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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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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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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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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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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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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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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박봉석 목사] 이판사판?
    현대인들은 하던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고 생각되었을 때에 ‘이판사판이다.’라는 말을 씁니다. 사실 이 말은 불교 용어로서 우리나라 조선 시대에 생성된 말이었습니다.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건국이념으로 숭유억불(崇儒抑佛)을 표방하였습니다. 고려시대에 폐단이 많았고 왕실의 타락을 조장했던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를 장려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불교는 하루아침에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그에 따라서 승려는 천민 계급으로 전락하였고 도성 출입도 금지되었습니다. 그런 위기 가운데서 승려들은 활로를 모색했는데, 그 하나는 불교의 사찰을 존속시키는 것이었고, 또 다른 다른 하나는 불법(佛法)의 맥을 잇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부 승려들은 여러 가지 잡일을 하면서 절의 운영이 유지되도록 하였는데 그런 승려들을 사판승(事判僧)이라고 불렀습니다. 반면에 또 다른 승려들은 불법(佛法)을 연구하고 전수하며 참선 등의 수행에 전념했는데 이런 승려들을 이판승(理判僧)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이판사판이라는 말은 숭유억불 정책 하에 천민으로 전락해 버린 승려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가장 최악의 상황에 이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끝장이라는 말인 것이지요. 사실 기독교가 로마 시대 때에 처음으로 전파될 때에 그리스도인들과 교회 또한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이판사판을 경험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유대인들에 의한 박해만이 아니라 다신교의 로마 사람들에 의해서도 많은 박해를 받았고, 그리고 로마의 네로 황제나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고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진짜 기독교의 이판사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점점 많아지고 교회도 점점 더 늘어났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판사판의 상황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극심한 타락한 시대를 사는 로마의 사람들이 다른 데서 경험하지 못하는 감화를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이 세상만이 아니라 기독교도 이판사판의 상황으로 몰리는 것 같지만 바로 이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은 더 뚜렷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런 시대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의연하게 주님을 닮은 거룩한 삶을 살아갈 때에 이 세상은 그런 그리스도인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주님께로 나아오는 역사가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미국의 정치가였던 벤자민 프랭클린은 자기가 살고 있는 필라델피아 시민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뭔가 선한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중에 한 가지 아이디어가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그는 자기 집 앞에 작은 선반 하나를 만들고는 거기에다가 예쁜 등을 하나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밤이 되면 그 등에 불을 켜놓았습니다. 그 모습을 본 동네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등불은 집 안에서 켜는 것인데 그렇게 집 밖에다 등불을 켜 놓는 것은 낭비라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뭔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집 밖에 등불을 켜두니 밤에 그 집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빛 가운데서 길을 잘 걸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좋게 생각한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씩 자기들도 집 밖에다 등불을 켜두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밤에도 그 지역의 길거리는 대낮처럼 환하였고 그래서 사람들은 허둥대지 않고 길을 걸을 수 있었고 범죄율도 현격하게 줄어들었습니다. 이것이 출발점이 되어서 가로등이라는 것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이 벤자민 프랭클린의 이야기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알게 해 줍니다. 죄로 인해서 점점 어두워져가는 이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주님 말씀 따라서 빛이 되어서 살아갈 때에 세상 사람들은 그 빛에 감화를 받고 빛의 근원이신 주님께로 나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더 어두워진 이판사판의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더욱더 주님을 닮아가는 거룩한 빛의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해 봅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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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과 삶
    2022-08-23
  • [하수룡 장로] 욱 여 쌈
    '욱여쌈'이란 말은 바울이나 요셉에게 어울리는 말로 정말 헤어 나오기 어려운 상황을 맞이했을 때 사용하면 적격이다. 이 말은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는 말로 ‘안쪽으로 조금 우그러져 있다.’는 형용사‘욱다’와 ’싸다‘라는 동사와 어울려 만들어진 순수한 우리나라의 말로 물건을 안에 넣고 보이지 않게 씌어 가리거나 둘러 말다는 뜻이다. 물건이나 물체가 아닌 사람이 욱여쌈을 당한다면 포도즙을 짤 때 포도를 짓누르는 것과 같이 엄청난 고통을 당하여 사방이 캄캄하고 터질 것 같은 답답함으로 생을 포기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보통 욱여쌈을 당한 사람하면 조선시대 이 순신 장군을 떠올리게 된다. 조정은 조정대로 위태한 나라를 위해 적극 힘을 보태주지 못하여 방해꾼이 되었고 아군은 아군대로 지도자가 자기의 공을 드러내기 위해 싸움은 뒤로한 채 허위보고와 헐뜯는 일에 몰두하여 적군 아닌 적군이 되었다. 지원군인 명나라도 일본과의 약은 정치로 군대 해산과 적대 행위 종료와 귀향을 명령하여 돕는 아군이 아니라 방해하는 적군이 되어버린 것이다. 진짜 적군인 왜군은 어찌하든지 이 순신 장군을 죽이고 조선 수군을 멸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던 것이다. 돕는 이 하나 없는 이 순신 장군은 아마 온 천지가 적들에게 포위되어 욱여쌈을 당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왜군과 명군은 돌아갈 고향이 있었으나 아군은 돌아갈 고향이 없다고 탄식했던 것이 아닐까? 결국‘죽으면 살리라.’라는 담대한 마음으로 적의 종자를 멸할 것을 명령하여 왜란을 승리로 이끌게 되어 역사의 한 장을 기록한 것이다. 작금에 우리나라의 형편은 국내외적으로 욱여쌈을 당한 형국에 처해졌다. 정파는 정파대로 교파는 교파대로 편을 나누어 국론이 통일되지 못하여 유대나라처럼 온통 찢어진 상태로 분열된 느낌이다. 북한은 시간만 나면 무력으로 남한을 접수하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주위의 강대국들은 한국이 부강하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아 보이지 않게 방해 공작을 멈추지 않는다. 특히 젊은이와 믿는 백성들까지도 방황하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많은 것을 포기하려 한다. 게다가 기상이변과 코로나까지 더 심해져 어려운 형국을 맞아 일제강점기의 최악의 순간처럼 도저히 미래가 암담하다. 일자리는 줄어들어 일하고 싶어도 일할 자리가 없어 직장도 결혼도 미루거나 포기한다. 한국이 선진국에 진입했다고 축하하지만 시국적으로 현재는 어려운 시기로 개인도 국가도 욱여쌈을 당하여 어려운 상태에 처해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 순신 장군도 바울도 요셉도 욱여쌈을 당하여 도저히 인간적으로 ‘바람 앞의 등불’같이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죽기로 각오하면 살리라.’하고 상황을 대처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살려 주시고 높여 주셨다. 우리의 현실은 지금 가정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모든 분야에 욱여쌈을 당한 상태로 어려운 위기의 비상상황임을 기독교인이 먼저 절감해야 한다. 우선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내가 진정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빛이 되었는지 자성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개체인 나라는 존재는 극히 작지만 예수님은 어떤 일도 다 할 수 있는 능력 있는 분임을 믿어야 한다. 성질이 날 때 내가 나를 죽이고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도 나를 죽여야 한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고 불평과 불만의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와도 나를 죽이자. 그리하면 그 분이 내 안에 계셔서 크게 역사해 주시고 위기에서 구해 주신다. 지금은 온 세계가 코로나와 전쟁 때문에 경제 침체의 욱여쌈을 당하여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상황이다. 다른 방법이 없다.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나만 죽으면 전능자는 삽니다. 나 자신을 죽이세요. 그 분이 모든 환난을 감당하십니다.’라고 외쳐야 한다.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해도 그 분이 환난을 능히 감당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절대 필요한 때다. 위기는 또 하나의 기회임을 명심하자. 2022.08.22. 경남기독신문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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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장칼럼
    2022-08-23
  • [김성수 총장] 하나님 앞에 기억되는 봉사
    10월 총회를 앞두고 각 교단들마다 총회에서 봉사할 주요 임원들 선거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면류관 벗어서 주 앞에 드리세”라고 찬송하면서도 자리에 오르기 위해 도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뜨겁게 달아오르는 선거 열풍을 느끼게 된다. 이 시점에서 우리 모두는 니고데모의 안경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기억되는 봉사”가 어떤 봉사인지를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호세아서 1장 1절에는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기록이 있다. 호세아 선지자는 남쪽 유다 출신이 아니라 북쪽 이스라엘 출신이다. 그가 활동했던 시대에 북쪽 이스라엘 왕국을 통치했던 왕들은 스가랴, 살룸, 므나헴, 브가히야, 베가, 호세아 등 여섯 왕들이었다. 그런데 선지자 호세아는 자신의 책을 기록하면서 자기 나라의 여섯 왕들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유다의 통치자들의 이름은 순서대로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 왕들 중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한 사람만 언급해도 충분하다고 간주하고 있다. 이들 여섯 왕들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아주 어두웠던 한 시대를 대표해 보여주고 있다. 이들 중 거의 대부분의 왕들은 한결같이 왕을 시해하는 대역죄를 범하기를 주저하지 않은 살인자들이었다. 이스라엘의 왕권은 공평과 정의가 그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왕권은 참된 왕 되신 하나님의 통치를 대표해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보좌에 대해서 아름다운 묘사를 하면서 의와 공평이 보좌의 기초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보좌를 표현할 때 항상 율법이 새겨진 두 비석이 들어있는 언약궤 위에 놓여 있는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신정국가의 왕들로서 하나님의 왕권의 옥쇄를 가지고 있는 들로 상징되는 이들 이스라엘 왕들은 완전히 반대적인 것을 대표해 보여주었는데, 이들의 보위가 모두 인간의 피로 얼룩진 기초위에 세워져 있었다. 이것이 아마도 호세아 선지자가 이들 권세 있는 왕들을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 이유였을 것이다. 호세아는 이들 왕들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이들 왕들의 행위가 하나님 나라에서는 완전히 무용지물이었기 때문이었다. 호세아 선지자가 이름을 언급하고 있는 왕들이 모두 경건한 왕들인 것은 아니다. 요담과 아하스는 불신앙으로 잘 알려져 있는 왕이었다. 호세아가 언급하고 있는 모든 왕들은 어떤 경건한 목적이든지 아니면 다른 목적으로든지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하나님을 “봉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심지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여로보암에게도 해당된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여섯 왕들은 심지어 “부정적인 방법”으로도 사용하지 않으셨다.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에게 완전히 쓸모가 없는 자들이었다. 의심할 나위 없이 이 모든 왕들은 자신들을 엄청난 위엄으로 치장한 자들이다. 이 모든 왕들은 야심에 찬 왕들이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위하여 “이름”을 내고자 노력하였으며, 이스라엘을 세계 권력의 자리에 올리고자 원했던 왕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단지 자기들 스스로를 위해서, 자기들 자신만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던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의 명성은 사라져 갔으며, 이들의 위대함도 잊혀 버린 것이다. 선지자에게 있어서 이들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그들의 통치 연대를 언급해야 할 만큼 중요하지 않았다. 이들 왕들은 아마도 자신들의 통치 시대가 역사책에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비중으로 기록되는 것을 보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 호세아는 이들을 침묵 속에 파묻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 이스라엘 왕들은 사실 언약의 백성들로서 아주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에 이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온전히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살았던 자들이었지 하나님의 봉사에 헌신하기를 결코 배우지 않은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험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존재한다. 물론 우리가 이들 여섯 왕들처럼 왕이 되기 위해 왕을 죽이거나 이들처럼 토색하는 자들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잘못 생각하기를 단지 공개적으로 인정된 악이나 죄인들만 하나님의 나라에서 제외되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지옥의 불에 알맞게 만드는 죄가 무엇인가? 그것은 “열매 없음”과 하나님 나라에 아무 “쓸모없음”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존경받는 사람들도 될 수 있고, 사람들 사이에 굉장한 명성을 즐길 수도 있다. 교회의 각 기관, 노회, 총회 활동에서 자신을 드러낼 수도 있고 인정받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목전에 이름 없는 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았는지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하며 우리 주님을 위해서 살았느냐 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은 자기 자신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관심을 갖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 자신들의 삶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내가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며 나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살고 있는지, 아니면 나 자신을 부인하며 주님을 위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성찰해 보아야 한다. 이러한 검토의 결과는 아주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위한 삶을 산다는 것은 단지 세상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불행하게도 주님을 위해서 산다고 하면서도 사실상 자신의 개인적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다. 사실상 인간의 마음보도도 더 악한 것은 없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 현 Evangelia University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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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23
  • [신재철 목사] 학생이 먼저 들어가 봐
    칼국수 배달 일이 끝나면 나에게 필요한 것은 쪽잠이다. 이렇게라도 쉬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 키 168cm에 몸무게 50kg이 넘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20여 년 살아오며 한 번도 강건했던 기억이 없었기에 지금의 쓰리잡(three job)은 죽을 것 같다. 지금 청하는 쪽잠은 여유로움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몸부림이다. ‘종일 자고, 좀 놀고 싶다.’ 듣는 이도 없구만 혼자 중얼거리며 베개에 머리를 누여본다. 한 시간 휴식 후 몸을 일으킨다. 새벽 기상보다 더 몸이 무겁다. 하지만 어렵게 얻은 야간 아르바이트를 위해 일어나야 했다. 국가에서 어려운 이들에게 제공하는 일자리, 공공근로를 신청했는데 합격 되었다. 「방범대원」 태권도 단증이 있어서 유리했다는 말도 있는데 잘 모르겠다. 면접을 통해 나의 여리여리한 몸뚱아리를 확인했다면 나는 탈락했을 것이다. 여하튼 나는 3인 한 조가 되어 매일 저녁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방범대원이 되었다. 밤 12시까지만 그렇게 버티면 일은 끝난다. 내가 속한 조는 우리 파출소에서 나름 ‘특공조’로 불렸다. 일단 모두가 20대이다. 겉모습은 볼 품 없지만 나는 태권도 유단자였고 함께 근무하는 형은 학창시절 태권도 선수 출신인 찬양사역자.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충남대학이라는 건실한 간판을 달고 있다. 하지만 충남대학생 형은 한량이다. 매일 여자 이야기, 클럽 이야기. 잘생긴 그의 무용담이(?) 뻥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신학대학 휴학생, 국립대 휴학생, 찬양사역자.’ 우리의 조합은 파출소에서 듬직하고 건실한 그룹으로 보여지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도 어두운 공원 벤치에 앉아 각자의 이야기로 떠들기 시작한다. 순찰은 잠시, 우리는 이렇게 ‘짱’박혀 놀고 있다. 나와 찬양사역자 형이 사역과 비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더니 견디지 못한 충남대 형이 드디어 재미난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그의 연애담은 정서적으로는 불편했으나 심장을 뛰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몰래 보던 무협지의 짧은 야한 이야기 같은 느낌이랄까? 젊은 사역자 둘은 아닌척했지만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래, 이렇게라도 시간이 가면 된다. “치익, 치익” 휴식을 깨는 요란한 무전이 날아온다. 우리 행방을 묻는다. 걸렸나? 상황을 들어보니 비상이 걸렸으니 파출소 직원들과 합류하라는 지령이다. 장기 출타로 신고된 집에 불이 켜졌으니 출동해서 외부인 침입을 확인하라는 내용이다. 이런 일에 엮이면 무조건 불편하다. 그래도 가야 했다. 현장에 적당히 서 있으면 경찰관이 알아서 처리할 일이기에 큰 걱정 없이 출동했다. 급하게 도착한 집에는 정말 불이 켜져 있었다. 경찰관 2명과 우리 특공 방범 3인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경찰관의 지시가 떨어졌다. 모든 인원이 동시에 진입할 수 있도록 누군가는 담을 넘어 대문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가장 날렵하고 젊어서 당첨. 조금 당황스럽다. 억지스럽게 담장을 짚고 몸을 올리는 순간, 너무 겁이 났다. ‘도둑과 눈이 마주치진 않을까? 너머에 누가 있진 않을까?’ 무서웠다. 무사히 담을 넘어 문을 열어주었고 경찰관과 우리 대원들은 진입에 성공했다. 결과는? “아이고 죄송합니다. 저희가 신고한 일정보다 휴가에서 빨리 돌아왔어요.” 장기간 출타를 신고했던 주인이 일정보다 빨리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몸에 긴장이 풀리고 기운이 빠진다. 우리의 공로가 인정되었을까? 아니면 공공근로에게 무리한 업무를 주어 미안했을까? 우리는 처음으로 조기 퇴근을 ‘명’받았다. 같이 해장국 한 그릇 하자며 퇴근하는 길, 형들의 투덜거림이 나왔다. 직원도 아닌 학생에게 담장을 넘어 들어가라고 하라는 것은 부당하지 않냐고. 나도 그리 생각한다. 세금으로 월급 받는 경찰이 들어가야지. 무장도 없는 학생을 시키다니. 여하튼 오늘도 무사히 일이 끝났다. 무조건 감사. 에필로그. 2022년. 태권도 선수 출신 찬양사역자는 나이 50이 다 된 지금까지 찬양을 부르고 있다. 그의 찬양을 들으면 지금도 좋다. 하지만 여전히 가난하다. 잘생겼던 한량 형은 더이상 가난하지 않은 것 같다. 잘나가는 법무사로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다. 당시 형이 살던 허름한 빌라가 아직도 눈에 선한데, 잘되어서 좋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어디 공공근로 없나 기웃거리는 개척교회 목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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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23
  • [오태열 목사] 복이란 무엇인가
    성경은 모든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다. 창세기 1:27-28절에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에게 생육, 번성, 땅에 충만,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명을 다스리라는 복을 주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복을 저주로 바꾸고 말았다. 그 결과 에덴동산의 행복과 풍요로움을 잃어 버린다.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으며,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동물과 인간의 평화로운 관계도 깨어져 버렸으며 흙으로 돌아가게 되는 비참한 인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예수를 보내시어 저주받아 불행해진 인간을 복 있는 인간으로 바꾸어 놓으셨다. 따라서 예수를 영접하고 가르침을 따를 때, 복된 삶을 살게 된다. 복을 희랍어로 μακαριος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세 가지의 의미가 있다. ① 외적인 번영 ② 가난과 연약, 죽음에서의 자유 ③ 참된 성품의 소유이다. 예수님의 산상설교에서 가장 먼저 언급한 것이 복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복과는 거리가 먼 복을 말씀하셨다. 복이란 하나님의 통치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거룩 성을 닮아가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거룩성의 회복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함께 교제가 이루어지며 그 결과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순종하는 삶을 말한다. 예수님은 이들을 복 있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복 있는 자 되기 위해, 첫 번째 시도는 버려야 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복은 구원이다. 구원은 죄에서 자유 함을 얻어 새 생명을 얻는 것이다. 가득 차 있는 데는 다른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없다. 비움은 새로운 채움을 위한 시작이다. 예수께서 심령이 가난하게 될 때 천국으로 채워진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복 있는 사람은 버릴 줄 아는 사람들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고 애지 중지 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버렸다고 하였다(빌2:8-9). 반대로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은 버리지 못함으로 영생을 얻는 데 실패하여 근심하며 돌아가야만 했다. 두 번째 시도는 애통해야 한다. 애통 후에는 위로가 넘친다. 애통은 잡초가 무성한 마음의 밭을 기경 하는 것이다. 그리할 때 내면의 변화가 일어난다. 무엇에 대한 애통인가? 첫째, 죄에 대한 애통이다. 잘못이 있다면 마음이 아파야 한다.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은 자신의 잘못과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이 없어 불행을 자초하게 된다. 애통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세리처럼 가슴을 치며 통회 자복하는 것이다. 그래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된다. 둘째, 자기의 무능함에 대한 애통이다. 하나님은 슬피 울며 애통하는 자를 위로하시고 도우셔서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 한나가 아들을 낳지 못해 첩인 브닌나로부터 심한 모멸감을 당하자 하나님께 나아가 눈물로 자신의 심정을 토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평안한 마음과 사무엘이라는 아들을 낳게 하셨다(삼상3:10). 셋째, 영혼들에 대한 애통이다. 구원받지 못한 골육 친척 이웃의 영혼과 이 땅의 영혼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애통 하는 것이다(롬9:1). 여러분은 지금 어떤 복을 추구하고 있는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복인가? 아니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인가? 참된 복을 추구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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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23
  • [조희완 목사] 미움의 함정 (요일2:7-11)
    어느 맑은 연못에 예쁜 붕어 두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항상 다정하게 지내던 두 마리의 붕어가 어느 날 서로를 미워하게 되었고, 급기야 물어뜯고 싸워서 한 마리가 죽고 말았습니다. 살아남은 한 마리의 붕어는 자기가 미워하던 붕어가 죽자 속이 너무 시원하고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뒤로부터 연 못의 물이 오염이 되어서 더러운 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물어 죽인 금붕어가 그 연 못에서 썩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한 마리의 붕어도 그 오염된 물을 먹고 더 이상 살 수가 없어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넘어지거나 망할 때 내가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넘어질 때 기뻐하면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 나를 넘어지게 하십니다. 남을 미워하는 사람은 자기를 미워하는 것이고,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잘 되기 위해서라도 남을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종말의 징조 가운데,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4:10)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많아져야 사람 살맛나는 세상이 될 텐데 그렇질 못하고 서로 미워하는 마음이 많아진다면 괴로운 세상이 되고 맙니다. 지금은 미워하는 마음이 증가되고 있으니 지금이 바로 말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특히 우리 하나님은 본질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미워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대단히 싫어하십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사랑할 책임만 있을 뿐 미워하거나 정죄할 자격이 없습니다. 내가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모든 사람을 열심히 사랑하면서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왜 사람을 미워하지 말아야 할까요? 첫째로, 미움은 어둠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요일2:11) 둘째로, 미움은 거짓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요일4:20) 셋째로, 미움은 살인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요일3:15) 그러므로 치열하게 미움을 몰아내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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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23
  • [특별기고] 경남기독문화원 문화선교사 김태군 목사의 미주행전(2)
    아틀란타에서의 공식적인 일정이 마쳐지고 다시 짐을 꾸렸습니다. 짐을 꾸리며 들었던 생각은 ‘저 천국 갈 때는 이런 짐들이 아무것도 필요치 않을텐데’라는 생각에 하나님을 다시 한 번 묵상하며 과테말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6월 22일(수), 과테말라에 도착하니 들었던 이야기처럼 공항 근처에 힘든 분들이 포진이 되어있었고 여기 저기 눈을 돌리는 곳마다 시간이 거꾸로 간 것처럼 느껴지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주님의 섭리가 운행하심을 느끼며 일정들을 소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선한사마리아인교회에서 지원하고 후원하는 한미학교가 있습니다. 과테말라 높은뜻우리교회를 통해서 선교 사업을 진행하는데 학교를 지어서 교육열이 떨어지는 현지인들을 모아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서 과테말라 청소년과 청년들이 의식이 깨어나고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것을 도와주는 일들을 진행 중이었습니다. 학교는 거의 80%가 완공이 되었으며 임시로 쓰는 곳에서 학업에 전념하는 과테말라 학생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특별시간을 만들어서 제가 부족하지만 합창을 가르치는 시간들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짧은 시간에 뭔가를 만들어 낼 수는 없었지만 그들과의 소통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값지고 가치 있는 것임을 함께 나누고 돌아 왔습니다. 또한, 과테말라 청소년들 뿐 아니라 높은 뜻 우리교회에서는 현지에 있는 한인 청소년들을 모아서 합창을 배우는 시간들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연습한 합창곡을 26일(주일) 높은뜻우리교회 대예배때 특송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과테말라에서의 일정 가운데 아주 특별한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홍속렬 선교사님을 만났습니다. 축구로 한 평생을 바친 분이신데 젊으셨을땐 국가대표 선수를 많이 만들어 배출시킨 분이셨습니다. 선교사님을 뵙고 느낀 점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입니다. 여든을 훌쩍 넘긴 연세에도 과테말라 한미학교 학생들을 가르치시고 훈련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존경을 금치 못했습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없으시냐고 여쭸더니 .축구화를 좀 보내 달라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때마침 창원 양곡교회에 시무하시고 축구에 남다른 사랑을 가지신 최문욱 장로님이 생각나서 연결을 했더니 축구화를 기증받아서 보내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언제나 사람들의 만남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새삼 깨닫고 기쁨의 순간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6월 27일(월) 오전, 이제...마지막 일정이 기다리는 LA로 출발. LA에서는 가기 전 경남기독문화원 이사장님 이신 구자천 장로님의 섬김을 통해서 라디오 인터뷰가 잡혀 있었고 그리고 돌아오는 날인 7월 3일(주일), 남가주 사랑의교회(노창수 목사) 1~3부 예배 찬양 간증 집회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SNS를 보신 그 지역에 계신 전도사님께서 이곳 저곳 저의 프로필을 소개 하시면서 생각지도 못한 남침례회 LA비전교회(김대준 목사) 금요기도회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28일(화) GBC미주복음방송 친절한전도사의 Networking Today라는 프로그램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별빛교회와 섬기는 신곡리마 을과 출석하는 별빛친구들을 소개하고 경남기독문화원의 일들을 소개하며 인터뷰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루의 일정을 마칠 즈음 한인축제를 기획하시고 담당하시는 화랑청소년재단을 운영하시는 박윤숙 총재님과 연결이 되면서 수요일 만남을 가졌습니다. 화랑청소년재단은 비영리 재단으로써 2006년부터 LA에 본부를 두고 남가주, 북가주, 보스턴과 하와이, 애리조나 등 미 전역에 21개 지부를, 한국 등 11개국에 15개 지부를 각각 두고 운영이 되고 있습니다. 화랑재단은 세속오계를 바탕에 두고 가족 사랑, 나라 사랑, 이웃 사랑, 정의 사랑, 평화 사랑 등 사랑 5계를 실천하는 청소년단체입니다. 박 총재님을 만나서 또 다른 청소년과 청년들의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되었고 긴시간을 함께 나누지는 못했지만 앞으로 생겨날 크고 놀라운 일들을 서로 나누고 품고 돌아온 시간이었습니다. 저의 사역 가운데 별빛 청소년들에게 삶의 꿈과 희망을 나눌 수 있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런 일들로 채워지길 소망하고 기도하며 돌아왔습니다. 비단 저희 별빛교회 다음세대 뿐 아니라 원하는 모든 청소년 청년들에게 보다 큰 세상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아쉬운 만남은 더 큰 역사가 되어서 만들어 질 것이라는 믿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7월 1일(금) 지인 전도사님을 통해 만나게 된 LA비전교회(김대준 목사)에 금요기도회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 만남의 순간에 참으로 감사한 일들이 벌어 졌습니다. 꿈에도 생각도 못한 중학교 후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함께 학교를 다니진 못했지만 그 이국만리에서 동문을 만났다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배목사님을 통해서 더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매형이 목사님이신데 저와 중학교 동기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중학교 동기 목사의 사모는 저의 초등학교 동기인 것! 이 무슨 은혜의 순간인지요 정말 놀라고 감사한 만남의 복을 누렸습니다. 후배는 그 날 집회를 하는 교회 부목사로 섬기고 있었으며 중학교 동기와 초등학교 동기인 사모는 북가주에서 목회를 열심히 한다고 전화통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생각하기를 하나님께 참 감사한 순간이었습니다. 저의 삶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면서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을 전파하는 일을 하는 목사가 된 것도 감사한 일인데 중학교와 초등학교 동기들이 그 먼 곳으로 이주를 하여 목사로 사모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이 이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일인지를 새삼스레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금요기도회가 시작되고 말씀과 찬양과 기도로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도록 은혜의 시간을 나누고 내려 왔습니다. 돌아온 지금도 LA비전교회 김대준 목사님과 소통을 이어가는 중입니다. 만남의 복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것 입니다. 이제 마지막 일정인 7월 3일(주일) LA남가주사랑의교회 주일 1~3부 설교가 저의 어깨를 조금 무겁게 하는 시간들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한국에서 출발 전 이 번 찬양간증집회의 주제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가지고 왔기에 담대하게 말씀과 찬양을 전하고 사랑의교회 온 성도님들과 은혜를 누리고 내려 왔습니다. 저에겐 두 번 다시 오지 못할 시간들이었습니다. 아니 그 시간이 마지막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찬양하고 찬양했습니다. 그렇게 총 25일간의 일정이 마쳐지고 한국 시간 7월 5일 천국제공항으로 무사히 도착하였습니다. 이번 미주 찬양 간증 집회를 통해서 느낀 점은 세상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이뤄지기가 힘들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고 머리에 새로이 각인이 된 시간들이었습니다. 출발 전 저의 마음에 하나님 사랑이 곧 이웃 사랑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주신 것은 남들에게 전하라는 섭리도 있었겠지만 최우선은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마음임을 다시 한 번 고백하게 됩니다. 어떤 것이 중요한지 분간이 잘 안되는 요즘 세상에서 우리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깊이 깨닫고 실천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라고 기도하며 25일 간의 주님과 동행을 나눕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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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23
  • [박동철 장로] 대한민국 건국 74년, 우리암·우광복 선교사의 건국 공로 이야기
    광복 77주년을 보냈다. 해방의 희수(喜壽) 년을 보내면서 그동안 여정의 기쁨도 있지만 지나온 역사를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같은 때 우리 앞에 대한민국 건국 74주년을 맞는 마음이 함께했다. 대한민국 건국을 두고 우리끼리 주장과 논쟁이 많아져 거대한 담론이 되고 있다. ‘1919년 임시정부가 건국의 정부다’, ‘1948년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정부 수립이 대한민국 건국이다’라는 백성의 다른 소리들은 따져보면 하나의 소리다. 서슬 퍼런 일정하에서 독립운동의 선각자들이 세운 임정의 건국 기초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해방 후 좌우 분열의 치열함에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중심의 대한민국 건국이 명실상부한 건국의 완성이라고 말한다. 어떤 학자는 임시정부에서 건국, 자유대한민국 건국과 함께 통일 대한민국이 되어야 완전한 대한민국의 건국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맞는 주장일 수도 있다. 우리가 이러한 대한민국 근대역사의 여정에서 1948년 처절했던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복음 사명에 몸을 던진 선교사들의 숨은 공로 이야기가 새롭게 들리고 있다. 충남 공주에 가면 많은 지역의 인재들을 키워낸 사학 ‘영명학원’이 있다. 영명중고등학교는 1906년 미국 콜로라도 출신으로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되어 공주에서 선교사역에 매진한 프랭클린 윌리엄스 선교사 부부가 설립한 학교다. 윌리엄스 선교사는 한국 이름으로 ‘우리암(禹利岩)’으로 부인 앨리스와 함께 덴버대학을 졸업하고 결혼과 함께 이듬해 한국 땅에 선교사로 파송해왔다. 우리암이 설립한 영명학교는 충남지역 최초 근대 학교로 전도·애국·개화·민주이념으로 교육의 지경을 넓혀갔다. 이곳에서 유관순, 유우석, 조병옥, 노마리아, 김관희 등 기라성 같은 지도자들을 배출했다. 우리암 선교사의 자녀는 다섯이었으나 둘은 일찍 사망하고 세 명의 자녀가 성장했는데 이중 장남 조지 윌리엄스는 부모님 선교사의 교육하에서 성장, 한국 이름 우광복(禹光復)으로하고 영명학교를 14살까지 다니다 미국으로 귀국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우광복이라 이름 지은 것은 ‘대한민국 광복’을 염원했기 때문이다. 우광복은 고향 미국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해방 후 미 해군의 군의관으로 다시 한국을 찾았다. 우광복은 미 군정 책임자 하지 사령관을 만나 특별보좌관으로 발탁되어 통역 일과 함께 한국을 아는 사람으로 하지의 비서실장이 되어 중요한 업무를 맡게 된다. 당시 해방된 조선 땅에는 국가 정부 수립을 두고 좌우 갈등과 분열이 극심했다. 우광복은 하지 사령관 옆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실들이 최근 재조명되고 있다. 우광복은 평소 자유민주주의를 배웠고 좌익의 공산사회주의를 경계하고 있었다. 이때 하지 사령관에게 미국에서 독립운동하던 이승만을 불러들여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할 것을 건의했던 것이다. 하지 사령관의 혼돈스런 생각에서 바르게 판단하도록 우광복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러한 위대한 역사 속 이야기가 최근 한국기독교실업인회(이하 CBMC)에서 공주대 서만철 교수와 함께 묻혀있던 이야기를 발굴해낸 데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지난 15일 CBMC가 부산 벡스코에서 개최한 한국대회에서 서만철 교수가 새롭게 발굴된 역사 이야기를 설명했다. 이와 함께 의정부 CBMC와 경기북부연합회가 후원하여 미국에 거주하는 우리암선교사 친척들 30여 명을 초청, 우리암·우광복 선교사 선교지를 돌아보게 하고 선대의 한국 사랑의 사실을 알려주는 아름다운 행사가 있었다. 우리의 근대역사 속에 나라가 세워지고 나라를 지켜낸 중심에 목숨을 내놓고 헌신한 선교사들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많다. 이번에 충남 공주에서 거의 한평생을 보내며 복음을 전하고 한국 백성을 사랑하며 대한민국에 헌신한 우리암·우광복 선교사 가족 이야기를 다시 보며 우리는 무얼 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는 숙제를 받은 느낌이다. 모두가 사명에 도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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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20
  • [특별기고]김동식 목사의 〔‘통합기념 한마음교회 유감’에 대한 오해 바로잡기〕에 대한 반론
    먼저 고신 경기중부노회 지역에 속한 ‘통합기념 한마음교회’(이하 한마음교회)에 대한 경기중부노회의 행정 처리에 대하여 존중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통합기념 한마음교회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마음교회는 일반적인 교회가 아닙니다. 그 의미는 전적으로 경기중부노회에 소속된 교회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총회 차원에서 정책적인 지원과 헌금, 전국 교회의 협력이 들어간 명실공히 총회가 협력해서 세운 교회입니다. 따라서 경기중부노회의 바른 행정 처리들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총회가 결의한 사항과 통합 정신, 그리고 통합 준비위원회의 결의와 상반된 행정 처리에 대해서는 총회원 모두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교회임을 명백히 밝힙니다. 그리고 통합의 한 축인 (구)고려의 목사들이 행정처리가 잘못되었다며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명백한 권리입니다. 또 다시 분명히 밝히는 것은 이 이의제기가 경기중부노회에 대한 이의가 아님을 주장합니다. 김동식 목사가 기고한 <‘통합기념 한마음교회 유감’에 대한 오해 바로잡기>에 대한 재 반박문입니다. 그리고 통합기념교회의 잘못된 행태를 바로잡기 위한 주장입니다. 따라서 <‘통합기념 한마음교회 유감’에 대한 오해 바로잡기>라는 김동식 목사의 글에 대하여 이렇게 주장합니다. 1. 통합기념 한마음교회는 유일무이한 통합기념교회입니다. 2. 한마음교회는 안양일심교회 40주년기념교회나 지교회가 아닙니다. 라는 소제목 1과 2에 대한 반론 통합기념 한마음교회에 현판, 단체이름이 걸려있기 때문에 통합기념교회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글의 주장자는 이렇게 허울 좋은 겉모양밖에는 주장할 것이 없습니다. 현판과 단체 이름이 들어가 있으면 뭐합니까? 통합의 한 주체인 (구)고려는 통합이 아닌 상처만 가득한데 말입니다. 이유는 총회 통합추진위원회의 결의대로 (구)고려의 담임목사가 위임목사는커녕 당회장권도 한 번 받지 못한 교회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현재는 안양일심교회 부목사 출신을 후임목사로 보냈습니다. 통합기념교회의 통합정신을 단 1%라도 생각했다면, 이런 행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안양일심교회가 헌신을 많이 한 것이 아니라 안양일심교회가 세우고 싶은 교회에 총회가 헌금한 목적헌금을 가져다 쓴 결과 외에 달리 무엇이 있습니까? 통합추진위원회 제12차 회의 회의록에 보면, 1년 안에 위임목사로 세우는 것을 권고하기로 했는데, 위에 말한 대로 위임목사는커녕 당회장권도 한 번 받은 일이 없이, 안양일심교회 부목사에게 교회 담임권이 넘어갔습니다. <참고자료> 제12차 회의 : 2018 년 11 월 20 일(금) 오후 1시 한마음교회당(식당 ; 둥근상시골집) ⑦ 기념교회 이성용 목사를 1년 안에 위임목사로 세우는 것을 위원들이 좋게 여겨, 해 노회와 기념교회 임시당회장에게 시행하도록 권고하기로 결의하다. 3. 당회장권을 한 번도 준 적이 없다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라는 소제목 3에 대한 반론 3)-1의 주장은, 팩트체크-1대 담임목사와-결과 팩트가 아닌 거짓이라 반론 가치가 없습니다. 3)-2의 6가지 주장은, 이렇게 일심교회 당회가 결의했는데, 김홍석 목사가 통합기념교회에 이런 행동을 했다면, 오히려 김홍석 목사가 일심교회 당회의 결의를 위반한 것입니다. 1년만 당회장권을 달라고 했던 김홍석목사가 3개월 만에 당회장권을 다른 목사에게-그것도 1대 담임목사보다 후배목사에게-이임한 것을 보면 그 진위의 정당성이 판단됩니다. 그에 더하여 2년 동안 6회의 당회장권을 바꿨다는 것(팩트입니다)은, 기본상식에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 모든 것이 명백한 팩트인데, 뭐가 행정적 근거와 사실이 아닌지 설명해야 합니다. 4. 옛 고려 측 목사가 담임하지 못하는 불행한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라는 소제목 4에 대한 반론 한마음교회 ‘1대 담임목사의 과오’ 때문이라는 주장은 시각에 따라 달리 평가할 수 있으며, 재론의 여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리고 1대 담임 이성용 목사는 수원사명교회(상가 15평, 3-4명의 교인)를 28년간 한결같이 목회했고 예배당을 건축하고 당회를 구성한 목사입니다. 큰 교회는 아니지만, 신실한 목회자임을 28년간의 목회에서 검증된 목사입니다. 그런 목회자가 2년 만에 당회장이 6번씩 바뀌는 상황에서 무너져 간 것이 누구의 책임이겠습니까? 4-2) 통합기념 한마음교회 제2대 담임목사 청빙에서, 지원자 21명 중 (구)고려 측 목회자가 단 한 명도 지원하지 않았던 사실에 대하여, 왜 그렇게 되었지 한 번이라도 생각하셨습니까? 굳이 밝히면 (구)고려 측 목사들의 상처와 반발이 얼마나 컸는지를 말해주는 메시지입니다. 5. 교단 70주년을 맞아 통합기념교회를 다시 세운다는 것은 역사의 역행입니다. 6. 무엇보다 이 문제는 고신 총회 제 71회 총회에서 모두 화합 하에 이미 처리 된 일입니다. 라는 소제목 5와 6에 대한 반론 제71회 총회에서 70주년 기념교회에 통합정신을 담아 경기북부노회 지역에 교회를 다시 세우기로 한 안건을 임원회에 맡겨 처리하도록 결의했습니다. 김동식 목사는 처리가 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처리가 되었으면 왜 이런 결의를 총회가 다시 했습니까? 총회 선거를 앞둔 마당에 정당한 근거가 없이 정치 이슈화했다고 합니다. 이 재 반박 글을 쓰면서도 저는 김홍석 목사의 거짓말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박 글을 쓰거나 고소, 고발은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분명히 했다고, 전임 총회장 CH목사와 전 통합추진위원 O목사에게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런데 약속을 파기하고 하루 만에 반박 글을 버젓이 신문에 게재했습니다. 이렇게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분이 부총회장 되면 고신 총회가 어디로 흘러가겠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분이 고신 총회 부총회장에 출마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고신의 앞날이 심히 우려됩니다. 손순호 목사 약력 현) 한강사랑의교회 개척 후 27년간 목회 (구)고려 경인지방 제3대 SFC 위원장 경인지방 SFC 간사 역임 서경노회 SFC 지도위원장 역임 (구)고려 경인노회서기 역임 경기서부노회 서기 역임 미주고신 복음대학교 목회학 박사(D.MIN) ※ 기고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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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13
  • [특별기고] ‘통합기념 한마음교회 유감’에 대한 오해 바로잡기
    ※ 본지는 반론권 보장을 사유로 김동식 목사의 반론문 게재를 수용하여 13일(토)에 기고문을 게재할 것을 약속하였으나 김동식 목사는 본지 편집인의 개인 휴대전화로 협박성 문자를 보내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속히(2022년 8월 12일 18시까지) 반론을 게재해 줄 것을 촉구하며, 반론이 게재되지 않을 경우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는 물론, 명예훼손과 정신적피해에 대한 민형사상의 책임을 반드시 물을 것임을..." 또한 타 기독 언론 매체를 통하여 본인의 기고글을 게재하는 과정에서 본지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악의적인 글을 실었다. 뿐만 아니라 타 기독 언론 매체 기사 입력 시간이 '2022년 8월 12일 12시 56분' 으로 김동식 목사가 본지에 게재를 요구하며 커트라인으로 제시한 '2022년 8월 12일 18시까지' 에 대한 약속은 스스로 지키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따라서 본지 경남기독신문은 향후 합당한 절차를 통하여 엄중히 대처할 것이다. 그러나 구독자의 알 권리와 정당한 논쟁을 보장해야 할 언론의 사명을 다하고자 요청한 반론문은 게제하는 바이다. <경남기독신문 편집인> 경남기독신문 2022년 8월 2일자 <[특별기고] 통합기념 한마음교회 유감>의 글은 행정적 근거와 사실과도 전혀 다른 사실입니다. 마치 ‘시뮬라크르-Simulacre’와 같이 본질을 복제한 가짜로 자신의 생각만을 주장한 허상의 글이기에 그 당시 직접 경험하고 개입된 일이기에 반론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어 경기중부노회 임원들의 의견도 듣고 이 글을 씁니다. 아울러 고신 총회 경기중부노회는 행정적 오류가 없음을 밝힘과 동시에 특별기고자는 한번도 노회나 한마음교회를 수습한 당시 임시당회장들에게 서류나 사실 확인을 위해 요청한 바가 없음은 일방적 생각과 주장으로 글을 기고하였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에 반론을 제기합니다. 1. 한마음교회는 유일무이한 ‘통합기념교회’입니다. 한마음교회가 세워지는데는 안양일심교회 J 안수집사의 13억 상당의 종교부지를 헌물한데서 시작됩니다. 2017년 12월 ‘총회통합기념교회 설립추진위원회-위원장 김성복 부총회장’의 요청으로 안양일심교회 당회는 기꺼이 통합기념교회로 드리기로 하여 세워졌고, 2019년 12월 22일 설립예배를 드려졌습니다. 지금도 현관 현판에 개인, 교회, 단체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교회 홈페이지에서도 확인되고 교회 주부에 ‘통합기념교회’에 기록되어 성도들이 자긍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2. 한마음교회는 안양일심교회의 40주년 기념교회나 지교회가 아닙니다. 안양일심교회 40주년 기념교회나 지교회라는 말은 말도 되지 않는 일입니다. 물론 종교부지 헌물하였고, 성도들이 10억 헌금 하였지만 안양일심교회 주보, 교회요람, 교회연혁 등 어디에도 ‘40주년 기념교회’나 ‘지교회’라는 표현을 사용한 적이 전혀 없습니다. 더구나 2018년에 설립되었고, 40주년은 2020년이기 때문에 전혀 맞지 않습니다. 더구나 분명한 것은 노회에서도 한마음교회는 통합기념교회로 되어 있습니다. 3. 당회장권을 한번도 준 적이 없다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1) 한마음교회 1대 담임 목사가 선정되고 안양일심교회는 장로 2인과 성도들을 보내기로 하고 노력하였으나, 1대 담임 목사는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장로 2인이 가고 성도들이 함께 하였다면 당회장이 아니라 위임목사로 세워졌을 것입니다. 그렇지 몫해서 전도 목사로 파송되어 당회장을 맡지 못한 것입니다. 2) 첫 번째 당회장이었던 김홍석 목사는 한마음교회 1대 담임 목사에게 모든 권한을 일임하였습니다. 2018년 12월 30일 첫 공동의회에서 당회장이 담임 목사에게 위임한 내용이 회의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성례권(학습, 세례, 입교, 유아세례)을 담임 목사에게 위임한다. (2) 제직회 일반 사무를 담임 목사에게 위임한다.(예산 편성권, 추가경정 예산 편성권, 예산에 관한 지출, 제직회를 경유한 각종 특별회계 지출) (3) 부목사 청빙을 제외한 교역자 및 임시직원(서리집사)의 임명을 담임 목사에게 위임한다. (4) 경기중부노회 및 총회를 제외하고 대외적으로 교회를 대표할 수 있도록 위임한다. (5) 본 교단 소속목사에 한하여 강도권을 담임 목사에게 위임한다. (6) 정직이하의 치리권을 담임 목사에게 위임한다 로 결의 명시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당회장과 같이 위임하여 준 것입니다. 3) 시찰회와 노회는 당회장권을 주려고 하였으나 담임 목사 사역 중 전임 사역교회에서 재정문제 등 여러 문제를 노회에 제기하게 되어 당회장권이 재론 되었습니다. 4. 옛 고려 측 목회자가 담임하지 못하는 불행한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1) 1대 목사의 과오 때문입니다. 누구도 한마음교회 1대 담임 목사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목회 사역 과정에서 심각한 성도와의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겨우 화해와 봉합이 되었지만 2020년 2월 16일 제직회와 공동의회에서 다시 격화되어 내분이 확산 되었습니다. 2차 문제의 해결방법으로 J 당회장의 중재로 3가지 합의를 하였지만 담임 목사의 일방적 합의 파기와 함께 교회 출입 금지 시키고 참으로 고통스런 자살소동까지 이어져 교회는 끝없는 파국으로 빠졌습니다. 총회 재판국의 중재와 임시 당회장과 협조 당회의 결단으로 재정지원으로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2) 2대는 청빙은 교회의 고유한 행정권한입니다. 청빙위원회가 구성되었고 2020년 8월 기독교보에 ‘한마음교회 청빙공고’를 통해 공개적 청빙절차를 밟았습니다. 총 21명이 청빙서류를 제출하였고 그 중에는 옛 고려 측의 목회자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옛 고려 측의 목사가 제2대 한마음교회 담임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억지입니다. 21명의 지원자 중 2020년 9월 27일 청빙위원회에서 21명 중 4명으로 압축하고 면접자 2명을 최종 선정하였고 최종 결적을 내리지 못하고 1주일 기도 후 9월 26일 낮 12시 무기명 투표로 2대 담임 목사를 선정하였습니다. 3) 현재 한마음교회는 2대 담임 목사를 중심으로 회복되어 출석교인 130여 명에 이르는 은혜로 무너진 교회가 회복되어 있습니다. 5. 교단 70주년을 맞아 통합기념교회를 다시 세운다는 것은 역사의 역행입니다. 전국 노회와 교회의 후원금 13억을 말하는데 내야 할 분은 따로 있습니다. 1대 담임 목사를 잘못 세운 책임과 관계된 교회들과 우리 모두의 책임임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경기중부노회 소속 안양일심교회 김홍석 목사와 당회 그리고 성도들은 통합기념교회를 위해 종교부지 헌납, 10억 헌금, 1차 성도 파송, 2차 성도 파송하여 한마음교회를 살린 교회입니다. 이런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고 정치적 이슈화하여 거론하는 것은 목회자의 일이 아님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6. 무엇보다 이 문제는 고신 총회 제 71회 총회-2021년 9월 28일(화) 오후 1시 ~ 30일(목)-에서 모두 화합 하에 이미 처리 된 일입니다. 이것을 다시 거롢는 것은 총회의 결의를 번복하는 처사이고, 고신총회와 역행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본인이 총회에서 화합과 통합을 발표한 사람입니다. 아울러 총회 선거를 앞둔 마당에 정당한 근거 없이 정치적 이슈화하여 유포하는 것은 총회를 어지럽히는 것이고, 도리어 통합 정신을 고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반하는 것이라 사료됩니다. 고신 총회는 한국교회의 보루입니다. 다시는 이런 일로 총회를 어지럽히고 여론을 조장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김동식 목사 약력 · 현)충훈교회 담임 · 목회학 박사 · 전임 경기중부노회 노회장 · 미주목회 13년 · 말씀회복연구소 소장 · 월간 광야 발행인 · 칼럼리스트 · CMF 전문가정사역자 ※ 기고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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