하고 배려해야 관계가 잘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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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22
  • [황권철 목사] 부활신앙의 확신
    부활신앙의 확신     주님은 베드로를 특별히 사랑하셨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주님은 자신의 부활소식을 가장 먼저 제자들에게 알리게 하셨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베드로의 이름을 호명하셨을까? 아마 그가 주님을 부인하고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요21:3).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를 향한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주님을 부인하고 디베랴로 갔으나 주님은 그들 먼저 가셔서 그들을 격려해 주셨다. 심한 좌절과 실의에 빠진 베드로에게 주님은 디베랴 바다에서 강한 확신을 심어 주셨다(요21:15-17). 부활신앙은 좌절에 빠진 우리를 강한 확신의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주님은 엠마오 도상에서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이들은 근간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로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주님은 그들 곁에 가서 물으셨다. “너희가 길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눅24:17). 주님은 이들의 근심된 마음에 부활신앙을 불어넣어 줌으로 냉랭한 가슴에 불을 붙여 주셨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24:32). 부활신앙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풀어서 주님의 부활을 증거 해야 한다. 부활신앙은 냉랭한 우리의 가슴에 말씀과 성령으로 불을 지피는 것이다.  주님은 마음이 강퍅한 제자들을 꾸짖었다.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이 말을 들으면 제자들의 신앙이 이상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도 왜 믿지를 못했을까? 사실 제자들은 지금 영적으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전에 주님과 동행하면서 보는 신앙에 길이 들어져 있었던 자들이 한순간 보이던 예수가 사라져 버리니 그들은 갈 바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공허해지고 방황하게 되어 각기 제 길로 가게 되었다. 이제 보이는 메시야 시대가 끝나고 보혜사 성령의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8). 성령 보혜사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보이지 않는 보혜사의 능력을 구하는데 익숙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성령을 무익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의 굳어지고 닫힌 완악한 마음을 책망하셨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일 처음으로 제자들을 만나실 때 깊은 호흡을 내어 쉬면서 말씀하시기를 “성령을 받으라”(요20:22)고 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복음에 신실한 증인이 된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이젠 복음이 유대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은 유대지역에만 제한 받았으나 성령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므로 성령 받은 우리로 하여금 온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다. 그래서 딕 힐리스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가 없는 모든 마음은 곧 선교지이며, 그리스도를 모신 모든 마음은 곧 선교사이다”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 믿지 않는 모든 자에게는 전도해야 하며, 예수 믿는 모든 자는 전도자가 되어야 한다. 믿음으로 중생 하여 세례 받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요 믿지 않는 자는 정죄함을 받아 멸망할 것이다. 부활신앙만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 주신다.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    주님은 믿는 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표적을 주셨다. 여기 표적이란 말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테라스(Teras)란 의미이다. 이는 호흡이 멈추어질 정도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대제사장과 빌라도 총독의 숨을 멈추게 할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다. 둘째, 두나미스(Dunamis)란 말이다. 우리가 바위와 같은 암반을 깨뜨릴 때 다이나마이트와 같은 폭발물을 사용한다. 죄악으로 굳어진 암반과 같은 강퍅한 심령은 성령의 다이나믹한 힘으로만이 파괴할 수 있다. 셋째, 세메이온(Semeion)란 뜻이다. 이는 삶의 의미를 주는 것으로 신호기능을 가진 사인(Sign)을 말한다. 우리가 복음을 가지고 나가면 성령이 우리와 동행하므로 우리의 사역 현장에 놀라운 증거들이 나타난다. 그러면 믿는 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표적이 나타나는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이 쫓겨난다.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라고 했다. 악한 령들은 예수 이름이 아니고는 절대로 쫓아낼 수 없다. 바울이 빌립보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귀신들렸던 자가 바울의 사역을 방해하여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행16:18)고 했다. 예수만이 사망권세와 사단의 권세를 정복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자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명령하면 귀신들이 물러간다.  새 방언을 말한다. “새 방언을 말하며”, 여기 새 방언이란 부활신앙을 소유한 자들이 죄와 사망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 어떤 세력 앞에서도 담대하게 주님의 이름을 증거 할 수 있는 부활신앙을 소유한 전도의 역사를 말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14:19)고 했다. 이는 말씀의 능력이다.  뱀을 잡는다. “뱀을 집어올리며”, 여기 뱀은 지금 우리가 보는 땅에 기어 다니는 그런 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뱀은 미혹의 영으로 나타나는 사단을 상징하는 말이다. 에덴동산에 하와에게 나타난 뱀이 단순한 뱀 이전에 사단의 영이 역사한 것처럼 부활신앙의 소유자는 사망권세를 짓밟은 것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무슨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는다.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옛날에 교회를 박해한 자들은 하나님의 종들에게 사약을 먹이기도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 복음을 전파한 사실들이 많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특별히 간섭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부러 하나님을 시험하기 위해 독약을 먹으면 죽는다. 영적으로 마귀는 우리의 심령 속에 죽이는 독약 같은 미움과 시기와 증오를 심으려고 한다. 그러나 부활신앙의 소유자는 그러한 것으로 인해 해를 받지 않고 말씀으로 승리한다.  병 고치는 능력을 주신다.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5:14-16)고 했다. 사도는 갔으나 사도와 함께 했던 그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중에서 역사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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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
    2022-03-22
  • [김성수 총장] 공의가 하수 같이…
    현대사회는 과학과 과학 기술 등 여러 면에서 굉장한 승리를 쟁취한 사회이면서도 동시에 전례 없는 부정과 부패, 불공정, 불의, 고통 그리고 비극에 깊이 빠져있는 세계이기도 합니다. 방대한 선택의 범위를 구가하면서 자국의 시민들은 거대한 자유를 누리게 하는 바로 그 정부가 전 세계적으로 수십억에 달하는 사람들을 영속적인 가난의 상태에 머물도록 만들고,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정치테러와 고문이 그들의 항존적 환경이 되도록 지원하거나 그러한 불의를 자행하는 부정의한 현실이 바로 현대사회의 한 심각한 비극이기도 합니다. 우크라이나의 비극을 보면서 우리 모두는 함께 분노하고 가슴 아파하며 하나님의 공의가 하수 같이 흐르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하늘의 평강(샬롬)을 누리며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공의가 없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평강의 삶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기쁨과 떨림과 환희가 있는 샬롬은 공의로운 상태 하에서만 피어날 수 있습니다. 평화를 깨뜨리는 많은 조건들과 상황들은 공의도 마찬가지로 깨뜨려 버립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공의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상호간의 의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회는 공의를 추구하는 사회입니다. 이와 같은 사회는 언제나 샬롬의 사회를 지향합니다. 그러나 공의를 추구하지 않는 사회는 샬롬의 성취를 가로막습니다. 예를 들어, 방직 공장 안에 어린아이들을 가두고, 자연 자원들을 함부로 낭비함으로 후손들로부터 그것을 착취하며, 자국 영토의 확장을 위해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국가는 불의한 국가이며, 이와 같은 사회와 국가는 공의를 파괴하며 필연적으로 샬롬의 성취를 가로막는 흑암의 세력입니다. 그렇다면 공의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공의라는 단어를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 냉담하고 원칙을 고수하는 비인간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합니다. 공의와 관련하여 연상되는 것은 재판 과정, 법적 절차, 감옥 등과 같은 단어들입니다. 그러나 공의는 본질상 권리와 관계가 있습니다. 공의와 권리는 사실상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자신의 권리를 향유할 수 있을 때 그 사회는 공의로운 사회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권리라는 단어 역시 공의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다소 냉담하고 비인간적인 어떤 것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권리와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연상하는 것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 천부적 인권, 유엔 회원국의 권리, 권리 헌장 등과 같이 다소 추상적이며 고양된 권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권리의 의미를 공의와 관련하여 아주 다른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개인이 어떤 것에 대해 권리를 가진다라고 할 때 그것은 윤리적으로 합법적인 권리, 그것을 실제로 향유함에 대한 주장, 그리고 그 어떤 것을 누림에 있어서 직면할 수 있는 위협으로부터 보장받을 것에 대한 주장을 의미합니다. 권리는 다른 이에 대해 윤리적으로 합법적인 권리입니다. 권리는 다른 이에 대해 의무와 책임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모든 책임이 권리와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모든 권리는 책임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권리는 또한 그것을 실제로 누림에 대한 주장입니다.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된다고 하더라도 그 권리를 실제로 향유하지 못하면 그 법은 공허한 것입니다. 그리고 권리는 그 어떤 것을 누릴 때에 일반적이거나 심각한, 그러나 고쳐질 수 있는 위협으로부터의 사회적보장을 주장합니다. 위협에 대해서 보장하라는 주장을 권리로 보는 것은 권리가 사회에서 약자와 자신을 변호할 수 없는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구상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권리를 우리는 자기 방어의 권리, 자유의 권리, 발언과 참여의 권리, 그리고 안전과 생계의 권리라는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안전과 생계의 권리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입니다. 안전과 생계권은 그것이 없다면 모든 다른 권리가 의미가 없어지며, 기본적인 삶을 보장하는 권리라는 의미에서 기본적인 권리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서구 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대부분의 다른 권리들보다 더 근본적입니다. 언론의 자유는 그것이 얻어지는 만큼 삶에 유익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없이도 많은 다른 권리를 즐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안전과 생계권보다는 임의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전과 가난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관용의 문제가 아니라 권리의 문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안전을 위협받는 자들과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은 살롬의 성취를 위한 필수적인 조건과 같은 것입니다. 부유한 자가 기아에 있는 허덕이고 있는 사람들을 알고 도울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는 육체적으로 그 어려운 자를 공격하는 것만큼 그 주린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인식한다는 것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겠지만, 이것이 바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성경은 공의에 관한 책입니다. 구약의 모세 오경과 선지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공의를 요구하시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에서 공의에 대해 말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사람들은 고아와 과부들, 나그네들, 그리고 가난한 자들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한 사회에 공의가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는 실제적 원칙은 공의가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미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공의가 요구하는 것은 고아와 과부들, 나그네들, 그리고 가난한 자들과 같이 한 사회의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그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가지고 자신의 공정한 몫을 갖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해하는 공의의 본질은 현대 서구사회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공의와는 분명히 다릅니다.  우리는 공의와 권리의 문제를 인간 존재의 아주 섬세한 조직과 같이 가장 근원적인 것에서부터 구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무참하게 짓밟히고 있는 작금의 국내외 정세를 보면서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희생 제물이나 감언이설의 의식이 아니라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흐르게 하라”(암 5:24)는 것임을 갈파했던 아모스 선지자의 호소를 다시금 가슴에 새길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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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별 칼럼
    2022-03-22
  • 수영로교회 정필도 원로목사 별세
    예장(합동) 부산 수영로교회 정필도 원로목사가 3월 21일(월) 부산 동아대병원에서 소천했다. 향년 82세의 정필도 원로목사는 지난 2월 24일 급성폐렴으로 지금까지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 오던 중이었다. 정필도 원로 목사의 유족으로는 부인 박신실 사모 외 1남 2녀의 자녀가 있으며 장례는 부산성시화 장으로 5일 동안 치러진다. 조문 장소는 부산 해운대구 수영로교회 1층 평강홀이다. 22일(화)부터 24일(목) 오전 11시 위로예식을 가지고 25일(금) 수영로교회에서 천국환송예식을 가진 후 경남 창원공원묘원에서 하관예식을 가진다. 유가족은 고인의 뜻에 따라 조화, 조의금을 받지 않는다고 수영로교회(이규현 목사)가 전했다. 정필도 원로목사는 서울 출생으로 서울대 철학과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미국 리폼드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정 목사는 1975년 6월 1일, 부산 수영구 수영교차로에 수영로교회를 개척해 36년 동안 담임하면서 성도 3만5000여 명이 출석하는 지역 최대 교회로 성장시키고, 지난 2011년 10월 은퇴한 후에도 동남아, 중국, 러시아 등 해외 선교에 힘썼다. 정 목사는 부산성시화운동본부장, 아세아연합신학대 재단이사를 역임하고 서빙더네이션(SERVING THE NATIONS) 이사장, 부산기독교총연합회 증경회장, 부산세계선교협의회 이사장, 부산 CTS 이사장 및 극동방송 고문, 수영로교회 원로목사로 섬겼다. 정필도 목사의 저서로는 ‘교회는 무릎으로 세워진다’, ‘교회는 목사만큼 행복하다’(이상 두란노), ‘하나님의 사람’ ‘성령의 사람’(이상 생명의말씀사), 설교선집 10권 ‘기도로 눈물로 은혜로’(홍성사) 등이 있다. 설재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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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21
  • 경남노회, 주기철 목사 생가 복원
    예장(통합) 경남노회(노회장 손태원 장로)가 항일 독립운동가 주기철 목사 생가를 복원해 창원시에 기부채납하기로 했다. 경남노회는 항일독립운동가 주기철 목사 기념관(창원시 진해구 웅천동로 174)부지에 오는 7월까지 생가 및 헛간 50㎡를 복원하여 창원시에 기부채납할 계획이며, 지난 3월 4일(금), 창원시 접견실에서 허성무 창원시장과 함께 협약식을 체결했다. 故 주기철 목사는 일제의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다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옥고를 치렀다. 주기철 목사는 1944년 평양형무소에서 순교했으며 1963년 대한민국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 생가가 복원 될 주기철 목사 기념관은 1,116㎡, 2층 규모로 전시실, 영상실, 수장고 등이 갖춰진 곳으, 지난해 11월 현충시설로 지정되어 시민들에게 올바른 역사의식을 함양하고 나라사랑 정신을 일깨우고 있다. 허성무 창원시장은 “대한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에서 항일독립운동가 주기철 목사 생가를 복원해 기부하기로 결정한 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다”며 “생가가 복원되면, 주기철 목사 기념관과 함께 애국정신을 고취하는 관광자원으로 활용 적극 활용하겠다”고 밝혔다. 설재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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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단 및 연합회
    2022-03-17
  • [6.1 지방선거] 경남 도내 각 지자체 등 예비후보 등록 시작
    3월 9일 대선이 끝남에 따라 이제 오는 6월 1일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위한 경주가 시작 됐다. 이에 따라 각 정당 또는 무소속 출마자들이 경상남도선거관리위원회에 2월 1일부터 지금까지 예비후보 등록이 이어지고 있다. 경상남도선거관리위원회에 3/16일 오전 11시 기준 등록 된 주요 지역 단체장 예비후보 내역이다. (직함 등 생략) ■ 경상남도 도지사 - 이주영(국민의 힘) ■ 창원특례시 시장 - 송병권 (국민의힘) - 장동화 (국민의힘) - 조청래 (국민의힘) - 차주목 (국민의힘) - 허영 (국민의힘) - 홍남표 (국민의힘) - 김상규 (국민의힘) ■ 진주시 시장 - 한기민 (국민의힘) ■ 통영시 시장 - 강석우 (국민의힘) - 천영기 (국민의힘) - 김종부 (국민의힘) - 정동영 (국민의힘) - 김태종 (국민의힘) - 서필언 (무소속) ■ 사천시 시장 - 이원석 (국민의힘) - 강호동 (국민의힘) - 최상화 (국민의힘) - 박동식 (국민의힘) - 이종범 (국민의힘) - 차상돈 (무소속) - 황승주 (무소속) ■ 김해시 시장 - 박동진 (국민의힘) - 박병영 (국민의힘) - 황전원 (국민의힘) - 박영진 (국민의힘) ■ 밀양시 시장 - 안병구 (국민의힘) - 김병태 (무소속) ■ 거제시 시장 - 김범준 (국민의힘) - 윤호진 (국민의힘) - 신금자 (국민의힘) - 박종우 (국민의힘) - 김한표 (국민의힘) ■ 양산시 시장 - 김효훈 (국민의힘) - 정장원 (국민의힘) 설재규 기자 ※ 차후 등록된 명단은 경상남도선거관리위원회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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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16
  • 경남중부노회, 전도동력세미나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총회 산하 국내전도위원회(위원장 신성현 목사, 이하 국내전도위)가 주최하고 경남중부노회(노회장 윤종국 목사)가 주관하는 전도동력세미나가 3월 15일(화), 경남 창녕군 창녕제일교회(이재격 목사)에서 열렸다. ‘교회, 다시 세상의 빛으로’라는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 앞서 드린 개회예배는 경남중부노회장 윤종국 목사(예림중앙교회)의 인도로 시작해 국내전도위 회계 배종규 장로(대구서교회)가 대표로 기도하고 국내전도위원장 신성현 목사(월배중앙교회)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딤후4:1-5)라는 제하의 말씀을 전했다. 신성현 목사는 말씀을 통해 “주님이 우리게 주신 명령 중 ‘가라’라는 명령이 가장 중요한 명령이다.”라며 “우리가 때로는 소홀히 여기는 명령이지만 우리는 이 명령을 기억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 전도동력세미나를 통해 일어나시기 바란다. 일어나 어두움을 밝히는 빛으로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일이 필요하다.”라고 전했다. 설교 후 국내전도위 서기 심재휘 목사(김해예닮교회)가 광고를 전한 후 직전노회장 신병진 목사(칠성교회)가 축도함으로 예배를 마쳤다. 2부 순서에서 이어진 제1강은 선교부장 황홍규 목사의 사회로 국내전도위 전문위원 박희재 목사(구미온누리교회)가 주제강의를 전했다. 박희재 목사는 △십자가의 삶은 최고의 전도지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완전한 복음입니다. △인간의 사실은 최고의 영접메시지라고 전하며 구미온누리교회에서의 경험과 실천들을 바탕으로 설명했다. 이날 강의는 제2강에서 김문훈 목사(포도원교회)가 ‘전도 DNA를 찾아라.’라는 제하의 강의를 전하고 제3강에서 국내전도위 상임위원 정은석 목사(하늘샘교회)가 ‘우리교회, 왜 전도하지 않는가?’(막16:15)라는 제하의 말씀을 전했다. 한편, 고신 총회 설립 70주년기념 70일 특별새벽기도회의 후속행사로 ‘고신교회(총회) 설립 70주년 기념 특별 전도동력세미나’를 5월 9일(월)-11일(수)까지 부산 강서구 세계로교회(손현보 목사)에서 열릴 예정이다. 1천 명의 참석자를 목표로 열리는 이번 세미나는 2박 3일의 일정으로 멀리서 찾아오는 성도들을 위해 숙소도 제공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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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단 및 연합회
    2022-03-15
  • [박동철 장로] 이념의 전장(戰場), 교회가 분명해야할 때다
    제20대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정국은 새 정부 출범을 준비하는 분주함에 들어갔다. 어느 선거보다 국민 관심도가 높았고 그만큼 투표 현장의 열기도 뜨거웠었다. 밤샘 개표 현장은 쉽게 떠날 수 없는 피 말리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윤석열 당선인에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축하를 보낸다. 이번 대통령선거가 왜 이렇게 네거티브의 극단이라 할 만큼 상대 허물만 찾는 선거였을까. 그리고 진영의 위치에서 한순간도 양보 없는 초극 대립된 선거였을까. 선거의 뒷담이 국가사회발전에 던져주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 또한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복음의 사명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선거 결과를 두고 볼 때 지난 5년의 정권은 진보 이념의 세력들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진보적 촛불세력들이 5년간 국가관리에 너무도 부족함을 드러냈다. 대표적 실패가 부동산 정책. 서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너무도 컸다. 실험적 임금고용정책의 실패 등등이 있지만 평화를 내세운 대북정책이 북한에 굴종적 모습을 보임으로써 친북좌파정권이라는 혹된 평가를 받고 정권을 내놓게 되었다. 사실 반일 친북의 기조 속에 국민을 갈라치기 함으로써 더더욱 국민의 정서에 상처를 냈고 혹된 비판을 받았다. 우리 교회가 민감했던 부문은 우리 사회에 소리 없이 들어온 유물론의 산물, 평등사회로의 전환준비를 위한 제반 법들을 만들어 사회를 병들게 하고 교회 복음을 옥죄게 하는 제도가 생기는 것이었다. 한국교회는 이에 사실상 반정부입장으로 악법들 제정에 반대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 같은 사회갈등이 심화된 것은 지난 5년, 정권을 운영해온 주체들이 지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극단 친북 인사들의 정책주도에 따라 나타난 결과라는 지적도 있다. 많은 혼돈이 일어났다. 국가는 이념의 싸움판에서 몸살을 앓았다. 헌법 이념과 대한민국 건국을 두고도 엄청난 논란이 일었다. 북한을 향한 통일의 제안과 소통은 필요하지만 공산주의 집단을 미화시키는 일은 용납 될 일이 아닌 것이다. 따뜻한 가슴으로 통일을 논하되 도발의 북한에 대해서는 냉철하고 단호해야 한다. 지난 정권에는 이러한 대처가 없었다. 이것이 지금 대한민국이 이념의 전장(戰場)이 된 원인이다. 보수의 진영에서는 최대의 위기라는 진단과 함께 정권교체의 큰 장이 형성된 것이다. 복음에 사는 교회는 어떠한가. 지난 5년 동안 악법 제정을 막기 위한 투쟁에 교회가 나섰으며 애국운동이란 화두에 성도들이 편승했다. 걱정되면서도 중요한 것은 교회 내 세대 중심의 시각차가 엄청나다는데 있다. 이념 투쟁이 되어버린 나라, 그 중심에서 교회가 복음을 맘껏 전하고 사회를 건강하게 이끄는데 혼미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젊은 세대는 보수적 이념 논쟁에서 이해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다. 전후세대 한국 근대사를 몸으로 알지 못하는 세대 또한 이념의 공격이 얼마나 교회를 힘들게 할 수 있다는데 낙관하는 점도 있다. 교회를 이끌고 설교를 담당하는 목사와 장로들의 시각이 난처할 때가 많다. 장로의 기도가 다르고, 집사의 기도가 다른 교회 현장에서 교회 지도자들의 혼미함이 생겨나고 있다. 이제 정권교체와 새 정부가 출범하지만 또다시 이념의 전장은 생겨날 것으로 전망된다. 선거에 이기고 졌지만 이념의 투쟁은 이제 시작될 것 같은 나라의 걱정거리가 생겨나고 있다. 여기서 교회가 분명해지지 못하고 혼미해가서는 안될 일이다. 교회 지도자들은 말씀에 근거하여 교회를 지켜내고 나라의 미래를 어떻게 세워갈 것인지 깊이 생각하고 가르치는 지금의 때가 아닌가 싶다. 복음을 공격할 수 있는 차별금지법 평등법 기독사학 관련 등 많은 법들이 국회에 상정되어있다. 너무 현안이 많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교회가 분명히 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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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2-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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