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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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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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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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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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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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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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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이정희 목사] 숫자에 대한 호불호(好不好) 2/ 13일의 금요일
    I. 서언(序言) 기피하는 숫자 4(四)에 대해서 몇 주 전에 논한바 있었다. 이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한자문화권에서 주로 금기시하는 숫자였고, 서양의 경우에 가장 기피하는 숫자는 13일의 금요일이다. 반면 7은 행운의 숫자로 여기고 즐겨 사용한다는 사실을 지난 번 논한 바 있다. 이런 숫자에 대한 호불호는 전혀 근거 없는 어리석은 행위이며 미신적인 행위이다. 이런 면에서 본 호에서는 주로 서양권에서 기피하는 13일의 금요일에 대해서 고찰해보고자 한다. II. 13일의 금요일을 금기시하는 이유 1. 13에 대한 금기시 하는 보편적 현상: 숫자 13에 대한 공포증을 ‘트리스카이데카포비아)’라고 한다. 이러한 13에 대한 공포는 오늘날의 현대 문화 속에서도 여전히 존재한다. 예를 들면, 고층 빌딩에서 80%이상은 13층이 없다. 또한 많은 병원에는 13호실이 없으며, 프랑스와 이탈리아에는 주소에도 13번지가 거의 없다. 또한 공항에도 13번 게이트가 없거나 비행기 좌석에도 13번열이 없는 경우도 많다. 이런 현상은 ‘13일의 금요일’ 때는 항공사에서는 약 9억 달러의 손실이 생기기도 하는데, 이는 사람들이 재수 없는 13일에는 비행기를 타거나 금융거래를 피하려는 이유 때문이다. 2. 13에 대한 금기시의 유래: 황당하기 이를 때 없는 이런 미신적인 기피현상은 어디서부터 왔을까? 그 유래에 대한 민속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기독교 이전의 고대 스칸디나비아 신화에서부터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신화의 내용에 의하면, 12명의 신들이 그들의 천국에 건설된 발할라(Valhalla)란 신전에서 저녁 만찬을 즐기고 있었는데, 그 자리에 ‘로키(Loki)’라는 초대받지 않은 13번째 신이 도착했다. 장난을 좋아하는 로키는 어둠의 신 호더(Hoder)로 하여금 겨우살이나무로 만든 화살을 기쁨의 신 볼더(Balder)에게 쏘도록 일을 꾸민다. 결국 볼더(Balder)는 화살에 맞아 죽고 세상은 어둠에 덮였다는 것이다. 이런 유래로 13에 대한 기피현상이 생겼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외에도 13이란 숫자가 언제나 예언과 운명으로 느껴지게 된 것은 기독교의‘최후의 만찬’역시 이 신화의 구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유다는 예수의 제자 중에 마지막으로 만찬장에 나타난 제자이며, 13번째로 식탁에 앉았다. 다음날 그는 예수를 배신했으며, 또 13일의 금요일에 예수님이 못 박히셨으므로 더욱더 좋지 않은 날로 여겨진 것이다. 또한 고대 로마에서 마법사들의 모임은 보통 12명의 마법사들로 구성되었고, 13번째 참가자는 악마였다고 한다. 이런 이유들로 13에 대한 기피증이 생겨났다. 또한 숫자로 점을 치는 사람에 의하면 12 다음에 나오는 13은 불운을 가져오는 숫자라고 여겼다. 그 이유는 완전수인 12는 반으로도 나눌 수 있고, 3과 4로도 균등하게 나눌수 있다. 또한 12는 예수님의 제자들, 별자리, 1년의 달, 올림퍼스 산의 신, 헤라클레스의 노역, 이스라엘 지파, 그리고 배심원의 숫자가 모두 12이다. 하지만 여기에 하나를 더해서 13이 되면, 12의 완전함이 깨어지면서 불균형을 가져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견해는 고대 이집트에서는 인간의 모든 삶은 12단계를 거쳐야 되고, 13번째 단계는 내세의 생으로서 신비롭게 생각했고,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고 믿으면서 내세를 상징하는 숫자 13에 대한 일종의 경외감을 갖게 되었다. 결국 13은 죽음에 대해 그들이 느끼는 전반적인 두려움의 일부분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13이란 숫자는 고대 이집트보다 더 먼 고대의 여성의 힘과 연관되어 있었고, 당시의 여신 숭배문화에서 13이라는 숫자는 더 신성시되었다고 보고 있다. 왜냐하면 이 숫자는 1년 동안 도는 달의 회전수와 일치했기 때문이다. 즉, 13×28=364일이었다. 또한 프랑스 라스코(Lascaux)동굴에 있는 27,000년 전에 조각된‘대지의 어머니 러셀(the Earth Mother of Laussel)’은 13개의 새김 눈(notch)이 있는 뿔을 들고 있는 여인의 형상이다. 이것은 여성의 힘을 정복하거나 수용할 수 없었던 무능력과 전반적 여성에 대한 두려움이 13이라는 숫자에 투영된 것이라고 추측된다. III. 결 어 어떤 조사에 의하면, 13일의 금요일에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미국에서는 1,700만에서 2,100만 명의 사람들이 고통 받는다고 한다. 이 공포증은 숫자 13에 대한 공포와 금요일에 관한 미신이 결부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고대 스칸디나비아의 전설이 진짜 근원일 수도 있다. 즉, 금요일(Friday)은 하늘의 여신 프리가(Frigga)의 이름에서 나왔는데, 기독교가 전파된 후부터 프리가는 마녀로 간주되었다는 것이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그 후 수세기 동안 금요일을 ‘마녀의 안식일’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것이 오늘날 13일의 금요일의 시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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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14
  • [김성수 총장] 위대하신 하나님
    분주한 일상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한번씩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를 생각하며 감탄할 때가 있다. 장엄한 계곡과 아름다운 자연 경관, 밤하늘의 신비한 은하계와 별들을 바라보면서 시편 기자와 함께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한다(시8편).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너무도 아름답고 신비하기에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창조 세계를 경작하고 다스리기는 커녕 오히려 자연을 숭배하기까지 하였다. 대부분의 이방종교는 자연 숭배와 관련이 있다. 도시를 밝히는 인공 조명과 심지어는 기후까지 조절할 수 있는 시대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신비한 자연의 질서에 훨씬 더 잘 적응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사 화복이 자연의 어떤 요소에 좌우된다고 생각하였다. 작물은 너무 덥거나 너무 춥거나 너무 습하거나 너무 건조하면 파괴되거나 익지 않을 수 있다. 화산, 지진, 홍수, 폭풍은 그들의 삶을 끝내거나 기아로 인해 서서히 죽음을 선고할 수도 있다. 질병은 그들이 건설하기 위해 노력한 모든 것을 낭비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자연에서 초월의 원천, 곧 그들 자신보다 더 큰 힘을 보았고, 그들이 생존하기 위해 이들을 달래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이교도 신들은 원래 자연의 힘과 연결되어 있었다. 신들의 왕인 주피터(Jupiter)도 폭풍의 신으로서 그의 경력을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그가 번개를 던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종교의 주된 기능은 신들이 사람들을 멸망시키지 않도록 신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었고, 좀 더 자비로운 신들에게는 자연계를 축복함으로써 사람들을 돕도록 격려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많은 이교 신들은 다산과 관련이 있으며, 농작물과 가축들이 잘 자라도록 독려하기 위해 숭배되었다. 따라서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신전 매춘부들이 숭배자들과 성관계를 갖고 바알(하늘의 신)이 아세라(땅의 여신)와 성관계를 갖도록 해서 땅에 비를 내려 농작물이 자랄 수 있도록 하는 숭배 형태도 있었다. 이와 같은 숭배의 기본 개념은 그리스-로마 세계에 와서는 자연 세계를 넘어 전쟁(Mars)을 포함한 인간적인 할동으로 까지 확대되었다. 그래서 구걸, 거짓말, 도적질(Mercury), 금속 세공(Vulcan), 음악과 시(Apollo) 그리고 섹스(Venus)와 같은 활동에까지 확대되었다. 신들은 본질적으로 인간 삶의 특정 영역이나 자연 세계의 최고 통치자였으며, 신들을 향한 숭배는 주로 신의 비우호적이며 적대적인 관심을 피하기 위해 그 영역에 대한 신들의 권위를 인정하는 방법으로 행해졌다. 예를 들어, 바다에 항해를 시작하기 전에 선장과 선원들은 바다에 대한 넵튠(Neptune)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에게 자신의 영역에 대한 무단 침입을 용서해 달라고 요청하는 의식의 희생 제사를 수행했다. 다르게 말하면, 압도적 다수의 숭배자들에게 있어서 신들은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의 존재였다. 그래서 심지어는 사랑의 언어가 사용된 곳에서도(예를 들어 메소포타미아에서처럼) 그것은 신들에게 감정적인 애착을 갖지 않고 신들에게 순종하는 것을 의미했다. 종교 의식은 신들을 위무하고 달래기 위해 고안되었다. 신들과의 감정적 애착은 거의 없었고 신들이 숭배자들을 파괴하지 않도록 그들을 달래려는 욕망만 있었다. 그래서 적절한 형식과 의식을 따르고, 적절한 기도와 희생 제물을 바쳐서 숭배자가 한 일이나 하지 않은 일로 인해 신들이 불쾌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전부였다. 한 가지 흥미로운 예는 집에 조상 신을 모신 사당을 두는 로마 가족의 경우다. 로마에서 아버지는 가족의 최고 통치자였기 때문에 아버지는 문자 그대로 가족 구성원의 삶과 죽음에 대한 권한까지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아버지는 다른 모든 영역에서 포괄적인 로마법이 가족법을 거의 완전히 발전되지 않은 상태로 남겨둘 정도로 많은 권한을 가졌다. 왜 그러했는가? 간단히 말하면 아버지가 집안의 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많은 가정에서 아버지는 여러 세대에 걸쳐 가족의 다른 가장들의 범신전(판테온)에 합류하고 집에 있는 조상 사당에서 향을 피워 숭배를 받았다. 집안의 최고 권위자로서 아버지(특히 세상을 떠난 아버지)는 종교 의식의 적절한 대상이었다. 이방 종교는 신봉자들에게 오직 한 신 또는 한 무리의 신들만을 숭배하도록 요구하지 않았다. 많은 이교도들은 신들이 지역적이어서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면 자연스럽게 신들을 바꿀 것이라고 믿었다. 자신들의 종교 체계에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새로운 신들을 추가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실, 이교도 세계에서 더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이것을 오히려 마음이 넓고 포용적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고결하고 덕스럽고 국제적인 것으로 여겨졌을 뿐만 아니라 실용적인 가치도 있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포용성을 로마 통치에 대한 종교적 반란을 막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의 힘의 원천으로 여겼다. 게다가 로마를 지지하는 신들은 많을수록 더 좋았다. 그러나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 한 분만이 유일하게 참되며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임을 선포하고 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영원부터 존재하셨고 지금도 계시고 영원히 계실 자존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자신과 별개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통치하는 만물의 주권자이시다. 이 위대하신 하나님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과 사랑과 경배하기에 홀로 합당한 분이시다. 이 위대하신 하나님은 아들의 목숨을 내어 주기까지 자기 백성을 사랑하고, 모든 환난에서 지키고 보호해 주는 분이시다. 오늘도 이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기는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소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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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14
  • [신재철 목사] 관리소장, 태풍과 만나다.
    “오늘 잠 자기는 틀렸네.” 태풍 소식에 긴장이 된다. 건물 관리가 안 된 아파트이기에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태풍, 장마와 같은 가혹한 상황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길 수 있기에 잠을 포기하기로 했다. 물론 내가 자지 않는다고 해서 폭풍 중에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그것을 알면서도 잠을 잘 수 없는 것은 관리소장의 책임감이랄까? “순찰이나 한 번 돌아볼까?” 새벽 1시. 예보된 것보다 밖은 더 요란하다. 집 안에서도 태풍의 무서움이 느껴진다. 아파트 옥내 순찰이라도 돌아보자는 마음으로 몸을 일으킨다. 어차피 다 젖을 것 같아 가벼운 복장에 우의를 걸치고 슬리퍼를 끌며 밖을 나선다. 사람들이 오가는 유리 자동문은 뿌려지는 비를 맞으며 요란스럽게 흔들리고 있다. 이러다 부서지는 것 아닌가 싶은 불안감에 적당한 거리를 두며 살핀다. “어? 장난이 아니네?” 밖이 보이는 주차장에 서서 태풍에 버티며 몸을 가눈다. 큰 도로 상황이 어떤지 보려는 것이다. 보통이 아니다. 왕복 6차선이 작은 수영장이 된 듯 가로등 불빛이 물에 일렁인다. 이사 와서 이 정도 상황을 본 적이 없었기에 잠시 물구경 하듯 살피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함을 느낀다. “지하 주차장! 괜찮을까?!” 헐거운 슬리퍼를 급하게 끌며 계단을 뛰듯 지하로 내려간다. ‘앗!’ 몸이 잠시 뜨더니 계단에 그대로 고꾸라졌다. 슬리퍼가 물기 있는 계단에서 이렇게 위협적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본능적으로 팔을 내어주고 허리와 머리를 지켰다. 일어나기 힘든 고통에 잠시 웅크리고 앉아 있어 보지만 드라마에서처럼 누군가 나타나 위로하거나 돕는 일 따위는 없다. 몸을 일으킨다. 주차장 상황을 봐야만 했다. “아... 이게 뭐야.” 내 생에 이런 광경은 처음이다. 지하주차장 진입로는 계곡이 되어 있었다. 물이 쏟아져 내려오고 주차장 바닥은 이미 발목까지 물이 차 올랐다. 배수펌프 한 개가 돌아가고 있었지만 역류되어 그마저도 주차장으로 다시 들어왔다. 얼어붙은 듯 서 있다가 주차된 차량 먼저 빼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급히 차주들에게 전화를 돌리며 차량 이동이 시작되었다. 마치 군사작전같이 긴박하다. 남자 입주민 몇이 함께 붙어 주차장 입구에 모래주머니를 쌓아보지만 역부족이다. 이미 통제할 수준을 넘었고 차오른 물로 인해 자칫 감전되지 않을까 두려움도 생겼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느끼고 일단 퇴각한다. “이걸 어떻게 수습하지?” 황망한 상황에 차라리 여기가 군대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중대, 소대 인력이 함께 한다면 수습이 빠를 텐데, 이걸 어떻게 나 혼자 정리를 한단 말인가? 이미 승강기 지하는 물이 가득하다. 배수펌프 고장으로 물을 뺄 방법도 없다. 119는 계속 먹통이다. 무력감에 기계적인 못 짓으로 떠다니는 쓰레기를 치우며 생각이 깊어진다. 인생 별 경험을 다한다는 생각에 눈물이 난다. 다행스럽게도 평소 친분이 있던 업체 사장님이 배수펌프를 가지고 와서 승강기부터 물을 퍼내며 진척이 보인다. 영화의 좀비처럼 생각 없는 몸놀림으로 계속해서 치우고 버리고 퍼낸다. “아! 진짜!” 오늘은 주일이다. 벌써 시간은 10시. 갑자기 짜증이 난다. 대강 물은 뺐지만 일이 정리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목사가 예배 인도를 안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홀딱 젖은 옷에 누더기가 된 슬리퍼. 내 차림이 처량하다. 팔은 여전히 욱신거리고 몸은 천근만근이다. 그래도 예배는 가야지. 급하지만 느리게 몸을 이끌고 집으로 가 샤워를 한다. 개척하면 목사는 강단에서 많이 울어야 한다는데. 나는 왜 자꾸 엉뚱한 곳에서 눈물이 날까. 샤워기 물인지 눈물인지 자꾸 흘러내린다. 누구 들으라는 듯 혼자 중얼거려 본다. ‘나 부르신거 맞죠? 개척교회 잘 할 수 있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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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07
  • [김경헌 목사] 보시니(창1:31)
    창세기 1장이 창조장이라는 것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무슨 마음으로 창조하셨을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해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일의 경중을 떠나서 무슨 일이든 목적과 의도가 있는데 모든 것의 시작이 되는 창조를 접하면서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하시면서 무슨 마음으로 무엇을 목적으로 창조하셨을까?” 하는 것에는 의외로 무관심한 것 같습니다. 믿음이 좋아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으니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베소서 기자는 우리를 창세 전에 택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실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우리의 구원까지 언급합니다.(엡1:4-5) 성도라고 한다면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신 사랑의 하나님 ......”이라는 기도는 너무도 자연스럽고 익숙한 표현이요, 신앙고백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다면 창세기 1장에서 창조하시면서 이 창조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셨을까요? 창조의 결정체요, 핵심인 사람이 어떻게 될지를 모르겠을까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하신 사람, 하나님 닮은 사람이 어떻게 될지 모르고 창조하셨을까요?(창1:26, 5:1) 결혼을 해서 2세를 기다리는 부부에게 임신의 징후가 보입니다. 기다리던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에 부부뿐만 아니라 양가 가족, 친구, 이웃들까지 축하하고 기뻐합니다. 그런데 만약 임신한 여자가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는데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중병에 걸려 있고, 태어나면 죽을 것이라는 진단을 받는다면 그 아이 부모의 심정은 어떨까요?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창세기 1장에 와서 창조를 시작하십니다. 우리같이 부족한 부모도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죽는다는 진단결과 앞에서 차라리 임신하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아픔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물며 완벽한 아버지 하나님,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변함이 없으신 아버지 하나님 그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시면서 어떤 마음, 어떤 심정이셨을 것 같습니까? 자신의 형상을 따라, 자신의 모양을 한 사람이 장차 선악과를 따먹고 완전히 죽게 될 것을 다 아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의 심정이 어떠하셨을 것 같습니까? 빛을 창조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땅과 바다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채소와 과목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물고기와 생물들과 새들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땅의 짐승과 육축과 기는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정말 좋으셨을까요?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며 젖병 기저귀 속옷 겉옷 장난감을 장만하고, 모든 관심과 생각과 생활과 삶이 아이를 중심해서 달라지는데 정작 그 아이가 태어나면 죽는다고 합니다. 그 아이를 위하여 준비한 그 모든 것을 볼 때 그 부모는 좋겠습니까? 정말 하나님께서 좋으셔서 좋아하셨겠습니까? 25시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납니다. “웃어요, 더 크게 활짝 웃으라고요!”라고 하는 사진 기자의 요구에 이러지도 못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주인공 안소니 퀸의 일그러진 표정이 하나님의 얼굴과 오버랩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경은 잔인하게도 그 장면을 아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그냥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면 안 될까요? 하나님이 그 지은 모든 것들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시면 안 될까요? 보시니!!!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보셨을까요? 무엇을 보셨기에 심히 좋으셨을까요? 창세기 1장은 너무도 슬픈 하나님의 이야기, 너무도 아프신 하나님의 이야기, 어쩌면 인간의 역사가 끝날 때까지 너무도 슬프고 아프실 하나님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3-03-07
  • [이상규 교수] 왜 역사(교회사)를 공부해야 하는가?
    시작하면서 마틴 로이드 존스(1899-1981)는, “나는 성경 다음으로 교회사를 선택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목회자들의 교회사에 대한 무지를 통탄히 여겼고 설교자들에게 역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강조한 인물이었다. 그는 특히 부흥(Revival)과 청교도(Puritans)에 대한 깊은 식견을 가진 인물이었는데, 그가 쓴 The Puritans을 보면 교회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 특히 청교도 역사와 인물에 대한 깊은 식견을 볼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신앙과 교회의 삶은 역사의 사건에 기초하고 있다.” 마틴 로이드 존스와 같은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가 역사에 대한 지식이 교회적 삶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다는 점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는 항상 역사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를 숙고하였다. 그래서 “역사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를 마틴 로이드 존스 보다 더 잘 아는 이가 없었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제임스 패커, 존 스탓트 등도 설교자에게 있어서 교회사의 주요성을 강조한 인물이었다. 위대한 설교자 스펄전(C. H. Spurgeon, 1834-1892) 또한 교회사를 중시한 인물인데 그에게는 약 2만5천권의 장서가 있었는데 이중 6천권 정도는 청교도 관련 서적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교회사 특히 청교도에 대해 박식했다. 그는 설교자에게 있어서 역사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설교계의 양대 거목이라 불리는 19세기 영국의 찰스 스펄전과 20세기 마틴 로이드 존스가 이처럼 교회사를 중시했다는 사실은 설교자에게 있어서 교회사의 중요성을 대변해 준다. 이 글에서는 왜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가에 대해 답하면서 역사이해 혹은 인식과 관련된 주변의 몇 가지 사항에 대해 답해 보고자 한다. 이 글은 급하게 쓴 미완성의 글이라는 점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강의를 이끌어가기 위한 작은 안내일 뿐이다. 1.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歷史, ὶστορια)를 뜻하는 History나 Historia 라는 말은 그리스어(ὶστορια, ὶστορεω)에서 유래했는데 ‘연구,’ ‘탐구,’ ‘조사’ 혹은 ‘탐구하여 획득된 지식’, ‘연구하여 얻어진 지식’을 의미한다(갈1:18). 예컨대 헤로도투스(Herodotus, 484-425 BC)는 그의 『역사Histories』에서 인간이 이룩한 위대한 업적들이 소멸되어 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저자가 조사한 내용을 역사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역사’를 과거에 대한 지식이란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2세기부터였다. 로마의 역사가 폴리비우스(Polybios, 203-120 BC)는 그의 『역사Histories』에서 역사를 ‘과거에 대한 지식’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우리가 보통 역사라고 할 때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사건(events)으로서의 역사(Geschichte)와 기록(record)으로서의 역사(Historia)이다. 사건으로서의 역사는 우리의 인식과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지만,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수많은 역사의 창고에서 현재나 미래에 유용하다고 판단되는 것을 선택하여 기록한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 기록을 통해 과거를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역사를 ‘인간의 집단적 경험에 대한 기록’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그 역사를 기록한 역사가가 인식한 바에 의한 주관적 성격을 지닌다. 이를, 헤겔은 “역사란 말은 객관적 의미와 주관적 의미를 종합하고 있는데, ‘사건’(res gestae)을 의미하는 동시에 ‘사건의 기술’(historia rerum gestarum)을 의미한다.”고 했다. 시간 세계 안에 일어난 모든 사건는 절대적이며 객관적인 것이지만(사건으로서의 역사), 그것을 인식하고 기술하는 것(기록으로서의 역사)에는 주관적 측면을 배제할 수 없다. 역사가의 관점, 곧 세계관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한다’라고 말할 때 사실은 역사에 대한 기록을 공부한다는 의미가 있다. 정리하면, 역사란 고고학적 자료나 문헌자료, 혹은 현존하는 자료에 대하여 과학적 방법에 의해 수집된 조직적인 자료에 기초하되 사회적으로 중요한 인간의 과거에 대한 해석된 기록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2. 왜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가? ‘왜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가’라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이다. 인류가 이룬 그 풍성한 유산을 모른다는 것은 나 자신을 알지 못하는 것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지난 2천간 서양과 동양사회에엄청난 영향을 준 교회의 역사를 모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역사를 공부한 가장 큰 이유는 기원 혹은 연원에 대한 관심, 곧 호기심 때문이었다. 지난 과거를 알고 싶은 호고주의(好古主義)는 역사 공부의 출발점이었고 그 결과는 기쁨과 위안이었다. 이런 점에서 역사연구는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점은 사소한 것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에 몇 가지 실제적인 이유를 제시하고자 한다. 1) 인간 존재에 대한 확인 역사를 ‘인간의 집단적 기억’이라고 말하는데, 이 기억 곧 기록이 없다면 우리는 누구이며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으며 어떻게 존재해 왔는가를 알 수 없게 된다. 이는 마치 인류가 집단적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우리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결국 인간은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역사는 개인과 집단, 부분과 전체를 아우르는 인간 삶의 기원과 연원, 변화와 발전, 흥망성쇠를 통해 개인, 민족, 국가, 사회제도, 문화, 종교를 알게 하고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준다. 곧 역사는 시간, 장소, 사회발전과 각종 제도들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인식하게 함으로서 정체성을 확인시켜 준다. 그래서 얼 케언즈(Earle E. Cairns)는 교회사란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도구’라고 불렀다. 역사 연구는, 오늘 우리가 누리는 앞선 세대가 물려준 위대한 유산들을 알게 해 준다. 그래서 오늘 우리로 하여금 앞선 시대에 대하여 감사하게 하고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어 준다. 우리가 파지 않는 우물물를 마시며, 심지 않는 포도원의 열매를 먹으며, 건축하지 않는 도시에 살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되기(신6:10-11)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역사발전은 우리보다 앞선 세대의 희생과 수고, 헌신의 결과임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2)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 구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역사 즉 5대제국(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기에 역사를 안다는 것은 구약을 이해하는데 절대적인 도움을 준다. 신약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심문받으실 때,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인정하고(요18:38, 19:4, 6) 그를 석방하려 했다. 그런데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忠臣)이 아니니이다”(요 19:12)라는 말을 듣고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내어준다. 그런데 여기서 ‘가이사의 충신’은 바른 번역이 아니다. 바르게 번역하면 ‘가이사의 친구(φίλος τοῦ Καίσαρος)’로 번역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 ‘친구’를 ‘충신’으로 의역했을까? 한글성경 번역자들이 역사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문대로 ‘친구’라고 번역하지 않고 ‘충신’이라는 말로 의역한 것이다. 여기서 친구라는 단어는 보통명사가 아니라 당시의 직위 혹은 자격을 말하는 고유명사였다. 당시 로마 황제는 지극히 신임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친구’라는 칭호를 수여했는데 이 칭호를 받은 자는 사전 내락 없이 황궁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자격을 지닌다. 빌라도는 당시 황제였던 티베리우스(재임기간 14-37년)로부터 ‘친구’라는 칭호를 수여 받았는데, 군중으로부터 “예수를 석방하면 그 친구라는 칭호를 잃게 된다”는 말을 듣고 무죄한 자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준 것이다. 정리하면, 성경 번역자들이 로마제국의 역사를 몰랐기 때문에 성경을 의역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역사를 아는 것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3) 역사로부터의 교훈 역사 연구의 필요성에 대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대역사가들은 역사는 개인과 집단에게 교훈을 준다고 가르쳤다. 동양문화권에서도 역사를 거울(鑑)이라고 보았다. 중국에는 자치통감(資治通鑑), 우리나라에는 동국통감(東國通鑑)이 있는데, 이 역시 역사를 거울이라고 본 것이다. 명심보감(明心寶鑑)은 역사로부터 도출된 예문을 통해 교훈과 훈계를 주기 위해 편집된 책인데, 역사를 거울로 본 것이다. 성경도 역사의 교훈을 말하고 있는데,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구약의 출애굽 사건들)이 거울이 되어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다”(고전10:11)고 말하고 있다. 역사는 거울처럼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교훈과 훈계를 주기 때문에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다. 바울도 로마서에서, 역사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for our learning) 기록했다(롬15:4)고 말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키케로는, “당신이 출생하기 전의 일에 대하여 무지하다면 어린아이로 사는 것과 같다”(Nescire autem quid ante quam natus sis acciderit, id est semper esse puerum)고 했다. 스페인의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 또한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자들은 그것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Those who cannot remember the past are doomed to repeat it)”고 했다. 이런 점에서 역사는 ‘사례(examples)를 가지고 가르치는 설교’라고 할 수 있다. 구약의 역사서, 특히 사무엘서, 열왕기서, 역대기서는 이스라엘 왕조시대 역사인데, 여기에 여러 왕들의 영욕의 자취가 기록되어 있고 오욕의 역사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런 역사적 사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교훈하고 있다. 역사는 삶을 위한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랄프 윈터(Ralph Winter)는 “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책 제1권이고, (교회)역사는 하나님의 책 제2권이다”라고 말한바 있다. 역사는 ‘과거의 산물인 동시에 미래의 씨앗이다.’ 그래서 역사는 교훈을 주기도 하지만 미래를 어느 정도 예측하게 해 준다. 우리가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할 때 이 말에는 역사는 어느 정도 반복한다는 점을 전재로 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역사는 반복하는 가? 이 점에 대해서는 차항에서 검토하고자 한다. 4) 거시적(巨視的) 혹은 통시적(通時的) 안목 역사공부는 역사적 안목, 곧 거시적 혹은 통시적 안목을 갖게 해 준다. 역사에 무지하면 어린아이로 살뿐 아니라 역사를 조망해 보는 안목을 가질 수 없다. 이는 마치 우물 안의 개구리(井中之蛙)처럼 밖의 세계를 볼 수 없다. 그러나 역사 연구는 우물 밖의 세계를 보게 해 준다. 즉 타자의 인식을 주관화함으로서 역사를 거시적 안목으로 보게 해 준다. 1989년 시한부종말론이 유행했을 때 역사에 무지하면 당시 풍미하던 거짓 종말론이 한국교회의 특이한 현상이라고 여기지만, 이런 류의 시한부 종말론은 초대교회시대, 중세시대, 16세기 종교개혁시대, 그리고 19세기 미국에서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것의 한계와 기만성을 깨닫게 된다. 윌리엄 밀러(William Miller)의 그리스도 재림론(1843)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시한부종말론이 가져오는 사회병리적 현상에 놀라지 않게 된다. 말하자면 역사에 대한 이해는 과거와 현재를 조망해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게 하고, 역사를 원근법적으로 파악하게 도와준다. 그래서 영국의 교회사학자인 제프리 빙햄(Jeffrey Bingham)은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역사가여야 한다. 과거로부터 자양분을 얻는다면 더 높은 곳에 앉아 더 멀리까지, 그리고 더 넓은 전경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결국 역사는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 준다. 5) 역사연구와 오늘의 현실 역사연구는 우리 우리의 현실을, 그리고 우리의 실제 모습을 깨닫게 해 준다. 특히 교회사 연구는 오늘의 교회가 본래적 교회로부터 얼마나 부합하는지 혹은 이탈했는지를 깨닫게 해 준다. 그래서 루터를 비롯한 개혁자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복음주의 신앙을 첫째는 성경에 호소하여 그 정당성을 주창했고, 둘째는 역사에 기대어 당시 교회가 얼마나 본래적 교회, 본래적 신앙에서 이탈했는가를 제시하고 자 했던 것이다. 역사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척도였다. 우리는 역사연구를 통해 4세기 이후 교회가 본래적 교회로부터 이탈하여 속화의 길을 가게 되었고, 6세기 이후 교리적 변질을, 9세기 이후 성직매매가, 그리고 11세기 면벌부가 소개되었고, 14세기 이후 교회가 타락하여 성직자들이 윤리적 타락이 심각했음을 알게 된다. “성직자의 삶은 평신도의 복음이다”(Vita clerici est evangelium laice)는 경구가 나온 배경을 알게 해 준다. 교회사는 교회의 본질과 사명 혹은 특성을 이해하는데 가장 적합한 수단이 된다. 역사, 역사적 연구는 교회의 본질과 사명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진정한 교회상을 제시해 준다. 또 역사를 통해 우리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役事)와 섭리를 헤아릴 수 있다. 6) 설교자, 역사(교회사)의 유용성 그렇다면 역사에 대한 지식은 설교자에게 어떤 유용성을 지니는가? 두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로, 역사는 설교자들에게 유용한 예화(사례)를 제공한다. 지난 2천여 년 간의 교회사에는 본받거나 경계해야 할 많은 사례가 있는데, 그것이 오늘 삶에 유용한 가르침을 준다. 이보다 더 좋은 사례집이 있을까? 역사에 대한 지식은 설교자에게 유용한 예화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이를 ‘역사의 예화적 기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역사에 대한 지식은 설교자들을 풍요롭게 해 준다. 둘째, 역사(교회사)는 성경의 가르침을 확증해 준다. 예를 들면, 성경은 인간은 타락했고 전적으로 타락했다(롬3:10, 20, 1:18-3:18)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진실로 인간은 타락했고,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역사는 성경의 가르침이 옳다는 것을 확증하는 기능을 한다. 이런 점에서 역사는 사례를 가지고 가르치는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역사는 누구에게나 소중한 자료가 되지만 특히 설교자들에게는 성경의 가르침을 확인해 주는 기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3. 역사는 반복하는가? 우리가 주변에서 늘 듣는 말이 ‘역사는 반복한다’는 말이다. 전도사 기자도 “해 아래 새것이 없다”(전1:9)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역사는 실제로 반복하는가? 고대 그리스인들이나 로마인들도 그렇게 믿었다. ‘명상록’을 썼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는, 우리가 과거에 일어난 일과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기 위해서는 오직 40년만이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역사는 40년을 주기로 반복한다는 의미였다. 그런가 하면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 에밀리아누스(Scipio Aemilianus)는 힘겹게 카르타고를 점령하고 나서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역사는 반복하기 때문에 지금은 로마가 정복했지만, 언젠가 로마가 동일한 방법으로 정복당하게 될 것을 예견하고 통곡한 것이다. 역사의 반복을 믿었던 것이다. 실제로 역사는 반복할까? 만일 반복이 없다면 역사를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역사 연구는 결국 교훈을 얻기 위한 것인데 과거의 일이 다시 반복하지 않는다면 구태여 지난 역사를 공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은 역사는 어느 정도 반복한다는 점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영국의 존 버리(John B. Bury) 같은 역사가는 역사는 반복한다고 믿었기에 역사에서 법칙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역사는 과학,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History is a science, no less and no more)’라고 말한 바가 있다. 자연과학의 법칙이란 반복된 사실에서 얻는 정리(定理)인데, 그는 역사도 자연과학처럼 동일한 사건이 반복된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역사는 반복하는 것일까? 정확하게 말하면, 역사는 어느 정도 반복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동일한 사건의 재현은 없습니다. 예컨대 칸트와 견해가 똑같은 철학자가 후대에 나올 수 있어도 그 동일한 칸트가 다시 태어날 수는 없다. 이렇게 볼 때 역사는 반복한다고 할 수 없고, 이런 점에서 역사는 개별성과 특수성을 지닌다. 그렇지만 역사는 동일한 사건이 수없이 많이 발생한다. 그래서 역사는 반복하는 것처럼 보일 따름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는 반복하지 않고 반복되는 것처럼 보일 따름이다. 왜 그럴까? 인간의 본성(human nature)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동일한 본성을 가진 인간에 의해서는 시대와 상황은 달라도 유사한 사건이 반복적으로 발생한다. 로마 시대에도 권력을 가진 자는 그 권력을 유지하고 싶어 했고, 권력을 잃은 자는 그 권력을 되찾고 싶어 했다. 이런 권력에의 욕망은 고대에도 있었고, 16세기에도 있었고 우리 시대에도 동일하다. 고대 로마만이 아니라 아시아나 유럽 사회에서도 동일한 현상이었다. 이런 인간의 동일한 본성 때문에 유사한 사건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결국 역사는 인간의 본성이 어떠한가를 보여 준다. 비록 동일한 사건의 재현(再現)은 아니지만 유사한 사건이 거듭 반복되기 때문에 역사는 교훈을 주고, 역사를 공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또 유사한 사건이 반복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법칙성을 발견할 수 있고, 그래서 (어느 정도) 사회과학적 예측이 가능한 것이다. 4. 하나님은 역사에 개입하시는가? 하나님(神)은 인간 역사에 개입하시는가? 이 점에 대해서는 3가지 견해가 있는데, 실증주의(Leopord von Ranke, Karl Marx), 관념론(I. Kant, Johann Gottlieb Fichte) 그리고 기독교적 이해가 있는데, 기독교회는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 곧 하나님의 섭리 혹은 경륜을 말한다. 그것은 인간역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역사(役事)에 대한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말 하나님은 인간 역사에 개입하시고 간섭하시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악이 존재하며, 의로운 사람이 고통당하고, 불의와 부정의가 활개치고, 참학과 광포가 줄을 잇고, 무죄한 자가 칼날에 쓰러지고, 의로운 외침이 곡절되고, 공의를 외치는 이들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가? 이런 의문은 오랜 역사가 있다. 기원전 12세기경에 살았던 욥은 ‘왜 의인이 고통당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했고, 덕천막부(德川幕府) 치하 일본의 천주교도들도 동일한 질문을 했다. 나치 하에서 유대인들의 의문도 동일했다. 만일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하나님은 이 살육의 현장에서 침묵하시는가? 아우슈비츠에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한 엘리 비젤(E. Wiesel)은 그의 책 <밤, Night>에서 이렇게 물었다.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우리라고 이런 의문이 없을 수 없다. 실제로 인간의 역사에는 우리가 답할 수 없는 문제가 수없이 많다. 루터는, 이런 일들을 우리는 다 알 수 없지만 여기에는 하나님의 숨은 뜻이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인간 역사에 개입하시고 간섭하시고 다스리신다고 말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일이 저절로 되거나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役事)라는 믿음을 섭리라고 말한다. 영국의 이신론(deism)은 하나님의 창조는 인정하되 창조된 이후에는 만물이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창조한 세계에 오셔서 간섭하시고 다스리시고 통치하신다고 가르친다(창45:5-8, 50:15-21). 하나님은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셨고(대하36:22, 스1:1), 포로된 자기 백성을 귀환하게 하셨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마10:29)고 말한다. 볼테르(Voltaire, 1694~1778)는 ‘역사는 인간의 그림자’라고 하여 인간이 역사의 주체라고 부장했으나, 성경은 하나님이 역사의 주체이며 지금도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계신다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특정한 사건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증명할 수 있을까?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1588년 7월 스페인의 무적함대라고 불리던 아르마다 함대(Armada)가 영국을 침공했다. 교황청과 관계를 단절한 영국을 다시 천주교로 복귀시키려는 의도였다. 아르마다 함대는 130척의 배와 8,000명의 해군, 19,000명의 보병으로 구성된 대군이었는데, 도버해협에 도착한 날은 7월 27일이었다. 영국은 속수무책이었는데, 오직 한 가지 희미한 가능성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실한 영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을 걸고 기도했을 때 청명하던 하늘에 먹구름이 일기 시작했고, 바다에 폭풍이 몰아쳤다. 예기치 못한 기상 이변에 당황한 아르마다함대는 결국 패전하고 오직 30여 척만이 도버해협을 넘어 도망갔다. 이 사건을 역사가들은 ‘개신교의 바람(the wind of Protestantism)’이라고 부른다. 무적함대라고 불리던 아르마다 함대가 패배한 것은 커다란 이변이었고, 이 사건 이후 영국이 해상권을 장악하고 거대한 제국으로 발전해 갔다. 그래서 아르마다 함대를 물리친 것은 하나님이 섭리하신 특별한 사건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을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증명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건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었다고 증명할 수 있을까? 이 역시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신념 체계, 곧 성경에 근거한 믿음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실증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믿음으로,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고 믿는 것이다. 마르크시스트들은 신(神)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 간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사건은 역사 내적인 원인과 결과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역사 외적인 개입이나 간섭은 인정하지 않는다. 실증주의도 이와 다르지 않다. 실증주의는 역사의 동인(cause)이나 과정을 현상세계 안에서, 곧 역사 내적인 인과론에서 찾기 때문에 하나님의 간섭이나 통치 혹은 섭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이들은 역사의 궁극적인 의미를 묻는 질문은 역사가의 영역 밖의 문제라고 말한다. 랑케(Leopold von Ranke)와 같은 실증주의 전통을 따르는 이른바 ‘과학적 역사가들(scientific historians)’은 기독교 신앙과 역사는 관련성이 없다고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 간섭을 인정하지 않는다. 5. 기독교는 역사를 어떻게 보는가?: 역사관의 문제 고대 그리스인(희랍인)들은 역사는 끝도 시작도 없는 무한한 반복으로 보았고, 그 역사 과정은 맹목적인 순환으로 보았다. 이를 회귀론 혹은 순환사관(循環史觀)이라고 말한다. 농경 문화권 속에서 계절의 순환을 보고 살았던 저들은 역사를 맹목적인 순환의 과정으로 이해했다. 즉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는 반복된 자연의 순환에서 역사의 순환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은 그리스인들은 역사를 본 것이 아니라 자연을 보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스인들은 역사를 맹목적인 순환의 과정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역사에서 새로운 것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래서 역사는 지향하는 목표도 없고 발전이라는 개념도 없다. 결국 역사과정은 운명론적인 영원한 회귀(回歸)일 뿐이다. 그래서 그리스 철학의 근저에는 운명론(μοῖρα)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이 그리스적인 회귀론을 극복했다. 그리스인들과는 달리 유목민이었던 히브리인들은 새로운 목초지를 따라 이동해 가면서 직선적 역사관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은 그리스인들과는 달리 역사의 분명한 시작과 역사의 목표를 상정했다. 즉 역사란 하나님의 창조와 더불어 시작되었고, 하나님이 정하신 종말로 나아가는 과정, 곧 역사란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전개되는 과정으로 이해했다. 역사는 하나님이 정하신 목표를 향하는 과정이었다. 그 역사는 모든 인류를 포용하는 일원론적이었다. 히브리인들은 역사의 무한한 회귀만을 믿었던 운명론적 역사이해와는 달리, 역사는 분명한 목표를 향한 선적인 과정, 곧 직선적 역사관을 가지게 된 것이다. 히브리인들은 자연은 신비로운 자존실체(自存實體)가 아님을 알게 되어 자연 중심 사상을 탈피할 수 있었고, 역사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았기에 자연을 비신격화 할 수 있었다. 자연은 신비로운 정영(精靈)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無)에서 창조하신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었고, 역사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하게 된 것이다. 정리하면, 역사는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역사 과정은 의미 없는 반복이 아니라 유의미한 진보이며, 분명한 종말을 향해 가는 목적 있는 과정이라고 본 것이다. 이것이 히브리적 역사이해였다. 이런 히브리적 역사관을 계승한 것이 기독교 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의 역사이해는 근본적으로 다음의 3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역사는 하나님의 창조, 인간의 타락,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계획이 펼쳐지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이와 같은 역사에 대한 관점을 구원사관 혹은 구속사관이라고 한다. 둘째, 모든 역사 과정은 맹목적이거나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개입하시고 간섭하시고 섭리하신다는 점이다. 이를 섭리사관(攝理史觀)이라고 말한다. 말씀을 통해서 무에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피조된 세계를 지탱하시며, 모든 것과 동행하시며, 모든 것이 그가 정한 목적을 향해 발전하도록 섭리하신다. 셋째, 역사는 분명한 시작과 함께 분명한 목표, 곧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한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사관을 목적론적 사관이라고 한다. 역사는 맹목적인 반복이 아니라 하나님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과정이며, 역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목표를 행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라는 점을 확신하고 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피조된 세계를 다스리시고 유지하신다. 지구궤도를 돌고 있는 수많은 별들과 자연계의 미미한 현상들, 그리고 복잡한 인간의 삶이 다 그의 다스림 아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이 세상에 왜 그토록 심각한 악이 활개 치며, 공의가 무너지고 의로운 자가 핍박당하는가? 이 모든 문제는 범죄한 인간의 악함 때문이다. 인간의 죄와 그로 인한 욕망, 곧 악함이 자연을 파괴하고 불의를 행하고 인간 생명을 살상하고 있다. 우리의 현실을 보면 마치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마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는 ‘하나님의 일식(日蝕) 현상’이라고 불렀다. 하나님이 역사를 다스리시고 통치하시지만 마치 달이 해를 가려 해가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루터는 ‘인간사의 불의가 하나님의 역사 간섭을 부인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고 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현실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여기에는 하나님의 숨은 뜻이 있다’고 보았고, 그 숨은 뜻을 ‘하나님의 마스크’라고 불렀다. 부정하고 싶은 것이 사실이지만, 일제의 식민 지배나 8‧15 광복, 그리고 6‧25 동란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 뜻이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은 각기 다를 수 있지만 숨은 뜻이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사실 우리에게는 역사를 긴 안목으로 헤아리는 안목이 없다. 눈앞의 현실만 인식할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를 통시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 우리의 단견으로는 하나님의 침묵을 읽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긴 안목으로 역사를 굽어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으나 먼 훗날 하나님의 인내와 침묵, 인간의 악행을 허용하신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낙담하고 절망하기도 한다. 우리의 시각으로 볼 때 우리의 현실은 절망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불의와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침묵이 너무 긴 길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때’에 대한 우리의 개념일 뿐이다. 지금 우리는 헤아리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역사를 당신의 거룩한 뜻 안에서 이루어 가실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는 역사를 원근법으로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우리의 날들은 오직 주의 선하신 손안에 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My times are in thy hands, 시31:15)”라고 고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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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07
  • [박동철 장로] 대한민국 인구위기, 출생대책 교회가 앞장서야하는 이유
    인구위기가 닥쳐오고 있다. 전 세계 각 나라별 인구대책이 다르다. 대한민국의 인구 위기는 눈앞에 닥쳤다. 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출생아 수를 합계출산율이라 한다. 2022년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0.78명으로 세계 최저 수준으로 밝혀졌다. 보통 서구 여러 나라 인구대책을 잘 세우고 실행한 나라들의 합계출산율 1.3(핀란드) 1.6(미국) 1.3(일본)에 비하면 정말 위기를 실감 할 수 있다. 깜짝 놀라울 일은 그동안 인구 저출산 대책으로 쏟아부은 정부 재정이 200조 원을 넘었다는 사실이다. 정부가 정책으로 해결할 수 없음이 드러났다. 이렇게 시간이 가면 2050년이 되면 대한민국 인구가 거의 소멸된다는 끔찍한 예측이 나오고 있다. 세상이 세태에 따라 급변하는 모습이 의아하지만 만군의 하나님의 섭리를 어찌 알겠는가. 불과 30여 년 전만해도 정부의 인구정책은 저출산을 위해 힘을 쏟았다. 한 가정 2명의 자녀를 권장했다. ‘둘도 많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 ‘셋 낳으면 삼천만의 나라가 망한다.’ 등의 구호가 유행했다. 필자의 30대 예비군 훈련 시 정관 시술의 특혜를 주는 문화가 유행했다. 사람은 한 시대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음을 고백해야 한다. 이것이 인구 절벽 앞에 선 우리의 고백이어야 할 것 같다. 인구대책에는 세상의 학자들의 고견도 들어볼 필요가 있다. 한 나라가 선진국으로 가는 길에 인구의 감소 정책이 필요하다는 고전 인구경제학자들의 역설적 주장이 한때 대세를 이뤘다. 미국 록펠러대 조엘 코헨교수는 한나라의 안정적인 인구유지의 출산율을 2.1로 봤다. 적정하게 인구 증가 속도가 느려지면 1인당 GDP가 오른다. 그리고 유한한 상태에서 경쟁자가 줄고 선진국에 진입하게 된다는 이론이다. 극히 상식적인 이 이론이 오늘날 유럽 선진국에 적용되어 국가 정책에 반영되었다. 그리고 선진국이 되었다. 문제는 선진국의 나라 형편이 잘 살게 될 때 ‘아이를 낳지 않는 문화의 급속한 변화’가 큰 문제를 낳는다. 오늘날 대한민국 앞에 놓인 형편이다. 소위 대한민국이 겪는 물질의 축복 속에 진통하는 저출산 문제이다. 복음의 바탕위에 세워진 대한민국, 급속 압축 성장에 성공한 경제대국이 되었지만 가정 가정에 아이를 안 낳는 문화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경제발전과 생육번성의 균형 잡힌 풍조가 깨져버렸다. 이것이 대한민국 인구위기 저출생 대책에 한국 교회가 앞장서야 하는 이유다. 기독교 선교방송 CTS가 앞장서 저출생대책국민운동본부를 조직하여 대한민국 교회가 앞장설 것을 외치고 있다. 필자는 경남지역 저출생대책본부 위원으로 위촉받아 참여하고 있다. 아직 출범 단계이고 많은 실행 계획을 수립 중에 있다. 몇 번 세미나 등에 참여해 보니 한국 기독교 교회가 나서지 않으면 국가차원의 출생대책은 제자리걸음에서 머물 수 밖에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문화의 사회 지배 힘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한 명령을 받았다. 창세기 문화 명령, 생육하고 번성하여 이 땅을 정복 하라는 위대한 말씀 앞에 경건히 서야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없는 갈라파고스는 너무 끔찍한 일이다. 저출생경남본부는 지난해 경남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을 역임한 순복음진주초대교회 이경은 목사께서 본부장을 맡아 열정을 내고 있다. 본부장을 맡은 이 목사는 지난 세미나 때 기억나는 멘트를 남겼다. 교회가 한국 인구위기 출생대책에 앞장서야하는 이유는 교회는 생육하고 번성하되 사람 같은 사람을 양육하는 교육의 요람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기억에 남기는 멘트였다. CTS의 저출생대책본부 조직과 경남지역본부에서의 열정의 활동이 대한민국을 살리는 모델이 되었으면 하는 강한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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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3-02-28
  • [양대식 목사] 단정해야 한다
    리더는 품위가 단정해야 합니다. 단정하다는 것은 외모, 행동에 관계된 말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기에 외모도 단정해야 합니다. 탈무드의 인간관계 원리에서 외모를 잘 관리해야 한다고 가르쳐 줍니다. 구두도 닦고 옷도 단정하게 입어야 합니다. 사치스러운 옷은 입지 않아야 하나 깨끗하고 사람들에게 보기 좋은 옷을 입어야 합니다. 머리도 잘 다듬고 화장도 해야 합니다. 여성 리더인 경우 화장품을 사서 화장도 해야 합니다. 예의가 있어야 하며 매너가 있어야 합니다. 운동도 해서 건강관리도 하고 걷는 것도 잘 걸어야 합니다. 질서도 지켜야 합니다. 단장을 잘 해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아야 좋은 이미지를 주는 리더가 됩니다. 타고 다니는 자동차도 세차해야 합니다. 집안 청소, 서류 관리 등 모든 면에서 단정해야 합니다. 넥타이를 잘 매야 하며 옷도 세탁해서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외모를 단정하게 해야 무시당하지 않게 됩니다. 행동 하나하나에 상대방이 불쾌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치약으로 양치질을 해야 하며, 껌을 아무데서나 아무렇게 씹지 않아야 합니다. 난폭운전을 삼가야 하고 술을 가까이 하지 않아야 합니다. 무례한 행동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지나치게 상대방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리더는 단정한 자입니다. 단정히 하는 것은 이미지 관리, 외모 관리입니다. 인간은 가꾸면 아름다워 보입니다. 신중해야한다 리더는 무슨 일을 하든지 신중해야 합니다.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에 옮겨야 합니다. 지나치게 신중하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리더는 무엇보다 신중해야 합니다. 리더가 신중하지 못하면 실수하게 됩니다. 실수가 많으면 신뢰를 얻지 못합니다. 기도하고, 깊이 생각하고, 무슨 결정을 해야 합니다. 리더는 신중해야 합니다. 쉽게 생각하고 성급하게 결정하고 행동할 때 실수하게 되고 문제가 일어나게 됩니다. 리더가 어떤 일을 누군가에게 시켰으면 신중하게 검토, 확인, 점검해야 합니다. 상대방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점검하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리더는 중요 서류를 신중히 살피고 중요자료를 자료철에 보관해야 합니다. 꼼꼼하게 점검하지 않으면 사람들 이 실수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약속을 하면 약속 날짜를 달력에 적어 놓고 신중하게 살펴야 합니다. 리더가 신중하지 못하면 모든 면에서 문제가 일어나게 됩니다. 신중하게 일하는 리더가 지혜로운 리더입니다. 신중하지 않고 생각 없이, 계획 없이 말하고 행동하다가 실수하게 됩니다. 무엇이든지 쉽게 쉽게 하는 것은 좋은 리더의 모습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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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문/책
    2023-02-28
  • [황권철 목사] 유다 다대오(Jude Thaddaeus'Behind Stories)-동역의 사도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요14:22). 성경에 유다란 이름을 가진 자가 많으나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은 세 명이었다.  첫째, 예수의 동생 유다이다. “이는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마13:55). 그는 초기에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았다. 예수님과 한 형제이지만, 같은 배에서 나왔으나 씨가 다른 형제였다. 그가 어린 시절에는 형 예수에 대해 잘 몰랐다. 그래서 예수님이 공생애를 위해 집을 나갔을 때 많은 박해를 했다. 그러다가 부활하신 후에 형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믿었고 비록 사도는 아니었지만 명분상 사도적 반열에 참여하여 예수가 메시야라는 언약의 복음 유다서를 기록했다.  둘째, 예수를 판 가룟 유다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유다의 이름 앞에 꼭 붙이는 한 단어가 있는데 예수를 판 자 라는 말이다.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마10:4),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막3:19),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눅6:16). 요한은 가룟인 아닌 유다가 라고 하였다(요14:22). 가룟 유다는 이 땅에서 가장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남긴 불행한 자였다.  마지막 셋째, 본문에 나오는 다대오 유다이다. 마태와 마가는 다대오라고 불렀다. 요한은 왜 유다를 가룟이 아닌 유다라고 불렀을까? 신약성경이 쓰여 질 때 예수를 판 가룟 유다 때문에 유다란 치욕스러운 이름이 되어 버렸다. 그 이전 구약에서 유다 이름의 뜻은 찬송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자들이 유다라는 이름으로 불러지기를 좋아했다. 예수님도 유다의 가문을 통해서 오셨다. 그러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이후로 유다란 이름은 치욕스러운 이름이 되어 버렸다. 그 이후로 아무도 유다란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당시 그 이름을 가진 자들도 가룟 유다와 구별하여 불렀다. 다대오 유다는 시몬과 함께 열심당원이었다.   주님의 고민에 동참한 다대오    주님의 구원사역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그러나 제자들도 주님의 죽으심을 잘 모르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그의 괴로운 심정의 비밀을 토로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요13:21). 이제 주님이 마지막 십자가 지실 사실을 말씀하셨다. 이것이 너무도 가슴 아픈 심령의 괴로움이었다. 물론 십자가 지는 육체적인 고통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이지만 그보다 더 큰 아픔과 괴로움은 이 사실을 곁에 있는 제자들에게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일은 외부에서 일어날 일이 아니고 조직 내에서 반역자가 생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개적으로 떠벌려 말하기도 곤란하여 지금까지 미루어 왔던 것이다.  이젠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 이 사실을 말씀하셨다. 할 수 없이 조직 내에 반란자가 있음을 애기했다.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 이는 제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삼년 동안 훈련하여 준비해 왔는데 그것도 외부에서가 아닌 조직 내에서 반동분자가 일어났다는 사실은 앞으로 조직의 붕괴마저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떠나가는 것도 문제이지만 자신이 떠난 이후 제자들이 서로 분쟁하여 붕괴될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이 더욱 가슴 아픈 일이었다. 이것은 제자들 상호간에 불신을 조장하는 공동체의 마비현상이 생길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요13:22). 당장에 이 같은 징조가 나타나고 있다.  그때 성미 급한 베드로가 단호하게 말했다.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요13:24). 그는 분노하여 누가 감히 그런 일을 꾸미느냐 하고 분개했다. 그때 가룟 유다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내가 떡 한 조작을 적셔서 주는 자가 그니라”고 하시면서 가룟 유다에게 주셨다. 유다는 그때가 회개 할 절호의 기회였으나 오히려 괴심한 생각을 품어 주님을 팔 생각을 했다. 그때 사단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곳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요13:27). 유다는 그 조각을 받고 나간 그날이 영원한 밤이었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요13:30). 다대오 유다는 이 같은 주님의 아픈 마음을 다 헤아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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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
    2023-02-28
  • [조희완 목사] 소싯적 예수 (눅2:41-51)
    과수재배 과정을 보면 크게 3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파종을 해서 묘목을 기르는 묘목기와 꽃이 피는 개화기와 열매를 맺는 결실기로 구분이 됩니다. 이 과정을 인생으로 비유하면 어린 시절을 묘목기라고 할 수 있고 청년기를 개화기라고 할 수 있고 장년기를 결실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정을 거치면서 과일이 익어가듯이 과정을 거치면서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어린 청소년기는 인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시기입니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을 어떤 환경에서 어떤 영향을 받고 자라느냐에 따라서 울고 웃는 인생으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말 속담에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듯이 어릴 때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이 그 사람의 전체 인생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말이 있듯이 자녀들이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란다면 좋은 환경을 접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자녀 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은 자녀가 어릴 때 가정과 회당을 중심으로 율법을 가르치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합니다. 절대로 어린 자녀를 세상경쟁 구도 속으로 내몰리지 않고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게 해주고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토라(율법) 교육을 시킵니다. 그렇게 교육을 받고 자란 탓에 두각을 나타내고 가장 많은 노벨상 수상자들이 탄생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은 과연 어떠했을까? 성경에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관한 기록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짧은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충분히 알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배를 중요시 하는 삶을 사셨습니다.(41,42) 둘째는, 성전을 중요시 하는 삶을 사셨습니다.(48,49) 셋째는, 효도를 중요시 하는 사람을 사셨습니다.(50-51) 그렇게 성장을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더욱 사랑을 받으셨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예수님의 삶을 닮은 아이들로 자라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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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28
  • [김성수 총장] 기독교적 지성과 세속화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사고해야 하는가?』(The Christian Mind: How Should a Christian Think?)라는 저서를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헤리 블레마이어(Harry Blamires)는 영국의 지적 풍토를 염두에 두면서 “이제 기독교적 정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탄식했다. 그는 정신(또는 지성, mind)이라는 용어를 “집단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관념과 태도의 경향”이라는 의미로 규정하면서, 세속적인 정신의 영향력과는 달리 기독교적 정신은 사회적, 정치적, 혹은 문화적 생활에 대하여 밀접하고도 현저한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오히려 세속적 정신에 굴복하거나 고갈되어 버렸다고 지적하고 있다. 기독교적 정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블레마이어의 지적은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삶을 살지 않는다거나 경건적인 삶의 실천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직도 기독교적 윤리와 기독교적인 영성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블레마이어도 인정하고 있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도덕적인 존재로서 비그리스도인과는 다른 법전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교회의 일원으로서 비그리스도인이 무시하는 책임과 의무들을 잘 감당하고 있으며, 영적인 존재로서 기도와 명상을 통해 비기독교인이 탐구하지 않은 삶의 차원을 계발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사유하는 존재로서 삶에 대한 종교적 견해 즉, 모든 지상적 사건들을 종교적 맥락에서 해석하며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인 인간의 제 문제들을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생각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엄격하게 개인적인 행위만을 주로 다루는 매우 협소한 사고의 영역 이외에는 세속적 정신에 의하여 구성된 준거틀(frame of reference)과 세속적 가치 평가를 반영하는 판단의 틀을 수용하여 정신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앙은 기껏해야 개인적 수준에서 영성과 도덕적 지침을 전달하는 도구 정도로 남아 있고, 공공의 수준에서는 감상에 빠진 연대 의식의 표현에 불과할 정도로 기독교 신앙의 지적 관련성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블레마이어는 기독교적 정신 또는 지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독교적 지성의 결여 문제는 본질상 기독교 신앙의 세속화(secularization)와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세속화란 사회와 문화에 인접한 영역들이 사회와 문화의 중심부로부터 점차로 그 외곽을 향해 종교로부터 나온 개념이나 제도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세속화란 현대 사회의 중심 영역, 즉 과학이나 산업기술이나 정부조직 등과 같은 영역에서 종교가 미칠 수 있는 사회적 문화적 중요성을 희석시켜서 종교로부터 나온 개념이 삶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약화시키고 종교에 의해 형성된 제도들이 미치는 영향을 점점 작아지게 만드는 과정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 한국사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점에서 세속화되어 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로 만나는 것은 예배하는 존재와 도덕적 존재로서 이지, 생각하는 존재로서가 아니다. 주님의 날인 주일을 주님의 집에서 보내는 것은 옳은 일이다. 또한 우리는 거짓말을 하거나 이웃을 비방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동의한다. 그러나 우리는 논쟁의 대상이 되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문제에 대하여 사고하는 그리스도인을 만나기는 무척 어렵다. 우리는 개인적인 도덕과 영성 이외의 문제에 대해서는 기독교적인 사유를 중지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적 정치적인 영역과 활동 속으로 발을 들여 놓을 때에는 우리의 기독교적 신앙이라는 옷을 벗어 던지는 습관에 젖어 왔다. 그 주제가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잘 훈련되어지고 잘 기초가 다져져 있는 우리의 기독교적인 개념들은 뒤로 두고 세속주의의 어휘들을 채택해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린다. 그런 후에 우리는 돌아가서 정치가와 정치를 이야기하고 사회 활동가들과 사회 복지를 이야기하고 노조원들과는 노동 관계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우리 머릿속에서 기독교적인 어휘와기독교적인 개념들을 비워버렸으며, 한 술 더 떠서 그 결과 우리가 그들과 완전히 접촉하게 되었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정신적으로는 세속주의에 발을 깊숙하게 들여 놓고 있다. 우리는 세속적인 일들에 대해서는 세속적으로 생각하도록 우리 자신을 훈련시켰고, 심지어 단속하기까지 하였으며 또한 아이러니 중의 아이러니인 것은 이런 일들을 양보하며 다른 사람들의 정신적 상황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기독교적인 것 이상의 어떤 것이 있었다고 우리 스스로를 애써 설득시키고자 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조우하는 제반 문제들에 대해서 기독교적으로 사고하는 기독교적 지성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기독교적 지성을 개발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노력하지 않으면 기독교적 지성은 시들고 죽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지적관련성을 갖도록 만드는 일에 소홀히 하게 되면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단지 설교와 만 관계되는 것이고, 그런 종류의 단어는 교회의 거룩한 강단에서나 하는 것이 예의라는 요청을 더 공격적으로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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