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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7)- 관언유착(官言癒着)
언론이 독자들이나 대중들에게 주는 영향이 크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사실이 아닌 잘못된 기사나 중심을 잃은 기사는 많은 사람에게 혼란을 줍니다.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몇 해 전 우리 노회에서 모 목사를 순회 선교사로 파송한다고 기독교보에 기사가 올랐습니다. KPM 이사장과 담당자들이 파송 예배에 순서를 맡으며 파송 예배 사진까지 첨부하여 누가 봐도 총회에서, KPM에서 파송하는 선교사처럼 대문짝만하게 기사를 올렸습니다. 노회 파송 선교사도 아닌데 과장된 허위 기사를 올릴 수 있느냐고 기독교보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몇 주 후 신문 구석 어느 페이지에 짧은 한 줄로 000교회 순회 파송 선교사로 정정한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습니다. 그 기사를 본 대부분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은 KPM 파송 선교사로 알고 있습니다. 짤막한 정정 기사가 났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도 “부산서부노회 파송 선교사냐?”고 물어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선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KPM이나 노회에서 파송한 선교사처럼 위장을 하고 그것을 교단 신문인 기독교보에까지 기사화한 것은 그 저의를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디 이 한 건뿐이겠습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이 발생하여 총대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거짓된 걸음을 걷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 심히 우려됩니다. 기독교보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할 것입니다. 기독교보가 KPM 선교사로 파송하는 기본도 모른다는 것은 몰랐다고 하는 말 자체가 거짓말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의 파장도 결코 간과할 수 없지만, 신앙과 교리, 교회와 개인의 인권에 대한 의도적인 허위 기사는 고신 신앙 전체를 흔들 수 있는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문제는 고신 언론사는 총회 유지재단 이사회에서 관리하는 기관입니다. 유지재단 이사회는 총회장을 당연직 이사장으로 해서 총회 기관 중 최상위 기관으로 총회를 잘 알고, 총대들의 지지를 받아 총회 산하 교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감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유지재단 이사회가 직무유기 한 것입니다. 학원 이사들이 잘못할 때만 소환할 것이 아니라 유지재단 이사회가 잘못할 때는 그 파장은 훨씬 더 크고 중요하기에 반드시 소환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독교보가 총회 기관지인지, 유지재단 이사회 관할에 있는 기관지인지, 기독교보 자체 언론지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된다고 입을 모읍니다. 언론사 사장 얼굴이 기독교보에 빠지는 일이 없자 이 일에 대해서 총대들은 물론이요, 유지재단 이사회에서도 지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과는 마이동풍입니다. 순교 정신을 기본으로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모토로 하는 고신의 기관지인 기독교보가 본류의 신앙을 이탈한 것은 이미 옛말이고 특정 계파에 포진한 자들이 기고하는 재고 되어야 할 지나친 인문학적 논의와 신앙 고백적 정체성을 벗어난 잘못된 사상들이나 도배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고신 신앙을 가진 목회자들과 장로들, 교회들은 알게 모르게 기독교보에 대한 불신으로 불매 운동을 하고 있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입니다. 5월 2일 자 코람데오닷컴에 “교계 언론 편집 책임자의 이학규 장로 고소 건, 고검 재정 심사에서도 또다시 기각 판결”이라는 기사가 올랐습니다.(코람데오닷컴 참조) 이 사건의 실상은 전국 남전도회 임원으로 있는 모 장로님이 유지재단 이사로 출마하려고 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웠는데 그해에 언론사 사장 선거가 있어 보수 측 인사가 유지재단 이사가 되면 사장이 되는 길에 장애가 될 것 같아 코람데오닷컴의 기사대로 언론사의 직원이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운 장로를 “사퇴 종용”했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총회 산하 교회를 잘 돌아보고, 총회의 기관들을 바르게 잘 관리해야 하는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시작부터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일반 총대들은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는 계파와 개인의 이권과 자리가 그 배경이 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재미를 본 자들은 이제 총회에서 골치 아프게 투표하고 경쟁하는 것보다 아예 노회 총대를 조정하는 기가 찬 수법으로 발전했습니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계파에 표를 던질 사람을 골라서 총대라는 자리로 매관매직을 하고, 각 노회 지도급에 있는 목사 장로들을 총회 상임위의 자리로 매관매직해서 4월 노회 총대 선거가 끝나면 이미 상황이 종료되는 모양새로 발전되었습니다. 이학규 장로가 전국 남전도회 회장으로 봉직하고 있을 때 함께 임원으로 봉사하던 모 장로가 “사퇴를 종용”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항의한 것이 코람데오닷컴 에 기사 실린 것과 같은 결과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평생 법 없이도, 법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사는 목사, 장로가 이 일로 인하여 교회 생활이나 신앙생활에 방해를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경찰서와 법원으로 불려 다니며 고초를 겪고 어려움을 당했던 것에 대해서 고신 언론사를 관리하는 유지재단의 총회장과 목사, 장로 이사들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 궁금합니다. 왜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말입니다. 이학규 장로는 신앙적으로 잘 해결하고자 언론사의 불법 선거 개입 못 하게 해달라는 진정서를 총회 선관위에 제출했더니 총대가 아니라 진정서를 접수하지 못한다고 하더랍니다. 참 훌륭한 총회 선거관리 위원회이십니다. 그래서 “여기 보냈다, 저기 보냈다” 서류 핑퐁 게임을 하다가 결국 사법기관에 판단을 받기까지 하면서 이학규 장로가 당한 심적 피해, 정신적 피해, 일상 업무 손해의 피해는 누가 보상해줍니까? 고신총회가 이렇게 기본을 상실하고 무책임하게 하면 안 됩니다. 펜은 검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오보도 문제이지만, 언론이, 신문이 의도적이고 사욕에 치우쳐 고신의 정체성에 위배 되는 글이나 기사를 올리고, 무책임으로 일관할 때 고신총회 산하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미치는 파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총회 임원회와 학원이사회가 지난 총회 시 총대들을 속이고 총장선출 규정을 통과시켜 불법으로 총장을 선임했다고 신문에 기사화되어도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볼 때, 총회 임원회의 수장인 총회장이 유지재단의 당연직 이사장이기에 이 사실조차 그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게다가 현 총회장은 기독교보 발행인이 아니기에 변명하며 피해갈 수 있는 좋은 길도 열려 있습니다.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재정적인 문제는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릅니다. “반려동물을 장례식”에 대한 안건이 고신총회 신학부에서 재론되고, 어떻게 고신총회에서 “그따위 안건이 거론되느냐”는 회원들의 호통에 경남노회 모 회원이 나와 옹호 발언을 하며 “지난달에 우리 찐이(고양이)가 죽어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하늘나라로 보내줬다”고 말을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총회가 불건전하고 이단성이 있어 교류를 금지해도 전혀 문제의식 없이 그런 모임에 참여하고, 순서나 자리까지 맡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는 300M 거리를 유지해야 하지만 이전하는 것은 법에 명시가 없기에 괜찮다고 하는 고신입니다. 핑퐁 게임을 하다하다 안되면 법리해석을 문제 삼아 법제위에 해석을 요청하여 본질을 잊어버리게 하고 계파싸움 진영싸움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고신입니다. 양파도 아니고 벗겨도 벗겨도 끝이 없는 고신이여...... 언론은 “言路”를 여는 것입니다. 言路가 막히면 세상은 암흑세계나 다름없습니다. 한 마리의 개가 먼저 짖으면 온 동네 개가 때지어 짖어대듯이 기독교보가 먼저 총대를 메고 총회 여러 현안의 심각성을 알리면 동시에 총회 여러 곳에서 포문을 열고 동참할 것입니다. 언론은 여론을 집약하고 전문가들의 진단과 의견을 수렴하거나 민심을 파악한 후 사안에 따라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로 펜 끝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언론의 사명입니다. 총회 성도들을 대신해서 할 말을 하며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선도해야 합니다. 독선의 권력을 향한 비판은 언론이 지향해야 할 우선순위이자 언론 존재 이유입니다. 이 가치관이 상실되면 결국 관언유착(官言癒着)이 되기 쉽고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관제언론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사리사욕에 길들어서 소위 ‘독선과 권력’의 ‘종’이 된다면 스스로 펜을 손에서 내려놓아야 함은 불문가지입니다. 기독교보가 그렇게 길들어진 “관보(官報)”라는 비판을 듣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집을 지키기 위해 열심 짖어야 할 개가 요즘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주인 행세를 한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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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6 : 성가대와 찬양대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평생을 예배드리면서도 때로는 이 말이 옳은가 틀리는가에 대한 의문이 되는 용어들이 많다. 본 기고의 목적이 이를 바로 알고 사용하자는 취지에서 계속 기고하지만, 필자 자신도 때로는 헷갈릴 때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예배 중의 순서에서 찬양대인가 성가대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통합 측 총회에서는 찬양대라고 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수많은 교회들이 성가대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는 여기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성가대(聖歌隊)와 찬양대(讚揚隊)의 용어 차이 두 용어는 일반적으로 보면 거의 같은 말이다. 국어사전에도 성가대는 “교회 등에서 성가를 부르기 위해서 조직된 합창대”라고 했고, 찬양대도 “남녀 기독교 신자로 조직된 합창대”로 둘 다 영어로도 ‘choirs’로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같은 듯 다른 용어이다.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성가와 성가대란? : 먼저 일반적으로 성가라는 용어는 범(凡) 종교적으로 사용하는 말로서 일반적인 음악과는 다른 거룩한 음악이란 뜻이다. 그래서 성가는 범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는 ‘종교음악’으로서 세속적인 노래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의 찬불가는 불교의 성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 용어가 전혀 언급이 없다. 오직 찬양 혹은 찬송으로 표현되어 있다. 2. 찬양과 찬양대란? : 찬양이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으로서 참된 경건의 중요한 요소이다. 즉 찬양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성육신과 십자가 지심과 부활, 종말과 재림 등의 구속의 은혜를 노래하는 것이 찬양이고 또 함께 부르는 것이 찬양대인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가진 찬양은 개역성경에는 213회, 찬송은 98회, 찬미는 14회가 나온다. 하지만 성가란 말은 한 곳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찬양은 일반 종교의 성가와는 차원이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만을 높이는 노래인 것이다. 3. 성가와 성가대란 말을 교회에서 사용해 온 이유는? : 왜 성경에도 없는 이 용어를 그동안 교회에서 사용해 왔을까? 그 이유는 1976년에 나온 공동 번역 성경에서 개역성경의 “노래하는 자”, “성가대”로 12회에 걸쳐 번역을 했다. 또 하나의 성가대란 용어의 기원은 한 출판사가 흑인 영가의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곡집”이라 부른 것이 성가대의 이름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의 ‘세이까다이’(성가대 せいかたい, 일본 사람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며 노래할 때 쓰는 용어)가 직수입되면서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서 그동안 찬양대라고 했던 용어가 성가대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성가대란 말은 일본어의 잔재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가대란 말은 1958년 출판된 동아출판사 사전에도 성가대란 명칭이 없었으나 1994년 민중서관의 국어사전에서 처음 등재되었고 그 이전에는 성가대라는 말이 고정되어 사용되는 곳은 일본의 ‘세이까다이’뿐이었다. III. 결론과 제언 앞서 서론에서 밝힌 대로 성가대와 찬앙대라는 말은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동안 큰 문제 없이 사용해 왔기 때문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성경에도 없는 말이며, 일본어의 잔재라는 문제도 있다고 볼 때, 또한 타 종교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굳이 성가대란 말을 계속 사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성경에도 없는 성가나 성가대란 말보다는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사용해 왔던 찬양, 찬양대란 우리 고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올바른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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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성경의 큰 그림과 안식(1)
1)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창조되었다(창1:26~28).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일 때 가장 행복하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안식한다. 사람은 창조 되자마자 안식을 살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함께 안식하시려고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을 완벽하게 창조하셨다. 완벽이 무엇인가? 완벽하다는 말이 단순하게 세상을 좋고, 아름답게 창조했다는 말로만 보아선 안 된다. 물론 그런 뜻도 있다. 그러나 완벽하게 창조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상태를 말한다. 비 인격체인 피조물이 완벽할 수 있는 것은 인격체인 사람이 완벽할 때 완벽할 수 있다. 모든 피조물들이 사람의 손에 주어졌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하나님과 동일시 될 때 완벽하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하게 세상을 창조하셨다.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였고 완벽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로 완벽했다. 그래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 되게 하신 일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 될 때 완벽하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임마누엘을 이루시는 날 우리는 하나 되었다. 완벽 해졌다. 회복된 날이다. 하나님의 완전함 같이 우리도 완전해졌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고 하셨다. 안식을 말한다. 완전함을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임을 알 때 완전하다. 또 이것이 행복이고 안식이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 이것을 보고 안식의 삶이라고 한다. 완벽하기 때문에 더 이상 무엇을 보텔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안식은 피곤해서 안식하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어 안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고 완벽하기에 안식이다. 점이라도 하나 더 찍으면 작품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붓을 놓는 화가처럼 완벽하고 부족함이 없어 쉬시는 것이 안식이다. 사람은 창조되자말자 안식을 살았었다. 보기에 심히 좋았다. 하나님은 인간을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당연히 모든 피조물도 완전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가 하나님의 첫 번째 그림이다. 하나님의 큰 그림은 안식이었다. 2) 사단에게 속아 안식을 잃었다 사람은 사단에게 속아 합법적인 하나님과의 분리가 일어나 버렸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완전함이고, 안식인데 안식을 잃어버린 것이다. 마귀에게 속아서 신적 통치권을 빼앗겨 버렸다.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함으로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는 말씀대로 되었다. 그 결과 안식, 즉 임마누엘의 완벽함을 잃어 버렸다. 마귀도 언제나 말을 먼저 먹인다. 마지막 때도 마귀의 주된 일이 말을 먹이는 일을 한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계12:15)라고 했다. 여자인 교회를 말인 물로 떠내려 보내려 한다. 뱀인 마귀는 입에서 물을 토하는 것이다. 다른 복음을 많이 토한다. 다른 복음은 없다. 하늘의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갈1:8). 마귀는 다른 말을 토해 냄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큰 그림인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은 안식이다.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보아야하는데 보지 못하게 다른 말을 넣는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고 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의 그림인 안식이 없으면 두렵다. 안식을 보지 못하는 자의 모습이다. 안식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내가 다른 복음을 먹었습니다."라고 스스로 확증한다. 스스로 벗었다고, 두렵다고 고백한다. 그전에도 벗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누가 너에게 벗었다고 알려줬느냐"고 물으신다. “누가 그런 말을 해 주더냐”라는 뜻이다. “네가 무엇인가 스스로 입어야 한다고 누가 말 하더냐”는 질문이다. 지금도 사단은 우리가 예수 외에도 무엇을 입어야 한다고 속삭인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왜 따먹었느냐?"라고하시지 않고 "누가 벗었다는 것을 알려줬느냐?"라고 물으셨다. 말의 권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 주는 순간이다. 사단의 속임수는 다 말로부터 온다.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말을 들으면 보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큰 그림이 보인다. 사단의 말을 들으면 벌거벗음이 보이게 된다. 두려움을 보게 되고, 두려워 숨게 된다. 주님이 입혀 주신 것 외에 뭔가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엔 온전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하는가? 말이 온전하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고 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욕도 안해야하고,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욕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말이 온전하려면 복음을 말하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이다. 복음을 말하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우리도 온전할 수 있다. 온전한 말을 하면 아버지의 일인 안식을 보게 된다. 우리에게 너무나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한다. 너무 아까운 세월을, 아까운 인생을, 남의 이야기하다가 다 보낸다. 비판과 불평불만만 하다가 시간을 다 보낸다. 안식이 있을 리가 없다. 사단은 말로 우리를 속였고 속이고 있다. 안식은 우리의 믿음의 말에서 온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10:10). 마귀에게 속아 안식을 잃어버린 것은 말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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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희생
우리는 봄이 오면 마음이 들떠 어디론가 꽃구경을 가기를 원하고, 늘 가는 곳이라 할지라도 봄꽃이 핀 곳이면 가족들이 나들이하는 경우가 많다. 4월 초순에 비가 오는 산복도로를 거쳐 교회에 가는 도중에 아름답게 피어있는 벚꽃을 바라보는 순간 “아! 이렇게 아름답게 핀 꽃을 비바람이 망치면 어떻게 하지?”하는 걱정이 앞선다. 내 집 정원의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거워할 수 있는 벚꽃을 비바람 때문에 망치게 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통상 벚꽃은 일본의 나라꽃이라 생각하고 별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은데 실상은 원산지가 우리나라 제주도라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나라의 꽃이니까 더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라 믿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잎도 피우지 않고 살얼음이 언 메마른 땅속에서 뿌리를 내려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한겨울 내내 자기의 몸을 단단히 무장하여 정한 시간에 꽃을 피우는 식물이 바로 벚꽃이라는 데서 관심이 더 가고 피어있는 그 자체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가정집 정원에 있는 꽃나무들은 그래도 춥다고 싸주기도 하고 거름도 하며 옮겨주기도 하고 가지치기도 하지만 벚꽃은 차가 많이 다니는 길가나 산 중에서 전혀 무관심 속에 홀로 자립하여 이른 봄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 너무 장하고 아름다울 뿐이다. 꽃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수 있는 시간은 겨우 일주일도 안 되기에 항상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렇게 고생하여 잠간 동안을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선사하기 위해 정말 희생한 벚꽃의 수명이 좀 오래 지속 되면 얼마나 좋으랴. 게다가 벚꽃이 질 때에도 벚 눈을 내려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아무 불평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따뜻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마치 눈이 오는듯한 모습으로 꽃눈이 낙화한다. 그것이 바로 자연적인 아름다움의 자체가 아닐까? 흰 꽃잎이 떨어진 것은 분명히 하얀색인데 바람이 불어 모인 블럭 바닥은 분홍색 꽃눈으로 소복하게 쌓인다. 눈은 밟으면 ‘뽀드득’이란 소리라도 내지만 떨어진 꽃눈은 아무리 밟아도 소리를 내지 않고 인간의 발과 자동차의 바퀴에 짓밟히며 휘날릴 뿐이다. 오직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순종하여 이렇게 끝까지 희생하는 것이 바로 벚꽃이라는 것에 나는 감동을 받는다. 우리 주위에도 다른 사람의 아무런 도움이 없이 주님이 말씀하신 일들을 잘 수행하여 사회에 귀감이 된 아름다운 모습이 매스컴에 등장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분들은 오직 자기에게 주어진 미션을 좌우를 살피지 않고 오직 앞만 바라보고 나아갔기 때문에 큰일을 해내었을 것이다. 한낱 미물과 같은 식물도 말없이 자기를 희생하고 아름다움을 선물하는데 우리가 기대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지 못하면 실망하고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벚꽃은 자기의 아름다움을 봄꽃으로 인간인 우리에게 잠간 보여주기 위해 동한의 춥고 쓰라린 고통을 다 견뎌내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변함없이 희생한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믿음의 형제들과 이웃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정말 벚꽃처럼 나를 희생하고 말없이 맡겨진 일을 수행하는 데 최선을 다하면 우리가 사는 곳이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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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저축할 내용 (창41:46-57)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에 보도 된 내용에 의하면, <영국 교육과정평가원>이 새로운 아동 교육개혁 방안을 발표 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11세-16세까지 중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금융교육을 학교 정규 과목으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수학을 배우고 과학을 배우는 것처럼 이 수업을 통해서 스스로 부채를 관리하는 것을 배우고,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 연금 계획 짜는 것을 배우고, 금리를 계산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는 9월부터는 모든 <영국>의 5세 된 아동들에게는 정부로부터 250파운드가 지원 되어서 자신의 펀드를 개설하게 된다고 합니다. 일반 가정의 아동들에게는 250파운드(약$500)의 펀드 자금이 지원되고 저소득층 아동들에게는 500파운드의 펀드 자금이 지원된다고 합니다. <영국>정부가 이렇게 어린 아이들에게 조기금융교육을 실시하는 까닭은 매년 해마다 개인 파산 신청자들이 늘어나는데 대한 대처 방안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사람이 일찍 돈을 알면 좋지 않다고 해서 어린아이들에게 돈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돈을 가르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돈의 가치를 알게 해야 하고, 올바르게 돈 버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고, 올바르게 돈을 저축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보다 더 안정된 내일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안정된 내일을 사는데 있어서 저축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 가운데 꼭 저축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많이 저축할수록 보다 나은 내일을 보장해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저축해야 할 것들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물질을 저축해야 합니다.(창41:46-57) 둘째로, 기도를 저축해야 합니다.(시32:6-7) 셋째로, 선행을 저축해야 합니다.(딤전6:17-19) 필요하고 좋은 것들을 많이 저축해서 오늘 보다 내일이 더 안정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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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해녀의 욕심
‘물숨’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제주 출신의 고희영 감독이 7년 동안 제주도 우도(牛島)의 해녀들과 함께 지내면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잘 몰랐던 해녀들의 삶을 속속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해녀들에게는 계급이 있습니다. 제일 높은 계급인 상군은 가장 깊은 바다까지 들어가서 작업을 합니다. 보통 15-20미터의 바다까지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중군이고, 맨 마지막 하군은 일명 똥군이라고도 부르는데, 2미터 이하의 바다에서만 작업을 합니다. 그 해녀들의 계급은 노력과 경험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자신의 숨 길이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바로 그 숨길이로 계급이 정해진다고 합니다. 이렇듯 상군, 중군, 하군 이라는 계급에 따라 해녀들이 작업하는 바다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하지만 모든 해녀들이 바다에 들어갈 때마다 동일하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물숨’입니다. 물숨은 바다 밖에서 숨을 쉬는 것과는 달리 바다 밑에서 들이마시는 숨을 의미합니다. 이 물숨은 해녀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아주 무서운 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에 한 두 명의 해녀가 물숨을 먹고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물숨은 다른 말로 하자면 욕심입니다. 자신의 숨 길이만큼 숨을 참으면서 작업을 하던 해녀가 다시 숨을 쉬기 위해서 물 위로 올라가려 합니다. 이 때 저 밑에 큼지막한 전복이 해녀의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그 순간, 그것에 대한 욕심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전복을 따기 위하여 물 아래로 내려가는 해녀는 그 물숨을 먹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사고를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면서도 욕심을 이기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해녀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은 자신의 숨만큼만 해산물을 따서 재빨리 물 위로 나오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부질없는 욕심을 경계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러하기에 해녀들은 바다를 가리켜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다는 무서운 곳이지만, 욕심을 버리면 친정엄마처럼 다 내어 주는 곳이야!” 우리는 손안에 그 무언가를 움켜쥐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숨을 참으며 견뎌냈을까요? 우리 또한 욕심내지 않아야 할 것,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에 욕심을 내다가 물숨을 마시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장 14-15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만족하는 법을 모릅니다. 진짜 자신들에게 필요한 영적인 것에 대한 열망은 없이 사실은 지금 필요하지 않는 것들을 위해서 더 더를 외치며 욕심에 사로잡혀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에든지 욕심을 품는 순간 불행이 시작됩니다. 욕심이 많을수록 불만이 많아지고 마귀의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욕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죄에 가장 약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욕심은 하나님께도 응답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다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에 응답하시지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여서 기도 응답에 대해서 의심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야고보서 4장 3절에서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의 기도는 좋아도 너희의 욕심은 싫다, 나는 결코 너희의 욕심에는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욕심을 내고 또 내지만 사실은 욕심으로 인해서 인간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서 이미 내게 주신 것에 자족하는 데 있고, 그 자족에서 진정한 감사가 나오고, 그 감사로 인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제 헛된 욕심의 물숨을 버리고 자족과 감사의 바른 숨을 쉬면서 진정한 행복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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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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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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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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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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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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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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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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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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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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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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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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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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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내 이름을 더 많이 불러 줄 수 없겠니?
- 걸어가며 주님께 하소연했다. “주님, 제가 기도할 때 듣고 계신 건가요?” 즉시, 마음으로 음성이 들려왔다. “그래, 성한아, 듣는단다. 너는 내가 너의 음성을 듣는지, 안 듣지, 헷갈리지만 나는 늘 듣고 있단다. 네가 안 듣는 것 같이 여길 때도 듣고 있단다. 그런데, 성한아, 나는 네가 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감격한단다.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나는 온몸이 절여져 온단다. 네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 너무 좋단다. 나는 네가 너무 좋단다. 네가 나의 이름을 부를 때 전율이 온단다. 성한아, 성한아, 더, 더 많이 나의 이름을 불러 줄 수 없겠니?”라고 하셨다. 나는 길을 가다가 한 쪽에 서서 엉엉 소리 내어 한참 동안 울어 버렸다. 사람들은 내가 왜 우는지 몰랐을 것이 틀림없다. 들려주신 음성 때문에 울 수밖에 없었다. 주님을 깊이 생각하다 들려주시는 음성을 듣는 시간은 행복한 시간이다. 저절로 화답이 나오게 되고 천사들과 함께 춤을 추는 시간이다. 내 안에 잠자던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시간이다. 그 후 자주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 난 울보인 것 같다. 십자가에서 완전한 나를 만들어 주심을 고백할 때마다, 눈물이 자꾸 난다. 쾌활하고 명랑하다가도, 혼자 있을 땐 많이도 울곤 한다. 주님이 좋아서 운다. 지금도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난 주님이 너무 좋다. “주님, 주님이 너무 좋습니다!”라고 말하면 운다. 주님을 불러드리는 것이 그렇게 좋으시다고 하시니 황송하고, 감격이다. 자주 주님의 이름을 부르도록 하자. 주님을 불러드리는 것이 주님을 감동을 드리는 일임을 믿음으로 알고 사랑을 고백하며 자주 주의 이름을 부르자. 주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자. 약속을 붙잡고 많이 기도하자. 자신에게 기도한 것을 선포해 주며 응답 되었음을 말해 주자. 그때마다 임마누엘의 열정이 넘쳐날 것이다. 복음증거를 위해 사는 인생 속에 표적과 기사로 더욱 확증해 주실 주님을 찬양하며 확신하자. 영감으로 깨닫게 해 주신 말씀이 많아지도록 말씀을 주장하고, 내세우자. 말씀을 묵상하며 믿음으로 인정만 한다면 표적과 기적을 삶은 시작된 것이다.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왔노라고 말씀하신다(요한복음 10:10 참고). 예수만 믿으면 영원토록 생수의 강이 흐른다. 예수만 믿으면 아들이 있는 자가 된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다(요한복음 5:12 참고). 다른 것을 더 보태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예수 안에 산다. 그래서 우리에게 능력이 있다(빌립보서 1:6). 우리에게 자유가 있다(요한복음 6:32 참고). 우리에게 예수 생명이 있다(요한복음 일5:12). 우리에게 새로운 신분이 있다(고린도후서 5:17 참고). 우리는 주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요한복음 14:20 참고). 주님은 어떤 문제보다 크신 분이시다. 당신이 날마다 영감을 받고 산다는 것을 발견하라.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며 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라. 어릴 때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관두게 된다. 성경은 장성한 자가 되면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라고 말씀하신다(고린도전서 13:12 참고). 장성한 자가 되면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나 자신도 온전히 알게 될 것이다. 주께서 나를 아시는 나는 어떤 나일까? ‘온전한 나’이다. ‘온전한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 천국에서 생길 일이다. ‘온전한 나’를 발견하게 되면 안식을 누리게 된다. ‘온전한 나’를 발견할 때, 더 나은 무엇이 되기 위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는 완벽하고,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만족이 넘쳐 안식하게 된다. ‘온전한 나’를 발견하면, 전적으로 주님의 이름을 높이며, 영광만 돌리게 될 것이다. ‘온전한 나’를 발견하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얼마나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얼마나 나를 사랑하셔서 이 땅에 오셨으며, ‘온전한 나’를 만들기 위해 하신 일이 목숨을 버리셔야만 했다는 사실 앞에 영원히 찬양하는 힘이 생겨 버릴 것이다. 목숨을 바쳐 건져 낸 자녀가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주님은 감격하신다는 것을 알고는 자주 주님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이 일은 먼 훗날 육신의 몸을 떠나 천국 가서 일어날 일이 아니다. 천국 가서가 아닌 지금 할 수 있고 해야 한다.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신 놀라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인정하면 된다. 바로 이 시간부터 영원히 그렇게 살기로 결단하자. 그리고 주의 이름을 불러드림이 주님께 감격인 줄 알고, 주님의 이름을 자주자주 많이 불러드릴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만들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사도행전 2:21)라고 하심은 주의 이름을 불러드림이 얼마나 주님께 감격이심을 표현하신 말씀이다. 십자가를 지신 후 주님의 이름만을 불러 달라고 하신다. 그러면 구원받는다고 오늘도 눈물 어린 눈으로 주님의 이름을 불러 주기만을 기다리신다. 모든 역사의 중심축을 십자가를 지기 위해 맞추시고, 전력을 다하셨던 주님은 이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만을 간절히 기다리시고 계신다.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마가복음 10:46-47)라고 소리 지를 때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라고 했지만,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마가복음 10:48)라고 부르짖는, 주님의 이름을 불러 본 적이 언제였던가? 지금도 이렇게 주님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싶다 하신다. 십자가의 고통을 고통이라 하지 않으시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 두시고는 “나의 이름만 불러다오”라고 하시며, 간절히 기다리시는 주님의 이름을 많은 사람이 불러드리도록 목숨 바쳐 세상 끝날까지, 내가 아는 사람,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이름을 부르도록 전심전력할 것을 결단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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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내 이름을 더 많이 불러 줄 수 없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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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장례용어에 대한 문제 제기
- I. 서언(序言) 최근 신실한 교인이며, 대권 주자로 부각되는 어떤 유명인사의 부친상에서 삼우제(三虞祭)란 용어가 공공연히 사용되는 것을 보면서 기독교적 장례 용어로 적합한가를 잠시 생각한 적이 있다. 문제 있는 용어지만, 현실적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먼저는 성경에 나오는 장묘문화와 용어 정립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인식하면서 이에 대한 기고를 계속하고자 한다. 그러나 앞서 몇 차례 밝힌 대로 여기에 대한 신학적 정립은 한계가 있다. 이에 지난 호부터 저명한 구약학 교수이며 장로회 신학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김중은 교수의‘기독교적 장묘문화에 대한 고찰’을 축약해서 연재했고, 앞으로도 몇 차례 계속하고자 한다. II. 김중은 교수의 시대에 따른 성경의 장묘문화 고찰(2) 김 교수는 인류의 시대적 구분에서 이스라엘의 장례의 역사를 이렇게 나누었다. 먼저 지난 호에서 언급한 1, 2항을 다시 논하고, 계속 3항 이하를 축약하거나 옮기면 다음과 같다. 1. 팔레스틴에서 확인되는 가장 오래된 장례: 중기 구석기 시대(주전 15,000년경 이전)의 것으로 갈멜산의 지하 동혈들에서 발견된다. 2. 중석기 시대(주전 15,000-8,300 년경): 역시 지하 동혈들을 사용하였고, 매장은 옆으로 웅크린 자세와 두개골만 하기도 했고, 개인 혹은 집단적으로 이루어졌다. 여성의 경우는 가공된 장신구들도 함께였고, 모든 무덤위에는 돌을 세워 표시를 해 두기도 했다. 3. 신석기 시대(주전 8,300-4,500 년경): 고인돌(dolmen) 무덤 양식이 출현한다. 또 여리고 지역에서는 가옥의 터 아래에 유골들을 매장했다. 4. 동석기 시대(주전 4,500-3,100 년경): 팔레스틴 해안지역에 새로운 장묘문화가 생겨났는데, 토기로 가옥을 본떠 만든 뼈 상자에 유골을 담아 사암(砂巖)벽을 판 동굴에 보관했다. 또 큰 옹기에 시신을 넣어 가옥의 터 밑에 매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5. 초기 청동기 시대(주전 3,100-2,200 년경): 무덤이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 졌는데, 주로 석회암 층에 수직갱도를 만들고 다시 옆으로 원형 또는 사각형의 묘실에 이르는 구조를 보여준다. 부장품으로 다양한 토기그릇들이 있고, 그릇에는 음식물이 담겨있는 경우도 있다. 6. 중기 청동기 시대(주전 2200-1550 년경): 여러 형태의 무덤 양식들이 있다. 초기 청동기 시대와 같은 방법으로 묘실을 만들고, 시신은 돗자리 같은 깔개나 나무 판자위에 반듯이 뉘었다. 비녀나 머리핀들이 발견되며, 다양한 일상적 도구들도 볼 수 있다. 또 바위를 직접 파서 묘실을 만들기도 했다. 보통 한 무덤에 40구까지 사용했으며, 매장할 자리가 없으면, 이전의 시신 유골은 한쪽으로 모아 쌓아 두기도 했다. 이 시대의 특이한 것은 봉분을 갖춘 무덤양식도 나타났다. 시신을 매장한 뒤 흙과 돌로써 높이와 지름이 각각 3-4m 되는 봉분을 쌓았고, 다수의 토기들과 무기류가 부장품으로 드러났다. 7. 후기 청동기 시대(주전 1,550- 1,200 년경): 수직 또는 경사진 계단식 갱도를 입구로 하여 묘실로 연결되는 무덤양식이 보편화되었다. 하나의 묘실은 계속해서 사용되었고, 많은 토기류가 부장품으로 드러났다. 8. 철기시대(주전 1,200-600년경): 과거에 사용되던 자연 또는 인조 동혈이나 석실묘가 재사용되었다. 이 시대의 새로운 발전은 여러 개의 방을 갖춘 묘실로서, 지상에서 지하로 계단을 만들어 전실(前室)에 이르고 여기서 여러 묘실들로 연결된다. 묘실은 그 벽면의 둘레에 유해를 안치하는 대(臺)를 만들었고, 어떤 묘실에는 대 대신 벽을 파서 그곳에 유해를 안치했다. 이러한 석실묘 형태가 제2 성전시대 가장 일반적인 무덤형태가 되었다. 그러나 일반 평민들은 석실묘를 사용하지 못하고, 평토장을 했다고 본다. 9. 바벨론 포로기, 페르시아, 헬라, 로마 시대(주전 600-주후 70년경): 바벨론과 페르시아 시대와 크게 달라진 점은 없고, 부장품들을 통해서 그 시대를 알 수 있다. 주전 3세기 헬라시대 부터는 카타콤(the catacomb)방식의 무덤형태가 새로 나타나며, 여기에는 무덤비문과 벽화 장식도 등장한다. 로마시대 이후 예루살렘 주변 무덤들에서는 석회암으로 만든 수많은 직육면체 유골함들이 드러났으며, 이것은 유해의 살이 다 내린 다음 유골을 수습하여 보관한 것이다. 여기에는 피장자의 이름과 함께 단순한 기하학적 장식 무늬가 새겨져 있다. III. 중략하고 맺는 말 전 호에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김 교수는 그의 논고의 서론에서“성경 전체를 통해 장묘문화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가 없기 때문에, 여러 시대의 각기 다른 역사적 배경에서 일관된 장례법은 재구성할 수 없었고, 각 시대에 나타나는 장묘문화를 이스라엘도 어느 정도 보편적으로 공유했을 것으로 본다.”고 솔직히 밝힌바 있다. 본 호에서의 그의 연구에서도 역시 그러한 면을 밝히고 있다. 이는 앞서 논한 바 있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동서양의 장묘문화와 비슷한 경로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이상과 같은 김중은 교수의 연구 발표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갈 것이지만, 지면 관계상 이번 호에서는 여기에서 중략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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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장례용어에 대한 문제 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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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코미디 리그’ 같은 총동창회 임시총회
- 정기총회의 공과 지난 5월 총동창회 정기총회는 그동안 총동창회를 위해 수고한 임원들의 공을 무시하거나 부인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이전까지의 특별한 사정으로 인해 간접추천, 추인 등의 절차를 따라 임원들이 세워질 수밖에 없었던 사정도 이해된다. 총동창회 회원들의 미온적인 협력이 결국은 그런 행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이해된다. 그러나 이제는 한 번 바꿔볼 때도 되었다. 마치 어느 특정한 그룹의 밀실 야합적인 모습으로 임원들을 줄 세우기식으로 추천하였고, 총동창회를 위해 적극적으로 일을 해 보고자 하는 회원들의 임원출마가 원천적으로 차단되었다. 이러한 절차를 따른 총동창회의 임원선거는 동창회의 발전적인 미래를 담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뜻있는 회원들이 공회 앞에 합법적인 발언 기회를 얻어 의제를 제시하였고, 의제에 대한 다양한 토론과 격론 끝에 상정된 의제를 표결에 붙여서 회칙이 수정되었다. 개정된 임원선거 규칙은 공천위원 추천제에서 본회에서 직접추천, 혹은 자원하는 방식으로 바꾼 것이다. 개정된 규칙에 따라 적법하게 임원선거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를 문제 삼는다면, 이는 분명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는가? 아니나 다를까 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특정인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정치적인 입김으로 이상한 임시총회를 개최하여, 정기총회를 통하여 선출된 회장을 불신임하는 형태를 취하고 다시 추대하여 보선한 초법적인 행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적법한 정기총회를 뒤집은 불법적인 임시총회 총동창회는 2021년 5월 24일 오후1시 신대원101호 강의실에서 개최한다고 공고하였고, 그 일정에 따라 총동창회 정기총회는 회집된 회원으로 개회되었다. 총회는 회순에 따라 적법하게 진행되었고 임원 개선과 안건을 다루고 폐하였다. 그런데 전임회장단은 총동창회 회칙 12조 2항에 수석부회장을 수정하지 않아 그대로 살아 있고, 13조 1항에 ‘수석부회장은 당연직으로 추대’로 전년도 총동창회 총회에서 받았는데, 이를 지키지 않은 것은 불법이라고 주장하면서 200여명의 서명을 받아 임시총회를 요구하였고, 그에 따라 총동창회 임원회는 임시총회를 받아 들여 공고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정기총회를 불법적인 임시총회로 뒤집은 초유의 사태이다. 무엇보다 지난 정기총회는 수석부회장을 당연직으로 추대하는 것을 본회에서 직접 추천하여 투표하도록 개정하였기 때문에 적법한 절차를 밟은 것이다. 만일 그것이 부당하다면 당시 정기총회에서 의견을 개진하여 관철시켜야 마땅한데, 정기총회가 폐한 후에 문제를 삼아 임시총회를 요구한 것은 다분히 정략적이며 정당하지 못한 처사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임시총회를 적어도 1주일 전에는 공고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보에 7월10일자에 공고하여 절차에 문제가 있다. 그리고 임시총회 소집 요건에 보면 1)적법절차에 따른 임원 구성(보선)과 2)회칙보완 수정이라고 명시 했다, 그런데 어떻게 적법한 절차에 따라 선출된 회장을 다시 받을 수 있는가? 그 자체가 불법일 뿐 아니라 상정된 안건도 아니기 때문에 초법을 자행한 것이다. 따라서 이는 명백한 불법이다. 이렇게 볼 때, 불법적인 방법으로 선출된 현 회장은 그 정당성을 상실했다. 그리고 서명한 회원200명에 절반도 못 미치는 61명(전임회장 9명과 임원 14명, 담임목사, 부목사)이 참석하여 정기총회를 한지 불과 한 달 남짓 만에, 재론하여 회칙을 수정하고, 임원을 개선하는 불법적인 전횡을 저지른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임시총회소집이란 말은 이미 정기총회를 인정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임시총회를 주장하는 이들은 이미 스스로 정기총회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만약 정기총회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불법총회로 규정하고 정기총회 소집을 요구해야 마땅하지 않는가? 이상한 임시총회 사회 금번 총동창회 임시총회(21.07.16) 개회 시 지난 정기총회를 통해 선출된 회장으로 하여금 회의를 주재하게 한 것은 이미 정기 총회에서 선출된 회장을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임시총회는 임원 개선에 들어가면서 정기총회에서 선출된 회장을 단상에서 내려오게 하고, 전임 회장이 회의를 진행하고 임원 개선을 했다. 이는 법과 상식을 뛰어넘는 불법적인 임시총회이다. 전임회장은 이미 정기총회를 통하여 그 실효가 상실되었다. 그런데 적법한 회장을 의장석에서 내리고 무슨 자격으로 버젓이 회의를 주재한다는 말인가?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권한남용이라는 말 자체를 사용하기도 부끄럽다. 그리고 전임회장이 의장석을 차지하고 회칙을 수정하는 것을 주재하였고, 임원을 개선하였다. 더욱이 해괴한 일은 다른 임원 개선한 것은 차제하고 전년도 회칙을 들어서 수석부회장으로 있었던 김홍석 목사를 회장으로 추대한 후에 본인이 출석하지 않았기에 사의한 것으로 하고 정기총회에서 선출된 회장을 다시 받았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이상한 임원개선이며, 이는 총동창회의 정기총회를 기만하였고, 또 총동창회 자체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것은 세상의 어떤 회의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비상식적이며, 불법적인 처사임이 분명하다. 코미디 같은 이 회의 진행에 동의하고 박수를 친 회원들은 상식과 법을 어떻게 알고 동의한 것인지 진심으로 물어 보고 싶다. 전임회장들의 놀이터가 된 임시총회 어느 모임이든 전임회장들은 그 경륜으로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 영향은 미미하면 미미할수록 좋다. 한 교회에 원로목사는 담임목사가 전체적으로 교회를 이끌어나가도록 온전히 뒤에서 기도하며 도우는 것이 은혜로운 교회이고 정상적이 아닌가. 이런 상식과 윤리가 지켜지지 않고 문제되어 상당한 어려운 교회들을 종종 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총동창회에서도 전임회장들은 그야말로 전임회장이어야 한다. 전임회장이 상왕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금번 임시총회 건에도 전임회장들이 소위 총동창회를 바르게 세운다는 미명 하에 도에 넘치는 개입으로 총동창회를 불법의 장으로 만들어 버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차하면 세력으로 임시총회를 요구하여 정기총회를 완전히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아주 나쁜 선례를 만들었다. 설령 지난 5월 개최된 정기총회가 본인들의 생각에 못 미치는 것이라 할지라도(결코 그렇지 않지만), 전례 없는 임시총회 개최를 조종하여 코로나 상황에서 진행한 행동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임시총회가 전임회장들 발언의 전유물처럼 여기고 전횡을 휘두르므로 총동창회의 격을 완전히 실추시켰다. 적어도 전임회장들이라면 정기총회에서 진행된 것을 존중하고, 문제점이 있을 때 그것을 차기 총회에서 정당하게 처리하도록 지도하는 것이 전임회장의 처신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총동창회 재정 통장 관리의 이중성 총동창회의 재정운영은 노회에 참여하는 목사회원들에게 소위 협동총무라는 굴레를 씌워 그들로 하여금 반강제적으로 각출하게 하여 회비를 수령하고 있다. 장학금 등으로 후배들과 신학교를 위해 사용한다니 대부분의 목사들은 아무런 반론 없이, 회비 각출에 순응하여 지불한다. 총동창회의 운영을 위한 수입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는, 신대원 장학금 명목으로 전체 회원을 상대로 봄. 가을 노회 시마다 일년에 두 번씩 거두어 가는 회비이고, 둘째는, 임원들의 임원 회비이고, 셋째는, 총동창회 부부수련회를 위한 목사들과 전국교회 후원금이다. 이 세 종류의 수입에 관하여 정기총회에서 종류별로 상세하게 보고되지 않고 있다, 임원회비는 용인된다 할지라도, 총동창회 부부수양회 시에 전국 교회에서 부담한 후원금은 결국 총동창회의 공적인 재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재정의 지출에 대해 정기총회에서 공개적, 구체적, 객관적인 보고를 해야 할 것이다. 총동창회의 공식 행사에 대한 재정보고는 반드시 총회에서 보고되어야 할 것이다. 개정된 회칙은 즉시 발효되는 것이 통상이다. 어떤 회든지 개회가 선언되고, 절차에 따라 진행될 경우 회칙수정을 하고, 그 수정된 회칙에 따라 임원개선이나 사업 등이 논의된다. 회칙수정이 앞부분인 것은 그 수정된 것으로 회의를 진행하기 위한 것이 주 이유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정된 회칙은 즉시 발효한다고 것이 회칙의 통상이다. 그런데 즉시 발효하도록 개정한 것을 두고, 악의적인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한 회기, 아니 체 두 달이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몇 몇의 입김에 의해 종잇장 뒤집듯이 뒤집는 것은, 그야말로 전제정치가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고려신학대학원 총동창회는 어떤 특정한 그룹의 전유물이 아니다. 어떤 특별한 힘이 있는지 모르나 왜 이렇게 전임회장들이 그 입김을 행사하려고 하는지, 그것이 진정한 애정인지, 아니면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묻고 싶다. 순수한 친목 단체인 총동창회를 정치 단체로 이용하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생각한다. 어디든 완전한 것은 없다. 불완전한 것이라도 인정하고, 순리를 따라 시간을 갖는 것이 더 옳은 방법이다. 이번 임시총회는 코미디 중의 코미디를 보는 것 같았다. 이렇든 저렇든 원하는 바를 얻게 되었다고 자위하는 부류들도 있겠지만, 정말 안타까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차후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지만, 이런 식으로 전임회장들이 행동한다면 향후 총동창회에 일어나는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분명히 인지해야 할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있길래 ...... 코로나19의 변종으로 인해 교회의 예배가 위협을 받는 상황에, 당장 오는 주일 예배가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 심각한 상황에 총동창회가 모여야 할 명분이 무엇인가? 예배를 지키기 위하여 헌법소원을 하며 사투를 벌이는 상황보다도 어떤 더 중요한 명분이 있는지를 묻고 싶다. 만약에 감염의 문제가 발생하면 학교와 고신교회의 치명적인 타격이 분명한데도, 예배보다도 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겁쟁이 고신의 목사들이 그렇게 용감하게 모여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 기고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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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코미디 리그’ 같은 총동창회 임시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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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환 전도사] 사회 전반에 스며든 이단(異端)과 사교(邪敎)의 그림자
- 이전 글에서는 기독교 주요 교단으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된 ‘통○교’가 “정치와 언론”을 통해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까지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기업·의료·문화·예술·교육·봉사’를 통해 사회 전반적으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통○교의 모습을 밝히고자 합니다. 통○교는 리조트와 여행사, 건설·식품·제조·출판 관련 기업들을 운영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경제적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정보들은 여러 언론이나 경제 전문지에서 이미 소개되었습니다. 그리고 통일교는 문화·예술 단체와 사회복지 관련 분야에도 발 빠르게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문화·예술 단체에는 리틀 엔○○ 예술단, 유○○설 발레단, 청○평화월드센터가 있으며 사회복지 관련 분야에서는 자원봉사 단체인 애○, 의료법인인 청○병원, 실버타운인 청○ 빌리지와 함께 여러 수련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선○대학교, 청○국제중고등학교, 선○화예술고등학교, 선○여자중학교, 선○유치원, 선○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분야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으며, 통○교 관련 신학교를 국내(선○대학교, 선○UP대학원대학교)와 해외(미국 통○신학대학원-UTS)에 설립하여 오랫동안 교세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관련 교단과 단체를 설립하여 한국 교회에 침투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많은 교단과 단체가 있는 한국 기독교 현실에서 통○교뿐만 아니라 이단 단체가 설립한 위장된 교단과 단체를 밝히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새롭게 설립되는 기독교 교단과 단체의 성격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인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처럼 통○교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쉽게 부딪힐 수 있는 다양한 분야에서 오랫동안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해 왔습니다. 이러한 통○교가 설립하고 관여하고 있는 다양한 분야의 기업과 단체는 서로 연결점이 돼 통○교가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주요 언론과 기독교 언론들을 통해 보면 통○교는 사회 전반적으로 관여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장해 왔습니다. 이러한 통○교의 모습이 한국교회에 주는 영향력은 매우 큽니다. 이미 사회 전반적으로 확장된 통○교의 기업과 문화·예술·교육 단체들은 사회적 이해관계 속에서 기독교인들과 연결되어 서로에게 영향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이러한 통○교의 영향력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한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자칫 잘못 대처하면 법적소송으로 번질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교회의 오랜 무관심과 우리의 안일한 사회적 이해관계가 신앙의 후배와 후손들에게 너무나도 뼈아픈 현실을 물려주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세상에서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회복함으로 교회의 선한 영향력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진실 된 사랑을 이웃과 나누고 전하는 모습이 회복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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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환 전도사] 사회 전반에 스며든 이단(異端)과 사교(邪敎)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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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진짜 문제는?
-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어촌 마을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고기잡이를 나간 배가 있었는데, 밤이 늦도록 돌아오질 않는 것입니다. 얼마나 걱정이 됩니까? 온 동네가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온 마을 사람들이 목이 빠져라 기다립니다. 그런데 이런 형편에서 설상가상으로 어느 집 아이가 촛불을 넘어뜨려서 한 집에서 불이 났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완전히 울상이고 혼비백산이었습니다. 배는 놔두고 그 불을 끄는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너무나 힘든 밤이었고 그러다가 아침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어렴풋이 저 멀리 그렇게 고대하던 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한 사람이 그 배를 발견하고 “배다. 배가 온다!”라고 소리를 치자 모두가 바닷가에 나와서 그 배를 맞았습니다. 그런데 그 배를 탔던 뱃사람 중에 한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어젯밤 바다에 뜻하지 않는 풍랑이 일어서 배가 방향을 잡지 못해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도저히 방향을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먼 육지에서 큰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불빛을 보고 육지가 저기구나 생각하고 항로를 바로 잡고 이렇게 육지로 무사히 올 수가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불난 집이 풍랑을 만난 많은 뱃사람들을 살린 것이지요. 독자 여러분, 우리는 우리 앞에 일어나는 한 가지 일만을 바라보고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큰일이 났다.”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 그렇게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달라야 합니다. 그 어떤 상황이라 하더라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저 천국을 주실 하나님만이 아니라 지금 실제의 삶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려움과 시련의 단면만을 보면 시험이고 문제일 수가 있지만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계획안에서 볼 때는 더 크고 놀라운 선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 자녀의 특권이며, 그것을 믿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믿는 것입니다. 성경 복음서에 보면 그런 기사가 나옵니다.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가던 제자들은 풍랑을 만나자 그만 호들갑을 떱니다. 예수님이 함께 배에 타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무서워서 난리가 났습니다. 배 고물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며 “주여 일어나소서. 우리가 다 죽겠나이다.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말하며 전부 다 죽은 것처럼 호들갑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큰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함께 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잠잠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른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제자들 생각과 주님 생각은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상황이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주님은 믿음이 작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생애에서 진짜 문제는 삶의 상황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어떤 삶의 경우에도 절망하거나 좌절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내가 아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나를 선택하시고 구원하셔서 자신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천국 가는 그 날까지 최선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만나는 그 어떤 사람이나 사건이나 상황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나를 유익되게 할 것입니다. 바로 그 믿음으로 그 어떤 삶의 상황 가운데서도 결코 낙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하나님이 주신 신앙의 길, 인생의 길을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진짜 문제는 삶의 상황이나 환경이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믿음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담대히 이 세상을 살아가시는 독자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본지 590호 게제된 박봉석 목사님의 칼럼 <진짜 문제는?>의 원본으로, 첫 문장에 편집상의 오류로 수정해 게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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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진짜 문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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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하나님, 일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 인간의 삶은 어떤 면에서 먹고, 자고, 일하고, 먹고, 자고, 일하고, 또 먹고, 자고, 일하는 것을 되풀이하는 삶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간에 우리는 깨어있는 대부분 시간을 일하는데 보냅니다. 남자거나 여자거나, 교육을 받았거나 받지 못했거나, 부유한 자거나 가난한 자거나 간에 우리 모두는 일을 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전형적인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그렇게 유쾌한 일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일이라는 것이 본래 가지고 있던 존엄성과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약이라는 것이 쓴 것이기는 하지만 건강을 얻는데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일이라는 것 역시 유쾌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필요로 하거나 원하는 것을 얻는데 반드시 필요한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일 그 자체의 가치만을 가지고 일할 필요를 느끼거나 일하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현대인들이 일을 하는 것은 돈을 필요로 하거나 돈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음식, 의복, 가옥, 오락, 휴가, 안전, 은퇴 후의 안락한 생활 등을 돈으로 살 수 있기 때문에 일을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것들을 얻기 위해서 일은 필요하면서도 유쾌하지 못한 수단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스럽고 끝없는 질병과도 같은 노동 시간을 가능한 한 줄이려고 합니다. 그래야만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과 관계하여 우리가 듣게 되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나는 오늘 일해야 한다!”는 말이지, “나는 오늘도 일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일에 대한 이와 같은 태도는 올바르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일이란 거룩한 청지기로서의 소명이며 영적인 활동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일을 하도록 사명을 받았습니다. 고대 헬라인들은 일에 대해서 이러한 태도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헬라의 철학자 플라톤의 신은 일을 하는 신이 아닙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신은 위대하고 무한한 사상가일 뿐입니다. 플라톤의 신은 이 세계를 만든 신이 아니라 단지 계획했을 뿐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철학자는 귀족이며, 사상가며, 여가를 즐기는 사람입니다. 헬라인들에게 있어서 노동자들은 천대와 멸시를 받았습니다. 일을 천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우리가 아직도 손으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천하게 생각하고 머리로 사고하는 사람들은 더 높고 존귀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태도는 성경적인 태도가 아니라 이교적인 헬라적 태도입니다. 우리가 경배하고 섬기는 성경의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창조의 일을 하셨으며, 자신이 만드신 세상을 섭리하고 다스리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에게는 불법적인 파업이나 명퇴나 조기 은퇴라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세계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세계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창조 세계를 섭리하고 다스리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오늘도 이 세상을 유지 보존하시고 통치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또한 구속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보혈과 빈 무덤을 통해서 우리를 구속하시는 일을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중생과 성화, 그리고 영화의 방법을 통해서 우리의 구속을 적용하시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일을 하셨고 지금도 계속하여 일을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의 존엄성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의 타락은 일의 존엄성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존엄성을 가졌던 일(work)이 이제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노동(labor)이 되어 버렸습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일이 의미와 목적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일은 이제 인간의 이기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필요악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속하시고, 다시금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을 위해서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일에 새로운 활력과 존엄성을 부여해 주셨으며, 일을 한다는 것이 다시금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소명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가정과 일터에서 일을 할 때 우리 모두 일할 수 있는 사람으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받은 성도로서 이제는 단순히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사명자들이 되었다는 사실로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오늘도 일할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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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하나님, 일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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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장례용어에 대한 문제 제기
- I. 서언(序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절실한 의문이요 관심사는 죽음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란 대 명제일 것이다. 이에 우리 기독교인의 장례용어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고자 했으나, 이보다 우선 되어야 될 것은 장례 용어에 대한 역사와 그 문화적인 배경이 먼저 일 것 같았다. 이에 그동안 장례문화에 대한 동서양과 성경역사적인 고찰이 먼저라는 관점에서 계속 이에 대해서 논해 오고 있다. 이번 호부터는 성경 속에 나오는 장묘문화에 대한 역사를 논하면서 기독교적인 장묘문화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를 논하고자 한다. 그러나 앞에서 논한 바 있지만, 아쉽게도 이에 대한 기독교적 역사적 고증이나 신학적 연구와 분명한 장묘에 관한 구체적 예식에 대한 선행연구가 별로 많지 않다. 필자도 실천신학을 전공했고 장례용어에 대한 기고와 강의도 많이 했지만, 아직은 역부족이다. 이렇게 많지 않은 연구 속에서 구약학 교수로서 장로회 신학대학 총장을 역임했으며, 진해교회 출신인 김중은 교수의‘기독교적 장묘문화에 대한 고찰’은 정말 반가웠다. 이에 김중은 교수가 연구한 내용을 축약하고 여기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3~4회 정도 피력하고자 한다. II. 김중은 교수의 성경적 장묘문화의 서론 신구약 성경 본문에는 장묘문화에 관해 상세하고 체계적인 정보가 없기 때문에, 여러 시대의 서로 다른 역사적 배경에서 주어지는 단편적인 정보들로써 우리는 만족해야 한다. 한편 지난 19세기말부터 비교적 활발하게 진행되어온 성서 고고학 발굴의 결과로 성경의 역사현장인 가나안 지역과 고대 중동지역에서 수많은 무덤들이 발굴된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는 대부분의 경우 이스라엘인들의 무덤과 이방인들의 무덤이 확연히 구별될 만큼 그 차이가 드러나지 않았다. 이 지역의 무덤, 유해나 유골의 형태, 부장품들을 보아서 그 민족이나 종교적 특성을 가려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지금까지 고고학적인 지식만으로는 이스라엘 장묘문화의 특징을 확인하기가 어렵다. 아마도 성경의 이스라엘은 자신의 야훼 유일신 신앙과 큰 갈등 없이 가 시대마다 고대 가나안과 그 인근지역에서 행해지던 장묘문화에 동참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성경본문이 단편적으로 알려주는 정보에서도 알 수 있는바 나름대로 신앙생활과 연관하여 어느 정도는 자신의 장묘문화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예컨대, 신 14:1 이하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이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위의 털을 밀지 말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또 신약시대에는 “유대인의 장례법”이 있었고, 예수의 시신도 이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장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요 19:40 참조; “... according to the burial custom of the Jews", NRSV). 유대교에서는 역사적으로 오늘날까지 나름대로의 장묘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 이 글에서는 신구약 성경본문에 나타나는 장묘문화를 중심으로 살표보는 데에 국한하기로 한다. 그러나 먼저 성경의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이 각 시대에 보편적으로 공유했다고 생각되는 장묘문화에 관해 성서 고고학적인 견해를 요약해서 살펴본 후, 성경본문에 나타나는 장례문화의 내용을 간추려 정리하고자 한다. III. 김중은 교수의 성경시대의 보편적 장묘문화 고찰 전통 민속신앙과 근대로 오면서 유교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한국의 상례(喪禮)에서는 상당히 복잡한 장묘문화의 방식과 절차를 볼 수 있다: 1)초종(初終) 2)습(襲): 소렴(小殮)과 대렴(大斂) 3)성복(成服) 4)조석전(朝夕奠)과 상식(上食) 5)치장(治葬)과 천구(遷柩) 6) 발인(發靷)과 반곡(反哭) 등 여기에 죽은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다양한 제사절차까지 포함된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성경의 신구약 각 시대에 이러한 체계적이고 일관된 장례법은 재구성할 수 없다. 다만 고고학적인 시대구분에 따라 각 시대에 나타나는 장묘문화를 이스라엘도 어느 정도 보편적으로 공유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1. 팔레스틴에서 확인되는 가장 오래된 장례는 중기 구석기 시대(주전 15,000년경 이전)의 것으로 갈멜산의 지하 동혈들에서 발견된다. 시신을 지하 구덩이에 넣고 그위에 돌들을 얹어 놓는 형식이며, 시신은 무릎과 양손이 가슴에 닿도록 웅크린 자세이다. 2. 중석기 시대(주전 15,000-8,300 년경) 에는 역시 지하 동혈들을 사용하였고, 시신은 옆으로 눞여 웅크린 자세가 나타나며, 두개골만 매장한 경우도 있다. 매장은 개인적 또는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며, 피장자가 여성일 경우는 조개껍질, 뼈, 돌로 가공된 장신구들이 함께 드러난다. 무덤위에는 돌을 세워 표시를 해 두었다. VI. 중략하고 맺는 말 김중은 교수의 연구 발표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갈 것이지만, 지면 관계상 이번 호에서는 여기에서 중략한다. 여기까지 볼 수 있는 것은 본인이 저명한 구약 학자이지만, 여기에 대한 전문적 연구가 아직은 미흡하다는 솔직한 지적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이에 대한 계속적인 연구와 노력으로 진정한 우리 기독교적인 장묘문화를 이루어 나가야 되겠다는 많은 이들의 학구적인 사명감이 있다면 이는 분명히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정희 목사(진해영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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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장례용어에 대한 문제 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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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시 기독교 연합회 6.25 구국성회 설교문
- 1. 코로나 펜데믹이 18개월 동안 계속되고 있고 아직도 끝이 안 보인다. 국가도 어렵고,기업도 어렵고, 국민들도 어렵고 교회도 어렵고 성도들의 어려움도 말이 아니다. 혹자는 6.25 전쟁 때보다 더 어렵고 힘든 것 같다고 한다(?) ① 그런데 이런 끔찍한 일이 왜 생기게 됐을까? 잠6: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국가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하셨는데 거기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 ㄱ.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믿음으로 깨어 있으라고 하셨다. 벧전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ㄴ.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와 교회안에 알곡을 고르시는 것이다. 마3: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을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② 코로나 펜데믹이 무엇 때문에 왔던지 우리는 하나님께 회개해야 산다. 눅13: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같이 망하리라. ㄱ.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 a. 교회와 성도가 “소금의 맛”을 잃어버려 세상의 소금이 못되고 사람들에게 버림 받고 땅에 떨어져 짓밟히게 됨을 회개하라 눅14:34~35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땅에도 거름에도 쓸데 없어 내어 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하시니라.아멘 b. 천국소망,부활소망을 잃어버리고 육신의 것,세상의 것만 위해 살고 있음을 회개해야 한다. 골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으셨느니라. 좋으신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떠한 죄를 범했어도 하나님 전에 나가서 진실하게 회개하면 들으시고 다 용서해주시고 우리를 그 모든 고통에서 구해 주신다.필독(왕상8:37~40) 2. 그리고 우리나라는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시33:12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로 자기에 하나님으로 삼았다는 것은? ①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섬기는 것이다. ②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③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하나님께만 구하는 것이다. (1) 황송하게도 “대한민국”은 이 믿음 위에 세우주신 나라이다. ① 구한말 세계 열강속에 이 나라가 망해갈 때 선교사들을 통해 복음이 들어왔다. 나라가 망하고 소망이 없을 때 0.8% 밖에 안되는 기독교는 이 나라를 살렸다. 3.1 운동, 상해임시정부 수립,독립운동,문맹퇴치,계급철폐,남녀차별철폐,미신타파,물산장려운동,농촌계몽,거룩운동(금연,축첩폐지,정직) ② 일제 치하에서 해방시켜 주신 후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만들어 주셨다. ㄱ. 1948.5.31. 제헌국회에서 198명의 의원 중 이윤영 의원(목사)이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하고 시작하였다. ㄴ. 1948.7.27.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유민주주의 헌법을 만들어 주셨다. ㄷ. 1948.8.15. 대한민국의 설립을 공포하였다. 1270년 몽골침략 이후 680년 만에 독립국가 된 것이다. ③ 그러나 유엔과 국제사회에서 독립국가로 인정받는 과정은 매우 힘들었지만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으로 축복해 주셨다. 1948.9.21.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유엔 총회에서 인준을 받으려고 장면,모윤숙,김활란,장기영,정일형을 파송함. 그러나 소련 대표의 집요한 반대 공작과 위성 국가들의 “필리버스터”로 유엔 총회가 폐회되기 전날까지 승인도 못 받고 분위기가 최악이었다. 그러자 장면 대표와 모윤숙이 새벽에 교회에 나가 눈물로 간절하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였는데 그 날 소련 대표가 발언을 하다가 목이 아파 밖으로 나가고 즉시 투표하여 찬성 48, 반대 6, 기권 1표로 대한민국이 한반도에 유일한 합법적인 국가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 이것이 2년 후 소련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6.25 전쟁 중 유엔이 참석 후 처음으로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결의하여 1950.7.7일 한국에 유엔군을 파견하게 된 것이다. ④ 이 기적도 6.25 발발 7일 후 7월 2일에 부산으로 피난 온 이승만 대통령이 모든교회와 성도들이 나라를 위해 비상기도를 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초량교회와 모든 교회가 철야,새벽,금식 기도를 하고 시민들은 해운대 백사장에서 기도를 하였는데 7.7일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놀라운 축복을 주신 것이다.아멘! ⑤ 인천상륙작전도 금식기도의 응답이었다.(1950.9.15~19)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장로님이셨는데 세계 상륙사를 살펴보니 500번 상륙에 성공은 단 하나 ‘노르망디’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배 위에서 3일 동안 하나님께 금식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전쟁을 역전시킨 것이다.아멘! 이 외에도 이런 기적은 대한민국에 계속되었다. 1973년 빌리그래함 전도대회 때 ~ 남,북이 국가 경쟁력이 역전 됨 1974년 엑스플로74 ~ 땅굴 발견,안보를 튼튼하게 됨 1977년 민족복음화 대회 ~ 4,300만석(쌀) 100억불 수출 1980년 세계복음화 대회 ~ 88 올림픽을 유치하게 하심 1984년 한국기독교 100주년 ~ 대한민국이 중진국이 됨 1975~1985 10년 동안 기독교는 350% 성장 경제는 980% 성장함 이것은 세계 역사에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기적)이었다.아멘! 이 외에도 모든 것을 열거하려면 시간이 부족해서 그치려고 한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① 이 나라와 민족이 사는 길은 예수님을 구주로 잘 믿고 오직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나라가 살고 우리와 자손 만대가 사는 길이다. 그러므로 더욱 예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려고 힘쓰는 모두가 되자.아멘! ② 그리고 오늘도 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간절히 기도하고 교회에 돌아가서는 오늘과 같은 기도를 쉬지 않고 하도록 하자. ③ 그리고 빨리 이 나라가 복음화 되도록 예수님을 부지런히 전파하자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이 이 나라와 한국교회 그리고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에게 영원히 계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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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시 기독교 연합회 6.25 구국성회 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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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군선교의 대부 “손원일”을 아십니까?
- 해군 모든조직에 기독교정신으로 군가 만들고 군목 제도 창설 창원시 진해구 제황산 남녘 진해 바다를 바라보는 기슭에 손원일 선교센터(다락방)라는 조그만 문패와 함께 낡은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지나가는 왠만한 사람도 알지못하는 생소한 손원일 다락방이란 건물이다. 그런데 이 건물이 안고있는 보이지 않는 내용을 알고보면 기독교인으로서는 놀랄수 밖에없는 한국 군선교의 살아있는 발자취를 만날 수 있다. 1945년 8월15일 광복과 함께 대한민국 해군이 창설되고 한국 군선교의 꿈이 이뤄져 오늘까지 이어져온 역사의 산실이기 때문이다. 바로 한국 해군의 창설자이자 군선교의 대부 손원일제독의 복음 사역의 숨결이 있는곳이다. 손원일 제독은 목회자이자 일정때 독립운동가였던 손정도목사의 장남으로서 아버지의 하나님사랑과 나라사랑은 군선교로 이뤄야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있었다. 손원일은 신앙교육과 해외유학 등 학습을 마치고 향후 나라의 미래는 해양에 있다고 판단하고 꿈을 꾸어왔다. 그래서 무역업을 시작했으며 일제말에는 실업인으로 성공한 손원일은 해방과 함께 뜻있는 사람들과 해사대를 조직하고 사재를 들여 대한 해군을 창설한다. 평소 아버지 손목사로부터 배움받은 하나님 사랑과 나라사랑의 깊은 애국정신으로 대한 해군을 창설키로 한 것이다. 당시 미 군정과 협의하여 1945년11월 해방과 함께 급속하게 추진하여 오늘의 해군 전신인 해안경비단을 창설, 단장을 맡게된다. 18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초대 해군참모총장으로 취임한 사람이 손원일 제독이다. 손원일 제독의 해군 활약상은 우리나라 군역사에 길이 남아있어 잘 알수 있다. 그러나 손원일 제독은 대한민국 해군을 창설하고 초대 참모총장이 되기까지 모든 분야분야에 기독교 정신을 담아 군조직을 하고 부인되는 홍은혜 권사와 함께 사재를 털어 군조직이 기독교정신으로 발전하도록하는데 온몸을 헌신했다. 해군조직이 취약할 때 음악을 전공한 홍은혜 권사가 기독교 정신으로 많은 군가를 작곡하여 부르게했다. 손원일 제독이 이같이 기독교바탕에서 해군을 일으키게 된 것은 아버지 독립운동가 손정도 목사로부터 철저한 신앙교육과 훈련에서 알수가 있다. 손정도 목사는 일정시대 유교의 가문에서 과거를 통한 벼슬을 꿈꾸었으나 복음을 받고 급격히 회심과 함께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를 한다. 일정시대 목회를 하는 동안 하나님 사랑은 나라사랑이라는 성경의 교훈에 따라 독립 운동에 참여,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해군의 대부가된 손정도 목사의 맏아들 손원일 제독은 해군 창설과 함께 해군사관학교를 세우고 모든 군 조직에 군목을 두고 군 선교를 제도적으로 국가가 허락하도록 하는데 초석을 낳은 인물이다. 바로 이러한 손원일 제독의 군 선교 정신을 기리고 실천하고자 지난 1974년 10여 명의 해군의 크리스찬 후배들이 기금을 모아 해군의 중심 진해 제황산 기슭에 손원일 다락방을 세우게된다. 그동안 40여년동안 손원일다락방은 먼 바다로 나가는 군함과 잠수함에 승선하는 장병들을 위해 소그룹 크리스찬 리더를 양성하는 선교 센터를 조용히 운영해왔던것이다. 최근 손원일 선교센터가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건물이 낡아 새롭게 재건축해야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구체화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고 있다. 그동안 해군 장교 후배들이 손원일 선교센터를 재단법인으로 만들고 해군 선교의 새로운 장으로 조성하고자 하는 계획이 구체화 하고 착공의 즈음까지 진척되고 있어 하나님께서 참 기뻐하실 일일 것 같다. 필자는 몇 년전 CBMC(한국기독실업인회)를 섬기던 때 재단법인 손원일선교센터 이사장 김덕수 장로(해군 예비역 소장)와 함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당시 경남CBMC연합회가 함께 기도하기로 했는데 그동안 재단법인 김 이사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은 눈물겹게 이 사업을 추진해왔다. 이제 전국 곳곳에서 크고작은 기부금을 보내와 곧 재건축의 첫 삽을 뜨게 된다는 소식이 들린다. 지난 6월 15일 오후 한국군선교회 경남지회장 이상영 목사(명곡교회)를 비롯 지역 교계 지도자들과 해군 관계자들이 모여 기존 건물 철거 예배를 하나님께 올려드렸다. 참 선하고 선한 사역임이 분명하다. 날이 갈수록 하나님의 청년들이 줄어들고 있고 군선교의 길이 막혀가고 있는 때이다. 우리는 이때야말로 우리 지역에서 펼쳐지는 해군 선교의 열정이 다시 살아나도록 군선교의 산실이 되어온 손원일선교센터가 재건축될수 있도록 힘을 합쳐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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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군선교의 대부 “손원일”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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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큐티[황권철 목사] 기도는 내 인생의 밑천이다
-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 토마스 왓슨이라는 유명한 설교자가 이런 말을 했다. “베드로를 감옥에서 끌어낸 것은 천사의 활동이었으나 천사를 움직인 것은 교회의 간절하고도 지속적인 기도였다.” 앞서간 선진들이 가르쳐 준 또 하나의 지침서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기도의 부담을 주셨다. 신앙의 선배들은 그 부담이 떠날 때까지 기도했다.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으로 갔다. 세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기도하러 가시고 다른 제자들은 산 아래에서 쉬고 있었다. 그때 벙어리 귀신들린 자의 아버지가 찾아와서 아들을 고쳐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귀신을 좇아내지 못했고 그때 마침 주님이 기도를 마치고 내려오셨다. 그가 주님께 와서 말하기를 당신의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했으나 고치지 못했으니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라고 했다. 그때 주님은 그 아버지를 책망하면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시면서 고쳐 주셨다. 사역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갔을 때 제자들이 물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쫒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했다. 기도는 부흥의 열쇠이다. 마가복음 9장의 변화산상과 산하에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하여 기도의 능력에 대해 말씀 드리고자 한다. 목양에 기도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 기도가 능력이요 재산이다. 엿새 후에 또 오른 산 본문 2절에 “엿새 후에” 라고 했다.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누가는 “팔 일쯤 되어”라고 했다. 그러면 엿새 후와 팔일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 사건 앞에 주님은 제자들과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수련회를 가졌다. 누가는 그곳에서 출발한 날짜와 이곳에 도착한 날을 포함시켰고 마가는 제외했다. 주님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의 수련회를 마치고 한 주간이 지나갈 무렵 산으로 올라가셨다. 이 사건에서 주는 영적인 도전이 무엇인가? 첫째, “따로”라는 말이다. 주님은 이 산에 도착하여 제자들 중에 몇을 따로 세웠다. 그들이 베드로, 요한, 야고보이다. 이는 주님이 제자들을 차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큰 충성과 섬김을 위한 구별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더 큰 헌신을 하기 위해 따로 세우는 반열에 참여하도록 힘써야 한다. 안디옥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하기 위해 온 교회가 금식하고 기도할 때 성령께서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우라”고 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평생 존귀하게 쓰임을 받았다. 둘째,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라고 했다. 아홉 제자들을 산 아래 두고 세 제자를 데리고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그들에게는 남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싶었다. 높은 고지를 정복해야 만이 새로운 세계에 눈이 열리게 된다. 셋째,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라고 했다. 그들은 변화된 주님의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은 세상에서 볼 수 없는 광채, 곧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그들은 완전히 황홀경에 사로잡혀 자아와 세속적인 정욕 가치관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그래서 초막 셋을 짓고 그곳에서 살기로 작정했다. 제자들은 천국과 하나님의 영광으로 변화된 주님을 보았다. 넷째,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라고 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그때 주님은 새로운 사명을 주셨다. 왜 그들을 산상에 불러 올렸으며, 천국을 보여 주셨는지를 알게 되었다.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때 사명을 발견하게 된다. 다섯째, “오직 예수”만 보였다고 했다. 우리의 눈에는 주님만 보여야 한다. 신앙의 대상은 모세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닌 오직 예수이다. 예수만이 우리의 영원하신 목자이다. 산에서 내려올 때에 주님은 기도를 마치고 산 아래로 내려왔다. 산상에서는 천국이 임했는데 산 아래에서는 사단의 소굴이었다. 주님은 구원사역의 완성을 위해 산상에서 천국의 예고편을 보여주셨다. 그런데 산 아래에서는 사단의 지배로 악령이 득세하고 있었다. 주님은 산 아래 머물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책망했다. 첫째, 그들은 변론을 좋아하는 자들이다.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왜 서기관들이 그 많은 율법적인 지식을 가지고도 능력을 행치 못했는가? 그들은 기도하지 않고 언제나 변론을 좋아했다. 하나님의 능력은 변론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 나타난다. 아무리 많은 무리가 모여서 변론을 해도 그곳에는 아무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는 변론하기 이전에 무릎을 꿇어 기도해야 한다. 둘째, 참 믿음이 없었다. 주님은 “믿음이 없는 세대여”라고 하면서 책망했다. 이 믿음은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 역사하는 믿음이다. 주님이 한 순간만이라도 떠나 버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유아적 믿음이다. 참 믿음은 시공을 초월해서 역사를 일으키는 능력 있는 믿음이다. 셋째, 귀신들린 아들의 아버지를 책망했다. 그 아버지는 주님께 말하기를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라고 했고, 주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했다. 그때 그 아버지가 즉시로 주님 앞에 엎드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라고 간구 했을 때 주님이 귀신을 꾸짖어 추방하니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라고 했다. 그때 주님이 손을 잡고 일으키시니 온전하게 되었다. 이 때 제자들이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물었을 때 주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기 귀신들린 아들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아버지가 안고 있는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가문과 더 확대해 가면 유대민족과 온 인류의 문제가 그 속에 담겨져 있다.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외아들은 그 아비의 생명줄이요 그 가정과 가문을 이어갈 기업이요 포기할 수 없는 아들이다. 주님이 나인 성으로 들어갈 때 동네에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는 상의를 발견했다.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아들은 어머니의 생명이요 그 가문의 기업을 이어갈 생명줄이었다. 이와같은 개인과 가정의 평생 문제를 사전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믿습니다’ 한다고 치유 될 문제가 아니다. 이는 한번 받은 은혜로 목사가 되겠다고 덤비는 것과 같다. 이런 것은 기도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여기 기도는 단순히 ‘믿습니다’ 하는 일회성으로 해서 될 문제가 아니다. 이는 지속적으로 산상에 오르는 특별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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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큐티[황권철 목사] 기도는 내 인생의 밑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