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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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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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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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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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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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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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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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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호숙 목사] 뇌피셜 지피셜에 만족하는 사람
    누구나 보편적으로 대화가 소통하는 사회가 아름다운 사회다. 그러나 요즘 시대는 기성세대와 신세대 사람들과 소통이 잘 안 되는 시대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신세대들은 사전에도 없는 국적불명의 외래어(外來語)이거나, 은어(隱語)를 신조어(新造語)로 만들어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성세대 사람들이 어휘력에 아무리 유식해도 소통이 안 된다. 요즘 방송 토크 쇼나 유튜브 방송을 보면 많이 듣는 용어가 있는데 오피셜, 뇌피셜, 지피셜,네피셜등이다. 오피셜은 영어 ‘official’인데 사전적 의미는 “공식적인, 공인된...”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신뢰할 수 있도록 공인 인증된 사안이라는 뜻이다. 뇌피셜은 한자어 ‘뇌(腦)’와 영어 ‘official’을 조합해서 만들어낸 단어이다. 객관적 근거도 없이 자기 머리에서 나온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생각이 마치 사실이나 검증된 것처럼 말하는 것을 뜻한다. 지피셜은 ‘지인’과 ‘official’이 결합한 용어다. 지인에게서 들었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얘기가 사실임을 주장하는 행위다. 네피셜은 ‘네이버’와 ‘official’의 합성어다. 어떤 사실을 알기 위하여 네이버 검색창을 이용하는데 네이버를 통해 알게 된 입증되지도 않은 정보를 마치 사실인 것처럼 말하는 행위를 뜻한다. 자신이 상상한 것이든 지인에게 들었든 그것이 사실이라면 별 문제가 없지만 사실과 다르다면 큰 문제인 것이다. 코로나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시대에 유튜브 방송을 통해 고추나무 대를 삶아서 차로 먹으면 효과가 있다는 방송을 보았다. 그 방송에는 유명한 교회 목사님이 나와서 홍보를 하였기 때문에 100% 신뢰가 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 예방·치료 된다고 광고한 한의사 1명과 업체 14곳을 적발해 <식품위생법>과 <식품등의 표시·광고에 관한 법률>을 위반 혐의로 행정처분 및 수사 의뢰했다는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 요즘 젊은 시대의 표현대로 ‘헐~’ 검증되지 아니한 한의사 개인적인 뇌피셜이었다는 사실이다. 또 요즘 방송가에 요리, 식당과 관련된 프로그램을 장악하고 있는 요리사 백00 씨의 진행 레시피(recipe)를 보면 맛을 내기 위해 백설탕을 듬뿍 듬뿍 넣는 것을 보았다. 필자가 볼 때 저 요리법이 과연 건강에 좋은 것인지 과학적 근거가 있으며, 영양학적으로 타당한 것인지 의문이 갈 때가 있다. 단순히 요즘 사람들의 입맛을 맞추기 위한 개인적인 뇌피셜이라면 문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로 인하여 교회를 혐오집단으로 몰아가며 지탄의 대상이 되어 전도가 더 어려워졌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적 사건들이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성경 저자들의 뇌피셜 정도, 또는 단순 경험을 통해 들은 것을 기록한 지피셜 정도로 생각한다. 역으로 성경적 진리를 왜곡하는 그들도 개인적 생각인 뇌피셜일 뿐이다. 신대원 시절 설교학 교수가 “가짜 약을 파는 약장수들도 힘있게 외치는데 진짜 약(신·구약)을 전하는 목회자들의 외침에 힘이 없어서야 되겠느냐”는 강의가 생각이 난다. 다른 것은 몰라도 성경은 2000년 기독교 역사에 변함없이 세계의 사람들로 하여금 인정받은 오피셜 성경(official scripture)이다. 진리인 성경을 통해만 만족 얻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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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며 생각하며
    2021-02-19
  • [조희완 목사] 감동하며 삽시다.
    충청북도 단양군에 90세가 넘어 한글 깨치기에 도전한 하신 <장영옥>할머니가 계십니다. 이 할머니는 옛날에 학교를 다니지 못해서 글씨를 모르고 평생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써보는 것이 소원이셨습니다. 그런데 수 해 전, 자기 손으로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쓰고 너무 감격해서 울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하나를 배우면 둘을 잊어버리는 할머니가 매일 경로당에 나가서 670시간 동안 교육을 받았는데 드디어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쓰고 너무 감격해서 울었다는 것입니다. 그 할머니의 다음 목표는 ‘남편의 이름과 자식들의 이름을 배워보는 것’이라고 인터뷰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할머니의 경우를 보면서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자기 이름 석 자를 쓰고 그렇게 감격하셨다면, 오늘 우리는 더 감격하고 감동할 일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손으로 우리의 이름을 쓸 줄 아는 것뿐만 아니라, 죄인 되었던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감사의 차원을 넘어서 감격할 일입니다. 만왕의 왕 되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섬기게 된 것은 매일매일 감격하고 감동할 일입니다. 마11:16-17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의 감정이 메말라서 도무지 감동이 없고 감격할 줄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감사가 없고 감격이 없고 감동이 메마른 시대를 살고 있지만,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감사하고, 감격하고, 감동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알면 알수록 감동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실 감동할 수밖에 없는 것들인데 그 동안 우리가 너무 몰라서 소홀히 여긴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우리가 교회를 알면 감동하게 됩니다.(스1:1-6) 둘째는, 우리가 말씀을 알면 감동하게 됩니다.(느8:5-9) 셋째는, 우리가 지옥을 알면 감동하게 됩니다.(막9:45-49) 우리 모두 날마다 감동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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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19
  • 기독교 세계관[김성수 총장] 복음의 총체성
    우리 모두가 끼고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아야 할 니고데모의 안경 즉, 기독교 세계관의 기초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이 말씀을 사랑하며, 읽고 묵상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 성경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기초가 되고 지도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잘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 수 세기 동안, 세속적인 세상은 과학과 종교, 사실과 가치, 객관적인 지식과 주관적인 감정의 분리를 주장하며 교육해 왔습니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서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잘못된 이분법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고 사고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 곧 신념 체계는 단지 개인적인 감정이나 경험일 뿐, 객관적인 사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으로 치부하면서 복음의 포괄적이고 광대한 범위와 능력을 특정 영역으로 제한시키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경건과 헌신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자들은 이런 협의적인 이분법적 견해에 아주 취약합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헌신은 복음주의 운동의 가장 큰 힘이 되었고, 수백만의 사람들을 그리스도와의관계로 불러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찰스 콜슨(Charles Colson)과 낸시 피어시(Nancy Pearcey)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영적 여정의 어딘가에 톱날 같은 상처의 흔적들을 가지고 있으며, 나도 마찬가지이다. …그 때 그리스도를 만나 죄사함의 확신을 얻지 않았다면 나는 내자신의 범죄에서 나는 악취로 인해 이미 질식해 버렸을 것이고, 내 영혼은 결코 안식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들 가운데도 아마 많은 분들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개입하지 않으셨다고 한다면 나는 아마도 소위 세상적으로는 안락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을런지는 몰라도 내 마음 속 깊은 어딘가에는무엇인가 채워지지 않은 공허함을 지닌 채 살았을 것이며, 영혼의 만족함을 누리지 못하고,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지 못하는 어두움의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 복음주의의 장점인 동시에 또한 가장 큰 약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이와 같은 관점이 우리로 하여금 개인의 영혼 구원이라는 차원을 뛰어넘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전체를 위해 준비하신 놀랍고 원대한 계획을 볼 수 없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구원과 신앙은 개인의 영혼 구원, 개인 경건, 교회 출석, 성경 연구, 자선 활동 등으로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 훨씬 그 이상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은 영혼 구원과 개인적인 경건,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교리의 체계를 믿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계관(worldview)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향해서 기독교 신앙이란 단지 개인적인 신념에 불과한 것이 아니며, 개인의 구원문제만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어주어야 합니다. 현대생활에서 사람들이 겪고 있는 분명한 문제들에 대해 눈을 감아버리고 단지 영적인 것, 성경공부, 복음전도 등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이야 말로 인류가 오랫동안 가져온 질문들, 즉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가, 이런 잘못에 대한 치유책은 무엇인가, 인생에는 어떤 의미와 목적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 모두 답할 수 있는 총체적인 삶의 체계임을 보어주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런 질문들에 대한 유일하고도, 이성적으로 변증할 수 있는 확실한 대답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만이 물리적 질서와 도덕적 질서 모두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합니다. 기독교 신앙만이 삶과 사상의 모든 영역, 곧 피조세계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통합적인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만이 우리가 현실세계에 맞추어 올바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가 모든 진리의 원천이며 현실의 모든 측면을 이해하는 ‘포괄적인 틀’(comprehensive framework)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복음은 총체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삶 전체를 향한 총체적인 틀이며 능력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네덜란드의 수상을 지낸 18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기독교 진리의 지배적인 원칙은 구원론이 아니라, 우주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주 전체는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카이퍼는 칼빈주의(Calvinism)를 어떤 기독교의 교리나 명제의 체계가 아니라 ‘삶의 체계’(life system)라고 강조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는 삶의 체계, 혹은 세계관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복음의 총체성이라는 성경적 관점을 가지지못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와 문화의 여러 영역에서 절름발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식과 교회라는 신앙 공동체에 이런 문제들이 이미 생겨나고 있습니다. 교회가 문화를 분석하고 평가할 수 있는 어떤 기준이나 틀(frame)을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인해서 이미 부모들은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이 겪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의문들에 대해서도 대답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친구들이나 이웃들에게 우리가 왜 믿는지를 설명할 수 없게 되었고, 우리 신앙을 변호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 주변세계의 영향을 받아 어떤 일들을 결정하면서도 우리의 삶을 바르게 꾸려나가는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심오한 아름다움과 의미들을 놓치고 있습니다. 자연의 미묘함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기쁨이나, 위대한 교향악의 연주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능력, 질서가 잘 잡힌 공동체의 조화속에서 하나님의 품성을 깨닫을 수 있는 능력도 상실해 버렸습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복음을 우리의 삶과 우주에 대한 총체적인 진리의 틀로 이해하면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 문화까지도 복음으로 채색하고 변혁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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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04
  • [신광열 목사] 모델링
    개펄에 자꾸 옆으로 걷는 아기 게 엄마게는 혀를 차며 꾸짖는다 쯔쯔쯧 똑바로 쫌 걸어라 얘야 화를 내는 엄마에게 아기게는 묻는다 어떻게 걸어란 말이야 날보고 따라하란 말이야 이렇게 엄마 게는 옆으로 잘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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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03
  • [최호숙 목사] 뇌피셜 지피셜에 만족하는 사람
    누구나 보편적으로 대화가 소통하는 사회가 아름다운 사회다. 그러나 요즘 시대는 기성세대와 신세대 사람들과 소통이 잘 안 되는 시대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신세대들은 사전에도 없는 국적불명의 외래어(外來語)이거나, 은어(隱語)를 신조어(新造語)로 만들어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성세대 사람들이 어휘력에 아무리 유식해도 소통이 안 된다. 요즘 방송 토크 쇼나 유튜브 방송을 보면 많이 듣는 용어가 있는데 오피셜, 뇌피셜, 지피셜,네피셜등이다. 오피셜은 영어 ‘official’인데 사전적 의미는 “공식적인, 공인된...”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신뢰할 수 있도록 공인 인증된 사안이라는 뜻이다. 뇌피셜은 한자어 ‘뇌(腦)’와 영어 ‘official’을 조합해서 만들어낸 단어이다. 객관적 근거도 없이 자기 머리에서 나온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생각이 마치 사실이나 검증된 것처럼 말하는 것을 뜻한다. 지피셜은 ‘지인’과 ‘official’이 결합한 용어다. 지인에게서 들었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얘기가 사실임을 주장하는 행위다. 네피셜은 ‘네이버’와 ‘official’의 합성어다. 어떤 사실을 알기 위하여 네이버 검색창을 이용하는데 네이버를 통해 알게 된 입증되지도 않은 정보를 마치 사실인 것처럼 말하는 행위를 뜻한다. 자신이 상상한 것이든 지인에게 들었든 그것이 사실이라면 별 문제가 없지만 사실과 다르다면 큰 문제인 것이다. 코로나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시대에 유튜브 방송을 통해 고추나무 대를 삶아서 차로 먹으면 효과가 있다는 방송을 보았다. 그 방송에는 유명한 교회 목사님이 나와서 홍보를 하였기 때문에 100% 신뢰가 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 예방‧치료 된다고 광고한 한의사 1명과 업체 14곳을 적발해 「식품위생법」과 「식품등의 표시‧광고에 관한 법률」을 위반 혐의로 행정처분 및 수사 의뢰했다는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 요즘 젊은 시대의 표현대로 ~헐~~ 검증되지 아니한 한의사 개인적인 뇌피셜이었다는 사실이다. 또 요즘 방송가에 요리, 식당과 관련된 프로그램을 장악하고 있는 요리사 백00 씨의 진행 레시피(recipe)를 보면 맛을 내기 위해 백설탕을 듬뿍 듬뿍 넣는 것을 보았다. 필자가 볼 때 저 요리법이 과연 건강에 좋은 것인지 과학적 근거가 있으며, 영양학적으로 타당한 것인지 의문이 갈 때가 있다. 단순히 요즘 사람들의 입맛을 맞추기 위한 개인적인 뇌피셜이라면 문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로 인하여 교회를 혐오집단으로 몰아가며 지탄의 대상이 되어 전도가 더 어려워졌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적 사건들이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성경 저자들의 뇌피셜 정도, 또는 단순 경험을 통해 들은 것을 기록한 지피셜 정도로 생각한다. 역으로 성경적 진리를 왜곡하는 그들도 개인적 생각인 뇌피셜일 뿐이다. 신대원 시절 설교학 교수가 “가짜약을 파는 약장수들도 힘있게 외치는데 진짜약(신구약)을 전하는 목회자들의 외침에 힘이 없어서야 되겠느냐”는 강의가 생각이 난다. 다른 것은 몰라도 성경은 2000년 기독교 역사에 변함없이 세계의 사람들로 하여금 인정받은 오피셜 성경(official scripture)이다. 진리인 성경을 통해만 만족 얻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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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03
  • [박무열 목사] 부스러기의 은혜에도 감사하자(농촌목회 스토리)
    코로나 19로 인하여 무심코 보내었든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것처럼 우리의 일상의 주어진 모든 것이 당연하게 여기며 내 안에 주어진 복을 생각하지 못하고 내게 없는 것들을 추구하며 감사하지 못했던 지난날을 돌이켜 후회해 보며 소소한 일상의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겠노라고 다짐해본다. 우리는 큰 은혜들을 추구하며, 작은 것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작은 것에 감사함이 곧 큰 것의 감사함에 이르게 하는 지름길 이라고 생각한다. 2021년 들어서면서 더욱 필자의 삶에는 사소한 은혜들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들을 통해서 일어나고 있다. 교회적으로는 함께 섬겨갈 성도들을 보내 주시고 개인적으로는 삶의 필요들을 채워 주셔서 감사함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마을의 주 농사가 봄에 딸기와 가을에는 감이다. 요즘은 딸기 철이라 딸기가 집에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나눌 수 있어 감사하다. 마을 어르신들이 포장하고 남는 자투리들을 담아서 가져오신다. 요즘 가격이 비싼데 팔지 않고 주십니까? 라고 반문하면 목사님 비쌀 데 잡수셔야 맛이 좋은 법입니다. 라고 하신다. 뿐만 아니라 공장에 점심을 배달하시는 다른 교회 성도님은 매일 배달하고 가시면서 교회에 들러 기도하고 남은 음식을 사택에 들러 주시고 가신다. 내게는 없지만 사람들을 통해 매일 풍족하게 주셔서, 이웃 어르신들과 나눌 수 있어 참으로 감사하고 행복하다. 매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대할 때마다 부스러기의 은혜를 갈망했던 성경 마태복음15:27-28절에 기록된 여인의 신앙고백을 생각해 본다.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지난날들을 돌아보면 나는 더 좋은 것, 더 귀한 것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왔고 그것을 자랑하며 자긍심을 갖고 살아왔던 나 자신의 민낯을 들춰내게 하신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 어리석고 부질없는 것이었다. 농촌에 목회를 하면서 점점 나를 낮아지게 하시고 겸손하게 하시며 일상의 주어진 사소한 삶에도 감사하게 하는 하나님의 치유하심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신다. 시편 23편 다윗의 고백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 되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삶으로 부족한 종을 이끌어 가심에 날마다 감사할 뿐이다. 사자성어 “지족지부(知足知富) 족한 것을 알고 현재에 만족하는 사람은 부자” 라는 말처럼 현재 주어진 삶에 감사며 만족할 수 있는 나는 참 부자이다. 일상의 욕심을 내려놓고 부스러기의 은혜에 감사하며 마음을 비우니 마음이 이렇게 평안할 수가 없다. 왜 그렇게 붙들려고 마음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아등바등 그렇게 살았을까? 후회스러움, 만감이 교차한다. 사치와 허영을 멀리하라 영혼의 허전함을 사치와 허영으로 채우려는 것은 물질로 영혼의 허전함을 채우려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인은 더욱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사치와 허영에 감정을 이입해 대리만족에 빠지는 삶은 불신앙적인 태도다. 목양의 길에서 사치와 허영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현재의 고난과 역경에 얽매이지 말고 또한 스쳐 가버린 과거의 삶에 연연하지 말고 다가올 미래의 삶을 연상하라. 절망 중에도 희망의 꽃을 피울 수 있는 그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현재의 삶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려면 사치와 허영을 멀리하고 부스러기의 은혜에도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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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03
  • [김금주 상담실장] 보이는 천국
    이단은 사람을 신격화하여 섬기게 하고 이혼과 가출로 가정을 파괴 시키며, 심지어 직장과 학업까지 포기하게 합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단에 빠지는 것을 보며 우리는 사람들이 이단에 빠지는 이유를 질문하게 되고 궁금함을 가지게 됩니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이단이 가르치는 교리의 특징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단 교리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자신들의 단체에만 성령이 역사한다고 주장 합니다. 2. 자신들의 단체에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 합니다. 3. 자신들의 단체만이 이시대의 참 교회라고 주장하며, 시온-예루살렘-남은자 등의 표현을 합니다. 4. 자신들이 속한 단체 외에 모든 교회가 바벨론이라고 주장 합니다. 위와 같은 이단 교리의 특징으로 인해, 이단에 미혹된 사람들은 자신들이 속한 단체에만 하나님이 계시고 천국이 도래했다고 확신합니다. 또, 신천지는 기성교회에서 신천지로 넘어온 것을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유월(탈출)한 것과 같이, 영적 바벨론(사망)에서 구원의 처소인 신천지(생명)로 옮겨졌다고 주장하며 ‘영적인 유월’이라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천지는 자신들의 단체만이 천국이라고 가르치며, 신천지 밖은 지옥이며 그렇기에 신천지를 나가면 죽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주어 신도들이 이탈하지 못하도록 통제합니다. 신천지 신도들이 이러한 가르침을 따르는 이유는, 복음방과 센터 교육을 통해 오랫동안 신천지 교리를 배움으로 신천지가 계시록의 실상이 이루어진 곳이라고 세뇌를 당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교리적 세뇌는 신도들이 성경의 권위보다 신천지의 가르침과 교주의 말을 더욱더 따르게 됩니다. 이 때문에, 신천지는 성경의 말씀을 자신들의 유리한 대로 왜곡시키며 변질 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심지어 비성경적인 육체 영생을 믿고 교주뿐만 아니라 자신들도 죽지 않는다고 믿게 됩니다. 이러한 비성경적이며 비이성적인 가르침을 성경의 가르침으로 믿고 있는 사람들은 부족하거나 모자란 사람들이 아닌 우리와 같이 신상생활을 함께 해왔던 사람들입니다. 교회에서 열심을 다해 사역했던 목회자와 직분자들 그리고 그분들의 자녀들이, 신천지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 생각하며 그 곳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열심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거짓 목자에 속아 이단의 가르침에 미혹되어 생명력을 잃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기성교회의 성도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교회는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이단에 빠지게 된 것은 그들의 잘못인가?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가? 교회는 이단에 미혹된 사람들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없는 것일까? 우리는 길을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헤매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을 경계하고 배척하는 것이 아닌 그들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약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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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02
  • [김성수 총장] 니고데모의 안경으로 세상 읽기
    경남기독신문 애독자 여러분안녕하십니까? 고신대학교에서 38년을 봉사한 후 지금은 미국 LA 앤하임에 소재하고 있는 에반겔리아 대학교(Evangelia University)에서 총장으로 봉사하고 있는 김성수 목사입니다. 세월의 흐름은 정말 화살과도 같음을 실감합니다. 2020년도를 시작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21년도를 맞았습니다. 새로운 한 해를 맞으면서 먼저 경남기독신문 애독자 여러분들 모두 건강하시고, 가정과 일터에도 하나님의 복 주심이 풍성하시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특별히 여러분의 소중한 언약의 자녀들이 믿음으로 잘 살고, 악에 물들지 아니하며, 지혜롭고 건강하게 하나님의 소중한 보물들로 복되고 형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번 호부터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와 문화 현상들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며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세계관(worldview)의 문제입니다. 세계관이란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는 ‘안경’(spectacles)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세상을 바라보는 나름대로의 ‘관점’(perspective)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관점도 갖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관점에서 세상을 해석하고 평가하며 행동합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자신이 의식을 하던지 하지 못하던지 간에 나름대로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고평가하며 거기에 따라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색깔있는 안경을 끼고 있으면 그 안경의 색깔에 따라 사물이 다르게 채색되어 보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은 지도(map)나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동일한 사물과 현상을 대하면서도 서로 다른 가치판단을 하게 되고서로 다르게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공동체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의 삶을 살기를 소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곧 세계관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영위하는 신앙의 삶은 단순히 예배, 찬양, 기도, 성경공부, 교제, 그리고 약간의 봉사와 전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와 같은 협의적인 의미의 신앙생활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런 생활을 등한시하면서 세계관의 문제를 논의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은 좁은 의미의 경건생활만 신앙의 삶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런 일에만 전념하고 만족하면서 그것이 마치 신앙적인 삶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 신앙은 개인적이며 사적인 것(private)이 되고,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지게 되면 기독교는 우리 사회와 문화로부터 점점 더 변두리로 밀려나 주변화되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안경을 끼고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인생과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인생과 세상이 확연하게 달라지게 되고, 지역 사회 속에서 감당하는 교회의 사명과 역할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찰스 콜슨(Charles Colson)과 낸시 피어시(Nancy Pearcey)가 말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에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구상에서 지옥을 만드는 데 조력하고 있거나, 아니면 천국을 미리 맛보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더 많은 상처를 받는데 일조할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사역에 참여하여 이 세상을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실현되도록 변화시키는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사탄의 지배를 강화시킬 수도 있고,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어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선택은 우리가 끼고 바라보는 안경 곧 우리의 세계관에 따라 확연하게 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올바로 바라보고 평가할 수 있는 안경을 껴야 합니다. 초점이 맞지 않는 안경을 끼거나 깨어진 안경을 끼고는 세상을 올바로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정확무호한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안경을 끼고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경은주일 하루 예배 시간에만 필요한 책이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는 등불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이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고 했습니다. 시편 기자도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세계관의 기초도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성경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인식해야 합니다. 지난 세기 동안, 세속적인 세상은 과학과 종교, 사실과 가치, 객관적인 지식과 주관적인 감정의 분리를 주장해 왔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들도 이러한 잘못된 이분법으로 사고하는 경우가 많았고, 따라서 우리의 신앙은 단지 개인적인 감정이나 경험일 뿐, 우리의총체적인 삶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으로 치부되었습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2021년도 새해를 맞으면서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변화되어 새로운 삶을 살게 된 니고데모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에 의미 있게 기여하는 보람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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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29
  • 전 행정처장 곽춘호, 미완으로 끝난 복음병원 노조 개혁
    부·울·경지역의 꼴찌 병원으로 전락되다니 고신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복음병원 행정처장을 지낸 재단 사무국장 곽춘호 장로(60세)가 지난해 12월 26일 심장마비로 소천하여 큰 충격을 주고 있다. 공교롭게도 그는 25년 전 12월 25일 성탄절날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던 성산 장기려 박사의 뒤를 이어 그 다음날 우리 곁을 떠난 샘. 곽춘호 장로는 한때 장기려 박사를 기리는 장기려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을 지낸 터라 그 시점이 참으로 묘기만 하다. 지금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두고 안타까움과 함께 여러 뒷말들이 오가고 있다. 정년을 불과 6개월 앞둔 터에다 지난 5년여 넘게 복음병원 노조와의 법적 소송 등 온갖 갈등과 대립 속에 오히려 재단 이사장을 비롯한 여러 관계자들은 지속적으로 노조의 편을 드는 듯한 행보가 본인에게는 큰 스트레스였던 점은 주변에 잘 알려져 왔고 예견되어 왔던 일이다. 더욱이나 그가 매일 출근하는 재단 사무실 입구에는 수년 동안 복음병원 노조가 내건 곽 장로를 규탄하는 현수막에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라는 설립 비전을 지닌 기독교 정신을 구현하는 복음병원 내에서 벌어진 불신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살벌한 싸움이라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그는 오래전부터 골리앗 같은 병원의 거대 노조와의 분쟁으로 쌓인 극심한 스트레스와 재단 고위인사들로 부터 받았던 투명인간 대우 등이 견딜 수 없는 일이였기에 결국 뇌출혈로 갑자기 쓰러져 끝내 소생을 하지 못하게 돼 주위의 안타까움을 더 했다. 때마침 지난 12월 29일에는 복음병원이 보건복지부의 제4기 상급종합병원 재지정 탈락이라는 비보까지 전해져 또 한 번의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이번에 지정된 병원들은 전국 45곳 중 부·울·경지역만 하여도 무려 7곳에 이른다. 부산대병원, 동아대병원 양산부산대병원, 인제대백병원, 울산대병원, 경상대병원, 성균관대삼성창원병원까지 포함되었다. 반면에 고신의대 부속 복음병원은 재지정에서 유일하게 탈락되어 지역사회에 창피함과 충격이 크다. 과연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상급종합병원은 중증질환에 대해 고난도 의료를 전문적으로 제공하는 종합병원을 일컫는다. 진료권역별로 인력·시설 장비·진료·교육 등의 항목을 종합 평가해 우수한 병원을 3년 마다 지정한다. 상급종합병원에 지정되면 건강보험 수가 종별 가산을 30%를 적용받는다. 의료기관이 종별가산율을 보면 상급종합병원은 30%, 종합병원은 25%, 병원은 20%, 의원은 15%가 각각 가산된다. 과거 장기려 박사의 헌신에 힘입어 한강 이남에서 최고의 명성을 지녔던 복음병원은 이제 암전문병원이라는 마지막 명예와 자존심마저도 퇴색되고 있는 듯한 불길한 징조이다. 가장 강성인 1천5백여 명의 복음병원 노조원, 저들을 어찌할꼬.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는 말이 있다. 지금은 AI시대, 몇 년 전 알파고와의 바둑 대전에서 보듯 앞으로 법원 판결도 AI가 대신하는 날이 머지않았다고까지 예견되는 요즘이다. 현재 병원의 구성원들은 의료진이 2백여 명, 간부를 포함한 비노조직원 3백여 명, 그리고 노조원 1천5백여 명 모두 2천여 명에 이르는 매머드급 규모이다. 언제부터인지 환자보다 직원이 더 많은 병원이라는 자조 섞인 한탄들이다. 이는 그동안 고신재단 이사나 총회 유력 위치에 오른 이들이 자기 자녀들을 복음병원에 낙하산 투하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보니 어쩌면 오늘의 이런 기형적인 구조는 당연한 결과인 듯하다. 대표적인 사례로 80년대 재단 이사장을 지낸 박 아무개 목사는 재임 시절 얼마나 많은 자기 교회 교인들을 밀어 넣었는지 출·퇴근 때 교회버스가 오갔다는 우스갯말까지 회자되었다. 이런 교단 내 지도자들의 이기주의와 비양심적인 처신은 방만한 병원경영을 더욱 부추겨 결국 한때 부도라는 파국까지 맞게 되었다. 지금도 이름만 대면 알만한 총회 유력인사들의 자녀들은 끊임없이 재단의 여러 기관에 수시로 공수되는 형국이니 병원의 구조조정 문제는 그야말로 마이동풍 격인 듯하다. 이렇게 노조에 약점이 단단히 잡힌 꼴이니 재단 관계자들은 언제나 제 목소리를 내기는커녕 노조에 계속 끌려 다니는 형국이다. 지금의 재단 이사장도 연임한 노조위원장인 간부가 자기 교회에 출석하는 터에 친 노조 행보라는 세간의 평가이다. 역대 병원 원장들 가운데에는 병원 개혁을 하려다 노조와 마찰로 법적 소송까지 가는 수모를 겪고 중도 하차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니면 아예 노조에 침묵 내지는 협조자가 되는 경우이다. 여기에 역대 재단 이사장마다 노조의 손을 들어주는 비상식을 자행하는 사례가 빈번하여 사태는 더욱 악화되고 노조를 중심으로 한 병원 개혁은 빈번이 물 건너가는 형국은 물론이고 상급종합병원 재지정 탈락되는 수모까지 당하게 된 샘. 이미 외부의 진단에서도 방만한 경영으로 인한 적자 누적 해결책은 인력 구조조정뿐이라는 지적이었다. 그러나 이런 현실에서 병원 경영합리화는 그야말로 요원하기만 하다. 과거 개혁과 혁신의 상징인 듯한 손봉호 교수의 아바타인 강 아무개 장로가 이사장 재임시절, 교단 안팎에서는 그가 병원 개혁을 잘 하리라 크게 기대를 하였으나 임기 내내 노조에 끌려 다니며 그저 자신의 임기를 채우는 일에도 급급해 큰 실망과 배신감을 안겨 주었다. 그야말로 복마전 같은 복음병원의 개혁이 얼마나 힘든가를 잘 대변해 준 사례였다. 그를 가까이 지켜본 한 인사는 “그와 함께 하나님 앞에 서는 날 이사장으로서 그의 행보가 과연 얼마나 정의로웠는지를 따져 보겠다”라는 의미심장한 코멘트이다. 노조의 활동자금원이 된 병원 각종 편의시설 운영, 법원은 불법이라고 판결하였건만… 현재 복음병원 노조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하 민노총) 산하 민주노총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에 소속되어 있다. 병원의료노조는 민노총 가운데 가장 강성 성향을 지닌 노조이다. 1천5백여 명의 거대한 공룡 노조이다 보니 중앙에서도 복음병원의 위치나 목소리는 상당히 크다. 복음병원 노조는 과거 20년 넘게 병원 내 매점과 분식점 등 각종 수익 시설을 운영해 왔다. 그러나 2010년 7월 노동법 개정으로 노동법 개정 이후 사측이 노동조합에 제공한 시설은 노동조합법 제81조 제4호(근로자가 노동조합을 조직 또는 운영하는 것을 지배하거나 이에 개입하는 행위와 노동조합의 전임자에게 급여를 지원하거나 노동조합의 운영비를 원조하는 행위)가 정한 부당노동행위에 해당되면서 문제가 붉어졌다. 부산지방고용노동청도 2012년 6월 ‘시정 지시서’를 통해 “사용자는 노동조합의 운영비를 원조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안 된다”며 사용자의 어떠한 개입도 없이 노동조합이 전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운영비 지원’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병원 측은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다가 2016년 6월경 매점과 분식점을 돌려달라는 내용증명을 발송했다. 돌려달라는 병원 측과 돌려 줄 수 없다는 노조 측이 협상을 가졌지만 의견차이만 확인했고, 결국 이 문제는 건물명도 소송으로 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당시 부산지방법원 제6민사부는 “원고의 피고에 대한 이 사건 시설 제공은 노동조합법 제81조 제4호 본문에서 금지하는 부당노동행위에 해당한다고 봄이 상당하므로, 이 사건 시설 제공의 근거가 된 단체협약은 강행규정에 위반하여 무효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피고는 원고에게 이 사건 시설 및 그 점유, 사용으로 인한 이익을 부당이득으로 반환할 의무가 있다”고 원고 측인 병원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처럼 당시 강성 병원노조와의 법적인 소송 실무를 추진한 장본인이 바로 전 행정처장 곽춘호 장로였다. 노조 측에서 곽 장로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게 된 것은 당연한 처사. 마침 곽 장로가 병원 과장들에게 골프채를 선물한 것을 빌미로 ‘김영란 법’ 위반 운운하여 노조의 고발사태가 이어졌지만 검찰에 이어 법원마저도 곽 장로에게 무혐의로 판결해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과연 재단의 고무줄 처벌 잣대와 기준은? 과거 고신대 한 교수의 제자에 대한 부적절한 의혹이나 학생회의 문제제기로 학교 공금을 횡령한게 밝혀지자 조용히 해당 교직원의 사표를 받고 사건들을 무마시킨데 반해 곽 장로가가 상급자에게 뇌물을 준 것도 아닌 격려차원에서 동료인 몇몇 과장들에게 골프채를 선물한 것을 두고 노조가 지나치게 부풀려 형사고발을 하고, 재단까지 나서서 ‘해고’라는 징계를 내린바 있다. 그러나 부산지방노동위원회는 징계위원회가 내린 처사가 부당하다며 복직을 명하여 교단은 또 한차례 망신까지 당한 바 있다. 그 후에도 재단 측은 품위유지 위반이라는 생뚱맞은 무리한 처벌을 계속 고집, 행정처장 직위마저 정지하는 법원 소송도 진행한바 있다. 한 교단 중진목회자는 “이런 처사는 재단이 노골적으로 노조 편을 들어준 또 하나의 고신교단의 흑역사”라고 비판한다. 어떤 이는 곽 장로의 부친인 故 곽삼찬 목사가 과거 고신 총회장을 지낸 강력한 카리스마 행보에 설움을 받았던 일부 목회자들이 세월이 흘러 갑, 즉 실력자가 되어 매스를 잡게 되니 불의에 대한 수술이나 개혁보다 그 아들에게 인간적인 보복 즉 ‘갑질’을 일삼았다는 비판까지 받아왔다. 그래서 뜻있는 교계인사들은 또 다른 적폐가 된 샘이라며 개탄한다. 앞서 교단 실력자들의 자녀들을 편법으로 낙하산 임명한 경우나 공정한 절차를 거쳐 임명된 이들 중에는 물론 실력이 뛰어난 이들도 상당한 사례도 있다. 병원 개혁에 총대를 멘 곽 장로나 현 고신대 김 아무개 사무처장의 경우 다들 그 능력은 인정해오지 않았던가. 이는 누구보다 교단 사정을 잘 아는 목회자 자녀출신이라는 이점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전 행정처장인 곽 장로는 재임 당시인 2015년 서울에서 운영되던 ‘성산 장기려 기념사업회’를 부산으로 유치하고, 고신대복음병원이 위치한 서구 감천로 구간을 ‘장기려로(路)’로 명명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소외받은 다문화가정과 외국인들을 위한 의료나눔 활동을 벌인 공적으로 ‘선행천사 세계나눔대상’까지 받은 것처럼 말이다. 그가 한때 소신 있는 병원장과 함께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복음병원을 개혁하려는 계획은 결국 노조의 강력한 저항으로 미완으로 끝나고 말았다. 병원 행정처장으로 다시 복직하려던 그 꿈을 과연 누가 저지하였는가. 역대 여러 재단 이사장들도 결국 노조의 악행을 손보려던 곽 장로의 손을 들어주기 보다는 비겁하게 침묵, 방관 내지 노조 편으로 일관하였다는 비판이 그래서 나온다. 누가 과연 고양이 목에 방울은 달것인가? 지금 우리는 전혀 예상치 못한 코로나 팬데믹 사태로 경제위기와 함께 급격한 변화가 쓰나미처럼 몰려오고 있다. 그 중심 키워드는 인력 구조조정을 통한 경영합리화. 과거 침례병원의 방만한 인력구조와 여기에 덧붙인 무능한 침례교단 지도자들의 행보로 인해 결국 부도와 병원 폐쇄로 이어진 불행한 흑역사를 우리들은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침례병원 케이스나 제2의 부도사태가 발생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라도 비대한 몸을 다이어트 해야만 살아남을 수가 있다. 재벌 기업들마저 추진하는 가혹한 경영합리화 프로그램이 과연 복음병원에는 가능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이다. 민노총의 만행으로 만들어진 지나친 악법들- 최저임금제나 주52시간 근무, 노조의 회사경영 참여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시행 등으로 기업들이 점점 골병들고 있는 형국이다. 매년 엄청난 액수의 노조 상납금으로 이 민노총 집단의 거대화에 일등공신격인 그야말로 꿀단지를 공급해 주고 있는 공룡 복음병원 노조. 노조에 포위되어 서서히 좌초되고 있는 고신교단은 물론 대한민국호의 암울한 현실에서 과연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그래서 이번 곽 장로의 돌연사가 시사 하는 바가 크고, 그를 떠나보내는 재단 임원진들의 여전한 노조 편애나 눈치보기식 행보가 하수상 내지는 개탄스럽기만 하다. 미완으로 끝난 그의 병원 개혁 몸부림, 과연 누가 그 뒤를 이어갈 수가 있을까. 노조위원장인가 병원장, 총장, 총회장, 재단이사장인가? 최수경 (출판인, 월간고신 창간 편집장 역임) ※ 기고 또는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고신대학교복음병원 노동조합 보도 관련 기고문 http://gncnews.net/news/view.php?no=855 [정정보도문] 고신대 복음병원 노조 관련 본 신문 지난 2021년 1월 12일자 「전 행정처장 곽춘호, 미완으로 끝난 복음병원 노조 개혁」 제하의 기고문과 관련, 다음과 같이 바로 잡습니다. 1. 고 곽춘호 사무국장이 노조와의 분쟁으로 쌓인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뇌출혈로 사망했다고 했으나 사망 원인은 심장마비로, 노조와의 스트레스가 원인이라는 것은 확인된 사실이 아닙니다. 2. 환자보다 직원이 더 많다고 보도 했으나 복음병원은 동 지역내 상급병원에 비해 환자수 대비 직원수가 적은 편으로 확인됐습니다. 3. 역대 병원 원장들이 노조와의 법적 소송으로 중도 하차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했으나 노조와 법적 소송을 한 사실이 없습니다. 4. 편의시설 운영 이익이 노조의 활동자금원이 되었다는 보도 관련, 직원의 후생복지비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 됐습니다. 5. 노조와의 법적 소송 실무를 추진한 장본인이 고 곽춘호 사무국장이었다고 했으나 고 곽춘호 사무국장이 진행한 사실이 없습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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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1-01-12
  • [신지균 목사포토묵상에세이]하루
    <하 루> 하루를 넘겼을 뿐인데 새해라고 한다. 하루를 넘겼을 뿐인데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다. 이렇게 하루하루 넘긴다면 주님 만난 날 있겠지 새해 마라나타 하루 만에 천국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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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1-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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