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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⑹- 장두노미(藏頭露尾)
필자는 지난 ?월 ?일 모 신문에 총장 선임의 불법성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고신총회와 고려학원 이사회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반응이 없어도 되는 걸까요? 박영호 목사님이 총회장으로 있을 때모 신문에 나온 기사를 가지고 신문에 나온 사건이기에 조사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당시 총회 임원회의 강력한 의지와 결단에 따라 총회는 격론을 벌이고 투표까지 하여 조사위원회를 만들었던 전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도 그 결정의 정신을 존중하여 총회와 관련하여 신문 기사에 난 사건에 대해서 조사위원회를 만들든지, 아니면 운영위원회에서라도 살펴야 하는 것이 공정하지 않겠습니까? 자기편이면 덮고 다른 편이면 조사위원회를 만듭니까? 총회 임원회의 결정이 이렇게 사람에 따라 수시로 바뀌어도 괜찮은 겁니까? 다시 한번 이야기해 봅시다. 고신대 총장의 논문표절문제 아무 문제가 없습니까? 개인적으로 이사장이나 총장의 두터운 신뢰와 사랑을 받는 당사자 대해 그 대학이 공정하게 심사하리라 기대하지 않습니다.하지만 결과가 너무 느립니다. 이번에도 시간 끌기로 할 것 같습니다.“오래된 일이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등으로 적당히 넘기려고 할 것 같습니다. 어쨌든 결과를 지켜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사회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이사회가 바르게 하려고조속한 결론을 내자고 회의 한 일이 한번이라도 있습니까?어쩌면 이사회는 이 일에 대한 답변이 나오지 않길 기다리고 있을 것 같습니다. 고려학원은 이사들의 개인 전유물이 아닙니다. 고신총회 산하 성도들과 총회에서 파송한 이사들로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총회와 성도들의 뜻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그런 노력도 의지도 없다면 이사회는 직무유기입니다. 알고도 문제없다고 강행한 이사회에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이사회에 속한 목사들이 자신의 교회에서 설교할 때 그렇게 가르치고, 장로들은 대표 기도할 때 그런 자세로 기도하는지 궁금합니다. “주님, 이건 불법이지만 급한 불부터 끄고 봅시다.” 과연 이런 설교와 기도에 성도들이 얼마나 공감하며 은혜받을 것인지 심히 궁금합니다. 절차위반과 위조문서 정말 이래도 괜찮은 겁니까? 총회의 ‘절차위반, 문서위조’, 이런 일들이 아무런 죄의식 없이 받아들여지다니 참 신기합니다. 노회 구역조정 문제로 시끌벅적할 때 당회도 노회도 거치지 않는 괴문서를 총회장이 운운하는가 하면, 총회 서기가 임원회의 결정과는 다른 문서를 노회에 보내는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니 이사회도 그런 불법을 보고 배운 것이 아닙니까? 지난 73회 총회에서 고려학원 이사회가 총장 인선을 위한 고려학원 정관을 개정했습니다. 총장선임을 위해 ‘1차는 3분의 2 찬성을, 2차는 과반 찬성’으로 선임할 수 있도록 개정했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듯 이런 절차가 진행되려면 이사회에서 먼저 결정하고 수정안이 총회에 상정되어야 합니다.그런데 지난해 총회가 파한 후 3개월이 지난 12월 말에가서야이사회가 총회가 결정한 정관개정을 ‘추인’하는 형식으로 개정을했다 하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입니까? 정말 이래도 괜찮습니까? 이일을 누가 주도했으며 누가 진행했습니까? 반드시 책임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이런 짓은 절대 해서는 안 되며, 고신 총회와 500여 총대를 속인 일이고, 고려학원 이사회와 고신총회 산하 모든 교회와 성도들을 기만한 일입니다. 총장은 거짓과 불법으로 세움을 받았으니 주도 세력이 시키는 대로, 하라는 대로 하수인 역할을 톡톡히 잘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고신총회 산하 모든 교회와 성도들은 논문표절, 절차위반, 부정 정관개정 등,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이렇게 선임된 총장의 지도력이 서겠습니까? 정관개정도 불법이지만 불법적 개정안을 불법으로 총회에 상정 해서 총대를 속이고 총장을 선임했습니다. 총장 모집 공고를 낼 때의 법은 분명 3분의 2 이상으로 선임해야 한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공모를 보고 지원한 지원자들은 공고한 정관대로 선임해야 한다. 그런데공모한 후에정관을 ‘과반수’로 개정해서 뽑는 것은 누가 봐도 특혜입니다. 공모가 나갔다면, 공모한 정관대로, 기준대로 선임해야 합니다. 공모한 정관과 다른 정관을 만들어서 지원자 중에 총장을 선임한 것은 누가 봐도 특혜를 주기 위한 일종의 모략에 불과합니다.처음부터 과반수 개정된 정관으로 공모를 했다면, 더 많은 지원자가 있었을 것입니다. 3분의 2보다 과반수가 훨씬 당선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특정인에게 유리하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사람 아니면 안 된다는 우스꽝스러운 일을 이사회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부당하게 일사천리로 진행했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의 이런 행위에 대해 ‘선거운동의 의미와 금지되는 범위’와 관련한 대법원의 판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법원 2016. 8. 26. 선고 2015도11812 전원합의체 판결 [공직선거법위반, 정치자금법위반]’을 예를 들어 살펴봅시다. 이때 판시사항은 ‘선거운동의 의미와 금지되는 선거운동의 범위를 판단하는 기준’이며, 판결 요지 중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선거운동은 대상인 선거가 특정되는 것이 중요한 개념표지이므로 문제 된 행위가 특정 선거를 위한 것임이 인정되어야만 선거운동에 해당하는데, 행위 당시의 상황에서 특정 선거의 실시에 대한 예측이나 확정 여부, 행위의 시기와 특정 선거일 간의 시간적 간격, 행위의 내용과 당시의 상황, 행위자와 후보자의 관계 등 여러 객관적 사정을 종합하여 선거인의 관점에서 문제 된 행위가 특정 선거를 대상으로 하였는지를 합리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 “...특정한 선거를 목표로 하여 선거에서 특정인의 당선 또는 낙선을 도모하는 목적의사가 표시된 것으로 인정되지 않는 한 선거운동이라고 볼 것은 아니다.” “...특정 선거에서 특정인의 당선 또는 낙선을 도모하는 목적의사에 따라 행해진 것이라는 점이 당해 선거인의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인정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 세 가지 판결 요지에 따르면, 고려학원 이사회가 시도한 정관 개정은, ‘행위의 시기와 특정 선거일 간의 간격, 행위의 내용과 당시의 상황’ 등을 종합해 볼 때, 분명 ‘특정인의 당선’을 도모하는 ‘목적 의사’가 분명한 ‘선거운동’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사회는 총대들을 무지하게 보는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필자는 몇 차례에 걸쳐서 바르게 하자고 강력하게 호소하는데, 이사회나 총회 임원회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답을 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까? 잘못이 없으면 없다고 밝히고, 잘못이 있다면 용서를 구하고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안에서 이것이 다루어지고 해결책이 나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렇게 글로 표현하지만, 답이 없을 땐, 똥물을 뒤집어쓸 각오로 문제를 삼아도 저의 책임이 아님을 분명히 밝힙니다. 이후의 모든 책임은 그렇게 행한 당사자들에게 있음을 알립니다.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더 얹어봅시다. 월간고신과 기독교보에 발행인은 현직유지재단 이사장, 총회장이 맡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현 총회장은 어디를 가고, 전례 없는 전 총회장이 발행인을 계속하는가?외국인이라 안된다면, 이에 관해 아무 문제 없다는 사람들이나 당사자가 답할 차례입니다. ‘장두노미’(藏頭露尾)란 말이 있습니다. 중국 원나라의 문인 장가구가 지은 <점강진·번귀거래사>에 등장하는 이 말은 쫓기는 타조가 머리를 덤불 속에 숨기지만 꼬리는 미처 숨기지 못해 쩔쩔매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장두노미(藏頭露尾)는 “진실은 감춰도 언젠가는 밝혀 진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사회는 장두노미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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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6) (민12:1-3, 마5:5)
지면을 통하여 제가 목회하는 고신교회에 대해 잠깐 예로 언급함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고신교회도 세계를 교구로 선교하는 대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370 용사는 못되더라도 37 용사는 있어야 합니다. 고신교회 목회자로서 오늘까지 우리 고신교회의 선교를 돌아보면 고신교회 성도들이 다윗의 37 용사에 버금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교회 분열의 아픔과 담임목사, 부목사들이 면직을 당하는 일 앞에서도 선교를 중단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믿음의 의리가 있는 용사들이었습니다. 코로나19 기간에도 15개 정도의 교회를 필리핀과 네팔에 건축했습니다. 순간순간 어려움이 생겼을 때 구제하고 돌아본 것은 말할 수도 없이 많습니다. 지난해 상반기만 해도 우리 교회 선교비가 1억이 더 지출되었습니다. 경상비 전체 25-30%가 선교비로 지출되고 있습니다. 일단 빚을 내서라도 선교비는 지출하고 봅니다. 돈의 액수를 떠나서 선교를 바라보는 시각과 선교를 하는 실천에 우리 고신교회와 같은 교회가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고신교회 담임목사로서 우리 교회는 세계를 교구로 선교하는 일에 전 성도가 다윗의 37 용사와 같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얼마나 성도들을 좋아하겠습니까? 잘은 몰라도 고신교단 안에서 저만큼 성도들 좋아하는 목사 없을 겁니다. 하지만 바로 이 장면에서 목회자는 매우 위험한 신호를 감지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을 자기 자신보다 사랑하고 좋아해야 합니다. 하지만 목회자는 성도들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이 부분이 목회자가 감지할 줄 알아야 하는 위험한 신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가 하나님 외에 그 어느 것도 의지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눈곱만큼이라도 하나님 의지하는 것을 성도에게로 돌리고 기대를 거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목회자에게 즉각 응징하십니다. 그러니 목회자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성도들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 사이에서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절대로 타협하거나 양보해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로 하여금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십니다. 목회자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때, 성도들은 반드시 목회자의 37 용사가 되어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를 시도 때도 없이 풀무불 앞에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를 철저히 하나님만 의지하는 온유한 자로 만드시기 위하여 풀무불에 던져 넣으십니다. (욥23:10)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그 결과 목회자는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당한다 하더라도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그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온유한 자가 되어 순금같이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온유하게 된 목회자는 정금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리암이 아론과 70장로들을 규합하여 백성들을 선동합니다. 어느 정도 새가 결집 되니 미리암은 공개적으로 모세의 통치에 비방과 반역을 시도합니다. 아직 출애굽과 홍해를 건넌 감동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때 성경은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증언합니다. 악한 무리들이 거짓된 계획을 세워 공격했습니다. 무시무시한 공격 앞에 제자들과 함께했던 무리들은 다 떠나가 버렸습니다. 부인하며 저주까지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홀로 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거나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홀로 지시기도 힘든 십자가를 지시고 묵묵하게 끝까지 골고다로 가셨습니다. 목숨까지 위협하는 거짓된 계획으로 공격했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른말, 천국 복음을 전하시며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온유한 자를 완성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온유한 자의 완성을 이루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약속하신 대로 땅을, 약속의 땅을, 교회를 주셨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교회는 하나님께서 온유한 자에게 약속하신 최고의 복입니다. 어떻습니까? 나는 교회인 것 같습니까? 온유한 사람입니다. 이미 복 받은 사람입니다. 나는 교회가 아닌 것 같습니까? 온유한 사람 아닙니다. 교회와 한 몸 되지 못하고, 교회와 거리가 있는 사람은 온유한 사람도 아니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 복음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 모든 말을 듣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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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현령비현령(5) -전관예우(前官禮遇)
두런두런 둘러앉은 장로님들의 담소 가운데 20만 원짜리 봉투 하나면 “총회에서 발언해 줄 목사들 많다” 아니 “발언 안 할 사람 거의 없다”라는 말로 폭소가 터져 나옵니다. 참 검소한 고신 교단의 목사들입니다. 상임위나 특별국의 자리 하나면 평생 다져왔던 인간관계나 의리는 배설물처럼 여기는 결단력 있는 고신 교단의 목사들입니다. 이렇게 다루기 좋은 목사 장로이니 계파나 진영의 의도를 가지고 매관매직하면 오늘날 고신에 만연되어있는 계파와 진영의 골은 더욱 깊어질 것이 자명합니다. 아니 혹자는 이미 보수는 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보수를 만들어 개혁을 견제하고 균형을 맞추자고 주장합니다. 뼛속까지 개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총회 임원으로 만들어 죽어가는 보수를 살려야 한다고 평생 개혁에서 쌓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작금의 정치행태에 발맞추어 가능한 봉투가 되는 자리를 만들고, 그곳에서 천년만년 누리고 싶어 하는 형국입니다. 20만 원짜리 봉투와 자리의 맛을 봐 버린 소위 보수라는 자들은 아예 정치적인 의리와 명분은 상실되어버렸고, 보수라는 가면만 쓰고 있을 뿐 언제든지 개혁도 되고, 진보도 되어 그동안 누리던 봉투의 자리를 놓칠까 전전긍긍하며 그 신보수라는 새 배에 올라타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최근 들어 고신교단 내에 계파와 진영의 골이 더욱 깊어지고 커진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서울의 L 목사님께서 열변을 토하신 것처럼 총회 서기 출신 카르텔입니다. 총회 부회록 서기가 되기 전에 총회 준비를 위한 총회 서기부 MT라는 명목으로 그 해 부회록 서기 후보의 물망에 오르는 사람을 부부 동반 모임에 참여시킵니다. 그러니 총회 임원에 입성하기 위해서 그 계파 사람이 아니면 시작부터 불가능합니다. 지금 총회 서기부에 포진한 분들을 보십시오. 계파 색채가 엷고, 계파를 싫어하고, 보수성향이 있는 사람도 일단은 그 진영에 몸을 기대고 양다리를 걸쳐야 시작이 됩니다. 균형 있는 총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분명한 명분으로 다리만이라도 걸치고 시작했는데, 회록 서기를 지나면서 하체가 들어가고, 부서기를 지나면서 몸통이 들어가고, 서기가 되면 총회를 손에 쥐고, 서기를 마치면서 그 영향력은 한국교회로 확대됩니다. 사욕에 치우친 사람이 총회 임원, 특히 총회장이 되어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4년 동안 총회 서기부를 거치면서는 구석구석을 너무도 잘 알게 된 서기부 임원들이 총회장단이 되었을 때, 유익한 점보다 작금의 현상처럼 위험하고 무법천지가 될 위험성이 훨씬 높습니다. 소위 서기 카르텔이라는 것을 반드시 총회적으로 다루어 이 카르텔로 인한 계파와 진영을 넘어 안하무인의 정치로 흘러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서기부를 거치지 않아도 총회장단에 오를 정도의 사람이면, 이미 노회와 목회에 상당한 경험과 식견을 가진 분들로서 충분한 자질이 검증되었고, 사무총장 이하 직원들의 훌륭한 보좌가 있기에 1-2년의 총회장단 사명은 충분히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한국교회에서의 우리 교단의 몫이 있습니다. 교단의 위상을 생각해서 대부분이 총회장을 역임하신 분들이 이사로 가십니다. 총회 서기부를 마치고는 특별국이나 상임위에는 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고 총회 임원회에서 의논이 있었다지만 관례처럼 총회 서기를 마치면 총회를 잘 안다는 빌미로 감사국에 들어갑니다.(현재 감사국원 3명은 최근 총회 서기역임) 총회 감사국인지 총회 서기 지내신 분들의 친목회인지 구분이 안 될 지경입니다. 총회 감사국이 총회 서기부의 연장선 조직입니다. 총회 감사국은 별정직처럼 그 기능상 법적 전문가, 재정 전문가, 행정 전문가 정도는 배치해야 합니다. 차라리 총회를 잘 아는 서기부 출신들로 총회를 하나 만드시지요. 총회 총대로 나올 정도가 되면 기본적인 자격과 능력을 갖춘 분들인데, 총회 서기 출신들이 꼭 해야 한다는 논리는 총대들을 얼마나 무시하는 처사인지 총대들은 알아야 합니다. 총대들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당근 하나 던져주면 입을 다무는 총대들이니 무시당하는 줄도 모를 수 있습니다. 유일하게 서기를 마치고 임원회에서 의논한 대로 그 어느 상임위도, 틀별국도, 이사도 가지 않은 분이 고 신수인 총회장이십니다. 최근 총회 서기를 지낸 분 들 중 유일하게 보수진영의 고 신수인 총회장님께서 약속을 지켰습니다. 소위 개혁진영의 서기들은 단 한 명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너무 개혁을 잘하셔서 말입니다. 처음 시작할 땐 훌륭하셔서 선출되셨습니다. 그런데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니 자연스럽게 욕심이 생긴 것입니다. 여기엔 그 어떤 사람도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총회가 훌륭한 분들로 보호해야 할 책임도 있습니다. 총회장의 사역이 끝날 무렵 고 신수인 총회장님께서는 당신의 몫인 “CBS이사”를 제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당연히 총회장님께서 가셔야 교단 권위와 위상이 서게 된다고 고사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렇게 전달하여 CBS에서는 제가 이사로 갈 것 다 알고 전화까지 왔었습니다. 물론 개혁에 몸을 담았던 총회장 출신은 선배 총회장 출신 목사님의 이사 자리를 빼앗아서라도 반드시 그 자리에 갑니다. 말 그대로 개혁 정신이 투철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난 후 고 신 총회장님께로부터 “미안하다”고 하는 전화가 왔습니다.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너무 힘들게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원래 그 자리는 제자리가 아닙니다. 총회장님 자리니 총회장님 편하신 대로 하시라”고 대답했고, 현제 이사로 있는 당시 총회 서기가 고집을 부려 그 자리로 갔습니다. 사욕에 눈이 뒤집히면 세상이 말하는 윤리도 도덕도 질서도 없습니다. 현재 우리 고신총회가 한국교회에 파송하는 이사는 CBS, 성서 공회, 찬송가 공회, CTS, 군선교 위원회입니다. 현재 이사를 하고 있는 분들은 다 총회 임원 출신이고, 목사인 경우는 다 총회 서기 출신입니다. 고 신수인 총회장님을 분기점으로 해서 그동안 관례로 총회장을 역임했던 분들이 가던 이사를 총회 서기를 마치고 가는 아주 개혁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총회를 잘 아는 것을 넘어 총회 울타리 밖에 있는 이권도 잘 알게 된 것입니다. 총회장단이 갖는 위엄과 일반 목사와 비교할 수 없는 혜택에 눈이 멀어 목사의 정년까지 희생해 가며 자리에 오르고 “내 때만 망하지 않기를 소망”하면서 그동안 꿈꾸어 왔던 즐거움을 만끽하게 됩니다. 그럴 수도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그런 세월이 가는 동안 고신의 신앙과 정신은 오물통이 되어 썩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위기가 아니라고 했다가 집권을 하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위기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이 역시 진영논리로서 총대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하는 속임수입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책임을 고신의 교회들에게 떠넘기는 기가 찬 술수이지요. 그리고 뒤에서는 몇 년 세월을 통해 달인의 경지에 오른 실력으로 소위 봉투가 되는 일에는 탁월한 안목으로 몇 수를 내다보는 행보를 하게 됩니다. 총회 서기부는 총회 서기단 활동으로 총회 임원회 자리를 끝내야 합니다. 총회장단은 시대 시대마다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바라보며 영적으로 한국교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장자 고신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을 세워야 합니다. 총회가 평안하고 태평성대일 때는 농어촌에서 목회하시는 훌륭한 목사님도 총회장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고신이 위기라고 특별기도회를 하는 상황이라면 총회장 되기 위해 몇 해 동안 수천, 수억을 쓸 것이 아니라 총회장에 된 후 수억을 총회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인물을 총회장으로 세워야 합니다. 고신이 위기라고 기도회를 하면서, 1) 눈 감고 아웅 하지 말고 2) 순수한 교회들과 성도들의 주머니를 갈취하지 말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야 합니다. 또 이미 그 자리에 오르신 분이라 해도 위기의 총회를 위하여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분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정말 고신을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전관예우(前官禮遇)’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적 의미는 장관급 이상의 고위 관직에 있었던 사람에게, 퇴임 후에도 그의 공직에 대한 헌신을 기려 예의를 갖추어 존중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관리는 개인의 행복에 우선해서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재능과 노력을 바쳤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자세로 일한 관리가 퇴직했을 때 그를 예우함은 마땅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흔히 쓰이는 전관예우라는 말의 뜻은 본래의 뜻과는 거리가 멉니다. 가장 잘못된 사례가 법조계의 전관예우입니다. 전직 판사와 검사가 퇴직 후에 변호사가 된 사람을 현직 검사나 판사가 예우해 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변론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관(前官)이라는 이유로 유리한 결과를 얻는다는 것은 공정을 생명으로 하는 법정에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제 총회 감사국은 서기부 출신의 ‘전관예우’의 자리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러니 총회 피감 기관들을 공정하게 제대로 감사할 기능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전관예우 받았으니 밥값을 해야겠지요? 한 걸음 더 나아가 고신을 대표하는 한국교회의 자리도 서기부 출신의 “전관예우”의 자리로 자리매김해 버렸습니다. 당연히 사리사욕이 목구멍까지 차오릅니다. *묻고 싶습니다. 앞서 언급한 총회를 대표하여 파송하는 이사직에 어떤 근거로, 어떤 기준으로 파송하는지, 서기 출신이 총회를 대표할 자격이 있는 것인지, 총회 임원회는 총대들이 납득 할 수 있는 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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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5 : 성경에서의 용납과 용서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지나면서 주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믿음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데 먼저 감사를 드리면서 문득 그게 용서인가 용납인가? 두 단어는 같은 말인가 다른 말인가? 라는 용어적 의미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흔히들 많은 교인들은 이 두 단어를 구분 없이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찬송가 569장 3절에도‘흠이 많고 약한 우리를 용납하여 주시고’란 가사가 있다. 하지만 엄격히 보면 같은 듯 다른 말이다. 본 호에서는 그 차이점이 어떤지를 분석하여 논하고자 한다. II. 용납(容納)과 용서(容恕)의 단어 분석 1. 용납이란? : 헬라어로는 ‘아네레스’, 한자어로는 얼굴 용(容), 바칠 납(納)이다. 민중서관의 국어대사전에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남의 말이나 행동을 받아들임’, ‘어떤 물건이나 상황을 받아들임’이라 했고, 금성사 국어대사전에는 ‘부정적인 것을 그냥 받아들이거나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했다. 국문학 교수를 역임한 최태영 장로는 ‘교회용어 이대로 좋은가?’란 그의 저서에서 ‘이 용납은 허용(許容)과 거의 같은 뜻으로 부정적인 요소, 모자라는 점이 있지만, 그것을 탓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하며 받아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이를 우리 개신교적인 의미로 보면, ‘우리의 죄는 용납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시지 이를 긍정적으로 이를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용납하시는 분은 아니시다.’라고도 했다. 이상으로 볼 때 어떤 잘못이 있을 때는 그 일에 대한 회개 기도가 필요하며,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성경에서도 용납은 죄의 개념으로 표현되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면,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고후11:1).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 구나’(고후11: 19). ‘사랑가운데 서로 용납하라’(엡4:2)고 했다. 여기에서의 용납이란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용서가 아니라 상호 인간관계 속에서 상대방을 너그럽게 보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2. 용서란? : 헬라어로는 파레시스 로서 ‘놓아줌’, ‘해산’, ‘처벌의 보류’등의 뜻이 있고, 로마서 3:25절에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하여 지은 죄를 용서함’이란 뜻으로 말씀하고 있고 수많은 용서에 대한 말씀도 거의 동일하다. 한자어로는 얼굴 용(容), 용서할 서(恕)이며, 민중서관의 국어대사전에는 ‘지은 죄나 잘못한 일을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덮어줌’이라 했다. 이상으로 볼 때 성경적 의미나 각종 사전적 의미로 볼 때도 용서의 의미는 거의 동일하다. 이렇게 볼 때 용서란,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또 스스로 죄를 해결할 방법은 없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믿고 회개 기도할 때 비로소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용서는 상호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용납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는 믿음 안에서의 회개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용서인 것이다. III. 결론과 제언 서론에서 언급한 찬송가 569장 3절에 ‘흠이 많고 약한 우리를 용납하여 주시고’란 가사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면, 용서와 용납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어서 다소의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앞에서 논한 대로 실제로는 같은듯하나 다른 의미이다. 여기서는 용납이 아니라 용서로 표현함이 옳을 것이다. 이 두 단어 외에도 관용(寬容)(사전적 뜻: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이란 용어도 있다. 어쩌면 용납과 용서를 다 포함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고민과 염려가 되는 것은 이런 문자적인 구분을 지나치게 하다 보면, 문자적 율법주의에 빠져서 본질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항상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확한 의미를 알고 사용하는 것은 더 좋은 일이기 때문에 바로 알고 바로 사용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 용어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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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삶의 현실에 대한 인간의 태도
인생의 삶을 사는데 현실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그 태도가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태도(attitude)가 고도(altitude)를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비행기가 아래로 향하느냐 위로 향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고도가 결정되듯 사람이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 방향과 높이가 결정된다는 뜻이다. 누구나 높이 오르고 싶어 하지만 아무나 높이 오르는 것은 아니다. 오를 수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히말라야 고산족들은 양을 매매할 때 가파른 산비탈에 양을 놓아두고 살 사람과 팔 사람이 함께 지켜본다고 한다. 비탈 위로 풀을 뜯으러 올라가면 값이 비싸고, 비탈 아래로 내려가면 값이 싸진다고 한다. 그 이유는 위로 올라가려는 양은 현재 힘이 들더라도 넓은 산허리에 이르게 되지만, 아래로 내려가는 양은 현재 수월하나 협곡 바닥에 이르러서는 굶주려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신앙의 삶도 마찬가지다. 항상 높이 계신 주님을 바라보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오는 자가 있는가 하면 어려움이 있을 때 예루살렘을 떠나 내려가는 자들이 있다. 어려운 시기에 갈렙은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 믿음의 태도를 가졌던 사람이다. 그는 85세의 나이에도 아직도 정복되지 않은 가나안 땅에 잔류하고 있는 아낙 사람들이 사는 산악지대를 정복하고자 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곳에는 아낙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분명 함께 하실 것이니, 내가 반드시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수 14장 12절)” 갈렙의 신앙은 능동적 신앙의 삶이었다. 45년 전에도 다른 사람들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후퇴 반응을 보였지만 갈렙은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자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벌써 85세 고령인데도 여전히 적극적인 Next Vision 성취를 지향하며 살았던 것이다. 맥도널드 햄버거를 창업하기 전 레이 크록은, 53세 나이에 겨우 밀크쉐이크와 함께 30년 동안 종이컵을 파는 세일즈맨으로 반평생을 보냈다. 그래도 그는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던 그는 30년이라는 기나긴 밤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서 성공을 한 것이다. 인도의 벵골 호랑이는 먹이 사냥에서 사냥감을 잡는데 약 스무 번의 시도 끝에 한 번 성공한다고 한다. 그는 실패 앞에 포기가 아니라 도전의 태도를 가져 그 도전이 성공을 이루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한 번 실패하면 쉽게 단념하고 한탄한다. 잃은 것 때문에 원망하지 말고 지금 있는 것이 자산이 되어 다시 도약해야 한다. 열정을 가진 사람으로 다시 일어나면 되는 것이다. 슈베르트는 가난한 음악가였다. 31세로 죽을 때까지 방 한 칸 없었고, 그토록 필요한 피아노 한 대 없는 불우한 음악가였다. 어느 날 레스토랑에 앉아 있는데 악상이 떠올랐다. 그는 오선지를 찾았다. 친구가 레스토랑 메뉴판에 오선지를 그려주었다. 그것이 유명한 아베마리아 세레나데이다. 환경에 낙심할 필요 없다. 주위 시선에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다. 폭풍이 일어도 지구는 돌고 있는 것이다. 고난 속에 신앙의 열정을 가지고 가면 길이 열린다. 신앙의 열정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능력 주시고 그 능력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나니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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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자유의 축복 (요8:31-36)
1997년 북한의 권력서열 제3위(노동당 국제담당비서)였던 <황장엽>씨가 주중 한국 대사관을 통해서 우리나라로 망명을 했습니다. 그 망명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북한에는 그의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과 가족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나라로 망명함에 따라서 그의 가족들은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고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북한 권력층의 실세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남한으로 망명을 할 경우 남아 있는 가족들이 얼마나 비참해 지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남한으로 망명을 감행한 이유는 바로 체제의 자유를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고, 너무나 잘못되어 있는 북한의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어서였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렇게 무모한 망명을 한데 대해서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의 행동이 옳았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역사가 평가를 할 것입니다. 그의 행동을 통해서 우리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을 깨달을 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유의 소중함”입니다. 체제의 자유, 정치적인 자유는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억압이 있는 나라마다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 기꺼이 몸을 던지고, 민주화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유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자유의 소중함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억압 속에 사는 사람들은 자유의 소중함을 애타게 목말라 합니다. 그렇게 소중한 정치적인 자유보다 더 필요하고 소중한 자유가 있는데 바로 영적인 자유(신앙의 자유)입니다. 그 영적인 자유에 대해서 알아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유를 취하는 방법을 알아야합니다.(요8:32,36) 둘째는, 자유를 빼앗기지 않게 지켜야합니다.(갈2:4) 셋째는, 자유를 누리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갈5:13)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소중한 자유를 잘 지키고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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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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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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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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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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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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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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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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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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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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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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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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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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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오해와 이해 (수22:10-34)
- 제주도의 한 교회에 새로 부임하신 목사님께서 어느 날 성도의 가정을 심방하려고 동네를 지나가다가 동네 할머니 한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할머니가 목사님을 보고 “목사님, 어디 감수꽈?”하고 인사를 하기에 “예, 심방갑니다”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아주 의아한 표정을 지으시면서 “목사님도 신방 감수꽈?”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동네에 “교회에 새로 오신 목사님이 무당 집에 다닌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목사님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자초지종을 알아보았더니 며칠 전 심방 가다가 만난 동네 할머니가 원인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심방”(尋訪)간다고 한 말을 할머니가 “신방”(神房)에 간다는 말로 오해를 하셔서 소문을 퍼트렸던 것입니다. 제주도에서는 무당 집을 가리켜서 “신방”(神房)이라고 합니다. 목사님이 한 말을 할머니가 잘 이해를 못한 나머지 오해를 했던 것입니다. 오해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인간관계 속에서 생각지도 않은 일 때문에 오해를 받기도 하고, 또 남을 오해하기도 합니다. 오해를 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것입니다. 내가 남을 오해하는 것도 나쁜 것이고, 남이 나를 오해하는 것도 괴로운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가면 언젠가는 오해가 풀리게 되지만 그러나 오해를 하는 동안은 마음이 참 괴롭고 불편합니다. 그러므로 오해를 하거나 오해를 받는 일이 없어야 하고, 오해를 하더라도 빨리 풀어야 합니다. 본문 말씀은, 가나안 땅 정복을 끝내고 자기 곳으로 돌아가던 용사들이 요단강 언덕에 기념으로 큰 제단을 쌓았는데 그것이 그만 큰 오해의 불씨가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왜 오해를 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오해를 풀 수 있었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오해는 속단에서 비롯됩니다.(10-20) 둘째로, 대화하면 오해가 풀어집니다.(13,14,26,27) 셋째로, 오해가 풀어지면 즐겁습니다.(32,33) 주님의 몸 된 교회 공동체 안에 서로 오해하고 반목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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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오해와 이해 (수22: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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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여백(餘白)
- 필자는 목사입니다. 설교 원고를 작성하고 프린터를 해 보면 항상 설교 원고의 위와 아래 그리고 좌우 옆으로 여백이 있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컴퓨터 한글 프로그램이 그렇게 설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때에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여백이 없도록 설정을 하고 프린트를 해 보면 어떨까 하고 말입니다. 독자 여러분은 어떨 것 같습니까? 종이 한 가득 빽빽하게 적힌 글자로 인해서 읽기가 싫을 것입니다. 그처럼 여백이란 필요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은 무엇에든지 꼭 필요한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바쁜 현대의 삶 가운데서 너무 여러분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힘들고 탈진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상태가 문제가 되는 것은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을 수렁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나오는 엘리야 선지자는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와의 기도의 대결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가 문제였습니다. 악독한 우상 숭배자였고 악녀였던 왕비 이세벨이 엘리야 선지자를 찾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열왕기상 19장 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엘리야는 그 이세벨의 위협에 낙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광야로 가서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 간구하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바로 얼마 전에 그렇게 영적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왕비 이세벨의 위협 앞에 그렇게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엘리야 선지자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그런 것입니다. 아무리 강한 것 같아도 한계가 있고 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지쳐서 갈멜산의 그 놀라운 승리는 온데간데없고 그렇게 죽기를 간구할 만큼 한 없이 약해졌던 엘리야 선지자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엘리야를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천사를 보내셔서 그를 위로하시고 두 번이나 구운 떡과 물을 주어서 먹게 하시고 오랫동안 잠을 자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시고 그의 삶에 여백을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를 푹 쉬게 하시고 다음 사역을 감당하게 하셨던 것이지요. 이 하나님의 지혜가 놀랍고 감사합니다. 연약함을 가진 우리 인간은 그렇습니다. 삶의 여백이 없이 달리기만 하다가는 인간의 한계로 인해서 치명적인 실수를 하거나 나락을 빠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아시고 엘리야를 그렇게 위로하고 먹이고 재웠던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알고 목표만을 바라보며 삶의 여백이 없이 달려가는 것을 잠시 멈추십시오. 그리고 나를 돌아보며 삶의 여백을 가지십시오. 육신과 정신이 쉬게 하면서 영적으로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우리는 살면서 그런 경우를 만납니다. 지치고 낙심된 상황에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잘못된 결정을 내리고 나중에 후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모로 기진맥진하거나 마음이 힘든 상태에서 내리는 결정은 그렇게 열에 아홉은 어리석은 결정이 됩니다. 그리고 조급한 마음으로 바쁘게만 나를 몰다보면 앞만 보이고 옆도 뒤도 돌아볼 여유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돌아볼 여유도, 내 도움이 필요한 곳을 돌아볼 여유도 없어집니다. 그러한 삶은 성공적인 삶인 것 같지만 가장 피폐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삶의 여백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오셔서 바쁜 공생애의 삶 가운데서 많은 일을 하셨지만, 조용히 성부 하나님과 기도의 교제를 하는 시간도 빠뜨리지 않으셨습니다. 폭풍같이 영혼을 향한 능력의 사역을 하시면서도 고요한 하늬바람처럼 물러날 줄도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닮으십시오. 예수님보다 더 열심인척 하지 마십시오. 이제 달리기만 하는 삶을 잠시 중단하고 삶의 여백을 만드십시오. 삶의 여백, 그것은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의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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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여백(餘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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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울이
- 오랜 시간 인도에서 선교하면서 있었던 일이다. 처음에는 인도인들에게 카스트 제도와 사회적 편견에 매여 말씀으로 변화를 시킨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은혜의 생수에 목말랐고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었기에 성령 하나님은 장소나 사람에 제한받지 아니하고 거침없이 그들에게 임하여 큰 역사를 일으킨 것이다. 언어적 한계와 피부색깔이나 문화적 차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했다. 예수를 영접한 이가 늘어난 후 선교사가 안식년으로 인해 고국으로 떠난다는 소식에 왕복거리가 꽤 먼데도 선교사가 좋아하는 해산물을 구해 따뜻한 밥 한 끼라도 대접하는 정성을 보였다. 선교사가 전하는 짧은 메시지에 감동받아 인도인들의 눈시울이 붉어지며 진심으로 울어주는 눈물의 감격이 선교사도 엉엉 울게 만든 것이다. 울어주는 이의 마음과 우는 이의 마음이 이어지고 언어보다 시선을 통해 의미가 전해지면서 행복을 빌어주는 최고의 좋은 관계가 형성되었다. 비가 엄청 쏟아지는 어느 날 마포대교 위의 난간에서 우산을 쓰고 혼자서 고개를 숙인 여고생이 있었다. 잠시 뒤 저 멀리서 한 여순경이 허겁지겁 뛰어와 여고생 앞으로 달려가 위로의 말을 전했다. 처음엔 경찰을 보고 놀랐지만 진심어린 따뜻한 위로의 말을 듣고 따돌림과 떨어진 성적으로 죽기로 결심했던 여고생은 펑펑 울기 시작했다. 이 여고생의 유일한 친구가 이런 고민을 알고 혹시나 큰일이 날까 봐 울면서 다급하게 신고한 것이다. “너를 위해 울어 줄 친구 한 명이 있다면 넌 정말 괜찮게 살아온 행복한 사람이야. 일단 언니랑 좀 걸으면서 얘기하자.“ 이처럼 때로는 누군가를 위해 울어줄 수 있는 이가 생명을 살리고 영혼을 구할 수 있는 능력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주위의 살아갈 힘을 잃은 사람을 위로하고 진정 울어줄 사람이 되면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참된 위로자가 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 죽음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별이다. 장례식장에서 임종 예배 등을 드릴 때 목회자가 장례 예문에 따라 틀에 박힌 말씀보다는 마음을 다해 정말 그 가정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울어 줄 수 있을 정도의 은혜의 말씀이 전해진다면 가장이나 자녀들의 미미한 믿음도 새롭게 될 가능성이 충분하게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인도사람들의 울어주는 눈물이 선교사와의 행복한 관계를 만들었고 한강에서 자살의 순간까지 갔던 그 여고생을 살리는 기적이 일어난 것은 모두 울어 줄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진심으로 울어줄 이가 있다면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큰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독일의 마르틴 니묄러 목사는 나치 정권의 폭력이 닥쳤을 때 나를 위해 울어 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하고 마지막엔 교회로 끝을 내는 것을 보아도 자기를 위해 진심으로 울어 줄 이가 없음을 한탄하고 있다. 인생의 끝과 엄청난 환난이 엄습했을 때 진정 나를 위해 과연 울어줄 이가 얼마나 있을까? 그러나 항상 우리 주님은 날 위로해 주시고 울어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남을 위해 주님처럼 내가 먼저 울어주는 사람이 되어보자. 그리하면 최고의 관계가 회복되고 가정과 교회와 사회는 분명히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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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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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7) (민12:1-3)
- 교회는 성도들의 눈에 어떻게 보여야 하겠습니까? 성도들의 눈에 교회가 장로들의 공화국처럼 보이면 어떨 것 같습니까? 성도들의 눈에 교회가 성도들의 공화국처럼 보이면 참 민주적이고 좋을 것 같습니까? 만약 교회가 그렇게 보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교회입니다. 만약 교회가 그렇게 보인다면 그것은 사람이 통치하는 세상과 같습니다. 교회가 어떻게 보여야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것임을 나타낼 수 있을까요? 간혹 교회 안에서 우리교회는 목사 공화국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좋은 의미에서 말하는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은근히 원망과 불평이 깔려있는 말투입니다. 이런 원망과 불평이 비방으로 튀어나온 말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오묘막측합니다. 사탄의 미혹에 넘어져 우리 교회는 목사 공화국이라는 원망과 불평, 비방의 말을 했지만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 말은 맞는 말입니다. 성도들의 눈에 교회가 목회자의 공화국처럼 보이는 것이 참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사명을 모세에게 맡겼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에게 맡기지 않았습니다. 70명의 어른들, 장로, 지도자들에게 맡기지 않았습니다. 아니 미리암과 아론은, 70명의 장로들은 모세의 통치를 도와야 하는 자들입니다. 백성들의 눈에는 이스라엘이 당연히 모세의 공화국처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명을 맡은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스라엘이 누구의 공화국처럼, 누구의 왕국처럼 보이도록 해야 하겠습니까? 모세는 이스라엘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심을 가르쳐야 합니다. 모세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착각하여 이스라엘이 자신의 공화국인 줄 알 때 그것으로 끝입니다. 순간이라도 이 사실에 대해 모세가 실수하면 모세는 곧바로 즉결심판에 넘겨집니다. 그래서 아주 순간적인 착각이었지만 모세는 반석을 지팡이로 두 번 내리친 것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분은 100%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모세는 끝도 없이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나타내야 합니다. 그러니 모세는 하나님만 보면 됩니다. 하나님의 기색만 살피면 됩니다. (에1:14)때에 왕에게 가까이 하여 왕의 기색을 살피며 목사가 목회를 하는 여정 가운데서 어느 한 부분이라도 자기가 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목회자의 사명을 거두어 가십니다. 구스여자를 핑계 삼았지만 미리암과 아론의 속셈은 따로 있었습니다. 미리암은 70명 장로들의 충성을 자신들에게로 옮기어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권력을 따먹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창3:4-5)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성경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미리암만 나병에 걸린 것을 보면 비방의 주인공은 미리암이었던 것 같습니다. 미리암이 주도하는 일에 아론이 숟가락을 얹은 것으로, 이용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창3: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아론의 비방이 아니라 미리암의 반역이었습니다. 미리암의 반역이 모세의 통치에 대한 직접적인 반역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여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위협하는 십보라에 대한 견제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모세의 통치를 비방하는 것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세우신 것에 대한 비방으로 발전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단순한 미리암의 비방 때문에 이스라엘을 떠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름이 장막을 떠나는 순간 미리암은 문둥병이 들려 눈과 같이 되었습니다. (민12:9-10)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시매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문둥병이 들려 눈과 같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문둥병이 들었는지라 이스라엘의 문화는 남남 여여, 남자와 여자의 구분을 합니다. 우리나라도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 반, 여 반을 나누었습니다. 기관도 남녀로 구분해서 분류합니다. 이렇게 볼 때, 미리암은 자연스럽게 이스라엘의 수많은 여성을 돌보았을 것이며, 여성들의 대변자였을 것이며, 여자들의 세계를 주도했을 것입니다. 더욱이 모세의 아내 십보라는 아이들과 함께 친정으로 갔으니, 모세를 돕는 배필인 아내로서의 사명은 누나 미리암의 몫이었을 것입니다. 병에 걸린 오빠 나사로를 대신해서 동생 마르다가 집안일을 돌아본 것처럼 말입니다. (눅10:38)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이런 위치에 있었던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했습니다. 그것도 여호와의 이름을 이용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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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7) (민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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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우리의 모든 삶은 선교적이어야 한다!
- 한국교회가 선교의 대상이었던 위치에서 선교 대국으로 성장 발전한 것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며 감사의 조건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교회 성도들의 선교 열정은 정말 대단하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의 시점에서 한국교회의 선교 방식에 대해서 한번쯤은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선교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없이, 또 변화하고 있는 선교 동향과 방식에 대한 이해가 없이 그냥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우리보다 낙후된 나라로 가서 재정적인 도움을 좀 베풀어 주고 오는 것을 선교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 단체들도 ‘선교’, ‘선교사역’, ‘선교사’, 또는 ‘선교지’라는 단어들을 아직도 주로 “지리적 확장”정도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선교 또는 선교사역은 주로 소위 서구 기독교 국가로부터 세계의 나머지 지역으로 일방적으로 나아가는 지리적 이동 또는 확장 정도로 이해되고 있다. 선교사는 이러한 확장을 감당하는 주역이다. 선교지는 서구사회 밖에서 이러한 확장을 진행할 수 있는 잠재적인 지역이다. 선교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아직도 많은 교회들이 갖고 있는 지배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오늘날 선교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 방식을 진부한 것으로 만드는 많은 요인들이 있다. 특별히 두 가지 요인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 요인은전통적 선교지였던 제3세계 교회의 성장이다. 오늘날 세계 교회의 거의 2/3는 소위 전통적 선교지인 아프리카, 아시아,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에 존재하고 있다. 여기에 덧 붙여서 제3세계 교회의 생동감, 그리고 이들 제3세계 교회들이 지금 서구 교회보다도 다문화 선교사들을 더 많이 파송하고 있다는 사실은 제3세계를 선교지로 보는 시각이 진부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 요인은 서구 교회의 쇠퇴이다. 마이클 고힌(Michael Goheen)이 소개하고 있는 바렛트(David Barrett)의 지적을 간접적으로 인용해 보자. 바렛트에 의하면, 1980년대를 통해서 서구 교회는 매일 7,600명의 신자들을 잃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다 서구 교회의 점증하는 명목상의 신자들, 여러 면에서 세속적-인간주의자의 세계관에 대한 굴복, 그리고 타문화선교에 대한 관심의 상실을 생각하면, 오늘날 선교지는 진정 어느 곳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물론 선교에 대해서 더 이상 동일한 방식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19세기와 20세기를 지배해 온 선교 운동을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는 관심은 이 시기의 선교 운동을 지배하였으며, 이러한 관심은 오늘날 교회의 선교에도 여전히 핵심적인 관심사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 방식을 추구해야 한다. 선교는 더 이상 소위 “기독교적”인 서구 사회에서부터 “비기독교적”인 제3세계로의 문화 간 이동의 관점에서 정의할 수 없다. 선교는 멀리 있거나 가까운 곳이거나 간에 교회가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증거의 문제다. 선교는 단순히 선교사들을 파송 하는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전체 교회를 파송 하는 과업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두 가지 슬로건이 이를 잘 포착하고 있다: 첫째, 선교는 모든 6개 대륙에서, 6개 대륙으로 그리고 6개 대륙으로부터 행해지는 사역이다. 모든 대륙에서 우리는 선교 본거지와 선교 필드를 보게 된다. 둘째선교는 전체 교회가 총체적인 복음을 온 지구촌에 전인을 향해서 들려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이 구원이 전 세계에 전달되고 알려 지도록 의도 하셨는가? 이 점에서 예수님을 모하메드와 대조해 보는 것은 흥미롭다. 둘 다 그들의 메시지가 본질적으로 유효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모하메드는 책을 썼다: 알라의 메시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은 코란을 통해서였다. 예수께서는 책을 쓰지 않으셨다. 그는 신앙 공동체를 결성하고 이 공동체에다 메시지를 구현하고 선포하도록 위임했다. 하나님께서는 각 지역에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삶을 구현하는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시고,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좋은 소식을 전하고자 하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설계다. 이들 공동체들은 자신들의 공동체적 삶 속에서 함께 좋은 소식을 구현할 뿐만 아니라 인간 삶의 전체 스펙트럼을 가로 지르는 다양한 소명들 속에서도 좋은 소식을 구현해 나타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전체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라는 좋은 소식을 알리도록 부름 받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모든 삶은 선교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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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우리의 모든 삶은 선교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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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종교개혁주일을 보내며 … 무덤과 비석
- 종교개혁주일을 보내며 … 무덤과 비석 종교개혁자 존 칼빈이 세계 기독교 역사에 기여한 공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죽음을 앞두고 결코 자신의 무덤을 치장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무덤을 조금이라도 우상시할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유언을 중시하여서 스위스 제네바의 공동묘지에 묘비도 없이 묻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세월이 흐르면서 후세의 사람들은 칼빈이 어디에 묻혔는지조차 모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1830년, 칼빈을 깊이 흠모하던 네델란드인이 수소문 끝에 그의 무덤을 찾아내었습니다. 그리고 유언 때문에 비석을 세울 수는 없었지만 비석 대신에 존 칼빈의 이니셜인 J. C.를 새긴 붉은 벽돌을 박아 두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비로소 칼빈이 묘는 그 위치가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칼빈이 죽은 지 435주년이 되는 때에, 스위스 제네바 시의회 의원인 미셸로제티라는 사람이 그 칼빈의 묘를 대대적으로 보수했습니다. 무덤 주위에 대리석을 깔고 철책을 두른 다음에 그 앞에 정식으로 동판까지 설치했습니다. 그 동판은 “위대한 개혁자, 존 칼빈”이라고 쓰인 동판이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후 샤를 죠르지라는 이름의 한 제네바 시민이 동판을 설치한 미셸로제티를 고발했습니다. 그 고발 내용은 칼빈의 유언을 무시하고 그분의 묘를 치장했다는 죄목이었습니다. 고발을 접수한 제네바 주 정부 검찰총장은 개인의 유언이 과연 형사고발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심사숙고하겠다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독자 여러분, 이런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기독교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운 분의 묘지를 꾸미고 동판을 세운 것은 잘 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칼빈의 뜻은 다릅니다. 자신이 종교개혁의 과업을 위해서 일한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래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믿음 때문에 결코 자신을 기념하는 무덤의 비석을 세우지 말 것을 유언했고, 그리고 동판을 세운 사람을 고발한 사람은 바로 그 칼빈의 숭고한 뜻을 받들고자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필자는 그분들의 이런 옥신각신 하는 모습이 부럽습니다. 왜 우리나라에는 기독교 선조의 생가나 묘지를 거의 신성시하고 그것을 대대적으로 꾸미고 기념물로 삼으려고 하는지 마음이 씁쓸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을 바친 그분들의 신앙을 더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닌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신사참배의 요구를 끝까지 거부하며 옥고를 치르다가 해방이 되어서 출옥을 하신 고 한상동 목사님은 사역을 다 마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별세하시기 전, 후배 목사님들과 가족들에게 이런 유언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죽고 나면 나에 대해서 기록하고 나에 대해서 말한 모든 문서들이나 사진들은 객관적인 역사적 자료로 남겨야 될 만한 몇 가지만 최소한으로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모아서 불태워 없애버리도록 하라.” 왜 한 목사님이 이런 유언을 하신 것일까요? 자신이 복음과 한국 교회를 위해서 일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자신이 기념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천명한 것입니다. 세상이 역사적 인물의 동상이나 기념비를 세우는 것은 그 인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고백하기에 그런 기념물을 세우지 않습니다. 순교와 헌신의 역사는 책이나 기록을 통해서 후대에 전하는 것으로 배움과 귀감이 되게 하면 됩니다. 그 이외에 신앙의 선조들을 기리기 위해서 동상을 세우거나 생가를 복원하여서 기념하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자신을 드린 선조들의 신앙을 오히려 욕되게 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늘 기념하고 감사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여야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의 사도 바울의 고백을 반추해 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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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종교개혁주일을 보내며 … 무덤과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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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호칭과 지칭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 I. 서언(序言) ‘우리 말 바르고 아름답게’란 표어를 본 적이 있다. 이런 면으로 관심이 있는 필자로서는 ‘정말 이렇게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이 표어와 함께 오늘도 올바른 호칭과 지칭어에 대한 내용으로 논하고자 한다. 먼저 본 호에서는 2011년 12월에 국어심의회를 통하여 확정된 ‘표준 언어 예절’에 근거하여 조부모(祖父母/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주 사이의 호칭어와 지칭어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호칭과 지칭의 뜻과 유래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손주를 돌보는 조부모들이 시댁이나 친정의 구분 없이 많아졌다. 필자의 경우도 그러했고, 주변에서도 이런 경우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에 손주의 입장에서 조부모님들을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하는지의 구분이 필요하게 되었다. 1. 뜻과 유래 :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한자어는 조부와 조모이다. 그 뜻은 조상 조(祖), 아비 부(父), 어미 모(母)자 이다. 순수한 우리말로는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이다.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도 문제는 없지만, 오늘날에 있어서는 조모, 조부보다는 주로 할머니 할아버지로 호칭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용어들을 논할 때마다 의문이 되는 것은 한자 용어와 순수한 우리말의 어원이나 발음이 전혀 다른 말들이 많다는 것이다. 앞에서 논한 용어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면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란 순수한 우리말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할아버지에 대한 친족용어가 수록된 가장 오래된 문헌은 고려시대 때 송나라의 사신으로 왔던 ‘손목’이 편찬한 ‘계림유사’란 책에 ‘한아비’라는 호칭으로 기록된 것이 최초이다. 그다음은 1527년 최세진의 ‘훈몽자회’에서는 ‘하나비’로 표기하였고, 친족용어들을 모아서 정리한 ‘최재석’의 ‘한국의 친족용어’에 의하면 할아버지, 할아버님, 할아범, 할애비, 조부, 조부님, 조부주, 현조부, 가조부, 조고 등의 여러 용어들이 있었으나, 결국 중세국어의 음운 변천 과정을 겪으면서 지금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로 되었다. 2. 경우에 따른 호칭과 지칭 :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할까? 먼저 아버지의 부모님을 부를 때는 ‘할머니, 할아버지’이고, 어머니의 부모님을 부를 때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로 부른다. 하지만 양가의 조부모님들이 모두 한자리에 있을 때는 구분을 위해서 ‘외’자를 붙여서 호칭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구분 없이 ‘할아버지, 할머니’로 호칭할 수 있다. 하지만 요즈음은 장수하는 경우가 많아서 아버지의 할아버지 할머니도 생존해 있는 경우들도 많이 있다. 이런 경우에는 ‘증조(曾祖)’라는 말을 붙여서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로 부른다. 그러나 외가의 증조부들에게는 ‘진외(陳外)’자를 부쳐서 ‘진외증조 할아버지’, ‘진외증조 할머니’로 부르기도 한다. 여성의 경우에 결혼해서 시댁의 조부모님들을 부를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해서는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존칭어인 ‘님’자를 붙여서 할아버님, 할머님으로 부르면 된다. 하지만 친정 식구들에게 시댁의 조부모님들을 소개할 때는 ‘시 할아버님’, ‘시 할머님’으로 지칭한다. 마지막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손주와 외손주를 호칭하고 지칭할 때는 어떠할까? 누구든지 마찬가지지만 조부모의 손주 사랑은 아주 각별하다. 요즈음은 휴대폰에 손자 손녀의 사진을 배경 그림으로 넣을 정도로 유별나다. 그렇다면 이런 사랑스러운 손주를 부를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에 대해서는 특별한 호칭과 지칭보다는 그냥 가장 친근한 손주의 이름을 부르면 된다. 그러나 손주가 결혼해서 자녀가 생기면 그 아이의 이름뿐만 아니라 ‘OO 아범, OO 어멈’, ‘OO 아비, OO 어미’ 등으로 부를 수 있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이런 친족용어의 호칭어와 지칭어들은 흔히 사용하는 익숙한 말들이지만, 실제로 사용하다 보면 혼돈이 올 때도 있다. 하지만 조금씩 더 노력한다면, 가족 상호간의 아름다운 위계질서와 집안의 화목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 모두 바람직한 가족 간의 언어문화 창달에 앞장설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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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호칭과 지칭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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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6) (민12:1-3)
-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6) (민12:1-3) 오늘날 한국교회가 위기를 만난 이유들이 많겠지만 그 많은 이유 중 매우 중요한 시작을 말해보라면 저는 단연코 오늘 본문의 미리암과 아론 그리고 모세와 결부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선교사의 사역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니 노회에서 전도사, 목사 면접을 하는데가정사역에 대한 질문과 답이 오고 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목사가 가정을 돌아보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놀란 이유는 목사의 사명을 교회의사역과 가정의 사역으로 구분하더라는 사실입니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한 것이 단순히 모세의 가정일로 끝나는 문제입니까? 본문 성경구절만 보더라도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한 가정의 일이 모세의 직분, 모세의 사역에까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목회자의 가정에 문제가 생기면 교회 사역에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까? 목회자의 가정에 문제가 생겨도 교회 사역과는 무관합니까? 목회자만 그렇습니까? 성도들의 가정은 다릅니까? 성도들의 가정에 문제가 생기면 교회 생활에 타격이 있지 않습니까? 자식이 불신결혼을 하는데 왜 아버지가 장로직을 내려놓아야 합니까? 성도들의 가정에 불신결혼을 하는데 왜 교회는 광고조차도 하지 않습니까? 왜 목사는 학습 세례받지 않은 남녀에게 주례를 서지 못합니까? 목사에게서 가정과 교회를 분리시키는 순간 한국교회 위기는 시작된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어디서 못 보던 이론이 나오면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습니다. 한때, 지금도 그렇지만 목사 청빙 할 때 외국 유학, 박사학위가 단골 메뉴였습니다. 어디 가서 들어보지 못한 이론 하나 듣고선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난리 합니다. 이단성이 있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자기가 어디서 듣고, 보고, 배운 것 최고인 것처럼 주장합니다.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게, 무엇을, 배워왔는지는 몰라도 20년 전에 목사가 되는 면접에 가정사역, 교회사역이 단골 메뉴였습니다. 어줍잖게 배워와서 전도사, 목사가 되는 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교육을 했으니 사탄은 쾌재를 불렀을 것이고, 오늘날 그 결과는 너무도 심각합니다. 요즈음은 교역자들에게 월요일이 주일보다 중요한 날입니다. 가정사역의 날이라고 합니다. 월요일에 담임목사가 부 교역자에게 전화나 문자를 하면 그 순간 공공의 적이 됩니다. 신학적인 문제까지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주일 오전 예배만 참석하고 집에 가는 교역자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부 교역자들이 교회를 옮길 때 중요한 요구사항이 월요일 부르지 말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월요일 재림하실 것이라는 우스운 말까지 생겼습니다. 그놈들은 가정 사역한다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셔도 천국 안 가려고 할 것 같습니다. 성도들이 월요일을 교역자가 쉬는 날로 알아주시는 것 너무도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교역자들 자신은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의 교회를 위하여 부름 받은 자들은 24시간이 공인이요, 공무입니다. 교역자는 똥 누는 시간도 공무라는 말을 저는 잘 합니다. 저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심각한 위기가 온 이유 중 하나는 목회자가 교회와 가정의 일을 구분한 것이 매우 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70장로를 세운 후 모세의 리더쉽을 비난한 것을 보면, 그 사이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70장로들의 도움으로 이스라엘의 어느 정도 질서가 잡힌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니 미리암과 아론 조차도 "이제 모세가 없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 것 같습니다. 이전에는 모세 없이는 이스라엘을 통제할 수 없었는데, 70명의 지도자들이 생기니, 이스라엘에 소위 "정치"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방대한 나라는 지도자 모세 한 사람으로 통치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으로, 조직으로 통치되는 듯 보입니다. 2백만, 3백만이 되는 백성들을 모세 한 사람으로는 부족할 것 같습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목회자도, 성도들도 쉽게 착각하고 우를 범합니다. 교회는 성도가 한 명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고 다스리십니다. 교회는 성도가 천명, 만 명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통치하고 다스리십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지팡이일 뿐입니다. 성도가 많아지니 하나님 한 분으로는 안 될 것 같습니까? 목회자도, 당회원도, 성도들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친히 통치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친히 통치하시는 방법이 목회자에게 위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목회자가 어렵고 힘들 때, 교회를 목회하면서 져야 할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하나님께서 친히 장로를 세우시고, 당회를 조직하셨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왕은, 교회의 주인은, 교회의 통치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공화국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통치하셨던 것처럼 교회의 주인되신 예수님께서는 목회자를 통하여 교회를 통치하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마치 목회자의 왕국 같아 보이고, 목회자의 공화국 같아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세우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했던 것처럼 오늘날 교회는 목회자를 세우셔서 성도들을 천국으로, 교회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통치되는 곳입니다. 이 사실을 그 어느 누구보다도 여선지자 미리암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미리암의 비방은 결국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통치방법에 대한 비방이요, 반역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미리암은 하나님을 향한 비방과 반역을 도모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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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6) (민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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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예수님의 왕국사명 이어가기
- 미국 이민 교회 성도들의 생활 모습을 보면서 나는 너무나도 자주 이분들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의 본질과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회의가 들고 안타까운 마음을 가질 때가 많이 있다. 이민교회에서 생겨나는 많은 문제들은 결국 교회의 정제성과 역할, 교회의 본질과 영광에 대한 성경적인 지식이 없이 교회에 출석하고 직분을 받는 현실에 기인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셔서 통치하시는 교회라는 신앙공동체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의 정립이 이민교회 성도들에게 시급함을 느낀다. 교회의 본질과 사명이 무엇인가? 우리는 그 해답을 교회라는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신 예수님의 사역에서 찾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고 변화 되도록 부르신 것처럼, 교회도 이와 꼭 같은 일을 하도록 부름 받고 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치유하는 능력과 사랑을 증시 해 보여 주신 것처럼, 교회도 자비와 공의의 행위로 이웃을 이타적으로 섬기도록 부름 받고 있다. 예수님의 사명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한 눈물의 기도생활로부터 시작하고 진행되는 것과 같이, 교회 구성원들의 생활도 동일한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옛 질서에 도전했을 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고난 당하신 것과 같이 교회도 옛 질서에 선지자적으로 도전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이에 따라 겪게 되는 고난을 기꺼이 감내해야 한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구현할 수 있는 공동체를 형성하고 자신의 사명을 계속해 갈 수 있도록 일하신 것처럼 우리도 또한 우리의 재능을 사용하여 하나님 나라의 삶을 신실하게 계속해 갈 수 있는 공동체를 건설하도록 부름 받았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 이것이 우리의 이야기(Story)에서 차지하는 우리의 위치와 역할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재림 사이의 기간에 살고 있다. 이 기간은 선교로 특징 지워진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과업을 감당하고, 열방 가운데서 그분의 나라를 증거 하는 예수님의 사명을 계속하도록 부름 받았다. 사도행전 1:6절은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른 모든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메시아의 오심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즉각적으로 도래할 것을 기대하였다. 예수께서 사망에서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은 최종적 부활이 시작되었다고 믿었다. 이제 확실히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임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질문을 했다. “주님, 이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시키고자 하나이까?” 예수님의 대답은 이 일이 언제 일어날 것인지를 아는 것은 그들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마지막 심판과 영화는 분명히 아직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예수님께서 새롭게 형성하신 공동체의 삶과 말, 행동에서 소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소통의 증거는 영화의 예고편과도 같은 것이다. 영화 예고편은 도래할 매력적인 것의 실제적인 장면이다. 이 유비에서 두 가지가 중요하다. 예고편은 실제 현재적 장면과도 같은 것이며, 그 장면은 또한 미래를 보여준다. 그래서 관객들로 하여금 그것을 보기를 원하도록 만들어 준다. 교회는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예고편과도 같다. 교회는 열방을 향해서 미래적 왕국을 현재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정체성을 규정해 준다. 우리의 과제는 이 왕국을 마지막 때가 이르기까지 땅 끝까지 신실하게 매력적인 삶의 모습을 통해 증거 하는 것이다. 안디옥 교회는 이 증거가 어떻게 수행될 것인지에 대한 모범을 보여주었다.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은 열방을 향해서 매력적인 삶의 모습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를 삶으로 보여주었다(행2:42-47; 4:32-35; 11:23).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나아갔다(행11. 24). 가정에서 보여주었던 이들의 신실함은 복음을 들어 보지 못한 곳을 향하여 복음을 전하는 역동적인 비전으로 이어졌다. 안디옥에서와 같이 로마 제국 전역에도 증인 공동체가 세워져야 했다. 그래서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우고 다른 지역에 복음의 공동체를 세우기 시작했다(행13:1-2). 사도행전의 나머지 부분은 바울의 선교 여행을 기록하고 있다. 신약 성경의 나머지 대부분은 바로 이 공동체들에게 신실하도록 요청하는 편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은 불러 모으는 시간이다. 모든 민족 백성들이 이 종말의 왕국에 들어가서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 삶에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창조물과 모든 나라 백성들을 새롭게 하시는 사역을 완성하실 것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예수님의 사명을 계속해서 이어가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사명을 계속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의 실제를 무조건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고도 상이한 역사적 상황에서 그분의 사명을 창의적으로 계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 현 미국 Evangelia University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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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예수님의 왕국사명 이어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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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말씀을 네 마음속에 지켜라.
-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21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속에 지키라 22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잠4:20-22) ‘마음’은 바로 당신 존재의 핵심을 의미한다. “내가 주께 범죄 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119:11). 사람이 죄를 이길 수 없다. 죄를 이기는 방법은 주의 말씀을 마음에 두는 것이다. 말씀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 이것이 죄를 끝내는 유일한 방법이다. 토의가 쓸모없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육간의 건강이다. 말씀이 약이다. 모든 육체에 약이다. “내가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요6:63). 케네스 헤긴의 고백을 더 들어 보자. 그가 몸이 찌부둥 할 때는 “나는 약을 두 배로 먹는다. 복용량을 배로 늘인다.” “성경읽기를 두 배로 더한다. 그 말씀은 이적을 일으킨다.”고 했다. 잠언의 말씀은 하나님의 약을 반복해서 강조한 것이다. 마음(heart)에 적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마음에 항상 품으라는 말씀이다. 늘 주의하라는 말씀이다. 보통 사람들은 말씀에 주의하지 않고 산다. 그러나 말씀으로 마음을 고치라고 하신다. ‘마음을 고쳐라’고 하면 기분 상해하기도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더 좋은 휴대폰 앱(app.어플)을 소개하면서 바꾸라고 한다고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 마음을 바꾸라는 말은 자신을 바꾸라는 말과 같기에 기분 상해한다. 나를 완전히 죽인다는 말이고 죽일 뿐 아니라 말씀으로 채우라고 하니 맘을 상해 할 수 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약은 영이요 생명이다(요6:63). 믿을 뿐만 아니라 영에 적용해야 한다. 어떤 약속을 읽고 외울 수 있겠지만 그 말씀이 실제로 이미 영에 있다. 주님의 말씀은 영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은 영이 아주 기뻐한다. 영이 기뻐함을 알고 행하려고 노력하라. 말씀이 영(heart)에 있지만 인지하지 못하고 머리만 두려고 노력한다. 이미 암송하고 있는 말씀을 더욱 반복해서 암송하거나 읽어라. 그리고 마음에서 터져 나오는 묵상이 되게 하라. 기도는 마음에서 터져 나오는 말씀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케네스 헤긴은 딸의 눈 옆에 종기가 자라는 것을 보고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기로 결단했다. 그는 “병 고침에 관한 성경 말씀을 한 시간 동안 읽어야겠다.”고 결단했다. 그는 병 고침에 대한 말씀을 거의 다 암송하고 있었다. 또 성경에 줄이 모두 그어져 있었다. 그래도 그는 그렇게 했다. “여기 한 시간만 누워 이 말씀들을 중얼거리며 읊조려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했다. ‘묵상하다(meditate)’라는 단어는 ‘낮은 소리로 읊조리다, 중얼중얼 거리다(mutter)’라는 뜻이다. 그는 피곤이 몰려 올 때 “한 시간 자고 나서 일어나 또 한 시간 이 구절들을 읊조려야지, 그리고 또 한 시간 자고 일어나 또 한 시간 읊조리고 아침까지 해야지.”라고 말하며 실천했다. 그에게 그 때 필요한 것은 딸의 치유였기에 다른 것을 읊조릴 필요가 없었다고 말한다. 말씀은 반복해서 읽고 묵상해야 한다. 말씀으로 인해 마음속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 기도인데 말씀이 기도되게 해야 한다. 케네스 헤긴은 다음 날도 읽고 묵상하길 반복했다. 그는 2+2=4이고, 3+6=9인 것을 아는 것처럼 딸의 치유를 마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는 아내에게 편지를 써서 딸에게 “2+2=4이고, 3+6=9인 것처럼 너는 나았단다.”라고 전하라고 했다. 딸은 이 말을 듣고 잠깐 서있더니 “아빠가 그랬으면 그렇겠지.”라고 하곤 나가 놀았다. 의사에게 경과를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그는 “약을 나의 영에 장착했다. 딸은 치유되었다.”고 고백한다. 음식을 아무리 많이 본다고 배부르지 않다. 성경이 바로 그렇다. 토론을 하고 외우기도 하고 공부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영 깊이 뿌리내리지 않는다면 말씀이 우리에게 그대로 역사하지 않는 것이다. 계속 말씀을 먹어라. 항상 말씀을 마음에 장전하라. 말씀이 마음에서 터져 나오도록 하겠다고 생각하며 맘을 열어 놓으라. 강한 믿음을 지키려면 말씀을 계속 먹으라. 믿음의 말씀을 끊임없이 먹으라. 음식을 한 번만 먹는다고 건강해지지 않는다. 몸은 먹는 대로 만들어진다. 운동도 해야 한다. 계속 먹고 운동해야 한다. 믿음과 치유의 말씀 구절을 계속 먹으라. 매일 믿음과 치유의 말씀을 계속 읽으라. 다른 사람에게 그런 역사가 있으니 나에게도 그런 역사가 일어날 것을 단순히 믿고 말씀을 장착하라.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 지는 것은 진리다(딤전4:5).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의 약을 당신의 영에 장착시켜라! 앞에서 언급한 마가복음 속의 예수님의 사역의 말씀을 암송하여 마음에 창착해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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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말씀을 네 마음속에 지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