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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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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2
  • [김성수 총장]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
    모든 사람은 의식적이든지 무의식적이든지 간에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관(worldview)을 가지고 있다.세계관은 개인이 소유하지만 공동체적으로 공유하기도 한다.우리는 세계관의 틀(framework)을 통해서 사물을 바라보고 행동한다.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세계관은 삶의 양식으로 표출되는데 이것을 우리는 문화라고 부른다.그러므로 한 개인과 공동체가 어떤 세계관을 소유하고 공유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삶의 양태가 나타나고, 한 사회의 문화와 제도도 생성하고 발전하며 쇠퇴하기도 한다. 인간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의 역할은 역사를 통해서 확연히 볼 수 있다.이것은 근대 문화 형성의 근간이 되는 로마의 역사와 문화에서는 잘 나타나고 있다.기독교 세계관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일찍이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시대부터 노예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법률이 통과되었다. 영아 살해의 관습 역시 십자가형과더불어,보다 더 극적으로는 낙태와 함께 금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검투사 시합도 종말을 고했는데, 그 이유는 텔레마코스(Telemachus)라는 용감한 수도승이검투 경기에서 일어나는 잔인한 살인을 막으려고 경기장 바닥으로 내려갔고,그 과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로마 사회의 변화는 비록 점진적이긴 했지만 로마 제국 전역에서 인간 생명의 가치가 점점 더 인식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로마 제국 자체는 결국 곤경에 처해 있었다. 왜냐하면 로마 제국을 지배했떤 세속적이며 인본주의적인 세계관으로 말미암아 로마 사회는 너무 오랜 세기 동안 쾌락과 반 출생주의적인 비성경적 삶의 양태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물론,이와 같은 저 출산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소위 그들이 야만인이고 불렀던 비게르만족들을 향한 이민문호를 폭넓게 개방하기는 했지만 이민에 대한 높은 의존도가 로마 사회의 인구 격차를 메우기에 역부족이었다.여기에 행정적, 군사적 실수가 결합되어 이주하는 인근의 다른 부족들에게도 제국의 국경을 활짝 열어 놓게 되었다.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부 지역에서 로마의 권위는 자신의 무능함과 게르만 부족의 공격으로 붕괴되었다. 로마, 게르만, 그리고 기독교 전통의 궁극적인 융합은 비록 완만한 전환의 과정이긴 했지만 중세 유럽에 새로운 문화와 세계관의 출현을 가져왔다. 우리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의 역할에 대해서 한 가지 예를 더 살펴 보기로 하자.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삶을 영위하기를 소망한다.그런데 영적인 삶의 영위에 향한 우리의 소망과 삶의 양태 역시 영적인 삶에 대한 관점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예를 들어,인간의 정신은 고상하고 거룩하고 선한 반면에 육체는 저급하고 속되고 악하다고 보는 이원론적 인간관을 견지하게 되면 육체적 고행이 하나님과 더 연합하는 삶이라고 보게 되고,따라서 우리가 신앙적이고 영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될 수 있는 한 육체적인 본능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역사적으로 보면,결국 이러한 종류의 인간관에 기초한 금욕적 실천은 사람들이 '생활의 법칙'에 따라 공동체로 살아가는 수도원주의(monasticism)로 발전했다. 수도원은 일반적으로 독신 생활과 엄격한 생활 방식을 요구했다.수도승과 수녀는 체계적인 기도, 연구, 그리고 생산적인 노동의 삶을 영위하였다. 수도승과 수녀들에게는 관상기도의 기초로서 연구 활동이 특별히 중요했다. 이미 5세기 초에 카시오도루스(Cassiodorus)라는 로마 원로원 의원은 자신이 비바리움(Vivarium)에 설립한 수도원에서 기독교와 이교 사상가들에 대한 텍스트 복사와 연구를 수도원 생활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삼았다. 카시오도로스와 그의동료들은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며, 그 연구는 영적 발전의 길이라고 믿었다. 모든 초기 수도원들이 카시오도루스의 관점을 따른 것은 아니지만, 몇 세기 안에 그의 사상과 독서 목록은 수도원 영성의 중추를 제공하게 되었다. 수도승들은 기도나 연구와 같은 보다 분명한 “영적인 활동”들과 함께, 생산적인 노동에도 참여해야 했다. 로마 사회의 세계관 노동을 비하하고 노예들에게 노동을 강요했을지 모르지만 수도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비록 부분적으로는 겸비의 덕을 장려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수도승이 일해야 한다는 생각은 주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성경적 사상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그분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도 역시 일해야 한다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었다. 창세기에서 아담은 죄를 짓기 전에 동산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그러므로 일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행하도록 만들어진 한 부분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은 삶의 목적에 대한 현저하게 다른 견해로 이어지게 되었다. 세계관 변화의 이러한 특별한 요인은나중 서구의 경제적 성공과 활력의 토대를 놓았다. 저출산,도덕성의 일탈,경제 문제,환경 파괴,정치 불신과 혐오 현상,남북간의 긴장 등 이 모든 문제들의 근본 뿌리는 왜곡된 세계관이다. 2024년도 새해를 맞았다.올 한 해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형성하는 올바른 세계관의 정립 운동이 범 국민 운동으로 펼쳐지기를 소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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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9
  • [김성수 총장]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합법화(1)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합법화(1) 요즘 언론을 통해 중국의 시진핑과 러시아의 푸틴, 그리고 북한의 김정은과 같은 독재자 한 사람의 잘못된 가치관과 이로 인한 횡포로 인해 그들 자국 인민들이 겪는 불행과 고통은 물론, 예측할 수 없이 소용돌이치는 국제 정세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 번씩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를 떠 올리게 된다. 시진핑, 푸틴, 김정은과 같은 악랄한 독재자 대신 기독교 신앙에 좀 우호적인 지도자가 등장하면 자국민들도 좀 더 행복할 것이고 세계 질서도 달라질 것인데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앞으로 한 두 번 정도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황제에 대해서 잠시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주후 313년에 밀라노 칙령(the Edict of Milan)을 발표하면서 로마 제국 내에서는 기독교의 상황과 법적 지위가 획기적으로 바뀌어졌다. 일 년 전, 밀비안 다리 전투(the Battle of the Milvian Bridge) 직전에 콘스탄티누스는 하나님으로부터 환상을 보았는데 예수께서 꿈에 그에게 나타나서 그가 해야 할 일을 설명하셨다고 주장했다.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병사들에게 방패에 기독교 상징을 그리게 했고, 적의 우세한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을 때 이를 하나님의 표징으로 받아들여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 후 곧 바로 기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만드는 밀라노 칙령이 공포되었다. 이 칙령은 이교(paganism)를 불법화하거나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콘스탄틴의 개종으로 인해 확실히 기독교는 박해 받던 위치에서 선호 받는 종교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이 진짜였는지 아니면 정치적 계산의 산물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당시 기독교는 도시를 중심으로 고도의 조직성을 갖춘 성장하는 종교였다. 따라서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가 의지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을 제공할 수 있었다.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인기가 없었으며, 추산에 따르면 로마 세계의 약 10~15%에 불과했다. 이는 결코 압도적인 숫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기독교인들은 313년 이전에도 군대에 복무했다는 증거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평화주의자였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포용함으로써 실질적인 정치적 이점이 있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황제로서 콘스탄티누스의 행동은 그의 개종에 대한 많은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우선, 그는 아버지 하나님을 자신이 총애했던 “정복되지 않는 태양”(the Unconquered Sun)인 솔 인빅투스(Sol Invictus)와 구분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은 태양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세상의 빛, 또는 의의 태양 등으로 예수를 묘사하는 기독교인들의 관습에 영향을 받아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또한 자신의 "개종" 후에도 거의 한 세기 동안 자신의 주화에 이교 신들을 계속 사용했으며, 나중에 교황이 차지한 로마 이교 대제사장의 칭호인 폰티펙스막시무스(Pontifex Maximus)라는 칭호도 유지하고 있었다. 기독교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콘스탄티누스는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매우 일찍부터 개입했다. 첫 번째 도전은 도나투스파(Donatists)와 관련이 있는데, 이들은 박해 중에 굴복하고 배교했던 사제들은 박해 중에도 믿음을 지키며 신실하게 남아 있었던 주교의 승인과 용서를 받지 않는 한 진정한 사제들이 아니라고 믿었던 집단이다. 법정과 콘스탄틴은 이에 대응하여 폭동을 일으킨 도나투스파에 대해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 콘스탄티누스는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무력으로 보복했다. 그는 탄압이 효과가 없다고 보고 그 후 도나투스파에 적대적인 법령을 철회했지만, 그의 행동은 교회에 대한 국가의 간섭과 강압의 선례를 남겼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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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1
  • [김성수 총장] 복음의 능력과 문화의 변혁
    서기 303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는 당시 로마 제국에서 별로 매력적이지 못하고 변방 종교였던 기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하였다. 이 박해는 처음에는 기독교도들의 예배 처소인 교회당을 파괴하고 기독교 서적을 불태우는 것으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성직자들을 투옥하고, 고문하며, 때로는 잔혹하게 사형에 처하는 등 성직자들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평신도들에게도 이러한 공격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박해가 시작된 지 불과 10년 후인 313년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에서 이전처럼 범죄 집단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독교는 오히려 로마 제국 안에서 다수의 종교가 되었고, 결국 로마를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는 후기 로마 제국의 세계관을 형성하여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과 삶의 방식을 변화시켰다. 복음의 능력이 사람들의 세계관을 변혁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를 이렇게도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으로 나타나도록 만든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가졌던 성경적 세계관, 특별히 성경적 신관이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당시 로마 제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은 비록 소수였지만 로마제국 내에서 독특한 신관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과 로마에 있던 다른 인종 집단들이 견지하고 있었던 신관 사이의 명백한 차이점은 유대인들은 급진적인 일신론자라는 점이었다. 이들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라는 구약의 성경적 신앙을 확고하게 견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믿고 섬기며 경배하는 신이 유일신이냐 아니면 다신론이냐는 문제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섬기는 신이 어떤 본성과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믿느냐는 문제였다. 모든 이방 종교는 신 또는 신들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신의 기원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 유대교적 또는 성경적 신관은 이런 이방 종교의 신관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어떤 다른 것에서 기원한 존재가 아니라 단순히 영원부터 존재하셨고 지금도 계시고 영원히 계실 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시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존재하는”(I Am who I Am)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신과 별개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자연계의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섭리자요 주권자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연신”(nature god)이나 “자연의 힘과 관련된 신”(god associated with the forces of nature)이 아니라 오히려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하나님께 응답해야 하는 창조주시다. 이와 같은 신관은 얼핏 신 플라톤적(Neoplatonic)인 신관과 흡사해 보이기도 한다. 피상적으로 보면, 성경의 하나님이 마치 존재의 위계를 형성하는 “단일자”(One)로부터 유출된 만물의 기원이며, 초월적 존재인 “하나” 곧 단일자(One)를 신이라고 보는 신 플라톤적 개념과 다소 비슷해 보일 수도 있다. 사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와 같은 일부 유대인 사상가들은 플라톤 철학의 렌즈를 통해 유대교를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경적 신관과 신 플라톤적인 관점의 신 개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신 플라톤주의자들의 신은 의지가 없는 비인격적인 신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인격적이시며 자발적인 행위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또한 신 플라톤적인 관점의 우주는 영원하다. “단일자”(One)라는 신이 존재하는 동안 우주도 존재한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우주 만물은 비인격적인 신으로부터 유출된 것이 아니라, 역사의 특정한 시점에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말씀으로 지은 바 된 피조물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인격적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독특한 성경적 인간관을 형성해 준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시고 하나님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창조 세계를 보호하고 다스리며 감독하는 청지기적 사명을 주셨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에 죄가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 자신을 대신하여 에덴의 동산을 다스리는 사명을 인간에게 부여해 주셨다. 창조 질서에서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이와 같은 고유한 위치는 인간에게 특별하고 고귀한 가치를 부여해 주고 있다. 하나님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하나님의 섭정자인 인간을 공격하는 행위는 하나님 자신을 공격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로마 제국에 흩어져 살았던 유대인들은 당시 로마의 쾌락 문화 사회에서 공공연히 행해졌던 영아 살해 행위, 로마의 역사학자 타키투스(Tacitus)가 “불길하고 역겨운” 일이라고 묘사했던 영아 살해 행위를 단호하게 거부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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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8
  • [김성수 총장] 불가능한 사람들
    11세기 베네딕트 수도회의 개혁가 피터 다미안(1007-1073)을 일컬어 사용된 표현이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교회는 타락하고 부패가 기승을 부렸다. 성직자와 교회 지도자, 일반 성도까지 도덕적으로, 신학적으로 부패했다. 이에 맞서 다미안은 성직 매매와 성직자들 사이에 용인되던 동성애와 소아성애, 남색을 강도 높게 비난하며 개혁을 촉구했다. 그는 예수님께 충성하고 복음의 진리를 지키고자 헌신한 사람이었다. 그가 모든 형태의 부패와 부도덕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좌시하지 않았던 이유는 자신 안에 있는 열정 때문이었다. 그는 어떤 방해와 반대에도 흔들리지 않고 맞섰다. 오직 예수께 헌신하고자 하는 그의 열정이 얼마나 불같았던지 그는 ‘조종 불가능한 사람’, ‘뇌물이 안 통하는 사람’,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조지 오웰의 표현대로 그는 ‘도무지 한 패거리로 끼워 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비록 소수였지만 시대마다 이런 소위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느부갓네살의 신상 앞에 아무 생각 없이 한번만 절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음에도, 산채로 불태워 죽인다는 위협에 굴하지 않고 우상 숭배를 거부했다. 다니엘은 창문 하나만 닫고 커튼만 쳐도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음에도 사자의 먹이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향을 피우는 흉내만으로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음에도, 시저를 주로 인정하기를 거부함으로 야수의 저녁 먹잇감이 되었다. 황제와 왕비와 전 제국에 맞서는 것이 터무니없는 만용으로 여겨졌음에도, 아타나시우스는 세상에 맞서 진리를 대변했고 그 신실함으로 다섯 번이나 유배 생활을 했다. 양심을 따라 전통의 합의에 맞서는 마틴 루터를 사람들은 교만하다거나 미쳤다고 말했지만, 그는 화형대에서 죽어간 얀 후스의 순교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학문이라는 미래의 중대한 일을 위해 목숨을 보존하라는 절친한 친구들의 만류에도, 디트리히 본 회퍼는 히틀러의 소굴로 다시 들어가 두려운 교수대의 위협에 맞섰다. 한상동, 주남선, 조수옥 권사도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믿음으로 모진 고문과 옥중 생황을 감내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허다한 구름 같은 증인들과 순교자들의 빛 안에 살고 있는가? 아니면 발전된 현대 세계의 안락한 분위기에 젖어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는가? 기독교 역사상 지금의 서구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부당한 취급을 당하거나 기독교 수정주의가 득세한 적이 없다. 오늘날처럼 기독교의 성경 해석이 이렇게 자의적이고, 설교가 이렇게 타협적이며, 신앙인의 행실이 이렇게 방탕한 때가 있었는가? 오늘날처럼 아무 고민 없이 세상과 타협하고 쉽게 신앙을 저버리면서도 그 수치를 모르는 이렇게 천박한 적이 또 있었는가?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시대의 도전 앞에 맥없이 굴복하고 있다. 우리의 복음 증거는 날카로운 예리함을 잃어 가고 있으며, 예수의 주되심과 권세는 배반을 당하고 있다. 이제 이 상황을 되돌려 우리 주님께 합당한 태도를 취할 때가 되었다. 온 열방의 우리형제 자매들이 믿음을 지키려고 목숨으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이때, 서구의 세대는 우리 주를 배신했다는 쓰라린 후회만을 남기지 전에 어서 서둘러야 한다. 오스기니스(Os Guinness)가 잘 설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개혁가 피터 다미안, 그는 오직 한 청중만을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쓰고 행동했다. 그 외 다른 목소리는 그를 제지할 수 없었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신실했다. 그의 믿음은 강철같이 강했다. 그는 난공불락의 사람이었다. 우리에게는 바로 이런 기독교 지도자들이 필요하다. 우리 역사 ‘불가능한 사람들’(Impossible People)이 되어야 한다. 연민으로 눈처럼 녹을 수 있는 가슴을 가졌으나 강철과 부싯돌처럼 단호한 얼굴과 의지로 어떤 압력과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고 농락당하지 않으며 뇌물이 통하지 않는 그리스도인, 그럼에도 우리 주님의 온유함과 자비와 은혜와 따뜻함을 잃지 않는 그리스도인 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보다 오직 예수께만 흔들림 없는 충성을 바쳐야 한다. “예수는 주님이시다”가 우리의 고백이자 권위이며 기준이고 인생의 법칙이 되어야 한다. 그분을 부정하는 사람이나 대상이 무엇이든 우리는 굳건히 맞서야 한다. 또 다시 오스 기니스의 표현을 빌린다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깨가 튼튼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 위해 지셨던 주님의 십자가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어야 만들어지는 어깨이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3-04-19
  • [김경헌 목사] 지팡이니이다!(출4:1-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심장부에 넣어 보호하셨습니다. 보호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위용을 갖추게 하셨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출범할 하나님의 시간이 도래했습니다. 출애굽이란 성도 개인에게는 구원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출애굽이란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는 하나님의 나라, 하늘나라의 출범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80년 전에 구체적으로 그 일을 진행하셨습니다. 성경은 모세를 “아름답다, 잘 생겼다”고 기록하면서 하나님의 소명을 나타내고 있습니다.(출2:1-2) 모세의 어머니와 누나의 치밀한 계획 하에 모세를 바로의 궁정에 침투시키게 됩니다. 4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모세는 어느 정도 완벽에 가까운 준비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출애굽이라는 거사를 실행에 옮겨야 할 상황이 되었는데 모세는 상상도 못했던 난관에 부딪히게 됩니다.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대였습니다. 불 신앙과 반역의 역사는 항상 에덴동산 안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대가 두려워 미디안으로 도망을 가게 되고, 그곳에서 또 다른 40년 동안의 준비를 마치게 됩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고, 하나님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못하겠다고 버팁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시기 위하여 보여주신 표적이 지팡이가 뱀이 되는 것과 손에 문둥병이 생긴 것입니다. 얼핏 보면 모세가 빼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 확인에, 확인을 하는 장면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지팡이가 뱀이 되고, 뱀의 꼬리를 잡으니 지팡이가 되는 표적을 보여주십니다. 애굽의 요술사들도 그들의 요술로 할 수 있는 요술이요, 마술입니다. 이스라엘을 탈출시키는, 해방시키는, 출애굽시키는, 우리의 입장에서 구원이 시작되는 장면에 하나님께서는 왜 애굽의 요술사도 할 수 있는 표적을 모세에게 보이고 있을까요? 모세의 사역 전부는 지팡이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시작부터 지팡이, 10가지 재앙도 지팡이, 출애굽할 때 홍해를 가르던 지팡이의 장관은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습니다.(출14:16) 지팡이가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지팡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지팡이가 모세의 손에서 떨어지니 뱀이 되었습니다. 구지 성경은 땅에 던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던지면 당연히 땅에 떨어질 것인데 성경이 왜 불필요하게 땅에 던졌다고 표현하고 있을까요? 땅은 뱀의 주 무대입니다.(창3:14) 자신을 지키는 지팡이가 땅에 떨어지는 순간 자신을 물고, 자신을 죽이는 뱀이 되었습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손에서 떨어져 땅으로 가는 순간 뱀이 됩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이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성도들이 목사를 잡을 때, 목사는 성도들을 물어 죽이는 뱀이 됩니다. 장로가 목사를 잡을 때 목사는 장로들을 물어 죽이는 뱀이 됩니다. 목사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삼위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시행하는 것입니다. 그런 중요한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가 될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하십니다.(출4:4) 뱀 꼬리를 잡았다가는 순식간에 물려 죽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독이 센, 가장 위험한 뱀이었던 우리의 꼬리를 잡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물려 죽으셨다. 말씀을 선포하고 목회하는 것은 목숨을 걸고 뱀꼬리를 잡는 사역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뱀이었던 성도들이 목회자의 손에 들려지면 지팡이가 됩니다. 목회자는 성도라는 지팡이, 교회라는 지팡이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목회자들을 향한 매우 무서운 경고가 있음도 잊어선 안 됩니다. 모세는 이 지팡이를 잘못 사용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심판을 받았습니다.(민20:11-13) 목회자가 손에 들려진 성도라는 지팡이를 맘대로 사용했다가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손에 죽습니다. 목회자의 손에 들려진 교회라는 지팡이를 맘대로 사용했다가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손에 죽습니다. 목회자는 주님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입니다. 모든 능력은 주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지팡이는 지팡일 뿐입니다. 주님의 손에 들려질 때 주님의 지팡이가 되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하게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의 지팡이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이루신 구원은 완전합니다. 오늘의 목회자들은, 교회를 위해 세움 받은 자들은 주님의 손에 들려진 구원의 지팡이입니까? 땅에 떨어져, 땅을 기어 다니며 성도들을 물어 죽이는 뱀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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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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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 꾸지 아니하게 하시는 하나님
    돈을 빌려 주면서 사는 자가 있고, 돈을 빌려 달라고 하면서 사는 자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행을 통해 돈을 빌려 쓰면서 살아갑니다. 빚을 지면서 사는 것은 큰 부담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복 주셔서 서서히 은행 빚을 갚아가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으면 꾸어줄지라도 꾸지 아니하고 살아갑니다. 꾸지 아니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게 복을 주시리니 네가 여러 나라에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하겠고 네가 여러 나라를 통치할지라도 너는 통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신15:6)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신28:12) 하나님께서 재물의 복을 주시면 가난한 자가 없어집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신15:4-5) 가난이 죄는 아니지만 축복은 아닙니다. 가난을 원하는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재물의 복을 주시면 빚지지 아니하고, 꾸지 아니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살다보면 빚지기도 합니다. 은행 빚을 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면 빚을 다 갚고 꾸어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꾸어주고 나누어주고 사는 삶이 축복입니다. 꾸어주고 살지언정 꾸지 아니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꾸지 아니하고 살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반드시 복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꾸어주면서 살지언정 꾸지 아니하고 살 수 있는 은혜와 축복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꾸어주며 나누면서 살아갈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사람들에게 덕이 됩니다. 남에게 꾸어달라고 구걸하면서 살 때 전도문이 막히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 수 있게 됩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30:7-9) 하나님께 복을 받아야 합니다. 축복을 받으면 꾸지 아니하고, 꾸어주고 나누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복 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에게 다양한 복을 주십니다. 신명기 28장에 나오는 축복의 내용을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복 주시는 하나님을 묵상해야 합니다. 칼럼의 완본은 gncnews.net 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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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9
  • 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늦은 비, 이른 비를 적당히 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막 지대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고, 물이 없어 죽기도 하고 고통을 겪게 됩니다. 비는 물이요, 생명처럼 귀합니다. 비, 많은 양의 물을 사람이 만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주셔야 합니다.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신11:14)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 들에 풀이 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또 가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신11:15)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때, 심판하실 때, 비를 내리지 아니하시기도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이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께서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신11:17) 지나친 가뭄도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비가 오랫동안 오지 않으면 농사도 망하고, 심각한 문제가 일어납니다. 비가 내릴 때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신다고 믿고 비를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적당히 내리는 비가 축복의 비입니다. 비가 너무 적게 내려도 안 되고, 너무 많이 내려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적당한 비를 내려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비를 내려주시고, 은혜의 단비, 신령한 비도 내려주십니다. 성령의 단비도 내려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자연을 사랑해서 살려주고, 풍요롭게 해 주시려고 비를 내려주십니다. 엘리야 선지자 때, 비가 오지 않아 하나님께 비를 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엘리야 선지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주셨습니다. 가뭄의 때에 비를 내려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약:17-18) 비가 와야 농사가 되고, 열매 맺고, 풍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비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나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으리라”(전11:3)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신2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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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25
  • 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 낮추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높이시기도 하시고 낮추시기도 하십니다. 낮추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시18:27) 하나님이 높여 주셔야 높아집니다. 하나님이 높여 주는 자는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겸손한 자를 때가 되면 높여주십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4:10)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2:7) 하나님은 누구를 낮추실까요? 교만한 자를 낮추십니다. 교만은 죄성입니다.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하나님은 교만했던 웃시야, 느부갓네살 왕, 사울 왕을 낮추셨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심판하십니다. 교만은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교만한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교만한 눈으로 사람들을 쳐다보지 않아야 합니다. 교만하면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가 깨집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높아지고자 하면 낮아지고 낮아지고자 하면 높아진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버리십니다.(사울왕) 겸손한 다윗을 왕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함을 가져야 합니다. 교만은 사단의 속성입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 순간마다 교만하지 않도록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교만한 태도로 남과 비교하면서 기도했던 바리새인의 기도를 주님은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기도를 기뻐하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겸손한 세리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겸손했던 세례요한을 예수님은 칭찬해 주시고 높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낮추신다.” 낮추시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낮추시면 누구도 막을 수 없고 하나님이 낮추시면 부끄럼 당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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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24
  • 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 상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해주십니다. 잘한 자를 칭찬해 주시고 상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상주시는 하나님은 격려, 칭찬, 응원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상급 신앙이 성경적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내게 갚으셨으니”(시18:20) 상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보상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칭찬해주시는 것도 상 받는 것입니다. 축복을 상급으로 주시기도 합니다. 명예, 지혜, 재물도 하나님이 주시는 상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상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상주신다고 가르쳐 줍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5) 다윗은 하나님께서 억울함, 고난 속에서 인내로 믿음 지키게 하시고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원수 갚는 최선의 길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많이 받는 것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제거해 주시고 나의 삶이 축복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상입니다. 다윗은 수많은 고난 있었지만 인생의 마지막이 더 잘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는 삶이었습니다. 늙도록 존귀하게 살았습니다. 노년의 축복,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상입니다. 바울은 상급에 대한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딤후4:7-8 ) 하나님께서 의의 면류관을 예비해 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끝까지 믿음 지킨 자에게 상 주십니다. 죽도록 충성한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 상을 주십니다. 충성된 자가 복된 자입니다. 하나님은 충성된 자에게 상주십니다. 양무리의 본이 되고 목양을 잘한 자에게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상을 준비하시고 상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전도 열심히 하여 많은 영혼을 구원한 자에게 상주십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을 잘 섬기는 자에게 상주십니다. 요셉은 섬김의 삶을 살았을 때 하나님께서 높여주시고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상 주신 것입니다. 좋은 명예를 남기는 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사는 자에게 세상에서도 축복받는 축복의 상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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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0-09-04
  • [이상규 교수] 광복 75주년, 뒤돌아보는 역사
    해방75주년 기념 (세계로교회, 2020.8.9) 광복 75주년, 뒤돌아보는 역사 시126:1-6 A nation that forget its past has no future 과거를 잊는 나라에는 미래가 없다 - Winston Churchill - 광복 75주년을 기념하는 이런 뜻 깊은 자리에 부족한 저를 초청해 주신 경남기독교총연합회 박정곤 대표회장님과 경남성시화본부 오승균 대표회장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과거 한국교회는 민족의 역사와 관련하여 두 차례 기념 예배를 드렸는데, 첫째는 매년 3월 첫 주에 드렸던 3.1절 기념예배였고, 둘째는 8.15일과 가까운 주일에 드렸던 광복기념예배였습니다. 이 전통은 1960년대까지 계속되었으나 그 이후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는데, 경남의 교계지도자들이 이런 한국교회 전통을 계승하고 있어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런 예배를 통해 오늘의 교회와 조국의 현실을 생각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는 오늘 시편 126편에 기대어 우리 민족이 당했던 고난과 수난의 여정을 뒤돌아보고, 우리에게 광복의 기쁨을 주셨던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감사하면서 오늘 우리 교회와 국가의 현실을 생각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1. 뒤돌아보는 역사 : post tenebras lux 우리나라는 1910년 8월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타율에 의해 해방되었던 1945년까지 35년 간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았습니다만 일제의 한국침략은 점진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그 첫 단계가 1876년 일본대표 이노우에(黑田淸隆)와 조선대표 신헌(申櫶)사이에 체결된 병자수호조약입니다. 전문 12조로 구성된 이 조약이 일본의 조선 침략의 발판이 된 조약입니다. 이 조약 1조에서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평등권을 갖는다”고 명시하므로 청(淸)의 세력(宗主權)을 배제하고자 했고, 1882년의 임오군란은 일본세력의 조선 진출에 대한 반일감정의 표출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일본은 제물포조약을 체결하고 일본군의 조선 주둔권을 획득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1894-5년에는 청일전쟁을 일으켜 조선침략의 방해가 되는 청나라 세력을 제거하고, 1904-5년에는 러일 전쟁을 통해 러시아 세력을 물리치고 러일강화조약, 곧 포츠머스조약을 채결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선점하게 됩니다. 1905년 11월 17일에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외교권을 강탈하고, 1906년 2월에는 통감부를 설치하고 조선의 행정권, 사법권, 경찰권을 차례로 강탈하게 됩니다. 1907년에는 조선의 군대를 해산시켜 국방력을 마비시키고, 이준 열사의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묻는 형식으로 고종을 폐위시켰습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점진적인 침략과정을 거쳐 일제는 1910년 8월29일에는 '합방'(合邦)이란 이름으로 한국을 강점하여 그들의 식민지로 만들었습니다. 일제는 조선의 국권을 침탈한 행위를 정당성하기 위해 ‘한일합방 韓日合邦’ 혹은 ‘한일합병 韓日合倂’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우리는 ‘한일병탄 韓日倂呑’이라고 말합니다. ‘경술국치庚戌國恥’ 혹은 ‘국권피탈國權被奪’'이라고도 합니다. 이렇듯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고, 조선은 주권을 상실함으로서 1392년 이성계에 의해 시작된 조선 왕조는 27대 순종(純宗, 1872-1926)을 끝으로 518년간의 역사를 마감하게 됩니다. 이때로부터 우리나라는 35년간 일제의 지배를 받고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게 된 것입니다. 배경을 좀 더 말씀 드리겠습니다. 1910년 조선을 병탄한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식민지로 만들었고, 1937년 7월 7일에는 중국을 침략합니다. 우리는 ‘지나사변’이라고 말했습니다만 이것이 ‘중일전쟁’입니다. 이 전쟁을 시작으로 동남아전 지역과 태평양지역으로 전선을 확대해 나갑니다. 1941년 12월 7일에는 하와이 진주만을 습격하고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서 대동아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대동아전쟁’이라고 부르지만 보통 ‘태평양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일본이 하와이를 공격함으로서 유럽에서 독일과 이탈리아에 이어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든 것입니다.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의 대외 팽창에 따른 제2차 대전이 전개되고 있었으나 미국은 참전을 꺼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주만이 일본에 의해 기습공격을 당하게 되자 미국이 참전하게 되었고, 미국의 참전은 전세의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전쟁 초기에 일본은 싱가포르 필리핀 인도네시아 버마까지 전선을 확대하면서 승세를 떨쳤으나 1944년 7월 미국이 사이판을 점령한 이후 전세는 급변하였고, 1944년 11월 사이판에 비행기지를 확보한 미국은 이오지마(硫黃島, 1945. 2-3)와 오끼나와(沖縄, 1945.6)를 차례로 점령했습니다. 버마전선에서도 일본은 거의 전멸 당했고, 중국전선에서도 1945년 봄부터 일본은 패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럽 지역의 경우, 이탈리아가 1943년 6월에 연합국에 항복했고, 독일은 1945년 5월 7일 항복했습니다. 수도 베르린이 미국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포위되자 히틀러의 자살로 독일은 항복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전세가 연합군의 승리로 기울게 되자, 1943년 11월 12일, 영국의 처칠, 미국의 루즈벨트, 중국의 장제스 총통은 이집트 카이로에서 회담을 개최하고 전후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카이로회담입니다. 이 회담에서, “한국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자유, 독립케 할 것”을 결의한 것입니다. 이 결의문 작성자는 루즈벨트의 최측근인 해리 홉킨스였는데, 그는 독실한 감리교신자였습니다. 독일이 항복하고 두 달이 지난 1945년 7월 17일에는 연합국대표는 독일 포츠담에 보여 일본의 무조적적인 항복을 요구하고, “일본의 주권은 본주(本州) 북해도(北海道) 구주(九州) 사국(四國)과 연합군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 될 것이다.” 라고 선언하여 조선의 독립을 재확인했습니다. 이때 원자폭탄 제조에 성공한 미국은 히로시마(廣島, 1945.8.6.)와 나가사끼(長琦, 8.9)에 투하하자 일본은 항복하게 됩니다. 원자폭탄 투하로 20만 명이 죽임을 당하는 무서운 파괴력을 본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迪官裕仁, 1901-1989) 천황이 항복을 선언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 한국을 비롯하여 필리핀, 대만,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 대부분의 동남아국가들이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우리는 35년간의 질고를 끝내고 해방을 맞게 된 것입니다. ‘어둠 후의 빛’(post tenebras lux)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를 광복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박정곤 대표회장이 인사말에서 언급처럼 빛을 회복한 것입니다. 2. 광복의 의미 그렇다면 이 해방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3가지로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해방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빨리 해방을 맞게 될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함석헌 선생은 “해방은 도적같이 왔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독립은 우리의 힘으로 얻은 것도 아니었고, 우리가 싸워 쟁취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3.1운동 때 전인구의 10%인 2백만 명이 시위에 참가하고 1,700여회의 집회를 하고 5만여 명이 수감되고, 7천5백명이 죽임을 당하고 1만6천명이 부상을 입었지만 독립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이국땅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 하며 독립을 위해 싸웠습니다. 그 애국정신은 숭고했지만 그것 때문에 독립을 얻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해방은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그가 제국과 제왕을 다스리시고 역사와 자연을 주관하십니다. 그가 전쟁의 승패를 관장하시고 나라의 흥망성쇠를 주장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리의 역사와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서울과 다윗 솔로몬에 이르는 120년 간의 통일 왕국시대 이후 나라는 남북으로 분열되었고,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앗수르에 멸망하고, 남유다는 기원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패망하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갑니다. 이스라엘왕국의 존속기간은 509년으로 우리나라 조선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유대백성들이 포로로 잡혀있는 동안 당시 제국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동안은 바벨론이 최강국이었으나, 바사라고 불리는 페르샤가 신흥 제국으로 등장합니다. 기원전 549년에는 메데를 정복하여 바사에 통합시켰습니다. 그래서 고레스는 메데와 바사를 연합국으로 만들고 두 나라를 동시에 통치했습니다. 그래서 ‘메데 바사’ 혹은 ‘바사 메데’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에1:3, 18, 19, 10:2, 단5:28, 6:8, 12, 15, 8:20 등). 이 신생제국이 바벨론을 정복했을 때가 기원전 539년이었습니다. 세계의 패권을 장악한 바사의 고레스(Cyrus II)왕은 그 이듬해에 칙령을 내렸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조서'(詔書)로 번역되어 있습니다만 그 내용이 역대하 36장 23절, 에스라1장 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포로로 잡혀갔던 유다민족에게 해방을 선언한 것입니다. 70년간의 포로생활을 청산하고 본토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한 것입니다. 이 때의 기쁨을 노래한 것이 오늘 읽은 시편 126편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다.” ‘시온의 포로’로 번역되어 있습니다만 ‘포로된 자들을 시온으로 돌리실 때’(the captives to Zion)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시온은 예루살렘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고토(故土) 곧 두고 온 고향을 의미합니다. 70년간의 포로 생활을 마감하고 자유를 얻었을 때 그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요? 해방을 얻는 자유민은 본토로 돌아오는 데, 그 거리가 1,200km였습니다. 1차 귀환 때 약 5만 명이 이 먼 거리를 걸어 귀국하게 됩니다. 이 때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남의 나라에 지배하에 있다가 해방과 자유를 누리게 되었을 때의 기쁨과 감격이 얼마나 컸을까요?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大事)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점은 하나님께서 해방을 주셨음을 고백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1절과 2절, 3절, 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가 주체이자 주어입니다. 시편 기자는 해방을 주신 이는 여호와이시고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다(126:2)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주체가 여호와라는 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신생제국인 페르샤의 고레스는 이스라엘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로된 백성의 해방을 선언하고 성전 건축을 허락하고, 과거 바벨론이 빼앗아 갔던 모든 기병들 곧 지금의 문화제를 다 돌려주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그 해답이 역대하 36장 22절과 에스라1: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The Lord moved the heart of Cyrus of Persia...)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던 것입니다. 해방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즉 해방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대가 없이 얻는 것이기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해방은 정치적 자유만이 아니라 신앙의 자유였습니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할 당시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기독교회는 20만 신도, 1900여개처의 교회, 조선인 교역자 2천3백명, 선교사 270명, 3백 개 이상의 기독교학교, 3만 명이상의 재학생을 거느린 거대한 조직으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한국교회를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식민지배의 성패가 달린 문제라고 보고 있었습니다. 특히 기독교회가 반일운동의 거점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교회를 적절하게 통제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그래서 일제는 일면 회유, 일면 탄압의 이중적 정책을 시행했는데, 한국교회를 탄압하여 그 힘을 축소하고자 했습니다. 한국기독교를 친일 세력으로 물들여 황도주의(皇道主義) 기독교로의 변질시키거나, 일본의 조합교회의 조선 전도를 통해 조선인들을 충량한 일본국민으로 교화하려고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일제는 기독교회를 탄압하였는데, 첫째는 법적 제제를 가하고자 했습니다. 보안법, 범죄즉결령, 조선 태형령과 같은 일반적인 법령 외에도, 한국교회 종교활동을 통제하려는 ‘포교규칙’(1915)을 제령83호로 공포했는데, 포교자의 자격을 제한하고 교회당 설립의 경우 총독부의 허가를 얻게 하는 등 신교의 자유를 제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조선사립학교령(1911. 8), 사립학교 규칙(1911.10), 개정사립학교 규칙(1915,3) 등과 같은 법령을 통해 기독교 학교를 옥죄고 종교교육을 제한했고, 성경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방해한 것입니다. 둘째는, 교회의 각종 집회를 제한하고 설교를 감시했습니다. 성경 중 출애굽기 에스겔 등을 설교하지 못하게 하는 등 설교의 자유를 제한했습니다. 셋째, 일부 찬송가를 금지시키거나 개사(改詞)하도록 강요했습니다. 당시 사용하던 찬송가는 1934년에 편찬된 신편찬송가였는데,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 벗은 형제여” “주 예수의 강림이 불원하니” 등 만왕, 신앙적 결의, 재림 찬송은 금지곡이었습니다. 특히 만유의 쥬(32장), 면류관 드리세(33), 만왕의 왕(54), 믿음이 세상을 이김(201), 하나님은 피난처(206), 십자가 군병(222), 영원한 문아 열어라(286), 여호와만 섬기세(337), 의의 길(385)를 못 불렀습니다. 자구 수정을 강요당한 사례도 있습니다. ‘전능왕’(7장)을 ‘쥬시여’로, ‘만유의 대왕’(10)을 ‘우리의 쥬님’으로, ‘만유의 쥬’(38)를 ‘우리의 쥬’로, ‘만유의 주제’(48)를 ‘우리의 쥬님’으로, ‘태평왕’(56)을 ‘우리 쥬’로 변경하여 부르게 했습니다. 넷째는, 기독교회를 줄이기 위해 교회를 통폐합시켰습니다. 1942년 경남노회 지역의 경우, 325 처 교회가 있었으나 108개 교회는 통폐합되어 교회수는 217개 처로 축소되었습니다. 경남노회 지역의 교회 3분지 1을 폐쇄시킨 것입니다. 신앙의 자유를 제한하고 침해한 것입니다. 가장 큰 박해는 우상숭배의 강요였습니다. 신사참배(神社參拜)라는 이름의 우상숭배 강요는 1935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때부터 10년간이 가장 고통스런 시기였습니다. 신교의 자유를 정면으로 부인 한 것입니다. 이 일로 200여개 처교회가 폐쇄되고, 2천명이 투옥되고, 50여명이 순교했습니다. 이때 순교하신 대표적인 경남의 인물이 최상림, 주기철, 이현속 장로 같은 분들입니다. 이처럼 신교(信敎)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을 때 성도들이 은밀하게 하나님께 손을 펼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일본이 패망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해방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했던 권력은 길어야 십년입니다. 권불십년이란 말 그대로입니다. 투옥되어 있었으나 주남선, 한상동, 손양원 목사 등은 사악한 일제 권력이 오래가지 못한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해방은 정치적 자유일 뿐 아니라 종교의 자유였습니다. 해방과 함께 마지막까지 감옥에 있던 26명의 종들(평양감옥 20명, 대구 3명, 부산 2명, 청주 1명)이 8월 17일 감옥문을 열고 출옥하게 되었습니다. 후에 안 일입니다만 일제는 패색이 짙어지자 기독교신자를 비롯한 민족지도자 5만 명을 학살할 계획을 세우고 비밀지령을 하달했습니다. 이것이 ‘조선총독부 보호관찰령 제3호’인데, 학살 예정일이 8월 18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음모가 결행되기 3일 전에 해방이 왔고, 처형대상자들이 처형되기 전날 밤에 석방된 것입니다. 해방이 하루만 늦었더라면 이들은 다 처형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역사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시편 31편 15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나이다. My times are in thy hand”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일제의 학살음모가 ‘이루어질 수 없는’ 미수사건이 된 것입니다. 거짓 불의 위선 음모와 같은 인간의 모사(謀事)는 한줌 모래 위에 쌓는 누각일 뿐입니다. 해방은 정치적인 자유만이 아니라 신앙의 자유를 얻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해방기념 주일을 지키고 자유를 주신 하나남께 감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승만 건국 대통령으로 기도할 때 늘 드렸던 기도가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게 하옵소서.”(갈5:1)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는 너무 늙고 지쳤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민족을 위하여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하소서.” 이것이 그의 마지막 기도였습니다. 그는 90세가 되던 1965년 7월 19일 망명지 하와이 요양원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셋째, 해방은 새로운 나라 건설을 위해 주신 기회였습니다. 해방을 맞은 우리에게 있어서 어떤 체제의 나라를 건설하느냐는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해방은 우리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변화의 길목이었습니다. 우리는 해방과 동시에 분단을 맞게 된 것은 한반도 문제에 소련의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나타난 결과였습니다. 일본이 항복하기 불과 6일 전인 1945년 8월 9일 소련이 일본에 전쟁을 선포하고 참전하였습니다. 일본과 홀로 싸우며 큰 희생을 치루던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소련에 대해 대(對) 일본전에 참전을 요구했고 소련은 계속 미루다가 종전 6일 전에 참전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런데 원자폭탄의 위력을 본 일본이 곧 항복하자 소련은 별 희생 없이 태평양전쟁의 승전국의 일원이 되었고, 한국의 장래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참전 선언 후 소련은 한반도 북부를 점령하기 시작하는데, 8월 12일에는 함흥 청진 원산을 점령하였고, 24일에는 평양까지 점령해 38도 이남인 개성까지 진출했습니다. 이것이 동북아시아 지역에 소련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인민위원회 중심의 공산주의 독제정권이 북한에 자리 잡게 됩니다. 미군이 들어오기 전에 소련군에 의해 실질적인 분단 상태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미군은 소련군 보다 한 달 늦은 9월 6일에야 인천으로 상륙합니다. 9월 9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까지 미군정(美軍政,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이 실시되는데, 당시 남한은 혼란했습니다. 그 혼란을 해방정국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여러 정치 결사체가 난립했습니다. 여운형 중심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박헌영 주도의 조선공산당, 김성수 송진우 중심의 한국민주당 등이 조직되었고, 조선공산당의 박헌영 등 좌익세력은 이승만의 허락도 받지 않고 그를 허위로 끌어들이고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하고자 했으나 미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1945년 12월 28일 발표된 미소공동위원회의 신탁통치안은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이 안이 발표되자 민족 세력 중심에 있던 이승만, 김구, 좌익 계열인 조선공산당, 건국동맹 등도 반대했습니다. 특히 이승만은 미소합의에 의한 한국문제해결이라는 미국의 정책을 바꾸려고 노력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정책은 소련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것이 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 좌익은 찬탁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래서 남한에서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공산주의 및 좌파계열과 이를 반대하는 민족주의 계열 간의 대립이 심화되는데, 전자는 허울 좋은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후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조직하였습니다. 남한에서 반탁운동이 거세지자 결국 1947년 8월 미소공동위원회는 완전 결렬되었고, 남한에는 미국이, 북한에는 소련이 주도하는 독자적 정부 설립을 촉진 시켰고, 미국으로 하여금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이관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전국적인 반탁운동은 남한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공산주의의 확산을 저지하고 독자적인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가속화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물론 남한에서 좌익들의 반발과 폭동이 이어졌습니다. 소련 공산당의 지침을 받은 박헌영 계열의 좌익들은 반미운동을 선동하며 폭동을 일으켰고 사회 혼란을 가중시킵니다. 이에 대해 남한의 민족진영 지도자들은 남한만이라도 공산화되지 않는 나라를 만듦으로써 공산화된 북한과 맞서야 한다고 생각하여 남한의 독자적 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제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독립정부를 우선 남한만이라도 구성할 것인가, 아니면 북한까지 참여하는 정부를 추진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제기되었는데, 전자를 주장한 이가 이승만이었고, 후자를 지지한 인물이 김구와 김규식이었습니다. 이승만은 소련의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 남북 총선거는 사실상 이루어질 수 없음으로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수립하자는 입장이었고, 김구와 김규식은 김일성과의 남북협상을 통해 문제해결을 주장하고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48년 4월 19일 북으로 올라갔으나 본격적인 회담도 못한채 이용만 당하고 빈손을 돌아왔던 것입니다. 남북협상의 실패로 김구, 김규식은 주도권을 잃게 됩니다. 유엔은 1947년 11월 유엔 결의안을 통해 유엔 감시 하에 남북한 모두에서 인구 비례에 의한 총선거를 실시하고, 그 선거결과에 따라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결정을 통과시켰습니다. 이에 따라 1948년 1월부터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구성되어 한국에서의 선거관리를 맡았습니다. 그런데 소련의 거부로 위원단이 북한 지역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되자, 유엔은 다시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 우선적으로 선거를 통한 정부 구성을 결의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5월 9일 선거를 하려 했습니다만 일식(日蝕)예보도 있었지만 기독교인들을 배려하여 하루 늦춘 5월 10일 선거를 실시하게 된 것입니다. 북한에서는 기독교인들을 탄압할 의도로 일부러 주일 선거를 실시했지만(1946.11.3)남한에서는 주일을 피하게 한 것입니다. 이 선거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보통, 평등, 비밀원칙에 입각한 민주적 방식의 선거였고, 이것이 의회민주주의의 시작이었습니다. 여성에게도 투표권을 준 것은 스위스(1971)보다 앞섭니다. 이 선거에서 총 200석 중 4.3폭동이 발생했던 제주도 2석을 제외한 198명의 의원이 선출되었습니다. 5월 31일에는 구 중앙청 회의실에서 첫 국회, 곧 제헌국회를 개원하게 됩니다. 이때가 오전10시였습니다. 이 때 임시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대한민국 독립 민주국회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 사상이 무엇이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가지고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릴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올려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고 이윤영 의원께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이윤영 의원은 감리교 목사였는데, 서울의 종로구 갑 지역구 의원이었습니다. 임시의장 이승만 박사가 공식 순서에도 없는 기도를 부탁하자 감리교 목사였던 이윤영 의원은 기도했습니다.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사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하나님은 이제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현신하신 것으로 믿나이다. ...” 이 기도를 드릴 때 모든 제헌국회의원들이 다 일어섰습니다. 대한민국 공문서 제1호라고 할 수 있는 국회속기록 제일 앞에 바로 이 기도문이 기제 되어 있습니다. 국회는 헌법 제정에 착수하여 헌법기초위원이 제정한 전문 및 본문 103조의 대한민국 헌법이 7월 12일 국회 의결을 거쳐 7월 17일 공포되었습니다. 제헌 헌법은 개인의 자유와 사유 재산권을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확실히 한 것입니다. 헌법 절차에 따라 7월 20일 회집한 국회 제32차 본회의에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고 이승만 박사가 압도적인 지지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7월 24일에는 대통령 취임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이때 이승만은, “대통령 선서하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과 동포 앞에서 나의 직무를 다하기로 일층 더 결심하며 맹세합니다.”라고 선서했습니다. 8월 15일에는 중앙청 광장에서 대한민국 정부 독립(수립) 선포식을 거행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기념사에서 그날의 행사가 우리 민족의 광복과 건국을 동시에 축하하기 위한 것임을 지적했습니다. 이로서 대한민국은 자유민주공화국을 수립하게 된 것입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임을 선언하고 국제적 승인을 받기 위해 노력하여, 유엔은 1948년 12월 12일 파리에서 개최된 제3차 유엔총회는 찬성 48, 반대 6표, 기권1 이라는 절대 다수로 대한민국을 합법적 정부로 승인하였습니다(결의안, 제195-III호). 이어 미국을 시작으로(1949.1.1.) 개별적인 승인이 뒤따라 자유 우방 50여 개국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런 승인 있었기 때문에 6.25 전쟁 때 참전이 통과되었고, 세계 93개 독립국가 중 70%에 가까운 63개국이 한국을 도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분단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처럼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의 원래 계획은 소련과의 합의를 통해 한반도 전체를 하나의 단위로 하는 중앙정부를 수립하고자 했고, 서울의 미군은 평양의 소련군에게 물자의 자유로운 교환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소련이 이를 거부하고 38선을 차단합니다. 북한을 동유럽의 나라들처럼 공산국가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스탈린은 이미 1945년 9월 20일자 전문에서 북한에 단독정부 수립을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당장 소련식 공산정부를 세우기보다는 좌우합작의 연립정부를 세우게 지시했습니다. 기만전술이었습니다. 그러나 조만식 같은 우파 민족주의자들이 협조하지 않자 1946년 2월 공산주의자들의 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세웠습니다. 이처럼 광복된 지 6개월 만에 정부를 세워 놓고는 분단의 책임을 회피하기위해 남한에 정부가 수립되기까지 선포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남한이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을 선포하고 나니 북한은 9월 9일 이미 세워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하는 형식을 취했던 것입니다. 이제 정리해 봅시다.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고 반공노선을 취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가장 큰 공헌이며, 이를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46년 8월 미군정이 조사한 여론 조사, ‘귀하가 찬성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8,453명의 응답자 중 70%에 해당하는 6,037명이 ‘사회주의’를, 7%에 해당하는 574명이 공산주의를 찬성했습니다. 곧 77%가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를 찬성했고, 자본주의를 선택한 이는 1,189명으로 14%에 불과했습니다. 좌익이 유리한 분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고 반공(反共)노선을 고수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는 공과가 있기 마련이지만 이승만(1875-1965)의 큰 업적은 그의 투철한 반공사상과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제로 확립한 일입니다. 1913년 2월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 33년만인 1945년 10월 16일 김포비행장을 거쳐 귀국했는데, 11월 28일(수요일) 김규식 김구와 미군 아놀드 대령과 같이 정동감리교회를 방문했습니다. 당시 담임목사는 황치헌 목사였습니다. 이 때 그는 성경책을 선물로 받고 인사말을 했는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 지금 우리나라를 새로이 건설하는 데 있어서 성경말씀의 토대위에 굳건히 세우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반석으로 삼아 의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매진합시다.” 그는 기독교 건국론의 이상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복잡한 역사적 배경을 말씀드렸습니다만, 해방된 조국에서 어떤 정부를 세울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였는데,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건국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맺는말: 우리의 과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광복을 맞게 되었고, 오늘 75주년을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차 대전 후 탄생했거나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한 나라는 85개국인데, 70여년이 지난 오늘날 민주화와 산업회를 동시에 이룬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합니다. 해방당시는 유엔기구로부터 원조를 받아 살던 최빈국이었고, 휴전 당시 국민소득은 67달러에 불과했으나 70여년이 지난 2017년 3만 달러가 넘어 OECD회원국 가운데 22번째로, 인구 5천만명 이상 국가 중에는 7번째로 3만 달러를 달성해 3050클럽(인구 5천만 명 이상,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이상인 국가)에 진입한 일곱 번째 국가가 되었습니다. 미국 프랑스 영국 독일 일본 이탈리아, 그 다음이 한국입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해방을 얻지 못하고 자유와 인권을 탈취당한 채 독제정권하에서 신음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북한입니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체제에서 살게 되었고, 짧은 시기에 민주화와 산업화 두 가지를 다 성취했으나, 북한은 공산체제하에서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마크 크라머 라는 사람이 쓴 ‘공산주의의 검은 역사 The Black Book of Communism’라는 책을 보니 공산주의 혹은 공산국가에서 죽임을 당한인구가 무려 9천 4백만 명, 곧 1억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마오쩌둥 치하의 중국에서만 기근, 문화혁명, 대장정 기간에 6천5백만 명이 죽임을 당했고, 소련에서 2천만 명, 캄보디아에서 2백만 명이, 북한에서 3백만 명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이것이 공산주의 실상입니다. 그런데 북한은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3대 세습국가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라는 이유로, 혹은 성경을 소지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투옥된 자가 5-7만 명에 달합니다. 월드워치리스트(WWL: World Watch List)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북한은 19년 째 세계 최악 기독교 박해국 제1위라고 합니다. 정치법 수용소에 갇힌 이들이 12만 명에 달합니다. 북한에서 살 수 없다며 생명 걸고 탈북한 이가 3만5천명에 달합니다. 이것이 오늘의 공산주의 북한의 실상입니다. 그럼에도 서울에서 백주에 공산주의가 좋다는 사람들이 활개치고 다니고, 김정은 정권을 칭송하는 백두칭송위원회라는 괴이한 조직이 설치고 있는 현실입니다.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말하고 전향하지 않았다는 사람이 장관에 임명되는 현실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이념적으로 혼란합니다. 해방정국과 비슷합니다. 1947년 해방을 기념하는 주일, 손양원 목사가 부산 제일영도교회에 와서 설교하면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무지했던 이들에게 설교했습니다. “여러분 공산주의가 좋습니까, 민주주의가 좋습니까?” 그때만 해도 이런 이데올로기에 무지했고 분별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이렇게 설교합니다. “공산주의는 남의 것 빼앗아 먹자는 주의입니다. 같이 공평하게 나누어 먹자가 아닙니다. 남의 것을 빼앗는 강제입니다. 그러면 민주주의는 무엇입니까? ‘이것 맛보시오’ 하면서 나눠 주는 주의입니다. 내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나누어 먹는 주의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성경주의입니다. 여러분, 어느 주의가 좋습니까?, 정신 바짝 차리십시오.” 손양원 목사를 순교자로만 아는데 그는 철저한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였습니다. 바른 신앙을 가진 분이라면 좌익이 될 수 없고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움을 받았고, 결국 전쟁이 발발한 3개월 후인 1950년 9월 13일 수요일 인민군에 잡혀 끌려 다니다가 28일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북한은 일제하 35년, 공산정권 하에서 75년 꼭 100년이 넘는 세월을 고난 가운데 시달리고 있습니다. 북한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지금 북한에는 6명의 한국인이 억류되어 있습니다. 김정욱(2013.10), 김국기(2014.10), 최춘길(2014.12), 고현철(2016.7), 김원호(2016.7), 함진우(2016.7) 선교사입니다. 북한 주민 탈북자를 도와주거나 성경을 전달했다는 이유로 잡혔고, 김정욱 김국기 최춘길 등은 무기 징역형을 선고받고 노동교화형에 처해 있습니다. 이들은 부서지는 육신을 안고 하루하루 버티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정부 당국자들도 억류된 자국민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북한이 오만방자해도 말 한마디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죽은 지 70년이 지났는데도 유해를 발굴하고 정중히 모시고 예우를 다하고, 억류된 자국민을 구출하기 위해 특사를 파견하고 외교적 수단을 동원하여 구출하지 않습니까?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이들의 구출과 해방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둔가 진정한 해방과 광복을 누리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다시 종의 멍에를 매지 않는 길일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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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20
  • 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는 하나님
    의로우신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일을 좋아하십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시11:7) 하나님은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기에 의로운 일을 행해야 합니다. 의로운 일을 행하는 삶은 하나님 앞에서의 올바른 삶,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의, 죄, 정직하지 못함, 거짓을 싫어하십니다. 죄성을 가진 죄인이지만 공의, 정직, 진실, 신실, 의로움을 선택해야 합니다. 거짓된 마음, 불의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정직, 진실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진실, 정직해야 합니다.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야 합니다. 좋은 마음, 좋은 생각, 올바른 판단력을 가져야 합니다. 거짓, 불의, 잘못된 마음과 생각은 의로움을 좋아하는 하나님의 성품과 반대가 됩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의를 기뻐하십니다.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정직해야 합니다. 선을 구하고 공의를 행해야합니다.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사는 자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 쓰임 받습니다. 불의, 죄, 거짓은 반드시 드러나게 되고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정직, 의, 공의는 시간이 갈수록 빛이 나고 인정받게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는 분임을 묵상하고 믿어야 합니다. 의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의를 구하고 공의롭게 행하고 언제나 신실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시15:1-2) 거룩하고, 순결하고, 착하고, 베풀고, 위로해주는 선을 행하는 것이 의로운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순리를 따르고 원칙과 원리를 따라가는 삶을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은 의의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의롭고 반듯하고 정직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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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20
  • 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 소원을 들으시는 하나님
    누구에게나 소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시10:17) “그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셨으며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 (셀라)”(시21:2) 소원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께 구하면 이루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고 싶어 하십니다. 소원은 꿈과 비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꿈과 비전을 이루어 주십니다. 요셉의 꿈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시20: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37:4)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 겸손한자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소원을 가진 자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어디에서나 언제나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한 자를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은혜를 주시며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겸손은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의 열쇠가 됩니다. 소원을 가지고 겸손 하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기도 들으시고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하나님께는 아무리 큰 소원이라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입을 넓게 열고 하나님께 소원을 가지고 이루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시81:10) 예수님은 맹인 바디메오의 눈 뜨고 싶은 소원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딸, 귀신들린 병에서 고침 받고 싶어 하는 소원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십니다. 소원을 이루어 주고 싶어 하는 사랑의 주님 이십니다. 믿음이 커지고 싶은 소원, 가정 복음화의 소원, 건강하고 싶은 소원, 하나님께 쓰임 받고 싶은 소원, 하나님은 이루어 주십니다. 소원을 가지고 사는 자가 믿음의 사람입니다. 욕심을 버리고 순수한 동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꿈과 소원을 하나님은 이루어 주십니다. 자녀를 얻고 싶은 한나의 소원을 하나님은 이루어 주셨습니다. 부자 되고 싶고 환난에서 벗어나고 싶은 소원을 가지고 기도했던 야베스의 소원을 하나님은 이루어 주셨습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4:10) 로마에 가서 복음 전하고 싶은 바울의 소원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셨습니다. 영혼 구원의 소원, 꿈을 하나님은 이루어주셨습니다. 아무리 큰 소원을 가진다 해도 하나님은 부담을 느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시고 이루어 주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대로 됩니다. 꿈, 소원대로 됩니다. 말한 대로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소원을 이루어주신 모습을 기대하면서 하나님은 나의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고 선포해야 합니다. 인간은 인간의 소원을 이루어 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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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06
  • 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 고아를 도우시는 하나님 시편 10:14
    고아는 불쌍한 자입니다. 외롭고 힘들게 사는 자가 고아입니다.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사람들은 고아를 멸시하지만 하나님은 고아를 사랑해 주십니다. 고아를 도와주십니다.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시10:14) 고아는 의지할 자가 없이 사는 힘이 없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고아의 형편, 마음을 아시고 때를 따라 도와주십니다. 고아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복된 인생을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아라고 탄식하거나 절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사람을 통하여 고아를 도와주십니다. 사람을 잘 만나 고아가 공부하고, 유학도 갑니다. 돕는 사람을 붙여주어 살 길을 열어 주기도 합니다. 고아에게 양식을 주시고,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고아와 함께 해 주십니다. 고아들까지 도와주고 살피시는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육신의 부모가 없는 고아이지만 하나님을 믿고 사는 자는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어 도와주십니다. 고아가 좋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고아를 도와주시기에 고아에게 하나님이 소망이 되십니다. 공중의 새를 기르시고, 들의 백합화를 기르시는 하나님께서 고아를 반드시 살피시고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은 고아를 버려두지 않고 도와주십니다. 참된 경건은 고아와 같이 불쌍한 자를 도우면서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1:27) 고아를 도와주면서 사는 삶은 고아를 지으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립니다. 고아와 같은 형편이라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외롭지 않습니다. 영적인 고아,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영적 고아도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도우십니다. 하나님은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 없는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고아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은 사랑으로 가득 찬 하나님이십니다. 고아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녀는 세상에 사는 고아들을 불쌍히 여겨주고 사랑하고 도와주면서 살아야 합니다. 고아를 도우시는 하나님은 선한 하나님, 선한 목자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참된 도움을 주시는 전능자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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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08
  • [순교자 주일 기념 설교문] 충성된 증인
    순교자기념주일 설교(2020. 6. 14) 충성된 증인 (계 2:8-10) 제공자: 이상규 교수 시작하면서 오늘 6월 둘째 주일은 우리 교단 총회의 결정에 따라 ‘순교자기념 주일’로 지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전국의 고신 교회가 똑같이 공동설교문으로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늘 앞서간 믿음의 선진들을 기억하고 그들이 남겨주신 신앙의 유산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분주한 일상에서 순교자들의 숭고한 신앙을 잊어버리고 사는 일이 많았습니다. 오늘 순교자기념 주일을 지키면서 오늘 하루만이라도 순교자들의 거룩한 열정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순교자들은 한결같은 주님 사랑과 자기 목숨까지 바쳐 복음을 증거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먼저 순교가 무엇인가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그러고 나서 역사 현장 속에 나타난 사례를 소개하고, 성경 본문이 주는 교훈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헌신하며 기꺼이 순교자의 길을 갔던 이들을 생각하면서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을 점검하고 새롭게 결단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순교의 의미 우리가 ‘순교’(殉敎)라고 말할 때 이 말은, 사전적으로 “자기가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한 죽음”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순교자’라고 할 때 이 말은 “자기가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한자문화권에서 ‘순(殉)’이라는 말은 거룩하고 고상한 죽음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를 위한 죽음을 순국(殉國), 직책에 충실하여 목숨을 바침을 순직(殉職)이라 합니다. 순교란 말의 순(殉)자는 죽을 사(死)와 열흘 순(旬)이 합쳐진 말로서 “죽은 사람(死)의 뒤를 이어 열흘(旬) 안에 따라 죽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 순(殉)은 ‘함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말하는 순교(殉敎)는 동양 문화권에서 말하는 의미와는 다른 뜻이 있습니다. 순교를 뜻하는 영어(martyrdom)는 라틴어 ‘마르티리움’(martyrium)에서 왔고, 마르티리움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말투리온(μαρτύριον)인데, 이 말은 흔히 ‘순교’로 번역되지만 본래의 의미는 ‘증언’ 또는 ‘증거’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약에서 ‘순교’라는 개념은 따로 없었고, ‘증언’ 혹은 ‘증거’라는 말이 후에 ‘순교’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말투리온이라는 말은 ‘증거,’ 혹은 ‘증인’을 의미하는 동시에 ‘순교’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헬라어 마르투스(μἀρτυς)는 흔히 ‘순교자’로 번역하지만, 본래는 ‘증인’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이를 증거 하다가 죽은 이들을 ‘증인’(μάρτυρός)이라고 표현했습니다(행22:20, 딤전6:13, 계17:6). 그래서 말트리온은 ‘증거,’와 ‘순교’를, 마르투스는 ‘증인’이라는 의미와 ‘순교자’라는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순교자들이 다 복음의 증거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행 22:20 또 주의 증인(ma,rturo,j)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딤전 6:13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딤전 6:13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o`molog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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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4
  • 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생각해주시는 하나님
    사람을 생각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에 있습니다. 부모는 항상 자녀를 생각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생각하십니다. (시 8: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누군가를 생각해준다는 것은 관심이요, 사랑입니다. 사랑하지 않고 관심가지지 않는 사람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생각하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언제나 하나님의 자녀에 있습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기억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하십니다. 사람들은 기억력에 한계가 있습니다. 떠나 살면 잊혀 집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인간관계가 없으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나를 기억해 주십니다. 나의 기도제목, 나의 이름, 나의 소원을 기억하십니다. 나의 삶, 선행을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은 고넬료의 구제, 선행, 기도를 기억해주셨습니다.(행10:4)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생각해 주셨습니다.(창 19:29) 하나님은 라헬도 생각해 주셨습니다.(창 30:22)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생각해주셨음을 찬양하였습니다.(시 40:5) 하나님은 생각해주시고, 기억해주시는 섬세하고 자상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회개한 죄를 지워주시고, 기억도 하지 않으시는 인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죄성은 다른 사람들의 나쁜 점은 기억하고, 좋은 점은 잊어버리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좋은 점을 기억하십니다. 하나님께 충성한 것을 기억하시고 상 주시는 분이십니다. 생각나는 사람은 기억하고 날마다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생각만 하지 않고, 기억해주고 기도해주는 자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생각하여 구원하시려고 예수님을 보내어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나를 생각하시는 하나님은 언제나 내 편에 서서 도와주십니다. 나를 생각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나도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기쁘다는 찬송을 부르게 됩니다. 항상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 하나님을 닮게 됩니다. 나를 생각하시는 하나님은 나를 돌보아 주십니다. 생각이 돌보아 주심으로 나타납니다. 사랑은 생각하게 되고 돌보아 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시듯 우리도 사람들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낙심된 자, 슬픈 자, 외로운 자를 심방하고 주의 이름으로 돌보아야 합니다. 목사의 사명은 양을 돌보아 주는 데 있습니다. 나를 생각하고, 기억해 주시고,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을 높이고, 사랑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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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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