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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7)- 관언유착(官言癒着)
언론이 독자들이나 대중들에게 주는 영향이 크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사실이 아닌 잘못된 기사나 중심을 잃은 기사는 많은 사람에게 혼란을 줍니다.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몇 해 전 우리 노회에서 모 목사를 순회 선교사로 파송한다고 기독교보에 기사가 올랐습니다. KPM 이사장과 담당자들이 파송 예배에 순서를 맡으며 파송 예배 사진까지 첨부하여 누가 봐도 총회에서, KPM에서 파송하는 선교사처럼 대문짝만하게 기사를 올렸습니다. 노회 파송 선교사도 아닌데 과장된 허위 기사를 올릴 수 있느냐고 기독교보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몇 주 후 신문 구석 어느 페이지에 짧은 한 줄로 000교회 순회 파송 선교사로 정정한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습니다. 그 기사를 본 대부분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은 KPM 파송 선교사로 알고 있습니다. 짤막한 정정 기사가 났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도 “부산서부노회 파송 선교사냐?”고 물어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선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KPM이나 노회에서 파송한 선교사처럼 위장을 하고 그것을 교단 신문인 기독교보에까지 기사화한 것은 그 저의를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디 이 한 건뿐이겠습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이 발생하여 총대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거짓된 걸음을 걷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 심히 우려됩니다. 기독교보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할 것입니다. 기독교보가 KPM 선교사로 파송하는 기본도 모른다는 것은 몰랐다고 하는 말 자체가 거짓말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의 파장도 결코 간과할 수 없지만, 신앙과 교리, 교회와 개인의 인권에 대한 의도적인 허위 기사는 고신 신앙 전체를 흔들 수 있는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문제는 고신 언론사는 총회 유지재단 이사회에서 관리하는 기관입니다. 유지재단 이사회는 총회장을 당연직 이사장으로 해서 총회 기관 중 최상위 기관으로 총회를 잘 알고, 총대들의 지지를 받아 총회 산하 교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감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유지재단 이사회가 직무유기 한 것입니다. 학원 이사들이 잘못할 때만 소환할 것이 아니라 유지재단 이사회가 잘못할 때는 그 파장은 훨씬 더 크고 중요하기에 반드시 소환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독교보가 총회 기관지인지, 유지재단 이사회 관할에 있는 기관지인지, 기독교보 자체 언론지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된다고 입을 모읍니다. 언론사 사장 얼굴이 기독교보에 빠지는 일이 없자 이 일에 대해서 총대들은 물론이요, 유지재단 이사회에서도 지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과는 마이동풍입니다. 순교 정신을 기본으로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모토로 하는 고신의 기관지인 기독교보가 본류의 신앙을 이탈한 것은 이미 옛말이고 특정 계파에 포진한 자들이 기고하는 재고 되어야 할 지나친 인문학적 논의와 신앙 고백적 정체성을 벗어난 잘못된 사상들이나 도배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고신 신앙을 가진 목회자들과 장로들, 교회들은 알게 모르게 기독교보에 대한 불신으로 불매 운동을 하고 있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입니다. 5월 2일 자 코람데오닷컴에 “교계 언론 편집 책임자의 이학규 장로 고소 건, 고검 재정 심사에서도 또다시 기각 판결”이라는 기사가 올랐습니다.(코람데오닷컴 참조) 이 사건의 실상은 전국 남전도회 임원으로 있는 모 장로님이 유지재단 이사로 출마하려고 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웠는데 그해에 언론사 사장 선거가 있어 보수 측 인사가 유지재단 이사가 되면 사장이 되는 길에 장애가 될 것 같아 코람데오닷컴의 기사대로 언론사의 직원이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운 장로를 “사퇴 종용”했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총회 산하 교회를 잘 돌아보고, 총회의 기관들을 바르게 잘 관리해야 하는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시작부터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일반 총대들은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는 계파와 개인의 이권과 자리가 그 배경이 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재미를 본 자들은 이제 총회에서 골치 아프게 투표하고 경쟁하는 것보다 아예 노회 총대를 조정하는 기가 찬 수법으로 발전했습니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계파에 표를 던질 사람을 골라서 총대라는 자리로 매관매직을 하고, 각 노회 지도급에 있는 목사 장로들을 총회 상임위의 자리로 매관매직해서 4월 노회 총대 선거가 끝나면 이미 상황이 종료되는 모양새로 발전되었습니다. 이학규 장로가 전국 남전도회 회장으로 봉직하고 있을 때 함께 임원으로 봉사하던 모 장로가 “사퇴를 종용”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항의한 것이 코람데오닷컴 에 기사 실린 것과 같은 결과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평생 법 없이도, 법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사는 목사, 장로가 이 일로 인하여 교회 생활이나 신앙생활에 방해를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경찰서와 법원으로 불려 다니며 고초를 겪고 어려움을 당했던 것에 대해서 고신 언론사를 관리하는 유지재단의 총회장과 목사, 장로 이사들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 궁금합니다. 왜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말입니다. 이학규 장로는 신앙적으로 잘 해결하고자 언론사의 불법 선거 개입 못 하게 해달라는 진정서를 총회 선관위에 제출했더니 총대가 아니라 진정서를 접수하지 못한다고 하더랍니다. 참 훌륭한 총회 선거관리 위원회이십니다. 그래서 “여기 보냈다, 저기 보냈다” 서류 핑퐁 게임을 하다가 결국 사법기관에 판단을 받기까지 하면서 이학규 장로가 당한 심적 피해, 정신적 피해, 일상 업무 손해의 피해는 누가 보상해줍니까? 고신총회가 이렇게 기본을 상실하고 무책임하게 하면 안 됩니다. 펜은 검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오보도 문제이지만, 언론이, 신문이 의도적이고 사욕에 치우쳐 고신의 정체성에 위배 되는 글이나 기사를 올리고, 무책임으로 일관할 때 고신총회 산하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미치는 파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총회 임원회와 학원이사회가 지난 총회 시 총대들을 속이고 총장선출 규정을 통과시켜 불법으로 총장을 선임했다고 신문에 기사화되어도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볼 때, 총회 임원회의 수장인 총회장이 유지재단의 당연직 이사장이기에 이 사실조차 그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게다가 현 총회장은 기독교보 발행인이 아니기에 변명하며 피해갈 수 있는 좋은 길도 열려 있습니다.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재정적인 문제는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릅니다. “반려동물을 장례식”에 대한 안건이 고신총회 신학부에서 재론되고, 어떻게 고신총회에서 “그따위 안건이 거론되느냐”는 회원들의 호통에 경남노회 모 회원이 나와 옹호 발언을 하며 “지난달에 우리 찐이(고양이)가 죽어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하늘나라로 보내줬다”고 말을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총회가 불건전하고 이단성이 있어 교류를 금지해도 전혀 문제의식 없이 그런 모임에 참여하고, 순서나 자리까지 맡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는 300M 거리를 유지해야 하지만 이전하는 것은 법에 명시가 없기에 괜찮다고 하는 고신입니다. 핑퐁 게임을 하다하다 안되면 법리해석을 문제 삼아 법제위에 해석을 요청하여 본질을 잊어버리게 하고 계파싸움 진영싸움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고신입니다. 양파도 아니고 벗겨도 벗겨도 끝이 없는 고신이여...... 언론은 “言路”를 여는 것입니다. 言路가 막히면 세상은 암흑세계나 다름없습니다. 한 마리의 개가 먼저 짖으면 온 동네 개가 때지어 짖어대듯이 기독교보가 먼저 총대를 메고 총회 여러 현안의 심각성을 알리면 동시에 총회 여러 곳에서 포문을 열고 동참할 것입니다. 언론은 여론을 집약하고 전문가들의 진단과 의견을 수렴하거나 민심을 파악한 후 사안에 따라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로 펜 끝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언론의 사명입니다. 총회 성도들을 대신해서 할 말을 하며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선도해야 합니다. 독선의 권력을 향한 비판은 언론이 지향해야 할 우선순위이자 언론 존재 이유입니다. 이 가치관이 상실되면 결국 관언유착(官言癒着)이 되기 쉽고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관제언론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사리사욕에 길들어서 소위 ‘독선과 권력’의 ‘종’이 된다면 스스로 펜을 손에서 내려놓아야 함은 불문가지입니다. 기독교보가 그렇게 길들어진 “관보(官報)”라는 비판을 듣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집을 지키기 위해 열심 짖어야 할 개가 요즘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주인 행세를 한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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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6 : 성가대와 찬양대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평생을 예배드리면서도 때로는 이 말이 옳은가 틀리는가에 대한 의문이 되는 용어들이 많다. 본 기고의 목적이 이를 바로 알고 사용하자는 취지에서 계속 기고하지만, 필자 자신도 때로는 헷갈릴 때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예배 중의 순서에서 찬양대인가 성가대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통합 측 총회에서는 찬양대라고 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수많은 교회들이 성가대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는 여기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성가대(聖歌隊)와 찬양대(讚揚隊)의 용어 차이 두 용어는 일반적으로 보면 거의 같은 말이다. 국어사전에도 성가대는 “교회 등에서 성가를 부르기 위해서 조직된 합창대”라고 했고, 찬양대도 “남녀 기독교 신자로 조직된 합창대”로 둘 다 영어로도 ‘choirs’로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같은 듯 다른 용어이다.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성가와 성가대란? : 먼저 일반적으로 성가라는 용어는 범(凡) 종교적으로 사용하는 말로서 일반적인 음악과는 다른 거룩한 음악이란 뜻이다. 그래서 성가는 범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는 ‘종교음악’으로서 세속적인 노래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의 찬불가는 불교의 성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 용어가 전혀 언급이 없다. 오직 찬양 혹은 찬송으로 표현되어 있다. 2. 찬양과 찬양대란? : 찬양이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으로서 참된 경건의 중요한 요소이다. 즉 찬양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성육신과 십자가 지심과 부활, 종말과 재림 등의 구속의 은혜를 노래하는 것이 찬양이고 또 함께 부르는 것이 찬양대인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가진 찬양은 개역성경에는 213회, 찬송은 98회, 찬미는 14회가 나온다. 하지만 성가란 말은 한 곳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찬양은 일반 종교의 성가와는 차원이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만을 높이는 노래인 것이다. 3. 성가와 성가대란 말을 교회에서 사용해 온 이유는? : 왜 성경에도 없는 이 용어를 그동안 교회에서 사용해 왔을까? 그 이유는 1976년에 나온 공동 번역 성경에서 개역성경의 “노래하는 자”, “성가대”로 12회에 걸쳐 번역을 했다. 또 하나의 성가대란 용어의 기원은 한 출판사가 흑인 영가의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곡집”이라 부른 것이 성가대의 이름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의 ‘세이까다이’(성가대 せいかたい, 일본 사람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며 노래할 때 쓰는 용어)가 직수입되면서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서 그동안 찬양대라고 했던 용어가 성가대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성가대란 말은 일본어의 잔재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가대란 말은 1958년 출판된 동아출판사 사전에도 성가대란 명칭이 없었으나 1994년 민중서관의 국어사전에서 처음 등재되었고 그 이전에는 성가대라는 말이 고정되어 사용되는 곳은 일본의 ‘세이까다이’뿐이었다. III. 결론과 제언 앞서 서론에서 밝힌 대로 성가대와 찬앙대라는 말은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동안 큰 문제 없이 사용해 왔기 때문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성경에도 없는 말이며, 일본어의 잔재라는 문제도 있다고 볼 때, 또한 타 종교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굳이 성가대란 말을 계속 사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성경에도 없는 성가나 성가대란 말보다는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사용해 왔던 찬양, 찬양대란 우리 고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올바른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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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성경의 큰 그림과 안식(1)
1)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창조되었다(창1:26~28).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일 때 가장 행복하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안식한다. 사람은 창조 되자마자 안식을 살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함께 안식하시려고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을 완벽하게 창조하셨다. 완벽이 무엇인가? 완벽하다는 말이 단순하게 세상을 좋고, 아름답게 창조했다는 말로만 보아선 안 된다. 물론 그런 뜻도 있다. 그러나 완벽하게 창조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상태를 말한다. 비 인격체인 피조물이 완벽할 수 있는 것은 인격체인 사람이 완벽할 때 완벽할 수 있다. 모든 피조물들이 사람의 손에 주어졌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하나님과 동일시 될 때 완벽하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하게 세상을 창조하셨다.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였고 완벽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로 완벽했다. 그래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 되게 하신 일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 될 때 완벽하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임마누엘을 이루시는 날 우리는 하나 되었다. 완벽 해졌다. 회복된 날이다. 하나님의 완전함 같이 우리도 완전해졌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고 하셨다. 안식을 말한다. 완전함을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임을 알 때 완전하다. 또 이것이 행복이고 안식이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 이것을 보고 안식의 삶이라고 한다. 완벽하기 때문에 더 이상 무엇을 보텔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안식은 피곤해서 안식하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어 안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고 완벽하기에 안식이다. 점이라도 하나 더 찍으면 작품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붓을 놓는 화가처럼 완벽하고 부족함이 없어 쉬시는 것이 안식이다. 사람은 창조되자말자 안식을 살았었다. 보기에 심히 좋았다. 하나님은 인간을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당연히 모든 피조물도 완전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가 하나님의 첫 번째 그림이다. 하나님의 큰 그림은 안식이었다. 2) 사단에게 속아 안식을 잃었다 사람은 사단에게 속아 합법적인 하나님과의 분리가 일어나 버렸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완전함이고, 안식인데 안식을 잃어버린 것이다. 마귀에게 속아서 신적 통치권을 빼앗겨 버렸다.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함으로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는 말씀대로 되었다. 그 결과 안식, 즉 임마누엘의 완벽함을 잃어 버렸다. 마귀도 언제나 말을 먼저 먹인다. 마지막 때도 마귀의 주된 일이 말을 먹이는 일을 한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계12:15)라고 했다. 여자인 교회를 말인 물로 떠내려 보내려 한다. 뱀인 마귀는 입에서 물을 토하는 것이다. 다른 복음을 많이 토한다. 다른 복음은 없다. 하늘의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갈1:8). 마귀는 다른 말을 토해 냄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큰 그림인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은 안식이다.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보아야하는데 보지 못하게 다른 말을 넣는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고 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의 그림인 안식이 없으면 두렵다. 안식을 보지 못하는 자의 모습이다. 안식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내가 다른 복음을 먹었습니다."라고 스스로 확증한다. 스스로 벗었다고, 두렵다고 고백한다. 그전에도 벗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누가 너에게 벗었다고 알려줬느냐"고 물으신다. “누가 그런 말을 해 주더냐”라는 뜻이다. “네가 무엇인가 스스로 입어야 한다고 누가 말 하더냐”는 질문이다. 지금도 사단은 우리가 예수 외에도 무엇을 입어야 한다고 속삭인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왜 따먹었느냐?"라고하시지 않고 "누가 벗었다는 것을 알려줬느냐?"라고 물으셨다. 말의 권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 주는 순간이다. 사단의 속임수는 다 말로부터 온다.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말을 들으면 보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큰 그림이 보인다. 사단의 말을 들으면 벌거벗음이 보이게 된다. 두려움을 보게 되고, 두려워 숨게 된다. 주님이 입혀 주신 것 외에 뭔가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엔 온전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하는가? 말이 온전하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고 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욕도 안해야하고,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욕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말이 온전하려면 복음을 말하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이다. 복음을 말하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우리도 온전할 수 있다. 온전한 말을 하면 아버지의 일인 안식을 보게 된다. 우리에게 너무나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한다. 너무 아까운 세월을, 아까운 인생을, 남의 이야기하다가 다 보낸다. 비판과 불평불만만 하다가 시간을 다 보낸다. 안식이 있을 리가 없다. 사단은 말로 우리를 속였고 속이고 있다. 안식은 우리의 믿음의 말에서 온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10:10). 마귀에게 속아 안식을 잃어버린 것은 말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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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희생
우리는 봄이 오면 마음이 들떠 어디론가 꽃구경을 가기를 원하고, 늘 가는 곳이라 할지라도 봄꽃이 핀 곳이면 가족들이 나들이하는 경우가 많다. 4월 초순에 비가 오는 산복도로를 거쳐 교회에 가는 도중에 아름답게 피어있는 벚꽃을 바라보는 순간 “아! 이렇게 아름답게 핀 꽃을 비바람이 망치면 어떻게 하지?”하는 걱정이 앞선다. 내 집 정원의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거워할 수 있는 벚꽃을 비바람 때문에 망치게 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통상 벚꽃은 일본의 나라꽃이라 생각하고 별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은데 실상은 원산지가 우리나라 제주도라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나라의 꽃이니까 더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라 믿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잎도 피우지 않고 살얼음이 언 메마른 땅속에서 뿌리를 내려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한겨울 내내 자기의 몸을 단단히 무장하여 정한 시간에 꽃을 피우는 식물이 바로 벚꽃이라는 데서 관심이 더 가고 피어있는 그 자체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가정집 정원에 있는 꽃나무들은 그래도 춥다고 싸주기도 하고 거름도 하며 옮겨주기도 하고 가지치기도 하지만 벚꽃은 차가 많이 다니는 길가나 산 중에서 전혀 무관심 속에 홀로 자립하여 이른 봄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 너무 장하고 아름다울 뿐이다. 꽃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수 있는 시간은 겨우 일주일도 안 되기에 항상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렇게 고생하여 잠간 동안을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선사하기 위해 정말 희생한 벚꽃의 수명이 좀 오래 지속 되면 얼마나 좋으랴. 게다가 벚꽃이 질 때에도 벚 눈을 내려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아무 불평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따뜻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마치 눈이 오는듯한 모습으로 꽃눈이 낙화한다. 그것이 바로 자연적인 아름다움의 자체가 아닐까? 흰 꽃잎이 떨어진 것은 분명히 하얀색인데 바람이 불어 모인 블럭 바닥은 분홍색 꽃눈으로 소복하게 쌓인다. 눈은 밟으면 ‘뽀드득’이란 소리라도 내지만 떨어진 꽃눈은 아무리 밟아도 소리를 내지 않고 인간의 발과 자동차의 바퀴에 짓밟히며 휘날릴 뿐이다. 오직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순종하여 이렇게 끝까지 희생하는 것이 바로 벚꽃이라는 것에 나는 감동을 받는다. 우리 주위에도 다른 사람의 아무런 도움이 없이 주님이 말씀하신 일들을 잘 수행하여 사회에 귀감이 된 아름다운 모습이 매스컴에 등장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분들은 오직 자기에게 주어진 미션을 좌우를 살피지 않고 오직 앞만 바라보고 나아갔기 때문에 큰일을 해내었을 것이다. 한낱 미물과 같은 식물도 말없이 자기를 희생하고 아름다움을 선물하는데 우리가 기대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지 못하면 실망하고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벚꽃은 자기의 아름다움을 봄꽃으로 인간인 우리에게 잠간 보여주기 위해 동한의 춥고 쓰라린 고통을 다 견뎌내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변함없이 희생한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믿음의 형제들과 이웃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정말 벚꽃처럼 나를 희생하고 말없이 맡겨진 일을 수행하는 데 최선을 다하면 우리가 사는 곳이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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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저축할 내용 (창41:46-57)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에 보도 된 내용에 의하면, <영국 교육과정평가원>이 새로운 아동 교육개혁 방안을 발표 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11세-16세까지 중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금융교육을 학교 정규 과목으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수학을 배우고 과학을 배우는 것처럼 이 수업을 통해서 스스로 부채를 관리하는 것을 배우고,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 연금 계획 짜는 것을 배우고, 금리를 계산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는 9월부터는 모든 <영국>의 5세 된 아동들에게는 정부로부터 250파운드가 지원 되어서 자신의 펀드를 개설하게 된다고 합니다. 일반 가정의 아동들에게는 250파운드(약$500)의 펀드 자금이 지원되고 저소득층 아동들에게는 500파운드의 펀드 자금이 지원된다고 합니다. <영국>정부가 이렇게 어린 아이들에게 조기금융교육을 실시하는 까닭은 매년 해마다 개인 파산 신청자들이 늘어나는데 대한 대처 방안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사람이 일찍 돈을 알면 좋지 않다고 해서 어린아이들에게 돈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돈을 가르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돈의 가치를 알게 해야 하고, 올바르게 돈 버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고, 올바르게 돈을 저축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보다 더 안정된 내일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안정된 내일을 사는데 있어서 저축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 가운데 꼭 저축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많이 저축할수록 보다 나은 내일을 보장해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저축해야 할 것들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물질을 저축해야 합니다.(창41:46-57) 둘째로, 기도를 저축해야 합니다.(시32:6-7) 셋째로, 선행을 저축해야 합니다.(딤전6:17-19) 필요하고 좋은 것들을 많이 저축해서 오늘 보다 내일이 더 안정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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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해녀의 욕심
‘물숨’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제주 출신의 고희영 감독이 7년 동안 제주도 우도(牛島)의 해녀들과 함께 지내면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잘 몰랐던 해녀들의 삶을 속속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해녀들에게는 계급이 있습니다. 제일 높은 계급인 상군은 가장 깊은 바다까지 들어가서 작업을 합니다. 보통 15-20미터의 바다까지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중군이고, 맨 마지막 하군은 일명 똥군이라고도 부르는데, 2미터 이하의 바다에서만 작업을 합니다. 그 해녀들의 계급은 노력과 경험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자신의 숨 길이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바로 그 숨길이로 계급이 정해진다고 합니다. 이렇듯 상군, 중군, 하군 이라는 계급에 따라 해녀들이 작업하는 바다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하지만 모든 해녀들이 바다에 들어갈 때마다 동일하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물숨’입니다. 물숨은 바다 밖에서 숨을 쉬는 것과는 달리 바다 밑에서 들이마시는 숨을 의미합니다. 이 물숨은 해녀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아주 무서운 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에 한 두 명의 해녀가 물숨을 먹고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물숨은 다른 말로 하자면 욕심입니다. 자신의 숨 길이만큼 숨을 참으면서 작업을 하던 해녀가 다시 숨을 쉬기 위해서 물 위로 올라가려 합니다. 이 때 저 밑에 큼지막한 전복이 해녀의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그 순간, 그것에 대한 욕심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전복을 따기 위하여 물 아래로 내려가는 해녀는 그 물숨을 먹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사고를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면서도 욕심을 이기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해녀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은 자신의 숨만큼만 해산물을 따서 재빨리 물 위로 나오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부질없는 욕심을 경계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러하기에 해녀들은 바다를 가리켜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다는 무서운 곳이지만, 욕심을 버리면 친정엄마처럼 다 내어 주는 곳이야!” 우리는 손안에 그 무언가를 움켜쥐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숨을 참으며 견뎌냈을까요? 우리 또한 욕심내지 않아야 할 것,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에 욕심을 내다가 물숨을 마시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장 14-15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만족하는 법을 모릅니다. 진짜 자신들에게 필요한 영적인 것에 대한 열망은 없이 사실은 지금 필요하지 않는 것들을 위해서 더 더를 외치며 욕심에 사로잡혀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에든지 욕심을 품는 순간 불행이 시작됩니다. 욕심이 많을수록 불만이 많아지고 마귀의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욕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죄에 가장 약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욕심은 하나님께도 응답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다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에 응답하시지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여서 기도 응답에 대해서 의심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야고보서 4장 3절에서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의 기도는 좋아도 너희의 욕심은 싫다, 나는 결코 너희의 욕심에는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욕심을 내고 또 내지만 사실은 욕심으로 인해서 인간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서 이미 내게 주신 것에 자족하는 데 있고, 그 자족에서 진정한 감사가 나오고, 그 감사로 인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제 헛된 욕심의 물숨을 버리고 자족과 감사의 바른 숨을 쉬면서 진정한 행복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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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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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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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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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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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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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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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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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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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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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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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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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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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최호숙 목사] A.Q(Adversity Quotient-역경지수)를 높여라
- A.Q(Adversity Quotient-역경지수)를 높여라 미국은 다종족 국가이다. 그렇다 보니 우월한 민족과 열등한 민족 간에 비교의식이 생기게 되었다. 여러 민족 중에 유대인들이 정치, 경제, 문화, 교육, 과학 등 모든 분야에서 월등히 두각을 나타내 보였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조사해보니 I.Q(Inteligence Quotient-지능지수)가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래서 타민족도 아이큐를 높였다. 그래도 여전히 유대인들에 비하여 열등했다. 재 조사 결과 아이큐 문제가 아니라 E.Q(Emotional Quotient-감성지수)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동일하게 E.Q도 높여 보았지만 여전히 따라 잡을 수가 없었다. 전문가들의 새로운 연구결과 유대인들은 타민족에 비하여 S.Q(Spiritual Quotient-영성지수)가 높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름대로 자신들의 신앙관을 가지고 영성을 키워 보았다. 그래도 유대인들을 따라 잡을 수 없었다. 최종 결과 유대인들에게는 타민족에서 찾을 수 없는 A.Q(Adversity Quotient-역경지수)가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역경지수가 높기 때문에 성공할 확률이 훨씬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역경지수란 무엇인가? 미국의 커뮤니케이션 이론가 폴 스톨츠(Paul G. Stoltz, 1960~ )가 만든 용어로 역경과 고난에 굴하지 않고 합리적인 판단으로 목표를 성취하는 능력을 말한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사람들은 세 가지 반응을 보이는데 첫째, 퀴터(quitter-포기하는 자)로 산에 오르다가 힘들거나 장애물을 만나면 그냥 등반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역경지수가 낮은 퀴터라 부른다. 둘째, 캠퍼(camper-안주하는 자)로 장애나 어려움을 만나면 뚜렷한 대안을 찾지 못하고 현상 유지 정도로 적당히 안주하는 사람을 캠퍼라 부른다. 셋째는, 클라이머(climber-등반하는 자)로 역경을 만나면 자신의 모든 능력과 지혜를 동원하여 기어코 이를 이겨내려고 하는 역경지수가 높은 사람을 말한다. 예전에 웬반 티오 월남 대통령이 한국 청와대를 방문했다가 청와대에 활짝 핀 목련화를 보고 감탄하였다. 우리 정부는 부러워하는 티오 대통령에게 목련화를 선물하였다. 티오 대통령은 기쁨으로 목련화를 받아 자신의 사저(私邸)에 심었다. 1년이 지나도 꽃은 피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티오 대통령이 전화를 걸어 “선물 받은 목련화가 자라기는 잘 자랐는데 꽃이 피지 않는다”고 하였다. 서울대 농대 교수에게 자문을 구한 결과 “목련화는 반드시 추운 겨울을 통과해야 만 꽃이 핀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한다. 코로나 시대에 모든 국민이 침체 상태에 있다. 이 고난의 시대를 잘 극복해야 좋고 아름다운 세상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영적인 삶도 마찬가지다. 성경은 그냥 영광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난 후에 영광이 있음을 말한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라고 바울을 말하였다. 삶의 시련과 역경을 체험한 욥도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한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고 하였다. 영어의 격언에 “No cross, No crown” 이라는 말이 있는데 “고난의 십자가가 없으면, 영광의 면류관도 없다”는 말이다. 이와 비슷한 말에는 “No sweat, No sweet” 땀이 없으면, 달콤한 삶도 없다. “No pain No gain” 고생 없는 수확의 결과는 없다는 뜻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이런 원리를 가지고 사역에 임하였듯이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역경지수를 높여 귀한 열매들을 거두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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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최호숙 목사] A.Q(Adversity Quotient-역경지수)를 높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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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목회 스토리[박무열 목사] 겨울은 봄을 이기지 못한다
- 세상이 온통 고난의 겨울을 맞이한 것 같다. 코로나19, 수해, 폭염, 등.... 고난의 겨울을 우리가 없애지는 못하여도 고난을 이겨내는 봄을 앞당길 수는 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차가운 세상에 따듯한 봄소식을 알리는 복수초와 같은 삶을 살아가길 소망해본다. 세찬 바람도 결국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것이다. 고난도 하나님이 허락 하에 일어난 것임을 욥을 통해서 우리는 교훈을 얻는다. 욥처럼 섭리적인 믿음을 가지고 고난을 받아들일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갑절로 받는 회복의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다. 시골 농촌에는 겨울 속에서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추위를 견뎌낸다. 춥다고. 힘들다고 어렵다고 움츠리고 있으면 결코 씨앗을 뿌릴 밭을 이룰 수가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구원의 희망 씨앗을 품고 오늘도, 어렵고 힘든 농촌교회와 마을을 섬기며 긴 겨울이 어서 지나가기를 날마다 기도하며 하루하루를 인내하며 견디어간다. 왜 사람들은 크고 작음의 부피로 계랑 하는가? 사람이 보기에 작은 교회가 하나님 보시기에 작지 않을 수 있고 사람이 보기에 큰 교회가 하나님 보시기에 크지 않을 수도 있는데, 필자의 자격지심일까? 믿음의 결과는 나중에 다 알게 되고 천국에서는 더욱 잘 알게 될 것이다. 외적인 것에 속아 허상을 쫓는 목양의 삶이 되지 않기를 다짐한고 다짐 한다 . 아무리 대단한 일이 나를 통해 이뤄져도 자기도취에 빠지지 말고 맡겨진 일을 겸손히 감당함으로 사명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내 안에 은혜의 샘이 없으면 남이 파 놓은 야곱의 우물은 내게 별 소용이 없는 허상일 뿐이다. 현실과 주어진 상황 속에서 말씀으로 구원의 은혜를 나누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믿음 씨를 뿌리면 추수의 기쁨의 단을 거두게 될 것이다. 봄을 준비하는 겨울의 농부처럼 환경을 극복하고 진일보하는 선한 목양의 삶을 이루어가자. 나의 시간이 아닌 하나님의 시간에 맞춰서 살아가자. 환경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세상 민심이 교회를 향하여 등을 돌리고 돌팔매질을 한다고 해도, 현재의 섬기는 목양지의 모습이 연약해 회의 든다 해도, 꿈과 희망을 포기하지말자. 하나님은 자기 양 때를 돌보시는 분이시다. 겨울은 봄을 이기지 못한다. 열심히 복음으로 살려고 노력하고 애쓰는데 열매가 없느냐는 의문을 가지지 말라, 아니 생각조차도 하지 말라. 그런 의문과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우리의 마음에는 감사를 잃어버리게 되고, 앞으로 나아갈 추진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 나의 맡은 사명을 감당함에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기도하며 꿈을 향하여 달려가기를 쉬지 않으면 언젠가는 그 꿈의 열매인 달콤함을 맛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거룩한 사명을 주셨고 그 사명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신데 내가 좌절하고 포기하면 이는 큰 불신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고 나의 기쁨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도록, 추운 겨울 같은 어려운 목양의 환경을 잘 이겨내고 꽃피고 새우는 춘 삼월을 꿈꾸며 오늘도 힘차게 전진하는 하루가 되기를 나에게 다짐하며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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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목회 스토리[박무열 목사] 겨울은 봄을 이기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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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볼 수 있는 사람은 다르다
- 나는 매일 보좌로 나아간다. 보좌에서 울려 퍼지는 영광의 소리와 찬양과 경배를 만끽하며 영광을 돌린다. 육의 눈에 보여서 보좌로 나가는 것이 아니다.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는 하나로 되어 있고 같은 공간에 있다. 엘리사를 잡으러 아람 군대가 왔다. 엘리사의 시종은 놀랐다. 놀란 시종은 다급히 말했다. “엘리사 영감님, 저기 군대가 안 보이십니까? 너무 멀리 있어 구별이 안 됩니까? 벌써 노안이 왔단 말입니까? 제가 자세히 알려 드릴까요?”라고 야단법석이었다. “저 정도면 한 도시 정도는 거뜬히 삼킬 군대입니다.”라고 분석하며 아주 똑똑하고, 예리하게 이야기했다. 엘리사는 그래도 평안하다. 엘리사가 입을 열었다. “하나님, 시종의 눈을 열어 주세요.”라고 기도하자, 엘리사의 시종은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세계를 보게 되었다. 엄청난 하늘 군대가 아람 군대를 포위하고 있었다. 시종의 눈이 열린 후 하늘 군대가 왔는가, 눈이 열리기 전에도 하늘 군대가 있었는가? 그렇다. 시종의 눈에 보이고, 안 보이고와는 상관없이 하늘 군대는 처음부터 거기 있었다. 영의 세게는 육의 눈에 안 보여도 그대로 있는 것이다.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는 분리된 다른 세계가 아니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는 같은 공간에 있다. 함께 있는 세계다. 영의 세계와 육의 세계를 하나다. 보이는 세계와 안 보이는 세계는 함께 있다. 지금 이곳에 주님의 임재가 있다. 임마누엘은 나와 하나다. 이사야가 본 하나님의 보좌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내 몸을 보좌 삼고, 내 몸에 좌정하셨다. 나는 이 보좌를 사모한다. 보좌 앞에 나가 하나님 앞에 있길 사모하고 갈망한다. 우리 교단은 “하나님 앞에서”라는 표어를 가지고 있다. 전에는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이 두려운 말로 느껴졌다. 뭔가 조심해야 하는 곳 같은 느낌이랄까? “하나님 앞에서”의 실재는 몰랐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보좌 앞에 서 있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예전의 느낌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사랑스러운 자리이고, 감격의 자리이고, 가고 싶은 자리가 되었다. 나는 보좌 앞에 있고 싶은 갈망이 넘친다. 그래서 보좌 앞에 자주 나아가고, 보좌 앞에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자주 그려보며 감사하고 감격에 빠진다. 육의 눈엔 보이지 않지만, 이사야를 통해, 사도 요한을 통해, 에스겔의 설명을 통해 나는 보좌를 알 수 있었고, 그 놀라운 보좌를 그려본다. 요한계시록에서 바다는 주로 사단이 올라오는 곳이다. 요한계시록 4장에서는 이 바다가 유리 바다가 되어 보좌 앞에 있다. 나는 그곳에 서 있기를 좋아한다. 주님은 풍랑 이는 모든 파도를 잠재우시고, 유리 바다를 만드셨다. 평온하다. 평안이다. 따뜻하다. 아름답다. 유리 바다 위에 서 있는 나는 걱정이 없다. 보좌가 움직일 때마다 네 생물은 따라 움직인다. 나도 함께 춤을 추며 움직이는 깊은 상상을 하곤 한다. 이런 기도시간은 좋다. 한없는 주님의 임재를 만끽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든지, 항상 주님의 보좌 앞에 나 자신이 있음을 생각하려 하고 계속 그렇게 하려고 갈망한다. 에스겔도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것을 믿는다. 24 장로들과 천군 천사와 함께 합창한다. 끝없는 찬양 소리가 육의 귀에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지만, 주님의 보좌 앞엔 항상 놀라운 찬양이 있다. 보이지 세계와 보이는 세계가 한 공간에 하나 되어 있을 알고 영의 눈으로, 영의 귀로 들어보라. 끊임없는 찬양과 영광이 하나님의 보좌 곁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우리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다. 그 성전에 보좌가 있고 놀라운 찬양과 영광이 울려 퍼지고 있다. 이것을 볼 수 있다면 항상 기뻐할 수 있다. 항상 감사할 수 있다. 항상 기도할 수 있다. 이런 묵상이 나의 입을 열게 한다. 나도 함께 찬양한다. 찬양과 경배와 영광을 올리지만, 더 올리고 싶은 갈망이 넘친다. 주님의 보좌를 보며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엎드리고 싶어진다. 엎드려 한없이 운다. 감격의 눈물이 왜 그리 흐르는지. 보좌는 당신 몸 안에 있다. 그 보좌에서 울려 퍼지는 어린양을 향한 찬양이 있다. 이 보좌가 바로 우리의 몸 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적은 것 같다. 우리 몸은 하나님이 계신 성전이다. 성전에 보좌가 있다. 성전에 주님의 옷자락이 가득하다. 나는 그 보좌 앞에 들어가 주님의 품에 자주 잠긴다. “주님 사랑해요. 온 맘과 정성 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신부 되어 감사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온 맘과 정성 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신부가 되었어요.”라고 고백한다. 노래하며, 노래 위에 노래를 더하고 싶다. 보고 있는데, 더 보고 싶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데, 더 듣고 싶다. 나의 주님을 향한 갈망은 끝이 없다. 주님이 좋다. 함께 있는 것이 좋다. 나는 주님을 갈망한다. 주님을 갈망하는 것이 능력이다. 보좌가 몸 안에 있음을 알고 잠겨 들어 갈망하자. 성령님은 우리를 보좌 앞에 있게 만드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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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볼 수 있는 사람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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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한토막[김문훈 목사] 최종 선택
-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전12:31)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겨자씨 한알이 자란 후에는 새들이 와서 들이느니라 (마18:30)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 재물보다 명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잠22:1)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말세에 고통의 때에 최종적으로 선택해야 될 것은 무엇일까요? 선택의 기준은 내게 유·불리를 따지는 재물이 아니라, 나의 자존심과 명예가 아니라 은총을 마지막으로 택해야 된다. 어떤 사람은 결정을 앞두고 ①이 일이 주께서 기뻐 하시는 일인가? ②이 일을 지금 해야 되는가? ③이 일을 내가 해야 되는가? 이 세 가지를 고려한다고 한다.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해야 되지 돈 몇 푼에 영혼을 팔수는 없다. 주님이 싫어하시는 죄악 된 삶은 포기 하고 구원 에 이르는 회개 기도를 하기로 작정해야 된다. 하나님나라를 세우고 세계교회를 건설해야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위력은 너무나 막강하다. 성경에서 재물은 하나님과 동격인 라이벌 신으로 등장 한다. 하나님과 재물,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은 돈의 종이 되든지 하나님의 종이 되는 둘 중의 하나 라는 것이다. 돈 때문에 사람이 죽고 살지만 재물이 최종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사람들에게 명예욕 은 포기 할 수 없는 것이다. 성공한 사람일수록 명예에 집착 하고 자존심에 손상을 입을 때 자살도 한다. 재물은 주신자도 여호와요 취하신자도 여호와시다. 이 시대의 풍요의 신, 바알에게 무릎 꿇지 말아야 된다. 크리스찬은 자존심이 아니라 ‘주’존심이 있어야 된다. 자기를 주장 하고 자기 의를 내세우고 가르치려고 덤비는 사람은 분명 교만한 사람이다. 나는 주님 앞에 무익한 종일 따름이다. 모르드개는 권력 앞에 머리 숙이지 않았다. 그의 신앙 지도로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 각오의 에스더 신앙이 나왔다. 레아는 남편 복은 없었지만 하나님의 은총을 덧입어 복을 받았다. 메시야의 모태를 이룬 룻의 신앙은 시어머니 나오미에게서 본받은 것이다. 성경은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 하도다’(룻3:10)라고 하였다. 은혜가 임하고, 은혜가 머물고, 은혜가 자라고, 은혜가 흐른다. 바울은 마지막 인사를 ‘너희들에게 은혜, 긍휼,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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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한토막[김문훈 목사] 최종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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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콘서트[정연철 목사] 복된 사람의 비결(3)
- 하늘 문을 여는 비결(2) 한나의 경우 마음의 아프믈 해결할 길이 없어서 성전에 나와 기도를 했습니다. 처음부터 입술을 열어 기도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몸부림을 치며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하다 보니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제사장이 와서 보니 한나가 얼굴이 불그스름해가지고 입술로 중얼중얼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성령이 임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한나의 이런 모습을 보고 술에 취했다고 하자 한나는 “나는 술 취한 것이 아닙니다. 내 원통함을 하나님 앞에 아뢴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기도가 점점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소리가 작아집니다. 기도 줄을 잡기 전에는 몸부림을 칩니다. 왜냐면 자꾸 다른 것이 생각나기 때문에 몸부림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너는 내게 부르짖어라. 더 크게 부르짖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흑암의 세력을 뚫고 나가려면 기도 소리가 지붕을 뚫고 나가야 합니다. 교회가 부흥하려면 옆에 사는 사람들로부터 “저 교회 이상하다.”라는 소리가 들려야 합니다. 저는 개척하면서부터 성도들에게 통성기도를 시켰습니다. “주여!” 소리가 저 건너편에서는 “불이야, 불이야!”라는 소리로 들려서 사람들이 물 양동이를 들고 교회로 달려온 적도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기도한 것은 자기 자신을 죽인 것입니다. 무릎을 꿇는 자체가 죽는 것이고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가장 훌륭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임 하나님을 움직이면 사람의 마음도 움직입니다. 어떤 분은 통성기도를 하면 귀를 막습니다. 다른 교회에서 오신 어떤 성도가 처음에는 그렇게 귀를 막았지만 나중에는 우리 보다도 더 열정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온 사람들은 다른 교회에 가서 신앙생활을 잘 못합니다. 너무 조용해서 가슴이 답답해진다고 합니다. 엘리야가 얼굴을 무릎사이에 넣고 기도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존 한다는 의지의 표현으로서 그는 오직 하나님만 의존 했습니다. 우리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되겠나이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엘리야의 기도의 결과로 큰비가 내렸습니다.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지며 큰비가 내리는지라”(왕상18:45). 조그만 구름이 나중에는 큰비가 되어 내렸습니다. 가장 중요한 말씀은 마지막 절입니다.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46절). 여기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하늘 문을 열기 위해서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능력을 주셨습니다.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능력을 입혀 주신 것입니다. 마차를 타고 달리는 달리는 사람보다도 앞서가서 이스라엘 궁전으로 들어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엘리야는 문제를 가지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문제만 해결해주신 것이 아니라 능력까지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즉각적인 응답도 있고 지체되는 응답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마음만 먹어도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지만 어떤 때는 기도해도 응답이 늦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뜻으로 기도 응답을 받을 시기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머무르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것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작은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기록이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작은 일에 충성했으니 내가 너에게 큰 것을 맡기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큰 것만을 원합니다. 그러나 작은 것에 충성하지 못하면 큰 것에도 충성하지 못한다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작은 것에 충성하면 하나님께서 더 큰 것을 맡겨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습관저긍로 기도해서는 곤란하며, 하나님과 나 사이에 뭔가 잘못된 것이 있지 않은지 살펴보고 중심이 하나님께 고정된 기도가 절대적으로 요청됩니다. 기도해도 아무런 응답이 없을 때는 그것은 응답인 줄로 믿을 수 있는 정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로 하늘 문을 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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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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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콘서트[정연철 목사] 복된 사람의 비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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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큐티[황권철 목사] 마태가 전한 마태복음 (28장)
- 더치 쉬츠 목사는 태신자를 위한 “구원 기도자의 자기 점검표”를 다음과 같이 확인하고 있다. 첫째, 나는 오늘 그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습니까? 둘째, 나는 오늘 그에게 안부 전화를 했습니까? 셋째, 나는 그가 좋아하는 관심사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까? 넷째, 나는 그에게 말뿐이 아닌 행동으로 삶의 모범을 보입니까? 다섯째, 나는 그의 영혼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러본 적이 있습니까? 여섯째, 나는 주님께서 나의 사랑하는 이를 구원해 주실 것을 확실히 믿습니까? 일곱째, 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 있게 증거할 수 있도록 날마다 성경을 묵상하며 연구하고 있습니까? 그러면서 말하기를 결코 지옥 가서는 안 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며 계속해서 기도하라고 했다. 시골에 한 소년이 나무를 친구삼아 살았다. 소년은 나뭇잎을 주어서 왕관을 만들어 쓰기도 하고 배를 만들기도 했다. 나무에게 싫증을 느낀 소년은 장난감을 사기 위해 돈이 필요했다. 하루는 나무에게 가서 돈을 좀 빌려 달라고 하자 나무는 “나는 돈이 없으니 대신에 내 과일을 팔아 장난감을 사라”고 했다. 어느 덧 소년은 청년이 되어 그는 집을 짓기 위해 돈이 필요했다. “나무야 내게 돈을 빌려 줄 수 있니?” 그때 나무는 “나는 돈이 없으니 내 가지를 잘라서 집을 지으라”고 했다. 소년은 성인이 되어 여행을 위해 배가 필요했다. 이번에도 소년은 나무에게 “나무야 돈을 빌려 줄 수 있니? 내가 배가 필요해!”라고 했다. 나무는 돈이 없고 대신에 “내 둥지를 잘라서 배를 만들라”고 했다. 소년은 배를 타고 멀리 여행을 떠났다가 돈을 다 쓰고 늙은 노인이 되어 돌아왔다. 자기 곁을 떠났던 친구가 거지가 되어 돌아 왔으나 그루터기는 그를 영접해 주었다. 인도의 성자 썬다씽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 한 대학교수가 질문을 했다. “당신은 인도의 정신적 지주인데 평생을 신봉한 힌두교를 버리고 왜 기독교로 개종을 하셨나요?” 이에 그가 대답하기를 “성경에서 만난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마태복음 1장에서 주님은 육의 몸으로 오셨고 28장에 와서는 부활의 몸으로 구원사역을 마무리하셨다. 본문에는 그 주님을 만나기 위해 세상에서 버림받았던 힘없는 여인들이 가장 먼저 무덤을 찾았다. 반면에 가장 힘 있는 대제사장들은 주님의 부활을 은폐하기 위해 가진 모략을 다 꾸몄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너무도 분명하게 부활사건을 보여주시고 승천하셨다. 여인들의 열정 우리말에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다. 대부분 위대한 인물의 배후에는 위대한 어머니들이 있었다. 이처럼 여인들의 역할이 참으로 중요하다. 주님의 곁에서 드러나게 수종 든 제자들이 있었으나 반면 항상 은밀한 배후에는 충성스러운 여종들이 있었다. 주님의 마음에 감동을 준 자도 바로 이름 없는 여인들이었다. 주님의 무덤을 제일 먼저 찾은 사람도 제자들이 아니라 여인들이었다. 위대한 사역의 저변에는 이런 여종들의 숨은 헌신이 있었음을 보게 된다.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막달라 마리아의 열심은 대단했다.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라고 했다. 아직 날이 밝기도 전에 그녀는 다른 여러 여자들과 함께 무덤을 찾았다. 아마 주님을 장사한 이후 주님이 말씀하신 약속의 시간만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이런 열심을 내게 했는가? 그녀는 남다른 은혜와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인들은 가면서 무덤을 막고 있던 큰 돌을 어떻게 옮길 수 있을까? 염려하며 갔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하나님이 주의 사자를 통해 벌써 옮겨놓았다. 그럴 뿐만 아니라 천사가 그 돌 위에 앉아 있었고 천사들이 빌라도의 인봉을 찢어버리고 돌을 굴러 옮겼던 것이다. 이것이 사단의 권세를 짓밟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를 본 초병들은 너무도 무서워서 공포에 떨고 있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권능 앞에 자신들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한지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다. 이들은 죽은 사람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때 천사들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그러면서 주님을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주님은 흩어진 양들을 찾기 위해서 먼저 디베라로 가셨다.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다른 마리아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났다. 비록 여인들의 이름이 사도의 반열에 올라가지는 못했어도 가장 존귀한 사역을 감당한 사명자였다. 하늘나라 생명책에 가장 존귀한 반열에 기록이 되어 있을 줄 믿는다. 기독교 최초 부활의 메시지는 막달라 마리아의 입에서부터 선포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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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큐티[황권철 목사] 마태가 전한 마태복음 (2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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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 소원을 들으시는 하나님
- 누구에게나 소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시10:17) “그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셨으며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 (셀라)”(시21:2) 소원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께 구하면 이루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고 싶어 하십니다. 소원은 꿈과 비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꿈과 비전을 이루어 주십니다. 요셉의 꿈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시20: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37:4)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 겸손한자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소원을 가진 자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어디에서나 언제나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한 자를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은혜를 주시며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겸손은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의 열쇠가 됩니다. 소원을 가지고 겸손 하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기도 들으시고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하나님께는 아무리 큰 소원이라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입을 넓게 열고 하나님께 소원을 가지고 이루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시81:10) 예수님은 맹인 바디메오의 눈 뜨고 싶은 소원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딸, 귀신들린 병에서 고침 받고 싶어 하는 소원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십니다. 소원을 이루어 주고 싶어 하는 사랑의 주님 이십니다. 믿음이 커지고 싶은 소원, 가정 복음화의 소원, 건강하고 싶은 소원, 하나님께 쓰임 받고 싶은 소원, 하나님은 이루어 주십니다. 소원을 가지고 사는 자가 믿음의 사람입니다. 욕심을 버리고 순수한 동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꿈과 소원을 하나님은 이루어 주십니다. 자녀를 얻고 싶은 한나의 소원을 하나님은 이루어 주셨습니다. 부자 되고 싶고 환난에서 벗어나고 싶은 소원을 가지고 기도했던 야베스의 소원을 하나님은 이루어 주셨습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4:10) 로마에 가서 복음 전하고 싶은 바울의 소원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셨습니다. 영혼 구원의 소원, 꿈을 하나님은 이루어주셨습니다. 아무리 큰 소원을 가진다 해도 하나님은 부담을 느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시고 이루어 주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대로 됩니다. 꿈, 소원대로 됩니다. 말한 대로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소원을 이루어주신 모습을 기대하면서 하나님은 나의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고 선포해야 합니다. 인간은 인간의 소원을 이루어 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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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 소원을 들으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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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부요하게 삽시다.(창26:12-22)
- 오래 전 우리나라에서 발행되는 시사 월간지인 “월간 조선”에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습니다. 한국 “부자특성연구회”(富者特性硏究會) 대표인 <문성렬>박사가 기고한 글입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부자들의 특성을 연구한 결과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부자들은 전문가를 100% 신뢰하지 않는다(자기주관). 2.부자들은 아침 형 인간이 많다(부지런). 3.부자는 얼굴에 부자 라인이 있다(웃음). 4.부자는 가구나 가전제품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절약). 5.부자는 옷차림이 수수하다(검소). 6.부자는 붉은 색을 좋아한다(열정). 7.부자는 주말보다 평일 쇼핑을 좋아한다(대우). 8.부자는 남향집을 선호한다(서울 강남의 최고급 아파트인 타워팰리스의 경우 남향집은 모두 부자들 소유). 9.부자는 겨울에 태어난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12-1월, 이와 같은 통계는 세계 적인 경제 전문 잡지인 <포천>에서도 거의 같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10.자녀 교육에 투자하는 성향이 강하다. 사람들 중에 대부분이 다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땀 흘려서 일하고 아끼고 절약하는 것은 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가난하게 사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가난하게 사는 것보다는 부자로 사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부자가 되어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큰일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큰 부자가 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큰일을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어떤 면으로 큰 부자가 되어야 할까요? 성경에 보니까 우리의 삶 가운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부요함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재물이 부요해야 합니다.(창26:12-13) 둘째로, 믿음이 부요해야 합니다.(약2:5) 셋째로, 선행이 부요해야 합니다.(딤전6:18-19) 우리 모두 재물과 믿음과 선한 행실이 부요한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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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부요하게 삽시다.(창26: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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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묵상[김진홍 목사]
- 영국의 19세기를 이끈 빅토리아 여왕이 나라를 이끌 인재를 뽑으려 주위에 추천을 의뢰하였습니다. 3명의 후보가 추천되었습니다. 여왕은 3명의 후보들에게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건네주며 말했습니다. “일주일 뒤 한 장으로 요약해 오십시오. 요약을 가장 잘하는 분을 뽑겠습니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2차 대전 중에 모든 보고서를 한 페이지로 요약해서 보고하기를 지시하였습니다. 운명을 판가름하는 전쟁도 한 장으로 보고서를 제출하기를 지시하였습니다. 보고서가 1페이지가 넘으면 다시 작업하여 1페이지로 요약하여 보고하라 지시하였습니다. 어렵고 복잡한 내용을 핵심을 추려 간단하고 명료하게 압축하는 지혜를 발휘하지 못하면, 큰 일을 맡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려시대나 조선조에 실시하였던 과거 시험에는 약술하는 능력으로 인물을 판단하였습니다. 제너럴 모터스 같은 세계적인 기업들도 입사 시험을 치를 때 요약하는 능력을 꼭 과목으로 넣었습니다.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성경의 내용을 ‘그리스도의 보혈’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하였습니다. 우리들의 신앙 내용을 간결하게 요약한다면 어떤 말이 될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물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로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간결하게 대답하였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학력도 경력도 아무런 스펙을 갖추지 못한 평범한 뱃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예수에 대한 신앙을 요약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제자 중의 제자가 될 수 있는 바탕이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태복음 16장 16절)”. 칼럼의 완본은 gncnews.net 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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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묵상[김진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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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여는 시[신광열 목사] 허참
- 제자보다 못한 선생 환자보다 못한 의사 사병보다 못한 장교 아이보다 못한 어른 교인보다 못한 목사 안타깝게도 개보다 못한 사람도 더러 있다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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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여는 시[신광열 목사] 허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