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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⑹- 장두노미(藏頭露尾)
필자는 지난 ?월 ?일 모 신문에 총장 선임의 불법성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고신총회와 고려학원 이사회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반응이 없어도 되는 걸까요? 박영호 목사님이 총회장으로 있을 때모 신문에 나온 기사를 가지고 신문에 나온 사건이기에 조사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당시 총회 임원회의 강력한 의지와 결단에 따라 총회는 격론을 벌이고 투표까지 하여 조사위원회를 만들었던 전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도 그 결정의 정신을 존중하여 총회와 관련하여 신문 기사에 난 사건에 대해서 조사위원회를 만들든지, 아니면 운영위원회에서라도 살펴야 하는 것이 공정하지 않겠습니까? 자기편이면 덮고 다른 편이면 조사위원회를 만듭니까? 총회 임원회의 결정이 이렇게 사람에 따라 수시로 바뀌어도 괜찮은 겁니까? 다시 한번 이야기해 봅시다. 고신대 총장의 논문표절문제 아무 문제가 없습니까? 개인적으로 이사장이나 총장의 두터운 신뢰와 사랑을 받는 당사자 대해 그 대학이 공정하게 심사하리라 기대하지 않습니다.하지만 결과가 너무 느립니다. 이번에도 시간 끌기로 할 것 같습니다.“오래된 일이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등으로 적당히 넘기려고 할 것 같습니다. 어쨌든 결과를 지켜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사회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이사회가 바르게 하려고조속한 결론을 내자고 회의 한 일이 한번이라도 있습니까?어쩌면 이사회는 이 일에 대한 답변이 나오지 않길 기다리고 있을 것 같습니다. 고려학원은 이사들의 개인 전유물이 아닙니다. 고신총회 산하 성도들과 총회에서 파송한 이사들로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총회와 성도들의 뜻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그런 노력도 의지도 없다면 이사회는 직무유기입니다. 알고도 문제없다고 강행한 이사회에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이사회에 속한 목사들이 자신의 교회에서 설교할 때 그렇게 가르치고, 장로들은 대표 기도할 때 그런 자세로 기도하는지 궁금합니다. “주님, 이건 불법이지만 급한 불부터 끄고 봅시다.” 과연 이런 설교와 기도에 성도들이 얼마나 공감하며 은혜받을 것인지 심히 궁금합니다. 절차위반과 위조문서 정말 이래도 괜찮은 겁니까? 총회의 ‘절차위반, 문서위조’, 이런 일들이 아무런 죄의식 없이 받아들여지다니 참 신기합니다. 노회 구역조정 문제로 시끌벅적할 때 당회도 노회도 거치지 않는 괴문서를 총회장이 운운하는가 하면, 총회 서기가 임원회의 결정과는 다른 문서를 노회에 보내는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니 이사회도 그런 불법을 보고 배운 것이 아닙니까? 지난 73회 총회에서 고려학원 이사회가 총장 인선을 위한 고려학원 정관을 개정했습니다. 총장선임을 위해 ‘1차는 3분의 2 찬성을, 2차는 과반 찬성’으로 선임할 수 있도록 개정했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듯 이런 절차가 진행되려면 이사회에서 먼저 결정하고 수정안이 총회에 상정되어야 합니다.그런데 지난해 총회가 파한 후 3개월이 지난 12월 말에가서야이사회가 총회가 결정한 정관개정을 ‘추인’하는 형식으로 개정을했다 하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입니까? 정말 이래도 괜찮습니까? 이일을 누가 주도했으며 누가 진행했습니까? 반드시 책임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이런 짓은 절대 해서는 안 되며, 고신 총회와 500여 총대를 속인 일이고, 고려학원 이사회와 고신총회 산하 모든 교회와 성도들을 기만한 일입니다. 총장은 거짓과 불법으로 세움을 받았으니 주도 세력이 시키는 대로, 하라는 대로 하수인 역할을 톡톡히 잘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고신총회 산하 모든 교회와 성도들은 논문표절, 절차위반, 부정 정관개정 등,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이렇게 선임된 총장의 지도력이 서겠습니까? 정관개정도 불법이지만 불법적 개정안을 불법으로 총회에 상정 해서 총대를 속이고 총장을 선임했습니다. 총장 모집 공고를 낼 때의 법은 분명 3분의 2 이상으로 선임해야 한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공모를 보고 지원한 지원자들은 공고한 정관대로 선임해야 한다. 그런데공모한 후에정관을 ‘과반수’로 개정해서 뽑는 것은 누가 봐도 특혜입니다. 공모가 나갔다면, 공모한 정관대로, 기준대로 선임해야 합니다. 공모한 정관과 다른 정관을 만들어서 지원자 중에 총장을 선임한 것은 누가 봐도 특혜를 주기 위한 일종의 모략에 불과합니다.처음부터 과반수 개정된 정관으로 공모를 했다면, 더 많은 지원자가 있었을 것입니다. 3분의 2보다 과반수가 훨씬 당선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특정인에게 유리하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사람 아니면 안 된다는 우스꽝스러운 일을 이사회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부당하게 일사천리로 진행했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의 이런 행위에 대해 ‘선거운동의 의미와 금지되는 범위’와 관련한 대법원의 판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법원 2016. 8. 26. 선고 2015도11812 전원합의체 판결 [공직선거법위반, 정치자금법위반]’을 예를 들어 살펴봅시다. 이때 판시사항은 ‘선거운동의 의미와 금지되는 선거운동의 범위를 판단하는 기준’이며, 판결 요지 중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선거운동은 대상인 선거가 특정되는 것이 중요한 개념표지이므로 문제 된 행위가 특정 선거를 위한 것임이 인정되어야만 선거운동에 해당하는데, 행위 당시의 상황에서 특정 선거의 실시에 대한 예측이나 확정 여부, 행위의 시기와 특정 선거일 간의 시간적 간격, 행위의 내용과 당시의 상황, 행위자와 후보자의 관계 등 여러 객관적 사정을 종합하여 선거인의 관점에서 문제 된 행위가 특정 선거를 대상으로 하였는지를 합리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 “...특정한 선거를 목표로 하여 선거에서 특정인의 당선 또는 낙선을 도모하는 목적의사가 표시된 것으로 인정되지 않는 한 선거운동이라고 볼 것은 아니다.” “...특정 선거에서 특정인의 당선 또는 낙선을 도모하는 목적의사에 따라 행해진 것이라는 점이 당해 선거인의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인정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 세 가지 판결 요지에 따르면, 고려학원 이사회가 시도한 정관 개정은, ‘행위의 시기와 특정 선거일 간의 간격, 행위의 내용과 당시의 상황’ 등을 종합해 볼 때, 분명 ‘특정인의 당선’을 도모하는 ‘목적 의사’가 분명한 ‘선거운동’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사회는 총대들을 무지하게 보는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필자는 몇 차례에 걸쳐서 바르게 하자고 강력하게 호소하는데, 이사회나 총회 임원회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답을 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까? 잘못이 없으면 없다고 밝히고, 잘못이 있다면 용서를 구하고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안에서 이것이 다루어지고 해결책이 나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렇게 글로 표현하지만, 답이 없을 땐, 똥물을 뒤집어쓸 각오로 문제를 삼아도 저의 책임이 아님을 분명히 밝힙니다. 이후의 모든 책임은 그렇게 행한 당사자들에게 있음을 알립니다.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더 얹어봅시다. 월간고신과 기독교보에 발행인은 현직유지재단 이사장, 총회장이 맡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현 총회장은 어디를 가고, 전례 없는 전 총회장이 발행인을 계속하는가?외국인이라 안된다면, 이에 관해 아무 문제 없다는 사람들이나 당사자가 답할 차례입니다. ‘장두노미’(藏頭露尾)란 말이 있습니다. 중국 원나라의 문인 장가구가 지은 <점강진·번귀거래사>에 등장하는 이 말은 쫓기는 타조가 머리를 덤불 속에 숨기지만 꼬리는 미처 숨기지 못해 쩔쩔매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장두노미(藏頭露尾)는 “진실은 감춰도 언젠가는 밝혀 진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사회는 장두노미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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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6) (민12:1-3, 마5:5)
지면을 통하여 제가 목회하는 고신교회에 대해 잠깐 예로 언급함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고신교회도 세계를 교구로 선교하는 대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370 용사는 못되더라도 37 용사는 있어야 합니다. 고신교회 목회자로서 오늘까지 우리 고신교회의 선교를 돌아보면 고신교회 성도들이 다윗의 37 용사에 버금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교회 분열의 아픔과 담임목사, 부목사들이 면직을 당하는 일 앞에서도 선교를 중단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믿음의 의리가 있는 용사들이었습니다. 코로나19 기간에도 15개 정도의 교회를 필리핀과 네팔에 건축했습니다. 순간순간 어려움이 생겼을 때 구제하고 돌아본 것은 말할 수도 없이 많습니다. 지난해 상반기만 해도 우리 교회 선교비가 1억이 더 지출되었습니다. 경상비 전체 25-30%가 선교비로 지출되고 있습니다. 일단 빚을 내서라도 선교비는 지출하고 봅니다. 돈의 액수를 떠나서 선교를 바라보는 시각과 선교를 하는 실천에 우리 고신교회와 같은 교회가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고신교회 담임목사로서 우리 교회는 세계를 교구로 선교하는 일에 전 성도가 다윗의 37 용사와 같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얼마나 성도들을 좋아하겠습니까? 잘은 몰라도 고신교단 안에서 저만큼 성도들 좋아하는 목사 없을 겁니다. 하지만 바로 이 장면에서 목회자는 매우 위험한 신호를 감지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을 자기 자신보다 사랑하고 좋아해야 합니다. 하지만 목회자는 성도들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이 부분이 목회자가 감지할 줄 알아야 하는 위험한 신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가 하나님 외에 그 어느 것도 의지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눈곱만큼이라도 하나님 의지하는 것을 성도에게로 돌리고 기대를 거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목회자에게 즉각 응징하십니다. 그러니 목회자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성도들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 사이에서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절대로 타협하거나 양보해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로 하여금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십니다. 목회자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때, 성도들은 반드시 목회자의 37 용사가 되어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를 시도 때도 없이 풀무불 앞에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를 철저히 하나님만 의지하는 온유한 자로 만드시기 위하여 풀무불에 던져 넣으십니다. (욥23:10)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그 결과 목회자는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당한다 하더라도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그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온유한 자가 되어 순금같이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온유하게 된 목회자는 정금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리암이 아론과 70장로들을 규합하여 백성들을 선동합니다. 어느 정도 새가 결집 되니 미리암은 공개적으로 모세의 통치에 비방과 반역을 시도합니다. 아직 출애굽과 홍해를 건넌 감동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때 성경은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증언합니다. 악한 무리들이 거짓된 계획을 세워 공격했습니다. 무시무시한 공격 앞에 제자들과 함께했던 무리들은 다 떠나가 버렸습니다. 부인하며 저주까지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홀로 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거나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홀로 지시기도 힘든 십자가를 지시고 묵묵하게 끝까지 골고다로 가셨습니다. 목숨까지 위협하는 거짓된 계획으로 공격했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른말, 천국 복음을 전하시며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온유한 자를 완성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온유한 자의 완성을 이루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약속하신 대로 땅을, 약속의 땅을, 교회를 주셨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교회는 하나님께서 온유한 자에게 약속하신 최고의 복입니다. 어떻습니까? 나는 교회인 것 같습니까? 온유한 사람입니다. 이미 복 받은 사람입니다. 나는 교회가 아닌 것 같습니까? 온유한 사람 아닙니다. 교회와 한 몸 되지 못하고, 교회와 거리가 있는 사람은 온유한 사람도 아니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 복음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 모든 말을 듣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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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현령비현령(5) -전관예우(前官禮遇)
두런두런 둘러앉은 장로님들의 담소 가운데 20만 원짜리 봉투 하나면 “총회에서 발언해 줄 목사들 많다” 아니 “발언 안 할 사람 거의 없다”라는 말로 폭소가 터져 나옵니다. 참 검소한 고신 교단의 목사들입니다. 상임위나 특별국의 자리 하나면 평생 다져왔던 인간관계나 의리는 배설물처럼 여기는 결단력 있는 고신 교단의 목사들입니다. 이렇게 다루기 좋은 목사 장로이니 계파나 진영의 의도를 가지고 매관매직하면 오늘날 고신에 만연되어있는 계파와 진영의 골은 더욱 깊어질 것이 자명합니다. 아니 혹자는 이미 보수는 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보수를 만들어 개혁을 견제하고 균형을 맞추자고 주장합니다. 뼛속까지 개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총회 임원으로 만들어 죽어가는 보수를 살려야 한다고 평생 개혁에서 쌓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작금의 정치행태에 발맞추어 가능한 봉투가 되는 자리를 만들고, 그곳에서 천년만년 누리고 싶어 하는 형국입니다. 20만 원짜리 봉투와 자리의 맛을 봐 버린 소위 보수라는 자들은 아예 정치적인 의리와 명분은 상실되어버렸고, 보수라는 가면만 쓰고 있을 뿐 언제든지 개혁도 되고, 진보도 되어 그동안 누리던 봉투의 자리를 놓칠까 전전긍긍하며 그 신보수라는 새 배에 올라타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최근 들어 고신교단 내에 계파와 진영의 골이 더욱 깊어지고 커진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서울의 L 목사님께서 열변을 토하신 것처럼 총회 서기 출신 카르텔입니다. 총회 부회록 서기가 되기 전에 총회 준비를 위한 총회 서기부 MT라는 명목으로 그 해 부회록 서기 후보의 물망에 오르는 사람을 부부 동반 모임에 참여시킵니다. 그러니 총회 임원에 입성하기 위해서 그 계파 사람이 아니면 시작부터 불가능합니다. 지금 총회 서기부에 포진한 분들을 보십시오. 계파 색채가 엷고, 계파를 싫어하고, 보수성향이 있는 사람도 일단은 그 진영에 몸을 기대고 양다리를 걸쳐야 시작이 됩니다. 균형 있는 총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분명한 명분으로 다리만이라도 걸치고 시작했는데, 회록 서기를 지나면서 하체가 들어가고, 부서기를 지나면서 몸통이 들어가고, 서기가 되면 총회를 손에 쥐고, 서기를 마치면서 그 영향력은 한국교회로 확대됩니다. 사욕에 치우친 사람이 총회 임원, 특히 총회장이 되어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4년 동안 총회 서기부를 거치면서는 구석구석을 너무도 잘 알게 된 서기부 임원들이 총회장단이 되었을 때, 유익한 점보다 작금의 현상처럼 위험하고 무법천지가 될 위험성이 훨씬 높습니다. 소위 서기 카르텔이라는 것을 반드시 총회적으로 다루어 이 카르텔로 인한 계파와 진영을 넘어 안하무인의 정치로 흘러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서기부를 거치지 않아도 총회장단에 오를 정도의 사람이면, 이미 노회와 목회에 상당한 경험과 식견을 가진 분들로서 충분한 자질이 검증되었고, 사무총장 이하 직원들의 훌륭한 보좌가 있기에 1-2년의 총회장단 사명은 충분히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한국교회에서의 우리 교단의 몫이 있습니다. 교단의 위상을 생각해서 대부분이 총회장을 역임하신 분들이 이사로 가십니다. 총회 서기부를 마치고는 특별국이나 상임위에는 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고 총회 임원회에서 의논이 있었다지만 관례처럼 총회 서기를 마치면 총회를 잘 안다는 빌미로 감사국에 들어갑니다.(현재 감사국원 3명은 최근 총회 서기역임) 총회 감사국인지 총회 서기 지내신 분들의 친목회인지 구분이 안 될 지경입니다. 총회 감사국이 총회 서기부의 연장선 조직입니다. 총회 감사국은 별정직처럼 그 기능상 법적 전문가, 재정 전문가, 행정 전문가 정도는 배치해야 합니다. 차라리 총회를 잘 아는 서기부 출신들로 총회를 하나 만드시지요. 총회 총대로 나올 정도가 되면 기본적인 자격과 능력을 갖춘 분들인데, 총회 서기 출신들이 꼭 해야 한다는 논리는 총대들을 얼마나 무시하는 처사인지 총대들은 알아야 합니다. 총대들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당근 하나 던져주면 입을 다무는 총대들이니 무시당하는 줄도 모를 수 있습니다. 유일하게 서기를 마치고 임원회에서 의논한 대로 그 어느 상임위도, 틀별국도, 이사도 가지 않은 분이 고 신수인 총회장이십니다. 최근 총회 서기를 지낸 분 들 중 유일하게 보수진영의 고 신수인 총회장님께서 약속을 지켰습니다. 소위 개혁진영의 서기들은 단 한 명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너무 개혁을 잘하셔서 말입니다. 처음 시작할 땐 훌륭하셔서 선출되셨습니다. 그런데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니 자연스럽게 욕심이 생긴 것입니다. 여기엔 그 어떤 사람도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총회가 훌륭한 분들로 보호해야 할 책임도 있습니다. 총회장의 사역이 끝날 무렵 고 신수인 총회장님께서는 당신의 몫인 “CBS이사”를 제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당연히 총회장님께서 가셔야 교단 권위와 위상이 서게 된다고 고사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렇게 전달하여 CBS에서는 제가 이사로 갈 것 다 알고 전화까지 왔었습니다. 물론 개혁에 몸을 담았던 총회장 출신은 선배 총회장 출신 목사님의 이사 자리를 빼앗아서라도 반드시 그 자리에 갑니다. 말 그대로 개혁 정신이 투철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난 후 고 신 총회장님께로부터 “미안하다”고 하는 전화가 왔습니다.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너무 힘들게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원래 그 자리는 제자리가 아닙니다. 총회장님 자리니 총회장님 편하신 대로 하시라”고 대답했고, 현제 이사로 있는 당시 총회 서기가 고집을 부려 그 자리로 갔습니다. 사욕에 눈이 뒤집히면 세상이 말하는 윤리도 도덕도 질서도 없습니다. 현재 우리 고신총회가 한국교회에 파송하는 이사는 CBS, 성서 공회, 찬송가 공회, CTS, 군선교 위원회입니다. 현재 이사를 하고 있는 분들은 다 총회 임원 출신이고, 목사인 경우는 다 총회 서기 출신입니다. 고 신수인 총회장님을 분기점으로 해서 그동안 관례로 총회장을 역임했던 분들이 가던 이사를 총회 서기를 마치고 가는 아주 개혁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총회를 잘 아는 것을 넘어 총회 울타리 밖에 있는 이권도 잘 알게 된 것입니다. 총회장단이 갖는 위엄과 일반 목사와 비교할 수 없는 혜택에 눈이 멀어 목사의 정년까지 희생해 가며 자리에 오르고 “내 때만 망하지 않기를 소망”하면서 그동안 꿈꾸어 왔던 즐거움을 만끽하게 됩니다. 그럴 수도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그런 세월이 가는 동안 고신의 신앙과 정신은 오물통이 되어 썩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위기가 아니라고 했다가 집권을 하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위기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이 역시 진영논리로서 총대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하는 속임수입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책임을 고신의 교회들에게 떠넘기는 기가 찬 술수이지요. 그리고 뒤에서는 몇 년 세월을 통해 달인의 경지에 오른 실력으로 소위 봉투가 되는 일에는 탁월한 안목으로 몇 수를 내다보는 행보를 하게 됩니다. 총회 서기부는 총회 서기단 활동으로 총회 임원회 자리를 끝내야 합니다. 총회장단은 시대 시대마다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바라보며 영적으로 한국교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장자 고신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을 세워야 합니다. 총회가 평안하고 태평성대일 때는 농어촌에서 목회하시는 훌륭한 목사님도 총회장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고신이 위기라고 특별기도회를 하는 상황이라면 총회장 되기 위해 몇 해 동안 수천, 수억을 쓸 것이 아니라 총회장에 된 후 수억을 총회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인물을 총회장으로 세워야 합니다. 고신이 위기라고 기도회를 하면서, 1) 눈 감고 아웅 하지 말고 2) 순수한 교회들과 성도들의 주머니를 갈취하지 말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야 합니다. 또 이미 그 자리에 오르신 분이라 해도 위기의 총회를 위하여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분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정말 고신을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전관예우(前官禮遇)’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적 의미는 장관급 이상의 고위 관직에 있었던 사람에게, 퇴임 후에도 그의 공직에 대한 헌신을 기려 예의를 갖추어 존중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관리는 개인의 행복에 우선해서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재능과 노력을 바쳤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자세로 일한 관리가 퇴직했을 때 그를 예우함은 마땅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흔히 쓰이는 전관예우라는 말의 뜻은 본래의 뜻과는 거리가 멉니다. 가장 잘못된 사례가 법조계의 전관예우입니다. 전직 판사와 검사가 퇴직 후에 변호사가 된 사람을 현직 검사나 판사가 예우해 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변론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관(前官)이라는 이유로 유리한 결과를 얻는다는 것은 공정을 생명으로 하는 법정에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제 총회 감사국은 서기부 출신의 ‘전관예우’의 자리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러니 총회 피감 기관들을 공정하게 제대로 감사할 기능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전관예우 받았으니 밥값을 해야겠지요? 한 걸음 더 나아가 고신을 대표하는 한국교회의 자리도 서기부 출신의 “전관예우”의 자리로 자리매김해 버렸습니다. 당연히 사리사욕이 목구멍까지 차오릅니다. *묻고 싶습니다. 앞서 언급한 총회를 대표하여 파송하는 이사직에 어떤 근거로, 어떤 기준으로 파송하는지, 서기 출신이 총회를 대표할 자격이 있는 것인지, 총회 임원회는 총대들이 납득 할 수 있는 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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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5 : 성경에서의 용납과 용서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지나면서 주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믿음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데 먼저 감사를 드리면서 문득 그게 용서인가 용납인가? 두 단어는 같은 말인가 다른 말인가? 라는 용어적 의미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흔히들 많은 교인들은 이 두 단어를 구분 없이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찬송가 569장 3절에도‘흠이 많고 약한 우리를 용납하여 주시고’란 가사가 있다. 하지만 엄격히 보면 같은 듯 다른 말이다. 본 호에서는 그 차이점이 어떤지를 분석하여 논하고자 한다. II. 용납(容納)과 용서(容恕)의 단어 분석 1. 용납이란? : 헬라어로는 ‘아네레스’, 한자어로는 얼굴 용(容), 바칠 납(納)이다. 민중서관의 국어대사전에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남의 말이나 행동을 받아들임’, ‘어떤 물건이나 상황을 받아들임’이라 했고, 금성사 국어대사전에는 ‘부정적인 것을 그냥 받아들이거나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했다. 국문학 교수를 역임한 최태영 장로는 ‘교회용어 이대로 좋은가?’란 그의 저서에서 ‘이 용납은 허용(許容)과 거의 같은 뜻으로 부정적인 요소, 모자라는 점이 있지만, 그것을 탓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하며 받아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이를 우리 개신교적인 의미로 보면, ‘우리의 죄는 용납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시지 이를 긍정적으로 이를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용납하시는 분은 아니시다.’라고도 했다. 이상으로 볼 때 어떤 잘못이 있을 때는 그 일에 대한 회개 기도가 필요하며,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성경에서도 용납은 죄의 개념으로 표현되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면,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고후11:1).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 구나’(고후11: 19). ‘사랑가운데 서로 용납하라’(엡4:2)고 했다. 여기에서의 용납이란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용서가 아니라 상호 인간관계 속에서 상대방을 너그럽게 보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2. 용서란? : 헬라어로는 파레시스 로서 ‘놓아줌’, ‘해산’, ‘처벌의 보류’등의 뜻이 있고, 로마서 3:25절에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하여 지은 죄를 용서함’이란 뜻으로 말씀하고 있고 수많은 용서에 대한 말씀도 거의 동일하다. 한자어로는 얼굴 용(容), 용서할 서(恕)이며, 민중서관의 국어대사전에는 ‘지은 죄나 잘못한 일을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덮어줌’이라 했다. 이상으로 볼 때 성경적 의미나 각종 사전적 의미로 볼 때도 용서의 의미는 거의 동일하다. 이렇게 볼 때 용서란,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또 스스로 죄를 해결할 방법은 없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믿고 회개 기도할 때 비로소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용서는 상호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용납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는 믿음 안에서의 회개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용서인 것이다. III. 결론과 제언 서론에서 언급한 찬송가 569장 3절에 ‘흠이 많고 약한 우리를 용납하여 주시고’란 가사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면, 용서와 용납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어서 다소의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앞에서 논한 대로 실제로는 같은듯하나 다른 의미이다. 여기서는 용납이 아니라 용서로 표현함이 옳을 것이다. 이 두 단어 외에도 관용(寬容)(사전적 뜻: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이란 용어도 있다. 어쩌면 용납과 용서를 다 포함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고민과 염려가 되는 것은 이런 문자적인 구분을 지나치게 하다 보면, 문자적 율법주의에 빠져서 본질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항상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확한 의미를 알고 사용하는 것은 더 좋은 일이기 때문에 바로 알고 바로 사용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 용어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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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삶의 현실에 대한 인간의 태도
인생의 삶을 사는데 현실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그 태도가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태도(attitude)가 고도(altitude)를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비행기가 아래로 향하느냐 위로 향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고도가 결정되듯 사람이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 방향과 높이가 결정된다는 뜻이다. 누구나 높이 오르고 싶어 하지만 아무나 높이 오르는 것은 아니다. 오를 수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히말라야 고산족들은 양을 매매할 때 가파른 산비탈에 양을 놓아두고 살 사람과 팔 사람이 함께 지켜본다고 한다. 비탈 위로 풀을 뜯으러 올라가면 값이 비싸고, 비탈 아래로 내려가면 값이 싸진다고 한다. 그 이유는 위로 올라가려는 양은 현재 힘이 들더라도 넓은 산허리에 이르게 되지만, 아래로 내려가는 양은 현재 수월하나 협곡 바닥에 이르러서는 굶주려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신앙의 삶도 마찬가지다. 항상 높이 계신 주님을 바라보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오는 자가 있는가 하면 어려움이 있을 때 예루살렘을 떠나 내려가는 자들이 있다. 어려운 시기에 갈렙은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 믿음의 태도를 가졌던 사람이다. 그는 85세의 나이에도 아직도 정복되지 않은 가나안 땅에 잔류하고 있는 아낙 사람들이 사는 산악지대를 정복하고자 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곳에는 아낙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분명 함께 하실 것이니, 내가 반드시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수 14장 12절)” 갈렙의 신앙은 능동적 신앙의 삶이었다. 45년 전에도 다른 사람들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후퇴 반응을 보였지만 갈렙은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자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벌써 85세 고령인데도 여전히 적극적인 Next Vision 성취를 지향하며 살았던 것이다. 맥도널드 햄버거를 창업하기 전 레이 크록은, 53세 나이에 겨우 밀크쉐이크와 함께 30년 동안 종이컵을 파는 세일즈맨으로 반평생을 보냈다. 그래도 그는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던 그는 30년이라는 기나긴 밤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서 성공을 한 것이다. 인도의 벵골 호랑이는 먹이 사냥에서 사냥감을 잡는데 약 스무 번의 시도 끝에 한 번 성공한다고 한다. 그는 실패 앞에 포기가 아니라 도전의 태도를 가져 그 도전이 성공을 이루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한 번 실패하면 쉽게 단념하고 한탄한다. 잃은 것 때문에 원망하지 말고 지금 있는 것이 자산이 되어 다시 도약해야 한다. 열정을 가진 사람으로 다시 일어나면 되는 것이다. 슈베르트는 가난한 음악가였다. 31세로 죽을 때까지 방 한 칸 없었고, 그토록 필요한 피아노 한 대 없는 불우한 음악가였다. 어느 날 레스토랑에 앉아 있는데 악상이 떠올랐다. 그는 오선지를 찾았다. 친구가 레스토랑 메뉴판에 오선지를 그려주었다. 그것이 유명한 아베마리아 세레나데이다. 환경에 낙심할 필요 없다. 주위 시선에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다. 폭풍이 일어도 지구는 돌고 있는 것이다. 고난 속에 신앙의 열정을 가지고 가면 길이 열린다. 신앙의 열정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능력 주시고 그 능력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나니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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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자유의 축복 (요8:31-36)
1997년 북한의 권력서열 제3위(노동당 국제담당비서)였던 <황장엽>씨가 주중 한국 대사관을 통해서 우리나라로 망명을 했습니다. 그 망명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북한에는 그의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과 가족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나라로 망명함에 따라서 그의 가족들은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고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북한 권력층의 실세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남한으로 망명을 할 경우 남아 있는 가족들이 얼마나 비참해 지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남한으로 망명을 감행한 이유는 바로 체제의 자유를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고, 너무나 잘못되어 있는 북한의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어서였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렇게 무모한 망명을 한데 대해서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의 행동이 옳았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역사가 평가를 할 것입니다. 그의 행동을 통해서 우리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을 깨달을 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유의 소중함”입니다. 체제의 자유, 정치적인 자유는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억압이 있는 나라마다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 기꺼이 몸을 던지고, 민주화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유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자유의 소중함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억압 속에 사는 사람들은 자유의 소중함을 애타게 목말라 합니다. 그렇게 소중한 정치적인 자유보다 더 필요하고 소중한 자유가 있는데 바로 영적인 자유(신앙의 자유)입니다. 그 영적인 자유에 대해서 알아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유를 취하는 방법을 알아야합니다.(요8:32,36) 둘째는, 자유를 빼앗기지 않게 지켜야합니다.(갈2:4) 셋째는, 자유를 누리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갈5:13)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소중한 자유를 잘 지키고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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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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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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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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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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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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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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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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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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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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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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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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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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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평안하게 삽시다.(시122:1-9)
- 여러분이 만약 죽었다가 잠깐 다시 살아난다고 가정을 할 때,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 것입니까? 사람에 따라서 하는 말들이 다를 수 있을 것인데, 아마 살아생전에 가슴에 한이 맺혔던 말씀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자녀들에게 “제발 예수를 믿어라”고 하실 분도 있을 것이고, “제발 다투지 말고 화목하게 지내라”고 하실 분들도 있을 것이고, “아프지 말고 건강해라”고 하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을 때 자기를 따르던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두 번이나 연거푸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요20:19,21) 다른 하실 말씀이 참으로 많으셨을 법한데 평강을 말씀하신 것은 곧, 평소에 예수님께서 가장 원하셨던 것이 바로 평안과 평강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평안은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샬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평안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평안하기를 원하시는지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했습니다.(살후3:16)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우리가 평안을 누리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 날 사람들이 이 소중한 평안을 다 빼앗겨 버리고 불안하고 불편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평안이 가득해야 할 곳에 평안은 사라지고 대신 반목과 다툼과 불협화음이 가득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 너무나 흔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평강의 왕이셨던 것처럼, 그 분을 믿는 우리도 평안을 도모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영역 중에서 어떤 곳이 평안하기를 힘써야 할까요? 첫째로, 교회가 평안해야 합니다.(시122:6-7) 둘째로, 가정이 평안해야 합니다.(잠17:1, 21:9) 셋째로, 나라가 평안해야 합니다.(딤전2:1-4) 우리 모두 평안을 위해서 기도하고 평안을 도모하는 자들로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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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평안하게 삽시다.(시1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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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생수의 근원
- 예레미야서 1장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르셨다. 2장부터 25장까지를 12번의 설교로 분류할 수 있다. 26장은 12번의 설교를 마치니 “죽여라”라고 소리친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27장에서 “설교로 부족하구나. 시청각으로 보여 줄 것”을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예레미야가 나무 멍에를 메고 나갔더니 부러뜨려 버렸다. 그러니 부러뜨릴 수 없는 메고 나가라고 하신다. 28장이다. “쇠 멍에를 메고 나가라”고 하신 것이다. 이제 29장은 “편지를 써서 읽게 하라”고 하신다. 30장부터 33장까지는 약속하시며, 34장부터 52장은 인간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상태임을 상세히 보여 주고 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 왕 때부터 유다가 멸망한 후까지 사역한 선지자이다. 5번째 설교인 13장에서 유다 멸망의 원인을 “교만”이라고 지적을 하고 있다. 베 띠를 바위틈에 감추었다가 다시 가보라고 하신다. 다시 가보니 베 띠가 놀랍게도 완전히 썩어 있었다. 유다의 교만을 이렇게 썩게 하겠다고 하신다. 이때 “교만”이라는 단어를 짧은 구절 속에 4번 사용하신다(렘13장). 유다는 교만으로 인해 망했다. 무엇이 교만인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겠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 교만이다. 예레미야서를 좀 더 설명해 보겠다. 12번의 설교가 2장부터 25장 사이에 있는데 첫 번째 설교가 12번의 설교의 주제라고 볼 수 있다. 첫 설교를 하신 다음 하나님은 반복해서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성경은 많은 분량이 있는 것 같지만 단순한 임마누엘의 비밀을 반복하고 있다. 예수라는 말은 구원이라는 말인데, 구원이란 임마누엘이라고 나시기 전에 지어주신 이름으로 요약될 수 있다. 첫 설교는 예레미야 2장에 기록한다. 2장 13절을 12번의 설교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예레미야서의 핵심이라고 보면 좋다. 두 가지 악을 지적한다. 두 가지 악을 지적하지만, 결국 한가지라고 볼 수 있는데, 생수의 근원을 버리면 인간은 자연히 엉뚱한 웅덩이를 파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생수의 근원인 하나님을 버린다는 것이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라고 하셨다. 생수의 근원을 버려선 안 된다. 생수의 근원을 버린 것이 “교만”이라고 계속 지적하신다. 생수의 근원 되신 예수를 버리지 말아야 한다. 어떻게 버리지 않을 수 있는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에게 성취해 주신 모든 것을 믿음으로 그대로 믿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찾아오셔서 약속해 주시고 이미 이루신 것을 믿기만 하면 된다(렘11장). 이 약속을 깨뜨리게 되면, 바알을 섬기게 된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찾아오셨다. 세상을 사랑하셔서 오셨다. 누구든지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다른 것을 더 할 필요가 없다. 믿으면 된다. 약속을 잡으면 된다. 예수를 믿는 것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면 된다. 내가 무엇을 더 하려고 하는 것은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터진 웅덩이를 파는 것과 같다. 무조건 십자가의 은혜를 믿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의 약속을 깨뜨리지 않는 방법은 믿음이다. 내가 믿어 드리면 된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나는 말을 바꾸었다. “하나님 저는 생수의 강이 내 안에 있음을 믿습니다. 주님이 주신 생수의 강이 오늘도 흘러넘칩니다. 저는 생수를 마십니다. 정말 시원합니다.”라고 날마다 고백하며 산다. 또 나에게도 말한다. “성한아, 너는 샘물을 가진 놈이란다. 너는 오늘도 생수의 강이 흘러넘친단다. 너는 성령의 사람이란다. 성한아,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란다”라고 수십 번도 더 말해 주고 선포해 주며 행복해한다. 감격이 일어난다. 춤이 춰진다. 나 같은 자를 사랑해 주신 신랑이 좋다. 나의 사랑 신랑을 생각하면 자주 눈물이 난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신랑에게 감격을 눈물을 보이는 것을 아끼지 않는다. 나에게 늘 감격의 눈물이 있다. 지금도 나는 눈물을 흘리며 이 고백을 하고 있다. 왜 이렇게 눈물이 많은지, 눈물과 함께 콧물도 흐른다. 호주머니에도, 성경책에도 휴지를 늘 넣고 다닌다. 휴지가 없는 날은 곤란할 때가 많다. 옷마다 휴지가 많이 들어 있는 이유가 있다. 이렇게 감격으로 산다. 감사하다. 정말 감사하다.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나는 많이 울었다. 지금도 운다. 지금도 눈물이 흘러내려 뺨을 타고 떨어진다. 흐느껴 감격하며, 감사하며, 자주 우는 것이 습관이 된 것 같다. 내 사랑, 나의 신랑에게 감사하다. 내 안에는 사랑의 시가 있다. 당신의 언어로 충만함을 깨워라. “나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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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생수의 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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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용 돈
- 보통 말하는 용돈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돈으로 자기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을 말한다. 자기가 벌지 않아도 생기는 돈, 즉 불로소득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용돈은 주로 아직 어린 미성년자거나 경제적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적은 금액의 돈을 용돈이라 한다. 옛날 어렵던 시절에는 어릴 때 용돈을 받아 본 적이 없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요즘은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정기적으로 쓸 수 있는 용돈이나 학용품 살 돈을 준다. 어릴 때부터 용돈을 관리할 능력을 키우거나 독립심을 키우도록 교육적으로 용돈을 주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여자아이는 옷이나 장신구를 위해 사용하도록 용돈을 주거나 대학생 정도의 청년이면 교통비는 물론 교제비나 영화를 볼 수 있는 용돈을 주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다. 대학생 된 아이들이 방학 때가 되면 자기 힘으로 아르바이트 해서 자기 용돈과 학비까지도 벌어 쓸 뿐만 아니라 저축까지 하는 것은 정말 칭찬할만한 일이다. 옛날 형편이 어려울 때에 부모가 경제적 능력이 없는 자녀들에게 용돈을 주는 것은 진정 사랑을 베푸는 큰 은혜라 할 것이다. 부모님이 어렵게 벌어서 사용하라고 주신 용돈을 향토장학금이라 하여 신나게 썼던 기억이 난다면 정말 철없이 소비했다는 마음으로 부끄러워해야 한다. 진정 자녀가 성장하여 경제적인 능력을 가지게 되면 가난한 시절에 부모님이 사랑의 진액을 다 바쳐 우리에게 주신 용돈은 은총임을 기억하고 이제는 치사랑으로 약해진 어른들께 감사함을 담아 용돈이 역으로 이어지는 것이 마땅하다. 필자가 잘 알고 있는 친구 중에 자녀가 다 잘 성장하여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는 자녀결혼, 직장 문제나 손자를 걱정함이 없이 잘 살아가는 분이 있다. 항상 얼굴에는 기쁨으로 가득 차 감사함으로 늘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우리를 늘 편안하게 해 주는 분이다. 그런데 어느 날 파안대소하여 점심식사를 쏜다고 해서 나갔더니 큰아들이 아파트를 팔고 중도금 일부를 아버지에게 용돈이라 하면서 일금 일천만 원을 통장에 입금을 시켰다고 했다. 요즘 이런 자식을 찾아볼 수 없는데 보기 힘든 효도를 실천한 참 귀한 아들이라 생각되었고 정말 부러웠다. 친구의 아들은 새집으로 이사해야 하고 자기 자녀를 키우려면 얼마나 쓸 곳이 많을 텐데 부모에게 용돈을 그렇게 많이 주다니... . 난 그 순간 감동을 받아 한참동안 그 친구가 부러워 존경스러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정말 친구의 아들이지만 하나님이 복을 주고도 남음이 있겠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뿌듯했다. 용돈은 주로 아이들에게 주는 돈이라 생각하기 쉬운데 이렇게 자녀가 경제적 능력이 없어진 부모에게 쓸 돈을 챙겨서 드리는 것은 마땅하고 귀한 일이다. 일천만 원이나 되는 큰돈도 돈이지만 아버지에게 용돈을 드리는 것은 존경하는 마음으로 진정한 효심에서 출발한 것이라 믿어진다. 사실 옛날에는 부모가 자녀를 키운다고 제대로 먹거나 입지도 못 하고 자녀를 키우는 일에만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노후대책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늙어 경제적 능력이 없어진 부모님에게 큰돈은 아니더라도 용돈을 챙겨드리는 자녀들이 많아지면 존경과 사랑, 그리고 축복이 공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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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용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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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은메달 예찬
- 약 한 달 전에 코로나로 어수선한 가운데서도 지구촌의 잔치인 도쿄 올림픽이 개최되어서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약 2주 동안 매스컴에서는 올림픽 기사가 계속 올라왔습니다. 필자는 금메달을 딴 선수의 기사보다 4위를 한 여자배구대표팀과 다이빙의 우하람 선수의 기사를 유심히 봤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노력을 칭송하는 기사에 흐뭇해했습니다. 사실 올림픽 때만 되면 필자는 매스컴에 불만을 가졌습니다. 왜냐하면 매스컴이 대부분 주목하는 것은 금메달이었기 때문입니다. 금메달을 딴 것에 대해서만 특종 기사로 다루고 신문도 대서특필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도 역시 금메달에만 주목합니다. 그러나 금메달을 딴 사람만이 아니라 은메달, 동메달을 딴 사람 또한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땀과 피를 흘리고 수고를 했을까요? 아니 아예 메달을 따지 못한 사람 또한 그들이 흘린 땀과 피는 금메달을 딴 사람보다 오히려 더 많은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그런 과정보다 결과에만 집중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참 좋으신 분이신 것은 하나님은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시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달란트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다섯 달란트를 받아서 다섯 달란트 남긴 종에게나, 두 달란트 받아서 두 달란트 남긴 종에게 똑같이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칭찬하며 상급을 선포하신 것은 하나님은 결과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맡긴 만큼 얼마나 최선을 다해서 충성했느냐 그 과정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교회를 섬기는 우리도 결과 지상주의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결과보다 하나님이 맡기시는 일에 최선을 다해 충성하고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숙한 교회를 이루어 가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결과 때문에 실망하고 실족하는 일이 없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충성이란 결과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과정으로 판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달란트 비유에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성경에는 2등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모세에게 아론은 2등이었습니다. 다윗에게 요나단은 2등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바나바는 2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2등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일이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 1등이 못하는 일을 2등이 잘 감당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1등이 아니어도 묵묵히 충성하는 2등을 기뻐하시고 쓰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바나바는 그 2등의 사명을 정말 훌륭히 감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어 보면 처음에는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의 이름을 거명할 때에 늘 “바나바와 바울”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항상 바나바의 기사를 먼저 기록하고, 뒤에 바울의 기사를 기록하고 있음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바나바와 바울의 순서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어느 시점부터는 “바울과 바나바”로 기록이 되고, 또한 바울이 중요하게 부각되어서 사도행전이 기록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제 복음과 선교사역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나바가 그에 대해서 불평과 원망을 한 흔적이 성경에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묵묵하게 바울을 조력하는 자로서 훌륭하게 자신의 사역을 감당하는 모습을 사도행전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때가 되어서 바울을 전면에 내세워서 선교사역을 이루어 가시려는 주님의 뜻을 알고 거기에 철저히 순종하며 자신이 감추어지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그렇게 숭고한 신앙과 인격을 지닌 훌륭한 2등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은메달리스트였습니다. 하늘에서는 그 누구보다 찬란한 금메달을 받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금메달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은메달 또한 중요합니다. 사람들 앞에 칭송받는 1등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2등이 되십시오. 주님의 일을 하면서 결코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내게 주신 재능과 은사를 따라 최선을 다해 충성하는 은메달리스트들이 되십시오. 그런 사람이 결국에는 저 하늘의 금메달리스트들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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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은메달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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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장례용어에 대한 문제 제기
- I. 서언 (序言) 그동안 지구 역사상 장묘 문화가 어떻게 흘러 왔는가에 대해서 여러 각도에서 간략하게 선행연구자들을 통하여 살펴보았다. 또한 이에 대한 성경적 조명을 구약학 교수인 김중은 교수의 ‘구약에 있어서의 장묘에 관한 세미나 발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차후에 신약과 초대교회 이후의 장묘문화에 대해서 논하겠지만, 이를 논하는 것은 본 기고의 근본 취지인 장묘 용어를 살피고자 한 것이다. 특히 이런 장묘 용어들 중에는 타 종교의 영향을 받았거나 잘못 오용되어서 우리 기독교인이 사용하기에는 거북한 용어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번 호에서는 이런 장례 용어 중의 하나인 명복과 미망인이란 단어의 문제점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명복(冥福)과 미망인(未亡人)에 대한 문제 제기 1. 명복(冥福) : 불교의 교리와 연관된 용어 중에 명복은 전혀 기독교적인 말이 아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본다면 불교에서는 살아 있는 이 세상을 ‘이승’이라 하고,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을‘저승’이라고 한다. 또한 그 곳을 명부(冥府), 명토(冥土), 황천(黃泉), 유계(幽界), 유명(幽冥), 염라국(閻羅國)이라 하기도 한다. 그중 명부는 죽은 사람들이 심판을 받는 곳으로 사망자가 거기서 벌 받지 않고, 복된 심판을 받기를 바라는 뜻에서 ‘명복을 빈다’고 조사를 하는 것이다. 즉, 명복이란 말은 죽은 자들이 복된 심판을 받아서 극락정토에 가기를 바란다는 불교의 내세관에서 온 용어이다. 이렇게 볼 때 이 말은 우리 기독교와는 전혀 상관없는 불교의 사후 교리에서 온 말이며, 교인이라면 당연히 삼가야 될 용어이다. 그렇다면 교인들은 상가에 가서 어떤 말로 조문을 해야 할까? 여기에 대해서는 특별히 예식서에 정해진 것은 없으나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위로 받으시기 바랍니다.”,“부활의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등의 성경적인 용어를 사용함이 적합하다고 본다. 2.미망인(未亡人) : 남편을 사별한 아내들에게 흔히 사용하는 미망인이란 용어는 표면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신문 지상의 부고장이나 교인의 장례식장에서도 어김없이 이 호칭이 장례식장의 게시판에 부착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말의 뜻과 배경을 살펴보면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이 말의 뜻은 아닐 미(未), 죽을 망(亡), 사람 인(人)으로서 “남편이 죽고 홀로 사는 여인”과“남편을 따라 아직 죽지 못한 사람”이란 뜻으로서 과거 순장제도에서 유래된 말이기 때문이다. 순장(殉葬)이란 무엇인가? 이는 어떤 사람이 죽으면 사후에도 무덤 안에서 도와주기 위해서 산 사람을 강제로 같이 매장하는 제도이다. 실제로 왕이나 귀족이 죽으면 살아 있는 종이나 아내까지도 같이 매장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러한 풍속은 고대 중국의 은나라와 이집트, 또한 우리나라도 부여시대와 신라 초기와 가야시대까지 존속했던 장묘제도로서 우리 지역의 창녕에서도 순장된 여종의 시신이 발굴된 예가 있기도 하다. 또한 이 용어는 남자가 여자를 철저하게 지배하는 남존여비 사상과 가부장적인 한국 문화의 유산이기도 하다. 이러한 과거의 잘못된 역사와 문화적 배경을 생각한다면 이런 용어를 일반 사회나 특히, 교회에서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는 일이다. 즉, 이 말은 남편을 잃고 슬픔에 젖은 아내에게 “당신은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한 여인”이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또한 이 용어는 포스터 모더니즘과 페미니즘 시대를 사는 현대인의 감각에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그렇다면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는 아내를 어떻게 불러야 되는가? 일반적으로 사용하기 적당한 말은, “고인의 유족”, “고인의 부인”, “고인의 아내”란 말이 훨씬 더 자연스럽고 옳은 말이 것이다. III. 맺는 말 종전의 기고에서 기술한바 있지만, 이미 일반화 된 생활용어에 대해 타종교적인 말과 뜻이 맞지 않다하여 무작정 사용하지 말자라고 규정하는 것은 다소의 문제가 있다. 하지만 앞에서 기술한대로 이런 용어들이 우리의 믿음과 배치되는 타 종교의 교리적인 말이거나 사회적 거부감을 주는 용어라면 경우가 다르다. 이에 “명복을 빕니다.”란 말이나, 듣기 좋고 어감이 좋은 말이라고 해서 분별없이 ‘미망인’이란 말의 사용은 기독교인으로서는 반드시 삼가야 될 용어인 것이다. 또한 잘못된 용어사용의 주의와 함께 기독교인의 바른 언어문화 사용에 배전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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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장례용어에 대한 문제 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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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밤은 어둡고 깊어만 가는데. . .
- 세월이 참 빠르게 지나갑니다. 한 해를 시작한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가을을 맞고 있습니다. 한 해를 시작할 때마다 무언가 달라지겠지 하는 기대와 소망으로 시작하지만 실망과 후회로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하는 것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오늘날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이제는 새로운 기대와 소망을 가지는 것 자체가 사물을 잘못 보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까지 갖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과학과 과학기술의 발달이 인류를 새로운 유토피아로 인도해 줄 것으로 기대하면서 진보 그 자체에 대한 신앙도 가졌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욱 방황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발달과 문명의 진보가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해 준 점도 많이 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인류 전체가 멸망하게 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조성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인간은 스스로가 발전시킨 과학기술 앞에 벌벌 떨고 있는 무력한 모습을 보이며, 자기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현대인은 과학과 과학기술이라는 새로운 우상 앞에 노예가 되어 꼼짝하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직시하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인간의 이러한 지식과 기술이 인간의 삶의 질과 가치를 고양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저급한 욕구 충족과 도덕과 윤리의 퇴폐적 생활로 끊임없이 인도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찍이 자연주의 철학자 루소(J.J. Rousseau)는 드죵의 현상 논문을 통해서 인간의 과학과 문화의 발전이 인간 사회를 도덕적으로 고양시키기보다는 오히려 타락하게 만든다고 주장하면서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갈파하였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확실히 어두움을 향해서 계속해서 질주해 가고 있습니다. 청소년의 일탈 행동은 갈수록 폭력과 퇴폐성으로 얼룩지고 있고, 기성사회는 정신적인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언론을 통해서 보도되는 모든 사회적 현상들은 희망보다는 실망과 좌절감을 더해 주고 있습니다. 도무지 소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시대상을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날이 임박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언제 주의 날이 우리에게 임하도록 계획되어 있는지 말하지 않지만 주의 날에 관해서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 날이 밤에 도적같이 임할 것이라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이 진술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주의 날이 해가 떠 있는 낮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캄캄한 밤에 올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밤에 올 것이라고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고 있지만 그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님은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영적으로 어두운 밤에 재림할 것이라는 사실을 바울은 밤에 임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아무리 과학의 빛이 찬란하게 빛난다고 할지라도 도덕적, 영적인 눈으로 보면 이 세상의 삶은 더욱 더 어두운 밤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점점 더해져 가는 어두움이 시야를 가리우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죄와 불의가 점점 더 깊어 가는 흑암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습니다. 주님은 영적인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가 밤 12시를 치기까지 기다리시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모든 빛들이 꺼지고 죄악이 극도로 관영할 때까지 인내하면서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의 저녁 시간즈음에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두움이 점점 더 깊어가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알리는 시계가 밤 12시를 알리기까지 얼마 남아있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세상의 쾌락을 추구하는 모든 장소들, 극장과 술집, 환락가들이 사람들로 가득 차 붐비고, 인간이 만든 조명들이 찬란하게 빛날 그 때에, 사람들이 자신들이 이룩한 과학 기술 문명의 발전을 스스로 찬양하면서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말하고 있을 바로 그 때에 주님은 홀연히 재림하실 것입니다.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주의 날(DAY of the Lord)이 밤(Night)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 얼마나 놀라운 대조인가!! 하늘과 땅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위대한 날에, 어두움이 흑암을 뒤덮고 있을 그 때에 하나님은 “빛이 있어라!”고 다시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그 날에는 밤이 낮이 될 것입니다. 이제 이 날은 다시는 밤이 찾아오지 않는 영원한 낮이 될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다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뒤덮지 못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이 주의 날은 캄캄한 밤에 빛과 같이 오게 된다고 바울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빛은 어두운 모든 구석을 다 비추며, 어두운 구석에 감추어져 있던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드러나도록 만들 것입니다. 빛이 어두움을 정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게 진솔한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나의 가정과 나의 마음의 모든 구석이 어두움이 없이 낮의 광명한 빛이 찬란하게 비치고 있는가? 우리가 악의 장막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아직도 이 악의 장막에 속하고 있지는 않는가? 언약의 물로 씻음 받기는 했지만 아직도 여전히 어두움의 자녀로 남아있지는 않는가? 밤은 어둡고 깊어만 가는데 우리 주님의 은혜의 빛이 나의 삶에 드리워져 있는 죄악의 어두움을 대항해 싸워서 그 어두움을 깨뜨리도록 살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화가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이 어두운 시대에 빛의 자녀들로 살아갈 수 있기를 진심을 소원합니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 현 에반겔리아 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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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밤은 어둡고 깊어만 가는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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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50원만 빌려주세요.”
- 나는 유치원을 다녀보지 못했다. 아침에 노란 가방을 매고 내가 알지 못하는 곳을 향하던 소수의 친구들이 조금 부러웠다. 얼핏 구경을 해보니 유치원은 노래를 부르고, 놀이를 하고, 그림도 그리는 곳이었다. 나는 그 시간이 되면 동생과 함께 시장터를 누비고 다니거나 빈 땅에 구멍을 만들어 구슬을 던지고 놀았다. 하지만 나도 이제 정해진 시간이 되면 당당히 가방을 매고 갈 곳이 생겼다. 어머님께서 일 나가시기 전에 왼쪽 가슴에 달아주신 손수건. 자그마한 플라스틱 통에 밥과 반찬 두세 가지를 넣어 챙겨주신 도시락. 나는 이제 자랑스러운 ‘청송국민학교’ 학생이 된 것이다. 유치원을 다녔던 친구도, 나와 함께 동네를 누비던 친구도, 같은 동네 살면서도 얼굴을 잘 몰랐던 친구도. 이제는 같은 공간에 모여 함께 공부하고 노래하고 공을 찼다. 오늘은 엄마가 아프다. 늘 힘든 일을 하시더니 병이 나신 것 같다. 학교를 오기는 했는데 오늘은 도시락을 준비하지 못했다. 점심을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하다가 즐기지는 않지만 오늘은 빵으로 한 끼를 해결할까 싶다. 나의 플라스틱 필통은 수납공간이 많다. 버튼을 누르면 여기저기 문이 열린다. 늘 지우개를 넣어두던 그곳을 열어보니 50원이 나온다. 우유는 학교에서 받은 것이 있고, 빵만 사면 되는데 50원이 부족하다. “선생님요, 50원만 빌려주면 안돼요?” 교탁 옆 개인책상에 앉아계신 담임 선생님께 당당하게 요구했다. 어떤 자신감이고 무슨 여유였을까? 분명한 것은 선생님이라는 분은 그 정도 재력은 있다고 믿었고 나에게 빌려주실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뻔뻔함도 늘 누울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었으니깐. 선생님께서는 50원의 용처를 물으셨고 역시나 당당하게 내가 가진 50원에 보태어 빵을 사먹으려고 한다고 대답했다. 50원은 내 손에 쥐어졌다. 성공. “선생님, 내일 엄마한테 받아서 꼭 갚을게요.” 그렇게 빵으로 한 끼를 해결하고 온 아들을 맞이하는 어머님 표정이 묘했다. 담임 선생님께서 집에 전화를 하셨단다. 어머님은 너무 부끄러웠다며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 타이르신다. 하지만 돈도 잘 갚고 내 배도 채운 아름다운 상황에서 나는 아직도 뭐가 문제인지는 모르겠다. <삽화작가 : 김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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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50원만 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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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교만과 겸손의 상관관계
- 겸손(謙遜)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낮추는 태도가 있음을 겸손이라고 한다. 유교의 경전 중 하나인 “주역(周易)”에서는 겸손을 “지산겸(地山謙)으로 풀고 있다. 이 의미는 산이 땅 위에 있어야 마땅하지만 땅 아래에 산이 겸손하게 엎드려 있음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사람으로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갖추고 있고, 세상적으로 잘난 사람이지만 못난 사람 밑에서 섬기며 사는 삶을 말한다. 겸손에 대한 헬라어 표현이 다양하지만 그중에 ‘타페이노프로쉬네’는 우리 속에 일어나는 감정을 억제하며 짓누르며 낮은 자세로 임하는 상태를 말한다. 구약 히브리어로 ‘겸손’이란 단어는 ‘아나브’이다. 이 단어의 뜻은 ‘응답하다’란 단어 ‘아나’에서 ‘아나브’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적 겸손은 우리 속에 일어나는 사악한 감정을 억누르고 주님이 부르실 때 응답하는 그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다.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라고 성경은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 우리가 아는 모세는 무능력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다혈질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세상에서 가장 ‘아나브’한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세상적 개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관적인 판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반응하는 사람이었기에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이다. 바그완 슈리 라즈니쉬(Bhagwan Shree Rajneesh)는 “겸손은 신이 사람에게 내린 최고의 덕이다.”고 하였다. 장수를 구분하면 용장(勇將)보다 지장(智將)이 낫고, 지장보다는 덕장(德將)이 위대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겸손을 소유한 덕장으로 산다는 것은 위대한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교만과 겸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살아간다. 내 속에 교만이 있음에도 교만인지를 모르고 살아가는 경우가 있다. 참다운 겸손은 인간의 의도적 행위에서 분출되는 것이 아니라 겸손의 주체이신 주님이 내 안에 계셔서 나를 통제 해야 참다운 겸손을 이룰 수가 있다. 인위적 겸손인지 판단해 보면 “저는 미천합니다.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라는 말속에 “자신의 자아와 자기 높임”이 숨어 있다면 그것은 교만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나은 달란트가 있고 장점을 발견하여 자신이 원하는 자아가 충족되지 못할 때 나오는 열등감이 교만의 극치가 될 수 있다. 타인의 뛰어남을 못마땅하게 여겨 비판하고 그 사람의 단점을 발견하여 깎아내리며 질투하는 것도 교만의 일종이다. 또한 자신의 결점이 드러나지 않으려고 보호하기 위해 변명하고 합리화하는 행위도 교만에 속한다. 이러한 내면적 모습들이 밖으로 표출되는 것을 원치 않고 두려워하여 자신의 마음 문을 열지 않는 폐쇄적인 상태도 교만이라 할 수 있다. 겸손의 주체이신 주님의 통제를 받지 않는 자는 교만한 자요, 온유하신 주님께 배워 통제를 받으면 겸손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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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교만과 겸손의 상관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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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무열 목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자
- 몇 일전 아는 지인 목사님이 교회에 방문하셨다.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어가다가 목사님 어떻게 하면 목사님처럼 후원을 받을 수 있는지 방법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다. 순간 생각이 멈춰지며 할 말을 잊어 버렸다. 내가 하는 말을 다 들으시며 내가 행동하는 모든 것을 달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목사님의 신앙의 자리가 어떠했는가를 먼저 성찰함이 선행되어져야 한다. 무엇을 구하기 전에 내 마음과 삶을 온전히 드리기를 먼저 배워야 한다. 나를 드리는 것이 믿음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살아 있는 예배다. 교회에 다니는 것은 하나님으로 부터 서비스를 받으려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나의 필요를 공급받고 삶의 위로를 얻기 위함도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이나 환경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만 무릎 꿇는 인생을 원하신다. “기도 외에는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9:29) 믿음으로 기도하고 인내하면 하나님의 때에 아름답게 이루어주시는 만남의 복을 허락하시고 그 만남을 통하여서 기도하고 간구한 일들을 이루게 하신다. 모든 일에는 준비 과정이 있고 또한 일정한 시간과 땀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그 과정이 믿음의 기도요, 인내의 수고인 것이다. 우리는 수고와 인내의 시간이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것이 세상 이치이듯이 신앙생활도 마찬가지 이다. 나는 목사님에게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도하시면 됩니다. 서로가 사는 삶의 환경과 각자의 받은 은사가 다르기 때문에 자기에게 맞는 옷을 입으려고 노력해야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데칼코마니”는 아니기 때문이다. 내게 주신 은혜와 그분 목사님에게 주시고자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분명코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왜 남의 옷을 빌려 자기의 옷으로 살려고 하는가. “아닌 것 아닌 거여, 자꾸 거시기하려고 하는 가” 정말 답답하다. 말씀 따라 가면 인생길이 시온의 대로와 같이 분명하게 펼쳐 보일 것이다. 자기를 드리지 않고서는 좋은 인생의 결과물을 얻을 수 없다. 소금이 맛을 내려면 녹아져야 하고 촛불은 자신의 녹여 불사를 때에 어두움을 물리치고 밝음을 드러내는 것처럼 하나님은 나의 희생과 헌신과 사랑이 끝까지 순수하기를 원하신다. 희생하고 헌신하면서 내게 돌아올 보상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라. 오늘을 희생하고 내일을 보장받자. 고인 물은 흘러내야 흘러들어온다. 계산적인 인생이 되지 말라. 왜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고 매사에 부정적이고 습관적인 불평을 쏟아 내는가? 그것은 자신이 희생과 헌신 없이 계산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반증이다. 가끔 힘든 현실이 펼쳐져도, 삶을 되돌아보면 죄와 허물이 많은 내게 하나님의 은혜는 늘 생각보다 풍성했다. 삶에 위기도 있었지만 그 이상의 위로가 있었음을 생각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희생적인 삶을 새롭게 다짐한다. 코로나19로 비대면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도울 동역자를 보내주셔서 마을에 섬김과 복음을 전하는 귀한 사역을 창원 산성교회를 통하여 토요일에 실시했다. 정말 곰팡이가 가득 피어있는 벽지를 교체하고 희미한 전등을 LED 등으로 교체와 동시에 낡은 전선을 교체하며 주변을 정리하는 성도님들의 수고와 한 영혼을 사랑해서 선물 꾸러미를 준비하여 호우주의보가 내려져 장대비가 내리는데 온몸을 비에 젖으면서 가가호호 방문하여 주의 복음을 전하는 성도의 열정이 주민들의 마음을 녹이며 연신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어르신의 눈가에 맺힌 이슬을 바라보게 되니 거저 감사할 뿐이다. 부족한 종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렇게 천사들을 보내 주셔서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니 감사할 뿐이다. 주일날 담임목사님과 선교팀들이 함께 예배를 드리고 전도하여 4명의 주민이 예배에 참석하는 은혜의 시간을 가졌다. 저들이 돌아간 후의 텅 빈 예배당에 홀로 앉아 십자가를 바라본다. 밀물처럼 왔다가 설 물처럼 빠져나가고 오직 하나님과 대면해 있는 내 모습은 언제나 코람데오..... 주님. 부족한 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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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무열 목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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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장례용어에 대한 문제 제기
- I. 김중은 교수의 성경본문에서 보는 장묘문화와 결론(4) 1. 구약 성경에서 보는 장묘문화 구약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대 전제로 하고 있다.(창3:19). 이런 전제하에 구약 성경에는 두 집단의 장례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첫째는 족장들의 장례에 관한 것이고(창25:8-10; 35:29; 49;29-32 등),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의 장례에 관한 것이다(왕상14:31; 16:28등). 또한 모세 율법에서 시체는 부정한 것으로 규정되었으며(레22:4; 민9:6-7,10; 민19:11-22 참조), 대제사장을 비롯한 제사장들은 시체에 접촉해서는 안 된다(레21:1, 11 이하)고 규정하고 있다. 2. 무덤의 종류 1) 가족묘: 아브라함의 가족묘인 헤브론의 막벨라 굴은 자연 동혈을 이용한 것으로서 중기 청동기 시대의 무덤양식이다. 또한 기드온(삿8:32), 삼손(삿16:31), 아사헬(삼하2:32), 아히도벨(삼하17:23), 기스(삼하21:14) 등의 가족묘(왕상13:22 참조)가 언급되고 있다. 2) 일반 평민의 묘: 평민들은 주로 평지에 토장했다. 예루살렘의 경우는 주로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공동묘지에 매장한(왕하23:6; 렘26:23; 쿰란의 경우 등 참조)것으로 나온다. 3)왕들의 묘: 주로 수도 성읍 안에(유다의 경우: 왕상2:10; 11:43 등; 이스라엘의 경우: 왕상16:6, 28; 22:37; 왕하10:35등; 비교, 대하 16:14; 21:20; 24:25; 28:27; 느3:16; 행2:29 등)묘실을 두었다 . 3. 무덤의 위치: 일반적으로 거주지 밖에 있었다. 예를 들면, 동굴(창23), 나무 밑(창35:8, 상수리나무 아래; 삼상 31:13, 에셀나무 아래)을 사용했으며, 성읍 내, 평지 밭(수24:30, 32), 집터 아래(삼상25:1)등에 두었다. 이사야는 바위에 새 무덤을 파놓은 셉나를 경고했는데(사22:16) 이는 장소보다는 화려한 무덤을 판 것을 책망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예수님의 무덤은 골고다 근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정원에 파 놓은 묘실이었는데(마27:60; 요19:41; 20:5, 입구는 돌을 굴려 닫는 식이었고(막15:46), 시신을 안치하는 석상(시신 대)을 설치(막16:5-6; 요20:12 등)한 것을 볼 수 있다. 4. 장례식: 죽은 자의 눈을 아들이 손으로 감겨 준(창46:4) 경우를 볼 수 있고, 야곱과 요셉의 경우는 애굽식의 미이라(창 50:1-14; 50:26)장례였으나, 나중에 야곱은 막벨라에 묻혔고, 요셉(수24:32)과 라헬(창35:20)은 각기 다른 곳에 묻혔다. 시신은 일종의 들 것 상여에 실어서 무덤으로 운반했고(삼하3:31;눅7:12),수의는 로마시대부터 사용되었기 때문에(마27:59; 요11:44; 19:40 등) 그 이전에는 평상복을 입혔다. 묘비의 경우는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석을 세운(창35:20)일과 압살롬이 죽기 전에 자신의 기념비를 세운(삼하18:18)것이나 웃시야 왕의 돌로 된 뼈 상자나 셉나의 바위 묘실에 피장자의 이름을 새기고“열지 말라”는 경고문이 새겨져있는 것 등으로 볼 수 있다. 애곡하는 일은, 가족이나 특히 여자들과 전문 애곡인이 동원 되었다(암5:16-17; 렘9:17-22 등). 또한“키나”(3+2)율에 따른 애가(조가)를 불렀다(삼하1:19-27; 3:33이하; 대하35:24-25). 애곡기간은 30일(신34:8), 7일간(삼상31:13) 등이었고, 옷을 찢음(창37:34, 상복 착용(왕하6:30), 두건과 신발 벋음(겔24:17), 수염을 가림(겔24:17), 얼굴을 가림(삼하19:5), 머리에 흙먼지를 뿌림(수7:6), 머리털과 수염을 깎음(암8:10), 자해(렘16:6), 칠일 금식(삼상31:13)을 하기도 하고, 상가 음식(렘16:7)을 따로 하기도 했다. 구약시대의 장례식은 가능한 한 임종 당일에 행해졌고, 특별한 매장 준비는 없어 보인다. 범죄자도 처형 후 장례를 허락했다. 또한 매장되지 못하는 것은 저주받은 것으로 여겼다(신28:26; 왕상21:23이하; 사34:3; 66:24; 렘7:33 등). 신약시대의 장례식은 시신을 씻었고(행9:37), 예수님의 시신은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싸고, 기름과 향유를 발랐다(요19:39이하; 눅23:52-56 등). 일반적으로 관을 사용하지는 않았고, 입관은 애굽 풍속이다(창50:26). 하지만 팔레스틴에서(특히 페니키아 지역)에서는 석관이 사용했고, 불레셋 지역은 사람 형태의 토관을 사용했으며, 어린이의 시신은 옹관묘에 매장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부터 점차 시신을 관에 넣은 경우가 증가하며, 대략 1년 후 살이 내리면 유골을 모아 석기 골함에 넣어 보관했다. II. 중략하고 맺는 말 이상의 내용은 김중은 교수의 견해를 소개하면서 약간의 수정 보완을 한 것이다. 여기까지의 내용을 보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묘문화는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인다. 이에 대해 필자는 지난 주간 장례예식에 대한 내용을 집필한 어떤 신학대학의 예배학 교수에게 이에 대한 견해를 물었더니 역시 동일한 내용으로 대답했다. 이는 앞으로도 좀 더 논하면서 독자 제위와 함께 나름대로의 결론을 맺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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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장례용어에 대한 문제 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