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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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봉석 목사] 애착
    북극의 에스키모 인들에게는 늑대를 사냥하는 독특한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시퍼런 칼날에 짐승의 붉은 피를 묻혀 꽁꽁 얼게 합니다. 그리고 늑대가 서식하는 곳으로 가서 칼날은 밖으로 나오게 한 채 땅바닥에 파묻습니다. 그러면 이내 피 냄새를 맡은 늑대들이 몰려옵니다. 그리고는 피 묻은 칼날을 정신없이 핥기 시작합니다. 북극은 기온이 매우 낮기 때문에 혓바닥이 둔해져서 자기가 핥고 있는 것이 예리한 칼날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합니다. 그렇게 칼을 핥다가 시간이 지나면 늑대의 혀에 상처가 생겨서 피가 흐릅니다. 그런데도 늑대는 그 피가 자기 혀에서 나오는 피인 것을 모르고 정신없이 그것을 핥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늑대는 피를 너무 흘려서 탈진 상태에 빠져서 죽고 맙니다. 칼날에 묻은 약간의 피를 욕심내어서 그것을 향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다가 스스로의 목숨을 삼키게 되는 것입니다. 한 젊은이가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기 위해서 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수도를 하며 세상에 대한 애착을 아무리 떨쳐버리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이 그를 사로잡고서 놓아주지를 않았습니다. 그 문제로 고심하던 그는 수도원 원장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원장님, 제가 속세를 떠나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기 위해서 수도원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떨쳐버리려고 해도 세상이 나를 놓아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수도원 원장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그를 데리고 수도원 뒤뜰로 갔습니다. 그곳에는 아름드리나무가 여러 그루 서 있었습니다. 원장은 그 가운데 한 나무 앞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를 자기의 양팔로 꽉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원장은 자기의 몸을 몇 번 뒤척뒤척하더니 그 젊은이를 향해서 말했습니다. “여보게, 이 나무가 갑자기 나를 붙들고서는 놓아주지를 않네. 나를 좀 도와주게. 이 나무에서 나를 좀 떼어주게나.” 젊은이는 원장의 그 말에 영문을 몰라서 어리둥절하였습니다. 그러자 수도원 원장은 더 다급한 소리로 외쳤습니다. “아니, 무엇을 하고 있나? 이 나무가 나를 붙들고서 놓아주지 않는데 왜 그냥 보고만 있는 것인가?” 계속된 원장의 요청에 그는 마지못해서 수도원 원장을 그 나무에서 떼어 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가 나무에서 원장을 떼어내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원장은 더 안간힘을 쓰면서 나무를 놓지 않으려고 오히려 더 꽉 끌어안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원장에게 말했습니다. “원장님, 그 손을 놓으세요! 지금 나무가 원장님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고 원장님이 나무를 붙들고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 말을 듣고 수도원 원장은 그제야 손을 풀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자네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이제는 깨닫겠는가? 세상이 자네를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고 실상은 자네가 세상을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네. 자네 마음속의 세상을 향한 애착이 자네를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임을 왜 모르는가?” 독자 여러분, 세상은 내가 원하지 않는데 나를 붙들지 않습니다. 내가 세상의 것들에 대한 애착으로 인해서 세상을 붙들고 있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 안의 욕심으로 인해서 아직도 놓지 못하고 동행하고 있는 세상의 것이 무엇입니까? 이제 그만 그것을 놓으십시오. 예수님은 성경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쉽게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의 것을 동시에 사랑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의 것에 대한 애착을 끊지 못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지금 내게 우상이 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이제 끈질기게 이어온 세상에 대한 애착을 단호히 끊고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보시지 않겠습니까?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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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3
  • [신재철 목사] 고맙다 조교 동생
    28세, 유부남, 아내는 임신 6개월 문제 많은 나는 그렇게 군인이 되었다. 입소대대에서 보내는 첫날. 생각이 많아서 잠이 오지 않는다. 나는 왜 여기 있는지 그 이유를 스스로 이해시킬 방법이 없었다. 이 밤 혼자 누워있을 아내 생각에 더 마음이 괴롭다. 내 괴로움과 무관하게 소지품은 택배로 보내지고, 빈 가방에는 보급품이라 불리는 다양한 녀석들이 채워졌다. 이거 없어지면 죽는다는 소리만 반복된다. 혹시나 기대했던 간단한 신체검사는 나의 건강을 확인시켜줬고 동기들과 같은 복장으로 줄을 지어 이동했다. 커다란 운동장에 멈췄을 때 들려온 한 사람의 고함에 내가 누구인지 분명해졌다. 여기는 논산훈련소다. 학교 운동장 같았지만 우리는 체육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 체육 선생님 같았지만 보다 더 고압적이다. 4월의 논산은 딸기향 가득했지만 그다지 달콤하진 않을 듯하다. 고역이다. 밥도, 부식도 남기면 안 된다. 동기들은 컵라면 하나가 부족하다며 난리인데 나는 국물 다 먹기 힘들어서 난리다. 모든 훈련이 행군 같다. 사격을 위해서, 교육을 위해서, 수류탄 한 발을 던지기 위해서, 공포스러운 가스를 마시러 가기 위해서, 우린 거추장스러운 단독군장 차림으로 많이도 걸어야 했다. 물론, 진짜 행군 훈련을 하고서는 지금까지 교육장 이동은 산책이란 것을 깨달았지만. “너무 아파요.” 신체적 한계와 스트레스로 병이 왔다. 심한 몸살 기운을 버티지 못하고 조교에게 상태를 보고한다. 간단히 확인 후 의무대로 이동. 하지만 훈련병은 아파도 혼자 이동이 불가하다. 인솔 조교가 붙어야 한다. 드라마에서 본 것과 다르게 군의관은 친절했고 내게 수액을 놓아주었다. 일단 누워서 천천히 맞고 쉬라는 명령(?)을 듣고 잠시 눈을 붙인다. “96번 훈련병, 일어나.”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조교가 옆에서 나를 깨운다. 링거는 다 들어갔고 시간은 벌써 밤 12시가 되어간다. 혼자 복귀할 수 없는 훈련병이었기에 또 조교가 붙었다. 하... 불편하다. 전역이 얼마 안 남았다고 들은 병장 조교다. 그리고 늘 무표정에 성대를 꽉 누르는 듯한 소리로 호통을 치는 조교. 분명 카리스마는 있다. 그리고 잘생겼다. 밖에서 만났으면 호감이 갔을 것도 같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불편하다. 그리고 아직은 나이 어린 청년이 욕 비슷하게 들리는 반말하는 것이 불편하다. 그렇게 나는 생활관으로 복귀를 하게 되었다. 몸이 많이 가벼워져서 걸음은 가볍다. 그런데 복귀 코스가 이상하다. 아무리 내게 어색한 길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이 길은 아니다. 점점 어두운 구석으로 데리고 간다. 심지어 연병장을 가로질러 뭐가 있을지도 모를 곳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아, 갈구는 거 아냐?” 말년 병장 귀찮게 한다고 으슥한 곳에서 욕먹을까 긴장이 된다. 나이 먹고 군대 와서 아픈 것도 서러운데 이런 눈치 보고 있는 내가 너무 서글프다. “형수님한테 전화해.” 연병장을 지나 도착한 구석진 곳. 조명도 없는 그곳에는 공중전화가 있었다. 갑자기 자신의 조교 모자를 벗어 내게 푹 눌러 씌운다. 담배 한 대 피고 올테니 여유 있게 통화하라는 말과 함께 더 어두운 곳으로 조교가 사라졌다. 이게 무슨 일인가? 망설이는 시간도 아깝다는 생각에 급하게 아내에게 전화를 한다. 늦은 시간 훈련소에 있는 남편의 전화에 아내는 많이 놀라는 눈치다. 지금 아프다는 이야기, 너무 고단하다는 이야기를 다 전하지 못하고 자꾸만 눈물이 난다. “왜 울어... 힘들어?” 아내의 눈물 삼킨 말에 나는 더 눈물이 난다.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눈치가 보였을까? 그리 긴 통화를 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공중전화 부스 밖에 서 있었다. 생각보다 한참 병장 조교는 돌아왔다. 왜 벌써 끊었냐는 말에 딱히 할말은 없다. “형, 나 담달에 전역이야. 시간은 가더라. 아프지 말고 무사히 전역해.” 다시 가로지르는 연병장은 따스했다. ‘유부남, 고령자(?), 아내가 임신 중’ 나의 이력을 알고는 의무대에서 복귀하는 인솔을 자처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잘생기고 무뚝뚝했던 성현준 분대장, 어디서 잘 살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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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2-11-23
  • [황권철 목사] 도마(Thomas Behind Stories)-의심의 사도
    도마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중의 한 사람이다. 신약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네 번 언급이 되는데 그 중에 도마는 항상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마10:2-4; 막3:16-19; 눅6:14-16; 행1:13). 요한복음에서 도마는 세 번 언급 되었다(요11:16, 20:24, 21:2). 그 뒤에 디두모(Didymus)라는 헬라 이름이 따라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헬라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디두모인 줄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도마란 아람어로 ‘트오마’이고, 히브리어로는 ‘트옴’인데 이것은 쌍둥이라는 뜻의 별명이다. 이 사도의 성격은 요한복음서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주님이 요단강에서 유대로 돌아오시기를 결심하셨을 때 나사로 죽음의 비유를 통해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다. 그때 도마는 예수께 모든 것을 바치고 따르려고 동료 제자들에게 함께 죽음에 동참하자고 강렬한 충성과 용기 있는 결단으로 말했다(요11:7, 8, 16). 그는 주님이 하늘나라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요14:5). 그러나 주님이 부활하신 후 부인할 수 없는 증거를 보고서야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요20:24-28). 우둔하나 충실한 도마 그는 주후 27-90년경에 활동했다. 아우그스투스가 죽은 후 로마제국은 티베리우스(AD 14-37), 칼리쿨라(AD 37-41), 글라디우스 그리고 네로(AD 54-68)같은 황제들이 다스렸다. 아우쿠스투스 황제 이후 최고의 황제는 글라우디우스(Claudius)였다. 도마는 갈릴리 출신의 제자였으며 주님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우둔한 제자로 나타나 있다(요14:1-5).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하여 의심 많은 제자로 낙인이 찍히기도 했다(요14:1-5). 복음전파 사역을 위해 모든것을 헌신했다. 주님은 나사로의 죽음의 현장에서 그가 다시 살아 날 것을 통해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한 것이었으나 도마는 그 의미도 모른체 주님의 죽음에 동참하는 제자로서의 희생과 용기를 드러내 보이는 우둔한 부분을 보여 주고 있다. 도마는 예수님의 수난 때도 자신의 우둔함을 드러내 보였다(요14:1-5). 주님은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고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다고 하였다(요14:4). 아버지께로 돌아갈 것이고 그 길은 십자가에 못 박힘의 수치와 부활의 영광을 통해 열려 있다는 것이다. 이런 길을 주님은 제자들에게 친히 고백하며 알려 주셨다. 그러나 도마는 그 길을 알지 못했다. “우리가 어떻게 그 길을 알겠삽나이까?” 라고 묻는 것으로 보아 여기서도 도마의 몰이해를 보게 된다. 그러나 이 사실은 도마 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제자들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몰라도 아는 척 하며 말없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도마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솔직하게 물어보는 순수함이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 볼 때 지각이 없는 우둔한 사람같이 보이기는 하나 그의 질문은 솔직하고 정직한 고백이었다. 이로 인해 의심 많은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기는 했으나 이것이 도마의 약점이자 강점이었다. 그는 솔직하게 자신의 심정을 표출했던 정직한 심성을 소유한 자였다. 의심자로 낙인찍힌 도마 동료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부활하신 주님은 무덤을 찾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시고 먼저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셨다. 마침 그때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다. 후일 동료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했을 때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20:25). 도마는 주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구약의 예언을 유의하지 않았다. 자신의 손으로 만져 확인 해 보고서야 부활하신 주님을 믿을 수 있었다. 팔일 후 주님은 도마가 제자들과 집안에 있을 때 다시 나타나셨다(요20:26). 그때 주님은 도마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며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도마는 자신의 믿음 없음을 부끄럽게 여기며 바른 신앙고백을 했다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0:28). 이 공개적인 고백을 그가 불신하고 의심했던 자들이 다 듣게 되었다. 이 같은 부활신앙을 경험한 것이 도마로 하여금 이방 선교로 나아갈 동기 부여가 되었다. 도마 하면 의심 많은 자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의심은 의심을 위한 의심이 아니라 더 잘 믿고 더 확실히 믿으려고 가진 의심이었다. 그 결과 그는 예수님의 참된 사도로 거듭나게 되었다. 우리 가운데도 도마와 같은 자가 적지 않게 존재한다. 도마처럼 꼭 손으로 그 못자국과 발자국과 허리에 창 자국을 만져 보아야 믿겠다는 것과 같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보아야 믿겠다고 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 가운데 불신하는 자들과 도마와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정직한 고백의 차이다. 도마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몰라도 모른다고 말하지 않는다. 모르면서도 아는 것처럼 자신을 속이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정직한 고백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같이 우리도 도마처럼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정직하게 고백할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확실한 고백을 통해 약속한 말씀위에 굳게 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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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
    2022-11-23
  • [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14)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말세는 자기를 사랑하는 이기주의자가 많은 시대입니다. 사랑이 식어지는 시대입니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이기심이 관계를 깨뜨립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진 자는 자신보다 남을 배려하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추구합니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자가 많지 않습니다. 이기심은 무지요, 불신앙이요, 어리석음입니다. 이기주의자가 리더가 되면 공동체가 무너집니다. 사랑의 예수님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으시고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좋은 리더는 남을 배려하고 헌신과 희생, 사랑이 넘치는 리더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은 불신앙이요 어리석음입니다. 남의 유익을 구하는 자는 성숙한 자요 지혜자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자는 영적으로 어린아이입니다. 욕심 부리는 자입니다. 리더는 사랑의 마음으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남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의 마음 가진 자는 사랑을 실천하는 자입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남을 배려하고 섬기면 좋은 관계가 됩니다.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면 누구나 다 싫어하고 관계가 깨지며 좋은 리더가 되지 못합니다. 인정받고 신뢰받는 리더는 사랑의 마음으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자입니다. 사랑의 예수님의 삶은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시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유익하게 해주는 삶 전체이셨습니다. 참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합니다. 희생 헌신하는 자가 어리석은 자가 아니고 지혜자입니다. 성내지 아니하며 사랑하면 성내지 않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진 자는 분노를 다스립니다. 화내고 성내다가 관계가 깨집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성내지 않습니다. 성을 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열 번 잘하다가 한번 화내고 성내면 이미지가 나빠지고 관계가 깨집니다. 사랑의 리더는 분노의 감정을 다스립니다. 마음에 분노가 가득할 때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의의 분노, 죄가 없는 분노, 거룩한 분노, 사랑의 마음에서 나오는 분노입니다. 인간의 분노는 죄성을 가진 분노입니다. 미움의 마음을 가지면 혈기 부리고 분노하게 됩니다. 분노가 커지면 크게 싸우게 되고 문제가 커집니다. 분노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면 살인하기도 합니다. 사랑은 삶은 문제, 사고를 예방합니다. 미움은 분쟁을 일으키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미움의 마음을 가지면 싸우게 되고 관계가 깨집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지면 좋게 보고 좋게 생각하기에 성내지 않고 혈기 부리지 않게 됩니다. 사랑은 분노의 감정을 다스리는 힘입니다. 사랑의 마음은 상대방에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사랑은 선한 마음 가지고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사랑이 가장 중요합니다. 날마다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고 구해야 합니다. 리더는 사랑이 많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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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문/책
    2022-11-23
  • [조희완 목사] 사모할 대상 (시19:7-14)
    어쩌다가 신세가 처량하게 된 사람을 가리켜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라고 말을 합니다. “낙동강 오리알”이란 말에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담겨있습니다. 6.25전쟁 당시 우리나라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는 각오로 결사항전의 결의를 다지고 있었습니다. 그 때 1개 대대규모의 인민군이 필사적으로 우리 아군을 공격하기 위해서 낙동강 도하 작전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치열한 총격전이 계속되고 있을 때 유엔군 전투기에서 네이팜탄을 퍼부어서 적진지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 때 우리 아군 중에 한 대대장이 전투기에서 떨어지는 포탄을 바라보면서 너무 신이 나서 “야! 낙동강에 오리 알이 떨어진다.”고 소리를 쳤습니다. 물론 낙동강을 건너려고 필사의 노력을 하던 인민군들도 다 몰사를 당했습니다. 그 때 낙동강을 건너려다가 죽음을 당한 인민군들을 조롱하는 말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무모한 도전을 하거나,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하거나, 믿어서는 안 될 대상을 믿다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는 헛되고 무가치한 우상을 섬기다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절대로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일생 다가도록 사랑하고 섬겨도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분이 있으니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헛된 우상과는 달리 살아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로 후회가 없습니다. 우리 인생이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가 신앙생활 가운데 특별히 사모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시19:9-10)(벧전2:2) 둘째는, 성전과 예배를 사모해야 합니다.(시84:1-4) 셋째는, 영원한 천국을 사모해야 합니다.(히11:16) 사모할 것을 더욱 사모하므로 멋진 인생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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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3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21
    I. 서언(序言) 세월이 유수같이 흐른다고 했던가? 벌써 한 해의 마지막 달력을 넘겨야 되는 날이 가까웠고,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선 이번 주간에 신년 달력을 배포했다. 이런 즈음에 문득 달력이란 용어는 어떤 역사적인 유래와 배경 하에서 시작되었고, B.C와 A.D같은 그리스도를 중심한 연호는 어떻게 제정되었는지, 또한 매달의 이름과 한 주간의 요일별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되었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졌다. 필자로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에 대한 연구를 시도하면서 자료를 수집해 오기도 했다. 이에 이번 호부터는 몇 차례로 나누어 이에 대한 유래와 용어들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한 가지 밝혀둘 것은 이를 시도하는 이유는 이런 달과 연호와 요일의 명칭이 기독교식이란 오해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세계적으로 거의 공통으로 사용하는 용어들이기에 고칠 수는 없으나 바로 알고 사용하는 것이 좋을 듯해서 이를 논하고자 하는 것이다. II. 달력과 기독교적 연호 사용의 유래 1. 달력의 유래 : 달력(calendar)이라는 말은 라틴어로‘흥미있는 기록’ 또는 ‘회계장부’라는 뜻의 ‘칼렌다리움(calendarium)’과 고대 로마에서 매월 초하루의 날짜를 ‘calend’라고 한데서 출발했다고 한다. 이는 월 초를 매우 중요한 기점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연(年) 월(月) 일(日)은 각각 독립된 주기이지만, 이런 각 주기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은 역서(曆書)를 만들었고, 이를 주로 일상생활이나 종교의식을 치를 때 사용하였다. 또한 이러한 역서(曆書)는 달의 규칙적인 변화를 중심으로 해서 만든 태음력(太陰曆)이었기 때문에 이를 달력(月曆)이라고 불렀다. 또 하나의 역서는 고대 이집트 문명에서 태양의 규칙적인 움직임을 토대로 한 태양력(太陽曆)이 사용되었다. 그 이후 이집트를 정복한 쥴리아스 시저(Caius Julius Caesar)가 BC 45년에 그곳에서 사용하는 간편한 양력역법을 보고 그대로 사용하였는데 이를 율리우스력(Julius Calendar)이라 한다. 이는 태양의 공전주기에 맞춘 것이었는데, 16세기까지 천년 이상 사용되었다. 하지만 여러 면에서 오차가 생겨졌고, 이를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가 새롭게 개정해 달력을 만들었고, 이를 그레고리우스력(Gregorius Calender)이라 했다. 이는 지금까지 우리 나라를 포함해서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사용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의하면 B.C 4000년 경 환웅이 달력을 만들었고, 단군 4년(B.C 2096년)에 60갑자를 활용하여 책력을 제작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지금은 앞서 밝힌 대로 거의 모든 세계와 함께 그레고리우스력을 사용하고 있다. 2. 기독교적 연호(A.D) 사용의 유래 : ‘A.D’란 연호의 처음 사용은 주후 6세기경의 동로마 황제인‘저스틴 1세’때부터 였다. 그는 당시의 수도사였던 ‘디오니시우스’로 하여금 세계에서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연호를 연구하게 했다. 이에 그는 깊은 명상 중에 예수님 탄생의 해를 기점으로, 그 이전은 before Christ의 약자인 ‘B.C’로, 이후는 Anno Domine의 약자인 ‘A.D’로 정했다. 또한 이를 황제에게 보고했고, 황제는 이를 선포하여 오늘까지 거의 세계 모든 나라들이 사용하는 연호로 확정되었다. 우리나라의 연호의 사용은 옛날부터 단기(檀紀)와 60갑자(六十甲子)인 육갑연호를 사용해 왔다. 또한 일본 통치하에서는 명치(明治)라는 연호를 사용했고, 해방 후에는 서양의 영향을 받아 서력기원(西曆紀元)이란 뜻의 서기(西紀)의 연호를 사용함으로서 자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인 B.C와 A.D를 인정하는 겪이 되고 있다. III. 결 어 이상에서 논한 대로 위의 용어들과 유래는 주전(B.C)와 주후(A.D)를 제외하고는 반 기독교적인 용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기독교적인 용어도 아니다. 다음호부터 논할 12개월의 월별 이름과 한 주간 7일의 요일 별 용어들은 더욱 더 그러하다. 하지만 서론에서 논한 대로 이런 용어들은 세계적으로 거의 공통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고칠 수도 없고, 또한 심각한 반기독교적인 용어는 아니기 때문에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바로 알고 사용하는 것이 좋을 듯해서 이를 계속 논해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B.C와 A.D같은 신앙적인 연호가 세계 공용어로 된 것은 대단히 자랑스러운 일이다. 부디 이런 연호를 널리 사용함으로서 기독교적 언어문화를 창출해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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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3
  • [김성수 총장] 당신의 마음을 감사로 채우십시오
    몇 주 전에 플로리다(Florida)주에서 열린 미국 학위인증기구인 TRACS(Transnational Association of Christian Colleges and Schools) 연례 모임에 참석했을 때 칼빈대학교 커뮤니케이션 학과 교수인 쿠엔틴 슐츠(Quentin Schultz) 박사의 “섬김의 가르침”(Servant Teaching)이라는 책을 소개받고 읽으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교사와 목회자는 물론 우리 모두가 이 내용들을 깊이 묵상하고 실천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섬기는 사역이 될 수 있음을 확신하기에 우리의 일상의 사역을 성찰해 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앞으로 몇 회에 걸쳐서 슐츠 박사의 글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이번 호에서는 우리의 마음을 감사로 채워보기를 바라며 제1장의 내용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나는 학생들에게 만나서 반갑다고 말하면서 매 수업을 시작한다. 나는 그들에게 수업에 와줘서 고맙다는 말로 모든 수업을 마친다. 한 학생이 나에게 그렇게 하는 이유를 물었다. 나는 “여러분들이 수업에 올 때마다 나는 영광스럽고 축복받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 그 학생은 자신은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나 역시 섬기는 교사로서의 소명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다. 섬기는 교육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감사다. 우리의 마음이 감사로 가득 차 있을 때, 우리는 학생들과 우리의 일을 멋진 선물로 보게 된다. 우리는 학문의 세계를 감염시킬 수 있는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태도에 대한 면역성을 구축하고 있다. 감사는 기독교 교육학의 책에서 놓치고 있는 첫 번째 장이라고 생각한다. 가르치는 기술을 연마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마음을 준비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일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을 하나님의 선물로 보는 대신 우리에게 부과된 부담으로 여길 수도 있다. 우리의 일이 선물이라기보다는 의무에 가깝고, 모험이 되기보다는 매너리즘에 빠지는 일상에 가까워지고 있다. 우리로 하여금 섬길 수 있는 문을 열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또한 우리 학생들, 우리를 고용한 기관,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 우리의 능력, 우리를 도와주는 교직원들, 학위를 취득할 수 있도록 도와준 교사와 저자, 멘토, 우리를 지원하고 격려하는 동료들로 인해서 주님께 감사하자. 심지어는 실수할 수 있는 자유에 대해서도 감사하자.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다 더 큰 그림을 그려 보자. 다시 말하면, 우리를 구원하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고 있는 자들이다. 우리는 동일한 언약적 사랑에 접 붙여진 사람들을 가르치도록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우리 학생들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다. 요한은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심이라”(요일4:19)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구원의 기쁨을 잃으면 우리 자신이 기쁨이 없는 스승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학생들은 이것을 감지한다. 우리가 학생들에게 말과 비언어적으로 우리 자신을 제시하는 방식은 그들이 배우는 동작을 하는 것처럼 우리가 단순히 가르치는 동작을 하고 있음을 의미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선한 은사에 비추어 우리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새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생활 실천이 필요하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또 다른 삶의 날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나는 그날이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 생각은 다가오는 시간의 집안일과 스트레스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내 기도는 송영 없는 단순한 간구가 되어 버린다. 나는 캠퍼스 입구 표지판을 하나님의 선하심과 연관시킨다. 매일 매일 하루를 시작하면서 나는 모든 건물과 가르침과 배움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되새긴다. 나는 나의 일터 그곳에 하나님으로부터 초청 받은 사람으로 부름을 받고 준비되어 있다. 캠퍼스 간판을 보면 나의 마음은 설레어지고 봉사를 위한 준비로 고양된다. 나는 집 서재에 ‘감사 게시판’을 하나 만들었다. 코르크 판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격려의 글, 성경 말씀, 사진, 아이디어, 찬송가, 티켓, 그리고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상기 시켜 주는 다른 여러 기념 조각들을 붙여 놓는다. 그 중 한 장의 사진은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의 무덤에서 아버지의 학대를 용서하는 나를 보여주는 사진도 있다. 아버지에 대한 원한을 극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다. 나는 ‘감사 게시판’ 아래 소파에서 낮잠을 자며 게시판에 있는 것들을 음미하며 잠이 든다. 나는 서재를 나설 때마다 잘 볼 수 있는 벽에 감사 게시판을 걸어 두었다. 연구실에서 무엇을 하고 있든, 퇴근할 때는 하나님께서 나를 책임지고 계시며 내 삶을 축복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다. 결국, 감사 게시판은 내가연구실을 나설 때,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내 방을 나선다는 사실을 상기 시켜 주는 이른바 나를 향한일종의 축복 기도의 역할을 한다. 여러분과 나는 많은 선물을 받은 사랑받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이것을 더 많이 인식하면 인식할수록 우리는 학생들을 위해 봉사하는 데 더 감사하면서 우리의 삶을 바칠 수 있을 것이다. Clairvaux의 Bernard(1090-1153)는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수록 사랑에 대한 보답을 더 쉽게 찾을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감사는 쇠렌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가 배은망덕의 "질병"이라고 부르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예”라고 말하는 우리의 방법이다. 감사는 섬김의 가르침을 키워준다. 비밀 공식은 없다. 우리의 감사는 온 마음을 다하는 것이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다. (빌4:4). 구속주를 향한 우리의 태도에 감사가 부족하다면 학생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그러할 것이다. 시편 기자는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라고 묻고 있다(시116:12). 우리는 섬기는 교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포함하여, 모든 좋은 선물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써 응답한다. 감사하는 섬김의 교사가 되는 데 도움이 되는 실천 사항은 무엇이며, 당신의 감사 게시판에는 어떤 항목을 붙여 놓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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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3
  • [박동철 장로] 예수의 경제학, 공자의 경제학 미국과 중국의 ‘화폐전쟁’
    국부론의 저자 아담 스미스는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아담 스미스가 지은 국부론(國富論)은 오늘날 세계경제를 이끄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교과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아담 스미스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영국 장로교 교회 집사로 기독교 교육을 받은 신앙인이었다. 영국 옥스포드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경제학자가 되었다. 아담 스미스가 지은 국부론의 기초는 재화와 노동을 통해 생산과 이윤을 냄으로써 국가의 경제가 튼튼해진다는 원리다. 노동이 철저하게 자본과 결합해야 최고의 이익을 낼 수 있다는 경제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국부론의 이론은 성경적 근거가 있다고 학자들은 설명하고 있다. 성경은 끊임없이 일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마태복음 25장의 다섯 달란트 비유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이 땅을 가꾸고 번영해야 국가의 개념이 생긴다. 장사(상업)와 노동의 가치관를 말한다. 그래서 아담 스미스의 경제학을 일명 ‘예수의 경제학’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아담 스미스 이후 많은 경제학자들이 새로운 경제 이론을 내었지만 독일 출신 칼 마르크스가 자본보다 노동의 가치가 더욱 중심이 되는 사회주의 자본론을 주장했다. 자본이 노동의 이익을 착취하면 안 되는 원리의 이상론의 사회주의 경제학이 더욱 발전하며 세계 근대사회를 이끌어왔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학문적으로도 경쟁을 하면서 수정자본주의 수정사회주의 등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경제학의 두 산맥은 결국 이념화하여 미국을 비롯한 서구, 소련을 중심한 동구권으로 근대 세계냉전시대를 지내왔다. 소련이 공산 사회주의에서 실패하고 러시아로 잔존하게 되고 이제 중국이 중국식 사회주의로 맹주(孟主)가 되면서 새로운 세계 패권경쟁의 패러다임을 만들고 있다. 중국의 사회주의는 변형된 면이 있다. 모택동(毛澤東)의 공산당 혁명 후 거장 등소평(鄧小平)의 시장중심의 중국경제가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 중국의 경제사상은 의(義) 에 바탕을 두고 이(利)를 추구하는 이념이다. 이를 두고 중국 춘추시대 공자(孔子)의 “인자는 밥을 먹을 때도 인(仁)이 있어야 한다.”는 이념의 바탕에서 중국식 사회주의가 발전해왔다. ‘공자의 경제학’을 강조한다. 그래서 중국 경제는 공산당이 모든 국가 경제를 통제한다. 지난 1978년 등소평의 개방 중심으로 중국이 세계 경제에 눈을 뜨면서 미국과 우호적 관계를 가지는데 노력해 왔다. 2001년 중국은 WTO에 가입함으로써 세계화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세계화의 호혜적 무역 관계에 힘입어 14억 인구의 내공으로 개도국이면서 세계 경제를 주도했다. 미국은 그동안 소련의 공산주의가 붕괴된 후 중국을 민주주의 시장경제국가로 변화할 것을 유도해왔다. 그리고 무역 환경에서 많은 배려를 했다. 그러나 이제는 중국의 성장이 미국의 강력한 라이벌이 되었다. 중국식 사회주의를 지키면서 미국과의 사실상 화폐전쟁에 돌입했다. 세계 무역에서 경제권을 주도하는 기축통화에도 중국이 위안화를 내세우려 한다. 그래서 미국과 중국의 지도자들 간 요즘 오가는 말들이 거칠다. 그러나 중국은 아직 미국을 따를 수 없다. 반도체 등 원천기술에는 중국이 먼 거리에 있다. 중국은 희토류등 원자재 공급에 주도권이 있다. 미국은 중국의 화폐도전에 요즘 ‘킹달러’(King dollar)게임으로 중국의 도전에 거리를 멀리하려고 한다. 바로 화폐 전쟁의 치열함이다. 중국은 더욱 중국식 사회주의를 위해 시진핑의 영구 집권을 굳히고 있다. 미국·중국의 경제 전쟁의 화폐 게임이 본격화되었다. 복음의 사명자 교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시진핑의 중국은 공산 사회주의의 영구 집권 전체주의로 흘러갈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입김을 받은 자유시장 원리의 경제구조가 힘을 잃어갈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탄압에 더욱 가속페달을 밟을 것이다. ‘공자의 경제학’은 커녕 ‘시진핑의 경제학’은 쇠락의 길을 걷지 않을까. 기우가 아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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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3
  • 삼남연회, 제29회 삼남찬양제 개최
    기독교대한감리회 삼남연회(정동준 감독)가 주최하는 ‘다음세대회복 제29회 삼남찬양제’(이하 찬양제)가 지난 11월 5일(토), 창원시 의창구 북면 기쁨의교회(노완우 목사)에서 있었다. 청장년선교회 삼남연회연합회와 청장년선교회 창원동비장연합회가 주관하는 이번 찬양제는 삼남연회 산하 7개 교회가 참여하고 또 창원지역 감리교 연합찬양단과 창원서지방 청년연합찬양대 등 많은 성도들이 참여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친교의 시간을 가졌다. 찬양제에 앞서 드린 예배는 창원동지방연합회장 최준오 집사의 사회로 운영부회장 성봉균 집사가 대표로 기도하고 부산남지방연합회장 오영석 권사가 성경봉독(대상25:1-7)한 후 삼남연회 정동준 감독(동래온천교회)이 ‘신령한 노래’라는 제하의 말씀을 전했다. 말씀 후 스포츠부회장 김영복 집사가 헌금기도하고 장소를 제공한 기쁨의교회 노완우 목사가 인사를 전했다. 이어, 회장 윤상규 권사가 인사와 함께 내빈 소개를 하고 청원동지방 정기용 감리사가 축도함으로 예배를 마쳤다. 예배 후 이어진 찬양제는 조난영 집사의 사회로 창원지역 감리교 연합합창단인 천사합창단의 첫 연주를 시작으로 대구제일교회, 동래온천교회, 마산중앙교회가 차례로 공연을 이어가고 위드클래식앙상블이 특별출연으로 함께해 ‘참 아름다워라’와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를 프로의 실력으로 연주하며 찬양제를 더욱 빛냈다. 그 뒤 순서에서도 진주제읽회, 기쁨의교회, 진해제일교회, 대구중앙교회, 창원서지방 청년연합찬양대가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렸다. 한편, 삼남연회 정동준 감독은 격려사를 통해 찬양제를 준비한 청장년선교회 삼남연회연합회를 축복하고 “연회 안의 모든 교회에는 부흥의 역사가, 모든 성도들의 가정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과 복이 넘치시기를 간절히 기원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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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단 및 연합회
    2022-11-22
  • [진해서부교회 김현직 목사] 인터뷰
    본지는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님으로부터 위임 받은 교회를 이끌고 경남 지역의 교계 부흥에 새 바람을 일으켜줄 목회자들을 만나 짧은 대화를 나눴다. 이번 호에서는 무더웠던 지난 8월 6일, 예장(합동) 진해서부교회 위임 목사 된 김현직 목사의 이야기를 전한다. Q. 경남기독신문 독자들에게 목사님에 대한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A. 안녕하세요, 이번에 새로 진해서부교회 담임으로 부임한 김현직 목사입니다. 진해에 오기전까지 분당우리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하며 예배와 목양, 그리고 훈련을 담당하였습니다. Q. 지난 1월 경상노회 2022년 감사예배에서 특송 하시는 걸 봤습니다. 목사님 노래도 너무 잘하시고, 또 위임식 때 분당우리교회 성도님들이 축가로 불렀던 곡이 목사님께서 만드신 곡이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음악에 관심이 많으신데 앞으로 교회 사역방향 등에 많은 영향이 있을까요? 또 다른 새로운 창작 활동도 이어 가실 예정이신가요? A. 제 사역의 출발점이 찬양사역이었습니다. 찬미워십과 소망의바다 미니스트리에서 팀 사역으로 훈련을 받은 후, 솔로 사역으로 전향하여 개인 음반을 출반하고 방송과 교회집회, 대학 및 기관 등에서 다양하게 음악 사역을 했습니다. 지금도 음악작업은 개인적으로도 꾸준히 하고 있으며, 동료 사역자나 필요한 곳에 음반참여나 방송 사역 등으로 활동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서부교회는 찬양과 말씀 그리고 기도가 균형을 이루어 예배하는 교회로 세워질 것입니다. 특히 젊은 성도님들이 마음껏 예배할 수 있는 곳으로 변화될 것이며, 40-50대의 장년층과 청년들이 생동감 있게 예배하며 신앙의 유익함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사랑과 축복의 터전으로 세워져 나가기 위해 열심히 터를 닦고 있습니다. 동시에 어르신들에게는 안식과 평안함을 누릴 수 있는 평강의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애를 쓰고 있습니다. Q. 연고가 전혀 없는 지역까지 오셔서 사역하게 되셨는데, 몇 개월 계시면서 창원시, 그 중에 진해에 대해 많이 알게 되셨나요? A. 창원이라는 도시에 처음 와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함이 많았습니다. 물론 지금도 계속 적응해 가며 지역에 대해 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지만 참 아름다운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 4월에 만개했던 벚꽃으로 뒤덮인 동화 속 같은 마을들이 잊혀 지지가 않습니다. 또 그만큼 지역 주민들, 특별히 우리교회 성도님들의 따뜻한 마음이 너무 귀하고 복되다는 생각에 감사함이 가득합니다. Q. 지금 진해서부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 또 앞으로의 사역 방향과 계획, 목사님의 목회철학 등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제가 부임하면서 선포한 목회비전은 바로 ‘선택과 집중’입니다. 지금 서부교회는 ‘예배의 회복과 전 성도 양육’이라는 뚜렷한 방향을 ‘선택’하였습니다. 이 두 가지에 모든 마음과 에너지를 ‘집중’하여, ‘한 사람을 살리고, 한 사람을 세우는’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서부교회는 이러한 목회비전을 중심으로 하여, ‘예배의 감격이 있는 교회, 가정을 회복시키는 교회, 다음세대에게 길을 보여줄 수 있는 교회’로 굳건히 세워지기를 소망합니다. Q. 경남지역과 창원 교계는 독소조항이 담긴 학생인권조례를 저지했던 저력이 있는 곳입니다. 지금은 독소조항이 담긴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에 앞장서서 반대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운동들에 진해서부교회 담임 목사로서 함께 동참하실 수 있으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A. 성경의 진리에서 벗어난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옳은 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각자가 처한 자리에서 지혜롭게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해 나가는 성숙함의 열매가 필요한 시절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Q. 진해서부교회 교인들과 지역 교계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사랑하는 진해서부교회 성도님들, 함께 가족이 되어 같은 곳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어 참 기쁩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항상 행복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속에서 길을 찾으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경험하는 신앙생활의 ‘맛’도 충만히 누리시기를 소원합니다. 이제 우리교회는 새롭게 시작되는 그 첫 걸음을 힘차게 내딛었습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부르심의 소망을 향하여 달려 나갈 때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큰 일’을 분명히 이루시리라 확신합니다. 늘 함께 기도하고 예배하며,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를 만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축복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교회들을 세우시고 주의 일을 감당하게 하신 데에는 각 교회에게 주신 분명하신 뜻이 있다고 믿습니다. 특별히 지역사회를 섬기며 그리스도의 선한 영향력이 이 땅 가운데 흘러가게 하는 데에 교회가 전심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저와 서부교회가 지역의 목사님들과 교회들에게 그러한 귀한 동역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선하신 주님께서 우리 모든 교회 공동체의 머리가 되어주셔서, 하나가 되어 서로 도우며 연합함의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 기획
    • 인터뷰
    2022-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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