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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8) - 묘서동처(猫鼠同處)
동상이 시작되면 추위로 인해 혈관이 좁아져 냉동된 부위 자체보다 그 인접 조직이 혈류 감소로 인한 손상을 입는다고 합니다. 동상은 추위로 인해 혈관이 좁아지기 때문에 냉동된 부위 자체가 아니라 그 인접 조직이 혈류 감소로 인해 손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추위로 인해 이러한 조직의 소 혈관에서 혈전이 형성될 수도 있습니다. 이 혈전은 혈액의 흐름을 심하게 제한하여 조직이 괴사하게 됩니다. 결국, 괴사한 조직 때문에 회복 불가능한 신체 부위는 절단해야 합니다. 구습에 젖어서 ‘동상’에 걸린 고려학원의 썩은 부분은 과감히 절단하고 제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무사안일주의에 빠져서 이대로 간다면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저는 컨설팅 전문가도 아니고 돈의 흐름도 읽을 줄 모르는 목회자입니다. 단순히 총회 산하의 기관이 “내 것이라면 어떻게 할까?” 하는 정도의 수준으로 대안을 제시해 보겠습니다. 안목이 깊으신 분들께서 좋은 안을 창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고신대학교 현재 부산의 초중고의 실정은 점점 폐교의 수준입니다. 부산의 23개 대학은 7개 대학으로 구조조정이 됩니다. 게다가 부산 근교의 양산이나 정관 쪽에 산단 이 생겨 일자리를 따라 부산 인구가 이동하고 있고, 그 주변의 학교들은 포화상태입니다. 초,중,고 가 이런 상황이라고 한다면 학력 인구 감소로 대학은 갈수록 어려운 상황이 될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 고신은 천안에 캠퍼스가 있습니다. 서울의 학생들은 천안까지 통학이 가능합니다. 인기 학과를 신설하여 천안으로 옮기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고신이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신학 과와 의과는 송도 복음병원을 중심해서 확충 조정하고, 중부권 이상 신학교육은 천안에서 운용하면 충분합니다. 가능하면 부, 울, 경, 호남을 중심한 신학과도 역세권으로 학사를 이전하는 것이 미래를 준비하는 필수 조건입니다. 고려신학대학원 이런 경우, 현재 신대 원 자리는 역시 좋지 않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매각하여 역세권으로 이전해야 합니다. 총회 전체적으로 볼 때 천안, 아산 역에서 도보로 갈 수 있는 거리가 좋습니다. 이렇게 될 때 자연스럽게 대학과 대학의 행정 체계가 통일될 수 있습니다. 그동안 문제가 되어 왔던 대학과 신대원의 교류도 조율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목회자 후보 양성 목사를 세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소명입니다. 그런데도 현재 시스템은 소명과 별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35개 노회에서 유치원생부터 목회자, 사모, 선교사 후보를 선별하여 노회와 교회가 함께 기도하고 후원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과로 진학할 때 7년 과정을 교회와 노회가 100% 장학금으로 후원을 하고 사관학교와 같이 엄격하게 교육해야 합니다. 35개 노회에서 각각 3명만 책임지면 100명의 준비된 소명감 있는 재원들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고신대학교 매각 과감한 구조조정을 하려면 약 150억 정도의 자금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저는 200억 정도의 자금이 필요할 것으로 봅니다. 한평생 학교를 위하여 수고하신 분들을 섭섭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교수와 직원들은 현재의 어려움을 다 인지하고 있습니다. 교단에서 최선을 다해 대우를 해 준다면 고신의 식구들로서 충분히 이해하리라고 생각됩니다. 복음병원의 부실 경영의 원인은 악성 카드깡입니다. 600억 정도가 되는 약품 대금을 일시에 해결해 준다면 복음병원의 발목을 잡고 있는 노조의 횡포도 차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학교가 어려울 때 병원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고, 총회 산하의 기관이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재원은 현 고신대를 매각하여 운용할 수 있습니다. 총회 회관과 산하 전 기관을 한 곳으로 고신대를 매각하여 남은 금액과 현 고려신학대학원을 매각한 금액으로 천안아산역에 부지를 구입하여 새로운 캠퍼스를 건축해야 합니다. 방만한 운영으로는 안 됩니다. 가장 검소하게, 가장 운영비가 적게 드는 구조로, 총회 산하의 모든 기관을 다 수용할 수 있는 그림으로 건축해야 합니다. 총회 산하는 모든 기관과 상임위가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회의실과 간결한 소통망을 구축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당면한 위기에 대한 대안이지만 이런 변화의 핵심에는 반드시 교회 중심이 모든 것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와 총회의 품속에서 우리의 미래가 교육을 받는 그림입니다. 단순히 책에 의존한 교육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교육, 관계와 만남의 교육 현장이 될 것입니다 (창 41:53-54) 【애굽 땅에 일곱 해 풍년이 그치고 요셉의 말과 같이 일곱 해 흉년이 들기 시작하매 각국에는 기근이 있으나 애굽 온 땅에는 먹을 것이 있더니】 우리는 이제 요셉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아직 골든타임이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골든타임의 끝자락의 위기가 기회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지금부터 7년을 준비해야 고신의 미래는 밝아질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안일하게 눈앞의 명예와 이익만 탐한다면 고신에도 ‘기근’이 찾아올 것입니다. 학교, 병원, 교회가 도미노처럼 무너지지 않으려면 지금의 총회 구조와 운영을 멈추고 재정비해야만 합니다. 이전처럼 해서는 미래가 없습니다. '묘서동처'(猫鼠同處)란 말이 있습니다. 쥐를 잡아야 할 고양이가 쥐와 한패가 됐다는 뜻입니다. 중국 후진 때 당나라 역사를 서술한 <구당서(舊唐書)>와 북송 때 이것을 수정한 <신당서(新唐書)>에 “고양이와 쥐가 같은 젖을 빤다”라는 ‘묘서동유’(猫鼠同乳)라는 말과 함께 나옵니다. 보통 쥐는 굴을 파고 들어와 곡식을 훔쳐 먹고, 고양이는 쥐를 잡습니다. 이렇게 사이가 원수이면서도 위아래 벼슬아치들이 부정 결탁하여 나쁜 짓을 함께 저지르는 것을 지적한 말입니다. 한 군인이 고양이와 쥐가 같은 젖을 빨고 서로 싸우지 않는 모습을 목격하고는, 그 고양이와 쥐를 임금에게 잡아다 바치자 관료들이 복이 들어올 것이라며 기뻐했으나 단 한 관료만이 “이것들이 미쳤다”라고 한탄했다는 역사 기록에서 유래됐습니다. 총회 지도자들이 교권과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내 때만 망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묘서동처'(猫鼠同處)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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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7) (민12:1-3, 신22:12, 창4:7)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여 선지자로서 사명을 감당했던 미리암이 40년 만에 돌아온 진짜 선지자 모세의 등장으로 적지 않는 갈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미리암은 40년이라는 선지자의 세월을 살면서 자기도 모르게 선지자라는 직분과 그것에 따르는 사명이 하나님께서 주신 부여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유가 되어버렸습니다. 오늘 목사로, 장로로, 성도로 거룩한 직분과 사명을 받은 우리는 이 장면을 결코 잊어선 안 됩니다. 받은 사명 다할 때까지, 죽을 때까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망각하면 우리의 결말도 교회의 역사에서 원망의 아이콘 미리암으로 남게 됩니다. (신24:9)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리암에게 행하신 일을 기억할지니라 40년이라는 세월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예수 믿은 지 40년이 된 성도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가운데서는 우리 교회 나온 지 40년 된 성도도 있을 것입니다. 40이 불혹이라는 것은 그 정도 세월이 흘렀으면 이제 안 변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40년이라는 세월도 대단하고 크지만, 영적으로 주는 의미는 더 중요합니다. 그냥 성경 속에서 40이라는 수를 생각만 해도 쉽게 그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겉옷규례를 명하셨습니다. (신22:12)너희는 너희가 입는 겉옷의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 겉옷 규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출을 할 때 입는 옷에 대한 규례입니다. 그 옷을 입고 있으면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옷을 입고 있는 자신도, 그 옷을 보는 다른 사람도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게 하는 용도입니다. 이 장면은 성도의 목적, 교회의 목적과 그 맥을 같이 합니다. 소교리문답 제1문에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교회는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아니,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냥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만유의 주인이시오, 창조주이십니다. 그런데 피조물이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나타낸다고 하면 그것 자체가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권이요, 축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창1:1:27-28)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똑같은 피조물인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땅 위의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반대로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나타내지 못할 때 가장 추하고 더러운 존재가 됩니다. (마5: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세상 사람들이야 이 사실을 모르니 당연히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자신을 바베탑으로, 금송아지로, 금신상으로 높이 쌓아 올리고 화려하게 금칠을 해야 위대하고 존귀한 줄 압니다. 그런데 성도는 사람의 창조목적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가장 사람답고, 가장 존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명하신 겉옷규례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상실한 우리에게 다시 하나님의 모습을 복구시켜 주시는 은혜요 축복입니다. 단순히 어떤 옷을 입으라고 하는 정도의 명령이 아니라 겉옷 하나에도 우리를 향하신 삼위 하나님의 구원이 담겨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와 성도들은 규례, 명령이라는 단어에 국한되어 마치 옷도 내 맘대로 못 입게 하느냐는 식의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통탄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오해하는 기가 찬 노릇입니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가장 교회답고 존귀합니다. 성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가장 성도답고 존귀합니다. 성도는 교회라는 옷을 입을 때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성도는 주일이라는 옷을 입을 때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성도는 예배라는 옷을 입을 때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얻은 성도들이 주일에 교회로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은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최고로 존귀한 모습이요, 장엄한 현장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위하여 부여받은 직분을 자기의 것으로 착각하는 순간 미리암의 전철을 밟게 됨을 한시도 잊어선 안 됩니다. 미리암은 완전한 선지자 모세가 오기까지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사명을 위해 준비하기 위하여 세움받은 여선지자였습니다. 여선지자로서의 미리암은 모세가 오기까지였습니다. 그런데 미리암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직분과 사명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고, 그 순간 자신은 바벨탑이 되어버렸고, 금송아지가 되어버렸고, 두라 평지에 세워진 금신상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미리암의 말을 듣고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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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공산주의와 공동체주의
요즘 한국 정치사회 세태를 보면 한번쯤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의 정치사회이념을 공부해볼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앞에 놓여있는 정치사회발전의 모습들이 적이 걱정과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국가사회구조를 갖고 있다. 우리의 헌법이 명시하고 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76년을 넘기는 정치의 부침 속에 국가는 존재하고 발전하고 있다. 바로 대한민국의 존재성이다. 지금 한국정치발전의 흐름은 날로 혼돈해지며 국가정체성을 혼란케 하는 갈등이 크다는게 문제이다. 오늘날 정치사회이념의 화두이기도하다. 좌파 우파의 혼돈 속에서 대한민국을 사회주의 정치사회시스템으로 바꾸자는 무서운 주장이 세력화하고 있다. 우선 우리가 공부해봐야 할 아젠다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이념을 정확히 알아야한다. 필자는 정치학의 전공자가 아니다. 피부로 듣고 책을 읽고 극히 상식적인데서 의견을 나누고 싶은 욕구가 있다. 정치이념의 경쟁적 현장은 18세기 유럽 독일 영국 프랑스가 중심이다. 18세기 초 유럽은 봉건주의 사회였지만 영국의 산업혁명과 함께 서서히 정치이념의 장이 생겨났다. 영국의 스코틀랜드출신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이 영국의 산업혁명과 함께 자유민주의 시장경제의 근간이 된다. 산업혁명은 전 유럽으로 확대되고 여기에 자본가의 등장, 규모의 경제 즉 공장기업 경제가 발전한다. 영국 프랑스 등 시민혁명에서 발호된 공화정의 자유민주주의가 자본경제와 함께 시장경제 자유민주주의의 발전과정이다. 자본주의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노동의 착취행태가 새롭게 대두된다. 이에 독일출신 정치철학자 칼 마르크스가 1800년 초에 급변하는 자본주의 경제발전에서 나타나는 노동문제를 보고 고민에 빠진다. 오늘날 정치사회 이념의 갈등에 중심이 되는 사회주의 이념의 태동이다. 사회주의는 처음부터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모순에서 나타나는 이상적 이념으로 각광을 받는다. 마르크스는 생산결과물을 막대하게 분배하는 바탕에서 사회주의이념을 아주 과학적 정치이념이라고 명시했다. 공동체의 개념이자 협동적 조직모델이 바로 사회주의 바탕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이상적 이론적 이념으로서만 머물 수 밖에 없었다. 마르크스와 동시대 엥겔스의 사회주의 이념에 힘입어 나타난 유럽에서 서서히 노동자혁명의 기운이 일어났다. 러시아에 본격적 노동자 운동과 함께 프롤레타리아 혁명투쟁이 불을 붙인다. 러시아 사회주의 볼세비키 혁명이다. 사회주의 투쟁적 혁명의 공산주의가 생겨나는 계기이다. 독재사회주의가 곧바로 공산주의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공산주의 독재국가로 자리매김한 러시아 중국 북한의 정치행태를 낳게 된 배경이다. 이러한 사회주의 이상적 이론이 현장에서 나쁜 공산주의로 발전하게 된 배경설명을 성경의 공동체주의의 뿌리로 견강부회하는 주장이 있다. 사도행전 2장45절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로 되어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성령이 임하고 각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이웃사랑의 엑기스인 함께 나누며 공동체 삶의 모본을 보였다. 초대교회 믿는 자들의 교회공동체의 모델이다. 여기에는 하나님 중심의 엄격하고 경외로운 은혜의 삶이 전제되어야한다. 오늘날 교회 또한 공동체운영이 물질의 나눔으로 근간을 이루게 된다. 소련의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중국의 공산주의가 변화하는 잠깐시대를 지나 새로운 공산주의 정치행태가 우리 주변에서 발전하고 있다. 우리가 정신 차리지 않으면 복음의 바탕에서 발전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뿌리가 흔들릴 수 있다는 공포가 밀려들고 있다. 교회 공동체를 참칭하고 농락할 수 있는 공산주의를 경계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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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어머니
어머니가 천국 가신지가 벌써 몇 년이 흘렀다. 95세 연세로 끈질긴 민들레처럼 사시다가 소천하셨기에 문득문득 어머니가 고생한 가슴 아픈 옛날 모습들이 떠올라 어떤 때는 늦게까지 잠 못 이룰 때가 있다. 어릴 때는 먹을 것이 없어 어둑한 저녁까지 어머니만 오시기만을 무조건 기다렸다. 맛있는 것도 아니고 배만 채울 수 있는 것만 가져오셔도 좋은데 그렇지 않을지라도 캄캄한 밤 긴 기다림 속에서 어머니만 오시면 대만족이었다. 가방도 아닌 함티 속에서 눈깔사탕 하나만 주셔도 좋아서 춤추던 때가 생각난다. 6.25 전쟁 때도 비행기가 날아오니까 아버지는 짐보따리 안고 논두렁으로 피했지만 어머니는 자식을 안고 방패막이 되어주었다는 얘기를 가끔 듣는다. 시골 마을에 닭장에 불이 났는데 진압된 뒤에 들어가 보았더니 암탉이 병아리를 품은 채 새까맣게 타 죽었지만 병아리는 모두 살아 있었다는 실화가 전해지는 것만 보아도 동물의 모성애는 대단하다. 위대한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암탉의 그것에 감히 견주어 비교할 수 있으랴. 당신은 배고파도 잡수지도 않고 자식들 먹일 것이라고 잔칫집에서 떡 하나를 때 묻은 손수건에 싸 가지고 와 나눠 맛있게 먹었다는 감동적인 글도 보았다. 오늘날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때에는 정말 그 떡 한 조각이 귀했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다 품어주시고 모든 것을 다 주고도 기억하시지 않는 정말 좋으신 분이다. 어릴 때는 없어서는 안 되는 디딤돌과 같은 존재로 기다림의 연속이었지만 가정을 가지고 자식이 생겨나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내 생활에 걸림돌과 같은 존재로 여기며 산 것이다. 어머니는 영원한 나의 안식처로 자식 바라보고 기다리는 고향 같은 분이었지만 언젠가부터 고인돌같이 예사롭게 여기며 살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사는 땅 위에서 생명이 길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세상에서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셨던 분이 어머니이셨는데 진정 그걸 모르고 살면 배은망덕한 사람이 따로 없다. 여자가 어릴 때는 아버지를 기다리고 결혼해선 외출한 자식을 기다린다고 했다. 어머니의 기다리는 마음은 사랑이고 특히 자식을 기다리는 상대로 여기며 사는 것을 행복이라 여기셨다. 그런 어머니를 병들었다고 시장 바닥에 내버려 경찰이 양로원에 입원시켰다는 뉴스가 우리를 분노케 한다. 놀라운 것은 그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과 사는 곳을 절대 모른다고 입을 닫는다. 자식은 어머니를 버려도 어머니는 절대 자식을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머니! 옛날에는 기다림이었고 지금은 그리움에 사무치는 분이다. 그 어머니는 모든 사람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고향 같은 존재다. 모든 것을 품어주시고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주고도 보답을 바라지 않는 분이 바로 어머님임을 기억하자. 누구든 천국 가신 어머니가 새삼 그리운 것은 평소 효도를 다 하지 못한 잘못이 자꾸만 부끄럽다는 마음이 더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릴 때나 성인이 된 후에도 일평생을 나보다 나를 더 사랑했던 그분이 바로 그리운 어머니였었는데 그걸 늦게 깨달았으니 지나온 우리의 삶이 한심하여 후회가 막심할 뿐이다. 어머님이 천국에 가시기 전 이 땅에 살아계실 때 시간 내어 찾아뵙고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 참 효도임을 꼭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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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7)- 관언유착(官言癒着)
언론이 독자들이나 대중들에게 주는 영향이 크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사실이 아닌 잘못된 기사나 중심을 잃은 기사는 많은 사람에게 혼란을 줍니다.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몇 해 전 우리 노회에서 모 목사를 순회 선교사로 파송한다고 기독교보에 기사가 올랐습니다. KPM 이사장과 담당자들이 파송 예배에 순서를 맡으며 파송 예배 사진까지 첨부하여 누가 봐도 총회에서, KPM에서 파송하는 선교사처럼 대문짝만하게 기사를 올렸습니다. 노회 파송 선교사도 아닌데 과장된 허위 기사를 올릴 수 있느냐고 기독교보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몇 주 후 신문 구석 어느 페이지에 짧은 한 줄로 000교회 순회 파송 선교사로 정정한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습니다. 그 기사를 본 대부분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은 KPM 파송 선교사로 알고 있습니다. 짤막한 정정 기사가 났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도 “부산서부노회 파송 선교사냐?”고 물어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선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KPM이나 노회에서 파송한 선교사처럼 위장을 하고 그것을 교단 신문인 기독교보에까지 기사화한 것은 그 저의를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디 이 한 건뿐이겠습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이 발생하여 총대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거짓된 걸음을 걷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 심히 우려됩니다. 기독교보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할 것입니다. 기독교보가 KPM 선교사로 파송하는 기본도 모른다는 것은 몰랐다고 하는 말 자체가 거짓말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의 파장도 결코 간과할 수 없지만, 신앙과 교리, 교회와 개인의 인권에 대한 의도적인 허위 기사는 고신 신앙 전체를 흔들 수 있는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문제는 고신 언론사는 총회 유지재단 이사회에서 관리하는 기관입니다. 유지재단 이사회는 총회장을 당연직 이사장으로 해서 총회 기관 중 최상위 기관으로 총회를 잘 알고, 총대들의 지지를 받아 총회 산하 교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감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유지재단 이사회가 직무유기 한 것입니다. 학원 이사들이 잘못할 때만 소환할 것이 아니라 유지재단 이사회가 잘못할 때는 그 파장은 훨씬 더 크고 중요하기에 반드시 소환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독교보가 총회 기관지인지, 유지재단 이사회 관할에 있는 기관지인지, 기독교보 자체 언론지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된다고 입을 모읍니다. 언론사 사장 얼굴이 기독교보에 빠지는 일이 없자 이 일에 대해서 총대들은 물론이요, 유지재단 이사회에서도 지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과는 마이동풍입니다. 순교 정신을 기본으로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모토로 하는 고신의 기관지인 기독교보가 본류의 신앙을 이탈한 것은 이미 옛말이고 특정 계파에 포진한 자들이 기고하는 재고 되어야 할 지나친 인문학적 논의와 신앙 고백적 정체성을 벗어난 잘못된 사상들이나 도배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고신 신앙을 가진 목회자들과 장로들, 교회들은 알게 모르게 기독교보에 대한 불신으로 불매 운동을 하고 있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입니다. 5월 2일 자 코람데오닷컴에 “교계 언론 편집 책임자의 이학규 장로 고소 건, 고검 재정 심사에서도 또다시 기각 판결”이라는 기사가 올랐습니다.(코람데오닷컴 참조) 이 사건의 실상은 전국 남전도회 임원으로 있는 모 장로님이 유지재단 이사로 출마하려고 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웠는데 그해에 언론사 사장 선거가 있어 보수 측 인사가 유지재단 이사가 되면 사장이 되는 길에 장애가 될 것 같아 코람데오닷컴의 기사대로 언론사의 직원이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운 장로를 “사퇴 종용”했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총회 산하 교회를 잘 돌아보고, 총회의 기관들을 바르게 잘 관리해야 하는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시작부터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일반 총대들은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는 계파와 개인의 이권과 자리가 그 배경이 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재미를 본 자들은 이제 총회에서 골치 아프게 투표하고 경쟁하는 것보다 아예 노회 총대를 조정하는 기가 찬 수법으로 발전했습니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계파에 표를 던질 사람을 골라서 총대라는 자리로 매관매직을 하고, 각 노회 지도급에 있는 목사 장로들을 총회 상임위의 자리로 매관매직해서 4월 노회 총대 선거가 끝나면 이미 상황이 종료되는 모양새로 발전되었습니다. 이학규 장로가 전국 남전도회 회장으로 봉직하고 있을 때 함께 임원으로 봉사하던 모 장로가 “사퇴를 종용”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항의한 것이 코람데오닷컴 에 기사 실린 것과 같은 결과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평생 법 없이도, 법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사는 목사, 장로가 이 일로 인하여 교회 생활이나 신앙생활에 방해를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경찰서와 법원으로 불려 다니며 고초를 겪고 어려움을 당했던 것에 대해서 고신 언론사를 관리하는 유지재단의 총회장과 목사, 장로 이사들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 궁금합니다. 왜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말입니다. 이학규 장로는 신앙적으로 잘 해결하고자 언론사의 불법 선거 개입 못 하게 해달라는 진정서를 총회 선관위에 제출했더니 총대가 아니라 진정서를 접수하지 못한다고 하더랍니다. 참 훌륭한 총회 선거관리 위원회이십니다. 그래서 “여기 보냈다, 저기 보냈다” 서류 핑퐁 게임을 하다가 결국 사법기관에 판단을 받기까지 하면서 이학규 장로가 당한 심적 피해, 정신적 피해, 일상 업무 손해의 피해는 누가 보상해줍니까? 고신총회가 이렇게 기본을 상실하고 무책임하게 하면 안 됩니다. 펜은 검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오보도 문제이지만, 언론이, 신문이 의도적이고 사욕에 치우쳐 고신의 정체성에 위배 되는 글이나 기사를 올리고, 무책임으로 일관할 때 고신총회 산하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미치는 파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총회 임원회와 학원이사회가 지난 총회 시 총대들을 속이고 총장선출 규정을 통과시켜 불법으로 총장을 선임했다고 신문에 기사화되어도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볼 때, 총회 임원회의 수장인 총회장이 유지재단의 당연직 이사장이기에 이 사실조차 그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게다가 현 총회장은 기독교보 발행인이 아니기에 변명하며 피해갈 수 있는 좋은 길도 열려 있습니다.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재정적인 문제는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릅니다. “반려동물을 장례식”에 대한 안건이 고신총회 신학부에서 재론되고, 어떻게 고신총회에서 “그따위 안건이 거론되느냐”는 회원들의 호통에 경남노회 모 회원이 나와 옹호 발언을 하며 “지난달에 우리 찐이(고양이)가 죽어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하늘나라로 보내줬다”고 말을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총회가 불건전하고 이단성이 있어 교류를 금지해도 전혀 문제의식 없이 그런 모임에 참여하고, 순서나 자리까지 맡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는 300M 거리를 유지해야 하지만 이전하는 것은 법에 명시가 없기에 괜찮다고 하는 고신입니다. 핑퐁 게임을 하다하다 안되면 법리해석을 문제 삼아 법제위에 해석을 요청하여 본질을 잊어버리게 하고 계파싸움 진영싸움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고신입니다. 양파도 아니고 벗겨도 벗겨도 끝이 없는 고신이여...... 언론은 “言路”를 여는 것입니다. 言路가 막히면 세상은 암흑세계나 다름없습니다. 한 마리의 개가 먼저 짖으면 온 동네 개가 때지어 짖어대듯이 기독교보가 먼저 총대를 메고 총회 여러 현안의 심각성을 알리면 동시에 총회 여러 곳에서 포문을 열고 동참할 것입니다. 언론은 여론을 집약하고 전문가들의 진단과 의견을 수렴하거나 민심을 파악한 후 사안에 따라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로 펜 끝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언론의 사명입니다. 총회 성도들을 대신해서 할 말을 하며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선도해야 합니다. 독선의 권력을 향한 비판은 언론이 지향해야 할 우선순위이자 언론 존재 이유입니다. 이 가치관이 상실되면 결국 관언유착(官言癒着)이 되기 쉽고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관제언론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사리사욕에 길들어서 소위 ‘독선과 권력’의 ‘종’이 된다면 스스로 펜을 손에서 내려놓아야 함은 불문가지입니다. 기독교보가 그렇게 길들어진 “관보(官報)”라는 비판을 듣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집을 지키기 위해 열심 짖어야 할 개가 요즘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주인 행세를 한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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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6 : 성가대와 찬양대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평생을 예배드리면서도 때로는 이 말이 옳은가 틀리는가에 대한 의문이 되는 용어들이 많다. 본 기고의 목적이 이를 바로 알고 사용하자는 취지에서 계속 기고하지만, 필자 자신도 때로는 헷갈릴 때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예배 중의 순서에서 찬양대인가 성가대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통합 측 총회에서는 찬양대라고 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수많은 교회들이 성가대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는 여기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성가대(聖歌隊)와 찬양대(讚揚隊)의 용어 차이 두 용어는 일반적으로 보면 거의 같은 말이다. 국어사전에도 성가대는 “교회 등에서 성가를 부르기 위해서 조직된 합창대”라고 했고, 찬양대도 “남녀 기독교 신자로 조직된 합창대”로 둘 다 영어로도 ‘choirs’로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같은 듯 다른 용어이다.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성가와 성가대란? : 먼저 일반적으로 성가라는 용어는 범(凡) 종교적으로 사용하는 말로서 일반적인 음악과는 다른 거룩한 음악이란 뜻이다. 그래서 성가는 범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는 ‘종교음악’으로서 세속적인 노래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의 찬불가는 불교의 성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 용어가 전혀 언급이 없다. 오직 찬양 혹은 찬송으로 표현되어 있다. 2. 찬양과 찬양대란? : 찬양이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으로서 참된 경건의 중요한 요소이다. 즉 찬양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성육신과 십자가 지심과 부활, 종말과 재림 등의 구속의 은혜를 노래하는 것이 찬양이고 또 함께 부르는 것이 찬양대인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가진 찬양은 개역성경에는 213회, 찬송은 98회, 찬미는 14회가 나온다. 하지만 성가란 말은 한 곳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찬양은 일반 종교의 성가와는 차원이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만을 높이는 노래인 것이다. 3. 성가와 성가대란 말을 교회에서 사용해 온 이유는? : 왜 성경에도 없는 이 용어를 그동안 교회에서 사용해 왔을까? 그 이유는 1976년에 나온 공동 번역 성경에서 개역성경의 “노래하는 자”, “성가대”로 12회에 걸쳐 번역을 했다. 또 하나의 성가대란 용어의 기원은 한 출판사가 흑인 영가의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곡집”이라 부른 것이 성가대의 이름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의 ‘세이까다이’(성가대 せいかたい, 일본 사람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며 노래할 때 쓰는 용어)가 직수입되면서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서 그동안 찬양대라고 했던 용어가 성가대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성가대란 말은 일본어의 잔재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가대란 말은 1958년 출판된 동아출판사 사전에도 성가대란 명칭이 없었으나 1994년 민중서관의 국어사전에서 처음 등재되었고 그 이전에는 성가대라는 말이 고정되어 사용되는 곳은 일본의 ‘세이까다이’뿐이었다. III. 결론과 제언 앞서 서론에서 밝힌 대로 성가대와 찬앙대라는 말은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동안 큰 문제 없이 사용해 왔기 때문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성경에도 없는 말이며, 일본어의 잔재라는 문제도 있다고 볼 때, 또한 타 종교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굳이 성가대란 말을 계속 사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성경에도 없는 성가나 성가대란 말보다는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사용해 왔던 찬양, 찬양대란 우리 고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올바른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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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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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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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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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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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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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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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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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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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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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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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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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권태(倦怠)를 극복하는 신앙
- 인생의 삶 과정에는 육적인 권태(倦怠)뿐만 아니라 영적 권태기가 있다. 권태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관심이 없어지고 시들해져서 생기는 싫증이나 게으름” 뜻하는 말이다. <군주론>을 쓴 이탈리아의 정치 사상가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는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가난도, 걱정도, 병도 비애(悲哀)도 아니다. 그것은 권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는 이렇게 말했다. “권태 보다는 죽음을...” 인생에 권태를 느끼며 하품만 하고 따분하다고 불평만 하는 사람처럼 세상에 비참한 사람은 없다. 코로나 이후 교회 내 세 부류의 사람이 형성되게 되었다. 첫째 부류는 코로나로 인해서 오히려 신앙이 성장한 성도들이 있고, 둘째 부류는 신앙이 떨어진 성도들이고, 셋째 부류는 평상유지하며 사는 성도들이 있다. 코로나로 인하여 오히려 신앙이 성장한 사람이라고 하면 유의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욥에 대하여 사탄에서 자신 있게 변호하기를 “네가 내 종 욥을 유의(留意)하여 보았느냐?” 시인 나태주 씨가 <풀꽃>이라는 시를 발표하면서 풀꽃의 가치에 대해서 변호하며 이렇게 시(詩)를 지었다. 풀꽃,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하나님께서도 욥의 신앙의 가치를 칭찬할 때에 욥을 그냥 흘려보아서는 안 되고 자세히 집중하여 보면 그가 가진 신앙은 어떤 역경 속에서도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보석 같은 존재라고 하였다. 우리의 신앙은 환경에 지배를 받아 무너지는 신앙, 무기력한 신앙의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 신앙을 세우기 위한 활기찬 전진이 있어야 한다. 노력의 나무에는 반드시 충실의 향기가 있고, 향상의 꽃이 피고, 행복의 열매가 열린다. 우리는 땀의 배려로 노력의 나무를 가꾼다. 권태의 나무에는 반드시 허무의 악취가 나고, 불만의 벌레가 먹고, 불행의 낙엽이 떨어지고, 실패의 병이 들게 된다. 지혜로운 시작과 보람된 출발을 계획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노력의 땀을 흘릴 각오를 해야 한다. 현대 기독교 지도자 존 맥스웰(John Maxwell)은 모세의 새로운 도약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는 안전지대를 벗어나 믿음의 지대에서 살았다: He lived in the faith zone out of the safe zone.” 의미 있는 말이다. 우리가 제 2 의 인생을 살고자 도약하려면 안전지대를 벗어나야 하고 신앙의 나태함, 권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것이 벤처 신앙이다. 인생이란 과감한 모험을 하지 않고는 진정 위대한 일을 이루어낼 수가 없다. 초대교회 시절 사탄의 전술 전략은 환란과 핍박이었으나 실패하였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사탄은 환난 핍박 보다는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잠 6:9~11). 말씀으로 재 무장하고 새롭게 도약하는 신앙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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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권태(倦怠)를 극복하는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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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가정에서의 호칭어와 지칭어 : 아내가 남편에게
- I. 서언(序言) 가끔 주례를 하면서 신랑신부에게 ‘여보’라 불러보라고 시킬 때가 있다. 그 이유는 신혼 초에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 잘못되거나 일정하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결혼을 했어도 전과 마찬가지로 ‘오빠’나 이름을 그대로 부르거나, 어떻게 불러야 할지 서로가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 가족과 친지와 지인들이 보는 앞에서 ‘여보’라는 첫 호칭을 불러보게 하고 있다. 이런 경우는 결혼 한지 20년이 다된 필자의 두 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가끔 그들이 ‘아빠’라고 부를 때 사위와 필자는 동시에 ‘왜?’라고 하면서 둘 다 돌아 볼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이는 두 딸들은 필자를 부를 때도 아빠, 남편을 부를 때도 ‘아빠’라고 호칭하기 때문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앞으로는 이런 면으로 당분간 올바른 호칭어와 지칭어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아내가 남편을 부르는 호칭어와 지칭어 1. 호칭어 : 대학의 동기와 결혼한 어떤 주부는 자신의 남편을 부를 때, 결혼 전에는 ‘철호야’라고 했다가 결혼 후에는 ‘철호씨’, ‘이봐요’, ‘여보’, ‘당신’, ‘자기야’ 등의 기분 내키는 대로 불렀다. 차녀 출생 후에는 아들의 이름을 붙여서 ‘민호 아빠’라고 부르고, 시부모 앞에서 남편을 부를 때는 ‘보세요.’ 라든가 ‘있잖아요’라고 부르고 있다. 이런 경우는 젊은 부부들 뿐 만이 아니라 40, 50대 이상의 중년, 노년 부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연령층의 호칭어들은 주로 ‘여보’를 비롯해서 ‘민호 아버지’, ‘영감’, ‘임자’등 아주 다양하게 호칭한다. 또 다른 사람에게 남편을 지칭할 때도 ‘그이’, ‘우리 남편’, ‘바깥양반’, ‘우리 집 주인’, ‘우리 아저씨’ 등으로 지칭하기도 하고, 남편의 직장 직함을 붙여서 ‘사장님’, ‘교장 선생님’, ‘장로님’, ‘목사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호칭어와 지칭어 사용을 어떤 단체에서 설문조사로 물어보니 대상주부 565명중에 65.5%가 ‘여보’, 22.1%가 ‘아빠’, 또 ‘자기’로 부르는 경우가 10.3%였다고 한다. 이상과 같은 경우만 보더라도 오늘날 아내가 남편을 부르는 말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일관성이 없는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 가장 알맞은 남편에 대한 호칭어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전문가들 의견들도 일관성이 없이 다양하다. 대략 3가지 정도인데, 하나는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8.15 해방 후에는 일본식인 ‘주인’이란 호칭어이다. 두 번째는 현대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여보’이다. 물론 이 용어도 국어사전에 정식으로 오른 것은 1982년판 국어대사전이었기 때문에 그리 오래된 용어는 아니다. 하지만 오늘 날에 있어서 가장 보편적인 용어로 되어 있다. 마지막 또 하나의 보편적인 호칭어는 ‘자기’이다. ‘애인이나 부부간에 상대방을 부르는 속어이긴 하지만, 어떤 사람을 부르는 대명사 역할도 하고 있기 때문에 표준어로 수용해도 좋을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2. 지칭어 : 남편에 대한 지칭어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는 호칭어보다 더 까다롭다. 특히 문제는 시부모 등 어른 앞에서 남편을 지칭하는 말들이다. 일제 강점기까지는 시부모 앞에서 ‘아범’이나 ‘○○아버지’, ‘그 사람’ 등의 지칭어가 많이 쓰였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아범’, ‘애비’, ‘○○아빠, ‘○○아버지’, ‘서방님’, ‘아빠’, ‘○○씨’, ‘○○애비’, ‘애 아빠’, ‘그 사람’, ‘그 이’, ‘남편’, ‘지아비’, ‘제 남편’등 20가지 가까운 지칭어가 혼용되고 있다. 어떤 조사에 의하면 시부모에게 남편을 지칭하는 말의 빈도수는 ‘애 아빠’가 38.85%, ‘아범’ 25.1%, ‘그 이’ 22.4%, ‘애비’ 12.3%, ‘그 사람’1.4%였다고 한다. 전문가들의 의견도 역시 다양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시댁 어른 들 앞에서는 ‘그 이’로, 친정 어른들에게는 ‘○서방’이 보편적인 지칭어들이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오늘날 아내가 남편을 부르는 호칭어나 지칭어가 얼마나 다양하고 일관성이 없는가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런 다양성 속에서 어느 하나만을 택해서 똑같이 적용을 하는 것은 다소 무리라고 보는 전문가들도 많다. 하지만 공동의 문화적 뿌리를 두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동일하지 않는 용어들을 너무 많이 사용하는 것은 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런 일은 가장 긴밀한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 가정과 교회에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든 이러한 적절한 부부간의 아름다운 호칭어와 지칭어의 사용은 아름다운 공동체 문화를 형성해 가는 귀중한 잣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 모두 올바른 언어문화 창조에 앞장설 수 있게 되기를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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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가정에서의 호칭어와 지칭어 : 아내가 남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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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신앙의 적폐 (삿17:1-6)
- 문재인대통령이 집권을 시작하면서 국정 지표로 삼은 것이 바로 ‘적폐 청산’입니다. 적폐(積弊)란 ‘오랫동안 쌓여온 폐단’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적폐는 반드시 청산되어야 하는 게 지당합니다. 다만 무엇을 적폐의 기준으로 보느냐는 것은 생각할 여지가 있습니다. 자기 판단을 기준으로 적폐몰이를 하고 마녀사냥을 하듯이 청산의 대상으로 몰아가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 판단기준이 절대 선이 아니고 진영에 따라서 판단기준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폐란 잘못된 것인데 오랫동안 쌓여온 나머지 몸에 밴 습관이 되었기 때문에 좀처럼 바꾸거나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사람이 오래된 습관을 바꾸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유대교의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잘못된 악습과 불의한 제도를 청산하시려고 했지만 강한 저항에 부딪혀야 했습니다. 적폐 청산이 얼마나 쉽지 않은지를 보여 주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습관을 바꾸지 않으면 자기발전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적폐를 청산하지 않으면 그 사회가 발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항이 따르고 고통이 따르더라도 잘못된 관습은 뜯어고치고 청산하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기독교계에도 청산되어야 할 오랜 기간 동안 쌓이고 쌓여온 적폐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가 잘못된 것을 뜯어고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개혁하지 않으면 사회로부터 외면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잘못된 것인데도 잘못된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붙잡고 있는 관습이 있습니다. 당연하게 여기고 있지만 우리가 적폐로 여기고 고쳐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는,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은 적폐입니다.(삿17:6) 둘째로는, 편의주의를 추구하는 신앙은 적폐입니다.(삼하6:6,7,대상15:13) 셋째로는, 세속주의적인 신앙생활은 적폐입니다.(롬12:2,약1:27) 느리더라도 불편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바른 신앙생활을 힘쓰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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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신앙의 적폐 (삿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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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철 목사] 불편한 반상회
- 아무리 날이 더워도 혼자 쓰는 에어컨은 불편하다. 눈치가 보인다. 그리고 아파트에서 그만큼 불편한 것이 하나 더 있다. 반상회. 그 자리는 안건이 무엇이든지 늘 불편하다. 「‘고성, 갈등, 비난’ 이 셋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고성(高聲)이라.」 경상도 아지매와 아재의 소리는 기본적으로 데시벨이 높다. 본인은 화난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아무리 봐도 화가 많이 났다. 의견을 낼 때도, 건의사항이 있을 때고, 심지어 부탁할 때도 화가 나 있다. 냉정하게 분노의 이유를 분석해보려 하지만 답을 찾을 수 없다. 화를 낼 타이밍도 이유도 아닌데 소리는 점점 커지고 상대의 말을 부정하며 공격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이 반상회에 잘 참여하지 않는다. 불참에 따른 벌금이 있지만 참석하지 않는다. 어쩌면 불편한 자리에서 담임목사와 만나는 것이 더 불편해서 일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이런 자리에서 집사님들과 만난다면 편치는 않을 것 같다. 오늘 반상회도 여러 가지 논의할 부분이 있다. 분명 누군가 도화선이 될 것이고 전쟁은 시작될 것이다. 아파트 옆 공터에 버스 차고지가 들어온다. 그리고 배수관에 문제가 있어서 작은 공사가 추진되어야 한다. 역시나 난장(亂場)이다. 뭐라 하는지 들리지도 않고 시끄럽기만 하다. 반상회에서 관리소장은 3자의 입장이다. 입주민과 대표가 논의하고 결정된 것을 실행하는 위치이기에 격한 토론에 참여할 이유가 없다. 내 의견을 내봐야 내 목과 마음만 상한다. 잠시 먼 곳을 바라보며 심신의 평온을 유지하고 있을 때 갑작스러운 공격이 들어온다. “관리소장이 누구요?” 얼마 전 이사 온 어르신이다. 나를 몰라서? 아니다. 관리소장이 관리실에서 자리를 지키지 않아 짜증이 난 것이다. 새로운 입주민이 생기다 보니 나의 근로 형태를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차근히 설명해드린다. “아파트에 필요한 일은 시간 가리지 않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다만 경비처럼 자리를 지키며 근무하지 않기로 처음부터 계약이 되어 있습니다.” 이미 대부분 입주민이 알고 수긍하는 내용이었고 문제 될 부분이 아니었다. 그때. “소장!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입주민들이 수군거려! 불편하다고!” 입주민이기도 한 전(前) 관리소장님이 갑자기 더 큰 소리를 내며 따져 묻기 시작한다. 하... 저 어른 있을 때 아파트 상태를 생각하면 지금도 화가 난다. 더럽고, 노후 된 시설 방치되고, 미래 준비 따위는 없었고. 사실 지금 하는 고생의 절반은 저 어르신의 뒤처리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지금 아파트 상황에서 고군분투하는 나를 누구보다 가장 잘 알 사람이다. 그리고 전과 다르게 뭐가 좋아졌는지도 분명하게 알고 있을 텐데. 기가 막힐 노릇이다. 할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제가 근무하면서 불편하신 부분이 많은데 말씀을 못 하셨나 봐요. 제 생계를 염려해서 그러셨다면 염려 마세요. 요즘 최저시급이 올라서 주 5일 편의점 가서 일해도 여기 일보다 덜 힘들고 급여도 낫습니다. 그러니 좋은 사람 생기시면 반상회에서 정식으로 해임안 올리셔서 관리소장을 바꾸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정당하게 해임안을 올려서 결의하시라고 차분하게 말씀드렸다. 나는 고용된 사람이다. 고용주가 맘에 들지 않으면 해고하면 그만이다. 일도 못하면서 90만 원이나 받아갈 이유가 없다. 나를 위해 아파트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파트를 위해 관리인이 존재하는 것이니깐. 서운할 이유도 버틸 이유도 없다. “우리 새로운 소장님 와서 아파트 많이 깨끗해지고, 일 처리도 빠르고 좋습니다.” 여기저기서 토닥이는 말씀이 이어진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상처는 이미 받았고 흔적은 남더라. 날이 덥다. 그리고 사람과 마주하기가 갑갑하다. 언제까지 나는 아파트에서 일하고 있을까? 벌써 만 3년이 지나고 있구나.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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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철 목사] 불편한 반상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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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베스트 관계 목회(1)
- 가인과 아벨의 관계 가인과 아벨은 나쁜 관계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형제 관계인데 가인의 시기 질투 분노 때문에 아벨을 죽이는 살인사건으로 관계의 비극을 볼 수 있습니다. 가까운 가족 형제 관계도 깨질 수 있습니다. 관계의 깨짐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사탄은 관계 파괴자입니다. 성령은 하나가 되게 하고 하나님은 좋은 관계 맺기를 원하십니다. 가인과 아벨의 비극적인 관계는 가인의 시기 질투 때문입니다.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시고 가인의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았을 때 가인이 아벨을 시기하여 죽이게 되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시기 질투는 관계를 깨뜨립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관계를 세웁니다. 시기 질투를 버리고 넓은 마음으로 배려하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 시기 질투는 인간의 죄성입니다. 인간의 죄성 때문에 관계가 깨집니다. 관계의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관계가 잘 되면 행복하고 깨지면 불행해집니다. 사울은 다윗에 대해 시기 질투하고 죽이려 하다가 스스로 관계를 깨뜨리고 사울 자신이 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관계를 깨뜨립니다. 가룟유다도 사탄이 들어가니 스승인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가룟유다의 마지막은 자살로 그 인생이 끝납니다. 사탄은 관계를 깨뜨립니다. 가정과 인간관계 가정은 하나님이 만드신 축복의 센터입니다. 가정이 중요하며 가정생활에 성공해야 합니다. 사탄은 가정을 공격합니다. 가정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가정생활의 성공이 삶의 성공 목회의 성공입니다. 가정이 평안해야 목회가 안정적입니다. 가정이 흔들리면 목회가 흔들리고 가정의 위기는 목회의 위기입니다. 가까운 가정에서 신뢰 얻어야 합니다. 가족식구들과 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사탄은 가정에서의 인간관계가 깨지게 합니다. 사탄은 관계를 깨뜨리는 자이고 파괴자입니다. 가까운 관계가 깨지기 쉽습니다. 가정에서 인간관계가 깨지면 상처가 크고 고통이 큽니다. 가정의 화목은 관계의 지혜입니다. 가정에서의 인간관계가 좋으면 삶이 행복하고 목회가 행복합니다. 사탄은 계속 관계를 공격합니다. 가정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성령님은 하나되게 하십니다. 가정에서의 식구들이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충만은 인간관계의 열쇠입니다. 가정은 모든 것의 기초이고 뿌리입니다. 가정목회에 성공해야 합니다. 가정에서의 인간관계 승리는 목회의 승리입니다. 가정에서 예의 지키고 진실해야 합니다. 스트레스를 극복하고 매력을 개발하여 싫증나지 않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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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베스트 관계 목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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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개혁주의 신앙, 무엇인가?
- 개혁주의라는 용어는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단어이다. 교회 안에서는 물론 교회 밖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개혁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이 용어는 개인과 집단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이해되거나 심지어는 아주 애매하게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혹자는 단순히 수구적 보수주의에 대한 반대적 의미로 개혁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들은 수구적 보수주의를 반대하면서도 진보적 또는 급진적 혁명과는 다른 차원의 변화와 개선을 추구하는 노선을 표방하기 위해서 개혁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여기에 덧붙여 개혁주의는 형용사적이며 추상적이라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개혁주의 교회(Reformed Church), 개혁주의 전통(Reformed tradition), 개혁주의 신앙(Reformed faith), 개혁주의 신학(Reformed theology), 개혁주의 세계관(Reformed world view), 개혁주의 철학(Reformed philosophy) 등은 구체성을 갖고 있지만 ‘개혁주의’ 그 자체는 추상적이다. 개혁주의 신앙과 삶의 특성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다양한 관점들이 있다. 예를 들면, 개혁주의 신앙은 무엇보다도 정통 보수 신앙이라는 아주 평범한 관점이 있는가 하면, 교리공부에 열심이며, 주일 성수에 힘쓰고, 복음송 보다는 시편 찬송을 부르기를 강조하는 신앙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혹자는 개혁주의 신앙의 특성으로 흔히 ‘튤립’(TULIP)으로 불리는 칼빈주의 5대 교리 (인간전적부패, 부조건적 선책, 제한적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궁극적 구원)를 강조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강조는 알미니안누스주의를 반박하기 위해 확정된 도르트 총회의 결의문인 도르트 신경(1618-1619)로부터 유래한다. 개혁주의 신앙의 특성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은 “오직”(sola)의 신앙을 강조하는 관점이다. 다시 말하면, 개혁주의 신자들은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예수”(solus Christus),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 만 영광을”(soli deo gloria) 돌리는 삶을 특성으로 강조한다. 이상에서 언급한 모든 것들이 개혁주의 신앙과 삶의 특성임은 분명하다. 개혁주의 신자들은 이러한 신앙과 삶을 유지하며 영위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들이개혁주의 전통의 신앙과 삶의 특성을 포괄적으로 다 드러내 보여준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개혁주의 신앙의 특성은 무엇인가? 헤세링크(Hesselink)에 의하면, 개혁주의 신학은 “왕국 신학”(Kingdom theology)이다. “…… 그러므로 개혁주의는 인간 개인의 영적인 복지에만 적용되는 불완전한 각색된 복음이 아니라, 전체 세계에 총체적인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개혁주의 신학의 출발점이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the absolute sovereignty of God)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그 범위에 있어서 우주적이다. 그리스도는 왕 중의 왕이며, 만주의 주가 되시는 분이다 (계19:16; 17:14). 그의 나라는 무궁하다 (눅1:33). 개혁주의 신앙의 관점은 다른 형태의 기독교 신앙과 비교해 볼 때 분명한 차이점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루터교 신앙은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추구하며, 경건주의 신앙은 개인 영혼의 복지에 관심을 갖는다. 웨슬리안 전통은 개인의 거룩성에 관심을 갖지만, 개혁주의 신앙의 궁극적 관심은 개인적인 경건과 개인의 구원을 초월하며, 제도 교회의 범주를 넘어선다. 개혁주의 신앙은 국가와 문화, 자연과 우주의 보다 더 광범위한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데 있다. 이와 같은 고귀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더 포괄적인 세계관이 필요하다. 그래서 헤세링크는 개혁주의 신앙의 특성을 성경적인 개혁주의 세계관의 발전이라고 보고 있다. 인생관 세계관, 삶의 모든 영역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주권과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에 대한 비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하나님 나라의 신학,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웅대한 디자인이다.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 하나의 주제, 그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이다. ……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 지어다 아멘’ (롬 11:36).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은 분명히 고상하고 차원이 높고 성경적이다. 그러나 유의해야 할 점은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견지하고 있다고 표방하는 구성원들이 독단적이고 비판적이며 오만한 승리주의에 도취되지 않아야 한다. 모든 신학과 신앙의 전통은 나름대로의 강점과 약점을 갖고 있다. 그럼으로 우리는 다양한 신학과 신앙 전통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겸비함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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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개혁주의 신앙,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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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헤만은 찬송하는 자라(대상6:33)
- (대상6:31-32)언약궤가 평안한 곳을 얻은 후에 다윗이 이 아래의 무리를 세워 여호와의 집에서 찬송하는 일을 맡게 하매 솔로몬이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의 전을 세울 때까지 저희가 회막 앞에서 찬송하는 일을 행하되 그 반열대로 직무를 행하였더라 찬송에 대한 의미가 많이 퇴색된 시대인 것 같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 찬송해서 힘을 얻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되고 일이 잘 풀릴 때 감사의 찬송을 합니다. 우리 성도의 입에서 찬송이 사라지지 않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상 문화가 우리의 입에 할 말을 너무 많이 넣어주고, 개인적으로 너무 똑똑해지고, 트로트가 너무 많이 들려 저절로 입속에서 흥얼거리는 지경까지 되어버렸습니다. 찬송인지 트로트인지 곡만 봐서는 구별도 잘 안 되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오늘 성경은 찬송하는 일, 그 일이 직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언약궤가 평안한 곳을 얻었을 때, 언약궤가 평안한 곳을 얻은 후에” 하나님께서 평안을 얻으시기가 참 힘드셨던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쉬시기가 너무 어려우셨던 것 같습니다. (마8:20)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이런 장면을 들어 “예수님께서 검소하게 사셨다, 소유욕이 없었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요단강에도 제일 먼저 들어가야 했고, 전쟁터를 누벼야 했고, 포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진영 한복판에서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이스라엘 속으로 가만히 들어온 섞여 있는 가라지들 때문에 졸지도 주무시지도 못하셨습니다. (시121:4)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언약궤가 평안한 곳을 얻었을 때, 언약궤가 평안한 곳을 얻은 후에” 이렇게만 보아도 이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께 너무 송구스럽고, 죄송스럽고, 가슴 아픈 말씀입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전쟁이 끝나고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임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집인 성전이 건축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쉬신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백성, 그의 자녀들에게 평강과 구원이 임했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소속된 교회는 우리에게 구원이 임했다는 상징이요, 약속입니다. 그런 뜻을 담은 성전이 건축되는 동안 찬송하는 직무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니 찬송은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것처럼 “은혜받았다, 감동받았다”의 차원을 넘어 구원을 상징하는 하나님의 집, 성전을 향하여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라”하면 교회를 그리 오래 다니지 않으신 분들도 다 아실만한 사람입니다. 특히 주일을 성수하고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은 너무도 잘 아실 것 같습니다. (민16:1-2)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라엘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 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 가운데에서 이름있는 지휘관 이백오십 명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르니라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반역의 깃발을 든 주동자가 “고라”입니다. 고라와 그 무리들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부여하신 제사장직과 왕직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결정에 반기를 든 결과입니다. 세상 나라도 역린, 반역을 하면 9족을 멸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반역과 불신앙은 세상의 반역을 넘어 삼위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뻔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언약궤가 평안한 곳을 얻었을 때, 언약궤가 평안한 곳을 얻은 후에”,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구원이 임하였음을 상징하는 하나님의 집, 성전건축을 알리는 찬송하는 직무에 헤만이 등장을 한다는 말입니까? 헤만은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반역의 깃발을 든 고라(대상6:38)의 후손입니다. 시편 성경에도 고라의 찬송을 10편이나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찬송과 기도가 우리의 은혜, 우리의 감동이 목적이 되고, 그 선에서 머물러서야 되겠습니까? 우리의 입에 찬송과 기도가 있다는 사실은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여 있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찬송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어쩌면 우리는 고라의 후손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아니 고라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바로 우리가 고라입니다. 내가 고라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나에게 찬송의 직무를 맡겨 주셨습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성도의 구원을 상징하고,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향한 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9족을 멸하는 대신, 교회의 역사를 기록하는 장면에서 우리가 부르는 찬송의 고백을 10편이나 할애해 주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일을 성수하며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여 찬송할 때마다 내 입에서 나오는 찬송의 의미를 바르게 알아 삼위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가 풍성하시길 소망합니다. 죽는 그 날까지, 하나님 앞에 서는 그 순간까지 찬송이 끊어지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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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헤만은 찬송하는 자라(대상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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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가정에서의 높임말과 낮춤말 : 며느리가 시부모에게
- I. 서언(序言) 앞에서 논한 바 있지만 높임말은 우리 사회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거추장스러운 걸림돌이 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어느 사회이건 특히 다양한 계층이 모여 있는 교회에서는 최소한의 예의는 반드시 있어야 될 것이고, 이를 잘 이행할 때 이 사회 속에서 올바른 높임말과 적합한 낮춤말 하나로도 아름다운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지난 호에서는 가정에서의 호칭 중에서 시부모가 며느리에게 어떻게 호칭하며 지칭할 것인지를 논하였다. 본 호에서는 며느리가 시부모에게는 어떻게 높임말을 해야 될 것인지를 논하고자 한다. II. 며느리가 시부모에게 하는 호칭 오늘날의 높임말은 어떠한가? 여기에 대해서는 지난 번 3회에 걸쳐 논하면서 그 심각성을 소개한 바 있었다. 그것은 오늘 본 호에서 논하고자 하는 가정에서의 높임말 사용도 마찬가지이다. 한마디로 심각할 정도로 많이 변형되어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실례를 들면 요즈음 젊은 층의 다수는 ‘-어요’라는 말을 선호하면서 ‘그랬어요.’, 저랬어요.’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듣는다. 이는 며느리가 시부모에게 하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분석해보면, 낮춤말은 아니지만 격식을 차리고 시부모에게 쓰는 말도 아니다. 이런 경우는 ‘그랬습니다.’, ‘저랬습니다.’란 표현이 가장 올바른 높임말이다. 또한 잘못된 말은 ‘제가 그랬습니다.’라고 해야 되는데 ‘내가 그랬습니다.’라고 함으로서 ‘나’와 ‘제’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한 가지 실례를 더 든다면, 이제 갓 결혼한 새신부가 시아버님께 ‘아버님 식사하세요.’라고 말했다가 시어머님께 꾸중을 들은 일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때는 어떤 높임말이 좋을까? 이때는 ‘아버님, 진지 잡수십시오.’라고 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높임말이다. 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날까? 이런 높임말의 붕괴는 주로 어휘를 잘못 선택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경우가 아주 많다. 예를 들면, ‘생신’, ‘연세’, ‘진지’, ‘말씀’ 등의 높임말 대신 ‘생일’, ‘나이’, ‘밥’, ‘말’ 등의 평대어를 예사로 쓴다. 또 ‘주무시다.’, ‘말씀하시다.’, ‘잡수시다.’, ‘드리다.’ 라고 해야 되는데 ‘자다’, ‘말하다’, ‘묻다’, ‘먹다’, ‘주다’로 말을 한다. 이는 높임말의 선어말 어미인 ‘-시’를 생략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상과 같은 경우만 보더라도 오늘날 젊은 층이 시부모님이나 윗사람에게 사용하는 높임말은 호칭어이든 지칭어이든 얼마나 다양하고 일관성이 없는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런 다양성 속에서 어느 하나만을 택해서 똑같이 적용을 하는 것은 다소 무리라고 보는 전문가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가장 기초적인 공동체인 가정에서와 공동의 문화적 뿌리를 두고 살고 있는 우리의 사회 현실에서 동일하지 않는 용어들을 너무 많이 사용하는 것은 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런 일은 가장 긴밀한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 가정과 교회에서는 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정이든 교회이든 이러한 윗사람께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를 바로 사용하는 것은 교인으로서 갖출 아름다운 예의 일 것이다. 또한 건전한 사회문화를 형성해 가는 귀중한 잣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III. 결 어 우리가 가장 흔히 쓰는 가정의 호칭어, 지칭어들도 이상에서 보는 대로 바로 쓰지 못하는 경우들도 너무 많다. 하지만 이러한 원칙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간의 따뜻한 사랑의 마음이다. 예를 들면, 며느리가 친정어머니 대하듯 시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이런 원칙은 때로는 무시되어도 좋을 것이다. 문제는 상호간의 마음이다. 서로가 신뢰하고 사랑한다면, 약간의 어법에 오류가 있을지라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오늘도 오고가는 서로 존중하고 높이는 말들 속에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하루가 되기를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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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가정에서의 높임말과 낮춤말 : 며느리가 시부모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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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신앙의 경주 (히12:1-3)
- 우리나라에서 2005년도에 개봉이 되어서 많은 국민들의 마음을 감동시킨 “말아톤”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는 2급 정신지체 장애를 가지고 있는 배형진군의 삶을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배형진군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2001년도 춘천 국제마라톤 경기에서입니다. 그 당시 그의 나이가 불과 16세였으며 2급 정신지체 장애인이었는데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조목을 받았고, 그 이듬해에는 철인 3종 경기에도 출전을 해서 풀코스를 완주했습니다. 그 배형진군의 삶이 모든 장애아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줄 수 있다고 판단을 해서 “말아톤”이라는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북한의 김정일국방위원장이 알려진 바대로 영화광인데 그 영화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작년에는 배형진군이 평양 국제 마라톤 경기에 특별 초대를 받아서 경기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정상인들도 해 낼 수 없는 일을 해 냄으로서 인간 승리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가 인간 승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어머니의 눈물어린 노력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배형진군은 지능이 4살 아이 정도밖에 안되는데, 그 아이를 어떻게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할까를 생각하다가 달리기에 소질이 있음을 알고 직접 훈련을 시켰던 것입니다. 아들에게 너무 가혹한 훈련을 시키는 것 때문에 친어머니가 아니고 계모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의 헌신으로 오늘의 그가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마라톤 경주와 같습니다. 우리는 이 믿음의 경주에 반드시 승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할 수가 있을까요? 첫째는, 준비가 철저해야 합니다.(1) 둘째는, 인내를 발휘해야 합니다.(1) 셋째는,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2) 코로나19라는 어려운 상황을 맞이한 우리 모두 신앙의 경주를 완주하고 주님 앞에 승리자들로 서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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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신앙의 경주 (히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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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말씀은 주야로 묵상해야한다.
- 성경이 “말했구나.” 정도가 아니다. “주야로 묵상해.” “이 말씀을 붙잡아”, “이 말씀은 귀해”, “이 말씀을 들어라”고 하신다. 목사의 설교만 들어선 안 된다. 성령님께 직접 설교를 들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설교하신다. “하나님께서 메세지 하시구나”하는 것을 말씀을 통해 발견해야 한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들린다. 주야로 묵상하자. 자나 깨나 묵상한다는 말이다. 이 율법 책을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라고 했다.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고 했다. “행하라”를 “믿어라”로 읽어야 한다. 그리하면 어떻게 되는가? “네 길이 평판하게” 된다. “형통하게” 된다. 하나님이 말씀은 진실이다. 평탄한 길, 형통한 길이 여기 있다. 평탄하고 형통하고 싶어 노력만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윗은 말씀을 묵상하다가 실재가 되었다. 믿음으로 기름 부음을 유지할 뿐 아니라 선포를 했다.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오지만...”라고 마음에 있는 것을 읊조리고 선포를 하는 것이다. 마음에 있는 것을 선포를 하는 일을 하려면 말씀이 우리에게서 떠나지 말게 해야 한다.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라고 하신다. 묵상이란 깊이 생각하고 깨달은 것을 입으로 읊조리는 것을 말한다. 읊조리는 것, 자꾸 말해야 한다. 입을 가지고 말을 해야 한다. 말을 온전하게 하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다. 이 땅의 아무리 좋은 말도 온전한 말은 없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온전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읊조릴 때 온전한 말이다. 말씀을 말하는 사람은 온전한 자라고 성경이 말한다.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고 하셨다. “내가 온전하니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씀을 믿음으로 거룩해질 수 있다. 말씀을 말함으로 온전 해 질 수 있다. 우리는 “이 율법 책을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겠다.”라는 결단이 필요하다. 그러면 반드시 오늘 이후로부터 응답의 문이 열린다. 형통하다. 평탄하다. 문이 열린다. 형통한 길 평탄한 길이 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1:8)라고 하셨다. 놀라운 말씀이 아닌가! 말씀을 다섯 가지 방법으로 가까이하길 권한다. 읽기, 듣기, 공부하기, 암송하기, 묵상하기이다. 말씀을 읽는 시간을 꼭 정하길 권한다. 작정해 보라. 말씀이 읽어질 것이다. 읽기만 할 것이 아니라 공부하기도 해야한다. 말씀은 들음에서 믿음이 생긴다. 말씀을 듣는 일에 귀를 기울이고 관심을 가지는 것은 중요하다. 말씀을 듣는데 어떤 말씀을 듣느냐는 중요하다. 정확한 복음을 들어야 한다. 참고로 유튜브 <오복음tv>를 활용해 보라. 유튜브 <오복음tv>를 들어보라. 힘이 생길 것이고, 행복의 문이 열릴 것이다. 삶 속에 흔들 깃발이 생길 것이다. 성경 공부하기를 재미있고 쉽게 하는 방법을 소개하고 싶다. 유튜브 <오복음tv>를 활용해 보라.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장별로 복음으로 볼 수 있도록 영상으로 잘 만들어져 있다.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가능하다면 로마서를 먼저 공부한 후 창세기부터 노트에 필기도해 가면서 공부할 것을 권한다. 암송하기에도 도전해 보라. 암송은 암송할 수 있다는 생각이 중요하다. “나는 성경을 암송할 거야”라는 말을 1,000번을 해 보라. 쉽게 암송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나는 성경을 암송할 거야”라는 말을 억지로 하지 말고 그냥 수시로 그렇게 해 보라. 1,000번을 말하면 무엇이든지 쉬워진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말씀을 묵상하라. 읽고, 듣고, 공부하고, 암송한 말씀을 생각하고, 되새기고, 주장하면 마음속에서부터 올라오는 환희와 함성이 생길 것이다.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는 말씀을 만드는 일을 묵상이라고 한다. 그것이 기도하게 될 때 놀라운 능력의 삶은 나타나게 될 것이다. 다시 당부드린다. 생동감 있는 삶을 위해 유튜브 <오복음tv>를 활용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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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말씀은 주야로 묵상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