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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7)- 관언유착(官言癒着)
언론이 독자들이나 대중들에게 주는 영향이 크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사실이 아닌 잘못된 기사나 중심을 잃은 기사는 많은 사람에게 혼란을 줍니다.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몇 해 전 우리 노회에서 모 목사를 순회 선교사로 파송한다고 기독교보에 기사가 올랐습니다. KPM 이사장과 담당자들이 파송 예배에 순서를 맡으며 파송 예배 사진까지 첨부하여 누가 봐도 총회에서, KPM에서 파송하는 선교사처럼 대문짝만하게 기사를 올렸습니다. 노회 파송 선교사도 아닌데 과장된 허위 기사를 올릴 수 있느냐고 기독교보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몇 주 후 신문 구석 어느 페이지에 짧은 한 줄로 000교회 순회 파송 선교사로 정정한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습니다. 그 기사를 본 대부분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은 KPM 파송 선교사로 알고 있습니다. 짤막한 정정 기사가 났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도 “부산서부노회 파송 선교사냐?”고 물어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선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KPM이나 노회에서 파송한 선교사처럼 위장을 하고 그것을 교단 신문인 기독교보에까지 기사화한 것은 그 저의를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디 이 한 건뿐이겠습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이 발생하여 총대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거짓된 걸음을 걷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 심히 우려됩니다. 기독교보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할 것입니다. 기독교보가 KPM 선교사로 파송하는 기본도 모른다는 것은 몰랐다고 하는 말 자체가 거짓말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의 파장도 결코 간과할 수 없지만, 신앙과 교리, 교회와 개인의 인권에 대한 의도적인 허위 기사는 고신 신앙 전체를 흔들 수 있는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문제는 고신 언론사는 총회 유지재단 이사회에서 관리하는 기관입니다. 유지재단 이사회는 총회장을 당연직 이사장으로 해서 총회 기관 중 최상위 기관으로 총회를 잘 알고, 총대들의 지지를 받아 총회 산하 교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감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유지재단 이사회가 직무유기 한 것입니다. 학원 이사들이 잘못할 때만 소환할 것이 아니라 유지재단 이사회가 잘못할 때는 그 파장은 훨씬 더 크고 중요하기에 반드시 소환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독교보가 총회 기관지인지, 유지재단 이사회 관할에 있는 기관지인지, 기독교보 자체 언론지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된다고 입을 모읍니다. 언론사 사장 얼굴이 기독교보에 빠지는 일이 없자 이 일에 대해서 총대들은 물론이요, 유지재단 이사회에서도 지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과는 마이동풍입니다. 순교 정신을 기본으로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모토로 하는 고신의 기관지인 기독교보가 본류의 신앙을 이탈한 것은 이미 옛말이고 특정 계파에 포진한 자들이 기고하는 재고 되어야 할 지나친 인문학적 논의와 신앙 고백적 정체성을 벗어난 잘못된 사상들이나 도배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고신 신앙을 가진 목회자들과 장로들, 교회들은 알게 모르게 기독교보에 대한 불신으로 불매 운동을 하고 있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입니다. 5월 2일 자 코람데오닷컴에 “교계 언론 편집 책임자의 이학규 장로 고소 건, 고검 재정 심사에서도 또다시 기각 판결”이라는 기사가 올랐습니다.(코람데오닷컴 참조) 이 사건의 실상은 전국 남전도회 임원으로 있는 모 장로님이 유지재단 이사로 출마하려고 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웠는데 그해에 언론사 사장 선거가 있어 보수 측 인사가 유지재단 이사가 되면 사장이 되는 길에 장애가 될 것 같아 코람데오닷컴의 기사대로 언론사의 직원이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운 장로를 “사퇴 종용”했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총회 산하 교회를 잘 돌아보고, 총회의 기관들을 바르게 잘 관리해야 하는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시작부터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일반 총대들은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는 계파와 개인의 이권과 자리가 그 배경이 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재미를 본 자들은 이제 총회에서 골치 아프게 투표하고 경쟁하는 것보다 아예 노회 총대를 조정하는 기가 찬 수법으로 발전했습니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계파에 표를 던질 사람을 골라서 총대라는 자리로 매관매직을 하고, 각 노회 지도급에 있는 목사 장로들을 총회 상임위의 자리로 매관매직해서 4월 노회 총대 선거가 끝나면 이미 상황이 종료되는 모양새로 발전되었습니다. 이학규 장로가 전국 남전도회 회장으로 봉직하고 있을 때 함께 임원으로 봉사하던 모 장로가 “사퇴를 종용”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항의한 것이 코람데오닷컴 에 기사 실린 것과 같은 결과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평생 법 없이도, 법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사는 목사, 장로가 이 일로 인하여 교회 생활이나 신앙생활에 방해를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경찰서와 법원으로 불려 다니며 고초를 겪고 어려움을 당했던 것에 대해서 고신 언론사를 관리하는 유지재단의 총회장과 목사, 장로 이사들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 궁금합니다. 왜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말입니다. 이학규 장로는 신앙적으로 잘 해결하고자 언론사의 불법 선거 개입 못 하게 해달라는 진정서를 총회 선관위에 제출했더니 총대가 아니라 진정서를 접수하지 못한다고 하더랍니다. 참 훌륭한 총회 선거관리 위원회이십니다. 그래서 “여기 보냈다, 저기 보냈다” 서류 핑퐁 게임을 하다가 결국 사법기관에 판단을 받기까지 하면서 이학규 장로가 당한 심적 피해, 정신적 피해, 일상 업무 손해의 피해는 누가 보상해줍니까? 고신총회가 이렇게 기본을 상실하고 무책임하게 하면 안 됩니다. 펜은 검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오보도 문제이지만, 언론이, 신문이 의도적이고 사욕에 치우쳐 고신의 정체성에 위배 되는 글이나 기사를 올리고, 무책임으로 일관할 때 고신총회 산하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미치는 파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총회 임원회와 학원이사회가 지난 총회 시 총대들을 속이고 총장선출 규정을 통과시켜 불법으로 총장을 선임했다고 신문에 기사화되어도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볼 때, 총회 임원회의 수장인 총회장이 유지재단의 당연직 이사장이기에 이 사실조차 그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게다가 현 총회장은 기독교보 발행인이 아니기에 변명하며 피해갈 수 있는 좋은 길도 열려 있습니다.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재정적인 문제는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릅니다. “반려동물을 장례식”에 대한 안건이 고신총회 신학부에서 재론되고, 어떻게 고신총회에서 “그따위 안건이 거론되느냐”는 회원들의 호통에 경남노회 모 회원이 나와 옹호 발언을 하며 “지난달에 우리 찐이(고양이)가 죽어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하늘나라로 보내줬다”고 말을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총회가 불건전하고 이단성이 있어 교류를 금지해도 전혀 문제의식 없이 그런 모임에 참여하고, 순서나 자리까지 맡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는 300M 거리를 유지해야 하지만 이전하는 것은 법에 명시가 없기에 괜찮다고 하는 고신입니다. 핑퐁 게임을 하다하다 안되면 법리해석을 문제 삼아 법제위에 해석을 요청하여 본질을 잊어버리게 하고 계파싸움 진영싸움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고신입니다. 양파도 아니고 벗겨도 벗겨도 끝이 없는 고신이여...... 언론은 “言路”를 여는 것입니다. 言路가 막히면 세상은 암흑세계나 다름없습니다. 한 마리의 개가 먼저 짖으면 온 동네 개가 때지어 짖어대듯이 기독교보가 먼저 총대를 메고 총회 여러 현안의 심각성을 알리면 동시에 총회 여러 곳에서 포문을 열고 동참할 것입니다. 언론은 여론을 집약하고 전문가들의 진단과 의견을 수렴하거나 민심을 파악한 후 사안에 따라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로 펜 끝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언론의 사명입니다. 총회 성도들을 대신해서 할 말을 하며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선도해야 합니다. 독선의 권력을 향한 비판은 언론이 지향해야 할 우선순위이자 언론 존재 이유입니다. 이 가치관이 상실되면 결국 관언유착(官言癒着)이 되기 쉽고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관제언론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사리사욕에 길들어서 소위 ‘독선과 권력’의 ‘종’이 된다면 스스로 펜을 손에서 내려놓아야 함은 불문가지입니다. 기독교보가 그렇게 길들어진 “관보(官報)”라는 비판을 듣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집을 지키기 위해 열심 짖어야 할 개가 요즘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주인 행세를 한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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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6 : 성가대와 찬양대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평생을 예배드리면서도 때로는 이 말이 옳은가 틀리는가에 대한 의문이 되는 용어들이 많다. 본 기고의 목적이 이를 바로 알고 사용하자는 취지에서 계속 기고하지만, 필자 자신도 때로는 헷갈릴 때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예배 중의 순서에서 찬양대인가 성가대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통합 측 총회에서는 찬양대라고 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수많은 교회들이 성가대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는 여기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성가대(聖歌隊)와 찬양대(讚揚隊)의 용어 차이 두 용어는 일반적으로 보면 거의 같은 말이다. 국어사전에도 성가대는 “교회 등에서 성가를 부르기 위해서 조직된 합창대”라고 했고, 찬양대도 “남녀 기독교 신자로 조직된 합창대”로 둘 다 영어로도 ‘choirs’로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같은 듯 다른 용어이다.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성가와 성가대란? : 먼저 일반적으로 성가라는 용어는 범(凡) 종교적으로 사용하는 말로서 일반적인 음악과는 다른 거룩한 음악이란 뜻이다. 그래서 성가는 범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는 ‘종교음악’으로서 세속적인 노래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의 찬불가는 불교의 성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 용어가 전혀 언급이 없다. 오직 찬양 혹은 찬송으로 표현되어 있다. 2. 찬양과 찬양대란? : 찬양이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으로서 참된 경건의 중요한 요소이다. 즉 찬양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성육신과 십자가 지심과 부활, 종말과 재림 등의 구속의 은혜를 노래하는 것이 찬양이고 또 함께 부르는 것이 찬양대인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가진 찬양은 개역성경에는 213회, 찬송은 98회, 찬미는 14회가 나온다. 하지만 성가란 말은 한 곳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찬양은 일반 종교의 성가와는 차원이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만을 높이는 노래인 것이다. 3. 성가와 성가대란 말을 교회에서 사용해 온 이유는? : 왜 성경에도 없는 이 용어를 그동안 교회에서 사용해 왔을까? 그 이유는 1976년에 나온 공동 번역 성경에서 개역성경의 “노래하는 자”, “성가대”로 12회에 걸쳐 번역을 했다. 또 하나의 성가대란 용어의 기원은 한 출판사가 흑인 영가의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곡집”이라 부른 것이 성가대의 이름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의 ‘세이까다이’(성가대 せいかたい, 일본 사람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며 노래할 때 쓰는 용어)가 직수입되면서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서 그동안 찬양대라고 했던 용어가 성가대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성가대란 말은 일본어의 잔재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가대란 말은 1958년 출판된 동아출판사 사전에도 성가대란 명칭이 없었으나 1994년 민중서관의 국어사전에서 처음 등재되었고 그 이전에는 성가대라는 말이 고정되어 사용되는 곳은 일본의 ‘세이까다이’뿐이었다. III. 결론과 제언 앞서 서론에서 밝힌 대로 성가대와 찬앙대라는 말은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동안 큰 문제 없이 사용해 왔기 때문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성경에도 없는 말이며, 일본어의 잔재라는 문제도 있다고 볼 때, 또한 타 종교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굳이 성가대란 말을 계속 사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성경에도 없는 성가나 성가대란 말보다는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사용해 왔던 찬양, 찬양대란 우리 고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올바른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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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성경의 큰 그림과 안식(1)
1)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창조되었다(창1:26~28).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일 때 가장 행복하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안식한다. 사람은 창조 되자마자 안식을 살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함께 안식하시려고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을 완벽하게 창조하셨다. 완벽이 무엇인가? 완벽하다는 말이 단순하게 세상을 좋고, 아름답게 창조했다는 말로만 보아선 안 된다. 물론 그런 뜻도 있다. 그러나 완벽하게 창조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상태를 말한다. 비 인격체인 피조물이 완벽할 수 있는 것은 인격체인 사람이 완벽할 때 완벽할 수 있다. 모든 피조물들이 사람의 손에 주어졌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하나님과 동일시 될 때 완벽하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하게 세상을 창조하셨다.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였고 완벽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로 완벽했다. 그래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 되게 하신 일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 될 때 완벽하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임마누엘을 이루시는 날 우리는 하나 되었다. 완벽 해졌다. 회복된 날이다. 하나님의 완전함 같이 우리도 완전해졌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고 하셨다. 안식을 말한다. 완전함을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임을 알 때 완전하다. 또 이것이 행복이고 안식이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 이것을 보고 안식의 삶이라고 한다. 완벽하기 때문에 더 이상 무엇을 보텔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안식은 피곤해서 안식하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어 안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고 완벽하기에 안식이다. 점이라도 하나 더 찍으면 작품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붓을 놓는 화가처럼 완벽하고 부족함이 없어 쉬시는 것이 안식이다. 사람은 창조되자말자 안식을 살았었다. 보기에 심히 좋았다. 하나님은 인간을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당연히 모든 피조물도 완전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가 하나님의 첫 번째 그림이다. 하나님의 큰 그림은 안식이었다. 2) 사단에게 속아 안식을 잃었다 사람은 사단에게 속아 합법적인 하나님과의 분리가 일어나 버렸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완전함이고, 안식인데 안식을 잃어버린 것이다. 마귀에게 속아서 신적 통치권을 빼앗겨 버렸다.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함으로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는 말씀대로 되었다. 그 결과 안식, 즉 임마누엘의 완벽함을 잃어 버렸다. 마귀도 언제나 말을 먼저 먹인다. 마지막 때도 마귀의 주된 일이 말을 먹이는 일을 한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계12:15)라고 했다. 여자인 교회를 말인 물로 떠내려 보내려 한다. 뱀인 마귀는 입에서 물을 토하는 것이다. 다른 복음을 많이 토한다. 다른 복음은 없다. 하늘의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갈1:8). 마귀는 다른 말을 토해 냄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큰 그림인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은 안식이다.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보아야하는데 보지 못하게 다른 말을 넣는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고 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의 그림인 안식이 없으면 두렵다. 안식을 보지 못하는 자의 모습이다. 안식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내가 다른 복음을 먹었습니다."라고 스스로 확증한다. 스스로 벗었다고, 두렵다고 고백한다. 그전에도 벗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누가 너에게 벗었다고 알려줬느냐"고 물으신다. “누가 그런 말을 해 주더냐”라는 뜻이다. “네가 무엇인가 스스로 입어야 한다고 누가 말 하더냐”는 질문이다. 지금도 사단은 우리가 예수 외에도 무엇을 입어야 한다고 속삭인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왜 따먹었느냐?"라고하시지 않고 "누가 벗었다는 것을 알려줬느냐?"라고 물으셨다. 말의 권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 주는 순간이다. 사단의 속임수는 다 말로부터 온다.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말을 들으면 보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큰 그림이 보인다. 사단의 말을 들으면 벌거벗음이 보이게 된다. 두려움을 보게 되고, 두려워 숨게 된다. 주님이 입혀 주신 것 외에 뭔가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엔 온전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하는가? 말이 온전하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고 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욕도 안해야하고,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욕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말이 온전하려면 복음을 말하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이다. 복음을 말하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우리도 온전할 수 있다. 온전한 말을 하면 아버지의 일인 안식을 보게 된다. 우리에게 너무나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한다. 너무 아까운 세월을, 아까운 인생을, 남의 이야기하다가 다 보낸다. 비판과 불평불만만 하다가 시간을 다 보낸다. 안식이 있을 리가 없다. 사단은 말로 우리를 속였고 속이고 있다. 안식은 우리의 믿음의 말에서 온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10:10). 마귀에게 속아 안식을 잃어버린 것은 말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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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희생
우리는 봄이 오면 마음이 들떠 어디론가 꽃구경을 가기를 원하고, 늘 가는 곳이라 할지라도 봄꽃이 핀 곳이면 가족들이 나들이하는 경우가 많다. 4월 초순에 비가 오는 산복도로를 거쳐 교회에 가는 도중에 아름답게 피어있는 벚꽃을 바라보는 순간 “아! 이렇게 아름답게 핀 꽃을 비바람이 망치면 어떻게 하지?”하는 걱정이 앞선다. 내 집 정원의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거워할 수 있는 벚꽃을 비바람 때문에 망치게 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통상 벚꽃은 일본의 나라꽃이라 생각하고 별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은데 실상은 원산지가 우리나라 제주도라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나라의 꽃이니까 더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라 믿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잎도 피우지 않고 살얼음이 언 메마른 땅속에서 뿌리를 내려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한겨울 내내 자기의 몸을 단단히 무장하여 정한 시간에 꽃을 피우는 식물이 바로 벚꽃이라는 데서 관심이 더 가고 피어있는 그 자체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가정집 정원에 있는 꽃나무들은 그래도 춥다고 싸주기도 하고 거름도 하며 옮겨주기도 하고 가지치기도 하지만 벚꽃은 차가 많이 다니는 길가나 산 중에서 전혀 무관심 속에 홀로 자립하여 이른 봄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 너무 장하고 아름다울 뿐이다. 꽃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수 있는 시간은 겨우 일주일도 안 되기에 항상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렇게 고생하여 잠간 동안을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선사하기 위해 정말 희생한 벚꽃의 수명이 좀 오래 지속 되면 얼마나 좋으랴. 게다가 벚꽃이 질 때에도 벚 눈을 내려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아무 불평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따뜻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마치 눈이 오는듯한 모습으로 꽃눈이 낙화한다. 그것이 바로 자연적인 아름다움의 자체가 아닐까? 흰 꽃잎이 떨어진 것은 분명히 하얀색인데 바람이 불어 모인 블럭 바닥은 분홍색 꽃눈으로 소복하게 쌓인다. 눈은 밟으면 ‘뽀드득’이란 소리라도 내지만 떨어진 꽃눈은 아무리 밟아도 소리를 내지 않고 인간의 발과 자동차의 바퀴에 짓밟히며 휘날릴 뿐이다. 오직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순종하여 이렇게 끝까지 희생하는 것이 바로 벚꽃이라는 것에 나는 감동을 받는다. 우리 주위에도 다른 사람의 아무런 도움이 없이 주님이 말씀하신 일들을 잘 수행하여 사회에 귀감이 된 아름다운 모습이 매스컴에 등장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분들은 오직 자기에게 주어진 미션을 좌우를 살피지 않고 오직 앞만 바라보고 나아갔기 때문에 큰일을 해내었을 것이다. 한낱 미물과 같은 식물도 말없이 자기를 희생하고 아름다움을 선물하는데 우리가 기대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지 못하면 실망하고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벚꽃은 자기의 아름다움을 봄꽃으로 인간인 우리에게 잠간 보여주기 위해 동한의 춥고 쓰라린 고통을 다 견뎌내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변함없이 희생한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믿음의 형제들과 이웃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정말 벚꽃처럼 나를 희생하고 말없이 맡겨진 일을 수행하는 데 최선을 다하면 우리가 사는 곳이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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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저축할 내용 (창41:46-57)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에 보도 된 내용에 의하면, <영국 교육과정평가원>이 새로운 아동 교육개혁 방안을 발표 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11세-16세까지 중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금융교육을 학교 정규 과목으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수학을 배우고 과학을 배우는 것처럼 이 수업을 통해서 스스로 부채를 관리하는 것을 배우고,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 연금 계획 짜는 것을 배우고, 금리를 계산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는 9월부터는 모든 <영국>의 5세 된 아동들에게는 정부로부터 250파운드가 지원 되어서 자신의 펀드를 개설하게 된다고 합니다. 일반 가정의 아동들에게는 250파운드(약$500)의 펀드 자금이 지원되고 저소득층 아동들에게는 500파운드의 펀드 자금이 지원된다고 합니다. <영국>정부가 이렇게 어린 아이들에게 조기금융교육을 실시하는 까닭은 매년 해마다 개인 파산 신청자들이 늘어나는데 대한 대처 방안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사람이 일찍 돈을 알면 좋지 않다고 해서 어린아이들에게 돈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돈을 가르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돈의 가치를 알게 해야 하고, 올바르게 돈 버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고, 올바르게 돈을 저축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보다 더 안정된 내일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안정된 내일을 사는데 있어서 저축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 가운데 꼭 저축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많이 저축할수록 보다 나은 내일을 보장해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저축해야 할 것들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물질을 저축해야 합니다.(창41:46-57) 둘째로, 기도를 저축해야 합니다.(시32:6-7) 셋째로, 선행을 저축해야 합니다.(딤전6:17-19) 필요하고 좋은 것들을 많이 저축해서 오늘 보다 내일이 더 안정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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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해녀의 욕심
‘물숨’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제주 출신의 고희영 감독이 7년 동안 제주도 우도(牛島)의 해녀들과 함께 지내면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잘 몰랐던 해녀들의 삶을 속속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해녀들에게는 계급이 있습니다. 제일 높은 계급인 상군은 가장 깊은 바다까지 들어가서 작업을 합니다. 보통 15-20미터의 바다까지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중군이고, 맨 마지막 하군은 일명 똥군이라고도 부르는데, 2미터 이하의 바다에서만 작업을 합니다. 그 해녀들의 계급은 노력과 경험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자신의 숨 길이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바로 그 숨길이로 계급이 정해진다고 합니다. 이렇듯 상군, 중군, 하군 이라는 계급에 따라 해녀들이 작업하는 바다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하지만 모든 해녀들이 바다에 들어갈 때마다 동일하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물숨’입니다. 물숨은 바다 밖에서 숨을 쉬는 것과는 달리 바다 밑에서 들이마시는 숨을 의미합니다. 이 물숨은 해녀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아주 무서운 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에 한 두 명의 해녀가 물숨을 먹고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물숨은 다른 말로 하자면 욕심입니다. 자신의 숨 길이만큼 숨을 참으면서 작업을 하던 해녀가 다시 숨을 쉬기 위해서 물 위로 올라가려 합니다. 이 때 저 밑에 큼지막한 전복이 해녀의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그 순간, 그것에 대한 욕심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전복을 따기 위하여 물 아래로 내려가는 해녀는 그 물숨을 먹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사고를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면서도 욕심을 이기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해녀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은 자신의 숨만큼만 해산물을 따서 재빨리 물 위로 나오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부질없는 욕심을 경계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러하기에 해녀들은 바다를 가리켜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다는 무서운 곳이지만, 욕심을 버리면 친정엄마처럼 다 내어 주는 곳이야!” 우리는 손안에 그 무언가를 움켜쥐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숨을 참으며 견뎌냈을까요? 우리 또한 욕심내지 않아야 할 것,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에 욕심을 내다가 물숨을 마시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장 14-15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만족하는 법을 모릅니다. 진짜 자신들에게 필요한 영적인 것에 대한 열망은 없이 사실은 지금 필요하지 않는 것들을 위해서 더 더를 외치며 욕심에 사로잡혀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에든지 욕심을 품는 순간 불행이 시작됩니다. 욕심이 많을수록 불만이 많아지고 마귀의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욕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죄에 가장 약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욕심은 하나님께도 응답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다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에 응답하시지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여서 기도 응답에 대해서 의심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야고보서 4장 3절에서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의 기도는 좋아도 너희의 욕심은 싫다, 나는 결코 너희의 욕심에는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욕심을 내고 또 내지만 사실은 욕심으로 인해서 인간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서 이미 내게 주신 것에 자족하는 데 있고, 그 자족에서 진정한 감사가 나오고, 그 감사로 인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제 헛된 욕심의 물숨을 버리고 자족과 감사의 바른 숨을 쉬면서 진정한 행복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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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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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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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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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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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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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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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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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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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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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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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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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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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진영논리 내로남불 디스토피아 세상?
- 성경 누가복음 9장을 읽으면 예수님의 권능의 사역 정점을 보는듯하다. 열두 제자를 파송하면서 귀신 병자를 고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고 제자들과 함께 변화산 광채를 보이시기도 했다. 간간이 인자의 죽음과 부활을 제자들과 얘기했으며 귀신들린 어린아이를 고치시고 제자들이 누가 크냐를 논쟁할 때 어린아이를 세우시고 누구든 내 이름으로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고 설파했다.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자가 큰 자라라는 예수의 역설적 은혜의 유명한 말씀을 남겼다. 이때 제자 요한이 난데없는 고백을 한다. 누가복음 9장 49절의 말씀이다.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않으므로 금하게 했나이다. 예수님으로부터 제자훈련을 받는 중에 제자들 집단이 보인 요즘세상말로 진영논리다. 우리 제자들이 아니고 누가 귀신을 내어 쫓는다 말입니까. 말씀을 묵상하면서 역시 제자들도 사람들이고 세속 된 이기적 진영의 이해에 머물러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다가왔다. 다음 예수님은 유명한 말을 던진다.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요즘 세상의 집단 세계를 보면 너무나 진영논리 내로남불의 원리가 날로 굳어져 가고 있다. 정치판을 취재하는 기자들이 쓰는 용어 중 가장 많이 쓰는 단어 중 하나가 진영논리 ‘내로남불’이라고 한다. 갈등과 대립이 없을 수 없는 사회 기능과 구조가 복잡해져가는 세상에 소통과 타협의 지혜를 찾을 수 없는 경직된 세상으로 치닫고 있다. 성숙한 사회로의 기대 속에 필연적인 과정의 공간으로 이해하려 해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국가 사회에 대한 정당정치 진영의 이해다툼이 국가 경제력을 따르지 못하면 사회 공동체는 균형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의 정치판에만 그렇다면 좀 나을 텐데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로 살고자 하는 교회를 둘러싼 교단과 노회의 정치판에도 진영논리 내로남불의 원리가 더 크게 퍼져있는 듯하다. 교회가 수시로 갈라지고 노회가 깨지고 교단 총회마저 갈기갈기 갈라져 있다. 우리가 함께 섬기는 기독교 교계, 은혜로 살고자 하는 주의 종들의 세계도 이러하니 언제 우리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될까. 하나님이 일손을 놓아버리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이다. 누가복음 9장을 묵상해 보면 제자들은 이때 성화되고 훈련되어가는 과정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을 입은 제자들은 각자 사명의 길을 떠나 복음을 위한 순교의 길을 찾아갔다. 오늘날의 주님의 종들도 다를 바가 있겠는가. 세상에서 판치는 세상의 승리와 성공을 위한 세속 된 게임의 룰에서 교회는 벗어나야 할 것이다. 교회와 세상이 공히 지향하는 다음의 세계는 유토피아(Utopia)다. 우리는 오직 천국의 소망에 마음을 다하는 제자들이다. 그래서 온 땅에 예수 복음만이 유토피아를 소망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유토피아에 반론한 디스토피아(Dystopia)의 지배적 예언을 설파하는 많은 서적들이 나오고 있다. 컴퓨터가 발달하고 환경이 파괴되고 동성애가 횡행하고 핵 전쟁의 위험이 커져가는 세상의 변화에 진영논리에 갇힌 군상들이 사회를 통제할 때 세상은 유토피아는커녕 암흑의 세상에 들어가고 만다는 예측의 메시지이다. 조지 오웰의 1984년이 소설로서 이러한 메시지를 던졌다. 최근에 같은 메시지의 서적들이 출간되고 있다. 뭣보다 무서운 것은 진영논리의 세력들이 합리적 과학기술 세상을 통제하지 못하면 선악(善惡)이 구분 안되는 캄캄한 세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디스토피아다. 교회가 다시 회심하고 세상을 이끌어야 할 때이다. 선악의 분별을 배우는 교회마저 타락하여 디스토피아의 공간이 될까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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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진영논리 내로남불 디스토피아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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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교회를 끊다
- # 교회를 끊다. 앞집, 방 한 칸에 혼자 사는 아저씨. 나는 그 아저씨를 ‘농협 아저씨’라고 불렀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 아저씨가 농협에 출근하고 있었기 때문. 시골 살이, 재미있는 게 별로 없었던 내게 자주 놀러오라는 아저씨 말에 민폐인줄도 모르고 거의 매일 문을 두드렸다. 거기에는 맛있는 빵도 있고 뭔가 분위기 있는 음악이 흐르는 라디오가 있었다. 우리 집과 다르게 연탄 따위는 아끼지 않는 훈훈함이 있었고 이불 위에서 뒹구는 여유는 어린 내게도 충분히 쉼이 되었다. 분위기 최고다. “재철아, 교회 가보지 않을래?” 함께 교회 다녀보지 않겠냐는 제안.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인데 두렵기 보다는 뭔가 모를 설렘에 냉큼 엄마에게 물어본 후 허락을 받았다. 그렇게 나는 주일학교 예배를 참석하게 되었다. 교회는 농협 아저씨 방보다 더 좋았다. 친절했던 농협 아저씨 같은 사람들이 무지하게 많았다. 화장품 향 짙었던 선생님. (알고 보니 그 선생님은 화장품 방문판매 일을 하시는 분이었다.) 뭔가 분위기 있는 양복 입은 부장 선생님. 앞에서 멋지게 노래 부르는 선생님까지. 커다란 종이에 그려진 악보를 보며 큰 소리로 따라 부르던 노래도 재미났다. 교회에서 보고 들은 것을 집에 와서 재잘거리자 엄마는 100원을 주시며 예배에는 헌금이 필요하다는 말씀과 함께 남들 다 하는데 가만히 있지 말고 꼭 헌금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교회에 다녔더니 100원이 생겼다. 그것도 매주. 매 주 100원 들고 향하는 교회. 중간에 잠시 오락실 들러 50원은 오락 한 판하고, 남은 50원은 헌금하고. (엄마 죄송해요. 사실 하나님보다 엄마에게 더 미안하다.) 마룻바닥에서 나는 것인지, 방석에서 나는 것인지 모를 그 냄새도 참 좋았다. “흰 구름 뭉게뭉게 피는 하늘에!” 힘차게 한 곡 부르고 나면 간식도 먹고 몇 명씩 모여 성경을 공부했다. 성경 말씀을 듣고 공부하는 시간이 내게는 제법 묵직하게 다가왔다. 부모님 따라 교회 나오는 친구들을 보면 설교든, 공부시간이든 늘 장난스러웠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린 것들... “아, 믿음이 이렇게 자라는 것인가?” 시간이 흘러... 교회 앞마당에 들어서는 내 발걸음은 당당했고 능숙하게 신발장에 신을 넣고 방석을 깔고 앉아 기도를 한다. 기도 내용은 별 거 없다. “하나님, 저 왔어요.” 선생님이 그렇게 하면 된다고 하셨다. 뭔가 대단한 아이들이나 하는 것으로 보였던 헌금 위원 순번에 들어가게 되었다. 성경공부 시간에 선생님과 나누는 이야기도 많아졌다. 그렇게 교회 생활도 익숙해지고 있었다. 교회 다니며 맞는 첫 성탄절, 우리 주일학교는 분주하게 연극을 준비했다. “마구간에 오신 예수님” 이야기를 친구들과 함께 연극으로 꾸며야 했다. 각 자에게 배역이 주어지는 시간. 별 거 없는 아기 예수님 역할 (이 역은 진짜 그냥 누워만 있으면 된다.), 그냥 뒤에 탈을 쓰고 서 있으면 되는 동물들, 동방박사, 목자들, 그리고 요셉과 마리아. 누가 봐도 주인공은 요셉과 마리아다. 최근 교회 인싸로 등극한 나는 배역에 욕심이 생겼다. 요셉까지는 아니라도 박사 역할 정도는 주어지지 않을까 싶었다. “동물 3” 내게 주어진 역할이다. 얼굴도 나오지 않는다. 대사도 없다. 그냥 탈을 쓰고 잘 서 있으면 된단다. 쓰린 속과 다르게 최대한 웃으며 첫 연습에 참여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일정을 소화했다. 나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니깐. 그리고 성탄 행사가 잘 끝나고 나는 교회를 끊었다. 더 이상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 많은 친구들과 선생님의 연락에도 더 이상 교회에 가지 않았다. “아, 믿음이 이렇게 별거 없구나.” epilogue 고향집 방문할 때면 조용히 그 교회를 찾습니다. 지금은 현대식으로 바뀐 예배당에 들어가 잠시 기도하고, 주변을 괜히 살피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 추억 한 자락 있을까 싶은 마음일까요. 그러다가 고향교회 담임목사님을 만나 초등학교 시절 1년 출석했던 주일학교 학생이라고, 지금은 목회를 하고 있다며 어색한 인사를 합니다. 그 목사님은 제가 교회를 다닐 당시 첫 부임하신 아주 젊은 목사님이셨는데 지금은 은퇴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궁금해서 이름도 모르는 농협 아저씨를 아시는지 목사님께 여쭈었습니다. 어디 계신지는 모르지만 지금 어느 시골에서 목회를 하시고 계시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보고 싶습니다. 그 아저씨가. 꼭 감사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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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교회를 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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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9
- I. 서언(序言) 언젠가 모 교단의 노회장이 정기노회 개회예배 설교 시에‘명문노회가 되는 길’이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어떤 신문에서 이를 기사화 하면서‘명품노회 되기 위한 노력 다짐’이란 제목을 달았다. 같은 내용을 말하면서 왜 다른 용어로 표기했을까? 또 어떤 대선 후보를 지지하는 글에‘명품을 통해 명인으로 인정받고, 명품은 장인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에 답하는 그 대선후보는‘명품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함께하겠다.’는 말을 했다. 여기에서의 ‘명품 대한민국’이란 말은 옳은 용어인가? 또한 어떤 도시에서는 발전하자는 표어를 내걸면서 ‘명품 00 도시를 만들자’고 했고, 또 어떤 도시는‘명품 도시’가 아닌, ‘명문 00 도시’라고 했다. 창원시의 경우도 ‘명품 창원시’라고 했다. 이러한 표현들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이름 있는 목회자는 자신의 위임식 때 감사인사를 하는 자리에서‘본 교회와 교인은 명품이지만 저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겸손한 모습의 말로서 좋아 보이지만, 명품이란 말은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게 느껴진다. 이에 본 호에서는 이 두 용어의 차이점을 논하여 보고자 한다. II. 명품(名品)과 명문(名門)의 차이점 두 용어를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명품’이란 단어이다. 한자의 뜻으로는 이름 名(명)과 물건 혹은 품위 品(품)자 이다. 사전적인 뜻은‘뛰어나거나 이름난 물건이나 작품’등을 말한다. 즉, 명품은 주로 사람을 대상으로 사용되는 말이 아니라 사물 등의 뛰어난 것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용어인 것이다. 두 번째는‘명문’이란 단어이다. 한자의 뜻을 보면, 이름 명(名), 집의 두 문을 의미하는 문 문(門)자 이다. 사전적인 뜻은 ‘이름 있는 문벌(門閥), 문벌이 있는 집안, 명가(名家)’를 의미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명문은 사물이 아닌, 사람의 모임으로 이루어진 가정이나 가문, 모임, 단체 등의 뛰어남을 말할 때 사용되어지는 말인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평소 자주 사용하는 명문과 명품의 구별은 분명하다. 하지만, 실제로 사용되어지는 경우들을 보면 이 두 용어의 차이를 큰 구분 없이 사용하고 있다. 앞에서 예를 든 경우가 다 그러하다. 심지어 대선후보 진영에서나 각 도시들에서도, 또 교계의 중진들까지도 이를 명확하게 잘 구분하지 못하고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뿐 아니라 이와 비슷한 의미의 용어들도 많이 있다. 명성이 있는 가문을 뜻하는 명가(名家), 명문에 속한 집안을 뜻하는 명문가(名文家), 정치를 잘하는 이름 있는 관원을 뜻하는 명관(名官), 문화를 높이고 정치를 잘하는 군주를 뜻하는 명군(名君), 이름난 선비를 말하는 명사(名士), 문벌이 좋은 집안을 뜻하는 명벌(名閥) 등 비슷하거나 뜻을 같이하는 여러 용어들이 있다. III . 결 어(結語)와 제언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것은 명품과 명문의 경우처럼 왜 사람들은 단어의 뜻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면서도 이런 용어들을 자주 사용하는 것일까? 란 의문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언어문화 사대주의 사상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한문을 선호하고 국어를 경시하는 풍조는 훈민정음을 만든 세종대왕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한글 창제에 있어서 당시 집현전 학자였든 ‘최만리’, ‘정창손’등은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물론 나름대로의 시대적인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문 선호 사상은 조선시대 5백 년 동안 뿐 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그 잔재는 계속 남아 있다. 그렇다고 한자어를 사용하지 말자는 말은 절대로 아니다. 그 이유는 한자어를 알지 못하고는 우리의 일상용어를 바로 분석하고 알기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의 두 용어처럼 애매모호한 말이나 뜻도 알지 못하면서 사용하는 용어들은 순수한 우리말이나 알기 쉬운 용어로 사용하면 좋지 않을까 라는 제언을 해본다. 예를 들면, 위의 두 용어 대신 ‘좋은 가문’, ‘좋은 노회’, ‘좋은 도시’, ‘좋은 대한민국’등이나 ‘이름 있는’, ‘아름다운’등의 표현을 쓰면 어떠할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 일컬어지는 현대에서는 알기 쉽게, 듣기 좋게, 보기 좋게 쓰는 말이 더 아름답고 좋은 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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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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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영적 피톤치드(Phytoncide)로 회복하라
- 우리 인생은 육적으로 영적으로 연약한 존재이다. 그래서 육신이 병들고 나약해지면 어떤 통로를 통해서든지 치유 받고 건강하게 되어 행복한 삶을 누리려고 한다. 치유 방법 중에 “피톤치드(Phytoncide) 치유법”이 있다. 피톤치드는 합성어인데 식물을 뜻하는 ‘피톤(phyton), 과 살해, 죽이다를 뜻하는 ‘치드(cide)’를 합하여 만든 단어이다. 편백 나무를 비롯한 여러 나무가 자신을 위협하는 세균들과 해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어 내는 천연물질 성분이 숲속의 향을 만들어 내는데 그 향이 피톤치드인 것이다. 사람들은 피톤치드 치료를 통해 건강한 삶을 회복하기 위해 우거진 숲을 찾아 휴양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육을 위한 피톤치드 요법이 있듯이 영적인 삶을 회복하기 위한 치료법도 있어야 한다. ‘회복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포카디스테미(ἀποκαθίστημι)’이다. ‘아포카디스테미’는 두 개의 단어가 결합 된 것인데, ‘아포(ἀπό)’는 ‘~ 로부터’ 떨어지게 하다. 분리를 나타내는 전치사이며, 카디스테미(καθίστημι)는 임명하다, 되게 하다, 원래 상태로 돌리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회복은 이전의 악한 상태를 떠나 원래 상태로 되돌아오는 것을 회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성경 역사를 볼 때 위대한 지도자들도 연약한 모습을 지닌 회복의 대상이었다.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은 나이 많아 늙었고, 모세는 하나님의 명을 받았을 때 달변이 아닌 자신의 어눌함과 애굽과 바로에 대한 ‘트라우마(trauma)’로 하나님의 소명을 거듭 부정했던(출 4:10-17) 사람이었고, 다윗은 간음했을 뿐 아니라 온갖 가정 문제를 갖고 있었으며, 육체의 가시(고후 12:7)라는 질병을 포함한 신체적 연약함(갈 4:14), 그리고 능하지 못한 언변에 대한 타인의 지적(고후 10:10)을 스스로도 인정해야 했던(고후 11:6) 사도 바울, 즉흥적이고 성격이 급한 불같았던 베드로 등등... 이런 약점이 있으면 당연히 열등감으로 연결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위대하게 이끈 능력자들이었다. 왜냐하면 약하고 부족한 이들 안에서 역사하시는(고전 고후 13:3) 하나님은 그 약함을 강함으로 선용(고후 12:9)하실 뿐 아니라 우리 안의 손상되고(broken) 손실된(lost) 부분까지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회복의 주체는 우리 주님이시다. 주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떤 회복도 기대할 수 없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숲에서 주님의 향기를 맛보며 살아가면 회복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 회복을 위한 기도를 하였다.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난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시 39:13) 이 기도를 응답해 주셨고 다윗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날까지 왕의 직분을 견고하게 감당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에게 회복을 주시는 이유는 먼저 회복된 우리가 주위 사람들의 회복 과정에 동참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예배 및 집회 금지 요청에 따라 한국 교회는 공적인 예배 중단의 위기까지 겪어야 했으며, 온라인 예배부터 인터넷 성찬식까지 다양한 신학적, 목회적 의견의 충돌로 목회자와 성도들에게는 더욱 어려운 시간이었다. 우리는 이제 “어두움을 저주하기보다는 한 줄기 빛을 비추라”라는 말처럼, 오늘날 교회에 필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우려 섞인 비판이 아니라 다시 한 번 회복할 수 있는 소망의 빛을 붙드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치료하시는 여호와라파 하나님의 의로운 오른손의 역사가 가정과 섬기는 교회 위에 충만하게 넘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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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영적 피톤치드(Phytoncide)로 회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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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대접의 기쁨 (히13:1-2)
- 우리나라에서 최고급 호텔하면 롯데호텔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 호텔은 수준이 있는 만큼 전 세계에서 유명한 분들이 많이 이용하고 있습니다. 방송에서 그 롯데 호텔 총주방장으로 근무하시는 분 이병후 씨의 일상을 본적이 있습니다. 총주방장이 되기까지 오랜 세월이 지났고 많은 경력이 있는 분인 만큼 그 분이 만들어 내는 요리는 요리라기보다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는 생각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취재진이 그에게 질문하기를, 최고급호텔 총주방장으로서 가장 보람을 느낄 때가 언제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을 한번 예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유명한 요리사이기 때문에 자신이 만든 예술작품 같은 요리를 손님들이 맛보고 감탄할 때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최고급호텔인 만큼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을 위해서 아주 특별한 음식을 만들 때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한 달에 한 번씩 양로원(養老院)을 방문해서 소박하게 만든 음식으로 어른들을 대접할 때 가장 기쁘고 보람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화려한 호텔 요리에 비해서 양로원 음식은 너무 초라하지만 그래도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서 노인들을 대접할 때 너무 기쁘다고 했습니다. 남을 대접하는 것은 참 아름다운 일이고 보람 있는 일입니다. 어떻게 보면 받는 사람보다 하는 사람의 마음이 더 기쁜 것이 바로 대접(待接)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남을 대접하는 것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서로 대접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일 뿐 아니라 피차에 기쁨이 되고 서로 대접하는 마음이 풍성할 때 관계가 좋아지고 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서로 식사대접은 기쁨이 됩니다.(히13:1-2) 둘째는, 서로 인사대접은 기쁨이 됩니다.(잠15:23) 셋째는, 서로 기도대접은 기쁨이 됩니다.(엡6:18-19) 사회적으로 메말라 가는 시대에 서로 아름다운 대접으로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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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대접의 기쁨 (히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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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당신 안에 기름부음이 있다.
- 믿음의 출발이 중요하다. 믿는 자에게 기름부음이 있다는 것을 믿고 출발해야 한다. 당신에게 기름부음이 넘쳐난다. 기름부음을 이해하고 믿는 것은 능력의 출발이 된다. 기름부음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도록 도우시는 성령님의 인격적인 가르침이고, 동력이라고 표현해도 좋다. 기름부음은 어떤 능력 그 이상이다. 기름부음은 믿는 자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활동하심이다. 영계는 보이 세계 속에 함께 존재하는 세계다. 영계를 모르는 사람은 예수 믿으면서도 두려움이 떤다. 엘리사의 사환은 눈이 열리기 전에는 천군 천사들이 그렇게 많이 와 있는데도 모르고 떨었다. 큰일이라고 야단이었다. 골리앗이 앞에 있다고 두려움이 우리의 것인가? 영계가 안 보이는 사람은 어두움 속에 총을 쏘는 것과 같다. 안 보이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과 똑같다. 영계가 열려 정확하게 보고, 정조준하면 한방이면 끝난다. 놀라운 사실이다.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 그런 축복이다. 성경은 같은 말씀을 계속 반복해서 하고 있다. 왜 이렇게 반복해서 보여주시는 것인가? 보고 듣고 믿으라는 것이다. 한 사건만으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주시고 끝내면 될 텐데 여러 사건으로 반복하시는 것은 믿지 못할까봐 거듭거듭 우리에게 배려해 주시는 사랑이다. 생명 걸고 이루어 놓은 업적을 인정해 주면 상대를 인격적으로 인정해 주는 일이 된다. 상대방이 생명 걸고 이룬 일을 몰라준다면 그 사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인정 할 때도 마찬가지다. 다른 것보다 예수님을 통해 성취하신 것을 인정해 드리고, 믿어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까지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나? 우리의 죄 때문이라는 것만으로는 완전한 대답이 아니다. 주님은 왜 우리의 죄를 없애셔야만 하셨나? 그것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다. 우리의 죄를 청산하신 이유는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함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 승천이 끝이 아니다. 다시 오셨다. “내가 너희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고 하셨다. 그 분이 다시 오셨다. 성령으로 다시 오신 그 분을 인정하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우리를 속량하셨다. 육신의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우리가 잊고 살면 안 된다. 늘 우리 마음속에 “영원토록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영원토록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고하셨다. 임마누엘 하나님에 대해서 모셔 들이고, 받아들이고, 환영하고 영접하고 늘 그분과 대화해야한다. 기름부음이 있다. 확신을 가져라. 당신 안에 기름부음이 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고후13:5)고 했다. 자신을 확증해야 한다.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한다.”고 했다(요일2:20,27). 기름부음이 없으면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다. 예수를 믿는 일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동정녀의 몸에서 예수님이 태어났음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사람의 힘이 아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했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이것은 성령의 기름부음의 결과다. 그러기에 성경은 기름부음이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한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요일2:27)라고 말씀한다.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있다고 말씀하셨다. 능력의 출발은 믿음에서 출발 된다. 기름부음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믿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 물을 마셔라.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는 그 배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되고, 마시기만하면 영원토록 생수의 강이 흐를 것이다.”고 하셨다. “마셔라”는 말과 “먹어라”는 말은 “믿어라”는 말이다. 예수님을 믿어라. 예수를 믿으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른다. 말씀대로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인정하는 것이 주님을 인격적으로 모셔 들이는 것이다. 지금도 당신 뱃속에 끊임없이 흐르는 한강보다 더 놀라운 성령의 강물이 흐르고 있다.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다(요7:39). 예수를 믿는다면 성령의 역사가 당신에게 있다. 기름부음이 당신 안에 있다. 당신에게 기름부음이 넘쳐난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의 기초다. 성령 충만이 신앙생활의 종점이 아니고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기름부음을 더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기름부음이 넘쳐나고 있음을 발견하고 믿는 것이 기름부음에 장악되게 된다.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온전히 계실 뿐 아니라 성령의 생수의 강이 철철 흘러넘침을 믿을 때 기름부음에 장악된다. 기름부음이 넘치고 있음을 말고 믿음의 확증을 가지고 사는 것이 당신 안에 잠자는 성령의 능력을 깨우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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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당신 안에 기름부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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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1)
- 사랑의 리더십 사랑이 제일입니다.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사랑이 중요한 것을 아는데 사랑하기가 힘듭니다. 사랑은 성령충만의 열매입니다. 성령충만해야 사랑하게 됩니다. 리더는 사랑을 실천하는 자입니다. 사랑이 많은 리더가 좋은 리더입니다. 사랑의 리더십이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사랑으로 무슨 일을 하면 부작용이 적고 열매가 좋게 맺힙니다. 사랑의 리더가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이 지혜요, 능력이요, 리더십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 받고 싶어합니다. 사랑해 주는 자를 좋아하고 따르게 됩니다. 사랑이 인간관계를 잘 되게 합니다. 미움은 관계를 깨뜨립니다. 미움을 가진 리더는 무너지고 실패합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은 사랑의 리더십, 관계 리더십입니다. 사랑은 심는 것입니다. 사랑을 심어야 사랑을 거두게 됩니다. 누가 큰 자일까요? 사랑이 많아 사랑을 실천하는 자입니다. 사랑의 리더십이 최고의 리더십입니다. 사랑은 좋은 영향력을 주고 감동을 줍니다. 사랑하면 이해합니다. 대화합니다.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 줍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사랑 받고 섬김, 대접 받으면 기쁘고 행복합니다. 사랑하면 후회가 없게 되고,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면 후회하게 됩니다. 사랑이 식어진 시대입니다. 인간은 사랑에 목말라 합니다. 사랑 받기만 바라지말고 내가 먼저 사랑하는 것이 삶의 지혜, 관계의 지혜입니다. 사랑이 많은 리더는 사랑하는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리더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사랑하면서 사는 사랑의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는 지혜자이고 미워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리더십으로 좋은 영향을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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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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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베드로(Peter's Behind Stories)-열정의 사도
- 베드로(Peter's Behind Stories)-열정의 사도 베드로는 주님의 공생애 초기에 부름 받았다. 그러나 장소와 상황에 있어 다소 차이가 있다. 공관복음서에서는 그 장소가 갈릴리 바닷가에서 이루어 진 사건이라고 한다. 마태와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바닷가에 거니시다가 시몬과 안드레를 처음으로 부르셨으며 야고보와 요한도 불렀다. 그들은 즉시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따랐다(마4:18-22, 막1:16-20). 누가복음에는 부르신 장소는 일치하나 안드레에 대한 언급이 없고, 야고보와 요한도 별로 중요하게 다루지 않고 있다(눅5:1-11). 요한복음은 안드레와 형 시몬이 세례요한의 제자였음을 말하고 있다. 주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는 것을 보고 메시야이심을 알게 되어 그의 제자들이 예수를 따를 것을 권고했다(요1:35-42).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인 사복음서를 종합해 보면 주님을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 안드레이며 그곳은 요단 남쪽 골짜기였다(요1:28). 안드레는 그 형 시몬에게 말했고 그들이 어느 날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던 중 주님을 만나 주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를 따랐다. 이런 면에서 베드로는 열두 제자의 부르심에서 처음으로 부름 받은 자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열두 제자 중에 언제나 그 이름이 첫 번째 불리게 된다(마10:2, 막3:16, 눅6:14, 행1:13). 베드로는 형제 안드레와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 잡는 어부였다. 호수 북쪽에 있는 가버나움이 그의 고향이었다(막1:21, 29). 요한에 의하면 빌립의 거주지 벳세다가 안드레와 베드로의 동리였다(요1:44). 이는 갈릴리 바다의 서북쪽 거주 지역을 갈릴리라고 하는 일반적 의미에서 벳새다도 갈릴리에 있는 한 동리로 요한이 생각한 것으로 본다. 예수께서 전도하실 당시에는 이들 형제의 집이 가버나움에 있었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고기 잡는 일에 있어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동업자들이었다(눅5:10). 누가는 베드로의 소명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 초기에 베드로와 안드레는 세베대의 아들들과 더불어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었다. 그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마4:18). 즉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고기를 잡지 못해서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때 주님은 그들에게 다가오셔서 그물을 다시 내릴 것을 명령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려서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다. 이 사건에서 베드로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그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라고 고백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제 이후로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눅5:10)는 주님의 말씀처럼 제자가 되었다. 베드로는 부름 받을 당시 이미 결혼한 사람이었다(마8:14, 막1:30, 눅4:38). 본문을 보면 마태가 그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후에 사도시대에 이르러 바울은 게바가 그의 아내와 여러 교회의 선교 여행에 함께 했음을 진술하고 있다(고전9:5). 그러므로 로마 카톨릭이 사제들의 결혼을 금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베드로의 인간성 그의 성품은 다혈질적이었다.4 생각하기 이전에 행동하는 단순한 사람이었다. 그는 주님의 제자가 된 이후에도 많은 실수로 넘어지기도 했다. 베드로의 성급하고 변덕스러운 면모를 잘 보여 주는 사례는 그가 물 위로 걷고자 했던 사건이다. 주님은 그의 믿음이 작은 것을 책망하셨다(마14:28-32). 그러나 그는 제자들 중 최초로 주님에 대한 훌륭한 신앙고백을 했다(마16:16). 하지만 곧 이어 주님께서 자신의 수난을 예고하시자 격렬한 태도로 반대했다(마16:22). 이런 베드로를 보시고 예수님은 사단이라고 말씀하셨다(마16:23). 또한 다락방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실 때 베드로는 이를 완강히 거부했지만 예수님은 다시 베드로의 생각을 바로 잡아 주셨다(요13:4-11). 주님이 감람산으로 가는 도중에 모든 제자가 예수를 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하자 베드로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감 있는 태도에도 불구하고 결국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다(요18:25-27).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이 사건은 4복음서 기자들 모두가 기록하고 있다. 마태와 마가에 의하여 이르되 주님에 대한 베드로의 세 번째 부인은 저주와 맹세로써 이루어졌다.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울더라”(마26:74).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명세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막14:71)하니 닭이 두 번 울었다. 그는 곧 바로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으며 얼마나 비겁한 자였는지를 통곡하며 회개했다. 그러나 베드로가 이같이 회개할 수 있었던 것은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막14:72) 했고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께 받은 말씀을 들어야 기억이 나고 깊이 생각할 때 회개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연약함 가운데서 지도력이 개발되었다. 그가 물 위로 걸어간 사건이나(마14:28),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메시야이심을 강조한 고백이나(마16:16, 막8:29, 눅9:20), 그 외에 형제가 범죄 했을 때 몇 번 용서해 주리이까(마18:21)라 하고 묻는 질문에서 베드로가 항상 제자들을 대변하는 대표자 같이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열두 사도의 중심인물을 언급할 때도 베드로는 항상 선임으로 언급되고 있다. 베드로의 우위성은 다른 여러 방식으로 나타난다. 주님은 제자들 중 가장 먼저 가버나움에 있는 베드로의 집에 가셨으며(마8:14, 막1:29, 눅4:38), 갈릴리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도 베드로의 배를 띄우게 하셨고(눅5:3), 결정적인 중요한 때 예수 부활의 첫 목격자로서 베드로에게 보이셨다(눅24:34, 고전15:5). 이는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이후에도 그의 동료인 주님의 제자들을 다시 모으는 임무를 베드로가 맡게 되었다(눅22:31-32). 그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랐으며, 또한 초대교회 중심적인 지도자였다. 베드로가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교회의 지도자로서 준비되어 있지 못했다. 그러나 부활신앙으로 베드로와 모든 제자들은 사도적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다. 이 같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먼저 본 자가 사도 중에 으뜸이 되는 것과 부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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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베드로(Peter's Behind Stories)-열정의 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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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성경의 ‘라마나욧’과 오늘의 대한민국 ‘광화문’
- 이스라엘이 사사 시대를 지나면서 대선지자 사무엘이 늙어 고향 라마에 머물 때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사무엘에게 나라의 왕을 세울 것을 요청한다. 이때 사무엘이 여호와께 기도하면서 오가는 하나님과의 대화가 흥미롭다. 사무엘상 8장을 보면 이스라엘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왕을 세울 것을 요청하니 사무엘은 기뻐하지 않으면서 여호와께 기도한다. 또한 여호와는 사무엘에게 백성의 말을 들으라고 하면서 백성들이 당신을 버리고 자기들의 왕을 세우려고 하는데 섭섭함을 토로한다. 그리고 여호와는 사무엘에게 백성에게 잘 경계하게 하고 왕의 제도를 알려준다. 그리고 사무엘은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함께 이스라엘 왕을 준비케하고 사울을 택하여 라마에서 기름 부어 세워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세운다. 성경에 나타났듯이 사울은 이스라엘을 통치하는데 처음에는 당시 이웃 강대국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전의 공적을 세우고 통치를 잘했으나 갈수록 사울의 이스라엘 통치는 잘못되어갔다. 무엇보다 우상에 의지하는 죄를 범했으며 왕이라는 자기 본위의 통치에 머물면서 여호와에 대한 의지를 잃어갔다. 당시 이스라엘은 블레셋을 비롯한 주변국과의 전쟁사 이야기가 모든 역사였다. 큰 문제가 생긴 것은 다윗이 새롭게 등장함으로써 사울과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사울은 악신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어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은 어린 목동이었으나 불타는 애국심에 철천지원수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을 죽이고 일약 이스라엘의 대스타로 떠오른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질투와 핍박에 시달렸으며 왕이 되기까지 쫓겨 다녀야 했다. 선지자 사무엘은 사울의 실패의 국가관리에 실망하고 다시 고향 '라마'로 돌아가 거기서 '나욧'이란 학교를 세워 후진 양성에 힘쓴다. 이즈음 다윗이 사울을 피해 라마로 도망가 사무엘을 만나고 학교 라마나욧에서 사무엘의 지도를 받게 된다.(삼상19:18) 그리고 다시 사울에게 쫓겨다닌다. 여호와는 가만 있지 않으시고 사무엘에게 사울의 끝을 경고하고 다윗에게 왕의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2대 왕으로 세울 것을 명령한다. 사무엘은 베들레헴으로 찾아가 다윗에게 기름 부어 왕을 세우게 된다. 성경 사무엘상과 하에 기록된 사무엘과 사울 다윗의 이스라엘 왕정국가의 초기 개략적인 이야기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사무엘의 라마나욧에서 사울이 그리고 다윗이 왕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서 하나님이 한 나라와 지도자를 만들어가는데 깊고 오묘한 뜻이 있음을 은혜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본래 뜻이 아닐지라도 백성이 원할 때 허락하시고 또 시간과 공간을 채워가는 과정에서 주인공들을 세워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엮어가심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인본주의에 치우친 사울과 신본 주의에 성실한 다윗이 세상을 관리하는데 성패의 결과를 달리 낸다는 점이다. 좀은 비유가 다를 수 있겠지만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정점인 이때 광화문에서 대통령을 만들어내는듯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민중의 공동체 힘이 민주주의 선거의 결과를 낸다. 5년 전 문재인 전 대통령이 선출됨이 이러한 과정이다. 촛불 혁명의 힘이 광화문에서 시작되어 한 사람의 대통령을 만들어냈다. 여기서 잘잘못의 평가를 논할 필요는 없다. 윤석열 현 대통령 또한 광화문의 애국운동의 불씨에서 민주주의 과정을 거쳐 일약 대통령이 되었다. 대한민국 미래에 행복을 줄 것인가, 불행이 될 것인가 아직은 모를 수밖에 없다. 역사의 발자취를 잘 읽고 복리민복의 대한민국을 만들어 가길 기대할 뿐이다. 다만 정권의 전환기에 너무 거친 말들이 오고 간다. 적폐 청산이 화두가 되고 적폐가 또 적폐를 만들어 반복되는 슬픈 정치 현실이 되고 있다. 제발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보우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덧붙이자면 위정자들이 성경 사무엘서를 읽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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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성경의 ‘라마나욧’과 오늘의 대한민국 ‘광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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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8 : “중보기도(仲保祈禱)”란 용어의 논란
- I. 서언(序言) ‘어떤 말이 바른 말일까?‘우리 기독교인들이 사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말들은 어떤 것일까?’ 또 ‘잘못사용하고 있는 말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본지에서 이를 계속 연제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이런 질문 앞에 항상 나름의 사명감을 가지고 연구하는 마음을 가져본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은 우리가 가장 흔히 사용하고 있는 ‘중보기도(仲保祈禱)’란 말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중보기도(仲保祈禱)”, 무엇이 문제인가? 먼저 밝혀두고 싶은 것은 이 용어에 대해 논하는 것은 필자 나름대로는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이 용어의 어원의 뜻으로 본다면 분명히 잘못된 표현이기 때문이다. 또한 국어사전에도 등제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예수님이 아닌 교인의 입장에서 이 용어의 사용은 분명히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은 교계에서 이미 널리 통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문제점을 지적하는 필자 자신도 무의식적으로 이 용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할 때가 많다. 그 많 큼 이 말은 보편화 되어 있기 때문에 차라리 의미는 맞지 않을지라도 아예 기독교적 전문용어로 사용해 버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할지라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는 바로 알고 사용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되어 다소는 무거운 마음으로 이 용어를 논하고자 한다. 먼저 중보자(仲保者)란 용어는 예수님에 대한 또 다른 이름으로 사용하는 말이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중간 역할을 하시어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다는 의미에서 중보자로 호칭하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절대적인 의인으로서 죄인인 인간을 위해서 절대적 사랑을 베푸시어 하나님과 가까워지도록 중보자의 역할을 담당하신 것이다. 또한 디모데전서 2장 5절에는“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또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하여 중보의 유일성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중보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중보기도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닌 것이다. 다만 천주교에서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교황이나 사제가 중보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개신교에서는 목회자나 교인이 중보자의 역할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이런 이유로 합동 교단에서는 2002년 9월 총회에서 이 말을 쓰지 않도록 결의 한 바 있고, 여러 신학자들도 이 용어의 문제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중간 역할을 하거나 어떤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중보가 아닌 중재(仲裁)라는 말이 합당하다. 또한 이것이 기도로 연결될 때 그것은 “중재 기도”가 된다. 하지만 중재기도란 말이 한국교회에 익숙하지 않다보니 사용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이유로 본다면 어떤 용어가 적합할까? 여기에 대한 성경적인 용어는 디모데전서 2장 1절에 나오는 “도고(禱告)”라는 말이다. 원어의 뜻은“다른 사람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용어가 가장 적합할 수도 있다. 그 외에도“이웃을 위한 기도”, “도움 기도” 등도 적합한 좋은 말일 것이다. III . 결 어(結語) 결론적으로 다시 한 번 필자의 고민을 피력하자면, 너무 국어 사전적인 어법과 신학적인 잣대로 용어를 구별하다 보니 말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마땅히 대안으로 내 놓을 말도 많이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면은 지금까지 논한‘중보기도’도 마찬가지다. 이미 한국교회 안에서 중요한 기독교적인 용어로 고착화 되어버린 말을 지금 와서 바로 고친다고 해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용어를 계속 지적하고 논하는 이유는, 어쩔 수 없이 습관적으로 이런 용어를 계속 사용한다 할지라도 무엇이 올바른 말인지는 분별하고 바로 알고 있어야 된다는 의미에서 이런 논의를 계속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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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8 : “중보기도(仲保祈禱)”란 용어의 논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