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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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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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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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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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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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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양대식 목사] 관계의 리더십
    부모와 자녀 관계 부모와 자녀 관계는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가까운 관계인데 깨어지기도 하고 상처 주거나 상처받기도 합니다. 부모에게 상처 많이 받은 자녀는 마음에 쓴 뿌리가 있으며, 증오심으로 가득 차 사회생활, 직장생활 등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자가 됩니다. 인격이 삐뚤어지고 반항하는 성품을 가지게 됩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과 훈계의 균형을 가지고 신앙과 인격 교육을 잘해야 합니다. 자녀라고 함부로 대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녀가 잘못된 길을 갈 때는 부모가 사랑의 마음으로 징계도 해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 앞에서 삶의 본이 되어야 부모와 자녀 관계가 잘 유지됩니다. 부모와 자녀 관계가 깨어져 불행한 가정이 많이 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고 해도 안전하지 못합니다. 자녀를 편애하지 말아야 하며, 재산 문제, 유산 주는 문제 때문에 자녀들 간에 관계가 깨지기 쉽기 때문에 부모가 살아 계실 때 유산 분배 문제도 지혜롭게 잘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님을 공경하고 귀히 여겨주어야 합니다. 혹시 부모가 가난하고 배우지 못했다고 해도 부모님을 멸시하지 않아야 합니다. 부모님을 위해 기도하고 섬기는 자녀는 부모님과의 관계가 좋아집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좋아야 삶이 행복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노 엽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님의 삶의 형편을 잘 파악하여 도와주고 힘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사랑, 은혜를 보답하려고 하는 착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 관계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관계가 깨지면 삶에 기쁨이 없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좋은 관계는 삶의 행복의 비결이요 축복받는 비결입니다. 서로 간에 기대를 줄이고 마음을 비우고 사랑의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형제 자매 관계 피를 나눈 형제 자매 관계도 깨지게 됩니다. 모든 관계는 위험이 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꿈을 꾼 요셉을 시기 질투하여 구덩이에 던지고 애굽에 팔아 넘겼습니다. 형제가 좋으나 형제 관계도 위험합니다. 형제는 위급할 때 도와주기도 하는 좋은관계입니다. 관계가 좋으면 서로 도우면서 살아갑니다. 형제끼리 관계가 깨져서 원수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재산 때문에 관계가 깨어져 원수가 되고 고소하기도 합니다. 형제 관계는 가족관계입니다. 가족관계가 잘 된 가정이 복된 가정입니다. 형제 관계라해도 주고 받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한쪽에서만 계속 주고 한쪽에서 받기만 바라면 관계가 깨집니다. 형제 관계에서 결혼한 형제들의 부인이 중요합니다. 좋지 못한 부인을 만난 형제는 관계가 깨지기 쉽습니다. 형제 자매의 부인이나 남편을 잘 만나야 형제 자매 관계가 잘됩니다. 누님이나 매형, 동서, 매제 관계는 형제 자매 관계인데 좋은 관계여야 합니다. 어떤 경우는 형제 자매 관계가 나빠서 남들보다 못한 관계이기도 합니다. 서로 관심가지고 꾸준히 연락해야 합니다. 경조사에 적극 참여해야 합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도와주기도 해야 합니다. 잘되고 성공해도 겸손해야 하며 형제 자매간의 우애가 있어야 합니다. 따뜻한 마음과 사랑은 형제 관계를 건강하게 만듭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형제, 자매 관계가 좋은 것이 정상입니다. 깨어진 형제 관계가 있다면 회복되는 것이 축복입니다. 야곱과 에서의 갈등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야곱이 보낸 선물을 받고 에서의 마음이 부드러워 졌습니다. 선물을 주는 지혜는 관계를 회복 시키기도 합니다.
    • 오피니언
    • 논문/책
    2022-04-05
  • [김성수 총장] 영유아가 나라의 미래다!
    몇 년 전 미래 사회의 모습을 그린 영국의 한 소설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내용인 즉 현대사회의 저출산과 고령화 문제로 인해서 인형과 유모차 제조 산업이 각광받는 미래 산업으로 각광받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초롱초롱한 눈빛의 아이들이 없는 텅 빈 학교 교실과 해맑은 웃음을 머금고 뛰노는 순박하기 그지없는 아이들이 없는 학교 운동장과 동네 놀이터는 조용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기까지 느껴집니다. 결혼한 젊은 부부가 유모차에 인형을 싣고 산책하는 모습을 그린 장면은 읽는 이로 하여금 소름을 끼치게까지 만듭니다. 애기를 출산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기를 갖고 양육하고 싶어 하는 모성애마저 제거할 수는 없으니 애기를 대체할 수 있는 인형산업과 유모차 산업이 각광을 받게 된다는 그럴듯한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이 공상적인 이야기가 우리 사회에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동네 곳곳에 산아제한을 독려하는 표어들이 많이 붙어 있었습니다.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덮어 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이 당시에는 우리 나라의 합계출산율(가임 여성 1명이 평생 낳는 자녀수)이 6.0명이었습니다. 한 여성이 평균 6명씩 아기를 낳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와 같은 끔찍한 출산제한 구호가 등장할 만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구호가 등장한지 반세기만에 우리 사회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과 가장 빠른 인구 고령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한국개발연구원의 한 보고서에 의하면 우리 사회의 합계출산율은 1970년 4.53에서 1980년 초 인구 대체율인 2.1 이하로 떨어진 후, 계속된 출산 감소로 2004년 1.15명, 2017년 1.05명, 2018년에는 0.98명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합계출산율이 0명대인 국가는 우리 나라가 유일하다고 합니다. 출산율 하락은 곧 다시 학령인구 감소로 이어지게 됩니다. 학생이 없어 문을 닫는 학교가 많아지게 되고 생산연령인구 또한 감소하게 되는 암울한 전망이 현실이 되고 가고 있습니다. 학령인구가 줄어들면서 앞으로 2년 뒤에는 전국 대학 70곳 이상이 폐교 위기에 처할 것으로 교육부는 전망하고 있습니다. 의과대학과 간호대학 등 취업이 비교적 잘 되는 학과를 제외하고는 많은 학과들이 정원을 채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출산과 고령화 문제는 또한 건강보험 및 연금 등 과중한 노인부양 문제를 야기 시킬 뿐만 아니라, 경제성장을 뒷받침할 젊은 노동인력의 부족 등 심각한 사회 문제를 야기 시키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는 다양한 방법으로 출산을 장려할 수 있는 정책을 개발해 내어야 합니다. 소득수준이나 노동시장 참여 등의 조건 없이 5세 이하의 자녀가 있는 가정에 일정액의 양육보조금을 제공하거나 출산친화적 세제 도입, 출산 및 육아 휴직 등의 방법은 출산과 노동공급을 동시에 장려하는 방안이라는 보고서도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자녀가 있는 경우 자녀수에 따라 과세표준을 낮춰 주는 소득공제나 세액을 감면해 주는 출산 친화적 세제는 출산 장려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방안으로 적극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세제의 경우 피부양자 공제 및 교육비 공제 등으로 자녀수에 따른 공제 혜택을 주고 있으나 그 혜택은 매우 한정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이제는 미국의 자녀 및 피부양자 세액공제와 근로소득장려세제, 영국의 자녀세액공제와 근로소득장려세제 등 출산친화적 세제와 같은 다양한 방법을 도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정책 등은 정책 비교를 위한 모의실험에서도 모두 긍정적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사회 문제들은 정치권이 관심을 가지고 해결해 내야 할 본질적인 문제들입니다. 그런데도 곧 물러나야 할 현직 대통령과 앞으로 5년간 국사를 맡아야 할 당선인의 힘 겨루기 모습은 국민들을 답답하게 만들고 때로는 속이 터지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대통령 집무실을 옮겨야 할 피치못할 이유가 있으면 국민들에게 좀 소상히 밝혀서 왜곡되거나 과장된,또는 가짜 뉴스가 떠 돌지 않도록해야 합니다. 봄 벗 꽃이 피기 전에 청와대를 국민들에게 돌려주지 않아도 되니까 좀 더 본질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대통령 부인 의상이 178벌이니 구두가 몇 컬레라는 허접스러운 뉴스도 정말 우리를 짜증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대통령 부인이면 더 검소한 생활 모습을 보이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등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온갖 소리들이 다 들립니다. “평생에 옷 몇 벌 갖고 사는 사람들도 있는데…”, “마르코스 부인 이멜다하고 꼭 같네…”, “운동화한 개 사면 2년은 신는데…”, “육영수 여사가 한복 입으면 우아하기라도 한데…”, “대통령이 왜 사채는 빌려 쓰느냐?”. 정치인들의 언행도 너무 저질스럽습니다. 청와대 이전을 반대하면서 청와대 지붕을 붉은 색으로 물들여 페이스 북에 올리는 모습도 참 치졸하고, 여당과 야당 대변인들의 담화에도 합리성과 고상함이 없습니다. 이제는 정치인들은 물론 우리 모두가 좀 품격이 있는 대화를 나누고 우리 사회의 본질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함께 고민하며 해결책을 모색하는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혼란한 국제정세를 보면서 공의와 샬롬의 가치를 구현하는 정책을 구상하고 젊은 이들이 일자리를 마련하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사회, 오염된 하수를 식수로 사용해야 하는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생각하고 가난과 질병에 허덕이는 지구촌의 어려운 나라 백성들을 가슴에 품을 줄 아는 선진사회의 가치관을 구현해 나가야 합니다. 출산장려의 보다 근본적인 정책도 결국은 영유아에 대한 국민 모두의 가치관 변화를 모색하는 일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아동학대와 낙태, 어린이 유괴와 영유아 살해와 같은 생명경시 풍조를 흉악한 범죄로 단정하고 추방해야 합니다. 모든 종교는 가정을 중요시하고 자식을 귀하게 여기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자식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라고 했으며,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에 있는 화살과 같아서 이것이 그의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며 성문에서 원수와 담판할 때에도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CTS(기독교TV)가 벌이는 “영유아가 나라의 미래다!”는 출산장려운동은 찬사를 보낼만합니다. 이제 한 달 안에 178벌의 옷을 정리해야 하는 대통령 부인과, 청와대 집무실 이전을 위해 예비비를 받아내야 하는 대통령 당선인 모두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젊은이들이 직장을 갖고 결혼을 하여 애기를 가지고 단란한 가정을 꾸밀 수 있는 소망 있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 지 진지하게 한번 구상해 볼 수 있기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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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05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6 : 회의시 동의(動議)의 의미 바로알기
    I. 서언(序言) 봄이 오면, 각 교단의 노회 혹은 지방회 등의 많은 회의들이 개회된다. 은혜롭게 잘 진행된 회의들도 있고, 파행이 되거나 논란이 벌어지는 경우들도 종종 발생한다. 이유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그 중의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사회자나 회원들이 회의 진행법을 잘 알지 못하는 미숙함에서 오는 경우들도 아주 허다하다. 특히 혼란을 가져다주는 주된 요인 중의 하나는 “동의”에 대한 개념을 명확히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혼란도 많다. 실제로 회의에 있어서 “동의를 제대로 알면 회의에 성공한다. 회의는 동의로 움직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동의는 회의에 있어서 아주 중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본 호에서는 “동의”에 대한 용어분석과 회의시의 용도에 대하여 논해보고자 한다. II. 동의에 대한 여러 가지 용어분석 1. 동의(同意, 同議)와 동의(動議)의 차이 : 동의에 대해서 흔히 오해를 하는 경우는 動議를 同意로 보는 경우이다. 하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다른 뜻이다. 그 차이를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동의(同意)의 사전적인 뜻은 같을 同(동)이 주는 의미 그대로 “같은 의미, 어떤 일에 대하여 의견을 같이함”이란 뜻으로 “나도 너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란 경우를 말한다. 그다음 동의(動議)란 뜻은 같을 同이 아닌, 움직일 動(동)으로서 “회의 중에 토의할 안건을 제시함”이란 뜻이다. 이 중에서 회의에서 주로 사용하는 동의는 動議이다. 2. 동의(動議)의 종류 : 주로 4가지로 나눈다. 주동의(원동의), 보조동의, 부수동의(임시동의), 특권동의 등인데 이를 구체적으로 논하면 다음과 같다. 1) 원동의(原動議) : 원안, 의안, 기본 동의, 주요동의 등으로서 어떤 의안을 제출하는 가장 근본이 되는 중요한 동의로서 주동의(主動義)라고도 한다. 이것이 제출되면 회장은 이를 진술하고 토론을 거쳐 마지막으로 표결 순으로 이어간다. 2) 보조동의(補助動議) : 원동의가 이미 상정되어 있을 때 그 동의에 대한 수정이나 특별 조치를 요구하며 그 동의의 목적과 능률적인 처리를 위해 제출하는 동의이다. 종류로는 무기연기나 수정동의, 위원회 회부와 유기 연기 동의, 토론 종결 동의나 보류동의 등이 있다. 3) 부수동의(附隨動議) : 회의 진행 중에 부수적으로 일어나는 동의로서 임시동의 혹은 부대(부대)동의라고도 한다. 동의에는 직접 관련되지 않으나 의사(議事)진행에 관한 동의이다. 종류로는 규칙일시정지 동의, 철회동의, 심의 반대동의, 표결방법에 관한 동의, 의사진행에 관한 발언, 번안동의(재론, 재심의) 등이 있다. 4) 특권 동의(우선 동의) : 특수한 상황에 관한 동의로서 어떤 동의보다 우선적으로 처리 한다는 의미에서 우선동의라고도 하며, 제안되는 즉시 심의하여야 한다. 종류로는 일정변경의 동의, 일정진행의 동의, 회원의 권리가 부당하게 침해당할 때 그 특권을 지키기 위한 동의, 휴식 동의, 정회와 폐회 동의, 다음 회의의 일시와 장소를 위한 동의 등이 있다. 5) 기타 동의 : 이상과 같은 4가지 동의 외에도 자주 발생하지는 않지만, 간혹 한 번씩 제안되는 문서의 일자, 명칭, 숫자 등의 공백의 기입이나 수정을 요구하는 동의가 있다. 이런 동의는 재청과 표결 없이도 즉시로 통과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보고서 수리동의, 회의록 승인 동의, 지명 및 구두호천과 호천중지 동의, 사후 승인 동의 등이 있다. 또한 이 외에도 발언 허락을 받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동의, 정족수나 재청을 요하지 않아도 되는 동의, 토론하지 않아도 되거나 수정 할 수 없는 동의, 특별 다수결을 요하는 동의, 재심의를 할 수 있는 동의 등 여러 종류의 동의들이 있다. III . 결 어(結語) 이상으로 논한 동의에 대한 용어의 내용들은 원활한 회의 진행에 대한 것이기는 하지만, 본 지면들이 생활용어를 위한 내용을 논하기 때문에 회의 진행의 자세한 설명 보다는 용어 소개에 중점을 두었다. 다시 한 번 부연하고자 하는 것은 “동의(動議)는 동의(同意)가 아니다.”라는 점이다. 각종 회의 시나 일상생활에서 동의에 대한 혼돈이 많음을 보면서 이에 관한 용어정리를 논하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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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05
  • [오태열 목사] 내 인생의 가라지
    살다 보면 내 삶에 가라지가 많음을 발견하게 된다. 생각 없이 바쁘게 살았기에 나도 모르게 내 삶에 가라지가 뿌려지고 자란 것을 몰랐다. 교회에서도 기도 없이 세운 중직 자는 반드시 문제를 일으킨다. 기도의 방심이 이런 일을 일어나게 한다. 여호수아는 “새벽에 일찍이 일어난 자”였다. 요단강을 건너기 전(수3:1-6),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기 전(수6:12-14), 아간의 범죄 해결을 위해(수7:16), 아이성 점령을 위해(수9:10) 일찍 일어나 기도하였다. 그러나 기브온 사람과의 평화조약체결 시, 여호와께 묻지 않는 실수를 저지른다. 그 결과 가나안 입성 후에도 기브온 사람들이 두고두고 화근이 되었다(수9:14-15). 우리 삶에도 좋은 관계에 금이 가고 깨어져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다. 남편이나 아내를 기도 없이 외모만 보고 선택하였기에 가라지 남편, 가라지 아내라고 느껴진다. 직장과 교회 안에도 가라지 같은 사람들이 있어 처한 환경이 가라지 같을 때가 있다. 은혜를 받으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현상은 영안이 밝아져 내 삶에 알곡과 가라지가 보인다. 가라지가 보이면 먼저 뽑고 싶은 강한 충동이 일어난다. 내 인생의 가라지는 기도하지 않고 방심하고 감정적 충동적으로 살 때 생긴다. 요즘 사회는 인스턴트 시대다. 결혼도 쉽게 하고 쉽게 헤어진다. 살다 보니 서로에게 가라지가 있음을 보고 뽑으려 하기 때문이다. 뽑으면 안 된다, 이미 늦었다, 안고 가야 한다. 가라지를 뽑으면 옆의 알곡도 뽑히기 때문에 이미 누리고 있는 것도 다 잃게 되어 가라지가 있을 때보다 더 심한 상황에 직면한다. 내 인생의 가라지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 바울에게도 가라지가 있었다. 뽑아 달라고 세 번이나 하나님께 간청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대로 두라 하였다(고후12:9). 예수님도 가라지를 가만두라 하였다(마13:29). 여러분들의 인생에 가라지가 있는가? 그냥 두라. Dlete(삭제) 명령 한 번에 가라지만 다 지어지는 것이 인생이라면 얼마나 쉽겠는가? 내 인생의 가라지를 지우려다가 인생 자체를 모두 지울 수 있다. 신앙은 내 삶의 모든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청년들이 순결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내 인생에 가라지가 자라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외모만 보고 불신자와 결혼 하였다면 불신 남편, 불신 아내는 평생 가라지가 된다. 지혜로운 성도는 가라지가 자라지 않는 쪽을 선택한다. 삶에 가라지가 있다면 내가 뽑으려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뽑게 하라. 가라지는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내가 짊어지고 가는 짐이기에 인내의 대상이다. 마태복음 13:30절에 ‘둘 다 추수 때까지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 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묵고 곡식은 모아 내 곡간에 넣으라 하리라’는 말씀이 있다. 결국에 가라지는 뽑히고 불에 태워지게 된다. 그러므로 그냥 두고 인정하고 품고 가야 한다. 교회 안에도 알곡과 가라지가 있다. 가라지라 해서 제거하려 하면 알곡까지 다친다. 아파도 괴로워도 참고 가면 하나님이 변화시켜 알곡 신자 되게도 하시고 끝내 회개치 않으면 뽑으시기도 한다. 다만 나의 삶과 교회 안에 있는 가라지를 인정하고 품고 갈 수 있는 힘과 가라지가 변하여 알곡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알곡 되게 하시는 분도, 가라지를 뽑는 분도 내가 아닌,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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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05
  • [박봉석 목사]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
    우리나라 토목 공사 기술은 세계 최고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게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도로나 다리를 건설하다가 사람들이 희생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최고의 선진국인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Golden Gate Bridge)라는 다리를 건설할 때에 처음 1년 동안에 사람이 23명이나 밑으로 떨어져서 추락사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은 다리가 너무 높아서 일하는 사람들이 다리 밑에 넘실거리는 검푸른 강물을 보고 심한 공포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다리를 건설하는 회사는 궁리를 하다가 거대한 그물을 만들어서 다리 밑에 깔아 놓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두 가지 놀라운 효과를 얻었습니다. 첫째는 이때부터 한 사람도 떨어지는 일이 없었고, 그리고 둘째는 공사 진행이 20%나 빨리 진척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떨어져도 죽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인해서 추락하는 일도 거의 없었고 일의 공정도 빨라진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그런 생활 속의 사소한 믿음도 사람을 지켜주는데 완전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말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야말로 우리 하나님의 백성을 지켜주는 최고의 안전그물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존 번연이 지은 ‘천로역정’이라는 책을 보면, 주인공인 기독도(그리스도인)가 나옵니다. 이 기독도가 길을 가다가 하루는 아름다운 궁전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아름다운 궁전에서 하룻밤 묵고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서둘러 그 궁전을 향하여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걷고 있는 좁은 길의 앞쪽을 주의 깊게 살펴보니 두 마리의 사자가 길을 막고 누워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까 그곳에서 ‘불신’과 ‘겁쟁이’라는 사람이 도망쳐 나오는 것을 보았는데, 왜 그랬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 기독도는 그래서 자신도 겁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저 궁전으로 계속해서 걸어가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하겠구나 생각하며 자신도 ‘불신’과 ‘겁쟁이’처럼 되돌아갈까 궁리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궁전을 지키고 있던 문지가가 이 기독도를 보고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당신은 그렇게도 용기가 없으십니까? 사자들은 쇠사슬에 매여 있으니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는 자들의 신앙을 시험해 보고 믿지 않는 자들을 가려내기 위해서 사자들을 거기에 매어둔 것입니다. 길의 한 가운데로 오시면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고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기독도가 살금살금 사자에게로 다가가 보니 진짜로 사자들은 쇠사슬에 매여 있었습니다. 기독도는 그래서 조심조심 그 두 마라의 사자들 사이의 정중앙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러자 사자들은 으르렁거리며 겁을 주기는 했지만 결코 그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했습니다. 독자 여러분, 존 번연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주기를 원했던 것일까요?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시험은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담대하게 믿음으로 나아가면 결코 나를 파멸로 빠뜨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문제를 문제시하는 그것이 문제다.”라고 말입니다. 똑같이 햇빛을 받지만 진흙은 점점 더 굳어지고, 초콜릿은 푸석푸석하게 녹아내립니다. 똑같이 햇빛을 받지만 산 나무는 더욱더 싱싱해 지고 무성해 지는 데, 죽은 나무는 점점 더 바짝 말라갑니다. 우리가 삶에서 만나는 문제를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그 인생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세상의 편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의 편입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기에 내가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 담대히 나아가면 이 세상 그 어떤 시험도 나를 파멸에 빠뜨릴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고난은 있어도 멸망은 없습니다. 인생길을 운전하여 가는 우리 앞에는 두 개의 핸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두려움의 핸들이고 또 다른 하나는 믿음의 핸들입니다. 우리는 시마다 일마다 이 둘 중에 하나를 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어려운 시절, 어떤 핸들을 잡고 사시렵니까? 이 세상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편이시니 우리는 언제나 어떤 삶의 상황 가운데서도 믿음의 핸들을 잡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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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05
  • [오성한 목사] 기회를 잡는 사람
    기회는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진다. 사라진 기회는 아무리 되새겨도 소용없다. 지나간 이야기를 하나 하겠다. 신기한 일이지만 나는 꿈에 “이 땅은 너희 땅이다!”라는 큰 소리에 놀라 깬 적이 있다. 두 번이나 연거푸 같은 꿈을 꾸었다. 잊혀지지가 않았다. 얼마 후 꿈에 본 이미지와 비슷한 장소를 발견했다. 지나가다 잠시 볼일이 있어 들렀던 곳인데 꿈에 본 그 땅과 똑같아 보였다. 구입할 수 있는 땅인지 알아보았다. 알아보니 팔려고 내 놓았단다. 그 땅을 보니 마치 꿈속의 소리가 주님의 음성같이 느껴졌다. 구입하려고 결정을 했다. 3천 평 정도 되는 땅이었다. 적은 금액은 아니었다. 구입하려고 계획하던 과정에 여러 가지 이유로 포기하게 되었다. 몇 년이 안 되어 그 땅의 가치는 엄청나게 올랐다. 후회가 되었다. “그때가 기회였는데...”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기회는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지나간다. 바람처럼 지나가는 기회를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준비된 사람이 잡을 수 있다. 군에서 산악 행군을 마치고 귀대 중이었다. 내리막길이었다. 소방도로로 소대가 줄지어 내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산 위에서 큰 트럭 바퀴가 길을 따라 빠른 속력으로 굴러 내려오는 것이었다. 행군을 마치고 귀대하던 소대원들을 덮치면 크게 다칠 수밖에 없었다. 미리 본 군인들이 “피해!”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늦었다. 굉장히 빠른 속력으로 굴러 내려오는 자동차 바퀴는 소대원들을 덮치기 직전이었다. 그때 분대장의 발이 올라갔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이단옆차기가 정확하게 바퀴 측면을 걷어찼다. 바퀴는 옆으로 나뒹굴며 쓰러져 힘을 잃어버렸다. 큰일 날 뻔한 일을 모면하게 되었다. 우리는 박수를 쳤다. 장말 멋있는 순간이었다.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준비된 분대장이니깐 할 수 있었다. 분대장은 태권도 4단이었다. 태권도로 단련된 그는 자기도 모르게 실력을 발휘한 것이다. 준비된 자가 기회가 오면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중개하는 분이 다른 사람만 좋은 일시키는 일이 많다. 대박 칠 물건을 본인이 잡았더라면 달라졌을 것이다. 같은 일을 해도 준비된 사람은 다르다. 상당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생각의 준비, 지식의 준비, 재정의 준비 등이 되어 있는 사람은 대단한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회가 와도 기회를 볼 수 없는 것은 준비되어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준비된 자는 기회를 볼 수 있는 눈이 생긴다. 기회를 볼 수 있는 눈만 생긴 것이 아니라 기회를 잡을 수 있는 눈이 있다. 기회가 와도 준비되지 못하면 볼 수도 없고 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항상 믿음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임마누엘의 믿음이 가득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능력이 가득함을 알고 있어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알고 있어야 한다. 믿는 자의 손을 통해 역사하심을 알고 있어야 한다. 믿는 자에게는 권세 있다. 당신은 능력이 넘쳐난다. 생수의 강이 지금도 흐르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 항상 머리 위에 있음을 알고 준비되어 있다는 것은 삶에 있어 중요하다. 하나님과 함께하시기에 준비된 자는 풀무 불 가운데도 들어갈 수 있었다. 사자 굴도 두렵지 않았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성경은 아는 것을 믿음이라고 했다. 그래서 믿음은 힘써 여호와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6:3)라고 한다. 여호와를 알되 힘써 알아야 한다. 아는 것이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준비다. 하나님의 나라를 아는 것은 이 땅을 사는 놀라운 지혜다. 능력이다. 힘이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동일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면서 보이는 세상을 사는 사람은 힘이 있다. 기회가 올 때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아야 한다. 보는 것과 아는 것은 같은 것이다. 알면 기회를 볼 수 있고 잡을 수 있다. 산삼을 알고 있으면 산삼을 보면 안다. 산삼을 발견하면 힘이 난다. 산삼을 발견하면 소망이 생긴다. 영적인 준비가 된 사람은 영적인 기회를 볼 수 있다. 기회가 왔을 때 믿는 자가 마땅히 할 일을 하게 된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16:17)는 말씀대로 산다. 영적인 세상과 이 세상은 같은 공간에 있다. 영의 눈이 열려 볼 수 있고, 알게 되면 이 땅이 달라진다. 영생도 무엇을 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아는 것에 달렸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영적인 싸움도 아는 것과 연관된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10:5)라고 했다. 영적인 세계를 아는 것은 아무에게나 허락된 것은 아니다. 믿는 자에게만 허락되었다. 아무나 알 수 없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마13:11)라고 했다. 우리에겐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다. 구별하여 주어진 특권을 가지고 주신 기회 포착하고 풍성함으로 나가야한다. 바른 앎으로 잘 준비한다면 믿음의 거장이 되어 산을 들어 옮길 것이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엄청난 결과를 낳는다. 복음을 정확히 알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춤추는 삶을 살 수 있다. 예수님께서 이미 하셨다. 알게 되면 능력이 생긴다. 그래서 기쁨으로 쉽게 행할 수 있다. 산삼을 본다하더라도 모르면 소용없지 않는가? 보화를 가지고 있는 자신을 알게 되는 것은 복중의 복이다. 성령께서 당신에게 쉬지 않고 알도록 도우신다. 당신에게 성령께서 보여주신 것이 있다. 엄청난 산삼 밭이다. 보화를 보여주셨다는 말씀이다. 진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셨다. 눈을 깨워라. 잠자는 눈을 떠라. 빛이 비취였다. 어둠 속에 있을 때 감고 있던 눈을 떠라. 당신에게 빛이 있고 당신은 빛이다. 눈만 뜨면 보일 것이다. 빛이 이르렀다. 여호와의 영광이 머리 위에 있다.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눈을 떠라. 당신에게 임한 영광을 보는 눈을 깨워라. 실재를 보는 눈을 깨운다면 놀라움과 감사와 감격으로 살게 될 것이다. 당신에게 주어진 엄청난 산 삼밭을 보고 있는가?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사6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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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05
  • [신재철 목사] 안 돼! (1) : 떡 사고 혼나다.
    신앙생활은 새로운 활력이 되었다. 성공이 전부라고 믿었던 내게 다른 희망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하나님을 알아가고, 예수님의 뜻을 살피는 재미가 독특한 즐거움이 되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나를 돌보시는 이모 입장에서는 나의 변화된 모습이 영 마뜩치 않았던 것이다. 부모 떠나 이모 손에 자라고 있었는데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최소한 이모님의 시각) 교회라는 곳으로 매주 출근하고 있었으니, 많이 불편하셨으리라 짐작이 된다. 오르지 않는 성적, 잦은 외출로 결국 나는 ‘교회 출입 금지’ 명령을 받게 된다. 명령을 어기고 교회를 갔다가 걸리고 말았다. 나름 조심스럽게 갔는데, 아파트에서 내려다보면 교회 가는 모습이 보인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더는 교회를 갈 수 없게 되었다. 지금까지 어른들 말씀 잘 듣고 살았는데, 이번에도 말씀 잘 듣는 아이로 태도를 유지해야 할까? “교회를 옮기자. 멀리 가자.” 큰 결단을 하게 된다. 거짓말, 속임수. 나쁜 것 알지만 학교간다는 핑계로 친구 아버지가 목회하는 교회로 옮겨 계속 신상생활을 이어갔다. 무려 버스로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곳이다. 하지만 신앙생활을 포기할 수 없었고 이 즐거움을 놓아버릴 용기도 나지 않았기에 거리는 문제되지 않았다. 종점에서 거의 다른 종점까지 가는 길이다. 교회 가는 길은 생각보다 지루했고 졸렸다. 그날도 졸다 깨다를 반복하며 교회로 향했다. 늘 그렇듯 하나님께서는 내려할 정거장에서 눈을 뜨게 하셨고 무사히 하차하게 되었다. “어? 처음 보는 할머니네?” 버스에서 내려 마주하게 된 할머니. 인도에 쭈그리고 앉아 떡을 늘어놓고 팔고 계신다. 평소 거리에서 물건 파는 할머니들 채소를 사드리곤 했기에 거리낌 없이 더 다가갔다. 어디서 사 오신 듯 깔끔한 포장의 떡들이 줄을 지어 있다. 스포츠머리 고등학생에게 할머님은 관심이 없으시다. 구매를 권하지도 않는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오히려 내가 판매를 권한다. “할머니, 이거, 이거... 얼마씩 해요?” 예상 밖의 손님이었을까? 할머니는 조금 커진 눈으로 나를 보신다. 일부러 안사도 된다는 할머니 말씀에 원래 떡을 좋아한다는 보호막으로 방어를 한다. 그리고 제법 많은 양의 떡을 비닐봉투에 담았다. 할머니는 다시 눈이 커진다. 시골 어머님께 받은 용돈이 내 또래 친구들에 비해 적지 않았기에. 나는 종종 이렇게 부자집 도련님 같은 씀씀이를 보인다. 사실 떡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저 떡이 다 팔리지 않으면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무리해서 샀다. 나도 먹고, 성가대도 나눠먹고, 늘 신세지는 목사님 댁에도 드리고. 그렇게 즐거운 상상을 곁들이며 푸짐한 봉투를 들고 교회를 향했다. 교회와 붙어 있던 사택을 먼저 들러 봉투 하나를 내민다. 목사님을 향한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감사와 사랑이었으리라. “주일에 돈 쓰면 안 되는 거야.”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반응이다. 고맙다거나, 좋아해주실 줄 알았다. 아니, 오히려 할머니 도우려던 내 착한 마음을 칭찬하실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훈계와 질책을 받았다. 주변에 있던 사모님과 딸들도 목사님과 같은 생각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주일성수’에 관한 가르침을 들으며 불편한 기독교의 한 면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면서 안 되는 것이 많다는 것을 조금 알게 되었다. 생각은 깊어진다. “사랑이 뭘까? 주일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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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05
  • [황권철 목사] 마가가 당신을 섬깁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샤클롯(Shachllot) 부인이라는 73세의 할머니가 있었다. 노랑머리에 젊은이 못지않은 미모를 갖춘 아름다운 노인이었다. 평소에 음식을 조절해 먹으므로 몸매를 잘 가꾸어 항상 고상한 옷차림을 하고 다니는 귀부인이었다. 그 여인에게 딸이 하나 있기는 하나 교회 출석을 잘 하지 않았기에 노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직접 운전하여 동양인이 세운 교회에 출석했다. 그 교회가 바로 김동명(안이숙 남편) 목사가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척한 한인침례교회였다. 부인은 김동명 목사와 안이숙 사모의 신앙에 감동을 받아 젊은 목사를 친 자식 같이 생각하고 주의 종으로 섬겼다. 그 여인은 30분 이상을 운전하여 김 목사가 개척한 교회에 오기까지 열 개가 넘는 백인교회(白人敎會)를 지나오면서도 주변의 동양인 할머니와 미국인 할머니들을 전도하여 모시고 왔다. 또한 교회 맨 앞자리에 앉아 설교를 들었고 그때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언제나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예배를 마치면 자기 집 근처에 있는 분들을 태워 집으로 모셔다 드렸고, 여름성경학교 때는 음료수와 과자를 한 아름 사서 동네 아이들을 교회로 데려오기도 했다. 하루는 한 동양인 할머니가 물었다. “당신은 백인이면서 화려하고 좋은 백인교회도 많은데 하필이면 동양인이 세운 한국인 교회에 오십니까?” 그때 샤클롯 부인은 “한국인 김 목사는 내 아들 같은 주의 종이며 내 기도의 뒷받침이 절실히 필요한 주님의 일꾼입니다. 내가 사는 날 동안 그를 붙잡아 주어야 해요 당신도 힘껏 도와주세요” 라고 했다. 그녀는 78세의 일기로 김 목사의 장례주례를 받고 천국으로 갔다. 북 이스라엘의 아합 왕 시절 칠년 기근의 때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 선지자를 자기 집으로 모셔서 섬김으로 선지자를 보호한 그 하나님이 선지자를 모신 그 과부와 아들까지 지켜 주셨다. 그래서 주님은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 10:41-42)라고 했다.  마가는 어떤 사람인가?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루살렘에 120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 예배드릴 수 있는 큰 집을 소유한 부자였다(행 12:12). 이는 마가가 부유한 유대인 가문의 출신임을 보여준다.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에 의하면(행 12:13-16) 마가 집안에 계집종이었던 로데가 베드로의 음성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베드로는 마가의 모친 마리아의 집에 자주 왕래하였을 뿐 아니라 마가는 바나바의 생질이기도 했다(골 4:10). 그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오게 한 이는 베드로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마가를 친히 아들이라(벧전 5:13)고 불렀다. 또한 마가 자신이 쓴 복음서의 근본 자료도 베드로에게 전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즉 마가는 AD 30-65년 사이에 베드로가 행한 예루살렘에서 로마에 이르는 전도사역의 초기부터 끝까지 그와 함께 하면서 베드로가 전하는 바를 기록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에서보다 특별히 베드로에 대한 기록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가 사도는 아니지만 베드로의 직접적인 증언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기에 사도성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연유로 마가복음은 베드로의 복음이라는 별명까지 붙이기도 한다.  마가복음이란 저자 마가의 이름에서 붙여진 것이다. 초대교회 각종 문헌과 교부들의 증언에 의하면 본서의 저자가 마가임을 너무도 쉽게 확증할 수 있다. 또한 마가복음 10장은 갈릴리에서 유대 예루살렙 입성 전까지의 유대사역을 요약하고 있다. 예수님은 마지막 한 주간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인자(the Son of God)는 섬기려 왔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의 수난의 의미를 밝히는 동시에 참된 제자의 길이 섬기는 종의 길임을 알려 주고 있다. 예수는 만왕의 왕이신 메시야로 이 땅에 오셨으나 사람들에게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도리어 섬기려 오셨다(마 20:28; 요 13:12-17). 주님의 대속적인 죽으심과 섬김의 본은 결코 분리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는 성도는 누구나 그가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신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3-4)고 권면했다. 성도의 참된 교제도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며 서로 서로 섬기는 자세를 가질 때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다. 이 섬김의 자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죽음을 본받는 데서 비롯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없는 자는 진정으로 섬기는 삶을 살 수 없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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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05
  • [하수룡 장로] 탓할 데가 없는 자
    필자기 어릴 때만 하더라도 장로라 하면 보통 사람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훌륭한 인품과 선하고 뛰어난 행동으로 탓할 데가 없는 분으로 신불신간 존경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잘 아는 예화 중에 평양 산정현교회의 조만식 장로와 주기철 목사를 들지 않을 수 없다. 두 분은 사제기간으로 제자를 담임목사로 모신 것이다. 초대 조선일보 사장인 조만식 장로가 급한 일로 주일 예배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도착하여 문제가 생긴 것이다. 보통 목사라면 그냥 넘어 갈 일이지만 주목사는 강단에서 단호하게 말했다. 입구에 들어서는 조장로에게 “장로님 거기 서서 예배드리시지요.” “장로님이 예배시간에 늦으면 성도들이 무엇을 본받겠습니까?” 명한대로 예배를 다 드린 후에 “목사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이 못된 장로를 용서해 주세요.”하고 울먹이니까 온 교인들이 같이 울어 순식간에 은혜의 바다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믿는 우리에게 지금까지 두고두고 아름다운 교훈이 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 고신총회만 하더라도 장로의 숫자는 엄청 많다. 세상에서 좋은 것을 즐기고 그야말로 부귀영화를 다 누리던 분이 돈이나 세상명예를 가지고 장로가 되어 옛날의 것을 다 끊어버리지 못하고 장로의 직을 수행한다면 정말 교회가 시끄럽게 된다. 술 담배를 즐겼던 자는 과감히 끊어야 하고 해외여행 가서 불건전한 골프나 마사지를 즐겼던 장로이면 회개하고 이제는 그만 두어야 한다. 특히 교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기를 중심으로 당을 만들어 교회를 어지럽힘은 죄악임을 깨닫고 훼파해야 한다. 서울의 대형교회 어느 장로는 형제간에 부모의 재산 때문에 원수가 되어 사회법정에서의 치열한 싸움은 정말 부끄럽다. 어린 성도들이 장로는 목사를 쫒아내는 주역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것 또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장로선택의 맹점은 교회의 형편이나 조직의 방침대로 장로를 뽑게 되니까 수준이하의 장로가 탄생되어‘장로가 왜 저 모양이이지.’라고 손가락질을 받는다. 보통 장로 장립할 때에는 자기의 부족함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충성되이 살 것을 다짐하는 모습은 든든하고 희망적이었음을 기억한다. 오랫동안 장로의 일을 수행하면서 배우고 익혀 탓할 데가 없는 장로로 거듭나는 것이 정상인데 해가 갈수록 헌신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누림과 권위의식에 젖어들어 교회의 귀중한 일도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것 때문에 교회의 질서가 무너지는 현실이 안타깝다. 좋은 장로는 청지기의 삶으로 교회의 밑거름이 되고 목회자의 동역자가 되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장로의 역할은 매우 귀하고 교회의 부흥을 위해 꼭 필요한 직분이 아닐 수 없다. 매일 내가 장로의 자격이 있는지 자문하고 주님께 탓할 데가 없는 좋은 장로의 자질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 내가 교회 안에서 성도들에게 덕을 끼치는 장로로 성도들에게 존경과 신뢰를 받고 살아가는지를 스스로 평가하고 또한 질서 있게 당회를 잘 섬기는 장로가 되었는지 자성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보통 목사와 장로는 부부관계라고 말하는데 목회자의 비전이 무엇인지 알고 목회자가 어떤 것을 필요로 하는지를 살피고 섬기는 것이 당연하다. 진정 장로가 할 일이 무엇인지 나의 직무를 찾으려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분별력도 절대 필요하다. 어느 대통령 후보가 국민을 섬기는 머슴이 되겠다고 외치는 소리에 공감한 적이 있다. 교회 장로는 머슴같이 섬기는 위치에 서있어야지 대우받는 감독의 자리에 있으면 안 된다. 모름지기 세상적인 것은 버리고 낮은 자의 자세로 탓할 데가 없는 자로 성도를 사랑으로 보살피는 역할에 충실해야한다. 보통 목사는 좋은 장로를 만나는 것이 목회의 행복이고 장로는 목사를 잘 만나는 것이 신앙의 승리라고 말한다. 작금에 병들어 시들어가는 한국교회를 올곧게 성장시키려면 장로가 바로 서야한다. 장로가 탓할 데가 없이 바로 서야 교회와 나라가 산다는 것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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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05
  • [박동철 장로] 망(網)을 쓴 우리들, 봄날은 간다.
    성경 말씀 신명기 25장 4절에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고 했다. 일하는 자에게 수고의 대가를 주고 먹을 것을 반듯이 주라는 주님의 명령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풀어쓴 고린도전서 9장 10절을 보면 곡식 떠는 자가 소망을 갖고 일하듯 밭 가는 소 또한 소망을 갖고 일한다고 했다. 코로나19의 역병이 3년째 기승을 부리며 온 인류에게 망(網)을 씌워놓고 있다. 2022년에 들어서도 우리들 모두 마스크라는 망을 쓰고 봄을 맞았다. 아버지의 소망을 바라볼 수 없는 죄인들인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개나리 진달래가 봄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코로나 세상 또 한해의 봄날은 가고 있다. 1953년 가수 백설희가 불러 국민가요가 된 ‘봄날은 간다’는 한국인의 정서에 뿌리가 깊이 서려있다. 6.25전쟁 시기 해마다 따뜻한 봄날은 오지만 봄이 아니었다. 전쟁의 참혹함으로 젊은이들에게 소망이 없어 보일 때 박시춘 작곡에 서정성의 작사가 손소원이 작사한 봄날은 간다의 곡이 만들어져 널리 불렸고 전쟁 이후에도 국민가요가 되고 영화로도 만들어지기도 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 오늘도 옷고름 씹어 가며 산 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가사를 가슴에 새겨보면 애틋한 남녀의 사랑 가운데 큰 아쉬움이 자리하고 있는듯하다. 그래서 봄날은 간다는 전쟁 속의 슬픈 봄날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한 맺힌 국민가요가 되어 우리의 정서를 후벼댔다. 이후 봄날은 간다는 조용필, 장사익 기라성 같은 대형가수들이 리메이크하여 많이 불리고 있다. 요즘 젊은이 미스·미스터 트롯 가수들도 많이 부르는 가요가 되고 있다. 2001년 영화로도 만들어져 이영애와 유지태가 주연으로 만들어졌다. 애틋한 남녀 사랑이 처음과 끝이 달라지는 비극의 러브스토리로 가슴에 아려있다. 처절한 전쟁의 아픔 속에 사랑과 행복 이별로 얽혀가는 사람들의 고난의 정서를 보여준 영화이기도 하다. 지금 2022년 봄날은 어떤가. 봄날은 온 줄도 모르게 가고 있다. 코로나 19라는 역병이 온 지구촌을 전쟁보다 더한 불안과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이 땅에 예수의 탄생과 부활로 구원의 여정을 이루는 세기의 역사를 코로나가 새롭게 바꿀 수도 있다는 무서운 전망을 하기도 한다. 지금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겪어보지 못한 공포 속에 언젠가 끝이 오면 전혀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것 아닌가 하는 나약한 인간의 막연한 기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은혜 입은 우리들은 마지막 때를 진짜 봄날을 준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전서 1장 5절에 말씀하고 있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고 했다. 복음의 밭갈이를 않는 우리들에게 망을 씌웠을까. 아니다. 소망을 가진 자에게는 망을 벗겨줄 것이다. 더욱 복음의 소망을 가져보자. 우리는 예수 다시 오실 때 받을 칭찬 영광 존귀 영원한 유업을 받는 그때는 복되고 그리고 영원한 봄날이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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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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