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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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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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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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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8
  • [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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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3
  • [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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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8
  • [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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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실시간 칼럼 기사

  • [조희완 목사] 오해와 이해 (수22:10-34)
    제주도의 한 교회에 새로 부임하신 목사님께서 어느 날 성도의 가정을 심방하려고 동네를 지나가다가 동네 할머니 한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할머니가 목사님을 보고 “목사님, 어디 감수꽈?”하고 인사를 하기에 “예, 심방갑니다”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아주 의아한 표정을 지으시면서 “목사님도 신방 감수꽈?”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동네에 “교회에 새로 오신 목사님이 무당 집에 다닌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목사님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자초지종을 알아보았더니 며칠 전 심방 가다가 만난 동네 할머니가 원인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심방”(尋訪)간다고 한 말을 할머니가 “신방”(神房)에 간다는 말로 오해를 하셔서 소문을 퍼트렸던 것입니다. 제주도에서는 무당 집을 가리켜서 “신방”(神房)이라고 합니다. 목사님이 한 말을 할머니가 잘 이해를 못한 나머지 오해를 했던 것입니다. 오해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인간관계 속에서 생각지도 않은 일 때문에 오해를 받기도 하고, 또 남을 오해하기도 합니다. 오해를 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것입니다. 내가 남을 오해하는 것도 나쁜 것이고, 남이 나를 오해하는 것도 괴로운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가면 언젠가는 오해가 풀리게 되지만 그러나 오해를 하는 동안은 마음이 참 괴롭고 불편합니다. 그러므로 오해를 하거나 오해를 받는 일이 없어야 하고, 오해를 하더라도 빨리 풀어야 합니다. 본문 말씀은, 가나안 땅 정복을 끝내고 자기 곳으로 돌아가던 용사들이 요단강 언덕에 기념으로 큰 제단을 쌓았는데 그것이 그만 큰 오해의 불씨가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왜 오해를 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오해를 풀 수 있었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오해는 속단에서 비롯됩니다.(10-20) 둘째로, 대화하면 오해가 풀어집니다.(13,14,26,27) 셋째로, 오해가 풀어지면 즐겁습니다.(32,33) 주님의 몸 된 교회 공동체 안에 서로 오해하고 반목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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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9
  • [박봉석 목사] 여백(餘白)
    필자는 목사입니다. 설교 원고를 작성하고 프린터를 해 보면 항상 설교 원고의 위와 아래 그리고 좌우 옆으로 여백이 있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컴퓨터 한글 프로그램이 그렇게 설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때에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여백이 없도록 설정을 하고 프린트를 해 보면 어떨까 하고 말입니다. 독자 여러분은 어떨 것 같습니까? 종이 한 가득 빽빽하게 적힌 글자로 인해서 읽기가 싫을 것입니다. 그처럼 여백이란 필요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은 무엇에든지 꼭 필요한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바쁜 현대의 삶 가운데서 너무 여러분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힘들고 탈진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상태가 문제가 되는 것은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을 수렁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나오는 엘리야 선지자는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와의 기도의 대결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가 문제였습니다. 악독한 우상 숭배자였고 악녀였던 왕비 이세벨이 엘리야 선지자를 찾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열왕기상 19장 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엘리야는 그 이세벨의 위협에 낙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광야로 가서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 간구하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바로 얼마 전에 그렇게 영적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왕비 이세벨의 위협 앞에 그렇게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엘리야 선지자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그런 것입니다. 아무리 강한 것 같아도 한계가 있고 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지쳐서 갈멜산의 그 놀라운 승리는 온데간데없고 그렇게 죽기를 간구할 만큼 한 없이 약해졌던 엘리야 선지자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엘리야를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천사를 보내셔서 그를 위로하시고 두 번이나 구운 떡과 물을 주어서 먹게 하시고 오랫동안 잠을 자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시고 그의 삶에 여백을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를 푹 쉬게 하시고 다음 사역을 감당하게 하셨던 것이지요. 이 하나님의 지혜가 놀랍고 감사합니다. 연약함을 가진 우리 인간은 그렇습니다. 삶의 여백이 없이 달리기만 하다가는 인간의 한계로 인해서 치명적인 실수를 하거나 나락을 빠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아시고 엘리야를 그렇게 위로하고 먹이고 재웠던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알고 목표만을 바라보며 삶의 여백이 없이 달려가는 것을 잠시 멈추십시오. 그리고 나를 돌아보며 삶의 여백을 가지십시오. 육신과 정신이 쉬게 하면서 영적으로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우리는 살면서 그런 경우를 만납니다. 지치고 낙심된 상황에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잘못된 결정을 내리고 나중에 후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모로 기진맥진하거나 마음이 힘든 상태에서 내리는 결정은 그렇게 열에 아홉은 어리석은 결정이 됩니다. 그리고 조급한 마음으로 바쁘게만 나를 몰다보면 앞만 보이고 옆도 뒤도 돌아볼 여유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돌아볼 여유도, 내 도움이 필요한 곳을 돌아볼 여유도 없어집니다. 그러한 삶은 성공적인 삶인 것 같지만 가장 피폐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삶의 여백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오셔서 바쁜 공생애의 삶 가운데서 많은 일을 하셨지만, 조용히 성부 하나님과 기도의 교제를 하는 시간도 빠뜨리지 않으셨습니다. 폭풍같이 영혼을 향한 능력의 사역을 하시면서도 고요한 하늬바람처럼 물러날 줄도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닮으십시오. 예수님보다 더 열심인척 하지 마십시오. 이제 달리기만 하는 삶을 잠시 중단하고 삶의 여백을 만드십시오. 삶의 여백, 그것은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의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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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9
  • [박봉석 목사] 종교개혁주일을 보내며 … 무덤과 비석
    종교개혁주일을 보내며 … 무덤과 비석 종교개혁자 존 칼빈이 세계 기독교 역사에 기여한 공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죽음을 앞두고 결코 자신의 무덤을 치장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무덤을 조금이라도 우상시할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유언을 중시하여서 스위스 제네바의 공동묘지에 묘비도 없이 묻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세월이 흐르면서 후세의 사람들은 칼빈이 어디에 묻혔는지조차 모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1830년, 칼빈을 깊이 흠모하던 네델란드인이 수소문 끝에 그의 무덤을 찾아내었습니다. 그리고 유언 때문에 비석을 세울 수는 없었지만 비석 대신에 존 칼빈의 이니셜인 J. C.를 새긴 붉은 벽돌을 박아 두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비로소 칼빈이 묘는 그 위치가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칼빈이 죽은 지 435주년이 되는 때에, 스위스 제네바 시의회 의원인 미셸로제티라는 사람이 그 칼빈의 묘를 대대적으로 보수했습니다. 무덤 주위에 대리석을 깔고 철책을 두른 다음에 그 앞에 정식으로 동판까지 설치했습니다. 그 동판은 “위대한 개혁자, 존 칼빈”이라고 쓰인 동판이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후 샤를 죠르지라는 이름의 한 제네바 시민이 동판을 설치한 미셸로제티를 고발했습니다. 그 고발 내용은 칼빈의 유언을 무시하고 그분의 묘를 치장했다는 죄목이었습니다. 고발을 접수한 제네바 주 정부 검찰총장은 개인의 유언이 과연 형사고발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심사숙고하겠다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독자 여러분, 이런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기독교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운 분의 묘지를 꾸미고 동판을 세운 것은 잘 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칼빈의 뜻은 다릅니다. 자신이 종교개혁의 과업을 위해서 일한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래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믿음 때문에 결코 자신을 기념하는 무덤의 비석을 세우지 말 것을 유언했고, 그리고 동판을 세운 사람을 고발한 사람은 바로 그 칼빈의 숭고한 뜻을 받들고자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필자는 그분들의 이런 옥신각신 하는 모습이 부럽습니다. 왜 우리나라에는 기독교 선조의 생가나 묘지를 거의 신성시하고 그것을 대대적으로 꾸미고 기념물로 삼으려고 하는지 마음이 씁쓸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을 바친 그분들의 신앙을 더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닌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신사참배의 요구를 끝까지 거부하며 옥고를 치르다가 해방이 되어서 출옥을 하신 고 한상동 목사님은 사역을 다 마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별세하시기 전, 후배 목사님들과 가족들에게 이런 유언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죽고 나면 나에 대해서 기록하고 나에 대해서 말한 모든 문서들이나 사진들은 객관적인 역사적 자료로 남겨야 될 만한 몇 가지만 최소한으로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모아서 불태워 없애버리도록 하라.” 왜 한 목사님이 이런 유언을 하신 것일까요? 자신이 복음과 한국 교회를 위해서 일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자신이 기념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천명한 것입니다. 세상이 역사적 인물의 동상이나 기념비를 세우는 것은 그 인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고백하기에 그런 기념물을 세우지 않습니다. 순교와 헌신의 역사는 책이나 기록을 통해서 후대에 전하는 것으로 배움과 귀감이 되게 하면 됩니다. 그 이외에 신앙의 선조들을 기리기 위해서 동상을 세우거나 생가를 복원하여서 기념하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자신을 드린 선조들의 신앙을 오히려 욕되게 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늘 기념하고 감사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여야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의 사도 바울의 고백을 반추해 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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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5
  • [이정희 목사]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호칭과 지칭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I. 서언(序言) ‘우리 말 바르고 아름답게’란 표어를 본 적이 있다. 이런 면으로 관심이 있는 필자로서는 ‘정말 이렇게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이 표어와 함께 오늘도 올바른 호칭과 지칭어에 대한 내용으로 논하고자 한다. 먼저 본 호에서는 2011년 12월에 국어심의회를 통하여 확정된 ‘표준 언어 예절’에 근거하여 조부모(祖父母/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주 사이의 호칭어와 지칭어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호칭과 지칭의 뜻과 유래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손주를 돌보는 조부모들이 시댁이나 친정의 구분 없이 많아졌다. 필자의 경우도 그러했고, 주변에서도 이런 경우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에 손주의 입장에서 조부모님들을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하는지의 구분이 필요하게 되었다. 1. 뜻과 유래 :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한자어는 조부와 조모이다. 그 뜻은 조상 조(祖), 아비 부(父), 어미 모(母)자 이다. 순수한 우리말로는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이다.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도 문제는 없지만, 오늘날에 있어서는 조모, 조부보다는 주로 할머니 할아버지로 호칭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용어들을 논할 때마다 의문이 되는 것은 한자 용어와 순수한 우리말의 어원이나 발음이 전혀 다른 말들이 많다는 것이다. 앞에서 논한 용어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면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란 순수한 우리말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할아버지에 대한 친족용어가 수록된 가장 오래된 문헌은 고려시대 때 송나라의 사신으로 왔던 ‘손목’이 편찬한 ‘계림유사’란 책에 ‘한아비’라는 호칭으로 기록된 것이 최초이다. 그다음은 1527년 최세진의 ‘훈몽자회’에서는 ‘하나비’로 표기하였고, 친족용어들을 모아서 정리한 ‘최재석’의 ‘한국의 친족용어’에 의하면 할아버지, 할아버님, 할아범, 할애비, 조부, 조부님, 조부주, 현조부, 가조부, 조고 등의 여러 용어들이 있었으나, 결국 중세국어의 음운 변천 과정을 겪으면서 지금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로 되었다. 2. 경우에 따른 호칭과 지칭 :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할까? 먼저 아버지의 부모님을 부를 때는 ‘할머니, 할아버지’이고, 어머니의 부모님을 부를 때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로 부른다. 하지만 양가의 조부모님들이 모두 한자리에 있을 때는 구분을 위해서 ‘외’자를 붙여서 호칭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구분 없이 ‘할아버지, 할머니’로 호칭할 수 있다. 하지만 요즈음은 장수하는 경우가 많아서 아버지의 할아버지 할머니도 생존해 있는 경우들도 많이 있다. 이런 경우에는 ‘증조(曾祖)’라는 말을 붙여서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로 부른다. 그러나 외가의 증조부들에게는 ‘진외(陳外)’자를 부쳐서 ‘진외증조 할아버지’, ‘진외증조 할머니’로 부르기도 한다. 여성의 경우에 결혼해서 시댁의 조부모님들을 부를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해서는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존칭어인 ‘님’자를 붙여서 할아버님, 할머님으로 부르면 된다. 하지만 친정 식구들에게 시댁의 조부모님들을 소개할 때는 ‘시 할아버님’, ‘시 할머님’으로 지칭한다. 마지막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손주와 외손주를 호칭하고 지칭할 때는 어떠할까? 누구든지 마찬가지지만 조부모의 손주 사랑은 아주 각별하다. 요즈음은 휴대폰에 손자 손녀의 사진을 배경 그림으로 넣을 정도로 유별나다. 그렇다면 이런 사랑스러운 손주를 부를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에 대해서는 특별한 호칭과 지칭보다는 그냥 가장 친근한 손주의 이름을 부르면 된다. 그러나 손주가 결혼해서 자녀가 생기면 그 아이의 이름뿐만 아니라 ‘OO 아범, OO 어멈’, ‘OO 아비, OO 어미’ 등으로 부를 수 있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이런 친족용어의 호칭어와 지칭어들은 흔히 사용하는 익숙한 말들이지만, 실제로 사용하다 보면 혼돈이 올 때도 있다. 하지만 조금씩 더 노력한다면, 가족 상호간의 아름다운 위계질서와 집안의 화목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 모두 바람직한 가족 간의 언어문화 창달에 앞장설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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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5
  • [오성한 목사] 말씀을 네 마음속에 지켜라.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21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속에 지키라 22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잠4:20-22) ‘마음’은 바로 당신 존재의 핵심을 의미한다. “내가 주께 범죄 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119:11). 사람이 죄를 이길 수 없다. 죄를 이기는 방법은 주의 말씀을 마음에 두는 것이다. 말씀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 이것이 죄를 끝내는 유일한 방법이다. 토의가 쓸모없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육간의 건강이다. 말씀이 약이다. 모든 육체에 약이다. “내가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요6:63). 케네스 헤긴의 고백을 더 들어 보자. 그가 몸이 찌부둥 할 때는 “나는 약을 두 배로 먹는다. 복용량을 배로 늘인다.” “성경읽기를 두 배로 더한다. 그 말씀은 이적을 일으킨다.”고 했다. 잠언의 말씀은 하나님의 약을 반복해서 강조한 것이다. 마음(heart)에 적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마음에 항상 품으라는 말씀이다. 늘 주의하라는 말씀이다. 보통 사람들은 말씀에 주의하지 않고 산다. 그러나 말씀으로 마음을 고치라고 하신다. ‘마음을 고쳐라’고 하면 기분 상해하기도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더 좋은 휴대폰 앱(app.어플)을 소개하면서 바꾸라고 한다고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 마음을 바꾸라는 말은 자신을 바꾸라는 말과 같기에 기분 상해한다. 나를 완전히 죽인다는 말이고 죽일 뿐 아니라 말씀으로 채우라고 하니 맘을 상해 할 수 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약은 영이요 생명이다(요6:63). 믿을 뿐만 아니라 영에 적용해야 한다. 어떤 약속을 읽고 외울 수 있겠지만 그 말씀이 실제로 이미 영에 있다. 주님의 말씀은 영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은 영이 아주 기뻐한다. 영이 기뻐함을 알고 행하려고 노력하라. 말씀이 영(heart)에 있지만 인지하지 못하고 머리만 두려고 노력한다. 이미 암송하고 있는 말씀을 더욱 반복해서 암송하거나 읽어라. 그리고 마음에서 터져 나오는 묵상이 되게 하라. 기도는 마음에서 터져 나오는 말씀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케네스 헤긴은 딸의 눈 옆에 종기가 자라는 것을 보고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기로 결단했다. 그는 “병 고침에 관한 성경 말씀을 한 시간 동안 읽어야겠다.”고 결단했다. 그는 병 고침에 대한 말씀을 거의 다 암송하고 있었다. 또 성경에 줄이 모두 그어져 있었다. 그래도 그는 그렇게 했다. “여기 한 시간만 누워 이 말씀들을 중얼거리며 읊조려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했다. ‘묵상하다(meditate)’라는 단어는 ‘낮은 소리로 읊조리다, 중얼중얼 거리다(mutter)’라는 뜻이다. 그는 피곤이 몰려 올 때 “한 시간 자고 나서 일어나 또 한 시간 이 구절들을 읊조려야지, 그리고 또 한 시간 자고 일어나 또 한 시간 읊조리고 아침까지 해야지.”라고 말하며 실천했다. 그에게 그 때 필요한 것은 딸의 치유였기에 다른 것을 읊조릴 필요가 없었다고 말한다. 말씀은 반복해서 읽고 묵상해야 한다. 말씀으로 인해 마음속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 기도인데 말씀이 기도되게 해야 한다. 케네스 헤긴은 다음 날도 읽고 묵상하길 반복했다. 그는 2+2=4이고, 3+6=9인 것을 아는 것처럼 딸의 치유를 마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는 아내에게 편지를 써서 딸에게 “2+2=4이고, 3+6=9인 것처럼 너는 나았단다.”라고 전하라고 했다. 딸은 이 말을 듣고 잠깐 서있더니 “아빠가 그랬으면 그렇겠지.”라고 하곤 나가 놀았다. 의사에게 경과를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그는 “약을 나의 영에 장착했다. 딸은 치유되었다.”고 고백한다. 음식을 아무리 많이 본다고 배부르지 않다. 성경이 바로 그렇다. 토론을 하고 외우기도 하고 공부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영 깊이 뿌리내리지 않는다면 말씀이 우리에게 그대로 역사하지 않는 것이다. 계속 말씀을 먹어라. 항상 말씀을 마음에 장전하라. 말씀이 마음에서 터져 나오도록 하겠다고 생각하며 맘을 열어 놓으라. 강한 믿음을 지키려면 말씀을 계속 먹으라. 믿음의 말씀을 끊임없이 먹으라. 음식을 한 번만 먹는다고 건강해지지 않는다. 몸은 먹는 대로 만들어진다. 운동도 해야 한다. 계속 먹고 운동해야 한다. 믿음과 치유의 말씀 구절을 계속 먹으라. 매일 믿음과 치유의 말씀을 계속 읽으라. 다른 사람에게 그런 역사가 있으니 나에게도 그런 역사가 일어날 것을 단순히 믿고 말씀을 장착하라.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 지는 것은 진리다(딤전4:5).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의 약을 당신의 영에 장착시켜라! 앞에서 언급한 마가복음 속의 예수님의 사역의 말씀을 암송하여 마음에 창착해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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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5
  • [신재철 목사] 코로나, 열지를 못하겠다
    코로나, 열지를 못하겠다 2019년 1월, 교회를 개척했다. 2020년 1월, ‘코로나19’라는 낯선 손님이 등장했고 동행하기 시작했다. 과거 신종플루에 걸려 아파본 경험이 있다. 뉴스에 신종플루에 의한 사망자 소식이 들려올 때 방구석에 격리되어 누워보았다. 워낙 약골이라 아픈 것에 익숙했지만 이 녀석은 차원이 달랐다. 정말 아팠다. 여하튼 신종플루가 신약이 나오며 끝이 났듯 코로나도 그렇게 정리될 줄 알았다. 하지만 확산세와 치명도가 신종플루와 달랐다. 사람들은 모이지 못했고 여름에도 마스크를 써야 하는 독특한 풍경을 만들었다. 상업 시설과 각종 집합시설이 제한되거나 폐쇄되었다. 교회도 예배가 제한되었다. 좋은나무교회도 자발적 온라인 예배를 통해 공동체와 이웃의 안전을 돌아보기로 결정했다. 자연스럽게 만화방은 1년도 못 되어 문을 닫고 언제 문을 열 수 있을지 약속할 수 없게 되었다. ‘이거, 다시 열 수는 있는 거야?’ 1년을 넘어 2년. 만화방은 공식적으로 문을 열 수 없었다. 분위기에 따라 상업 시설은 탄력적으로 제한이 풀리기도 했지만, 우리 만화방은 문을 열 수가 없었다. 이미 주변에서는 우리 만화방이 일반 상업 시설이 아니라 교회에서 운영하는 것임을 알기에 문을 열었다가는 교회의 이기심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종종 만화방을 찾던 아이들을 길에서 마주한다. 마스크를 쓰고 있지만, 얼굴을 알아보기 어렵지 않았다. 2년이 지나 제법 훌쩍 커버린 아이들. 여러 생각으로 마음이 아리다. 하나님의 타이밍은 늘 선했다. 하지만 이 시기의 코로나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품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만화방 언제 열어요?” 이런 내 속도 모르고 지나는 나를 붙잡고 종종 묻는 아이들이 있다. 가끔 전화가 걸려 오기도 한다. 문을 열어 줄 수 있다. 라면도 끓여 줄 수 있다. 어려울 게 뭐가 있을까? 하지만 아이들이 놀다가 병이라도 걸리면, 서로 옮기기라도 하면 더 큰 어려움이 되기에 거절해야 했다. 미안함 가득 품고 다음에 만나자 인사해야 했다. ‘언제 한번 밥 먹자.’ 지인과 나누는 인사처럼 기약이 없다. 코로나, 그래서 열지를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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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5
  • [최호숙 목사] 인간의 자기합리화(self justification)
    자기합리화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자책감이나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자신이 한 행위를 정당화 하는 일 또는 그 심리적 경향”을 의미한다. 정신분석학에서, 어떤 행동을 한 이후에 초자아(superego)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죄책감이나 불안을 억누르기 위해 자아(ego)가 자신의 행동을 포장하고 합리화하는 것이라고 한다. 배고픈 사자가 토끼를 발견하여 잡아먹으려고 쫓아갔다. 토끼는 최선을 다하여 필사적으로 도망하였다. 사자는 토끼를 놓치고 말았다. 다른 동료 사자가 물었다. “어째서 연약한 토끼 하나 못잡나?” 그 사자는 씩씩거리며 말했다. “토끼는 도망가는데 목숨이 달려 있지만 나에게는 저녁 한 끼만 달렸을 뿐이었지!” 이것은 사자의 자기합리화이다. 사자는 최선보다 차선을 택해놓고는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 시키는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차선이라는 방편이 있기 때문에 어떤 일을 성취하지 못하고 쉽게 포기하며 또한 나태에 이르기까지 한다. 배고픈 여우 한 마리가 먹을 것을 찾다가 포도나무를 발견하게 되는데 나무에 달린 포도가 높이 달려 있어 노력을 해봐도 포도를 따 먹을 수 없게 되자 “저 포도는 신포라서 먹을 수 없을 거야” 여우는 먹고 싶었지만 불가능한 것을 알게 되자 먹을 수 없는 현실을 부정하기 위하여 애초부터 먹고 싶지 않았던 것처럼 이야기하고, 먹지 못한 포도를 신 포도로 왜곡시키는 “자기합리화”를 선택했다.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반응을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로 인해 생겨난 심리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방어기제하고 한다. 자기애의 집착에 빠져있는 사람은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고 자기합리화가 심해 분노나 섭섭함을 자기중심적 사고 체계 속에서 극단적으로 표출한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차선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최선을 요구하신다. 하나님 섬기며 봉사하는 일에도 최선 가정을 돌보는 일에도 최선 사회생활에도 최선 무슨 일에든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바른 것이다. 자기합리화로 끝나거나 차선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불신앙의 삶이다. 성도들에게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백하기를 인간은 무능하지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고 하였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7)” 우리 인간은 무한한 존재가 아니며,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전능자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포기한다거나 자기합리화 시키는 것은 불신앙이다. 바울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고 그분 안에서 새 힘을 공급받아 승리적인 삶을 이루어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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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5
  • [박동철 장로] 21세기 이스라엘 블레셋 전쟁(2)
    혼합을 원치않는 하나님의 강한 메시지 며칠 전 창원극동방송 공개홀에서 아키바 토르 주한 이스라엘대사 초청 특강이 있었다. 이즈음 이스라엘대사 초청 특강이 열린 데는 당연 지금 포염에 휩싸인 이스라엘 하마스전쟁의 실상을 듣고자 하는데 있다. 필자도 참석해서 진지한 강의를 들었다. 예상했던바 대로 아키도 대사의 강의 내용은 지난 10월7일 가자지구 무력단체 하마스가 잔인하게 이스라엘 민간인을 공격한 실상을 비판하는데 있었다. 이스라엘의 향후 전쟁에 대응할 방향을 하나하나 제시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비롯 중동 반 이스라엘 이슬람제국을 이길 수 있다고 설파했다. 우리나라가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현 실정에서 당연 이스라엘 입장에서 중동전쟁 대처를 이해할 수 있었다. 모든 상황을 두고 전쟁이 끝나고 세계평화가 함께하길 기도하고 싶다. 우리가 예수 구원의 위대한 복음의 소망에 살아가지만 복음의 중심에 있는 이스라엘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여기에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는 설교가나 학자들을 통해서도 딱부러진 이해를 하기가 어렵다. 이는 깊고 넓은 인류의 역사 속 하나님의 섭리를 쉽게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번 21세기 5차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하마스 이스라엘의 공격을 두고 우리는 한번쯤 이곳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찾아가볼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은 어떤 나라인가. 세계 인류의 역사 속에 토인비가 말한 도전과 응전의 역사관 속에 항상 주역이었던 이스라엘 민족의 유대인. 이들이 만들어내는 세계역사는 지금도 주역이자 주도권을 갖고 있다고 봐야한다. 성경에서 주님 명령했던 아브라함의 가나안땅, 모세와 여호수아의 가나안 땅 지향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그곳에서 태어나는 신비를 보였다는 역사를 우리는 이해하고 있다. 위대한 구원자 예수가 태어날 때 그때 이스라엘은 어떠했는가. 주변 4대제국에 이어 로마제국의 노예가 되어 처참한 역사를 쓸 때이다. 그 중심에 예수의 공생애 사역이 있었다.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 유대인은 메시아 예수를 부인하고 지금껏 그 역사 속에 있다. 최대의 아이러니다. 긴 역사의 부침 속에 이스라엘은 로마에게 마사다 항전을 끝으로 무참히 멸망한데도 그 중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로마서 11장에서 보듯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 끝 날까지의 구원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 세계사속 이스라엘 속으로 들어가 보자. 이슬람의 기반 500년 오스만제국의 역사 속에 유대인들은 온 땅으로 흩어져 디아스포라가 된다. 주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호흡은 계속된다. 1·2차 세계대전과 함께 세계 유대인들의 시온이즘이 시작되면서 이스라엘의 건국운동이 일어난다. 특히 유럽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으로 모이고 모였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1948년 5월 14일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절대 지원으로 이스라엘은 건국하게 되고 세계 속의 이스라엘 국가를 정비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건국됐지만 그곳 실제 거주하던 팔레스타인과 중동 갈등은 본격화한다. 겨우 나라의 걸음마 단계 건국 이듬해 소위 1차 중동 전쟁이 일어나고 예상을 뒤엎고 약체 이스라엘이 아랍에게 대승한다. 이어서 2차 영토 분쟁, 3차 1967년 6일 전쟁에서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게 크게 이긴다. 이후 50여년 끊임없는 분쟁과 정전협상 속에서도 진정한 평화는 찾지 못하고 있다. 영원한 숙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브레셋)과는 전쟁의 연속된 역사이다. 이번 전쟁에서 하나님은 무슨 메시지를 던지고 계실까. 로마서 11장 25절이 말하고 있다.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될것이니라.”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통한 온 땅의 구원계획, 그리고 이방인에게 먼저 복음과 이스라엘에 대한 계획을 이야기한다. 그 속에 이스라엘을 철저히 적그리스도세력과 혼합하지 않고 끌고 가시는 당신을 이해할 수 있다. 지금 중동전쟁을 통해 던지는 메시지다. 우리도 적그리스도와 절대 혼합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이다. 그것이 끝나지 않는 전쟁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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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4
  • [박동철 장로] 우상 神道의 나라 일본 땅에서 예수 생명을 보았다
    2023년 10월22일 주일 저녁. 주일 예배를 마치고 창원특례시기독교장로총연합회(대표 최주철 장로, 이하 창기장총) 장로들과 부인 등 30여 명이 일본 땅 선교여행을 위해 부산서 카페리호에 몸을 실었다. 연초부터 창기장총 임원회가 일본 성지순례 계획을 세웠다. 희망자를 모집, 일본 땅 기독교 유적코스를 탐색, 현지를 돌아보고 복음의 현실을 살펴보자는 취지였다. 갈릴리 여행사 안내로 밤 9시 넘어 밤배는 부산 여객 터미널을 출발했다. 출발시간부터 부산 앞바다의 야경을 감상하며 삼삼오오 모여 여행의 기대와 일본 복음화의 사전 정보 등 소담한 시간을 보내고 단체 방에서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 8시경 시모노세키 항 하선과 함께 가이드의 인솔로 잠시 옛 영주들의 성이 있던 성하(城下)마을을 둘러보고 나가사키로 3시간 달려 성지가 있는 곳에 다다랐다. 첫 장소는 나가사키 남쪽 히라도. 1549년 스페인출신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신부가 히라도에 첫발을 내딛고 선교의 시작종을 울림으로써 일본에 복음의 씨가 뿌려졌다. 잠시 당시 역사적 개관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로마 카톨릭은 유럽전지역에 전파되면서 면죄부 등으로 타락했으나 마틴 루터가 1517년 종교개혁을 단행 천주교의 개혁 신앙이 널리 퍼져갈 때라고 보아진다. 루터 종교개혁 후 30년이 흘러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신부는 포르투갈 가톨릭 수도회 예수회의 파송으로 일본 땅 히라도에 들어온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관점에서 당시 일본에 들어온 카톨릭은 매우 복음적이고 타락의 신앙에서 개혁된 카톨릭이었을 것으로 보여 진다. 막부전성기 서양문물과함께 복음 상륙 같은 시대 일본 땅은 막부권력시대였다. 당시 오다 노부나가의 쇼군이 강력한 영주가 되어 사무라이 권력을 휘두를때이다. 처음 프란시스코와 동행한 토레스 신부 등이 오다 노부나가와 친한 관계가 되었다. 그 이유는 포르투갈에서 조총이 들어옴에 따라 일본의 권력자들은 서양문물에 대한 호기심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작용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시대 역사를 살펴보자. 오다 노부나가에 이어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권력을 잡고 초기 서양종교를 받아들이게 된 것 또한 서양 무기도입에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592년 도요토미는 조선을 침략한다. 서양조총을 들고 중국 명나라를 갈테니 길을 내어달라며 조선 땅을 침략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만들었다. 일본의 초기 복음의 전파가 우리에게 회한을 던져준다. 우리 땅의 천주교역사는 이때 임진왜란과 함께 일본에서 선교사들이 들어왔으나 뿌리 내리지 못했다. 이후 한참 뒤 중국에서 카톨릭 선교사들이 들어와 뿌리를 내렸다.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조총 등 신무기를 들고 우리 땅에 먼저 들어왔다면 우리의역사가 어떻게 됐을까? 항상 우리는 주님의 깊은 뜻을 알 수 없다는데 순종해야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 하에서 우리는 지금 복음의 강국이 되었고 일본은 복음이 약하기 그지없는 땅이 되었다. 아무튼 일본 땅 첫 복음지 히라도에는 프란체스코 하비에르 신부가 처음세운 교회당 터만 남아있고 그곳을 성지로 성역화해 가꾸고 많은 순례자들이 다녀가고 있다. 아울러 당시 기거하던 집터 기무라와 기념공원도 볼 수 있었다. 500여 년 전 이곳에 복음의 씨를 뿌린 하나님. 그 복음의 향기가 히라도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히라도에서 온천욕을 즐기며 일 박한 후 다음날 일행은 나가사키로 이동했다. 규수지역 복음지경 확장 ‘작은 로마’ 규수지역의 넓은 땅 중 나가사키에 또한 많은 옛 선교지를 볼 수 있었다. 히라도에서 복음의 씨가 자라 나가사키로 지경이 확장되면서 곳곳에 성당이 들어서고 작은 로마라 일컬어질 정도로 부흥했다. 당시 일본 땅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막부시대 천하통일을 하고 조선 땅 침략을 꿈꾸고 있을 때 이다. 도요토미는 초기 서양각국과 교류를 위해 교회를 인정하다 세력이 갑자기 커지는데 불안을 느끼고 본격 탄압을 시작했다고 한다. 도요토미가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고 탄압한 원인은 당시 스페인 선교사들이 일본에 들어와 결국 일본을 점령한다는 소문에 더욱 격노하여 가혹한 교인 색출에 나섰다. 곳곳에 숨어 지내던 성도들을 한마을에서 밀고함으로서 26명을 한꺼번에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나가사키 니시자카의 언덕에서다. 1597년 2월 5일이라고 순교 터에 적혀있다. 도요토미는 자기가 일으킨 임진왜란이 우리의 이순신 장군에게 패전으로 끝나갈 때 급사한다. 임란 역사서에는 도요토미가 천주교신자로 기록되어있지만 실제 부하 고니시 유키나가가 신실한 신도로 알려져 있다. 다음 권력을 잡은 쇼군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그즈음부터 200년 동안 일본은 기독교를 탄압하는 시대 수많은 순교자들이 생겨났다. 열도의 나라 뜨거운 100도 온천수가 나는 곳에 성자들을 밀어 넣고 불에 태우는 처참한 순교의 현장이 26성좌 순교를 비롯 나가사키 일대에 산재해 있다. 여러 공원에서 볼 수 있었다. 곳곳에 후일 세워진 순교자 위령비에 한국인 13명의 명단도 있어 마음이 짠함을 느꼈다. 200년 추방 탄압에 못이겨 산속으로 숨어 살다 나가사키에 다시 복음의 그루터기에서 새 생명이 피었다. 200년 동안 믿음의 생명들은 산속에서 지하에서 숨어 기도하는 시간이 흘렀다. 일본에는 막부시대가 가고 메이지 유신과 함께 종교 개방책에 따라 나가사키에 교회가 세워진다. 바로 국보로 지정된 오우라 천주당. 흩어졌던 신자들이 성당에 높이 세워진 십자가를 보고 몰려들었다고 안내 책에 기록되었다. 5백여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일본은 기독교 인구가 1퍼센트도 안되지만 나가사키 일대에 대부분 모여 이 지역에 10%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순교의 피의 역사는 곧 주님의 은혜의 골짜기가 된다는 진리를 입증하고 있었다. 성지 순례를 마무리하면서 나가사키 우에노마치에 있는 원폭피해자 나가이 타카시박사의 원폭상처를 노래하는 기념관을 방문했다. 1945년 8월 14일 2차 대전 말 연합군은 일본 히로시마에 이어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다. 이로써 2차 대전이 끝나고 우리나라 또한 치욕의 일제 36년에서 해방한다. 이 거대한 역사의 반전에 원폭 피해의 이야기가 눈물겹다. 당시 의학박사로 두 자녀와 행복했던 타가시박사는 아내를 그 자리에서 잃고 본인은 백혈병 등 10가지 넘는 온몸이 찢어지는 장애인이 되었다. 그러나 박사는 일본의 잘못을 자백하며 다시는 원폭의 역사가 없도록 용서와 화해의 노래를 하고 43세에 세상을 떠난 이야기를 장식한 나가이 타가시 기념관을 찾았다. 마음이 무거웠다. 눈에 들어오는 벽에 그린 사랑의 노래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에게 남기는 메시지. “네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너희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은 이 말씀으로 시작하고싶다. 끝도 이 말씀으로 맺고 결국 모두가 이 말씀으로… 사랑하는 아이들아” 긴 여운을 던졌다. 오늘의 일본, 전범국으로서 경제 강국이다. 무장해제 된 나라이지만 자위대의 위력이 무섭다. 정직하고 정결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나라 일본을 보고 깊은 생각을 한다. 또다시 속을 알 수 없는 나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으로 다가가야 할 것이다. 그래도 일본 땅에서 지금 예수생명의 씨를 볼 수 있었다는데 있다. 귀가길 성지 순례한 일행 모두의 생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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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30
  • [최호숙 목사] 인간의 공짜 심리
    공짜 심리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힘이나 돈을 들이지 않고 물건 따위를 거저 얻는 것을 좋아하거나 원하는 마음”을 말한다. 교회 내 체육대회를 한다거나 어떤 경연대회를 한다거나 모임 행사에 경품 추첨이 있으면 인원동원이 수월하고 모임에 활기가 있다. 영어권에서는 ‘자유’와 ‘공짜’ 모두 ‘free’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아 혼동이 생기는 경우가 많은데 어쨌든 대부분의 인생은 공짜를 좋아한다. 목사도 사람인지라 추석 명절이나 설 명절이 되면 은근히 성도들이 선물이라도 가져오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있다. ‘선물’ 하면 몇 년 전 교회 내 부흥회 사건이 기억 속에 떠 오른다. 부흥사 목사님이 오셔서 부흥집회를 하는데 시간마다 담임목사님 잘 섬기라고 강조하는 통에 너무도 민망했던 적이 있다. 마치 강사와 담임목사가 짜고 치는 고스톱 같아 필자가 성도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였다. 그것도 모자라 한 수 더 나아가 또 강조하기를 “요즘 시대 명절에 누가 목사에게 시시하게 과일바구니 가지고 오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돈 봉투면 몰라도...” 그 부흥회 이후로 명절이 오면 목사 가정에 돈 봉투 주기는 부담이 되고, 과일 선물하면 목사가 시시하게 생각할 것 같아 성도들이 이것도 저것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어 목사는 명절에 빈 손이다. 마음에 서운함 보다는 차라리 내가 섬기자 하고 오히려 많은 분들에게 내가 손수 선물을 하고 있다. 그것이 마음 편하고 좋다. 무엇인가 받으면 준 사람은 기대 심리가 있어 오히려 불편하다. 옛날 중국 요왕이 학자들에게 백성들이 교훈 삼을 만한 책을 편찬하라고 명령했다. 학자들은 1년 동안 고심하여 책 10권을 만들어 왕에게 바쳤다. 그러나 왕은 “먹고살기 바쁜 백성들이 한가롭게 10권의 책을 언제 읽겠느냐” 하면서 1권으로 만들라고 하였다. 1권으로 요약하여 바쳤으나 왕은 다시 1권도 많으니까 1장으로 요약하라고 했다. 1장도 많으니 다시 1줄로 요약하라고 하였다. 결국 학자들은 왕의 명령을 따라 1줄로 요약하여 바친 말은 “세상에 공짜는 없다”였다고 한다. 우리나라 속담에 “공짜면 소도 잡아 먹는다”는 말이 있고, 북한 속담에는 “공짜면 양재물도 마신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그렇게 할 사람은 없겠지만 공짜 싫어할 사람은 세상에 없음을 풍자한 말이다. 반면,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는 말도 있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며 열심히 일해야 댓가를 받을 수 있다는 일종의 도덕률이다. 공짜로 생긴 억만금의 돈(재물) 보다는 자신의 땀과 수고가 담긴 예물을 귀히 보신다. 불로 소득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이 아니다. 로또복권을 사서 한순간에 부자가 되고 싶은 것은 인간의 욕망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처럼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의 명언 “If you're not paying for it, You are the product. (뭔가를 공짜로 쓰고 있다면, 당신이 바로 상품이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일하여 먹고 살기를 권하신다. 공짜 심리는 도적과 같은 마음이요 욕심이 담겨진 정당하지 못한 마음이다. 공짜를 받았다면 다음에 더 큰 것으로 베풀려고 하는 마음이 아름다운 마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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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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