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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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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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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9
  • [기고] 고신, 우이독경(牛耳讀經) 교단과 대학교
    지난 글에 대한 반론이 나왔습니다. 고신대학교 모 교수님이 쓴 글입니다. 반론이라는 말 자체는 없지만, 내용을 보면 반론이 확실합니다. 아무런 반응이 없을 것이라 짐작했던 터라 이 반론이 참 반갑기도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내용은 ‘우이독경(牛耳讀經)’,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지난 글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염려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본질을 흐리는 말싸움, 감정싸움으로 비치지 않길 바랍니다. 한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이번에 나온 반론도 ‘위기’, ‘골든타임’을 표면적으로는 인정하는 듯 보이니까 말입니다.하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지난 글에서 지적하고자 했던 것은 간단합니다. “언제까지, 얼마가 필요한가?” 다시 설명해 드립니다. ‘골든타임’으로 접어든 ‘위기’의 고신대학교에 관한 교단 지도자들의 책임 있는 대안을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교단 지도자들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작금의 이런저런 노력이 귀하지 않다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와 성도를 설득해 기부금을 받는 정도의 방법이 주요 대안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방법으로는 본질을 해결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고신 내부의 큰 소리를 들어달라는 겁니다. 지금까지 고신교단의 교회는 고신대학교를 위해 헌신해 왔습니다. 그런데 ‘위기’와 ‘골든타임’이라는 상황에 다시 더 큰 기부금을 요청하며 걷고 있습니다. 기도회를 하면서 말입니다. 저의 제안은 언제까지, 얼마를 기부해야 하며, 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대안을 묻는 것입니다.그것이 어떤 것이든, 이제는 정확한 판단과 분석이라는 것을 보고 싶고, 봐야 할 때라서 그렇습니다. 저는 저의 이 제안이 간단명료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반론을 보니 제 제안이 어려운 모양입니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장황하지도 않은 장황한 역사만늘어놓았습니다. 2003년, 2014년, 2015년의 이야기가 지금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본질을 흐리고 있습니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73회 총회가 드디어 제대로 된 대책을 내며 일을 시작했다는 생색뿐입니다. 과거의 장황한 역사를 꼬집은 것은 이 ‘생색’을 돋보이게 하는 양념이었군요. 책임져야 할 자들은 따로 있는데, 왜 ‘우리’(?)에게 말하느냐는 마음이 행간에 엿보입니다. 설명이 어려운 듯하여 다시 설명해 드립니다. 과거에는 전혀 기부금이 없었습니까? 역대 최고 수준의 기부금을 언급하는데, 이것이 고신대학교를 살릴 수 있습니까? 이 노력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된 판단과 분석을 토대로 노력하자는 겁니다. 본질을 흐리지 마십시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고신대학교의 상황에 관한 미화뿐입니다. 과거에는 전혀 기부금이 없었고, 과거에는 교직원들의 헌신이 없었습니까? 교수의 81%, 직원의 42%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면, 교수의 19%와 직원의 58%와는 갈등이 없습니까? 내부적으로 나오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겁니까? 아니면 듣기 싫은 겁니까? 지금 모든 지방 사립 대학은 연합 대학을 통해서라도 글로컬 대학에 진입하는 일에 대학의 사활을 걸고 있는데(참고, https://news.unn.net/news/articleView.html?idxno=558472), 글로컬 대학이 해결책이 아니라는 주장은 도대체 어떤 근거와 데이터를 가지고 하는 말입니까? 대학에 몸담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본질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카테고리가 헷갈리거나, 아니면 호도(糊塗)하는 유희삼매(遊戱三昧)만있습니다. 교육부와 지자체가 발주하는 사업에 참여한 결과로 받은 금액이 64억 중 교직원 인건비, 학교 운영비로 지출된 금액이 1원이라도 있습니까? 이 금액은 그야말로 프로그램을 위한 비용입니다.혹시 64억을 받아 학교 살림이 나아졌는데도 ‘위기’와 ‘골든타임’에 동조하며 계속 모금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계시는 겁니까? 반론자도 고신대학교의 문제가 학령인구 감소와 그에 따른 재정위기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대안으로 학생들이 공부와 자기 발전을 위해 열심히 하는 것을 제시하다니요? 또한, 구조조정을 언급하면서 실제적인 문제를 언급하는 일반적인 상식은 ‘세속적인 사고방식’으로 무시하면서 교직원 연봉의 십일조를 자발적으로 기부하는 것을 언급하다니요? 도대체 구조조정과 연봉의 십일조 기부와 무슨 상관이 있으며, 이것이 어떻게 전체 고신대학교를 위한 상생이 되는지요? 수익 구조 다각화에 대한 노력과 5년 재정 구조에 대한 정밀 시뮬레이션 완성? 좋습니다. 바로 이런 대책을 내놓으라는 겁니다. 본질을 흐리지 말고, 그 방법을 고신대학교를 위한 더 큰 헌신과 헌금을 요구하는 고신 교회 앞에 설명해 주십시오. “모금하다가 안 되면 할 수 없고”라는 식의 미봉책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동참하지 않는 수많은 교회와 성도들의 염려와 중심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그분들의 ‘고신 사랑’을 폄하하지 마십시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가짜 뉴스라는 지적만있습니다. “재학생 등록률과 신입생 충원 결과를 보면 1년 100억 적자가 날 것이 분명한 사실인데”라는 표현이 가짜 뉴스인가요? 제 나름대로 정보를 통해 파악한 금액입니다. 저의 부족함 때문에 계산상 조금의 오류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정확한 정보를 주는 이가 없으니 그럴 수 있지요. 그런데 이게 가짜 뉴스라고 지적받을 표현인가요? 그렇다면 반론자는 자료를 다루는 교수 아닙니까? 병원의 적자는 어떻습니까? 학교법인 고려학원의 적자가 100억 이상 나는 것이 가짜 뉴스라면, 본질을 흐리지 말고, 진짜 뉴스로 ‘정확한 적자 금액’을 분명히 밝혀주십시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오히려 가짜 뉴스만 있을 뿐입니다. “혹자는 의대와 복음병원을 헐값에 인수하려는 사람들과 모의를 벌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동안 위기라고 말만 하면서 오히려 잘못된 과장 정보로 위기를 부풀리기만 했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다면...”??? 신학교수인 반론자는 정말 신앙 양심에 화인을 맞았습니까? 십계명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동료를 향한 가짜 뉴스를 은근히 양산하는 말장난을 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잘못된 과장 정보로 위기를 부풀렸다면, 지금 반론자가 말하는 위기와 골든타임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이 정도 매너의 교수가 신학교수로 학교 강단에 있는 고신의 현실이 개탄스럽기까지 합니다. 본질을 흐리는 공격을 멈추십시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책임질 수도 없고, 책임질 생각도 없는 나팔수의 아부만 있을 뿐입니다. 도대체 교수님은 우리 고신교단과 고신대학교에서 어떤 책임 있는 자리에 있습니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개진하는 것은 신자 개인의 자유이나, 총회와 고신대학교를 대변하는 듯한 이런 주장으로 교단과 고신대학교를 갈라치기 하는 (파탄 내는) 논쟁으로 몰아가는 것은 나팔수의 아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이것이 극단적인 분리주의 사고방식인 것은 모르실 리 없겠지요. 본질을 흐린 채 말장난, 정중하고 정확한 논의를 촉구합니다. 정확한 사실을 제시하는 책임 질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길 간절히 바랍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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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27
  • [특별기고] 통합 기념 한마음교회 유감
    폭염입니다. 여름의 태양이 작열하는 계절! 이 여름에 우리 주님 다시 오신다면 태양처럼 뜨거운 신앙 열정을 가진 사람을 찾으실 것 같습니다. 사역의 현장마다 여름 태양보다 더 뜨거워서 주님의 칭찬을 받는 우리 교단 교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미 알고 계시듯이 우리는 성공적인 교단통합을 이었습니다. 그 통합기념으로 한마음교회를 설립한 것입니다. 전국 노회와 교회들이 마음과 기도와 물질을 모아 세운 기념비적 통합기념교회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통합기념 한마음교회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시는지요? 통합기념 한마음교회는 고신교단의 여러 어른들과 선배 목사님들 그리고 총회 임원들 그리고 (구)고려의 선배들과 임원들이 힘들게 이루어낸 통합의 금자탑이며 결정체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느 교회의 지 교회가 되어있습니다. 교단통합을 하면서 기념으로 교회를 설랍(립)하되 (구)고려측의 목회자를 세우기로 결의하고 설립한 교회가 바로 한마음교회입니다. 그런데 (구)고려측의 일대 한마음교회 전임목사는 당회장권 한번 갖지 못하고, 고초를 겪다가 사임하였습니다. 한마음교회 담임목사에게 이러저런 이유로 당회장권을 이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2년 동안 무려 6번이나 당회장을 바꾸면서 힘들게 했습니다. 이런 상식 밖의 이상한 일이 통합기념 한마음교회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안양일심교회 부목사로 사역했던 이 모 목사가 담임으로 있습니다. 안양일심교회가 물심양면으로 많은 부분을 헌신한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전국 노회와 교회의 헌금으로 세운 통합기념교회를 일심교회 40주년 지교회로 삼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결과론적으로 유감스럽게도 통합기념교회 설립을 위한 목적헌금이 한 교회의 지교회를 설립하는데 사용되는 어처구니 없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교단 전체가 바로 알고, 바로 잡아야 하겠다는 결연한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우리가 하나의 교단으로 통합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처음의 약속과 결의가 깨짐으로 아름다운 통합정신이 훼손된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아픔이지만, 특히 (구)고려 측 형제들에게 깊은 상처를 준 아픔이 된 것입니다. 이런 사태로 인해 안양일심교회와 당회장은 (구)고려 측 형제들로부터 신뢰를 잃었고, 지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미안했던지, 무마하려고 (구)고려의 어려운 분들을 후원하겠다고 접촉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고려 목사들은 의도가 순수하지 못한 후원금을 받을 리 없지 않습니까? 지난해부터 제안하는 후원금을 거부해 왔습니다. 올해 들어와서 또다시 (구)고려 동문회에 7천만원 정도를 후원하겠다고 제의를 해왔지만 코로나로 인해 어려운 교회와 선교사들이 많이 있었지만 통합기념교회를 세우려는 큰 뜻이 있기에 거절했던 것입니다. 급기야는 비공식 채널을 통해 기어코 후원을 했습니다. 공식적으로 거부했는데도 비공식체널을 통해 기어코 다수의 교회에 상당한 후원을 감행한 저의가 무엇인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저도 부교역자 약 10년, 한 교회 담임목회를 27년째 하니 37년 사역을 하며 산전수전공중전까지 다 겪은 사람입니다. 교회의 내부 사정이 있어 그렇겠거니, 일면 이해가 가지만, 그렇지만 한마음교회의 문제는 양 교단 통합기념 교회인만큼 그냥 넘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전국 노회와 교회의 헌금은 통합기념교회를 설립하기 위한 목적 헌금입니다. 그 목적대로 쓰이지 않았다면 바로 잡는 것이 마땅합니다. 따라서 교단 70주년을 맞아 통합기념교회를 다시 세우려는 계획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국 노회와 교회의 후원금 13억여원은 교단통합의 정신과 기념을 담는 명실공히 통합기념교회 설립을 위해 쓰여져야 할 것입니다. 안양일심교회는 고신교단의 대표적인 큰 교회 중의 하나입니다. 또한 당회장 김홍석목사님은 앞으로 총회에 큰 일을 감당해야할 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중대한 일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고 교단의 지도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안양일심교회 김홍석목사는 통합기념 교회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하는 지도자로서의 모습을 보여할 것입니다. 이것이 (구)고려측 대부분 형제들의 일치된 생각입니다. “순교자의 고장! 진리의 파숫군! 경건자의 훈련소, 예수의 제자들이 일어나는 산실!” 그 교단이 우리 고신 입니다. 저는 우리 교단의 일원이고 교단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고신의 목사로 함께 사역함이 늘 감사합니다. 저는 고신인이 된 것이 좋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의 뒤를 이어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 정신을 이어가는 우리 교단이 좋고 자랑스럽습니다. 그 어떤 일보다도 고신과 고려의 통합이 자랑스럽습니다. 통합 후 (구)고려 동문들이 연합하여 학원이사로, 고신세계선교회 이사로, 이단사이비연구소장으로, 동문회 임원으로. 각 상비부에서... 각처에서 활약하는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운 하모니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통합입니다. 이렇게 배려해 주고, 사랑해주는 우리 ‘고신’이라는 이름이 자랑스럽고 감사합니다. 따라서 통합기념교회가 다시 설립되어 통합정신이 훼손되지 않고 계승되어 아름다운 교단을 잘 보전하고, 또 더 아름답게 발전되기를 기원하는 바램을 담아 이 글을 씁니다. * 통합기념교회 설립을 이행하라! * 전국 노회와 교회의 목적 헌금을 반환하라! 2022년 7월 중순 신앙 열정이 여름 태양처럼 뜨겁기를 기도하며... ※ 기고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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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02
  • [신재철 목사] 안녕, 대전(大田) : “전학왔니더”
    “푸를 청(靑), 소나무 송(松). 청송에서 대전으로 전학왔니더.” 전학 수속이 끝나고 들어간 교실. 담임 선생님께서 친구들에게 자기소개를 해보라 말씀하셨다. 나는 큰 소리로 나의 고향 이름을 소개하며 인사했다. 아이들이 나의 인사보다 더 크게 웃는다. 왜 웃을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선생님께서 정해주신 빈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와 다르게 아이들 얼굴이 뽀얗다. 우리 엄마가 읍내에서 사준 이랜드 옷이 촌스럽게 느껴졌다. 어쩐지 다들 공부도 잘 할 것 같다. 주눅과 함께 찾아든 두려움도 잠시. 쉬는 시간에 몰려든 아이들의 질문 세례에 정신이 없었다. 자꾸 말을 시킨다. 그리고 아이들은 더 크게 웃는다. 아마도 나의 사투리가 재미있고 신기했던 것 같다. 대놓고 놀리는 것은 아닌데 뭔가 찝찝하다. 촌놈 하나 전학 오니 신기해서 구경하러 온 느낌이다. “뭐여~ 내가 언제~” “니가 그랬잖여~ 왜그랴~” 나를 구경하러온 친구 무리와 떨어진 곳에서 조금 큰 소리가 난다. 제법 덩치 큰 남자 아이 둘이서 대화를 하고 있다. 내게 몰려든 아이들이 이제 그쪽으로 몰려간다. 아직은 인사도 제대로 못한 옆 짝에게 상황을 물어보았다. 큰소리로 대화하는 두 명의 친구, 그곳으로 몰려드는 아이들.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첫인상이 좋았던 짝은 웃으며 답한다. “응, 쟤들 싸우는 거야. 그래서 구경 간거지모.” 응? 싸우는 것이라고? 저렇게 느린 말로, 저렇게 너그러운 톤으로 싸움이 가능하단 말인가? 내가 있던 경상도에서는 싸움이 나면 일단 말로 여럿 죽인다. 목소리도 얼마나 큰지 말한 대로 곧 실천할 것 같은 위협이 느껴진다. 경상도 말은 나름 살가운 인사도 종종 살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오해를 받기도;; 뭔가 대전 친구들은 푸근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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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1
  • 마음을 여는 시 [신광열 목사] 걱정
    사람이 없어 걱정이다 강 같은 어머니가 없고 산 같은 아버지도 없다 길 같은 선생님도 별 같은 지도자도 흙 같은 목회자가 없어 참으로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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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24

실시간 기고 기사

  • [기고] 교회 정치를 교회 정치 되게 하라!
    교회 정치는 교회 직분자 손에 맡겨진 교회의 고유 권한에 속하는 부분이지만, 철저하게 성경과 신앙고백서에 근거해야 한다(참조. WC 25, 30-31장; 고신헌법전문 3항 교회 정치). 이런 점에서 교회 문서로서의 교회 정치는 비록 교회 안에서 그 사역적 권위가 인정되어야 하지만, 언제나 성경과 신앙고백서 아래에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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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07
  • [특별기고] 고난주간을 경남에서 보낸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
    헨리 데이비스는 한국에 온 호주의 첫 선교사이자 순교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그는 선교에 대한 간절한 마음으로 한국에 왔으나 선교의 뜻을 제대로 펴보지 못하고 순교함으로써 자신의 꿈은 꺾였지만 대신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가 한국선교를 강하게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고 그이 뒤를 이어 많은 선교사가 부산과 경남지역을 맡아 선교의 열매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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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03
  • [특별기고] 이스라엘, 튀르키예 성지순례기
    마산동부교회 창립 50주년을 맞아 2022년 9월에 성지순례팀을 조직하고 교우들을 대상으로 팀원을 모집하여 10월에 32명을 확정하고 12월부터 수요예배후 1시간씩 8차례 이스라엘과 튀르키예의 순례 할 곳을 공부하였고 기도회를 통하여 은혜로 준비 하였다. 드디어 2023년 2월 20일(월) 오후 2시 교회 앞마당에서 출발기도와 단체 촬영후 출발하여 인천공항에 8시 도착 수속하고 가이드 선교사님의 안내로 2시 15분 터키항공으로 출국하여 이스탄불을 경유하여 텔아비브 벤구리온 공항에 21일 아침에 도착하여 현지 가이드 목사님을 만나서 첫 일정을 시작했다. 첫 순방지 가이샤라로 가게 되었는데 헤롯왕은 가이사랴 항구를 건축할 당시 황제 가이사 아우구투스의 이름을 따서 가이사랴로 명명했고 로마 총독부가 있었고 그 곳에서 본디오 빌라도라는 석판이 발견되어 빌라도 총독 관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기 전 여기에 머물러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그의 복음에 대한 열정과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 여정으로 갈멜산 엘리야 기념교회를 방문 했는데 많은 순례객들이 단체로 찬양하며 기도하는 모습에 주님을 섬기는 일에는 인종과 나라와 민족을 초월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기념교회 옥상에서 바라본 넓은 이스르엘 평원과 그 너머 스불론 땅과 므깃도 사마리아로 이어지는 산맥들을 보면서 성경의 지명들을 한꺼번에 보게되는 감격과 이 땅을 차지하기위해 치열하게 싸운 이유를 알것 같았다. 다음으로 므깃도 성채로 가서 말들을 훈련시킨 흔적들과 지하 우물 저장고를 보면서 이곳이 솔로몬 시대에 전략적 요충지였고 계시록의 아마겟돈이 이 지역임을 설명해 주었다. 다음은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전해준 나사렛 수태고지 기념교회를 방문하였고 세계 각국에서 보내온 성화 중 한복을 입은 마리아와 한글로 예수님을 경배하는 글을 보게 되고 원뿔모양의 천장에서 빛이 제단으로 비치면서 마리아의 잉태 사실을 암시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예수님이 첫 기적을 베푸신 가나 혼인 기념교회는 늦은 시각이어서 교회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문을 잡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며 하루를 마감했다. 22일 수요일 버스 안에서 기도로 일정을 시작하면서 성지순례 팀웍과 섬김과 사랑을 위하여 비밀기도 짝 마니또를 정했는데 한국에서 품은 기도짝에 대한 간증과 새로운 기도짝을 추첨하면서 서로를 많이 이해하고 교회 안에서 서로 서먹했던 관계를 해소 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을 가졌다. 바알을 위해 제단을 쌓았던 가이샤라 빌립보로 가서 당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한 흔적들을 보게 되었고 근처에 현재의 지명 바니야스로 명명된 바니야스 폭포를 보면서 헐몬산에서 지하로 물이 흘러 솟아나와 샘을 이루고 흐르는 현장에서 사막에 강을 내겠다는 말씀이 실감나게 다가 왔다. 근처에 예수님이 선포한 산상수훈을 기념한 팔복교회로 가게 되었고 교회 내부는 팔각형 모양으로 의자를 놓아 두었고 우리 일행 32명은 “심령이 가난한 자”시작하는 팔복 찬양을 감격해서 부르며 흘러 내리는 눈물을 주체 할 수 없었고 주위의 순례객들도 우리 찬양을 경건하게 듣는 참 은혜로운 시간 이었다. 여로보암 왕이 세운 우상이 있는 텔단으로 가서 그곳에서 발원하여 요단강으로 흐르는 물의 근원지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갈릴리 바다 근처 막달라 마리아가 살았던 마을에 있는 식당에서 베드로고기라 칭하는 생선튀김을 점심으로 먹고 갈릴리 바다에 손과 발을 담가보며 예수님이 수많은 무리에게 말씀을 전하시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오병이어 기념교회에서 모자이크에 빵이 4개만 그려져 있어서 1개가 어디 있는지 궁금했는데 가이드 목사님이 그 한 개는 예수님 자신을 가르키지 않았나 하시며 예수님 자신이 “나는 생명의 떡이다” 라고 하신 말씀을 상기 시켜 주었다. 근처 베드로 수위권 교회가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시나고그(유대인 회당)에 대한 설명을 듣고 유대인들이 회당을 중심으로 생활했음을 알게 되었고 베드로 장모가 살았던 집터위에 세워진 교회와 황금열쇠를 지닌 베드로 동상을 보면서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진면목을 보게 되었고 예수님의 사역이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많이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었다. 갈릴리 바다에서 배를 타고 국기 상기식과 애국가를 부르는데 옆 배에서도 스웨덴과 이탈리아 국기가 게양되는 것을 보며 다양한 나라에서 순례의 길을 동참하구나 하는 느낌을 안고 선상에서 드리는 수요 예배에 은혜와 감격이 넘쳤고 유창근 목사님의 설교가 예수님 당시 주님이 선포하시는 모습을 떠올리며 진정한 예배자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23일 목요일 맛사다로 향해 가는 길에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던 요단강 세례터에 들러서 손에 물을 적시며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맛사다는 히브리어 어근 자체가 요새라는 뜻을 가졌고 난공불락의 성채였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데 요새 아래에서 걸어서 올라가는 단체팀은 대부분 이스라엘 학생들로 역사공부겸 여행을 와서 조상들의 민족정신을 느끼는 현장학습의 연장으로 느껴졌다. 3단으로 된 헤롯궁과 물 저장 장치, 곡식 저장고등을 둘러보고 정상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니 로마군대가 쌓아놓은 토성의 흔적들이 군데군데 보여서 여기가 로마군의 공격을 피해서 마지막 항전을 한 곳임을 실감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쿰란으로 가서 구약성서 사본들이 집중해서 발견된 쿰란의 1~9동굴중 사본이 가장 많이 발견된 4동굴을 멀리서 보면서 발견된 사해 사본이 현재 사용되고 있는 성경과 완벽하게 일치하고 구약성서 전권이 900여 두루마리로 항아리 속에 보존되었고 에스더서만 빠져 있다는 내용도 듣게 되어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오묘하며 성경의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음을 현장에서 느꼈다. 예수님이 40일 금식후 시험 받았던 시험산에서 주님이 말씀으로 세 번 마귀를 물리친 현장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주님을 더욱 붙들어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근처 15분 거리에 있는 유대 광야를 걸으며 찬양하고 정상 계단에 모여 서쪽 노을을 바라보며 앞으로 순례일정과 두고 온 교회와 가정을 생각하며 기도하는 은혜의 시간을 가졌고 베들레헴 지역에 있는 숙소로 와서 1박을 하였다. 24일 금요일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 지역으로 나가는데 분리장벽이 7M 정도 높이 서 있고 검문검색이 까다로워 30분 이상 기다리며 휴전선이 분리장벽이 아닌가하는 우리의 현실을 생각해 보았다. 버스로 약 2시간 정도 이동해서 브엘세바로 가면서 드넓은 평원에 밀보리 밭을 보면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떠올리며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번제단 모형과 당시 주거지 형태가 남아 있는 현장을 둘러 보았다. 점심식사 후 차에서 잠깐내려 다윗과 골리앗이 싸운 엘라 골짜기 지형을 보며 와 닿는 것이 있었고 그 위쪽 소라땅과 소렉 골짜기, 단지파 땅들을 둘러보고 그곳에서 많이 자생하는 합환채 설명을 듣고 열매하나를 따서 목사님께 드리면서 출산 장려를 위해 설교 자료로 유용하게 사용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들의 목자교회와 보아스 광야를 거쳐 베들레헴 예수 탄생교회에 들어가서 예수님이 태어나신 동굴을 보았고 그곳에 아르메니아 정교회와 그리스 정교회가 각각 자리를 차지하여 기념하는 것이 이색적 이었다. 25일 토요일 예루살렘으로 가서 먼저 예수 승천교회를 방문 했는데 사순절 기간이라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고 감람산에서 황금돔이 있는 다윗성과 예루살렘 성전을 보며 사진으로만 보던 역사의 현장을 눈으로 그 실체를 보며 감격하였다. 주기도문 교회에 각국의 언어로 번역된 주기도문 비가 있고 우리는 한글로 된 주기도문 앞에서 주기도송을 부르며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시간을 가졌다. 힌놈의 골짜기를 내려다보고 겟세마네 벳바게의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기도하신 곳에서 합심해서 기도하고 베드로 통곡교회를 향하였다. 베다니 마가요한의 집터위에 세워진 교회 꼭대기에는 닭 모양의 형상이 표현되어 있었고 예수님이 안장된 곳에는 수많은 참배객이 기도하고 예배하고 있으며 빌라도 법정에서 출발하여 비아돌로사 14 지점을 순례하며 십자가를 지시고 힘들게 걸어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묵상 하였다. 오늘 일정 마지막으로 유대인의 성지인 통곡의 벽으로 가서 저들이 진지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두루마리 성경을 열어서 낭송하고 다시 닫아 벽장 속에 넣는 경건한 의식을 통해 구약시대 제사장들도 저렇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 해 보았다. 그곳에서 조금 내려와 Dong Door(분문)가 있어 성경에서 읽은 분문을 직접 보고 신기해 했다. 26일 주일 아침 일찍 이스탄불 시내를 통과해서 보스포러스 해협의 두 다리를 지나 아시아 지역과 유럽 지역을 둘러보고 근처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선상에서 주일예배를 드리며 순례길에 참여한 이유와 목적을 되새기게 되었다. 성소피아 성당으로 들어가는 길에 줄이 길어 한참을 기다리고 전에는 박물관으로 사용 되었는데 현재는 모슬렘 예배처소로 사용되고 있었서 많은 부분이 가려져 있고 제한되어 있어 안타까웠다. 점심식사를 하고 이스탄불 공항으로 가서 카이세리행 비행기를 타고 다시 버스로 갑바도기아로 이동하였고 순례일행중 생일을 맞은 세분을 위해 생일파티를 열어주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하였다. 27일 월요일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갑바도기아 괴뢰메 동굴을 지프를 타고 가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형성해 놓은 동굴교회와 주거형태 생활 모습을 보았고 파사바계곡의 수많은 동굴 거주지와 교회를 보면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많은 고난과 위험을 감내하면서 생활했던 모습에 숙연함을 느꼈다. 데린구유는 지하7층까지 미로처럼 만들어 놓고 그곳에서 환란과 핍박을 피하여 신앙의 정조를 지킨 믿음의 선배들의 살아있는 숨결을 느끼며 통성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28일 화요일 호텔을 출발하여 버스로 2시간 거리에 있는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가서 바울 기념교회를 둘러보고 눈 덮인 설산과 호수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에서 사진을 찍으며 잠깐 숨고르기를 하였고 점심식사 후 라오디게아교회를 둘러보고 근처 히에라폴리스로 가서 드넓은 유적지를 살피고 언덕위에 있는 빌립 기념교회에서 묵상하였고 조금 지쳐 있지만 다시 힘을 내어 파묵칼레로 가서 따뜻한 온천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서 여행의 피로를 풀고 회복하는 시간을 가졌다. 3월1일 수요일 버스 안에서 찬양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주택가에 거대한 돌기둥 세 개만 남아있는 빌라델비아교회를 방문하니 입구에 사도요한 기념교회라는 표지석이 있었다.사데지역으로 가서 사데교회의 흔적을 보고 가이드 목사님이 초대 일곱교회 중에 책망받은 교회 지역은 폐허가 되었는데 칭찬받은 두 교회 서머나와 빌라델비아 지역은 번성하다고 설명 하였다. 누가의 무덤 터를 둘러보고 빌립기념교회와 히에라볼리에 있는 사도요한 무덤교회를 들리고 에베소에 있는 셀수스 도서관 거쳐 원형 경기장에서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이동환 가이드 선교사가 중후한 목소리로 찬양 할 때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광대하심에 전율을 느꼈다. 3월2일 목요일 튀르키예에서 마지막 일정을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님 크신 은혜”로 찬양하면서 시작하고 초대교회 어렵게 신앙생활을 했던 두아디라교회를 방문하고 버가모(버가마)교회터 위에서 한국교회가 처한 현실을 상기 해 보았다. 갑바도기아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장시간 이동하여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 선상 근처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이스탄불공항으로 이동하여 새벽 2시25분 출발하여 인천공항에 3일 오후6시30분에 도착하여 버스로 마산에 내려오니 4일 새벽 1시 정도 되었다. 마중 나온 가족과 성도들을 만나 긴 여정의 일정을 모두 마무리 하였다. 11박 12일의 순례를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새삼 느끼게 되었고 성경의 역사와 지명들을 알고 느끼고 체험하면서 큰 은혜와 감동의 시간이었슴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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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29
  • [이상규 교수] 왜 역사(교회사)를 공부해야 하는가?
    시작하면서 마틴 로이드 존스(1899-1981)는, “나는 성경 다음으로 교회사를 선택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목회자들의 교회사에 대한 무지를 통탄히 여겼고 설교자들에게 역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강조한 인물이었다. 그는 특히 부흥(Revival)과 청교도(Puritans)에 대한 깊은 식견을 가진 인물이었는데, 그가 쓴 The Puritans을 보면 교회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 특히 청교도 역사와 인물에 대한 깊은 식견을 볼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신앙과 교회의 삶은 역사의 사건에 기초하고 있다.” 마틴 로이드 존스와 같은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가 역사에 대한 지식이 교회적 삶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다는 점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는 항상 역사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를 숙고하였다. 그래서 “역사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를 마틴 로이드 존스 보다 더 잘 아는 이가 없었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제임스 패커, 존 스탓트 등도 설교자에게 있어서 교회사의 주요성을 강조한 인물이었다. 위대한 설교자 스펄전(C. H. Spurgeon, 1834-1892) 또한 교회사를 중시한 인물인데 그에게는 약 2만5천권의 장서가 있었는데 이중 6천권 정도는 청교도 관련 서적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교회사 특히 청교도에 대해 박식했다. 그는 설교자에게 있어서 역사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설교계의 양대 거목이라 불리는 19세기 영국의 찰스 스펄전과 20세기 마틴 로이드 존스가 이처럼 교회사를 중시했다는 사실은 설교자에게 있어서 교회사의 중요성을 대변해 준다. 이 글에서는 왜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가에 대해 답하면서 역사이해 혹은 인식과 관련된 주변의 몇 가지 사항에 대해 답해 보고자 한다. 이 글은 급하게 쓴 미완성의 글이라는 점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강의를 이끌어가기 위한 작은 안내일 뿐이다. 1.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歷史, ὶστορια)를 뜻하는 History나 Historia 라는 말은 그리스어(ὶστορια, ὶστορεω)에서 유래했는데 ‘연구,’ ‘탐구,’ ‘조사’ 혹은 ‘탐구하여 획득된 지식’, ‘연구하여 얻어진 지식’을 의미한다(갈1:18). 예컨대 헤로도투스(Herodotus, 484-425 BC)는 그의 『역사Histories』에서 인간이 이룩한 위대한 업적들이 소멸되어 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저자가 조사한 내용을 역사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역사’를 과거에 대한 지식이란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2세기부터였다. 로마의 역사가 폴리비우스(Polybios, 203-120 BC)는 그의 『역사Histories』에서 역사를 ‘과거에 대한 지식’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우리가 보통 역사라고 할 때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사건(events)으로서의 역사(Geschichte)와 기록(record)으로서의 역사(Historia)이다. 사건으로서의 역사는 우리의 인식과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지만,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수많은 역사의 창고에서 현재나 미래에 유용하다고 판단되는 것을 선택하여 기록한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 기록을 통해 과거를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역사를 ‘인간의 집단적 경험에 대한 기록’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그 역사를 기록한 역사가가 인식한 바에 의한 주관적 성격을 지닌다. 이를, 헤겔은 “역사란 말은 객관적 의미와 주관적 의미를 종합하고 있는데, ‘사건’(res gestae)을 의미하는 동시에 ‘사건의 기술’(historia rerum gestarum)을 의미한다.”고 했다. 시간 세계 안에 일어난 모든 사건는 절대적이며 객관적인 것이지만(사건으로서의 역사), 그것을 인식하고 기술하는 것(기록으로서의 역사)에는 주관적 측면을 배제할 수 없다. 역사가의 관점, 곧 세계관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한다’라고 말할 때 사실은 역사에 대한 기록을 공부한다는 의미가 있다. 정리하면, 역사란 고고학적 자료나 문헌자료, 혹은 현존하는 자료에 대하여 과학적 방법에 의해 수집된 조직적인 자료에 기초하되 사회적으로 중요한 인간의 과거에 대한 해석된 기록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2. 왜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가? ‘왜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가’라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이다. 인류가 이룬 그 풍성한 유산을 모른다는 것은 나 자신을 알지 못하는 것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지난 2천간 서양과 동양사회에엄청난 영향을 준 교회의 역사를 모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역사를 공부한 가장 큰 이유는 기원 혹은 연원에 대한 관심, 곧 호기심 때문이었다. 지난 과거를 알고 싶은 호고주의(好古主義)는 역사 공부의 출발점이었고 그 결과는 기쁨과 위안이었다. 이런 점에서 역사연구는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점은 사소한 것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에 몇 가지 실제적인 이유를 제시하고자 한다. 1) 인간 존재에 대한 확인 역사를 ‘인간의 집단적 기억’이라고 말하는데, 이 기억 곧 기록이 없다면 우리는 누구이며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으며 어떻게 존재해 왔는가를 알 수 없게 된다. 이는 마치 인류가 집단적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우리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결국 인간은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역사는 개인과 집단, 부분과 전체를 아우르는 인간 삶의 기원과 연원, 변화와 발전, 흥망성쇠를 통해 개인, 민족, 국가, 사회제도, 문화, 종교를 알게 하고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준다. 곧 역사는 시간, 장소, 사회발전과 각종 제도들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인식하게 함으로서 정체성을 확인시켜 준다. 그래서 얼 케언즈(Earle E. Cairns)는 교회사란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도구’라고 불렀다. 역사 연구는, 오늘 우리가 누리는 앞선 세대가 물려준 위대한 유산들을 알게 해 준다. 그래서 오늘 우리로 하여금 앞선 시대에 대하여 감사하게 하고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어 준다. 우리가 파지 않는 우물물를 마시며, 심지 않는 포도원의 열매를 먹으며, 건축하지 않는 도시에 살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되기(신6:10-11)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역사발전은 우리보다 앞선 세대의 희생과 수고, 헌신의 결과임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2)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 구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역사 즉 5대제국(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기에 역사를 안다는 것은 구약을 이해하는데 절대적인 도움을 준다. 신약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심문받으실 때,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인정하고(요18:38, 19:4, 6) 그를 석방하려 했다. 그런데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忠臣)이 아니니이다”(요 19:12)라는 말을 듣고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내어준다. 그런데 여기서 ‘가이사의 충신’은 바른 번역이 아니다. 바르게 번역하면 ‘가이사의 친구(φίλος τοῦ Καίσαρος)’로 번역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 ‘친구’를 ‘충신’으로 의역했을까? 한글성경 번역자들이 역사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문대로 ‘친구’라고 번역하지 않고 ‘충신’이라는 말로 의역한 것이다. 여기서 친구라는 단어는 보통명사가 아니라 당시의 직위 혹은 자격을 말하는 고유명사였다. 당시 로마 황제는 지극히 신임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친구’라는 칭호를 수여했는데 이 칭호를 받은 자는 사전 내락 없이 황궁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자격을 지닌다. 빌라도는 당시 황제였던 티베리우스(재임기간 14-37년)로부터 ‘친구’라는 칭호를 수여 받았는데, 군중으로부터 “예수를 석방하면 그 친구라는 칭호를 잃게 된다”는 말을 듣고 무죄한 자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준 것이다. 정리하면, 성경 번역자들이 로마제국의 역사를 몰랐기 때문에 성경을 의역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역사를 아는 것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3) 역사로부터의 교훈 역사 연구의 필요성에 대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대역사가들은 역사는 개인과 집단에게 교훈을 준다고 가르쳤다. 동양문화권에서도 역사를 거울(鑑)이라고 보았다. 중국에는 자치통감(資治通鑑), 우리나라에는 동국통감(東國通鑑)이 있는데, 이 역시 역사를 거울이라고 본 것이다. 명심보감(明心寶鑑)은 역사로부터 도출된 예문을 통해 교훈과 훈계를 주기 위해 편집된 책인데, 역사를 거울로 본 것이다. 성경도 역사의 교훈을 말하고 있는데,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구약의 출애굽 사건들)이 거울이 되어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다”(고전10:11)고 말하고 있다. 역사는 거울처럼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교훈과 훈계를 주기 때문에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다. 바울도 로마서에서, 역사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for our learning) 기록했다(롬15:4)고 말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키케로는, “당신이 출생하기 전의 일에 대하여 무지하다면 어린아이로 사는 것과 같다”(Nescire autem quid ante quam natus sis acciderit, id est semper esse puerum)고 했다. 스페인의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 또한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자들은 그것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Those who cannot remember the past are doomed to repeat it)”고 했다. 이런 점에서 역사는 ‘사례(examples)를 가지고 가르치는 설교’라고 할 수 있다. 구약의 역사서, 특히 사무엘서, 열왕기서, 역대기서는 이스라엘 왕조시대 역사인데, 여기에 여러 왕들의 영욕의 자취가 기록되어 있고 오욕의 역사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런 역사적 사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교훈하고 있다. 역사는 삶을 위한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랄프 윈터(Ralph Winter)는 “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책 제1권이고, (교회)역사는 하나님의 책 제2권이다”라고 말한바 있다. 역사는 ‘과거의 산물인 동시에 미래의 씨앗이다.’ 그래서 역사는 교훈을 주기도 하지만 미래를 어느 정도 예측하게 해 준다. 우리가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할 때 이 말에는 역사는 어느 정도 반복한다는 점을 전재로 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역사는 반복하는 가? 이 점에 대해서는 차항에서 검토하고자 한다. 4) 거시적(巨視的) 혹은 통시적(通時的) 안목 역사공부는 역사적 안목, 곧 거시적 혹은 통시적 안목을 갖게 해 준다. 역사에 무지하면 어린아이로 살뿐 아니라 역사를 조망해 보는 안목을 가질 수 없다. 이는 마치 우물 안의 개구리(井中之蛙)처럼 밖의 세계를 볼 수 없다. 그러나 역사 연구는 우물 밖의 세계를 보게 해 준다. 즉 타자의 인식을 주관화함으로서 역사를 거시적 안목으로 보게 해 준다. 1989년 시한부종말론이 유행했을 때 역사에 무지하면 당시 풍미하던 거짓 종말론이 한국교회의 특이한 현상이라고 여기지만, 이런 류의 시한부 종말론은 초대교회시대, 중세시대, 16세기 종교개혁시대, 그리고 19세기 미국에서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것의 한계와 기만성을 깨닫게 된다. 윌리엄 밀러(William Miller)의 그리스도 재림론(1843)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시한부종말론이 가져오는 사회병리적 현상에 놀라지 않게 된다. 말하자면 역사에 대한 이해는 과거와 현재를 조망해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게 하고, 역사를 원근법적으로 파악하게 도와준다. 그래서 영국의 교회사학자인 제프리 빙햄(Jeffrey Bingham)은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역사가여야 한다. 과거로부터 자양분을 얻는다면 더 높은 곳에 앉아 더 멀리까지, 그리고 더 넓은 전경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결국 역사는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 준다. 5) 역사연구와 오늘의 현실 역사연구는 우리 우리의 현실을, 그리고 우리의 실제 모습을 깨닫게 해 준다. 특히 교회사 연구는 오늘의 교회가 본래적 교회로부터 얼마나 부합하는지 혹은 이탈했는지를 깨닫게 해 준다. 그래서 루터를 비롯한 개혁자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복음주의 신앙을 첫째는 성경에 호소하여 그 정당성을 주창했고, 둘째는 역사에 기대어 당시 교회가 얼마나 본래적 교회, 본래적 신앙에서 이탈했는가를 제시하고 자 했던 것이다. 역사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척도였다. 우리는 역사연구를 통해 4세기 이후 교회가 본래적 교회로부터 이탈하여 속화의 길을 가게 되었고, 6세기 이후 교리적 변질을, 9세기 이후 성직매매가, 그리고 11세기 면벌부가 소개되었고, 14세기 이후 교회가 타락하여 성직자들이 윤리적 타락이 심각했음을 알게 된다. “성직자의 삶은 평신도의 복음이다”(Vita clerici est evangelium laice)는 경구가 나온 배경을 알게 해 준다. 교회사는 교회의 본질과 사명 혹은 특성을 이해하는데 가장 적합한 수단이 된다. 역사, 역사적 연구는 교회의 본질과 사명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진정한 교회상을 제시해 준다. 또 역사를 통해 우리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役事)와 섭리를 헤아릴 수 있다. 6) 설교자, 역사(교회사)의 유용성 그렇다면 역사에 대한 지식은 설교자에게 어떤 유용성을 지니는가? 두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로, 역사는 설교자들에게 유용한 예화(사례)를 제공한다. 지난 2천여 년 간의 교회사에는 본받거나 경계해야 할 많은 사례가 있는데, 그것이 오늘 삶에 유용한 가르침을 준다. 이보다 더 좋은 사례집이 있을까? 역사에 대한 지식은 설교자에게 유용한 예화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이를 ‘역사의 예화적 기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역사에 대한 지식은 설교자들을 풍요롭게 해 준다. 둘째, 역사(교회사)는 성경의 가르침을 확증해 준다. 예를 들면, 성경은 인간은 타락했고 전적으로 타락했다(롬3:10, 20, 1:18-3:18)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진실로 인간은 타락했고,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역사는 성경의 가르침이 옳다는 것을 확증하는 기능을 한다. 이런 점에서 역사는 사례를 가지고 가르치는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역사는 누구에게나 소중한 자료가 되지만 특히 설교자들에게는 성경의 가르침을 확인해 주는 기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3. 역사는 반복하는가? 우리가 주변에서 늘 듣는 말이 ‘역사는 반복한다’는 말이다. 전도사 기자도 “해 아래 새것이 없다”(전1:9)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역사는 실제로 반복하는가? 고대 그리스인들이나 로마인들도 그렇게 믿었다. ‘명상록’을 썼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는, 우리가 과거에 일어난 일과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기 위해서는 오직 40년만이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역사는 40년을 주기로 반복한다는 의미였다. 그런가 하면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 에밀리아누스(Scipio Aemilianus)는 힘겹게 카르타고를 점령하고 나서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역사는 반복하기 때문에 지금은 로마가 정복했지만, 언젠가 로마가 동일한 방법으로 정복당하게 될 것을 예견하고 통곡한 것이다. 역사의 반복을 믿었던 것이다. 실제로 역사는 반복할까? 만일 반복이 없다면 역사를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역사 연구는 결국 교훈을 얻기 위한 것인데 과거의 일이 다시 반복하지 않는다면 구태여 지난 역사를 공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은 역사는 어느 정도 반복한다는 점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영국의 존 버리(John B. Bury) 같은 역사가는 역사는 반복한다고 믿었기에 역사에서 법칙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역사는 과학,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History is a science, no less and no more)’라고 말한 바가 있다. 자연과학의 법칙이란 반복된 사실에서 얻는 정리(定理)인데, 그는 역사도 자연과학처럼 동일한 사건이 반복된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역사는 반복하는 것일까? 정확하게 말하면, 역사는 어느 정도 반복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동일한 사건의 재현은 없습니다. 예컨대 칸트와 견해가 똑같은 철학자가 후대에 나올 수 있어도 그 동일한 칸트가 다시 태어날 수는 없다. 이렇게 볼 때 역사는 반복한다고 할 수 없고, 이런 점에서 역사는 개별성과 특수성을 지닌다. 그렇지만 역사는 동일한 사건이 수없이 많이 발생한다. 그래서 역사는 반복하는 것처럼 보일 따름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는 반복하지 않고 반복되는 것처럼 보일 따름이다. 왜 그럴까? 인간의 본성(human nature)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동일한 본성을 가진 인간에 의해서는 시대와 상황은 달라도 유사한 사건이 반복적으로 발생한다. 로마 시대에도 권력을 가진 자는 그 권력을 유지하고 싶어 했고, 권력을 잃은 자는 그 권력을 되찾고 싶어 했다. 이런 권력에의 욕망은 고대에도 있었고, 16세기에도 있었고 우리 시대에도 동일하다. 고대 로마만이 아니라 아시아나 유럽 사회에서도 동일한 현상이었다. 이런 인간의 동일한 본성 때문에 유사한 사건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결국 역사는 인간의 본성이 어떠한가를 보여 준다. 비록 동일한 사건의 재현(再現)은 아니지만 유사한 사건이 거듭 반복되기 때문에 역사는 교훈을 주고, 역사를 공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또 유사한 사건이 반복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법칙성을 발견할 수 있고, 그래서 (어느 정도) 사회과학적 예측이 가능한 것이다. 4. 하나님은 역사에 개입하시는가? 하나님(神)은 인간 역사에 개입하시는가? 이 점에 대해서는 3가지 견해가 있는데, 실증주의(Leopord von Ranke, Karl Marx), 관념론(I. Kant, Johann Gottlieb Fichte) 그리고 기독교적 이해가 있는데, 기독교회는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 곧 하나님의 섭리 혹은 경륜을 말한다. 그것은 인간역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역사(役事)에 대한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말 하나님은 인간 역사에 개입하시고 간섭하시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악이 존재하며, 의로운 사람이 고통당하고, 불의와 부정의가 활개치고, 참학과 광포가 줄을 잇고, 무죄한 자가 칼날에 쓰러지고, 의로운 외침이 곡절되고, 공의를 외치는 이들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가? 이런 의문은 오랜 역사가 있다. 기원전 12세기경에 살았던 욥은 ‘왜 의인이 고통당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했고, 덕천막부(德川幕府) 치하 일본의 천주교도들도 동일한 질문을 했다. 나치 하에서 유대인들의 의문도 동일했다. 만일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하나님은 이 살육의 현장에서 침묵하시는가? 아우슈비츠에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한 엘리 비젤(E. Wiesel)은 그의 책 <밤, Night>에서 이렇게 물었다.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우리라고 이런 의문이 없을 수 없다. 실제로 인간의 역사에는 우리가 답할 수 없는 문제가 수없이 많다. 루터는, 이런 일들을 우리는 다 알 수 없지만 여기에는 하나님의 숨은 뜻이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인간 역사에 개입하시고 간섭하시고 다스리신다고 말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일이 저절로 되거나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役事)라는 믿음을 섭리라고 말한다. 영국의 이신론(deism)은 하나님의 창조는 인정하되 창조된 이후에는 만물이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창조한 세계에 오셔서 간섭하시고 다스리시고 통치하신다고 가르친다(창45:5-8, 50:15-21). 하나님은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셨고(대하36:22, 스1:1), 포로된 자기 백성을 귀환하게 하셨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마10:29)고 말한다. 볼테르(Voltaire, 1694~1778)는 ‘역사는 인간의 그림자’라고 하여 인간이 역사의 주체라고 부장했으나, 성경은 하나님이 역사의 주체이며 지금도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계신다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특정한 사건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증명할 수 있을까?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1588년 7월 스페인의 무적함대라고 불리던 아르마다 함대(Armada)가 영국을 침공했다. 교황청과 관계를 단절한 영국을 다시 천주교로 복귀시키려는 의도였다. 아르마다 함대는 130척의 배와 8,000명의 해군, 19,000명의 보병으로 구성된 대군이었는데, 도버해협에 도착한 날은 7월 27일이었다. 영국은 속수무책이었는데, 오직 한 가지 희미한 가능성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실한 영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을 걸고 기도했을 때 청명하던 하늘에 먹구름이 일기 시작했고, 바다에 폭풍이 몰아쳤다. 예기치 못한 기상 이변에 당황한 아르마다함대는 결국 패전하고 오직 30여 척만이 도버해협을 넘어 도망갔다. 이 사건을 역사가들은 ‘개신교의 바람(the wind of Protestantism)’이라고 부른다. 무적함대라고 불리던 아르마다 함대가 패배한 것은 커다란 이변이었고, 이 사건 이후 영국이 해상권을 장악하고 거대한 제국으로 발전해 갔다. 그래서 아르마다 함대를 물리친 것은 하나님이 섭리하신 특별한 사건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을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증명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건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었다고 증명할 수 있을까? 이 역시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신념 체계, 곧 성경에 근거한 믿음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실증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믿음으로,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고 믿는 것이다. 마르크시스트들은 신(神)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 간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사건은 역사 내적인 원인과 결과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역사 외적인 개입이나 간섭은 인정하지 않는다. 실증주의도 이와 다르지 않다. 실증주의는 역사의 동인(cause)이나 과정을 현상세계 안에서, 곧 역사 내적인 인과론에서 찾기 때문에 하나님의 간섭이나 통치 혹은 섭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이들은 역사의 궁극적인 의미를 묻는 질문은 역사가의 영역 밖의 문제라고 말한다. 랑케(Leopold von Ranke)와 같은 실증주의 전통을 따르는 이른바 ‘과학적 역사가들(scientific historians)’은 기독교 신앙과 역사는 관련성이 없다고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 간섭을 인정하지 않는다. 5. 기독교는 역사를 어떻게 보는가?: 역사관의 문제 고대 그리스인(희랍인)들은 역사는 끝도 시작도 없는 무한한 반복으로 보았고, 그 역사 과정은 맹목적인 순환으로 보았다. 이를 회귀론 혹은 순환사관(循環史觀)이라고 말한다. 농경 문화권 속에서 계절의 순환을 보고 살았던 저들은 역사를 맹목적인 순환의 과정으로 이해했다. 즉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는 반복된 자연의 순환에서 역사의 순환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은 그리스인들은 역사를 본 것이 아니라 자연을 보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스인들은 역사를 맹목적인 순환의 과정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역사에서 새로운 것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래서 역사는 지향하는 목표도 없고 발전이라는 개념도 없다. 결국 역사과정은 운명론적인 영원한 회귀(回歸)일 뿐이다. 그래서 그리스 철학의 근저에는 운명론(μοῖρα)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이 그리스적인 회귀론을 극복했다. 그리스인들과는 달리 유목민이었던 히브리인들은 새로운 목초지를 따라 이동해 가면서 직선적 역사관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은 그리스인들과는 달리 역사의 분명한 시작과 역사의 목표를 상정했다. 즉 역사란 하나님의 창조와 더불어 시작되었고, 하나님이 정하신 종말로 나아가는 과정, 곧 역사란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전개되는 과정으로 이해했다. 역사는 하나님이 정하신 목표를 향하는 과정이었다. 그 역사는 모든 인류를 포용하는 일원론적이었다. 히브리인들은 역사의 무한한 회귀만을 믿었던 운명론적 역사이해와는 달리, 역사는 분명한 목표를 향한 선적인 과정, 곧 직선적 역사관을 가지게 된 것이다. 히브리인들은 자연은 신비로운 자존실체(自存實體)가 아님을 알게 되어 자연 중심 사상을 탈피할 수 있었고, 역사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았기에 자연을 비신격화 할 수 있었다. 자연은 신비로운 정영(精靈)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無)에서 창조하신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었고, 역사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하게 된 것이다. 정리하면, 역사는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역사 과정은 의미 없는 반복이 아니라 유의미한 진보이며, 분명한 종말을 향해 가는 목적 있는 과정이라고 본 것이다. 이것이 히브리적 역사이해였다. 이런 히브리적 역사관을 계승한 것이 기독교 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의 역사이해는 근본적으로 다음의 3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역사는 하나님의 창조, 인간의 타락,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계획이 펼쳐지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이와 같은 역사에 대한 관점을 구원사관 혹은 구속사관이라고 한다. 둘째, 모든 역사 과정은 맹목적이거나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개입하시고 간섭하시고 섭리하신다는 점이다. 이를 섭리사관(攝理史觀)이라고 말한다. 말씀을 통해서 무에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피조된 세계를 지탱하시며, 모든 것과 동행하시며, 모든 것이 그가 정한 목적을 향해 발전하도록 섭리하신다. 셋째, 역사는 분명한 시작과 함께 분명한 목표, 곧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한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사관을 목적론적 사관이라고 한다. 역사는 맹목적인 반복이 아니라 하나님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과정이며, 역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목표를 행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라는 점을 확신하고 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피조된 세계를 다스리시고 유지하신다. 지구궤도를 돌고 있는 수많은 별들과 자연계의 미미한 현상들, 그리고 복잡한 인간의 삶이 다 그의 다스림 아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이 세상에 왜 그토록 심각한 악이 활개 치며, 공의가 무너지고 의로운 자가 핍박당하는가? 이 모든 문제는 범죄한 인간의 악함 때문이다. 인간의 죄와 그로 인한 욕망, 곧 악함이 자연을 파괴하고 불의를 행하고 인간 생명을 살상하고 있다. 우리의 현실을 보면 마치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마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는 ‘하나님의 일식(日蝕) 현상’이라고 불렀다. 하나님이 역사를 다스리시고 통치하시지만 마치 달이 해를 가려 해가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루터는 ‘인간사의 불의가 하나님의 역사 간섭을 부인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고 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현실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여기에는 하나님의 숨은 뜻이 있다’고 보았고, 그 숨은 뜻을 ‘하나님의 마스크’라고 불렀다. 부정하고 싶은 것이 사실이지만, 일제의 식민 지배나 8‧15 광복, 그리고 6‧25 동란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 뜻이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은 각기 다를 수 있지만 숨은 뜻이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사실 우리에게는 역사를 긴 안목으로 헤아리는 안목이 없다. 눈앞의 현실만 인식할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를 통시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 우리의 단견으로는 하나님의 침묵을 읽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긴 안목으로 역사를 굽어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으나 먼 훗날 하나님의 인내와 침묵, 인간의 악행을 허용하신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낙담하고 절망하기도 한다. 우리의 시각으로 볼 때 우리의 현실은 절망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불의와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침묵이 너무 긴 길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때’에 대한 우리의 개념일 뿐이다. 지금 우리는 헤아리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역사를 당신의 거룩한 뜻 안에서 이루어 가실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는 역사를 원근법으로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우리의 날들은 오직 주의 선하신 손안에 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My times are in thy hands, 시31:15)”라고 고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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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3-03-07
  • [기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다시 성탄절 주후 2022년의 크리스마스입니다. 사전적 의미의 성스러운 사람의 탄생을 축하하는 명절이 크리스마스라고 말하지만 정작 이 날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에 대하여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9:2) 이 빛은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나심으로 임하시고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창3:15)이라는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여자에게서 나셨으며 그리스도의 본질을 순전하고 흠 없이 보전하기 위하여 아담의 허리로부터가 아닌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음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날이며 “때가 차매, 아버지가 정하신 결정적인 시간,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갈4:4) 하신 날입니다.” 모든 구약의 율법이 우리를 붙들어 그리스도를 뵈옵게 하심으로 우리를 지으신 분이 우리를 다시 지으신 날(딛3;4~7)입니다. 그러나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합니다.”(요1;5) 이 어둠의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빛이 비쳐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3;19) 즉 세상은 자기 생활방식을 사랑합니다. 인간이 어둠 속에 있을 뿐 아니라 어둠이 인간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는”(고전1:21) 우리에게 저녁 서늘한 무렵 하나님께서 동산에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즉 타락한 에덴동산에 빛이 비친 것입니다. 이 빛은 120년간 방주를 지으며 사람들에게 호소한 노아의 빛으로 소돔과 고모라에서 탄식했던 롯의 빛으로 아브라함과 족장들, 이스라엘 민족과 선지자들, 믿음의 선진들을 통해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그 빛이 계속 비친 것입니다. 모든 빛은 그에게서 나오고 빛의 본질이 그에게 있습니다. 그 분이 빛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오시기까지 사백여년의 어떤 선지자도 메시지도 없는 암흑시대를 지나 마침내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사9:6) 곧 진정한 빛, 주님이 우리에게 임한 방식입니다. 그리고 신약시대의 포문을 여는 첫 장 마태복음 1장의 1절의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펼쳐집니다.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열네 대,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 일곱 대가 여섯 번 있었고 그래서 예수님은 일곱 번째 일곱의 시작이 되십니다. 성경에서 7은 의미가 깊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을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고 모세의 율법에 따라 농부들은 일곱째 해마다 땅을 쉬게 하는 안식을 취했습니다. 레 25장의 일곱 번째 일곱 해 중에서 마지막 해인 49년째 되는 해는 희년으로 모든 노예가 해방되고 모든 빚이 탕감되는 해였습니다. 마태복음 1장은 낳고, 낳고, 낳고의 연속이지만 이 안식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온다는 것을 보여주며 문제는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만 그리스도 안에서 그 안식을 함께 누릴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크리스마스가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강조하지만 어쩌면 이렇게 '내려오심'(강림)의 의미가 더 크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주목해볼 것은 이 족보에 상상할 수 없는 다섯 여인이 이름을 올려놓고 있습니다. -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마리아' 그들은 성전에 들어가 예배조차 드릴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대부분 이방인들이었습니다. 다말과 라합은 가나안 여인들이었고, 룻은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근친상간을 거론하는 다말, 물론 수혼제로 해석이 됩니다. 매춘부인 라합, 이름을 밝히지 않고 우리야의 아내라고 명시함으로 다윗의 치부를 여실히 드러내게 되는 밧세바, 사회 계층상 밑바닥에 가까웠던 겨우 15살의 어린 소녀 마리아... 심지어 헤롯왕이 그리스도께 보인 반응조차도 실은 이 모두가 다 우리의 영적 모습임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어둠의 자식들이었고 세상에서 소망이 없던 자들이었습니다. 주일 하루 예배자의 모습을 드러내지만 교회 문을 나서기 바쁘게 세상과 영적 간음의 배교의 자식들이고 항상 내 생각이 아버지의 말씀 위에 두는 자들입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2:12) 이러한 우리에게 올해도 어김없이 우리를 외면하거나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시고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찾아오시어 “우리가 누구였든지, 어떤 사람이었든지” 이전의 우리를 개의치 않으시고 주님의 자녀로 가족 삼아 주신다는 겁니다. 여기 다섯 명의 여인들 딱 중간에 룻이 자리하면서 에브라임지파와 유다지파를 하나로 모읍니다. 요셉은 유다지파 사람이고 고향이 베들레헴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나사렛에서 나셨을까 생각해 보게 합니다. 성경에서 유다에게는 하나님께서 왕의 축복을 해주셨고 에브라임에게는 장자의 축복을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한다면 이 두 축복을 다 가지고 있어야함을 봅니다. 신약시대의 시작을 예수님의 계보로 시작함은 복음은 삶의 도움이 되는 정도의 상담이나 충고 정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와 그의 모든 행하심에는 역사적 근거가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이야기가 그냥 영웅담이 아니듯이 예수님의 탄생, 그의 성육신은 허구가 아니라 실제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세계 방방곡곡의 크리스마스는 이제 연말 파티용으로 전락되어 우리끼리 먹고 마시는 금송아지 파티를 하고 있습니다. 다시, 크리스마스입니다.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는 우리에게 또 어김없이 빛이 비칩니다.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라”(눅 2:11)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성육신 하셨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가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 분이 우리 삶에 들어오시기 전까지는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는 스스로 알 수 없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마리아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 고백함으로 십자가를 알기도 전에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성육신 하신 주님도 훗날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나아갑니다. 전쟁과 기근과 역병이 돌고 돌아도 하늘의 문은 닫히지 않습니다. 유한하고 제한적인 땅으로부터 고개를 들어 영원한 하늘을 바라보며 위의 것을 찾는 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소망하며 코로나를 함께 겪어 나가며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처방은 최신의 백신이나 해독제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사9:6)된 이 은혜의 선물, 이 빛을, 나의 예수님을 우리 함께 온전히 받아 누리는 복된 크리스마스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글. 이정은 사모(부산 고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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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1
  • [이정은 사모] "악이여, 너는 나의 선이 될지어다''
    "악이여, 너는 나의 선이 될지어다'' 존 밀턴이 '실낙원'에서 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롬1:18) 제가 목사님을 통하여 가르침을 받은 바울 사도의 이 말씀은 그 순서가 매우 중요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경건하지 않음'이 첫 번째이고 '불의'가 두 번째입니다. 이 순서를 깨닫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한 지난 세월의 실수들이 낳은 소위 위대한 사상가들 - 다윈, 헉슬리, 스펜서...복음의 어그러진 사상가들, 그 추종자들 또한 신앙의 확신이 없어 그들을 마땅히 책망하지 못하고 심지어 그들의 가르침이 교회의 메세지에까지 침투해 들어오도록 내버려둔 소심한 교회의 지도자들 - 우리는 그들을 숭배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은 그냥 자연 그대로일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여기에 사람의 의지가 들어갈 때 "사람은 자연보호” “자연은 사람보호”라는 말이 나옵니다. 성소수자들의 퀴어 축제, 동성애 차별금지법, 인간복제, 트랜스젠더, 그들의 인공 자궁이식, 할로윈파티, 여성목사안수...등등 문제는 “왜 이런 것이 시대마다 계속 되어져 나오고 목소리가 커져갈까? 왜 그리스로인들 마저 어정쩡한 모습일까?”입니다. 가만 살펴보면 어떤 이들이, 성경에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그 중에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요소들을 다 몰아내고 하나님을 실제 살아계신 분으로 믿지 않아도, 성경속에 너무나 훌륭한 도덕적, 윤리적 가르침은 얼마든지 지킬 수 있다는 겁니다. 경건과 도덕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것을 꼭 알아야합니다. 경건을 버리는 즉시 불의가 들어옵니다. 이것은 말씀이 우리를 깨우치게 해주는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세상은 법을 내세우지만 성경은 죄를 다룹니다. 세상이 죄의 개념에 반발하는 것입니다. 죄의 개념을 지워나가며 병적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점점 절대적 기준이란 없다고 못을 박습니다, 그럼 어디에서 기준을 찾습니까? 하나님도 몰아내고, 십계명도 몰아내면 대체 무엇으로 기준을 삼습니까? 이에 대한 사람들의 대답은 각자의 의견이 기준이라는 겁니다. 나와 다른 이들에게 최대의 행복을 주는 일이 곧 옳은 일임을 믿으라고 아주 진지하게 가르치며 반드시 행복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쾌락주의자들(Epicurianism)과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즉, 좋은가, 나쁜가, 옳은가, 그른가를 따지는 대신 전반적으로 효과가 있는가를 묻자는 공리주의자들(Utilitarianism), 여기에 더나아가 신학적 공리주의 교리는 “인간의 행동이 순전히 행복 추구”에 있다는 것입니다. 공리주의를 낳은 영국의 빅토리아인들이 광적으로 숭배한 존 스튜어트 밀은 그리스도인도 아니었고, 사상적으로는 니체와 반대사상을 가진 자였지만 그렇다고 유신론자라고도 할수 없는 자였습니다. 그저 그것이 유익한가, 효과가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공리주의를 나름 수정한것이 편의주의(Opportunism)인데 절대적인 기준 같은 것은 없다는 주의이고, 무엇이 효과가 있는지 판단해야하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 즉 목적이 바람직하면 어떤 수단을 사용해도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대중적인 견해로 자리잡아 예수회(Society of Jesus)를 비롯한 여러 단체와 국가가 채택하고 있는 이론이기도 해서 '사회복지' 분야에서도 인기 있는 프레임입니다. 이 편의주의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한다”면 “힘이 곧 정의다” “내 힘으로 원하는 목적을 이룰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도 된다”는 파시즘(Facism)의 철학이고 알다시피 여기서 아돌프 히틀러가 나왔습니다. 그는 편의주의의 창시자는 아니지만 그가 따른 철학은 편의주의였고 편의주의는 파시즘의 철학입니다. 히틀러를 비롯한 수많은 사례가 보여주듯이 고의적인 거짓말과 속임수를 국가의 합법적 수단으로 옹호하는 무서운 결과가 초래된 것입니다. 이러한 발상은 기준이 없기 때문에 훈육, 권징(discipline)에 대한 개념이 없어지고 그에 따른 벌(punishment)이라는 것이 사라졌다는 겁니다. 결국 상황이 훨씬 더 복잡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명하는 기본적이고 영원하고 절대적인 기준을 버린 탓에 '도덕 기준'이 시대에 따라 계속 바뀐다는 것입니다 정말 심각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폐하는 순간 각자 다른 기준을 갖게될 뿐만 아니라 공적인 기준 또한 바뀐다는 것입니다. 1957년 9월 영국의 '동성애 및 매춘 위원회'에서 제출한 울펜덴 보고서(Wolfenden Report)가 있습니다. 그것의 중대한 논지는 “항상 그 시대 사람들 다수의 견해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존 밀턴의 말이 생각나게 합니다. "악이여, 너는 나의 선이 될지어다!" 문제는 세상이 율법을 무시하도록 조장해온 복음주의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율법은 설교하지마라, 사람들을 정죄하거나 비난하지말고 그리스도께 나아오도록 초.청.만 하라” “하지 말라”라고 금하는 대신 "이렇게 하는 편이 훌륭하지 않겠는가? 옳지 않겠는가? 좋지 않겠는가?”라고 귄.하.라.는 겁니다. 비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한.테.나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라고 권하는 것은 성경의 진리를 부인하는 짓입니다. 정죄를 모르는 자들에게 은혜와 진리를 전하는 것은 치명적인 잘못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렘17:9) 결국 비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독교적인 호소를 하는 것만큼 잘못된 일은 없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이 땅의 많은 성도(장로, 권사, 집사, 일반 성도)가 이 땅의 많은 목사, 신학자가 '하나님에 대한' 말은 많이 하지만 허나 ‘하나님께 나아가지는 않음’을 너무도 많이 보아왔습니다. 나라가 안정되고 고요하고 평온하고 질서가 있고 국민이 행복하고, 정부가 원하고, 편하게 목회하고 등등...그래서 동성애도 차별금지법도 여성안수도 더한 것도 시대와 상황에 따라... 이런 주장을 하는 목.사.님들도 분명 알 것이라 여깁니다. 궁극적으로 평화주의는 이단입니다. 평화주의는 비 그리스도인들에게, 어정쩡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독교적인 행동을 기대합니다. 중생치 못한 자들에게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원리들을 적용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이단적인 생각입니다. 물론 다툼과 분쟁, 전쟁은 악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시람들이 은혜아래 들어 올때까지 율법 아래 가두어야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롬13:4) 기독교로 가장하고 있으나 사실은 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거짓 이상주의에 현혹되지 않도록 목사님들은 저희들을 가르치고 가르치고 또 가르쳐야합니다. 사도 요한은 아니 성경 어느 책을 대하든 던지는 질문은 “이 복음서는, 이 말씀을 쓴 이유가 무엇일까?”입니다. 수많은 박해와 시련과 어려움에 직면해있는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은 단순히 위로를 건네는 것이 아니라 물론 궁극적인 의미에서 교회는 위로를 줍니다. 그러나 교회는 심리치료를 받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교회는 깃발을 든 군대로써 말씀 기록자는 일반적인 위로를 건네지도, 호소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가.르.칩.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20:31) 말씀을 말씀으로 풀어주는 이가 없으면 가시채를 뒷발질합니다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행9:5, 26:14) 하나님의 율법과 싸우지 말라는 것, 하나님은 반드시 법을 집행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 형벌을 정하신 하나님은 반드시 그대로 실행하시는 분입을 가르쳐 주십시오. 복음의 위로는 직접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통해 간접적으로 오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말씀 사역자님들의 주된 임무는 감성적이고 감정적인 위로를 원하는 상냥한 사람들에게 한 스푼의 설탕을 맛보게 하는것이 아니라 형제보다 친밀한 친구께 이끌어 가는데 있습니다.(잠18:24) 말씀만 말씀하여 주옵소서. 말씀만 가르쳐 주옵소서 제발. 저희들이 듣겠나이다. 피렌체에서 한달살이를 하면서 이들 속을 면밀히 들여다보고 느끼는 것들은 너무 많지만 그 중에 특히 르네상스의 꽃으로 불리는 피렌체의 중심지에서 눈만 뜨면 들려오는 성당의 종소리와 수많은 아이콘들과 골목길을 들어서면 세상끝날까지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자태를 드러내는 두오모 대성당을 바라보며 장엄하고 웅장하며 화려함의 극치를 드러내었던 그 옛날의 대로마제국을 상상해보며 과연 저들 속에 하나님은 계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어떻게 해석되고 있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헬라인들이 볼 때, 그의 죽음은 너무도 어리석은 것이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구원은 나무에 달려 죽는 사건으로 이루어지는것이 아니라 철학과 사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입니다 예수를 알지만 선생으로 존경하기는 하지만 영접하지는 않음을 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1:23)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 깨닫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정은 사모 (고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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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2
  • [특별기고] 경남기독문화원 문화선교사 김태군 목사의 미주행전(2)
    아틀란타에서의 공식적인 일정이 마쳐지고 다시 짐을 꾸렸습니다. 짐을 꾸리며 들었던 생각은 ‘저 천국 갈 때는 이런 짐들이 아무것도 필요치 않을텐데’라는 생각에 하나님을 다시 한 번 묵상하며 과테말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6월 22일(수), 과테말라에 도착하니 들었던 이야기처럼 공항 근처에 힘든 분들이 포진이 되어있었고 여기 저기 눈을 돌리는 곳마다 시간이 거꾸로 간 것처럼 느껴지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주님의 섭리가 운행하심을 느끼며 일정들을 소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선한사마리아인교회에서 지원하고 후원하는 한미학교가 있습니다. 과테말라 높은뜻우리교회를 통해서 선교 사업을 진행하는데 학교를 지어서 교육열이 떨어지는 현지인들을 모아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서 과테말라 청소년과 청년들이 의식이 깨어나고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것을 도와주는 일들을 진행 중이었습니다. 학교는 거의 80%가 완공이 되었으며 임시로 쓰는 곳에서 학업에 전념하는 과테말라 학생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특별시간을 만들어서 제가 부족하지만 합창을 가르치는 시간들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짧은 시간에 뭔가를 만들어 낼 수는 없었지만 그들과의 소통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값지고 가치 있는 것임을 함께 나누고 돌아 왔습니다. 또한, 과테말라 청소년들 뿐 아니라 높은 뜻 우리교회에서는 현지에 있는 한인 청소년들을 모아서 합창을 배우는 시간들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연습한 합창곡을 26일(주일) 높은뜻우리교회 대예배때 특송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과테말라에서의 일정 가운데 아주 특별한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홍속렬 선교사님을 만났습니다. 축구로 한 평생을 바친 분이신데 젊으셨을땐 국가대표 선수를 많이 만들어 배출시킨 분이셨습니다. 선교사님을 뵙고 느낀 점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입니다. 여든을 훌쩍 넘긴 연세에도 과테말라 한미학교 학생들을 가르치시고 훈련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존경을 금치 못했습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없으시냐고 여쭸더니 .축구화를 좀 보내 달라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때마침 창원 양곡교회에 시무하시고 축구에 남다른 사랑을 가지신 최문욱 장로님이 생각나서 연결을 했더니 축구화를 기증받아서 보내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언제나 사람들의 만남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새삼 깨닫고 기쁨의 순간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6월 27일(월) 오전, 이제...마지막 일정이 기다리는 LA로 출발. LA에서는 가기 전 경남기독문화원 이사장님 이신 구자천 장로님의 섬김을 통해서 라디오 인터뷰가 잡혀 있었고 그리고 돌아오는 날인 7월 3일(주일), 남가주 사랑의교회(노창수 목사) 1~3부 예배 찬양 간증 집회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SNS를 보신 그 지역에 계신 전도사님께서 이곳 저곳 저의 프로필을 소개 하시면서 생각지도 못한 남침례회 LA비전교회(김대준 목사) 금요기도회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28일(화) GBC미주복음방송 친절한전도사의 Networking Today라는 프로그램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별빛교회와 섬기는 신곡리마 을과 출석하는 별빛친구들을 소개하고 경남기독문화원의 일들을 소개하며 인터뷰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루의 일정을 마칠 즈음 한인축제를 기획하시고 담당하시는 화랑청소년재단을 운영하시는 박윤숙 총재님과 연결이 되면서 수요일 만남을 가졌습니다. 화랑청소년재단은 비영리 재단으로써 2006년부터 LA에 본부를 두고 남가주, 북가주, 보스턴과 하와이, 애리조나 등 미 전역에 21개 지부를, 한국 등 11개국에 15개 지부를 각각 두고 운영이 되고 있습니다. 화랑재단은 세속오계를 바탕에 두고 가족 사랑, 나라 사랑, 이웃 사랑, 정의 사랑, 평화 사랑 등 사랑 5계를 실천하는 청소년단체입니다. 박 총재님을 만나서 또 다른 청소년과 청년들의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되었고 긴시간을 함께 나누지는 못했지만 앞으로 생겨날 크고 놀라운 일들을 서로 나누고 품고 돌아온 시간이었습니다. 저의 사역 가운데 별빛 청소년들에게 삶의 꿈과 희망을 나눌 수 있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런 일들로 채워지길 소망하고 기도하며 돌아왔습니다. 비단 저희 별빛교회 다음세대 뿐 아니라 원하는 모든 청소년 청년들에게 보다 큰 세상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아쉬운 만남은 더 큰 역사가 되어서 만들어 질 것이라는 믿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7월 1일(금) 지인 전도사님을 통해 만나게 된 LA비전교회(김대준 목사)에 금요기도회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 만남의 순간에 참으로 감사한 일들이 벌어 졌습니다. 꿈에도 생각도 못한 중학교 후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함께 학교를 다니진 못했지만 그 이국만리에서 동문을 만났다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배목사님을 통해서 더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매형이 목사님이신데 저와 중학교 동기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중학교 동기 목사의 사모는 저의 초등학교 동기인 것! 이 무슨 은혜의 순간인지요 정말 놀라고 감사한 만남의 복을 누렸습니다. 후배는 그 날 집회를 하는 교회 부목사로 섬기고 있었으며 중학교 동기와 초등학교 동기인 사모는 북가주에서 목회를 열심히 한다고 전화통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생각하기를 하나님께 참 감사한 순간이었습니다. 저의 삶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면서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을 전파하는 일을 하는 목사가 된 것도 감사한 일인데 중학교와 초등학교 동기들이 그 먼 곳으로 이주를 하여 목사로 사모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이 이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일인지를 새삼스레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금요기도회가 시작되고 말씀과 찬양과 기도로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도록 은혜의 시간을 나누고 내려 왔습니다. 돌아온 지금도 LA비전교회 김대준 목사님과 소통을 이어가는 중입니다. 만남의 복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것 입니다. 이제 마지막 일정인 7월 3일(주일) LA남가주사랑의교회 주일 1~3부 설교가 저의 어깨를 조금 무겁게 하는 시간들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한국에서 출발 전 이 번 찬양간증집회의 주제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가지고 왔기에 담대하게 말씀과 찬양을 전하고 사랑의교회 온 성도님들과 은혜를 누리고 내려 왔습니다. 저에겐 두 번 다시 오지 못할 시간들이었습니다. 아니 그 시간이 마지막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찬양하고 찬양했습니다. 그렇게 총 25일간의 일정이 마쳐지고 한국 시간 7월 5일 천국제공항으로 무사히 도착하였습니다. 이번 미주 찬양 간증 집회를 통해서 느낀 점은 세상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이뤄지기가 힘들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고 머리에 새로이 각인이 된 시간들이었습니다. 출발 전 저의 마음에 하나님 사랑이 곧 이웃 사랑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주신 것은 남들에게 전하라는 섭리도 있었겠지만 최우선은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마음임을 다시 한 번 고백하게 됩니다. 어떤 것이 중요한지 분간이 잘 안되는 요즘 세상에서 우리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깊이 깨닫고 실천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라고 기도하며 25일 간의 주님과 동행을 나눕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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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23
  • [특별기고]김동식 목사의 〔‘통합기념 한마음교회 유감’에 대한 오해 바로잡기〕에 대한 반론
    먼저 고신 경기중부노회 지역에 속한 ‘통합기념 한마음교회’(이하 한마음교회)에 대한 경기중부노회의 행정 처리에 대하여 존중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통합기념 한마음교회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마음교회는 일반적인 교회가 아닙니다. 그 의미는 전적으로 경기중부노회에 소속된 교회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총회 차원에서 정책적인 지원과 헌금, 전국 교회의 협력이 들어간 명실공히 총회가 협력해서 세운 교회입니다. 따라서 경기중부노회의 바른 행정 처리들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총회가 결의한 사항과 통합 정신, 그리고 통합 준비위원회의 결의와 상반된 행정 처리에 대해서는 총회원 모두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교회임을 명백히 밝힙니다. 그리고 통합의 한 축인 (구)고려의 목사들이 행정처리가 잘못되었다며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명백한 권리입니다. 또 다시 분명히 밝히는 것은 이 이의제기가 경기중부노회에 대한 이의가 아님을 주장합니다. 김동식 목사가 기고한 <‘통합기념 한마음교회 유감’에 대한 오해 바로잡기>에 대한 재 반박문입니다. 그리고 통합기념교회의 잘못된 행태를 바로잡기 위한 주장입니다. 따라서 <‘통합기념 한마음교회 유감’에 대한 오해 바로잡기>라는 김동식 목사의 글에 대하여 이렇게 주장합니다. 1. 통합기념 한마음교회는 유일무이한 통합기념교회입니다. 2. 한마음교회는 안양일심교회 40주년기념교회나 지교회가 아닙니다. 라는 소제목 1과 2에 대한 반론 통합기념 한마음교회에 현판, 단체이름이 걸려있기 때문에 통합기념교회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글의 주장자는 이렇게 허울 좋은 겉모양밖에는 주장할 것이 없습니다. 현판과 단체 이름이 들어가 있으면 뭐합니까? 통합의 한 주체인 (구)고려는 통합이 아닌 상처만 가득한데 말입니다. 이유는 총회 통합추진위원회의 결의대로 (구)고려의 담임목사가 위임목사는커녕 당회장권도 한 번 받지 못한 교회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현재는 안양일심교회 부목사 출신을 후임목사로 보냈습니다. 통합기념교회의 통합정신을 단 1%라도 생각했다면, 이런 행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안양일심교회가 헌신을 많이 한 것이 아니라 안양일심교회가 세우고 싶은 교회에 총회가 헌금한 목적헌금을 가져다 쓴 결과 외에 달리 무엇이 있습니까? 통합추진위원회 제12차 회의 회의록에 보면, 1년 안에 위임목사로 세우는 것을 권고하기로 했는데, 위에 말한 대로 위임목사는커녕 당회장권도 한 번 받은 일이 없이, 안양일심교회 부목사에게 교회 담임권이 넘어갔습니다. <참고자료> 제12차 회의 : 2018 년 11 월 20 일(금) 오후 1시 한마음교회당(식당 ; 둥근상시골집) ⑦ 기념교회 이성용 목사를 1년 안에 위임목사로 세우는 것을 위원들이 좋게 여겨, 해 노회와 기념교회 임시당회장에게 시행하도록 권고하기로 결의하다. 3. 당회장권을 한 번도 준 적이 없다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라는 소제목 3에 대한 반론 3)-1의 주장은, 팩트체크-1대 담임목사와-결과 팩트가 아닌 거짓이라 반론 가치가 없습니다. 3)-2의 6가지 주장은, 이렇게 일심교회 당회가 결의했는데, 김홍석 목사가 통합기념교회에 이런 행동을 했다면, 오히려 김홍석 목사가 일심교회 당회의 결의를 위반한 것입니다. 1년만 당회장권을 달라고 했던 김홍석목사가 3개월 만에 당회장권을 다른 목사에게-그것도 1대 담임목사보다 후배목사에게-이임한 것을 보면 그 진위의 정당성이 판단됩니다. 그에 더하여 2년 동안 6회의 당회장권을 바꿨다는 것(팩트입니다)은, 기본상식에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 모든 것이 명백한 팩트인데, 뭐가 행정적 근거와 사실이 아닌지 설명해야 합니다. 4. 옛 고려 측 목사가 담임하지 못하는 불행한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라는 소제목 4에 대한 반론 한마음교회 ‘1대 담임목사의 과오’ 때문이라는 주장은 시각에 따라 달리 평가할 수 있으며, 재론의 여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리고 1대 담임 이성용 목사는 수원사명교회(상가 15평, 3-4명의 교인)를 28년간 한결같이 목회했고 예배당을 건축하고 당회를 구성한 목사입니다. 큰 교회는 아니지만, 신실한 목회자임을 28년간의 목회에서 검증된 목사입니다. 그런 목회자가 2년 만에 당회장이 6번씩 바뀌는 상황에서 무너져 간 것이 누구의 책임이겠습니까? 4-2) 통합기념 한마음교회 제2대 담임목사 청빙에서, 지원자 21명 중 (구)고려 측 목회자가 단 한 명도 지원하지 않았던 사실에 대하여, 왜 그렇게 되었지 한 번이라도 생각하셨습니까? 굳이 밝히면 (구)고려 측 목사들의 상처와 반발이 얼마나 컸는지를 말해주는 메시지입니다. 5. 교단 70주년을 맞아 통합기념교회를 다시 세운다는 것은 역사의 역행입니다. 6. 무엇보다 이 문제는 고신 총회 제 71회 총회에서 모두 화합 하에 이미 처리 된 일입니다. 라는 소제목 5와 6에 대한 반론 제71회 총회에서 70주년 기념교회에 통합정신을 담아 경기북부노회 지역에 교회를 다시 세우기로 한 안건을 임원회에 맡겨 처리하도록 결의했습니다. 김동식 목사는 처리가 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처리가 되었으면 왜 이런 결의를 총회가 다시 했습니까? 총회 선거를 앞둔 마당에 정당한 근거가 없이 정치 이슈화했다고 합니다. 이 재 반박 글을 쓰면서도 저는 김홍석 목사의 거짓말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박 글을 쓰거나 고소, 고발은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분명히 했다고, 전임 총회장 CH목사와 전 통합추진위원 O목사에게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런데 약속을 파기하고 하루 만에 반박 글을 버젓이 신문에 게재했습니다. 이렇게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분이 부총회장 되면 고신 총회가 어디로 흘러가겠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분이 고신 총회 부총회장에 출마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고신의 앞날이 심히 우려됩니다. 손순호 목사 약력 현) 한강사랑의교회 개척 후 27년간 목회 (구)고려 경인지방 제3대 SFC 위원장 경인지방 SFC 간사 역임 서경노회 SFC 지도위원장 역임 (구)고려 경인노회서기 역임 경기서부노회 서기 역임 미주고신 복음대학교 목회학 박사(D.MIN) ※ 기고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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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13
  • [특별기고] ‘통합기념 한마음교회 유감’에 대한 오해 바로잡기
    ※ 본지는 반론권 보장을 사유로 김동식 목사의 반론문 게재를 수용하여 13일(토)에 기고문을 게재할 것을 약속하였으나 김동식 목사는 본지 편집인의 개인 휴대전화로 협박성 문자를 보내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속히(2022년 8월 12일 18시까지) 반론을 게재해 줄 것을 촉구하며, 반론이 게재되지 않을 경우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는 물론, 명예훼손과 정신적피해에 대한 민형사상의 책임을 반드시 물을 것임을..." 또한 타 기독 언론 매체를 통하여 본인의 기고글을 게재하는 과정에서 본지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악의적인 글을 실었다. 뿐만 아니라 타 기독 언론 매체 기사 입력 시간이 '2022년 8월 12일 12시 56분' 으로 김동식 목사가 본지에 게재를 요구하며 커트라인으로 제시한 '2022년 8월 12일 18시까지' 에 대한 약속은 스스로 지키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따라서 본지 경남기독신문은 향후 합당한 절차를 통하여 엄중히 대처할 것이다. 그러나 구독자의 알 권리와 정당한 논쟁을 보장해야 할 언론의 사명을 다하고자 요청한 반론문은 게제하는 바이다. <경남기독신문 편집인> 경남기독신문 2022년 8월 2일자 <[특별기고] 통합기념 한마음교회 유감>의 글은 행정적 근거와 사실과도 전혀 다른 사실입니다. 마치 ‘시뮬라크르-Simulacre’와 같이 본질을 복제한 가짜로 자신의 생각만을 주장한 허상의 글이기에 그 당시 직접 경험하고 개입된 일이기에 반론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어 경기중부노회 임원들의 의견도 듣고 이 글을 씁니다. 아울러 고신 총회 경기중부노회는 행정적 오류가 없음을 밝힘과 동시에 특별기고자는 한번도 노회나 한마음교회를 수습한 당시 임시당회장들에게 서류나 사실 확인을 위해 요청한 바가 없음은 일방적 생각과 주장으로 글을 기고하였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에 반론을 제기합니다. 1. 한마음교회는 유일무이한 ‘통합기념교회’입니다. 한마음교회가 세워지는데는 안양일심교회 J 안수집사의 13억 상당의 종교부지를 헌물한데서 시작됩니다. 2017년 12월 ‘총회통합기념교회 설립추진위원회-위원장 김성복 부총회장’의 요청으로 안양일심교회 당회는 기꺼이 통합기념교회로 드리기로 하여 세워졌고, 2019년 12월 22일 설립예배를 드려졌습니다. 지금도 현관 현판에 개인, 교회, 단체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교회 홈페이지에서도 확인되고 교회 주부에 ‘통합기념교회’에 기록되어 성도들이 자긍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2. 한마음교회는 안양일심교회의 40주년 기념교회나 지교회가 아닙니다. 안양일심교회 40주년 기념교회나 지교회라는 말은 말도 되지 않는 일입니다. 물론 종교부지 헌물하였고, 성도들이 10억 헌금 하였지만 안양일심교회 주보, 교회요람, 교회연혁 등 어디에도 ‘40주년 기념교회’나 ‘지교회’라는 표현을 사용한 적이 전혀 없습니다. 더구나 2018년에 설립되었고, 40주년은 2020년이기 때문에 전혀 맞지 않습니다. 더구나 분명한 것은 노회에서도 한마음교회는 통합기념교회로 되어 있습니다. 3. 당회장권을 한번도 준 적이 없다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1) 한마음교회 1대 담임 목사가 선정되고 안양일심교회는 장로 2인과 성도들을 보내기로 하고 노력하였으나, 1대 담임 목사는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장로 2인이 가고 성도들이 함께 하였다면 당회장이 아니라 위임목사로 세워졌을 것입니다. 그렇지 몫해서 전도 목사로 파송되어 당회장을 맡지 못한 것입니다. 2) 첫 번째 당회장이었던 김홍석 목사는 한마음교회 1대 담임 목사에게 모든 권한을 일임하였습니다. 2018년 12월 30일 첫 공동의회에서 당회장이 담임 목사에게 위임한 내용이 회의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성례권(학습, 세례, 입교, 유아세례)을 담임 목사에게 위임한다. (2) 제직회 일반 사무를 담임 목사에게 위임한다.(예산 편성권, 추가경정 예산 편성권, 예산에 관한 지출, 제직회를 경유한 각종 특별회계 지출) (3) 부목사 청빙을 제외한 교역자 및 임시직원(서리집사)의 임명을 담임 목사에게 위임한다. (4) 경기중부노회 및 총회를 제외하고 대외적으로 교회를 대표할 수 있도록 위임한다. (5) 본 교단 소속목사에 한하여 강도권을 담임 목사에게 위임한다. (6) 정직이하의 치리권을 담임 목사에게 위임한다 로 결의 명시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당회장과 같이 위임하여 준 것입니다. 3) 시찰회와 노회는 당회장권을 주려고 하였으나 담임 목사 사역 중 전임 사역교회에서 재정문제 등 여러 문제를 노회에 제기하게 되어 당회장권이 재론 되었습니다. 4. 옛 고려 측 목회자가 담임하지 못하는 불행한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1) 1대 목사의 과오 때문입니다. 누구도 한마음교회 1대 담임 목사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목회 사역 과정에서 심각한 성도와의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겨우 화해와 봉합이 되었지만 2020년 2월 16일 제직회와 공동의회에서 다시 격화되어 내분이 확산 되었습니다. 2차 문제의 해결방법으로 J 당회장의 중재로 3가지 합의를 하였지만 담임 목사의 일방적 합의 파기와 함께 교회 출입 금지 시키고 참으로 고통스런 자살소동까지 이어져 교회는 끝없는 파국으로 빠졌습니다. 총회 재판국의 중재와 임시 당회장과 협조 당회의 결단으로 재정지원으로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2) 2대는 청빙은 교회의 고유한 행정권한입니다. 청빙위원회가 구성되었고 2020년 8월 기독교보에 ‘한마음교회 청빙공고’를 통해 공개적 청빙절차를 밟았습니다. 총 21명이 청빙서류를 제출하였고 그 중에는 옛 고려 측의 목회자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옛 고려 측의 목사가 제2대 한마음교회 담임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억지입니다. 21명의 지원자 중 2020년 9월 27일 청빙위원회에서 21명 중 4명으로 압축하고 면접자 2명을 최종 선정하였고 최종 결적을 내리지 못하고 1주일 기도 후 9월 26일 낮 12시 무기명 투표로 2대 담임 목사를 선정하였습니다. 3) 현재 한마음교회는 2대 담임 목사를 중심으로 회복되어 출석교인 130여 명에 이르는 은혜로 무너진 교회가 회복되어 있습니다. 5. 교단 70주년을 맞아 통합기념교회를 다시 세운다는 것은 역사의 역행입니다. 전국 노회와 교회의 후원금 13억을 말하는데 내야 할 분은 따로 있습니다. 1대 담임 목사를 잘못 세운 책임과 관계된 교회들과 우리 모두의 책임임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경기중부노회 소속 안양일심교회 김홍석 목사와 당회 그리고 성도들은 통합기념교회를 위해 종교부지 헌납, 10억 헌금, 1차 성도 파송, 2차 성도 파송하여 한마음교회를 살린 교회입니다. 이런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고 정치적 이슈화하여 거론하는 것은 목회자의 일이 아님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6. 무엇보다 이 문제는 고신 총회 제 71회 총회-2021년 9월 28일(화) 오후 1시 ~ 30일(목)-에서 모두 화합 하에 이미 처리 된 일입니다. 이것을 다시 거롢는 것은 총회의 결의를 번복하는 처사이고, 고신총회와 역행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본인이 총회에서 화합과 통합을 발표한 사람입니다. 아울러 총회 선거를 앞둔 마당에 정당한 근거 없이 정치적 이슈화하여 유포하는 것은 총회를 어지럽히는 것이고, 도리어 통합 정신을 고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반하는 것이라 사료됩니다. 고신 총회는 한국교회의 보루입니다. 다시는 이런 일로 총회를 어지럽히고 여론을 조장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김동식 목사 약력 · 현)충훈교회 담임 · 목회학 박사 · 전임 경기중부노회 노회장 · 미주목회 13년 · 말씀회복연구소 소장 · 월간 광야 발행인 · 칼럼리스트 · CMF 전문가정사역자 ※ 기고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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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13
  • [특별기고] 경남기독문화원 문화선교사 김태군 목사의 미주행전(1)
    여호와 샬롬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 고백한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저 역시 무엇 하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루어 질 수 없었던 미주초청 찬양집회를 다녀오게 되었고 그 짧지 않은 여정들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자 이렇게 글을 씁니다. 별빛교회가 어떤 모습으로든지 신곡리를 섬기고 또한 출석하는 15명의 청소년들의 꿈과 소망을 키워 나가기 위해 교회 1층을 영업허가를 내어서 갤러리 카페로 준비하는 과정 속에서 몇 해 전 하나님의 은혜로 만나게 된 아틀란타 선한사마리아인교회 협동목회를 하시는 김춘곤 목사님과 서경훈 목사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서로 기도의 동역자들로 힘을 나누고 지내다가 그 교회에서 선교를 하는 과테말라 높은뜻우리교회(배형근 목사)와 인연이 닿았습니다. 그렇게 연결이 되면서 과테말라 현지 청년들을 밀양으로 농업교육과 취업을 위해 이런 저런 절차들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김춘곤 목사님의 밀양 방문을 통해서 밀양 시장님과 만나게 되고 좀 더 구체적인 일들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일들이 점점 만들어 지는 가운데 과테말라 한인 청소년들이 아틀란타 선한사마리아인교회로 단기 선교를 오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졌고 아틀란타에서 연락이 오기를 저를 초청해서 부흥회와 문화선교에 관한 일들을 만들어갔으면 하는 일들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지난 6월 10일 인천을 통해 아틀란타로 가게 되었습니다. 가기 전 갤러리 카페를 오픈 하려고 했던 저의 계획은 밀양에 큰 불이 나는 바람에 오픈식도 못하고 그냥 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저런 갑갑함을 가지고 출발을 하려니 정말 모든 것이 손에 잡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기도와 찬양 준비로 마음을 가다듬고 출국길에 올랐습니다. 처음엔 아틀란타와 과테말라만 가려고 했지만 이런 기회가 또 오겠나 싶어서 일정을 한 주간 더 늘려서 나오는 길은 LA를 통해서 나오려고 했고 그 일정을 통해 주께서 인도하심을 느끼고 온 시간들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6월 10일(금) 아틀란타에 도착 후 기회가 주어지는 순간마다 예배 찬양으로 영광 올려 드리며 걸어갔습니다. 금요기도회, 새벽기도회, 주일 일정 중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아틀란타였기에 순간순간을 알차게 보내려고 맘 먹고 기도하며 순종하며 나아갔습니다. 도착 후 첫 주일, 한인교회인 주은혜교회(강윤구 목사)에서 1부 찬양과 2부 땐 미국인교회인 Lord of Life Lutheran Church에서 특송을 하게 되었습니다. 공식적인 첫 사역이었습니다. 미국인 교회에서 “생명의 강물”을 부르게 되었는데, 한국말도 모르시는 미국인 성도님들께서 눈물을 흘리며 함께 찬양 속으로 빠져 드셔서 순간적으로 엄청 놀란 시간이었습니다. 예배가 마치고 난 뒤에도 다들 오셔서 눈시울을 붉히며 축복해 주셨습니다. 정말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루어 질 수 없는 순간을 누리게 되었으며 가기 전 준비한 USB음반이 있었는데 전혀 알아듣지도 못하는 그 미국인 성도님들께서 음반을 사주시고 축복의 시간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은혜의 시간을 누리고 15일 수요일 양로원 데이케어 사역이 진행 되었습니다. 이민 가신 어르신들께서 아침에 오셔서 오후까지 지내시는 센터에서 예배와 미니콘서트를 가졌습니다. 고국에서 왔다고 다들 너무 반갑게 맞이해 주셨습니다. 마치고 함께 식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어르신들과 짧은 만남의 시간도 나누게 되었는데 모두가 하시는 말씀이 한국에 가면 꼭 만나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그 말씀은 정말 오시겠다는 말씀 이전에 고국을 그만큼 그리워하고 계신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저 또한 남은 시간들을 더욱 더 봉사하며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저 하늘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17일(금) 선한 사마리아인교회로 단기선교를 온 과테말라 한인 청소년들과 아틀란타 프라미스교회에서 금요기도회로 섬겼습니다. 과테말라 단기선교팀의 오카리나 연주와 저의 찬양간증집회를 은혜 가운데 마치게 되었습니다. 프라미스교회 담임목사님께서 안식월이라 뵙지는 못했지만 가족 같은 분위기의 프라미스교회는 참으로 따뜻한 교회임을 느끼고 왔습니다. 또한 프라미스교회를 섬기시는 집사님 부부를 만나서 고국의 청년들을 위해 프로그램을 준비해 보라는 말씀도 나누게 되었습니다. 집사님부부는 미국으로 이민을 한 후 열심을 다해서 살아가시면서 청소년과 청년들을 향한 남다른 마음이 있으셔서 저에게 고마운 충고를 해주시고 물심양면으로 섬겨 주셨습니다.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고 별빛교회 청소년들도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에 제대로 잘 준비해서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도록 기도하고 준비하는 비전을 품고 돌아왔습니다. 18일(토) 선한 사마리아인교회에서 부흥집회가 시작되었습니다. 토요일 오후 그리고 주일 오전과 오후 총 세 번의 집회 동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말씀의 주제를 가지고 은혜 가운데 모든 집회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미국도 마찬가지로 펜데믹 때문에 성가대가 모이지도 못하고 주일 예배 시 한 번도 찬양의 시간을 못했는데 이 번에 제가 인도한 부흥회에 아름다운 하모니로 성가대가 2년여 만에 예배 때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하시더군요. 참 감사하고 은혜로운 시간을 함께 누리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집을 숙소로 준비해 주신 선한 사마리아인교회 이 장로님과 집사님, 잊지 못할 순간이었습니다. 장로님 댁에서 지내면서 주님은 머리 둘 곳 조차 없으셨다고 하셨는데 나 같은 죄인이 이렇게 편한 곳에서 지낼 수 있다는 것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그 어떤 것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이제 주일이 지나고 과테말라로 떠나기 전날 급작스럽게 또 다른 데이케어에서 섭외가 들어왔습니다. 기쁨으로 찾아뵙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르신들을 위해 찬양과 간증을 드리고 함께 은혜를 나누게 되었는데 마치고 그 어르신들께서 저에게 찾아 오셔서 두 손을 꼭 잡으시고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고국에 가게 되면 꼭 찾아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처음 갔던 센터처럼 그 어르신들의 마음엔 고국에 대한 간절함이 묻어 있었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분이 계셨는데 환하게 웃으시면서 다가오신 백발의 어머님은 눈시울을 붉히시면서 “실은 제가 목사 사모입니다. 그런데 은퇴하신 목사님께서 작년에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천국 갈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시면서 빌려오신 헌금을 봉투에 담으셔서 “고국에 돌아가면 꼭 좋은 곳에 사용해 주십시오” 하시는 겁니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 사모님의 사랑의 마음을 신곡리 어르신들과 별빛 아이들에게 전하려고 굳게 맘을 먹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들에게 주어진 시간과 사람과 그 모든 곳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존재로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해 봅니다. <다음 호에 계속> 글. 김태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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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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