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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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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 오피니언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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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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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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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박동철 장로] 이승만의 ‘건국전쟁’ 예수복음이 대한민국 國富論된 이야기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이야기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이 예상보다 흥행하며 전국에서 상영되고 있다. 필자는 설 명절에 가족과 함께 관람을 하고 청년인 아들과 우리의 근대 역사를 두고 토론을 잠시 한 적이 있다. 눈물겨운 우리의 역사에 이승만을 다시 보는 보람된 시간이 되었다. 필자는 보수적 시각과 좀은 복음의 욕심에서 바라봤다. 이승만의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바탕에 깔려있는 기독교의 건강한 사회이념을 영화가 설명 못 했음이 아쉬웠다. 그동안 이승만의 건국대통령에 대한 찬반의 국민정서가 심각의 도를 넘었다. 그리고 공(功)과 과(過)에 대한 평가 또한 세상의 담론에서 정리되지 못했다. 온통 이승만의 공은 과에 덮여져 있었다. 장기집권과 독재정치 6.25한국전쟁에서의 피난처신등이 과였다. 그리고 4.19라는 민주주의 정치의 헌법정신이 이승만의 공을 고개 들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이번 영화가 많은 정치적 다른 견해에서 찬반이 있지만 대한민국 국가발전의 뼈대의 기초를 이승만이 확실히 세웠다는 입증을 분명히 한 많은 증거들이 있었다. 그것은 이승만의 피나는 항일 독립운동과 외교,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대한 강한 집착이었다. 대한민국이 오늘날 세계 속의 경제 강국이 된 것은 1948년 8월 15일 자유민주주의 정부수립의 헌법정신이 시장경제의 글로벌 경쟁을 뚫고 세계를 주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승만의 역사를 추적해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정사(正史)에도 나온다. 왕손 양영대군 16대손 전주 이씨로 한학을 하며 청년까지 성장한 이승만이다. 나라의 지도자 선각자가 될 수 있었던 계기는 1905년 25살에 한성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면서이다. 이승만은 청년시절 대단한 진보적 사고를 가졌다.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당시 일본 중국 러시아 열강 속에서 제대로 개혁정치를 하지 못할 때 만민공동회를 결성한다. 고종을 폐위시키는 목적이었다. 이로 인해 한성감옥에 추포되어 감옥에서 복음을 듣고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을 만난다. 이때부터 이승만은 향후 이 나라를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 기독교 사회이념의 국가에 대한 큰 소망을 가지게 된다. 이승만이 천재적 재능을 가진 머리 좋은 인재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참 기독교인이 되고난 후 성령을 받고 모든 나라비전을 기독교 이념에 두었다. 일정시대 미국에서 유수한 대학에서 공부하고 항일독립운동을 하면서 온통 기독교 사회 이념 바탕에서 미래의 꿈을 꾸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온몸으로 대한민국 독립과 새로운 건국에 몰입했다.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의 아이콘이 된 것은 광복 후 건국과 함께 토지개혁과 여성해방 그리고 사학육성 등 나라의 백년대계가 되는 기초를 만들었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 속의 대한민국이 되는 설계도가 된 것을 어느 누가 부인하겠는가. 우리 믿는 자들이 눈여겨 봐야할 것은 기독교 사회이념을 국가발전 기초에 담고자하는 이승만의 일념이다. 우리 교회지도자들이 주장하는 기독교 입국론이다. 건국전쟁의 영화가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총선을 앞둔 정치권에선 유·불리의 논쟁이 뜨겁다. 차치하고 건국전쟁 영화를 통해 이승만이 건국대통령 또는 국부(國父)라는 긍정과 부정의 국민시각이 갈려져있다. 다만 함께 모두가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중국 소련 등 주변 공산사회주의 국가들 속에서 자유민주 국가를 세웠다는 공적을 인정해야한다. 그리고 자본주의시장경제의 근간이 되는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에 버금가는 이승만의 국부론(國富論)을 만든 주인공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그 공적을 먼저 인정해야함을 주장하고 싶다.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2-20
  • [기고] 나는 정치 안 한다!
    “나는 정치 안 한다”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이 말 속에는 정치를 나쁘게 평가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치 목사’라는 말도 좋은 의미는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도 오늘날 목사와 장로들의 사리사욕과 그것을 위한 안하무인의 협착 행태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나는 정치 안 한다”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현실의 안타까운 모습들 때문에 “나는 정치 안 한다.”라고 해야 건전하게 목회하는 목사처럼 보입니다. 우리 헌법 제2부 관리표준을 보면 예배지침에 이어 교회정치가 나옵니다. 교회정치는 교회, 교인, 교회 직원, 목사, 장로, 집사 및 권사, 준직원과 임시직원, 교회 치리회, 당회, 노회, 총회, 교회 회의 및 소속기관, 선교 및 대외교류, 재산, 각종 고시, 헌법개정 등, 교회를 구성하는 전부를 총망라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만 살펴보아도 “나는 정지 안 한다”는 주장이 무엇을 뜻하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정치 안 하면 목회를 못 합니다. 정치 안 하면 교회를 바르게 세우지 못합니다. 인간의 교만한 속성상 바른 정치를 하다가 힘을 쥐게 되면 정치꾼으로 변질되는 안타까운 일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타락한 본질적 속성 때문에 교회를 바르게 세우는 정치를 안 한다고 하는 것은 불완전한 사람이기에 목사를 그만둔다는 것보다 못한 선택임을 자인하는 결과입니다. 홍해를 건너 해방된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은 시작되었습니다. 아무리 잘 봐 준다 해도 하나님의 심판이 확실한 상황에 모세는 자신의 목숨으로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심판을 막아보려고 합니다.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민11:14-15) “당신 새끼지 내 새끼요?”, “저 새끼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소!”, “그 전에 내부터 죽이소!”, 아들의 잘못에 대해 엄마로서 더 이상 방법이 없을 때 마지막으로 하는 모습이 쉽게 연상됩니다. 사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완전한 장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생들인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도록 기도하시면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시면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마음을 발견하기에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 백성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을 향해 정치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여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와 정치를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바른 정치는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이 자기 목숨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바른 정치는 완전한 장자이신 예수님을 따라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목숨을 희생하는 하늘의 장자들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를 불리기 위한 정치라는 발상 자체가 불신앙입니다. 하나님 역시 이스라엘을 심판하여 멸망시키는 것이 본심이 아니셨기에 모세의 희생적인 중심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보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노여움을 푸시고 모세를 축복하며 그의 짐을 들어주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노인 중에 네가 알기로 백성의 장로와 지도자가 될 만한 자 칠십 명을 모아 내게 데리고 와 회막에 이르러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라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영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담당하지 아니하리라”(민11:16-17) 70명의 지도자가 세워졌다고 해서 하나님의 통치 방법이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통치 방법은 동일합니다. 70명의 지도자를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수행하는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라고 세운 지도자들이 오히려 모세의 짐이 되어버렸습니다. “너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능력 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살펴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그들이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라 큰 일은 모두 네게 가져 갈 것이요 작은 일은 모두 그들이 스스로 재판할 것이니 그리하면 그들이 너와 함께 담당할 것인즉 일이 네게 쉬우리라”(출18:21-22) 모세의 일을 쉽게 하기 위하여, 모세가 감당해야 할 짐을 함께 지기 위하여 지도자들이 세워졌습니다. 교회 내에 조직이 생겼고, 시스템이 만들어졌습니다. 소위 정치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잊어서 안 되는 것이 이스라엘의 통치는 하나님의 손 하나에 달려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정치를 넘어 정치꾼이 되어버리니 하나님의 손을 자신들의 손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끊임없이 선악과에 손을 대고, 바벨탑을 쌓아 올렸습니다. 사람을 만드시면서 만물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셨는데,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정치꾼이 되어버렸습니다. 부부관계도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바른 정치가 있어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부부가 됩니다. 가족이나 구역, 기관, 교회, 당회는 언급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 한 분의 통치를 위한 바른 정치가 살아있어야 합니다. “정치한다, 안 한다.” 해도 사실 모든 목사는 정치하고 있습니다. 정치해야 하나님의 교회를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 정치를 안 한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깨끗한 척, 거룩한 척 외식하는 바리새인 화 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릅니다. 혹은 불신앙적인 책임회피의 말인지도 모릅니다. 반대로 이미 고도의 정치꾼이 되어있다는 뜻인지도 모릅니다. 보수 재건?? 신 보수?? 개혁에 몸담고 개혁에 표 던진 이들의 모임 2-3년 전에 신보수라는 말이 등장하더니 급기야 지난 연말을 시작으로 새해 벽두에 보수재건이라는 대단한 주장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자신의 입으로 뼛속까지 개혁이라고 주장하던 자들이 신보수를 만들어 보수를 재건하겠다고 하더니 이제는 보수와는 전혀 상관없이 평생을 소위 개혁으로 살던 사람들이 신보수의 등에 올라타고 고신을 위한 보수재건을 외치고 있습니다. 현재 고신이 개혁이라는 계파로 완전히 기울어 법도 필요 없는 상황까지 와 버렸으니 다시 보수를 일으켜 세워 한쪽으로 기울어진 교단을 바로 세우고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고 거룩한 희생의 명분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변을 확대해야 한다고 합니다. 상황에 따라 뼛속까지 개혁이 되기도 하고, 뼛속까지 보수가 되기도 하는 자를 중심으로 고신을 위하여 보수를 재건해야 한다고 합니다. 평생토록 개혁진영에 있던 사람들이 고신을 위한 보수가 되어야 한다고 기치를 내겁니다. 오늘날 내로남불의 세상 정치도 이 정도는 아닙니다. 이런 주장을 내세우며 저변확대를 위해 마치 대단한 희생이라도 하는 듯 들러리를 섭니다. 보수재건을 위하여 말입니다. 입각하지 못하면 사람이 모이지 않기에 입각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내세워 입각을 시키고 사람들을 불러모아 보수를 재건하자는 주장입니다. 천국에 계신 전임 신총회장님께서 탄식을 할 것 같습니다. 이러니 많은 목사의 입에서 “나는 정치 안 한다.”라는 탄식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뼛속까지 개혁인 사람, 한평생 개혁진영에서 일한 사람들, 보수진영에 있었지만 자신의 이익 추구에만 혈안이 되어 언제든지 변질을 일삼아 왔던 자들이 이제 고신의 균형발전을 위하여 보수를 재건해야 한다는 위대한 명분을 내세워 당당하게 주장하는 모습들이 정말 가관입니다.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입니다. 입각해서 사람들이 모이면 한 자리씩 주어 조직을 키우면 힘 있는 보수가 됩니까? 지금 교단을 지탱하는 힘이 매관매직에 있는 것 같은데 보수재건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꼴입니다. 그런 식으로 보수가 재건되지도 않겠지만 시작도 하기 전에 오히려 개혁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정치는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입니다. 오늘날 세상 정치의 타락은 교계 정치가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요, 결과입니다. 교단을 위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정치한다는 자들이 세상 정치하는 자들보다 하나님을 더 의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까지 망령되이 사용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나는 정치 안 한다.”라고 하면서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목숨을 걸어야 하는 책임을 회피하고 거룩한 외식에 만취되어 있습니다. 고신의 동지 여러분 위기라고 말만 하지 말고 제대로 합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마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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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6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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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9
  • [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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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8
  • [신재철 목사] 수요예배와 새벽기도
    수요예배와 새벽기도 교회를 개척하며 생긴 고민 중 하나가 예배와 모임이다. 한국교회는 모임으로 평가하자면 세계 최고가 아닐까 싶다. 질적인 부분의 평가는 패스. 다만 양적인 부분은 세계 어느 나라의 개신교도 따라가지 못할 것이라 확신한다. 「주일오전예배, 주일오후예배,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새벽기도회, 소그룹모임, 성경공부, 제자훈련, 다음 세대 부서예배 등」 이제 나도 젖어 있어서 익숙한 모임들이다. 이런 모임과 열정이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존경스럽고 위대하기까지 하다. 그럼 그 좋은 것, 나도 해야지 않을까? 그런데 그러다가는 내가 죽을 것 같았다. ‘죽을 것 같다.’ 힘들어서 나오는 관용적 표현이 아니라 진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회하다 죽으면 순교? 그런 무책임한 말을 내게 적용하고 싶지는 않다. 낮에 일하며 혼자 그 많은 모임을 준비하고 인도할 자신이 없었다. 누군가는 나의 이런 말에 손가락질하겠지만 나는 일을 하면서라도 목회해야 한다. 어떻게 받은 소명인데. “여러분, 저는 새벽기도 할 자신이 없습니다. 새벽기도 없는 교회가 싫으시다면 떠나셔도 괜찮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성도들에게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목사의 새벽기도 포기가 어떤 사람에게는 큰 충격이 될 수 있고 실망이 될 수도 있기에 큰 두려움이 되었다. 하지만 모든 성도는 나의 고단함에 수긍해 주었고 두려움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오히려 새벽기도 안 하는 불경건한 목사를 통해 누군가는 안도하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웃픈’ 상황이다. 전임 사역을 시작하며 쉬어본 적 없던 새벽기도를 개척하면서 쉬는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새벽기도도 안 하는 목사, 이래서 되겠는가?’ 한편의 불안함은 있다. 하지만 일단 이렇게 달려보자. “당분간 수요일 저녁에는 교리공부로 12주 모이겠습니다.” 개척 6개월이 지나 수요모임을 광고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기간이 정해져 있다. 가을에 12주만 모이겠다는 말이다. 새벽기도보다 더 큰 부담이 수요예배였다. 교회 모든 모임이 그렇듯,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 목회자만 참석하더라도 있는 모임을 없애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모임을 폐하는 아주 악한 자가 될 것이다. 수요예배를 시작하는 것, 성도들이 얼마나 함께할지, 우리 공동체에 어떤 유익이 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한시적, 학기제 수요모임을 준비하게 되었다. 봄, 가을. 다른 주제를 정해서 수요일 저녁에 만나기로 틀을 짰다. 「강단 위에 작은 원형 테이블을 두고 앉았다. 기타를 잡고 찬양을 2곡 부른다. 그리고 만들어 둔 교재를 열어 함께 주제별 성경을 공부한다. 기도로 마친다.」 이것이 전부다. 하지만 생각보다 참여율이 높았다. 우리 공동체가 신앙이 좋아서? 목사가 탁월한 강사라서? 안타깝게도 아니다. 기한이 정해져 있었기에 ‘한번 해볼까?’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는 두려움이 나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성도들도 견딜 힘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첫 가을학기를 마무리하며 책을 덮을 때, 우리에게는 두 마음이 들었다. ‘끝났다.’ ‘다음 학기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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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8
  • [황권철 목사] 세상의 빛 : 명곡교회
    명곡교회(이상영 목사)는 경남 창원시 의창구 원이대로 219번길 12에 있다. 명곡이란 명서동과 봉곡동을 연합한 지역 이름이다. 명곡교회는 1984년 2월 5일에 설립되었기에 올해 4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명곡교회는 1991년 1월 2일 지금의 예배당이 있는 곳에 건축하여 오기 전에 1987년 1월 24일 봉곡동 36-3 승창상가 3층에 있었다. 필자가 1991년 6월 30일 바로 그곳을 임대하여 할렐루야교회를 개척하여 설립예배를 드렸다. 그러고 보니 필자가 경남법통노회에서만 34년 목회를 한 셈인데 그때 명곡교회는 창원시찰 산하 교회들 중에 중간 레벨에 속할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독립군 같은 한 젊은이가 우리 시찰에 나타났다. 그가 바로 2004년 2월 8일에 위임을 받은 명곡교회 이상영 목사였다. 너무도 주관과 소신이 분명한 목회자였기에 당시로써 선배들과 어른들의 눈 밖에 나 있었던 특별한 친구였다. 그런데 이 목사는 교회를 사랑하고 지역을 품고 목회하는 비전이 남달랐다. 이제 와서 그가 사역한 목장의 열매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세간에 그를 보는 안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창원시찰과 노회와 지역사회를 대표하는 교회로 자리매김했다. 필자는 2023년 12월 30일 밀알교회 은퇴를 하면서 원로목사로 추대를 받았다. 이때 이 목사가 당회장을 맡아 너무도 은혜롭게 일을 처리해 주었고, 은퇴예식을 감동의 장으로 집례 해 주어 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은퇴를 하고 이제 고려파교회연구소 사역을 하며 지역교회를 돌아보기 위해 작은빛교회(성희찬 목사)에 이어 두 번째 순방으로 명곡교회를 찾았다. 목회자가 지역에 같이 있으면서도 자신의 교회를 섬겨야 하기 때문에 주변 교회를 잘 모른다. 그러므로 그 교회의 예배모범이나 그 지역의 맞춤형 목회전략을 보기 위해서는 온 회중이 함께 예배하는 주일예배를 보면 쉽게 진단을 할 수 있다. 필자는 오늘 명곡교회 11시 예배에 참석하여 받은 감동을 다음 몇 가지로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예배가 밝은 축제의 장이었다. 필자는 11시 예배에 맞추어 20여분 전에 교회 도착하니 주차장이 가득 차 있어 주변 주택가에 주차하고 교회당으로 갔다. 입구 로비로부터 2층 예배실로 안내 하는 위원들의 복장과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뭔가 처음 오는 새가족들에게 설레임과 기대감을 주기에 충분한 교회였다. 주보를 받아 보니 전면에 커피 잔 같이 생긴 호야 등 아래로 THE LIGHT(세상의 빛)란 금년 한 해를 시작하는 주제가 선명하게 각인되어 다가왔다. 마지막 폐이지를 보니 “명곡교회는 지역의 가로등입니다”타이틀에 걸맞게 예배에서 느낀 감동이 너무도 잘 맞는 조화(concept)였다. 다음, ‘리셋 버튼 누르기’의 설교 제목이다. THE LIGHT(세상의 빛)이란 주제에 걸맞게 새해를 시작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는 역동성이 너무도 돋보인다. 이 목사는 주보에 요약(summary)한 설교 본문을 보면 첫째, 하나님께 새로운 다름의 첫 출발의 간구이다. 이를 위해 새로운 품격, 성품, 새사람으로 덧입기를 간구하라고 했다. 둘째, 지금 당장 실천 가능한 것부터 구체적으로 고백하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이라면 리셋 버튼이 필요 없는 완전한 사람은 없다고 했다. 셋째, 새 출발을 위해 곁에서 세워 줄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하라. 새로운 다름의 새 출발이란 결코 나 홀로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 넷째, 내게 유익하지 못한 나쁜 습관을 제거하라. 새로운 다름의 가장 큰 방해물은 건강하지 못한 중독된 습관이라고 했다. 이 목사는 새해를 시작하는 신년 백두에 이 같은 설교를 시리즈로 계속해서 변화를 통해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닮아가는 새 사람을 입어 새로운 다름의 세계로 나아가는 변화를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고 설득력 있게 설교했다. 마지막, 이 목사는 언어 구사능력이 탁월한 리더이다. 그의 남다른 탁월함이란 언어구사능력이다. 이것은 리더의 자질이다. 리더는 대중의 신비에 각인될 한 마디로 표현하는 기술을 가진 자이다. 이런 면에서 이 목사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용어를 조금 다르게 표현해 청중들의 귀에 전혀 새로운 단어로 각인될 뿐 아니라 그것을 거듭 반복하는데도 늘 새로운 신선함을 더해 주는 언어창조능력을 가진 자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면서 말씀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영육이 혼재된 특별한 피조물이다. 인간은 언어로 하나님과 피조세계와 소통하며 살아간다. 그러므로 이 같은 언어를 잘 사용하는 리더가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리더요 목양자이다. 에필로그로 아우는 역시 탁월한 목회전략을 가진 자이다. 예배는 엄숙하고 경건하면서도 거룩한 축제의 장이다. 안내, 찬양, 기도, 설교, 방송자막, 손님배려, 그리고 마침인사와 식탁의 섬김 모든 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래 전에 읽은 존 웨슬리(John Wesley)가 한 말이 기억난다.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가능한 모든 방법을 사용하여, 가능한 모든 장소에서, 가능한 모든 시간에, 가능한 모든 사람에게, 그것이 가능할 때까지,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선한 일을 하라.”마지막 축도를 하고 나서 김수중 장로의 안내를 받아 식사를 하고 커피 한잔을 들고 명곡교회를 축복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2024년 1월 14일 11시예배 순방 고려파교회연구소장 교육학박사 황권철 목사(밀알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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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8
  • [최호숙 목사] 신앙인의 삶과 징크스(Jinx)
    원래 징크스(Jinx)란 사전적 의미는“으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악운(惡運)으로 여겨지는 것” 또는 “불길한 대상이 되는 사물 또는 현상”을 말한다. 심리학적으로 징크스는 자신이 우연히 한 행동이 나쁜 결과를 가져왔을 때 그걸 단순한 우연이나 미신이라고 여기지 않고 어떤 강한 인과 관계가 있는 것처럼 여기며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이 징크스(Jinx)의 어원은 일반적으로 딱따구리의 일종인 “개미잡이” 라는 새에서 찾는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 새를 점을 치는데 사용했는데 머리의 생김도 그렇고 움직이는 것도 뱀과 같다고 불길한 새로 취급했다. 바로 이 새의 그리스어 이름이 junx 이다. 라틴어로는 jynx 이며, 여기에서 유래한 말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순조롭게 일들이 잘 풀릴 때가 있는가 하면 잘 풀리지 않고 꼬일 때가 있다. 그러면 사람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습관적으로 징크스에 빠지게 된다. 위의 예처럼 “ ~ 하기만 하면 이렇게 좋지 않다”는 식이다. 징크스는 미신이라는 뉘앙스가 담긴 단어이므로 “밥을 안 먹으면 배가 고파진다”처럼 객관적으로 인과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은 징크스라고 볼 수 없다. 예컨대 “밥을 안 먹고 경기를 관람하면 내가 응원하는 팀이 지더라”라는 식의 주관적인 느낌이 징크스의 예시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징크스 중 하나로 “미역국을 먹으면 떨어진다”는 징크스가 있으며, 어떤 운동선수는 목욕하고 시합을 하면 반드시 패한다는 징크스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시합 전에는 절대 목욕을 하지 않는다. 또 어떤 사람은 아침에 맹인을 만나면 일이 꼬이는 징크스를 가지고 있다. 어떤 택시 운전기사는 첫 손님으로 안경을 낀 사람을 태우면 하루 종일 재수가 없다는 징크스를 가지고 있고, 어떤 학생은 시험 전날에 손톱을 깎으면 시험을 망친다는 징크스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축구 감독은 반드시 흰색 유니폼을 입지 않으면 패한다는 징크스를 가지고 있어 흰색 유니폼을 고집한다. 아침 첫 손님이 여자가 오면 매상이 오르지 않는 징크스를 가지고 있어 여성 손님이 오면 그 손님을 기피하는 현상도 있다. 연예인들 중 아이유는 노래 제목애 대한 징크스를 가지고 있는데 노래 제목은 반드시 세 글자로 지어야 히트(hit) 친다는 징크스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히트 친 노래 제목들이 “잔소리, 좋은 날, 너랑 나, 밤 편지, 라일락...” 모두 세 글자로 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4자(字)가 죽음을 연상시킨다 하여 병실 번호 등에서 제외하고 있다. 아침부터 까마귀가 울거나 검은 고양이가 앞을 지나가면 불길하다고 생각한다. 일반인들이야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우리 기독교인들 중에도 징크스를 말하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목회자들 가운데서도 징크스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징크스에 눌려 있다면 그것은 불신앙이다. 예수님께서 씀하시기를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이사야 선지자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41:10)”고 교훈 하였다. 우리는 징크스에 빠질 것이 아니라 주님을 신뢰함으로 의심과 두려움을 버리고 주님 안에 굳게 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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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8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0 : 설날과 세시풍속 용어들 I
    I. 서언(序言) ‘내 마음 속에는 닫힌 문짝을 열고자 하는 손과 열린 문짝을 닫고자 하는 손이 함께 살았다.’ 안수환의 ‘문’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어줍은 지식이지만 올바른 용어 사용을 가로막는 닫힌 문짝을 열고, 잘못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을 닫아보고자 하는 열망, 그래서 시작된 기고를 10년이 넘도록 해오면서 많은 용어들을 논해왔다. 그중에서 약 1여년 전에는 29회까지 우리가 흔히 쓰는 교회 용어들에서 바로 사용하거나 주의해야 될 말들을 논해왔다. 하지만 심각하게 오남용되는 경어에 대한 바른 표현의 필요성 때문에 약 1여년 동안 논해왔다. 이제 지난호의 예고 대로 다시 올바른 교회용어에 대해서 논하고자 했으나 곧 설날이 다가오는 관계로 언젠가 기고한 바 있는 설날과 세시풍속의 용어들에 대해서 2~3회 정도 논해보고자 한다. II. 설날의 어원과 유래 설날을 전후한 세시풍속으로 행해지는 일들과 이에 대한 용어들에 대해서 우리 기독교적인 입장에서는 어떻게 볼 것인가를 논하고자 한다. 1. 설날의 어원: 설날의 사전적인 뜻은 ‘새해의 첫날’이다. 또 음력 정월 초하룻날이기 때문에 원단(元旦), 세수(歲首), 정초(正初)라고 하기도 한다. 또한 ‘사린다. 사간다’에서 온 말로 ‘조심하다’는 뜻도 있다. 또 이 말은 ‘섧다. 슬프다’란 말에서 왔다고도 한다. 이러한 뜻은 다소 의외로 보이지만, 이는 설이란 그저 기쁜 날로 들뜨기보다는 한 해의 첫날부터 모든 일에 조심하며 신중하게 첫발을 내딛는 것이 좋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설날을 ‘삼가고 조심하는 날’이란 의미에서 신일(愼日)이라고도 한다. 이런 뜻으로 볼 때 설날이란 말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사용해도 전혀 문제가 없는 용어이다. 2, 설날의 유래: 설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아직은 분명하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이 달의 주기를 가지고 만든 태음력(太陰曆)과 이집트인들이 지구가 태양을 회전하는 주기로 만든 태양력(太陽曆)을 사용하면서부터 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왜냐하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해의 시작 일을 중요시 여기며 기념하는 것은 거의 동일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설날을 지키는 직접적인 영향은 중국의 춘절(春節)일 것으로 본다 그 이유는 춘절은 우리의 설날과 거의 비슷한 형태로 지켜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설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7세기경 중국의 역사서에 ‘신라에서 지켜진 설날에 대한 기록’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고, 삼국사기에는 백제 고이왕(A.D 238년) 정월에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을 현대의 설날로 볼 수는 없으나 새해를 맞이하여 지냈던 제사라고 볼 때 비슷한 경우로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볼 때 설은 아주 옛날부터 이어져 온 민족의 명절인 것을 알 수 있다. 근래에 와서는 처음에는 양력의 1월 1일과 구분하여 민속의 날이라고 했으나, 1989년부터 본래 이름인 설날로 다시 불리어 졌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3. 설날에 행해지는 각종 세시풍속들과 용어들: 차례(茶禮), 복조리 달기, 한 해 운수를 점치는 토정비결(土亭秘訣), 청참(聽讖), 설빔, 세찬(歲饌), 세주(歲酒), 세화(歲畵), 음복(飮福), 덕담, 새해 성묘 등 많은 세시풍속들과 용어들이 있다. 이 중에는 사회적인 아름다운 미풍양속으로 충분히 계승하고 장려할 일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이 설날을 전후하여 행해지는 세시풍 속에는 성도들이 그대로 행하기에는 많은 문제점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세시풍속은 차례의식이다. 차례는 원래 하늘에 천신(天神)혹은 상제(上帝)가 있음을 믿고 제사를 지낸 천신제였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와서 유교의 영향으로 천신제에서 죽은 조상(자신으로부터 4대위 조상까지) 제사로 바뀌었다. 이것은 같은 문화 영향권 아래 있는 중국과 일본에도 없는 극히 한국적인 제사 형식이다. 또한 차례라는 말의 어원은 원래 다례(茶禮)였다. 이는 원래 제사상에 술이 아닌 차를 올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례 혹은 차례라고 하는 것이다. III. 기독교인 입장에서의 설에 대한 입장과 결론 설은 새 출발을 뜻하는 날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좋은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또한 부모와 어른들을 섬기는 세배나 서로 덕담을 나누는 풍습은 교회 속에서도 더 계승 발전시켜 야 할 좋은 덕목이다. 하지만 이것이 조상숭배와 미신적인 행위로 바뀌어 진 불신자의 세시풍 속은 결코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교회도 이제 선교 140년의 역사 속 에서 설날을 아름다운 기독교문화로 바꿀 필요가 있다. 그래서 명절이 제사 문제로 짝 믿음 가진 성도들에게 더 이상의 부담을 주는 날이 아닌, 온전히 하나님께 감사하고 온 가족과 일 가친척들 간의 아름다운 화목의 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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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8
  • [김성수 총장] 어린이세계관 교육의 중요성
    “세 살 버릇 여든 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다. 어릴적 습관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세계관 형성과 신앙 교육에 있어서 어린 시절은 매우 중요하다. 바울도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우리의 구원과 영적 성장에 있어 인생 초기의 중요성을 언급하고있다. “또 어려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느니라”(딤후 3:15). 시편 기자역시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나이다”(시 71:17)라고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아이들이 성경의 깊은 진리를 다루고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바 하나님의 뜻과 교훈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는 이들이 성숙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잘못 생각해서는 안 된다. 청소년 교육 전문가인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James Montgomery Boice)는 청소년기의 습관이 성인기의 습관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올바로 인식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청소년기의 결정은 그 시점부터 우리를 인도하고또한 끊기 어려운 습관을 형성한다. 우리가 젊었을 때 좋은 습관, 즉 성경 읽기, 기도하는 시간 갖기, 하나님의 백성과의 교제 즐기기, 교회 출석과 예배, 정직하고 선한 일을 실천하는 등의 좋은 습관을 갖게 된다면 이러한 습관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나중에 인생에서 좋은 선택을 더 쉽게 할 수 있도록 해 준다. 반대로 나쁜 선택을 하는 습성을 갖게 되면 그것이 비록 작은 습관이라고 할지라도 나중에 좋은 선택을 하기가 더 어려워지고, 나쁜 습관을 깨뜨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 우리에게 아주 잘 알려져 있는 영국의 라일(J. C. Ryle)목사는아주 오래 전 1800년대에 이미 모든 부모와 조부모가 주의해야 할 강력한 경고를 한 바 있다. “젊은이들이 어떤 사람이 될지는 아마도 현재 그들이 어떤지에 달려 있는데 그들은 이것을 잊고 있는 것 같다. 청소년기는 장년의 씨앗을 심는 시기이고, 인간 삶이 형성되는 작은 공간이며, 인간 정신의 역사에서 전환점이 되는 시기다. 돋아나는 싹을 보면 자라나는 나무의 종류를 알 수 있고, 꽃을 보면 열매의 종류를 알 수 있고, 봄을 보면 다가올 추수기를 알 수 있고, 아침을 보면 장래의 날을 알 수 있고, 청년의 상태에 따라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가 자라서 어떤 사람이 될지 판단할 수 있다.” 라일 목사는 계속해서 어린 시절의 교육과 품성,가치관의 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한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 사람의 마음은 어릴 때 변하지 않으면 거의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실제로 나이가 많이 들어서 신앙을 갖거나 개종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습관은 그 뿌리가 아주 깊다. 일단 죄가 우리의 마음에 정착하도록 허용하게 되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의지나 명령대로 잘 해결되지 않는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 되며, 그 사슬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선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구스인이 그의 피부를,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는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예레미야 13:23). 습관은 언덕 아래로 굴러 내려가는 돌과 같다. 더 멀리 굴러갈수록 그 경로는 더욱 빠르고 통제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나무와 마찬가지로 습관도 나이가 들면서 강화되고 고착된다. 어린아이가 참나무를 구부릴 수 있지만, 그것이 다 자란 나무가 되면 백 명의 성인 남자라도 그것을 뽑을 수 없다. 습관도 마찬가지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더욱 더 강해지고 고착된다. 소유한 기간이 길어질수록,그리고 그 습관에 익숙해지고 편안함을 느끼면 느낄 수록 쫓아내기가 더 어려워진다. 그것들은 우리의 성장과 함께 성장하고, 우리의 힘으로 강화된다. 새로운 죄의 모든 행위는 두려움과 후회를 줄이고, 우리 마음을 완고하게 하며, 우리의 양심을 무디게 하고악한 성향을 증가시킨다. 연구 결과를 보면 성경적인 세계관을 구비시켜주는 사역은가능하면 어린 시절에 시작하고 기초를 놓아주어야 할 중요성이 더욱 시급함을 알 수 있다. 미국의 “전국복음주의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NAE)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그들 중 63%가 4세에서 14세 사이에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34%가 15세에서 29세 사이에 기독교인이 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연구는 NAE 회원의 97%가 30세 이전에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모두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을 신앙으로 교육하는데 더욱 더 많은 관심을 갖고 기도하며 실천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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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8
  • [조희완 목사] 의지할 이유 (사26:1-7)
    한자 중에 사람 인(人)자를 보면 똑 같은 두 획이 서로 의지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것은 곧 “사람은 서로 돕고 의지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반드시 인간관계를 맺어야 하고, 그 인간관계 속에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서로 의지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홀로 독처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않다고 했습니다. 서로 좋은 관계를 맺고 서로를 의지하고 살 때 삶의 가치가 더 높아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참 히얀 한 것은, 그렇게 관계를 맺고 서로 의지하고 살아야하는 것이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누가 나를 의지할 때 부담스러워 하고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마음씨가 넓은 사람이라도 누가 나를 지나치게 의지할 때 싫어합니다. 싫어한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계속 의지를 하면 틀림없이 눈 밖에 드러나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남을 의지하는 사람은 어디를 가더라도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의지하면 할수록 부담스러워 하고 싫어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사람과는 정 반대로 하나님은 우리가 전심으로 의지하면 할수록 사랑해 주시고 도와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사람은 의지하면 할수록 부작용을 낳고 상처를 받지만 하나님은 의지하면 할수록 사랑을 받고 도움을 받고 축복을 받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 중에 한 가지입니다. 인간은 인간을 차별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누구든지 다 받아주시고, 언제든지 환영해 주시고, 아무리 의지를 해도 싫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에 보면 “여호와를 의지하라”는 말씀이 수없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의지하는 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까요? 첫째는, 우리의 구원을 보장해 주시기 때문입니다.(1) 둘째는 우리의 평강을 보장해 주시기 때문입니다.(3) 셋째는, 우리의 인생을 보장해 주시기 때문입니다.(4) 불안정한 세상에서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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