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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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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 오피니언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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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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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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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바이블큐티[황권철 목사]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으라
    시몬아 자느냐 이렇게 하여 주님은 제자들과 겟세마네 동산에 도착했다. 이곳은 주님이 기도하기 위해서 즐겨 찾으시는 동산으로 가룟 유다를 뺀 십 일명의 제자들과 함께 했다. 먼저 주님은 이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었다. 그 중 여덟 명의 제자들을 향해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고 했다. 이들은 주님과 동행한 그룹으로 제자로 부름 받아 이 밤에 겟세마네까지 동행한 제자들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 중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불러 세웠다. 주님은 평소에도 이들을 언제나 자기 곁에 두셨다. 이어 주님은 그들을 데리고 조금 더 나아가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고 하셨다. 주님은 이들이 자신의 고난에 동참해주기를 바라고 계셨기에 이들이 주님의 기도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리만큼 가셔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여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은 기도를 하셨다. 그런데 그들은 깨어 있지 못했다. 주님이 돌아와서 보았을 때 그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주님은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고 했다. 사실 그들은 한 순간도 주님의 기도에 동참하지 못했다. 주님과 함께 기도하지 못했고, 주님의 기도 소리도 듣지 못했다. 주님은 세 번이나 그들에게 와서 확인해 보았으나 올 때마다 자고 있었다. 최후에 주님은 그들을 깨워서 이르시기를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했다. 모든 범사에는 때가 있다. 아무리 피곤해도 깨어서 기도할 때가 있다. 깨어 기도할 때 기도하지 못하면 시험에 빠지게 된다. 결국 베드로는 실수하고 말았다. 기도할 때 기도하지 못한 그는 검을 빼어 휘두르다 말고의 귀를 떨어뜨리는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다. 공중 권세를 잡은 악한 영들과 싸우는 영적인 전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 그런데 베드로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의지하지 않고 육신의 검으로 로마 군병들과 싸우려 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를 책망하시며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라고 말씀하셨다. 나아가 로마 군병들을 향하여도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지 못한 베드로는 혈과 육의 검이 두려워 주님을 멀찍이 따랐다가 넘어지기도 했다. 예수를 멀찍이 좇아 주님은 로마 군병들에 의해 대제사장에게로 잡혀갔다. 그때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고 했다. 심지어 겉옷인 베 홑이불만 두르고 주님을 따르던 한 청년이 군병들에게 잡혀 얼마나 놀랐으면 겉옷인 베 홑이불을 벗어 던지고 벗은 몸으로 도망쳤겠는가?. 그때 베드로는 두려워 뒤에서 멀찍이 따라갔다. 그 날 저녁 주님이 말씀하신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는 말씀 그대로 이루어졌다. 베드로는 멀찍이 따라서 대제사장 가야바 궁전까지 갔다. 추운 날씨인지라 하속들과 군병들이 뜰에서 불을 피우고 있었다. 베드로도 추워서 불을 쬐기 위해 모르는 척하고 그들 곁으로 갔다. 곁에 선 비자중 한 여인이 베드로를 보고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라고 했다. 그때 베드로는 간이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는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고 했다. 아마 그때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당신 지금 무엇이라고 했소 나사렛 예수라고요 예수가 뭐 하는 사람인데요 생전 듣도 보지도 못한 소리를 하고 있소 살다가 보니 별소리를 다 듣겠네’ 하고는 시치미를 뚝 떼고 두 손을 비비면서 태연히 불을 쬐고 있다가 슬쩍 빠져 나와 앞뜰로 갔을 것이다. 얼마를 지났는데 그곳에도 역시 비자 한 사람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고 했다. 이번에는 베드로가 말하기를 내가 갈릴리에 살기는 살았지만 그런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다고 하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베드로에게 다 집중이 되었다. 그러자 곁에 선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고 했다. 그때 베드로는 아하 내가 갈릴리 사람이라고 한 것이 잘못이구나 생각하고 완전 오리발을 내밀기로 작정했다. 예수 ‘그놈은 못 박아 죽일 놈이지 나라도 당장 그놈을 죽일 것이야’ 라며 주님을 저주하고 맹세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닭이 곧 두 번째 울었다. 처음 울 때는 무심코 들었는데 두 번째 우는 소리를 듣는 순간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그는 그만 밖으로 달려 나가 통곡하고 말았다. 그는 철저히 회개한 이후 사도의 반열에 서게 되었다. 베드로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실수도 많았으나 깨달은 순간 회개하고 돌아선 것이다. 우리가 비록 연약하여서 넘어지기도 하고 실수도 잘 하나 그럴 때마다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와야 한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려지느니라”. 사명자들은 칠전팔기 오뚜기 신앙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다른 점이다. 가룟 유다는 후회는 했으나 회개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어서 회개할 기회를 상실하고 말았다. 주님을 멀리하지 말라. 베드로는 멀찍이 주님을 따르다가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했다.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주의 성소를 가까이 하고, 주님의 종들을 가까이 하기 바란다.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라 주를 앙망하면 새 힘을 주시고 독수리의 날개를 달아 주신다.
    • 오피니언
    • 성경
    2022-01-19
  • [최호숙 목사] 자기-합리화(自己-合理化)의 병폐
    자기 합리화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자책감이나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자기가 한 행위를 정당화하는 일 또는 그런 심리적 경향을 말한다. 자기합리화는 스스로 타협점을 찾아가는 길이다. 어떤 때는 무리한 요구를 할 때 빙 둘러서 쉽게 가려고 하고, 어떤 경우에는 힘든 길을 찾아서 갈 때가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자기합리화는 쉬운 길을 걸으려고 한다. 그 쉬운 길이 틀렸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알면서도 무시하고 싶으면서도 나도 모르게 하게 되는 것이 “자기합리화”의 삶이다. 이솝 우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하루는 여우가 포도원에 들어가 포도를 따 먹으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다. 그러나 키가 작아서 껑충껑충 뛰어보았지만 도무지 포도를 따 먹을 수가 없었다. 온종일 안간힘을 다 써 보았지만 한 알도 따 먹을 수가 없었다. 결국은 포도를 포기하고 돌아서야만 했다. 맥없이 돌아서면서 투덜거리기를 “저 포도는 신 포도야 내가 못 먹은 것이 아니라 안 먹은 거야” 이것은 여우가 자신의 마음을 위로하는 자위(自慰)이며, 자기 합리화(自己合理化)일 뿐이다. 자기애의 집착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고 자기 합리화가 심해 분노나 섭섭함을 자기중심적 사고 체계 속에서 극단적으로 표출한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자기 합리화의 예를 보면, 하고 싶지만 시간이 없어, 인맥이 있어야 뭘 하지, 이 나이에 뭘 할 수 있겠어, 오랜 습관이라 버리기 어려워, 맨정신으로는 살 수 없는 세상이야.... 자기합리화는 두려움에서 촉발하기도 한다. 즉, 자신의 잘못에 대한 면피성 변호 행위는 자기합리화에 속할 수 있다. 인생 중에는 자기 합리화로 위로받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 해결도 안 되는 것이며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것이다.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으면 왜 안 되었는가 분석하고 다음 방안을 연구해야 성공자가 되는 것이다. 세계 역사를 움직였던 성공자들은 하나같이 자기 합리화에 빠진 자들이 아니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해도 자신의 기량과 역량을 인정하고 바른 방안을 독창적으로 만들어 창출함으로 성공자가 된 것이다. 바울은 인생과 신앙의 문제 해결을 위하여 자신의 문제점을 하나님 앞에 내놓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갈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데 큰일을 이루어 냈던 것이다.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하였고, 주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마9:23)” 하셨다. 이것을 분석하면 자기 합리화는 불신앙의 죄라는 결론이다. 앞으로의 삶은 자기 합리화에 빠지지 말고 능력의 주님을 의지해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2022-01-19
  • [오성한 목사] 성찬과 비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다. 우리는 하나님께 얼마나 귀중하고, 중요한 존재인지 모른다. 하나님은 우리가 없이 못살겠다고 지신 것이 십자가 죽음이다. 우리 대신 죽을 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다. “나는 죽도록 이 여인을 사랑한다. 나는 이 여인이 없이는 살 가치가 없다”고 만방에 공포한 것이 십자가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고백이다. 온 천하에 나는 이 여인을 사랑하여 하나가 되었다고 공포하는 것이 성찬이다. 성찬은 사랑의 고백이다. 첫 성찬은 사랑하심을 만방에 공포하신 시간이었다. 스스로 하나 되신 시간이다. 우리가 분명한 정체성이 없는 것은 새 언약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진 정체성은 우리 스스로가 만든 정체성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사랑하셔서 주신 정체성을 가져라. 만왕의 왕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단다. 목숨을 걸고 구출하셔야 했다. 성찬은 사랑의 고백이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 되어 주님의 품에 안겨있다. 사랑하여 목숨을 내어주신 신랑을 얻었다. 신랑은 그 날을 잊지 말자고 한다.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전11:25)고 부탁하셨다. 사랑을 기억하는 것이 성찬이다. 우리는 날마다 성찬 속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날마다 성찬을 하라. 성찬을 깨닫는 것은 주님의 사랑에 빠져들 수밖에 없게 한다. 신랑과 신부에겐 비밀이 있다.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우리는 놀라운 창조주와 결혼을 했다. 결혼 서약인 새 언약은 최고의 언약이다. 나를 사랑해서 당신이 스스로 하나 되심을 선포하셨다. 놀라운 비밀이다. 주님이 우리의 신랑이 되었다. 사랑하는 신랑은 언제나 우리와 모든 것을 함께 나누며 함께 한다. 우리가 신랑과 하나 됨으로 신랑이 우리의 죄로 심판받으실 때 우리도 심판을 받았다. 신랑이 부활하실 때 우리도 부활 한 것이다. 신랑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은 나와 하나가 되어 하신 일이다. 예수님과 하나 됨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셨다. 또 우리는 신랑과 함께 일으켜 졌다. 나아가 우리는 신랑과 함께 하늘에까지 함께 앉혔다(엡2:6). 이것은 세상이 모르는 비밀이다. 이제 신랑 되신 예수님이 계신 곳에 우리가 있게 된 놀라운 비밀이다. 얼마나 놀랍고 놀라운 일인가! 이것이 하나 됨의 비밀이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비밀이다. 우리는 “예수님 함께 해 주세요”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그 이상의 복이 이미 주어졌다는 것을 알겠는가?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 내가 있다.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기에 떨어 질 수 없게 해 주셨다. 그분이 찾아 오셨기에 예수님이 계신 곳에 내가 있다. 놀라운 비밀이다. 육신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수용하지 못하고 수용할 수도 없는 비밀이다. 예수님이 하늘 우편에 앉아 계시므로 나도 하늘 우편에 앉아 있다. 성경은 이 정도로 우리의 정체성의 회복을 완벽함으로 말한다. 성경이 이렇게 말하고 있음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 믿음이다. 비밀은 알려 줘야 알 수 있다. 신랑은 말씀을 통해 비밀을 알려 주시고 계신다. 듣기만 하면 된다. 들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하시지 않는가! 우리가 지금 여기 있는 것은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 여기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있다. 우리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는 것에 만족하시지 않으시고 ‘함께’를 넘어 하나 되기를 원하셨다. 그저 단순하게 ‘함께’를 뛰어 넘어 새 언약을 맺으셔서 임마누엘로 우리와 하나가 되셨다. 우리에게 임마누엘의 엄청난 복이 임한 것이다. 우리에게 보여 지고, 깨달아 지고, 다가 올 때 죄에서 벗어난 확신을 갖게 되고,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요한일서 3장9절의 거듭난 사람은 죄에 있지 않는다는 말씀이 이해가 되고 믿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는 말씀 앞에 우리는 담대히 “아멘” 할 수 있다. 복음의 완전한 이해가 없으면 이 성경구절이 많이 혼란스럽다. 비밀이기 때문에 그렇다. “나는 죄인인데, 죄를 짓고 있는데, 죄를 짓지 않는다.”고 성경이 말하니 어렵다. 육으로 생각하니 어려운 것이다. 로마서 6장만 잘 읽어 봐도 우리는 죄에서 분리 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완전히 청산하셨다.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까지도 청산하셨다. 만약 미래는 “네가 잘 살아서 해결하라”고 하셨다면 우리는 가망이 없는 사람이다. 누가 가능할 수 있겠는가? 기독교는 도를 닦는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도를 깨달아 이미 이루어 졌음을 수용하고, 주님과 하나 됨을 인정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임마누엘이다.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것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 기독교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이것이 기독교의 비밀이다. 우리가 가는 곳에 예수님이 계신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우리가 있다. 예수님과 우리는 하나다. 하나이기에 예수님께서 계신 하늘에도 함께 앉아 있다(엡2:6, 사6:1). 우리는 주님과 하나 된 존재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혔다”(엡2:5-6)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고 죄가 되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직접 죄가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청산하셨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롬6:23). 그런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셔서 죽으실 수가 없는 분이시다. 당신께서 스스로 새 언약을 맺으시고 우리와 하나가 되심으로 우리의 죄가 되신 것이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으로 죄가 되셔서 죽으셨다. 우리는 주님과 하나가 되어 죽었고 부활했고 승천했다. 우리는 주님과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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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2-01-19
  • [신재철 목사] 행복한 꼴찌
    시골 초등학교 마을 운동회는 동네잔치다. 일단 먹을 것을 파는 분들이 몰려온다. 커다란 통에서 퍼주시는 아이스크림, 거뭇거뭇한 번데기, 머리통만한 솜사탕까지. 평소에 먹지 못하는 간식을 볼 수 있고 먹을 수 있다. 부모님은 물론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나오셔서 함께 즐기는 집도 있다. 우리 학교는 자체적으로 운영되는 ‘고적대’가 있다. 각종 악기들의 조합도 볼거리지만 가장 선두에 위치한 ‘고적대장’은 시선을 쓸어갈 정도의 매력이 있다. 뾰족한 봉을 흔들며 리듬을 맞추는 모습이 정말 멋있다. 고적대장 누나의 미모는 늘 학교의 원탑이었다. 멋진 복장과 씩씩한 음악은 모든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초등학생으로 저런 음악을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더욱 신나고 신기한 순서는 ‘차전놀이’다. 커다란 기구를 만들어 장수 복장을 한 사람이 선두에 타서 진두지휘하며 두 진영이 싸움을 한다. 직접 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이 되지 않을 듯하다. 놀이의 규칙도 잘 모르겠지만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 커다란 장비를 들고 부대끼는 모습이 정말 대단하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임진왜란의 한 장면이 저와 같지 않을까 생각을 해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아이들이 모여 연습하고 시전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그때 아이들은 정말 강했구나 싶다. 운동회 순서를 즐기다가도 긴장이 되는 순서. 100미터 달기기. 경쟁이 있고 순위가 결정된다. 결승지점에서 손에 찍어주는 숫자에 따라 선물과 부모님의 대우가 달라진다. 어떤 아이는 부모님께 등짝을 맞기도 한다. 달리기를 그리 못하지 않았던 나도 긴장이 되는 시간이다. 줄을 지어 쪼그려 앉아 대기하는데 옆 친구가 신경 쓰인다. 적당히 긴장한 아이들은 재잘거리며 떠들고 있는데 이 친구는 말도 없고 진짜로 얼굴빛이 어둡다. 너무 긴장해 있다. 어디가 아픈지, 불편한 상황인지를 물어보았다. “내가 달리기만 하면 꼴찌해서. 너무 싫고 무서워.” 친구의 답을 듣고 고민이 생긴다. 나는 반장이 아닌가. 가능하면 친구들의 고민을 해결해 줘야 한다. 그리고 결심한다. “**아 걱정하지 말고 뛰어. 내가 같이 뛰어 줄게.” 내 말의 뜻을 다 이해하지 못하였는지 친구는 계속 긴장한 상태로 출발선에 서게 되었다. 화약의 거친 소리가 울리고 우리는 초등학생에게 제법 긴 거리를 전력으로 뛰기 시작한다. 친구는 정말 느렸다. 다리도 팔도 같이 느리게 움직이는 듯 했다. 나는 일단 친구와 보조를 맞추었다. 가만 보니 그냥 두면 이 친구의 꼴찌가 확실하다. 친구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포기하지 말고 달려보자고 말을 건네 본다. 앞선 친구들은 이미 하얀 결승 테이프를 끊었다. 결승 지점에서 기다리던 우리 어머님은 묘한 표정을 지으신다. 아무리 봐도 아들이 열심히 안 뛰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고 이해 못할 순위를 달리고 있었으니. 이미 테이프도 사라지고 결승 라인도 여럿 발자국으로 히끗하다. 어깨를 나란히 하던 친구에게 마지막 파이팅을 외치며 나는 한발을 뒤로 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달리기 꼴찌를 경험했다. 내 손에는 숫자 8이 찍혔다. 머쓱하게 엄마와 마주하고, 어머님의 눈빛은 내게 상황 설명을 요구하는 듯 했다. “친구가 꼴찌하기 싫다고 해서요. 그래서 대신 꼴찌 했어요. 죄송해요.” 엄마가 꼭 안아주신다. 솔직히 혼날 줄 알았는데, 엄마가 등을 두드려 주시며 잘했다 칭찬하신다. 사실 정확히 뭘 잘했는지 모르겠는데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꼴찌도 행복할 수 있음을 알게 된 즐거운 운동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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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19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1 : 삼위일체 하나님의 호칭 문제
    I. 서언(序言) “기독교인의 생활 용어 바로잡기”라는 코너로 그동안 타 종교권의 용어나 일반적인 용어들 중에서 그 용어에 대한 바른 인식과 잘 못 사용하고 있는 내용들을 발췌하여 논하였다. 부족한 필자가 이를 논하였고, 또 앞으로도 계속 하고자 하는 것은 본인이 전공했거나 가르치고 있는 국문학과 실천신학, 또한 비교종교학 등을 총망라한 것과 선진 연구들을 참고한 것임을 먼저 밝히면서 본 호와 앞으로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용어들이다. 이를 논하는 것은 흔히 사용하고 있는 신앙생활 중의 용어들 중에는 잘못 사용하는 용어들이 상당수가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본 호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용어 중의 하나인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존칭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이다. II. ‘하나님’, ‘예수님’,‘성령님’에 대한 용어의 고찰 흔히 ‘하나님, 예수님’이라고 존칭 접미사 ‘님’자를 붙여서 호칭한다. 하지만, 유독 ‘성령’에 있어서는 ‘님’자를 붙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또한 공식적인 서식이나 문자로 기록할 때는 ‘예수님’도 ‘예수’라고 쓰고 있다. 이에 예장 통합교단에서는 2001년 86회 총회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는 존칭접미사‘님’자를 붙여서‘하나님’‘예수님’‘성령님’으로 호칭하도록 결의한 바 있다. 그러나 여전히 ‘님’자의 사용은 바로 사용되고 있지 않으며, 여러 가지 면에서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어떤 신학자는“하나님이란 말은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님’자는 존칭접미사가 아니다.”라고 했다. 즉 하나님으로 말하는 것은 보통명사로 부르는 것이지 존칭접미사 ‘님’자를 붙여서 부르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또한 ‘예수’, ‘성령’ 등은 보통명사가 아닌 고유 명사이기 때문에 ‘님’자를 공식적인 문서에는 쓸 수 없다고 했다. 단지‘가리킴 말’이 아닌 부르는‘부름 말’에 있어서는 ‘님’자는 붙일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한 반론도 있다. 어떤 신학자는 예수님, 성령님이라 부르는 것은 국어학적인 차원을 넘어 삼위일체 하나님의 차원에서 볼 때 3위 모두에 ‘님’자를 붙이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이 신학자는 “자칫 잘못하면, 이 호칭하나로 ‘하나님’은 주권적 사역자로 인정하고, ‘예수님, 성령님’은 보조적 사역자로 전락 할 수도 있다.”라고도 경고했다. 어쩌면 이런 논란은 오히려 더 혼란을 가져다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칭접미사 ‘님’의 문제는 필자의 견해로는 국어학적인 개념을 넘어선 신앙적인 측면의 문제라고 본다. 그런 차원에서 통합교단에서 결의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호칭은 동일하게 ‘님’자를 붙이는 것이 좋다고 본다. 또한 사전적 용어인 ‘하느님’이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인 종교적인 공식적인 용어로 사용되듯이 ‘예수님, 성령님’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교회에서 이런 호칭을 계속 사용하다 보면 종교적인 용어로 국어사전에 등재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용어는 비록 교과서적인 단어로는 사용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어느 신학자의 표현그대로 신앙생활 속의 ‘부름 말’에서는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는 용어이다. III . 맺는 말 이상에서 볼 때 최소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호칭 많 큼은 항상 존칭을 붙여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다.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호칭어 하나의 사용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언젠가 기술한 적도 있지만 절의 승려는 어법에도 없는 ‘스님’이라고 존칭어를 사용하고 있으면서 우리가 믿는 만유의 주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는 ‘예수’,“성령’등의 예사 낮춤말로 사용하는 것은 우리 자체의 모순이요, 하나님께 대단히 죄송한 일이다. 맺으면서 다시 한 번 강조하는 바는 이런 용어 사용자체가 우리의 언어문화를 또 하나의 우리만의 격리된 울타리를 만드는 우를 범하지는 말아야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용어 자체가 우리 신앙의 본질은 아닌, 지엽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바른 언어와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합한 용어 사용은 우리의 신앙적 교양인 동시에 좋은 신앙인의 태도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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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19
  • [기자의 눈] 그리스도인의 '격' 있는 정치참여
    현재 우리나라는 아주 뜨거운 정치 쟁점 가운데 서 있다. 바로 대선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몇 사람이 모이면,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여 가장 바람직하고 행복한 삶을 위하여 정치가 필요하다. 따라서 질서, 협의, 상호존중을 위하여 정치라는 단어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임을 부정할 수 없다. 정치라는 말은 오늘날 많은 사람이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원래 지니는 의미는 상당히 의미 있는 것이다. 정치의 사전적 의미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으로,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질서를 바로잡는 따위의 역할을 한다. 국민이 권력을 가지고 그 권력을 스스로 행사하는 제도. 또는 그런 정치를 지향하는 사상. 기본적 인권, 자유권, 평등권, 다수결의 원리, 법치주의 따위를 그 기본 원리로 한다.'라고 되어 있다. 국가권력의 차원만 아니라 인간이 속한 모든 영역에는 정치가 없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도 많은 국민이 혐오감을 가질 정도로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정치임에도 떠나서 살 수 없는 현실적인 구조에 놓여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 역시 한 국가나 단체의 일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치에 관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당연히 그리스도인은 기도하며 분별력을 발휘하여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의무 중의 하나이다. 특히 성경은 통치 권력에 대하여 하나님이 부여하신 것이라고 말한다(롬13:1-2). 이 말은 하나님께서 모든 통치 권위를 인정하신다는 의미다. 그래서 다양한 방식으로 정부가 생기도록 허용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이 하나님의 정의로 가득 채워지기를 원하신다(시146:7-9). 그리스도인으로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세상에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 책임을 수행하는 일이 바로 ‘정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정치를 바르게 세우는 사명을 위해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정치에 관여할 때는 반드시 몇 가지 기준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첫째는 기독교인을 선택해야만 한다는 지나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늘날에는 명목상 기독교인, 득표를 위한 형식적인 기독교인이라 이름 하는 이들 역시 적지 않다. 때로는 진실한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비전과 국가경영에 관한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를,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으로 무조건 선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정치적인 면에서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이방인도 훌륭하게 쓰임을 받은 경우가 있다. 다만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를 억지로 거역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며, 인간을 뻔히 보이는 파멸의 길로 인도할 가능성이 있는 자를 선택하는 무분별한 정치 행위는 금물이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에 참여하되 성경 말씀이 그 기준이 되어야 하며,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내어 자기가 지지하는 자를 드러내놓고 강요하는 행위는 금지되어야 마땅하다. 더욱이 성경을 이용하여 자기 배만 채웠던 이단자들과 같이, 자신의 억지 주장을 반증하기 위해 성경을 이용하는 반 기독교적인 성향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신대원 모 교수가 작성한 SNS의 글은 성경을 빗대어 특정한 후보를 마치 하나님께서 구별한 자라는 이미지를 주므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사안이며, 성경과 하나님의 권위를 모독하는 심각한 범죄 행위이다. 필자는 신학대학원의 교수라도 정치적 성향이 얼마든지 다를 수 있고, 평소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내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개인적인 성향이나 견해이므로 한편으로 이해하고 넘겼지만, 최근 SNS에 게재한 그의 성경을 빗댄 해석(?)은 결코 좌시할 수 없는 것이다. 고도의 네거티브 전략이라면 무서운 사상이고, 실수라면 납득할 수 있는 해명이 있어야 할 것이며, 평소의 사상이라면 교수직을 당장 내려놓아야 하는 상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가 지지한 후보에 대해 문제를 삼는 것은 삼가 해야 할 것이다. 다만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라는 직임을 생각할 때 정도를 벗어난 것이기에 누가 보더라도 심각한 상황이다. 이 사안에 대하여 본인도 그 심각성을 고려하여 현재는 SNS를 차단하고, 글도 내린 상황이지만 그 여파는 상당히 커져 버렸기 때문에 본인과 관계기관에서는 이해할 수 있는 조치나 해명이 반드시 뒤따라야 할 것이다. 모 교수의 SNS에 상에 성경을 자기 입맛에 맞게 해석한 정치적 행위는 단순한 해프닝이나 해학을 넘어 계명을 범한 처사이다. 십계명의 제3계명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되어 있다. “망령되이”는 히브리어 ‘샤베’로 ‘무익한, 헛된, 거짓된, 가벼운, 경솔한’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가볍게, 거짓되게 부르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대요리문답』 제 113문에는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경우들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특히 그 중에서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거나 오용하거나 왜곡시켜 세속적으로 농담거리를 만들거나, 쓸데없이 문제를 삼거나 헛되게 말다툼하며, 거짓된 교리를 주장하는 것(벧후 3:16, 엡 5:4, 딤전 6:4-5, 딤후 2:14, 17), 하나님의 이름 아래 포함되어있는 피조물이나 어떤 것을 악용하여 부적을 만들거나 정욕과 죄악된 행위에 이용하는 것(신 18:10-11)> 이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거나 오용, 왜곡, 농담거리로 만들지 말 것을 적시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교수는 분명히 제3 계명을 어겼다. 우리의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어겼다. 단순히 ‘독자들이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했다.’라는 해명은 어불성설이며 한낱 핑계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이번 사태는 신대원 교수로서 십계명 중 3계명을 정면으로 거역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준엄한 조치가 반드시 따라야 할 것이다. 김현주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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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17
  • [김성수 총장] ‘메리 크리스마스’와 ‘해피 홀리데이’
    인류의 구원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축하하는 아름답고 복된 계절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 상황 이전 같았으면 교회와 백화점의 성탄 장식과 가끔씩 들려오는 크리스마스 캐롤이 우리 모두의 가슴을 들뜨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가장 즐거워야 할 성탄의 계절도 그저 쓸쓸하고 심지어는 암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월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크리스마스가 있기 때문에 기쁘고 즐거운 달입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는 찬송을 들으면 가슴이 마냥 설레이고 부풀어 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즐거운 크리스마스와 행복한 새해!’(A Merry Christmas and a Happy New Year!)를 기원하는 인사를 주고받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사회가 참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Merry Christmas!"라고 하지 않고 “Happy Holiday!"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카드에도 ‘크리스마스’가 빠지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도 성탄절을 맞아 석가 탄신일과 비슷하게 기독탄신일로 개명을 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나오곤 했습니다.예수 탄신일도 아니고 기독탄신일로 해야 한다는 소리가 계속해서 심심찮게 들려오고 있습니다.석가와 예수의 균형을 맞추겠다는 이상한 발상입니다. 부시 대통령 시절에 미국의 백악관이 140만명에 이르는 대통령 내외의 친구와 지지자들에게 카드를 보내면서 ‘크리스마스 기원’보다 ‘연휴시즌 기원’이라고 표기한 카드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백악관으로부터 카드를 받은 일부 보수 기독교인들이 부시 대통령의 ‘신앙심 부족’에 격분했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이때 한국의 서울시청 옆 큰 빌딩에도 ‘Merry Christmas'라는 말이 없어지고 'Happy Holiday’라는 기원이 나붙어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눈을 뜨고 보니 시중에서 판매되는 대부분의 크리스마스 카드가 ‘Happy Holiday'라는 단어와 'Season's Greetings’라는 어휘를 사용하고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사회 문화적 현상들은 오늘 우리 사회가 극단적 인본주의와 소비주의(consumerism) 가치관에 지배되고 있으며, 극도로 세속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덤파기 작전’(The Gravedigger File)의 저자 오스기니스(Os Guinness)에 의하면 세속화의 가장 현저한 한 가지 특징은 ‘사설동물원 효과’(private zoo effect) 또는 ‘사생활화’(privatization)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사생활화란 인간의 삶을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으로 완전히 구분하여 신앙을 사적인 영역에만 적절성을 가지는 것으로 제한시켜 버리는 가치관과 태도를 의미합니다. 요컨대 세속화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통제하고 채색해야 할 신앙의 침투적기능을 삶의 변두리로 몰아내려고 하는 신앙의 ‘주변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핵심에서 우리 삶의 크고 작은 모든 부분들을 이끌어가야 할 신앙의 기능을 삶의 가장 자리로 몰아내는 것입니다.오늘날 교회도 주변화되어 있습니다.교회가 우리의 삶을 인도하는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마치 우리가 먹는 둥근 피자의 한 조각처럼 되어 있을 뿐입니다.크리스마스 카드와 크리스마스 장식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매리 크리스마스!’라는 단어 대신 ‘연말연시 인사’ 또는 ‘즐거운 휴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추세는 현대 사회의 세속화 현상을 보여주는 한 단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아무리 ‘Happy Holiday!'를 외쳐대도 유대 땅 베들레헴에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슴에 새기지 않고,그분을 우리 삶의 왕으로 모시지 않고는 진정으로 행복한 휴일,Happy Holiday가 있을 수 없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과 참된 소망과 영원한 행복을 줄 수 있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요 3:16)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 세상은 멸망의 길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빼놓고 외치는 ‘Happy Holiday!’는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을 보장해 주는 ‘행복한 휴일’이 될 수 없습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하나 뿐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보내주신 놀라운 사건을 기념하며 기뻐하고 축하하는 계절입니다. 크리스마스 카드와 장식에 ‘크리스마스’를 빼놓으려는 세속화 사회의 교묘한 술책을 보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Happy Holiday!'가 아니라 ‘Merry Christmas!’를 더 높이 외쳐야 할 것입니다. 경남기독신문 애독자 여러분!“Merry Christmas and Happy New Year!” 김 성수 목사(전 고신대학교 총장,현 Evangelia University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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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23
  • [신재철 목사] 나는 남자니깐!
    “피아노 배울래? 태권도 배울래?” 전화기를 앞에 두고 진지하게 질문하시는 엄마. 옆에는 두터운 전호번호부 책이 보인다. 친구들은 유치원, 학원을 다니며 입학 전부터 뭔가를 시작했다. 동네 친구들의 변화에 나도 고민이 되었다. 가방을 메거나 들고 어딘가를 다니는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고, 바빠진 친구들 덕에 조금은 심심했다. 나만의 고민은 아니었나 보다. 엄마의 진지한 물음에 나도 함께 진지해 진다. 피아노 치는 남자가 될 수 있다. 태권도하는 박력 있는 남자도 가능하다. 뭔가 도시적인 느낌을 주는 유치원생이 될 수도 있다. 잠시 행복한 상상을 하며 고민하다가 결정을 내린다. 피아노 치는 남자는 뭔가 쑥스럽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아무튼 그래서 피아노는 패스. 매일 가방을 메고 끌려서 다니는 유치원생은 뭔가 좀 즐겁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남자다움을 선택한다. 어머니께서는 바로 두터운 전화번호부 책을 뒤적이다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관원 상담’ 태어나서 처음 가보는 낯선 장소. ‘태권도장’이라는 곳이다. 습한 나무 냄새가 나고 쿰쿰한 땀 냄새가 배어 있는 공간이다. 밖은 볕이 쨍쨍인데 여기는 뭔가 음습하다. 벽에 붙어 있는 ‘관원 상담’이라는 글자가 크게 들어온다. 문을 열고 들어간 사무실에는 흰 도복을 입은 한 남자가 맞이한다. 머리카락이 좀 길다. 엄마보다 조금 더 짧은 정도? 그리고 엄청 말이 많다. 어머니는 관장님이라 불리는 그분을 향해 인사드리라 한다. 평소 예의바른 나인데, 그때 왜 그랬을까. 남자다움을 보이고 싶었을까? 이 음습한 기운을 떨어버리고 싶었을까?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격한 경상도 억양으로 관장님께 첫 인사를 건낸다. “니가 관장이가” 나는 그렇게 태권도와 연을 맺게 되었다. 친구들이 유치원을 갈 때 태권도장에 가서 한글을 익히고, 구구단을 외웠다. 결코 쾌적하지 않은 나무마루 바닥을 굴러다니며 공부를 하고, 공중에 매달려 있는 샌드백을 치며 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입학하니 태권도로 독보적인 존재가 된다. 1학년이 1품이다. 장기자랑, 체육대회 시범, 심지어 ‘군체육대회’ 태권도 시범단의 가장 앞에서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그 후 체육관은 국민학생 관원이 부흥되었다. 내 영향이 컸다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렇게 30년이 흘렀고 다시 찾은 고향 태권도장은 더 이상 냄새나는 공간이 아니었다. 시설도 깨끗하다. 긴 머리 관장님은 계시지 않았고, 지금의 젊은 관장님은 그의 제자라고 한다. 나도 그분의 제자였으니 ‘사형 사제’인가? 괜한 생각에 웃음이 난다. 그때보다 작아진 샌드백을 툭툭 건드려 보고, 나의 아들들과 바닥을 괜히 굴러보기도 한다. 나는 3품 심사를 앞두고 ‘겨루기’가 두려워 태권도를 그만두었다. 최연소 3품이 될 것이라며 흥분하던 관장님, 기대하던 부모님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하지만 나는 포기했고 아쉬움이 컸는지 30대 중반이 되어 태권도를 다시 시작했다. 결국은 3단 자격을 얻게 된다. 도복을 입고 다녔던 나의 영향을 받아서일까? 나보다 더 어린나이에 태권도를 시작한 아들 둘은 이미 4품, 3품이다. 제법 품새 자세가 괜찮다. 그리고 관장님을 대하는 태도도 나보다 깍듯하다. 우리 아이들의 품증과 도복 입은 모습을 살짝 찍어본다. 이제는 노인이 된 나의 사부, 관장님께 사진을 전송한다. 몸이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큰 기대가 없었는데 돌아온 답에 내 마음이 뭉클하다. “재철이 어릴적처럼 아주 멋지네.” 삽화 작가 : 강신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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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23
  • [김상규의 경제이야기] 마산 해양신도시의 문제점과 당면과제
    마산해양신도시 사업이 졸속으로 추진될 우려가 커지고 있다. 5차례나 입찰한 결과 현대산업개발 컨소시엄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었으나, 그 추진과정이 불투명하고 위법하다는 의혹이 여기저기서 제기되고 있다. 첫째, 심의위원 선정문제다. 공모지침서상 15인 모두를 사업 신청자가 추첨하여 선정토록 되어 있으나, 창원시는 지침서와는 달리 공무원 3인을 ‘당연직’심의위원으로 선정하였다. 더욱이 이들 3인은 단독 신청자였던 GS컨소시엄에 대해 평가항목 대부분을 최하등급으로 평가하여 공정성을 의심받고 있다. 국내 4위 건설사, 22조원 규모의 자산운용사와 초우량 증권사가 참여한 컨소시엄이 재무능력과 사업수행 능력면에서 최하점수를 받은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둘째, 제안내용에서도 5차 입찰에서 낙찰된 현대산업개발 컨소시엄의 안 보다 4차에서 탈락한 GS컨소시엄의 안이 더 나아 보인다. 현대산업개발 컨소시엄은 3,000억원의 토지가격과 40~70층의 건축물과 2.6조원의 총사업비를 제안했다. 반면 GS 컨소시엄은 2,300억원의 토지가격, 4~45층의 건축물과 1조원의 총사업비를 제안했다. 창원시는 GS 안에 대해 고층 공동주택으로 인한 조망권 침해를 탈락의 근거로 제시하였으나, 건설비용이 2.6배나 되고 70층의 고층 건물을 인정하면서 조망권 운운하며 GS 컨소시엄을 탈락시킨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셋째, 현대산업개발 컨소시엄은 지역 업체의 참여비율이 5%로서 대단히 낮다. 40% 이상 지역업체 지분을 보장한 GS 컨소시엄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GS 컨소시엄의 제안 내용을 잘 알면서도 열악한 안을 제시한 현산 컨소시엄을 우선 협상자로 선택한 것은 창원시민의 이익에 배치되는 결정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공모사업에 대해서는 우선 협상대상자의 제안내용을 시민에게 공개해야 하는데 창원시는 사업자의 영업비밀 보장 운운하며 비공개하고 있다. 무엇이 두렵고 어디가 구려서 자료를 숨기고 있는가. 이렇게 자료를 공개하지 않을수록 해양신도시 사업의 입찰의혹은 더욱 증폭되고 제기된 의혹들은 확실한 증거로 굳어질 것이다. 이렇게 많은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창원시는 현산 컨소시엄과의 계약체결을 서둘러서는 안 될 것이다. 더욱이 창원시 의회는 12월 13일 이 문제를 조사하는 특위를 구성키로 결의했다. 시장임기를 6개월도 남겨 놓지 않은 상황에서 사업체결을 서두를 경우 이 사업은 돌이킬 수 없는 손해를 보게 된다. 시의회 특위의 조사가 마무리 되어 모든 상황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질 때까지 창원시는 실시협약을 중단해야 한다. <김상규> 전)제32대 조달청장 전)감사원 감사위원 전)기획재정부 재정관리관 여의도연구원 경제정책기획위원장 김상규의 창원경제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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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6
  • [조희완 목사] 권면할 일들 (행14:19-28)
    한국은행에서 발행하는 오천 원 권 지폐에 <율곡 이이>선생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역사적 인물들 가운데 <율곡 이이>선생은 대단히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그는 13세 때 처음 과거시험에 합격을 한 후 아홉 번이나 연속으로 합격을 해서 “신동”(神童)이라는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29세 때는 장원급제를 해서 젊은 나이에 벼슬길에 올라서 이조판서, 호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냈고, 대제학이라는 높은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습니다. 그가 중요한 관직에 올랐을 때 우리 나라의 정치판은 부패할 대로 부패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목숨을 걸고 임금에게 두 가지 중요한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첫째는, 나라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이전투구(泥田鬪狗)에 몰두해 있는 정치판을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10만 대군을 양성해서 국방의 힘을 길러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의 목숨을 건 충고와 권면을 귀담아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7년 동안 왜군들에게 온 나라가 유린을 당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바른 양심을 가진 한 사람의 목숨을 걸고 하는 권면을 듣지 않고 외면한 댓가가 너무나 참혹했습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을 가진 사람의 권면이나, 바른 양심을 가진 사람의 권면은 귀담아서 듣고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을 당한 까닭은 바로 선지자들의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권면을 받을 줄 아는 사람이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잠13:10)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권면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피차에 서로 권면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 가운데 서로 권면해야 할 일들이 어떤 것일까요? 첫째는, 적극적으로 신앙을 권면해야 합니다.(행14:21-22) 둘째는, 적극적으로 예배를 권면해야 합니다.(히10:24-25) 셋째는, 적극적으로 회해를 권면해야 합니다.(고후5:18-19)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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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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