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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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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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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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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8
  • [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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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3
  • [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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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8
  • [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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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실시간 칼럼 기사

  • [신재철 목사] 안 돼! (1) : 떡 사고 혼나다.
    신앙생활은 새로운 활력이 되었다. 성공이 전부라고 믿었던 내게 다른 희망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하나님을 알아가고, 예수님의 뜻을 살피는 재미가 독특한 즐거움이 되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나를 돌보시는 이모 입장에서는 나의 변화된 모습이 영 마뜩치 않았던 것이다. 부모 떠나 이모 손에 자라고 있었는데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최소한 이모님의 시각) 교회라는 곳으로 매주 출근하고 있었으니, 많이 불편하셨으리라 짐작이 된다. 오르지 않는 성적, 잦은 외출로 결국 나는 ‘교회 출입 금지’ 명령을 받게 된다. 명령을 어기고 교회를 갔다가 걸리고 말았다. 나름 조심스럽게 갔는데, 아파트에서 내려다보면 교회 가는 모습이 보인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더는 교회를 갈 수 없게 되었다. 지금까지 어른들 말씀 잘 듣고 살았는데, 이번에도 말씀 잘 듣는 아이로 태도를 유지해야 할까? “교회를 옮기자. 멀리 가자.” 큰 결단을 하게 된다. 거짓말, 속임수. 나쁜 것 알지만 학교간다는 핑계로 친구 아버지가 목회하는 교회로 옮겨 계속 신상생활을 이어갔다. 무려 버스로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곳이다. 하지만 신앙생활을 포기할 수 없었고 이 즐거움을 놓아버릴 용기도 나지 않았기에 거리는 문제되지 않았다. 종점에서 거의 다른 종점까지 가는 길이다. 교회 가는 길은 생각보다 지루했고 졸렸다. 그날도 졸다 깨다를 반복하며 교회로 향했다. 늘 그렇듯 하나님께서는 내려할 정거장에서 눈을 뜨게 하셨고 무사히 하차하게 되었다. “어? 처음 보는 할머니네?” 버스에서 내려 마주하게 된 할머니. 인도에 쭈그리고 앉아 떡을 늘어놓고 팔고 계신다. 평소 거리에서 물건 파는 할머니들 채소를 사드리곤 했기에 거리낌 없이 더 다가갔다. 어디서 사 오신 듯 깔끔한 포장의 떡들이 줄을 지어 있다. 스포츠머리 고등학생에게 할머님은 관심이 없으시다. 구매를 권하지도 않는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오히려 내가 판매를 권한다. “할머니, 이거, 이거... 얼마씩 해요?” 예상 밖의 손님이었을까? 할머니는 조금 커진 눈으로 나를 보신다. 일부러 안사도 된다는 할머니 말씀에 원래 떡을 좋아한다는 보호막으로 방어를 한다. 그리고 제법 많은 양의 떡을 비닐봉투에 담았다. 할머니는 다시 눈이 커진다. 시골 어머님께 받은 용돈이 내 또래 친구들에 비해 적지 않았기에. 나는 종종 이렇게 부자집 도련님 같은 씀씀이를 보인다. 사실 떡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저 떡이 다 팔리지 않으면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무리해서 샀다. 나도 먹고, 성가대도 나눠먹고, 늘 신세지는 목사님 댁에도 드리고. 그렇게 즐거운 상상을 곁들이며 푸짐한 봉투를 들고 교회를 향했다. 교회와 붙어 있던 사택을 먼저 들러 봉투 하나를 내민다. 목사님을 향한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감사와 사랑이었으리라. “주일에 돈 쓰면 안 되는 거야.”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반응이다. 고맙다거나, 좋아해주실 줄 알았다. 아니, 오히려 할머니 도우려던 내 착한 마음을 칭찬하실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훈계와 질책을 받았다. 주변에 있던 사모님과 딸들도 목사님과 같은 생각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주일성수’에 관한 가르침을 들으며 불편한 기독교의 한 면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면서 안 되는 것이 많다는 것을 조금 알게 되었다. 생각은 깊어진다. “사랑이 뭘까? 주일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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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05
  • [박동철 장로] 망(網)을 쓴 우리들, 봄날은 간다.
    성경 말씀 신명기 25장 4절에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고 했다. 일하는 자에게 수고의 대가를 주고 먹을 것을 반듯이 주라는 주님의 명령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풀어쓴 고린도전서 9장 10절을 보면 곡식 떠는 자가 소망을 갖고 일하듯 밭 가는 소 또한 소망을 갖고 일한다고 했다. 코로나19의 역병이 3년째 기승을 부리며 온 인류에게 망(網)을 씌워놓고 있다. 2022년에 들어서도 우리들 모두 마스크라는 망을 쓰고 봄을 맞았다. 아버지의 소망을 바라볼 수 없는 죄인들인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개나리 진달래가 봄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코로나 세상 또 한해의 봄날은 가고 있다. 1953년 가수 백설희가 불러 국민가요가 된 ‘봄날은 간다’는 한국인의 정서에 뿌리가 깊이 서려있다. 6.25전쟁 시기 해마다 따뜻한 봄날은 오지만 봄이 아니었다. 전쟁의 참혹함으로 젊은이들에게 소망이 없어 보일 때 박시춘 작곡에 서정성의 작사가 손소원이 작사한 봄날은 간다의 곡이 만들어져 널리 불렸고 전쟁 이후에도 국민가요가 되고 영화로도 만들어지기도 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 오늘도 옷고름 씹어 가며 산 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가사를 가슴에 새겨보면 애틋한 남녀의 사랑 가운데 큰 아쉬움이 자리하고 있는듯하다. 그래서 봄날은 간다는 전쟁 속의 슬픈 봄날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한 맺힌 국민가요가 되어 우리의 정서를 후벼댔다. 이후 봄날은 간다는 조용필, 장사익 기라성 같은 대형가수들이 리메이크하여 많이 불리고 있다. 요즘 젊은이 미스·미스터 트롯 가수들도 많이 부르는 가요가 되고 있다. 2001년 영화로도 만들어져 이영애와 유지태가 주연으로 만들어졌다. 애틋한 남녀 사랑이 처음과 끝이 달라지는 비극의 러브스토리로 가슴에 아려있다. 처절한 전쟁의 아픔 속에 사랑과 행복 이별로 얽혀가는 사람들의 고난의 정서를 보여준 영화이기도 하다. 지금 2022년 봄날은 어떤가. 봄날은 온 줄도 모르게 가고 있다. 코로나 19라는 역병이 온 지구촌을 전쟁보다 더한 불안과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이 땅에 예수의 탄생과 부활로 구원의 여정을 이루는 세기의 역사를 코로나가 새롭게 바꿀 수도 있다는 무서운 전망을 하기도 한다. 지금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겪어보지 못한 공포 속에 언젠가 끝이 오면 전혀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것 아닌가 하는 나약한 인간의 막연한 기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은혜 입은 우리들은 마지막 때를 진짜 봄날을 준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전서 1장 5절에 말씀하고 있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고 했다. 복음의 밭갈이를 않는 우리들에게 망을 씌웠을까. 아니다. 소망을 가진 자에게는 망을 벗겨줄 것이다. 더욱 복음의 소망을 가져보자. 우리는 예수 다시 오실 때 받을 칭찬 영광 존귀 영원한 유업을 받는 그때는 복되고 그리고 영원한 봄날이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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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30
  • [특별칼럼] 산적한 경남 진보교육의 문제! 이를 해결할 교육감은 누구일까
    경남 교육감 선거를 목전에 둔 시점에 경남 교육에 대한 진지한 반성은 필수다. 진보교육감의 장기집권, 특히 8년째 장기집권 중인 경남의 진보교육, 자칫 12년 교육독재를 방불케하는 사건이 이어질 수 있는 중차대한 시점이기에 더욱 그렇다. 경남도민 다수는 ‘경남교육이 뭔가 본질에서 멀어져가고 있음’을 안다. 조국사태를 통해 확인된 내로남불, 공정과 정의의 상실, 말뿐인 진보의 허구와 실상 등 일맥상통한 체험을 하고 있는 듯하다. 진보교육감은 국·영·수 위주의 지식교육을 전통적이고 틀에 박힌 교육, 시험위주의 줄세우기식 교육이라고 폄하했다. 반면, 지식교육 이외의 온갖 교육 즉, 인권, 통일, 민주시민, 노동인권, 성적자기결정권, 다양한 직업체험 등 경험적이고 실질적인 교육이 21세기 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설득했다. 학생이 행복한 학교, 다양한 경험 교육, 놀이와 쉼, 민주시민의식함양, 학생인권, 노동인권, 성인권 등 할 수 있는 교육을 현장에 쏟아부었다. 학교교육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교육과정에 인권교육, 통일교육, 민주시민교육, 통일교육, 노동인권교육이 한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상대적으로 국·영·수 교과 수업 시수가 줄어들었다. 그 결과는 처참하다. 학교수업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기초학력미달 수준의 극심한 증가, 대입진학경쟁력의 추락, 온갖 학교폭력, 성폭력사건, 교권추락, 학교장의 자율성 침해, 도교육청의 전교조 편향 집단화, 학내 노조 간 갈등과 파업 및 교육공백, 정규교사들의 역차별 논란 등 학교 현장부터 도교육청행정 전반에 이르기까지 엉망진창이다. 교육의 인성적인 면이든 실력적인 면에서든 경남의 교육경쟁력은 바닥을 치고 있다. 양두구육(羊頭狗肉, 겉으로는 훌륭한 듯이 내세우지만, 속은 보잘 것 없음)이다. 온갖 미사여구로 포장해놓은 진보교육감의 선물을 마냥 우리 자녀들에게 좋은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막상 포장지를 뜯어보니 실망스런 내용물이었던 것이다. 이제는 겉포장지는 좀 투박해도 내실있고 진정성이 있는 내용물을 받고 싶다. 학교현장부터 교육행정 전반에 이르기까지 망가진 경남교육의 문제를 제대로 개혁할 적임자를 찾아야만 한다. 최소한 3가지 필수요건을 갖춰야 한다. 유·초등·중등학교 교육현장전문가, 도교육청개혁이 가능한 교육행정전문가, 학생의 역량을 제대로 키울 지식교육 가치를 아는 보수적 교육철학이다. ‘학교다운 학교! 교육다운 교육!’을 실천할 수 있는 중도·보수 교육감 후보의 단일화를 통해 경남교육의 경쟁력을 높이고, 경남의 학생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대한민국의 지도자로 발돋움할 수 있기를 고대한다. 일구이언 이부지자(一口二言 二父之子)라 했다. 현교육감은 재선당시 학생과 학부모, 도민 앞에서 스스로 했던 약속을 되새기며 최소한의 교육자의 양식을 지켜주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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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28
  • [조희완 목사] 남용의 결과 (민20:10-13)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전 세계인들을 매료시킨 홍콩 액션 영화배우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이소룡>, 미국 명 <부르스 리>입니다. 너무나 유명한 영화배우였을 뿐만 아니라 온 몸이 운동으로 다져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는 누구보다도 건강하게 오래 살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1973년 그의 나이 32세 때 갑자기 죽어서 전 세계 영화 팬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의 죽음의 원인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說들이 많았습니다. 독살을 당했다는 설도 있고,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설도 있고, 자살을 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신을 부검한 결과 사망 원인이 약물 남용 때문이었다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그는 늘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에 시달렸고 그 두통을 이겨내기 위해서 여러 가지 약물을 복용했는데 그 약물을 너무 과다하게 복용한 것 때문에 부작용을 일으켜서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약물을 과다하게 남용하는 것은 위험한 일임을 알려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미국 의학원의 통계에 따르면, 매년 미국에서 약물 남용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사람이 100만 명에 이르고, 그 중에 사망하는 사람이 매년 10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약이 병을 낫게 하고 사람을 고치기도 하지만, 반대로 병을 악화시키고 사람을 죽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약을 남용하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입니다. 옛날에 “약 좋다고 남용 말고 약 모르고 오용말자!”라는 표어가 있었는데 정말 귀를 기울여야 할 중요한 내용입니다. 필요한 것이나 좋은 것이라도 남용하면 반드시 손해를 보거나 피해를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절대로 남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직분을 남용하면 손해를 보게 됩니다.(민20:11) 둘째로, 재물을 남용하면 후회를 하게 됩니다.(눅16:19) 셋째로, 자유를 남용하면 혼란을 겪게 됩니다.(갈5:13) 남용이나 악용을 자제하고 선용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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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22
  • [최호숙 목사] 팬덤(fandom)문화 시대의 병폐
    이 시대 사회문화 중 팬덤문화 현상은 일반적인 사회문화 현상이지만 기독교 문화 안에도 존재할 만큼 보편적 현상이 되었다. 팬덤이라는 말은 광신자(狂信者)를 뜻하는 “퍼내틱(fanatic)”에서 유래한 ‘팬(fan)’과 영역 나라 등을 표시하는 접미사 ‘덤(dom)’의 합성어로 특정 인물이나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대중문화가 확산되면서 “팬덤문화”라는 말도 생기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대 대중가수 조용필 씨가 무대에 나오면 “오빠~ 오빠~”를 외치며 인기를 따라 형성되었던 ‘오빠부대’가 요즘 말하는 팬덤인 것이다. ‘팬심(fan心)’이 확대되면 ‘팬덤(fandom)’이 되는 것이다. 성경 인물 헤롯 대왕을 보면 유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에 대한 팬덤 현상을 유지하고 왕권을 강화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백성은 유대인들인데 자신은 이두메인(에돔)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출신성분의 약점을 커버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이 가장 좋아할 성전건축을 46년에 걸쳐 건축하여 선물로 주었는데 이것이 팬덤을 형성하기 위한 전형적인 포퓰리즘(populism)이다. 또한 유대 사회는 사두개 당파, 바리새 당파, 에세네 당파, 셀롯(열심)당파 등이 있었는데 이 파당들도 팬심이 팬덤이 되어 집단이 형성된 것이다. 고린도 교회 안에도 바울파, 게바(베드로)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 등이 팬덤을 이루었는데 이런 팬덤문화는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싸움을 통한 수많은 대미지(damage)를 입게 된 것이다. 우리 정치문화 형성을 보면, 민주당, 국힘당, 거대 양당과 소수 정당들 모두가 팬덤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들이 팬덤을 형성하는 이유는 자신이 지지하는 인물이 이 나라와 개인에게 100% 만족을 줄 것으로 기대하며, 내가 지지하는 사람이 아니면 이 나라가 망한다는 구조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위대한 공약을 하고 인기를 끈다 하더라도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며 신(神)이 아니기 때문에 능력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세례요한이라는 특출한 인물이 유대인들 가운데 팬덤이 형성되어 엄청난 인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세례요한보다 더 강력한 존재가 나타나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죽은 자를 살리며 기적의 역사를 나타내었다. 특별히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무리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면(요 6:15) 유대 나라의 경제문제가 해결되고, 기적의 능력을 발휘하면 로마로부터 독립을 얻고 자주 민족 국가로써 어엿이 건국(建國)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하셨다. 우리 주님은 육신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개인 팬덤문화가 존재하는 이상 현실 세계에 나타나는 병폐는 소멸되지 않는다. 개인의 인기와 팬덤에 치우치지 않고 바른 삶을 살았던 대표적인 인물이 세례요한과 바울을 들 수 있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어 정보를 입수한 결과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깨달았을 때에 그는 나보다 능력이 많아서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할 사람(눅 3:16) 이라고 했으며, 그는 흥하여야 될 분, 나는 쇠하여야 할 존재(요3:30)로 말하며 대중들 속에 인기를 누리기보다는 예수를 높이는 삶을 살았다. 바울도 고린도 교회에 권면하기를 나와 아볼로는 단지 심고 물주는 존재이지만 그리스도는 자라게 하는 주권자임을 강조하였다. 우리는 개인 팬덤문화에 빠질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중심한 팬덤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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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22
  • [오태열 목사] 습기를 공급하라
    고대 철학자 Tales(Bc 625-547년)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 하였다. 모든 생명체는 물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 외의 행성들에 생명체 존재 여부를 알기 위해 먼저 물의 유무를 조사한다고 한다. 이집트에서 3천 년 된 미이라가 발견되었는데 미이라의 손에 밀알 몇 개가 쥐어져 있어 시험 삼아 심어 보았더니 싹이 나더란다. 물이 없으니 3천 년이 흘러도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다가 물이 공급되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물을 필요로 한다. 미국 LA에서 동쪽으로 가면 갈수록 점점 사막화가 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나무들이 큰 잎사귀에서 점점 작아지다가 급기야 사막에 이르러서는 가시나무들만 보인다. 가시는 본래 잎사귀였지만 메마름이 가시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사막에는 온통 선인장들뿐이다. 메마름은 재앙이다. 인간의 심령도 마찬가지다. 심령의 메마름이 가시를 만들어 나를 찌르고 남을 찌르게 된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이생의 염려가 가시를 만든다고 하였다. 염려하다 보면 가시가 되고 점점 날카롭게 되어 남을 찌르게 된다. 염려의 반대는 평강이다. 평강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염려를 물리치고 평강을 얻는 비결을 바울은 빌립보 4:6절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였다. 염려하면 마음이 황폐하여 가시가 되지만 기도하면 가시가 변하여 잎사귀가 된다. 주변에서 선인장 같은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된다. 이들은 너무 날카로워서 접근하기도 말을 걸기도 어렵다. 심령이 메말라 있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마음에 상처받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못 볼 것을 보고 못 들을 것을 듣다 보면 이런 것이 쌓여 독이 된다. 독이 쌓이면 마음이 점점 강팍해지고 메말라 사막화되어 버린다. 나쁜 것이 쌓이면 씻어내야 한다. 가시를 잎사귀로 만들어야만 남도 살리고 나도 산다. 기도는 가시를 잎사귀로 변화시키는 비결이다. 다윗은 블레셋으로 부터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낸 일등 공신임에도 불구하고 사울 왕에 의해 많은 날 동안 유리걸식하며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심지어 생명의 위협까지도 여러 번 받았다. 분하고 억울하여 사울 왕에 대해 독기를 품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윗은 용서의 사람이 되고 관용의 사람이 된다. 사울 왕을 죽일 수있는 기회가 몇 번 있었지만 죽이지 않고 살려 준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갔고, 보디발 아내의 위증으로 억울한 감옥살이를 한다. 총리가 된 요셉은 형들에게 복수할 기회가 있었지만, 이들의 죄를 깨끗이 용서해주었다. 기도가 마음속 독기를 사라지게 하였기에 용서할 수 있는 관용의 사람이 된 것이다. 바위에 떨어진 씨는 “습기가 없어 말랐다” 하였다. 사막도 물이 공급되면 옥토가 되듯이 심령에도 수분이 공급되면 옥토가 된다. 지금 여러분들의 심령은 어떤 상태인가? 메마름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심령의 밭에 자주 습기를 공급하여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 가야 한다. 그래야만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관용의 사람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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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22
  • [신재철 목사] 진짜 믿어지니?
    진짜 믿어지니? 500원의 헌금 이후, 안내받은 청소년부 주일예배에 찾아갔다. 긴장과 함께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 그리고 흥분으로 문을 열었다. 어린이예배에서 보았던 남자 전도사님의 격한 환영이 나를 더 긴장이 시킨다. 환영해 주시니 마음이 놓이면서도 긴장이 더해지는 것은 왜일까? 주변을 둘러보니 내 또래 남자 아이가 앞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외모도, 기타도, 노래도. 나이스하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평소에 노래를 즐겨 부르던 나에게는 너무나 멋진 모습이다. 흠모할만하다. 그리고 긴 의자에는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모여 앉아 앞에 선 남자아이의 가이드에 따라 노래를 부르고 있다. 뭔지 모를 흥분에 자리에 앉게 되었다. 모르는 노래를 따라 부르고, 모르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래도 상식이 있었기에 주머니에 천 원짜리 한 장 들고 온 것으로 헌금순서를 능숙하게 넘긴다. 문제는 사도신경이었다. 아주 어릴적 외웠던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 눈을 감고 조용히 친구들의 중얼거림을 듣는 것으로 OK. “진짜 왔구나? 반갑다. 중고등부 담당 전도사님이야.” 오전 주일학교 예배에서 만났던 분과 예배가 끝나고 나서야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20대 후반? 인상은 좋았는데 잘생긴 분은 아니다. 그리고 옆에는 예배 내 옆자리를 지켜주었던 분이 중고등부 선생님이라는 소개를 하셨다. 미소가 참 아름다운 분이다. 간단하게 나의 소개를 하며 주변에 있던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유난히 동갑이 많은 교회였다. 그리고 한 살 어린 여중생들이 많았다. “어? 오빠네? 반가워. 자주봐.” 아, 내가 오빠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는 것을 오랜만에 상기시켰다. 이곳에 오기를 잘했다. 등록이라는 절차를 안내받고는 ‘1’도 고민하지 않았다. 이곳 패밀리가 되어야했다. 무엇인가 내 삶에 밝음이 찾아오는 느낌이다. 그렇게 흔쾌히 등록을 마친 후 전도사님께서 갑자기 진지한 톤으로 질문을 하신다. “사영리를 알고 있니?” 태어나서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단어다. 모른다는 나의 대답에 전도사님은 나를 의자에 앉힌 후 옆에 앉아 작은 책자를 꺼내셨다. 글이 많은 것도 아니고, 길지도 않았다. ‘하나님, 예수님, 십자가, 관계.’ 처음 듣는 이야기다. 듣기도 하고, 생각도 하고, 같이 읽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던져지는 질문. “이 사실이 믿어지니?” 전도사님은 나에게 성경의 이야기를 전해 준 것 같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믿어야 할 것처럼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는 진짜로 믿어졌다. 오히려 오늘 소개받은 예수님께 감사와 사랑과 존경의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그런 분이라면 잘 따라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전도사님의 물음에 믿어진다는 힘찬 대답을 드렸다. 전도사님은 놀라셨다. 그리고 재차 물으셨다. “정말 믿어지니?” 아니, 믿으라고 지금까지 설명하셨던 분이. 내가 믿는다고 했더니 이분이 오히려 믿지 못하는 눈치다. 정말 믿어지고, 앞으로 더 잘 알고 싶다는 나의 말에 전도사님의 눈은 더 커져만 갔다. 그리고는 자신을 따라서 기도를 하자고 말씀하신다. 전도사님의 떨리는 음성을 따라 나는 또박또박 반복하며 따라한다. 그렇게 나는 짧은 시간에 예수님의 매력에 빠지면서 신자가 되었다. 당시 전도사님과 지금도 연락을 한다. 그분은 당시를 회상하시며 그 이후로도 나처럼 사영리를 소개받고 한 번에 영접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 사실 나도 사역을 하며 그런 학생을 만나본 적이 없으니. 사람에게 믿음이 생긴다는 자체가 은혜임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확신 있게 본인이 전하고도 그렇게 놀라던 전도사님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조금 우습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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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22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5
    I. 서언(序言)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언어를 배우면서 가장 어렵게 여기는 것 중의 하나는 외국어에는 거의 없는 존칭어와 낮춤말이라고 한다. 그것도 우리 국어의 존칭어가 극히 높임말, 예사 높임말, 예사 낮춤말과 극히 낮춤말 등으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경어 사용이 없는 외국인들로서는 너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언어 예절은 우리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만약 존칭어와 낮춤말을 잘못 사용했을 때는 예의를 중시하는 우리 문화에서는 말하는 자의 인격과 가문, 학력까지도 의심을 받게 된다. 이는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더군다나 목회자의 경우는 거의 모든 사역이 언어에 치중되어 있기 때문에 잘못 사용된 용어하나가 목회자의 전인격인 면을 판단 받을 수도 있다. 이에 본 호에서는 교회 안에서 잘못 쓰고 있거나 다소 듣기에 어색한 말의 사용 중에 ‘아내’에 대한 용어들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아내에 대한 용어 : “우리 사모(師母)입니다”란 말의 남용 1.아내에 대한 호칭들: 한자 문화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언어문화는 아내에 대한 호칭만 해도 아주 다양하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에게 아내를 소개할 때‘아내’ 혹은 ‘내자’라고 하거나 겸손하게 이르는 말로서‘집사람’이라는 말을 한다. 또 다른 사람의 아내를 높여 부를 때는‘부인’이라는 호칭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또한 자기 아내를 남에게 소개할 때‘우리 부인’이라고 하거나 우리 마누라’라는 말을 하는 경우들도 종종 보고 듣는다. 전자의 경우는 너무 높여서 부르는 것이기 때문에 합당하지 않고, 뒤의 경우는 너무 낮추어 부르는 비속어이기 때문에 올바른 호칭어가 아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장 통합교단에서는‘아내’라는 말로 통일하자고 교단 내 교회들에게 권장을 했든 적이 있다. 2.‘우리 사모(師母)입니다’란 말의 남용: 아내에 대한 호칭들 중에 가장 어색한 말 중의 하나는‘우리 사모(師母)입니다.’라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은 경어법으로 본다면 너무 어색한 말이다. 왜냐하면, 사모라는 말의 뜻은‘스승 사(師)’에‘어미 모(母)’자이다. 이렇게 볼 때 이 말의 1차적인 의미는 스승의 부인을 높여서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다. 요즈음에는 좀 더 넓은 의미로 확장되어서 2차적인 의미로는 직장의 윗사람이나 다른 사람의 부인을 높여 부르는 호칭어로도 겸하여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2차적인 의미는 사전적인 적합성의 의미로 본다면 다소의 문제는 있다. 그러나 이미 워낙 많이 사용되고 있는 사회 통용어가 되었기 때문에 2차적인 의미로 사용해도 현재로서는 별 무리는 없다고 본다. 사모라는 용어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곳 중의 하나는 교회이다. 흔히들 교인들이 목회자의 아내를 호칭 할 때‘사모님’이라고 한다. 이는 아주 자연스러운 좋은 호칭어라고 본다. 하지만, 목회자 자신이 자기 아내를 소개할 때‘우리 사모입니다’라고 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또한 목회자의 아내들도 스스로를 소개할 떼‘어느 교회 사모입니다.’라고 하거나, 모임에서는 스스로‘사모회’란 명칭을 정하기도 한다. 이는 너무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말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아내를 스승의 대열에 두거나 또한, 자신 스스로를 높여서 사모라고 호칭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왜 이런 경우가 범람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이‘사모’라는 호칭을 권사, 집사처럼 교회의 하나의 직책의 용어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모는 교회 직책의 명칭이 아니라 교인들이 목회자의 아내를 높여서 부르는 호칭어인 것이다. III . 결 어(結語) 이상과 같은 경우가 하도 많다 보니 아예 이 사모라는 호칭어를 교회의 통상적인 직책의 용어로 사용하자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이 사모라는 말은 이미 사회 일반 전체에 통용되고 있는 정상적인 사전적 표준어이기 때문에 이 호칭어를 교회의 직책 용어로 정할 수도 없는 일이다. 또한 잘못 남용할 때는 일반 사회인들로부터 지탄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흔히 하는 말로 좋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사모라는 말이 덕스럽고 예의를 갖춘 아름다운 존칭어로 보이지만, 이를 자칫 남용하면 오히려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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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22
  • [김성수 총장] 공의가 하수 같이…
    현대사회는 과학과 과학 기술 등 여러 면에서 굉장한 승리를 쟁취한 사회이면서도 동시에 전례 없는 부정과 부패, 불공정, 불의, 고통 그리고 비극에 깊이 빠져있는 세계이기도 합니다. 방대한 선택의 범위를 구가하면서 자국의 시민들은 거대한 자유를 누리게 하는 바로 그 정부가 전 세계적으로 수십억에 달하는 사람들을 영속적인 가난의 상태에 머물도록 만들고,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정치테러와 고문이 그들의 항존적 환경이 되도록 지원하거나 그러한 불의를 자행하는 부정의한 현실이 바로 현대사회의 한 심각한 비극이기도 합니다. 우크라이나의 비극을 보면서 우리 모두는 함께 분노하고 가슴 아파하며 하나님의 공의가 하수 같이 흐르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하늘의 평강(샬롬)을 누리며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공의가 없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평강의 삶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기쁨과 떨림과 환희가 있는 샬롬은 공의로운 상태 하에서만 피어날 수 있습니다. 평화를 깨뜨리는 많은 조건들과 상황들은 공의도 마찬가지로 깨뜨려 버립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공의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상호간의 의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회는 공의를 추구하는 사회입니다. 이와 같은 사회는 언제나 샬롬의 사회를 지향합니다. 그러나 공의를 추구하지 않는 사회는 샬롬의 성취를 가로막습니다. 예를 들어, 방직 공장 안에 어린아이들을 가두고, 자연 자원들을 함부로 낭비함으로 후손들로부터 그것을 착취하며, 자국 영토의 확장을 위해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국가는 불의한 국가이며, 이와 같은 사회와 국가는 공의를 파괴하며 필연적으로 샬롬의 성취를 가로막는 흑암의 세력입니다. 그렇다면 공의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공의라는 단어를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 냉담하고 원칙을 고수하는 비인간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합니다. 공의와 관련하여 연상되는 것은 재판 과정, 법적 절차, 감옥 등과 같은 단어들입니다. 그러나 공의는 본질상 권리와 관계가 있습니다. 공의와 권리는 사실상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자신의 권리를 향유할 수 있을 때 그 사회는 공의로운 사회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권리라는 단어 역시 공의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다소 냉담하고 비인간적인 어떤 것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권리와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연상하는 것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 천부적 인권, 유엔 회원국의 권리, 권리 헌장 등과 같이 다소 추상적이며 고양된 권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권리의 의미를 공의와 관련하여 아주 다른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개인이 어떤 것에 대해 권리를 가진다라고 할 때 그것은 윤리적으로 합법적인 권리, 그것을 실제로 향유함에 대한 주장, 그리고 그 어떤 것을 누림에 있어서 직면할 수 있는 위협으로부터 보장받을 것에 대한 주장을 의미합니다. 권리는 다른 이에 대해 윤리적으로 합법적인 권리입니다. 권리는 다른 이에 대해 의무와 책임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모든 책임이 권리와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모든 권리는 책임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권리는 또한 그것을 실제로 누림에 대한 주장입니다.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된다고 하더라도 그 권리를 실제로 향유하지 못하면 그 법은 공허한 것입니다. 그리고 권리는 그 어떤 것을 누릴 때에 일반적이거나 심각한, 그러나 고쳐질 수 있는 위협으로부터의 사회적보장을 주장합니다. 위협에 대해서 보장하라는 주장을 권리로 보는 것은 권리가 사회에서 약자와 자신을 변호할 수 없는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구상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권리를 우리는 자기 방어의 권리, 자유의 권리, 발언과 참여의 권리, 그리고 안전과 생계의 권리라는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안전과 생계의 권리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입니다. 안전과 생계권은 그것이 없다면 모든 다른 권리가 의미가 없어지며, 기본적인 삶을 보장하는 권리라는 의미에서 기본적인 권리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서구 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대부분의 다른 권리들보다 더 근본적입니다. 언론의 자유는 그것이 얻어지는 만큼 삶에 유익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없이도 많은 다른 권리를 즐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안전과 생계권보다는 임의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전과 가난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관용의 문제가 아니라 권리의 문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안전을 위협받는 자들과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은 살롬의 성취를 위한 필수적인 조건과 같은 것입니다. 부유한 자가 기아에 있는 허덕이고 있는 사람들을 알고 도울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는 육체적으로 그 어려운 자를 공격하는 것만큼 그 주린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인식한다는 것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겠지만, 이것이 바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성경은 공의에 관한 책입니다. 구약의 모세 오경과 선지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공의를 요구하시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에서 공의에 대해 말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사람들은 고아와 과부들, 나그네들, 그리고 가난한 자들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한 사회에 공의가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는 실제적 원칙은 공의가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미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공의가 요구하는 것은 고아와 과부들, 나그네들, 그리고 가난한 자들과 같이 한 사회의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그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가지고 자신의 공정한 몫을 갖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해하는 공의의 본질은 현대 서구사회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공의와는 분명히 다릅니다.  우리는 공의와 권리의 문제를 인간 존재의 아주 섬세한 조직과 같이 가장 근원적인 것에서부터 구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무참하게 짓밟히고 있는 작금의 국내외 정세를 보면서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희생 제물이나 감언이설의 의식이 아니라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흐르게 하라”(암 5:24)는 것임을 갈파했던 아모스 선지자의 호소를 다시금 가슴에 새길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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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22
  • [박동철 장로] 이념의 전장(戰場), 교회가 분명해야할 때다
    제20대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정국은 새 정부 출범을 준비하는 분주함에 들어갔다. 어느 선거보다 국민 관심도가 높았고 그만큼 투표 현장의 열기도 뜨거웠었다. 밤샘 개표 현장은 쉽게 떠날 수 없는 피 말리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윤석열 당선인에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축하를 보낸다. 이번 대통령선거가 왜 이렇게 네거티브의 극단이라 할 만큼 상대 허물만 찾는 선거였을까. 그리고 진영의 위치에서 한순간도 양보 없는 초극 대립된 선거였을까. 선거의 뒷담이 국가사회발전에 던져주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 또한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복음의 사명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선거 결과를 두고 볼 때 지난 5년의 정권은 진보 이념의 세력들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진보적 촛불세력들이 5년간 국가관리에 너무도 부족함을 드러냈다. 대표적 실패가 부동산 정책. 서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너무도 컸다. 실험적 임금고용정책의 실패 등등이 있지만 평화를 내세운 대북정책이 북한에 굴종적 모습을 보임으로써 친북좌파정권이라는 혹된 평가를 받고 정권을 내놓게 되었다. 사실 반일 친북의 기조 속에 국민을 갈라치기 함으로써 더더욱 국민의 정서에 상처를 냈고 혹된 비판을 받았다. 우리 교회가 민감했던 부문은 우리 사회에 소리 없이 들어온 유물론의 산물, 평등사회로의 전환준비를 위한 제반 법들을 만들어 사회를 병들게 하고 교회 복음을 옥죄게 하는 제도가 생기는 것이었다. 한국교회는 이에 사실상 반정부입장으로 악법들 제정에 반대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 같은 사회갈등이 심화된 것은 지난 5년, 정권을 운영해온 주체들이 지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극단 친북 인사들의 정책주도에 따라 나타난 결과라는 지적도 있다. 많은 혼돈이 일어났다. 국가는 이념의 싸움판에서 몸살을 앓았다. 헌법 이념과 대한민국 건국을 두고도 엄청난 논란이 일었다. 북한을 향한 통일의 제안과 소통은 필요하지만 공산주의 집단을 미화시키는 일은 용납 될 일이 아닌 것이다. 따뜻한 가슴으로 통일을 논하되 도발의 북한에 대해서는 냉철하고 단호해야 한다. 지난 정권에는 이러한 대처가 없었다. 이것이 지금 대한민국이 이념의 전장(戰場)이 된 원인이다. 보수의 진영에서는 최대의 위기라는 진단과 함께 정권교체의 큰 장이 형성된 것이다. 복음에 사는 교회는 어떠한가. 지난 5년 동안 악법 제정을 막기 위한 투쟁에 교회가 나섰으며 애국운동이란 화두에 성도들이 편승했다. 걱정되면서도 중요한 것은 교회 내 세대 중심의 시각차가 엄청나다는데 있다. 이념 투쟁이 되어버린 나라, 그 중심에서 교회가 복음을 맘껏 전하고 사회를 건강하게 이끄는데 혼미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젊은 세대는 보수적 이념 논쟁에서 이해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다. 전후세대 한국 근대사를 몸으로 알지 못하는 세대 또한 이념의 공격이 얼마나 교회를 힘들게 할 수 있다는데 낙관하는 점도 있다. 교회를 이끌고 설교를 담당하는 목사와 장로들의 시각이 난처할 때가 많다. 장로의 기도가 다르고, 집사의 기도가 다른 교회 현장에서 교회 지도자들의 혼미함이 생겨나고 있다. 이제 정권교체와 새 정부가 출범하지만 또다시 이념의 전장은 생겨날 것으로 전망된다. 선거에 이기고 졌지만 이념의 투쟁은 이제 시작될 것 같은 나라의 걱정거리가 생겨나고 있다. 여기서 교회가 분명해지지 못하고 혼미해가서는 안될 일이다. 교회 지도자들은 말씀에 근거하여 교회를 지켜내고 나라의 미래를 어떻게 세워갈 것인지 깊이 생각하고 가르치는 지금의 때가 아닌가 싶다. 복음을 공격할 수 있는 차별금지법 평등법 기독사학 관련 등 많은 법들이 국회에 상정되어있다. 너무 현안이 많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교회가 분명히 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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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와 세상
    2022-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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