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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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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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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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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8
  • [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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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3
  • [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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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8
  • [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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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실시간 칼럼 기사

  • [이정희 목사] 가정에서의 호칭어와 지칭어 : 아내가 남편에게
    I. 서언(序言) 가끔 주례를 하면서 신랑신부에게 ‘여보’라 불러보라고 시킬 때가 있다. 그 이유는 신혼 초에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 잘못되거나 일정하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결혼을 했어도 전과 마찬가지로 ‘오빠’나 이름을 그대로 부르거나, 어떻게 불러야 할지 서로가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 가족과 친지와 지인들이 보는 앞에서 ‘여보’라는 첫 호칭을 불러보게 하고 있다. 이런 경우는 결혼 한지 20년이 다된 필자의 두 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가끔 그들이 ‘아빠’라고 부를 때 사위와 필자는 동시에 ‘왜?’라고 하면서 둘 다 돌아 볼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이는 두 딸들은 필자를 부를 때도 아빠, 남편을 부를 때도 ‘아빠’라고 호칭하기 때문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앞으로는 이런 면으로 당분간 올바른 호칭어와 지칭어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아내가 남편을 부르는 호칭어와 지칭어 1. 호칭어 : 대학의 동기와 결혼한 어떤 주부는 자신의 남편을 부를 때, 결혼 전에는 ‘철호야’라고 했다가 결혼 후에는 ‘철호씨’, ‘이봐요’, ‘여보’, ‘당신’, ‘자기야’ 등의 기분 내키는 대로 불렀다. 차녀 출생 후에는 아들의 이름을 붙여서 ‘민호 아빠’라고 부르고, 시부모 앞에서 남편을 부를 때는 ‘보세요.’ 라든가 ‘있잖아요’라고 부르고 있다. 이런 경우는 젊은 부부들 뿐 만이 아니라 40, 50대 이상의 중년, 노년 부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연령층의 호칭어들은 주로 ‘여보’를 비롯해서 ‘민호 아버지’, ‘영감’, ‘임자’등 아주 다양하게 호칭한다. 또 다른 사람에게 남편을 지칭할 때도 ‘그이’, ‘우리 남편’, ‘바깥양반’, ‘우리 집 주인’, ‘우리 아저씨’ 등으로 지칭하기도 하고, 남편의 직장 직함을 붙여서 ‘사장님’, ‘교장 선생님’, ‘장로님’, ‘목사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호칭어와 지칭어 사용을 어떤 단체에서 설문조사로 물어보니 대상주부 565명중에 65.5%가 ‘여보’, 22.1%가 ‘아빠’, 또 ‘자기’로 부르는 경우가 10.3%였다고 한다. 이상과 같은 경우만 보더라도 오늘날 아내가 남편을 부르는 말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일관성이 없는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 가장 알맞은 남편에 대한 호칭어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전문가들 의견들도 일관성이 없이 다양하다. 대략 3가지 정도인데, 하나는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8.15 해방 후에는 일본식인 ‘주인’이란 호칭어이다. 두 번째는 현대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여보’이다. 물론 이 용어도 국어사전에 정식으로 오른 것은 1982년판 국어대사전이었기 때문에 그리 오래된 용어는 아니다. 하지만 오늘 날에 있어서 가장 보편적인 용어로 되어 있다. 마지막 또 하나의 보편적인 호칭어는 ‘자기’이다. ‘애인이나 부부간에 상대방을 부르는 속어이긴 하지만, 어떤 사람을 부르는 대명사 역할도 하고 있기 때문에 표준어로 수용해도 좋을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2. 지칭어 : 남편에 대한 지칭어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는 호칭어보다 더 까다롭다. 특히 문제는 시부모 등 어른 앞에서 남편을 지칭하는 말들이다. 일제 강점기까지는 시부모 앞에서 ‘아범’이나 ‘○○아버지’, ‘그 사람’ 등의 지칭어가 많이 쓰였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아범’, ‘애비’, ‘○○아빠, ‘○○아버지’, ‘서방님’, ‘아빠’, ‘○○씨’, ‘○○애비’, ‘애 아빠’, ‘그 사람’, ‘그 이’, ‘남편’, ‘지아비’, ‘제 남편’등 20가지 가까운 지칭어가 혼용되고 있다. 어떤 조사에 의하면 시부모에게 남편을 지칭하는 말의 빈도수는 ‘애 아빠’가 38.85%, ‘아범’ 25.1%, ‘그 이’ 22.4%, ‘애비’ 12.3%, ‘그 사람’1.4%였다고 한다. 전문가들의 의견도 역시 다양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시댁 어른 들 앞에서는 ‘그 이’로, 친정 어른들에게는 ‘○서방’이 보편적인 지칭어들이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오늘날 아내가 남편을 부르는 호칭어나 지칭어가 얼마나 다양하고 일관성이 없는가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런 다양성 속에서 어느 하나만을 택해서 똑같이 적용을 하는 것은 다소 무리라고 보는 전문가들도 많다. 하지만 공동의 문화적 뿌리를 두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동일하지 않는 용어들을 너무 많이 사용하는 것은 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런 일은 가장 긴밀한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 가정과 교회에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든 이러한 적절한 부부간의 아름다운 호칭어와 지칭어의 사용은 아름다운 공동체 문화를 형성해 가는 귀중한 잣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 모두 올바른 언어문화 창조에 앞장설 수 있게 되기를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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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06
  • [조희완 목사] 신앙의 적폐 (삿17:1-6)
    문재인대통령이 집권을 시작하면서 국정 지표로 삼은 것이 바로 ‘적폐 청산’입니다. 적폐(積弊)란 ‘오랫동안 쌓여온 폐단’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적폐는 반드시 청산되어야 하는 게 지당합니다. 다만 무엇을 적폐의 기준으로 보느냐는 것은 생각할 여지가 있습니다. 자기 판단을 기준으로 적폐몰이를 하고 마녀사냥을 하듯이 청산의 대상으로 몰아가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 판단기준이 절대 선이 아니고 진영에 따라서 판단기준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폐란 잘못된 것인데 오랫동안 쌓여온 나머지 몸에 밴 습관이 되었기 때문에 좀처럼 바꾸거나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사람이 오래된 습관을 바꾸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유대교의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잘못된 악습과 불의한 제도를 청산하시려고 했지만 강한 저항에 부딪혀야 했습니다. 적폐 청산이 얼마나 쉽지 않은지를 보여 주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습관을 바꾸지 않으면 자기발전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적폐를 청산하지 않으면 그 사회가 발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항이 따르고 고통이 따르더라도 잘못된 관습은 뜯어고치고 청산하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기독교계에도 청산되어야 할 오랜 기간 동안 쌓이고 쌓여온 적폐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가 잘못된 것을 뜯어고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개혁하지 않으면 사회로부터 외면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잘못된 것인데도 잘못된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붙잡고 있는 관습이 있습니다. 당연하게 여기고 있지만 우리가 적폐로 여기고 고쳐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는,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은 적폐입니다.(삿17:6) 둘째로는, 편의주의를 추구하는 신앙은 적폐입니다.(삼하6:6,7,대상15:13) 셋째로는, 세속주의적인 신앙생활은 적폐입니다.(롬12:2,약1:27) 느리더라도 불편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바른 신앙생활을 힘쓰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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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06
  • [심재철 목사] 불편한 반상회
    아무리 날이 더워도 혼자 쓰는 에어컨은 불편하다. 눈치가 보인다. 그리고 아파트에서 그만큼 불편한 것이 하나 더 있다. 반상회. 그 자리는 안건이 무엇이든지 늘 불편하다. 「‘고성, 갈등, 비난’ 이 셋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고성(高聲)이라.」 경상도 아지매와 아재의 소리는 기본적으로 데시벨이 높다. 본인은 화난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아무리 봐도 화가 많이 났다. 의견을 낼 때도, 건의사항이 있을 때고, 심지어 부탁할 때도 화가 나 있다. 냉정하게 분노의 이유를 분석해보려 하지만 답을 찾을 수 없다. 화를 낼 타이밍도 이유도 아닌데 소리는 점점 커지고 상대의 말을 부정하며 공격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이 반상회에 잘 참여하지 않는다. 불참에 따른 벌금이 있지만 참석하지 않는다. 어쩌면 불편한 자리에서 담임목사와 만나는 것이 더 불편해서 일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이런 자리에서 집사님들과 만난다면 편치는 않을 것 같다. 오늘 반상회도 여러 가지 논의할 부분이 있다. 분명 누군가 도화선이 될 것이고 전쟁은 시작될 것이다. 아파트 옆 공터에 버스 차고지가 들어온다. 그리고 배수관에 문제가 있어서 작은 공사가 추진되어야 한다. 역시나 난장(亂場)이다. 뭐라 하는지 들리지도 않고 시끄럽기만 하다. 반상회에서 관리소장은 3자의 입장이다. 입주민과 대표가 논의하고 결정된 것을 실행하는 위치이기에 격한 토론에 참여할 이유가 없다. 내 의견을 내봐야 내 목과 마음만 상한다. 잠시 먼 곳을 바라보며 심신의 평온을 유지하고 있을 때 갑작스러운 공격이 들어온다. “관리소장이 누구요?” 얼마 전 이사 온 어르신이다. 나를 몰라서? 아니다. 관리소장이 관리실에서 자리를 지키지 않아 짜증이 난 것이다. 새로운 입주민이 생기다 보니 나의 근로 형태를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차근히 설명해드린다. “아파트에 필요한 일은 시간 가리지 않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다만 경비처럼 자리를 지키며 근무하지 않기로 처음부터 계약이 되어 있습니다.” 이미 대부분 입주민이 알고 수긍하는 내용이었고 문제 될 부분이 아니었다. 그때. “소장!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입주민들이 수군거려! 불편하다고!” 입주민이기도 한 전(前) 관리소장님이 갑자기 더 큰 소리를 내며 따져 묻기 시작한다. 하... 저 어른 있을 때 아파트 상태를 생각하면 지금도 화가 난다. 더럽고, 노후 된 시설 방치되고, 미래 준비 따위는 없었고. 사실 지금 하는 고생의 절반은 저 어르신의 뒤처리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지금 아파트 상황에서 고군분투하는 나를 누구보다 가장 잘 알 사람이다. 그리고 전과 다르게 뭐가 좋아졌는지도 분명하게 알고 있을 텐데. 기가 막힐 노릇이다. 할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제가 근무하면서 불편하신 부분이 많은데 말씀을 못 하셨나 봐요. 제 생계를 염려해서 그러셨다면 염려 마세요. 요즘 최저시급이 올라서 주 5일 편의점 가서 일해도 여기 일보다 덜 힘들고 급여도 낫습니다. 그러니 좋은 사람 생기시면 반상회에서 정식으로 해임안 올리셔서 관리소장을 바꾸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정당하게 해임안을 올려서 결의하시라고 차분하게 말씀드렸다. 나는 고용된 사람이다. 고용주가 맘에 들지 않으면 해고하면 그만이다. 일도 못하면서 90만 원이나 받아갈 이유가 없다. 나를 위해 아파트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파트를 위해 관리인이 존재하는 것이니깐. 서운할 이유도 버틸 이유도 없다. “우리 새로운 소장님 와서 아파트 많이 깨끗해지고, 일 처리도 빠르고 좋습니다.” 여기저기서 토닥이는 말씀이 이어진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상처는 이미 받았고 흔적은 남더라. 날이 덥다. 그리고 사람과 마주하기가 갑갑하다. 언제까지 나는 아파트에서 일하고 있을까? 벌써 만 3년이 지나고 있구나.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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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06
  • [이정희 목사] 가정에서의 높임말과 낮춤말 : 며느리가 시부모에게
    I. 서언(序言) 앞에서 논한 바 있지만 높임말은 우리 사회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거추장스러운 걸림돌이 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어느 사회이건 특히 다양한 계층이 모여 있는 교회에서는 최소한의 예의는 반드시 있어야 될 것이고, 이를 잘 이행할 때 이 사회 속에서 올바른 높임말과 적합한 낮춤말 하나로도 아름다운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지난 호에서는 가정에서의 호칭 중에서 시부모가 며느리에게 어떻게 호칭하며 지칭할 것인지를 논하였다. 본 호에서는 며느리가 시부모에게는 어떻게 높임말을 해야 될 것인지를 논하고자 한다. II. 며느리가 시부모에게 하는 호칭 오늘날의 높임말은 어떠한가? 여기에 대해서는 지난 번 3회에 걸쳐 논하면서 그 심각성을 소개한 바 있었다. 그것은 오늘 본 호에서 논하고자 하는 가정에서의 높임말 사용도 마찬가지이다. 한마디로 심각할 정도로 많이 변형되어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실례를 들면 요즈음 젊은 층의 다수는 ‘-어요’라는 말을 선호하면서 ‘그랬어요.’, 저랬어요.’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듣는다. 이는 며느리가 시부모에게 하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분석해보면, 낮춤말은 아니지만 격식을 차리고 시부모에게 쓰는 말도 아니다. 이런 경우는 ‘그랬습니다.’, ‘저랬습니다.’란 표현이 가장 올바른 높임말이다. 또한 잘못된 말은 ‘제가 그랬습니다.’라고 해야 되는데 ‘내가 그랬습니다.’라고 함으로서 ‘나’와 ‘제’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한 가지 실례를 더 든다면, 이제 갓 결혼한 새신부가 시아버님께 ‘아버님 식사하세요.’라고 말했다가 시어머님께 꾸중을 들은 일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때는 어떤 높임말이 좋을까? 이때는 ‘아버님, 진지 잡수십시오.’라고 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높임말이다. 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날까? 이런 높임말의 붕괴는 주로 어휘를 잘못 선택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경우가 아주 많다. 예를 들면, ‘생신’, ‘연세’, ‘진지’, ‘말씀’ 등의 높임말 대신 ‘생일’, ‘나이’, ‘밥’, ‘말’ 등의 평대어를 예사로 쓴다. 또 ‘주무시다.’, ‘말씀하시다.’, ‘잡수시다.’, ‘드리다.’ 라고 해야 되는데 ‘자다’, ‘말하다’, ‘묻다’, ‘먹다’, ‘주다’로 말을 한다. 이는 높임말의 선어말 어미인 ‘-시’를 생략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상과 같은 경우만 보더라도 오늘날 젊은 층이 시부모님이나 윗사람에게 사용하는 높임말은 호칭어이든 지칭어이든 얼마나 다양하고 일관성이 없는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런 다양성 속에서 어느 하나만을 택해서 똑같이 적용을 하는 것은 다소 무리라고 보는 전문가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가장 기초적인 공동체인 가정에서와 공동의 문화적 뿌리를 두고 살고 있는 우리의 사회 현실에서 동일하지 않는 용어들을 너무 많이 사용하는 것은 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런 일은 가장 긴밀한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 가정과 교회에서는 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정이든 교회이든 이러한 윗사람께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를 바로 사용하는 것은 교인으로서 갖출 아름다운 예의 일 것이다. 또한 건전한 사회문화를 형성해 가는 귀중한 잣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III. 결 어 우리가 가장 흔히 쓰는 가정의 호칭어, 지칭어들도 이상에서 보는 대로 바로 쓰지 못하는 경우들도 너무 많다. 하지만 이러한 원칙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간의 따뜻한 사랑의 마음이다. 예를 들면, 며느리가 친정어머니 대하듯 시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이런 원칙은 때로는 무시되어도 좋을 것이다. 문제는 상호간의 마음이다. 서로가 신뢰하고 사랑한다면, 약간의 어법에 오류가 있을지라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오늘도 오고가는 서로 존중하고 높이는 말들 속에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하루가 되기를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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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21
  • [조희완 목사] 신앙의 경주 (히12:1-3)
    우리나라에서 2005년도에 개봉이 되어서 많은 국민들의 마음을 감동시킨 “말아톤”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는 2급 정신지체 장애를 가지고 있는 배형진군의 삶을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배형진군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2001년도 춘천 국제마라톤 경기에서입니다. 그 당시 그의 나이가 불과 16세였으며 2급 정신지체 장애인이었는데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조목을 받았고, 그 이듬해에는 철인 3종 경기에도 출전을 해서 풀코스를 완주했습니다. 그 배형진군의 삶이 모든 장애아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줄 수 있다고 판단을 해서 “말아톤”이라는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북한의 김정일국방위원장이 알려진 바대로 영화광인데 그 영화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작년에는 배형진군이 평양 국제 마라톤 경기에 특별 초대를 받아서 경기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정상인들도 해 낼 수 없는 일을 해 냄으로서 인간 승리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가 인간 승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어머니의 눈물어린 노력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배형진군은 지능이 4살 아이 정도밖에 안되는데, 그 아이를 어떻게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할까를 생각하다가 달리기에 소질이 있음을 알고 직접 훈련을 시켰던 것입니다. 아들에게 너무 가혹한 훈련을 시키는 것 때문에 친어머니가 아니고 계모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의 헌신으로 오늘의 그가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마라톤 경주와 같습니다. 우리는 이 믿음의 경주에 반드시 승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할 수가 있을까요? 첫째는, 준비가 철저해야 합니다.(1) 둘째는, 인내를 발휘해야 합니다.(1) 셋째는,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2) 코로나19라는 어려운 상황을 맞이한 우리 모두 신앙의 경주를 완주하고 주님 앞에 승리자들로 서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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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21
  • [오성한 목사] 말씀은 주야로 묵상해야한다.
    성경이 “말했구나.” 정도가 아니다. “주야로 묵상해.” “이 말씀을 붙잡아”, “이 말씀은 귀해”, “이 말씀을 들어라”고 하신다. 목사의 설교만 들어선 안 된다. 성령님께 직접 설교를 들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설교하신다. “하나님께서 메세지 하시구나”하는 것을 말씀을 통해 발견해야 한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들린다. 주야로 묵상하자. 자나 깨나 묵상한다는 말이다. 이 율법 책을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라고 했다.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고 했다. “행하라”를 “믿어라”로 읽어야 한다. 그리하면 어떻게 되는가? “네 길이 평판하게” 된다. “형통하게” 된다. 하나님이 말씀은 진실이다. 평탄한 길, 형통한 길이 여기 있다. 평탄하고 형통하고 싶어 노력만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윗은 말씀을 묵상하다가 실재가 되었다. 믿음으로 기름 부음을 유지할 뿐 아니라 선포를 했다.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오지만...”라고 마음에 있는 것을 읊조리고 선포를 하는 것이다. 마음에 있는 것을 선포를 하는 일을 하려면 말씀이 우리에게서 떠나지 말게 해야 한다.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라고 하신다. 묵상이란 깊이 생각하고 깨달은 것을 입으로 읊조리는 것을 말한다. 읊조리는 것, 자꾸 말해야 한다. 입을 가지고 말을 해야 한다. 말을 온전하게 하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다. 이 땅의 아무리 좋은 말도 온전한 말은 없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온전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읊조릴 때 온전한 말이다. 말씀을 말하는 사람은 온전한 자라고 성경이 말한다.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고 하셨다. “내가 온전하니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씀을 믿음으로 거룩해질 수 있다. 말씀을 말함으로 온전 해 질 수 있다. 우리는 “이 율법 책을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겠다.”라는 결단이 필요하다. 그러면 반드시 오늘 이후로부터 응답의 문이 열린다. 형통하다. 평탄하다. 문이 열린다. 형통한 길 평탄한 길이 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1:8)라고 하셨다. 놀라운 말씀이 아닌가! 말씀을 다섯 가지 방법으로 가까이하길 권한다. 읽기, 듣기, 공부하기, 암송하기, 묵상하기이다. 말씀을 읽는 시간을 꼭 정하길 권한다. 작정해 보라. 말씀이 읽어질 것이다. 읽기만 할 것이 아니라 공부하기도 해야한다. 말씀은 들음에서 믿음이 생긴다. 말씀을 듣는 일에 귀를 기울이고 관심을 가지는 것은 중요하다. 말씀을 듣는데 어떤 말씀을 듣느냐는 중요하다. 정확한 복음을 들어야 한다. 참고로 유튜브 <오복음tv>를 활용해 보라. 유튜브 <오복음tv>를 들어보라. 힘이 생길 것이고, 행복의 문이 열릴 것이다. 삶 속에 흔들 깃발이 생길 것이다. 성경 공부하기를 재미있고 쉽게 하는 방법을 소개하고 싶다. 유튜브 <오복음tv>를 활용해 보라.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장별로 복음으로 볼 수 있도록 영상으로 잘 만들어져 있다.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가능하다면 로마서를 먼저 공부한 후 창세기부터 노트에 필기도해 가면서 공부할 것을 권한다. 암송하기에도 도전해 보라. 암송은 암송할 수 있다는 생각이 중요하다. “나는 성경을 암송할 거야”라는 말을 1,000번을 해 보라. 쉽게 암송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나는 성경을 암송할 거야”라는 말을 억지로 하지 말고 그냥 수시로 그렇게 해 보라. 1,000번을 말하면 무엇이든지 쉬워진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말씀을 묵상하라. 읽고, 듣고, 공부하고, 암송한 말씀을 생각하고, 되새기고, 주장하면 마음속에서부터 올라오는 환희와 함성이 생길 것이다.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는 말씀을 만드는 일을 묵상이라고 한다. 그것이 기도하게 될 때 놀라운 능력의 삶은 나타나게 될 것이다. 다시 당부드린다. 생동감 있는 삶을 위해 유튜브 <오복음tv>를 활용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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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21
  • [오태열 목사] 강한 자와 싸우라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평탄한 삶을 축복이고 험악한 삶을 불행이라 생각한다. 험악한 삶에는 강한 대적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면 왜 광야로 이끄시고 강한 대적들을 만나게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다. 결론적으로 더 큰 승리를 주시기 위함이다. 약한 상대는 이기기가 쉽다. 쉽게 이기는 싸움은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강한 상대를 만나 이겼을 때, 기쁨과 영광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때부터 일약 스타가 되고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는다. 모세가 바로 왕에게 내 백성을 해방시켜 달라고 하니 바로 왕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래 모든 편이를 봐 줄 테니 데리고 가라 하였다면 얼마나 무미건조하겠는가? 바로는 착한 자가 아니라 완악한 자로서 그의 완악함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10가지 재앙의 기적을 보여주는 원인이 된다. 우리의 삶에 완악한 바로를 만나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 큰 승리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바로의 완악함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출애굽이 가능하였다. 애굽에 430년간 노예로 산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애굽화 되어버렸다. 이런 이들이 모세의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을 버리고 애굽을 떠나겠는가? 바로의 완악함이 애굽에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지긋지긋한 환경을 만들었기에 미련 없이 애굽을 떠나게 된 것이다. 나쁜 환경은 약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을 쉽게 포기하게 만든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죽을 때 병들어 고생하다가 죽는다. 천국을 사모하라는 뜻도 있지만, 본인도 가족 식구에게도 떠나게 하기 위함이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 우리 지역에 국회위원 선거가 있었다. 당시 국회위원은 정치 거물인 한나라 당 사무총장인 이○호 씨였고 맞서는 자는 이름 없는 민노당 강○갑 씨였다. 내게 지지를 부탁할 때, 나는 당신의 싸움은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다.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인지도와 조직, 선거 자금 면에서 모두가 불리한데 무엇으로 어떻게 그를 이길 것인가 라고 물으니 그는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면 이라고 한다. 나는 교만과 자만에 빠져 지역구를 잘 돌아보지 않는 그의 약점을 파고들어 유권자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라고 조언하였다. 결과는 예상을 뒤엎고 승리하여 전국의 뉴스감이 되었다. 당선 후 그는 승리의 요인 다섯 가지 중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았다면 진 선거라고 하였다. 사무엘상 17장에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나온다. 객관적으로 다윗이 골리앗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 사울 왕은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으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하였다. 결과는 다윗의 일방적 승리로 끝난다. 이때부터 다윗의 명성은 이스라엘 전역과 주변국까지도 알려지게 되어 마침내 이스라엘 2대 왕이 된다. 강한 자에게도 약점이 있기 마련이다. 자만심과 교만이다. 상대를 얕잡아보고 방심한다. 사무엘상 17:42절에 골리앗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이 약점이 다윗에게 패하게 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서도 토끼가 이길 수밖에 없는 신체적 조건을 가졌으나, 자만심과 교만으로 질 수 없는 경주에서 거북이에게 지고 말았다. 이같이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지는 이유가 바로 자만심과 교만임을 말해준다. 그래서 사도바울 고린도전서 10:12절에서 이런 자들에게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충고하면서, 자신은 약함을 자랑한다고 하였다(고후11:30). 약할 그때가 곧 강해짐을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전도서 9:11절에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였다. 이왕 싸운다면 약자와 싸울 것이 아니라 강자와 싸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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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21
  • [신재철 목사] 관리실에 에어컨이 생기다!
    솔직히 너무 덥다. 컨테이너로 제작된 좁은 관리실은 숨이 막힐 지경이다. 한여름이지만 오히려 바람이 살랑이는 밖이 더 형편이 나았다. 그래서 전에 근무하시던 분은 여름이면 집으로 올라가셨다고 한다. 그래, 여기 있다가는 요리가 될 것 같다. 앞으로 누가 근무하든 냉난방이 전혀 안 되는 작은 컨테이너 사무실은 사람이 상주할 수 없을 것 같다. 상주는커녕 필요한 업무를 위해 잠시 머무는 것도 불가능하다. 지금 아파트의 큰 이슈는 승강기 공사다. 제법 큰 지출이 예상되었기에 몇 곳에서 견적도 보고 온라인에서 상담도 받아 본다. 아파트 관리실은 이런 문제로 언제든 시끄러울 여지가 있다. “소장이 돈을 얼마 받았다, 부실 업체를 선정했다, 업무 처리가 미흡하다.” 여러 말 듣기가 싫어 최대한 신경 쓰며 진행하게 된다. 업체 선정은 다행스럽게도 기존에 관리하던 업체에서 맡게 되었다. 우리 시설을 가장 잘 알았기에 이 업체가 했으면 싶었는데 마침 견적도 가장 낮은 가격을 제시했다. 입주민 대표도 오케이. 그렇게 공사가 진행되었다. “소장님, 공사 기간 고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사 후 건네진 봉투. 내가 고생한 것이 없는데 사례라며 봉투가 전해진다. “??” 평소보다 조금 더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던 것이 고생이라면 고생이랄까? 하지만 봉투 받을 내용은 아니다. 웃으며 거절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사장님은 조금 놀란 듯 표정을 보이셨다. 다른 아파트 소장님들도 이 정도는 다 받으니 받아도 된다는 말씀을 하시며 봉투 전달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처음에는 소장님이라 하더니 이제는 목사님이라 부르며 몇 번 설득하는데, 목사라 부르니 더 받기 어려워진다. “정직한 비용으로 꼼꼼하게 작업해 주시느라 사장님이 고생하셨죠. 저는 여기 일하며 절대 따로 봉투를 받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앞으로도 안전한 시설 되도록 잘 부탁드립니다.” 사람 사는 정이 그런 것이 아니라며 몇 번이나 나를 설득하셨지만, 이거 받는 순간 내 명예가 무너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미소는 짓되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리고 한 가지 사장님께 제안. “사장님, 저는 어차피 몇 년 후 여기 떠날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사장님은 여기 소장 바뀌어도 계속 관리 이어가셔야죠. 관리실이 여름이면 찜통입니다. 그런데 에어컨 하나 사지 못하고 있어요. 차라리 사장님 이름으로 에어컨을 기증해 주시며 어떨까요? 그럼 입주민들이 사장님을 좋게 보실 것 같은데.” 순간적인 아이디어였지만 사장님도 나도 만족스러운 대안이었다. 즉시 일은 진행되었고 제법 넉넉한 용량의 에어컨이 설치되었다. 나는 입주민들에게 은근히 소문을 냈다. 승강기 용역회사에서 관리실에 에어컨을 기증했다고. 나의 계획대로 입주민들은 승강기 사장님을 칭찬했고 사장님은 계속 아파트 업무를 이어가고 있다. 그래, 그거면 된 거다. 그렇게 설치된 에어컨 덕에 가장 신난 건 나다. 한낮 사무실 업무가 가능해진 것은 물론이고 야외 업무 후 잠시 땀을 식히기에도 그만이다. 하지만, 나도 눈치가 있지. 에어컨 실외기 돌아가는 소리에 입주민이 불편해할까 신경이 쓰인다. 에어컨 바람에 열 좀 식히고 있을 때 멀리서 누군가 다가온다. 관리실 방향이다. 큰일이다! 지금 사무실이 지나치게 시원하다. 나는 급하게 리모컨을 집어 들어 에어컨 전원을 껐다. 눈치 좀 보면 어떤가. 아무렴 에어컨 있는 사무실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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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21
  • [박봉석 목사] 유앙겔리온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 중에 중요한 한 가지는 오직 한 가지 일에만 전념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세계 곳곳에 안 들어간 데가 없고 심지어 이 세상에서 가장 폐쇄된 나라인 북한에까지도 거침없이 들어간 미국의 대표적인 기업이 있습니다. 바로 코카콜라입니다. 그렇습니다. 코카콜라는 공산권이든 제3세계 국가이든 구별 없이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심지어 아프리카 칼라하리의 부시맨의 손에도 코카콜라 병이 들려있었던 것을 옛날에 부시맨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봤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 회사 사장의 불타는 집념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코카콜라의 판매를 위하여 자기의 모든 정열을 바치고, 거기에 아예 자기 목숨을 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오직 코카콜라의 판매에만 전념했기에 누구를 만나든지 무엇을 하든지 항상 코카콜라만 생각하고 코카콜라만 말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어느 때는 기자들과 만나서 자신의 기업 경영에 대하여 인터뷰를 했는데, 그 인터뷰를 마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 혈관 속에 흐르는 것은 피가 아니라 코카콜라입니다.”그는 정말 완전히 코카콜라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어떤 기업도 넘볼 수 없는 세계 제1의 기업 브랜드의 아성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위대한 아성을 쌓은 사람이 성경에 나옵니다.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쌓은 것은 위대한 복음의 아성이었습니다. 코카콜라 사장의 비유대로 하면 아마 그의 혈관에는 피가 아니라 복음이 흐르고 있다고 말해야 될 것 같습니다. 바울이 코카콜라 사장과 다른 점이 있다면 코카콜라 사장은 썩어질 것에 정열을 바치고 집중한 사람이지만 바울은 영원한 것에 헌신하고 집중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이 복음에 그렇게 자신을 불태웠을까요? 신약 성경의 언어인 헬라어로 복음을 ‘유앙겔리온’이라고 합니다. 풀이하면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 이 단어는 로마 황제와 관련된 용어였습니다. 새로운 황제가 등극할 때 또는 황제가 자신이 다스리는 식민지나 도시를 방문할 때에 백성들은 그것을 ‘유앙겔리온’이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황제가 등극하면 일반 죄수들에게 특별사면을 시행했고, 또 황제가 어느 곳에 가면 신하들과 시민들은 기념 하사품이나 선물, 특식 등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기쁜 소식 즉 유앙겔리온이었습니다. 그것을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저 옛날 일제 강점기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일본천황이 항복을 했다는 소식, 바로 그것이 유앙겔리온이었습니다. 옛날 시대를 살았던 나이 많으신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1945년 8월15일에 라디오를 통해서 침울한 일본천황의 그 항복 선언을 듣는 순간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해방이구나. 이제는 자유이구나.”하는 생각에 많은 사람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좋은 유앙겔리온 있습니다. 죄로 인해 영원한 멸망의 포로가 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소식은 온 인류가 기뻐해야 할 진정한 유앙겔리온입니다. 사람들을 마귀가 장악한 세상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 구원 하는 것은 유앙겔리온 즉 복음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복음에 자신의 생애를 바쳤던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원 받은 인생에게 가장 가치 있는 삶은 내 자신을 구원한 바로 그 복음을 전하는 유앙겔리온의 전달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건강, 지식, 지혜, 재물 등을 바로 그것을 위해서 사용할 때 우리는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게 되고 그래서 저 하늘의 상급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몸에도 사도 바울처럼 유앙겔리온의 뜨거운 피가 흐르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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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21
  • [조희완 목사] 신뢰의 결과 (대하20:20-23)
    한 TV방송 프로그램 중에 시골에서 사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부부를 방송국 스튜디오에 모시고 퀴즈 대회를 진행하는 프로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카드에 적힌 단어를 설명하면 할머니가 알아맞히는 내용이었습니다. 한 할아버지가 차례가 되어서 카드에 적힌 단어를 열심히 할머니에게 설명을 했습니다. 그 날 할아버지가 설명하고 할머니가 알아맞혀야 할 단어는 “천생연분”(天生緣分)이라는 단어였습니다. 그런 방송 프로에 익숙하지 못한 할아버지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할머니가 동문서답(東問西答)만 하시고 알아맞히지를 못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너무 답답하셔서 “당신하고 나 사이를 뭐라고 혀?”라고 힌트를 드렸더니 할머니 입에서 튀어나온 대답이 “원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민망해진 할아버지가 “그것 말고 네 글자로 말해봐!”라고 다시 힌트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이번에 할머니 입에서 튀어나온 대답이 “평생원수!”라고 하셨습니다. 그 방송을 시청하고 있던 방청객들과 전국의 시청자들이 배꼽을 잡고 웃은 적이 있습니다. 그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는 참 대단하시다는 생각이었고, 또 하나는 안타깝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원수 같이 여기면서도 평생을 함께 살아오셨으니까 대단한 것이고, 부부이면서도 평생을 그렇게 원수같이 여기고 살았으니까 안타까운 것입니다. 부부는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평생이 즐겁고 행복할 수가 있습니다. 부부사이보다 우리가 더욱더 신뢰해야 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할 때 어떤 결과가 따르게 되는 것일까요? 첫째는, 신뢰하는 자를 견고케 하십니다.(대하20:20-23) 둘째는, 신뢰하는 자를 책임져 주십니다.(렘39:15-19) 셋째는, 신뢰하는 자를 구원해 주십니다.(사30:15-17) 하나님을 더 깊이 신뢰하시므로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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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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