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행연월일 2026-04-2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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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강도의 소굴 (눅19:45-46)
    고난주간, 우리는 다시 한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주님의 발걸음을 따라간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던 환호 속에서, 마태복음 21장에 기록된 그 장면은 왕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 환호의 열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그분이 마주하신 것은 찬양이 아니라 뒤틀린 예배의 모습이었다. 주님은 성전을 보시고 이렇게 선언하신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이 말씀은 단순히 성전 앞에서 장사하던 행위를 향한 도덕적 비판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이 사건을 “교회에서 장사하면 안 된다”는 교훈이나 탐심에 대한 경고로 축소시킨다. 그러나 질문은 더 깊어야 한다. 왜 그들은 성전 앞에서 장사를 했는가? 그곳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였기 때문에 장사가 잘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들은 제사를 드리기 위해 필요한 짐승과 물품을 제공함으로써 예배를 “더 쉽게”, “더 편리하게” 만들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들의 행위는 예배를 방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돕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것을 “강도의 소굴”이라 부르셨다. 왜일까? 그 이유는 예배의 본질이 인간의 편리함에 의해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점점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이동할 때, 그 예배는 더 이상 거룩한 예배가 아니다. 편리함은 어느 순간 거룩함을 대체한다. 효율은 경외를 밀어낸다. 그렇게 성전은 기도의 집에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공간으로 변질된다. 이 장면 앞에서 우리는 오늘의 교회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교회는 얼마나 “편리한 예배”를 추구하고 있는가? 예배 시간은 성도들의 일정에 맞춰지고, 예배 순서는 사람들의 취향에 따라 조정되며, 설교는 듣기 좋은 메시지로 다듬어진다. 교회의 공간과 구조 역시 성경적 상징과 신학적 의미보다는 실용성과 효율성에 의해 결정된다. 초대교회로부터 이어져 온 예배에 대한 경외와 철학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호렙산에서 모세를 부르실 때,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셨다. 대제사장조차 1년에 단 한 번만 들어갈 수 있었던 지성소의 거룩함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예배 가운데 그 거룩함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과연 영적인 신을 벗고 하나님 앞에 서고 있는가? 어쩌면 우리는 이미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놓았는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단지 상인들의 행위를 지적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방식 자체를 뒤엎으셨다. 만약 오늘 주님께서 우리의 교회를 방문하신다면 어떨까? 우리의 예배와 신앙생활을 보시고 책망하시며 우리의 삶의 방식을 뒤엎으신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자리에 남아 있을까? 아니면 많은 이들이 떠나가게 될까? 불과 며칠 전까지 “호산나”를 외치던 무리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다. 이 극적인 변화는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자처럼 살아가지 못한다. 오히려 백 데나리온을 붙들고 놓지 못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우리는 은혜를 받았지만 여전히 자기중심적이다. 모든 것이 우리 마음에 맞아야 한다. 예배조차 우리가 편해야 하며,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쉽게 외면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인가? 바로 우리가 그 “강도”이다. 그러나 고난주간의 메시지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또 다른 장면을 본다.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강도들이 달려 있었다. 그들은 분명 죄인이었고, 심판받아 마땅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중 한 강도는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고백한다.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그때 주님은 그에게 말씀하신다.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것이 은혜다. 우리가 아무리 강도와 같은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우리가 만든 예배가 아무리 왜곡되었다 할지라도, 십자가 앞에서 주님을 향해 돌아서는 자에게는 여전히 길이 열려 있다. 강도의 소굴 속에서도 은혜의 통로는 막히지 않는다. 고난주간, 우리는 묻는다. 나는 지금 호산나를 외치고 있는가, 아니면 십자가를 외치고 있는가? 나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아니면 소비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가, 아니면 나 자신을 중심에 두고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의 끝에서, 우리는 다시 십자가를 바라본다. 그곳에서 강도였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는 은혜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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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31
  • [김경헌 목사] 나귀 새끼를 타고 십자가를 향해 (요21:6-9)
    1. 종려나무 가지를 든 손, 일주일 뒤에는 무엇을 들었는가? 종려주일은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을 여는 문이다. 환호로 시작되지만, 곧 침묵과 배신, 그리고 십자가로 이어지는 주간이다. 교회는 이날을 맞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지만, 동시에 마음 한편이 무거워진다. 왜냐하면 이 환호가 오래가지 않았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던 날,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외쳤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그러나 불과 며칠 뒤, 같은 성 안에서 다른 외침이 울려 퍼진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무엇이 이토록 급격한 변화를 만들었을까. 2. 환호의 이유는 믿음이었을까, 표적이었을까?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설명하면서 한 사건을 반복해서 언급한다. 바로 나사로의 부활이다.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이미 썩고 있던 나사로를 예수님께서 살리셨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졌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 표적 때문에 많은 이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이전까지 예수님은 유대 땅에서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일이 두 번이나 있었고, 제자들조차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런데 나사로 사건 이후, 돌을 들던 손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게 된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한 이유가 그분이 누구신지에 대한 깊은 고백이었는지, 아니면 죽음까지도 뒤집는 능력에 대한 기대였는지다. 3. 사람들은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각자의 메시아를 기다렸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한 것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자기들이 상상한 메시아가 아닌 예수님을 거부했다. 그들이 기다리던 왕은 분명했다. 로마를 무너뜨릴 힘 있는 지도자, 억눌린 현실을 단숨에 바꿔 줄 정치적 구원자, 전쟁의 말을 타고 입성하는 승리의 왕. 그러나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오셨다.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처럼, 그 왕은 병거를 끊고 전쟁의 활을 꺾으며 평화를 선포하는 분이었다. 사냥꾼처럼 정복하러 오신 왕이 아니라, 사냥을 끝내기 위해 오신 왕이었다. 예수님은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길을 거부하셨다. 오히려 심판의 활을 자신에게로 돌리시며,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셨다. 4. 참된 왕은 사냥하지 않고, 사냥당하신다. 성경은 니므롯을 “용감한 사냥꾼”이라 부른다. 그는 힘으로 나라를 세웠고, 빼앗고 정복하며 다스렸다. 이것이 인간이 반복해서 꿈꿔 온 왕의 모습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반대의 길을 가신다. 그분은 빼앗지 않고 내어주셨고, 죽이지 않고 대신 죽으셨으며, 군중 위에 서지 않고 군중에 의해 버림받으셨다. 종려주일의 왕은 결국 가시관을 쓰신 왕이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십자가가 있었다. 5. 종려주일은 질문이다. 종려주일은 단순한 기념일이 아니다. 이 날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어떤 예수님을 원하고 있는가? 내가 원하는 왕이 예수님인가, 아니면 예수님이 진정 내 왕인가? 우리는 예배의 자리에서는 쉽게 “호산나”를 외친다. 그러나 삶의 자리에서도 그 고백이 유지되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주일에는 예수를 왕으로 모시지만, 월요일이 되면 다시 내가 왕이 되어 살고 있지는 않은가. 문제는 우리가 예수를 몰라서가 아니다. 예루살렘의 사람들처럼, 우리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너무나 잘 안다. 문제는 그분이 우리의 기대와 다른 방식으로 왕이 되실 때 드러난다. 6. 고난주간의 문 앞에서 종려주일은 고난주간의 문턱이다. 이제 교회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침묵과 기다림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끝에서 부활을 맞이한다. 그러나 부활은 십자가를 통과한 이들에게만 의미가 있다. 나귀를 타신 왕을 끝까지 따라간 이들에게만, 사냥당하신 어린 양을 왕으로 고백한 이들에게만. 종려주일, 우리는 다시 종려나무 가지를 든다. 그러나 그 손이 고난주간의 침묵 속에서도 주님을 놓지 않기를, 환호가 사라지고 십자가만 남는 자리에서도 여전히 순종이 남아 있기를 조용히 우리 자신에게 묻게 된다. 그리고 부활절 아침,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단지 무덤이 비어 있다는 소식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따랐는지에 대한 대답일 것이다. 나귀를 타신 왕을 끝까지 왕으로 고백한 자만이 부활의 기쁨 앞에 설 수 있기 때문이다. 나귀 새끼를 타고 시작해 십자가를 지나 부활에 이르는 이 거룩한 여정 속에서, 우리는 다시 선택의 자리에 선다. 예수님을 이용하는 신앙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 순종하는 제자의 삶으로 나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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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6-03-30
  • [마음을 여는 시] 간음(姦淫) 중에
    • 문화
    • 문화/행사
    2026-03-27
  • [황권철 목사] 교회순방: 산남교회(45)
    산남교회(이명자 전도사)는 경남 창원시 의창구 동읍 봉강가술로 211-15에 있다. 고신교회(교단) 설립 50주년 화보에 의하면 1965년 3월 27일에 경남 의창군 김정달씨 마당에서 김종인 전도사 부부와 부산 부평교회 고 강봉수 집사와 마산제일교회 성도들이 첫 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되었다. 현재 교회당은 1983년에 30평 규모로 건축하여 헌당했다. 교역자로는 1985년도에 권혁수 강도사가 부임하여 목사로 안수받아 사역하였고, 1988년 최종수 목사가, 1990년 이성호 강도사가 부임하여 목사 안수받고 섬겼고, 1992년 박재한 강도사가, 1998년 조인호 목사가 부임하여 시무했다. 2003년부터 윤태순 전도사 시무하다가 은퇴하고 2017년부터 이명자 전도사가 현재까지 시무하고 있다. 이 교회는 은퇴하신 윤태순 전도사가 은퇴하고 현재 사역하는 이명자 전도사는 윤 전도사의 따님이다. 이 전도사는 어머니의 뒤를 이어 이 교회를 잘 섬기고 있다. 이 전도사의 남편은 최봉식 목사인데 브니엘 신학을 하여 안수받아 경남(법통)노회 소속은 아니므로 당회와 시찰회의 허락으로 주일 강단과 말씀 사역을 아내를 대신하여 수종 들고 있다. 창원 시내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지역이지만 성도들이 교회를 잘 섬기고 있었다. 윤 전도사님이 오랫동안 교회를 섬겨 왔고 양무리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고 있어 교회가 영적으로 훈훈한 생기의 영이 넘치고 있었다. 금주 주신 말씀은 “하나님이 칭찬하는 사람”(수 14:6-15)이다. 사람이 칭찬을 들으면 자존감이 높아진다. 사람은 나이를 불문하고 칭찬하고 칭찬받으면 좋은 인간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칭찬은 사람에게만 아니라 동물이나 식물도 칭찬한다. 동물들 가운데 가축으로 사랑받는 진돗개는 특별히 주인에게 충성을 다 한다. 세계적인 경영 컨설턴트인 캔 블랜차드가 2003년에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 책을 써 베스트 셀러에 오른 적이 있다. 사람이 칭찬하다 보면 장점이 크게 보이고 단점이 점점 작아져 사라지게 된다. 특별히 성도들은 주의 이름으로 칭찬하면 영이 강건해진다. 오늘 본문에 갈렙은 출애굽 당시 45세였는데 40년이 지나 85세가 되었는데도 그때와 여전한 건강을 가지고 여호수아에게 헤브론 산지를 달라고 했다. 하나님은 갈렙의 어떤 점을 보고 칭찬하셨는가? 먼저, 그의 성실한 마음을 보고 칭찬했다. “내 나이 사십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보고하였고”(7) 하나님은 갈렙의 성실한 마음을 보고 칭찬하였다. 하나님은 갈렙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언약의 말씀에 근거한 믿음을 보고 칭찬하셨다. 신앙인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살아야 한다. 여기 성실한 마음은 자신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남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갈렙을 보고 칭찬하기를 내 종 갈렙은 다른 정탐군과 다르다고 했다. 그는 하나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온전히 따랐다. 그래서 결국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민 14:24). 바울은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원망하다가 죽임을 당했다(고전 10:10). 했다. 하나님은 성실하심으로 오래 참으시고 그의 언약을 지키는 성도를 칭찬하신다. 다음, 진실한 마음으로 따르는 충성된 자를 칭찬하신다. “그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팔십오세로되”(9-10) 하나님은 갈렙의 충성됨을 보시고 칭찬하였다. 그가 85세가 되었어도 이전과 전혀 다름없는 충성심이다. 다시 말해 충성에는 나이가 문제 되지 않는다. 충성의 정도는 작을 수 있으나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감당하면 된다. 하나님은 물량의 수치를 보지 않는다. 달란트 비유에서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받은 자의 칭찬이 같다. 시편 기자는 호흡이 있는 자마다 야웨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했다(시 150편).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고난의 풀무 불 속에서 단련하신다(사 48:10). 바울은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이 충성이라고 했다(고전 4:2) 요한은 죽도록 충성하라고 한다(계 2:10). 하나님의 사랑과 칭찬이 언약 백성들을 더욱 견고하게 하신다. 마지막,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끝까지 따르는 자를 칭찬하신다. “헤브론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14) 갈렙은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다. 그는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믿었다. 지금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은 앞으로도 인도해 주실 것을 믿었다. 끝까지 온전히 변함없이 섬겼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면 그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따라야 한다. 초기 한국교회 사역한 루비 켄드릭(1883~1908) 여자 선교사는 내한 9개월 만에 순직한 선교사이다. 그녀는 1907년 9월 24세의 나이로 텍사스 남 감리회에서 파송 받아 한국에 왔다. 그녀는 1908년 급성 맹장염에 걸려 수술 중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때가 꽃다운 나이 25세였다. 그녀의 조선에 대한 사랑을 뒤로하고 시신은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그녀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모 교회인 텍사스 청년들에게 “열 명씩, 이십 명씩, 오십 명씩 함께 조선에 복음을 전하러 오라”는 편지를 보냈다. 또한 “만약 내게 줄 수 있는 천 개의 목숨이 있다면 모두 조선을 위해 바치겠다.” 그녀의 부모님께 보낸 편지에 기록되어 있다. 켄드릭은 끝까지 주님의 언약을 따른 선교사이다. 오늘은 경남(법통)노회 순방교회 45번째로 산남교회를 찾았다. 창원시에서 변두리 지역에 있기에 조금 일찍 서둘러 갔다. 예배 시간 15분 전에 도착하여 기도하고 있으니 팔순에 가까운 분이 찾아와서 인사를 한다. 아마 앞서 사역한 윤태순 전도사인 것으로 보여 “윤 전도사님이지요”하고 물으니 그렇다고 했다. 제 이름을 밝혀 소개하니 이미 신문 지상으로 보아서 알고 있었다. 이제 은퇴하고 고려파교회연구소 사역으로 노회 산하 교회를 순회 방문차 왔다고 하니 너무도 반갑게 맞이했다. 이명자 전도사님은 따님이시고 말씀을 선포하는 최봉식 목사님은 사위 되신 분이라고 했다. 최 목사는 고신대학교 선교언어학과 졸업하고 브니엘에서 신학을 하여 브니엘 소속으로 있으면서 장모님과 아내를 도와 본 교회 말씀 사역에 수종 들고 있었다. 오늘 주신 말씀에 큰 은혜를 받았으며 축도까지 부탁하였다. 예배를 마치고 예배실에 식판을 펴서 가족처럼 둘러앉아 식사의 교제를 나누었다. 마치 옛 고향 모 교회를 방문한 것처럼 너무도 따뜻하게 반겨 주시며 돌아오는 길에 감과 동초 나물까지 챙겨 주어 친정의 어머니같이 따뜻한 사랑이 넘치는 모습이 너무도 감동적이었다. 교회당에서 걸어 도로변까지 나와서 배웅하기에 아쉬움을 남기고 오후 병원 선교 사역을 위해 마산 메트로병원으로 향하였다. . 2024년 11월 24일 주일 오전 11시 예배 고려파교회연구소장 교육학박사 황권철 목사(밀알교회 원로)
    • 기획
    • 교회탐방
    2026-03-26
  • [하수룡 장로] 기 다 림
    얼마 전에 Wate라는 주제의 영화를 봤는데 인간적으로 넘 감동적이었다. 주인공인 두 남녀의 아련한 첫사랑의 추억을 잊지 못하여 고뇌하는데 특히 남자의 기다림은 여성의 그것보다 훨씬 강력하여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아 영화 속에 푹 빠질 수밖에 없었다. 보통 여자가 높은 감성지수로 남자를 기다리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에서는 정반대였다. 남자가 사랑했던 여인이 자기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려 마침내 여인이 자기가 누리던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첫사랑의 남자에게 돌아오는 결말을 내리게 되는 것을 보고 가슴이 뜨겁고 뭉클함을 느꼈다. 보통 하나님을 믿는 남녀도 서로 닮은 부분이 없음에도 어떤 한 부분에 마음이 끌려 콩깍지가 씌어 지는 바람에 결혼을 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남자는 기다림에 능숙하지 못하여 상대방인 부인을 이해하고 기다리지 못하여 답답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면이 강하다. 성경에도 야곱은 자기 이익을 위해 급하고 약삭빠르게 행동했지만 타국생활에서 자기의 온 시선을 주님에 모아 기도했기 때문에 능력을 받고 큰 축복을 받은 것이다. 반대로 기드온은 용사 중의 용사이지만 천사가 나타나 축복의 약속을 했음에도 믿지 못하여 양털 솜을 땅에 내어놓고 이슬이 밤사이에 다른 땅은 그대로 두고 양털에만 내리게 해 달라고 요구하는 모습에서 큰 교훈을 얻는다. 해마다 성도가 지키는 대강절(대림절)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기간으로 희망과 설렘으로 기다림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게 된다. 주님을 기다리는 삶은 일반인들이 생각하지도 못하는 경건함을 선물을 받게 되는 것이다. 주님을 기다리는 삶이 당장에 부유함과 건강함으로 채워 주지 못한다 할지라도 득죄 하지 않고 믿음으로 경건하게 차근차근 준비하면 복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작금에 교회만 참석하는 교인이나 일반적인 사람들은 성도의 자유를 도덕적 자유에서의 해방으로 오해하여 자기만족이나 세상 즐거움이 축복이라 착각하여 그것이 정당한 것으로 여기고 자기가 스스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을 목격할 때가 있다. 오직 성도는 주님을 믿고 기다리는 것만이 경건과 축복에 이른다는 사실을 절대 잊으면 안 된다. 누구든지 일상생활에서 참지 못하여 조급함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는 데 엄밀히 따지면 이것은 죄임을 알아야 한다. 세상살이 어렵고 힘들어도 천국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우리는 그분이 언젠가는 오신다는 확실한 믿음 때문에 우린 힘을 얻고 에너지가 넘치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분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아도 지상에서 늘 동행하면서 차원이 다른 능력을 선물을 받고 살아간다. 참고 기다리면 치유의 은총을 선물로 받고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살아간다는 엄연한 사실을 잘 알면서도 왜 외면하고 세상 쪽에 마음을 빼앗겨 살아가는지 정말 안타깝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 주로 모시고 그분이 오실 것이라 확신하고 늘 기다리며 살고 있다. 세상에서의 기다림은 첫사랑을 기다리고 부인은 남편을, 남편은 부인을,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늘 기다림의 연속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 성도는 차원이 다른 믿음과 능력을 주시는 그분을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고 축복인지 깨닫고 살자. 2026.03.20. 경남기독신문 초장 컬럼 원고
    • 오피니언
    • 초장칼럼
    2026-03-26
  • [조희완 목사] 집착의 허상 (출16:1-3)
    미국에서 출간이 되어서 화제를 불러일으킨 <대통령을 기소하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미국의 현직 검사가 <조지 W. 부시>대통령을 법적으로 단죄해야 한다고 작심을 하고 쓴 책입니다. 그 책에서 그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일급 살인죄로 법정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이라크 전쟁을 일으켜서 4,000명이 넘는 미군 병사들과 수많은 이라크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조지 W.부시> 대통령에 대해서 또 한 가지 옳지 못한 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를 가리켜서 “휴가집착증”환자라고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조지 W.부시> 대통령은 재임기간 7년 동안 908일을 휴가로 보냈습니다. 즉 재임기간의 약 36%를 <캠프데이비드> 별장이나 <크로포트> 목장에서 휴가를 보냈는데 3일에 하루 꼴로 쉰 셈입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그렇게 수많은 날들을 휴양지에서 휴가를 지낸 것은 무책임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고, 지도자로서 실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서 “휴가집착증”환자라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격무에 시달린 나머지 휴가를 가지는 것은 필요한 일이고 유익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3일에 하루 꼴로 쉬었다는 것은 도에 지나친 것입니다. 도에 지나친 것은 좋지 않은 일입니다. - 비단 휴가뿐만 아니라 무슨 일이든지 정도에 지나쳐서 집착을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어떤 일에 집착을 하면 오직 그 한 가지 그 일만을 생각을 하기 때문에 생각의 폭이 좁아지고 분별력이 없어집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집착을 하면 안 되는지, 그리고 집착을 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지요? 첫째로, 과거에 집착하면 미래로 나아가지 못합니다.(출16:1-3) 둘째로, 재물에 집착하면 근심에 빠지게 됩니다.(마19:21-22) 셋째로, 쾌락에 집착하면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딤후3:4-5) 어지럽고 혼란한 이 시대에 성경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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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목회 칼럼
    2026-03-26
  • [이정희 목사] 불교에서 유래된 용어들: 천사는 불교적 용어인가?
    1. 서언(序言) “어느 목사가 ‘대자대비하신 하나님’이란 말을 T.V에서 하는 것을 듣고 눈물이 날 정도로 웃었다.” 이 말은 ‘생활 속 불교 용어’란 책을 집필한 불교 칼럼리스트인 방경일의 말이다. 그에 의하면 수많은 불교 용어가 한문을 통하여 우리말에 정착되었고, 이는 기독교 상용 용어에도 많이 포함되었으며, 심지어 불교 용어가 기독교에 빼앗길 정도로 확산되어 있다고 오히려 우려를 표하였다. 하지만 역으로 필자는 이러한 불교 용어가 기독교 용어로 정착되어도 되는가라는 측면에서 ‘대자대비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에 대해 ‘눈물이 날 정도로 울고 싶다.’는 심정이다. 이에 불교에서 유래된 용어에 대해 계속 기고하면서, 본 호에서는 앞의 불교 용어 전문가가 말한 기독교화된 용어 중에서 불교와 우리 기독교에서 동일하게 사용하는 ‘천사’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2. 천사란 말은 어디에서 왔는가? 1) 사전적 의미 : 천사(天使)는 하늘 천(天)과 부릴 사(使)로서 (1) 천자(天子)의 사자(使者), (2) 기독교에서 천국에서 인간계에 파견되어 신과 인간의 중간에서 중개를 맡고,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며 인간의 기원을 신에게 전하는 사자(使者), (3) 마음씨 곱고 선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되어 있다. 이상의 사전적 뜻을 보면 기독교계에 더 가까운 용어로 정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 불교 용어라는 주장 : 불교 사전에 의하면 천사는 산스크리트어(梵語)로 ‘데바’이며, 염마왕(閻魔王)의 사자(使者)로서 천연과 자연의 업도(業道)로 발생하여 세상을 경책하기 때문에 천사라고 했다. 구체적으로는 3천사(노, 병, 사)와 5천사(생, 노, 병, 사, 감옥)로 구분되며, 염라대왕의 사자로 생로병사와 감옥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 동시에 하늘의 사자로서 신의 뜻을 전한다. 그래서 죽음을 다루는 천사를 저승사자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불교의 용어가 한자 문화권 속에서 정착하게 된 것은 A.D. 397년 중국에서 번역된 ‘증일아함경’에서 ‘천사경’이란 표현으로 등장했다가, 그다음 해인 A.D. 398~399년경 한문으로 번역된 ‘출요경’에 처음으로 사용됨으로써 한자 문화권에서 정착되기 시작했다. 이상과 같은 배경을 가진 불교 용어인 천사가 어떻게 기독교 용어가 되었을까? 여기에 대해 앞에서 소개한 방경일은 이렇게 주장했다. “그 이유는 기독교에서는 천사가 그들의 신이 주관하는 세계인 천국에 영혼을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가장 필요로 여기는 존재로 여기지만, 불교에서는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의 영향으로 생명체가 사후 하늘나라에 태어나도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아미타불이 세운 극락정토에 태어날 것을 권한다. 이런 이유로 야마천의 심부름꾼인 천사의 존재가 크게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면서 활용하지 않았다. 반면, 기독교는 필요에 따라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기독교 용어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3) 기독교의 천사는 무엇인가? :기독교의 천사(Angelology)는 신학적 교리로 논해야 할 방대한 부분이기 때문에 본 호에서는 구체적으로 논하기는 지면의 분량상 어렵다. 단지 원어의 사전적 의미와 총론적으로 간략하게 논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천사의 단어적 정의는 히브리어로 ‘말라크’(מַלְאָךְ/Malakh)이며, 헬라어로는 ‘엥겔로스’(ἄγγελος), 영어로는 Angel이다. 뜻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메신저이자 돕는 자’로서 육체가 아닌 영적인 존재로 창조된 피조물이다. 그다음 주된 역할과 임무는 하나님의 메신저로서 인간을 보호하고 인도하며, 하나님의 군사와 예배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외에도 천사의 존재와 역할은 많은 성경적 근거와 교리로 말할 수 있으나 생략하고, 본 호에서는 ‘천사가 과연 불교적인 용어에서 온 것인가?’에 대해서만 기술하고자 한다. 3. 결론 및 제언   앞서 언급한 대로 천사의 존재에 대해서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적인 존재로서 성경과 유대 전승과 교회사 속에서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유래된 존재도 아닐 뿐 아니라 그 역할도 다르다. 단지 앞서 본 바와 같이 산스크리트어(梵語)의 ‘데바’가 한자어로 번역되면서 ‘천사’라고 했을 뿐이다.   또한 천사에 대한 불교의 존재 의미와 우리 기독교의 천사는 서로 다른 성격이지만, 번역 과정에서 같은 단어로 사용되었을 뿐이며, 불교에서 먼저 번역하여 사용했다고 해서 불교적 용어라고 하는 것은 편협한 주장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불교와 기독교 모두 같은 한자 문화권에서 용어를 사용하다 보니 각각 다른 의미임에도 함께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천사는 불교적 용어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각각 다른 의미이지만 한자 문화권 안에서는 같은 말로 얼마든지 함께 사용할 수 있으며, 근본 의미로는 천사는 우리 기독교 용어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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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26
  • [정우승 목사] 사랑으로 행하라
    하루는 예수님 일행이 회당 안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 안에서 한쪽 손 마른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 이 때 예수님을 향하여 악심을 품고 있는 한 사람이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라고 물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12:11-12)에서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고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병자를 향하여 손을 내 밀라 하시고 마른 손을 회복시켜 주셨다. 흔히 동양의 문명을 자율문명, 서양의 문명을 타율문명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곧 한국의 전통문화와 선비정신에서 가장 핵심은 존재와 당위였다. 타율문명의 무기인 법률이 발달하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법률 이전에 가치형성이 되어 있었기에 필요가 없었다. 한데 서양문명의 침투는 곧 한국인의 전통적 가치인 자율의 역량을 둔화시키거나 약화시켰다. 이 같은 서구적 실리주의와 합리주의에 젖은 현대인에게 우리의 전통적 선비요소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조선 태종이 집권할 때 김덕생(金德生)이라는 명사수가 있었다. 그가 명사수였기로 태종은 궁 가까이 두어 경호의 임무를 부여하였다. 어느 날 태종이 숲이 우거진 후원에 쉬고 있는데 호랑이 한 마리가 임금 가까이로 기어들고 있는 것을 김덕생이 발견하였다. 한말까지도 경복궁 뒷길엔 금호방(禁虎榜)이 붙어 있었고, 실록에도 호랑이의 궁궐침입 기사가 잦은 것으로 보아 이 후원의 호랑이 침입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김덕생은 활을 뽑아 호랑이를 명중시킴으로써 태종이 당할 호환(虎患)을 미리 막아냈던 것이다. 임금의 생명을 구한 김덕생은 다시 한 번 공신일 수가 있었다. 한데 그는 이 공로 때문에 죽음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상한 이치에 얽매이게 된다. 이 김덕생의 시호사건은 그렇게 일대 의리논쟁을 불러 일으킨다. 곧 임금을 향해 화살을 쏜다는 것은 목적여부에 떠나서 큰 잘못이며, 이 잘못은 선례에 따라 대적죄에 해당된다는 주장인 것이다. 임금을 향하여 화살을 겨냥했다는 것은 진리에의 배반인 것이다. 결국 김덕생은 대역죄로 사형을 당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선조 때에도 있었다. 군비강화의 필요성을 간파해서 훈련도감을 신설하고, 신무기인 조총과 홍이포 등을 수입해온 영의정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이 신무기의 위력을 임금일 비롯, 대신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어전방포를 하였다. 한데 이 어전방포를 두고 다시 의리논쟁이 붙었다. 임금 앞에서 살상의 흉물인 화약을 터뜨리는 것이 비리이며, 무관이 아닌 영의정이 발포했다는 것은 나라의 체면을 손상시켰다는 상소문이 날아왔던 것이다. 이 상소문의 주도한 인물이 영남선비인 박동현(朴東賢, 1544-1594)이었다. 이에 유성룡은 이 상소문이 정당하다고 판단하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정승에서 사임한 이후에 낙향함으로써 일단락이 지어졌다. 성경 안에는 수많은 율법조항과 복잡한 안식일 규례가 있다. 그 모든 것을 하나하나 다 지킬 수 없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하나의 상위법이 있다. 바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정신이다. (마태복음22:37-39)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묵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라고 말씀한다. 그리고는 위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서 요약을 하신다. (마태복음22:40)에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라고 말씀한다. 바울 역시 예수님의 계명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한다. (로마서13:10)에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라고 못을 박고 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16:14)에서도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라고 말씀한다. 613개나 되는 성경의 계명을 일일이 다 지킬 수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정신에 어긋하지 않게 산다면 그 사람은 나름 하나님 앞에 충성된 일군임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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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26
  • [오성한 목사] ‘노력하는 신앙’에서 ‘누리는 신앙’으로
    복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 신앙생활을 오래 한 성도일수록 자주 던지는 질문이 있다. “하나님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질문은 매우 진지해 보이지만, 동시에 신앙을 가장 쉽게 왜곡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해야 할 것들의 목록’으로 이해한다. 더 기도해야 하고, 더 헌신해야 하고, 더 성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복음은 이 질문 자체를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는다. 성경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보다, 무엇이 이미 이루어졌는가를 먼저 보라고 말한다.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의 참뜻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종종 “더 열심히 의롭게 살아라”, “더 죄 없이 살라”는 도덕적 권면으로 오해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의’는 인간의 도덕적 성취가 아니다. 바울은 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장 요지) 성경적 의는 내가 쌓아 올리는 결과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의가 믿는 자에게 전가(轉嫁)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은 더 애써서 의로워지라는 요구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라는 초청이다. 복음은 언제나 인간의 노력보다 하나님의 선물을 먼저 말한다. 십자가는 약함의 상징이 아니라 능력의 출발점이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은 복음의 역설을 분명히 보여준다. 십자가는 세상의 눈으로 보면 패배와 무능, 실패의 상징이다. 그러나 성경은 단호하게 선언한다. 십자가는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사람은 강해져야 능력이 나온다고 믿는다. 준비가 되어야 쓰임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일하신다. 약함에서 능력이 시작되고, 가만히 있는 자리에서 구원이 드러나며, 붙잡고 있던 것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다. 복음은 언제나 인간의 자랑이 설 자리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은혜만 남겨둔다. 그래서 십자가는 미련해 보이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나는 주님과 하나 되었다”는 고백의 실제적 능력 이 복음 시리즈의 결론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나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다.” 이 고백이 교리로 머물 때와, 믿음으로 받아들여질 때의 차이는 매우 크다. 이 고백이 실제가 되면 신앙의 무게 중심이 달라진다. 신앙은 더 이상 부담이 아니라, 관계가 된다. 기도는 하나님께 잘 보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이미 함께 계신 주님과의 대화가 된다. 예배는 의무가 아니라, 임재를 누리는 기쁨이 된다. 순종도 억지가 아니라, 생명이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열매가 된다. 성경은 이런 삶을 “영으로 사는 삶”, “은혜 아래 있는 삶”이라고 부른다. 이는 나태한 신앙이 아니라, 가장 깊이 복음을 이해한 자리에서만 가능한 삶이다. 복음은 결국 ‘누리는 삶’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노력해서 그분께 도달하기를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오셨고,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를 통해 일하고 계신다. 이것이 복음의 결정적인 차별성이다. 그래서 복음의 결론은 의외로 단순하다. 하나님은 이미 앞서 행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 안에 계신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사용하고 계신다. 우리는 그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누리며 살아가면 된다. 신앙이 무거워질수록 우리는 더 노력하려 하지만, 복음은 언제나 우리를 ‘쉼’으로 초대한다. 노력하는 신앙에서 누리는 신앙으로 옮겨갈 때, 비로소 복음은 교회 안의 언어를 넘어 우리의 일상 속에서 기쁨과 능력으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것이 복음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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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26
  • [양대식 목사] 담대해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두려움 속에 살아갑니다. 두려움은 관계의 장애물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경은 두려워하지 말라 강하고 담대하라고 가르쳐 줍니다. 소심하고 겁이 많은 자는 사람을 피하고 해야 할 말을 못합니다. 해야 할 말을 너무 못하면 얻을 것이 없고 피해를 보기도 합니다.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사람들 앞에 담대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비방이나 비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의 죄성은 남을 비난합니다. 남의 말을 듣고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아야 합니다. 인간은 무슨 말을 하고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묵상해야 하고 인간의 말은 묵상하지 않아야 합니다. 두려움은 사탄이 주는 마음입니다. 전화하고 부탁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닙니다.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합니다. 죄를 짓고 약점이 잡히면 두려움이 있습니다. 죄를 멀리하고 약점 잡히지 않아야 합니다. 목회자는 언제나 담대해야 합니다. 담대히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사람을 의식하거나 사람의 눈치를 살피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때는 담대히 무엇인가 부탁하면 해결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거절당할까 하는 두려움을 멀리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오해할 때 담대히 말해야 합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언제나 담대해야 합니다. 담대함이 목회와 관계의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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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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