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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7)- 관언유착(官言癒着)
언론이 독자들이나 대중들에게 주는 영향이 크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사실이 아닌 잘못된 기사나 중심을 잃은 기사는 많은 사람에게 혼란을 줍니다.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몇 해 전 우리 노회에서 모 목사를 순회 선교사로 파송한다고 기독교보에 기사가 올랐습니다. KPM 이사장과 담당자들이 파송 예배에 순서를 맡으며 파송 예배 사진까지 첨부하여 누가 봐도 총회에서, KPM에서 파송하는 선교사처럼 대문짝만하게 기사를 올렸습니다. 노회 파송 선교사도 아닌데 과장된 허위 기사를 올릴 수 있느냐고 기독교보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몇 주 후 신문 구석 어느 페이지에 짧은 한 줄로 000교회 순회 파송 선교사로 정정한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습니다. 그 기사를 본 대부분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은 KPM 파송 선교사로 알고 있습니다. 짤막한 정정 기사가 났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도 “부산서부노회 파송 선교사냐?”고 물어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선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KPM이나 노회에서 파송한 선교사처럼 위장을 하고 그것을 교단 신문인 기독교보에까지 기사화한 것은 그 저의를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디 이 한 건뿐이겠습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이 발생하여 총대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거짓된 걸음을 걷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 심히 우려됩니다. 기독교보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할 것입니다. 기독교보가 KPM 선교사로 파송하는 기본도 모른다는 것은 몰랐다고 하는 말 자체가 거짓말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의 파장도 결코 간과할 수 없지만, 신앙과 교리, 교회와 개인의 인권에 대한 의도적인 허위 기사는 고신 신앙 전체를 흔들 수 있는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문제는 고신 언론사는 총회 유지재단 이사회에서 관리하는 기관입니다. 유지재단 이사회는 총회장을 당연직 이사장으로 해서 총회 기관 중 최상위 기관으로 총회를 잘 알고, 총대들의 지지를 받아 총회 산하 교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감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유지재단 이사회가 직무유기 한 것입니다. 학원 이사들이 잘못할 때만 소환할 것이 아니라 유지재단 이사회가 잘못할 때는 그 파장은 훨씬 더 크고 중요하기에 반드시 소환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독교보가 총회 기관지인지, 유지재단 이사회 관할에 있는 기관지인지, 기독교보 자체 언론지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된다고 입을 모읍니다. 언론사 사장 얼굴이 기독교보에 빠지는 일이 없자 이 일에 대해서 총대들은 물론이요, 유지재단 이사회에서도 지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과는 마이동풍입니다. 순교 정신을 기본으로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모토로 하는 고신의 기관지인 기독교보가 본류의 신앙을 이탈한 것은 이미 옛말이고 특정 계파에 포진한 자들이 기고하는 재고 되어야 할 지나친 인문학적 논의와 신앙 고백적 정체성을 벗어난 잘못된 사상들이나 도배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고신 신앙을 가진 목회자들과 장로들, 교회들은 알게 모르게 기독교보에 대한 불신으로 불매 운동을 하고 있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입니다. 5월 2일 자 코람데오닷컴에 “교계 언론 편집 책임자의 이학규 장로 고소 건, 고검 재정 심사에서도 또다시 기각 판결”이라는 기사가 올랐습니다.(코람데오닷컴 참조) 이 사건의 실상은 전국 남전도회 임원으로 있는 모 장로님이 유지재단 이사로 출마하려고 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웠는데 그해에 언론사 사장 선거가 있어 보수 측 인사가 유지재단 이사가 되면 사장이 되는 길에 장애가 될 것 같아 코람데오닷컴의 기사대로 언론사의 직원이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운 장로를 “사퇴 종용”했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총회 산하 교회를 잘 돌아보고, 총회의 기관들을 바르게 잘 관리해야 하는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시작부터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일반 총대들은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는 계파와 개인의 이권과 자리가 그 배경이 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재미를 본 자들은 이제 총회에서 골치 아프게 투표하고 경쟁하는 것보다 아예 노회 총대를 조정하는 기가 찬 수법으로 발전했습니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계파에 표를 던질 사람을 골라서 총대라는 자리로 매관매직을 하고, 각 노회 지도급에 있는 목사 장로들을 총회 상임위의 자리로 매관매직해서 4월 노회 총대 선거가 끝나면 이미 상황이 종료되는 모양새로 발전되었습니다. 이학규 장로가 전국 남전도회 회장으로 봉직하고 있을 때 함께 임원으로 봉사하던 모 장로가 “사퇴를 종용”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항의한 것이 코람데오닷컴 에 기사 실린 것과 같은 결과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평생 법 없이도, 법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사는 목사, 장로가 이 일로 인하여 교회 생활이나 신앙생활에 방해를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경찰서와 법원으로 불려 다니며 고초를 겪고 어려움을 당했던 것에 대해서 고신 언론사를 관리하는 유지재단의 총회장과 목사, 장로 이사들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 궁금합니다. 왜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말입니다. 이학규 장로는 신앙적으로 잘 해결하고자 언론사의 불법 선거 개입 못 하게 해달라는 진정서를 총회 선관위에 제출했더니 총대가 아니라 진정서를 접수하지 못한다고 하더랍니다. 참 훌륭한 총회 선거관리 위원회이십니다. 그래서 “여기 보냈다, 저기 보냈다” 서류 핑퐁 게임을 하다가 결국 사법기관에 판단을 받기까지 하면서 이학규 장로가 당한 심적 피해, 정신적 피해, 일상 업무 손해의 피해는 누가 보상해줍니까? 고신총회가 이렇게 기본을 상실하고 무책임하게 하면 안 됩니다. 펜은 검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오보도 문제이지만, 언론이, 신문이 의도적이고 사욕에 치우쳐 고신의 정체성에 위배 되는 글이나 기사를 올리고, 무책임으로 일관할 때 고신총회 산하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미치는 파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총회 임원회와 학원이사회가 지난 총회 시 총대들을 속이고 총장선출 규정을 통과시켜 불법으로 총장을 선임했다고 신문에 기사화되어도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볼 때, 총회 임원회의 수장인 총회장이 유지재단의 당연직 이사장이기에 이 사실조차 그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게다가 현 총회장은 기독교보 발행인이 아니기에 변명하며 피해갈 수 있는 좋은 길도 열려 있습니다.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재정적인 문제는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릅니다. “반려동물을 장례식”에 대한 안건이 고신총회 신학부에서 재론되고, 어떻게 고신총회에서 “그따위 안건이 거론되느냐”는 회원들의 호통에 경남노회 모 회원이 나와 옹호 발언을 하며 “지난달에 우리 찐이(고양이)가 죽어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하늘나라로 보내줬다”고 말을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총회가 불건전하고 이단성이 있어 교류를 금지해도 전혀 문제의식 없이 그런 모임에 참여하고, 순서나 자리까지 맡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는 300M 거리를 유지해야 하지만 이전하는 것은 법에 명시가 없기에 괜찮다고 하는 고신입니다. 핑퐁 게임을 하다하다 안되면 법리해석을 문제 삼아 법제위에 해석을 요청하여 본질을 잊어버리게 하고 계파싸움 진영싸움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고신입니다. 양파도 아니고 벗겨도 벗겨도 끝이 없는 고신이여...... 언론은 “言路”를 여는 것입니다. 言路가 막히면 세상은 암흑세계나 다름없습니다. 한 마리의 개가 먼저 짖으면 온 동네 개가 때지어 짖어대듯이 기독교보가 먼저 총대를 메고 총회 여러 현안의 심각성을 알리면 동시에 총회 여러 곳에서 포문을 열고 동참할 것입니다. 언론은 여론을 집약하고 전문가들의 진단과 의견을 수렴하거나 민심을 파악한 후 사안에 따라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로 펜 끝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언론의 사명입니다. 총회 성도들을 대신해서 할 말을 하며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선도해야 합니다. 독선의 권력을 향한 비판은 언론이 지향해야 할 우선순위이자 언론 존재 이유입니다. 이 가치관이 상실되면 결국 관언유착(官言癒着)이 되기 쉽고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관제언론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사리사욕에 길들어서 소위 ‘독선과 권력’의 ‘종’이 된다면 스스로 펜을 손에서 내려놓아야 함은 불문가지입니다. 기독교보가 그렇게 길들어진 “관보(官報)”라는 비판을 듣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집을 지키기 위해 열심 짖어야 할 개가 요즘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주인 행세를 한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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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6 : 성가대와 찬양대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평생을 예배드리면서도 때로는 이 말이 옳은가 틀리는가에 대한 의문이 되는 용어들이 많다. 본 기고의 목적이 이를 바로 알고 사용하자는 취지에서 계속 기고하지만, 필자 자신도 때로는 헷갈릴 때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예배 중의 순서에서 찬양대인가 성가대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통합 측 총회에서는 찬양대라고 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수많은 교회들이 성가대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는 여기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성가대(聖歌隊)와 찬양대(讚揚隊)의 용어 차이 두 용어는 일반적으로 보면 거의 같은 말이다. 국어사전에도 성가대는 “교회 등에서 성가를 부르기 위해서 조직된 합창대”라고 했고, 찬양대도 “남녀 기독교 신자로 조직된 합창대”로 둘 다 영어로도 ‘choirs’로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같은 듯 다른 용어이다.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성가와 성가대란? : 먼저 일반적으로 성가라는 용어는 범(凡) 종교적으로 사용하는 말로서 일반적인 음악과는 다른 거룩한 음악이란 뜻이다. 그래서 성가는 범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는 ‘종교음악’으로서 세속적인 노래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의 찬불가는 불교의 성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 용어가 전혀 언급이 없다. 오직 찬양 혹은 찬송으로 표현되어 있다. 2. 찬양과 찬양대란? : 찬양이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으로서 참된 경건의 중요한 요소이다. 즉 찬양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성육신과 십자가 지심과 부활, 종말과 재림 등의 구속의 은혜를 노래하는 것이 찬양이고 또 함께 부르는 것이 찬양대인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가진 찬양은 개역성경에는 213회, 찬송은 98회, 찬미는 14회가 나온다. 하지만 성가란 말은 한 곳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찬양은 일반 종교의 성가와는 차원이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만을 높이는 노래인 것이다. 3. 성가와 성가대란 말을 교회에서 사용해 온 이유는? : 왜 성경에도 없는 이 용어를 그동안 교회에서 사용해 왔을까? 그 이유는 1976년에 나온 공동 번역 성경에서 개역성경의 “노래하는 자”, “성가대”로 12회에 걸쳐 번역을 했다. 또 하나의 성가대란 용어의 기원은 한 출판사가 흑인 영가의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곡집”이라 부른 것이 성가대의 이름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의 ‘세이까다이’(성가대 せいかたい, 일본 사람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며 노래할 때 쓰는 용어)가 직수입되면서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서 그동안 찬양대라고 했던 용어가 성가대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성가대란 말은 일본어의 잔재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가대란 말은 1958년 출판된 동아출판사 사전에도 성가대란 명칭이 없었으나 1994년 민중서관의 국어사전에서 처음 등재되었고 그 이전에는 성가대라는 말이 고정되어 사용되는 곳은 일본의 ‘세이까다이’뿐이었다. III. 결론과 제언 앞서 서론에서 밝힌 대로 성가대와 찬앙대라는 말은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동안 큰 문제 없이 사용해 왔기 때문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성경에도 없는 말이며, 일본어의 잔재라는 문제도 있다고 볼 때, 또한 타 종교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굳이 성가대란 말을 계속 사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성경에도 없는 성가나 성가대란 말보다는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사용해 왔던 찬양, 찬양대란 우리 고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올바른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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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성경의 큰 그림과 안식(1)
1)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창조되었다(창1:26~28).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일 때 가장 행복하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안식한다. 사람은 창조 되자마자 안식을 살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함께 안식하시려고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을 완벽하게 창조하셨다. 완벽이 무엇인가? 완벽하다는 말이 단순하게 세상을 좋고, 아름답게 창조했다는 말로만 보아선 안 된다. 물론 그런 뜻도 있다. 그러나 완벽하게 창조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상태를 말한다. 비 인격체인 피조물이 완벽할 수 있는 것은 인격체인 사람이 완벽할 때 완벽할 수 있다. 모든 피조물들이 사람의 손에 주어졌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하나님과 동일시 될 때 완벽하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하게 세상을 창조하셨다.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였고 완벽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로 완벽했다. 그래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 되게 하신 일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 될 때 완벽하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임마누엘을 이루시는 날 우리는 하나 되었다. 완벽 해졌다. 회복된 날이다. 하나님의 완전함 같이 우리도 완전해졌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고 하셨다. 안식을 말한다. 완전함을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임을 알 때 완전하다. 또 이것이 행복이고 안식이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 이것을 보고 안식의 삶이라고 한다. 완벽하기 때문에 더 이상 무엇을 보텔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안식은 피곤해서 안식하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어 안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고 완벽하기에 안식이다. 점이라도 하나 더 찍으면 작품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붓을 놓는 화가처럼 완벽하고 부족함이 없어 쉬시는 것이 안식이다. 사람은 창조되자말자 안식을 살았었다. 보기에 심히 좋았다. 하나님은 인간을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당연히 모든 피조물도 완전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가 하나님의 첫 번째 그림이다. 하나님의 큰 그림은 안식이었다. 2) 사단에게 속아 안식을 잃었다 사람은 사단에게 속아 합법적인 하나님과의 분리가 일어나 버렸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완전함이고, 안식인데 안식을 잃어버린 것이다. 마귀에게 속아서 신적 통치권을 빼앗겨 버렸다.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함으로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는 말씀대로 되었다. 그 결과 안식, 즉 임마누엘의 완벽함을 잃어 버렸다. 마귀도 언제나 말을 먼저 먹인다. 마지막 때도 마귀의 주된 일이 말을 먹이는 일을 한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계12:15)라고 했다. 여자인 교회를 말인 물로 떠내려 보내려 한다. 뱀인 마귀는 입에서 물을 토하는 것이다. 다른 복음을 많이 토한다. 다른 복음은 없다. 하늘의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갈1:8). 마귀는 다른 말을 토해 냄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큰 그림인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은 안식이다.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보아야하는데 보지 못하게 다른 말을 넣는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고 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의 그림인 안식이 없으면 두렵다. 안식을 보지 못하는 자의 모습이다. 안식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내가 다른 복음을 먹었습니다."라고 스스로 확증한다. 스스로 벗었다고, 두렵다고 고백한다. 그전에도 벗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누가 너에게 벗었다고 알려줬느냐"고 물으신다. “누가 그런 말을 해 주더냐”라는 뜻이다. “네가 무엇인가 스스로 입어야 한다고 누가 말 하더냐”는 질문이다. 지금도 사단은 우리가 예수 외에도 무엇을 입어야 한다고 속삭인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왜 따먹었느냐?"라고하시지 않고 "누가 벗었다는 것을 알려줬느냐?"라고 물으셨다. 말의 권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 주는 순간이다. 사단의 속임수는 다 말로부터 온다.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말을 들으면 보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큰 그림이 보인다. 사단의 말을 들으면 벌거벗음이 보이게 된다. 두려움을 보게 되고, 두려워 숨게 된다. 주님이 입혀 주신 것 외에 뭔가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엔 온전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하는가? 말이 온전하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고 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욕도 안해야하고,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욕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말이 온전하려면 복음을 말하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이다. 복음을 말하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우리도 온전할 수 있다. 온전한 말을 하면 아버지의 일인 안식을 보게 된다. 우리에게 너무나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한다. 너무 아까운 세월을, 아까운 인생을, 남의 이야기하다가 다 보낸다. 비판과 불평불만만 하다가 시간을 다 보낸다. 안식이 있을 리가 없다. 사단은 말로 우리를 속였고 속이고 있다. 안식은 우리의 믿음의 말에서 온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10:10). 마귀에게 속아 안식을 잃어버린 것은 말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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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희생
우리는 봄이 오면 마음이 들떠 어디론가 꽃구경을 가기를 원하고, 늘 가는 곳이라 할지라도 봄꽃이 핀 곳이면 가족들이 나들이하는 경우가 많다. 4월 초순에 비가 오는 산복도로를 거쳐 교회에 가는 도중에 아름답게 피어있는 벚꽃을 바라보는 순간 “아! 이렇게 아름답게 핀 꽃을 비바람이 망치면 어떻게 하지?”하는 걱정이 앞선다. 내 집 정원의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거워할 수 있는 벚꽃을 비바람 때문에 망치게 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통상 벚꽃은 일본의 나라꽃이라 생각하고 별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은데 실상은 원산지가 우리나라 제주도라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나라의 꽃이니까 더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라 믿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잎도 피우지 않고 살얼음이 언 메마른 땅속에서 뿌리를 내려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한겨울 내내 자기의 몸을 단단히 무장하여 정한 시간에 꽃을 피우는 식물이 바로 벚꽃이라는 데서 관심이 더 가고 피어있는 그 자체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가정집 정원에 있는 꽃나무들은 그래도 춥다고 싸주기도 하고 거름도 하며 옮겨주기도 하고 가지치기도 하지만 벚꽃은 차가 많이 다니는 길가나 산 중에서 전혀 무관심 속에 홀로 자립하여 이른 봄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 너무 장하고 아름다울 뿐이다. 꽃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수 있는 시간은 겨우 일주일도 안 되기에 항상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렇게 고생하여 잠간 동안을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선사하기 위해 정말 희생한 벚꽃의 수명이 좀 오래 지속 되면 얼마나 좋으랴. 게다가 벚꽃이 질 때에도 벚 눈을 내려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아무 불평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따뜻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마치 눈이 오는듯한 모습으로 꽃눈이 낙화한다. 그것이 바로 자연적인 아름다움의 자체가 아닐까? 흰 꽃잎이 떨어진 것은 분명히 하얀색인데 바람이 불어 모인 블럭 바닥은 분홍색 꽃눈으로 소복하게 쌓인다. 눈은 밟으면 ‘뽀드득’이란 소리라도 내지만 떨어진 꽃눈은 아무리 밟아도 소리를 내지 않고 인간의 발과 자동차의 바퀴에 짓밟히며 휘날릴 뿐이다. 오직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순종하여 이렇게 끝까지 희생하는 것이 바로 벚꽃이라는 것에 나는 감동을 받는다. 우리 주위에도 다른 사람의 아무런 도움이 없이 주님이 말씀하신 일들을 잘 수행하여 사회에 귀감이 된 아름다운 모습이 매스컴에 등장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분들은 오직 자기에게 주어진 미션을 좌우를 살피지 않고 오직 앞만 바라보고 나아갔기 때문에 큰일을 해내었을 것이다. 한낱 미물과 같은 식물도 말없이 자기를 희생하고 아름다움을 선물하는데 우리가 기대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지 못하면 실망하고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벚꽃은 자기의 아름다움을 봄꽃으로 인간인 우리에게 잠간 보여주기 위해 동한의 춥고 쓰라린 고통을 다 견뎌내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변함없이 희생한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믿음의 형제들과 이웃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정말 벚꽃처럼 나를 희생하고 말없이 맡겨진 일을 수행하는 데 최선을 다하면 우리가 사는 곳이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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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저축할 내용 (창41:46-57)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에 보도 된 내용에 의하면, <영국 교육과정평가원>이 새로운 아동 교육개혁 방안을 발표 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11세-16세까지 중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금융교육을 학교 정규 과목으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수학을 배우고 과학을 배우는 것처럼 이 수업을 통해서 스스로 부채를 관리하는 것을 배우고,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 연금 계획 짜는 것을 배우고, 금리를 계산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는 9월부터는 모든 <영국>의 5세 된 아동들에게는 정부로부터 250파운드가 지원 되어서 자신의 펀드를 개설하게 된다고 합니다. 일반 가정의 아동들에게는 250파운드(약$500)의 펀드 자금이 지원되고 저소득층 아동들에게는 500파운드의 펀드 자금이 지원된다고 합니다. <영국>정부가 이렇게 어린 아이들에게 조기금융교육을 실시하는 까닭은 매년 해마다 개인 파산 신청자들이 늘어나는데 대한 대처 방안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사람이 일찍 돈을 알면 좋지 않다고 해서 어린아이들에게 돈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돈을 가르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돈의 가치를 알게 해야 하고, 올바르게 돈 버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고, 올바르게 돈을 저축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보다 더 안정된 내일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안정된 내일을 사는데 있어서 저축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 가운데 꼭 저축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많이 저축할수록 보다 나은 내일을 보장해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저축해야 할 것들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물질을 저축해야 합니다.(창41:46-57) 둘째로, 기도를 저축해야 합니다.(시32:6-7) 셋째로, 선행을 저축해야 합니다.(딤전6:17-19) 필요하고 좋은 것들을 많이 저축해서 오늘 보다 내일이 더 안정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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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해녀의 욕심
‘물숨’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제주 출신의 고희영 감독이 7년 동안 제주도 우도(牛島)의 해녀들과 함께 지내면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잘 몰랐던 해녀들의 삶을 속속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해녀들에게는 계급이 있습니다. 제일 높은 계급인 상군은 가장 깊은 바다까지 들어가서 작업을 합니다. 보통 15-20미터의 바다까지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중군이고, 맨 마지막 하군은 일명 똥군이라고도 부르는데, 2미터 이하의 바다에서만 작업을 합니다. 그 해녀들의 계급은 노력과 경험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자신의 숨 길이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바로 그 숨길이로 계급이 정해진다고 합니다. 이렇듯 상군, 중군, 하군 이라는 계급에 따라 해녀들이 작업하는 바다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하지만 모든 해녀들이 바다에 들어갈 때마다 동일하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물숨’입니다. 물숨은 바다 밖에서 숨을 쉬는 것과는 달리 바다 밑에서 들이마시는 숨을 의미합니다. 이 물숨은 해녀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아주 무서운 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에 한 두 명의 해녀가 물숨을 먹고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물숨은 다른 말로 하자면 욕심입니다. 자신의 숨 길이만큼 숨을 참으면서 작업을 하던 해녀가 다시 숨을 쉬기 위해서 물 위로 올라가려 합니다. 이 때 저 밑에 큼지막한 전복이 해녀의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그 순간, 그것에 대한 욕심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전복을 따기 위하여 물 아래로 내려가는 해녀는 그 물숨을 먹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사고를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면서도 욕심을 이기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해녀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은 자신의 숨만큼만 해산물을 따서 재빨리 물 위로 나오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부질없는 욕심을 경계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러하기에 해녀들은 바다를 가리켜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다는 무서운 곳이지만, 욕심을 버리면 친정엄마처럼 다 내어 주는 곳이야!” 우리는 손안에 그 무언가를 움켜쥐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숨을 참으며 견뎌냈을까요? 우리 또한 욕심내지 않아야 할 것,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에 욕심을 내다가 물숨을 마시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장 14-15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만족하는 법을 모릅니다. 진짜 자신들에게 필요한 영적인 것에 대한 열망은 없이 사실은 지금 필요하지 않는 것들을 위해서 더 더를 외치며 욕심에 사로잡혀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에든지 욕심을 품는 순간 불행이 시작됩니다. 욕심이 많을수록 불만이 많아지고 마귀의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욕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죄에 가장 약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욕심은 하나님께도 응답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다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에 응답하시지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여서 기도 응답에 대해서 의심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야고보서 4장 3절에서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의 기도는 좋아도 너희의 욕심은 싫다, 나는 결코 너희의 욕심에는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욕심을 내고 또 내지만 사실은 욕심으로 인해서 인간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서 이미 내게 주신 것에 자족하는 데 있고, 그 자족에서 진정한 감사가 나오고, 그 감사로 인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제 헛된 욕심의 물숨을 버리고 자족과 감사의 바른 숨을 쉬면서 진정한 행복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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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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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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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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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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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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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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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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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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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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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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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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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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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인의 용어 사용(28)
- I. 서언(序言) 유대인들에게는 지켜야 할 많은 전통적인 절기들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지키는 절기는 무교병의 절기라고도 하는 유월절과 맥추절(칠칠절)과 수장절(초막절)의 3대 절기이다. 이는 “매년 세 번 절기를 지키라”(출 23:14~17)는 말씀에 따른 것이다. 또한 새해의 개념을 포함한 나팔절과 죄를 속죄하는 속죄일, 오순절과 전멸의 위기에서 벗어난 일을 기념하는 부림절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유월절은 고난 주간 중의 십자가 지심과 유월절 만찬으로 이루어진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과 3일만의 부활과도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이에 유월절은 종려주일과 고난주간, 또한 부활주일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이에 본 호에서는 이러한 절기 중의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의 의미와 절기의 명칭에 대해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II.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의 고찰 기독교의 절기는 구약과 달리 성탄절과 1월 6일부터 8주 동안 지키는 현현절(epiphany),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로 시작하는 사순절과 그 일정 중에 포함된 종려주일과 고난주간, 그 뒤를 이은 부활절, 또한 오순절과 연관된 성령강림절, 맥추감사절과 추수감사절, 종교개혁주일 등의 많은 절기들이 있다. 이상의 절기들 중에서 종려주일과 고난 주간에 대한 의미와 명칭에 대해서 논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부활절을 1주일 앞둔 주일을 교회력으로 ‘종려주일(Palm Sunday)’라고 한다. 또한 그다음 월요일부터 성금요일을 지나 부활절 전날인 8일까지는 ‘고난주간(passion week)’라고 한다. 하지만 가장 애매모호하고 쉽게 간과하고 넘어가는 절기가 바로 종려주일이다. 필자의 경우도 종려주일이 되면 예배의 중심을 예루살렘 입성에 맞춘 성경본문과 말씀을 전할 것인가 아니면 고난당하신 주간에 맞출 것인가를 고민한다. 이에 종려주일의 의미와 유래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고난의 십자가 지시기 위해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이다. 이때 많은 이들이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맞이하면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환영했다. 이런 행위가 기념주일로 정해진 유래는 A.D 385년 에게리아(Egeria)의 순례집에 최초로 기록된 것으로 동로마교회에서 예루살렘에 직접 가서 예수님 때와 같이‘종려 행렬’을 행한데서 출발했다. 서로마 교회들의 경우는 6세기 경 스페인 의식서에 의하면, 축하 분위기가 아닌 애도의 분위기를 가짐으로서 고난주간의 의미를 담아서 행한 것으로 보여 진다. 그 이후 중세시대에는 예배를 드린 다음, 가까이의 교회까지 행진하는 종려주일 관습을 가졌다. 이때 성도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되새겼다. 또한 그 이후 가톨릭에서는 성례에 쓰이는 물건 등을 정해진 의식을 통해 성스러운 것으로 구별하는 축성(祝聖)의식을 행하면서 그 중에서 축성된 종려나무 가지는 귀신 추방이나 질병의 치유와 재앙을 막는 능력이 있다고 믿으면서 종려주일을 지키고 이를 행하기도 했다. III. 명칭과 구분과 결어 마지막으로 종려주일이란 명칭은 합당한가에 대한 의문을 가져본다. 왜냐하면 한글성경에는 종려나무로 번역됐지만 실제로는 대추야자 나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종려나무로 번역된 이유는 중국에서 자라는 ‘당종려나무’의 이름을 그대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서 종려주일이란 명칭보다 호산나 주일 등이 오히려 더 좋지 않을까도 고민해 볼 수 있지만, 전통적으로 종려주일이라고 해 왔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또 한 가지 애매모호한 일은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의 경계에 대한 것이다. 이는 서로 다른 교회의 전통으로 인한 것으로서 동·서로마 교회는 고난주간에 종려주일을 포함시켜 지키지만, 그리스 정교회는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을 분리해서 일요일은 종려주일, 월요일부터는 고난주간으로 지키고 있다. 우리 한국교회는 이런 두 계통의 전통에서 명확하게 개념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보니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을 분명하게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오늘은 이제 종려주일을 지나서 고난주간 속의 하루를 지내고 있다. 그 의미를 되새기면서 보다 경건한 자세로 주님의 십자가 지심을 가슴에 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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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인의 용어 사용(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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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인간 생명의 가치
- 요즘 각종 언론을 통한 보도 중에서도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 아픈 것은 인간의 고귀한 생명이 너무도 무참하게 희생되는 사건과 사고들이다.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인간 생명의 존엄성이 무참하게 짓밟히고 희생되고 있는데도 역사상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는 현대인들이 인간 생명의 가치에 이처럼 무감각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동식물을 포함해서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 소중한 최고의 가치다.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생명은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성경은 인간 생명의 가치를 특별히 강조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을 제물로 삼는 인신 제사를 철저히 금하고 벌하셨다. 대부분의 이방 종교는 역사상 어느 시점에서 인간 생명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종교 의식을 행했다. 켈트족(Celts)의 세 주요 신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인신 제사를 요구했다. 타라니스(Taranis)는 사람의 두개골을 도끼로 쳐서 불태우는 제사, 에수스(Esus)는 사람의 목을졸라 죽이는 제사, 테우타테스(Teutates)는 사람을 물에 빠뜨려 죽이는 희생 제사를 요구했다. 이러한 제사를 관장했던 드루이드(Druids)는 전쟁 포로들을 나무의 잔가지로 엮어 만든 우리에 가두고 산 채로 불태워 신들에게 제물로 바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노르웨이인들 또한 당시 편만해 있던 인신 제사 의식에 참여했는데, 아마도 가장 잘 기록된 것은 스웨덴의 웁살라 신전(Uppsala temple)에서 일어났던 제사 의식일 것이다. 그리스인과 로마인들도 그들의 초기 역사에서 인간 희생 제사 의식에 참여했다. 그리스 전설은 미케네(Mycenaean)시대에 행해졌던 수많은 인신 제사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플루타르코스(Plutarch)에 따르면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Salamis) 전투 직전인 페르시아 전쟁 당시 까지도 인간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제사 의식을 행했다. 로마인들은 일반적으로 인간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지는 않았지만, 공화정 시대에는 망령(죽은 자의 영혼)에게 인간을 제물로 바쳤다. 고고학자들은 로마의 성벽에 산 채로 묻힌 사람들을 포함하여, 이러한 희생자들 중 일부의 무덤을 발견했다. 로마인들은 어떤 경우에는 한 쌍의 희생자들을 산채로 묻었는데, 특히 로마가 칸나(Cannae)에서 한니발 장군에게 패배한 이후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 모든 경우에서 우리가 추론해 낼 수 있는 사실은 거의 동일하다. 신들(또는 망령)이 인간의 생명을 원했거나 아니면 적어도 인간 생명을 바치는 것을 가치 있게 여겼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들을 공경하거나 신의 비위를 맞추어 호의를 얻기 위해서 그 사회는 소모적일 수 있다고 간주되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완벽하게 적하고 정당한 행위였다는 사실이다. 로마 후기 공화정 제국 시대에 오면 이러한 관행은 대부분 사라지고, 로마인들은 켈트족을 계속해서 인간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야만인으로 여겼다. 그런데 로마인들이 더 이상 신이나 망령을 위해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고 해서 이들이 갑자기 인간의 생명을 중시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죽은 자를 장사하기 보다는 기리기 위해 사람들로 하여금 ‘경기 게임’에서 죽을 때까지 싸우게 하는 에트루리아 관습(Etruscan practice, 인신 제사의 또 다른 형태)을 채택하고 이것을 대중적인 오락의 한 형태로 바꾸었다. 검투사들의 시합(Gladiatorial matches)과 서커스의 광경은 경기장에서 싸우다 죽은 노예들의 피를 대가로 대중을 즐겁게 하고 후원자들의 명성을 높이는 인신 제사의 또 다른 형태였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로마 당국은 감히 자신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도전하는 사람들에 대해 비할 데 없이 잔인하게 행동했다. 고대의 사회 문화에서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는 가치를 혹 찾아 볼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본질적 가치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존재의 위계질서를 보는 관점 또는 세계관에 기초해 있다. 인간을 동물 위에 두는 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합리성 곧 이성적 능력이었다. 합리성은 그들을 정신의 세계, 즉 사상과 형상(form)의 세계에 더 가깝게 가도록 인도해 주는 능력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만큼 합리적이지는 않다. 그래서 동일한 인간 사이에도 자연스러운 위계질서가 있다고 보았다. 노예는 본질적으로 자유인 보다 열등한 존재로 여겨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를 동물보다 조금 나은 ‘살아있는 도구’(living tools)로 평가했다. 남성은 여성보다 본질적으로 더 합리적이며 육체적으로 “분명히” 우월하다고 믿었다. 남자들 중에도 어떤 사람들은 지적으로 더 유능하다고 인정을 받았고, 이 우월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회를 통제했다. 소위 철인-왕(Philosopher-kings) 계급은 플라톤의 이상 국가(Republic)에서 통치했고, 각 사람은 사회 질서 아래에 있는 계층 구조에서 자신의 능력에 따라 그 사회에서 적절한 위치를 부여 받았다. 부, 혈통, 권력이 누가 누구보다 우월한지를 결정하는 기준이었다. 실제로, 귀족(aristocracy)이라는 단어는 문자 그대로 “최상의 사람들에 의한 통치”를 의미한다. 나머지 시민들은 사회의 최하층에 있는 노예와 함께 그들의 부와 교육의 정도에 따라 등급이 매겨 졌다. 이방 사회의 이와 같은 비성경적인 인간관에 비추어 보면 성경이 인간의 가치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고 있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 현 미국Evangelia University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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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인간 생명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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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부활의 신앙 (고전15:50-58)
- 타종교에 비해서 기독교의 우월성은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신앙이 아니면 타종교와 별로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윤리적인 가르침이나 도덕적인 가르침에 있어서 별로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불교에도 나름대로 훌륭한 가르침이 있고 이슬람교에도 좋은 가르침이 있고 유교에도 유익한 가르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타종교보다 기독교가 우월한 것은 부활을 믿고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 가운데 끊임없는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 바로 WCC 문제입니다. WCC는 종교다원주의를 지향하는 단체이고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을 하고 동성애를 인정하고 공산주의를 인정하기 때문에 결코 인정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종교다원주의는 비성경적인 사상이고 비 복음적인 이념을 가진 단체이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그리스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를 믿는 자들은 반드시 부활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들의 죽음을 가리켜서 ‘잠잔다.’는 표현을 씁니다. 깊은 잠을 자다가 정한 시간이 되면 다시 깨어서 일어나는 것처럼 성도들은 죽더라도 예수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 부활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을 몸이 죽지 않을 몸으로 부활하고 썩을 몸이 썩지 않을 몸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성도들의 소망입니다. 우리가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고 환난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는 까닭은 장차 부활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고 부활신앙을 가진 자들이라며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첫째는,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살아야 합니다.(51) 둘째는 승리를 보장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57) 셋째는, 맡은 직분에 충성하며 살아야 합니다.(58) 그렇게 살다가 주님 재림하시는 날 부활의 영광에 참예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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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부활의 신앙 (고전15:5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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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세롯인 시몬(Simon's Behind Stories)-침묵의 사도
- 하나님 나라는 언약 공동체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사상이나 이념 공동체가 아닌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정치적인 성향이나 지리적인 감정, 세속적인 신분에 따라 언약을 배반하면 안 된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받았을 때 본토와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갔고, 후일 백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번제를 드리러 간 것도 언약에 기초한 삶이었다. 언약의 율법을 받은 모세는 말씀에 순종하여 지팡이를 내어 밀 때, 홍해가 갈라졌고 반석이 쪼개지며 구름기둥 불기둥의 역사가 일어났다. 바벨론 포로 시절 다니엘은 이방 왕궁에서도 하나님 앞에 뜻을 정하여 언약 중심으로 살았던 신실한 사람이었다. 침묵의 사도 시몬 그는 사도로 부름을 받았으나 한 마디의 말도 남기지 않았다. 본래 세롯이라는 열심당원은 말을 많이 하는 자들이 아니라 몸과 행동으로 자신들의 삶을 통해 보여 주는 실천자가들 이었다. 당시 로마 제국주의 식민지하에 살았던 애국운동을 하는 자들은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어떤 공동체에 몸을 담아 일할 수 없는 신분이었다. 이들은 제국이 지배하는 세속적인 세상 가치관에서는 버림받은 자들이었지만 예수 공동체는 그를 불러 주었다. 그는 말없이 섬기는 순종형 성도의 모델이었다. 우리는 복음서 구석구석에서 말 많은 무리들 가운데 말없이 침묵 속에서 외치는 무언의 메시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바울은 시몬 같은 자들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 1:27-28). 그는 말없이 주를 섬긴 침묵의 사도였다. 말 만 앞세우고 행함이 없는 자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삶을 살았던 자였다. 세인들은 아무도 세롯 같은 자를 주목하지 않는 심지어 목회자라도 그에 관한 설교를 하는 자들이 거의없다. 그러나 그는 12제자 중 가장 열성적으로 목숨을 걸고 주를 섬기고 따랐던 제자이다. 사실 예수님이 택한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면모를 보면, 정말 보잘 것 없고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은 다 예수님을 그 중심에 모시고 각자 주어진 사명을 다하여 이 땅에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웠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지극히 작은 밀알과 겨자씨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 모두 이 땅에 거룩한 씨 그루터기 같은 가나안인 시몬 같은 자가 되기를 바란다. 순교의 제물 된 시몬 그는 주님이 승천한 후 선교하다가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갈릴리 가나 사람으로 열심당원인 셀롯 시몬은 주님의 승천하신 후 바로 배낭을 메고 선교지로 전도여행을 떠났다. 소아시아, 이집트, 영국 런던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후에 페르시아의 아스날에 도착한지 3일 만에 톱으로 허리가 잘려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주님이 승천 하신 후 가장 열성적으로 복음을 전한 사도 중의 한 사람이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난 후 3년간 고향 다소에 가서 침거 중에 있었다. 그때 셀롯 시몬은 전 세계를 돌며 복음의 터를 닦아 놓아 놓았다. 그가 닦아 둔 토양 위에 바울이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어쩌면 바울 사역의 터전을 셀롯 시몬 같은 자가 미리 닦아 놓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에서 줄 곧 침묵하고 있다. 그는 이름도 빛도 없이 아무런 영광도 없는 음지에서 묵묵히 주를 전하다 순교했다. 그 후 복음 전도에 관한 기록은 온통 베드로와 바울과 요한, 이 세 사람에게 집중되어 마치 기독교는 그들의 종교인 것처럼 보이고 있다. 사복음서나 서신서 어디에도 세롯 시몬의 기록은 없다. 그는 이같이 음지에서 진리와 빛을 전하다가 하나님이 부르신 선교의 현장에서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AD 61년경 잉글랜드의 카이스터 지역에서 로마인들에 의해 십자가형을 당하여 시신이 그 지역에 묻혔다고 한다. 그는 살았을 때도 말없이 주를 섬겼던 것처럼 그의 죽음에 대하여도 아무런 증거를 남겨 놓지 않았다. 우리가 후일에 천국에 갔을 때 그의 침묵을 깨고 주안에서 아름다운 교제를 나눌 수 있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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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세롯인 시몬(Simon's Behind Stories)-침묵의 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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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리더십에 대하여(6)
- 세상을 알아야 한다. 리더는 세상을 떠나 살 수 없습니다.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명을 가진 자가 리더입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궁극적으로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삶이 영적 리더의 사명입니다. 리더는 세상의 상태, 문화를 알아야 합니다. 알아야 대처하게 됩니다. 세상은 유혹의 광장입니다. 죄와 유혹, 갈등, 싸움 등이 가득 찬 곳이 세상입니다. 세상은 변하고 불안합니다. 리더는 유행을 좇지 않고 말씀을 따라 리더십을 나타내야 합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죄에 빠지지 않아야 하고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리더가 세상에서 죄짓고 유혹에 넘어지면 리더십, 영력을 잃게 됩니다. 세상, 세계 복음화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자가 리더입니다. 자주 변하는 세상을 바라보아서는 안 되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 풍조에 끌려 다니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말세현상을 기억해야 합니다. 말세는 고통 하는 때입니다. 세상은 수많은 사고, 사건, 고난, 고통소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합니다. 말세는 사람들이 이기주의, 자기중심이 되어 살아갑니다. 리더는 남을 사랑하고, 이타심을 가져야 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기도해주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세상과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리더는 세상에서 담대해야 합니다. 고난 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세상에서 두려워 떨면 사단이 좋아합니다.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해야 합니다. 리더는 세상의 소리에 예민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가는 지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십니다. 하나님 안에 참 평안이 있습니다. 절제해야 한다 절제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리더는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조절해야 합니다. 마음관리 감정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리더가 절제하지 못하고 무엇에나 지나치면 문제가 일어납니다. 욕심, 음식, 사치하고 싶은 것 지나친 명예심 등을 절제해야 합니다. 균형을 잡아야 하는 것이 지혜이고 리더십 입니다. 분노의 감정, 혈기를 조절, 절제해야 합니다. 말을 많이 하고 싶은 것도 절제해야 합니다. 지나치게 은행 빚을 지는 것도 절제해야 합니다. 돈 쓰는 것도 절제해야 합니다. 지나치게 과다지출하면 문제가 일어납니다. 욕심이 많으면 절제가 되지 않습니다. 리더는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욕심을 조절하지 않으면 사고가 일어납니다. 무엇이든지 무리하거나 지나치면 힘든 일이 생기게 됩니다. 리더는 사심이 없고 욕심을 멀리하고 순수해야 합니다. 절제 한다는 것은 세상 것에 취하지 않고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영적 리더는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 것에 취하면 눈이 어두워지고 타락하기도 합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려면 리더는 깨어 기도하는 가운데 세상의 소금이 되어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리더는 절제의 미덕을 가져야 합니다. 절제의 모습을 통해 리더의 좋은 이미지를 만들게 됩니다. 리더가 중요하며 리더십이 중요합니다. 절제는 지혜요 지혜의 리더십입니다. 절제가 있어야 건강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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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리더십에 대하여(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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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고난주간을 경남에서 보낸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
- 헨리 데이비스는 한국에 온 호주의 첫 선교사이자 순교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그는 선교에 대한 간절한 마음으로 한국에 왔으나 선교의 뜻을 제대로 펴보지 못하고 순교함으로써 자신의 꿈은 꺾였지만 대신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가 한국선교를 강하게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고 그이 뒤를 이어 많은 선교사가 부산과 경남지역을 맡아 선교의 열매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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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고난주간을 경남에서 보낸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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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이단사이비가 급증한다는데···
- 2023년 고난주간이다.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내려오시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심으로 모든 것을 이루신 예수그리스도.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시간 한 주간을 우리는 고난주간으로 기념한다. 한 주간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고뇌와 묵상으로 예수당신과 함께해야 한다. 천국 복음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를 이해하는 길은 예수 십자가와 함께 하는 길이다. 천국에 가는 길은 결코 우리가 천국의 사람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고난주간 묵상하면서 오늘날 이단사이비 종교의 문제를 생각해 본다. 몇 주 전 교회서 이단세미나를 가졌다. 새로운 사실들에 아연실색했다. 그동안 많은 이단들이 나타나고 사라지고 하던 악순환의 상황이 그들의 실체였다. 그런데 최근 엄밀하게 대부분 교주를 숨기고 정통 교단의 가면을 쓰고 포교하던 신천지 등 이단들이 이제 교주를 메시아라 선포하고 노골적인 포교에 열광하고 있다. 우선 통계에 아연실색한다. 국내 이단을 섬기는 인구가 3백만이다. 내가 재림 예수라고 선포한 교주만 200명이라는 통계다. 가히 이단의 전성시대인가. 오늘날 사회 전반에 복음의 진리 싸움을 차치하고도 온갖 사회병리 현상을 초래하는 이단에 대한 심각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마태복음 24장에 예수님이 여러 경계의 말씀을 설파했다.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주의하라.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할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이단의 거짓 구원론에 수많은 사람들이 미혹되고 있을까. 고난 주간에 묵상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 이단의 가짜 메시아의 주장이다. 국내 200명에 이르는 재림 예수의 정체는 대부분 ‘단순 믿음’으로 현혹하는 구원의 장사 놀음 사기극이다. 영육의 연약한 심령에 접근, 지금 이 땅에 오신 재림 예수를 믿으면 모든 것을 해결 받는다는 둔갑된 감언이설에 불쌍한 양들이 무참히 당하고 있다. 두 번째는 단순 명료하게 포장된 구원교리의 설파에 넘어간다. 유월절 떡과 잔을 받음으로써 구원을 보장받고 이후 영원히 구원을 잃지 않는다는 단순한 가짜 교리가 인기(?)를 끌게 된다는 것. 여기서 우리는 다소 어려운 정통 교단의 구원 교리를 깊이 묵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이번 고난주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도의 깊이와 높이를 묵상해 보자. 먼저 우리가 섬기는 종교개혁 이후 십자가 구원의 교리는 신구약 성경 전체에 얼개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설교가들이 성경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복음을 전파하고 있다. 그런데 십자가 구원 교리가 어쩜 기도와 말씀 그리고 묵상의 신앙 속에서 은혜의 체험에서 확신하는 믿음의 길을 금방 찾기는 쉽지가 않다. ‘주 예수를 믿어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한 감옥에서 바울과 실라가 간수에게 전한 복음이다.(행16:31)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예수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복음의 기초 진리다. 그러나 이 믿음의 이해만으로 예수 구원을 깨닫고 믿을 수 있을까. 이단의 정형화(定型化)된 단순 교리를 넘어야 한다. 성경 속의 예수님이 세상의 우리들의 죄를 한탄하시고 당신이 직접 세상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십자가의 도를 이해해야 한다. 그 구원의 길을 선물하신 크고도 놀라운 은혜에 우리는 환희에 젖어 살아야한다.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우리 모두 죄악의 괴수들을 구원하는 길은 당신이 모두 죄를 짊어지는 방법밖에 없어 눈물 흘리시고 만왕의 왕이 십자가에 오르셨다. 그 믿음은 저항할 수 없이 만세전에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칼빈의 예정설) 그리고 믿음에서 믿음으로 구원받고 천국 백성이 되는 길이 십자가의 도(道)일 것이다.(롬1:17) 그리고 당신이 주신 그 믿음은 우리와 함께 가꾸어가는 현재진행의 믿음으로 당신을 기쁘게 하며 살아간다. 바로 천국 백성 성도의 삶이다. 심오(深奧)하고 심원(深源)한 주님의 뜻을 만끽하고 사유(思惟)하면서 기쁨으로 살아가는 구원 백성의 길을 고난 주간에 묵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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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이단사이비가 급증한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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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이스라엘, 튀르키예 성지순례기
- 마산동부교회 창립 50주년을 맞아 2022년 9월에 성지순례팀을 조직하고 교우들을 대상으로 팀원을 모집하여 10월에 32명을 확정하고 12월부터 수요예배후 1시간씩 8차례 이스라엘과 튀르키예의 순례 할 곳을 공부하였고 기도회를 통하여 은혜로 준비 하였다. 드디어 2023년 2월 20일(월) 오후 2시 교회 앞마당에서 출발기도와 단체 촬영후 출발하여 인천공항에 8시 도착 수속하고 가이드 선교사님의 안내로 2시 15분 터키항공으로 출국하여 이스탄불을 경유하여 텔아비브 벤구리온 공항에 21일 아침에 도착하여 현지 가이드 목사님을 만나서 첫 일정을 시작했다. 첫 순방지 가이샤라로 가게 되었는데 헤롯왕은 가이사랴 항구를 건축할 당시 황제 가이사 아우구투스의 이름을 따서 가이사랴로 명명했고 로마 총독부가 있었고 그 곳에서 본디오 빌라도라는 석판이 발견되어 빌라도 총독 관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기 전 여기에 머물러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그의 복음에 대한 열정과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 여정으로 갈멜산 엘리야 기념교회를 방문 했는데 많은 순례객들이 단체로 찬양하며 기도하는 모습에 주님을 섬기는 일에는 인종과 나라와 민족을 초월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기념교회 옥상에서 바라본 넓은 이스르엘 평원과 그 너머 스불론 땅과 므깃도 사마리아로 이어지는 산맥들을 보면서 성경의 지명들을 한꺼번에 보게되는 감격과 이 땅을 차지하기위해 치열하게 싸운 이유를 알것 같았다. 다음으로 므깃도 성채로 가서 말들을 훈련시킨 흔적들과 지하 우물 저장고를 보면서 이곳이 솔로몬 시대에 전략적 요충지였고 계시록의 아마겟돈이 이 지역임을 설명해 주었다. 다음은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전해준 나사렛 수태고지 기념교회를 방문하였고 세계 각국에서 보내온 성화 중 한복을 입은 마리아와 한글로 예수님을 경배하는 글을 보게 되고 원뿔모양의 천장에서 빛이 제단으로 비치면서 마리아의 잉태 사실을 암시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예수님이 첫 기적을 베푸신 가나 혼인 기념교회는 늦은 시각이어서 교회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문을 잡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며 하루를 마감했다. 22일 수요일 버스 안에서 기도로 일정을 시작하면서 성지순례 팀웍과 섬김과 사랑을 위하여 비밀기도 짝 마니또를 정했는데 한국에서 품은 기도짝에 대한 간증과 새로운 기도짝을 추첨하면서 서로를 많이 이해하고 교회 안에서 서로 서먹했던 관계를 해소 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을 가졌다. 바알을 위해 제단을 쌓았던 가이샤라 빌립보로 가서 당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한 흔적들을 보게 되었고 근처에 현재의 지명 바니야스로 명명된 바니야스 폭포를 보면서 헐몬산에서 지하로 물이 흘러 솟아나와 샘을 이루고 흐르는 현장에서 사막에 강을 내겠다는 말씀이 실감나게 다가 왔다. 근처에 예수님이 선포한 산상수훈을 기념한 팔복교회로 가게 되었고 교회 내부는 팔각형 모양으로 의자를 놓아 두었고 우리 일행 32명은 “심령이 가난한 자”시작하는 팔복 찬양을 감격해서 부르며 흘러 내리는 눈물을 주체 할 수 없었고 주위의 순례객들도 우리 찬양을 경건하게 듣는 참 은혜로운 시간 이었다. 여로보암 왕이 세운 우상이 있는 텔단으로 가서 그곳에서 발원하여 요단강으로 흐르는 물의 근원지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갈릴리 바다 근처 막달라 마리아가 살았던 마을에 있는 식당에서 베드로고기라 칭하는 생선튀김을 점심으로 먹고 갈릴리 바다에 손과 발을 담가보며 예수님이 수많은 무리에게 말씀을 전하시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오병이어 기념교회에서 모자이크에 빵이 4개만 그려져 있어서 1개가 어디 있는지 궁금했는데 가이드 목사님이 그 한 개는 예수님 자신을 가르키지 않았나 하시며 예수님 자신이 “나는 생명의 떡이다” 라고 하신 말씀을 상기 시켜 주었다. 근처 베드로 수위권 교회가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시나고그(유대인 회당)에 대한 설명을 듣고 유대인들이 회당을 중심으로 생활했음을 알게 되었고 베드로 장모가 살았던 집터위에 세워진 교회와 황금열쇠를 지닌 베드로 동상을 보면서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진면목을 보게 되었고 예수님의 사역이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많이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었다. 갈릴리 바다에서 배를 타고 국기 상기식과 애국가를 부르는데 옆 배에서도 스웨덴과 이탈리아 국기가 게양되는 것을 보며 다양한 나라에서 순례의 길을 동참하구나 하는 느낌을 안고 선상에서 드리는 수요 예배에 은혜와 감격이 넘쳤고 유창근 목사님의 설교가 예수님 당시 주님이 선포하시는 모습을 떠올리며 진정한 예배자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23일 목요일 맛사다로 향해 가는 길에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던 요단강 세례터에 들러서 손에 물을 적시며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맛사다는 히브리어 어근 자체가 요새라는 뜻을 가졌고 난공불락의 성채였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데 요새 아래에서 걸어서 올라가는 단체팀은 대부분 이스라엘 학생들로 역사공부겸 여행을 와서 조상들의 민족정신을 느끼는 현장학습의 연장으로 느껴졌다. 3단으로 된 헤롯궁과 물 저장 장치, 곡식 저장고등을 둘러보고 정상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니 로마군대가 쌓아놓은 토성의 흔적들이 군데군데 보여서 여기가 로마군의 공격을 피해서 마지막 항전을 한 곳임을 실감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쿰란으로 가서 구약성서 사본들이 집중해서 발견된 쿰란의 1~9동굴중 사본이 가장 많이 발견된 4동굴을 멀리서 보면서 발견된 사해 사본이 현재 사용되고 있는 성경과 완벽하게 일치하고 구약성서 전권이 900여 두루마리로 항아리 속에 보존되었고 에스더서만 빠져 있다는 내용도 듣게 되어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오묘하며 성경의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음을 현장에서 느꼈다. 예수님이 40일 금식후 시험 받았던 시험산에서 주님이 말씀으로 세 번 마귀를 물리친 현장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주님을 더욱 붙들어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근처 15분 거리에 있는 유대 광야를 걸으며 찬양하고 정상 계단에 모여 서쪽 노을을 바라보며 앞으로 순례일정과 두고 온 교회와 가정을 생각하며 기도하는 은혜의 시간을 가졌고 베들레헴 지역에 있는 숙소로 와서 1박을 하였다. 24일 금요일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 지역으로 나가는데 분리장벽이 7M 정도 높이 서 있고 검문검색이 까다로워 30분 이상 기다리며 휴전선이 분리장벽이 아닌가하는 우리의 현실을 생각해 보았다. 버스로 약 2시간 정도 이동해서 브엘세바로 가면서 드넓은 평원에 밀보리 밭을 보면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떠올리며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번제단 모형과 당시 주거지 형태가 남아 있는 현장을 둘러 보았다. 점심식사 후 차에서 잠깐내려 다윗과 골리앗이 싸운 엘라 골짜기 지형을 보며 와 닿는 것이 있었고 그 위쪽 소라땅과 소렉 골짜기, 단지파 땅들을 둘러보고 그곳에서 많이 자생하는 합환채 설명을 듣고 열매하나를 따서 목사님께 드리면서 출산 장려를 위해 설교 자료로 유용하게 사용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들의 목자교회와 보아스 광야를 거쳐 베들레헴 예수 탄생교회에 들어가서 예수님이 태어나신 동굴을 보았고 그곳에 아르메니아 정교회와 그리스 정교회가 각각 자리를 차지하여 기념하는 것이 이색적 이었다. 25일 토요일 예루살렘으로 가서 먼저 예수 승천교회를 방문 했는데 사순절 기간이라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고 감람산에서 황금돔이 있는 다윗성과 예루살렘 성전을 보며 사진으로만 보던 역사의 현장을 눈으로 그 실체를 보며 감격하였다. 주기도문 교회에 각국의 언어로 번역된 주기도문 비가 있고 우리는 한글로 된 주기도문 앞에서 주기도송을 부르며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시간을 가졌다. 힌놈의 골짜기를 내려다보고 겟세마네 벳바게의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기도하신 곳에서 합심해서 기도하고 베드로 통곡교회를 향하였다. 베다니 마가요한의 집터위에 세워진 교회 꼭대기에는 닭 모양의 형상이 표현되어 있었고 예수님이 안장된 곳에는 수많은 참배객이 기도하고 예배하고 있으며 빌라도 법정에서 출발하여 비아돌로사 14 지점을 순례하며 십자가를 지시고 힘들게 걸어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묵상 하였다. 오늘 일정 마지막으로 유대인의 성지인 통곡의 벽으로 가서 저들이 진지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두루마리 성경을 열어서 낭송하고 다시 닫아 벽장 속에 넣는 경건한 의식을 통해 구약시대 제사장들도 저렇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 해 보았다. 그곳에서 조금 내려와 Dong Door(분문)가 있어 성경에서 읽은 분문을 직접 보고 신기해 했다. 26일 주일 아침 일찍 이스탄불 시내를 통과해서 보스포러스 해협의 두 다리를 지나 아시아 지역과 유럽 지역을 둘러보고 근처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선상에서 주일예배를 드리며 순례길에 참여한 이유와 목적을 되새기게 되었다. 성소피아 성당으로 들어가는 길에 줄이 길어 한참을 기다리고 전에는 박물관으로 사용 되었는데 현재는 모슬렘 예배처소로 사용되고 있었서 많은 부분이 가려져 있고 제한되어 있어 안타까웠다. 점심식사를 하고 이스탄불 공항으로 가서 카이세리행 비행기를 타고 다시 버스로 갑바도기아로 이동하였고 순례일행중 생일을 맞은 세분을 위해 생일파티를 열어주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하였다. 27일 월요일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갑바도기아 괴뢰메 동굴을 지프를 타고 가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형성해 놓은 동굴교회와 주거형태 생활 모습을 보았고 파사바계곡의 수많은 동굴 거주지와 교회를 보면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많은 고난과 위험을 감내하면서 생활했던 모습에 숙연함을 느꼈다. 데린구유는 지하7층까지 미로처럼 만들어 놓고 그곳에서 환란과 핍박을 피하여 신앙의 정조를 지킨 믿음의 선배들의 살아있는 숨결을 느끼며 통성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28일 화요일 호텔을 출발하여 버스로 2시간 거리에 있는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가서 바울 기념교회를 둘러보고 눈 덮인 설산과 호수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에서 사진을 찍으며 잠깐 숨고르기를 하였고 점심식사 후 라오디게아교회를 둘러보고 근처 히에라폴리스로 가서 드넓은 유적지를 살피고 언덕위에 있는 빌립 기념교회에서 묵상하였고 조금 지쳐 있지만 다시 힘을 내어 파묵칼레로 가서 따뜻한 온천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서 여행의 피로를 풀고 회복하는 시간을 가졌다. 3월1일 수요일 버스 안에서 찬양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주택가에 거대한 돌기둥 세 개만 남아있는 빌라델비아교회를 방문하니 입구에 사도요한 기념교회라는 표지석이 있었다.사데지역으로 가서 사데교회의 흔적을 보고 가이드 목사님이 초대 일곱교회 중에 책망받은 교회 지역은 폐허가 되었는데 칭찬받은 두 교회 서머나와 빌라델비아 지역은 번성하다고 설명 하였다. 누가의 무덤 터를 둘러보고 빌립기념교회와 히에라볼리에 있는 사도요한 무덤교회를 들리고 에베소에 있는 셀수스 도서관 거쳐 원형 경기장에서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이동환 가이드 선교사가 중후한 목소리로 찬양 할 때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광대하심에 전율을 느꼈다. 3월2일 목요일 튀르키예에서 마지막 일정을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님 크신 은혜”로 찬양하면서 시작하고 초대교회 어렵게 신앙생활을 했던 두아디라교회를 방문하고 버가모(버가마)교회터 위에서 한국교회가 처한 현실을 상기 해 보았다. 갑바도기아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장시간 이동하여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 선상 근처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이스탄불공항으로 이동하여 새벽 2시25분 출발하여 인천공항에 3일 오후6시30분에 도착하여 버스로 마산에 내려오니 4일 새벽 1시 정도 되었다. 마중 나온 가족과 성도들을 만나 긴 여정의 일정을 모두 마무리 하였다. 11박 12일의 순례를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새삼 느끼게 되었고 성경의 역사와 지명들을 알고 느끼고 체험하면서 큰 은혜와 감동의 시간이었슴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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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이스라엘, 튀르키예 성지순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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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사순절
- 사순절 천주교와 정교회에서 사순절이라는 절기를 지킵니다. 우리 개신교는 사순절을 지키지 않습니다. 구지 그 이유를 찾으라면 사순절은 성경에서 행하라고 가르치는 절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교회가 지키라고 가르치지 않는 절기들을 우리는 이미 많이 지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지키라고 하시는 절기들이 많으나 사실 신약성경에서 교회가 꼭 지켜야 한다고 하는 것은 오직 성례뿐입니다. 세례와 성찬 외에는 신약성경이 지켜야 된다고 가르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키는 부활절과 성탄절도 성경이 지키라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부활절과 성탄절을 예수님의 대한 아주 중요한 날들로 기념하며 지키고 있습니다. 그럼 왜 우리는 부활절과 성탄절과 같은 절기는 지키되 사순절은 지키지 않게 되었습니까? 그 이유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은 천주교에서부터 분리하고, 잘못되고 왜곡된 가르침으로부터 분리한 것입니다. 사순절을 오늘 지키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그 절기가 천주교 냄새가 너무 많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사순절에 대한 간단한 역사와 그 뒤에 있는 의미에 대하여 살펴봄으로 사순절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사순절은 먼저, 천주교나 정교회나 개신교라는 분열이 있기도 전에 초대교회가 지키던 절기였습니다. 교부들의 글들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아주 오래된 절기입니다. 사순절을 지키는 방법은 부활절을 앞두고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합니다.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금식기도 하시며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이기셨다는 이유에서 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금식기도하신 것을 근거하여 부활절이 되기 40일 전에 금식기도를 하는 절기가 사순절입니다. 사순절의 의도는 참 좋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사역 핵심이 십자가와 부활이기에 그것을 기억하고 표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을 표시하는 40일 금식이 부활절로 마무리가 되는 사순절은 그 속에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이 구속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왜 개신교는 이렇게 좋은 의미를 담은 사순절을 더이상 지키지 않습니까? 그것은 시대가 지나면서, 사순절이 신명기의 말씀으로 돌아가, 구약의 말씀으로 돌아가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지 못하며, 율법주의와 기복신앙에 사로잡힌 절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본문을 보시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40일을 광야에서 금식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40일 금식기도 하시면서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생활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신8:2-3)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얻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시험하신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사는지 시험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시험을 통과하면 어떠한 축복이 주어집니까? 4절부터 그 시험을 통과하면 주어지는 축복이 기록됩니다. 끝에 10절에는 이렇게 기록됩니다. (신8:10)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하나님의 광야시험을 통과하는 자에게 옥토를 주신다고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의 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니 성경은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결과가 부활이듯이, 십자가와 부활의 결과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옥토입니다. 사순절을 지키는 초대교회의 의도는 좋았지만, 시대가 흘러가면서 그 가르침이 참된 하늘의 옥토 즉,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하늘의 땅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옥토를 바라보고 세상의 형통함을 원하게 되어 초대교회가 지켰던 사순절의 의미가 많이 변질되어갔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실 광야의 시험은 이스라엘이나 그 어떤 사람도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였습니다. 12 정탐꾼의 보고로 그들의 믿음과 신앙의 실체가 드러났고, 여호수와와 갈렙 외에 애굽에서 나온 모든 성인은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여호수와의 인도를 따라 약속의 땅에 들어갔고, 다윗을 통해 12지파를 통일하여 이스라엘이란 강대한 나라를 세웠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시험을 통과해야 옥토를 주신다고 했는데 왜 시험에 실패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허락하십니까?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였기에 그들이 차지한 땅은 하나님께서 의도한 참된 옥토가 아니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가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을 대표하는 모세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어 광야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40일 금식기도 하심으로 이스라엘이 실패한 광야시험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의 시험을 통과하시니, 그를 믿는 자는 그와 함께 하나님께서 의도한 참된 하늘의 옥토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이상 광야의 시험을 받지 않아도 됩니다. 혹 그 시험을 받는다고 해도 우리 가운데 그 시험을 극복하고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초대교회에 사순절은 예수님의 40일 금식을 기념하며 그의 부활을 간절하게 기다리는 절기였는데, 시대가 지나면서 사순절은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광야의 시험을 스스로 자신의 욕심으로 차지하려고 하는 절기가 되었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구약의 율법주의와 기복신앙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변질된 사순절은, 40일 금식기도 하면서, 예수님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행(?)으로 받게 될 복을 예수님보다 더 추구하게 된 것입니다. 사순절이 이렇게 변질되다보니 우리 개신교회는 더 이상 사순절을 지키지 않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솔직한 마음으로 개혁주의의 근본정신을 따라, 사순절의 본 의미를 되찾으면 좋겠습니다. 사순절을 지킴으로 예수님을 더 가까이 사랑하며 그와 함께 영적으로 동행하면 좋겠다는 믿음의 거룩한 욕심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금식하였으니, 우리도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여 온 교회가 함께 금식하며 부활을 기념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옥토를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시대는 사순절만 아니라, 부활절과 성탄절까지 변질되어 세상적인 이벤트가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과 멀어지는 세상에 맞서 교회는 더더욱 예수님에게 가까이할 수 있도록 교회 문화를 발전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부활주일이 3주가 남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생활 속에 어떻게 그것을 기념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행위로 구원에 도달하는 것을 아니지만,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는지, 우리의 행동으로 사모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날 개신교회가 사순절을 지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초대교회의 신앙자체를 따라 예수님을 더욱더 가까이하는 생활에 노력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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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사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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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1)(창23:1)
-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1)(창23:1)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성도에게 가장 기본적이며 최고로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성경에서 우리의 구원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구원의 책입니다. 그래서 복음입니다. 복된 소식, 구원의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복은 궁극적으로 구원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의 여백 속에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어느 날 남편이 이사를 가자고 합니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모른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땅으로 갈 것이라고 합니다. 모험을 할 만한 나이도 아닙니다. 자신의 나이가 65세, 남편의 나이가 75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궁금해해야 하는 것 하나는 “어떻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는데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이 있었을까요? 아마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장면에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보신 분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다고 하면 오늘날도 그렇게 부름을 받아야 성경적이고, 전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충돌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이 질문에 대한 힌트와 숙제를 동시에 드려보겠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여호와의 신앙을 가르친 사람이 누구일까요? 아브라함 때에 노아가 살고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불러내시면서 여자의 후손이신 메시아(아들)에 대한 언약을 주셨습니다. 족장들의 사명은 생존입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까지 아들에 아들을 낳으면서 생존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최고로 중요한 사람이 아내입니다. 아들에 대한 사명이 과연 아브라함에게만 주어졌을까요? 아브라함이 대표이기에 아브라함을 언급하는 것이지 이 사명은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에게도 똑같이 주어진 언약입니다. 우리는 “씨 언약”이라고 하니 아브라함(남편)이 사라(아내)보다 더 중요할 것처럼 보기 쉽습니다. 그렇다면 여자의 후손이신 메시아께서는 씨(남편)로 오셨습니까? 자궁(아내)으로 오셨습니까? (마1:18)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1:23)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기가 찰 노릇입니다. 아브라함의 씨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선 다음에 살펴보도록 하십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창3:15의 복음을 갱신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약속의 땅에 큰 기근이 있어 애굽으로 이민을 가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기도하며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기 위하여 믿음의 약속을 합니다. “혹시 생명에 위협이 생기면 나는 당신을 오라버니라고 하고, 당신은 나를 누이라고 합시다.” 이런 결단과 약속은 남편으로서 또는 아내로서 죽는 것보다 힘든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씨 언약을 지키기 위해 실제로 희생과 아픔과 수고를 많이 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소원하고 바라는 것과는 전혀 관점이 다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아들을 낳는 것, 아들의 아들을 보는 것이 유일한 소망입니다. 남편 아브라함의 여정에 단 한 번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순종의 보상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는 일을 위해서라면 아내의 자리도 포기했습니다. 오직 하나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아들을 바라보면서 말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살았던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역시 성경입니다. 이 말씀 역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 역시 구원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 속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아들 하나만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희생하고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불가능한 상황 가운데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사라에게 유일한 소망은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사라에게 하나님께서 다른 것은 몰라도 주셔야 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아들의 아들입니다. 이것은 사라에게 최고의 소원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성취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최소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살았던 사라에게 손자의 손자는커녕 손자 정도는 보게 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손자가 아니라면 며느리라도 보게 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왜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이 결혼하는 것도 보지 못하고 죽게 하셨을까요? 왜 성경은 그렇게 필요해 보이지 않는 사라의 나이, 사라가 죽은 나이를 기록해서 우리를 안타깝게 할까요? 3년만 더 살려 주시면 며느리라도 보고 죽을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사라에게 이러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사라에게 이렇게 잔인하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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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1)(창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