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행연월일 2026-04-20(월)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설교/강의

실시간뉴스
  • [김성수 총장] 칼빈의 추억 한 토막
    종교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지만, 한 가지 인상 깊은 장면을 회상한 것은 기록되어 있다. 테아 반 힐세마(Thea B. Van Halsema)가 저술한 『This was John Calvin(이 사람 존 칼빈)』이라는 책을 보면, 칼빈은 어머니와 함께 짧은 순례길을 걸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골짜기를 따라 두 시간을 걸은 끝에 도착한 곳은 예수의 외할머니로 여겨지는 성 안나의 유골이 안치된 사당이었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들어 올려, 금으로 장식된 관 안에 누워 있는 유골에 입을 맞추게 했다. 사당 안은 촛불로 밝고 향기로웠으며, 숭배하는 순례자들의 눈빛은 경건으로 가득했다. 어린 칼빈에게 그것은 아마 신비롭고 감동적인 체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이 장면을 바라볼 때, 그것은 단순한 종교적 정서 이상의 것을 내포하고 있다.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말 세 마디가 끝나기도 전에 성당의 종소리가 울린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성읍 생활의 중심이 되었던 중세 말 교회의 풍경은 단지 아름답고 경건한 외양만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신앙의 본질이 흐려진 채 형식과 외적 숭배에 몰두한 영적 타락이 도사리고 있었다. 가톨릭 교회의 형식주의와 권위주의, 성유물의 과도한 숭배, 그리고 성직자들의 탐욕은 교회의 영적 본질을 흐리고 있었다. 성 안나의 유골만이 아니라, 세례 요한의 머리카락, 예수의 치아, 오병이어 사건의 빵 부스러기, 가시관 조각과 구약시대 만나의 조각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성유물이 사람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교회는 이러한 유물들을 통해 기적을 기대하고 은총을 얻으려는 사람들의 심리를 자극했고, 성직자들은 이를 통해 물질적 이익과 권력을 얻었다. 더 나아가 성당과 수도원은 특정 유물의 진위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다투었으며, 이 논쟁은 지역의 종교적 경쟁심을 자극했고, 프랑스 의회조차 이를 조정하지 못할 정도였다. ‘성인’의 이름을 붙인 성당이나 수도원은 유골을 소유한 장소로서의 권위를 주장했고, 이는 종종 종교적 신비주의를 이용한 경쟁과 탐욕의 장이 되었다. 말하자면, ‘거룩’은 거래되고, ‘은혜’는 판매되었으며, ‘경건’은 형식으로 포장되었다. 이 모든 모습은 한마디로 ‘거룩함의 상업화’였고, 진리 대신 형식과 기적, 외적 경건에 목을 매던 교회의 실상이었다. 이러한 부패는 개혁자들로 하여금 교회의 본질을 되묻게 했고,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잉태하게 했다. 칼빈은 단지 교리의 개혁자가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을 지닌 영적 개혁자였다. 그는 말씀으로 돌아가야 함을 외쳤고, 유골과 형상과 건물 안에서가 아니라, 성령의 조명 아래 말씀과 신앙의 참된 삶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함을 강조했다. 그의 신학과 실천은 교회의 본질을 새롭게 정의했다. 교회는 권위의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충실한 선포와 성례의 정당한 시행이 있는 곳이며, 무엇보다 복음이 살아 움직이는 믿는 자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문제는 과거의 부패가 오늘날에도 형태만 달리하여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교회는 더 이상 성인의 유골을 입맞추지 않지만, 또 다른 유물들을 만들어 숭배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 화려한 예배당, 웅장한 무대, 감정을 자극하는 조명과 음악, 유명 목회자에 대한 절대적 의존, 그리고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사역 성과들이 우리 시대의 새로운 성유물이 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때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상징처럼 여겨지지만, 실상은 인간의 욕망을 투영한 현대판 형식주의일 수 있다. 교회는 언제나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오늘날의 교회 안에도 ‘가시관 조각’이 있다. 그것은 더 멋진 무대, 더 화려한 예배당, 더 대형화된 사역과 같은 것들이다. 물론 이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이 중심이 되어 하나님을 도구화하고, 복음을 수단화하며, 인간의 만족을 위한 종교 행위로 전락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촛불 아래에서 거룩을 잃고 있는 것이다. 칼빈이 외친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는 외침은 시대를 초월한다. 이는 단지 제도 개혁의 구호가 아니라, 매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교회가 교회다워지기 위한 끊임없는 성찰과 순종을 요구하는 외침이다. 칼빈의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은 단지 과거의 회고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거울과 같은 통찰이다. 그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성유물 앞에서 입을 맞췄던 기억은, 우리가 누구의 손에 이끌려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를 묻는 물음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순례 중이며, 여전히 방향을 선택해야 하는 길 위에 서 있다.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지금 누구를, 무엇을 숭배하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멈추어 서는 것, 그리고 다시금 본질로 되돌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종교개혁의 정신이요, 오늘의 교회가 회복해야 할 신앙의 길이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5-10-30
  • [김성수 총장] 무관심의 절정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말 중에 “멍 때린다”는 표현이 있다. 고유한 우리말인 이 표현은 “아무 생각 없이 한곳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의식이 잠시 멈춘 듯한 상태로 가만히 있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나 한 번쯤은 아무 뉴스에도 반응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한 적이 있을 것이다. 어느새 멍하니 휴대폰을 스크롤하고 있지만, 거기 담긴 전쟁과 죽음, 기후 위기와 삶의 절망적인 광경 앞에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런 현상을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현대 사회는 너무 많은 것을 너무 자주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미지가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감정이 교묘하게 조작되며, 반응은 형식화된다. 심지어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피곤한 시대다. 바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그 시점이다. 이것을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무관심의 절정’이라고 불렀다. 이 무관심은 감정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감정을 과잉 소비한 끝에 마비된 상태다. 현대 사회는 모든 것을 이미지화하고, 의미로 포장하고, 감정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구성한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 많은 자극과 너무 많은 반응이 반복되다 보면 오히려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감정이 남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관심이 있던 자리에 무감각이 남고, 연대하려던 마음은 차가운 피로감으로 굳어버린다. 오늘 우리는 매일같이 뉴스, 광고, SNS, 알림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지구 반대편의 절망도, 이웃의 눈물도 잠시 울컥했다가 이내 다른 화면으로 스치듯 지나간다. 더군다나 진짜는 없고 이미지만 판을 친다. 이제는 인간의 슬픔도, 정의도, 연대도 모두 기호화된 감정이다. 그것은 진짜처럼 보이지만 반복되고 조작되고 연출된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이것이야말로 현대인의 감정 소진이며, 이 무감각이야말로 가장 극단적인 무관심이라고 말한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감정 소진 상태가 점점 자연스러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무관심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여긴다. 냉소와 피상적 반응은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 된다. 지금 이 시대는 누군가를 위해 슬피 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슬퍼 보이는 모습”을 공유하는 것으로 충분한 시대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도다 함과 같도다.”(마태복음 11:16-17) 보드리야르가 진단한 것은 이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는 것이다. 사회가 감정을 조작하고, 욕망을 설계하며, 공감의 언어마저 포장하는 구조 속에서 우리는 반응하는 법을 잃고 느끼는 법을 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조가 너무 익숙해져서 더 이상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 진짜 위기가 시작된다. “무관심의 절정”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각성해야 한다. 피로한 감정이 일상이 되었고, 감정 없는 반응이 습관이 되었을 때 우리는 진지하게 성찰하고 질문해야 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아니, 나는 아직도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가? 희망은 물음에서 시작된다. 감정을 회복한다는 것은 단순히 감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아파할 수 있는 능력, 누군가의 말에 진심으로 귀 기울일 수 있는 여백, 눈물이 마르지 않은 마음을 회복하는 것, 기호와 이미지에 휩쓸리지 않고 실재를 붙들 수 있는 용기를 갖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아직도 누군가의 고통 앞에 멈출 수 있다면 완전히 늦은 것은 아니다. 무관심의 절정 한가운데서 우리는 다시 ‘느끼는 연습’이 필요하다. 다시 사랑하고, 다시 분노하고, 타인의 고통에 다시 공감하고 연대하는 감정의 회복, 그것은 거창한 변혁이 아니라 아주 작은 감각의 틈에서 시작된다. 눈앞의 사람을 다시 바라보는 것, 뉴스 속 타인을 내 삶 안으로 초대하는 것, 멀리 있는 고통을 내 언어로 말해보는 것, 그렇게 우리는 다시 공감의 감정을 살아낼 수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우리를 조금씩 움직이게 한다. 반응하게 하고, 기도하게 하고, 다시 붙들게 한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자리에서 다시 울컥하게 만들고,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게도 만든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다. 지금, 우리는 감정을 회복해야 할 시간 한가운데에 있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5-09-09
  • [김성수 총장 ] 교육에 숨어든 문화 막시즘
    우리는 지금까지 학교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유용한 참된 지식을 배우는 곳이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지난 수세기 동안 교육에 대한 이와 같은 신념에 대해 수많은 비판들이 제기되어 왔다. 이와 같은 비판들 중에는 교육을 긍정적으로 발전시키는 비판들도 있었고, 교육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비판들도 있었다. 특히 교육은 단순한 지식의 전달 과정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을 배우게 하는 것이라는 중요한 통찰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현대 교육이 그렇게도 중요하게 강조하는 이 ‘생각하는 방식’의 교육이 지켜야 할 경계선을 넘어서고 있는 것을 보면서 염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방식’은 때로 우리가 전통적으로 믿어왔던 가치들, 예를 들면 가정, 신앙, 성, 국가, 책임과 같은 소중한 가치들과 충돌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것을 단지 ‘세상이 변했다’고 넘기기 쉽지만, 그 이면에는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온 하나의 사상적 흐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문화 막시즘’(Cultural Marxism)이다. 문화 막시즘은 한마디로 말해서 교육과 문화를 통해 세상의 기존 질서를 바꾸려는 시도다. 이들은 정치 혁명보다 문화 혁명을 중요하게 여긴다. 고전 막시즘이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쳤다면, 문화 막시즘은 “억압받은 소수자여, 깨어나라”고 말한다. 경제 계급 대신 젠더, 인종, 종교, 가족, 성적 지향 등 다양한 정체성이 투쟁의 중심이 된다. 그리고 그 가장 좋은 전파 수단이 바로 ‘학교’라는 교육의 현장이다. 한 초등학교 사례를 보자.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공립초등학교에서, 1학년 학생들에게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단지 신체 구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느끼는 정체성이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교육이 시행되었다. 아이들은 “나는 남자지만 여자일 수 있고, 여자지만 남자일 수 있다”라고 적힌 그림책을 읽는다. 성경적 창조 질서에서 벗어난 이 가르침은, 아직 성 정체성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큰 혼란을 준다. 문제는 이 교육이 ‘포용성과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당연시된다는 점이다. 이런 교육에 반대하는 학부모는 ‘차별주의자’로 낙인찍힌다. 이것이 문화 막시즘의 특징이다. 표면적으로는 자유와 평등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이념만을 강요한다. 또 다른 예는 역사 교육이다. 과거에는 학생들이 학교 교육을 통해 미국 건국의 이상이나 민주주의의 발전, 인류 보편 가치에 대해 배웠다면, 오늘날에는 ‘식민주의’, ‘인종차별’, ‘억압의 역사’라는 틀로 모든 역사를 해석하는 시각을 학습하고 있다. 물론 경직화된 전통적인 교육에 대한 이러한 비판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균형이 무너지면서 또 다른 세계관을 주입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이러한 교육으로 인해 학생들은 ‘자신의 문화와 조상은 억압자였고, 자신은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죄책감 속에서 자라게 된다. 이는 건강한 시민의식이 아니라 분노와 분열을 키우는 왜곡된 교육이다. 이 역시 문화 막시즘의 전략이다. 공동체를 해체하고, 소속감보다는 투쟁심을 주입하는 방식의 이념적인 학습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교육 현장에서 종교적 표현은 점점 더 배척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한 공립 고등학교에서 한 학생이 발표 시간에 “하나님은 나의 인생의 방향을 이끄신다”고 말했을 때, 교사는 “종교적 언급은 교실에서 부적절하다”며 중단시켰다. 그러나 같은 수업에서 “성소수자의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발표는 장려된다.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언급은 검열되고, 특정 이념은 보호되는 이중잣대는 교육이 중립성을 가장한 왜곡된 편향이다. 이런 학습은 교육을 ‘무신론적 포용성’의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문화 막시즘은 이처럼 표면적으로는 평등과 자유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전통을 해체하고 하나님을 배제하는 세계관을 퍼뜨리고 있다. 그리고 그 핵심 무대는 바로 다음 세대의 영혼이 형성되는 자리인 학교다. 학교는 언약의 자녀들이 단지 수학과 과학, 언어만을 배우는 장소가 아니라, 무엇이 ‘정상’인지, 무엇이 ‘옳은 가치’인지, 어떤 것을 ‘꿈꾸어야’ 하는지를 배우는 장소다. 학교는 문화 막시즘이 침투하여 장악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는 세계관의 전쟁터다. 교육은 ‘억압의 고발’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귀하게 만들고, 공동체를 세우며, 창조 세계를 잘 돌보도록 양육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 교육자들과 부모, 그리고 교회 공동체는 이제 깨어 있어야 한다. 문화 막시즘은 더 이상 대학 강의실에서만 머무는 철학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 자녀들의 교과서에, 동화책에, 학교 행사에, 교사 연수 프로그램에 은밀하게 침투해 있다. 우리는 교육의 자리를 다시 복음과 창조 질서의 언어로 채워야 한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5-08-13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2) (민12:11-16)
    미리암은 위대한 믿음의 여인이 맞습니다. 하지만 여선지자라는 위대한 칭호를 받은 후 신앙이 제자리걸음을 했습니다. 미리암은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새로운 역사에 발맞추지 못하고 여전히 애굽에서의 사명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모세가 없는 40년 동안 여자로서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진짜 지도자인 줄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진짜 지도자인 모세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는 교만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40년 만에 나타난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기절초풍할 일들을 일으킵니다. 세계 최강의 애굽과 바로도 모세 앞에 쩔쩔맵니다. 애굽을 초토화 시켜버렸고, 애굽의 장자를 죽여 씨를 말려버렸습니다. 여호와의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임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만 대면하시고 바다까지 갈라 마른 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미리암은 40년 동안 여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을 영도해 왔지만 40년 만에 갑자기 등장한 모세의 위용 앞에서 입도 벙긋할 수가 없습니다. 같은 선지자의 위치에서 볼 때 비록 인간적으로는 누나요 동생이지만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영적 권위를 지닌 모세였기에 고개 들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교회들끼리, 특히 목회자들끼리 묘한 질투심과 경쟁심이 있습니다. 곁의 교회가, 다른 교회가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상대적인 박탈감을 갖습니다. 잘못되면 입은 안타깝다고 하면서 속은 이유 없이 고소하고 상대적인 만족을 얻습니다. 교회의 주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망각한 무서운 죄입니다. 사실 이런 현상이 교인들 사이에서도 발생합니다. 곁의 성도가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잘못되면 입은 위로하는 것 같지만, 자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상대적으로 자신의 신앙과 믿음이 좋은 것으로 위로받고 착각합니다. 아주 나쁜 모습입니다. 악한 모습입니다. 교만의 극치입니다. 어쩌면 이것보다 더한 것이 목회자들끼리의 보이지 않는 견제와 경쟁입니다. 주변의 교회가 갑자기 성장하면 상대적 박탈감을 가집니다. 사람이다 보니 비교가 안 될 수 없습니다. 특히 가까운 교회에서 독보적인 성장을 보이면 심각한 스트레스까지 받습니다. 목사 자신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교회의 중직자들이나 성도들도 자연스럽게 목회자에게 압박을 가합니다. 자신은 1년이 가도 전도 한 명 하지 않으면서 교회 부흥을 입에 올립니다. 십일조나 감사헌금은 고사하고 선교나 불우이웃이나 개척교회, 농어촌교회, 은퇴하신 목사님, 가난한 신학생들을 위해 특별헌금 한 푼도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 재정을 입에 올립니다. 더 심각한 것은 설교자들의 교만입니다. 설교하는 사람이다 보니 설교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다른 설교자의 훌륭한 설교에 은혜받기는커녕 허점과 잘못을 찾기에 바쁩니다. 그러니 설교에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현상은 모세를 대적하는 미리암의 아류들입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의 땀방울 하나, 눈불 방울 하나 다 주의 것입니다. 우리는 비교 대상도 아니요, 경쟁상대도 압니다.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한 몸을 이루며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자들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특히 목회자들은 아바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평생 잊어선 안 됩니다. 물론 아바타라 하지만 예수님의 아바타니 영광스럽습니다. 진짜 선지자, 진짜 목회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미리암은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사실 미리암은 누구보다도 이런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몰라서 범한 죄도 무섭지만, 알고도 범하는 죄는 더 무섭습니다. 미리암의 교만은 단순히 그 사람의 성향이나 기질을 나타내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미리암의 교만은 모세의 통치를 방해했고, 이스라엘의 진행을 가로막았습니다. 감히 모세의 영적 권위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감히 같은 선지자였지만 명함조차 내밀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교만은 이 모든 영적 권위 앞에서도 원망과 비방의 고개를 들게 합니다. 호시탐탐 모세의 허점과 실수를 염탐합니다. 교회도 은혜를 계산하는 성도가 있고, 실수와 잘못을 찾아내는 성도가 있습니다. 기회가 왔습니다. 구스 여자가 돌아왔습니다. 이전에 이미 정리된 문제인데도 교만에 사로잡힌 미리암은 영적분력을 상실했습니다. 미리암은 십보라가 돌아오자 속에 숨겨놓았던 원망과 불평을 표출합니다. 원망에 사로잡힌 미리암은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사실까지 망각해버렸습니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4-08-07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1)
    성경 어디에도 미디안의 제사장 딸 십보라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이는데 문제 삼은 장면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사실에 대해 그 어디에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대하는 목소리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할례를 행하여 모세를 살린 사건 때문에 미리암과 아론, 이스라엘백성들이 구스 여인 십보라를 받아들이는데 이의를 달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암과 아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통치에 십보라를 문제 삼지 못하도록 아예 입도 벙긋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아버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사명을 주셨고, 그 사명 감당하기 위해 애굽으로 오는 길에 느닷없이 모세를 죽이시려고 한 것은 구스 여인 십보라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임이 분명합니다. 분명한 이유는 할례를 행하여 모세를 살린 것에 있습니다. 이 장면은 오늘날 우리 같은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받아들이는데 이의를 달지 못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발견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시려 하셨습니다. 완전한 모세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이셨습니다. 완전히 죽이셨습니다. 그래도 십보라는 할례언약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 긴박한 순간에 할례를 행하면 남편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미디안 제사장의 딸과 비교도 되지 않는 신분입니다. 단순히 액면가로 볼 때 우리는 시아버지와 관계한 여인입니다. (마1:3)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우리는 우상의 신전에서 몸을 팔던 기생이었습니다. 우리는 과부요,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우리는 남편을 사지로 몰고 왕과 간음한 유부녀였습니다. (마1:5-6)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인인데 죄인인 줄도 모르는 죄인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답도 없으면서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제 딴에 잘 사는 줄 알지만 무익한 인생이요, 단 하나도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입니다. 혀에는 속임만 있습니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입에는 저주와 악독만 가득합니다. (롬3:10-14)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런 우리가, 그런 우리의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도 달렸고, 예수님의 부활에 나도 부활했다고 고백합니다. 사탄이 생각해도 기가 찰 노릇입니다. 이의를 제기하고 문제 삼을 것이 수두룩한 우리입니다. 아니 우리는 문제 그 자체들입니다. 그런데 삼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합니다. 십보라가 할례 언약을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십보라가 할례를 행하여 남편을 살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불가능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입으로 시인합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것은 100%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십보라가 할례언약을 아는 것과 할례를 행하는 것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그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서십니다. (마10: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눅12: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받아들이는데 그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합니다. 문제 제기도 못합니다. 입도 벙긋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의 예배 자리에, 예수님께서 친히 집례하시는 하늘의 성찬의 자리에 앉혀주십니다. (계12:22-23)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이런 은혜를 받은 성도입니다. 그래도 원망하고 비방하시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것은 완전한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할례를 시행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에 거하며, 주일마다 하늘의 성찬의 자리에 참여하는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4-07-10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4-04-12

실시간 설교/강의 기사

  • 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식언치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지키지 못할 말을 하지 않으시고 말씀을 하셨으면 반드시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약속 언약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십니다. 인간은 죄성이 있어서 거짓말하게 되고 약속을 지키지 않기도 합니다. 인간은 부패했고 거짓되고 죄성이 있기에 신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상황 따라 자신의 유익을 위해 거짓말하기도 합니다. 온전한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은 죄인이고 거짓되고 죄성을 가진 자이기에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대해주어야 합니다. 인간은 거짓되고 약속을 어기기도 하나 하나님은 진실하고 약속을 지키십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민수기 23:19절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은 거짓된데 하나님은 거짓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다. 인간은 늘 실수하고 죄짓고 후회하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의롭고 완벽하고 실수가 없기에 후회가 없으십니다. 거짓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진실한 하나님이시기에 신뢰하게 됩니다.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신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약속은 거짓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정직하고 진실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이 없고 진실하기에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를 실망시키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정확하고 진실합니다. 진실한 약속 말씀이기에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약속을 주시고 지키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거짓말하지 않으시고 신실한 하나님이시기에 믿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믿을 수 없으나 하나님은 믿을 수 있습니다. 진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사는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찬송가 267장1. 주의 확실한 약속의 말씀 듣고 주만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2. 나의 갈길이 험하고 위험하나 항상 예수의 도우심 믿고가네3. 주의 보좌에 천사들 둘러서서 우리 구주를 높이어 찬양하네4. 예언자들과 왕들도 반여대로 황금길 따라 나아와 찬송하네5. 우리 모두 다 그 반열 뒤따르며 함게 즐거운 찬송을 부르리라(후렴)할렐루야 할렐루야 내가 예루를 믿어 그의 흘리신 피로 내 죄 씻었네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가 예수를 믿어 그의 흘리신 피로 내 죄 씻었네 양대식 목사(진주성남교회)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0-02-05
  • 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노예에서 구원하시고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자유가 없이 고통스럽게 사는 자들을 구원해 주시고, 자유를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이십니다. 레위기 25:55,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종들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내 종이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구원하시고, 자유주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은 누군가를 구원해 주거나 자유를 주거나 인도할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인생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레위기 22:33,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자니 나는 여호와이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 힘과 지혜로 사는 것이 아니다, 내가 구원해주고, 자유를 주고, 인도해 준 것이다.”라고 말씀을 주시면서 깨우쳐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하나님의 은혜로 살면서도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애굽은 세상입니다. 세상은 죄와 유혹이 가득 찬 세상, 사건사고가 많은 세상입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교회의 의미는 세상에 있는 자를 불러 모은 모임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임입니다. 성도의 삶은 죄의 속박에서 해방된 자,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넘어지고, 죄 짓고, 타락하지 않도록 은혜 주시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 항상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23:1-3,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 하시네” 찬송을 부르게 됩니다. 세상에 내버려 두지 않고 불러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81:10,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레위기 22:31-33, “31너희는 내 계명을 지키며 행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32너희는 내 성호를 속되게 하지 말라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거룩하게 함을 받을 것이니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요 33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자니 나는 여호와이니라” 양대식 목사(진주성남교회)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0-01-22
  • 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 기도할 때 주의 긍휼로 건지시는 하나님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의 크신 긍휼입니다. (느헤미야 9:17-19) 17거역하며 주께서 그들 가운데에서 행하신 기사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며 패역하여 스스로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종 되었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나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 18또 그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이르기를 이는 곧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한 신이라 하여 하나님을 크게 모독하였사오나 19주께서는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광야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이 그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길을 인도하며 밤에는 불 기둥이 그들이 갈 길을 비추게 하셨사오며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도 목자 없는 양을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느헤미야 9:27-31) 27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 넘기사 그들이 곤고를 당하게 하시매 그들이 환난을 당하여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에게 구원자들을 주어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거늘 28그들이 평강을 얻은 후에 다시 주 앞에서 악을 행하므로 주께서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 버려 두사 원수들에게 지배를 당하게 하시다가 그들이 돌이켜 주께 부르짖으매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여러 번 주의 긍휼로 건져내시고 29다시 주의 율법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경계하셨으나 그들이 교만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 가운데에서 삶을 얻는 주의 계명을 듣지 아니하며 주의 규례를 범하여 고집하는 어깨를 내밀며 목을 굳게 하여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30그러나 주께서 그들을 여러 해 동안 참으시고 또 주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의 영으로 그들을 경계하시되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열방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고도 31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 기도를 들으시고, 건져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긍휼의 하나님을 강조합니다.한 번의 긍휼이 아니고 여러 번 주의 긍휼로 건져주십니다. 환난을 당하면 부르짖어 기도하게 됩니다.성경은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건져 주리라”고 약속합니다.환난, 고통의 때에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으면 기도를 들으시고 건져 주십니다.불쌍히 여기시고 건져 주십니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0-01-15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