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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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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 오피니언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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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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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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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김성수 총장] 정직하고 행복한 대한민국
    거대한 대륙 중국이 급부상하고 있다는 것은 더 이상 언급할 필요도 없는 사실입니다. 넓은 국토, 저렴하면서도 풍부한 노동력, 그리고 개혁 개방 정책이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중국의 급속한 경제 성장은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를 긴장시키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면에서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려고 하는 이유도 바로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급부상을 우려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중국은 아직 선진국이라는 평가를 받기에는 무엇인가 모자라는 면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국민 다수가 정직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무관심하다는 인상을 주고 있기 때문이고,또 이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소위 '짝퉁'이 판을 치는 나라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조잡한 싸구려 장난감에서부터 불량식품에 이르기까지 가짜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계란까지도 가짜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천진 난만하고 천사 같은 어린 아이들이 바르는 얼굴 로션에도 스테로이드를 넣어서 애들 얼굴을 기형으로 만들고 있는 나라입니다. 돈만 되면 무엇이든지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납이 들어 있던지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독성 물질이 들어있던지, 조잡하던지 가짜던지 간에 일단 돈만 되면 만들고 팔아서 챙기고 보겠다는 배짱입니다. 법으로 안 되는 일도 편법으로 하면 된다는 의식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합법적 밀수’라는 어이없는 말까지도 자연스럽게 등장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올림픽을 개최한다고 했을 때도 세계 각국은 공장 굴뚝을 통해서 공해를 무차별 뿜어대는 중국이 과연 세계인들의 축제를 개최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까지도 되물었을 정도입니다. '중국'하면 불량품을 연상시키는 부정적 이미지를 불식시키지 않는 한 중국은 선진국의 반열에 끼어 들 수도 없고 그렇게 긴장할 만한 나라로 인식할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도 부정직에 관한 한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경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기업의 차명계좌 비자금, 국세청장의 비리, 주가조작, 학력위조, 입시 부정과 청탁 등 온갖 부정과 부패로 우리 사회가 썩어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부정공화국이라는 말이 전혀 낯설지 않는 것 같습니다. 도덕과 윤리를 가르치고 탐구해야 할 교육계도 예외가 아닙니다. 대학 사회의 표절과 컨닝, 대리출석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중고생들이 사회봉사를 하지 않고도 점수를 받습니다. 봉사활동 프로그램을 통해서 거짓말을 배우는 셈입니다. 수능 시험에서도 부정행위를 교묘하게 자행할 수 있는 최첨단 장비가 개발되고 있다고 하니 정말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청와대로부터 국회,정부 각료,심지어는 초등학교에 이르기까지 부정직의 행위가 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도덕성에 있어서 가장 모범을 보여주어야 할 종교계도 부정직한 행위를 스스럼없이 자행하고 있는 일들이 빈번하게 보도되고 있습니다. 전북일보 권순택 논설위원이 과학 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에 게재된 연구논문을 소개한 내용이 참 흥미롭습니다(전북일보인터넷신문(http://www.jjan.kr 2019, 6.26)미국 미시건대와 유타대, 스위스 취리히대 공동연구팀이 세계 시민들의 정직성 실험을 한 결과입니다. 연구팀은 세계 40개 국가 355개 도시에서 ‘잃어버린 지갑 찾아주기’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실험 대상자는 우체국 호텔 병원 문화관련 기관 등 공공기관과 민영회사 사람들이었습니다. 돈이 들어 있지 않은 지갑과 13.45달러(1만6000원 상당)가 들어 있는 지갑, 그리고 94.15달러(11만원 상당)가 든 지갑 등 3종류, 1만7303개의 지갑을 사용해 정직성 테스트를 진행했습니다. 지갑에는 돈뿐만이 아니라 열쇠와 명함 등도 함께 넣었고 직접 실험 대상자들에게 분실 지갑이라면서 건네주는 방식으로 실시했습니다.그런데,실험 결과는 다소 의외였다고 합니다. 연구팀은 지갑에 돈이 많을수록 사람들이 챙기려는 의도가 강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습니다. 거의 모든 국가에서 지갑에 돈이 많을수록 돌려주는 비율이 높았습니다. 돈이 없는 지갑의 회수율은 평균 40%에 그쳤지만 13.45달러가 든 지갑은 51%, 94.15달러가 든 지갑은 72%로 회수율이 높아졌다고 합니다. 지갑 회수율이 가장 높은 국가는 스위스였고 노르웨이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이 뒤를 이었습니다. 회수율이 낮은 국가는 중국 모로코 페루 카자흐스탄 케냐 순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한때 한국이 세계경제포럼 국가경쟁력 조사에서 23위에서 11위로 12단계나 뛰어올라 선진국형 혁신경제로 진입했다고 요란한 선전을 하기도 했습니다. 비용절감 등 효율성을 추구하는 수준을 넘어 신기술을 자체 개발하는 혁신경제 단계로 들어섰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정직성이 뒷받침되지 않는 경제성장은 모레 위에 세우는 성곽과도 같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선거철이 되면 여야를 막론하고 모든 대선 주자들이 한결같이 경제를 살리겠다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다수 의식 있는 국민들이 바라는 것은 국가의 지도자들이 좀 정직해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을 중국이 주는 부정적 이미지와는 다른 나라, 정직하고 행복한 나라, 그래서 지구촌을 향해서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운 나라로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갖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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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1
  • [김상규의 창원 경제 이야기] 창원특례시 허(虛)와 실(實)
    창원이 특례시가 된다는 소식에 시민들의 가슴이 설렜습니다. 보다 자율적이고 책임감 있는 시정을 펼칠 수 있으리라 기대되었기 떄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감은 최근 급격하게 실망으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속 빈 강정이기 때문입니다. ‘지방분권 시늉’만 낸 셈입니다. 마음은 내키지 않아도 어떤 사람을 예우해야 할 때 쓰는 방식이 명예만 높이고 실속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창원특례시가 그 모양새입니다. 이름만 특례시일 뿐 정작 특례는 전무합니다. 애초 특례시들은 광역시·도에 준하는 재정·행정자치 권한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개정안에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또한,‘특례시’ 명칭조차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습니다. 개정안은 ‘특례시’ 명칭을 주소나 각종 공적 장부에는 사용할 수 없게 했습니다. 사실, 금년 1월에 공포된 지방자치법에는 100만 이상 도시를 특례시로 지정할 수 있는 근거만 있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시행령에 둬야 하는데 최근 입법 예고된 내용을 보면, 기 시행 중인 지방분권법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았을 뿐입니다. 시민들이 기대하는 권한 이양은 없습니다. 인구에 맞는 행정을 하라고 특례시로 지정해 놓고선 권한은 제대로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시민들이 희망하는 조정교부세 인상, 취득세 · 특례시세 전환 등 실질적인 권한 이양은 가능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지방자치법이 통과될 때 다른 자치단체의 재원감소를 유발하는 특례를 두어서는 안된다는 부대 의견이 못박혔기 때문입니다. 물론 특례시 이름을 획득한 것은 명분을 얻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명분에 실리가 따르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게 됩니다. 시민들의 실망만 커질 뿐입니다. 창원특례시를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됩니다. 시민들의 기대를 부풀려서 일시적인 인기를 누리려해서도 안됩니다. 시민들의 희망이 슬픔과 분노로 변해서 부메랑으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특례시 이름에 걸맞는 재정과 조세 등 권한 이양 대책을 마련해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민들에게 특례시 현실을 올바르게 알리고 함께 이루어내자고 손을 내밀어야 하는 것이 창원시장의 역할 아닐까요? 글. 김상규 - 제32대 조달청장, 전 감사원 감사위원 - 여의도연구원 경제정책기획위원장 - 국민의힘 경남도당 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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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02
  • 바이블큐티[황권철 목사] 인생의 위대한 발견이 무엇인가
    헤롯당원의 과오 다음으로 13-17절을 살펴보고자 한다. 주님이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의 과오를 책망하신 사건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헤롯 당원 중에서 사람 몇을 보내어 예수를 시험하고자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주님을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했다. 그래서 주님은 참되시고 조금도 거리낌 없이 하나님의 도를 전하는 분이시다고 아부를 하고는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라고 물었다. 이것은 그들이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라 주님을 올무에 걸려 넘어지게 하기 위함이었다. 가하다고 하면 매국노로 몰아붙일 것이고, 불가하다고 하면 범법자로 고발할 생각이었다. 그때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라 하시고 누구의 화상과 글이 새겨져 있는지를 물으시며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하셨다. 주님은 그들의 중심을 먼저 헤아리고 계셨다.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고 하셨다. 주님은 외식하는 그들을 보시고 계셨다. 입술로 주님을 칭찬하나 그 속에는 무서운 독사의 독을 품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인생은 누구인가? 첫째, 주님을 시험하는 인생이다. 주님은 시험받을 인생이 아니라 친히 시험할 창조자요 구원자이다. 아브라함과 롯을 시험하신 하나님은 인간에게 시험받을 존재가 아니다. 둘째, 주님은 시험할 대상이 아니라 경배의 대상이다. 사단이 주님을 시험할 때 주님은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치 말고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했다. 셋째, 주님은 찬양의 대상이다. 시편 기자처럼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하는 심정으로 감사했다. 사두개인들의 과오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이 주님에게 가서 완전히 참패를 당했다. 이런 소문을 듣고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이 주님을 찾아갔다. 이들은 부활과 내세에 대한 소망이 없는 현실주의자로서 요즘 같으면 철저히 자유주의적인 세속주의자들이다. 그들 역시 기발한 아이디어로 단번에 주님을 ‘TKO’ 시킬 것으로 생각하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어떤 분에게 일곱 형제가 있는데 그 장남이 결혼을 하여 후사가 없이 죽었다. 그래서 모세가 가르친 계대 결혼법대로 그 둘째가 형수를 취했는데 그 역시 자식을 얻지 못하고 죽었고, 그리하여 일곱 형제가 다 그 형수를 아내로 취한 바 되었다. 그 후에 그 아내도 죽었다. 당신들의 말처럼 천국이 있다고 하면 이 여인이 천국에 가서 칠 형제 중에 누구의 아내로 살 것인가 라고 물었다. 그때 주님의 대답은 이러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고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우리가 성경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여 사두개인들처럼 어리석게 행동 할 때가 많다. 그러면 왜 이런 과오를 범하는가? 첫째, 무지해서 깨닫지 못하는 경우이다. 성경은 인간의 지각으로 풀려고 하면 안 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므로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야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게 된다. 둘째, 게을러서 읽고, 듣지를 못해서이다. 우리는 주의 말씀을 날마다 묵상해야 한다. 욥처럼 육신의 건강을 위한 일용할 음식보다 영혼의 양식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규칙적으로 먹어야 한다. 셋째, 우리의 연약성 때문이다. 우리가 무지해서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게을러서 보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연약해서 넘어지는 경우가 많다. 세상이 악하고 우리가 연약함으로 넘어진다. 그래서 날마다 기도함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시편 기자처럼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고백해야 한다. 서기관들의 과오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 그리고 사두개인들까지 주님에게 와서 완패를 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율법에 능한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가서 결판할 생각을 하고 율법의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라고 물었다. 율법은 당시 상황에 따라 그 경중과 우선순위를 달리 할 수 있는 수많은 사례들이 있었기에 어느 계명을 지적하면 거기에 대한 궤변을 늘어놓으려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주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계명에 우선되는 것은 행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율법의 근본적인 목적은 행위로 나타나기 이전에 그 속에 숨은 정신이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섬기거나 그 앞에 절하거나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일을 하거나 그의 날을 범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부모님을 사랑하면 자연히 공경하게 된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면 이웃의 생명을 해할 수 없고, 그들의 육체를 더럽힐 수 없고, 이웃의 물건을 도적질 할 수 없고, 이웃에 대하여 거짓되게 중상 모략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랑은 모든 율법의 강령이요, 가장 우선되고, 큰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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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
    2021-10-28
  • [박무열 목사] 기다림을 통해 얻어지는 지혜
    인간의 가장 큰 지혜는 앉을 자리와 설 자리를 분별할 줄 아는 것이야 말로 인간의 가장 큰 지혜이자 처세술이라 하겠다. 무조건 열심히 한다고 잘하는 것이 아니다.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때를 잘 붙들어야 한다. 하나님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시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깨달으라고 때로는 환란도 주시고 기도의 제목도 주셔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누구에게나 주시지 않는 것은 교만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위해서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광야의 길을 40년이나 걷게 하심은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라고 주신 축복의 연단에 시간들이였다. 우리가 눈물을 흘릴 때에, 나의 힘으로는 안 된다고 무릎을 꿇을 때에 하나님은 그를 세워 주시고 사용하신다. 인간은 풍랑 속에서 자신의 교만이 겸손으로 변하고 그것 때문에 주님을 찾고 그것 때문에 구원에 이르게 된 자들이 허다하다. 신앙은 하나님의 때를 구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태도로 결정된다. 우리가 아멘하고 응답하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 신앙에는 오직 “YES”만 있다. 하나님 말씀 앞에 “NO”라는 단어는 존재 할 수가 없다. 우리는 그분 보다 약하기 때문에 그분을 의지 하며 살아야 할 존재들이다 가끔 보면 믿음으로 기다리며 행동했는데 오랫동안 승리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을 때가 많다. 왜 그런 기다림이 오래 지속되는가? 그것은 내가 조금 더 깨지고 그 후에 더 좋은 것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다. 기다림이 계속되면 힘들지만 기다림이 힘들다는 마음이 있는 것 자체가 아직 내가 깨지지 않고 내 속의 욕심이 걸러지지 않은 증거다. 하나님은 나를 너무나 잘 아신다. 그 하나님께서 아직 내게 문제가 남아 있게 하셨다면 조금 더 나를 깨뜨리려고 하라. 고난과 문제 중에 너무 의문을 품거나 너무 질문을 하지 말라. 여기저기 상담도 너무 다니지 말라. 그런 모습 자체가 아직도 내가 깨어지지 않은 모습이고 여전히 하나님과 씨름하겠다는 모습이다. 더 씨름하려고 하기 보다 더 빨리 항복해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감사하라. 하나님 안에서 항복해야 행복도 따라온다. 아직 미운 사람이 불쑥불쑥 생각나면 그때를 “나를 더 깨뜨리소서.”라고 기도하는 기회로 삼으라. 하나님은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변화되기보다 내가 변화되기를 원하신다. 마리아처럼 나의 소중한 옥합을 깨뜨리라. 내가 깨뜨려야 할 가장 소중한 옥합은 바로 나 자신이다. 육적인 자아(ego)를 깨뜨릴 때 참된 자신(self)을 찾는다. 내게 어떤 기다림이 계속되는 것은 내가 기다리는 것보다 사실상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나의 자아가 깨어지기를 기다리시는 것이다. 내가 오래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하나님은 더 오래 기다리시고 있다는 생각까지 하라. 하나님은 나보다 더 내게 속히 평안을 주기를 원하신다. 그 사실을 기억하고 나를 더 예수님 안에서 깨뜨리고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인생이 되라. 흔히 인생은 고해와 같다고들 말합니다. 이 세상은 마치 바다에 물이 가득하듯 고통이 많고 깊다고 비유된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어도 고난과 환란들이 사라지거나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여러 고난을 다 당합니다. 시험에 실패하기도 하고 실직하기도 합니다. 질병에 걸리기도 하고 교통사고와 같은 각양 사고를 당하기도 합니다. 일찍 죽기도 합니다. 자연재해나 경기 불황이 그리스도인에게는 피하여 가는 것도 아니니 동일한 고난을 겪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이기에 세상에게 미움과 박해와 환란을 추가로 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환란을 면제해준 것이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환란을 당하는 것을 기정사실화 하셨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과 한 가지 다른 것이 있습니다. 환란을 당하되 평안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주셨습니다. 어떻게요? 예수님을 믿고 의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면 환란을 감당할 수 있게 해주거나 피할 수 있도록 해주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방이 모두 막힌 진퇴양란의 곤란한 상황가운데도 위로 향한 방향만 막히지 않으면 된다는 믿음을 갖습니다. 환란이 와도 위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평강으로 그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으면 두려워하는 대신 평안할 수 있습니다. 평안은 믿음과 늘 동행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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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8
  • [최호숙 목사] 영적 풍요 속의 빈곤
    인생을 살다 보면 풍요 속의 빈곤을 많이 체험하게 된다. 풍요 속의 빈곤이란 뜻은 “부유한 사회가 오히려 소비보다는 저축을 더 하려고 하는 경향 때문에 빈곤해질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풍요 속의 빈곤”이란 용어를 처음 언급한 사람이 있었다. 미국 대통령인 케네디로 그는 부통령인 존슨에게 편지를 보내었으며 이 편지 내용은 가장 부유한 나라인 우리 미국이 인구의 1/6이 절대빈곤을 경험하고 있으며 이는 곧 풍요 속의 빈곤이며 이는 우리가 해결 해야 할 문제 중 하나라고 밝혔다. 원인은 수입과 지출의 큰 불균형 때문이었다. 쉬운 예로 어떤 여인이 부잣집으로 시집을 가게 되어 혼자 생각하길 “부잣집으로 시집을 왔으니 이것저것 다 살 수 있고 풍요로운 삶을 누릴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시아버지가 얼마나 짠 구두쇠인지 1,000원짜리 하나 내어 주는 것도 너무나 아까워서 손을 떨면서 줄 정도였다는 것이다. 어떤 할머니는 악착같이 돈을 모아 억대의 부자가 되었는데 독거노인으로 살다가 세상을 떠나게 되어 사망원인을 조사해보니 영양실조로 죽었다는 것이다. 돈은 있으나 그 돈을 어떻게 써야 유익하고 의미가 있고 가치 있는 것인지를 잘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요즘에 포미(FOR ME) 족(族)이 생겨나게 되었다. 포미족이란 “자기 자신에게 가치 있고 만족을 주는 것이라면 다소 비싸더라도 과감히 지출하여 구매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건강(for health), 싱글(one), 여가(recreation), 편의(more convenient), 고가(expensive)의 머리글자를 따온 말이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를 중심으로 분석을 해보면 중직자의 직분을 받고도 성수 주일의 의미를 귀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주일에도 돈 벌러 가는 권사님이 계셨다. 여자 임에도 불구하고 용접기술 자격증을 가지고 있어 남자들보다 돈을 더 많이 받는다는 즐거움 때문에 신앙은 뒷전이고 오직 돈만 벌었다. 교회를 위한 봉사도 선교를 위한 헌금도 친교를 위한 모임 및 찬조도 공동체에서 함께 누리는 유익함을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하고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지금은 병들어 폐인처럼 지내고 있으며 예배 참석도 힘들어 겨우 가물에 콩 나듯 참석하는 상태다. 얼마나 가련한 삶인가? 우리는 여기서 영적 풍요와 빈곤의 삶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요즘은 설교 말씀 홍수 시대, 곧 말씀 풍요시대이다. 본교회 목사님의 설교도 있고 기독교 방송 cts, cbs 설교도 있고 개교회 방송채널, 한창 유행인 유튜브 설도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러나 이 시대 성도들이 영적 풍요 속의 빈곤한 삶을 살고 있다. 설교 듣기보다 세상 것에 취해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표현한 대로 듣기는 들어도 믿음과 결부시키지 않아(히4:2) 내 속에서 영적인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참된 유익이 없으며 의의 열매를 거두지 못하는 영적으로 빈곤한 삶을 사는 시대로 전락하고 있다. 돈은 많은데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곳에 투자하지 못했는가? 많은 달란트 재능은 있는데 썩히고 활용하지 못하여 무익한 삶이었는가? 강단설교 및 방송 채널을 통해 설교는 무한정 쌓여 있는데 내 삶에 영적 양식으로 삶지 못하여 영적 빈곤자로 살고 있는가? 생각의 전환과 더불어 이제는 유익하고 의미 있는 삶에 무엇인가 투자를 할 때이다. 나를 위한 유익한 삶을 지나 타인을 위한 헌신의 삶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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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8
  • [오성한 목사] 최고 시급한 일
    시급한 일이 있다. 미루면 안 될 일이 있다. 8살 정도 되었을 때 일이었는데 개울가에 놀다가 옆을 보니, 흐르는 물살에 검은 머리만 보이는 아이가 떠내려가고 있었다. 5살 아래의 여동생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슴까지 오는 물이었지만, 동생에겐 깊었다. 잊지 못할 기억이다.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급히 뛰어가 동생을 힘껏 들어 올렸다. 물속이라 가벼워 쉽게 안고 나올 수 있었다. 그 후 수년 동안 그 광경이 어른거리고, 사라지지 않았다. 자주자주 떠올라 섬뜩한 생각이 들곤 했다. 만약 그때 동생을 못 보았더라면, 만약 그때 급히 건져내지 못했더라면, 사랑스러운 여동생을 영원히 이 땅에서 보지 못했을 것이다. 종종 그때 일이 생각나곤 한다. 생명을 살리는 일 만큼 급한 일은 없다. 불 신앙은 상대를 무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을 불신앙 이라고 한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했다. 상대를 존중히 여길 때 상대는 기뻐한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큰일 난다. 마귀에게 속아 살다,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인생에 가장 시급한 일이 있다. 구원받는 것이다.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관심 때문이다. 믿는 자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무관심하다면, 그 사람은 복음을 듣지 못할 것이다. 복음을 듣는 본인이 복음에 무관심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복음을 듣는 본인이 무관심한 것은 어쩔 수 없다 할지라도, 믿는 우리가 믿지 않는 자들에게 무관심해 그들이 영원한 지옥에 가게 된다면, 그 책임을 누가 져야 할까? 믿는 자는 시급한 일을 위해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 우리는 전도자로 부름을 받은 시급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인정해 드리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고, 그분이 우리에게 하신 일을 높여 드리고, 인정해 드리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가? 왜 이 땅에 왔다 가셨는가? 십자가를 지신 결과가 무엇인가? 예수께사 하신 일을 그대로 인정해 드리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다. 예수님은 죄 없는 분으로 죄가 되심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고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다(고린도후서 5:21 참고). 예수께서 하신 일을 그대로 인정해 드리는 것이 믿어드리는 것이다. 사단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못 오시도록, 그대를 끊어 놓으려고 온갖 술수를 벌였지만,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매사건 마다 오히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며 지켜 내셨다. “내가 예수를 꼭 보내주마. 내가 메시아를 꼭 보내주마.”하시면서 대가 끊어지지 않도록 지켜 오셨다. 오히려 그러한 사건마다 더욱 분명한 구원의 길이 유일한 한 가지 길밖에 없음을 강조하며 보여주셨다. 사단은 지금도 이 길을 방해하고 있다. 사단의 어떤 방해도 이기고 우리는 예수만 믿어야 하고, 예수만 믿게 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급한 일이다. 우리 안에 잠재운 성령의 능력을 복음으로 깨우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킬 때 10가지 재앙을 통해 보여주신 메시지도 그러하다. 출애굽 할 수 있는 것은 9가지 재앙으로 바로의 마음이 점점 열려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10번째 유월절 사건으로만이 출애굽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메시지다. 예수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선포하는 메시지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숨겨져 있다. 문설주에 피를 바르고, 고기를 먹는 그 날, 도저히 불가능했던 출애굽의 기적을 경험한 것이다. “문설주에 피 바르고, 피 바른 집 안에 들어가서 양고기를 먹어라. 양고기를 먹는데 그냥 먹지 말고 출발할 준비를 잘해라. 허리띠를 띠고, 신을 신고, 지팡이를 잡고, 그렇게 양고기를 먹어라”라고 했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예수께서 하신 말씀대로 내 살과 피를 먹고, 나갈 준비를 하라는 말이다. 피를 발라야 나올 수 있다. 유월절 어린양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죄악에서 건짐을 받는다는 것이다. 다른 길은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시급한 구원의 길은 한 길뿐이다. 구원의 길은 다른 길이 없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죄를 용서했음을 마음에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 구원을 얻는다(로마서 10:10 참고).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만한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사도행전 4:12 참고). 홍해가 앞을 가로막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달려왔지만, 홍해를 건너게 하신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기꺼이 인도하시고, 지키신다는 것이다. 홍해를 건너게 하신다.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게 하신다. 돌아갈 수 없는 강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건널 수 없는 강이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인간이 건널 수 없는 강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너가게 하심으로 마귀의 손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다. 다른 길은 없다. 마귀는 오늘날도 다른 길이 있다고 속인다. 속지 말아야 한다. 시급하게 알려야 한다. 홍해를 건넘은 세례를 상징한다. 죽었다가 부활함을 상징한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었다가 살았다고 말씀하신다(로마서 6장 참고).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을 찬양하자. 홍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장애가 아니었다. 애굽에게는 심판의 장소였다. 홍해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을 가르셔서, 우리의 길이 되셨음을 상징한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히브리서 10:20)였다. 놀라운 구원이 아닌가! 이것을 알리는 일이 시급하다. 모든 사람은 마귀의 손에서 출애굽 해야 한다. 홍해를 건너야 한다. 인간의 힘으로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야 한다. 유월절을 통과해야만 건널 수 있다. 사단은 지금도 이 길이 열리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막아선다. 그러나 포기할 일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를 전해야 한다. 복음만 말해야 한다. 영혼을 구원할 일이 시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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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8
  • [신재철 목사] 좀 씻고 다녀라
    어릴 때 어지간하면 별명 하나쯤 가지고 있다. 이름이나 외모에서 추출된 별명은 유치함의 원액이다. 대부분 그런 별명은 본인은 싫고, 상대는 부르며 즐거워한다. 나 역시 그런 별명이 있다. 별명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몇 안 되는 별명은 모두 유치의 끝판 왕이다. 이름에서 생긴 별명은 ‘재떨이’ 외모에서 생긴 별명은 ‘아프리카 검둥이’ ‘깜상’ 뭐 이런 것이다. ‘재떨이’는 너무 유치해서 기분도 안 나쁜데 피부색으로 생긴 별명은 스스로도 약점이었나 보다. 많이 아프고 힘들었다. 이웃집 누나는 “재철이 아빠는 새 아빠”라 말하고 다니기도 했다. 친아빠는 아프리카에 살고 있는 흑인이고 지금 아빠가 새 아빠라 굳게 믿고 있었다. 누나는 나를 놀리거나 모욕할 의도는 없는 것으로 보였다. 진짜 그렇게 믿고 있었고 그 누나에게 그것은 진실이었다. 우리 가정에는 복잡한 사연이 있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재철아, 잠깐 여기 좀 와봐.” 마당에 있는 수돗가에서 누나가 나를 부른다. 손에는 수건이 들려 있다. 누나가 시키는 대로 옆에 쪼그려 앉으니 나를 갑자기 씻긴다. 처음에는 물로, 다음에는 비누로, 그래도 뭔가 성이 차지 않았는지 갑자기 수세미를 들었다. 그리고 내 얼굴과 손을 닦기 시작했다. 정말 아팠다. 그렇다. 누나는 신념을 확인하고 싶은 팩트 체크의 과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성경의 도마 같은 누나. “어? 안 바뀌네?” 나를 씻기며 무엇을 기대한 것일까? 누나의 갑작스런 행동에 고통보다 더 큰 괴로움과 부끄러움으로 눈물이 났다. 그대로 엄마에게 달려갔다. 엄마는 나를 다독이고는 누나를 불러서 뭔가 설명을 하고 누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누나를 혼내지 않는 엄마가 더 야속했다. 학교에서 신체검사 하는 날이다. 얼마만큼의 탈의가 있어야 한다. 남자들은 팬티만 남기고 다 벗었다. 보기 좋은 몸은 아니지만 굳이 못 벗을 이유도 없었기에 훌러덩 망설임 없이 옷을 벗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부르신다. 뭔가 불편하고 불안한 느낌이 엄습한다. “신재철, 너 좀 씻고 다녀. 이게 뭐니.” 아... 또 내 피부가 문제가 되었다. 엄마의 표현대로라면 내 피부는 그냥 검은색이 아니라 ‘때처럼’ 검다고 하셨다. 얼룩덜룩한 느낌이라나? 나는 그렇게 또 안 씻는 아이, 집에서 관리가 안 되는 아이가 돼 버렸다. 어려운 마음에 설명도 잘 못하고 그렇게 우리 엄마는 또 선생님의 호출을 받게 된다. 학교로 불려온 엄마는 난감하지만 친절한 모습으로 선생님께 상황을 설명한다. 마치 그 누나에게 설명하던 그 모습으로. 괜히 엄마가 야속하다. 내 피부의 색깔이 너무 싫다. 매일 검게 그을려 돌아오는 아버지를 닮아 이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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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8
  • [신간출간] 천국시민헌장 : 마태복음의 진수
    『천국시민헌장: 마태복음의 진수』출간(도서출판 향기)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책을 선물로 받고 목차(Contents)을 살핀 후 단숨에 보았습니다. 변성규 목사는 고신총회 은급재단 이사로, 동창회와 동기회(신대원 41회) 상임총무역으로 크고 작은 일을 도맡아 섬김으로시간적으로 많은 희생을 하는 바나바 같은 인물입니다. 이같은 바쁜 사역에도 목회자의 소임을 다하고 양무리를 기름지게 한 강단사역의 설교를 문서화 해서 우리 세대뿐 아니라 다음세대에까지 전수할 수 있는 목양 탈무드 격인설교집으로 출간해 주심에 경의를 표합니다. 우선 몇 가지 점에서 먼저 추천하고 간단한 서평을 하고자 합니다. 첫째, 품격(Quality)이 있는책을 출간함에 먼저 축하하고 추천합니다. 상인이 상품을 팔 때 상품의 질인 내용도 중요하지만 겉 포장 역시 내용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천국시민헌장: 마태복음의 진수』 란 작품의 표지의 디자인 면에서도 세련미가 넘쳐 우선 독자들에게 호감을 가질 줄로 생각이 되어 추천합니다. 둘째, 목차(Contents)가 일목요연하게 잘되어 있어 추천합니다. 논문을 심사할 때 규격심사와 내용심사를 하는데 사실은 내용보다는 규격심사가 더욱 까다롭습니다. 대부분 Contents에서 판가름이 납니다.변 목사의 설교를 보면 한눈에 Impact가 다가옵니다. 복음의 한 구절도 빠짐없이 강론했고, 어떤 경우에는 중복해서 다룬 점들에서 복음에 나타난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전하고자 한 목회자의 애절함 심정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Contents 만 보고도 독자들이 주석이나 강해집으로 활용함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줄로 알아 추천합니다. 셋째, 설교 구조(Structure)가 잘 되어 있어 추천합니다. 설교 제목 아래 보편적으로 대지가 3-4개 정도로 정하고, 대지 아래 소지가 2-3개로 적절히 구분되어 있어 아주 읽기가 편하게 구성되어 있고, 평이한 내용을 자신이 전공한 헬라어를 잘 풀어주셨고, 독자가 읽기 편하게 음역(영어)까지 달아 주심에 많음 심혈을 기울인 흔적을 보게 됩니다.인쇄의 문체와 활자 크기도 아주 바람직하여 독자들에게 사랑받을 줄 알고 추천합니다. 마지막으로 간단한 서평을 드리고자 합니다. 변 목사는 여러 차례 책을 출간한 경험이 있기에 비교적 문학적 기법이 탁월합니다.특별히 본 설교집은 목회사역 마지막으로 경남법통노회 100주년 기념교회인 「은혜와평강교회」를 담임하여 3년에 걸쳐 선포한 말씀을 문서화 시킨 것이어서 양무리들과 다음세대들에게는 목양 탈무드로 읽혀질 보고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 책의 제목으로 잡은 『천국시민헌장: 마태복음의 진수』 (PP. 98-101) 설교 구성은 이러합니다. 우선 서론에 “무리를 보시고”(1vs) 란 ‘무리’가 이끌러 온 배경을 앞 구절에서 소개해 줌으로 본문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본론에서 대지를 구분함에 있어 “1 자비로운 보증, 2 성실한 경고, 3 완전한 재보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복음의 양면성을 조화롭게 잘 이루고 있습니다.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보증, 경고, 재보증”이란 것입니다. 목회자가 양무리를 목양하고 훈육할 때 권면과 경고와 위로 격려로 세우는 아버지와 어머니 같은 목자의 심정이 녹아져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에 가서는 오늘 은혜와 평강의 목장에 있는 우리가 바로 하늘나라 주인공인 천국시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마태복음을 시리즈로 출간하기로 결단하였기에 개인적으로 드린 멘트 한 두가지 정도를 잘 참고하여 제2권이 속히 나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고려파교회연구소장 황권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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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0
  • [이상규 교수] 호주 장로교회의 형성과 경남지역 선교
    1. 시작하면서 오늘 이렇게 뜻 깊은 2021년 경남선교의 날 감사예배에 초청해 주신 점에 대하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부산경남 지방에 기독교 복음을 전해준 호주장로교와 미국북장로교 선교부의 활동을 소개하되, 특히 부산경남지방 선교를 꿈꾸며 이 곳에 왔던 첫 호주 선교사들의 경남지역에서의 선교활동에 대해 소개할까 합니다. 저는 이 분야 최초의 연구자로서 호주의 여러 도서관, 고문서관을 다니며 각종 문헌을 섭렵하였고 여러 자료를 수집하였으므로 여러분들에게 보여드리고 싶지만 오늘은 편안한 마음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는 미국 북장로교회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하였고 주로 부산 경남지역에서 활동했는데, 이들의 활동에 대해 말씀 드리기 전에 먼저 부산과 경남 지역에서의 기독교의 연원을 소개하고, 어떻게 부산경남 지방은 호주장로교와 미국북장로굫회의 공동선교구역이 되었는가를 말씀리고자 합니다. 그 후에 호주 선교부를 중심으로 이 지방에서의 활동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2. 부산, 경남지방으로 전래되는 기독교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성경반포사업 부산을 포함한 경상남도 지방에 복음을 전하려는 최초의 노력은 스코틀랜드 성서공회가 시도한 성경반포사업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는 1882년 심양(瀋陽)의 문광셔원에서 로스역(Ross Version) 『예수 셩교 누가복음 젼셔』와 『예수셩교 요안나 복음젼셔』를 각각 3,000권씩 출판했는데 이중 3분의 1을 일본 요꼬하마 주재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총무인 톰슨(J. Austin Thomson)에게 보내어 조선에 반포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본주재 동 성서공회는 1883년 일본인 나가사까(長坂)를 부산에 파견하여 성경반포사업을 시작했는데, 이 일은 이 지방에서의 최초의 복음운동이었습니다. 이때의 반포사업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때의 결실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월푸의 조선선교 시도 부산과 경남지방에서의 두 번째 기독교 복음과의 접촉은 영국성공회의 영국교회선교회(Church Missionary Society) 소속 월푸(Archdeacon John R. Wolfe) 선교사를 통해서였습니다. 월푸는 중국에서 사역한지 22년이 지난 1884년, 청불(淸佛)전쟁으로 야기된 불안한 정세 하에서 건강이 좋지 못해 의사로부터 일정기간 휴양을 권고 받고 일본 나가사끼(長埼)를 방문한 후, 1884년 10월 24일경 부산을 방문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당시 부산에는 약 2천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고, 일본인 거주지 내에 은행과 병원, 그리고 학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푸초로 돌아간 후 ‘남지나 선교회’(The South China Mission) 연례 지방대회에서 조선방문의 결과를 보고하면서 조선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호소가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1885년 11월 말경 두 사람의 중국인 전도자와 함께 다시 부산에 왔습니다. 이것이 이 지방에서의 선교를 위한 두 번째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선교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고 아무런 기록도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때는 아직 기독교 선교가 금지되어 있었고 활동도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선교활동이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의 부산 방문은 후일 두가지 결실을 가져오는데, 첫째는 한국에서의 성공회 선교운동의 한 동기를 부여하였고, 둘 째는 호주 장로교의 한국 선교의 길을 열였습니다. 즉 월푸는 조선 방문 후 한국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서신을 보냈는데, 이 편지는 멜버른의 코필드(Caulfield)에 위치한 성 메리교회(St. Mary Church)의 메칼트니(H. B. Macartney) 목사가 편집, 방행하는 「국내 국외 선교」(The Missionary at Home and Abroad)에 발표되었고, 이 호소는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의 내한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습니다. 게일과 하디의 부산에서의 선교 우리 지방에 왔던 세 번째 개신교 전도자는 캐나다인 게일(James Scarta Gale, 奇一, 1863-1937)이었습니다. 그는 토로토대학 YMCA의 파송으로 내한하여 1889년 7월부터 1891년 봄까지 부산에서 사역하였는데, 그는 한국의 역사와 언어, 풍습에 관한 주목할 만한 저서를 남겼던 학자이기도 했습니다. 게일이 부산에서 일했던 기간 중의 선교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당시 상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의 부산 체류기간이 짧았고 특히 부산에서 체류 기간 중에는 한국어 공부에 전념했던 점을 고려해 볼 때 선교를 위한 구체적인 노력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단지 부산에 주제한 첫 개신교 선교사로써 부산과 경남 지역 선교를 위한 탐색과 연구의 기간을 보낸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 뒤 역시 캐나다 출신 의사인 하디 의사(Dr. Robert A. Hardie) 부부가 부산지방에서의 의료 활동을 했습니다. 토론토 의과대학 출신인 그는 내한하여 1892년 11월 부산을 떠나 원산으로 가기까지 약 2년 동안 부산에 체류하며 게일과 함께 선교사역에 종사하였습니다. 이들이 부산지방의 초기 선교사들이었습니다. 데이비스의 내한, 부산도착, 죽음 그러다가 1889년 10월 2일 호주 장로교 출신인 해리 데이비스(Rev. J. H. Davies, 1856-1890)가 부산으로 오게 되는데, 이것이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의 한국 선교의 시작이 됩니다. 이 때는 알렌이 입국한지 5년이 지난 때였는데, 데이비스는 누나인 메리와 함께 1889년 8월 21일 멜버른을 떠나 한국으로 향했는데, 10월 2일 부산을 거쳐, 10월 4일 인천에 도착했고, 그 다음날 오후 늦게 서울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때로부터 5개월 간 서울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인천, 과천, 수원, 공주를 경유하여 경상도 땅을 지나 1890년 4월 4일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20여일 간에 걸쳐 약 500km에 달하는 긴 여행을 마치고 목적지인 부산에 도착했을 때는 무리한 도보 여행으로 인해 폐렴에 감염되었고 천연두까지 겹쳐 마지막 5일간은 아무 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데이비스가 부산에 도착한 날은 1890년 4월 4일 금요일이었는데, 그 다음날인 4월 5일, 오후 1시경 부산에서 사망합니다. 한국에 온지 6개월 된 때였습니다. 부산지방 선교의 꿈을 안고 부산으로 내려왔으나 그 꿈은 그 자신의 생애 속에는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그의 죽음은 호주 장로교회의 한국선교, 곧 부산, 경남지역 선교의 동기가 됩니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미국 북장로교 부산지역 선교 그렇다면 미국북장로교는 어떻게 부산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을까요? 본래 미국북장로교 선교부의 초기 선교사들은 서울에 정착하였습니다. 알렌이나 언더우드, 헤론 등이 그들입니다. 그런데 선교사 수가 많아지자 서울 외의 다른 지역에도 선교지부를 설치하기로 하고 두 지역을 개척하기로 했는데, 그 지역이 평양과 부산이었습니다. 평양 지역을 개척하기 위해 사무엘 마펫(Rev. Samuel Moffett)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부산지부를 개척하기 위해 파송된 사람이 윌리엄 베어드(Rev. William Baird)였습니다. 그래서 마펫은 1891년 평양으로 가서 사역한 결과 1893년 평안도 지방 최초의 교회인 장대현교회가 설립되었고, 후에 장대현 교회에서 평양야서문밖교회, 평양남문밖교회, 창동교회,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산정현교회가 1906년 개척된 것입니다. 부산으로 파송된 윌리엄 베어드는 19891년 9월 부산으로 와 부산 영선현에서 두 필지 땅을 사서 선교관을 건축하고 선교하기 시작하여 미국북장로교 선교부도 부산에서 사역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부산은 미국 북장로교와 호주장로교 공동선교구역이 된 것입니다. 물론 양 선교부 간의 협의와 합의를 거쳐 선교지역 분담이 이루어졌습니다만, 호주 선교부는 부산진, 고관을 거쳐 경남동부지역, 곧 해운대 기장 언양 양산 울산 등지를, 미국북장로교회는 부산의 서부지역인 부산 중앙동 영도 남포동 김해 밀양 등지에서 활동했습니다만 그 후에 선교지역 더 확대됩니다. 참고로 북장로교 부산경남지방 선교에 대해 더 말씀드리면, 베어드에 이어 두 번째로 부산에 부임한 북장로교선교사는 휴 브라운(Dr. Hugh M. Brown) 의사 부부였습니다. 이들은 1891년 12월에 부산에 와서 자기 집에 작은 시약소(dispensary)를 설치하고 의료선교사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였으나 브라운 의사의 예기치 못한 결핵의 감염으로 부산에 온지 2년 후인 1894년 1월 8일 귀국했고, 본국으로 돌아간 후 2년이 못 되어 1896년 1월 6일 뉴욕에서 병사했습니다. 1893년 11월에는 어빈의사(Dr. Charles. H. Irvin, 漁乙彬)가 내한했는데, 이듬해 3월 부산으로 와 브라운의 뒤를 이어 의료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어빈은 이때로부터 1911년까지 약 17년간 선교사로 일하고, 그해 4월 1일자로 선교사직을 사임합니다. 그러나 그는 동광동 5가 영선고개에 어을빈의원을 개원하고 계속 부산에 체류하였습니다. 1895년 5월 29일에는 아담스(Rev. James E. Adams, 安義窩) 부부가 부산에 파견되었는데, 그가 1897년 대구로 옮겨가 대구지부를 개척하였고, 1923년까지 한국선교사로 일했습니다. 그 후에 부산에는 미국북장로교의 로스목사 부부(Rev. Cyril Ross, 盧世永, 1897-1902), 시더보탐 목사(Rev. Richard H. Sidebotham, 史保淡, 1900-1909) 부부, 스미스 목사(Rev. Walter E. Smith, 沈翊舜, 1902-1912) 부부, 윈목사(Rev. George H. Winn, 魏喆治, 1909-1914) 목사 등이 활동했는데, 북장로교는 1913년 말까지 일하고 부산경남지방에서 완전히 철수합니다. 호주 선교사 수가 많아지니 북장로교는 구태어 부산경남지방을 고집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동안 미국 북장로교가 부산 경남지방에 파송한 선교사 수는 21명이었는데, 1914년 이후에는 부산과 경남 전 지역이 호주 선교부 관할이 되었고 호주 선교의 영향 하에 있게 됩니다. 저는 어떻게 경남지방이 호주장로교와 미국북장로교 공동 지역이 되었는가를 말씀 드린 것입니다. 2.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PCV)의 형성 영국인의 이민으로 시작된 호주는 사회의 모든 분야가 영국의 영향권 하에 있었고, 특히 장로교회의 경우 모교회(母敎會)라고 할 수 있는 스코틀랜드교회의 역사와 유산을 답습, 계승하고 있습니다. 빅토리아주의 경우 스코틀랜드에서 이주해 온 첫 목사는 제임스 클로우(James Clow) 목사였는데, 그는 1837년 10월 24일 빅토리아주에서의 첫 예배를 인도하였고, 그 다음해인 1838년 1월 28일 시드니로부터 멜버른으로 이주해온 제임스 폽스(James Forbes, 1823-1851) 목사는 멜버른에 정착하여 공식적으로 목회를 시작한 첫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의 공식적인 첫 예배 인도는 1839년 2월 3일이었다. 이때로부터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여러 교파의 목사와 신자들이 이주해 와서 각기 다른 교회조직을 유지해 오다가 1850년대에는 이들 교회 조직들 간의 교단 통합을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빅토리아에는 대표적인 세 개의 장로교회(敎團)이 있었는데, 첫째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The Established Church of Scotland)를 계승한 교회로서 1840년부터 1854년까지는 ‘호주대회’(Synod of Australia)로 불리다가 1854년 4월 ‘빅토리아대회’(Synod of Victoria)란 이름으로 독립한 교회, 둘째는 스코틀랜드에서 1843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 분립하여 ‘스코틀랜드자유장로교회’(Free Church of Scotland)가 형성되자 이로부터 3년 후인 1846년 호주 빅토리아주에서도 ‘호주대회’부터 분립하여 조직된 ‘빅토리아 자유 장로교회’(Free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 셋째로는 1847년 이래로 스코틀랜드의 연합장로교회(United Presbyterian Church of Scotland)의 목사들이 빅토리아로 이주해 옴으로 1850년 1월 22일 조직된 ‘빅토리아 연합장로교회’(United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가 그것입니다. 이 세 장로교단은 약 10년간의 교회연합을 위한 토의와 회합 거쳐 1859년 4월 7일 드디어 ‘빅토리아 장로교회’라는 이름하에 통합하게 됩니다. 물론 세 교단의 완전한 통합은 아니었지만 매우 획기적인 연합이었습니다. 이렇게 조직된 교회가 빅토리아주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인데 간단하게 PCV라고 부릅니다. 이 교회는 호주 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장로교단이 되었고 후일 경남선교를 주도한 교단이 된 것이다. 비록 PCV는 1859년에 구성되지만, 그 연원은 제임스 클로우(James Clow) 목사가 호주 빅토리아주에서 첫 예배를 인도했던 1837년이기 때문에 과거 호주장로교회는 이때를 기점으로 하여 1937년 호주 장로교 100주년 해사를 했고, 당시 경남지방의 대표적인 목회자였던 이약신 목사를 초청하여 강연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그로부터 곡 50년이 지난 1987년 제가 멜버른 교외의 하이델베르그라는 곳의 장로교회에 갔을 때 70세가 넘으신긴 장로님이 저 더러 “약신 리를 아느냐”고 물었는데 그 분은 청년 때 이약신 목사의 설교와 강연을 들었다고 이야기 하여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그런데 근년에 와서는 PCV가 조직된 1859년을 기점으로 2009년 호주장로교회가 150주년 행사를 했는데 부족한 저를 초청해 주어 짧은 인사를 하고, 또 저의 영어 책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바 있습니다. 3. 빅토리아장로교회의 선교운동과 한국선교의 동기 저명한 교회사학자인 케네스 라토렛(K. S. Latourette, 1884-1968)은 19세기는 의심할 여지없이 ‘기독교 선교의 위대한 세기’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 시기의 선교운동은 특히 독일 경건주의 운동, 모라비안들의 선교 열정, 앵글로 색슨 세계의 영적 각성이 아우러져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비기독교 세계로 혹산되었습니다. 그래서 19세기 이후 선교운동이 큰 영향을 기쳤고 여러나라에 영향을 주었는데, 호주교회는 이런 19세기 영국을 중심으로 전개된 선교사상 혹은 선교운동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빅토리아 장로교회(PCV)가 총회 내에 해외선교부(Foreign Mission Committee)를 조직했을 때는 교단이 조직된 이듬해인 1860년이었습니다. 당시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동기에서 선교운동이 시작되었는데 당시만 하더라고 ‘해외선교’(Foreign Mission)란 말보다는 ‘이교도 선교’(Heathen Mission)란 말이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당시 빅토리아 장로교회는 크게 두개 지역, 곧 지금은 바누아투(Vanuatu)라고 불리는 뉴 헤브리디즈(New Hebrides)와 호주 원주민 선교에 치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850년대 소위 골드 러쉬로 인한 중국인의 대거 유입 이후에는 빅토리아주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에 대한 선교가 제3의 선교로 대두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빅토리아 장로교회가 조직된 지 약 30 여년 후인 1889년 데이비스를 한국에 파송하게 되는데, 이때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선교운동에 영향을 몇 사람의 영웅적인 선교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존 게디(John Geddie), 하겐아우어(F. A. Hagenaur), 존 페이톤(John Paton, 1824-1907) 같은 선교사였습니다. 이들이 빅토리아 선교운동의 선구자들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페이톤은 선교지의 사회개량운동에도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선교사역과 활동은 빅토리아 교회의 선교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가 1865년 선교기금 확보를 위한 일환으로 영 연방에 속한 여러 국가들을 순방하던 중 멜버른을 방문했는데, 이때의 강연과 집회를 통해 호주 교회에 선교에 대한 각성과 선교적 책임을 환기시켜 주었고, 유능한 선교사들을 발굴하는 개기가 됩니다. 후일 부산에 와서 나병환자들을 위해 일한 매켄지(J. N. Mackenzie), 마산 창신학교 교장을 지낸 리알(D. M. Lyall), 마산에서 의신여학교 월영유치원에서 가르치며 문창교회 주일학교 와 반주자로 일한 엘리스(C. Ellis) 등은 페이톤의 영향으로 선교사로 자원하였던 이들입니다. 1925년 이전까지 경남도청 소재지였던 진주에 세워진 ‘배돈병원’은 페이톤의 아내였던 마가렛 화이트크로스를 기념한 병원(Mrs. Margaret Whitecross Paton Memorial Hospital)이었습니다. 페이튼이라는 여어이름을 한국말로 적당히 취음하여 배돈으로 불렀던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선구적인 선교사들의 활동과 선교보고, 선교운동은 1890년대 호주장로교회에도 큰 영향을 주었고 이후 한국선교를 가능케 했던 정신적 동력이 된 것입니다. 호주교회가 한국선교를 시작하게 된 보다 직접적인 동기는 해리 데이비스(J. H. Davies)의 자원과 한국에서의 짧은 사역, 그그리고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었습니다. 호주장로교회는 한국선교에 대한 아무런 계획이 없었습니다. 오직 바누아투, 빅토리아 주에 거주한 중국인, 그리고 호주 원주민들이 선굣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데이비스가 난데없이 한국선교를 자원하였을 때 빅토리아 장로교회는 한국에 대해 알지도 못했고 선교 구상도 없었습니다. 한국은 호주 기독교 세계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고, 조선은 여전히 입국이 허락되지 않는 땅(terra incognito), 은둔국(Hermit nation)이었습니다. 그래서 데이비스가 조선으로 가겠다고 하니 그를 선교사로 인준은 했으나, 선교비를 지원하지는 않았습니다. 재정적으로 후원해 준 이는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휘하 조직인 몇몇 청년연합회 회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데이비스의 자원과 내한(1889년 10월 2일), 그의 갑작스런 죽음(1890년 4월 5일)은 호주장로교회가 한국에 선교사역을 시작하는 중요한 동기가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의 헌신과 죽음이 교회의 선교 방향을 바꾸게 된 것입니다. 그러하다면 데이비스는 어떻게 조선을 생각하게 되었을까요? 데이비스가 한국선교를 자원한 배경에는 중국 복주(福州, Foochow)에서 선교하던 월푸(John R. Wolfe) 주교의 영향이 컸습니다. 영국교회 선교단체인 ‘영국교회선교회’(Church Missionary Society) 소속 선교사였던 월푸는 1885년과 1887년 한국 부산을 방문한 일이 있는데 그는 한국방문 결과를 보고하면서 한국선교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호소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씨 엠 에스 선교관계자의 관심을 얻지 못했고, 그의 편지는 호주로 보내졌는데 당시 멜버른의 코필드에 있는 성 메리교회의 메칼트니(H. B. Macartney) 목사가 편집, 발행하는 『국내·국외선교』(The Missionary at Home and Abroad)에 발표되었습니다. 당시 데이비스는 카오필드에 있는 성 메리교회(성공회)에 출석하면서 메칼트니 목사와 깊은 친교를 맺고 있었습니다. 월푸의 이 편지가 데이비스에게 한국에 대한 관심과 소명을 갖게 한 것입니다. 인도에서 단기간(1876-1878) 선교사로 일한 바 있는 데이비스는 본래 인도로 돌아가려했으나 월푸의 편지를 읽고 한국으로 오게 된 것이다. 데이비스가 읽고 조선 선교를 자원하게 했던 그 편지를 제까 연전에 「기독공보」에 소개한 바 있습니다. 데이비스가 한국에 오고 사망 한 이후 불과 10여년이 지난 191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은, 한국보다 50년 앞서 시작된 뉴 헤브리디즈나 중국인 혹은 원주민 선교를 제치고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가장 성공적인, 가장 중요한, 가장 역점을 두는 선교지역(mission field)이 되었고, 1920년대에는 빅토리아장로교회의 해외 선교비의 70% 상당이 한국 선교를 위해 사용될 정도가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예산배분은 한국선교의 성과와 관심을 반영한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일련의 과정에서 한국, 아니 부산경남선교운동이 시작되었고, 이 선교운동이 유지, 계승, 확장되는 과정에서 빅토리아장로교회 ‘해외선교부’와 함께 선교사 파송단체였던 ‘청년연합회’(Young Men's Fellowship Union)와 ‘여전도회연합회’(Presbyterian Women's Missionary Union)의 기여와 역할이 지대하였습니다. 4. 첫 선교사 데이비스의 내한 이제 내한한 첫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의 데이비스와 그의 큰 누나 메리(Mary T. Davies)는 미국 북장로교회의 알렌 의사가 입국한지 5년 후인 1889년 10월 2일 부산항으로 입국합니다. 이때로부터 호주장로교회는 1945년 해방이전까지 78명이, 해방 이후 1947년에 다시 한국선교를 계시하였고, 1977년 이후에는 호주 연합교회가 한국선교를 계승하고 있습니다. 데이비스가는 영국에서 온 이민자인데, 1856년 뉴질랜드 왕가라이(Wangarai)에서 출생하였습니다. 4살 때인 1860년 부모를 따라 호주 빅토리아주로 이주했습니다. 1876년, 곧 그의 나이 20세 때 호주 CMS(영국교회 선교회) 파송으로 인도 선교사로 인도에서 21개월간 일했습니다. 그러나 건강상의 이유로 1878년 5월 21일 멜버른으로 돌아왔고, 그 후 멜버른대학에서 수학하고 1881년 4월에는 코필드문법학교(Caulfield Grammar School)을 설립하여 1888년까지 교장으로 있었습니다. 그는 다시 인도로 돌아가기를 원했으나 앞서 언급한 월푸의 편지를 읽고 조선이 더 시급한 선교지라고 확신하고 조선선교를 자원하게 된 것입니다. 성공회 신자였던 그는 한국 선교사가 되기 위한 목적으로 성공회를 떠나서 빅토리아주 장로교회로 이적하였는데, 이때 투락이란 지역의 투락장로교회의 젊은 목사였던 이윙(John F. Ewing)의 역할이 컸습니다. 그는 데이비스를 장로교회로 인도하였고, 1888년 11월 22일 장로교 총회에 전(前)일본 선교사였던 딕슨(W. G. Dixon)과 맥크라렌(S. G. McLaren)을 포함하여 17명의 지도급 총대원들의 서명을 받아 데이비스를 한국 선교사로 갈 수 있도록 인준을 요청한 것입니다. 그 결과 데이비스가 목사안수에 필요한 기본교육을 마치고 시험에 합격하면 목사로 안수하기로 가결하게 됩니다. 데이비스는 ‘멜버른남노회’의 목사후보생으로 허입되었고, 안수에 필한 공부를 하기 위해 스코틀랜드 에딘버러로 갔고 에딘버러의 뉴칼리지(New College)에서 6개월간의 신학공부를 합니다. 필요한 과정을 마치고 1889년 5월 13일 멜버른으로 돌아왔고, 멜보른 남노회가 실시한 목사고시에 합격합니다. 그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빅토리아주 장로교회 설립 50주년을 기념한 특별기간 중인 1889년 8월 2일 청년연합회의 지원을 약속받고 8월 5일에는 목사안수를 받게 됩니다. 목사안수를 받고 선교사로 임명된 그는 청년연합회의 재정지원 하에 한국선교사로 향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의 누나인 메리(Mary T. Davies)도 동행하였다. 많은 이들이 메리가 데이비스의 동생이라고 말하는데 동생이 아니라 누나입니다. 메리는 뜻있는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멜보른교외기독교연합회’(Suburban Christian Union)의 지원 하에 함께 한국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데이비스 남매는 1888년 8월 16일 금요일 저녁 멜버른 시내 YMCA홀에서 거행된 환송회를 끝으로 8월 21일 멜버른을 떠나 시드니로 갔고, 그곳에서 며칠을 보낸 후 다시 8월 28일 증기선 ‘치난(S. S. Tsinan)호로 시드니를 떠나 한국으로 향하는 긴 여정에 올랐습니다. 이로부터 40여일 간에 걸친 항해를 끝내고 10월 2일 이른 아침 부산항에 입항한 것입니다. 항해 도중 데이비스 남매는 일시 본국에 귀국했다가 다시 임지인 서울로 돌아가는 당시 육영공원(育英公院) 교사였던 벙커(D. A. Buncker) 내외를 만나 한국의 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벙커의 안내로 부산을 둘러본 후 다시 출항하여 4일 오전 11시에 제물포에 도착하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말을 타고 인천을 떠나 그날 오후 늦게 서울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때로부터 북장로교의 언더우드와 함께 거하면서 서울에서 5개월을 지내게 되는데, 이 5개월간 데이비스는 한국어 공부에 주력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변 지역을 순회하고 어더우드와 같이 전도여행을 다닌 일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조선어 공부에 열중하였고 그 때 공부한 노트 일부를 제가 복사하여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조선말 공부에 바빠 가족들에게 편지 쓸 시간조차 없다”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약 5개월 후 일상의 대화가 가능하게 되었을 때 그는 누나는 서울에 남겨두고 부산으로의 여행을 시작합니다. 그는 바울의 선교 원리를 따라 일단 선교사가 없는 지역으로 가서 일하기로 작정하고, 한때는 군산지방으로 가서 선교할 것을 신중히 고려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만일 군산으로 갔었다면 호주교회의 한국 선교의 판도가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데이비스는 1890년 3월 14일, 어학 선생과 하인, 그리고 매서할 문서와 약간의 약품 등을 준비하여 서울을 떠나 수원, 과천 등 경기도 지방과 공주 등 충청도 지방을 거쳐 경상도 지방까지 300마일에 이르는 약 20일 간의 답사여행을 마치고 4월 4일(금) 목적지인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천연두에 감염되었고, 곧 폐렴이 겹쳐 부산 도착 다음 날인 4월 5일 34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조선 땅을 밟은 지 6개월,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183일만이었습니다. 그 부산에 체제하던 게일은 데이비스의 시신을 부산항이 굽어보이는 부산 동광동 뒷산인 복병산에 안장하였습니다. 이 때의 상황을 서울에 남아 있는 메리에게 알리는 게일의 긴 편지가 남아 있습니다. 데이비스의 죽음과 함께 그의 누나 메리도 폐렴으로 얼마간 고생했으나 헤론 의사의 치료로 회복한 다음 한국을 떠나 그해 7월 18일 멜버른으로 돌아감으로써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한국선교는 끝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데이비스의 죽음은 호주 교회의 한국선교를 시작하는 동기가 됩니다. 선교사는 살아서도 일하지만 죽어서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5. 선교사파송기관 호주 장로교회의 한국선교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데이비스의 개인적인 자원과 결단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이후의 한국선교는 빅토리아장로교회 ‘청년 연합회’(YMFU)와 ‘여전도히연합회’(PWMU)의 후원과 지원으로 계승됩니다. 빅토리아장로교 총회 해외선교부는 이들 두 기관보다 후기에 한국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하고, 두 선교기관을 관장하게 됩니다. 청년연합회의 창립과 첫 선교사의 파송 먼저 청년연합회에 대해 소개하겠습니다. 청년연합회는 맥길리버리(McGillivray) 씨의 발의로 1888년 조직되었습니다. 처음에는 Young Men's Sabbath Morning Fellowship Uniond라고 불렸는데 1876년 뉴 사우스웰즈(NSW)주에서 처음 조직되었고, 그후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었는데 빅토리아주에서는 1888년 7월 27일 준비모임이 소집되어 회칙 초안 등 총회 조직준비에 착수하였고, 동년 8월 17일에는 11개 개체교회 청년들을 창립위원으로 하여 역사적인 빅토리아주 청년연합회를 조직하게 됩니다. 이때 로버트 길레스피(Robert Gillespie)는 회장으로 선임되었고, 빅토리아주 장로교 신학교의 초대교수였던 렌틀(J. Laurence Rentoul), 투락교회의 이윙 목사(J. F. Ewing), 호손(Hawthorn)장로교회 장로 던칸 러브(Duncan Love), 그리고 첫 제안자였던 맥길리버리(M. McGillivary)는 부회장으로 피선되었고, 후일 뉴 사우스 웰즈주에서 장로교회 목사가 된 스틸(James Steels)씨는 총무가 됩니다. 조직 당시는 남․여 혼성으로 구성되었으나 후일 여전도회연합회가 창립된 이후 점차 남 청년들의 연합체로 발전되었습니다. 이 모임은 원래 주일 아침 함께 모여 성경공부와 기도 등을 통해 영적 성장을 도모하고 친목과 교제를 위한 운동으로 시작되었으나, 데이비스를 한국에 파송, 지원하는 일을 계기로 선교운동단체로 발전하였고, 주일 아닌 평일에 회합하는 경우가 많아짐에 따라 이 연합체의 이름도 후일 Young Men's Fellowship Union으로 변경되었고, 후에는 The Presbyterian Fellowship of Victoria로 변경됩니다. 이 모임이 처음 조직될 당시에는 11개 교회 청년들로 구성되었으나, 일년 안에 598명의 회원을 가진 26개 교회연합체로 성장하였고, 1889년 8월 2일 장로교 창립 50주년 기념대회 기간 중에 모인 특별회의에서는 한국선교사로 자원한 데이비스 목사를 지원하기로 정식 결의하게 된 것입니다. 청년연합회는 1889년 데이비스를 파송한 이래 1891년에는 멕카이(James Mackay) 목사 부부를, 1894년에는 아담슨(Andrew Adamson) 목사 부부를, 1903년에는 커를(Dr. H. Currell) 의사 부부를, 1910년에는 왕대선(R. D. Watson) 목사 부부를, 1916년에는 도별익(F. J. Thomas) 목사 부부를, 1929년에는 부오란(F. T. Borland) 목사 부부를 각각 파송하고 지원하였습니다. 특히 1921년 도별익 목사가 사임한 후 마산 창신학교 교사였던 김호열 씨를 초청하여 멜버른대학에서 유학토록 지원하였으나, 건강 악화로 수년 후 사망하여 좋은 결실을 얻지 못했습니다. 김호열은 호주에서 유학한 최초의 한국인이었다. 여전도회연합회의 창립과 한국선교 지원 데이비스의 죽음은 ‘여전도회연합회’(PWMU) 창립에도 중요한 동기를 부여하였습니다. 여전도회 연합회는 호주교회의 선교사 파송기관 중 가장 많은 수의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하였고 한국선교를 지원했던 영향력 있는 단체였습니다. 여전도회 연합회는 딘우디(C. Dinwoodie) 양이 익명으로 헌금한 50파운드, 한국선교사를 지원하는 사람을 위해 써 달라고 50파운드를 기증한 메리 데이비스(Mary T. Davies), 한국선교가 재개되기를 바란다며 역시 50파운드를 기증한 쿠리부인(Mrs Currie)의 숨은 공로와 함께 여전도회의 조직을 위한 여러 갈래의 시도가 어우러져서 1891년 여전도회연합회를 공식적으로 창립하게 됩니다. 멜버른시에서는 1890년 7월 29일 투락교회에 출석하던 하퍼 부인의 집에서 이방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장로교 여전도연합회 창립의 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한 모임이 회집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러한 여성연합회 조직을 위한 일련의 노력은 빅토리아주의 3개 지역에서 동시에 일어났는데, 이는 당시 교회여성들의 선교에 대한 일반적인 의식을 반영하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즉 멜버른에서의 준비 모임과 더불어 발라랏에서는 케언스(Mrs. Cairns) 부인이, 질롱에서는 데이비스(Mrs J. Davies) 부인이 각기 별도의 조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상과 같은 이 일련의 움직임이 어우러져서 1890년 8월 25일 멜버른 시내의 장로교 총회회관(Assembly Hall)에서 정식으로 여전도회연합회를 조직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첫 내한 선교사가 데이비스의 두 여동생과 제수씨가 이 조직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는 점이다. 발라랏의 케언주 부인은 데이비스의 여동생이었고, 질롱의 데이비스 부인은 첫 선교사 데이비스의 동생 존 데이비스의 부인이었으니 첫 서뇨사 데이비스의 재수씨였습니다. 이 점은 데이비스의 한국에서의 죽음이 가져온 분명한 영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전도회연합회가 조직된 다음 해인 1891년 멘지스(Miss Belle Menzies), 페리(Miss Jean Perry), 그리고 퍼셋(Miss Fawcett) 등 3 미혼여선교사를 부산으로 파송하였고, 이때부터 해방 전까지 35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는데, 이는 동일기간 내한한 호주선교사 총수의 60%에 달합니다. 이들 중에는 데이비스의 두 조카인 마가렛 데이비스(Miss Margaret Davies, 대마가례, 사역기간, 1910-1940년)와 진 데이비스의사(Dr Jean Davies, 대지안, 1918-1941년)도 약 30년간 한국선교사로 일했다. 두 조카라 바로 첫 선교사 데이비스의 동생 존 데이비스의 딸입니다. 총회 해외선교부 헌국에 선교사를 파송했던 또 하나의 기관이 빅토리아장로교 해외선교부(Foreign Mission Committee)였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선교사의 인준과 관리 등 총회 해외 선교부가 총괄하였으나 초기에는 청년연합회와 여전도회 연합회가 직접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고 재정적 지원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00년대 이후부터 총회 선교부가 직접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청년연합회의 경우 자체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하는 일은 점차 총회선교부 사역 속에 흡수되었습니다. 6. 선교지부의 설치, 선교사들의 활동, 선교정책 첫 선교사의 내한과 죽음, 1891년의 제 2진 선교사 5명의 내한, 그리고 초기 소규모의 인적 구성과 내분, 선교사의 사임 혹은 사망 등 여러 어려움이 있었으나 1900년대를 거쳐 가면서 주한 호주선교부의 활동이 정착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그 동안 부산,경남지역은 호주장로교선교부와 미국북장로교 선교부의 공동선교지역이었습니다. 예양협정(禮讓協定)에 따라 양 선교부가 함께 부산과 경남지역에서 사역한 것입니다. 물론 호주선교부는 부산 초량과 부산진 좌청동을 비롯하여 경남 동부지역을, 북장로교 선교부는 지금의 중앙동, 영도를 비롯하여 김해 등 서부지역을 맡습니다만 1901년 이래로 양 선교부 간의 계속적인 대화와 경남지역에서의 선교지역 분담과 재조정이 있어왔습니다. 그러다가 1913년 말에는 미국 북장로교선교부가 부산, 경남지방에서 완전히 철수함으로서 1914년 이후에는 경남지역 전역은 호주 장로교 선교부의 관활 하에 있게 됩니다. 당시 부산과 경상남도의 인구는 약 150만으로 추산되는데, 더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 호주장로교 해외선교부는 1910년 ‘전진운동’(Forward Movement)을 전개하여 1910년에서 1914년 어간에 8명의 남자(목사, 의사) 선교사와 9명의 미혼여선교사를 부산 경남지방에 파송하였습니다. 그동안 호주장로교선교부는 부산진과 초량 등 부산지부(1891) 중심으로 사역했으나 곧 이어 진주(1905), 마산(1911), 통영(1913)과 거창(1913)에 선교지부(Mission Station)를 열었고 이 5개 지부를 중심으로 경남지역 전역에서 사역하였는데, 이들 선교지부의 관활 지역을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부산(진)지부: 초량일원, 동래, 기장, 언양, 울산 양산, 김해, 울릉도, 밀양, 영산, 창녕, 진주지부: 진주일원, 사천, 곤양, 하동, 남해, 삼가, 산천, 의령 마산지부: 마산일원, 함안, 창원, 웅천, 칠원 거창지부: 거창일원, 안의, 함양, 합천, 초계 통영지부: 통영일원, 거제, 고성, 진해, 용남 호주선교부는 이들 5개 지역에서 만이 아니라 평양과 서울에서도 활동했는데, 왕길지(Gelson Engel)선교사는 1906년부터 평양신학교 강사로, 1919년부터 은퇴할 때인 1935년까지는 신학교의 교수로 봉사하였습니다. 평양신학교는 주한 4 선교부의 연합교육기관이었으므로 호주선교부는 왕길지 선교사를 교수로 파송하였던 것입니다. 또 의료선교사인 마라연(Dr Charles McLaren)는 당시 한국에서의 유일한 신경정신과 의사였는데, 1923년부터 1938년까지 세브란스병원과 의전(醫專)에서 진료와 교육을 담당하였습니다. 호주선교부도 사도시대 이후 선교사역의 가장 주요한 전도, 교육, 의료 등 3대 분야에서 활동하였고, 한가지 더하여 자선과 구제 사역을 전개하였습니다. 한국에서 사역하는 동안 네비우스 정책을 존중했고, 순회 게척전도를 중시하였습니다. 전도사역은 목사 선교사들과 미혼 여선교사들의 가장 중요한 사역이었고, 이 사역은 선교지부를 중심으로 관할지역을 정해 순회전도와 양육, 교회 돌봄, 동사(同事) 혹은 당회장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선교사들은 6개월을 단위로 해 관할지역을 순회하고 양육과 교육, 성례를 담당하였습니다. 호주선교부의 중요한 정책이 교육활동인데, 특히 부녀자와 아동 교육을 강조하였고, 여성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이 점은 호주 선교부에서 미혼 여성선교사율이 높았기 때문에 부녀자와 아동 등 여성교육을 강조하게 된 것입니다. 해방 전 호주 선교사 총 78명 중 남성은 24명, 선교사 부인 19명을 포함하여 여성은 54명이었습니다. 이중 미혼 여선교사는 35명이었는데 전체 선교사의 60%에 달했습니다. 이런 여선교사 비율은 다른 선교부보다 훨씬 높은 비율이었습니다. 경남지방은 경기 이북지방에 비해 보수적이었음으로 여성교육에 대한 무관심이 더욱 심했습니다. 그래서 여성 교육은 시급했고 이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호주선교부는 각 선교지부에 남, 여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남자학교는 정상 궤도에 오르면 해 지역 교회에 경영권을 넘겨주는 것을 고려했으나 여자학교는 선교부가 운영하도록 했습니다. 특히 호주선교부는 부산의 일신여학교(1895), 진주 시원여학교(1906), 마산 의신여학교(1913), 통영에 진명여학교(1914)를 설립하고 여성교육에 힘썼는데, 일신(日新)여학교는 한강 이남에서 가장 오래된 여자 학교로서 명성을 얻었고, 지금은 동래 여자중고등학교로 존속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통영과 동래에 실업학교(Industrial, Vocational 혹은 Farm school)를 설립하여 가난한자, 장애인, 혹은 불우한 여인들의 생계를 위한 직업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호주선교사들은 근대적 의미의 교육활동, 곧 교육은 특수한 일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교육이 대상이며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는 점, 또 그 교육의 목표는 과거급제나 공직에 나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건실한 사회인, 교양 있는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함양하는 것이라는 점을 고양하고 유치원 교육, 여성교육을 중요시하고 또 실용적인 직업교육을 통해 가난하고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게 삶의 길을 제시한 것은 큰 공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호주선교부의 의료 활동은 타 선교부에 비해 미진하였습니다. 78명의 내한 호주선교사 중에서 목사 선교사는 20명에 달했으나, 의료선교사는 11명에 불과했습니다. 이 중 의사는 4명이었고 간호사는 7명이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호주 장로교회는 다방면의 의료활동을 전개할 만큼 재정적으로 부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진주를 의료 활동의 중심지로 삼고 그곳에 배돈(培敦)병원을 설립하였습니다. 이 병원은 경남지방의 유일한 병원으로 이 지방민들에게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 대신 부산과 통영에는 아동 건강관리소(Baby Welfare Center)를 운영하였다. 특히 통영지부에서는 작은 선박을 이용하여 위급한 섬사람들을 진주로 후송하여 치료받도록 배려하였습니다. 호주선교부의 의료 혹은 자선사업 중에서 중요한 한 가지는 부산의 나환자 보호병원(Leprosy Asylum)을 운영한 일었습니이다. 이 일은 1910년부터 시행되었는데, 수용시설의 책임자는 매견시(J. N. MacKenzie) 목사였습니다. 그는 단기간 의학교육을 받았던 목사였고, 후일에는 독학으로 의학 공부를 이수하고 의사자격을 얻기도 했는데, 인간이 당하는 가장 큰 고통을 가슴에 안고 사랑으로 이들을 보살폈습니다. 그의 이러한 기여 때문에 일본 천황과 조선총독으로부터 몇 차례 훈, 표창을 받기도 했고, 귀국 후 1939년에는 호주빅토리아장로교 총회장으로 추대되기도 했습니다. 부산의 일신병원을 설립한 매혜란, 매혜영은 바로 매견시 선교사의 장녀와 차녀입니다. 7. 선교사들의 철수 1939년은 호주장로교회의 한국선교가 데이비스에 의해 시작된 지 50주년이 되는 해 이지만 불행하게도 이 해는 선교사들의 내키지 않는 철수가 시작되었던 해였습니다. 일제의 탄압은 심화되었고, 일제는 대동아권공영권이라는 이름으로 침략 야욕을 드러내고 이 강산에 전운이 감돌았습니다. 한국인들과 서구인들의 접촉이 감시의 대상이 되었고, 호주선교사 유영완(Rev Esmond New)는 영국 간첩이라는 소문과 함께 그는 특별 감시를 받았습니다. 그는 내한하기 전 해군장교로 근무한 바 있었기 때입니이다. 호주선교부에 의해 설립된 유구한 역사를 지닌 진주교회는 일제의 끈질긴 요구와 협박 때문에 “진주교회가 보내는 선언문”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호주선교부를 배척하고 관계를 단절한다는 선언과 함께, 소위 일본적 기독교를 추구하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문서를 발표한 일도 있었습니다. 등사판으로 만든 이 문서는 일제의 사주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일제의 한국교회에 대한 탄압 또한 심화되었습니다. 설교는 제한을 받았고, 찬송가 중에서도 일부는 부를 수 없도록 금지되었습니다. 집회도 제한적으로 허용되었고, 배교행위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1940년 9월에 이르러서는 선교는 크게 제한되었습니다. 미국 영사관은 모든 미국인의 철수를 명하였고, 11월 16일에는 미국 정부가 특별히 준비한 마리포사(S. S. Mariposa)호로 미국인 선교사와 자녀들 219명이 한국을 떠났습니다. 호주선교사들에게도 철수가 권장되었고, 어떤 이는 안식년으로 본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나오지 못했습니다. 1940년 말에는 이미 90%의 외국 선교사들이 다 한국을 떠났습니다. 예견했던 대로 1940년 12월 선교사역의 종말이 왔습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함으로서 태평양 전쟁(대동아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호주선교사들도 다 돌아가고 마지막 5명이 남았는데, 그들이 마라연(Dr McLaren), 예원배 부부(Rev & Mrs Wright), 나례인 부부(Rev & Mrs Lane)였습니다. 이들은 가택연금 되었다가 1942년 6월 2일 일본으로 추방되었고, 일본에서 2개월 동안 억류되어 있다가 포로교환 형식으로 포르투갈 영 동부 아프리카를 거쳐 호주로 돌아갔습니다. 결국 호주장로교회의 한국선교는 1941년으로 원치 않게도 중단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호주 장로교회의 한국선교에 대한 이 개괄적인 안내가 부산 경남 지역에서의 기독교의 기원을 헤아리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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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18
  • [김성수 총장] 현대 공교육의 기초:인간의 전적 자율권
    현대 공교육의 기초:인간의 전적 자율권 오늘은 내 친한 친구이자 동역자인 호주의 리챠드에들린(Richard Edlin) 박사가 저서 “The Cause of Christian Education”에서 소개한 TV 인터뷰 한 기사를 소개하면서 현대공교육의 문제점을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아주 오래 전에 미국에서 발간되는 선정적인 잡지 <포럼>(Forum)의 편집장과 십대 학생들간의 인터뷰가 방영된 적이 있었습니다.인터뷰에 참여한 십대들 대부분은 기독교 가정의 학생들로 기독교 학교가 아닌 일반 공립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이었습니다. 포럼(Forum)의 편집장은 논의의 전제가 되는 질문을 학생들에게 제시함으로써 인터뷰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인간이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은 선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율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학생들은 잠시 생각한 후 이 전제에 대해 모두 수긍했으며 토론이 진행되었습니다 이내 인간의 성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었는데 편집장은 자신이 수 년 동안 여자친구와 “계약결혼” 중에 있으며 공식적인 결혼계약 없이 함께 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과 여자친구가 서로 사랑하고 있으며 현재의 동거 관계가 가장 적합한 것 같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더군다나 아이도 없기 때문에 만약 관계를 청산해야한다고 느끼면 어떠한 법적 제재 없이 간단하게 헤어질 수 있다고 하며 토론에 참여한 학생들에게 이런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습니다. 즉각적으로 몇몇 학생들이 결혼과 관련된 성경구절과 교훈을 이야기하며 편집장을 설득하려 했으나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학생들이 이야기할 때마다 편집장은 인터뷰 시작 시 학생들이 동의했던 부분, 즉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인간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전제를 상기시켰습니다. 그리고는 이 전제에 동의한 이상 학생들이 이야기하는 성경말씀과 모순은 되지 않느냐고 되물었습니다. 상당시간 이 모순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었는데, 기독 학생들은 성경말씀을 인용하여 이 “계약결혼”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제시하려 했지만 이미 인정해버린 인간의 자율권과 대치됨으로 인해 전전긍긍하였습니다. 적어도 이 상황에서는 기독 학생들이 자신들에게 제시된 실제 삶의 모습을 기독교적으로 분석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왜 이런 문제가 생기게 되었을까요? 문제는 기독 학생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존재를 전혀 고려치 않은 채 인간의 전적 자율권을 인정한 것에서부터 혼돈이 시작된 것입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혼돈을 자주 겪게 됩니다. 우리가 실제 경험하게 되는 구체적인 상황들과 기독교 신앙은 별개인 것처럼 생각하도록 하는 유혹으로 인해 이러한 혼돈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편집장이 제시한 비 성경적인 견해를 기독 학생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는 것에서부터 중요한 문제가 시작된 것입니다. 학생들이 비 성경적인 견해를 그대로 수용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에들린 박사에 의하면 그들이 다니고 있는 공립학교의 교육을 가장 큰 원인으로 보았습니다. 학교는 단순히 ‘사실’(facts)만을 가르치는 곳이 아닙니다. 학교는 이러한 ‘사실’이 이해되어지는 삶에 대한 접근과 태도를 가르치는 곳입니다. 이는 교사가 가르치는 교육과정에 명확하게 언급될 수도 있고 언급이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와 같은 학교의 역할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공립학교 교육현실이 어떠합니까? 사회학, 과학, 언어학 등 몇몇 학과목 바탕에 깔린 기본 전제를 살펴보면 인간이 결정하는 것에는 어떤 한계를 그을 수 없고, 또 이를 제한하는 권위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중심 가치로 삼고 있습니다. 인간이 이 세계의 중심이 되어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공립학교의 기초를 이루는 이러한 세계관에서 말하는 진리라는 것은 인간 개개인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인간 밖의 어떤 존재로부터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이러한 철학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며 살 합법적인 자율권을 인간이 소유하고 있다는 사상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제에서부터 인간은 자유롭게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고 행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교육의 모든 과정에서 비록 말로 명확히 표현되지는 않지만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이러한 원리는 인간이 아무런 제한 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미 역사를 통해 인간 본성이 어떠한지를 명확히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란 존재가 마음의 병, 빈곤, 무지들의 문제를 지혜롭고 이타적인 선택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존재이며 모든 사람 나아가 온 세상을 보다 좋게 발전시킬 수 있는 존재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으로 보는 타락한 인간 본성, 하나님으로부터 근거한 인간행동에 대한 법률, 규범, 가치는 이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기독교 세계관은 선포적이며 직접적으로 온 세계를 유지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세계를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현대 공교육의 비 성경적인 관점에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는 우리의 귀한 언약의 자녀들이 성경적 세계관을 통해 세상을 올바로 바라보면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성장해 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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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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