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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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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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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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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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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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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김경헌 목사]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4)(창23:1)
    남편을 따라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온 지 10년 세월. 첩과 첩의 자식을 통해 멸시를 받고 살았던 믿음의 세월 14년. 이런 세월을 살았던 믿음의 여인 사라,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교회를 예표하는 여인 사라가 127세를 살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성경은 사라가 죽은 나이를 기록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고백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삼위 하나님의 구원의 책이요, 복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책이요,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찬 책이요, 성경의 여백 속에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이런 성경이 “사라가 127세를 살았다, 127세에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라가 127세를 살았다는 기록이 우리에게 어떤 복음이 될까요? 사라가 90세에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삭은 40세에 장가를 갑니다. (창25:20)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사라의 127세를 묵상하다 보니 이삭이 사십 세에 결혼했다는 것도 살펴보아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수가 의미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게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노아 홍수의 40 주야를 시작으로 40년 광야 생활을 거쳐 예수님의 40일 금식까지 그 의미는 너무도 풍부합니다. 그런데 이런 의미의 40을 감히 잘못된 신앙이 흉내 내는 경우도 있답니다. 에서는 이삭과 리브가에게 근심이 되고, 하나님께 근심이 되면서 40이라는 수로 포장을 하고 있습니다. (창26:34-35)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 문제는 이런 식의 신앙생활은 자신의 잘못을 감추고 포장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할 뿐 아니라 결국에는 최고의 믿음과 신앙과 결단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마약과 같다는 사실입니다. (행23:12)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하나님과 율법을 위하여 목숨을 거는 결단인 줄 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뜻하는 4, 40에 대해서는 겉옷 규례와 함께 다음에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민15:38)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신22:12)너희는 너희가 입는 겉옷의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 사라가 이삭을 90세에 낳고, 이삭이 40세에 장가를 갔으니 사라의 나이는 130세가 됩니다. 그런데 사라가 127세를 살았으니, 정작 사라는 이삭이 장가가기 3년 전에 죽었다는 뜻이 됩니다. 왜 우리는 장가를 간다고 할까요? 실제로는 여자가 시집을 오는데 말입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장가가는 것이 맞을까요? 시집오는 것이 맞을까요? (창2: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완전한 남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 우리에게로 오시네요. 그러니 이 말씀조차도 단순히 우리의 결혼이 주제가 아니라 우리와 한 몸 되시려고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 우리에게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제가 되고, 우리가 그의 신부 되는 구원이 주제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남편에 보조를 맞추는 아내에 대한 말씀 역시 그 핵심은 구원에 있습니다. (창2: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에덴동산에 있는 아담에게 돕는 배필이 왜 필요할까요? 아담을 돕는다면 무엇을 도와야 할까요? 이 말씀 역시 구원의 관점에서 풀지 않으니 여자는 남자에 귀속된 수동적인 역할 정도로 생각하고, 남녀차별을 논하는 인간적이고 불신앙적인 관점을 가지게 됩니다. 아담을 돕는 배필로서의 여자라고 한다면, 완전한 아담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돕는 배필인 그의 신부된 교회의 사명을 발견하기에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사라는 돕는 배필의 사명, 아브라함을 돕는 배필의 사명을 감당한 믿음의 여인입니다. 그런 여인인 사라의 수명이 127세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3-05-25
  • [김성수 총장] 저출산 사회의 몰락과 역사적교훈
    성경적 세계관을 통해서 인생과 사물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분명하고 바르게 보인다. 낮은 출산율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는 세속화된 쾌락추구의 시대에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언약의 자녀를 갖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젊은 세대가 거듭난 니고데모의 안경을 통해서 자녀 출산의 문제를 바라보지 않으면 번영된 사회가 존속될 수 없고, 신앙 공동체의 계속적인 존속과 부흥에도 심각한 위기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창조-타락-구속의 틀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 왜곡된 세계관은 개인은 물론 공동체의 존속과 번영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물질 세계와 인간의 생명, 특히 장애자와 병약한 자들을 건강한 사회 유지에 도무지 유용하지 못한 걸림돌로 평가 절하했던 로마와 헬라의 이원론적 세계관은 특히 로마 엘리트들 사이에서 근본적으로 출산을 축복으로 보지 않는 반출생적인 관점을 견지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결혼과 자녀 출산이라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 질서를 따르지 않고 결혼을 회피하고 성을 쾌락의 수단으로만 즐기는 사회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다. 로마 귀족의 자제들이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 문화에 대항해서 로마의 초대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Augustus Caesar)는 매우 분노했다. 그래서 젊은 귀족의 자녀들에게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미고 자녀를 생산 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법률을 제정하여 통과시키기까지 했지만 그렇게 큰 효과를 거두지 못 할 정도였다. 로마인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신비한 선물인 성(sex)을 도에 지나칠 정도로 삐뚤게 향유하는 쾌락주의 문화 속에 몰입해 있었다. 로마인들의 성생활은 하나님의 축복인 자녀 출산과는 도무지 관계가 없는 단순한 “비출산적” 쾌락 행위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들의 성행위는 다양한 종류의 신체적 자극을 즐기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임신을 방지하기 위한 고의적인 시도이기도 했다. 성행위가 임신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경우에도 로마인들은 출산을 막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약초를 사용하거나 피임 방법을 사용했다. 이러한 피임 방법이 실패했을 경우에는 산아 제한의 최종적인 수단으로 외과적 낙태 수술을 거침없이 시행했다. 이와 같은 시술은 특히 임신이 간통의 결과였을 경우에는 더욱 더 거침없이 행해졌다. 당시 로마인들의 낙태 기술은 조잡했고 심지어는 소독제로 사용할 비누조차 없었다. 그 결과 수많은 여성들이 낙태 시술이나 그에 따른 감염으로 사망하거나 영구적인 불임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출산 제한의 모든 방법이 실패하고 아이가 태어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영아 살해가 항상 그들이 선호한 선택 사항이었다. 로마 가족은 보통 가능한 한 건강한 아들들은 많이 키우고 딸은 한 명만 키웠다. 나머지는 단순히 폐기 처분되었다. 실제로 로마의 최초 성문법인 12표법(Twelve Tables)은 아버지가 가족 중에 태어난 눈에 띄게 기형인 아이를 죽이는 것을 의무화했다. 이 관행은 소위 건강한 로마 사회를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행위로 간주되었으며, 이는 특히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와 같은 저명한 사상가들이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있었다. 비교적 작은 마을인 고대 블레셋의 5대 성읍 중 하나인 아스글론(Ashkelon)의 로마 목욕탕 아래 하수구에서 고고학자들이일주일도 채 되지 않는 유아의 유골 100구를 발견했다는 기록은 영아 살해의 이런 관행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귀여운 아기들이 탐욕스런 인간 부모들이 단지 원치 않거나 불편했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하수구에 버려졌다. 일부 사람들은 단순히 자녀를 양육할생활의 여유가 없어서 자녀를 유기한 경우도 있지만, 부자들은 그런 문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피임, 낙태, 영아 살해와 같은 끔찍한 관행을 자행했다. 이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때문만이 아니라 당시 패악한 로마 사회를 지배했던 시대 풍조였다. 그런데 하나님의선하고 신비한 창조 질서를 거스르는 이와 같은 반출생 문화는 건강한 로마 사회의 유지와 번영에 기여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로마의 정치적 생존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고 결국은 로마 제국의 몰락을 초래했다. 로마 제국의 팽창이 주춤해지자 전쟁 포로의 노예 공급이 고갈되었고 새로운 노동자들이 유입되지 않았다. 여기에 출산율까지 떨어지자 로마인들은 로마 제국의 혜택을 함께 누릴 수 있다는 약속으로 유인하면서 국경 너머에서 점점 더 많은 게르만 이민자들의 유입을 허용하여 노동 시장의 인력 공백을 메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3세기 말까지 로마 군대는 인구의 증가와 함께 점차 게르만화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로마 제국 내에 문화적 변화를 가져왔고 로마인 됨의 의미에 변화를 가져왔다. 4세기와 5세기에 소위 “야만인” 부족이 로마 제국으로 이주했을 때 로마인들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마련한 삶의 길을 따르고 있었고 라틴어를 사용하는 제국의 서부 절반이 변화의 과정을 겪고 있었다. 로마 제국의 쾌락 추구와 저출산 문화는 오늘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할 우리 사회를 향한 역사적 교훈이기도 하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3-05-25
  • [양대식 목사] 리더에 대하여(9)
    살리는 자 예수님의 리더십은 살리는 리더십 입니다. 살리는 리더십은 관계의 리더십 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살리는 사역입니다. 죽은 자 살리고 병든 자 고쳐 살리시고, 낙심된 자에게 용기를 주어 살려주셨습니다. 영혼 구원은 죽은 영혼을 살리는 사역입니다. 예수님의 전도, 교육, 설교의 초점은 살려 주는 것에 있습니다. 좋은 설교는 설교를 듣고 영이 살아나는 부흥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살려주는 설교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자마다 살아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살려주는 사역, 살려주는 언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안심하라, 담대하라,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의 말씀은 살려주는 말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관계 리더십은 살리는 리더십입니다. 정치를 해도 죽이는 정치가 아니라 살리는 정치가 좋은 정치입니다. 남을 죽이면 내가 죽게 되고 남을 살리면 내가 살아납니다. 예수님은 어디에서나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 살리는 관계의 리더십의 전문가 중의 전문가이십니다. 나의 언어가 남을 살려주는 격려, 칭찬의 언어여야 합니다. 남을 잘되게 하고 살려주는 자가 좋은 리더입니다. 살려주는 언어, 마음, 행동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주는 자 예수님의 삶은 주면서 사는 삶이셨습니다. 주는 자가 복된 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삶 전체를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아 주셨습니다. 주면서 살 때 관계가 잘되고, 관계 리더십이 되며, 영향을 주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사신 삶이 아니고 사람들을 위해 시간을 내어 주시고 관심과 사랑, 필요한 양식까지 주셨습니다. 구원과 영생을 선물로 주셨고 기도 응답까지 주십니다. 기적을 베풀어 주셨고 심방 하시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만나 주시고, 위로가 필요한 자 위로해 주시고 병든 자 고쳐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천국까지 예비해 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주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함으로 다 주시고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주는 자가 리더입니다. 준다는 것은 희생입니다. 리더는 주는 자의 삶, 헌신, 희생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받기만 바라는 이기심을 버리고 예수님처럼 주면서 사는 삶을 살아갈 때, 관계가 잘되고 관계 리더십으로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지혜자는 주는 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 오피니언
    • 논문/책
    2023-05-25
  • [황권철 목사] 열두 사도 연구를 마치는 말
    라이스 교수의 글로 마치는 말을 대신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공적 수단를 미국 샌프란시스코 신학교 실천신학 교수 하워드 라이스(Howard L. Rice)는 그가 쓴 『개혁주의 영성(Reformed Spirituality)』에서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말하고 있다.  첫째,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 친밀감을 가지는 것이다. 모든 자연현상은 친밀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생명활동이나 친밀감에서 이루어진다. 인간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유통구조도 친밀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영적관계 또한 친밀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성도가 하나님과 친밀감을 가지기 위해서 끊임없이 엎드려 기도해야 한다. 그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을 이루게 된다.  둘째, 성경 읽기를 통한 영적 내면화 작업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성을 우리의 심령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일이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 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때 성령의 조명 아래서 하나님의 감동을 받게 되어 우리의 심성이 거룩해진다.  셋째, 다른 사람과의 교제를 통한 교회 공동체의 하나 됨이다. 주님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드려 이 땅에 교회를 세웠다. 교회는 지상에서 세운 가장 거룩한 공동체이다.우리가 비록 가문과 지역과 문화가 다른 환경에서 자랐을 지라도 예수 안에서 하나 될 수 있다. 그래서 복음으로 하나 되도록 교제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세상을 향한 윤리적인 실천행위이다. 이를 위해 소금과 빛으로 이웃과 사회를 섬기는 일이다. 섬김은 봉사와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주님은 인자로 오셔서 섬김으로 자신의 몸을 드렸다.  그는 이 같은 은혜를 지속적으로 누리기 위해서 날마다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고 했다. 개혁주의 신앙전통은 말씀 묵상인 성경 읽기를 강조한다. 개인이 성경을 읽고 공동체가 예배를 통해서 받은 말씀을 묵상하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게 된다. 말씀을 묵상하는 데는 몇 가지 단계가 있다.  첫째, 옥토화 작업이다. 주님의 씨 뿌리는 비유에 보면 “좋은 땅에 떨어지매”(마 13:8) 백배, 육십 배, 삼십 배로 결실했다고 한다. 씨를 뿌리기 이전에 밭을 기경하여 옥토를 만들어야한다. 이와 같이 말씀을 읽기 전에 자신을 추스르는 시간이 필요하다. 말씀에 대한 수용적 태도를 위한 준비 작업이다. 우리 자신을 괴롭히는 모든 환경적인 요인으로부터 자유 해야 한다. 거룩한 마음으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 순종의 자세로 나아가도록 해야 한다. 말씀을 읽기 전에 침묵을 통한 영적 워밍 업(warming up)을 가져야 한다.  둘째, 집중화 작업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제 구시 기도시간에 성전에 들어갈 때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만났다. 그때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행 3:4)고 했다. 앉은뱅이는 동전 한 푼으로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예수 이름으로 그를 일으켜 세웠다. 돋보기로 에너지를 집중시키는 것처럼 말씀을 집중해서 읽는 것이다.  셋째, 묵상화 작업이다. 소가 풀을 먹고 되새김질을 하는 것처럼 우리가 읽은 말씀을 묵상해야 말씀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다. 다윗의 위대한 능력은 날마다 말씀을 묵상했기 때문이다.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2)고 했다. 그때 하나님은 시절을 쫓아 열매 맺는 은총을 입게 하신다.  넷째, 청종화 작업이다. 묵상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청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은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된 자에게 친히 말씀하신다. “사무엘은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삼상 2:18). 우리가 날마다 말씀의 에봇을 입고 하나님의 성소에서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은 순간순간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마지막으로 실천화 작업이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간구하게 된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단 1:8)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는 이방의 바벨론왕궁에서도 하나님은 뜻을 이루기 위해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신실한 동역자들을 붙여 주셨다. 하나님 앞에 뜻을 정하여 기도할 때 환경을 극복할 담력을 주신다. 말씀과 기도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우리의 삶을 미지의 세계로 담대하게 인도해 간다. 오늘도 큐티를 통해 승리하는 하루가 되길 바란다. 이제 열두 제자에 관한 연구를 마치면서 독자들에게 몇 가지 당부를 드리고자 한다.  첫째, 정경 외의 문헌은 참고적인 견해로 보아 주기를 바란다. 사도들의 발자취를 살피려고 하면 고대 문헌들을 살펴야 하는데 정경에 기록이 없는 대부분의 것이 외경이나 위경에 속한 책이며 교부들의 문헌들이다. 이 같은 것에서 정경과 비교하여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정경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되어야지 정경을 파괴하는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둘째, AD 397년 칼타고 회의에서 정경화 작업은 하나님의 섭리임을 믿는다. 사도와 교부들의 사역이 마무리 되는 시점에 이 같은 작업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 세대가 진리의 규범이 없는 사상의 대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될 것이다. 필자는 이 같은 교부시대 역사를 통해 오늘날 우리들이 받은 복음을 다음세대에 바르게 전수하기 위해 【고려파교회연구소】를 세우게 됨을 너무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다시 한 번 사명을 재인식하게 되었다.  셋째, 열두 사도의 행적을 빠짐없이 언급해 보고자 노력했다. 베드로 같이 복음서와 서신서에서 많은 사역을 행한 흔적과 자국을 남긴 자가 있는가 하면 가나안인 시몬은 한 마디의 말도 남기지 않은 침묵의 사도였다. 그러나 이들은 각자 하나님 나라를 위해 주님의 부름을 받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다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복음의 소리는 외치는 소리로 전파되기도 하나 때로는 들리지 않는 메아리 같은 여운을 통해 더욱 더 우리의 가슴에 새겨지기도 한다. 문헌과 흔적과 자국이 없는 사도들을 위해서는 더욱 많이 기도하고 성령의 도움을 구하기도 했다. 이제 이 연구를 마치고자 한다. 모든 영역에서 부족하고 모자라는 부분이 많아 한계상황에 이르렀기에 이 부분은 여기에서 필을 놓으려고 한다. 비록 졸고이기는 하나, 큐티를 하는 언약 백성들에게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더욱 풍성한 깨달음이 있기를 기도하면서 열두 사도의 연구를 여기서 마감하고자 한다.
    • 오피니언
    • 성경
    2023-05-25
  • [김경헌 목사]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3)(창23:1)
    남편과 한 몸을 이루어 하나님 구원을 향한 “여자의 후손이신 메시아”를 향하여 한결같이 순종했던 사라였습니다. 자신이 돕는 배필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할 것 같아 아내의 자리까지도 양보하는 결단까지 내립니다. (창16:2-3)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지 십 년 후였더라 그 어떤 희생이나 양보를 다 한다 해도 여자로서, 특히 아내로서 불가능한 부분입니다. 이 사실만 보아도 메시아를 바라보는 언약은 아브라함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라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진 것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사라의 이 장면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돕는 배필(창2:18)”의 핵심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것도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있는 성도들은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서 복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특권 중의 특권이요 복 중의 복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 믿어서 복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위 성경 구절에서 또 한 번 사라 할머니가 우리를 안타깝게 하고 가슴 아프게 하는 장면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라는 부분입니다. 65세에 부름을 받아 10년 동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렸습니다. 단순히 10년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표현이 사라 할머니의 심정이라고 한다면 과언일까요? 사라는 열 손가락을 다 꼽아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렸습니다. 장차 오실 여자의 후손 메시아를 바라보는 신앙으로 아들을 기다린 세월이 10년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셨으니 사라의 나이 75세, 아브라함의 나이 85세입니다. 그런데 사라가 자신의 여종 하갈을 남편에 첩으로 넣어주자마자 하갈은 임신합니다. (창16: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참 기가 찰 노릇입니다. 여종을 첩으로 넣어주자마자 임신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아브라함에게는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마치 사라에게 문제가 있어 임신하지 못한 것임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말입니다. 어쩌면 이때까지는 사라가 아이를 가질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이 일이 있은 지 14년 후 이삭을 임신할 때 가서 성경은 사라의 생리가 끊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창18:11)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이 정도 되면 예수 믿어도 별수 없다는 말이 나올 것 같지 않습니까? 목사, 장로, 집사, 권사, 성도가 되어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교회와 사명을 위하여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았는데 이런 결과가 주어 지면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보고 미련하다고 비아냥거리지 않겠습니까? (창16: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여기서 참 재미있는 장면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갈이 임신한 후 14년 후에 사라도 임신합니다. 사라가 90세에 이삭을 낳았으니, 사라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보며 14년이라는 세월을 더 기다려야 합니다. 당연히 이스마엘과 이삭의 나이는 14살 차이입니다. 14년이라는 세월을 그냥 무심히 지나갈 수도 있지만, 14는 하나님의 안식 우리의 구원을 뜻하는 7의 2배입니다. 마1장 이스라엘 왕의 역사, 하나님 나라인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14대를 3번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마1:17) 이렇게 볼 때, 성경에서 14라는 수는 7의 갑절로 믿음의 세월,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 역사, 성도로서의 세월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는 "고통의 길, 슬픔의 길"이라는 뜻으로, 예수님께서 재판받으신 후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까지 걸어가신 길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길을 14처소로 기념하고 있는 것은 그냥 우연일까요? 남편을 따라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온 지 10년 세월. 첩과 첩의 자식을 통해 멸시를 받고 살았던 믿음의 세월 14년. 이런 세월을 살았던 믿음의 여인 사라,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교회를 예표하는 여인 사라가 127세를 살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이 결혼하는 것도 보지 못하고 죽게 하셨을까요? 왜 성경은 그렇게 필요해 보이지 않는 사라의 나이, 사라가 죽은 나이를 기록해서 우리를 안타깝게 할까요? 3년만 더 살려 주시면 며느리라도 보고 죽을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사라에게 이러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사라에게 이렇게 잔인하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사라가 죽은 나이를 기록만 하지 않았어도 안타까움이 덜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성경이 장차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예표하는 사라의 죽은 나이를 기록하여 오늘 사라의 후예가 된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복음은 무엇일까요?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3-05-10
  • [김성수 총장] 일에 대한 성경적 관점의 중요성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일상적인 삶을 영위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세상과 사물을 성경적 관점을 통해 바라보고 사고하며 실천하는 일이다. 거듭난 니고데모의 안경을 통해서 사물을 바라보고 영위하는 삶 전체가 영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적 세계관의 틀을 통해 사물을 바라보지 않으면 하나님의 선한 질서를 왜곡시키는 중대한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이와 같은 오류의 결과는 개인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집단 구성원의 삶의 양태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이와 같은 왜곡의 모습의 한 예를 일에 대한 관점과 결과를 통해서 성경적 관점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한다. 성경은 처음부터 우리의 일이 신적 기원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일이란 거룩한 청지기로서의 소명이며, 영적인 활동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일을 하도록 사명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많은 곳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일을 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5:17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 한다”고 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바로 이 진리로부터 일의 존엄성에 대한 기독교적 가르침이 유래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조명이 없었던 고대 헬라인들은 일에 대해서 이러한 태도를 가지지 않았다. 플라톤의 신은 일을 하는 신이 아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신은 위대하고 무한한 사상가일 뿐이다. 플라톤의 신은 이 세계를 만든 신이 아니라 단지 계획했을 뿐이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철학자는 귀족이며, 사상가며, 여가를 즐기는 사람이다. 헬라인들에게 있어서 노동자들은 천대와 멸시를 받았다. 일을 천한 것으로 보았다. 신에 대한 이러한 관점 때문에 이들은 일의 존엄성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우리가 아직도 손으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천하게 생각하고 머리로 사고하는 사람들은 더 높고 존귀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태도는 성경적인 태도가 아니라 이교적인 헬라적 태도이다. 헬라의 이교적 관점은 로마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로마 공화국 초기에 귀족은 하인이나 노예와 함께 토지를 소유하고 경작했다. 그러나 공화국이 확장되고 카르타고와 헬라 문화를 접하면서 일에 대한 결정적인 태도 변화가 일어났다. 헬라 문화와 마찬가지로 정신에 대한 묵상이 물질 세계를 대상으로 활동하는 것보다 더 높은 것으로 여겼다. 로마 귀족들은 ‘라티푼디아’(latifundia)로 알려진 노예가 운영하는 대규모 농장을 개발하기 시작했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점점 더 아름다운 예술품, 정원 및 주택과 함께 호화로운 삶에 자신을 바쳤다. 아름다운 미와 진리 속에서 사는 것이 정신적인 사색의 삶을 영위하는데 최고의 방법이라고 보았다. 완전한 신은 결국 선과 진실과 함께 아름다움의 근원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정신적 명상의 삶을 숙고하고 영위하기 위해 그들이 추구했던 사치스러운 삶은 그들을 육신을 위한 활동으로 냉혹하게 끌어당겼다. 종종 그렇듯이 사치는 폭식과 난교라는 죄악된 삶으로 이어졌다. 진흙 램프에서 로마 빌라의 벽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장식하는 포르노 이미지는 제국 시대 로마인의 성적 집착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된다.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성행위가 더 비뚤어지고 극단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펜트하우스(Penthouse)라는 잡지사에서 제작한 로마의 3대 황제 칼리굴라(Caligula)의 전기 영화는 이와 같이 극단적으로 왜곡된 삶의 충분한 증거가 될 것이다. 로마의 엘리트들이 소위 세련되고 방탕한 삶에 빠져드는 동안 누군가는 이들의 삶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일을 해야 했다. 그런데 이미 로마의 문화는 생산적 노동은 물질 세계를 다루기 때문에 하층 계급이나 노예와 같은 열등한 사람들에게만 어울리는 천박한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노예들이 일하던 귀족들의 소유 라티푼디아는 그 때까지만 해도 로마 경제의 중추였던 소규모 가족 농장을 점차 폐업 시켰고 이제 농업 생산은 주로 노예 중심의 기업이 되었다. 로마 제국의 전성기에는 사실상 전체 경제가 노예 노동에 의존해 있었다. 로마인들은 물레방아와 다른 노동 절약 기술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다. 노예가 일을 하게 할 수 있는데 이런 기술에 자본을 투자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노예 노동에 의존하는 것은 민간 기업만이 아니었다. 국가는 노예를 사용하여 상품 운송, 특히 제국 주변의 군인을 운송하는 도로를 건설했다. 노예들의 노역을 통해 또한 황제와 귀족의 특권을 강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거대한 정부 건물을 건설했다. 열등한자들이 자신들보다 우월한 자들을 섬기고 공경해야 한다는 가치구조 위에서 신들이 자신들을 기리기 위해 사원과 조각상을 원했다면 황제와 귀족들도 자신들을 찬양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노예와 하층 계급은 황실 영지의 분수를 위한 수로, 항구, 하수구, 서민을 위한 다층 아파트를 건설했다. 이 모든 건설 프로젝트는 노예와 평민들의 반란을 막기 위해,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로마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문명 사회라는 점을 모든 기회를 통해 과시해야 한다는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제국의 도시 거주자 대부분은 열악한 공동 주택에서 지독할 정도로 불결한 생활을 했으며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시 이들의 평균 수명은 약 30년 정도였다. 위대한 공학 기술과 건축 성과는 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엘리트에게 혜택을 주었다. 그들은 대중에게 일자리를 제공했을지 모르지만 대중을 위해 유익한 다른 일들을 거의 하지 않았다. 일에 대한 헬라와 로마 사회의 왜곡된 관점이 가져온 개인적이며 공동체적 결과는 우리에게 성경적 관점을 확립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더 일깨워 준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3-05-10
  • [양대식 목사] 리더에 대하여(8)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야 한다 리더는 가정생활에서 본이 되어야 합니다.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합니다. 성경은 일부다처제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리더는 가정이 건전해야 합니다. 가정생활이 편하지 않거나 가정이 견고하지 않으면 리더로써 인정받기 힘듭니다. 가정이 깨어지면 좋은 리더가 될 수 없 습니다. 가정이 순결하고 하나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가정이 어떤가, 가정 생활에 충실한 가를 살펴보고 평가하게 됩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리더십이 무너집니다. 리더는 가정을 귀히 여기고 가정생활에 충실해야 합니다. 한 아내의 남편, 한 남편의 아내여야 합니다. 가정의 실패는 인생의 실패입니다. 리더는 가정에서 인정받아야 하고 가정생활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가정사역을 귀히 여겨야 하고 자녀들을 신앙으로 잘 양육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성공해야 삶의 성공자가 됩니다. 가정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사단은 가정을 깨뜨리나 성령님은 가정을 하나 되게 하십니다. 리더의 가정은 온 가족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리더는 하나님이 주신 가정을 귀히 여기고 가정생활에 성실해야 합니다. 가정생활이 복잡하고 가정이 무너지면 좋은 리더가 되지 못하고 리더십이 무너집니다. 가정의 리더, 영적인 리더로써 성적인 순결을 지켜야 합니다. 성적인 순결이 무너지고 음란하여 음행하면 가정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리더로써 인정받지 못합니다. 가정을 지키는 자가 리더입니다. 자기 집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담대하라 인간은 담대하지 못하고 두려움이 많습니다. 성경은 두려워하지 말라, 담대해야 한다고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은 부드러우시면서 어떤 때는 담대하셨습니다. 담대해야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고 리더십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담대하지 못하고 소심하고 두려움이 많으면 관계가 잘 안되고 깨지기도 하여 관계 리더가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강하고 담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두려움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향해 담대히 죄를 회개하라고 외치셨습니다. 오늘날 담대해야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을 향해서 독사의 새끼라고 담대히 꾸짖고 책망하셨습니다.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합니다. 죄가 있고 약점이 잡히면 담대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이 담대함입니다. 담대하지 못하면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담대하게 가르치시고, 전도하시고, 설교하셨습니다. 리더는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담대히 사단마귀를 내어 쫓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사단마귀를 두려워합니다. 예수님은 사단마귀 앞에서 담대히 꾸짖고 명령하셨습니다. 담대해야 사단마귀를 이깁니다. 사단마귀도 자기를 두려워 하는 소심한 자를 비웃고 우습게 여깁니다. 성령 충만하고 기도하는 자, 의롭게 말씀대로 사는 자가 담대할 수 있습니다. 담대해야 리더가 되고 관계가 잘 됩니다
    • 오피니언
    • 논문/책
    2023-05-10
  • [황권철 목사] 가룟 유다의 최후(Judas' Death)-예수를 판자(2)
    이때 그는 선생에 대한 적개심을 품게 되었다. 이에 분노하고 괘심한 생각을 한 그는 곧 바로 유대교의 대제사장들에게 달려가서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마26:15)하고 예수를 그들에게 팔아넘길 것을 제의했다. 제사장들은 너무나 좋은 기회가 왔기에 즉석에서 은 30으로 흥정을 시작했다. 당시 노예가 황소에 받혀 죽었을 때 보상금으로 주인에게 지불하던 금액이 은 30이었다. 이 같은 것을 보면 유다가 돈의 액수는 고사하고 스승이 한 충고에 대한 적개심으로 예수를 팔아넘긴 것이 분명했다. 예수를 판 가룟 유다 주님은 무교절 첫날 성 목요일인 최후 만찬의 때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 것을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마26:21) 이때 사도들이 모두 근심하며 저마다 자기가 아니라고 부정했다. 그때 예수는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마26:23)라고 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서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곳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요13:26-27). 유다는 선생이 자신의 악한 마음을 드러낸 이후에도 그는 회개하지 않자 사탄이 그 마음속에서 역사하니 너무도 자연스럽게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마26:25)라고 능청스럽게 말하니 주님은 “네가 하려는 일을 속히 하라”고 했다. 다른 사도들은 예수가 그에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요13:29-30). 유다는 그 떡을 받고 회개하지 않고 영원히 주님 곁을 떠나고 말았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요13:30). 유다가 나간 때가 시간적으로 밤이기는 하지만 사실 그는 영적으로 영원한 어두운 밤인 사단의 자식이 되고 말았다. 유다는 밖으로 나가 즉시 대제사장들에게 달려갔다. 최후의 만찬이 끝나자 예수는 남은 11명의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서 열심히 기도했다. 기도가 다 끝났을 때 마침 유다가 군인들을 이끌고 왔다. 로마 군병들은 밤이 깊어서 어두웠기 때문에 누가 예수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유다는 누가 예수인지 알리는 신호로 예수에게 다가가 입맞춤을 하였다. 그리하여 군병들은 예수를 체포하여 빌라도 법정으로 끌고 갔다. 제 길로 간 가룟 유다 그는 존귀한 사도직을 버리고 제 길로 갔다.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행1:24-25). 그는 스스로 복된 자리를 박차고 나가 멸망의 길로 간 자이다. 누가는 그가 묻힌 곳을 아켈다마라고 했다. 유다가 자살한 후에 묻힌 밭을 아켈다마라고 하는데 피밭이라는 뜻이다. 마태에 의하면 가룟 유다는 그 은을 성전 안에다 내던지고 나와서 목을 매달아 자살하였고 대제사장들은 이를 주워 다가 나그네들을 위한 묘지용 토지를 샀다고 했다. 그러나 시편의 예언대로 그곳은 황폐한 곳이 되어 아무도 머문 자가 없었다. 사실 이곳은 유다가 3년간 횡령한 돈으로 산 대농장이었다(행1:18). 유다가 거꾸러져 죽은 피밭은 대제사장들이 토기장이들에게 산 나그네 묘지용 토지로서 작은 밭(헬라어로 아그로스)(마27:6~7)이 아닌 대농장(헬라어로 코리온)이었다. 그는 주님을 따르던 수많은 여인들이 자신의 재산을 들여 예수님과 사도들이 사용하도록 준 생활비를 가로 채 불의한 삯으로 마련해 두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가난한 예수 공동체 일원이었던 유다가 대농장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행1:18). 유다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으나 불행한 최후를 맞이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청함은 받았으나, 택함을 입지 못한 효과 있는 유효한 부르심을 받지 못한 자였다. 이는 곧 성령의 도우심으로 만이 가능하다. 성령은 성도를 통하여 참고 인내하여 궁극적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하신다. 비록 우리가 연약하여 인자를 거역할 수 있으나, 성령은 후일에 뉘우치고 회개하여 베드로와 같이 돌아오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케 하는 성령을 훼방하고 거역하면 돌이킬 수가 없다. 그래서 주님은 성령을 훼방하면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12:31-32). 유다는 좋은 이름을 천하게 만들어 버렸다. 성경에 가룟 유다 아닌 유다가 몇 명 있다.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창29:35), 주님의 사도 중에도 다대오란 이름을 가진 유다(요14:22), 그리고 예수님 동생 유다(마13:55)이다. 유다는 본래 찬송이란 뜻을 가진 이름이다. 그러나 가룟 유다 이후로 그 누구도 유다란 이름을 짓는 자가 없었다. 찰스 스펄젼은 “사탄은 거룩함을 상실한 천사다. 사도 중 하나가 아니었다면 유다가 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마리아가 깬 옥합을 허비하는 것으로 보았다. 주님은 그녀가 섬긴 헌신과 봉사는 복음이 증거 되는 곳마다 그 행한 일이 전파될 가장 아름다운 사역이라고 말씀하셨으나 그는 이를 허비하는 것이라 말함으로 주님의 장례를 욕되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그는 입맞춤으로 주님을 로마 군병들에게 팔아 넘겼다. 애정과 충성의 표시인 거룩한 입맞춤을, 속임과 배신의 수단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주님은 부활함으로 빈 무덤을 남겼지만 그는 불의의 삯으로 황폐한 무덤을 남기고 말았다. 우리 모두 아름다운 유산을 남기는 거룩한 씨 그루터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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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10
  • [최호숙 목사] 아라페시 현상(現想)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사상가인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는 교육의 위대함에 대해 명언을 남겼는데 “식물은 재배(栽培)에 의하여 식물다워지고, 사람은 교육(敎育)에 의하여 사람다워진다”고 하였다. 시골에 농부들이 호박순이 나오면 주인이 그 호박순을 동쪽으로 돌려놓으면 그 호박순은 동쪽으로 뻗어나간다. 나팔꽃도 주인이 어떤 모습으로 순(筍)을 돌려놓는가에 따라 성장 방향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런 원리를 일찍부터 알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아이들에게 쉐마교육을 하였다. “이스라엘아 들으라(쉐마 이스라엘)...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4~5).” 이 사상을 교육받았기 때문에 평생 여호와를 사랑하는 신앙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인류학자 마거릿 머드(Margaret Mead)는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연구하기 위하여 남태평양을 중심으로 한 오지 마을들을 찾아다니며 평생 연구에 몰두했다. 연구 중 뉴기니섬의 아라페시족과 문두구머족의 종족을 연구한 결과 같은 지역에 사는데 두 종족의 성격 기질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두구머족 사람들은 남자든 여자든 성격이 난폭하고 호전적인 반면에 아라페시족 사람들은 온순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원인은 어린아이를 양육하는 근본적 방식의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문두구머족 엄마들은 아이를 양육할 때 거친 바구니에 넣어 등에다 메고 다니며 양육을 했기 때문에 아이는 어머니와 피부 접촉도 단절, 대화도 단절, 만질 수 있는 것은 거친 바구니 밖에 만질 수 없었다. 이런 과정에 성장한 아이는 난폭하고 거친 성격의 소유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반대로 아라페시족의 엄마들은 아이를 앞가슴에 매어 달고 다니며 양육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아이는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느끼고 젖꼭지도 만지고 대화도 하고 서로의 교감이 있어 온화하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아라페시족 사람들의 삶 가운데 발견한 것은 그들이 사냥을 하다가 상처를 입거나 사고로 인하여 상처를 입었을 경우에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의 상처를 공개하고 다닌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이 서로 공감해 주고 아픈 고통에 참여해 주고 위로해 주고 그 고통의 감정에 호응함으로써 서로 간에 상처와 불행을 증발시켜 정서적으로 안정을 되찾고 회복하는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마가릿 머드는 아라페시 현상(現像)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아라페시 현상은 “개인이 받은 상처와 고통을 집단에 알리므로 그 집단은 그 사람의 상처와 고통에 호응하고, 위로해 주며 그 감정에 동감함으로 각자의 상처와 불행을 증발시켜 서로가 안정을 되찾는 현상”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공연장에서 볼 수 있는데 대중가요의 대부분은 사랑에 실패하고 배신, 눈물, 상처로 얼룩진 노래들이 많다. 그래서 대중 가수가 노래를 부를 때 그 가수의 감정을 청중들이 듣고 공감하고 응어리진 마음을 서로 회복하게 되는 아라페시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또한 기독교 간증자가 자신의 과거 고통, 실패하였던 경험을 간증하면 성도들이 그것을 듣고 그 고통과 실패 경험에 공감하며 서로가 상처를 증발시키게 되는데 여기서도 아라페시 현상이 나타난다. 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위로해 주고 사랑해 주는 마음은 어린 시절 어떤 문화 속에서 양육을 받았느냐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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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10
  • [이정희 목사] 높임말(경어), 이대로 좋은가? (2)
    I. 서언(序言) 우리나라를 일컬어 옛날부터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 칭하였다. 이는‘동쪽에 있는 예절의 나라’라는 뜻으로, 그 유래는 중국 공자의 7대손인 공빈이 쓴 ‘동이열전’에 기록됨으로서 유래된 말이다. 이는 당시 우리나라를 제후국 정도로 취급하던 중국에서 조차 우리의 예의범절을 아주 좋은 면으로 평가하는 자랑스러운 말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의 하나는 옛날부터 우리나라 언어의 고유한 특징 중의 하나인 높임말(경어)의 우수성과 사용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지난 호에서 밝힌바 있지만 높임말에 대한 사용은 심각할 정도로 잘못사용하거나 오염되어 있다. 필자 자신도 높임말을 해놓고 나중에 보면 잘못 사용했음을 알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에 본 호에서는 지난 호에 이어서 계속 높임말에 대한 올바른 사용을 논하고자 한다. II. 높임말의 분류 높임말을 제대로 잘못 사용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높임말의 체계와 구조가 복잡하고 어려운 면도 있지만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학습이 없다보니 더욱 그러하다. 이에 본 호에서는 높임말의 일반적인 개념 중에서 혼돈하기 쉬운 높임법의 분류, 즉 주체높임법과 객체높임법, 상대 높임법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1. 주체높임법 : 이는 말하는 자가 서술하는 주체에 대하여 높여서 말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목사님의 말씀이 타당하십니다.’란 말을 한다고 하자. 여기에서의 주체는 ‘목사님’이다. 또한 주체인 목사님을 높이는 말은 선어말 어미(先語末語尾)인 ‘-시’와 높임접미사 ‘-님’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경우를 주체높임법이라고 한다. 2. 객체높임법 : ‘목사님’을 높이는 주체 높임법과는 달리 말의 목적어나 부사어가 지시하는 대상, 곧 객체에 대해서 높이는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면 ‘나는 장로님을 모시고 교회로 왔다.’에서 말하는 주체는 나이다. 하지만 나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인 동시에 말의 목적어인 장로님을 높이는 경우이기 때문에 ‘모시다’란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이런 경우를 객체 높임법이라 한다. 3. 상대높임법 : 이 경우는 국어의 높임법 가운데 가장 발달되어 있는 것으로서, 말하는 자가 상대방에 대해 높이거나 낮추어 말하는 경우이다. 주로 종결 표현에 많이 나오는데, 크게는 격식체와 비격식체로 나뉘고, 높임의 정도에 따라서 네 단계로 나누기도 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면, 격식체는 높임 표현에서는‘이 성경책을 읽으십시오.’의 아주 높임의 ‘합쇼체’와‘이 성경을 읽으세요.’의 예사 높임의 ‘하오체’가 있다. 또한 격식체의 낮춤 표현에서는‘이 성경책을 읽게’의 예사 낮춤의 ‘하게체’와 ‘이 책을 읽으라.’의 아주 낮춤의‘해라체’가 있다. 이런 경우 모두를 격식체라고 한다. 반면 비격식체에 대해서 논한다면, ‘이 성경책을 읽어요.’의 두루 높임의 ‘해요체’가 있고, ‘이 성경책을 읽어’의 두루 낮춤의 ‘해체’가 있다. III. 결 어 높임말에 있어서는 이상과 같은 세 종류만 잘 구분해도 대부분의 높임말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논한 것만 해도 전공하지 않은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게 들려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이유들로 인하여 앞에서 논한 대로 높임말 사용이 지금은 심각한 수준에 와 있다. 더군다나 상하관계나 기본질서 개념이 분명치 않는 ‘해체주의(포스터모더니즘)’시대 속에서 높임말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어떤 이의 말처럼 동방예의지국이 아닌 동방무례지국(東方無禮之國)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다. 특히 이런 면으로 가장 먼저 선도해야 할 교회에서 조차 바른 높임말을 잘 하지 못하다보니 많은 우려가 된다. 예를 들어 예수님을 ‘예수’라 하고 성령님을 ‘성령’이라 하거나, 목사님, 장로님 등의 호칭에서 ‘-님’이란 존칭 접미사를 아예 무시하고, 바로 OOO 목사, OOO 장로 등으로 호칭하는 경우도 너무 많이 볼 수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의 올바른 언어 사용과 예의 있는 높임 말 사용은 또 다른 측면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아름다운 오고가는 따뜻한 말과 적절하게 서로 높이는 경의 사용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언어문화를 형성하고 선도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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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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