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2(목)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기고

실시간뉴스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4-03-01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4-02-09
  • [기고] 고신, 우이독경(牛耳讀經) 교단과 대학교
    지난 글에 대한 반론이 나왔습니다. 고신대학교 모 교수님이 쓴 글입니다. 반론이라는 말 자체는 없지만, 내용을 보면 반론이 확실합니다. 아무런 반응이 없을 것이라 짐작했던 터라 이 반론이 참 반갑기도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내용은 ‘우이독경(牛耳讀經)’,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지난 글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염려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본질을 흐리는 말싸움, 감정싸움으로 비치지 않길 바랍니다. 한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이번에 나온 반론도 ‘위기’, ‘골든타임’을 표면적으로는 인정하는 듯 보이니까 말입니다.하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지난 글에서 지적하고자 했던 것은 간단합니다. “언제까지, 얼마가 필요한가?” 다시 설명해 드립니다. ‘골든타임’으로 접어든 ‘위기’의 고신대학교에 관한 교단 지도자들의 책임 있는 대안을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교단 지도자들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작금의 이런저런 노력이 귀하지 않다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와 성도를 설득해 기부금을 받는 정도의 방법이 주요 대안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방법으로는 본질을 해결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고신 내부의 큰 소리를 들어달라는 겁니다. 지금까지 고신교단의 교회는 고신대학교를 위해 헌신해 왔습니다. 그런데 ‘위기’와 ‘골든타임’이라는 상황에 다시 더 큰 기부금을 요청하며 걷고 있습니다. 기도회를 하면서 말입니다. 저의 제안은 언제까지, 얼마를 기부해야 하며, 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대안을 묻는 것입니다.그것이 어떤 것이든, 이제는 정확한 판단과 분석이라는 것을 보고 싶고, 봐야 할 때라서 그렇습니다. 저는 저의 이 제안이 간단명료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반론을 보니 제 제안이 어려운 모양입니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장황하지도 않은 장황한 역사만늘어놓았습니다. 2003년, 2014년, 2015년의 이야기가 지금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본질을 흐리고 있습니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73회 총회가 드디어 제대로 된 대책을 내며 일을 시작했다는 생색뿐입니다. 과거의 장황한 역사를 꼬집은 것은 이 ‘생색’을 돋보이게 하는 양념이었군요. 책임져야 할 자들은 따로 있는데, 왜 ‘우리’(?)에게 말하느냐는 마음이 행간에 엿보입니다. 설명이 어려운 듯하여 다시 설명해 드립니다. 과거에는 전혀 기부금이 없었습니까? 역대 최고 수준의 기부금을 언급하는데, 이것이 고신대학교를 살릴 수 있습니까? 이 노력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된 판단과 분석을 토대로 노력하자는 겁니다. 본질을 흐리지 마십시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고신대학교의 상황에 관한 미화뿐입니다. 과거에는 전혀 기부금이 없었고, 과거에는 교직원들의 헌신이 없었습니까? 교수의 81%, 직원의 42%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면, 교수의 19%와 직원의 58%와는 갈등이 없습니까? 내부적으로 나오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겁니까? 아니면 듣기 싫은 겁니까? 지금 모든 지방 사립 대학은 연합 대학을 통해서라도 글로컬 대학에 진입하는 일에 대학의 사활을 걸고 있는데(참고, https://news.unn.net/news/articleView.html?idxno=558472), 글로컬 대학이 해결책이 아니라는 주장은 도대체 어떤 근거와 데이터를 가지고 하는 말입니까? 대학에 몸담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본질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카테고리가 헷갈리거나, 아니면 호도(糊塗)하는 유희삼매(遊戱三昧)만있습니다. 교육부와 지자체가 발주하는 사업에 참여한 결과로 받은 금액이 64억 중 교직원 인건비, 학교 운영비로 지출된 금액이 1원이라도 있습니까? 이 금액은 그야말로 프로그램을 위한 비용입니다.혹시 64억을 받아 학교 살림이 나아졌는데도 ‘위기’와 ‘골든타임’에 동조하며 계속 모금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계시는 겁니까? 반론자도 고신대학교의 문제가 학령인구 감소와 그에 따른 재정위기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대안으로 학생들이 공부와 자기 발전을 위해 열심히 하는 것을 제시하다니요? 또한, 구조조정을 언급하면서 실제적인 문제를 언급하는 일반적인 상식은 ‘세속적인 사고방식’으로 무시하면서 교직원 연봉의 십일조를 자발적으로 기부하는 것을 언급하다니요? 도대체 구조조정과 연봉의 십일조 기부와 무슨 상관이 있으며, 이것이 어떻게 전체 고신대학교를 위한 상생이 되는지요? 수익 구조 다각화에 대한 노력과 5년 재정 구조에 대한 정밀 시뮬레이션 완성? 좋습니다. 바로 이런 대책을 내놓으라는 겁니다. 본질을 흐리지 말고, 그 방법을 고신대학교를 위한 더 큰 헌신과 헌금을 요구하는 고신 교회 앞에 설명해 주십시오. “모금하다가 안 되면 할 수 없고”라는 식의 미봉책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동참하지 않는 수많은 교회와 성도들의 염려와 중심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그분들의 ‘고신 사랑’을 폄하하지 마십시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가짜 뉴스라는 지적만있습니다. “재학생 등록률과 신입생 충원 결과를 보면 1년 100억 적자가 날 것이 분명한 사실인데”라는 표현이 가짜 뉴스인가요? 제 나름대로 정보를 통해 파악한 금액입니다. 저의 부족함 때문에 계산상 조금의 오류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정확한 정보를 주는 이가 없으니 그럴 수 있지요. 그런데 이게 가짜 뉴스라고 지적받을 표현인가요? 그렇다면 반론자는 자료를 다루는 교수 아닙니까? 병원의 적자는 어떻습니까? 학교법인 고려학원의 적자가 100억 이상 나는 것이 가짜 뉴스라면, 본질을 흐리지 말고, 진짜 뉴스로 ‘정확한 적자 금액’을 분명히 밝혀주십시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오히려 가짜 뉴스만 있을 뿐입니다. “혹자는 의대와 복음병원을 헐값에 인수하려는 사람들과 모의를 벌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동안 위기라고 말만 하면서 오히려 잘못된 과장 정보로 위기를 부풀리기만 했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다면...”??? 신학교수인 반론자는 정말 신앙 양심에 화인을 맞았습니까? 십계명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동료를 향한 가짜 뉴스를 은근히 양산하는 말장난을 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잘못된 과장 정보로 위기를 부풀렸다면, 지금 반론자가 말하는 위기와 골든타임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이 정도 매너의 교수가 신학교수로 학교 강단에 있는 고신의 현실이 개탄스럽기까지 합니다. 본질을 흐리는 공격을 멈추십시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책임질 수도 없고, 책임질 생각도 없는 나팔수의 아부만 있을 뿐입니다. 도대체 교수님은 우리 고신교단과 고신대학교에서 어떤 책임 있는 자리에 있습니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개진하는 것은 신자 개인의 자유이나, 총회와 고신대학교를 대변하는 듯한 이런 주장으로 교단과 고신대학교를 갈라치기 하는 (파탄 내는) 논쟁으로 몰아가는 것은 나팔수의 아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이것이 극단적인 분리주의 사고방식인 것은 모르실 리 없겠지요. 본질을 흐린 채 말장난, 정중하고 정확한 논의를 촉구합니다. 정확한 사실을 제시하는 책임 질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길 간절히 바랍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4-01-27
  • [특별기고] 통합 기념 한마음교회 유감
    폭염입니다. 여름의 태양이 작열하는 계절! 이 여름에 우리 주님 다시 오신다면 태양처럼 뜨거운 신앙 열정을 가진 사람을 찾으실 것 같습니다. 사역의 현장마다 여름 태양보다 더 뜨거워서 주님의 칭찬을 받는 우리 교단 교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미 알고 계시듯이 우리는 성공적인 교단통합을 이었습니다. 그 통합기념으로 한마음교회를 설립한 것입니다. 전국 노회와 교회들이 마음과 기도와 물질을 모아 세운 기념비적 통합기념교회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통합기념 한마음교회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시는지요? 통합기념 한마음교회는 고신교단의 여러 어른들과 선배 목사님들 그리고 총회 임원들 그리고 (구)고려의 선배들과 임원들이 힘들게 이루어낸 통합의 금자탑이며 결정체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느 교회의 지 교회가 되어있습니다. 교단통합을 하면서 기념으로 교회를 설랍(립)하되 (구)고려측의 목회자를 세우기로 결의하고 설립한 교회가 바로 한마음교회입니다. 그런데 (구)고려측의 일대 한마음교회 전임목사는 당회장권 한번 갖지 못하고, 고초를 겪다가 사임하였습니다. 한마음교회 담임목사에게 이러저런 이유로 당회장권을 이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2년 동안 무려 6번이나 당회장을 바꾸면서 힘들게 했습니다. 이런 상식 밖의 이상한 일이 통합기념 한마음교회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안양일심교회 부목사로 사역했던 이 모 목사가 담임으로 있습니다. 안양일심교회가 물심양면으로 많은 부분을 헌신한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전국 노회와 교회의 헌금으로 세운 통합기념교회를 일심교회 40주년 지교회로 삼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결과론적으로 유감스럽게도 통합기념교회 설립을 위한 목적헌금이 한 교회의 지교회를 설립하는데 사용되는 어처구니 없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교단 전체가 바로 알고, 바로 잡아야 하겠다는 결연한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우리가 하나의 교단으로 통합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처음의 약속과 결의가 깨짐으로 아름다운 통합정신이 훼손된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아픔이지만, 특히 (구)고려 측 형제들에게 깊은 상처를 준 아픔이 된 것입니다. 이런 사태로 인해 안양일심교회와 당회장은 (구)고려 측 형제들로부터 신뢰를 잃었고, 지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미안했던지, 무마하려고 (구)고려의 어려운 분들을 후원하겠다고 접촉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고려 목사들은 의도가 순수하지 못한 후원금을 받을 리 없지 않습니까? 지난해부터 제안하는 후원금을 거부해 왔습니다. 올해 들어와서 또다시 (구)고려 동문회에 7천만원 정도를 후원하겠다고 제의를 해왔지만 코로나로 인해 어려운 교회와 선교사들이 많이 있었지만 통합기념교회를 세우려는 큰 뜻이 있기에 거절했던 것입니다. 급기야는 비공식 채널을 통해 기어코 후원을 했습니다. 공식적으로 거부했는데도 비공식체널을 통해 기어코 다수의 교회에 상당한 후원을 감행한 저의가 무엇인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저도 부교역자 약 10년, 한 교회 담임목회를 27년째 하니 37년 사역을 하며 산전수전공중전까지 다 겪은 사람입니다. 교회의 내부 사정이 있어 그렇겠거니, 일면 이해가 가지만, 그렇지만 한마음교회의 문제는 양 교단 통합기념 교회인만큼 그냥 넘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전국 노회와 교회의 헌금은 통합기념교회를 설립하기 위한 목적 헌금입니다. 그 목적대로 쓰이지 않았다면 바로 잡는 것이 마땅합니다. 따라서 교단 70주년을 맞아 통합기념교회를 다시 세우려는 계획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국 노회와 교회의 후원금 13억여원은 교단통합의 정신과 기념을 담는 명실공히 통합기념교회 설립을 위해 쓰여져야 할 것입니다. 안양일심교회는 고신교단의 대표적인 큰 교회 중의 하나입니다. 또한 당회장 김홍석목사님은 앞으로 총회에 큰 일을 감당해야할 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중대한 일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고 교단의 지도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안양일심교회 김홍석목사는 통합기념 교회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하는 지도자로서의 모습을 보여할 것입니다. 이것이 (구)고려측 대부분 형제들의 일치된 생각입니다. “순교자의 고장! 진리의 파숫군! 경건자의 훈련소, 예수의 제자들이 일어나는 산실!” 그 교단이 우리 고신 입니다. 저는 우리 교단의 일원이고 교단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고신의 목사로 함께 사역함이 늘 감사합니다. 저는 고신인이 된 것이 좋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의 뒤를 이어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 정신을 이어가는 우리 교단이 좋고 자랑스럽습니다. 그 어떤 일보다도 고신과 고려의 통합이 자랑스럽습니다. 통합 후 (구)고려 동문들이 연합하여 학원이사로, 고신세계선교회 이사로, 이단사이비연구소장으로, 동문회 임원으로. 각 상비부에서... 각처에서 활약하는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운 하모니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통합입니다. 이렇게 배려해 주고, 사랑해주는 우리 ‘고신’이라는 이름이 자랑스럽고 감사합니다. 따라서 통합기념교회가 다시 설립되어 통합정신이 훼손되지 않고 계승되어 아름다운 교단을 잘 보전하고, 또 더 아름답게 발전되기를 기원하는 바램을 담아 이 글을 씁니다. * 통합기념교회 설립을 이행하라! * 전국 노회와 교회의 목적 헌금을 반환하라! 2022년 7월 중순 신앙 열정이 여름 태양처럼 뜨겁기를 기도하며... ※ 기고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2-08-02
  • [신재철 목사] 안녕, 대전(大田) : “전학왔니더”
    “푸를 청(靑), 소나무 송(松). 청송에서 대전으로 전학왔니더.” 전학 수속이 끝나고 들어간 교실. 담임 선생님께서 친구들에게 자기소개를 해보라 말씀하셨다. 나는 큰 소리로 나의 고향 이름을 소개하며 인사했다. 아이들이 나의 인사보다 더 크게 웃는다. 왜 웃을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선생님께서 정해주신 빈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와 다르게 아이들 얼굴이 뽀얗다. 우리 엄마가 읍내에서 사준 이랜드 옷이 촌스럽게 느껴졌다. 어쩐지 다들 공부도 잘 할 것 같다. 주눅과 함께 찾아든 두려움도 잠시. 쉬는 시간에 몰려든 아이들의 질문 세례에 정신이 없었다. 자꾸 말을 시킨다. 그리고 아이들은 더 크게 웃는다. 아마도 나의 사투리가 재미있고 신기했던 것 같다. 대놓고 놀리는 것은 아닌데 뭔가 찝찝하다. 촌놈 하나 전학 오니 신기해서 구경하러 온 느낌이다. “뭐여~ 내가 언제~” “니가 그랬잖여~ 왜그랴~” 나를 구경하러온 친구 무리와 떨어진 곳에서 조금 큰 소리가 난다. 제법 덩치 큰 남자 아이 둘이서 대화를 하고 있다. 내게 몰려든 아이들이 이제 그쪽으로 몰려간다. 아직은 인사도 제대로 못한 옆 짝에게 상황을 물어보았다. 큰소리로 대화하는 두 명의 친구, 그곳으로 몰려드는 아이들.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첫인상이 좋았던 짝은 웃으며 답한다. “응, 쟤들 싸우는 거야. 그래서 구경 간거지모.” 응? 싸우는 것이라고? 저렇게 느린 말로, 저렇게 너그러운 톤으로 싸움이 가능하단 말인가? 내가 있던 경상도에서는 싸움이 나면 일단 말로 여럿 죽인다. 목소리도 얼마나 큰지 말한 대로 곧 실천할 것 같은 위협이 느껴진다. 경상도 말은 나름 살가운 인사도 종종 살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오해를 받기도;; 뭔가 대전 친구들은 푸근하게 느껴진다.
    • 오피니언
    • 기고
    2021-08-11
  • 마음을 여는 시 [신광열 목사] 걱정
    사람이 없어 걱정이다 강 같은 어머니가 없고 산 같은 아버지도 없다 길 같은 선생님도 별 같은 지도자도 흙 같은 목회자가 없어 참으로 걱정이다
    • 오피니언
    • 기고
    • 마음을 여는 시
    2021-03-24

실시간 기고 기사

  • [기고]고신, ‘개혁주의’를 절대 포기할 수 없다!
    <특별 기고> 필자는 고신포럼의 한 일원으로서 고신포럼의 이념구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고신포럼으로부터 그 어떤 권위도 부여받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의 글은 철저히 필자 개인 의견이며, 그 책임은 전적으로 필자 개인에게 있음을 밝혀 두는 바이다. (그리고 장문이라 서두에 단락의 제목을 밝히고 그 순서에 따라 의견을 펼침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1) 우리는 개혁주의 노선을 추구한다. 우리 고신이 개혁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이유는, 지난날 종교적 혼합과 세속적 타락으로부터 오직 하나님 말씀 앞에서 반드시 걸어야 할, 말씀중심의 길을 끊임없이 찾고자 하는 선진들의 생명을 건 투쟁에서 비롯된 것임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Protestant 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2) 개혁주의는 전 고신 인이 추구해야 할 정신이다. 그런데 이 개혁주의를 지향하는 이는 어떤 특정한 집단이나 인물만이 취급할 수 있는 전유물인양 주장하는 전제를 필자는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라면 누구나 이 점에 관하여 깨어있어야 하고, 특히 고신 인이라면 이 개혁주의 노선을 반드시 지켜야하고 그 길을 가야 할 길이 아닌가? 그래서 필자는 그 권위와 지위에 상관없이 누구든지 그것에 대하여 논하고 바른길을 찾는 것에는 예외일 수 없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3) 고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회복하는 길은 신학적 논리로 풀어야 한다. 그런데 최근 정00 목사가 고신의 정체성과 개혁주의 신앙과 관련하여 제기한 신학적 이슈에 관련하여, 첫째는 제기된 문제의 팩트를 확인하고, 둘째는 그 오류가 무엇인지 근거와 논리로 반박하고, 셋째는 그 제기된 문제가 분명 신학적 문제가 있다고 하면, 소위 목회적 경험과 전문적 지식을 가진 분들이 냉정한 판단을 통하여 바로잡아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모 교수와 모 목사는 본질적인 문제 보다 비본질적인 문제로 접근하여 본질을 희석시키려고 정치 논리로 몰아가는 것이 아닌지 자못 염려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결코 신학적 문제는 정치적 논리로 풀어서는 안 된다. 고신을 걱정하는 순수한 의도를 지닌 개혁주의 신앙을 걸어가는 자로서, 제시한 문제점들을 향하여 소위 ‘일개 목사’를 운운하면서 무시하는 처사는 결코 고신인답지 않는 처사이다. 적어도 고신포럼이 어떤 정치적인 사익을 챙기기 위한 것이었다면, 분명한 증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며, 비도적인 집단으로 매도한 모 목사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적인 관점에서 문제점을 지적하고 거기에 대한 오류를 수정해야지 어떤 정치적 프레임을 둘러씌워, 하나님 앞에서 불타는 열정을 가진 한 목사를 매도하거나, 더욱이 우리 교단에 소속된 수백 명의 회원을 가진 고신포럼을 아무 근거 없이 정치적으로 몰아 공격하고 있는 현실에 심히 우려가 되지 않을 수 없다. 4) 고신포럼은 고신의 그 이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고신포럼은 성경과 개혁주의 신앙고백의 가르침을 따라 개혁주의 교회 건설을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친목을 위한 소모임이 아니며, 엄연히 대표를 비롯한 조직을 갖추고 있어, 모 목사가 폄하할 정도가 결코 아님을 밝혀 둔다. 그런데 모 목사는 고신포럼에서 '고신' 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억지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 근거로 ‘고신몰’ 폐쇄에 대한 이야기를 들고 있다.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고신몰은 고신교회와 성도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교회 관련 물품들을 공급하여 상생하는 길을 찾으려 하였으나 이용자가 너무 적어서 그 존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여 폐쇄하는 방향’으로 결정하고 내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 모 목사의 말한 것처럼 따끔한 질책을 한 후에 폐쇄했다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며, 이를 근거로 목사들의 학문토론을 지향하는 고신포럼의 폐쇄를 운운하는 것에 심히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고신포럼의 주제와 강사선정까지 간섭하는 듯한 발언은 그 정도를 넘어선 발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고신포럼을 ‘정치모임, 자기편을 만드는 도구의 장, 정치화시키려는 장을 삼으려는 합리적 의심이 간다’는 식으로 폄하하는 정치적 프레임에 대해서야 말로 고신포럼이 엄중히 경고하고 사과를 받아야 할 사안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단체의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할 경우에는 그 단체의 이름을 사칭하여 사리사욕을 취하거나, 그 단체의 이름을 사용함으로 명예를 훼손하고 심각한 폐회를 끼친 경우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고신포럼에서 고신의 이름에 어떻게 명예를 훼손했으며, 심각한 폐해를 끼쳤는지 그 근거를 들어 제시해야 할 것이며,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고신’, 그 자랑스러운 이름은 고신 인이라면 누구나 자랑스럽게 사용해야 할 것이며, 그것에 자부심을 가져야 마땅한 일이며 오히려 권장할 일이다. 물론 개혁주의 입장에서 학문적인 따끔하고 아픈 지적은 언제든지 겸허히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것은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랑스러운 ‘고신’의 이름을 가슴에 품고 전진하는 ‘고신포럼’ 을 향해, 자신의 생각이나 입맛에 맞지않다고 하여 고신포럼을 공격하는 것이야말로 정치 놀음이 아닌지 정말 안타까울 뿐이다. 5) 올바른 신학적 논쟁으로 고신 정체성을 회복하자 지금 우리는 시대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교회가 위기에 직면해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위기를 극복하고 반석 위에 교회를 든든히 세워야 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선 우리 안으로부터 성숙한 신학적 논쟁으로 바른 신앙과 신학을 회복시켜 가야 할 시점이라고 본다. 그런데 ‘어떻게 아무런 알맹이 없는 발언으로 비난을 쏟아내는가?’, ‘어떻게 정당하게 신학적인 논쟁을 통해 해결할 생각보다는 정치적 논리로, 위협에 가까운 말들을 할 수 있는가?’를 되묻고 싶다. 그렇다. 존경과 공경은 중요한 윤리적인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회복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치열하고 성숙한 논쟁은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하는 가치요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 교단에서 누가 보더라도 정치적인 인물일 수밖에 없는 목사의 글에서, 순수하게 학문적, 신학적 문제를 제기한 후배 목사를 향하여, 정치적 배경을 운운하는 것이야말로 적반하장이 아닌지 되묻고 싶을 뿐이다. 교단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한 목사의 열정을 꺾어 버리고 상처를 준다면 교단의 미래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를 계기로 하나님 앞에서 누구나 자유롭게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고, 논쟁하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미래 지향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야 옳지 않는가? 비난이 아니라 생산적인 비평의 장, 정치적 프레임이 아니라 순수한 신학적 논쟁의 장, 권위의식으로 무시할 것이 아니라 겸허하게 수용하고 바로 잡고자 하는 것이 바로 개혁주의 정신의 장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장이 가감하게 마련되길 바란다. 6) 따라서 ‘교단신학과 정체성 회복을 위한 대토론회’ 를 제안한다. 제3회 고신포럼을 개최하면서 상당히 미묘한 주제라는 것을 인지한 준비위 측에서는 이와 반대되는 주장을 가진 특정인에게도 동일한 시간을 배정하여 강의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으나, 안타깝게도 개인적인 사정으로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을 통보받았다. 그리고 정상적인 절차를 따라 제안한 것은 아니지만, 모 목사가 ‘그렇다면 이슈의 중심이 된 모 목사와 정당하게 공개 토론의 장을 가져보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그 제안에 대해 ‘격이 떨어진다.’는 식의 회피성 발언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격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격을 인정받게 될 것인데, 그 논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 차제에 소위 말하는 고신 신학의 바른 정립을 위하여 격을 높여 한 번 진중하게 대내외적인 장에서 공개 토론을 하면 어떨까 제안한다. 발제자를 3-4명 정도로 하고, 발제 주제 전문을 발제 전에 다른 발제자들이 공유하게 하고, 그 발제 후는 ‘일대일’, 또 ‘일대다’의 형식으로 적어도 3차례의 반론기회를 부여하여 분명하게 대토론회를 가져보면 좋겠다. 이것을 고신포럼이 주최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코로나 시대에 한국교회에 신선한 충격을 줄 것이고, 누구든지 당당하게 신학을 논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모든 목회자들과 소위 젊은 신학자들에게 줄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그래도 배움에 자부심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얕은 신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한 젊은 목사에게 완전히 굴복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너무나 뿌듯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적어도 필자에게 ‘고신신학이 이래서는 안 된다.’ 라는 것까지는 분명하게 알려주었다. 그렇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고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지켜나가야 할 적기라고 생각한다. 이 일이 일부의 불필요한 오해와 왜곡된 시각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기를, 또한 고신 신학의 발전적인 기회를 놓치므로 후회할 일이 없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1-05-25
  • 마음을 여는 시 [신광열 목사] 걱정
    사람이 없어 걱정이다 강 같은 어머니가 없고 산 같은 아버지도 없다 길 같은 선생님도 별 같은 지도자도 흙 같은 목회자가 없어 참으로 걱정이다
    • 오피니언
    • 기고
    • 마음을 여는 시
    2021-03-24
  • 고신대학교복음병원 노동조합 보도 관련 기고문
    본지는 언론의 책임인 사실확인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에 대해 노동조합 측에 유감의 뜻을 표합니다. 경남기독신문은 홈페이지 오피니언세션에 “전 행정처장” 곽춘호, 미완으로 끝난 복음병원 노조 개혁”이라는 제목으로 고 곽춘호 사무국장이 노동조합과의 법적 소송, 고발 및 갈등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사망하였다고 보도하였고, 노동조합이 낙하산인사로 약점을 잡아 이사장 및 재단관계자들이 친노동조합적 행보를 하게 함으로 병원개혁과 경영합리화를 하지 못하게 하여 상급종합병원 평가에서도 탈락하였으며, 불법적 편의시설 운영하여 노조의 활동자금으로 쓰는 부도덕한 노동조합으로 기사를 게재하였다. 본 노동조합은 언론사의 책무인 사실확인을 하지 않은 17가지의 사항에 대해 언론중재위원회에 언론중재신청을 했으며 일부 정정보도가 나갔다. 기사 내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노동조합의 입장을 밝히는 바이다. 1. 노동조합과의 법적 소송, 고발 및 갈등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사망한 것처럼 기사가 났지만 고신대복음병원 노동조합은 곽○○국장과 법적소송을 진행한 적이 없으며 매점소송과 관련하여서는 강○○ 전 이사장이 소송을 진행하였고 곽국장은 2016년 6월 당시 해임되어있던 상태로 소송을 진행 할 수 있는 직위가 없었다. 노동조합은 곽국장을 형사 고발한 사실이 없고, 따라서 검찰과 법원에서 무혐의 판결이 난 적도 없다. 그리고 이사회는 여러 가지 비위사안으로 곽국장을 해임징계하였고 부산지방노동위원회는 징계의 사유는 정당하나 양정이 과하다고 결정한 것이지 징계위원회의 해임결정 자체가 부당하다고 하지 않았다. 또한, 곽국장의 사망원인으로 보도한 ‘뇌출혈’은 전혀 사실 무근이며 직접적인 사인은 ‘심근경색’이었다. 위와 같이 전혀 사실이 아닌 내용으로 곽국장의 사망의 원인이 노동조합에 있는 것처럼 호도하였다. 2. 환자보다 직원이 많은 병원이라고 기사에 나와있지만 실제로는 다른 상급종합병원들보다 환자수 대비 직원수가 적은 것으로 파악되었다. 고신대학교복음병원 노동조합이 전국보건의료노조안에서도 목소리가 큰 거대 공룡 노조인 것처럼 표현하였으나, 전국보건의료노조 조합원수 71,125명 중 1,396여명(약2%)정도의 비율을 가진 지부가 거대 공룡 노조이고 목소리가 크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다. 3. 역대 이사장들이 노동조합의 편을 들고 곽○○국장을 외면했다고 기사에 나와 있으나 이사장과 이사회는 여러 가지 비위로 해임 징계 처분을 받은 곽국장을 오히려 재단 법인 사무국장으로 승진시켰다. 이에 대해 노동조합은 이의를 제기 했지만 이사장 및 이사회는 침묵, 방관으로 곽국장의 편을 들었다. 4. 병원이 노조에 약점이 잡혀 재단 관계자들은 자기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노조에 계속 끌려 다니는 형국이고 지금의 재단 이사장도 노조지부장이 자기 교회에 출석하기에 친 노조 행보를 보인다라는 내용으로 기사가 났다. 하지만, 지부장은 현 이사장이 담임하는 교회에 등록교인일 뿐이며 현 이사장도 곽국장에 대한 노동조합의 이의 제기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5. 여기에 역대 재단 이사장마다 노조의 손을 들어주는 비상식을 자행하는 사례가 빈번하여 사태는 더욱 악화되고 노조를 중심으로 한 병원 개혁은 빈번이 물 건너가는 형국은 물론이고 상급종합병원 재지정 탈락되는 수모까지 당하게 된 샘. 이미 외부의 진단에서도 방만한 경영으로 인한 적자 누적 해결책은 인력 구조조정뿐이라는 지적이 나왔다고 보도하였다. 하지만 역대 재단이사장이 노동조합 편을 든 적이 없고 노동조합이 어떠한 행위로 경영을 어렵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구체적 사실이 없다. 또한, 엘리오 경영진단 7대 전략영역과 25가지 실행과제에 ‘적자 누적 해결책은 인력 구조조정’이라는 언급은 없었다. 6.노동조합이 병원의 매점·분식점을 운영해 활동자금으로 사용한 것처럼 기사에 나와 있지만 사실 노동조합은 매점·분식점 임대료 수익을 전액 조합원 및 조합원이 아닌 직원들까지 포함하여 설, 추석 등의 명절 선물비용 및 직원 복지비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 임대료 수익만으로는 비용을 충당하기 어려워 조합원들이 낸 조합비로 모자란 부분을 충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7. 매점·분식점 소송과 관련하여 결정문 중 “노동조합법 제81조 제4호 본문에서 금지하는 부당노동행위에 해당한다고 봄이 상당하므로”을 인용하여 노동조합의 매점·분식점 운영이 불법인 것처럼 표현하였다. 하지만 노동조합법 제81조의 입법취지는 사용자(병원)가 노동조합의 조직운영이나 사업에 대한 지원을 하여 노동조합 활동을 지배, 개입하여 노동조합의 자주성을 침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고, 헌법재판소 결정(2018.05.31. 선고 2012헌바90 결정)은 부당노동행위가 아니라는 판결취지이며 개정 법률안을 통해 더 명백해졌다. 부당노동행위라는 주장은 제81조 제4호의 「또한 근로자의 후생자금 또는 경제상의 불행 기타 재액의 방지와 구제등을 위한 기금의 기부와 …예외로 한다.」의 법문구의 취지와 충돌한다. 더군다나 소송은 현재 항소 진행 중으로 완전히 결정이 나지도 않았다. 8. 기사에 ‘민노총의 만행으로 만들어진 지나친 악법들-최저임금제나 주52시간 근무, 노조의 회사경영 참여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시행 등’이라고 민주노총의 활동을 만행으로 표현하였다. 민주노총은 제1노총이며 노동계를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조직으로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고 있다. ‘민노총의 만행’이라는 표현은 민주노총을 전혀 존종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근거없는 주장이다. 최저임금제나 주52시간 근무, 노조의 회사경영 참여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등은 국제적 기준에도 못미치는 법으로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보호법이며, 악법이 아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1-03-02
  • [신광열 목사] 모델링
    개펄에 자꾸 옆으로 걷는 아기 게 엄마게는 혀를 차며 꾸짖는다 쯔쯔쯧 똑바로 쫌 걸어라 얘야 화를 내는 엄마에게 아기게는 묻는다 어떻게 걸어란 말이야 날보고 따라하란 말이야 이렇게 엄마 게는 옆으로 잘도 걷는다
    • 오피니언
    • 기고
    • 마음을 여는 시
    2021-02-03
  • 전 행정처장 곽춘호, 미완으로 끝난 복음병원 노조 개혁
    부·울·경지역의 꼴찌 병원으로 전락되다니 고신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복음병원 행정처장을 지낸 재단 사무국장 곽춘호 장로(60세)가 지난해 12월 26일 심장마비로 소천하여 큰 충격을 주고 있다. 공교롭게도 그는 25년 전 12월 25일 성탄절날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던 성산 장기려 박사의 뒤를 이어 그 다음날 우리 곁을 떠난 샘. 곽춘호 장로는 한때 장기려 박사를 기리는 장기려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을 지낸 터라 그 시점이 참으로 묘기만 하다. 지금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두고 안타까움과 함께 여러 뒷말들이 오가고 있다. 정년을 불과 6개월 앞둔 터에다 지난 5년여 넘게 복음병원 노조와의 법적 소송 등 온갖 갈등과 대립 속에 오히려 재단 이사장을 비롯한 여러 관계자들은 지속적으로 노조의 편을 드는 듯한 행보가 본인에게는 큰 스트레스였던 점은 주변에 잘 알려져 왔고 예견되어 왔던 일이다. 더욱이나 그가 매일 출근하는 재단 사무실 입구에는 수년 동안 복음병원 노조가 내건 곽 장로를 규탄하는 현수막에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라는 설립 비전을 지닌 기독교 정신을 구현하는 복음병원 내에서 벌어진 불신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살벌한 싸움이라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그는 오래전부터 골리앗 같은 병원의 거대 노조와의 분쟁으로 쌓인 극심한 스트레스와 재단 고위인사들로 부터 받았던 투명인간 대우 등이 견딜 수 없는 일이였기에 결국 뇌출혈로 갑자기 쓰러져 끝내 소생을 하지 못하게 돼 주위의 안타까움을 더 했다. 때마침 지난 12월 29일에는 복음병원이 보건복지부의 제4기 상급종합병원 재지정 탈락이라는 비보까지 전해져 또 한 번의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이번에 지정된 병원들은 전국 45곳 중 부·울·경지역만 하여도 무려 7곳에 이른다. 부산대병원, 동아대병원 양산부산대병원, 인제대백병원, 울산대병원, 경상대병원, 성균관대삼성창원병원까지 포함되었다. 반면에 고신의대 부속 복음병원은 재지정에서 유일하게 탈락되어 지역사회에 창피함과 충격이 크다. 과연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상급종합병원은 중증질환에 대해 고난도 의료를 전문적으로 제공하는 종합병원을 일컫는다. 진료권역별로 인력·시설 장비·진료·교육 등의 항목을 종합 평가해 우수한 병원을 3년 마다 지정한다. 상급종합병원에 지정되면 건강보험 수가 종별 가산을 30%를 적용받는다. 의료기관이 종별가산율을 보면 상급종합병원은 30%, 종합병원은 25%, 병원은 20%, 의원은 15%가 각각 가산된다. 과거 장기려 박사의 헌신에 힘입어 한강 이남에서 최고의 명성을 지녔던 복음병원은 이제 암전문병원이라는 마지막 명예와 자존심마저도 퇴색되고 있는 듯한 불길한 징조이다. 가장 강성인 1천5백여 명의 복음병원 노조원, 저들을 어찌할꼬.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는 말이 있다. 지금은 AI시대, 몇 년 전 알파고와의 바둑 대전에서 보듯 앞으로 법원 판결도 AI가 대신하는 날이 머지않았다고까지 예견되는 요즘이다. 현재 병원의 구성원들은 의료진이 2백여 명, 간부를 포함한 비노조직원 3백여 명, 그리고 노조원 1천5백여 명 모두 2천여 명에 이르는 매머드급 규모이다. 언제부터인지 환자보다 직원이 더 많은 병원이라는 자조 섞인 한탄들이다. 이는 그동안 고신재단 이사나 총회 유력 위치에 오른 이들이 자기 자녀들을 복음병원에 낙하산 투하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보니 어쩌면 오늘의 이런 기형적인 구조는 당연한 결과인 듯하다. 대표적인 사례로 80년대 재단 이사장을 지낸 박 아무개 목사는 재임 시절 얼마나 많은 자기 교회 교인들을 밀어 넣었는지 출·퇴근 때 교회버스가 오갔다는 우스갯말까지 회자되었다. 이런 교단 내 지도자들의 이기주의와 비양심적인 처신은 방만한 병원경영을 더욱 부추겨 결국 한때 부도라는 파국까지 맞게 되었다. 지금도 이름만 대면 알만한 총회 유력인사들의 자녀들은 끊임없이 재단의 여러 기관에 수시로 공수되는 형국이니 병원의 구조조정 문제는 그야말로 마이동풍 격인 듯하다. 이렇게 노조에 약점이 단단히 잡힌 꼴이니 재단 관계자들은 언제나 제 목소리를 내기는커녕 노조에 계속 끌려 다니는 형국이다. 지금의 재단 이사장도 연임한 노조위원장인 간부가 자기 교회에 출석하는 터에 친 노조 행보라는 세간의 평가이다. 역대 병원 원장들 가운데에는 병원 개혁을 하려다 노조와 마찰로 법적 소송까지 가는 수모를 겪고 중도 하차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니면 아예 노조에 침묵 내지는 협조자가 되는 경우이다. 여기에 역대 재단 이사장마다 노조의 손을 들어주는 비상식을 자행하는 사례가 빈번하여 사태는 더욱 악화되고 노조를 중심으로 한 병원 개혁은 빈번이 물 건너가는 형국은 물론이고 상급종합병원 재지정 탈락되는 수모까지 당하게 된 샘. 이미 외부의 진단에서도 방만한 경영으로 인한 적자 누적 해결책은 인력 구조조정뿐이라는 지적이었다. 그러나 이런 현실에서 병원 경영합리화는 그야말로 요원하기만 하다. 과거 개혁과 혁신의 상징인 듯한 손봉호 교수의 아바타인 강 아무개 장로가 이사장 재임시절, 교단 안팎에서는 그가 병원 개혁을 잘 하리라 크게 기대를 하였으나 임기 내내 노조에 끌려 다니며 그저 자신의 임기를 채우는 일에도 급급해 큰 실망과 배신감을 안겨 주었다. 그야말로 복마전 같은 복음병원의 개혁이 얼마나 힘든가를 잘 대변해 준 사례였다. 그를 가까이 지켜본 한 인사는 “그와 함께 하나님 앞에 서는 날 이사장으로서 그의 행보가 과연 얼마나 정의로웠는지를 따져 보겠다”라는 의미심장한 코멘트이다. 노조의 활동자금원이 된 병원 각종 편의시설 운영, 법원은 불법이라고 판결하였건만… 현재 복음병원 노조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하 민노총) 산하 민주노총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에 소속되어 있다. 병원의료노조는 민노총 가운데 가장 강성 성향을 지닌 노조이다. 1천5백여 명의 거대한 공룡 노조이다 보니 중앙에서도 복음병원의 위치나 목소리는 상당히 크다. 복음병원 노조는 과거 20년 넘게 병원 내 매점과 분식점 등 각종 수익 시설을 운영해 왔다. 그러나 2010년 7월 노동법 개정으로 노동법 개정 이후 사측이 노동조합에 제공한 시설은 노동조합법 제81조 제4호(근로자가 노동조합을 조직 또는 운영하는 것을 지배하거나 이에 개입하는 행위와 노동조합의 전임자에게 급여를 지원하거나 노동조합의 운영비를 원조하는 행위)가 정한 부당노동행위에 해당되면서 문제가 붉어졌다. 부산지방고용노동청도 2012년 6월 ‘시정 지시서’를 통해 “사용자는 노동조합의 운영비를 원조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안 된다”며 사용자의 어떠한 개입도 없이 노동조합이 전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운영비 지원’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병원 측은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다가 2016년 6월경 매점과 분식점을 돌려달라는 내용증명을 발송했다. 돌려달라는 병원 측과 돌려 줄 수 없다는 노조 측이 협상을 가졌지만 의견차이만 확인했고, 결국 이 문제는 건물명도 소송으로 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당시 부산지방법원 제6민사부는 “원고의 피고에 대한 이 사건 시설 제공은 노동조합법 제81조 제4호 본문에서 금지하는 부당노동행위에 해당한다고 봄이 상당하므로, 이 사건 시설 제공의 근거가 된 단체협약은 강행규정에 위반하여 무효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피고는 원고에게 이 사건 시설 및 그 점유, 사용으로 인한 이익을 부당이득으로 반환할 의무가 있다”고 원고 측인 병원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처럼 당시 강성 병원노조와의 법적인 소송 실무를 추진한 장본인이 바로 전 행정처장 곽춘호 장로였다. 노조 측에서 곽 장로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게 된 것은 당연한 처사. 마침 곽 장로가 병원 과장들에게 골프채를 선물한 것을 빌미로 ‘김영란 법’ 위반 운운하여 노조의 고발사태가 이어졌지만 검찰에 이어 법원마저도 곽 장로에게 무혐의로 판결해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과연 재단의 고무줄 처벌 잣대와 기준은? 과거 고신대 한 교수의 제자에 대한 부적절한 의혹이나 학생회의 문제제기로 학교 공금을 횡령한게 밝혀지자 조용히 해당 교직원의 사표를 받고 사건들을 무마시킨데 반해 곽 장로가가 상급자에게 뇌물을 준 것도 아닌 격려차원에서 동료인 몇몇 과장들에게 골프채를 선물한 것을 두고 노조가 지나치게 부풀려 형사고발을 하고, 재단까지 나서서 ‘해고’라는 징계를 내린바 있다. 그러나 부산지방노동위원회는 징계위원회가 내린 처사가 부당하다며 복직을 명하여 교단은 또 한차례 망신까지 당한 바 있다. 그 후에도 재단 측은 품위유지 위반이라는 생뚱맞은 무리한 처벌을 계속 고집, 행정처장 직위마저 정지하는 법원 소송도 진행한바 있다. 한 교단 중진목회자는 “이런 처사는 재단이 노골적으로 노조 편을 들어준 또 하나의 고신교단의 흑역사”라고 비판한다. 어떤 이는 곽 장로의 부친인 故 곽삼찬 목사가 과거 고신 총회장을 지낸 강력한 카리스마 행보에 설움을 받았던 일부 목회자들이 세월이 흘러 갑, 즉 실력자가 되어 매스를 잡게 되니 불의에 대한 수술이나 개혁보다 그 아들에게 인간적인 보복 즉 ‘갑질’을 일삼았다는 비판까지 받아왔다. 그래서 뜻있는 교계인사들은 또 다른 적폐가 된 샘이라며 개탄한다. 앞서 교단 실력자들의 자녀들을 편법으로 낙하산 임명한 경우나 공정한 절차를 거쳐 임명된 이들 중에는 물론 실력이 뛰어난 이들도 상당한 사례도 있다. 병원 개혁에 총대를 멘 곽 장로나 현 고신대 김 아무개 사무처장의 경우 다들 그 능력은 인정해오지 않았던가. 이는 누구보다 교단 사정을 잘 아는 목회자 자녀출신이라는 이점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전 행정처장인 곽 장로는 재임 당시인 2015년 서울에서 운영되던 ‘성산 장기려 기념사업회’를 부산으로 유치하고, 고신대복음병원이 위치한 서구 감천로 구간을 ‘장기려로(路)’로 명명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소외받은 다문화가정과 외국인들을 위한 의료나눔 활동을 벌인 공적으로 ‘선행천사 세계나눔대상’까지 받은 것처럼 말이다. 그가 한때 소신 있는 병원장과 함께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복음병원을 개혁하려는 계획은 결국 노조의 강력한 저항으로 미완으로 끝나고 말았다. 병원 행정처장으로 다시 복직하려던 그 꿈을 과연 누가 저지하였는가. 역대 여러 재단 이사장들도 결국 노조의 악행을 손보려던 곽 장로의 손을 들어주기 보다는 비겁하게 침묵, 방관 내지 노조 편으로 일관하였다는 비판이 그래서 나온다. 누가 과연 고양이 목에 방울은 달것인가? 지금 우리는 전혀 예상치 못한 코로나 팬데믹 사태로 경제위기와 함께 급격한 변화가 쓰나미처럼 몰려오고 있다. 그 중심 키워드는 인력 구조조정을 통한 경영합리화. 과거 침례병원의 방만한 인력구조와 여기에 덧붙인 무능한 침례교단 지도자들의 행보로 인해 결국 부도와 병원 폐쇄로 이어진 불행한 흑역사를 우리들은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침례병원 케이스나 제2의 부도사태가 발생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라도 비대한 몸을 다이어트 해야만 살아남을 수가 있다. 재벌 기업들마저 추진하는 가혹한 경영합리화 프로그램이 과연 복음병원에는 가능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이다. 민노총의 만행으로 만들어진 지나친 악법들- 최저임금제나 주52시간 근무, 노조의 회사경영 참여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시행 등으로 기업들이 점점 골병들고 있는 형국이다. 매년 엄청난 액수의 노조 상납금으로 이 민노총 집단의 거대화에 일등공신격인 그야말로 꿀단지를 공급해 주고 있는 공룡 복음병원 노조. 노조에 포위되어 서서히 좌초되고 있는 고신교단은 물론 대한민국호의 암울한 현실에서 과연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그래서 이번 곽 장로의 돌연사가 시사 하는 바가 크고, 그를 떠나보내는 재단 임원진들의 여전한 노조 편애나 눈치보기식 행보가 하수상 내지는 개탄스럽기만 하다. 미완으로 끝난 그의 병원 개혁 몸부림, 과연 누가 그 뒤를 이어갈 수가 있을까. 노조위원장인가 병원장, 총장, 총회장, 재단이사장인가? 최수경 (출판인, 월간고신 창간 편집장 역임) ※ 기고 또는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고신대학교복음병원 노동조합 보도 관련 기고문 http://gncnews.net/news/view.php?no=855 [정정보도문] 고신대 복음병원 노조 관련 본 신문 지난 2021년 1월 12일자 「전 행정처장 곽춘호, 미완으로 끝난 복음병원 노조 개혁」 제하의 기고문과 관련, 다음과 같이 바로 잡습니다. 1. 고 곽춘호 사무국장이 노조와의 분쟁으로 쌓인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뇌출혈로 사망했다고 했으나 사망 원인은 심장마비로, 노조와의 스트레스가 원인이라는 것은 확인된 사실이 아닙니다. 2. 환자보다 직원이 더 많다고 보도 했으나 복음병원은 동 지역내 상급병원에 비해 환자수 대비 직원수가 적은 편으로 확인됐습니다. 3. 역대 병원 원장들이 노조와의 법적 소송으로 중도 하차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했으나 노조와 법적 소송을 한 사실이 없습니다. 4. 편의시설 운영 이익이 노조의 활동자금원이 되었다는 보도 관련, 직원의 후생복지비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 됐습니다. 5. 노조와의 법적 소송 실무를 추진한 장본인이 고 곽춘호 사무국장이었다고 했으나 고 곽춘호 사무국장이 진행한 사실이 없습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1-01-12
  • [신지균 목사포토묵상에세이]하루
    <하 루> 하루를 넘겼을 뿐인데 새해라고 한다. 하루를 넘겼을 뿐인데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다. 이렇게 하루하루 넘긴다면 주님 만난 날 있겠지 새해 마라나타 하루 만에 천국 되겠지
    • 오피니언
    • 기고
    2021-01-04
  • 마음을 여는 시[신광열 목사] 응답 應答
    하나님은 누구에게 숨어 있을까 누구에게 하나님은 침묵하실까 누구에게 하나님은 꼼짝도 하지 않으실까 그리고 왜 누구에겐 기다리고 있었듯이 얼른 대답하실까
    • 오피니언
    • 기고
    2020-12-09
  • [이상규 교수]초기 기독교는 낙태(落胎) 문제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시작하면서 임신 중절, 곧 낙태(落胎)는 우리 시대 현안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 형법 제269조 제1항과 제270조 제1항에서 비록 법의 규제가 실행되지 못했다하더라도 낙태죄를 명시하고 있는데, 2012년 8월 헌법재판소는 낙태죄의 합헌을 선고한 바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7년이 지난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헌법재판관 7:2로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2020년 12월 31일까지 낙태죄 개정을 권고했다. 이때까지 국회에서 개정하지 않으면 낙태죄 관련 조항은 2021년 1월1일부로 효력을 상실하고 자동 폐기된다.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 당시 단순 위헌 의견을 낸 재판관들은 임신 14주, 헌법 불합치 의견을 낸 재판관들은 22주를 인공임신중절 가능 기간으로 의견을 제시했다고 한다. 이에 정부는 10월 7일, 낙태죄 자체는 유지하되 임신 14주까지는 낙태를 허용하는 법률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이에 대해 법무부 자문기구인 양성평등정책위원회는 지난 8월 임신 주수(週數)에 따른 인공임신중절 허용이 아닌 낙태죄 전면 폐지를 권고했다고 한다. 또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단체연합 등이 참여하는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모낙폐)’도 지난 9월 23일 성명을 내고 “처벌 조항 존속은 국가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하는 심각한 역사적 후퇴”라며 반발했다. 그런가 하면 로마 가톨릭교회는 원칙적으로, 복음주의 교회는 낙태는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살인행위라는 점에서 이를 반대하고 낙태죄 폐지를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 태아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라는 상호 대립적인 가치를 놓고 찬반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낙태죄는 현제 한국 사회의 심각한 현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낙태 혹은 낙태죄에 대한 의학적 혹은 법률적 문제를 검토하려는 것이 아니라 낙태가 허용되던 그레꼬-로만 사회에서 ‘초기 기독교회’은 낙태 문제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어떻게 대응했던가에 대한 역사적 사례를 제시하고자 한다. 여기서 말하는 ‘초기 기독교’란 예루살렘에 교회가 설립된 이후 300년, 곧 첫 3세기를 칭하는 의미로 한정하고자 한다. 이런 교회사적 검토가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 교회를 비추는 거울이 되기를 바란다. 1. 낙태하는 사회 낙태란 태아가 모태로부터 자연분만 되기 이전에 인위적으로 태아를 모태에서 제거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를 의미하는데, 그레꼬-로만사회에서는 법적 규제 없이 자행되던 일상사였다. 이 시기 낙태는 이교도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시행되고 있었는데, 가난한 이들보다 부유한 계층이 더욱 빈번했다. 이미 고대 로마의 12동판법(The Twelve Tables, c 450BC)은 가장에게 여아의 유기를 허락하고 있었고, 성별과 관계없이 기형아의 유기를 허락하고 있었다. 플라톤(427-347BC)과 아리스토텔레스(384-322BC)는 낙태를 통한 가족계획을 권장한 바 있는데 이런 전통은 그 이후 헬라 로마사회에 영향을 주었고, 로마의 법은 태아를 인간(a human being)으로 보지 않고 내장(內臟)의 물질(material viscera)로 간주했다. 그래서 낙태는, 용이하지도 않았고 안전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동안 공공연하게 시행되고 있었다. 규제되지 않는 낙태는 결과적으로 성적 무질서와 출산율을 크게 저하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낙태의 방법은 다양했는데 상당한 위험을 안고 있었다. 가장 흔한 방법은 치사량에 약간 밑도는 독약을 복용하여 유산을 유발하는 것이었다. 또 태아를 죽이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독극물을 자궁내로 주입시키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상당한 위험을 안고 있어 태아와 산모 양자를 희생시키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특히 사망한 태아를 산모의 체외로 제거하지 못해 산모와 태아가 동반 사망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 다른 낙태법은 기구를 이용하는 방식인데, 긴 바늘과 갈고리 혹은 칼을 동원하여 태아를 토막 내 자궁을 통해 제거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낙태법이 산모에게도 상당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어 낙태가 여성의 주요 사망 원인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왜 낙태가 이처럼 횡행했는가?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째는 불륜에 의한 성행위 은폐가 가장 대표적인 경우였다. 또 경제적 이유나 재산 상속에 있어서 재산의 분산을 막으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한다. 부유한 이들은 재산을 여러 후손들과 공유하기를 원치 않았고, 가난한 이들은 대가족을 부양하기 어려웠기에 낙태라는 수단을 이용한 것이다. 이런 경우 낙태를 원하는 경우는 여성이 아니라 가장인 남성이었다. 로마법은 가장인 남성(paterfamilias)이 집안 여성에게 낙태를 명할 권리를 포함한 집안 식구의 생사여탈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런 권리를 파트리아 프로테스타스(patria protestas)라고 부른다. 사실상 가장인 아버지는 노예나 부인이나 자식을 죽이거나 신체를 훼손하거나 물건이나 소유물처럼 판매할 수 있었다. 도미티안(Domitian) 황제는 조카 줄리아(Julia)를 범해 임신하게 했는데, 그녀에게 낙태를 명했고, 줄리아는 낙태로 결국 사망했다. 남편에게 신생아의 유기를 명할 권한을 허용한 사회에서, 아내나 정부(情婦)의 낙태를 명할 권리가 남편에게 주어져 있었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못된다. 이런 이유 외에도 부유한 여성들은 성적 매력(sex appeal)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낙태를 선택했다. 2. 초기 기독교회의 대응 이런 시대에 살았던 기독교인들은 영아살해는 물론이지만 낙태 또한 살인으로 보아 이를 강하게 거부했다. 초기 기독교는 특히 3가지 관점에서 낙태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첫째, 태아도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사실, 둘째, 낙태는 명백한 살인이라는 점, 셋째, 낙태 행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따른다는 점이었다. 초기 기독교회는 태아도 인간이라고 보았고,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시139:13-16)을 확신했기에 태아라고할지라도 인위적으로 제거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비록 신약성경에서 직접적으로 ‘낙태’라는 용어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낙태는 하나님에 대한에 대한 반역으로 여겼다. 낙태 거부는 인간생명을 중시하는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응답이었다. 교회 지도자들도 이점을 강조하며 낙태를 금지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초기 기독교 문헌 중 낙태를 명시적으로 금지하는 대표적인 1세기 말 혹은 2세기 초의 두 가지 문서가 디다케(Διδαχή, Didache)와 바나바서신(The Epistle of Barnabas)이다. 디다케는 흔히 ‘열두 사도가 이방인에게 전한 주의 가르침’ 혹은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Doctrina Duodecim Apostolorum)으로 번역되는데, 이 책 서두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으로서의 도덕규범을 ‘두 길’(Two ways)이라는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두 길’이란 생명의 길(the way of life or light)과 사망의 길(the way of death or darkness)을 의미하는데, 이 두 길이라는 상호 대조 개념은 그 이후 기독교적 삶의 태도를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 ‘생명의 길’을 말하는 디다케 제2장 2항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두 번째 계명은 다음과 같다. 그대는 살인하지 말라. 그대는 간음하지 말라. 그대는 소년을 탐하지 말라. 그대는 음행을 피하라. 그대는 도덕질 하지 말라. 그대는 주술행위를 하지 말라. 그대는 낙태로 아이를 죽이지 말고, 영아도 죽이지 말라(οὐ φονεύσεις τέκνον ἐν φθορᾷ οὐδὲ γεννηθὲν ἀποκτενεῖς). 그대는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바나바서신 또한 디다케와 같은 방식으로 두 길을 제시하는데 디다케 보다 신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후일 아다나시우스는, 디다케는 초신자나 세례준비자들을 위한 훈련교법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는데, 이것은 신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에게 낙태 행위에 대한 거부를 가르쳐 준 것임을 알 수 있다. 디다케와 바나바서신에서 말하는 ‘사망의 길’은 영아살인과 하나님의 솜씨(workmanship of God)의 파괴자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또 2세기의 변증가 아데나고라스(Athenagoras)는 마쿠스 아울렐리우스는 황제에게 보낸 ‘청원 Plea’ 35항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낙태를 위해 약물을 사용하는 여성은 살인을 저질렀으며, 하나님께서는 낙태죄를 물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궁속의 태아조차도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이 돌보시는 대상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신생아를 유기하지 않습니다. 신생아를 내다버리는 이들은 유아 살해죄를 저지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낙태나 영아유기를 죄악시했고,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범죄행위로 간주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는 이런 행위를 일삼는 이교도를 비판했다. 2세기 말의 미니키우스 펠릭스(Minucius Felix)는 자신의 ‘변증서’(Octavius)에서 이렇게 썼다. “당신들은 한 때 태어난 자식들을 들짐승과 새들에게 유기했으며 아이들을 목을 조르거나 내던져 처참하게 죽였습니다. 당신들 중 어떤 여성은 약물을 마심으로써 복중에 있는 후일의 인간의 근원을 멸절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서 출산 전 존속 살해를 저지릅니다. 그리고 이런 형태는 당신들의 신들(gods)로부터 내려온 전통입니다. 사트루누스(Saturn)는 그의 자식들을 유기한 것이 아니라 잡아먹은 것입니다.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 유아를 희생 재물로 바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기독교공동체는 낙태와 유아 유기를 금지했다. 이탈리아의 역사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인드로 몬타넬리(Indtro Montanelli)는 이렇게 썼다. “낙태와 유아 살해가 점점 심해지고 있는 사회풍토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의미에서 이것들은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는 신자들에게 고아들을 양자로 입양하고 기독교 교리에 따라서 교육 하도록 당부하고 있었다.” 이런 점이 기독교회가 보여준 생명 존중사상이자 생명 윤리였다. 결과적으로 기독교 공동체의 출산율은 이교 사회보다 상대적으론 높을 수밖에 없었다. 미니키우스 펠릭스는 자신의 변증서에서 “날마다 우리의 수는 증가일로에 있다,”며 그것은 “우리의 건실한 생활양식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기독교회는 혼인을 신성시했을 뿐 아니라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이자 상급으로(시127:3) 이해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성행위는 일차적으로 자녀출산을 위한 것으로 보았고 출산과 육아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였다. 이런 가르침을 따랐던 초기 기독교는 생명 존중 사상을 보여 준 것이다. 이와같은 초기 기독교의 낙태 반대와 그 가르침은 그 이후 시기에까지 변함없이 중시되었다. 그래서 크리소스톰(Chrysostom, c. 347-407)이나 어거스틴(Augustine, 354-430) 같은 4세기 교부들도 낙태를 정죄했다. 낙태 문제에 대해 어거스틴 만큼 강하게 반대하고 어거스틴의 가르침만큼 비중 있게 영향을 준 사람도 없을 것이다. 어거스틴은 결혼과 성생활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자녀출산이라고 보았고, 쾌락을 위한 성행위를 반대했다. 성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였다. 정리하면, 초기 기독교는 영아 유기나 낙태뿐만 아니라 산아제한도 반대했다. 구약의 오난의 체외 사정이 정죄되었듯이(창38:8-10) 의도적이거나 인위적인 산아제한은 부당한 것으로 인식했다. 교부들도 그렇게 가르쳤다. 예컨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이렇게 썼다. “인간의 번식을 위해 하나님이 고안한 정자를 헛되이 사정하면 안 되고 파괴하거나 허비해서도 안 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스토아학파의 경우처럼 결혼에서의 성 생활을 오직 출산만을 위한 것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도리어 유대적 전통을 따라 결혼생활에서의 부부간의 의무와 즐거움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러나 2세기 후반에 와서 변화를 보여 주었는데, 결혼 주된 목적, 그리고 성해위의 유일한 목적은 출산에 있다고 보았다. 이런 변화는 당시의 편만한 낙태 관행에 대한 거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부연하며, 기독교 공동체는 동성애(롬1:26), 항문성교, 구강섹스 등 당시의 난잡한 동생애나 성행위도 분명하게 반대했다. 초기 기독교 문서에서 이런 점에 대해서까지 언급하는 것을 보면 기독교 공동체에 엄격한 윤리적 기준을 제시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예컨대 바나바서신에서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너는 우리 귀에 들리는 것처럼 더러움을 위하여 입으로 불의를 행하는 남자들과 같이 되지 말라. 그들의 입으로 불의를 행하는 부정한 여인과 연합하지 말라.”(바나바 서신, 10).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기독교는 그 시대의 풍조에 맞서 영아 유기나 살해, 낙태, 동성애 등을 반대하면서 건실한 가정윤리를 강조하였고, 유아나 영아, 장애를 가진 아이라도 할지라도 인간 생명의 인위적 제거는 범죄라는 점을 가르치고,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고 양육했는데 이것이 초기 기독교가 보여준 생명윤리였다. 이 글에서는 소개하지 못했지만 초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검투사들의 격투기를 반대한 것이나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주의(pacifism)를 지행한 것도 생명 윤리에 근거한 것이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0-11-25
  • 마음을 여는 시[신광열 목사] 다대고병
    많아야 하고 크고 높아야한다 솔로몬처럼 처첩도 황금도 많아야한다 매머드처럼 누구보다 웅장하고 커야한다 바벨탑처럼 하늘에 닿도록 높아야한다 그래야 화려하게 망하고 위대하게 쓰러질 수 있지
    • 오피니언
    • 기고
    • 마음을 여는 시
    2020-09-24
  • 마음을 여는 시[신광열 목사] 진 단
    또닥비 소리에 외로우십니까 봄바람 소리에 가슴 나부끼십니까 여행을 준비하면 삶이 설레십니까 음악을 들으면 맘이 행복하십니까 하나도 안 맞으면 병원으로 소풍갑시다
    • 오피니언
    • 기고
    • 마음을 여는 시
    2020-09-04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