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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7)- 관언유착(官言癒着)
언론이 독자들이나 대중들에게 주는 영향이 크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사실이 아닌 잘못된 기사나 중심을 잃은 기사는 많은 사람에게 혼란을 줍니다.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몇 해 전 우리 노회에서 모 목사를 순회 선교사로 파송한다고 기독교보에 기사가 올랐습니다. KPM 이사장과 담당자들이 파송 예배에 순서를 맡으며 파송 예배 사진까지 첨부하여 누가 봐도 총회에서, KPM에서 파송하는 선교사처럼 대문짝만하게 기사를 올렸습니다. 노회 파송 선교사도 아닌데 과장된 허위 기사를 올릴 수 있느냐고 기독교보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몇 주 후 신문 구석 어느 페이지에 짧은 한 줄로 000교회 순회 파송 선교사로 정정한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습니다. 그 기사를 본 대부분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은 KPM 파송 선교사로 알고 있습니다. 짤막한 정정 기사가 났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도 “부산서부노회 파송 선교사냐?”고 물어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선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KPM이나 노회에서 파송한 선교사처럼 위장을 하고 그것을 교단 신문인 기독교보에까지 기사화한 것은 그 저의를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디 이 한 건뿐이겠습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이 발생하여 총대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거짓된 걸음을 걷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 심히 우려됩니다. 기독교보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할 것입니다. 기독교보가 KPM 선교사로 파송하는 기본도 모른다는 것은 몰랐다고 하는 말 자체가 거짓말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의 파장도 결코 간과할 수 없지만, 신앙과 교리, 교회와 개인의 인권에 대한 의도적인 허위 기사는 고신 신앙 전체를 흔들 수 있는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문제는 고신 언론사는 총회 유지재단 이사회에서 관리하는 기관입니다. 유지재단 이사회는 총회장을 당연직 이사장으로 해서 총회 기관 중 최상위 기관으로 총회를 잘 알고, 총대들의 지지를 받아 총회 산하 교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감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유지재단 이사회가 직무유기 한 것입니다. 학원 이사들이 잘못할 때만 소환할 것이 아니라 유지재단 이사회가 잘못할 때는 그 파장은 훨씬 더 크고 중요하기에 반드시 소환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독교보가 총회 기관지인지, 유지재단 이사회 관할에 있는 기관지인지, 기독교보 자체 언론지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된다고 입을 모읍니다. 언론사 사장 얼굴이 기독교보에 빠지는 일이 없자 이 일에 대해서 총대들은 물론이요, 유지재단 이사회에서도 지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과는 마이동풍입니다. 순교 정신을 기본으로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모토로 하는 고신의 기관지인 기독교보가 본류의 신앙을 이탈한 것은 이미 옛말이고 특정 계파에 포진한 자들이 기고하는 재고 되어야 할 지나친 인문학적 논의와 신앙 고백적 정체성을 벗어난 잘못된 사상들이나 도배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고신 신앙을 가진 목회자들과 장로들, 교회들은 알게 모르게 기독교보에 대한 불신으로 불매 운동을 하고 있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입니다. 5월 2일 자 코람데오닷컴에 “교계 언론 편집 책임자의 이학규 장로 고소 건, 고검 재정 심사에서도 또다시 기각 판결”이라는 기사가 올랐습니다.(코람데오닷컴 참조) 이 사건의 실상은 전국 남전도회 임원으로 있는 모 장로님이 유지재단 이사로 출마하려고 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웠는데 그해에 언론사 사장 선거가 있어 보수 측 인사가 유지재단 이사가 되면 사장이 되는 길에 장애가 될 것 같아 코람데오닷컴의 기사대로 언론사의 직원이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운 장로를 “사퇴 종용”했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총회 산하 교회를 잘 돌아보고, 총회의 기관들을 바르게 잘 관리해야 하는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시작부터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일반 총대들은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는 계파와 개인의 이권과 자리가 그 배경이 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재미를 본 자들은 이제 총회에서 골치 아프게 투표하고 경쟁하는 것보다 아예 노회 총대를 조정하는 기가 찬 수법으로 발전했습니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계파에 표를 던질 사람을 골라서 총대라는 자리로 매관매직을 하고, 각 노회 지도급에 있는 목사 장로들을 총회 상임위의 자리로 매관매직해서 4월 노회 총대 선거가 끝나면 이미 상황이 종료되는 모양새로 발전되었습니다. 이학규 장로가 전국 남전도회 회장으로 봉직하고 있을 때 함께 임원으로 봉사하던 모 장로가 “사퇴를 종용”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항의한 것이 코람데오닷컴 에 기사 실린 것과 같은 결과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평생 법 없이도, 법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사는 목사, 장로가 이 일로 인하여 교회 생활이나 신앙생활에 방해를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경찰서와 법원으로 불려 다니며 고초를 겪고 어려움을 당했던 것에 대해서 고신 언론사를 관리하는 유지재단의 총회장과 목사, 장로 이사들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 궁금합니다. 왜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말입니다. 이학규 장로는 신앙적으로 잘 해결하고자 언론사의 불법 선거 개입 못 하게 해달라는 진정서를 총회 선관위에 제출했더니 총대가 아니라 진정서를 접수하지 못한다고 하더랍니다. 참 훌륭한 총회 선거관리 위원회이십니다. 그래서 “여기 보냈다, 저기 보냈다” 서류 핑퐁 게임을 하다가 결국 사법기관에 판단을 받기까지 하면서 이학규 장로가 당한 심적 피해, 정신적 피해, 일상 업무 손해의 피해는 누가 보상해줍니까? 고신총회가 이렇게 기본을 상실하고 무책임하게 하면 안 됩니다. 펜은 검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오보도 문제이지만, 언론이, 신문이 의도적이고 사욕에 치우쳐 고신의 정체성에 위배 되는 글이나 기사를 올리고, 무책임으로 일관할 때 고신총회 산하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미치는 파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총회 임원회와 학원이사회가 지난 총회 시 총대들을 속이고 총장선출 규정을 통과시켜 불법으로 총장을 선임했다고 신문에 기사화되어도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볼 때, 총회 임원회의 수장인 총회장이 유지재단의 당연직 이사장이기에 이 사실조차 그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게다가 현 총회장은 기독교보 발행인이 아니기에 변명하며 피해갈 수 있는 좋은 길도 열려 있습니다.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재정적인 문제는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릅니다. “반려동물을 장례식”에 대한 안건이 고신총회 신학부에서 재론되고, 어떻게 고신총회에서 “그따위 안건이 거론되느냐”는 회원들의 호통에 경남노회 모 회원이 나와 옹호 발언을 하며 “지난달에 우리 찐이(고양이)가 죽어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하늘나라로 보내줬다”고 말을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총회가 불건전하고 이단성이 있어 교류를 금지해도 전혀 문제의식 없이 그런 모임에 참여하고, 순서나 자리까지 맡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는 300M 거리를 유지해야 하지만 이전하는 것은 법에 명시가 없기에 괜찮다고 하는 고신입니다. 핑퐁 게임을 하다하다 안되면 법리해석을 문제 삼아 법제위에 해석을 요청하여 본질을 잊어버리게 하고 계파싸움 진영싸움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고신입니다. 양파도 아니고 벗겨도 벗겨도 끝이 없는 고신이여...... 언론은 “言路”를 여는 것입니다. 言路가 막히면 세상은 암흑세계나 다름없습니다. 한 마리의 개가 먼저 짖으면 온 동네 개가 때지어 짖어대듯이 기독교보가 먼저 총대를 메고 총회 여러 현안의 심각성을 알리면 동시에 총회 여러 곳에서 포문을 열고 동참할 것입니다. 언론은 여론을 집약하고 전문가들의 진단과 의견을 수렴하거나 민심을 파악한 후 사안에 따라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로 펜 끝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언론의 사명입니다. 총회 성도들을 대신해서 할 말을 하며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선도해야 합니다. 독선의 권력을 향한 비판은 언론이 지향해야 할 우선순위이자 언론 존재 이유입니다. 이 가치관이 상실되면 결국 관언유착(官言癒着)이 되기 쉽고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관제언론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사리사욕에 길들어서 소위 ‘독선과 권력’의 ‘종’이 된다면 스스로 펜을 손에서 내려놓아야 함은 불문가지입니다. 기독교보가 그렇게 길들어진 “관보(官報)”라는 비판을 듣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집을 지키기 위해 열심 짖어야 할 개가 요즘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주인 행세를 한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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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6 : 성가대와 찬양대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평생을 예배드리면서도 때로는 이 말이 옳은가 틀리는가에 대한 의문이 되는 용어들이 많다. 본 기고의 목적이 이를 바로 알고 사용하자는 취지에서 계속 기고하지만, 필자 자신도 때로는 헷갈릴 때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예배 중의 순서에서 찬양대인가 성가대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통합 측 총회에서는 찬양대라고 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수많은 교회들이 성가대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는 여기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성가대(聖歌隊)와 찬양대(讚揚隊)의 용어 차이 두 용어는 일반적으로 보면 거의 같은 말이다. 국어사전에도 성가대는 “교회 등에서 성가를 부르기 위해서 조직된 합창대”라고 했고, 찬양대도 “남녀 기독교 신자로 조직된 합창대”로 둘 다 영어로도 ‘choirs’로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같은 듯 다른 용어이다.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성가와 성가대란? : 먼저 일반적으로 성가라는 용어는 범(凡) 종교적으로 사용하는 말로서 일반적인 음악과는 다른 거룩한 음악이란 뜻이다. 그래서 성가는 범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는 ‘종교음악’으로서 세속적인 노래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의 찬불가는 불교의 성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 용어가 전혀 언급이 없다. 오직 찬양 혹은 찬송으로 표현되어 있다. 2. 찬양과 찬양대란? : 찬양이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으로서 참된 경건의 중요한 요소이다. 즉 찬양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성육신과 십자가 지심과 부활, 종말과 재림 등의 구속의 은혜를 노래하는 것이 찬양이고 또 함께 부르는 것이 찬양대인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가진 찬양은 개역성경에는 213회, 찬송은 98회, 찬미는 14회가 나온다. 하지만 성가란 말은 한 곳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찬양은 일반 종교의 성가와는 차원이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만을 높이는 노래인 것이다. 3. 성가와 성가대란 말을 교회에서 사용해 온 이유는? : 왜 성경에도 없는 이 용어를 그동안 교회에서 사용해 왔을까? 그 이유는 1976년에 나온 공동 번역 성경에서 개역성경의 “노래하는 자”, “성가대”로 12회에 걸쳐 번역을 했다. 또 하나의 성가대란 용어의 기원은 한 출판사가 흑인 영가의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곡집”이라 부른 것이 성가대의 이름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의 ‘세이까다이’(성가대 せいかたい, 일본 사람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며 노래할 때 쓰는 용어)가 직수입되면서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서 그동안 찬양대라고 했던 용어가 성가대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성가대란 말은 일본어의 잔재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가대란 말은 1958년 출판된 동아출판사 사전에도 성가대란 명칭이 없었으나 1994년 민중서관의 국어사전에서 처음 등재되었고 그 이전에는 성가대라는 말이 고정되어 사용되는 곳은 일본의 ‘세이까다이’뿐이었다. III. 결론과 제언 앞서 서론에서 밝힌 대로 성가대와 찬앙대라는 말은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동안 큰 문제 없이 사용해 왔기 때문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성경에도 없는 말이며, 일본어의 잔재라는 문제도 있다고 볼 때, 또한 타 종교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굳이 성가대란 말을 계속 사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성경에도 없는 성가나 성가대란 말보다는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사용해 왔던 찬양, 찬양대란 우리 고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올바른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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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성경의 큰 그림과 안식(1)
1)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창조되었다(창1:26~28).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일 때 가장 행복하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안식한다. 사람은 창조 되자마자 안식을 살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함께 안식하시려고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을 완벽하게 창조하셨다. 완벽이 무엇인가? 완벽하다는 말이 단순하게 세상을 좋고, 아름답게 창조했다는 말로만 보아선 안 된다. 물론 그런 뜻도 있다. 그러나 완벽하게 창조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상태를 말한다. 비 인격체인 피조물이 완벽할 수 있는 것은 인격체인 사람이 완벽할 때 완벽할 수 있다. 모든 피조물들이 사람의 손에 주어졌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하나님과 동일시 될 때 완벽하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하게 세상을 창조하셨다.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였고 완벽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로 완벽했다. 그래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 되게 하신 일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 될 때 완벽하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임마누엘을 이루시는 날 우리는 하나 되었다. 완벽 해졌다. 회복된 날이다. 하나님의 완전함 같이 우리도 완전해졌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고 하셨다. 안식을 말한다. 완전함을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임을 알 때 완전하다. 또 이것이 행복이고 안식이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 이것을 보고 안식의 삶이라고 한다. 완벽하기 때문에 더 이상 무엇을 보텔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안식은 피곤해서 안식하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어 안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고 완벽하기에 안식이다. 점이라도 하나 더 찍으면 작품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붓을 놓는 화가처럼 완벽하고 부족함이 없어 쉬시는 것이 안식이다. 사람은 창조되자말자 안식을 살았었다. 보기에 심히 좋았다. 하나님은 인간을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당연히 모든 피조물도 완전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가 하나님의 첫 번째 그림이다. 하나님의 큰 그림은 안식이었다. 2) 사단에게 속아 안식을 잃었다 사람은 사단에게 속아 합법적인 하나님과의 분리가 일어나 버렸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완전함이고, 안식인데 안식을 잃어버린 것이다. 마귀에게 속아서 신적 통치권을 빼앗겨 버렸다.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함으로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는 말씀대로 되었다. 그 결과 안식, 즉 임마누엘의 완벽함을 잃어 버렸다. 마귀도 언제나 말을 먼저 먹인다. 마지막 때도 마귀의 주된 일이 말을 먹이는 일을 한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계12:15)라고 했다. 여자인 교회를 말인 물로 떠내려 보내려 한다. 뱀인 마귀는 입에서 물을 토하는 것이다. 다른 복음을 많이 토한다. 다른 복음은 없다. 하늘의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갈1:8). 마귀는 다른 말을 토해 냄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큰 그림인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은 안식이다.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보아야하는데 보지 못하게 다른 말을 넣는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고 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의 그림인 안식이 없으면 두렵다. 안식을 보지 못하는 자의 모습이다. 안식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내가 다른 복음을 먹었습니다."라고 스스로 확증한다. 스스로 벗었다고, 두렵다고 고백한다. 그전에도 벗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누가 너에게 벗었다고 알려줬느냐"고 물으신다. “누가 그런 말을 해 주더냐”라는 뜻이다. “네가 무엇인가 스스로 입어야 한다고 누가 말 하더냐”는 질문이다. 지금도 사단은 우리가 예수 외에도 무엇을 입어야 한다고 속삭인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왜 따먹었느냐?"라고하시지 않고 "누가 벗었다는 것을 알려줬느냐?"라고 물으셨다. 말의 권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 주는 순간이다. 사단의 속임수는 다 말로부터 온다.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말을 들으면 보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큰 그림이 보인다. 사단의 말을 들으면 벌거벗음이 보이게 된다. 두려움을 보게 되고, 두려워 숨게 된다. 주님이 입혀 주신 것 외에 뭔가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엔 온전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하는가? 말이 온전하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고 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욕도 안해야하고,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욕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말이 온전하려면 복음을 말하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이다. 복음을 말하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우리도 온전할 수 있다. 온전한 말을 하면 아버지의 일인 안식을 보게 된다. 우리에게 너무나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한다. 너무 아까운 세월을, 아까운 인생을, 남의 이야기하다가 다 보낸다. 비판과 불평불만만 하다가 시간을 다 보낸다. 안식이 있을 리가 없다. 사단은 말로 우리를 속였고 속이고 있다. 안식은 우리의 믿음의 말에서 온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10:10). 마귀에게 속아 안식을 잃어버린 것은 말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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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희생
우리는 봄이 오면 마음이 들떠 어디론가 꽃구경을 가기를 원하고, 늘 가는 곳이라 할지라도 봄꽃이 핀 곳이면 가족들이 나들이하는 경우가 많다. 4월 초순에 비가 오는 산복도로를 거쳐 교회에 가는 도중에 아름답게 피어있는 벚꽃을 바라보는 순간 “아! 이렇게 아름답게 핀 꽃을 비바람이 망치면 어떻게 하지?”하는 걱정이 앞선다. 내 집 정원의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거워할 수 있는 벚꽃을 비바람 때문에 망치게 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통상 벚꽃은 일본의 나라꽃이라 생각하고 별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은데 실상은 원산지가 우리나라 제주도라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나라의 꽃이니까 더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라 믿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잎도 피우지 않고 살얼음이 언 메마른 땅속에서 뿌리를 내려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한겨울 내내 자기의 몸을 단단히 무장하여 정한 시간에 꽃을 피우는 식물이 바로 벚꽃이라는 데서 관심이 더 가고 피어있는 그 자체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가정집 정원에 있는 꽃나무들은 그래도 춥다고 싸주기도 하고 거름도 하며 옮겨주기도 하고 가지치기도 하지만 벚꽃은 차가 많이 다니는 길가나 산 중에서 전혀 무관심 속에 홀로 자립하여 이른 봄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 너무 장하고 아름다울 뿐이다. 꽃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수 있는 시간은 겨우 일주일도 안 되기에 항상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렇게 고생하여 잠간 동안을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선사하기 위해 정말 희생한 벚꽃의 수명이 좀 오래 지속 되면 얼마나 좋으랴. 게다가 벚꽃이 질 때에도 벚 눈을 내려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아무 불평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따뜻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마치 눈이 오는듯한 모습으로 꽃눈이 낙화한다. 그것이 바로 자연적인 아름다움의 자체가 아닐까? 흰 꽃잎이 떨어진 것은 분명히 하얀색인데 바람이 불어 모인 블럭 바닥은 분홍색 꽃눈으로 소복하게 쌓인다. 눈은 밟으면 ‘뽀드득’이란 소리라도 내지만 떨어진 꽃눈은 아무리 밟아도 소리를 내지 않고 인간의 발과 자동차의 바퀴에 짓밟히며 휘날릴 뿐이다. 오직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순종하여 이렇게 끝까지 희생하는 것이 바로 벚꽃이라는 것에 나는 감동을 받는다. 우리 주위에도 다른 사람의 아무런 도움이 없이 주님이 말씀하신 일들을 잘 수행하여 사회에 귀감이 된 아름다운 모습이 매스컴에 등장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분들은 오직 자기에게 주어진 미션을 좌우를 살피지 않고 오직 앞만 바라보고 나아갔기 때문에 큰일을 해내었을 것이다. 한낱 미물과 같은 식물도 말없이 자기를 희생하고 아름다움을 선물하는데 우리가 기대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지 못하면 실망하고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벚꽃은 자기의 아름다움을 봄꽃으로 인간인 우리에게 잠간 보여주기 위해 동한의 춥고 쓰라린 고통을 다 견뎌내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변함없이 희생한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믿음의 형제들과 이웃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정말 벚꽃처럼 나를 희생하고 말없이 맡겨진 일을 수행하는 데 최선을 다하면 우리가 사는 곳이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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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저축할 내용 (창41:46-57)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에 보도 된 내용에 의하면, <영국 교육과정평가원>이 새로운 아동 교육개혁 방안을 발표 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11세-16세까지 중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금융교육을 학교 정규 과목으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수학을 배우고 과학을 배우는 것처럼 이 수업을 통해서 스스로 부채를 관리하는 것을 배우고,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 연금 계획 짜는 것을 배우고, 금리를 계산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는 9월부터는 모든 <영국>의 5세 된 아동들에게는 정부로부터 250파운드가 지원 되어서 자신의 펀드를 개설하게 된다고 합니다. 일반 가정의 아동들에게는 250파운드(약$500)의 펀드 자금이 지원되고 저소득층 아동들에게는 500파운드의 펀드 자금이 지원된다고 합니다. <영국>정부가 이렇게 어린 아이들에게 조기금융교육을 실시하는 까닭은 매년 해마다 개인 파산 신청자들이 늘어나는데 대한 대처 방안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사람이 일찍 돈을 알면 좋지 않다고 해서 어린아이들에게 돈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돈을 가르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돈의 가치를 알게 해야 하고, 올바르게 돈 버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고, 올바르게 돈을 저축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보다 더 안정된 내일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안정된 내일을 사는데 있어서 저축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 가운데 꼭 저축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많이 저축할수록 보다 나은 내일을 보장해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저축해야 할 것들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물질을 저축해야 합니다.(창41:46-57) 둘째로, 기도를 저축해야 합니다.(시32:6-7) 셋째로, 선행을 저축해야 합니다.(딤전6:17-19) 필요하고 좋은 것들을 많이 저축해서 오늘 보다 내일이 더 안정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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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해녀의 욕심
‘물숨’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제주 출신의 고희영 감독이 7년 동안 제주도 우도(牛島)의 해녀들과 함께 지내면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잘 몰랐던 해녀들의 삶을 속속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해녀들에게는 계급이 있습니다. 제일 높은 계급인 상군은 가장 깊은 바다까지 들어가서 작업을 합니다. 보통 15-20미터의 바다까지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중군이고, 맨 마지막 하군은 일명 똥군이라고도 부르는데, 2미터 이하의 바다에서만 작업을 합니다. 그 해녀들의 계급은 노력과 경험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자신의 숨 길이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바로 그 숨길이로 계급이 정해진다고 합니다. 이렇듯 상군, 중군, 하군 이라는 계급에 따라 해녀들이 작업하는 바다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하지만 모든 해녀들이 바다에 들어갈 때마다 동일하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물숨’입니다. 물숨은 바다 밖에서 숨을 쉬는 것과는 달리 바다 밑에서 들이마시는 숨을 의미합니다. 이 물숨은 해녀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아주 무서운 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에 한 두 명의 해녀가 물숨을 먹고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물숨은 다른 말로 하자면 욕심입니다. 자신의 숨 길이만큼 숨을 참으면서 작업을 하던 해녀가 다시 숨을 쉬기 위해서 물 위로 올라가려 합니다. 이 때 저 밑에 큼지막한 전복이 해녀의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그 순간, 그것에 대한 욕심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전복을 따기 위하여 물 아래로 내려가는 해녀는 그 물숨을 먹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사고를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면서도 욕심을 이기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해녀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은 자신의 숨만큼만 해산물을 따서 재빨리 물 위로 나오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부질없는 욕심을 경계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러하기에 해녀들은 바다를 가리켜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다는 무서운 곳이지만, 욕심을 버리면 친정엄마처럼 다 내어 주는 곳이야!” 우리는 손안에 그 무언가를 움켜쥐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숨을 참으며 견뎌냈을까요? 우리 또한 욕심내지 않아야 할 것,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에 욕심을 내다가 물숨을 마시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장 14-15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만족하는 법을 모릅니다. 진짜 자신들에게 필요한 영적인 것에 대한 열망은 없이 사실은 지금 필요하지 않는 것들을 위해서 더 더를 외치며 욕심에 사로잡혀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에든지 욕심을 품는 순간 불행이 시작됩니다. 욕심이 많을수록 불만이 많아지고 마귀의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욕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죄에 가장 약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욕심은 하나님께도 응답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다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에 응답하시지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여서 기도 응답에 대해서 의심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야고보서 4장 3절에서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의 기도는 좋아도 너희의 욕심은 싫다, 나는 결코 너희의 욕심에는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욕심을 내고 또 내지만 사실은 욕심으로 인해서 인간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서 이미 내게 주신 것에 자족하는 데 있고, 그 자족에서 진정한 감사가 나오고, 그 감사로 인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제 헛된 욕심의 물숨을 버리고 자족과 감사의 바른 숨을 쉬면서 진정한 행복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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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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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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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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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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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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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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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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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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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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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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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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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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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10: 投票(투표)와 表決(표결)과 票決(표결)의 차이
- I. 서언(序言)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또 다시 지방선거의 열풍이 온 나라를 휘감고 돌았다. 이번 호를 받아보시는 시간이면, 벌써 투표를 다 끝낸 분들이 많을 것이다. 이런 즈음에 투표와 그에 관련된 단어들을 논하고자 한다. 投票(투표)와 表決(표결)과 票決(표결), 같은 듯 다른 이런 용어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필자의 경우도 무수한 회의에 참여하거나 사회를 보는 경우에 때로는 이런 단어의 차이점에 대해서 혼란이 올 때가 있었다. 또 어떤 회의들은 은혜롭게 잘 진행되는 회의들도 있었고, 위와 같은 용어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진행의 미숙함으로 인하여 갑론을박 하며 논란이 벌어지는 경우들도 종종 보기도 했다. 이에 본 호에서는 이와 같은 혼란을 피하기 위해 용어 정리를 해 보고자 한다. II. 투표(投票)와 표결(表決)과 표결(票決)의 차이 ‘표결’이란 무엇인가? 참고적으로 어떤 단체의 표결에 대한 회의 규칙을 보면, ‘표결은 투표, 기립, 거수, 발성 등의 방법으로 한다.’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필자가 참석한 어떤 회의에서는 잠시 혼란이 왔다. 그 이유는 여기의 ‘표결’과 ‘투표’에 대한 뜻을 의장이나 회원들이 잘 구분하지 못한데서 온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 두 용어는 어렵지 않은 상식 수준에서 판단 할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의외로 이 두 용어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이에 본 호에서는 표결과 투표에 대한 용어분석과 회의시의 용도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1. 표결의 뜻: 표결은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그 종류와 사전적인 의미를 보면, 表決(표결)과 表決權(표결권)이 있고, 또 票決(표결)이 있다. 그 의미를 논하면 다음과 같다. 1) 表決(표결) : 여기서의 표는 한자의 뜻 그대로 본다면, ‘겉 表’, ‘정할 決자’로 결 정을 겉으로 표시한다는 뜻이다. 사전적인 뜻을 보면, 법률적인 의미로서 ‘토의 안건에 대한 가부(可否)의 의사를 표시하여 결정하는 일’로서 주로 다수결에 의하여 결정할 때의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2) 表決權(표결권) : ‘회의에서 회원으로서 表決(표결)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3) 票決(표결) : 한자의 뜻 그대로 본다면, 표시 할 때의‘표(票)자’로 결정을 표로 표시한다는 뜻이다. 사전적인 뜻을 보면,‘투표로서 결정하는 일’이다. 이상으로 볼 때 위의 表決(표결)과 票決(표결)은 한글의 용어로는 동일하지만 한자어로 볼 때는 다른 용어이다. 서로 비슷한 것 같지만 같은 말이 아닌 것이다. 2. 방법에 있어서의 표결 : 표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앞에서 언급한 어느 단체의 회의 규칙에서 본바 대로, ‘표결은 투표, 기립, 거수, 발성 등의 방법으로 한다.’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이 외에도 회장이 회원들에게 ‘의의 있습니까? 라고 질문하고 ’가부’를 묻는‘약식표결(略式表決)’방법이 있고,‘예와 아니오.’로 결정하는 구두 표결(口頭表決)도 있다. 또한 결정시에 아무 말을 하지 않는 침묵표결(沈黙表決), 회장이 한 사람씩 이름을 불러서 찬반을 묻는‘점호표결’등이 있다. 3.투표(投票)에 대한 용어: 앞에서 언급한 표결과 그 의미에 있어서 자주 혼란을 주는 용어중에 투표(投票)가 있다. 이는 표결 방법 중의 하나로서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1) 投票(투표) : 먼저 한자의 뜻 그대로 본다면, ‘던질 投’, ‘표 票자’로 ‘표를 던진다’는 말이다. 사전적인 뜻을 보면, ‘선거 또는 어떤 의견 체결을 할 때 각 사람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 표지(標紙)에 이름, 부호 또는 의견을 개입하여 일정한 장소에 제출하는 일’로 되어 있다. 2) 投票權(투표권) : 한자의 뜻 그대로 ‘투표권 행위를 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즉, 투표는 표결의 한 방법이지 표결 자체가 아닌 것이며, 표결도 한자어의 표기에 따라 그 의미와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III . 결 어(結語) 마지막으로 표결의 결과에 대해서 잠시 논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결정을 했든 가결(可決), 미결(未決), 부결(否決) 등의 결과가 나온다. 여기에서 선거의 경우는 당선과 낙선이란 말을 사용하고 의제인 경우는 가결과 부결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부연한다면, 表決(표결)과 票決(표결), 投票(투표)는 혼돈하기 쉬운 서로 다른 용어들이다. 각종 회의 시에 이를 구분하지 못함으로 인해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보면서 이에 관한 용어들을 논하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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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10: 投票(투표)와 表決(표결)과 票決(표결)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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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나그네 인생
- 우리는 종종 이 세상은 우리의 본향이 아니요, 우리는 그저 나그네 인생을 살 뿐이라는 말을 합니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라는 노래도 한 때 유행을 했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발붙이지 않고 나그네 인생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아브라함과 신앙의 열조들이 이 땅에서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히 11:9). 아브라함도 헤브론에 있는 헷 족속에게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창 23:4)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약속의 땅 가나안 아브라함의 ‘우거하는 땅’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창 17:8). 이 땅은 또한 이삭과 야곱이 우거하는 땅이기도 했습니다(창 28:4, 37:1). 우리도 이들을 모범으로 삼고 영원한 하늘나라의 상급을 생각하며 짧은 인생 나그네처럼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그네처럼 사는 삶이란 어떤 모습일까요? 이 땅은 허망한 것이니 오직 영원한 하늘 나라만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삶일까요? 나그네 삶을 살았던 아브라함과 열조들이 언제나 소위 내세의 영적인 문제에만 사로잡혀 생활 했을까요? 아브라함의 가슴을 환희와 즐거움으로 채워준 위대한 약속이 단지 하나님과 천군 천사들과 더불어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것뿐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누렸던 축복은 오히려 땅의 기름진 축복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12장에서 이 내용을 잘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은 이 지구 전체 모든 족속을 향한 큰 축복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생육하고 번창하여 큰 민족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실제로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축복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이 왜 이 땅에서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성경은 약간의 대답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창 12:6)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에 이미 거하고 있던 시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나안 족속들의 죄악과 사악함이 이미 하늘에 들렸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 땅의 거민들과는 거리를 두고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가나안 거민들은 결국 이 약속의 땅에서 물러가야 하는데 아직 그런 때가 되지 않았기에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은 그들 가운데 거하면서도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아모리 족속이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않았던 것입니다(창 15:16). 가나안 족속이 약속의 땅에 살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았다고 한다면 다윗의 시대에는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다윗이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때에 드린 그의 아름다운 기도를 생각해 봅시다: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대상 29:15). 여호수아와 사사기의 기록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하여 가나안 사람들 가운데 거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시대에도 가나안 족속들이 아직도 그 땅에 있었기 때문에 다윗은 왕으로서의 모든 권리와 축복을 누리면서도 자신을 열조와 다름없이 나그네요 우거한 자로 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아가는 이 삶이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들의 신분이어야 합니까?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이 땅은 나의 본향이 아니다”라고 노래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만을 소망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일까요? 우리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은 유혹을 받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살지 않았느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8:20)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우리도 본향을 사모하며 이 땅에서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창조 세계의 회복을 소망하고 도래할 새 예루살렘과 새 땅을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다른 질문을 해 보아야 합니다. 산업화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아직도 가나안 사람들 가운데 우거하고 있는가?”라고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제는 가나안 사람들 가운데 살지 않으니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인종적으로 가나안 사람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할까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종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또는 문화적으로 셈, 함, 야벳 족속을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세계는 지금 국제결혼과 문화적 교류, 그리고 세계화를 통해서 하나가 되는 지구촌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가나안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종적으로나 지리적인 구분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가나안 사람들에 저주가 임하도록 기도할 수 없습니다. 대신에 우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명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과업은 인종적으로 가나안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땅 끝까지 모든 민족과 방언과 모든 족속들을 향해 하나님 나라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세상 모든 족속과 민족과 방언을 향해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나그네요 우거자라는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야 합니다. 인종적으로 가나안인 민족들을 향해서 저주하거나 미워하거나 두려워하는 삶이 아니라 구원과 용서와 사랑을 주기 위한 그리스도의 초대를 선포하면서 다가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들을 이미 우리에게 임했고 앞으로 온전히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도록 초대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함께 죄악된 삶의 영역에서 본토인이 아니라 진정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면서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진정한 왕이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땅 끝까지 선포하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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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나그네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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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동행의 조건 (창5:21-24)
- 얼마 전 TV뉴스 중에 전국에 꿀벌이 사라지고 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습니다. 활발하게 활동을 해야 할 꿀벌들이 죽거나 흔적 없이 사라지고 벌통이 텅 빈 채로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고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미국은 전체 벌의 약 40%가 사라졌고, 유럽은 약 70%가 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자연재해 때문인지 아니면 바이러스 때문인지 명확한 원인 규명을 밝혀내질 못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물리학자였던 <아인슈타인>이 말하기를, “이 세상에서 꿀벌이 사라지는 날 인류는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을 한 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꿀벌이 사라지는 것을 단순한 자연 현상으로 보지 않고 종말의 징조로 보는 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과연 <아인슈타인>의 예언대로 인류의 종말이 가까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분명 종말이 임박한 것 같습니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환경적으로 종말이 임박했음을 알 수 있는 징조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종말이 임박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있다면 이 시대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종말의 때에 합당한 삶의 자세는 바로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늘로 동행할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하늘로 동행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산창교회 성도들 모두가 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든든한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 할 수 있을까요? 첫째로, 믿음이 있어야 동행할 수 있습니다.(창5:21-24) 둘째로, 결단이 있어야 동행할 수 있습니다.(민10:29-32) 셋째로, 순종이 있어야 동행할 수 있습니다.(창22:6-14) 금년에 우리 모두 하나님과 동행하시므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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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동행의 조건 (창5: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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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2)
- 하나님의 넓은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넓고 깊은 사랑입니다. 인간의 머리나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넓은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신 이유는 사랑이 많으시고 마음이 넓으시기 때문입니다. 넓고 크신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온 우주를 품으시고 수 많은 죄인을 품으시고 사랑해주십니다. 사랑의 마음은 넓은 마음입니다. 좋은 사람 좋은 리더의 기준은 넓은 마음으로 포용해 주는 사랑을 실천하는 자입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살면 누구나 사랑할수 있고 골라서 사귀지 않게 됩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만 사랑하고 관계 맺는다면 많은 사람을 얻을수 없습니다. 사랑하면서 사는 자는 많은 사람을 얻게 됩니다. 많은 사람을 알고 지내며, 사람 얻는 것이 재산이요 축복입니다. 사랑하면 좋은 인맥을 가지게 됩니다. 사랑은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넓은 마음 포용력 넓은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을 묵상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넓은 사랑을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긍휼, 자비, 불쌍히 여겨주심, 오래 참으심, 은혜로우심, 인자하심이 풍부하심, 노하기를 더디하심, 지키시고, 도와주시고, 함께 하십니다.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선한 목자,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않으심, 용서하시는 하나님 등 다양하게 하나님의 넓은 사랑을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둘째 아들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의 넓은 사랑을 가르쳐줍니다. 아버지 집에서 떠나간 아들, 망한 아들 가난해진 아들, 허랑방탕한 죄를 짓고 실패한 아들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 돌아왔을 때 기뻐하고 잔치하는 아버지의 넓은 사랑 하나님의 넓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넓은 사랑은 죄지은 자, 망한 자, 실패한 자 까지도 사랑하시고, 포용하시고, 사랑하는 넓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탕자같은 삶을 살았는데 우리를 사랑하시고 품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구원 받을 자격 없는 죄인이었는데 하나님의 넓은 사랑 으로 선택 받고 구원 받은 자입니다. 호세아가 음란한 여자 고멜을 사랑한 말씀은 하나님께서 죄가운데 음란하게 하나님을 멀리 떠나 세상과 벗되어 살던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넓은 사랑을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삶이 변합니다. 사랑은 감동을 줍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으로 사랑하면 감동을 주고 사람들이 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 충성하게 됩니다. 사랑의 리더십은 관계의 리더십입니다. 사랑이 제일이고 최고의 리더십 관계의 비결입니다. 사랑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자가 이기고 승리합니다. 사랑은 아픔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쉽지 않고 고통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면서 산다면 승리자의 삶을 사는 자입니다. 사랑하면서 사는 자는 사랑받고 존경받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존귀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은 넓은 사랑을 가지신 선한 목자 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사랑 넓은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참된 예수님의 제자의 증거는 ‘서로 사랑하는 자’라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누구나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자까지 사랑하는 것이 참된 사랑입니다. 사랑이 전부이고 지혜이고 능력이고 리더십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넓은 사랑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의 책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버리시거나 미워하시지 않습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연약을 아시는 하나님, 우리가 약하여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 마음 아파하시면서 사랑하십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할 때 똑똑하고 성공하는 자녀만 사랑하지 않고 못난 자녀 실패한 자녀, 병든 자녀를 가슴 아파하면서 늘 생각하며 사랑하게 됩니다. 성경 전체의 중심은 하나님의 넓은 사랑이십니다.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전 세계를 통치하십니다. 사랑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고 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라 무조건 사랑해 주십니다. 우리가 부족하고 약점이 많아도 내 모습 이대로 받아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본질 속성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미워하는 것, 죄짓는 것을 안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랑해서 징계하시고 고난을 주어 연단시키시고 깨끗하게 하십니다. 고난과 시험도 감당할만한 고난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행하시는 하나님이 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고 힘들 때 불평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으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마귀는 싫어 하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뜨겁게 사랑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나누면서 사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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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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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베드로(Peter's Behind Stories)-열정의 사도 2
- 그는 곧 바로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으며 얼마나 비겁한 자였는지를 통곡하며 회개했다. 그러나 베드로가 이같이 회개할 수 있었던 것은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막 14:72) 했고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께 받은 말씀을 들어야 기억이 나고 깊이 생각할 때 회개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연약함 가운데서 지도력이 개발되었다. 그가 물 위로 걸어간 사건이나(마 14:28),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메시야이심을 강조한 고백이나(마 16:16; 막 8:29; 눅 9:20), 그 외에 형제가 범죄 했을 때 몇 번 용서해 주리이까(마 18:21)라 하고 묻는 질문에서 베드로가 항상 제자들을 대변하는 대표자 같이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열두 사도의 중심인물을 언급할 때도 베드로는 항상 선임으로 언급되고 있다. 베드로의 우위성은 다른 여러 방식으로 나타난다. 주님은 제자들 중 가장 먼저 가버나움에 있는 베드로의 집에 가셨으며(마 8:14; 막 1:29; 눅 4:38), 갈릴리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도 베드로의 배를 띄우게 하셨고(눅 5:3), 결정적인 중요한 때 예수 부활의 첫 목격자로서 베드로에게 보이셨다(눅 24:34; 고전 15:5). 이는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이후에도 그의 동료인 주님의 제자들을 다시 모으는 임무를 베드로가 맡게 되었다(눅 22:31-32). 그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랐으며, 또한 초대교회 중심적인 지도자였다. 베드로가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교회의 지도자로서 준비되어 있지 못했다. 그러나 부활신앙으로 베드로와 모든 제자들은 사도적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다. 이 같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먼저 본 자가 사도 중에 으뜸이 되는 것과 부합한다. 베드로의 오순절 성령 체험 베드로의 인간적인 절망보다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더 크고 오묘하다. 다듬어지지 않은 바윗돌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 체험 이후 새로운 믿음의 옷으로 단장되었으며 반석 같은 굳건한 믿음의 사도가 되었다. 그는 오순절에 임한 성령을 받고 하루에 오천 명을 회심케 하는 부흥을 일으켰다.오순절에 행한 설교는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일으켰다(행 2:14-36).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파한 빌립을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돕기도 했다(행 8:14-24). 백부장 고넬료 가정에 세례를 주었고 예루살렘 회의에서 야고보, 요한과 더불어 이방인 구원 문제를 옹호하였다(행 15:1-29). 베드로는 초대교회에서 최고의 실력자가 되었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활약한 반면에 베드로는 유대인의 사도로서 맹활약 했다. 그는 고린도와 로마에 교회를 세움으로서 초대교회 지도자로서 많은 일을 했다. 사도행전 전반부 12장에서 15년간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탁월한 지도자였다. 다른 사도들은 별 언급이 없다.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 성전에 갈 때도 베드로를 따라갔다(행 3:1). 요한은 주도권을 가지지 않은 둘째 인물이었다. 사도들 보다는 일곱 집사들을 언급하고 있다. 스데반의 설교와 그의 지도력은 탁월했다(행 6:8-8:1). 빌립은 핍박으로 인해 예루살렘에서 쫓겨났을 때 사마리아와 가사로 가는 도상에서 설교했다(행 8:4-8, 26-40).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선별하고자 할 때 제의한 사람도 베드로였다(행 1:15-22). 베드로는 오순절에 순례자들에게 설교할 기회를 얻었다. 이때 그의 설교를 들은 자들 중에 삼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으며(행 2:14-41), 오후 3시 기도시간에 성전에 기도 하러 갔다가 앉은뱅이를 고치는 역사도 일어났다(행 3:1-26).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협박에도 두려워하지 않았다(행 4:1-31).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 소유를 판 얼마를 감추고 사도를 속였을 때 베드로는 그들의 위선을 책망하고 저주함으로 죽었다(행 5:1-11). 그는 사람보다는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예루살렘에 박해가 일어났을 때 사도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쫓겨났다(행 8:1). 베드로는 사방으로 두루 다녔다(행 9:32). 당시 그들은 아람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었으며 베드로는 룻다와 욥바에서도 사역했다(행 9:32-43). 그는 가이사랴 백부장 고넬료 집에서도 복음을 전했다(행 10:1-11:18). 이 같은 것을 볼 때 예루살렘과 그 부근에서 베드로의 지도력이 탁월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다른 곳으로 갔다(행 12:17).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디 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아내가 동행했음은 분명하다(고전 9:5). 아마 시리아 안디옥으로 간 것으로 짐작하지만 그는 확실히 그 성을 방문했다(갈 2:11). 고대 전승에 의하면 그가 안디옥에 첫 번째 감독을 했다고 한다. 그가 초기에 그 교회를 방문 했으리라는 것과 실제로 영향을 끼칠 만큼 오랫동안 그 곳에 머물렀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그는 소아시아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곳 역시 방문했을 것이다. 고린도에 게바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보아 고린도와 이웃 지역에도 갔을 것으로 본다(고전 1:12). 베드로의 로마 방문에 관한 것에 대한 많은 견해는 있으나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는 그 사실을 발견할 수 없다. “바벨론에 있는 교회”(벧전 5:13)에서 그 근거를 제시한다. 당시 로마를 은밀히 바벨론이라 불렀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활동했다는 것은 안디옥 감독 이그나티우스(Ignatius)도 로마로 가는 도상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고린도의 감독 디오니시우스도 그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했으며 로마에 가서 복음전하다가 순교했다고 한다. 이레니우스(Irenaeus)도 바울과 베드로는 로마에서 설교하면서 교회의 기초를 놓았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는 베드로 전서가 기록된 곳은 로마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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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베드로(Peter's Behind Stories)-열정의 사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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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순 교 자
- 한 초등학생이 자기 어머니에게 순교가 옛날에 믿음이 좋은 어른이 자기 믿음을 지키려다 돌아가신 것이란 것을 알고 자기 엄마에게 대뜸 “엄마, 엄마도 순교자 처럼 순교할 수 있어?”라고 묻는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님을 말하고 대화를 마무리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도 요즘같이 실제 보기에 평화스러운 시대에는 순교자가 나타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먼저 잘 안다. 그러나 지금도 이슬람 국가에서 기독교인의 박해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놀랍게 일어나는 순교의 현장을 목도하고 그저 우리의 마음만 아파할 뿐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순교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하여 죽임을 당하거나 말이나 행위로 자신 의 신앙을 부인하기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행위를 말하고 대의명분을 위해 순 교한 사람을 순교자라고 부른다. 역사적으로 오랜 박해를 받아온 유대교에서 순교 의 이상적 형태가 전승되어 왔었는데 기독교나 이슬람교에 영향을 크게 미친 것은 사실이다. 여러 종교들이 이를 교육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웃에 순교자의 삶을 살고 간 분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함안 부봉 교회의 이현속 전도사를 들지 않을 수 없다. 그 분은 일제 강점기에 한상동 목사나 주남선 목사처럼 유명하진 못했으나 젊은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신사참배를 거부 하고 생명을 버리기까지 일제에 맞섰던 것은 정말 존경할 만한 일이다. 일본 순사의 혹독한 고문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여 주님을 배반하지 않 은 것은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을 발휘한 최고의 순교자요 변치 않는 믿음의 훌륭 한 선배라 하겠다. 훌륭하고 이름 있는 목회자가 아니었지만 젊은 나이에 변절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순교한 것은 그 어떤 분보다 훌륭한 것이기에 재조명 받아야 마땅하다. 끝까지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에도 굽히지 않고 버티다가 평양 형 무소로 이송되어 간 뒤 해방을 불과 3개월 앞두고 순교하신 것은 슬프다. 지금은 평양 돌박산 기독교 공원묘지에 잠들어 계신다고 하니 정말 가슴이 아프다. 요즘은 부모도 교역자도 순교자의 값진 순교의 삶을 교육하기보다 늘 축복에만 치중하다 보니 회개와 순교란 말씀을 듣기 힘들다. 국가에서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분을 쉽게 애국자로 인정하지도 않는다. 최근에는 순교자들을 위한 순교지 성역화 작업은 놀라운 규모를 자랑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고신총회나 재건 총회 이외에는 개신교의 대부분이 신사에서 참배했으며 전쟁을 지지하고 배교했던 것은 지울 수 없는 부끄러운 사실이다. 그런 역사적 사실이 있음에도 참회는 고사 하고 신사 참배를 거부하여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당한 순교한 자들을 입으로만 높임으로써 마치 자신들이 후예인 양 자랑하는 모순을 연출하고 있는 것은 위선 이다. 특히 외국 선교사 묘지도 단장하고 그 역사를 소유하여 자기의 업적을 높이 거나 상술에 이용되는 것은 순교자를 다시 한 번 욕보이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2000년이 되면서 교회가 쇠퇴하기 시작하자 경쟁하듯이 역사실과 박물관을 건립 하여 유적지 지정에 힘을 쓴다. 100년 넘는 교회들은 왜곡까지 하면서 자기 교회 역사를 거룩하게 미화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뼈를 탑에 넣고 모시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선배의 순교신앙을 정기적으로 교육하여 그 정신을 이 어 받고 순교신앙을 이어받는 뼈대 있는 신앙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야 몰락의 위기에 서있는 기독교의 쇠퇴기를 이길 수 있고 혼란기에 겪고 있는 죄악의 불감증을 치유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목회자와 부모는 함께 즐거운 하 루를 보내고 축복을 말하는 것도 좋지만 가까이 있는 순교지에 들러 순교자의 숭고 한 믿음을 이어가도록 학습지를 제공하거나 목회자는 정기적으로 순교에 관한 내용을 설교 하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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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순 교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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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무엇을 봅니까?
- 어느 책에서 본 한 교회 권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젊은 시절 남편을 여의고 유복자인 딸을 낳고 청상과부가 된 이 권사님은 시장에서 좌판을 벌여놓고 온갖 장사를 하면서 딸을 키웠습니다. 어머니의 희생 덕분인지 딸은 유학까지 갔다 와서 어느 대학교의 교수로 임용이 되었고 유능한 교수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머니는 신앙생활을 잘 하는데 딸은 고등학교 이후로 교회에 발을 끊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딸은 문득 많이 늙어버린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애잔한 마음에 이렇게 물었습니다. “엄마, 무엇이 제일 하고 싶으세요? 엄마가 원하는 것이라면 제가 뭐든지 해 드릴게요.” 그 질문에 어머니는 “나는 무엇보다 네가 잘 되는 것이 가장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굳이 나에게 뭔가를 해 주려고 한다면 주일에 교회에 갔다 오는 것을 좀 도와주면 좋겠구나.”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딸은 어머니의 의도를 알고 별로 마음은 내키지 않지만 할 수 없이 그 주일에 교회를 따라 나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주일 날, 딸은 어머니가 잠시 전도회 모임을 간 사이에 교회 휴게실에서 혼자 쉬고 있다가 여자 성도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들어보니 거의 모든 이야기가 다른 사람을 헐뜯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것들도 별 수 없군.” 딸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를 떴습니다. 그리고 2층 통로 쪽 의자에 앉아 있는데 교회 장로님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아들이 성적이 안 되니 교수님 재량으로 기부 입학을 할 수 없겠느냐는 청탁을 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교회 장로라는 분이 어찌 이럴 수 있는가 하는 생각에 치가 떨려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2층 회의실에서 몇 명의 성도들이 심하게 싸우는 소리가 바깥으로 들려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녀는 교회가 어찌 이럴 수 있느냐는 생각에 분노하면서 어머니 권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간의 이야기를 하며 “엄마, 어찌 이런 교회를 다녀요? 아예 일요일에 소풍을 가는 것이 더 낫겠어요. 다시는 교회에 오지 않을래요.”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권사님은 딸을 보며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나는 평생을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님만 봤는데, 너는 교회에 딱 하루 나와서 참 많은 안 좋은 것들을 보았구나.” 그 말에 딸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젊어서 배우지 못한 어머니가 그저 기복적인 신앙으로 교회를 다니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는 바른 신앙을 추구하는 분이었음을 직감하고는 그 앞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미술가였던 미켈란젤로가 어느 날 저녁, 몇몇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의 이야기 주제는 지금 그 자리에 없는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들추어내며 험담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밤이 깊어지면서 친구들은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함께 앉은 미켈란젤로는 전혀 자신들의 그 대화에 끼어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친구들은 미켈란젤로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그 물음에 답이라도 하듯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먼저 흰 물감으로 화폭을 가득 칠했습니다. 그리고 한가운데다 까만 점 하나를 찍었습니다. 그리고는 친구들을 향하여 묻습니다. “자네들은 지금 내 캔버스에서 무엇을 보는가?” 그러자 친구들은 그 그림 같지 않은 그림을 쳐다보면서 모두가 한 입으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까만 점밖에 없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나는 자네들이 그것을 보리라고 짐작했었지. 그러나 내가 보는 것은 다르다네. 내가 보는 것은 이 화폭의 하얗고 넓은 부분이라네.” 독자 여러분, 미켈란젤로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다 아시겠지요? 사람들에게는 검은 점 같은 오점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부분의 좋은 여백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시선입니다. 다른 사람의 단점보다 그가 가진 장점을 먼저 보고 그것을 격려하고 칭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에 그 사람은 마음의 문을 열고 나의 충고나 조언 또한 기쁨으로 받을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무엇을 먼저 보십니까? 바르게 보고 있는 것이 맞습니까?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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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무엇을 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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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열 목사] 나를 아시 나이다
- 심리학자 Ungelsma는 그의 저서 “가면으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Phoniness)에서 인간을 Being(존재)이 아닌 Becoming(되어진 자)라고 정의하였다. 인간은 결코 To be(스스로의 존재)는 될 수 없는 존재이다. 환경에 대해 인간은 Being으로 존재하느냐 Becoming으로 존재하느냐의 물음은 인간이 환경을 만드느냐 아니면 환경이 인간을 만드느냐 하는 문제가 된다. 환경론자들은 Locke의 백지설에 근거하여 환경이 인간 됨을 결정한다고 말한다. 인간존재의 양상은 우리의 사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철학적 의미가 있다. 인간은 神처럼 전지전능하지도, 동물처럼 단순히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가 아닌 중간적 존재이다. 인간의 삶은 자연과 환경 속에서 항상 문제 상황(Aporia)에 직면해 있다. Aporia에 대한 대응 방식은 동물은 본능에 구비된 방식으로 대응하나, 인간은 본능 외에 이성적 사고를 통해 대응하기에 환경에 잘 적응한다. 나를 미워한다고 나도 미워하고, 가난하다고 도둑이 되고 환경을 탓하고 세상을 원망하며 산다면 우리는 Being이 되지 못하고 Becoming으로 전락하여 나라는 존재가 상실됨을 알아야 한다. 세상이란 환경 속에서의 나는 누구인가? 내가 나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내가 알고 있는 내가 나인가? 이에 Ungelsma는 내가 나를 안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 의하여 알려진 나를 아는 것이라 하였다. 사회학자인 Cooley는 “Looking glass of Self ”(거울 자아 이론)에서 거울 속에 비친 나, 즉 다른 사람에게 알려진 나, 타인에게 알려진 나를 인식할 때 나에 대한 바른 지식을 정립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가? 사람마다 나에 대한 평가가 다른 것은 내가 나를 잘 모르고 남도 나를 잘 모른다는 의미다. 나를 정확히 아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아시는 내가 나임을 알아야 한다. 시편 139:1절에 다윗은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안다”는 말에는 희랍어로 οιδα와 γινωςκω가 있다. 오이다는 배워서 아는 것, 기노스코는 경험해서 아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는 지식은 인간처럼 배워서 경험해서가 아닌, 전지하시기에 아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보시자마자 ‘너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네 속에 간사함이 없다’고 하였다. 나다나엘은 놀라며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라고 반문한다(요1:47). 바울은 육체에 찌르는 가시가 있어 세 번이나 빼달라고 기도하였으나 하나님께서 바울이 자만할 것을 미리 아시고 가시를 준 것이라 하였다(고후12:7). 역대상 17:18절에 ‘이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까 주께서는 주의 종을 아시나이다’ 라고 하였다. 다윗이 자신과 주변 사람들 보다 자기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 대한 감격스러운 고백이다. 나의 앉고 일어섬, 나의 생각, 나의 모든 길, 눕는 것, 모든 행위, 내 혀의 말, 나의 허물과 죄, 나의 연약함과 단점, 나의 머리털 수까지 다 아시고도 사랑하는 그 안에 내 현실과 존재감이 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의 지식 속에 오늘의 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를 아는 지식만큼 환경을 극복하고 변화시키는 Becoming의 존재가 아닌 Being의 존재로서 환경을 변화시키는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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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열 목사] 나를 아시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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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바른 믿음이 중요하다.
- 바른 믿음이 중요하다. 내 생각이나 경험을 믿어서는 안 된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당신 자신을 인정하고 믿어야 한다. 그렇게 여겨야 한다. 많은 사람이 내 생각이나 경험을 믿는다. 내 생각에 갇혀서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을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고 한다. 스스로의 생각에 강하게 사로잡힌 사람들은 정신적으로도 혼란스럽다. 자신의 생각을 현실로 받아들이므로 신경성 질환에 시달리기도 한다. 내 생각대로 예수를 믿은 사람이 있다. 그래선 안 된다. 나는 이런 현상을 보이는 것을 영적 자폐증 증상이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내 생각이 어떠하던지 10년, 20년, 30년 이상 가지고 있던 생각일지라도 성경에서 그렇지 않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다고 하면 받아들여야 한다. 고정관념이 있고, 이미 굳어진 생각이라고 할지라도 그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또 성경대로 생각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학자의 마음이다. 믿음으로 인정하고 환영하면 굳은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이 되었음을 성령께서 발견하게 할 것이다. 당신 마음에 새 영이 임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믿음으로 당신 자신을 기름부음이 넘침을 인정할 때 새 마음이 생겼음을 발견하고 기뻐하게 될 것이다.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영접만 한다면 성령님은 이미 당신 안에 충만하게 거하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임마누엘로 충만한 당신을 볼 수 있는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한다. 임마누엘의 기름부음이 넘쳐 남을 믿고 능력으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바른 믿음이 중요하다. 어떻게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나? 성경대로 믿으면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성경대로 믿지 않으면 다른 복음을 믿는 것이다. 성경대로 믿지 않고 교회에 다니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 같아 보일지라도 다른 종교를 믿는 것이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 올 수 없다”는 말씀이 그런 말씀이다. 바울 사도는 안타깝게 말한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7-8)라고 한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했다. 성경대로 믿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생각대로 믿는 것이 아니다. 성경대로 믿는 눈이 열리는 것이 “지혜와 계시의 문”이 열렸다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열어 달라고 우리를 위해 기도했다. 우리도 그렇게 간구해야 한다. 말씀대로 믿으면 아주 쉽다. 하나님의 말씀한대로 믿겠다고 결정하고 나면 예수 믿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다. 말씀대로 믿겠다고 결정하면 신바람이 난다. 더 감사하다. "아하! 몰랐는데 이게 이렇구나! 야, 몰랐더니만 이게 사실이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내 생각을 더 크게 여기면 영적인 전투에서 지는 것이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라고 함이 두꺼운 성경 전부를 다 기억하며 묵상하라는 말씀일까? 그렇다. 성경 전부를 믿어야 한다. 그런데 성경 전부는 예수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임을 메시지 한다. 인간에게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시드기야 왕 때 유다가 멸망한다. 시드기야는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눈이 뽑히고 소고랑에 차여 바벨론으로 끌려갔으니 유다의 왕족과 유다는 완전히 망한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놀랍다. 앞에 잡혀간 여호야긴 왕을 하나님은 길게 살려 두신다. 여호야긴은 3개월 남짓 유다의 왕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살려 예수님의 조상이 되도록 하셨다. 그가 여고냐(마1:11)이다. 유일한 구원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해 하나님은 약속을 지켜 나가시는 것이 성경 이야기이고, 역사 이야기다. 바벨론을 급하게 세우신 것도 예수님을 보내시기 위한 작업이었다. 앗수르와 바벨론은 정책이 달랐다. 앗수르는 정복한 국가를 말살시키는 정책을 가지고 있었다. 이스라엘을 정복한 후 정복한 나라를 말살시키기 위해 여러 민족과 혼혈되게 해 버린다. 그러면 누가 독립을 위해 노력하겠는가? 이렇게 이스라엘은 흩어져 버린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는 놀랍다. 그렇게 강성했던 앗수르를 갑자기 멸망시켜 버렸다. 히스기야 왕의 기도를 통해 앗수르 군대 185,000명의 젊은이들이 송장이 되어 버렸으니 앗수르가 견디기가 힘들었다. 히스기야의 기도를 통해 바벨론을 일으키시고 앗수르를 정복하셨다. 앗수르를 정복한 바벨론의 정책은 앗수르와 다름을 볼 수 있다. 포로를 등용하기도 한다. 왕이 먹는 진미를 똑같이 먹이면서 인재들을 범국가적으로 뽑아서 공부를 시켜 120방백으로 나누어 그들을 등용시킨다. 포로들에게 어느 정도의 자율을 준 것 같다. 유대인들이 회당도 가질 수가 있었다. 다니엘서를 보면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하나님을 믿는 일까지 일어난다(단4장). 바벨론에 잡혀간 여호야긴(여고냐)를 바벨론에 항복하여 포로로 잡혀 가게 하시고 포로 잡혀간 지 37년 후에 회복된다(왕하25:27). 이렇게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일을 이방나라의 정책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어가심이 놀랍지 않는가? 성경은 예수님 이야기다. 예수님을 보내셨고 해결하셨다는 이야기다. 예수를 믿으라는 이야기다. 말씀대로 믿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을 말한다. 당신은 어떤 예수를 믿고 있는가? 당신 안에 영원토록 좌정하신 임마누엘을 믿어야 한다. 당신 안에 있는 기름부음을 믿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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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바른 믿음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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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술 권하는 교회 친구
- “야간 자율학습. 학원. 교회. 집” 고등학생 때 내 동선의 전부다. 누가 봐도 바른학생의 모습이다. 물론 나를 돌보고 계신 이모님 입장에서는 교회라는 곳이 늘 눈에 가시였겠지만. 그날도 루틴에 충실했다. 부족한 과목을 메우기 위해 학원을 가고 있었다. 학원 빌딩 바로 앞에는 작은 포장마차가 있다. 어묵과 떡볶이도 있지만 가볍게 소주 한잔 기울이는 사람들도 섞여 있는 곳이다. 별 생각 없이 바라 본 포차에 익숙한 사람이 보인다. 그도 나를 보았고 내게 손짓한다. 교회에서 찬양인도를 하는 친구. 여자 후배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친구. 늘 우러러 보며 동경했던, 교회친구다. “어디가? 한잔 하고 가.” 친구 주변에는 다른 교회 친구들도 있었고 청년부 형도 있었다. 정겹게 교제(?)를 나누는 모습에 더해진 술 한 잔이 내게는 너무 어색하게 다가왔다. 그냥 어벌쩡 핑계를 대며 자리를 피했다. 마치 내가 몰래 술 마시다 걸린 듯 얼굴이 뜨거워졌다. 친구들 표정은 정말 평온한데. 교회에서 다시 만난 친구들은 여전히 평안하다. 찬양인도를 하고, 헌금 위원을 하고, 대표기도를 한다. 내가 문제일까? 친구들이 누리는 극강의 평안이 이상해 보인다. 예배 후 사적인 교제들이 이어진다. 어떤 아이들은 피아노 앞에 삼삼오오 모여 찬양을 부르고, 어떤 경건파 친구들은 지하로 내려가 기도를 한다. 집안의 눈치를 보며 교회 다니던 내게는 그런 2부 행사가 쉽지 않았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려는 내게 포장마차의 무리들이 나를 부른다. “00형 집에 갈 건데, 같이 갈래? 잠깐 놀다 가라.” 포장마차에서 모임을 주도하던 청년부 형의 자취집에 가자는 친구의 권유였다. 부담도 있었지만 그래도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에 걸음을 함께 한다. 부엌 하나에 작은 방 하나. 그곳에 남자 여럿이 모였다. 익숙하게 어떤 것을 꺼내 입에 문다. 단체 흡연이 시작된 것이다. 소주를 권했듯 친구는 나를 챙기며 따뜻한 미소로 한 대 권한다. 머리가 좀 복잡하다. 신앙이 아니라도 술과 담배는 학생이 할 것이 아니라고 배워왔는데, 지금 내게 던져진 이 숙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를 모르겠다. 겸연쩍 웃으며 부드럽게 거절하고 적당히 어울리다 집으로 돌아왔다. 나름 극강의 보호막을 치며 친구들의 문화를 거절했지만 나도 변하고 있었다. 헐렁한 양복바지, 하얀색 셔츠. 머리에는 과한 무스. 당시 오랜만에 만났던 내 초등학교 친구들은 나를 멀리하기도 했다. 내가 좀 이상해 졌다는 말이 오랜 친구들 사이에서 돌았다는 이야기를 성인이 된 후 듣게 되었다. “너 그때 완전 날라리였어.” 어떤 친구의 직설에 웃음이 나온다. 나는 그렇게 교회 다니는 날라리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흡연과 음주” 지금 생각해 보면 신앙의 핵심은 아니지 싶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두 가지를 하지 않는다. 누군가 목사라서 안하냐는 질문을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꼭 맞는 말은 아니다. 일단 맛도 없고 돈이 들고 건강에 유익도 없는 것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첫째 이유다. 굳이 신앙적인 이유를 꼽아 보자면, 많은 성경의 가르침을 다 따르지 못하지만 적어도 이것만은 하지 말자는 신념이다. 믿음으로 포장해보지만 역시나 맛없는 것에는 유혹이 되지 않는다. 다행스럽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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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술 권하는 교회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