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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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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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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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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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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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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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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박봉석 목사] 나를 보는 기준이 무엇인가?
    한 흑인 선교사가 쓴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선교사님은 흑인 빈민촌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백인들이 사는 동네의 쓰레기통을 뒤져서 버려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것이 일과였습니다. 그렇게 쓰레기통을 뒤지던 어느 날, 한 백인 부인의 눈에 띄어서 그 집의 청소부로 취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흑인 빈민촌 출신으로는 큰 출세를 한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첫 출근을 하고보니까 딱히 청소할 것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사는 흑인 빈민촌 움막에 비하면 모든 것이 너무나 깨끗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깨끗한데 백인 부인이 왜 자기에게 청소를 시켰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놀면서 휘파람만 불다가 그냥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다음 날 곧장 쫓겨났습니다. 백인 부인이 보기에는 청소는 고사하고 더러운 발로 온 집안을 더럽혀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 흑인 소년이 쫓겨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준의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누추한 흑인 빈민촌에 사는 소년의 기준으로 볼 때는 너무나 깨끗했지만 백인 부인의 기준으로는 온 집안이 더럽혀져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나는 무엇을 기준으로 내 삶을 평가하고 있습니까?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는 신앙이 좋은 것 같고 의로운 것 같고 깨끗한 삶을 사는 것 같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기준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언제나 그 말씀으로 나를 비쳐보고 내 자신의 모습을 판단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바른 판단을 할 수 있고, 그래서 나를 변화시켜 갈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늘 예배 때에 말씀을 듣고 또 개인적으로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다른 사람은 기준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기준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늘 그 말씀으로 나를 비쳐보며 나를 변화시켜 갈 때에 예수님을 닮아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 있는 사람이 됩니다. 누가복음 18장에는 서로 다른 기도를 했던 두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들은 바리새인과 그리고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이 바리새인의 기도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보았다면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죄인 된 존재인지 알 텐데 오히려 그는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여서 자신의 종교적인 탁월함과 의로움을 과시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의 기도는 그와 전혀 달랐습니다. 그 당시 세리는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죄인 중의 상 죄인으로 취급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세리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는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멀리 서서 기도합니다. 그것도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무엇입니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알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기준으로 보면 성전 가까이 갈 수도 없고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애통할 수밖에 없는 죄인 됨을 그는 알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세리는 바로 이 고백으로 말미암아 전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8장 14절에서 예수님은 이 두 사람의 기도의 결론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독자 여러분, 늘 기도는 하지만 내 마음은 한껏 높아져 있지는 않습니까? 다른 성도보다 좀 더 나은 것 같은 나의 신앙과 헌신의 모습으로 인해서 나도 모르게 교만해져 있지 않습니까? 다른 성도는 기준이 아닙니다. 기준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말씀 앞에서 참 부족함이 많은 존재들이고 죄인 된 존재임을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 언제나 겸손을 잃지 않을 수 있고, 바로 그 겸손으로 말미암아 겸손한 자에게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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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22
  • [이정희 목사] 기독교인의 용어 사용 27: 고쳐야 할 예배용어/ 예배 본다
    I. 서언(序言) “잘못된 예배용어, 이것만은 고치자.”란 기사가 언젠가 국민일보에 게재된 적이 있었다. 이는 한국 기독교 교회협의회(NCCK)의 한국교회 발전연구원에서 연구 발표한 것으로서 현재 한국교회에서 잘못 사용하고 있는 예배 용어들을 바로 잡기 위한 시도였으며, 이에 관한 새 용어들을 제안했다. 구체적으로는 고쳐야 할 용어들 중에서 주로 예배용어들에 관 한 것이었다. 기도에서 9개, 예배 예식에서 31개 등 모두 40개 용어의 문제점을 설명하고 대체 용어를 제안했다. 이러한 연구와 발표는 그동안 개인 연구가나 일부 교단에서 발표해 왔다. 하지만 이러한 발표가 상당히 의미가 있는 것은 이번의 발표는 범 교단적 차원의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이루어졌다는데 있다. 또한 나름대로의 관심으로 본지의‘바로잡기’코너를 연재하는 필자로서는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이런 면에서 본 호에서는 예배 용어 중에서 ‘예배 본다’, ‘예배 드린다’는 용어에 대해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II. 예배드림에 대한 용어 먼저 우리 한국교회의 예배드림에 대한 용어는 통일된 말이 없이 아주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예배 드린다’, 예배 한다’, ‘예배 본다’,‘예배 봐준다’, ‘제단을 쌓는다’등 여러 용어들이 있다. 이 중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용어는 ‘예배 드린다’이다. 이 중에서 어떤 용어가 가장 적합할까?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전문가들의 견해가 조금씩 차이가 있다. 먼저 장로회 신학대학원 교수를 지낸 나채운 교수는 ‘예배 본다’는 용어도 틀린 말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이유는 ‘보다’란 말은 문법상 세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그 첫째는 본동사로 쓰이는 경우로 눈으로 본다는 시각적인 의미이다. 이런 경우는 ‘예배 본다’는 용어를 쓸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두 번째의 조동사와 세 번째의 보조 형용사로 사용될 경우는‘먹어본다’는 말처럼 체험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예배 본다’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많은 교인들은 이런 복잡한 문법적인 체계를 잘 모르기 때문에 ‘예배하다’나 ‘예배드리다’란 말을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또 다른 견해는 천안대학교 기독신학대학원의 김석한 교수이다. 그는 ‘예배 하다’란 용어 외에는 어떤 말도 사용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이유는 ‘예배 드린다’는 말은 구약시대의 제물을 드릴 때에 사용되는 용어이지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의 은총 이후에는 예수님이 단번에 드려졌기 때문에 ‘드림’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드린다는 것은 타종교들이 우상에게 드리는 의미가 담겨져 있기 때문에 이 말은 합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또한 ‘예배 본다’는 말은 과거 선교사들이 처음 들어와 예배할 때 서양인에 대한 호기심과 구경꾼들로서의 예배였고 그것이 고착화 되어 ‘예배 본다’는 말이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미상으로는 시각적이기 때문에 합당하지 않다고 했다. 그다음 예배를 ‘제단 쌓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구약시대의 제단을 쌓는 행위에 국한되기 때문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예배 한다’란 용어 외에는 사용할 말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다음 장로회 통합교단에서는 2003년에 ‘예배를 봐준다’는 말은 사용할 수 없다는 결의를 했고, 이번의 ‘이것만은 고치자’에서도 재차 확인 발표를 하였다. III. 결 어 이상과 같은 각 주장들을 볼 때에 어떤 생각이 드는가? 예배 용어 하나도 아직까지는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예배 한다’는 말은 누구도 반대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조심스럽지만, 필자의 견해로는 ‘예배 드린다’는 표현도 적절하다고 본다. 물론 신약적인 개념의 말이 아니라는 견해나 타종교의 드린다는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이라는 견해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너무 확대해석하는 것은 아닌지를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해 본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다양한 견해가 있다는 것은 발전을 위한 노력이라는 관점에서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해 보면서 하루 빨리 올바르고도 완전한 용어들이 정착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담아 기도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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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22
  • [신재철 목사] 잠복(潛伏), 사라지는 고물을 찾아서
    잠복(潛伏), 사라지는 고물을 찾아서 분리수거장은 돈 주고 버리기 아까운 물건들을 내어두는 곳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돈이 되는 물건이 모이는 장소이기도 하다. 폐지는 물론이고 고철과 공병은 어떤 이의 주 수입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큰 규모의 아파트에서는 제법 큰 수익을 만들어 아파트 복지를 위해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일하는 아파트는 규모가 작아 폐품으로 모을 수 있는 금액은 미비하다. 오히려 얼마간 돈을 만들기 위해 묵혀두었다가는 분리수거장이 냄새나고 지저분한 공간이 되어 버린다. 실제로 전임 소장님은 폐품을 관리해 월 2~3만 원의 현금을 만들기도 했다. 후문에는 그 돈은 개인 용돈이 되었다는데 확인할 길은 없다. 여하튼 모으면 돈이 될 수 있지만 내 기준에 득보다는 실이 많았다. 지역에 고물을 취급하는 사장님과 연계하여 매일 수거하는 조건으로 아파트 측에서 일절 금품을 요구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 얼마간의 돈을 포기했지만, 입주민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매일 치워지는 폐품으로 아파트가 너무 깨끗해 졌다. “소장님, 요즘 폐지랑 고철이 왜 이렇게 안 나오죠?” 업체 사장님의 전화다. 매일 수거하러 와보면 돈이 되는 폐지와 고철은 없고 잡다한 물건만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물건을 누가 집어갈까 싶어 며칠 더 지켜보자는 말을 전하며 통화를 마무리했다. 고물이 좀 덜 나오는 날도 있을 수 있으니 그럴 수 있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확실히 이상했다. 일주일이 지나도 고물은 모이지 않았다. ‘누군가 몰래 가지고 가는구나!’ 확신이 들었다. 마침 분리수거장을 비추는 CCTV가 있어서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 시간을 돌려보기 시작했다. 시간을 빠르게 돌리며 영상을 재생한다. 차곡차곡 쌓이는 폐지들. 그런데 어느 시간이 지나니 갑자기 사라진다. 그 순간을 다시 천천히 돌려본다. 새벽 시간, 어느 노인이 수레를 끌고 들어와 차분히 야무지게도 돈 되는 물건만 담아 간다. 매일매일 성실하게 찾아오셨다. 하, 고민이 깊어진다. 「잠복을 결정하다」 계약한 사장님께 미안한 마음도 들고, 분명한 절도라는 생각에 잠복을 결정했다. 반드시 잡아서 경찰에 넘길 계획이었다. 아내에게는 며칠간 못 들어 올 수도 있다는 말을 남겼다. 제법 비장하다. 밖에서 보일까, 관리실 불도 끄고 의자에 몸을 푹 묻은 상태로 새벽까지 뜬 눈으로 지켜본다. 첫날은 실패다. 반드시 다시 온다는 확신으로 둘째 날을 맞았다. 조금 지루해질 즈음에 드디어 나타났다. 영상에서 보았던 손수레와 할아버지다. 익숙하게 고물을 챙겨 담아 조용히 대로변으로 빠져나간다. 은밀히 드러나지 않게 따라가 본다. 굽은 허리로 옆 건물의 폐지도 조용히 정리하며 수레에 물건을 쌓는다. ‘이걸 어쩌지.’ 나는 무엇을 고민했을까? 할아버지와 대면하지 못하고 조용히 관리실로 돌아왔다. 사장님과 의리가 있으니 할아버지를 제재했어야 하는데 차마 말이 나오지 않는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민이 깊어졌다. 날이 밝은 후 고물상 사장님과 통화하며 그간 상황을 설명했다. 상황의 난감함, 사장님께 미안함이 버무려져서 말도 조리 있게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사장님은 의외의 시원한 답으로 나의 고민을 해결해 주셨다. “아이고, 소장님. 그러면 그 영감님께 고물 다 드리세요. 우리는 여기 아파트 물건 없어도 아무 지장이 없어요.” 정말 그래도 될지, 미안한 마음에 한 번 더 되물으며 감사 인사를 드린다. 내가 감사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지만 감사했다. 이유가 뭐가 되었든. 그리고 부끄러웠다. 목사보다 사장님 마음 씀이 더 고왔다. 그리고 나는 한 번 더 잠복을 이어간다. 그 할아버지를 만나야 했다. 새벽이 되어 어김없이 할아버지가 찾아왔다. 어제처럼 익숙하게 고물을 담아 돌아가는 길을 쫒아간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말을 걸어본다. “어르신, 제가 여기 아파트 관리소장이에요. 저희 고물을 매일 수거해 가실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요청을 드렸고 할아버지는 신이 나서 깨끗하게 정리해 가겠다는 약속을 하신다. 이미 손수레에 실린 우리 아파트 물건은 말이 없다. 할아버지와 나 사이의 비밀은 그 녀석들만 입을 다물어 주면 아무 문제 없을 듯하다. 오늘도 이렇게 인생의 한 수(手)를 배운다. 에필로그 그 후 할아버지는 새벽이 아닌 낮 시간 당당하게 고물을 챙겨 가셨다. 입주민이 간섭이라도 할라치면 관리소장님 허락이 있었다며 당당해 하신다. 그리고 얼마지않아 다시 폐지가 쌓이기 시작했고 더 이상 치워지지 않았다. 아파트 미관상 좋지 않기도 했지만 할아버지 신상이 염려되어 동네 고물상을 찾아다니며 할아버지 안부를 물었다. 마침 한 고물상에서 할아버지 소식을 듣게 되었다. 갑자기 몸이 안 좋으셔서 병원에 며칠 계시다 돌아가셨다는 이야기. 무엇을 위해 그리 고생하며 살다 가셨을까. 여전히 고물은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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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22
  • [조희완 목사] 소중한 평안 (시122:1-9)
    만약 죽었다가 잠간 다시 살아난다고 가정을 할 때,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게 될까요? 사람에 따라서 하는 말들이 다를 수 있을 것인데, 아마 살아생전에 가슴에 한이 맺혔던 말씀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자녀들에게 “제발 예수를 믿어라”고 하실 분도 있을 것이고, “제발 다투지 말고 화목하게 지내라”고 하실 분들도 있을 것이고, “아프지 말고 건강해라”고 하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을 때 자기를 따르던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두 번이나 연거푸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요20:19,21). 다른 하실 말씀이 참으로 많으셨을 법한데 평강을 말씀하신 것은 곧, 평소에 예수님께서 가장 원하셨던 것이 바로 평안과 평강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평안은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샬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평안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평안하기를 원하시는지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했습니다(살후3:16).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우리가 평안을 누리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 날 사람들이 이 소중한 평안을 다 빼앗겨 버리고 불안하고 불편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평안이 가득해야 할 곳에 평안은 사라지고 대신 반목과 다툼과 불협화음이 가득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 너무나 흔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평강의 왕이셨던 것처럼, 그 분을 믿는 우리도 평안을 도모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영역 중에서 어떤 곳이 평안하기를 힘써야 할까요? 첫째는, 교회가 평안해야 합니다.(시122:6-7) 둘째는, 가정이 평안해야 합니다.(잠17:1,21:9) 셋째는, 나라가 평안해야 합니다.(딤전2:1-2) 날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는 삶이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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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 칼럼
    2023-03-22
  • [오성한 목사] 소망을 넘어 믿음
    기도를 많이 하고 노력을 해야 생수의 강이 넘쳐흐르는 줄 알았다. 아니다. 누구든지 목말라 이 물을 마시면, 예수를 믿으면 그 배에서 영생하도록 흐르는 생수 강이 생긴다. 나는 이것을 깨달은 날 이후 늘 내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음을 믿는다. 자유하게 되었다. 감사하게 되었다. 흥분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춤추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성령도 능력도 믿음으로 받았다.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갈3:5). 대답해 보라. 성령의 능력을 믿음으로 받는다. “성령을 받는 것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라고 묻는다. 듣고 믿음으로이다. 너희에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려면 기도를 세 시간 이상해야 나타난다고 하지 않았다. 이미 받았음을 믿고 감사하고 인정하고 기도하면 된다. 기도를 하루 5시간 해야 능력을 주겠다고 그러지 않았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렇다고 기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더 기도하게 된다. 이것을 믿고 기도하면 기도가 더 힘이 있고 재미가 넘친다. 기도를 10시간 해야 성령의 능력을 주겠다고 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 이미 주신 것을 알고 기도하라고 하신다. 믿음으로 현실을 장악하라.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1:24-25). 믿음과 소망은 다르다. 지금 믿음으로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앞으로 성령 충만을 소망하지 말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믿음으로 충만해야 한다. 지금 충만해야 한다. "하나님 저는 앞으로 성령 충만할 것입니다. 내일 충만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샘물이 나는가? 물론 우리가 내일도 그렇게 될 소망을 가진다. 충만 위에 더 충만할 것을 소망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성령 충만함을 믿어야 한다. 소망은 있어야 하지만 지금 믿음을 가져야 한다. 지금 당신은 성령 충만하다. 당신은 성령 충만한 사람이다. 당신은 굳은 마음이 부드러워진 사람이다. 새 마음이 있고 새 영이 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36:26-27)라고 약속하셨다. 믿음으로 간구하면 주신다. 소망과 믿음을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지금 믿어야 한다. 동시에 소망도 가져야 한다. 지금 충만을 주셨고 앞으로도 더 충만케 하실 것이다. 지금 우리가 구원 받았고, 앞으로도 구원 받을 것이다. 이것을 "이미, 아직"이라는 표현을 한다. 이미 주셨고 아직 주실 것이다. 그것이 믿음과 소망이다. 우리는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사랑 속에 살아야한다. 믿음과 소망은 다르다. 엄밀히 말해서 소망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을 소망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 소망만으로는 믿음의 역사를 일으킬 수 없다. 쉽게 말하면 성령 충만한 것을 믿기 전에는 죽을 때까지 소망만 갖고 성령 충만 만 바라보다 죽을 것이다. 그래서 한 번도 완벽한 성령 충만함을 믿지 못하고 이 땅을 떠나는 사람이 많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내가 이 사실을 깨닫고는 부들부들 떨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 내가 믿는 줄 알았는데 소망만 가졌었구나! 나는 성령 충만을 믿지를 못했었구나. 큰 일 날 뻔 했구나. 죽을 때까지 바라기만 하다가 한 번도 성령 충만을 모르고 살 뻔 했구나. 능력을 바라기만 했지 능력이 나에게 넘쳐 남을 믿지 못했구나"하고 놀랐다. 복음을 믿음으로 깨닫고, 온전한 복음의 문이 열리던 날 감격과 기쁨과 함께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마음이 급해졌다. 모르고 평생을 살았다면 큰일 날 뻔 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십자가를 믿는 다고 하면서도 십자가에서 이미 다 이루어 놓으신 일을 믿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주님 저는 앞으로 복음만 말하겠습니다. 온전한 복음, 이미 이루신 복음의 소식을 말해 믿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자연스럽게 결단하게 되었다. 나는 그 후 기회만 있으면 시자가의 복음만 말하고 있다. 믿음과 소망은 다른 것이다. 이것을 몰랐다면 죽을 때까지 “오, 주님 성령 충만을 주세요.”라는 기도만 하다가 갈 뻔 했다. 생각 만해도 소름이 돋는다. 큰 일 날 뻔 했다. 당신은 안 그런가? "오, 하나님 복음만 전하다가 가겠습니다."라고 결단하게 된 강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이 방법이 아니면 성령 충만함에 도달하지 못할 사람이다. 그런데 성경은 다 주셨으니 믿음으로 받으라고 한다. 소망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믿음의 역사를 일으킬 수 없다. 무슨 말 인지 알겠는가? 모든 부분이 그렇다. 성령 충만 뿐 아니라 모든 부분이 그렇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다. 현재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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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22
  • [하수룡 장로] 맛
    보통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손맛 눈맛 입맛 때문에 바다를 찾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고 한다.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기 위해 교회를 끊임없이 찾게 된다. 마산지방에 문창이라는 이름을 가진 교회는 1901년에 최초로 설립되어 120여 년 동안 하나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맛본 교회로 자랑스럽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오아시스가 있기 때문이다. 사막 같은 불모의 땅 마산지방에 문창이라 이름을 가진 교회가 지금까지 이 지역에 변함없이 맑은 물이 흐르도록 한국교회의 오아시스를 견지해 온 것이다. 1919년 추산동의 옛 지명인 문창리에 석조 예배당을 건축하면서 이사했고 이때 교회명을 문창교회로 개칭했다. 선교사 아담슨 선교사의 지원을 받아 성호리에 독서숙을 세우게 되는데 1909년 대한제국의 인가를 받아 마산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창신학교로 발전했다. 이어 의신 여학교를 세우면서 남녀가 모두 신식교육을 받게 되고 1924년에 유치원을 설립하여 일찍부터 교육의 혜택을 받아 신문화의 맛을 보게 된 것이다.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나는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다. 이때 비로소 신식교육의 맛을 보게 되어 근대화를 이루는 주역들이 생산되고 일찍부터 이 지역이 다른 곳보다 깨어있는 선진인물이 많이 배출된 것이 사실이다. 한국에 수많은 교회가 있지만 문창교회(제일문창)는 다른 교회가 갖고 있지 못한 차별화된 복음적 특징이 있다. 1919년 3월 초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이용상이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져와 이 교회 장로이자 창신학교 학감인 이상소와 의신 여학교 교사 임학찬에게 전달했다. 이로써 창신학교 교사인 최용규, 의신여학교 교사인 김필애, 박순천 등이 준비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마산 장날 독립 만세 시위에 사제가 함께하여 독립 만세를 외친 것은 물론 주의 나라를 선포하고 의를 맛본 것이다. 복음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교회 내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거나 복음의 사회적 공적 영역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 교회사에서 기독 신자라면 내세울 자랑스러운 주기철 목사님이 1931년 7월에 부임하여 1936년 7월에 평양 산정현 교회로 이임할 때까지 이곳 문창리에서 사역하셨다. 일제강점기에 주 목사님은 대한의 독립과 신앙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것은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과 함께 투옥되어 끝까지 굽히지 않는 굳건한 믿음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셨고 사악한 일제는 망한다는 확신으로 투쟁하였기에 바울과 같은 큰 인물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악령의 포로가 되어버린 사람들을 그것에서부터 자유케 하시려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러 오신 것이다. 예수만 믿으면 모든 것이 잘되고 천국 간다는 싸구려 구원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서 미리 맛본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해야 할 신앙공동체임을 자각하고 이를 실천해야 한다. 일제강점기와 군사 독재 시대 선배들의 신앙심에 간접적이지만 참맛을 보았다. 이제는 교회를 향해 소리치는 아우성을 들어야 한다. 세상의 수많은 교회들이 오염되어 제구실을 못한다 할지라도 사막의 오아시스의 역할을 한 하나님의 나라를 맛본 문창이 있는 이 지역 교회들만은 하나님의 통치에 순응하며 종말론적인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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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22
  • [양대식 목사] 리더십에 대하여
    마음을 지켜야 한다 성경에서는 마음에 대해 가장 많이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매우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마음은 심장입니다. 심장같이 중요한 것이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마음을 보십니다. 리더는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마음 단속, 마음의 운전을 잘해야 합니다. 좋지 않은 마음을 가지면 사고가 일어납니다. 마음을 다스리고, 지키고, 관리하는 자가 리더이고 지혜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을 지키게 됩니다. 사단이 우리의 마음을 흔듭니다. 나쁜 마음, 거짓된 마음, 강퍅한 마음을 가지면 망하게 됩니다. 악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마음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마음에 분노가 가득 찰 때 기도해야 합니다. 마음이 우울하고 슬플 때 기도하면 성령님께서 위로해 주십니다. 마음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결정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마음이 선하고 신실해야 합니다. 두 마음을 품지 않아야 하며, 마음이 청결해야 합니다. 마음의 염려는 하나님께 맡기고 담대해야 합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가득 차야 합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입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스트레스가 적어지고 건강에 매우 유익합니다. 마음이 병들면 영육이 병들 수 있습니다. 성령 받으면 마음에 기쁨이 넘칩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며, 마음에서 우러나와 사람을 사랑할 때 관계가 깨지지 않습니다. 마음에서 말이 나옵니다. 마음이 선하면 좋은 말을 하게됩니다. 사람들 마다 마음의 전쟁이 있습니다. 자기 마음을 지키고 다스려야 승리하게 됩니다. ‘성령님, 마음을 지키게 해주세요.’ 순간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미운 마음을 버리고 사랑의 마음으로 가득 찬 리더가 좋은 리더입니다. 인간을 알아야 한다 리더는 인간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아는 데서 관계가 시작됩니다. 인간의 심리를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죄인이고 마음이 전적으로 부패했습니다. 죄짓고 사는 인생들입니다. 죄인들이기에 기대하지 않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리더는 긍휼의 마음, 사랑의 마음으로 가득 차야 합니다. 인간은 연약합니다. 나그네, 풀, 안개 같은 인생입니다. 영육이 약하고 마음도 약합니다. 약한 인간이기에 병들 때 고통당합니다. 마음이 약하고 소심하여 말 한마디 때문에 상처받고 고통을 겪게 됩니다.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인간을 두려워하지 말고 때때로 사람 앞에서 담대해야 합니다. 담대함이 리더십 입니다. 인간은 위기와 고난의 때에 약해집니다. 강하고 위대하신 하나님만 신뢰해야 합니다. 인간은 내일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들입니다. 리더는 내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오늘 주어진 시간에 충실하고 감사하면서 사는 자입니다. 인간은 욕심이 많고 이기적입니다. 누구나 욕심이 많고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욕심 부리고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을 보면서 “나도 저들과 똑같은 자이지” 라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욕심 부리고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스트레스 받지 말고 이해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욕심 부리고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충고해도 듣지 않고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타고난 성품, 기질이 있는데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인간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고 사랑의 대상입니다. 리더는 인간에 대해 기대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는 관계에서 평안을 누립니다. 인간에 대해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도 믿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주어야 합니다. 인간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경제 문제, 은퇴 문제, 관계 깨짐, 죽음, 미래, 건강 등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돈 많은 부자, 지식인들, 아이들까지 인생의 삶은 두려움으로 가득 찬 삶입니다. 소심하고 두려움 속에 사는 인생입니다. 리더는 두려움 속에 사는 인생임을 알고 용기와 희망의 메시지를 주어야 합니다. 성경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365번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려워 하는 마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만듭니다. 리더는 용기와 담대함으로 도전하는 자입니다. 인간은 변합니다. 인간의 감정, 마음, 약속이 변합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습니다.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기에 신뢰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수시로 변합니다. 변하는 인간이기에 신뢰할 수 없습니다. 리더는 변하는 인간을 알고, 인간을 믿 거나 기대하지 않고, 변하지 않는 하나님만 믿고 의지합니다. 변할 수 있기에 인간이 변할 때 크게 실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에게 유익이 안 되면 변할 수 있다, 배신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명예를 구하고, 인정받고 싶고, 성공하고 싶어합니다. 인정받을 때 행복합니다. 인간을 대할 때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고, 축복해 주어야 합니다. 지혜로운 리더는 인간을 알고 잘 대처해 나가는 지혜, 관계 리더십을 가진 자입니다. 하나님과 좋은 관계에 집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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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문/책
    2023-03-22
  • [김성수 총장]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우리 성도들이 즐겨 부르는 복음 중에서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라는 복음 송이 있다. 분주한 생활 가운데서도 우리 모두는 한번쯤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우리 모두의 삶 속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한번쯤 묵상해 볼 필요가 있다. 특별히 우리의 삶의 여정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정말 살아계셔서 나에게 관심이나 갖고 계시는지, 내가 당하는 삶의 고통을 알기나 하시는지, 또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인지 회의가 들 때 은혜의 문제를 한번쯤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를 간절히 바랬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이삭은 형 에서에게 축복을 물려주고자 했다. 그래서 야곱은 먼저 에서에게서 장자권을 빼앗았다. 형 에서의 옷을 입고 털이 많은 사냥꾼인 척하여 눈먼 아버지를 속였다.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어떻게 그렇게 빨리 사냥감을 갖고 돌아올 수 있었느냐고 물었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기까지 하였다.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을 했다. 거짓말하고, 속이고,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등 모든 일을 했다. 그래서 야곱은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 같아 보인다. 야곱의 계획과 간교는 오히려 역효과를 내기만했다. 에서는 화가 나서 동생을 죽일 기회를 노렸다(창 27:41). 야곱은 목숨을 걸고 형 에서로부터 도망을 쳐야 했고, 결국 자신의 고향과 약속의 땅으로부터도 멀어져 갔다. 도망자 야곱은 자신이 떠나온 고향 집에서 며칠 거리에 있는 어떤 곳에 이르렀다. 사실 그곳은 그의 조부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이르러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던 곳이었다(12:8). 그러나 야곱은 이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는 그의 조부모와 부모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많이 들었지만 이 여호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지를 못했다. 야곱은 어쩌다가 이곳에 도착했다. 해가 지고 어두워서 더 이상 여행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진맥진한 야곱은 잠이 들었다. 이 밤에 그는 놀라운 꿈을 꾸었고, 하나님은 꿈에 야곱에게 나타나셨다. 야곱은 자신이 꿈에서 본 이상을 보고 두려워 죽을 지경이었을 것이다. 그는 방금 아버지를 속이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악행에 대해 자신을 벌하실 것인가? 여호와께서 자신을 저주하실 것인가? 얼마나 두려웠겠는가?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은 야곱을 벌하거나 저주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오히려 풍성한 약속으로 그에게 복을 주셨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그의 조상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신 동일한 약속을 야곱에게 주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은 약속의 땅을 떠나 위험한 여행을 떠나는 야곱에게 특별한 약속을 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17:7)고 약속하셨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도망치는 교활한 야곱을 찾아서 만나시고,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어진 이 모든 풍성한 약속이 이제 그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족장들에게 베푸신 축복을 받았다.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을 받을 만한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약속의 땅에서 도망치는 도망자가 될 뿐이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축복을 붙잡고 취할 수가 없는 존재다. 우리는 오직 믿음과 감사라는 두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갖고 하시는 일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사실 생각해 보면 내가 소유하고, 누려온 모든 것들이 당연한 것 아니라 오직 은혜였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한 없이 연약하고 부족하고 허물이 많고, 하나님 앞에 도무지 설 수도 없는 죄인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의 행위대로 갚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좋은 것들을 누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모든 것이 은혜라! 모든 것이 은혜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삶이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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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22
  • [황권철 목사] 세롯인 시몬(Simon's Behind Stories)-침묵의 사도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 유대의 최고 권력 기관은 산헤드린 공회였다. 이 법정은 제사장들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그리고 탁월한 서기관들과 율법의 석학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당시 성전에서 상당히 실력행사를 했던 랍비 곧 교사들이었다. 유대는 로마의 식민지 국가이지만 사형 집행권을 제외하고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다 집행한다. 그들이 비록 사형이 없었으나 예수를 사형에 처하도록 주도적인 역할을 행했다. 그 당시 종교적으로는 여러 분파가 있었다.  첫째, 바리새파이다. 이는 헬라시대에 생겼으며 마카비를 지지했으나 요한 힐카누스 때에 그들과 분리하게 되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거룩한 무리(Holy one)로 알려졌으나 후에는 바리새파(분리주의자)로 불려졌다. 왜냐하면 힐카누스가 지지하는 로마 정부에 대항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당시 자유주의(사두개파)와 다른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고 율법의 가르침을 준수했으나 율법 속에 잠재되어 있는 율법의 정신을 바로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 율법의 외형적 가르침에만 치중한 바리새인들의 유형을 탈무드에서는 7가지로 지적했다. 어깨 형(shoulder), 잠깐 기다리게 하는 형(wait a little), 피 흘리기 형(bleeding), 채색 형(painted),계산 형(reckoning) 공포 형(fearing), 그리고 사랑 형(love) 바리새인이 있다고 했는데 이중에 사랑 형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위선과 외식적인 종교행위에 불과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의 외식을 책망했다.  둘째, 사두개파이다. 이들은 바리새파의 대적자로 수적으로는 적었으나 영향력은 대단했다. 재산이나 지명도나 정치적인 세력을 가진 세속적인 면에서 위대한 분들이 많았다. 이들의 출현은 고레스 왕 때에 유대인의 귀환이 있은 후 로마황제와 관계를 친숙히 한 유대인이 대제사장이 되었다는데서 생긴 것으로 본다. 그래서 이들의 지위는 대제사장들과 같았으며 이들은 성민의 율법을 세속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헬라문화가 지배했을 때는 헬라문화 보급을 위해 앞장섰으며, 로마가 지배할 때는 로마와 친숙하게 지냈다. 그들의 신앙은 현실적이며 세속적이었으므로 경건생활이나 부활신앙을 인정하지 않았다.  셋째, 엣센 파이다. 이들은 일종의 금욕주의자들이라고 부른다. 세속적인 삶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 그들은 재산을 공동으로 관리했으며 농경생활로 금소하게 생활하면서 전쟁과 노예제도 및 상업을 거부하고 일정한 목적을 세워 놓고 엄격한 규율 속에 자신들을 묶어 두었다.  넷째, 헤롯파이다. 이들은 헤롯 왕가를 지지하는 자들이다. 당시 로마 정부에 소속한 헤롯 군대를 지지하여 현실적 이권에 얽매여 있는 자들이다. 세리들이 주로 여기에 속해 있었다. 이들은 로마인들의 하수 노릇을 하면서 유대인들의 피를 빨아 먹는 매국노와 같이 취급을 받은 친로마파 권력형들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세롯 파인 열심당이다. 일명 이들은 유대 민족주의자들이며 애국주의자들로 극소의 무리들이다. 이들은 지나친 애국운동으로 반민족주의자들을 대적하고 저격하므로 일명 테러분자로까지 낙인이 찍혀 있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다대오 유다와 가나안인 시몬이 여기에 속한 자들이었다.   열심당원 시몬    세롯 시몬은 가나안 사람이었다(마 10:4; 막 3:18; 눅 6:15).5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12제자가 되었다. 오순절과 감람산에서 주님의 승천하는 현장에도 직접 참여했다(행1:13). 세롯(헬라어 제로테스)이란 ‘열심당’, ‘열광자’란 뜻이다. 이는 아람어에서 유래된 말로 셀롯당 즉 열심 당원으로 이스라엘 독립을 위한 비밀 결사대인 일종의 테러리스트이다. 이들은 유대의 반대 세력들을 살해와 테러로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저지르는 극열한 민족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품속에 언제나 반달 같은 검을 품고 다니다가 매국노 로마인들을 만나면 죽이기를 망설이지 않는 극렬 테러리스트였다. 그랬던 그들이 갈릴리 가버나움에 본거지를 두고 활동하다가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시몬은 전에 스스로 자신을 일컬어 로마의 팔레스타인 통치에 대한 광적인 반대파로 즉, 열심당원이라고 했기에 이와 같은 이름이 불리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예수께 부름을 받아 사도가 되었으나 사도의 반열에 올린 이름 외에는 성경 어디에도 그의 관한 기사를 찾아 볼 수 없다. 당시 이런 신분을 가진 자들은 공직은 물론 사회활동을 할 수 없는 신분의 많은 제약을 받고 살았다. 헤게십푸스(Euseb., Hist., Ⅲ. 11, 32)에 의하면 시몬은 야고보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었다고 한다.  하나님 나라는 언약 공동체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사상이나 이념 공동체가 아닌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정치적인 성향이나 지리적인 감정, 세속적인 신분에따라 언약을 배반하면 안 된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받았을 때 본토와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갔고, 후일 백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번제를 드리러 간 것도 언약에 기초한 삶이었다. 언약의 율법을 받은 모세는 말씀에 순종하여 지팡이를 내어 밀 때, 홍해가 갈라졌고 반석이 쪼개지며 구름기둥 불기둥의 역사가 일어났다. 바벨론 포로 시절 다니엘은 이방 왕궁에서도 하나님 앞에 뜻을 정하여 언약 중심으로 살았던 신실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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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22
  • [최호숙 목사] 주님이 원하시는 대학(大學)
    요즘 사람들이 유머 섞인 joke(농담)를 할 때 “한국에서 가장 빡신(?) 대학은 삼청교육대, 해병대, 들어가기 힘든 대학은 SKY대(스카이대:서울대 고대 연대)”... 웃자고 하는 말이다. 한국의 입시 제도 실태를 보는 외국인들의 눈은 예사롭지 않다. 예비고사, 학력고사, 수학능력고사(수능) 시대마다 용어가 달라졌을 뿐 진통을 겪는 양상은 마찬가지이다. 외국의 언론들이 한국의 수능시험 현장을 보고 보도하기를 “사생결단의 시험(Do-or-Die Exam)” 즉, 시험을 치르는 목적이 사느냐 죽느냐를 결판내는 시험이라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기에 세계 사람들이 한국의 대학입시제도를 보고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인터뷰하는 학생들의 대답은 한결같다. “이 수능시험 망치면 제 인생 끝장나는 겁니다...” 이것은 인생 도미노 이론이다. 시험 망치면 나쁜 대학(bad college), 나쁜 대학 나오면 나쁜 직업(bad job)...이런 상황에서의 대학 입시는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밥’의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대학 입시는 입시 자의 기(氣)살리기 아니면, 기(氣)죽이기식의 상황이 주어진다. 필자가 목회하는 곳은 통영 경상대학교 해양과학대학 후문에 자리 잡고 있다. 대학교를 끼고 있기에 학기마다 대학 신입생 또는 복학생들이 교회 나와 등록도 하고 등록 없이 예배만 드리고 가기도 하고 다양한 학생들이 오는데 이번 주에는 신입생이 등록을 했다. 집이 부산인데 부모님께서 친히 아들 등록을 위해 이곳까지 찾아와 예배에 동참한 것이다. 외적으로 판단해볼 때, 특별한 사정이 있는지도 몰라도 보편적으로 부산에서 이곳 통영까지 대학을 왔다는 것은 일류대 갈 성적은 안 되기 때문에 이곳까지 온 것이라 추론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학생 부모님과 대화를 통해 깨달은 것은 부모님의 신앙과 아들의 신앙이 참으로 돈독하다는 것을 직감하게 되었다. 비록 육신의 성적은 SKY(스카이 대)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의 왕국(Kingdom of God) 천국 대학에서는 수석 입학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삿포로 농학교의 초대 교장인 윌리엄 클라크 박사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립대 교수 시절 일본의 초청을 받아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 근대화에 일조한 인물인데 그의 교훈 중 유명한 교훈이 있다. “Boys, be ambitious!”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그런데 원래는 뒤에 ‘in Christ’라는 단어가 더 있었는데 그 단어가 누락이 되어 전해지고 있다. 윌리엄 클라크는 세상 적인 야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천국의 꿈, 소망 이것이 본질인 것을 교훈하려고 했던 것이다. 인생의 최종 대학인 천국 대학은 어떠한가? 이 대학은 인간의 노력과 행위, 술수로 들어가는 곳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가는 곳이고, 인간의 공로를 자랑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만이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천국대학 입학 자격을 얻고 살아가는 성도의 삶은 지극한 사랑에 근거하여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겸손하게 살아가며 소망 중에 승리해야 할 것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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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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