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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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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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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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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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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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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하수룡 장로] 사나래
    세월이 흘러 다 성장한 손자들을 보면 이제는 아들의 아들이나 딸도 부모를 떠나 짝을 찾아 독립할 때가 다 되어 뿌듯함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조부모가 줄 수 있는 사랑을 어릴 때 다 쏟아 부어 그렇게 딱 붙어 있는 껌처럼 밀착되어 좋아하던 그 모습은 손자들은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손자와 같이 놀아 주었던 조부모들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추억을 먹으면서 종종 행복해 하며 웃음을 지우곤 한다. 엄마의 젖을 빨며 엄마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울었던 아이가 건장한 청년이 되어 나라를 지키는 든든한 국군 용사가 되었고 손녀는 결혼할 나이만큼 성장해 있는 모습은 정말 대견스럽다. 어려서 부모나 조부모의 사랑을 잘 느끼지만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고 그냥 사랑만 먹고 성장하여 건강하게 잘 커는 것만으로 감사하게 생각했는데 자기가 받은 사랑을 놀랍게 표현하는 것을 보고 정말 사랑은 위대함을 발견하게 된다. 조부모는 손자 어릴 때의 콩딱콩딱 뛰며 꽉 안겨 떨어지지 않는 그 따뜻하고 행복한 느낌을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그림으로 남아 영원히 가슴에 그려져 있다. 어머니의 끊임없는 훈계 때문에 불만으로 차 있을 때 조부모의 말 한마디가 큰 위로를 받는 것이 틀림없다. 엄마보다 더 엄마 같은 할머니가 청년 손자의 가슴에 오랫동안 남아있는 것은 항상 사나래 같은 포근함으로 감싸주는 끊임없는 조모의 사랑 때문이다. 할머니가 손자를 더 깊이 사랑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기에 성인이 다된 아이들이 조부모를 보는 순간 거침없이 달려와 가슴이 터지도록 아낌없이 포옹하게 만든다. 아무리 시간이 흘렀어도 손자들의 예쁘고 아름다운 추억은 지워지지 않고 더 선명하게 떠오르기 마련이다. 하나님을 믿는 노인의 추억 속에 세 네 살 때 손자와 함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안에서 제대로 말을 못하던 어린 아이가 ‘우리 하바, 좋은 하바, 우리 하바, 좋은 하바.’하면서 스스로 작사 작곡을 하여 목청껏 노래를 불렀던 것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엄청난 기쁨과 감동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연세든 노인에게 손자가 감사한 마음을 특별한 날 쭉 써온 편지의 내용을 꺼내보면 더욱 감동하여 만족스럽고 흐뭇하다. ‘늘 저희들을 사랑해 주시고 맛있는 것과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셔서 감사해요.’‘할머니 사랑해요. 100세까지 건강하게 사세요.’‘은퇴하시면 건강도 챙기시고 행복하십시오.’‘열심히 공부하여 꼭 보답하겠습니다.’‘저희들의 앞날을 위해 항상 기도해 주심을 감사드려요.’‘제가 잘되어 꼭 좋은 차를 꼭 사드릴게요.’등을 다시 읽어보면 가슴이 찡해온다. 항상 주님이 우릴 안아 주시는 것처럼 할머니의 포근한 사랑의 사나래가 손자들을 늘 품어 주셨기 때문이리라. 손자는 할머니가 사나래가 있는 천사가 틀림이 없다고 확신한다. 손자의 성난 상태를 당신의 지혜로 다스리시고 미운 투정에 달콤한 사랑의 케이크로 달래 주신다고 믿는다. 쭈글쭈글한 나이든 손마저 아름답고 따뜻하다고 칭송한다. 어여쁜 당신 나의 할머니, 부디 나의 곁에서 오래오래 머물러 달라고 간절하게 노래한다. 조부모도 부모와 다름없다. 손자도 아들의 아들이기 때문에 조부모가 사나래를 활짝 펴 그들을 아낌없이 감싸 주어야 한다.
    • 오피니언
    • 초장칼럼
    2022-05-03
  • [양대식 목사] 관계의 리더십
    국제 외교 관계 나라와 나라의 외교관계가 매우 중요합니다. 외교관계가 잘 되어야 나라가 발전하게 됩니다. 정치 외교 관계가 잘 되어야 합니다. 다른 나라와 관계가 좋으면 많은 혜택과 유익이 있습니다. 선진국과의 좋은 관계는 좋은 영향을 받고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실력 있는 대사, 외교관은 언어를 잘 구사하고, 지적 인격적 실력이 있고, 뛰어난 관계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국제 관계, 외교 관계가 잘 되면 수출, 수입을 잘하게 되어 경제에 큰 유익이 됩니다. 지금은 글로벌 시대입니다. 영어는 필수입니다. 영어 공부를 하여 국제 외교에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세계 각 나라의 언어를 잘 구사하는 인재들을 영입하여 좋은 국제 관계가 되도록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국제 관계, 나라와의 관계에서 서로 주고 받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국제 외교관계가 잘 되려면 탁월한 리더가 있어야 하며, 지혜로운 정치가가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국제 관계에서 신용을 쌓고 신뢰를 얻어야 합니다. 신뢰를 얻는 길은 정직과 투명성입니다. 실력을 쌓아야 합니다. 국방, 경제, 외교가 튼튼해야 합니다. 지나치게 이기적이거나 욕심을 부리고 비상식적이면 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다른 나라의 어려움을 살피고 도와주는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국제 외교 관계를 과감하게 확장시켜야 합니다. 국제관계에서 성공하려면 나라의 지도자가 지혜가 있어야 하며, 다른 나라의 지도자와 좋은 인간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국제 외교 관계가 깨지면 나라가 큰 위기, 손실을 보게 됩니다. 국제 외교 관계가 잘 되면 도움 받게 되고 나라가 부강하게 됩니다. 국제 관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국제 관계, 나라와의 관계를 위해 기도하고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국제 관계가 잘 되면 선교사님들이 선교하는데도 유익합니다.
    • 오피니언
    • 논문/책
    2022-05-03
  • [황권철 목사] 마가가 당신을 섬깁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대속물이란 헬라어 뤼트론은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해 지불되는 몸값(ranson)을 의미한다. 구약시대에는 이 몸값에 대한 내용이 기업 무르는 전통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어떤 사람의 형제가 타인에게 빚을 져서 종이 될 운명에 있으면 그 사람의 형제가 그를 대신해서 몸값을 지불함으로써 그 사람은 해방될 수 있었다. 이런 방법으로 해방 될 수 없는 사람은 희년 제도에 의해 구제받을 수 있었고 그래서 희년은 은혜의 해로 불렀다.  첫째, 아브라함의 모리아 제사는 대속의 제사였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창 22:13).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언약 백성 히브리민족을 세우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 하나를 붙들고 본토와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갔다. 갈 바를 알지 못했으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으로 갔다. 그가 모리아 제단으로 갈 때도 이성적으로나 사회 윤리적으로 보나 아니 혈육의 정으로써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하나님의 언약 사상에 사로잡혀 모리아로 갔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칼을 뽑아 찌르는 최후의 순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하나님은 이삭을 대신하여 한 수양을 준비해 두셨고 그 수양은 이삭을 대신해서 대속의 죽음을 죽었다. 이것이 후일에 나타날 메시야 사건의 예표이다.  둘째, 애굽에서 유월절 어린양은 대속의 죽음이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 12:13). 하나님이 애굽에 장자를 치는 재앙을 내릴 때 천사가 문설주와 인방에 어린양의 피를 보고 재앙이 건너가게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재앙이 임하기 전에 유월절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고기는 온 가족이 함께 먹었다. 바로 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오실 메시야의 보혈이다. 우리가 예수 보혈로 사망권세에서 놓임을 받는다.  셋째, 주님이 갈보리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다.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으시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막 15:34). 주님이 죽으심이 대속의 죽임이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은 사건이 이를 증명해 준다. 먼저 제 6-9시까지 해가 빛을 잃었다. 유대시간으로 정오에서 오후 3시까지 가장 강렬한 빛을 비추는 시간이었다. 이때 해가 빛을 잃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참 빛 되신 주님이 빛을 잃는 순간 창조질서를 위해 세워 둔 궁창의 해가 자연스럽게 빛을 잃었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다음으로 갈보리 변방의 무덤 문이 열렸다. 주님은 사망권세를 깨고 부활할 것은 친히 보여 준 예표였다.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죄악의 담이 허물어짐으로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구약의 제사장이나 그 어떤 중보자가 없이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종교개혁지 순방 중 스코틀랜드에서 특별한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애딘버러의 한 교회당 묘지 동산에 충견비와 함께 개의 무덤이 있음을 보았다. 이 비가 세워지기까지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다. 주인은 개를 끔찍이도 사랑했다. 어디를 가든지 개를 데리고 다녔고 개는 주인의 사랑을 받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개를 기르던 주인이 세상을 떠났다. 가족들은 교회 묘지 동산에 장사하고 집으로 다 돌아왔다. 그런데 개를 찾으니 없어 온 동네를 찾아 헤매다가 주인을 장사한 무덤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가족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으나 개는 주인의 무덤을 지키고 있었다. 가족들이 개를 집에 데리고 왔으나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없어 무덤으로 가 보니 개가 주인의 무덤을 지키고 있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무덤을 떠나지 않았다. 가족들은 무덤 곁에 개집을 옮겨 놓고 먹을 것을 갖다 주었다. 그렇게 무려 14년 동안 주인의 무덤을 지키다가 개도 죽었다. 사람들은 개가 주인을 섬기는 충성됨을 귀하게 여겨 무덤을 만들어 주고 그 곁에 비를 세워 주었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비가 충견비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 성도들에게 주님을 향한 섬김과 충성에 큰 도전이 되기 바란다. 미물에 불과한 개도 주인을 향한 충성이 변함 없음을 보여 주는 아름다운 교훈이다.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편지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엡 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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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
    2022-05-03
  • [박동철 장로] 대한민국 검찰을 조롱·이단시하는 정치권력 군상들
    대한민국 검찰은 이단적인 권력이었던가? 국회 여당에서 몰아친 '검수완박'이라고 하는 검찰 수사권 박탈 법안을 보고 대다수 국민들은 이제 나라가 어디로 가는것인가 하고 걱정들이다. 73년전 오늘의 대한민국 검찰이 시동되어 그동안 부패와 부정 각종 범죄를 소탕하는데 그기능을 다해왔다. 사회가 건강해지고 선량한 국민들이 겪는 범죄·부패 사회의 공포를 해소하는데 그 기능을 부정할수 없다. 검찰이 권력의 힘이 되어 되려 민폐가 되고 억울한 수사로 피해를 보는 선량한 국민의 고통도 있어왔다. 그러나 검찰의 범죄소탕의 기능을 어찌 폄하할수 있겠는가. 선량의 얼굴로 정치권력을 쥐고 부패와 범죄에 연결된 기득권의 정치권력에게는 대한민국 검찰이 견제와 감시 기능을 다해왔다고 볼수있다. 대한민국 대표적 기득권층 정치권력이 이번 검수완박의 신박한 법(?)을 만드는 과정을 보고 국민들은 실망한다. 저 옛날 예수가 로마의 식민지나라 이스라엘의 한모퉁이에서 태어나 죄악을 멀리하고 천국복음을 전파할때 가장 기득권을 누리던 자들은 바리세인과 사두개인등 유대인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은 예수가 율법의 관행을 깨고 병든자 힘없는자들을 먼저 돌보며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위선을 책망했다. 이들은 율법을 넘은 사랑의 실행을 강조하면서 구원을 설파하는 예수를 조롱하고 이단으로 몰고 십자가에 처형하는데 앞장섰다. 다시말해 이스라엘지도자들의 기득권 수호를 위한 알량한 계산으로 일어난 예수십자가 사건이다. 조금은 다를수도 있겠지만 대한민국 정권이 바뀌는 이즈음에 갑자기 검찰개혁을 내세우며 검찰수사권을 증발시켜버리는 이같은 검수완박법은 선진국에 들어선 대한민국 정치권이 해야할 행태가 아닌게 분명하다. 국민 65%정도가 반대하는 검찰수사권 박탈을 두고 선량한 국민을 보호하기위한 검찰개혁이라고 볼수있을까. 온갖 꼼수를 부려가면서 보이는 행태가 우스꽝스럽기도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한민국 정치권력군상들이 국민을 조롱하는 행태인것 같기만 하다. 검찰의 권력화를 손보고 개선하여 안심의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데 반대할 국민이 있을까. 검찰 수사권력이 국민모두에게공정해야하지만 서민들에게는 좀은 관대하고 정치권력자들에게는 혹독하게 접근하는것이 건강한 국가사회를 만들어가는길이다. 이렇게 하는 검찰개혁의 절차와 과정이 국민적이어야 한다. 또다른 역기능을 초래할수있는 개혁은 개혁이 아니고 개악이라고 부른다. 이번 검찰청법 개정 검수완박법은 여당이 야당되는 과정에서 만들어내는 자기보호를 위한 졸렬한 행태이고 야당이 여당되는 자들도 온건하게 반대하는 흉내만 내며 동조하는 냄새가 난다.이 주장에 반론 할수있을까. 시대에 맞지않은 사회 운용의 기능은 결코 또다시 사필귀정으로 돌아올것이다. 국민의 안위에 역행하는 제도와 시스템은 결국 쓰레기통에 들어갈수밖에 없는 법이다. 중국 모택동 말기 문화혁명은 기득권 권력자들이 공안 검찰을 조롱하면서 혁파해 버렸던 것이다. 엘리트 공안 검찰들에게 홍위병을 시켜 머리를 깎게 하고 모두 지방으로 쫓아내 버렸다. 이것이 하방(下方)이라는 표현이다. 그러나 모택동 4인방 혁명은 후에 실용주의 권력에 쫓겨나고 검찰 공안은 살아나게 된다. 대한민국 검찰 오랜 역사 속에서 개혁의 여지가 있었겠지만 이같이 합리성이 없고 국민적 절차 없는 개혁은 역풍을 불러올수도 있을것이다. 이제라도 대한민국 검찰 개혁을 국민과 함께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하나의 정치 진영에서 무모하게 밀어붙인 일방적 개혁 입법이라면 다시 돌이켜 반성하고 국민과 함께 다시 시작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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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2-05-02
  • [박동철 장로] 유월절과 부활절, 예수 재림을 기다리다
    유월절과 부활절, 최후의 만찬 성경의 많은 곳에 나오는 유월절(逾越節 pass over)의 뜻은 출애굽기 12장 13절에서 지나감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히브리인들이 출애굽 과정에서 하나님이 바로에게 내린 심판을 피하고 지나게 한다. 이 같은 특별한 은혜로 살아온 역사의 발자취를 기념하는 이스라엘의 최대 명절이 유월절이다. 히브리인들에게는 유월절과 함께 오순절(칠칠절 맥추절) 초막절(수장절)과 함께 3대 명절로 지킨다. 예수님 이후에도 유대교는 전통의 히브리인들의 명절을 지킨다. 오늘날 개신교 기독교는 예수님 탄생의 성탄절과 부활절 그리고 맥추절과 추수감사절을 지키며 신앙생활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큰 절기로 지키는 부활절의 시기가 유대인들의 유월절과 겹치는 시기에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유월절에 잡히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고 삼 일 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히브리인들이 지키는 유월절은 유대력으로 니산월 14일이라고 하는데 로마기독교 발전과정에서 부활절 기념일을 위해 많은 논란을 거쳐 우리 기독교는 4월 둘째 혹은 셋째 주일을 부활절로 지킨다. 예수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을 굳이 예수를 메시아로 믿지 않는 유대교의 풍습에 따라야 하느냐 하는 주장도 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지키는 유월절에 제자들과 위대한 의미가 있는 마지막 만찬을 하고 십자가로 가셨다는데 의미를 같이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되면 1년 된 수송아지를 잡고 그 피로 집의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밤에는 온 가족이 한자리에 앉아 고기를 구워 먹는다. 그리고 이때 포도주 네 잔을 준비하여 잔을 마실 때마다 시편 찬송을 부르고 다음 세대들에게 조상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다 출애굽 한 고난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쓴 나물과 발효 없는 무교병(떡)을 먹고 반듯이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는다고 한다. 히브리인들의 출애굽과 광야생활의 쓰라린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의 미래를 꿈꾸는 아름다운 전통인 것이다. 유월절 만찬은 마지막 네 번째 포도주를 마시고 폐하게 된다. 예수님이 마지막 만찬을 제자들에게 배설하고 십자가로 가는 과정의 최후의 만찬에는 어떠한 뜻이 있을까? 필자가 섬기는 서머나교회 배성현 목사님은 2020년 부활절 예배(4월 둘째 주일) 설교에서 잘 설명한 바 있다. 본문 마가복음 14장을 중심으로 보면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는 즈음 가롯 유다는 대제사장들을 만나 예수를 팔기로 약속하고 돈을 받기로 한다.(10-11절) 그리고 마지막 만찬에 들어간다. 그런데 특이한 만찬이다. 예수님 만찬에는 단지 떡과 포도주만 있고 양고기가 준비되지 않았다. 또한 25절에 마지막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 하나님나라에서 난 새것으로 마실 것이라고 말씀을 남기시고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시게 된다. 무슨 뜻일까요. 알지 못하고 넘어갈 수 있는 대목이다. 분명 양고기가 없고 마지막 잔 포도주를 마시지 않은 이유는 당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어린 양의 죽음으로 가게 되는 무언의 외침이 분명하다. 그리고 마지막 잔을 마시지 않은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떠나신 이유는 재림으로 다시 와서 하늘의 포도주를 마시자는 언약의 말씀인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예수님 남기신 한마디 한마디, 아니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남긴 한마디가 얼마나 위대한 뜻을 담고 있음을 깨닫는 말씀인 것이다. 지난주 우리는 고난주간을 보내고 부활절 예배를 종일 몇 차례 올려드렸다. 팬데믹으로 대부분 교회가 성찬식을 갖지 못했지만 말씀을 통해 부활절 은혜를 받았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40일 후 머물다 승천하셨다. 마지막 만찬 때, 네 번째 떡과 포도주를 곁들인 성찬을 갖지 않듯이 다시 올 것을 말씀하시고 하늘을 오르셨다. 부활절의 큰 은혜는 우리가 예수 재림을 더 크게 갈망하는 것이다. 미국 3대 일간지 시카고 트리뷴의 신문사 정문에는 ‘예수가 잠시 전 재림하다’ 대 특종 성공이라고 쓰여 있다. 인류 역사 최대 예수 재림 사실을 세계 특종 하겠다는 야심찬 신문사의 포부다. 우리는 모두 부활절을 보내면서 예수 재림을 기다리는 차원 높은 복음을 갈망했을까. 말씀 은혜에서 쓴 시편(詩片) 마지막 만찬(막 14:22-31) 히브리의 유월절 만찬은 네 번의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라 첫 번째 잔을 마시고 430년 애굽 살이 광야 사십 년을 생각하는 쓴 나물을 먹는 것이라 두 번째 잔을 마시고 무교병을 먹고 아이들에게 고난을 알게 함이라 시편 찬송을 부르고 구원의 서정을 바라봄이라 세 번째 잔을 마시고 무교절 첫날에 잡은 어린 양고기를 먹고 하나님 구원의 찬미를 기뻐하며 아브라함의 언약의 축복을 기억함이라 그리고 네 번째 잔을 마시며 히브리 유월절의 가족의 만찬일진대 그러나 그러나 주님 십자가 고난의 대역사 앞에 두고 베풀고 베푼 예수 당신의 유월절 마지막 만찬은 양고기가 없고 네 번째 잔이 없었으니 이것이 왜 마지막 성만찬일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찬미하며 이 떡은 나의 살이요 이 포도주는 나의 언약의 피라고 말씀 남기시고 하나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않으리라 그리고 네 번째 잔을 내지 않았으니 제자들은 주님의 뜻을 몰랐다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네 번째 주님 이땅 다시 오실 때 네 번째 잔 마실 준비하게 하심이라네 어린양 예수 십자가에 오르면서 양고기를 준비하지 않았다네 모든 피를 흘려 구원의 노래를 부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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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20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7 : “축복(祝福)”과 “복(福)은 차이점
    I. 서언(序言) 우리 민족은 고대로부터 복(福)이라는 말을 굉장히 좋아했다. 그 중에서도 다섯 가지 복으로 말하는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 등을 특별히 좋아했다. 이러한 복에 대한 기대심리는 우리의 기독교 신앙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복에 대한 신앙적 관심을 크게 부각시켰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경에서 복에 대한 말씀을 찾아보면 아주 많은 말씀으로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면, 창세기 1장28절의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라는 말씀을 시작으로 요한계시록 22장 14절의 “자기 두루마리를 빠는 자는 복이 있으니”라는 말씀까지 총 32,569번이나 복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복에 대한 관심과 이를 받기 위한 노력은 당연한 것이다. 이러한 많은 관심은 때로는 복의 본질적인 의미를 떠나 지나친 기복주의 신앙을 형성하기도 한다. 그리고 복(福)자가 들어가면 무조건 다 좋은 줄 알고 그 뜻과 의미를 알지 못한 체 잘못 사용하는 경우도 아주 많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축복(祝福)”과 “복(福)”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그러다보니 많은 교인들이 이 두 단어를 같은 뜻으로 알거나 복 보다는 축복이란 더 좋은 말인 줄 알고 이 용어를 아주 좋아하지만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II. “축복(祝福)”과 “복(福)의 차이점 이 두 말은 같은 뜻이 아니라 전혀 다른 뜻으로서 성경에도 분명히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창세기 12장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라고 했으며, 민수기 6장 23-24절에는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로 되어 있다. 이러한 같은 문맥 안에서 다른 단어로 표기 된 말씀들은 아주 많이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논하면, 축복은 무엇이며 복은 무엇인가? 원어로 살펴보면 축복은 히브리어로 “바라크”이며, 뜻은 “좋은 것을 받도록 기원하다.”이다. 반면 복이란 말은 “아쉬레”이며, “복을 선포하다.”,“복이 있는 자”,“복이 있을지어다”란 뜻이다. 국어 사전에도 축복은 “행복을 빎”으로, 복은 “아주 좋은 일, 삶에서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되어 있다. 이런 모든 것을 신앙적인 면에서 종합해 볼 때, 복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신실한 백성들에게 내려주시고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고, 축복은 이런 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원하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가장 위에 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축복을 하실 수가 없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복을 비는 축복하시는 분이 아니라 복의 근원으로서 인간에게 복을 내려주시는 분이신 것이다. 반면 축복은 사람의 편에서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도록 기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두 용어는 완전히 개념이 다른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셨다는 말이나 축복하여 달라는 용어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어떤 연구자는 이 두 용어의 잘못된 표현을 지적하면서“축복은 사람이 하고, 복은 하나님이 주신다”라는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포괄적으로 보면 이 논리가 옳은 말이다. 결론적으로 복은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것이고, 축복은 말 그대로 인간 편에서 하나님께 복을 주시도록 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교인들은 “하나님, 축복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잘못된 표현이다. 이런 차원에서 앞의 기도를 수정해 본다면, “하나님, 축복해 주옵소서”를 하나님, 복을 내려주옵소서”로 해야 한다. 그리고 “저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받은 사람이다”를 “저 사람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다”로 수정해야 한다. III . 결 어(結語) 결론적으로 제언하고 싶은 말은 우리의 바른 언어 사용이다. 우리 기독교의 참으로 아름답고 귀중한 복과 축복에 관한 용어조차도 우리가 바로 사용하지 못한다면, 위대하신 하나님의 격을 손상시키거나 우리 스스로의 품위를 비하시키는 결과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한 것은 근래에 들어와서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이런 바른 언어 사용에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일이다. 이에 많이 수정되고 순화 되어 가는 일은 참으로 바람직한 일로서 이러한 면에서 관심 있는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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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20
  • [오성한 목사] 성령 충만을 깨워라
    사람들이 이미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벽장 속에 넣어 둔다. 벽장 속에 넣어두고 혼란스러워하지 말자. 내주하시는 성령에 대해 알지 못해 혼란스러워하는 것이다. 알게 되면 놀라운 힘이 생기고 기쁨의 삶은 시작된다. 성령을 육체적인 현상이 따라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현상이 없으면 성령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성령님을 능력의 도구로만 생각하기도 하는데 모두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믿는 모든 자에겐 성령님이 함께 하신다. 거듭난 것은 성령의 역사다. 거듭난 사람에겐 성령께서 항상 함께하신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성령님은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계3:20). 그 결과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요1:12).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성령님도 계신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계시면 온전히 계시는 것이지 점점 더 예수님이 오시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도 마찬가지다. 성령님께서 계시면 온전하신 삼위일체 되신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지 점점 더 성령님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다. 성령을 받는 것은 믿음으로 된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갈3:2)고 했다. 성령을 받는 것은 계명을 잘 지키는 행위에서가 아니다.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율법은 그림자다. 그림자는 잡을 수 없다. 율법은 지킬 수 없다.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히10:1) 계명을 잘 지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믿음으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에 능력의 사람이 되기가 쉽다. 지금 당장 능력의 사람이 될 수 있다.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갈5:3)라고 하셨다. 계명을 잘 지키는 바른 삶으로 성령의 역사를 얻어 내려고 하는 자들을 향해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3:1)고 안타까워한다. 성령으로 예수를 믿어놓고는 육체로, 노력하는 신앙생활로 마치겠느냐고 소리친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고 한 말씀을 꼭 기억하자. 계명을 잘 지켜야 성령의 역사가 크게 일어난다는 생각을 버리자. 우리는 예수를 잘 믿어야 복을 받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야 한다. 헌금을 열심히 하는 이유가 장사가 잘되기 위함이 아님을 가르쳐야 한다. 우리는 복을 받기 위해 예수를 잘 믿는 자들이 아니다. 이미 복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를 잘 믿는 자다. 깊숙이 다른 복음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을 고쳐야 한다. 바로 가르쳐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갈1:6)여긴다고 말했다. 다른 복음은 없는데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고 있다고 탄식한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하늘의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소리침을 보아야 한다.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8)라고 했다. 이해가 되는가? 당신은 어떤가, 다른복음에 오염되어 있지 않는가? 예수님께서 이미 만들어 놓으신 것, 당신 안에 이미 성령의 충만함이 있음을 그냥 믿을 수 있는가? 아직도 뭔가가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는가? 좀 더 열심히 해야 성령 충만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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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20
  • [신재철 목사] 안 돼! (2) : 선짓국이 뭔 죄야.
    공부 안 해도 피곤한 것이 고3이라 했는데. 동의한다. 야간자율학습, 일명 ‘야자’ 시간에 몰래 이어폰으로 라디오 듣고, 배가 고파 선생님 눈을 피해 학교 앞 떡볶이 집에서 배를 채우던 나. 여하튼 피곤하다. 오늘도 피곤한 몸으로 밤 10시가 넘은 시간 봉고차에서 내렸다. 학교와 집의 거리가 멀었지만 다행스럽게도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은 버스가 아니라 친구들과 함께 봉고차량을 이용해서 돌아왔다. “선지 해장국” 고3의 피로는 무엇으로 풀까? 소주 한 잔은 아니다. 집 앞에 24시간 열려 있는 해장국집이 내게는 회복의 장소이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그곳은 언제나 인심 좋은 아주머니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교복을 입고 들어서는 나를 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반겨주신다. 처음에는 얼마나 이상하게 바라보시던지... 내 또래 친구가 혼자 이 밤에 해장국 한 그릇 하는 풍경이 평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모, 선지 해장국 하나 주세요.” 국밥은 단출하지만 깔끔하다.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에 든든하게 먹을 수 있어서 참 좋다. 가끔 베어 무는 풋고추는 최고의 조미료가 된다. 고3 스트레스가 세상을 일찍 알게 하는 촉매제였을까? 옆에서 한잔 기울이는 아저씨들과 내가 비슷해 보인다. 신앙? 가져보았지만 역시나 삶은 고단하다고 느끼는 중이다. 그렇다고 끊을 수는 없다. 일단 예수님과의 의리를 지키고 싶고 내 삶의 영양제가 되어버린 신앙생활을 끊어버릴 용기도 없다. 그런데 최근에 고민이 생겼다. 주일이면 돈을 쓰면 안 된다는 제재를 받았는데 추가 제재가 들어왔다. 교회모임에서 삶을 나눈다는 이름으로 요즘 어찌 살아가는지 나누게 되었다. 나는 정직하게 일상을 나누었다. 필터링을 해야 할 이유도 기준도 없었기에 솔직했다. 그런데 ‘야자’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주 2회 정도는 국밥집에 들러서 선짓국을 먹는다는 내 이야기가 교회에 큰 파란을 일으켰다. 진짜 몰랐다. 그것이 그리 중요한 이슈가 될지. 목사님께서는 근엄하게 내게 말씀하셨다. “재철아, 믿음이 있는 자는 피 째 먹는 음식을 가려야 한다. 그것이 거룩한 삶이야.” 아, 뭘까? 선짓국보다 목사님들의 모임에서 드시는 개고기 수육, 탕 먹는 이야기가 내게는 더 불편했는데. 선짓국은 그 자체가 그냥 피가 메인 재료다. 죄 덩어리다. 그걸 포기하라고 신앙은 내게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은 뭔가 자꾸 내게 포기를 요구한다. 이제 머리가 좀 커서 레위기 말씀을 읽으며 선짓국 금지를 단순하게 이해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보니 차라리 선짓국을 포기하는 게 편한 것 아닌가 싶다. 영적생활, 신앙생활, 제자의 삶은 선짓국보다 더 큰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님... 뭔가 자꾸 안해야 거룩해 지는 건가요?” 나이 40이 넘어서도 내 기도는 선짓국을 포기할 그때와 같은 아쉬움을 고백하는 불경건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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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20
  • [최호숙 목사]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사람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날 때부터 ‘응애~에’하고 울면서 태어난다. ‘응애~에’하는 그 첫 음이 음악에서 표현하는 ‘라’음에 해당하는 음이라고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사람은 인생을 노래하면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뭐가 그리도 슬픈지 웃으면서 태어나지 않고 슬픈 노래를 하면서 태어나는 것이다. 이 슬픈 노래를 기쁨으로 승화시켜야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恨)을 가지고 살아가는 민족이라 한이 담긴 노래가 많다. 일제시대 나라 잃고, 자유 잃고, 모든 압박 속에 살다 보니까 자연히 그렇게 된 것이다. 또한 6.25 동란을 겪으면서 찌든 가난과 부모 잃고, 자식 잃고, 형제 잃고, 고향 잃어버린 아픔과 함께 살아온 민족이기 때문이다. 이런 한이 서린 정서를 가지고 있는 우리 민족의 아픔을 달랠 길은 음악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길이었다. 그래서 “한 오백년, 잃어버린 30년, 모정의 세월, 고향의 봄”등 가슴을 울려주는 노래들이 나오게 되었다. 응어리진 마음을 풀기 위해 사람들은 노래하는 곳을 찾게 된다. 그래서 노래방 문화가 발달해 가고, 청소년들은 노래하는 곳이면 모여든다. 특별히 코로나-19로 인하여 사람들의 마음과 삶 속에 웃음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그래서 마음을 달래주고 기분을 업(up) 시킬 콘텐츠가 필요했었는데 방송국에서 좋은 프로그램으로 미스트롯 미스터트롯 오디션을 통해 트롯(trot) 열풍을 일으켰다. 트롯 열풍으로 그나마 응어리진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영탁의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막걸리 한잔” 이찬원의 진또배기~~ 가사와 그 배경이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신이 나면 만족이다. 교회 음악도 이 트로트 열풍처럼 타올랐으면 좋으련만 코로나–19로 인하여 비대면 예배라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면서 성가대 모임 구역모임 성경공부 모임 모두가 벙어리가 되었다. 오랜 시간 비대면 벙어리로 예배에 동참하다 보니 영적 근육이 다 없어진 것이다. 참여 인원이 줄고 아멘 소리가 줄고 찬양의 함성이 줄고 헌금이 줄고 심지어 교회들이 문을 닫은 교회들이 많다. 원자 폭탄이 떨어진 자리에 모든 식물이 죽지만 생존하여 피어나는 것이 쑥이라고 한다. 자생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에델바이스라고 하는 꽃은 장미처럼 새빨간 색깔도 아니고 백합처럼 향기가 짙은 꽃도 아니다. 다만 15cm 정도 크기의 줄기와 잎에 솜털 같은 털이 많고 하얀색의 꽃이 피어있다. 외모로 볼 때는 그렇게 대단한 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에델바이스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혹독한 추위와 눈 속에서 피어나는 힘이 있는 꽃이기 때문이다. 부흥(Revival) 이란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꺼져가던 심지에 기름이 스며들면 불꽃이 살아난다. 이것이 부흥이다. 침체된 내 삶이 회복되는 것이 부흥이요,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찾는 것이 부흥이다. 이상화 씨의 시 제목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제목대로 봄이 오듯 우리의 영적인 삶에도 봄은 반드시 온다. 이제 회복의 시대가 도래했다. 세익스피어가 말한 대로 우리는 세상을 무대로 공연하는 배우이다. 천국 음악을 가지고 마음껏 공연하고, 마음껏 듣고, 부를 수 있는 영적 배우이다. 무대가 좁아서 못하는 것이 없고, 신분상의 제약을 받아 참여하지 못하는 일이 없는 천국 음악제에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초청받은 배우이며, 동시에 관람객이다. 다윗처럼 성소에 있든지 광야에 있든지 우리의 마음이 주께로 향하여 마음껏 영광 돌리고 모든 삶이 회복되는 역사가 있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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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20
  • [조희완 목사] 놀라운 감사 (하박국3:16-19)
    연세대학교에서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취업상담을 하시는 교수님이 쓴 글의 내용입니다. 수시로 많은 학생들이 찾아와서 진로에 대해서 취업에 대해서 상담을 받는데, 상담을 받고 돌아가는 학생들이 교수님께 “수고하세요.” “감사합니다.”는 인사말을 남기고 돌아간다고 합니다. 대부분이 “수고하세요.” 라는 인사말을 남기고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말을 남기는 학생은 아주 드물다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메말라 가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느냐 라고 했습니다. 상담을 하던 혹 다른 어떤 일을 하던 사람을 상대한 후 헤어질 때 “수고하세요.”라는 인사말 보다는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말이 더 정서적으로 아름답게 들리게 됩니다. 상대방에게 감사의 마음을 말로 표현하여 전달할 때 보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지난 과거시대에 비해서 훨씬 더 발달하고 편리한 시대를 살면서 온갖 문화적인 혜택을 다 누리고 살면서도 현대인들이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감사의 조건을 상대적인데서 찾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몸이 건강한데서 감사의 조건을 찾고, 사업이 잘되는데서 감사의 조건을 찾고, 기도가 응답되는데서 감사의 조건을 찾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데서 감사의 조건을 찾으려고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즐거워야 웃는 것이 아니다. 행복해야 미소 짓는 것이 아니다. 즐겁지 않아도 행복하지 않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밝은 표정을 짓는다면 우리의 뇌는 그 표정을 보고 반응할 것이다’ 옳은 말입니다. 웃을 일이 없어도 웃다 보면 웃을 일이 생기고, 행복하지 못해도 미소 짓다 보면 뇌의 반응을 따라서 행복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하박국선지자의 감사가 왜 놀라운 감사였을까요? 첫째는, 고통 중에 감사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없는 중에 감사했기 때문이고, 셋째는, 소망 중에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풍성한 감사로 행복한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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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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