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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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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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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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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8
  • [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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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3
  • [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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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8
  • [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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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실시간 칼럼 기사

  • [신재철 목사] 생쥐와 사투 : 내 거 먹지 마!
    “이제 일은 그만하고 사역만 집중하지 않겠니?”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나는 순종했다. 지금까지 치열하게 일하며 버텼지만, 복학 후 이제는 일하지 않고 버티기로. 어차피 버티기 인생은 매한가지다. 급할 때면 전단지 돌리기 같은 일회성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하지만 일에 묶이지 않기로 결심했다. 스물둘이라는 아주 어린 나이에 교육전도사를 시작했고 작지만 사례만으로 살아보기로 결단한 것이다. 소위 생계형 전도사가 된 것이다. 일할 때도 버거웠지만 순종은 내 삶을 더 퍽퍽하게 만들었다. 생계의 위협을 더욱 체감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대학생이 된 동생과 사는 집은 두 칸의 방이 있다. 각자의 공간을 갖게 되었으니 프라이빗(private)한 거주공간을 갖게 된 듯하다. 하지만 그야말로 허름한 옛날 집이다. 입식 부엌? 현대식 주방이라고 하던데 방문을 열고 나가면 마감이 덜 된 시멘트 바닥에 수도꼭지가 있어 머리도 감고 설거지도 한다. 여름이면 큰 대야에 물을 받아 쭈그리고 앉아 샤워도 가능하다. 작은 마당을 지나 밖으로 나가면 공용화장실을 사용한다. 그다지 나쁘지 않다. 하지만 딱히 좋지도 않다. “하나님, 이게 뭐에요.” 사역도 수업도 없는 조용한 오후. 오랜만의 여유로 빈방에 누웠다. 밖은 오지게 더운데 바닥의 서늘함이 작은 위로가 되어 바닥과 더 밀착해 본다. 나름 대학 생활 로망이 있었다. 중산층은 된다고 생각했기에 부모님이 뽑아주는 아반떼 승용차를 타고 서점에서 맘에 드는 책과 음반을 마음껏 집어 들며 살아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집은 망했고 부모님은 우리 형제를 도울 여력이 전혀 없었다. 동생은 아르바이트로 용돈 벌이를 하고 나는 온갖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신세 한탄으로 생각이 많아지던 시간, 어느새 잠이 들게 된다. 「덜그럭, 덜그럭」 “너였구나?” 작은 소리였지만 낮잠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현대식 주방에서 소리가 났다. 최근 주방 청소할 때 물과 함께 쓸려 내려오는 쥐똥. 남은 음식과 비누를 갉아 먹는 그 녀석. 나는 이놈에게 몹시 화가 나 있었다. 부족한 살림에 손을 대는 흉악한 녀석이다. 어렵게 얻어온 음식에 이 녀석이 먼저 입을 대면 나는 먹을 수가 없다. 비누는 왜 먹는 걸까? 쪼그려 앉아 세수할 때면 선명한 이빨 자국이 비누에서 보인다. ‘에잇!’ 짜증 섞인 소리를 내어보지만 아까워서 음식처럼 버리지는 못한다. 물로 대강 씻어내고 거품을 낸 후 찝찝한 세수를 마무리한다. 흔적만 있고 대면한 적 없던 그 원수가 드디어 나타났다. 내 키보다 작은 방문을 조용히 밀어 주방을 내다본다. 작은 쥐색의 생물. 생쥐다. 그간 얽힌 악연이 아니라면 뒤태가 귀엽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적’이다. 취향도 독특하지. 얼마나 맛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비누를 정신없이 갉아대고 있다. 군대용어로 기도비닉(企圖秘匿)이라 했던가. ‘살금살금’ 최선을 다해 은밀히 접근하다. 계획은 없다. 그냥 복수의 열망으로 다가간다. 나는 재빠르게 손을 뻗어 그 아이의 몸체를 집어 들었다. ‘아차!’ 잡힌 녀석은 급박한 상황에 고개를 돌려대며 내 손을 물려고 한다. 물리면 내가 더 타격이 클 수 있다는 생각에 더 큰 힘으로 움켜쥐었다. ‘찌~익’ 쥐가 고통스러운지 하늘을 향해 고함을 지른다. 막상 원수를 포획하고 나니 어찌할 줄 모르겠다. ‘묶어서 쓰레기통에 버려? 땅에 묻어?’ 길게 고민할 상황은 아니었기에 일단 밖으로 나왔다. 눈앞에 공터가 보인다. 팔을 크게 몇 바퀴 돌려 빈 공터에 던져버렸다. 땅에 내동댕이쳐진 원수는 기절했는지 잠시 움직임이 없다가 벌떡 일어나 잽싸게 도망가버린다. 살려 보낸 것이 유효했을까? 동네 쥐들에게 나의 흉폭함이 전해졌는지 알 수 없지만 더 이상 나의 식품에 손대는 불청객은 나타나지 않았다. 비누도 매끈함을 유지하게 되었다. 한낮의 소동은 그렇게 나의 승리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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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19
  • [박봉석 목사] 변화되는 것인가? 연기가 느는 것인가?
    그리스도인이라 이름 하는 사람들 중에 그런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 회사에 하루 종일 일을 하는 것은 피곤하지 않고 또 하루 종일 야외에서 놀다 오는 것은 별로 피곤하지 않은데 이상하게 주일에 교회에 다녀오면 피곤합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혼신의 힘을 다해서 예배를 하고 봉사를 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라면 또 다른 이유는 없는 것일까요? 우리는 교회에 오면 절대 내 단점은 보여서는 안 되고 내가 좋은 신앙의 사람이고 거룩한 사람인 것만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오면 내 원래의 모습은 감추고 가면을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피곤합니다. 나의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 가면을 쓴 모습으로 사람을 대하려고 하니 보통 때 느끼지 못하는 피곤함과 스트레스를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변화되는 것과 연기가 느는 것을 혼동할 수 있습니다. 완벽한 가면을 쓰고 연기한 것을 변화된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것은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가장 경건하다고 자타가 공인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서 자주 “외식하는 자들아!”라고 말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외식’이라는 말의 원어는 “가면을 쓰다.”, “위선적 태도를 취하다.”의 뜻입니다. 말하자면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겉과 속이 다른 가면을 쓴 모습은 아무리 경건한 모습이라고 하더라도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심을 외식이라는 단어로 예수님은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변화란 거룩한 것처럼 연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내 중심이 새로워지고 그 중심의 변화를 따라서 내 행동과 삶이 달라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연기학원에 등록한 것이 아니고 변화의 영이신 성령님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 이제 혹시 연기하는 것과 같은 가면을 쓴 모습의 신앙생활이었다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진정으로 내 중심으로부터의 변화된 모습을 열망하며 성령의 은혜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지금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연약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부족하고 연약하기에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스스로 용납할 수 있는 것이 겸손의 시작입니다. 때로는 내가 너무 싫어서 속상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 좋은 점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향한 나의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내 스스로를 용납하지 못하면 자꾸만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보이기 싫어서 가면을 쓰게 되고 그래서 외식하는 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족함과 연약함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인 교회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주님께서 이 죄 많은 인생들을 향하여서 그러셨던 것처럼 부족함과 연약함을 용납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부족함과 연약함을 서로 서로 내어 놓을 수 있는 편안한 공동체가 되어야 하겠고, 그리고 그것을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보듬어 안고 어루만져주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내 부족함과 연약함을 솔직하게 내어 놓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그 모습 그대로 받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변화의 체험을 하게 할 것입니다. 부족함과 연약함 때문에 가면을 쓰지 마십시오.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저절로 겸손해지게 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찾게 할 것이며, 그리고 이 모습 이대로 나를 받아주시고 만나주시는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기회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성령님은 완벽한 연기자 안에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고 연약해도 내 모습 그대로 겸손히 내어놓고 은혜를 구할 줄 아는 사람 안에 역사하는 영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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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19
  • [박동철 장로] 한국인보다 한글을 더욱 사랑한 제임스 게일 선교사
    지난 10월 9일(주일)은 ‘제576돌 한글날’이었다. 다음날 월요일은 대체공휴일로 마침 맑은 가을 날씨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휴일을 즐겼다. 일부에서는 한글날을 법정 공휴일로 해야하나, 대체공휴일로 해야하나하는 소리도 있었다. 공휴일로 하는 국가적 기념일은 큰 의미가 있고 기려야할 뜻이 있다. 바로 한글날은 7천만 한민족에게 함께 쓰는 어문(글자)이 있게한 한글창제일을 기리고 기념하는 높은 뜻이 있다. 우리 역사의 영웅이신 세종대왕께서 1446년 ‘나랏 말씀이 중국과 달라 백성이 쉽게 쓰게’ 한글을 창제하시고 선포하심으로써 우리 문자가 있는 위대한 나라가 되었다. 세종대왕이 창제하신 한글은 위대한 문자이었음에도 백성은 쓰지 않았다. 어문을 쓰는 양반과 선비는 한자의 사대문화에 젖어 있었고 서민대중이 한글을 일부 배워 쓰기도 했지만 문맹의 백성이 너무 많았다. 우리의 한글은 조선의 말기 일정시대 1927년 9월 마지막 날 조선어연구회가 ‘가갸날’이란 모음순서 이름으로 한글날을 정했다. 이듬해 크고 으뜸의 뜻을 담아 ‘한글날’로 이름 지어 기념했다고 기록 돼 있다. 이 긴 역사 속에 한글이 빛을 보게 된 것은 벽안의 서양인에 의해서다. 1888년 캐나다에서 조선 땅에 파송된 복음의 전사 제임스 S. 게일 선교사가 40년 동안 조선 땅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한글을 갈고 닦아 온 백성이 쓰게 하고 세계에 전하는 위대한 일을 하셨다. 제576돌 한글날을 앞두고 지난 6일(목) 게일 선교사의 한글사랑 발자취를 찾아보는 심포지엄이 있었다. 6일 저녁, 창원극동방송에서 경남기독문화원과 창원시기독교장로총연합회가 공동으로 심포지엄의 자리를 만들고 발제와 연찬 그리고 토론의 진지한 시간을 가졌다. 발제를 맡은 부산경남기독교역사연구회 회장이신 박시영 목사는 게일 선교사의 선교 사역 중에 한글의 우수성을 찾아내고 최초로 1897년 한영사전과 신구약 번역본 완성 등 조선 땅의 한글 대중화에 엄청난 업적을 이룬 선교사의 발자취를 정리했다. 가히 놀라우리 만큼 게일의 한글사랑이 지대했다. 그래서 조선백성들이 비로소 한글로 성경을 읽고 복음의 지경이 넓혀져 왔음을 알 수 있었다. 게일은 조선 땅에 발을 딛고 먼저 한글을 깨우치고 4년 만에 한글 체계화 기초가 되는 사과지남(辭課指南)이라고 하는 한글 어문법을 완성했다. 그리고 복음을 위한 큰 사역 중 온 세계인들이 읽고 있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한글로 번역, 백성들이 읽게 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1907년 그 유명한 평양 대부흥의 주인공 길선주 목사가 게일이 번역한 천로역정을 읽는 중 불같은 성령의 뜨거움을 체험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며 장대현교회 부흥을 일게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초대교회 선교사의 성경번역은 논란이 있다. 최초 대동강을 건너고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 후 로스선교사가 최초로 중국성경을 한글로 옮겼다는 기록이 우세하다. 그러나 게일선교사가 한글을 체계화하고 신구약 완역과 각종 서양기독서적을 한글 번역했으며 우리의 민족소설 구운몽 춘향전 등 고전을 영역해서 서양에 전한 업적은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 특별한 일은 영어의 The God을 ‘하나님’으로 한글 표기한 분이 게일 선교사이다.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한글의 대부 최현배 선생은 게일 선교사야말로 가히 우리 한글을 대중화하고 세계화한 일등공신이라고 평가했다. 우리의 한글은 지금도 세계 속으로 흘러가면서 빛을 내고 있다. 인도네시아 찌아찌아 소수민족이 한글을 수입해 쓰고 있다. 우리나라 기자들과 인터뷰하면서 한글을 평가했다. 자기민족의 언어를 가장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세계 각국의 문자 중 한글이 최고였다고 했다. 또 다른 소수민족이 한글을 수입해 쓰려고 하고 있다. 한글은 세계 속의 글자다. 1997년 유네스코에 등재된 국보 70호인 한글은 지구촌 2900여 종 언어 중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다. 지금 뜨거운 세계 속 한류의 으뜸 되는 문화가 예사로 됐을까. 하나님이 예비하신 한민족의 위대한 한글이 땅 끝까지 복음전파의 수단과 큰 길이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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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12
  • [최호숙 목사] 삶 속에 나타나는 프레임의 법칙( The law of frame)
    프레임의 법칙(The law of frame)이란 무슨 의미인가? 프레임의 문자적인 뜻은 액자 틀, 올가미를 뜻한다. 이것을 의미적 해석으로 인간의 사상 생각을 말한다. ‘프레임의 법칙’이란 같은 상황이라도 어떠한 사고(思考)의 틀을 가지고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사람의 행동이 달라진다는 법칙이다. 젊은 아내가 아이를 낳다가 출혈이 심해 세상을 떠났다. 다행히 아이는 목숨을 건졌고 홀로 남은 남자는 아이를 애지중지 키웠다. 남자는 아이를 돌봐 줄 유모를 구하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아서 유모 대신 훈련이 잘 된 듬직한 개에게 아이를 돌보게 했는데 개는 생각보다 똑똑했으며 남자는 안심하고 아이를 둔 채로 외출도 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남자는 여느 때처럼 개에게 아이를 맡기고 잠시 집을 비웠다가 사정이 생겨 집으로 돌아왔다. 남자는 집으로 들어서며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주인의 목소리를 들은 개가 꼬리를 흔들며 밖으로 뛰어나왔는데 개의 몸이 피범벅이었다. 불길한 생각이 들어 남자는 재빨리 방문을 열어보았다. 아이는 보이지 않았고 방바닥과 벽이 온통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순간 남자는 극도로 흥분했다. “내가 없는 사이에 개가 아들을 물어 죽였구나” 이렇게 생각한 남자는 즉시 총을 꺼내 개를 쏴 죽였는데 바로 그 순간, 방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남자가 방으로 들어가 보니 침대 구석에 쪼그려 앉은 아이가 울먹이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당황한 남자는 밖으로 뛰쳐나와 죽은 개를 살펴보니 다리에 맹수에게 물린 이빨 자국이 선명했다. 곧이어 남자는 뒤뜰에서 개한테 물려 죽은 늑대의 시체를 발견했다. “오, 맙소사!” 남자는 자신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늑대와 혈투를 벌인, 충직한 개를 자기 손으로 쏴 죽이고 만 것이다. 잘못된 프레임의 결과 때문이다. 여대생이 밤에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면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술집에서 일하는 아가씨가 낮에 학교 다니면서 공부를 열심히 한다면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 같은 상황이지만 그 사람이 가진 사고의 틀에 따라서 행동이 달라질 것이다. 선교 여행 도중에 선교를 포기하고 돌아온 마가에 대하여 바울이 생각하는 프레임과 바나바가 생각하는 프레임이 서로 달랐다. 바나바 입장은 “그래도 함께 선교 여행에 동참시키자”였고, 바울의 입장은 “절대 참여 불가”였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다음 선교 여행을 위해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다투게 되었다. 그냥 보통으로 다툰 것이 아니라 성경은 심히 다투었다고 기록한다. (행 15:39) “sharp disagreement” 날카로운 칼로 서로를 찌르듯 말로 서로를 찌르며 다툰 것이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내 독선적인 사고 때문에 여러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때가 있다. 그래도 나는 내 생각이 옳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일 수 있다. 바울은 나신의 삶을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내가 나를 판단하여 의로운 100점짜리 인생이라고 판단해도 주님의 판단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고백하기를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4) 이제부터 우리의 삶은 누구를 정죄하거나 근거 없는 프레임을 씌워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일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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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05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18: 한글날에 비하적인 용어들을 고찰해본다
    기독교 용어 고찰 18: 한글날에 비하적인 용어들을 고찰해본다 I. 서언(序言) 세계에서 우리의 우수성은 자타가 모두 공인하는 바이다. 이중에서 우리의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세계 어떤 언어보다 탁월하기 때문에 한글날이 세계 국어의 날로 제정된 것은 정말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 많 큼 우리 언어는 세계 어디에서도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용어 중에는 외국인이 우리 민족을 비하하는 말들도 다수 있다. 이 사실을 모른 체 자주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오는 9일은 한글날이다. 이에 우리 스스로를 비하하는 용어들이 어떤 것이 있는지를 발췌하여 논하고자 한다. II. 비하 하는 용어들의 고찰 1. 중국인이 한국인을 비하하는 용어들 : 먼저 ‘한국인은...’으로 시작하는 말들이다. 예를 들면, ‘한국인은 셋만 모이면 배가 산으로 간다.’, ‘한국인은 공덕심(公德心)이 없다.’, ‘한국인은 단결심이 약하다.’는 등의 말은 모두 우리 한국인을 비하하는 말들이다. 물론 이런 말이 있을 정도로 우리민족에게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나라와 비교해 볼 때 그 정도의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비하적 말들은 그동안 우리나라를 지배해 왔든 중국이나 일본 등이 우리 민족이 열등하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유포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잘못된 그들의 문화 정책에서 유래된 말들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논한다면, 먼저 중국인들이 우리나라를 비하해서 한 말들 중에 ‘고린내’란 말이 있다. 뜻은 ‘발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를 말하는 것으로서 원래는 고려취(高麗臭)라고 했다. 그 유래를 보면, 과거 중국과 몽고가 우리나라를 지배하거나 국교를 맺고 있을 때, 사신들과 일행들이 중국에 도착하면, 자연히 발에는 많은 냄새가 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중국인들이 사신들의 발 냄새를 ‘고려인들의 냄새’라는 뜻의 고려취라고 했다. 문제는 이 말이 비하의 말인 줄도 모르고 ‘고린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뚱이’라는 말도 그러하다. 이 말은 옛날 중국에서 자신들의 나라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의미에서 중국, 중원, 중화라고 했고, 우리나라 같은 주변국은 이족(異族)이라 하여 무시하는 경향이 많았다. 이에 저들은 우리 민족을 동쪽에 있는 천한 이방인인 오랑케라는 의미에서 동이(東夷)라고 불렀다. 이 말이 곧 중국말로는 ‘뚱이’이다. 여기에서 파생된 말 중에 ‘뚱 친다’는 말이 있다. 이는 좀도둑이라는 말로서 사신들의 종이나 수행인으로 따라간 자들이 작은 물건들을 훔친다고 해서 비하하면서 붙인 용어이다. 반면, 우리가 중국인들을 가리켜 ‘떼 놈’이라고 할 때가 있다. 이는 우리가 중국인을 비하해서 말 할 때 하는 말이다. 하지만, 비하 같이 보이지만 오히려 높이는 말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이 비속어의 어원은 여러 가지가 있다. 두만강 북쪽의 만주족을 일컫는 말이라고도 하고, 중국인들은 떼를 지어 다니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란 견해도 있다. 또 몸을 잘 씻지 않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가장 근거 있는 유래는 우리 민족은 고대로부터 중국을 대국(大國)으로 여겼고, 또 작은 나라로서 피해도 많이 입었기 때문에 중국에 욕을 하면서도 대국의 의미를 담은 ‘대국놈’, ‘뗏놈’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2. 일본인이 한국인을 비하하는 용어들 : 대표적인 말은 먼저 ‘조센진(朝鮮人)’이라는 말이다. 한자의 뜻 그대로 본다면 ‘조선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는 일본인들이 한국인을 비하할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엽전’이란 말도 그런 말 중 하나다. 일본인들은 우리 한국인을 엽전이라고 했다. 이는 금전이니 은전 같은 가치 있는 돈이 아닌 값싸고 열등한 엽전 같은 존재가 한국인이라는 점에서 비하해서 한 말이다. 이런 이유들로 볼 때 이런 용어들은 사용해서는 안 될 말들이다. 외국인들이 우리 민족 자체를 비하해서 사용한 말들을 우리 스스로 사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3. 한국인이 외국인을 비하하는 용어들 : 대표적인 경우는 먼저 중국과 중국인을 비하하는 말들이다. 여기에는 China를 음역한 ‘지나(支那)’라고 부르는 것이나(참고: 동지나 해), 중국인들을 일컬어 화상(華商-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버는 나쁜 상인), 짱꼴라(일본에게 지배당한 청나라를 비하하는 말), 짱깨(돈의 금고만 아는 사람들이라는 의미) 등의 여러 말들이 있다. 일본인들을 비하하는 말들로는 왜놈(倭-키가 작고 못생기고 왜소하다는 뜻)이나 쪽발이(게다란 신발을 신는 일본인) 등의 용어들이 있다. III . 결 어(結語) 이상의 비하하는 용어들은 아무리 남아 있는 국민감정이 남아 있다 할지라도 삼가야 한다. 또한 그들이 우리를 비하하는 말들도 절대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특히 우리 기독교인들은 언제나 경우에 합당하고 올바른 말들을 함으로서 밝고 아름다운 언어문화를 유지 계승해 가야 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비하적인 용어나 비속어 등은 절대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10월 9일 한글날을 맞하여 다시 한 번 우리말의 소중성을 알고 계승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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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05
  • [신재철 목사] 흔한 이름 : 싸이월드의 추억
    경상북도 시골 작은 교회에서 진행된 수련회. 며칠간 이곳에서 예배 찬양을 섬기게 되었다. 신학대학 동료들이 집회를 함께 섬기며 봉사하고 있었기에 큰 불편이나 이질감은 없었다. 전형적인 농촌이었기에 고향에 온 것 같은 정서적 평안함도 연속된 사역에 지친 내게 오히려 힐링이 되고 있다. 사실 여름 사역이 너무 많았고 대전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이 만만치 않아서 집회 요청이 왔을 때 거절을 어떻게 할지를 고민했었다. 평소 거절의 기술에 능하지 못했던 나는 결국 기타를 매고 이곳에 도착했다. 이때 까지만 해도 이번 일정이 내 삶을 뒤집어 놓을 역사적인 사건이 될 것을 꿈에도 몰랐다. 단지 여러 일정 중 하나였다. 열악한 환경이지만 예배는 은혜 가득했다. 잠시 쉬는 시간이면 읍내 작은 슈퍼마켓으로 음료와 아이스크림도 사러 나가고 오가는 길에 즐기는 시골 풍경은 피로를 덜어주기에 충분했다. 찬양 인도가 나의 메인 포지션이었지만 동문과 섬기는 작은 집회에 그런 것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가장 막내였기에 잡일에 잔심부름까지 맡으며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좋은 시간이었지만 여름방학 내 계속된 집회 일정에 육체적 고단함이 한계까지 차올랐다. 진행 요원들은 분주하지만 한쪽 구석의 철제 의자에 잠시 몸을 맡긴다. “아, 그러세요? 제가 가져다 드릴게요.” 한사람이 눈에 보인다. 아주 작고 귀엽게 생긴 자매님이 여기저기 누비며 사람들을 돕고 있다. 너무 바쁜 상황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다. 고도의 훈련을 받았거나 천성이다. 다른 곳을 보다가도 자꾸만 그 자매님의 동선을 좇아 눈길이 간다. 무엇을 찾고 있는지, 무엇을 들고 가는지, 어떤 사람들과 이야기하는지를 보게 된다. 큰일이다. 찬양인도자가 이렇게 한눈팔면 안 되는데.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수련회가 끝날 때까지 나는 그 자매가 누구인지 은밀하게 알아가기에 바빴다. 한 사람을 발견했다는 기쁨을 획득하며 수련회도 끝이 났다. 전국에서 모였던 스텝은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흩어지게 되었다. “너네 학교 선배인데 몰랐어?” 나보다 두 살이 많은 학교 선배라는 사실과 이름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말도 걸어보지 못했고 연락처는 당연히 받아내지 못했다. 이렇게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지 알 수도 없는 상황이다. 시간이 없다. 마음이 조급하다. 터미널에서 연락처라도 받아보려 했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남자 선배들의 방해가 있었다. 결국에는 아무런 소득 없이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나는 포기 못한다!” 집에서 쉬다가 벌떡 일어나 컴퓨터 전원 버튼을 급히 눌렀다. 알고 있는 정보로 찾아보자. 싸이월드는 가능했다. ‘검색’ 아... ‘78년생 이지현’은 정말 많았다. 엄청난 숫자의 전국의 ‘이지현’씨 홈페이지를 하나씩 방문했다. 페이지를 넘겨 가며, 넘겨 가며. 지쳐갔지만 반드시 찾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클릭을 멈추지 않았다. 드디어 그녀의 얼굴이 나타났다. ‘고진감래(苦盡甘來)’ 오늘에서야 이 말이 가슴에 와닿는다. “안녕하세요. 수련회에서 찬양을 섬겼던 신재철 전도사입니다.” 홈페이지 프로필에서 알게 된 전화번호. 통화를 시도한다. 가슴이 떨리고 긴장이 된다. 전화를 받은 자매님은 여전히 친절했다. ‘선배’라는 애매한 호칭, ‘전도사님’이라는 불편한 호칭을 하며 매일 같이 전화를 하고 문자를 한다. 연애일까? 잘 모르겠지만 내 가슴은 즐겁게 뛰고 있었다. 에필로그 어렵게 찾은 자매님은 지금도 나와 같이 예배를 드린다. PPT를 다루고 성도들을 돌보며 개척교회를 섬기고 있다. 당시 친절했던 미소는 사춘기 아들 둘이 누리는 복지가 되었다. 분노할 상황에도 미소를 잃지 않는 그녀에게 나의 아이들은 고백한다. ‘우리 엄마가 최고야.’ 잠시 고생해서 찾은 이름 세 글자가 지금까지 내 삶을 평온케 할 줄, 생각이나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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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05
  • [조희완 목사] 부요할 내용 (창26:12-22)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들을 때 기분이 좋은 인사말이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한국 “부자특성연구회”(富者特性硏究會) 회장을 맡고 있는 <문성렬>박사의 저서 <부자일지> <한국부자 세븐파워의 비밀>에 참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한국의 대표적인 부자들의 특성을 연구한 결과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부자들은 전문가를 100% 신뢰하지 않는다(자기주관). 2.부자들은 아침 형 인간이 많다(부지런). 3.부자는 얼굴에 부자 라인이 있다(웃음). 4.부자는 가구나 가전제품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절약). 5.부자는 옷차림이 수수하다(검소). 6.부자는 붉은 색을 좋아한다(열정). 7.부자는 주말보다 평일 쇼핑을 좋아한다(대우). 8.부자는 남향(南向)집을 선호한다(서울 강남의 최고급 아파트인 타워팰리스의 경우 남향집은 모두 부자들 소유). 9.부자는 겨울에 태어난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12-1월, 이와 같은 통계는 세계 적인 경제 전문 잡지인 <포천>에서도 거의 같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10.자녀 교육에 투자하는 성향이 강하다. 사람들 중에 대부분이 다 부자(富者)가 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땀 흘려서 일하고 아끼고 절약하는 것은 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가난하게 사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가난하게 사는 것보다는 부자로 사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부자가 되어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큰일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큰 부자가 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큰일을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어떤 면으로 큰 부자가 되어야 할까요? 성경에 보니까 우리의 삶 가운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부요함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이 부요해야 합니다.(약2:5) 둘째는, 재물이 부요해야 합니다.(창26:12,13) 셋째는 선행이 부요해야 합니다.(딤전6:18,19) 우리 모두 아름다운 부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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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05
  • [오성한 목사] 성령충만(3/3)과 출발
    우리의 신앙생활은 내가 죄를 짓지 않는데, 내가 실수하지 않으려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그것 때문에 실패하고 좌절을 느낄 수밖에 없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뭐냐? 임마누엘하심, 그 분의 십자가의 결론, 임마누엘하시고 나와 성령으로 함께하시고 성령 충만한 나임을 초점 맞추어야 한다. 성령충만하려고 신앙생활하지 말고, 성령충만함을 믿음으로 믿고 출발해야 한다. 죄를 짓지 않는데 초점을 맞추려 하지 말라. 예수 믿는 것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다. 예수님과 연합되었음에 초점을 맞춰라. 성령님과 하나 되어 당신 안에 성령이 가득함을 믿음으로 출발해야 한다. 성령의 생각에 내 생각이 연합되는 것이다. 늘 고백해야 한다. “저는 주님과 함께 삽니다.” 혹 실수 하더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하나님 제가 이런 부분에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진짜 회개하고, 주님이 해 놓으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당신은 성령충만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죄가 이미 사해졌다. 그러나 “잘못했다”는 표현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우리의 기도에 대해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다니엘이 70년 후에 해방 시켜 주신다는 것을 책을 통해 알게 된다. 이미 약속을 주셨다. 그것을 깨달은 다니엘은 즉시 그 민족을 위해 구체적으로 회개하는 모습을 본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회개한 후 해방 될 것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당신의 삶이 완전해 보이지 않더라도 당신의 부족을 묵상하지 말고 당신 안에 충만하게 계신 성령님을 묵상하라. 성령충만의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출발하라. 항상 당신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주님께 고백하며 인정하며 그렇게 여기고 믿음의 행동을 하라. 다시 율법의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 당신은 성령충만함을 믿고 모든 것을 출발해야 한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당신의 애씀이 성령충만의 결과를 가져 온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를 주셨고 성령님은 영원히 우리 안에 계신 것이다. 율법으로 돌아가지 말라. 당신은 성령의 사람이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갈4:9) 초등학문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 예를 들어 “오늘 외출하시면서 세수 하셨나요?” “세수했습니까?”는 질문은 어른에게는 맞지 않다. 어른에게 “너 오늘 세수했냐?”고 농담으로 할 수는 있어도 진담으로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린이들에게는 뭐라고 하는가? 엄마가 묻고 점검해야 한다. “너 오늘 세수했니? 양치질 했니?"라는 질문을 한다. 성경에 바울 사도가 그랬다. “내가 단단한 음식으로 하지 아니하고 너희들에게 젖으로 한다. 너희가 어른이 되어야하는데 어린아이다. 어른으로 못 대하고 어린아이같이 대한다.”고하면서 바울은 성경을 기록한다. 초등학문은 “미워하지 마라. 사랑해라. 서로 도와라. 어려운 일이 있으면 이래라. 이웃을 사랑해아.”는 식은 다 초등학문이다. 성장하고 나면 그 정도의 수준이 아니다. 성장하면 안다. “아,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시구나.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이 감사하다. 효도를 해야겠구나.” “나의 삶을 통해 세상에 기여를 해야겠구나. 꿈을 가지고 열심히 하면 세계적인 일을 할 수 있구나. 나도 열심히 이 땅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야 되겠구나.” 등의 생각을 하는 것은 성장한 사람이 하는 생각이다. 성장한 사람에게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묻거나 강조하지 않는다. “세수했냐? 밥을 먹을 땐 입을 다물고 씹어라.” 등을 한다면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중요한 말이다. 물론 초등학생에게는 좋은 생활이 되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성경도 많은 가르침이 있는 것이다. 배우게 되면 마땅히 할 일을 깨달아 기쁨으로 하게 되는 것이 성령충만한 자의 삶이다. 왼손을 쓰는 아이가 오른손으로 바꾸어 훈련을 하려면 불편하고 어려움이 있다. 우리가 복음으로 바꾼다는 것이 불편하다. 말도 불편하다. 생각도 불편하다. 남과 이야기하다가 “아차” 싶지만 입을 닫기도 힘이 든다. 나는 처음 복음을 깨닫고 난 후 기도를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경험을 했다. 기도할 때마다 복음적인 기도가 안 되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입에 익은 습관 된 기도가 자꾸 나왔다. 예를 들면, 주님이 항상 함께 하심을 감사하고 싶은데 입은 저절로 “오늘도 함께 하여 주시옵고, ...”라고 자동으로 이어져 나오는 것이었다. 옛 습관대로 살던 것을 갑자기 바꾸는 일은 얼마나 불편한지 모른다. 기분이 상당히 상하고 안에서 울화통이 터져 나오고 힘이 드는데 “주님이 다 이루셨다. 나는 풍성하고 평안하다.”라고 받아들일 수가 있느냐 말이다. 오히려 성내고 사는 것이 더 편할 수 있다. 욕하고, 고함지르고, 윽박지르면 더 편한 것 같기도 하다. 참으려니 더 울화통이 터진다. 그 때 누가 옆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품어야지.”라고 하면 “지금 하나님 사랑 찾을 때냐?”면서 오히려 더 뒤집어진다. 혹 우리가 이런 실수를 한다고 할지라도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절대로 되돌아가는 자가 아니다. 생각과 말과 습관을 바꾸기 힘들지만 당신은 성령충만하다고 고백하며 출발해야 한다. 따라해 보라. 고백하며 고함치며 그렇게 살아야 한다. “나는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지금만 아니라 항상 성령으로 충만함을 고백합니다.” “나는 하나님으로 가득한 사람입니다.” “나는 성령의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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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05
  • [황권철 목사] 「주기철 목사 일사각오 창작 오페라」를 보고
    「항일독립운동가 주기철 목사 일대기 창작 오페라」를‘창원시기독교장로총연합회’(이하 창기장총) 주최로 하게하심을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관계자 모두에게 격려와 힘찬 박수를 보낸다. 본 오페라 공연을 보고 느낀 소감을 다음 몇 가지로 말씀드리고자 한다. 먼저, 기독교 문화콘텐츠(contents)로 복음을 세상과 함께 할 수 있음이 대단히 고무적(鼓舞的)인 현상이다. 코로나 팬데믹(pandemic)으로 인해 기독교가 마치 팬데믹의 주범인 것처럼 오해를 받아온 점이 너무도 가슴 아팠으나 코로나의 늪에서 벗어나는 시점에서 교회가 복음으로 세상과 함께 할 수 있음이 너무도 감동적이다. 또한 이 같은 일에 사회일각에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교회와 복음을 함께 공유할 수 있음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다가온 점이다. 정기국회 기간 중인데도 지역을 사랑하는 국회위원과, 도지사, 시장, 그리고 각 시도위원장과 경남기독교총연합회장과 각계 각층의 많은 대표들과 창원은 물론 진주, 통영, 거제 경남의 중심도시의 교회와 시민들이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1-2회 공연에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가득메운 교회와 시민들의 열기에 감동했다. 이제 앞으로 얼마든지 기독교가 성경의 복음을 문화와 예술이라는 콘텐츠를 만들어 교회 울타리를 넘어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주기철은 경남이 낳은 한국적이며 세계적인 교회사적 인물로서 경남과 창원 시민의 자랑이다. 앞으로 우리 고장의 손양원과 장기려, 전영창과 조수옥 같은인물을 많이 발굴하여 기독교 문화 예술의 폭을 다양한 계층으로 넓혀 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다음, 창기장총의 헌신적인 노력에 아낌없는 박수와 격려를 보낸다. 주기철의 오페라 공연은 지난 창기장총 창립총회의 기념사업으로 시작하였다가 기대 이상의 반응과 호응으로 창원시의 전폭적인 지원과 창원을 비롯한 경남일대 여러 교회들의 아낌없는 헌신으로 이루어졌다. 경남의 여러 시와 도가 많은 연합회와 기구가 있으나 그간 모든 기관들이 교회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연합사업 정도에서 그쳤지만 이번 창기장총의 오페라 공연은 기독교 문화 콘텐츠로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교회가 가감하게 울타리를 허물고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좋은 소재가 되었다. 이는 이를 주체한 창기장총 회원들이 사회 곳곳에서 거룩한 영향력을 미치는 빛과 소금으로써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기에 보다 쉽게 사회 속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특별히 창작오페라 실무를 맡아서 수고하신 조직위원회 모든 분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프로 배우의 연기력을 갖춘 주요 배우들은 장문의 대본을 아무런 주저 없이 숙지하여 연출하는 연기력은 창원시민과 경남도민의 저력이요 자부심과 긍지였다. 마지막으로 조심스럽기는 하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조금 아쉬운 점 두 가지 정도로 첨언(添言)해 드리고자 한다. 우리에게 사실(fact)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보는 관점(觀點, point of view)일 수 있다. 그래서 필자의 지적을 또 다른 한 관점으로 볼 수 있는 너그러움을 가지고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필자는 ‘그루터기인물사’로 『주기철의 일사각오순교신앙』을 저술한 입장에서 보는 아쉬움이었다. 하나는 오산학교의 등장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조금 있었다. 주기철 목사의 고향이 웅천이기에웅천이 조명을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 그러나 주기철의 애국운동의 동기부여는 오산학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주기철의 민족적 애국심이 오산학교의 유영모 선생과 고당 조만식 선생으로부터 싹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평양 산정현교회가 폐쇄되는 장면이 언급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다. 1막과 2막에서 부산 초량교회와 마산 문창교회는 비교적 소상하게 언급이 되어 우리 지역을 대변해 주는 자부심과 긍지는 가졌으나 그에 비하여 평양 산정현교회가 많이 부각되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당시로서는 평양과 서북지역이 한국기독교를 대변하고 평양의 산정현교회가 한국교회를 대표한 교회로서 길선주(吉善宙)에 이어 주기철을 담임목사로 청빙한 점을 일제가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한 가지는 지나친 신학적인 면의 부각이나 아니면 목회자의 품격과 교회 순결성을 고려하여 선교적인 측면에서 간과(看過)한 것으로 생각되나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 저항신앙의 핵심이기에 기독교인과 교회사적으로는 꼭 숙지하고 있어야 다음세대에 역사의 왜곡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상 “경남노회 신사참배 반대결의안”에 대하여는 아직도 학계에서 이를 검정하고 있는 중이며, 문헌상으로는 의문을 제기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필자 역시도 그때를 전후해서부산 초량교회와 마산 문창교회 당회록이나 경남(법통)노회 노회록에서 그 기록과 그와 유사한 흔적을 찾아보려고 노력했으나 아직까지는 발견하지 못하고 있음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그러나 1938년 9월 10일 제27회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것과 1939년 12월 19일 주기철 목사가 옥중에 있을 때 평양노회가 그의 목사직을 파면한 것, 1940년 4월 20일에 산정현교회가 폐쇄 당한 것은 일사각오로 나아가는 클라이막스이기도 하다. 이는 한국교회가 신사참배 앞에 다 무너갈 때 산정현교회 주기철 목사와당회와 제직회, 그리고 온 교회 성도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함으로 6년 간 폐쇄를 당하여 해방이 되기까지 지하교회를 연연하면서 경건생활을 유지해 왔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주기철은 한국교회의 거룩한 씨, 그루터기였다. 한국교회를 대표한 장로교회 총회가 신사참배에 굴복하였고, 평양노회에서 목사직을 파면하기까지도 예언자의 권위를 지켰고, 산정현교회 당회는 끝까지 교회의 거룩성을 지켰다. “그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사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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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05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17
    I. 서언(序言) “복음의 메카(Mecca)는 예루살렘이다.”란 말을 어떤 칼럼에서 읽어본 적이 있다. 아무리 이해하면서 보려고 했지만 정말 이건 잘못된 말이었다. 흔히들 어떤 중심지를 말하고자 할 때 메카란 말을 많이 쓴다. 근래에 본 각 언론사에서 이 말을 사용한 것을 나열해 보면, ‘경제 문화의 메카OOO’, ‘게임의 메카’, ‘유기농 산업의 메카’, ‘패션의 메카 밀라노’등이었다. 이런 말은 이미 사회적 통용 언어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경우에는 어쩔 수 없다. 이는 ‘나락’, ‘야누스’등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기독교 단체와 성도들이 사용 할 말은 아니다. 이에대하여 이 용어들의 어원을 논하고자 한다. II. ‘메카’,‘나락’,‘야누스’의 의미와 유래 1. 메카(Mecca)의 유래 : ‘메카’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도시 이름이며,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Muhammad)’의 고향인 동시에 이슬람교의 발생지이며 중심지이다. 또한 ‘무함마드’ 이전에도 메카는 다신 숭배의 중심지였다. 이런 이유로 흔히들 중심지를 말할 때는 무슬림(Muslim)들 뿐만이아니라 일반인들도 ‘메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서두에서 논한 대로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는 일이다. 더군다나 ‘복음의 중심은 예루살렘이다.’라고 해야 될 것을 좀 더 유식하게 말한다고 ‘복음의 메카는 예루살렘이다.’라고 표현한 것은 너무 잘못된 말이다. 2. 나락(那落, 奈落, naraka)의 유래 : 얼마 전에 어떤 책임 있는 기독교계 방송국에서 ‘오늘날 교회의 신뢰도가 나락으로 떨어졌다.’라는 보도를 했다. 여기의 나락이란 말도 흔히 사용하는 국어사전에 등제되어 있는 용어이기 때문에 이 말을 방송용어로 사용한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나락(那落, 奈落)이란 말의 유래를 안다면, 기독교계 용어로서는 옳지 않는 말이다. 나락이란 말은 원래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의 ‘나라카’(naraka)를 음역한 말로, 본래 ‘밑이 없는 구멍’을 뜻하며, 지옥(地獄) 또는 괴로움을 받는 곳을 말하는 전형적인 불교 용어이다. 또 이 말은 일반적인 지옥의 의미보다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극한적인 상황을 비유해서 설명할 때 쓰는 말이기도 하다. 이로 볼 때 이런 완전한 불교의 교리적 용어를 교회적인 사항을 이야기를 할 때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는 일이다. 3. 야누스(Janus)의 유래 : 오래전 ‘욕망의 두 얼굴’이란 영화가 개봉된 적이 있다. 내용은 바로이 두 얼굴의 양면성을 나타내는 ‘야누스’ 이야기이다. 그 어원을 구체적으로 논한다면, ‘야누스’는 로마의 출입문과 아치형의 다리를 지키는 신의 이름이다. 또한 이 신은 양면(兩面)의 얼굴과 머리 혹은 4개의 얼굴을 가진 형상도 있다. 하지만, 이중에서 어떤 얼굴을 보느냐에 따라 행운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불운을 주기도 한다고 믿고 있다. 또한 이 말에서 한해의 끝과 시작이라는 의미에서 'Janualy'란 1월 달의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다. 이로 볼 때 이 말도 로마 신화에 나오는 미신적인 용어이기 때문에 우리 기독교인이 즐겨 사용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III . 결 어(結語) 이상으로 몇 가지 용어들을 논하면서 느끼는 것은 ‘왜 사람들은 단어의 뜻을 명확히 구분하지못하면서도 이런 용어들을 자주 사용할까?’라는 의문을 가져 볼 때가 많다. 그 중요한 이유 중의하나는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언어 사대주의 사상이 아직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과거부터 중국의 한문을 선호해 온 것이나 현대에선 영어권이나 외래어를 선호하는 것과 아예 우리 국어를 경시하는 풍조가 이런 애매모호한 용어들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타종교적인 용어들의 역사가 길게는 수천 년에 이르고, 거기에 비례해서 그 용어들이 우리말에 너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구분해서 사용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대로 그 유래와 뜻도 모르면서 계속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복음의 메카(Mecca)는 예루살렘이다.’라고 하거나, ‘오늘날 교회의 신뢰도가 나락으로 떨어졌다.’, ‘야누스의 두 얼굴’이란 신앙적인 용어가 아닌 말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 있는 말이 아니라면, 될 수 있는 대로 신앙적으로 알맞은 용어들을 알기 쉽게, 듣기 좋게, 보기 좋게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가장 아름답고 좋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언어의 품격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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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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