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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6) (민12:1-3, 마5:5)
지면을 통하여 제가 목회하는 고신교회에 대해 잠깐 예로 언급함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고신교회도 세계를 교구로 선교하는 대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370 용사는 못되더라도 37 용사는 있어야 합니다. 고신교회 목회자로서 오늘까지 우리 고신교회의 선교를 돌아보면 고신교회 성도들이 다윗의 37 용사에 버금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교회 분열의 아픔과 담임목사, 부목사들이 면직을 당하는 일 앞에서도 선교를 중단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믿음의 의리가 있는 용사들이었습니다. 코로나19 기간에도 15개 정도의 교회를 필리핀과 네팔에 건축했습니다. 순간순간 어려움이 생겼을 때 구제하고 돌아본 것은 말할 수도 없이 많습니다. 지난해 상반기만 해도 우리 교회 선교비가 1억이 더 지출되었습니다. 경상비 전체 25-30%가 선교비로 지출되고 있습니다. 일단 빚을 내서라도 선교비는 지출하고 봅니다. 돈의 액수를 떠나서 선교를 바라보는 시각과 선교를 하는 실천에 우리 고신교회와 같은 교회가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고신교회 담임목사로서 우리 교회는 세계를 교구로 선교하는 일에 전 성도가 다윗의 37 용사와 같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얼마나 성도들을 좋아하겠습니까? 잘은 몰라도 고신교단 안에서 저만큼 성도들 좋아하는 목사 없을 겁니다. 하지만 바로 이 장면에서 목회자는 매우 위험한 신호를 감지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을 자기 자신보다 사랑하고 좋아해야 합니다. 하지만 목회자는 성도들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이 부분이 목회자가 감지할 줄 알아야 하는 위험한 신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가 하나님 외에 그 어느 것도 의지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눈곱만큼이라도 하나님 의지하는 것을 성도에게로 돌리고 기대를 거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목회자에게 즉각 응징하십니다. 그러니 목회자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성도들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 사이에서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절대로 타협하거나 양보해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로 하여금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십니다. 목회자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때, 성도들은 반드시 목회자의 37 용사가 되어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를 시도 때도 없이 풀무불 앞에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를 철저히 하나님만 의지하는 온유한 자로 만드시기 위하여 풀무불에 던져 넣으십니다. (욥23:10)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그 결과 목회자는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당한다 하더라도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그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온유한 자가 되어 순금같이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온유하게 된 목회자는 정금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리암이 아론과 70장로들을 규합하여 백성들을 선동합니다. 어느 정도 새가 결집 되니 미리암은 공개적으로 모세의 통치에 비방과 반역을 시도합니다. 아직 출애굽과 홍해를 건넌 감동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때 성경은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증언합니다. 악한 무리들이 거짓된 계획을 세워 공격했습니다. 무시무시한 공격 앞에 제자들과 함께했던 무리들은 다 떠나가 버렸습니다. 부인하며 저주까지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홀로 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거나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홀로 지시기도 힘든 십자가를 지시고 묵묵하게 끝까지 골고다로 가셨습니다. 목숨까지 위협하는 거짓된 계획으로 공격했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른말, 천국 복음을 전하시며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온유한 자를 완성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온유한 자의 완성을 이루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약속하신 대로 땅을, 약속의 땅을, 교회를 주셨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교회는 하나님께서 온유한 자에게 약속하신 최고의 복입니다. 어떻습니까? 나는 교회인 것 같습니까? 온유한 사람입니다. 이미 복 받은 사람입니다. 나는 교회가 아닌 것 같습니까? 온유한 사람 아닙니다. 교회와 한 몸 되지 못하고, 교회와 거리가 있는 사람은 온유한 사람도 아니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 복음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 모든 말을 듣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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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현령비현령(5) -전관예우(前官禮遇)
두런두런 둘러앉은 장로님들의 담소 가운데 20만 원짜리 봉투 하나면 “총회에서 발언해 줄 목사들 많다” 아니 “발언 안 할 사람 거의 없다”라는 말로 폭소가 터져 나옵니다. 참 검소한 고신 교단의 목사들입니다. 상임위나 특별국의 자리 하나면 평생 다져왔던 인간관계나 의리는 배설물처럼 여기는 결단력 있는 고신 교단의 목사들입니다. 이렇게 다루기 좋은 목사 장로이니 계파나 진영의 의도를 가지고 매관매직하면 오늘날 고신에 만연되어있는 계파와 진영의 골은 더욱 깊어질 것이 자명합니다. 아니 혹자는 이미 보수는 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보수를 만들어 개혁을 견제하고 균형을 맞추자고 주장합니다. 뼛속까지 개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총회 임원으로 만들어 죽어가는 보수를 살려야 한다고 평생 개혁에서 쌓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작금의 정치행태에 발맞추어 가능한 봉투가 되는 자리를 만들고, 그곳에서 천년만년 누리고 싶어 하는 형국입니다. 20만 원짜리 봉투와 자리의 맛을 봐 버린 소위 보수라는 자들은 아예 정치적인 의리와 명분은 상실되어버렸고, 보수라는 가면만 쓰고 있을 뿐 언제든지 개혁도 되고, 진보도 되어 그동안 누리던 봉투의 자리를 놓칠까 전전긍긍하며 그 신보수라는 새 배에 올라타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최근 들어 고신교단 내에 계파와 진영의 골이 더욱 깊어지고 커진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서울의 L 목사님께서 열변을 토하신 것처럼 총회 서기 출신 카르텔입니다. 총회 부회록 서기가 되기 전에 총회 준비를 위한 총회 서기부 MT라는 명목으로 그 해 부회록 서기 후보의 물망에 오르는 사람을 부부 동반 모임에 참여시킵니다. 그러니 총회 임원에 입성하기 위해서 그 계파 사람이 아니면 시작부터 불가능합니다. 지금 총회 서기부에 포진한 분들을 보십시오. 계파 색채가 엷고, 계파를 싫어하고, 보수성향이 있는 사람도 일단은 그 진영에 몸을 기대고 양다리를 걸쳐야 시작이 됩니다. 균형 있는 총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분명한 명분으로 다리만이라도 걸치고 시작했는데, 회록 서기를 지나면서 하체가 들어가고, 부서기를 지나면서 몸통이 들어가고, 서기가 되면 총회를 손에 쥐고, 서기를 마치면서 그 영향력은 한국교회로 확대됩니다. 사욕에 치우친 사람이 총회 임원, 특히 총회장이 되어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4년 동안 총회 서기부를 거치면서는 구석구석을 너무도 잘 알게 된 서기부 임원들이 총회장단이 되었을 때, 유익한 점보다 작금의 현상처럼 위험하고 무법천지가 될 위험성이 훨씬 높습니다. 소위 서기 카르텔이라는 것을 반드시 총회적으로 다루어 이 카르텔로 인한 계파와 진영을 넘어 안하무인의 정치로 흘러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서기부를 거치지 않아도 총회장단에 오를 정도의 사람이면, 이미 노회와 목회에 상당한 경험과 식견을 가진 분들로서 충분한 자질이 검증되었고, 사무총장 이하 직원들의 훌륭한 보좌가 있기에 1-2년의 총회장단 사명은 충분히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한국교회에서의 우리 교단의 몫이 있습니다. 교단의 위상을 생각해서 대부분이 총회장을 역임하신 분들이 이사로 가십니다. 총회 서기부를 마치고는 특별국이나 상임위에는 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고 총회 임원회에서 의논이 있었다지만 관례처럼 총회 서기를 마치면 총회를 잘 안다는 빌미로 감사국에 들어갑니다.(현재 감사국원 3명은 최근 총회 서기역임) 총회 감사국인지 총회 서기 지내신 분들의 친목회인지 구분이 안 될 지경입니다. 총회 감사국이 총회 서기부의 연장선 조직입니다. 총회 감사국은 별정직처럼 그 기능상 법적 전문가, 재정 전문가, 행정 전문가 정도는 배치해야 합니다. 차라리 총회를 잘 아는 서기부 출신들로 총회를 하나 만드시지요. 총회 총대로 나올 정도가 되면 기본적인 자격과 능력을 갖춘 분들인데, 총회 서기 출신들이 꼭 해야 한다는 논리는 총대들을 얼마나 무시하는 처사인지 총대들은 알아야 합니다. 총대들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당근 하나 던져주면 입을 다무는 총대들이니 무시당하는 줄도 모를 수 있습니다. 유일하게 서기를 마치고 임원회에서 의논한 대로 그 어느 상임위도, 틀별국도, 이사도 가지 않은 분이 고 신수인 총회장이십니다. 최근 총회 서기를 지낸 분 들 중 유일하게 보수진영의 고 신수인 총회장님께서 약속을 지켰습니다. 소위 개혁진영의 서기들은 단 한 명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너무 개혁을 잘하셔서 말입니다. 처음 시작할 땐 훌륭하셔서 선출되셨습니다. 그런데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니 자연스럽게 욕심이 생긴 것입니다. 여기엔 그 어떤 사람도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총회가 훌륭한 분들로 보호해야 할 책임도 있습니다. 총회장의 사역이 끝날 무렵 고 신수인 총회장님께서는 당신의 몫인 “CBS이사”를 제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당연히 총회장님께서 가셔야 교단 권위와 위상이 서게 된다고 고사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렇게 전달하여 CBS에서는 제가 이사로 갈 것 다 알고 전화까지 왔었습니다. 물론 개혁에 몸을 담았던 총회장 출신은 선배 총회장 출신 목사님의 이사 자리를 빼앗아서라도 반드시 그 자리에 갑니다. 말 그대로 개혁 정신이 투철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난 후 고 신 총회장님께로부터 “미안하다”고 하는 전화가 왔습니다.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너무 힘들게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원래 그 자리는 제자리가 아닙니다. 총회장님 자리니 총회장님 편하신 대로 하시라”고 대답했고, 현제 이사로 있는 당시 총회 서기가 고집을 부려 그 자리로 갔습니다. 사욕에 눈이 뒤집히면 세상이 말하는 윤리도 도덕도 질서도 없습니다. 현재 우리 고신총회가 한국교회에 파송하는 이사는 CBS, 성서 공회, 찬송가 공회, CTS, 군선교 위원회입니다. 현재 이사를 하고 있는 분들은 다 총회 임원 출신이고, 목사인 경우는 다 총회 서기 출신입니다. 고 신수인 총회장님을 분기점으로 해서 그동안 관례로 총회장을 역임했던 분들이 가던 이사를 총회 서기를 마치고 가는 아주 개혁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총회를 잘 아는 것을 넘어 총회 울타리 밖에 있는 이권도 잘 알게 된 것입니다. 총회장단이 갖는 위엄과 일반 목사와 비교할 수 없는 혜택에 눈이 멀어 목사의 정년까지 희생해 가며 자리에 오르고 “내 때만 망하지 않기를 소망”하면서 그동안 꿈꾸어 왔던 즐거움을 만끽하게 됩니다. 그럴 수도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그런 세월이 가는 동안 고신의 신앙과 정신은 오물통이 되어 썩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위기가 아니라고 했다가 집권을 하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위기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이 역시 진영논리로서 총대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하는 속임수입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책임을 고신의 교회들에게 떠넘기는 기가 찬 술수이지요. 그리고 뒤에서는 몇 년 세월을 통해 달인의 경지에 오른 실력으로 소위 봉투가 되는 일에는 탁월한 안목으로 몇 수를 내다보는 행보를 하게 됩니다. 총회 서기부는 총회 서기단 활동으로 총회 임원회 자리를 끝내야 합니다. 총회장단은 시대 시대마다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바라보며 영적으로 한국교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장자 고신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을 세워야 합니다. 총회가 평안하고 태평성대일 때는 농어촌에서 목회하시는 훌륭한 목사님도 총회장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고신이 위기라고 특별기도회를 하는 상황이라면 총회장 되기 위해 몇 해 동안 수천, 수억을 쓸 것이 아니라 총회장에 된 후 수억을 총회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인물을 총회장으로 세워야 합니다. 고신이 위기라고 기도회를 하면서, 1) 눈 감고 아웅 하지 말고 2) 순수한 교회들과 성도들의 주머니를 갈취하지 말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야 합니다. 또 이미 그 자리에 오르신 분이라 해도 위기의 총회를 위하여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분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정말 고신을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전관예우(前官禮遇)’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적 의미는 장관급 이상의 고위 관직에 있었던 사람에게, 퇴임 후에도 그의 공직에 대한 헌신을 기려 예의를 갖추어 존중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관리는 개인의 행복에 우선해서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재능과 노력을 바쳤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자세로 일한 관리가 퇴직했을 때 그를 예우함은 마땅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흔히 쓰이는 전관예우라는 말의 뜻은 본래의 뜻과는 거리가 멉니다. 가장 잘못된 사례가 법조계의 전관예우입니다. 전직 판사와 검사가 퇴직 후에 변호사가 된 사람을 현직 검사나 판사가 예우해 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변론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관(前官)이라는 이유로 유리한 결과를 얻는다는 것은 공정을 생명으로 하는 법정에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제 총회 감사국은 서기부 출신의 ‘전관예우’의 자리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러니 총회 피감 기관들을 공정하게 제대로 감사할 기능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전관예우 받았으니 밥값을 해야겠지요? 한 걸음 더 나아가 고신을 대표하는 한국교회의 자리도 서기부 출신의 “전관예우”의 자리로 자리매김해 버렸습니다. 당연히 사리사욕이 목구멍까지 차오릅니다. *묻고 싶습니다. 앞서 언급한 총회를 대표하여 파송하는 이사직에 어떤 근거로, 어떤 기준으로 파송하는지, 서기 출신이 총회를 대표할 자격이 있는 것인지, 총회 임원회는 총대들이 납득 할 수 있는 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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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5 : 성경에서의 용납과 용서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지나면서 주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믿음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데 먼저 감사를 드리면서 문득 그게 용서인가 용납인가? 두 단어는 같은 말인가 다른 말인가? 라는 용어적 의미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흔히들 많은 교인들은 이 두 단어를 구분 없이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찬송가 569장 3절에도‘흠이 많고 약한 우리를 용납하여 주시고’란 가사가 있다. 하지만 엄격히 보면 같은 듯 다른 말이다. 본 호에서는 그 차이점이 어떤지를 분석하여 논하고자 한다. II. 용납(容納)과 용서(容恕)의 단어 분석 1. 용납이란? : 헬라어로는 ‘아네레스’, 한자어로는 얼굴 용(容), 바칠 납(納)이다. 민중서관의 국어대사전에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남의 말이나 행동을 받아들임’, ‘어떤 물건이나 상황을 받아들임’이라 했고, 금성사 국어대사전에는 ‘부정적인 것을 그냥 받아들이거나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했다. 국문학 교수를 역임한 최태영 장로는 ‘교회용어 이대로 좋은가?’란 그의 저서에서 ‘이 용납은 허용(許容)과 거의 같은 뜻으로 부정적인 요소, 모자라는 점이 있지만, 그것을 탓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하며 받아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이를 우리 개신교적인 의미로 보면, ‘우리의 죄는 용납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시지 이를 긍정적으로 이를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용납하시는 분은 아니시다.’라고도 했다. 이상으로 볼 때 어떤 잘못이 있을 때는 그 일에 대한 회개 기도가 필요하며,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성경에서도 용납은 죄의 개념으로 표현되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면,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고후11:1).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 구나’(고후11: 19). ‘사랑가운데 서로 용납하라’(엡4:2)고 했다. 여기에서의 용납이란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용서가 아니라 상호 인간관계 속에서 상대방을 너그럽게 보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2. 용서란? : 헬라어로는 파레시스 로서 ‘놓아줌’, ‘해산’, ‘처벌의 보류’등의 뜻이 있고, 로마서 3:25절에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하여 지은 죄를 용서함’이란 뜻으로 말씀하고 있고 수많은 용서에 대한 말씀도 거의 동일하다. 한자어로는 얼굴 용(容), 용서할 서(恕)이며, 민중서관의 국어대사전에는 ‘지은 죄나 잘못한 일을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덮어줌’이라 했다. 이상으로 볼 때 성경적 의미나 각종 사전적 의미로 볼 때도 용서의 의미는 거의 동일하다. 이렇게 볼 때 용서란,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또 스스로 죄를 해결할 방법은 없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믿고 회개 기도할 때 비로소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용서는 상호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용납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는 믿음 안에서의 회개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용서인 것이다. III. 결론과 제언 서론에서 언급한 찬송가 569장 3절에 ‘흠이 많고 약한 우리를 용납하여 주시고’란 가사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면, 용서와 용납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어서 다소의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앞에서 논한 대로 실제로는 같은듯하나 다른 의미이다. 여기서는 용납이 아니라 용서로 표현함이 옳을 것이다. 이 두 단어 외에도 관용(寬容)(사전적 뜻: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이란 용어도 있다. 어쩌면 용납과 용서를 다 포함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고민과 염려가 되는 것은 이런 문자적인 구분을 지나치게 하다 보면, 문자적 율법주의에 빠져서 본질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항상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확한 의미를 알고 사용하는 것은 더 좋은 일이기 때문에 바로 알고 바로 사용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 용어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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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삶의 현실에 대한 인간의 태도
인생의 삶을 사는데 현실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그 태도가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태도(attitude)가 고도(altitude)를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비행기가 아래로 향하느냐 위로 향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고도가 결정되듯 사람이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 방향과 높이가 결정된다는 뜻이다. 누구나 높이 오르고 싶어 하지만 아무나 높이 오르는 것은 아니다. 오를 수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히말라야 고산족들은 양을 매매할 때 가파른 산비탈에 양을 놓아두고 살 사람과 팔 사람이 함께 지켜본다고 한다. 비탈 위로 풀을 뜯으러 올라가면 값이 비싸고, 비탈 아래로 내려가면 값이 싸진다고 한다. 그 이유는 위로 올라가려는 양은 현재 힘이 들더라도 넓은 산허리에 이르게 되지만, 아래로 내려가는 양은 현재 수월하나 협곡 바닥에 이르러서는 굶주려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신앙의 삶도 마찬가지다. 항상 높이 계신 주님을 바라보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오는 자가 있는가 하면 어려움이 있을 때 예루살렘을 떠나 내려가는 자들이 있다. 어려운 시기에 갈렙은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 믿음의 태도를 가졌던 사람이다. 그는 85세의 나이에도 아직도 정복되지 않은 가나안 땅에 잔류하고 있는 아낙 사람들이 사는 산악지대를 정복하고자 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곳에는 아낙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분명 함께 하실 것이니, 내가 반드시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수 14장 12절)” 갈렙의 신앙은 능동적 신앙의 삶이었다. 45년 전에도 다른 사람들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후퇴 반응을 보였지만 갈렙은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자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벌써 85세 고령인데도 여전히 적극적인 Next Vision 성취를 지향하며 살았던 것이다. 맥도널드 햄버거를 창업하기 전 레이 크록은, 53세 나이에 겨우 밀크쉐이크와 함께 30년 동안 종이컵을 파는 세일즈맨으로 반평생을 보냈다. 그래도 그는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던 그는 30년이라는 기나긴 밤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서 성공을 한 것이다. 인도의 벵골 호랑이는 먹이 사냥에서 사냥감을 잡는데 약 스무 번의 시도 끝에 한 번 성공한다고 한다. 그는 실패 앞에 포기가 아니라 도전의 태도를 가져 그 도전이 성공을 이루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한 번 실패하면 쉽게 단념하고 한탄한다. 잃은 것 때문에 원망하지 말고 지금 있는 것이 자산이 되어 다시 도약해야 한다. 열정을 가진 사람으로 다시 일어나면 되는 것이다. 슈베르트는 가난한 음악가였다. 31세로 죽을 때까지 방 한 칸 없었고, 그토록 필요한 피아노 한 대 없는 불우한 음악가였다. 어느 날 레스토랑에 앉아 있는데 악상이 떠올랐다. 그는 오선지를 찾았다. 친구가 레스토랑 메뉴판에 오선지를 그려주었다. 그것이 유명한 아베마리아 세레나데이다. 환경에 낙심할 필요 없다. 주위 시선에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다. 폭풍이 일어도 지구는 돌고 있는 것이다. 고난 속에 신앙의 열정을 가지고 가면 길이 열린다. 신앙의 열정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능력 주시고 그 능력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나니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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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자유의 축복 (요8:31-36)
1997년 북한의 권력서열 제3위(노동당 국제담당비서)였던 <황장엽>씨가 주중 한국 대사관을 통해서 우리나라로 망명을 했습니다. 그 망명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북한에는 그의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과 가족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나라로 망명함에 따라서 그의 가족들은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고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북한 권력층의 실세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남한으로 망명을 할 경우 남아 있는 가족들이 얼마나 비참해 지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남한으로 망명을 감행한 이유는 바로 체제의 자유를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고, 너무나 잘못되어 있는 북한의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어서였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렇게 무모한 망명을 한데 대해서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의 행동이 옳았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역사가 평가를 할 것입니다. 그의 행동을 통해서 우리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을 깨달을 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유의 소중함”입니다. 체제의 자유, 정치적인 자유는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억압이 있는 나라마다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 기꺼이 몸을 던지고, 민주화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유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자유의 소중함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억압 속에 사는 사람들은 자유의 소중함을 애타게 목말라 합니다. 그렇게 소중한 정치적인 자유보다 더 필요하고 소중한 자유가 있는데 바로 영적인 자유(신앙의 자유)입니다. 그 영적인 자유에 대해서 알아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유를 취하는 방법을 알아야합니다.(요8:32,36) 둘째는, 자유를 빼앗기지 않게 지켜야합니다.(갈2:4) 셋째는, 자유를 누리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갈5:13)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소중한 자유를 잘 지키고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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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이현령비현령(4) - 가스라이팅 (gaslighting)
고신!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이름입니다. 고신!고운 정보다 미운 정이 더 무섭다고 했습니까! 고신!순교자의 정신,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노래하지만 지나가던 개가 고신을 비웃어도 고신에 속한 사람들 중 몇 명이나 당당하게 반론을 제시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개가 고신을 비웃어도 관심을 가질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요? 고신!그래도 고신이 고신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고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고신! 내가 부르다 죽을 이름이여! 고신! 고난도 슬픔도 그 이름 아래 묻을 수 있는 아름다운 이름이여! 고신에는 각계각층에 많은 인재들이 있습니다. 의외로 인재들이 많습니다. 우리 선배들의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이라는 철저한 신앙교육으로 훈련받은 인물들이 아직도 곳곳에 건재합니다. 오늘 우리는 선배들의 신앙과는 너무 멀어져 있어 다음 세대에는 과연 얼마만큼의 인재들이 양산될지는 극히 우려스럽습니다. 위기의 고신이라지만 마지막 희망 하나가 있다면 그렇게 훈련받아 각계각층에서 묵묵하게 고신의 신앙을 지켜가는 인재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왕상19:18)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문제는 그 인재들이 교단 내에서는 대부분 소위 정치를 등지고 살고 있습니다. 허물어져 가는 위기의 고신을 위하여 두 팔을 걷어붙이고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희생과 수고를 하다가도 시도 때도 없이 여리고성과 같은 절벽을 만나게 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제 내 교회나 잘 섬기다가 가리라!”라는 푸념을 내놓게 됩니다. 교단 외부에 있는 인재들은 고신을 사랑하는 신앙과 정신이 소외되었다는 안타까움과 서러움과 절박함으로 오히려 원한이 되고, 원성이 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뿌리가 고신이요, 고신 신앙이기에 고신이 문을 열고 불러만 준다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고신의 품으로 달려올 자들이 분명합니다. 고신대, 복음병원의 위기를 위기라고 말들 하지만 어쩌면 이 위기가 진짜 위기인지 모릅니다. 오랜 세월 이러한 위기가 있어 왔기에 오늘과 같은 고신대, 복음병원의 위기는 불을 보듯 자명한 사실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고신 내부에 있는 인재들과 고신 외부에 있는 인재들이 왜 이렇게 산화하여 떠돌고 있을까요? 세월이 가면 나이를 먹듯이 자연스러운 질서나 예상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하고 최선을 다하면 바른 기준과 질서에 따라 책임과 권한이 주어져야 합니다. 총회 산하 기관에 몸을 담고, 고신의 식구로서 고신의 교회와 기관을 위해 한 몸 불사르겠노라고 하는 청운의 꿈을 다짐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줄을 서야 되는지를 눈치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고신의 기관에 몸을 담은 식구들은 이 눈치, 저 눈치, 이 계파, 저 계파, 이 진영, 저 진영, 이 집안, 저 집안을 의식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낼 때 자연스럽게 진급을 하고 책임 있는 사명과 자리로 옮겨가도록 해야 합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고, 일을 잘해도 소용없다고 합니다. 위기를 직시하고 위기를 부르짖으면 오히려 경계의 대상이 되고, 다 같이 헌신해서 위기를 돌파하자고 외치면 손해 보기 싫어하는 동료들도 외면할 뿐 아니라 집행부에서는 다루기 힘든 사람으로 낙인을 찍어버립니다. 그러니 제일 잘하는 방법, 제일의 능력은 비위를 맞추고 손을 비비면 됩니다. 급기야 직원들에게 보직과 사명을 맡기면서 “어느 계파에 속해 있느냐? 누구와 가깝느냐? 어느 진영 사람이냐?”가 결정적인 기준이 된다고 합니다. 이해하기 좋게 최근의 있었던 일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평생을 고신대를 위해서 온갖 어려운 일 마다하지 않고 봉사한 이명호 장로의 일입니다. 이 장로는 고신대 기독교교육학과(82학번)를 졸업하고, 1989년 고신대에 몸을 담아 35년째 근무하고 있습니다. 2022년 6월 처장으로 보직을 받아 올해 2024년 12월에 퇴직(은퇴)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퇴직을 앞에 두고서 6개월 휴가(공로)를 주는데 이렇게 볼 때, 올해 2024년 6월 30일까지 3달만 더 근무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장로는 3달도 채 남지 않은 4월 3일에 처장에서 해임되어 학술정보관장(구. 문헌정보관장)으로 밀려(인사발령)나게 되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당사자는 정작 “이유를 모르겠다, 이유라도 알려주면 좋겠다.”라고 합니다. 이 장로는 한평생 고신대에 몸을 담았고, 고신의 장로로서 “기독교 대학으로 바르게 성장해 가면 좋겠다. 이런 식으로 하면 정말 사람이 없어진다. 안타깝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 장로는 현재 총장의 직계 후배입니다. 작년에 현 총장이 총장으로 선임된 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잘 도와달라 끝까지 함께 가자”고 부탁을 했고 이 장로도 최선을 다해 보필하겠다고 했는데 결과는 위와 같습니다. 필자가 알고 있는 총장은 그렇게 하라고 해도 못 할 사람입니다. 고신의 장로 아들로 누구보다도 고신을 잘 알고 후배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총장이 되고 나서 사람이 달라진 것입니까? 겨우 몇 달 사이에 말입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 이 총장으로서는 얼마나 든든하고 믿을 수 있는 후배가 아닙니까? 한평생의 일을 마무리하는 이 장로 역시 무슨 욕심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2달도 남지 않은 이 장로를 보직해임 시키고 학술정보관장(구. 문헌정보관장)으로 물러나게 했습니다. 과연 총장이 그렇게 했겠습니까? 총장의 평소 인품을 잘 아는 필자는 절대로 그렇게 할 사람이 아님을 확신합니다. 학교 구성원들은 총장은 허수아비요, 다른 사람이 실제 총장이라 말한다고 합니다. 학원 이사는 물론이요, 법인 사무실의 직원이 학교와 병원을 좌지우지한다고 입을 모은다고 합니다. 학교와 병원의 보직 인선에 총장이나 병원장의 의중보다는 외부의 입김이 더 크다고 교직원들은 말합니다. 최근에 있었던 일이지만 고신과 고신대를 위기로 몰아넣은 오늘까지의 악습이요, 안하무인입니다. 이런 상황에 기관의 구성원들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 것 같습니까? 아니 어떤 자세를 취할 것 같습니까? 학원 이사들은 위기라고 소리치며 교회의 호주머니를 노릴 것이 아니라 정신을 차리고 산하 기관의 식구들이 정당하게 일하고 정당하게 대우받을 수 있는 예상 가능한 행정을 집행하기 바랍니다. 도대체 하나님을 영광을 위한 기관을 누가 이렇게 똥 칠을 하고 있습니까?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해도 우리 사람으로 불렀으면 적어도 1-2년은 전권을 주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왜 사람을 불러 놓고 이런 말을 듣게 하고, 이런 식으로 손발을 자르고, 얼굴마담 노릇을 하게 합니까? 기준이 허물어지면 이렇게 됩니다. 법을 집행하는데 “법은 아니라 해도 우리가 다 찬성하면 할 수 있다”고 하는 결과가 바로 이것입니다. 총장을 정당한 방법으로, 정당한 법으로 초빙했어야 합니다. 억지로 총장을 불러오기 위하여 학원이사회와 총회를 운영하는 자들은 총회와 총대들을 속이고 기만한 결과가 이런 폐단을 만들었습니다. 불법적인 정관개정 고려학원 이사회는 지난 73회 총회에 고려학원 정관개정을 의뢰했고 총회는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총회에 상정되는 안건은 정확하고 정당한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개인이라면 당회와 노회를 거치고, 법인이라면 법인 이사회에서 충분히 논의하고 결정한 안건을 상정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총회는 바로 그 안건을 접수하여 다루어야 합니다. 지난 73회 총회는 고려학원 이사회의 이 정관개정 안건을 접수했고, 정관을 개정했습니다. 그런데 이 정관개정 논의를 위한 임시이사회는 정작 총회를 파한 후 3개월이 지난 2023년 연말에 열렸고, ‘사후 인준’이라는 명목으로 통과시켰습니다. 이것이 총회 법을 따른 정당한 절차입니까? 총회는 결과적으로 이사회가 제대로 논의하지 않은 안건을 접수, 논의, 개정했고, 고려학원 이사회는 총회와 교단을 기만했습니다. 이런 불법적인 개정안으로 총장 공모는 이전에 하고, 총장 선출은 개정된 법으로 집행했습니다. 총장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불법으로 총장에 오르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사욕의 의도를 가진 불의한 자들이 총장의 발목을 잡은 결과입니다. 총장의 발목을 잡은 총회의 몇몇 실권자들이 고신의 미래요, 자랑이자 자부심이기도 한 고신대와 복음병원을 세상보다 더 저질 기관으로 만들고 있음을 자인하고 책임져야 합니다. 총회와 총대를 기만하고 속인 학원 이사들은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 아니 총회는 이것이 사실일 경우 모든 이사들을 반드시 소환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을 결정하게 된 총회 임원회도 당연히 책임져야 합니다. “나는 몰랐다, 모른다”고 하는 총대들 역시 책임을 통감해야 합니다. 해결을 위해 발 벗고 나서든지 자신이 없으면 이번 총회 총대를 포기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자세일 것입니다. 고신을 위해 하나님으로 부름을 받은 고신의 총대들이여 정신을 차릴 때가 되었습니다. (살전5:6)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벧전4:7)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란 말이 있습니다. 대상에게 정서적인 학대를 지속하여 대상이 자신의 판단력이 매우 낮다고 스스로 믿게 만들어, 그가 행위자에게 의존하게끔 만드는 세뇌의 일종입니다. 가해자에게만 이득이 되는 교묘한 궤변, 날조, 선동, 정치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총회 곳곳에서 정권(?)을 잡고 있는 실세들은 총회와 산하기관들을 “가스라이팅(gaslighting)”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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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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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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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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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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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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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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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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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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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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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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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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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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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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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4) (민12:1-3)
- 비방의 대명사인 미리암이 죽자마자 또 안타깝게도 우리가 잘 아는 므리바의 물 사건이 일어납니다. (민20:10-11)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모세도 사람인지라 화가 났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판단은 우리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민20:12)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였다고 하십니다. (민20:24)아론은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가고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므리바 물에서 내 말을 거역한 까닭이니라 신앙의 정통과 생활을 순결을 실천하기 위하여 순교정신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은 이 말씀을 잊어선 안 됩니다. 교회의 직분을 받은 목사와 장로, 집사, 권사는 명심에 명심을 해야 합니다. 코람데오의 신앙으로 반석에서 물을 내는 위대한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반석에서 물을 냈는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것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것이 될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반석에 물을 내었는데도 모세와 아론처럼 약속의 땅으로 못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매우 조심하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교회와 성도가 살아가는 삶의 핵심은 오직 하나 여호와의 거룩함을 나타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홀이라도 내가 한다는 생각을, 내가 했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삼위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자신의 공로를 첨가하고, 숟가락을 얹는 것입니다. 마치 자신이 물을 내는 것처럼 반석을 두들기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교회 안에서 영적으로 문둥병에 걸리고, 주어진 직분에 따라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는 자들은 목사와 장로일 가능성이 많다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특히 코람데오,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 순교정신을 강조하할수록 “내가, 내, 나”라는 말이 내 입에서 나오지 않도록 조심에 조심을 해야 합니다. 반석에서 물을 내고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다고, 그래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했는데 문둥병에 걸린 사람은 미리암이었습니다. 이 장면을 오늘날 교회를 적용하여 쉽게 풀어보면 장로와 권사가 같이 목사를 비방했는데 문둥병에는 권사만 걸렸다는 말입니다. 미리암만 문둥병에 걸렸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고 많습니다. 여자의 사명이 돕는 것, 살리는 것과 맞물려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미리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사명은 남편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역사를 돕는 배필로서의 사명입니다. 자신의 사명을 돕는 것이 아니라 주도하는 것으로 망각할 때 문둥병에 걸립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비방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는 척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속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입의 변질된 말은 물론이요, 속마음의 말들까지 듣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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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4) (민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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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합법화(2)
- 한 국가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가 기독교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특별한 관심을 갖는 문제다.특히 국가 정책의 결정이나 교회 공동체의 존립과 번영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 지도자의 경우는 더욱 더 그러하다.그가 설령 기독교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한 명목상의 신자인지,아니면 기독교 신앙과 가치관을 정책의 입안과 실천에 반영하려고 노력하는 실질적인 그리스도인 지도자인지 하는 문제는 공의와 평화의 사회를 꿈꾸며 기도하는 그리스도인 모두의 자연스러운 관심사가 되지 않을 수 없다.이러한 문제 의식을 배경으로 우리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종과 그 진정성은 우리가 관심을 가져볼 만한 문제이기도 하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당시 로마에는 성육신 하신 인간 예수는 천사장이라고 하는아리우스(Arius)의 주장과그분은 하나님이시라고 하는아타나시우스(Athanasius)의 주장 간에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콘스탄티누스는 오늘날 튀르키에(터키)의 니케아(Nicea)에서 로마제국 전역의 주교 모임을 소집했는데, 이 회의에서는 아타나시우스의 입장이 결정되었고, 이것이 교회의 “정통” 입장이 되었다.여기서 문제는 콘스탄티누스가 도나투스파와 니케아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황제로서 자신의 뜻을 교회에 어느 정도 강요하려고 했는지 하는 것이다. 그가 황제로서 어떤 교리는 받아들이고 어떤 교리는 받아들이지 않는지를 스스로 결정함으로써 기독교가 로마 사회에 통합되는 조건을 지시하려고 했는가 하는 문제는 아주 논란이 되는 주제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렇게 하는 것은 아마도 그의 의도가 아니었을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교국가인 로마에서 사람들이 그들의 신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 황제의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는 단순히 이 전통을 따랐을 뿐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황제에 대한 교회의 유일한 모델은 구약의 이스라엘 왕들이었는데, 그들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하도록 돌볼 책임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도나투스파들이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접근했지 황제가 이들에게 접근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법정의 결정이 도나투스파들에게 불리하자 이들은 폭동을 시작했고, 어떤 정부도 그런 행동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전임자들에게 고문을 당했던 주교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상처에 입을 맞추었다. 이것이 정치적인 연극이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럴 것 같지는 않다. 또한 박해 속에서도 자신들의 입장을 견지했던 주교들이 콘스탄티누스가 그들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믿어야 할지 말하도록 유순하게 허용할 것 같지도 않다. 오히려 콘스탄티누스는 아마도 참된 교리를 결정하고 이를 중심으로 교회를 통합하려고 노력했을 뿐 자신이 소집한 교회 협의회의 결정을 따르도록 강요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종의 진정성을 평가하는 또 다른 요소는 그가 어머니 헬레나를 예루살렘과 주변 지역으로 보내 예수의 생애에 관한 역사적 증거와 유물을 정밀하게 조사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로의 완전한 개종을 향해 가고 있었음을 강력히 시사해 주고 있다.어떤 이들은 콘스탄티누스가 임종할 때까지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주 지적하며, 이 때문에 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시기 기독교인들은 세례를 받으면 모든 죄가 씻겨진다고 믿었지만, 세례를 받은 후에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았다. 그 결과 기독교인들은 세례를 기다리는 경우가 많았고,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아서 나중에 망칠 기회가 없도록 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결국 신학은 이것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지점까지 발전했지만, 콘스탄티누스 시대에는 임종 때 세례를 받는 것이 신앙 안에서 자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흔한 일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신앙에로의 개종을 어떻게 평가하든 황제로서 그의 행동은 기독교와 제국 모두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가장 눈에 띄는 효과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변화시켰다는 점이다. 박해받는 소수 종교에서 황제가 선호하는 신앙으로의 전환은 필연적으로 교회와 국가 사이의 유대를 강하게 형성했다. 정부는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방식으로 교회와 기꺼이 협력하고 상호작용하려는 의지를 보였다.당시에는 종교와 정치가 완전히 분리될 수 있다고는 누구도 믿지 않았다. 신에 대한 이교도들의 기본 개념 역시 신들이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최고의 권위자라고 보았기 때문에 더욱 더 그러하다. 따라서 도덕이나 정의에 대한 교회의 이해관계가 국가의 이익과 충돌하는 영역이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교회와 국가의 제도적 구조, 권한, 책임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필연적으로 제기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 역사에서 언제나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고 있다.우리는 교회가 정부와 우호적으로 강하게 밀착하게 될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지 그 역사적 교훈까지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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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합법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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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이스라엘 -블레셋, 21세기 중동전쟁
- 성경에 블레셋 족속은 창세기부터 주로 구약의 현장에 많이 나온다. 긴 역사와 함께 언약 백성 이스라엘의 숙적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인도 따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부터 이스라엘의 신약시대까지 블레셋과의 전쟁 이야기가 많다. 사사기에 잘 알려진 삼손이 사랑했던 들릴라가 블레셋 여자다. 다윗과 맞짱 뜬 골리앗이 블레셋 장군이다. 성경학자들은 이 블레셋이 오늘날 팔레스타인족으로 이어져 중동전쟁의 주역이 되었다고 비중 있게 설명한다. 여러 학설을 개략 정리하면 모세가 출애꿉하고 다음 지도자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입성할 때 블레셋은 가나안 토속족 중 한 족속으로 남아 이어진다. 이들은 이스라엘 북서 해양족들과 혼합하여 오늘날 팔레스타인족으로 발전해왔다는 주장이 많다. 역사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불과 며칠 전 발발한 중동전쟁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블레셋 족속의 종주 나라 가자 지구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이스라엘 키부츠를 예고 없이 폭격했다. 2천 명이 넘는 민간인이 사망하는 일대 전쟁이 일어났다. 며칠 만에 세계 전쟁으로 확대될 것 같은 비상한 사태로 온 세계가 긴장하고 있다. 그동안 중동에서 큰 전쟁이 수차례 발생하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제국의 21세기 전쟁역사를 쓰고 있다. 이번에도 미국을 비롯 서방세계와 중동 제국들 간의 대리전이 될듯하다. 지금껏 국지적 테러전은 자주 발생하고 있다. 특히 금세기 미국 9.11테러를 비롯 걸프전 등 중동 안팎에서 3차 세계 대전을 방불케하는 아찔한 전쟁 역사의 시간표를 가슴에 안고 있다. 이번 하마스의 이스라엘 민간지대 폭격이 크게 확전될까 걱정이다. 그동안 UN의 중재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가자 자치지구를 허용하고 긴장된 평화를 몇 년 동안 지켜왔다. 긴 역사 속에 숙적의 품속엔 칼을 버릴 수가 없었을까. 1948년 당시 이스라엘 디아스포라는 국가 인정을 받고 먼 옛날 가나안 땅에 대한 정복의 숙원을 위해 팔레스타인을 쫓아냈다. 그리고 시온의 나라를 세웠다.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쫓겨난 팔레스타인들은 해방기구(PLO)를 만들어 끝없이 영토를 되찾기 위해 테러와 전쟁으로 중동에 화약 냄새가 쉴 새 없었다. 한동안 조용하던 중동이 또다시 전쟁의 비극이 발생함으로써 지금 세계 각국에 정치·외교적 비상한 아젠더를 던지고 있다. 세계 각국의 대리전으로 확대되고 우크라이나 전쟁과 겹쳐 너무나도 우려와 걱정이 닥치고 있다. 국제외교 정치 기능이 살아나서 전쟁을 중지시키고 온 나라가 평화를 회복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지금까지 중동 전쟁은 오일 생산 거점 쟁탈을 위한 의도적 국지전 또는 테러 분쟁의 양상이었다. 이번 하마스의 폭격은 세계 패권을 지켜려는 미국 등 서방에 이란 등 중동 제국들이 도전하는 양상의 전쟁모습이다. 좀 더 우리는 기도하면서 지켜보고 오직 평화를 소망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먼 옛날 창세기 때 고대 중동 전쟁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성경에 있다. 창세기 26장과 27장에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의 우물 이야기가 있다. 가나안에 정착한 아브라함 가족들이 거주하는 동안 흉년이 들었다. 가족들은 애굽에 양식을 구하러 가는 동안 남쪽 블레셋 지역 그랄에 머물 때 우물을 팠다. 이때 시샘 많은 블레셋족들이 우물을 강탈했다. 첫 번째 아브라함 우물을 빼앗고 이어 이삭이 옮겨 판 우물도 빼앗았다. 이삭은 이들의 강취에 우물을 내어주고 또다시 옮겨 우물을 계속 팠다. 우물로 인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세 번째 이삭의 우물을 블레셋이 강취하지 않았다. 어떻게 우물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당시 우리가 알 수 없는 상황이 있었다고 본다. 많은 설교가들은 하나님이 함께할 때 화평이 있다고 한다. 이삭의 선한 우물 파기에 하나님이 블레셋 족속들에게 마음의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믿음의 족속 우리들은 분쟁과 전쟁에 먼저 주님과 동행하는 믿음과 마음이 중요함을 지금 중동 전쟁을 보면서 묵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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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이스라엘 -블레셋, 21세기 중동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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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추석명절을 한국의 추수감사절로 지키자
- 추석 명절이 다가왔다. 벌써 귀성길 차량이 늘면서 일찍 성묘하는 발길도 볼 수 있다. 가족과 함께 즐기는 추석 밥상을 위한 시장보기에 사람이 넘치고 있다. 우리의 고유명절 ‘추석’의 유래는 어디에서 일까. 매년 명절을 즐기긴 해도 대부분 잘 모르고 있다. 추석 명절은 삼국시대 신라 유리왕 때 가배(嘉俳)라는 길쌈 놀이에서 유래한다. 삼국 시대만 해도 우리의 옷 의류는 삼베가 유일했다. 삼베라는 천의 직조기술이 생겨난 때가 삼국시대라고 삼국유사에 기록이 있다. 얼마나 귀중한 생활품이었겠는가. 그래서 음력 팔월보름날 휘영청 보름달이 뜨는 때 동네별로 삼베길쌈 경연대회를 벌인다. 진 쪽에서 이긴 쪽에게 잔치를 베풀고 즐기는 축일이 발전해서 오늘까지 한껏 즐기는 추석명절이 되어왔다. 이후 고려 때부터 무명 옷이 생겨나고 비단천이 창조 되긴 했다. 당시 삼베 천이 얼마나 귀중했냐하면 오랜 기간 화폐 수단으로 삼베가 통용되었다는 문헌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의 추석명절은 고려시대 중국과 교류하면서 중추절(仲秋節) 한가위로 변화 발전 되고 미풍의 양속으로 이어져 왔다. 음력 팔월 보름은 대개 9월에 들어 있다. 우리의 주농 벼농사 수확시기보다 이르지만 일 년 농사 감사의 마음을 즐길 수 있는 지절(之節)이다. 추석명절은 많은 문화를 양산했다. 보름달 놀이, 강강수월래, 줄다리기, 씨름 등 참 좋은 전통 문화 놀이를 하며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조상들이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즐기며 이어오는 문화가 얼마나 우리의 정서를 지키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전통의 좋은 문화야말로 우리의 공동체적 건강한 정신과 마음을 지켜내고 있다. 추석 대명절을 보낼 때 마다 느끼는 소회이다. 그런데 우리교회가 절기로 지키는 큰 명절 중 ‘추수감사주일’의 유래를 보면 획기적으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한국 교회의 추수감사주일은 보통 11월 셋 째 주일을 지킨다. 그 유래는 미국에서 온 국민이 지키는 추수감사주일과 같이 한다. 그래서 같은 시기이다. 미국 국민이 지키는 추수감사주일도 개신교 교회에서 시작 됐다. 청교도 프로테스탄트들이 미주지역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고 감사의 절기로 발전하여 미국의 추수감사주일로 전통화 했다. 캐나다를 비롯 주로 북미에서 추수감사주일은 지켜지며 11월 넷째 목요일부터 3일 동안 휴일로 쉬며 칠면조 고기를 먹고 즐긴다. 최근에는 블랙 프라이데이까지 만들어져 온통 축제와 즐기는 미국의 전통 문화가 되었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우리가 지키는 추수 감사주일은 성경에서 온 절기가 아니고 미국의 개신교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캐나다 등 미주국민들이 지키는 절기를 따라할 필요가 있을까하는 제언이다. 우리는 전통으로 즐기는 추석 명절을 한국 교회의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온 국민의 추수감사절로 문화화 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교회의 섬기는 문화에 추석명절에 더하여 이웃을 돌아보며 함께 전통 문화로 이었으면 아름다운 추석명절로 발전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이제 대한민국은 강한 국력으로 세계를 이끌고 있다. 많은 다문화권 이주민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이들과 함께 예수복음의 문화를 가꾸며 공동체적 전통의 풍습을 맛보고 즐기는 한국 추석의 추수감사절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잘사는 대한민국 그 중심의 추석 명절에 함께 웃고 함께 울 수 있는 넉넉한 인심이 넘쳐나는 복음적인 추석명절이 되어 옛말처럼 ‘더도 덜도 아닐 만큼 한가위만 같아라’는 모두가 함께하는 추석 명절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많은 문화이벤트가 함께 만들어져 이러한 명절문화가 건강한 교회, 건강한 사회 그리고 품격 높은 나라를 이끌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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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추석명절을 한국의 추수감사절로 지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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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무엇이 소중한가?
- 화려한 옷과 보석 명품들을 좋아하는 유럽의 귀부인이 있었습니다. 온몸에 화려한 보석 장신구들을 치렁치렁 달고 다닐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귀부인이 아프리카로 여행을 갔다가 모래폭풍을 만나서 사막에서 낙오가 됐습니다. 그래서 며칠을 길을 잃고 헤매었습니다. 그녀는 너무 목이 말라서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갑자가 저 앞쪽에서 한 물병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녀는 미친 듯이 달려가서 그 물병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물병일 줄 알았던 것이 가까이 가서 보니 몇 캐럿은 되어 보이는 다이아몬드였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탄식을 토했습니다. “아, 겨우 다이아몬드란 말인가?” 무엇입니까? 평소 같으면 눈이 뒤집혔을 그 진귀한 다이아몬드가 사막에서는 한 모금의 물보다 못했던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소속이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 된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파송 받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 18절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소속이 바뀌고 나서 여러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 믿기 전에 가장 소중한 것이 예수님 믿고 나서도 여전히 소중하다면 도대체 구원 받은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전에는 돈이 가장 소중하고 세상의 입신양명이 소중했다 하더라도 예수님 믿어 구원 받고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 된 지금은 달라야 합니다. 이제는 영혼이 소중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소중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소중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이전에 내가 소중히 여기던 그것들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기꺼이 드리고 헌신할 줄 아는 참된 하나님의 나라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이미 가진 사람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억만 죄악을 사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가진 사람들이기에 다른 세상의 것들은 그것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꺼이 내가 가진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분을 전하고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드리고 헌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진짜 내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맞습니까? 빌립보서 3장 7-8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무슨 말입니까? 자신이 자랑하던 그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기는 이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것을 이렇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깜깜한 밤하늘에 아름답게 반짝이던 별빛이 아침녘에 찬란한 해가 솟아오르면 그 반짝거림이 빛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세상의 좋은 것들도 예수님과 비교하면 배설물의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최고의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다른 세상의 귀한 것을 견주어 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저 상대적으로 배설물의 수준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것을 다 잃는다고 하더라도 예수님만은 잃을 수가 없고, 그 예수님을 위하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나의 것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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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무엇이 소중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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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말씀과 귀
-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잠4:20-22)라고 했다.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신다. 우리의 귀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하나님 말씀에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다. 반복법을 사용하고 있다. 같은 말이다. 주의하는 것이나 귀를 기울이는 거나 같은 말을 다르게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고별 설교가 있는 곳은 요한복음 14장에서 16장까지 이다. 성령님에 대하여 기도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말씀하셨는데 중요한 마지막 부탁을 반복하심을 볼 수 있다. 기도에 대한 말씀을 8번이나 표현을 달리 하시면서 반복하신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반복 말씀하신다. 반복하는 것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말씀에 집중하는 일은 믿음 생활에 중심이다. 말씀을 묵상해서 깨달아지면 입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그 깨달음이 마음에서 폭발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치료하시는 하나님임이 틀림없음을 묵상하다가 깨달아 지면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는 말씀으로 인해 손을 올리고 싶어지고 마음이 뜨거워 질 수밖에 없다. 당신의 귀를 무엇을 향해 기울이라고 했나? “내가 말하는 것에….” 귀를 하나님이 말에 열라. 자동차 엔진이 시끄러워도 이상한 소리가 나서 집중하면 그 소리가 들린다. 생명이 탄생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생명의 신비는 설명할 수 없다. 말씀은 생명이다. 그러기에 이 말씀에 집중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죄의 법이 나를 사로잡아오기 때문에 주야로 묵상해야 한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어떻게 하나님의 치유하심이 역사하는지, 방언을 하는지, 거듭나는지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무엇이 신유를 일으키는지는 알고 있다. 믿음이 그렇게 한다. 믿음이 하나님의 병 고침을 일어나게 한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3:8). 말씀을 먹고 그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믿음은 무의식적으로 당신의 영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거듭날 때 온전한 믿음을 이미 주셨다(엡2:8). 말씀을 먹으면 믿음이 스트롭(stirrup)된다. 스트롭은 아래 가라앉아 있는 것을 휘 저어서 아래에 숨어 있는 것을 끌어 올리는 것을 말한다. 옛날에는 소죽을 끊일 때 설거지물을 받아 두었다가 휘 저어서 끊였다. 우리에게 이미 예수를 믿을 때 놀라운 믿음이 다 와있다. 이미 와 있는 믿음을 스트롭하는 것이 뭐냐?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넣고 “아멘”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아멘하면 스트롭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다. 성경의 말씀대로 믿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은혜에 의하여 믿음이 선물로 주어졌음을 믿고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보여도 그렇게 여겨야 한다. 의로움이란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셨다. 우리는 의롭게 된 자들이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믿음이 우리에게 있음을 믿어야 한다. 아가페의 사랑이 우리에게 넘쳐 남을 믿어야한다. 우리가 온전한 자가 되었음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잘 살았기 때문에 온전하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온전하게 되었음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 됨을 믿어야 한다. 의롭지 못하게 되는 것은 선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 아님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해도 좋을 것이다. 믿지 못하기 때문에 의로움이 상실 되었다. 주님이 이루어 주신 놀라운 사실로 풍성한 사람은 행함이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고 믿음의 행함은 저절로 되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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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말씀과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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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열 목사] 우정과 은행가의 역설우정은 사랑과 다르다
- 우정과 은행가의 역설우정은 사랑과 다르다. 사랑은 종족 번식을 위한 필수적인 감정이다. 마음에 드는 여성을 만나면 마음이 설레고 얼굴이 붉어지며 심장이 뛴다. 친구를 만나면 이런 감정은 없다. 호르몬 분비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정은 첫눈에 반해서도 운명적 만남도 아니다. 한 동네 학교 직장에서 우연히 만나 오래 두고 정겹게 사귀어 온 벗이다. 그러나 우정에는 강력한 감정이 있어 목숨까지 바친다. 인류학자 J, Tooby와 진화심리학자 L. Cosmides 부부의 공동연구인 “우정과 은행가의 역설”(Friendship and the Banker`s Paradox)에서 우정과 은행이 닮은 점이 있다고 하였다. 은행이란 돈을 빌려주어야 이익을 남기는 곳이다. 은행은 모든 사람에게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심사를 통해 재산이 많고 신용이 좋은 부자들에게 저금리로 빌려준다. 부자들은 생계 목적이 아닌 투자목적으로 돈을 빌린다. 정작 돈이 필요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먹고살기 위해 돈을 빌리려 한다. 그러나 은행은 돈을 떼일 우려 때문에 신용과 재산이 없다는 이유로 이들을 외면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는 대출금을 무자비하게 회수해 버리는 사람들이 은행가들이다. 돈이 필요 없을 때는 제발 돈 좀 빌려 쓰라 하던 그들은 막상 돈이 필요할 때는 입을 싹 닦고 매정하게 회수해 가버린다. 우정도 은행가들의 그것과 닮은 구석이 있다. 잘 나갈 때는 친구 사이에 우정도 호의도 넘쳐흐른다. 그런데 우정이 가장 절실하고 도움이 간절할 때 친구로부터 외면당한다. 진화심리학에서는 인류가 사회를 만드는 순간, 구성원들 사이에 우정의 네트워크가 생기는 것은 사냥과 우정과 은행가의 역설153부족 간의 전쟁 시 생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 하였다. 인간은 “이익 가치 중심적 사고”를 가졌기에 더 나은 삶을 위해 자신을 도와줄 친구를 찾는다. 사회구성원들 가운데는 힘이 세고 사냥을 잘하는 강한 사람, 힘이 없고 사냥을 못 하는 약한 사람이 있다. Net Work를 구성할 때 사람들은 누구와 친구를 하고 싶을까? Tooby는 사회적 강자 중심으로 우정이 형성된다고 하였다. 수렵을 잘못하는 사람일수록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한데 오히려 친구가 되는 일에서 배제된다. 정작 생존을 위해 우정이 절실한 사람은 사회적 약자들인데 힘센 사람들에게 집중된다는 것이 우정의 역설이다. 우리 사회에 은행가의 역설을 잘 보여주는 것이 관피아, 특히 검찰 집단이다. 역사적으로 검사는 늘 재벌과 보수 세력들이 형성한 강자들의 우정 네트워크에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검찰 개혁에 목숨을 걸고 저항한다. 가진 힘을 지키기 위해서다. 검찰 개혁은 강자들의 네트워크를 와해하고 그들이 독점한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쉽지는 않을 것이다. 행복 경제학의 창시자 J. F. Walliel은 행복의 6가지 조건을 돈, 건강, 자주적 삶의 선택권, 공동체성, 우정, 사회의 투명성이라 하였다. 이 중 우정을 행복의 조건 중 제일로 들었다. 웰리엘이 말하는 우정은 잘 나갈 때의 친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울 때 의지할 수 있는 친구를 말한다. 이런 친구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바닷물에 빠진 친구에게 밧줄이나 구명튜브는 얼마든지 던져줄 수 있지만 허우적대는 친구를 구하기 위해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고 직접 물에 뛰어드는 친구, 일시적 어려움에 처한 친구는 얼마든지 구해줄 수 있지만, 친구를 구하기 위해 내 소중한 것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비용을 치러야 한다면 그때부터 계산은 달라진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말처럼 위기의 순간이 닥쳐야 그때 비로소 우리는 안다. 옛이야기 한 토막이 생각난다. 아버지가 주색잡기를 일삼고 친구 많다고 자랑하는 아들을 일깨워 주기 위해 돼지 한 마리를 잡아 거적에 말고 아들과 함께 지게에 지고 아들 친구들 집마다 찾아가서 실수로 살인하여 시체를 암매장하려는데 도와 달라고 했더니 하나같이 핑계를 대며 외면하더라는 그 이야기 말이다. 우리는 먼 길을 가야 하는 인생이다. 혼자 가면 외롭고 힘이 든다. 함께 동행해줄 친구가 필요하다. 고난에 처할 때 함께 해주는 친구, 이런 친구가 없는 현대인들은 그래서 더욱 고독하다. 맹수사냥을 하러 함께 나갈 때 내 옆자리를 지켜주는, 다른 부족과 전쟁을 할 때 자신을 던져가며 내 생명을 지켜줄 수 있는 그런 우정이 없어 고독하다. 망년회, 신년회, 동창회라는 각종 모임을 빙자해서 친구들을 만나고 해외여행을 가도 본질적인 외로움은 떨쳐낼 수가 없는 것은 왜일까? 강도, 폭행, 살인, 약탈 등, 그 모든 위험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던 든든한 친구의 역할을 이젠 경찰이 대신한다. 한해 농사를 망쳐 처자식을 굶기게 되면 곳간을 털어주던 우정 역시 복지제도가 대신하고 있다. 조상이 살던 환경보다 훨씬 더 안전하고 안정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 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는 그럴수록 더 불안에 떨고 고독해 한다. 진정한 우정이란 과연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잘 나가던 어제의 내가 아니라, 실패하여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오늘의 나를 기꺼이 지켜줄 친구가 있을까? 가슴에 손을 얹고 물어보라. 나는 누구에게, 또 누가 나에게 그런 친구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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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열 목사] 우정과 은행가의 역설우정은 사랑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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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에녹의 신앙 (창5:21-24)
- 53억 원을 내고 점심 한 끼를 먹는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그것도 여러 사람이 서로 그 돈을 내려고 경쟁을 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온라인 경매 사이트인 eBay에서 <워랜 버핏>과의 점심 식사를 경매에 붙이고 있는데, 금년에는 무려 460만 달러(약53억 원)에 낙찰이 되었습니다. 암호 화폐인 트론 CEO 중국계 미국인 <저스틴 선>씨가 결정되었습니다. 그는 4명의 친구들을 데리고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워랜 버핏>과 함께 한 끼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지난 2000년부터 <워랜 버핏>은 매년 자신과의 한 끼 점심 식사를 경매에 부쳐서 그 수익금 전액을 노숙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해 오고 있습니다. 그 천문학적인 돈을 투자하면서까지 그와 함께 한 끼의 점심 식사를 하려는 것은 이 시대에 그가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본래 가난한 집 안에서 태어났는데 어릴 때부터 투자하는 것마다 대박을 터뜨리면서 일명 “투자의 귀재”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 천문학적인 돈을 내고 그와 함께 한 끼의 점심 식사를 하려고 하는 것을 볼 때 그는 분명 이 시대에 최고의 VIP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도 역시 그가 최고의 VIP인지는 생각해 볼 일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최고의 VIP로 인정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인정하고 우러러 보는 VIP보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의 VIP가 더 중요한 사람입니다. 죄악이 관영한 시대에 하나님의 시선과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에녹>입니다. 신앙의 혼란을 겪고 있는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믿음의 인물로 여겨집니다. 첫째로, 그는 불의한 시대에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입니다.(창5:21-22) 둘째로,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입니다.(히11:5-6) 셋째로,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 사람입니다.(유1:14-15) 우리 모두 에녹의 신앙을 본 받아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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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에녹의 신앙 (창5: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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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3) (민12:1-3)
-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했습니다.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린 것을 보면 아마도 이 사건은 미리암이 주도한 것 같습니다. 특이한 것은 성경이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는 말을 여호와께서 들으셨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정당한 이유를 근거로 모세를 비방했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미리암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셨다는 뜻입니다. 성도가 원망하고 비방할 때는 반드시 나름대로 신앙적인 명분을 내세웁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너무도 당연한 표현입니다. 모세가 애굽을 떠나 있는 동안 여선지자로서 사명을 감당한 미리암이 이 말을 했다는 것은 그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거나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분명히 다른 의도가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신앙적인 명분을 제시하다 보니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치 그 원망과 비방이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착각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이렇다 보니 비방하는 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최면에 걸려듭니다. 실상은 자기 최면이 아니라 사탄의 최면입니다.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면서도 그것이 거짓인지도 모르는 상태가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모세를 비방하는 자신이 그리스도와 복음과 교회를 위하는 줄로 착각합니다. 모세를 비방하는 자신이 무슨 대단한 희생을 하고 십자가를 진 것으로 착각합니다. 결국에는 자신만이 그리스도와 복음과 교회를 위하는 줄로 착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아니 다른 사람의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아니 자기와 다른 생각은 무조건 다 틀렸다고 여깁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원망은 섞여 사는 다른 인종(잘못된 신앙)을 통하여 받은 미혹으로 나타납니다. 원망은 생물과 같아서 쓴 뿌리처럼 자라고 암의 균처럼 전이가 됩니다. 원망은 바이러스와 같이 변종이 만들어지고, 확산하고, 강력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모세를 원망합니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원망은 비방으로 확산되고, 여론과 정서를 장악합니다. 모세를 향한 비방은 모세를 도우라고 세운 받은 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본연의 사명을 망각하고 오히려 모세에게 짐을 더 무겁게 하는 결과로 발전하였습니다. 이처럼 성도가 하는 원망은 반드시 비방으로 발전하고, 그다음은 반역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은 문둥병에 걸리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일단락되었지만, 그 씨와 잔재는 곰팡이와 바이러스처럼 숨어 있다가 반역으로 고개를 들게 되었습니다. 민16장에 와서 그 유명한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온의 반역이 등장합니다. (민16:1-3)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라엘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 가운데에서 이름있는 지휘관 이백오십 명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르니라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 분위기를 만들고, 여론을 형성하고, 정서를 결집하여 당을 짓습니다. 힘이 모여지면 이제 본격적으로 모세와 아론을 거스릅니다. 그렇게 하는 명분과 근거도 역시 하나님입니다.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 특이한 것은 이 일은 아론이 나서서 수습하게 됩니다.(민16:49-50) 이 일 후에 아론의 제사장직이 구체화됩니다. 위대한 제사장 직분이 구체화 되자마자 미리암이 죽습니다. 이런 장면도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가 나아가는 길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줍니다. 제사장의 직분이 구체화 되고 미리암이 죽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민20:1)첫째 달에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이 신 광야에 이르러 백성이 가데스에 이르더니 미리암이 거기서 죽으매 거기에 장사되니라 문제는 미리암이 죽었다고 해서 불신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원망의 아이콘 미리암이 죽자마자 백성이 모세와 아론을 공박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민20:2)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공박하니라 미리암은 죽었는데 그녀로 인하여 고개를 들었던 원망과 비방은 죽지 않았습니다. 성도가 신앙생활에 원망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분명히 발견하게 합니다. (빌4:4)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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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3) (민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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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합법화(1)
-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합법화(1) 요즘 언론을 통해 중국의 시진핑과 러시아의 푸틴, 그리고 북한의 김정은과 같은 독재자 한 사람의 잘못된 가치관과 이로 인한 횡포로 인해 그들 자국 인민들이 겪는 불행과 고통은 물론, 예측할 수 없이 소용돌이치는 국제 정세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 번씩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를 떠 올리게 된다. 시진핑, 푸틴, 김정은과 같은 악랄한 독재자 대신 기독교 신앙에 좀 우호적인 지도자가 등장하면 자국민들도 좀 더 행복할 것이고 세계 질서도 달라질 것인데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앞으로 한 두 번 정도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황제에 대해서 잠시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주후 313년에 밀라노 칙령(the Edict of Milan)을 발표하면서 로마 제국 내에서는 기독교의 상황과 법적 지위가 획기적으로 바뀌어졌다. 일 년 전, 밀비안 다리 전투(the Battle of the Milvian Bridge) 직전에 콘스탄티누스는 하나님으로부터 환상을 보았는데 예수께서 꿈에 그에게 나타나서 그가 해야 할 일을 설명하셨다고 주장했다.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병사들에게 방패에 기독교 상징을 그리게 했고, 적의 우세한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을 때 이를 하나님의 표징으로 받아들여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 후 곧 바로 기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만드는 밀라노 칙령이 공포되었다. 이 칙령은 이교(paganism)를 불법화하거나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콘스탄틴의 개종으로 인해 확실히 기독교는 박해 받던 위치에서 선호 받는 종교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이 진짜였는지 아니면 정치적 계산의 산물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당시 기독교는 도시를 중심으로 고도의 조직성을 갖춘 성장하는 종교였다. 따라서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가 의지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을 제공할 수 있었다.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인기가 없었으며, 추산에 따르면 로마 세계의 약 10~15%에 불과했다. 이는 결코 압도적인 숫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기독교인들은 313년 이전에도 군대에 복무했다는 증거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평화주의자였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포용함으로써 실질적인 정치적 이점이 있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황제로서 콘스탄티누스의 행동은 그의 개종에 대한 많은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우선, 그는 아버지 하나님을 자신이 총애했던 “정복되지 않는 태양”(the Unconquered Sun)인 솔 인빅투스(Sol Invictus)와 구분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은 태양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세상의 빛, 또는 의의 태양 등으로 예수를 묘사하는 기독교인들의 관습에 영향을 받아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또한 자신의 "개종" 후에도 거의 한 세기 동안 자신의 주화에 이교 신들을 계속 사용했으며, 나중에 교황이 차지한 로마 이교 대제사장의 칭호인 폰티펙스막시무스(Pontifex Maximus)라는 칭호도 유지하고 있었다. 기독교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콘스탄티누스는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매우 일찍부터 개입했다. 첫 번째 도전은 도나투스파(Donatists)와 관련이 있는데, 이들은 박해 중에 굴복하고 배교했던 사제들은 박해 중에도 믿음을 지키며 신실하게 남아 있었던 주교의 승인과 용서를 받지 않는 한 진정한 사제들이 아니라고 믿었던 집단이다. 법정과 콘스탄틴은 이에 대응하여 폭동을 일으킨 도나투스파에 대해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 콘스탄티누스는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무력으로 보복했다. 그는 탄압이 효과가 없다고 보고 그 후 도나투스파에 적대적인 법령을 철회했지만, 그의 행동은 교회에 대한 국가의 간섭과 강압의 선례를 남겼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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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합법화(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