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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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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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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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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8
  • [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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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3
  • [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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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8
  • [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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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실시간 칼럼 기사

  • [최호숙 목사] 단풍과 인생
    우리는 보통 나체(裸體)하면 사람의 벌거벗은 몸을 연상하는데 원래는 나무를 의미하는 것이다. 한자로 “나(裸 벗을 나)”자는 나무에 잎사귀가 낙엽이 되어 다 떨어졌다는 뜻이다. 한자 적(赤)자도 “벌거벗은”이라는 뜻이 있어, 적나(赤裸)나 적신(赤身)도 같은 의미로 쓰이나 근래에는 사용 빈도가 적지만 한자어 “적나라(赤裸裸)하다”는 것은 “다 까발려진”과 같은 비유적인 의미와, “다 벗다”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영어로는 ‘naked’와 ‘누드(nude)’가 있는데 둘 다 나체라는 의미이기는 하나 세부적으로는 차이가 있다. ‘naked’는 자연 그대로의 나체를 뜻하고, ‘nude’는 예술이라는 옷을 입은 나체를 뜻한다고 정의했다.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 세계의 순리를 보면 봄꽃은 남에서부터 물들어 올라가고 가을에는 북에서부터 물들어 내려온다. 단풍이 남쪽으로 내려오는 속도는 초속 30cm라고 하는데 필자가 목회하는 이곳 통영에도 나무에 단풍이 들더니 서서히 한 잎 두 잎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쓸쓸한 인생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 된다. 단풍이 드는 속도가 다르게 나타나는데 성목 보다는 묘목이 빠르고, 맨땅 보다는 화분이 빠르게 물들기 시작한다. 원인은 뿌리 온도와 관계된 것이라고 한다. 뿌리가 추위를 느끼면 더 빠른 단풍이 들게 된다. 성목보다 묘목의 흙이 적기에 뿌리가 온도변화를 더 빨리 느끼고 맨땅 보다는 화분이 더 민감하기 마련이다. 우리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다. 믿음의 뿌리가 깊고 말씀의 흙이 많은 성도는 세상에 쉽게 물들지 않고 자신을 지켜나간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세상에 쉽게 동화되어 세속적인 사람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이런 원리를 알기 때문에 에베소 교회를 위하여 기도할 때에 “교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사랑의 뿌리가 깊이 내려지기를(엡 3:17)”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나의 신앙의 삶은 얼마나 변색, 세속화되었는가? 겉만 깨끗하게 하는 것을 세속화라면, 속을 깨끗하게 하는 것을 복음화라고 할 수 있다. 형식적인 헌금을 세속화라면, 마음에서 우러나는 의로움과 자비의 예물을 바치는 것을 복음화라고 할 수 있다. 탐욕을 추구하는 것을 세속화라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복음화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인은 세상과 구별되어 살아가야 한다. 세상의 즐거움과 거룩함 두 가지를 동시에 추구할 수 없기에 결국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나를 위해 쓰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해 쓰는가가 중요한 지표이다. 나의 삶은 누구를 위해 더 많이 사용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세상 안에서 분명히 하나님을 나타내며 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이태원 참사는 안타까운 일이다. 핼로윈 데이(Halloween Day) 그것은 바울의 성경적 기준으로 볼 때 구별 없는 세상 풍조(엡 4:14)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세속으로 물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물들어야 하고,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아름다운 신앙의 삶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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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11
  • [이정희 목사] 성도(聖徒)와 성도(聖道), 성자와 성녀의 용어 고찰
    I. 서언(序言) 몇 달 전에 어떤 지인과 교회에서 집사가 되기까지의 교인들을 성도라고 호칭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또 그 의미는 무엇일까에 대한 토론을 했다. 필자는 성도의 한자어의 뜻은 거룩할 聖자에 길 道로서 거룩한 길을 가는 교인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반면 지인은 거룩할 聖자에 무리 徒로서 거룩한 무리들을 의미한다고 했다. 당장 그 자리에서 스마트폰으로 검색해보니 지인의 말대로 도는 길 道가 아니라 무리 徒였다. 이런 토론 속에서 또 다시 깨닫게 된 것은 올바른 용어 사용에 대한 캠페인과 본지를 통하여 계속 기고 하고 있는 필자로서도 바로 알지 못하고 사용하는 용어들이 너무 많다는 자괴감 속에서 앞으로 더 많은 연구와 노력을 경주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울러 거룩할 聖자로 사용하는 성자와 성녀에 대한 용어도 고찰해보고자 한다. II. 성도(聖徒)와 성도(聖道), 성자와 성녀의 사전적 용어분석 성도는 한국어로 사용할 때는 같은 말이지만, 한자어로 볼 때는 확연한 차이가 난다. 또한 성자와 성녀를 국어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용어를 기준으로 구분해서 본다면 다음과 같다. 1. 성도(聖徒)와 성도(聖道)의 차이 1) 성도(聖徒) (1) 개신교: 기독교 신자를 높이어 부르는 말(a christian saint) (2)가톨릭 : 이미 죽은 사람 중에서 특히 덕이 있었다고 인정되는 신자를 일컬음. 2)성도(聖道) (1)성인의 길. 거룩한 길 (2)불교: 자력문(自力門)으로 미혹을 물리치고 도를 깨닫는 교법(敎法)의 경우. 2. 성자(聖者)와 성자(聖子)의 차이 1)성자(聖者) (1)성인(聖人) (2) 개신교: 거룩한 신자나 순교자를 일컬음(saint) (3)불교: 도를 닦아서 온갖 번뇌를 끊고 정도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을 일컬음 2)성자(聖子): 개신교, 가톨릭-삼위일체에서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말함(The Son) 3)성녀(聖女): 가톨릭-여자 성인(聖人)을 일컬음 III. 올바른 용어 사용의 적합성 앞에서 본 용어의 사전적인 뜻을 볼 때, 이런 말을 교회에서 어떤 경우에 사용하는 것이 적절 할까? 또한 현재까지 흔히 사용하는 성도, 성도님, 성도들이란 말이 적법한가에 대한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이에 대해서 성경적 원어와 일반 교회적인 용어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성도(聖徒) : 국어사전의 의미로는 앞에서 기독교 신자를 높이어 부르는 말로 정의하였다. 헬라어 원어로는 ‘하기오스’이다. 신, 구약 전체로 백 여 번 정도 나오는데, 신약에서는 이 뜻이 단수와 복수로 모두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빌립보서에서 보면 성도란 같은 말에서 4:21절은 단수로, 22절은 복수로 나온다. 문제는 이 ‘하기오스’를 한자로 번역할 때 무리 徒 란 복수의 단어로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徒 자체가 복수이면서도 또 다시 복수를 표현 할 때는 성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한자로 표기한 성도나 성도들은 자체적인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사전적인 뜻으로 볼 때도 교회 처음 나온 초신자들을 호칭할 적당한 말이 없기 때문에 성도라고 부르지만, 자체적인 뜻은 거룩한 신자나 순교자를 의미하는 단어를 신앙생활을 처음 하는 초신 자들에게는 이치상 맞지 않는 용어이다. 차라리 신자, 교인, 형제, 자매 등으로 호칭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2. 성자(聖子)의 성녀(聖女): 간혹 교인들을 성자와 성녀로 호칭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지만 볼 수 있는데, 이런 용어도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그 이유는 앞서 사전적 뜻에서 본대로 성자(聖者)와 성자(聖子) 둘 다 평범한 신앙생활을 하는 일반 교인들에게는 합당하지 않는 호칭이며, 성녀(聖女)는 가톨릭에서만 사용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개신교의 입장에서는 더욱 더 사용해서는 안 될 용어이다. IV . 결 어(結語) 평생을 신앙생활과 20대부터 목회자의 삶을 살아온 필자로서 아직도 잘못 사용하고 있는 교회생활용어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란 것과 가장 잘 알고 있고, 바른 표현이라고 생각했던 것조차 잘못된 용어였다는 점에서 다시 한 번 자괴감을 가져본다. 물론 위에서 논한 용어들은 또 다른 견해가 있을 것이다. 바라기는 이런 용어의 올바른 사용에 대해서 끊임없는 연고와 토론이 있어야 될 것이다. 이에 앞으로도 계속 우리 자체의 용어들의 사용이 어떠한가를 계속 논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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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11
  • [조희완 목사] 사랑의 계명 (요13:31-35)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업 중에 하나인 <LG>그룹이 본래 럭키금성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난 1995년도에 LG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LG그룹이 창사 61주년을 맞이하여서 전체 계열회사의 “브랜드 아이덴티티”(BI)를 “사랑”이라는 주제로 바꾸었습니다. 고객들에게 더 친근하고 따뜻한 정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기업의 이미지를 “사랑”으로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그 기업에서 새롭게 내보내는 광고의 내용을 살펴보면 “사랑만 하기 에도 인생은 짧습니다. LG는 오직 당신만을 바라보고 오직 당신만을 생각하겠습니다. 이제 LG의 365일은 사랑입니다.” LG그룹은 이 새로운 광고를 통해서 “글로벌 톱 브랜드”로 도약을 시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고 합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사랑에 목말라하고 있는 이 시대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광고 주제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라는 주제는 우리 기독교의 브랜드이고 성경의 핵심 주제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기업에서 사랑이라는 주제로 기업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겠다고 하니까 왠지 우리의 고유 브랜드를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들의 인생 브랜드를 이렇게 바꾸면 어떨까요. “사랑만 하기 에도 인생은 짧습니다. 미워하지 맙시다. 나는 오직 당신만을 바라보고 당신만을 생각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나의 365일은 오직 사랑입니다.” 그렇게 인생의 정체성(identity)을 바꿀 때 우리의 삶이 아름답고 풍요로워 질 것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원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자원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자원이 너무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갈되어 가고 있는 사랑을 회복시켜야 합니다. 첫째로, 사랑은 하나님이 주신 새 계명입니다.(34) 둘째로, 사랑은 서로가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34) 셋째로, 사랑은 예수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35) 불법이 성하고 사랑이 식어지는 이때에 풍성한 사랑을 서로 나누며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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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11
  • [신재철 목사] 노래방 삐끼가 만난 사람
    이번에는 노래방 삐끼다. 삐끼는 기본적으로 머리를 숙이고, 웃음을 팔아야 한다. 나를 통해 손님이 가게 안으로 들어가게 해야만 한다. 지금은 심야 노래방 영업이 금지되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래도 노래방은 돌아간다. 밖에서는 고용된 삐끼들의 호객행위가 이어지고 성공하면 가게 안에 무전을 날린다. 그러면 내려진 셔터가 열리며 손님이 들어간다. 물론 셔터는 다시 닫힌다. 나는 그 호객행위를 담당하는 알바다. 노래방 서빙으로 알고 갔다가 일을 하기로 했는데 마음이 편치 않다. 일단 해보기로 했다. 일을 해야 핸드폰 요금도 내고 학교도 갈 수 있다. “형님, 노래방 어때요? 음료수 서비스 됩니다.” 다양한 형태의 행인이 지난다. 커플, 얼큰하게 취한 사람들, 짙은 화장의 누나들. 손님과 가벼운 밀당 후 성공하면 노래방 관계자에게 무전을 보낸다. 그리고 닫혀진 셔터 앞까지 안내한 후 열린 문으로 들여보내며 힘차게 인사를 한다. “좋은 시간 보내세요!” 여기까지가 내 역할이다. 오늘도 하얗게 불태웠다. 몇 팀이나 들어갔을까? 심지어 성공한 손님 중에 고등학교 동창도 있었다. 영업용 미소를 친구에게 보이며 노래방 이용을 부탁하는데 너무 부끄러웠다. 철저한 손님 마인드로 나를 대하는 동창 녀석이 얄밉기도 했다. 아침과 맞닿은 새벽 시간. 이 때면 손님도 없다. 비틀거리는 사람보다 이른 출근하는 사람이 더 보이는 시간이다. 그래도 퇴근까지는 조금 남았으니 대기. 잠시 등받이 없는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숨을 돌린다. 생각이 많아진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신학대학을 다녀야 할까?’ 친구들은 용돈 벌이로 아르바이트하는데, 먹고 사는 문제로 일하는 나를 보니 좀 서글프다. 길게 할 일은 아니라고 토닥여 보지만 괴로움이 털어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손에서 버려져 길가에 널브러져 밟힌 수많은 전단지가 내 삶과 겹쳐진다. “오늘 손님 좀 있었어?” 옆자리에 앉은 아주머니. 대전역 앞 사창가에서 호객하는 아주머니다. 이제 얼굴도 익은터라 편하게 이 시간이면 대화도 이어간다. 나이는 있어 보이지만 예쁘장하게 생긴 아주머니. 이분도 많은 사람에게 영업용 미소를 날리며 자괴감을 느꼈을까? 신학생이 왜 이 일을 하냐 물어오는데 근사하게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게요.”라는 말로 나를 감춰 본다. 아주머니의 불편한 질문에 심드렁한 음성으로 아줌마는 왜 일하냐는 반문을 날려본다. 우리는 오히려 더 어색해졌다. 둘 다 그냥 하늘만 본다. 서로의 삶에 관여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서로 잘 알고 있다. 아직은 자고 있을 여자친구에게 혹시나 문자 한 통 오지않을까 싶어 내 016 PCS를 만지작거린다. “휴... 하나님, 얼른 학교로 돌아가고 싶어요.” * 삐끼 음식점이나 유흥업소 따위에서 손님을 끌어들이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 비슷한 말 : 호객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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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11
  • [박동철 장로] 망조(亡兆)보이는 시진핑의 중국몽(中國夢)
    지난 10월 16일부터 22일까지 중국 베이징에서는 중국 공산당의 제20차 전국대표대회가 있었다.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이하 당대회)는 5년 만에 열리는 최대 정치행사이다. 당대회는 보통 공산당 통치의 최고 권력자 국가 주석이 새롭게 등극하거나 5년 만에 재신임을 받는 이벤트다. 지금껏 관행이라면 시진핑 주석의 10년 통치가 끝나고 새로운 지도자가 선출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날 당대회는 새 지도자를 선출하지 않음으로써 시진핑 주석의 3연임을 결정하는 대회가 되었다. 중국 공산당은 마오쩌둥(모택동, 毛澤東)의 공산당 혁명 후 장기집권에서 개혁의 혁명가 덩샤오핑(등소평, 鄧小平)이 사회주의 속 자본주의의 소위 흑묘백묘(黑猫白猫)론으로 동서 냉전시대를 끝내고 개방의 정책을 성공시켰다. 이후 중국은 사회주의속 자본주의 개방과 최고 지도자의 권력 또한 분산하고 10년의 권력 시한을 관례화하는데도 성공했다. 이에 중국은 경제의 도약과 함께 14억 인구의 경제 대국이 되고 미국과 세계 속 G2라는 위치를 굳히고 있다. 놀라운 일은 그동안 개혁·개방과 함께 기독교 복음의 길이 열리고 공산당의 엄격한 통제가 있었지만 오늘날 1억이 넘는 기독교 인구로 복음의 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중국은 이번 당대회를 통해 시진핑 주석의 영구집권의 정치체제를 출범시켰다. 그리고 사회주의 현대화란 기치로 명실상부한 공산주의 국가로 세계 제국의 꿈을 선포한 것이다. 다시 말해 시진핑의 중국몽(中國夢)을 선언한 것이다. 중국은 우리 대한민국과도 개혁개방과 함께 경제 우방국이 되었다. 국가 경제의 교역 1위의 나라이자 가장 가까운 경제 파트너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번 중국 당대회를 보면서 우리는 비상한 각오를 갖게 한다. 복음 전파를 위한 중국에 대한 전환적 시각이다. 중국을 상대하는데 자세를 바로잡아야하는 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우리는 중국의 경제발전을 두고 아주 혼란스러운 시각들을 갖고 있다. 사회주의식 경제 국가로 성공했다는 중국에 대해 동경하는 일부 좌파 이념의 세력들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국의 통제경제의 속살을 모르는 시각이다. 중국의 경제 발전 속에 민주화의 피바람이 크게 잠재하고 있음을 안다면 다시금 생각할 수 있다. 중국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발전과정에서 겪는 민주화의 경험이 아직 없다. 그동안 시진핑의 집권 10년 동안 민주화의 움직임을 억눌러왔다. 아울러 교회를 탄압하는데 어느 때보다 앞장서왔다. 정부 당국의 허가를 받아 교회 십자가를 세워야 하고 십계명 대신 시진핑 강령을 세우고 선(先) 공산당 이념을 교회에 명령해왔다. 중국의 기독교에서는 기독 인구 1억 명을 넘기면서 복음의 꿈을 꾸었다. 그러나 시진핑의 중국은 앞으로 기독교 복음에 더욱 강한 적대행위를 할 것이다. 더욱 본연의 공산주의 독재국가로 진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유물론의 공산주의와 기독교 복음은 공존할 수 없다. 국내 정치적으로는 소수민족을 강하게 흡입하면서 함께 공산 사회주의 전체주의국가로 전진할 것이다. 이에 복음의 사명에 불타는 성령의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더욱 복음전파에 정진할 것이다. 로마제국이 제국과 황제를 위해 기독교를 박해했을 때 예수그리스도가 나셨고 그리고 위대한 제자들이 로마에서 피의 순교를 했다. 그리고 어느 날 로마는 기독교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예수님 시대 로마를 닮아가는 시진핑의 중국몽(中國夢)은 기독교를 더욱 박해하는 슬픈 여정이 있을지라도 서서히 망조가 되어갈듯하다. 역사의 교훈이 오늘의 중국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교훈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중국 조야(朝野)의 사람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는 사명으로 중국을 위해 기도할 때이다. 골로새서 1장 16장은 말하고 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 흑묘백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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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와 세상
    2022-11-10
  • [박동철 장로] 이태원 참사가 교회에 던져주는 메시지
    지난 주말 저녁 소위 ‘핼로윈데이 축제’를 맞아 서울 이태원 거리에서 많은 인파가 밀리면서 압사사고가 발생, 2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먼저 참사에 희생된 유족들에게 애도와 위로를 드린다. 예상치 못한 참사, 국가적 애도 기간이 정해지고 온 국민의 애도와 함께 사고 수습이 잘되길 바란다. 이날 참사는 핼로윈데이라고 하는 주최 없는 축제의 장이 거리에서 열리고 수많은 군중이 몰리면서 질서와 통제의 기능을 잃고 발생한 사고이다. 경찰 등 공공질서가 잘못되었던 부분도 있어 조사도 진행 중이다. 참 안타깝고 아쉽고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없다. 슬픈 사고이긴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핼로윈데이가 뭔지, 그리고 교회가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는듯하다. 핼로윈데이의 유래는 고대 유럽에서 세력이 강했던 부족국가 켈트족이 지키는 한해의 마지막 날 (그들이 지키는 일 년을 10개월), 즉 10월의 마지막 날이 핼로윈데이다. 켈트족은 핼로윈데이에 그들의 조상을 섬기는 날로 정해 귀신 분장을 하여 사람을 찾아다니며 먹을 것을 요구한다. 소위 귀신놀이하는 사탄 문화로 발전했다고 볼수있다. 켈트족들이 살았던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족들이 1940년대 미국으로 대거 이민하면서 점차 미국의 지배문화가 되었다고 한다. 미국 전 대륙에 전파된 핼로윈문화는 최근 우리나라를 비롯 온 세계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최근 코로나 팬데믹과 함께 움츠려있던 여러 축제가 갑자기 늘어나면서 이러한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핼로윈데이가 지키는 10월 마지막 날은 우리 교회가 지키는 종교개혁주일이다. 올해는 종교개혁 505주년을 맞아 지난주 기념주일을 지키면서 할로인 축제의 사고에 무거운 마음을 가졌다. 우리에게 종교개혁이란 500여 년 전 로마 가톨릭에 의해 기독교신앙이 우상화되고 타락해버린데 대해 새로운 개혁의 순교적 도전이었다. 루터 칼빈 등의 종교개혁가들의 외침이 있었기에 오늘날 바른 복음을 지킬 수 있는 복음주의 세계 개신교가 부흥하게 된 것이다. 종교개혁 주일에 우리에게 발생한 참사는 오늘날 교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너무도 큰 것만 같다. 문화가 넘쳐나는 문화 부흥시대 복음이 문화의 옷을 입고 전파된다. 그러나 한 곳에는 핼로윈과 같은 사탄의 문화가 복음의 현장에 무차별 침투하여 영성을 흐리게 하고 있다. 온갖 세상의 문화들이 교회의 벽을 넘어 교회를 점령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교회를 섬기며 예수의 참 문화를 지켜내려고 하지만 몸부림에 머물러있고 이러한 허무한 문화들이 대중을 넘어 교회로 향해 물밀듯이 들어오고 있다. 복음주의 기독교가 강한 미국에서 왜 핼로윈축제가 크게 유행할까요. 오늘 우리에게 역으로 던지는 강한 메시지임에 틀림없다고 본다. 미국의 한 교회가 핼로윈데이에 맞춰 할렐루야데이로 열어 지키려고 했지만 소위 흥행이 전혀 되지 않았다고 한다. 교회가 사탄이 즐기는 문화의 교회 공격을 막아내는 비상적 그리고 공격적 사명의 회복이 필요한때이다. 말씀과 기도 그리고 그곳에서 건져올린 복음의 옷을 입은 문화의 창조가 필요하다. 그리고 다음 세대들이 세상에서 범람하고 교회로 밀려오는 사탄의 문화를 경계하는 영적 지혜를 발하도록 교회가 더욱 사명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사탄의 문화는 빛이 없다. 세상을 어둡게 한다. 영적 찬란한 빛을 발하는 복음의 문화를 가르치고 전파해야 하는 사명을 더욱 느끼게 하는 종교개혁 주간의 슬프고 슬픈 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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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2
  • [특별기고] 교회 연합과 교회법적 관점에서 본 목사·장로직 여성 임직 문제
    지난 72회기 고신총회는 여성안수에 대한 연구 청원을 기각했다. 필자가 기억하기로 이 청원은 역대 두 번째 청원이다.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이 높다. 우리 교단 역사 중 최고치에 이른 듯 보인다. 그래서 말들이 많다. 72회기 총회 때는 역대 어느 총회에서도 볼 수 없었던 여성 안수 허락에 대한 피케팅이 있었다. 여성임직 허락에 대한 청원도 아니고, 연구에 대한 청원인데 연구를 못하게 할 필요가 있냐는 말도 있다. 반대로 한국장로교회 내에서 고신이 가진 정체성과 영향력이 있는데 이런 결정은 파장이 크다는 의견도 있다. 여성 임직 문제는 그 자체로 첨예한 대립을 예고하며, 교회사적으로도 그래왔다. 어떤 신학적 패러다임을 배경으로 하던지 이미 양쪽은 성경적, 신학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으며, 서로의 주장은 공격하며, 자신의 주장은 옹호한다. 토론과 논쟁에 비교적 열려 있다고 평가받는 서방에서도 이미 갈등과 반목은 불가피했다. 전 세계적으로 이미 여러 종류의 심각한 분열이 일어났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생채기 수준을 넘어선 상처로 아픔을 겪고 있다. 우리 교단도 이런 과정으로 들어갈까 심히 염려된다. 어쩌면 문을 열고 이미 들어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한 가지를 꼭 염두에 두면 좋겠다. 우리 자매교회 중 하나인 남아 개혁교회는 공식적으로 분열 없이 수 십 년째 논쟁하고 있다. 갈등이 깊다는 말도 되지만, 교회 연합과 하나 됨을 지키기 위해 그만큼 노력하고 있다는 말도 된다. 또 다른 자매교회인 화란 해방파의 진행과정과 비교하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에게도 이런 마음이 필요하다. 결정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분노하지 말자. 이 덕목은 우선 여성 임직 찬성론자에게 요구될 것이다. 상대방의 주장이 비(혹은 반)성경적, 혹은 자유주의적 신학이라 화내지 말자. 이 덕목은 우선 여성 임직 반대론자에게 요구될 것이다. 성경과 신앙고백의 토대 위에서 치밀하게 연구하고, 치열하게 논쟁하되 주 안에서 서로를 온유한 심정으로 대하자. 그리고 끝까지 하나 됨을 지키자. 이런 각오와 결단이 없다면 연구와 논쟁을 그냥 포기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필자는 개인적으로 목자 장로직 여성 임직 허용을 반대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여성 임직에 관한 논의에 다시금 신학적,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인다(이 말을 오해하지 말길 바란다). 모두가 성경과 신학적 근거로 대립하기 때문이다. 여성 임직을 결정한 교회의 예를 보면 결국 지지하는 다수를 확보한 찬성 쪽의 성경과 신학적 근거가 채택되었다. 따라서 이 글에서 필자는, 앞서 언급한 덕목을 염두에 두면서 여성 임직 연구와 논쟁 시에 고려해야 할 교회연합 및 교회법적 관점에서 생각해 볼 문제를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다시 말하지만, 여성 임직을 반대하는 입장에서이다. 첫째, 여성 임직 문제가 결코 교회 연합을 깨트릴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여성 임직 자체만의 문제는 아니었지만 이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여러 결정으로 인해 세계의 많은 교회가 지역 교회 단위, 노회 단위, 총회 단위, 그리고 연합 기구 단위의 분열을 이미 겪었다. 최근 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 있었던 국제 개혁교회 협의회(ICRC) 총회는 우리 자매 교회인 화란 해방파 교회의 ICRC 회원 자격을 박탈했다. 직전 총회(2017년, 캐나다)에서 정지되었던 회원권을 최종적으로 박탈한 것이다. 해방파 교회의 회원권 문제는 해방파 교회를 모교회로 삼는 캐나다 개혁교회의 발의(이들이 그만큼 심각하게 이 사안을 고려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한부선 선교사를 파송했던 미국 정통 장로교회의 동의로 채택된 안건이었는데, 이번 ICRC 총회의 주요 안건 중 하나였다. 우리 교단 대표로 참석했던 후배 목사에게 들은 바로는 이 논의는 아주 조용하고 무거운 분위기에서 진행되었으며, 해방파 교회 대표의 여성 임직 문제에 대한 변호 발언과 이에 대한 회원교회들의 의견을 나눈 후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가결에 대해 각 회원교회 대표가 의사 결정을 ‘Yes’라고 말하는 다수의 목소리에서는 심지어 떨림이 감지되기도 했으며, 해방파뿐 아니라 기타 회원교회의 모든 대표가 침울한 슬픔을 표현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몸이 나뉘고, 교회의 연합이 깨어진 셈이다. 해방파는 자신들의 결정을 변호하는 발언 기회에 여성 임직 문제가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그리고 교회 연합적으로 ICRC에서 퇴출될 만큼의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는 논지의 발언을 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ICRC에 머무르고 싶다는 희망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결정을 지지했다. 마찬가지로 보수 신학 진영의 여성 임직 찬성론자들 역시 이 문제를 성경의 권위 및 진리 문제와는 별개로, 또한 교회를 혼란에 빠트리거나 분열을 야기할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는 입장을 표명한다. 하지만 결국 그동안 ‘이 작은 문제’를 교회의 분열보다 앞세운 셈이다. 다시 말하면, ‘이 작은 문제’가 교회를 찢어 놓은 것이다! 이번 ICRC의 결정은 우리에게 몇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 교단은 WCC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그토록 경계하고 반대하지 않는가? (필자도 동일한 생각이다.) 그렇다면 WCC 대척점에 서 있는 ICRC 교회와의 연합에는 어떤 입장을 견지해야 하는가? 우리 교단은 처음부터 WCC와 그에 준하는 국제기구에 가입된 교회와는 교류를 하지 않고 경계해 왔다. 비록 그 개념이 약했다고 할지라도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 때문이었다. WCC는 경계하면서, ICRC와의 연합은 고려하지 않는 입장은 우리 스스로를 모순 가운데 두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ICRC 가입 교회들과의 교제와 연합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우리가 이끌고, 또 지켜온 같은 신앙고백 안에서의 하나 됨에 분열을 야기해서는 안 된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이런 신학적 논의에 자매 교회들의 견해를 얼마나 열린 마음으로 듣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자매 관계에서는 총회의 회의록과 중요 결정사항을 교환한다. 정기적으로 각 교회 총회를 방문하여 서로 교제를 나눈다. 신앙고백이 일치하기 때문에 서로의 결정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배우며, 또 권면하는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서로의 목사를 청빙할 수도 있다. 가르치고 고백하는 내용이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작고하신 고 허순길 교수가 우리 자매교회인 호주 자유 개혁교회의 목사로 청빙 된 아름다운 개혁주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자매 교회들과 이런 교제를 가지지 못하는 것은 우리 교회가 여전히 성숙하지 못했다는 또 하나의 증거가 아닌가? 이번 총회에서 기각된 우리 신앙고백서 34-35장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전부 다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ICRC에 속한 대다수의 장로교회들은 34-35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문제에 대해 이견이 없을 정도이다. 아주 명쾌하다. 하지만, 우리 교단은 34-35장을 삽입할 때도, 그리고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고 있는 지금도 자매 교회들의 의견을 들은 적이 없다. 한때 우리 교단과 교제의 폭을 넓히고, 신학적 일치를 이루며, 합동까지 바라보고 있던 합신 교단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명확한데 말이다. 만약 우리 교단이 여성 임직 연구와 논쟁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면, 치밀하고 치열하게 시행하되 교회의 연합과 하나 됨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길 바란다. 자매 교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과의 논의도 확대하며, 함께 걸으려고 하는 유연한 교회 연합적 스탠스가 필요하다. 급하게 서두르지 말자! 둘째, 또한 우리는 새로운 교회 질서(법, 규례)를 만드는 일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흔히들 교회의 권세 중 하나로 ‘입법권’을 말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통치하시는 교회는 말씀과 신앙고백의 빛 아래에서 질서(혹은 법과 규례)를 만들 권세가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말씀의 지배 아래에서여야만 한다. 말씀의 원리를 따라 교회에 필요한 최소한의 질서, 최소한의 법과 규례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교회 질서’나 ‘교회법’이 ‘교회법전’화 되어 교회를 지배하자 종교개혁의 문이 열렸다. 교회에게 법과 질서가 필요한 것이지, 법과 질서에게 교회가 필요한 것이 아닌데 말이다. 물론 교회 질서와 법은 유동적이다. 하지만, 말씀의 원리를 무시한 채 시대사조나 요구에 따라 교회가 질서와 법을 적극적으로 만들고, 교회법적인 결정을 쉽게 내렸을 때 교회는 언제나 그 법이 가지고 오는 필연적인 무거운 멍에를 실제로 짊어져야 했다. 특히 여성 임직 문제는 직분의 문제이다. 공식적으로 온라인 예배(?)를 그토록 경계했던 우리 교단이 예배의 핵심과 직결된 직분의 문을 쉽게 여는 것에 대해 경계심이 없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화란 해방파의 예를 들어 보자. 현재 알려진 바에 따르면, 화란 해방파에서는 여성 임직을 결정한 후 동성애자를 교회에 허용하는 문제에 대한 연구 위원회를 구성했다고 한다. 은퇴한 윤리학 교수 한 명은 동성애 허용 가능성을 지지하는 입장의 책을 지난 주간에 출판했고, 실제 지역 교회에서도 동성애 커플들에 대한 치리가 이루어지지 않으며 심지어 성찬에 참여 시키는 예도 있다고 한다. 비록 여성 임직 찬성론자들이 여성 임직-동성애 허용은 별개의 문제라 주장하지만 여러 많은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도 우리는 이 두 문제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아왔다. 뿐만 아니라 해방파는 2020년 총회에서 WCC에 가입하기 위한 준비 위원회를 구성했다고 한다. 우리 관점으로는 2022년에 해방파는 ICRC에 머무르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하면서도 이미 2020년에는 반대편으로 가려는 다른 시도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새로운 질서(법과 규례)를 받아들이면, 이를 뒤따르는 무거운 멍에를 받아들이는 책임을 져야 한다. 누가 이 멍에를 맬 것인가? 가깝게는 화란 해방파의 예를 보면서도 동성애 관련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인가? 우리도 우리가 그토록 경계했던 WCC 편으로 이제 옮겨갈 것인가? 우리는 이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도 필자에게는 염려스러운 것이 하나 있다. 이런 글들이 오히려 연구와 논쟁을 가속화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 말이다. 하지만, 결국 이 연구와 논쟁을 피할 수 없다면 성경적, 신앙 고백적, 예배적, 교회 연합적, 교회법적 등, 모든 관계를 치밀하게 고려하고 치열하게 토론하여 한국교회와 세계교회 앞에 제대로 정리된 보고서를 내어놓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성경과 신앙고백을 따라 여성 임직을 허용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늘의 지혜가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길 희망한다. 무엇보다 열린 마음으로 자매 교회와 함께 의논하여 하나 됨에 상처를 내는 일이 없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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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27
  • [박동철 장로] 정치 언론권력과 손잡는 이단 집단들
    지난 7월 8일 일본 나라현 야마토사이다이시 광장에서 유세를 하다 발생한 아베 전 총리의 저격사건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총격으로 그 자리서 사망한 아베는 일본 총리로서는 8년 9개월 재임한 장수 총리다. 보수 자민당의 사실상 대부였기에 더욱 충격이 컸다. 총격의 원인이 또한 충격을 던졌다. 범인 야마가미는 어머니가 통일교신자인데 재산을 모두 통일교에 바쳐 가산을 탕진했는데 아베총리가 통일교를 지원하고 있다는 게 암살의 동기였다. 일본 열도는 발칵 뒤집혔고 이런 여러 연유와 반 아베 여론으로 결국 아베의 장례는 두 달 넘어서 국장으로 치렀다. 범인의 진술은 아베는 총리를 역임한 외조부부터 통일교 교주 문선명을 추앙하고 문선명의 투옥시 미국을 통해 석방운동까지 했다고 했다. 이단 통일교가 정치권력과 얽혀 비극을 자아낸 사례다. 최근 우리나라 메이저 언론 신문에 가끔씩 나오는 전면광고에 “온 천하는 잠잠하라”는 대형문구와 함께 전면광고를 내고 홍보전을 펴는 이단 광고가 게시됐다. 그 광고주를 추적한 한 단체는 은혜로교회라는 이단 기독교가 거액으로 게시한 광고임을 판명했다. 은혜로교회라는 이단은 교인들을 무차별 학대하며 태평양 섬으로 집단 이주시켜 폭행을 일삼고 헌금을 받아낸 사실이 드러났다. 가히 있을 수 없는 일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이 뿐인가. 지금도 매주 추수꾼이라는 신천지 이단 신도들이 기존 교회를 알게 모르게 드나들고 있다. 최근 코로나 때 방역과 관련 국민적 비난의 대상이 되자 전국일간지 신문에 연일 고액광고를 게재하고 있다. 필자는 오랫동안 신문사 재직한바 있어 관계자를 만나면 이단 종교의 폐해를 설명하고 광고수임을 못할 것을 설명한 바 있다. 그렇지만 신문이란 회사는 진리를 알 수 없고 수익을 외면할 수 없는 입장이라 무시할 수 없는 사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 신문사의 반사회적 이단종교의 광고를 싣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 다른 흥미를 끄는 이단의 사건이 있다. 여신도에 대한 상습적 성폭행으로 이름난 '기독교복음선교회'라고 하는 JMS정명석이란 자가 성폭행범으로 복역하다 출소한지 얼마 안 되어 또다시 여신도를 성폭행하여 구속된 사건이 최근 있었다. 이 뿐이겠는가. 언제든 우리의 신앙 주변에는 악령의 세력들이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고 있다. 이단의 문제는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올 때까지 우리를 괴롭히게 될 것이다. 먼 옛날 초대 시대에도 '바른 복음과 다른 복음'의 논쟁이 끝없이 있어왔음을 성경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문제는 최근 우리 주변에서 나타나는 이단들이 교세 확장을 위해 움직이는 양태가 예사롭지 않음을 감지할 수 있다. 이단 세력들은 세 확장을 위해 언론광고를 통해서도 선전하고 있지만 선거철만 되면 표를 찾는 정치집단에 파고들어 정치권력을 만드는데 힘을 보태고 있다. 그리고 교묘히 정치권력의 힘을 이용하려는 움직임이 크게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큰 문제를 일으킬 소지를 안고 있다. 정부에서도 종교로 인한 사회혼란과 폐해를 막기 위해 최근 실태조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의 이단종교의 감시는 한계가 있다. 말씀에 순종하며 복음의 사명을 다하고자 하는 교회는 더욱 감시에 나서고 대적하는 기도와 반응이 필요하다. 우리의 무관심이 커질 때 이단은 급속도로 성장함을 오늘날 목도하고 있다. 이단은 분명 오직 예수복음의 교회를 무력화하는데 혈안이다. 그리고 사회에 온갖 폐해를 불러왔음을 지금껏 경험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요한일서의 주님 말씀을 다시 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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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21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19: 중동(中東) 동남(東南)아시아 등의 지역이름의 유래와 고찰
    I. 서언(序言) “내가하고 있는 말들은 과연 바르게 표현하고 있는 말인가?”생활용어를 정리하고 논해보면서 한 번씩 필자 자신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그러면서 “바르게 말하는 것이 이렇게 어렵구나.” 라는 생각을 가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본 호에서 논하고자 하는 명칭 용어들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위의 말들은 사전과 국제적으로 사용되는 명칭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는 말들이다. 그러나 그 유래와 민족적인 자존감에서 본다면 어딘가 모르게 자연스럽지 못한 말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위의 명칭들의 유래와 그 사용처와 문제점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논하면 다음과 같다. II. 세계의 각 지역 이름들의 고찰 1. 아시아권의 지역 이름들의 고찰: 먼저 아시아권의 지역 명칭들을 보면, 중동(中東(중동)), 극동(極東(극동)), 원동(遠東), 근동(近東), 또한 동아시아(東Asia), 동남아시아(東南Asia), 서남 아시아(西南Asia), 중앙아시아(中央Asia) 등의 여러 지역 이름들이 있다. 하지만, 문제는 아시아권에 대한 이러한 지역 명칭들이 한 반도의 위치와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전혀 맞지 않는 말이라는 데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대한민국은 극동지역이 아니라 우리나라가 중심이다. 또한 동남아시아 지역인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등은 우리나라의 위치에서 보면 동남쪽이 아니라 서남쪽에 위치해 있다. 근동지역으로 불리어지는 터키, 시리아,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 등은 근동이 아니라 원동이다. 중동지역도 마찬가지이다. 중동은 근동과 극동의 중간 지역을 일컫는 말로서 이라크, 이란, 아프가니스탄 등의 나라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곳도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중동이 아니다. 2. 세계지도를 보는 관점에 따른 지역이름의 차이 : 앞의 문제 제기처럼 왜 우리나라와는 전혀 관계없는 명칭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는 먼저 세계의 지도를 누가 어떻게 어떤 관점에서 그리느냐에 따라 그 시각과 인식이 달라진다. 또 그와 동시에 지역에 대한 명칭도 달라진다. 이런 면에서 세계 지도를 보면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유렵과 아메리카 대륙을 중심으로 한 지도이다. 이는 과거에 영국을 중심한 서방국가들의 영향력이 세상에서 가장 컸고, 또 그들의 관점에서 지도를 그린 것이 현제 세계의 대다수 국가와 U.N이 공식화 하고 있는 지도이다. 두 번째는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을 중심으로 한 지도이다. 여기에는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세계의 중심이란 관점에서 그린 지도이다. 우리가 주로 사용하는 지도는 바로 이 지도이며, 현재 중국과 일본에서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다음 세 번째는 오세아니아 주를 포함한 남반구를 중심으로 한 지구를 뒤집어 놓은 것 같은 거꾸로 된 지도가 있다. 이는 이 세상을 그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며, 그들을 중심으로 보면서 그린 지도이다. 이로 볼 때 세계 모든 민족들은 지도 하나를 놓고도 모두 자신들의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지역 이름을 붙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III . 제언(提言(제언))과 결 어(結語) 지도를 보는 관점에 따라 정해진 지역의 명칭들을 다시 보면, 첫 번째 지도를 그린 유렵인들은 자신들을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고, 각 지역을 저들의 관점에서 나누어서 붙였다. 특히 이런 명칭들이 구체화 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과 싸우던 영국이 아시아를 세지역으로 구분하면서 부터이다. 예를 들면, 그들의 식민지 국가였든 인도를 중심으로 인도가 중동, 인도 서쪽을 근동, 우리나라를 극동으로 분류 했다. 지금은 그 때 그들의 개념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그 기본적인 분류의 개념은 그대로 남아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 볼 때에는 어떤 문제성이 있어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나라 중심이 아니라고 배격한다면 오히려 그것은 너무 국수주의적인 발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우리를“동방예의지국”이나 “동방의 떠오르는 태양”같은 나라로 불리어 지는 것은 명칭 때문에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명칭 용어들에는 문제점이 있다. 그것은 지역을 이렇게 나눈 이들의 인식이다. 이들은 당시 자신들을 중심으로 보면서 그들의 지역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문명의 수준이 떨어진다고 생각을 했다. 이런 관점에서 중동, 원동,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란 명칭은 원래는 식민사관에서 오는 다소 비하하는 의미의 말이었든 것이다. 그렇다고 이 명칭들을 사용하지 말라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단지 그 유래와 뜻을 바로 알자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수정 보완하거나 다른 용어로 교체함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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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19
  • [오성한 목사] 바른믿음 (1)
    T.L 오스본이 쓴 “하나님의 큰 그림”이라는 책이 있다. 하나님은 큰 그림을 가지고 계신다. 완벽한 창조의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그런데 사단에 의해 인간이 속았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속량의 그림을 가지셨다. 온전한 복음, 새로운 피조물의 복음, 회복복음으로 하나님이 가지신 큰 그림을 성취하셨다. 하나님의 큰 그림의 결론이 무엇인가? 믿는 자에게 온전한 회복의 복음으로 온전히 회복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에는 이 큰 그림이 있다. 하나님은 이 목적을 가지고 세상을 움직이고 계신다. 믿음의 핵심인 죄인이 의인이 된 것을 믿어야 한다. 믿음의 핵심이 무엇이냐? 죄인이 의인이 되었다 것이다. 그런데 의인으로 끝나면 안 된다. 의인이 된 이유는 임마누엘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이 살고 싶어서 임마누엘 하셨다. 죄인이 의인이 되었다는 것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5:10-13) 믿는 자안에는 아들이 있다. 임마누엘을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다.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는 증거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여기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들을 구원해 두었다. 내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이루어 놓았다.”고 하시는데 그 말을 안 믿으니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여기는 것이다. 여러분을 거짓말하는 자로 보는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는가?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여기니까 예수 믿지 않으면 하나님은 “네가 나를 거짓말쟁이로 여기느냐?”라고 하신다. 믿는 자에게는 증거가 있다. 믿는 자안에 아들이 있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는데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 생명이다. 결과적으로 영생이 있음을 믿게 하시려고 성경이 쓰였다. 의인으로 만드신 이유는 아들이 있으시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바른 믿음에서 우리는 출발해야 한다. 나는 전에는 성령충만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였다. 몰라서 그렇게 생각했다. 귀하고 중요한 사실은 내가 성령충만하다는 믿음의 확신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굉장히 힘든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굉장히 힘이 든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또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 성령님께서 부족하게 계신 것이 아니다. 완벽하게 계신다. 이 사실을 믿고 완벽한 성령님이 내 안에 함께 하심을 믿고 나는 성령의 사람이 되었음을 믿는 믿음에서 신앙생활이 출발해야 한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라고 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주님이 주시는 물을 마신 자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샘물이 영생하도록 솟아난다. 어떤 선행을 한 후에 샘이 솟아나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을 때, 주님이 주는 물을 마실 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은 터진 것이다. 지금도 예수를 믿는 당신 안에서는 영생하도록 샘물이 솟아오르고 있다. 이 사실을 아는 믿음에서 신앙생활을 출발해야 한다. 새벽기도를 많이 해야 어느 날 샘물이 솟아오른다고 하지 않았다. 예수를 믿은 후 수련을 닦아야 샘물이 솟아난다고 하지 않았다. 오늘도 당신 안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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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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