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2(목)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칼럼

실시간뉴스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 오피니언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2024-02-08
  • [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1-03
  • [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2023-12-18
  • [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기독교인 생활용어
    2023-09-06

실시간 칼럼 기사

  • [이정희 목사] 높임말(경어), 이대로 좋은가? (3)
    I. 서언(序言) ‘목사님 한국말은 너무 어려워요’. 이 말은 필자가 시무하는 교회에 다니는 필리핀에서 온 다문화 가족 중 한 여자 성도의 말이다. 필리핀에서는 기자 생활도 했고 교육수준이 상당히 있는 엘리트이지만, 우리 한국어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말을 처음 배울 때는 어렵지 않다.‘슬기로운 사람은 아침을 마치기 전에 배울 수 있고,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는 말처럼 아주 쉽고 과학적으로 잘 되어 있다. 또한 소리로 표현되는 언어 중에 한글은 11,000개 이상이고, 일본어는 300개, 중국어는 400개 정도이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란 말대로 너무 발달되어 있다 보니 외국인이 배우기로는 아주 어렵게 느껴지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그 중에서도 외국인 가장 어려워하는 말 중 하나는 요즈음 계속 논하고 있는 높임말이다. II. 높임말이 어려운 이유 높임말이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는 지난 호에서 논한 대로 높임말의 체계와 구조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외국어 중에는 우리 국어처럼 사회계층, 지위, 연령, 성별에 따라 화법이 구분되는 언어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영어권에서는 상대방을 부를 때 남녀노소 구분 없이 2인칭인 ‘You’ 라고 한마디만 해도 거의 통한다. 하지만, 우리 한국어는 그렇지 않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부름말은 각각 다르다. 예를 들어 동료나 아랫사람에겐 ‘너’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이나 윗사람에게 영어식대로 ‘You’ 라고 했다가는 큰일 날 것이다. 이건 1인칭 ‘I’ 도 마찬가지다. 대화하는 상대방에 따라 ‘내가’, ‘나는’, ‘저는’, ‘제가’ 등 여러 용어들을 쓴다. 그러다 보니 외국인들에게는 아주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외국인 뿐 아니라, 현대 이 시대의 젊은이들도 마찬가지다. 높임말에 대한 교육을 별도로 받지 않은 이유도 있겠지만, 높임말을 사용해야 한다는 당위성과 필요성도 별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유명인은 자신의 칼럼에서“현시대에 있어서 높임말은 필요 없다. 오늘날의 국제화 시대에 계속 높임말을 강조하면 많은 소통의 문제가 생긴다. 국제 관계나 남녀노소간의 소통에도 그러하다. ‘공자가 죽어야 산다.’는 말처럼 높임말의 강조는 많은 국익의 손실을 가져올 뿐 아니라 시대착오적인 일이다.”라고 했다. 이상의 주장은 한편으로는 옳은 말이다. 실제로 높임말 때문에 소통의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높임말은 지난 호에서 언급한 대로 우리나라 고유의 미덕일 뿐 아니라, 우리말의 우수성을 세계 속에 자리매김하는 또 하나의 국가적 위상이요 한류열풍을 가져오는 수단이다. 그 하나의 증거로 지금 우리 한국어는 세계 언어 중 가장 우수한 언어로 인정받고 있다. 2013년 태국에서 개최된 ‘세계문자 올림픽’에서 우리말은 당당히 금메달을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 국어의 날을 우리나라의 한글날인 10월 9일로 정하기 도 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 한국어 사용 인구수는 세계 12위로 되어 있다. III. 결어 이상으로 볼 때 우리 한국어는 국익의 손실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언급한 대로 세계 속에서 한국의 위상을 더 높이는 자랑스러운 우리의 보물인 것이다. 하지만, 세계 속의 위상에도 불구하고 높임말은 우리 사회,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있어서도 하나의 거추장스러운 걸림돌이 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어느 사회를 불문하고, 특히 다양한 계층이 모여 있는 교회에서는 최소한의 예의는 반드시 있어야 될 것이고, 이를 잘 이행할 때 이 사회 속에서 올바른 높임말 하나로도 아름다운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기독교인 생활용어
    2023-05-25
  • [최호숙 목사] 아라페시 현상(現想)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사상가인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는 교육의 위대함에 대해 명언을 남겼는데 “식물은 재배(栽培)에 의하여 식물다워지고, 사람은 교육(敎育)에 의하여 사람다워진다”고 하였다. 시골에 농부들이 호박순이 나오면 주인이 그 호박순을 동쪽으로 돌려놓으면 그 호박순은 동쪽으로 뻗어나간다. 나팔꽃도 주인이 어떤 모습으로 순(筍)을 돌려놓는가에 따라 성장 방향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런 원리를 일찍부터 알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아이들에게 쉐마교육을 하였다. “이스라엘아 들으라(쉐마 이스라엘)...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4~5).” 이 사상을 교육받았기 때문에 평생 여호와를 사랑하는 신앙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인류학자 마거릿 머드(Margaret Mead)는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연구하기 위하여 남태평양을 중심으로 한 오지 마을들을 찾아다니며 평생 연구에 몰두했다. 연구 중 뉴기니섬의 아라페시족과 문두구머족의 종족을 연구한 결과 같은 지역에 사는데 두 종족의 성격 기질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두구머족 사람들은 남자든 여자든 성격이 난폭하고 호전적인 반면에 아라페시족 사람들은 온순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원인은 어린아이를 양육하는 근본적 방식의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문두구머족 엄마들은 아이를 양육할 때 거친 바구니에 넣어 등에다 메고 다니며 양육을 했기 때문에 아이는 어머니와 피부 접촉도 단절, 대화도 단절, 만질 수 있는 것은 거친 바구니 밖에 만질 수 없었다. 이런 과정에 성장한 아이는 난폭하고 거친 성격의 소유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반대로 아라페시족의 엄마들은 아이를 앞가슴에 매어 달고 다니며 양육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아이는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느끼고 젖꼭지도 만지고 대화도 하고 서로의 교감이 있어 온화하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아라페시족 사람들의 삶 가운데 발견한 것은 그들이 사냥을 하다가 상처를 입거나 사고로 인하여 상처를 입었을 경우에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의 상처를 공개하고 다닌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이 서로 공감해 주고 아픈 고통에 참여해 주고 위로해 주고 그 고통의 감정에 호응함으로써 서로 간에 상처와 불행을 증발시켜 정서적으로 안정을 되찾고 회복하는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마가릿 머드는 아라페시 현상(現像)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아라페시 현상은 “개인이 받은 상처와 고통을 집단에 알리므로 그 집단은 그 사람의 상처와 고통에 호응하고, 위로해 주며 그 감정에 동감함으로 각자의 상처와 불행을 증발시켜 서로가 안정을 되찾는 현상”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공연장에서 볼 수 있는데 대중가요의 대부분은 사랑에 실패하고 배신, 눈물, 상처로 얼룩진 노래들이 많다. 그래서 대중 가수가 노래를 부를 때 그 가수의 감정을 청중들이 듣고 공감하고 응어리진 마음을 서로 회복하게 되는 아라페시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또한 기독교 간증자가 자신의 과거 고통, 실패하였던 경험을 간증하면 성도들이 그것을 듣고 그 고통과 실패 경험에 공감하며 서로가 상처를 증발시키게 되는데 여기서도 아라페시 현상이 나타난다. 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위로해 주고 사랑해 주는 마음은 어린 시절 어떤 문화 속에서 양육을 받았느냐가 중요하다.
    • 오피니언
    • 칼럼
    • 살며 생각하며
    2023-05-10
  • [이정희 목사] 높임말(경어), 이대로 좋은가? (2)
    I. 서언(序言) 우리나라를 일컬어 옛날부터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 칭하였다. 이는‘동쪽에 있는 예절의 나라’라는 뜻으로, 그 유래는 중국 공자의 7대손인 공빈이 쓴 ‘동이열전’에 기록됨으로서 유래된 말이다. 이는 당시 우리나라를 제후국 정도로 취급하던 중국에서 조차 우리의 예의범절을 아주 좋은 면으로 평가하는 자랑스러운 말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의 하나는 옛날부터 우리나라 언어의 고유한 특징 중의 하나인 높임말(경어)의 우수성과 사용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지난 호에서 밝힌바 있지만 높임말에 대한 사용은 심각할 정도로 잘못사용하거나 오염되어 있다. 필자 자신도 높임말을 해놓고 나중에 보면 잘못 사용했음을 알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에 본 호에서는 지난 호에 이어서 계속 높임말에 대한 올바른 사용을 논하고자 한다. II. 높임말의 분류 높임말을 제대로 잘못 사용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높임말의 체계와 구조가 복잡하고 어려운 면도 있지만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학습이 없다보니 더욱 그러하다. 이에 본 호에서는 높임말의 일반적인 개념 중에서 혼돈하기 쉬운 높임법의 분류, 즉 주체높임법과 객체높임법, 상대 높임법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1. 주체높임법 : 이는 말하는 자가 서술하는 주체에 대하여 높여서 말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목사님의 말씀이 타당하십니다.’란 말을 한다고 하자. 여기에서의 주체는 ‘목사님’이다. 또한 주체인 목사님을 높이는 말은 선어말 어미(先語末語尾)인 ‘-시’와 높임접미사 ‘-님’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경우를 주체높임법이라고 한다. 2. 객체높임법 : ‘목사님’을 높이는 주체 높임법과는 달리 말의 목적어나 부사어가 지시하는 대상, 곧 객체에 대해서 높이는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면 ‘나는 장로님을 모시고 교회로 왔다.’에서 말하는 주체는 나이다. 하지만 나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인 동시에 말의 목적어인 장로님을 높이는 경우이기 때문에 ‘모시다’란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이런 경우를 객체 높임법이라 한다. 3. 상대높임법 : 이 경우는 국어의 높임법 가운데 가장 발달되어 있는 것으로서, 말하는 자가 상대방에 대해 높이거나 낮추어 말하는 경우이다. 주로 종결 표현에 많이 나오는데, 크게는 격식체와 비격식체로 나뉘고, 높임의 정도에 따라서 네 단계로 나누기도 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면, 격식체는 높임 표현에서는‘이 성경책을 읽으십시오.’의 아주 높임의 ‘합쇼체’와‘이 성경을 읽으세요.’의 예사 높임의 ‘하오체’가 있다. 또한 격식체의 낮춤 표현에서는‘이 성경책을 읽게’의 예사 낮춤의 ‘하게체’와 ‘이 책을 읽으라.’의 아주 낮춤의‘해라체’가 있다. 이런 경우 모두를 격식체라고 한다. 반면 비격식체에 대해서 논한다면, ‘이 성경책을 읽어요.’의 두루 높임의 ‘해요체’가 있고, ‘이 성경책을 읽어’의 두루 낮춤의 ‘해체’가 있다. III. 결 어 높임말에 있어서는 이상과 같은 세 종류만 잘 구분해도 대부분의 높임말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논한 것만 해도 전공하지 않은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게 들려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이유들로 인하여 앞에서 논한 대로 높임말 사용이 지금은 심각한 수준에 와 있다. 더군다나 상하관계나 기본질서 개념이 분명치 않는 ‘해체주의(포스터모더니즘)’시대 속에서 높임말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어떤 이의 말처럼 동방예의지국이 아닌 동방무례지국(東方無禮之國)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다. 특히 이런 면으로 가장 먼저 선도해야 할 교회에서 조차 바른 높임말을 잘 하지 못하다보니 많은 우려가 된다. 예를 들어 예수님을 ‘예수’라 하고 성령님을 ‘성령’이라 하거나, 목사님, 장로님 등의 호칭에서 ‘-님’이란 존칭 접미사를 아예 무시하고, 바로 OOO 목사, OOO 장로 등으로 호칭하는 경우도 너무 많이 볼 수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의 올바른 언어 사용과 예의 있는 높임 말 사용은 또 다른 측면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아름다운 오고가는 따뜻한 말과 적절하게 서로 높이는 경의 사용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언어문화를 형성하고 선도해 나가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기독교인 생활용어
    2023-05-10
  • [조희완 목사] 순종의 결과 (삼상15:17-23)
    이스라엘에 있는 사해(死海) 바다는 일반 바닷물에 비해서 염도(鹽度)가 약 10배가량 높기 때문에 사람이 누우면 가라앉지 않고 뜨게 됩니다. 그래서 그냥 가만히 물에 누워서 신문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이 전혀 위험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곳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위험이 있기 때문에 물에 들어갈 때 반드시 지켜야 할 안전 수칙이 있습니다. 그 안전 수칙은 바로 “절대로 헤엄을 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염도가 높기 때문에 물에 몸을 맡기고 가만히 누우면 부력(浮力)에 의해서 저절로 몸이 뜹니다. 그러나 물에 빠질까봐 걱정을 해서 몸에 힘을 주게 되면 몸의 균형을 잃고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특히 수영을 한다고 첨벙거리다가는 다량의 광물질(鑛物質)이 함유된 소금물이 눈에 들어가거나 입으로 들이키게 되어서 자칫 큰 해를 입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해진 안전 수칙대로 몸에 힘을 빼고 가만히 바닷물에 몸을 맡기고 누워야 합니다. 그 정해진 안전 수칙에 따르기만 하면 누구나 안전하게 사해 바다의 즐거움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전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한 법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마음대로 행동하지 말고 인생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신학자 <앤드류 머레이>는 말하기를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순종의 학교>에 입학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은 곧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는 올바른 신앙생활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순종의 학교>에 입학한 그리스도인들답게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의 원칙이 되고 그 원칙에 순종함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순종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삼상15:22) 둘째로, 순종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출23:22) 셋째로, 순종하면 하나님이 해결하십니다.(요2:1-11) 항상 순종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2023-05-10
  • [오성한 목사] 내 말에 주의, 눈, 귀, 마음속에!
    말씀과 기도를 통해 기름 부음이 나타난다. 그러기 위해 믿는 자에게 이미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다는 것을 믿는 바른 믿음이 중요하다. 기름 부음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성령께서 하게 하시는 능력이다. (요일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분명히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라고 하셨다. 믿는 자에게는 이미 기름 부음이 있다. 기름 부음이 없이는 예수를 믿을 수 없다. 성령의 도움이 아니고는 예수가 믿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사람의 생각으로 동정녀 탄생을 믿을 수 있겠는가? 사람의 힘으로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고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믿을 수 없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라고 했다. 우리에게 거하는 기름 부음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을까? 많은 사람이 복음을 받고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는 복음을 믿는데 왜 내 삶 속에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는가, 복음이 이론인가?”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복음을 들을 때 기분은 좋은데 실재가 되지 못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 우리에게 있다면 이제 나타내야 되겠다. 기름 부음이 우리에게 있다는 먼저 믿어야 한다. 믿음을 가지면 우리 속에 기름 부음이 유지가 된다. 기름 부음을 유지할 뿐 아니라 기름 부음을 나타내며 복음을 전해야 한다. 초대교회는 그렇게 했다. 기름 부음이 나타나는 방법이 있다. 기름 부음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 나타난다. 제자들이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이유를 예수님께 물었을 때 예수님의 대답은 기도 외에 방법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9:29)라고 하셨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기름 부음이 타나난다. 기름 부음이 역사하는 길을 깨닫고 그 따르는 표적으로 확실히 증언하심을 이 시대에도 볼 수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하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셨다”(막16:20).“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잠4:20-22)라고 하셨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라고 하심이다. "내 말에 주의하라"는 말은 말씀에 주의하라는 말씀이다. "내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라"고 했다. 말씀이다 ."또 그것을 네 눈에서"이다. 그러니깐 말에 주의하고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고 눈에서 떠나지 말게 하고 마음속에 지켜야 한다. 마음속에 지킨다는 말은 내 마음에 믿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늘 마음에 있어야 한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요6:63)라고 하셨다. 살리는 것이 영이다. 영만이 살린다. 살리는 영을 붙잡아야 한다. 영이 무엇인가? “내가 이른 말”이 영이다. 생명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린다. 말씀과 기도로만이 거룩해진다. 말씀과 기도로 거룩한 삶이 나타난다는 말씀이다.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함을 주셨는데 거룩해진다는 말은 거룩한 삶이 타나나게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딤전4:5). 이미 우리 거룩함이 있다.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함을 주셨다. 이 거룩함이 나타나는 방법이 말씀과 기도의 충만이다. 나는 다음 구절을 수백 번, 수천 번 암송하고 묵상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주장하고 고백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하고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11:23). 당신도 이 구절을 철저히 암송하고 주장해 보라. 신나는 일이 아니가!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된단다.
    • 오피니언
    • 칼럼
    2023-05-10
  • [신재철 목사] 윈도우 XP, 너를 보게 될 줄이야.
    급한 일이 없는 관리실은 평화롭다. 골치 아픈 민원이나 신경 써야 할 작업도 없다. 이럴 때면 작은 컨테이너 관리실에 앉아 소소한 업무를 진행한다. 그런데! 누군가 다가온다. 점점 거리가 좁혀지며 예상 이동 경로가 관리실로 보인다. 결국, 관리실 문이 열렸다. “소장님 계시네? 우리 집 컴퓨터 한번 봐줄 수 있겠습니까?” 늘 이런 식이다. 관리실에서 조금이라도 여유를 가져보려면 내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 입장한다. 카랑카랑한 경상도 할매의 음성, 집에 있는 컴퓨터가 이상하다는 말과 함께 도움을 요청한다. 집의 컴퓨터가 문제가 있는데 왜 관리소장에게 문의할까? 주로 어르신들이 계신 아파트. 자식들은 타지에서 바쁘게 살아간다. 자식들에게는 미안해서 연락을 못 하겠다 하시며 내게는 미안하지 않으신가 보다. 컴퓨터는 물론 소소한 살림살이에 관한 도움 요청이 많다. 이런 일에 엮이면 반나절 이상 소비되는 귀찮은 일이 된다. “아, 그러세요? 컴퓨터 업체 전화번호 드릴까요?” 최대한 미소를 잃지 않고 여유롭게 응대한다. 내가 친절한 목사라는 것을 상대방이 인지하게 해야 한다. 그렇다고 일을 떠안을 수 없다. 이럴 때 가장 유용한 회피 기술은 전문 업체와 연결해 주는 것이다. 단순히 귀찮아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기술도 없는 사람이 종일 고생한 후 해결 못 하는 것보다 출장비를 지불하더라도 정확하고 빠르게 해결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비겁한 변명일까? 여하튼 지역에 소문난 컴퓨터 업체 사장님을 소개해 드렸다. “어르신, 제가 고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고 한번 올라가서 봐드릴게요.” 10분이 못 되어 전화를 드린다. 얼마 전 홀로 되신 할머니를 돌려보내며 뒷모습에 마음이 아렸다. “아이고, 소장님이 마음에 걸리셨구나.” 돌아설 때 무거운 표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 전파를 타고 느껴진다. 나를 의지하며 찾아오셨는데 매몰차게 돌려보낸 것 같아 죄책감이 밀려왔다. 노인 냄새는 났지만 집은 깨끗하다. 안내받은 안방에 들어가 보니 구매할 때는 제법 비쌌을 것 같은 날씬한 본체의 대기업 컴퓨터가 있다. 그 옆에는 정사각형 비율을 통해 연로함을 자랑하는 작은 모니터가 자리했다. ‘지금까지 정상적으로 작동되었을까?’ 의구심이 든다. 전원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 오래, 오래, 아주 오래. 다행일까? 부팅이 된다. 맙소사. 부팅 화면에 나타난 화면. ‘윈도우 XP’ 호기심에 설정을 확인해 보니 ‘메모리 512MB’ 추억의 사양이다. “가끔 인터넷 하고, 한글 프로그램만 돌아가면 됩니다.” 할머니가 요구한 조건은 이 녀석이 감당하기에 가혹하다. ‘인터넷은 될까?’ 혹시나 인터넷 사용은 가능할까 싶어 눌러보니 오랜 시간 후 연결은 되나 페이지가 열리지 않는다. 이건 답이 없다. 적당히 내가 만져서 살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뭐라도 살릴 수 있나 살펴보다가 항복을 선언했다. “할머니, 이건 도저히 쓸 수 없겠어요. 차라리 ‘당근 마켓’에서 중고라도 사신다면 제가 도와드릴게요.” 내가 해드릴 수 있는 전부다. 본체와 모니터를 합쳐 10만 원만 줘도 지금 이 아이보다 나을 것이라는 조언을 해드리고 퇴장한다. 사실 내게 약간의 여유만 있어도 컴퓨터를 바꿔드리고 싶었지만 그럴 여력이 없다. 오래된 윈도우XP 보다 내가 더 무능한 것 같아서 할머니에게 괜스레 더 죄송스러워진다. 이번에는 내 잘못도 아닌데.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2023-05-10
  • [박동철 장로] 제자 도마가 가야국 김해에 왔다?
    지난 5월 4일 김해 모 교회에서 가야 건국 1981주년 기념 예배가 올려졌다. 이어, 이 자리서 가야사 속 기독교 사적을 찾는 세미나가 열렸다. 필자는 기독교 역사 공부에 늘 관심이 있어 김해서 개최되는 가야사 세미나에 몇 차례 참석한 적이 있다. 교회서 무슨 가야 건국 예배인가. 의아할 수도 있지만 우리 역사 1세기 전후 가야국 속에 기독교의 전래 유적이 있다는 가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최근 들어 가야국의 기독교 역사 연구의 열기가 전국으로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개괄적인 역사 흐름은 1세기 중반 제자 도마가 인도에서 복음을 전했으며 복음을 받은 허황옥이 가야의 시조 김수로(金首露)와 국제 결혼한데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고대 역사는 가설에 치우친다. 한데 허황옥이 살던 인도 아유타국에서 도마가 복음을 전한 것과 아유타국의 상징 물고기가 기독교의 상징이란 데 흥미를 끈다. 더욱 지금 눈길을 끄는 것은 가야국 시조 김수로왕릉에 쌍어(雙魚)라는 물고기 두 마리가 그려져 있다. 역사 탐구하는 사람들은 가만 있을 수 없다. 특별히 손길(주님손길의 뜻)문화원을 세워 기독교 역사 연구에 열심인 원장 이용봉 목사의 열정이 가야의 기독교 역사 연구에 불을 붙이고 있다. 가야 고분의 유물 중 일곱 촛대 메노라가 이스라엘의 일곱 등잔대와 같다는 유적유물에서의 일치도 더욱 흥분케 한다. 제자 도마는 의심 많은 제자로 알려져 있다. 부활 후 오신 예수님에게 못 자국을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했다. 예수님이 직접 도마의 손을 끌어 못 자국을 만지게 했고 그때 도마는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십니다(요20:28)라고 고백했다. 이 고백을 두고 성경 학자들은 도마가 의심 많은 제자가 아니고 신중하면서도 복음을 넓게 전한 제자로 평가하기도 했다. 아무튼 많은 학자들은 제자 도마가 아시아의 인도 아유타국(지금의 첸나이)에서 복음을 전했다고 정리하고 있다. 인도 첸나이에 도마 기념교회가 있고 우상의 나라 인도에서 3천만 명이 예수를 믿는 복음의 지경이 있게 했다. 역사의 깊음 속에 사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흔적을 통해서 우리는 추적해 볼 수 있고 이를 통해 예수 복음의 강한 전파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묵상해 볼 때 가야국에 복음 전파가 있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다. 같은 시대 신라에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경교(景敎)가 있었다. 예수님 승천하시고 초대 강한 복음의 전파가 오늘날 이시대보다 강렬했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김해 가야국의 기독교 역사를 왜 연구하고 강렬하게 추적해야 하는가. 문제는 불교권에서 가야를 불교 진흥의 국가로 왜곡시켜 성역화하는데서 비롯된다. 가야가 불교의 나라인가. 전혀 아니다. 우리 나라 불교 유입의 연대도 맞지 않고 불교국의 역사 유물도 전혀 없다.(우리나라 불교유입 서기378년 고구려시대) 그러나 몇 년 전 국가적 가야사 복원 프로젝트에 수조원의 국비가 편성되면서 불교권에서 이러한 왜곡된 역사 기획을 했던 것이다. 많은 예산를 탐 낼만 하다. 급기야 김해시 기독교연합회서 왜곡된 불교 역사에 저항하고 결국 불교 성역화 사업을 무산시켰다. 너무나 잘한 일이다. 김해기독교연합회는 지난 2018년부터 가야 건국 기념예배를 매년 드리고 가야국 기독교 역사 연구를 위한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부터 전국의 많은 기독교 역사 연구가들이 당시 가야사 전역의 일부 호남 포함 대구 경북지역의 가야 시대 기독교 유물 찾기에 나서고 있다. 이날 세미나에는 경북 영주의 산속에 버려져있는 불상 비슷한 석상이 제자 도마상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필자가 보기에 고개를 갸우뚱할 수 밖에 없었다. 판단이 어려웠다. 그러나 분명 불상은 아니었다. 깊은 연구의 숙제를 주었다. 가야문화의 많은 남김도 있다. 가야 후기 우륵이 만든 영원한 우리의 악기 가야금은 다윗의 비파 수금과 가장 엇비슷한 악기라고 평가한다. 앞으로 가야의 문화 예술 또한 무한히 재현될 전망이 보인다. 많은 담론이 있겠지만 문화의 옷을 입고 세상에 메시지를 던지게 될 것이다. 기독교의 나라 가야(伽倻)가 분명히 재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3-05-06
  • [박동철 장로] 비판할 자격 있는가?
    최근 모정당(중립 견지에서 모 정당이라 함)의 전당대회 돈 봉투 살포 사건이 일파만파로 확산될 조짐이다. 소위 80년대 군사독재 정권에 항거했던 운동권 86그룹이라는 정치인 중심의 모 정당은 진보를 내세우고 민주와 깨끗함을 유전자로 삼고 있다. 실제 이들의 민주화 운동은 그 공로를 높이 인정할 수 있다. 80년대 인권이 짓밟히고 군사독재의 서슬 퍼런 때 용감하게 거리에서 민주화를 외쳤고 또한 감옥살이까지 하면서 고난을 겪은 분들도 많다. 그분들이 그동안 민주화를 거치면서 국회에 많이 진출하고 이제 한국 정치의 중심에서 나라를 이끌고 있다고 봐야한다. 이념의 교체에 따라 몇 차례 집권을 하기도 했다. 진보 이념으로 국가를 발전해 보자는 주창도 이들을 통해 많이 들었다. 보다 보편적 평등사회를 만들자는 주장도 너무 무시할 수는 없다. 문제는 진보 이념을 주창하는 이들이 오늘날 한국의 정치 중심에서 방향을 잃고 위선적 정치판을 만들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이번에 전당대회 돈 봉투 사건은 앞으로 검찰 수사 과정에서 밝혀지겠지만 전망컨대 아수라장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민주와 깨끗함의 기치가 깡그리 무너질 수도 있지 않을까 걱정이다. 국민들 시각에서 그래도 대한민국이 선진국 초입에서 정치가 성숙되길 기대한다. 그리고 보편적 균형의 사회 안정을 위해 진보 이념의 정치인들이 보수 정치인들과 견제와 경쟁으로 나라를 이끌어주기를 바라고 있다. 국민의 이러한 기대와는 달리 진보 이념의 정치인들이 그동안 도덕적 우월감만 갖고 바리새인 같은 선민의식에서 많은 착각을 보여왔다. 친북좌파로 흐르고 지나친 인본주의 문화와 노동투쟁 쟁취의 문화를 양산했던 것 부정할 수 없다. 문제는 이번 전당대회 돈 봉투 살포와 같은 조직적 지능적 부패 관리로 권력을 잡으려는 추한 모습들이 이들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으니 슬픈 생각이 든다. 모든 국민의 바람은 나라 지도자들이 부패문화를 없애고 공의가 살아있는 사회를 만들어주길 기대한다. 선진국이 되는 길에서 서민들의 바람은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래서 이번 사건을 보면서 그동안 운동권 정치인들에 우려가 있었지만 정말로 한국 사회에는 빛과 소금 역할을 할 리딩 그룹이 없는 걸까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영적 삶의 현장 기독교 사회는 어떨까. 교회와 교계의 지도자들은 우리 사회의 모본(模本)이 될 만큼 정결하고 건강할까. 우리가 냉정히 진단하고 회개의 기회를 삼아야 되지 않을까 싶다. 얼마 전 필자는 교계발행 신문 한 칼럼 제목을 보고 언뜻 이해가 안 되는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다. 칼럼의 제목은 ‘목사장로님들 신사임당을 좋아하지 마소서’였다. 난데없이 신사임당의 단어가 뭔가? 읽고 보니 교계뉴스와 관련 총회를 앞두고 금전이 오가는 악한 문화를 없애자는 비평의 칼럼이었다. 필자는 교계 지도자들이 총회 선거철만 되면 관행의 금전 문화가 있음을 일정 들은 바는 있다. 그러나 칼럼을 읽고 우리 기독교 교계에도 세상의 정치문화처럼 선거 때 ○○억을 써야 당선 되고 천만 원만 적게 쓰도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런 자괴 어린 푸념들이 목사·장로님들 속에서 회자될 일인가. 이만큼 슬픈 일이 있을까. 필자도 노회 총대, 총회 총대로 참석해 본 적 있으나 세세한 속을 알 수가 없다. 정치판이라고 다 그래서 될 일인가. 지금 대한민국은 정치판이 건강해지면 선진국이 되는 길은 눈 앞에 와있다고 본다. 그래서 이번과 같은 정당의 돈 봉투 살포 사건을 보고 기독교 교계 지도자들은 강한 비판과 함께 감시의 눈을 더욱 크게 떠야할 것이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한국 정치를 비판할 자격을 잃으면 나라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타락하여 바벨론에 노예로 보내야 할 때 ‘공의’를 가장 강조했던 팩트를 우리는 성경에서 보았다. 교회가 사회 구원을 위한 길은 이웃에게 쌀 한 포대 전달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공의를 전하는 일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3-04-29
  • [조희완 목사] 수고의 자세 (고전15:57-58)
    우리가 흔히 주고받는 인사말 중에 “수고 하세요” 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일터를 방문했다가 나올 때나. 관공서에 가서 일을 보고 나올 때 그냥 나오기가 뭐해서 일반적으로 “그럼 수고 하세요”라고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그 인사말은 아주 잘못된 것이라고 합니다. 특히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인사를 할 때는 그 말을 써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말 속에는 “욕을 보세요.”라는 의미가 들어있는 욕(辱)이기 때문입니다. “욕보세요.”라는 말은 엄청난 “욕”(辱)입니다. 옛날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우리 조선의 처녀들이 오랑캐들에게 끌려가서 윤간(輪姦)을 당한 것을 가리켜서“욕을 당했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일제시대(日帝時代) 때 우리 조선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로부터 착취(搾取)를 당하고 학대(虐待)를 당한 것을 가리켜서 “욕을 당했다”라고 합니다. “수고 하세요”라는 말 속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절대로 그렇게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인사하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수고라는 한문을 다른 글자로 바꾸어 보았습니다. “성취할”(遂) 字에다가 “오로지 고”(固) 字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니까 “오로지 노력해서 믿음을 성취하자”는 뜻이며, “오로지 노력해서 맡겨주신 직분을 잘 감당하자”는 뜻입니다. 욕(辱)을 보자는 수고가 아니라 직분을 잘 감당하고 맡겨 주신 일을 성취하자는 수고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수고를 할 때 큰 보람이 있고 하나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맡겨주는 것은 하나의 계급이거나 명예가 아닙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고 수고하라고 맡겨주는 것입니다. 수고를 하되 어떤 자세로 수고해야 할까요? 첫째로, 기쁨으로 수고해야 합니다.(고전15:58) 둘째로, 겸손으로 수고해야 합니다.(고전15:10) 셋째로, 열심으로 수고해야 합니다.(골1:28,29) 우리의 수고로 주님의 몸 된 온전한 교회가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2023-04-19
  • [이정희 목사] 기독교인의 용어 사용 29: 높임말(경어), 이대로 좋은가? (1)
    I. 서언(序言) 종종 이를 치료하기 위해서 치과를 찾은 적이 있었다. 그 때 간호원으로 부터 “목사님이 앉으신 의자가 내려가시겠습니다.” 라는 말을 들었다. 이런 말은 한 번 두 번 들었던 것이 아닌 자주 듣는 말이기도 하다. 또 은행에서 돈을 찾을 때 “선생님의 돈이 나오십니다.” 라는 말도 종종 듣는다. 말하는 이로서는 최대한 존대 말로 상대방을 높이기 위한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높임말의 원칙에서 본다면 이 말은 너무나도 어색한 말이다. 이런 차원에서 앞으로는 평소에 사용하는 높임말의 바른 사용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II. 높임말의 구분과 원칙 1. 구분의 필요성: 높임말을 제대로 잘 사용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필자 자신도 때로는 높임말을 해놓고 지금 바로 말했는가? 라는 의문점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는가? 이유 중 하나는 높임말에 대해서는 우리 한국어가 세계에서 가장 발달되어 있으며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높임말은 아주 다양하고 정확하게 바로 사용하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 대한 나름대로의 학습이 없으면 우리가 한국인이지만 높임말을 바로 정확하게 쓴다는 것이 힘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고 여러 계층의 교인들을 만나는 목회자로서는 이런 면으로는 너무 많은 신경이 쓰이는 것도 사실이다. 2. 올바른 높임말의 기초적인 원칙들: 높임말에는 여러 원칙들이 있지만 앞으로 기회가 있으면 논하기로 하고 우선 위의 서두의 잘못 사용된 높임말을 분석해 보자. 먼저 “목사님이 앉으신 의자”까지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의자가 내려가십니다.”란 말은 사물의 하나인 의자를 높이는 격이 되기 때문에 너무 잘못된 표현이다. 바른 표현은 “목사님이 앉으신 의자가 내려갑니다.”라고 해야 올바른 말이 된다. 한 가지 더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슈퍼에 가서 커피 한잔을 주문하면서 “커피 한 잔 주세요"라고 했다. 그 때 주인이 “예, 3천 원이세요.”라고 대답했다. 그 때 손님이 “그러면 시럽도 좀 넣어 주세요”라고 요구했다. 이때 주인이 “예, 시럽은 저쪽 테이블에 있으세요” 라고 대답했다. 여기 이 대화에서 잘못된 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주인이 “3천 원이세요”, “테이블에 있으세요”라는 대답에서 “~이세요, ~있으세요” 라는 말이다. 이는 높일 필요가 없는 사물을 존대함으로서 “주체 높임말의 오류법”이란 원칙을 어기고 잘못 사용한 경우이다. 이상과 같이 실체를 알 수 없는 어색한 높임말이 우리 사회의 언어문화에서 너무나도 많이 범람하고 있다. 이런 경우는 교회의 성도들 간의 대화에서도 얼마든지 많이 볼 수 있는 현상들이다. 그러면 언제부터 이러한 현상이 생겼을까? 국어학자들에 의하면 이런 변형된 존대어는 6.25전쟁 이후, 산업화 초기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하여 오늘에까지 왔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급격한 사회의 변화 속에서 봇물처럼 밀려오는 외래어와 새로운 용어들이 등장함으로서 우리의 언어체계 뿐만 아니라 민족 고유의 높임말까지 변형시키게 된 것이다. 특히 이러한 잘못된 존대어의 주범은 “TV와 인터넷, 스마트 폰이다”라고 할 만큼 이런 기기들의 영향이 아주 크다. 여기에다 연예인, 특히 개그맨들의 어법에 맞지 않는 유행어의 남발과 인터넷 언어 등의 남용이나 오용, 무조건 외래어를 사용해야 유식해 보이는 언어 사대주의 등이 우리 고유의 기존의 높임말에도 잘못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III. 결 어 이상과 같은 잘못된 높임말은 일반 사회뿐만이 아니라 앞에서 밝힌 대로 교회에서도 역시 많이 통용되고 있는 경우들을 많이 듣고 본다. 이러한 차원에서 앞으로 구체적으로 높임말의 체계와 실례를 들어서 논하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올바른 높임말을 제대로 사용하는 것은 교회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생활 가운데서도 매우 유익할 것이다. 특히 이러한 높임말의 올바른 사용은 우리 모두를 덕과 인격을 갖춘 품위 있는 기독교인으로 세워 줄 것이며, 또 하나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귀한 일일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기독교인 생활용어
    2023-04-19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