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행연월일 2026-04-2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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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호숙 목사] 영적 싸움에 “VICI(이겼노라)”가 있는가?
    전쟁에는 반드시 이겨야 하듯, 영적 싸움에도 반드시 승리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의 종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로마 제국 시대 율리어스 카이사르(Jullius Caesar – 영어표기 시저. 성경표기 가이사)는 전쟁을 스포츠처럼 즐겼던 사람이다. 그가 남긴 명언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The dice(die) is cast. 주사위는 던져졌다. 폼페이우스가 로마 원로원과 음모를 꾸며 카이사르를 죽이려고 로마로 복귀할 때 루비콘강을 건너기 전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오라고 하였다. 명령을 받은 카이사르가 생각해 볼 때 가만히 있으면 자신은 파멸될 것이고, 무기를 들고 루비콘 강을 건너오면 로마의 역적이 될 것이므로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루비콘 강을 건너기 전 카이사르는 고민하였다. 이래도 죽을 상황이고 저래도 죽을 상황인데 “죽을 때 죽더라고 싸우고 죽자” 결단을 내리고 무기를 들고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명언을 남겼는데 “주사위는 던져졌다”고하였다. 이때부터 특별한 결단을 하여 어떤 일을 할 때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을 하게 되었다. *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왔노라[VENI-고대 라틴 발음(웨니), 현대 라틴 발음(베니), I came] 보았노라[VIDI-고대 라틴 발음(위디), 현대 라틴 발음(비디), I saw] 이겼노라[VICI-고대 라틴 발음(위키), 현대 라틴발음(비키,비치), I conquered] 이 문구는 B.C 47년 카이사르가 소아시아 파르나케스를 격파한 후 원로원에 보냈던 전승 보고서 첫 줄이다. 이 문구를 우리 한국인들이 체육대회나 단합대회 때 원문을 약간 변경하여 “왔노라 싸웠노라 이겼노라”로 사용하기도 한다. 어쨌든 인간적으로 카이사르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 그는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폭군(暴君)이 아닌 성군(聖君)의 모습으로 부하들을 다스리며 덕(德)의 정치를 했다. 카이사르의 인생철학이 있었는데 “강자에게 영예를 양보하고, 약자에게 필수품을 양보하라”였다. 인생철학 그대로 그는 전리품들을 자신이 챙기지 않고 부하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고 개인적 재산을 가지고 법률사무소, 마켓, 편의시설을 지어 제공함으로 많은 사람의 신뢰를 쌓아갔으며 자신은 검소한 삶을 살아 타인들로하여금 인정받는 지도자였다. 또한 유머 감각이 있어 부하들에게 마음의 안정을 주었고. 외부 적군들을 정복하기보다 더 힘든 내국 통치를 덕(德)의 정치로 이끌었던 지도자였다. 하지만 죄의 성향을 가진 인간들은 선한 정치를 하는 카이사르를 온전하게 두지 않았다. 카이사르와 친했던 부하 브루투스를 배신자로 만들어 음모를 꾸며 살해하도록 하였다. 믿었던 부하에게 배신당해 칼에 찔려 죽어가면서 마지막 남긴 말이 “브루투스 너마저...!” 인생 허무함으로 막을 내렸다. 훗날 카이사르에 대한 평가를 할 때에 일부 부정적 평가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좋은 평가를 하는데 로마에 수많은 지도자가 있었지만 카이사르를 “로마가 낳은 창조적 천재”라고 결론지었다. 신앙의 싸움을 하고 최후 주님 만나는 그날 주님께서 주신 사역의 현장인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VICI(이겼습니다)” 이렇게 승전 보고를 한다면 멋진 인생을 산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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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30
  • [박동철 장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다시 논하다
    지난 9월 3일 전국 신문 1면 톱뉴스를 장식한 중국 베이징에서 보내온 사진이 눈길을 끌었다. 중국 전승절 8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중국 시진핑, 러시아 푸틴, 북한 김정은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서늘한 기운으로 다가왔다. 마치 한반도를 바라보면서 어떻게 해보겠다는 음흉한 모습이랄까. 아무튼 중국 전승절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답답하지만, 중국은 한 장의 사진으로 대한민국을 비롯한 서방권 제국들에게 도전하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작금의 세계 정세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후 강한 드라이브로 관세폭탄을 세계 각국에 던지면서 ‘강한 미국’을 시현하고 있다. 이에 대한 사회주의 동맹의 이들 세 나라는 단합의 자세를 즉각 보이는 것으로,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한참 국민 정서를 흐트려놓았다. 문제는 이날 사진 한 장에서 세계는 지금 경제전쟁과 이념패권이 깊어지고 있다는 진단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세계를 주도하는 미국의 경제력에 부단히 따라붙고 있는 중국을 미국은 본격 견제하기 시작했다. 세계 각국 언론사 탐사취재팀은 오늘의 중국이 시진핑의 장기집권을 비판하면서 위기로 치닫고 있다는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반면에 중국의 건재함을 진단하면서 미국의 경제력을 압도해 간다는 보도를 내기도 한다. 세계 새로운 산업 트렌드인 AI 산업시대는 중국이 세계를 이끌 것이라는 학자들의 진단도 있다. 등소평 후 개혁개방의 대전환이 이제 자본주의의 현장 미국을 넘어설 것인가. 아니면 공산사회주의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이끄는 데 한계가 왔다는 주장이 맞을 것인가. 쉽게 전망할 수 없는 형편 아니겠는가. 상황의 전개가 어찌되든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야욕에 대해 쉽게 시선을 돌릴 수 없다. 러시아의 남하정책과 북한의 3각 대응이 우리에게는 조선 말 위기의 한반도가 되지 않을까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해방 후 좌우 대립에서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가 아닌가. 주변 강대국이 새롭게 이념전쟁화하는 신냉전시대, 우리는 갈 길을 모르고 깊은 내전(內戰)에 휩싸여 있다. 필자는 얼마 전 우리의 근대사 영웅 안중근이 1907년 하얼빈에서 원수 일본 총리 이토를 쓰러뜨린 후 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주창했던 이야기를 영화 《하얼빈》을 통해 소개한 바 있다. 다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 오버랩된다.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은 이 비상하고 위험한 정세일지라도 복음의 실크로드를 열심히 닦아내는 것이다. 이 사명의 복음운동에 동아시아의 진정한 평화의 길이 열릴 것이다. 사형집행을 앞둔 차디찬 감옥 바닥에서 그는 5가지의 평화제안을 했다. 첫째, 조선·일본·청나라 3국이 연합하여 협력공존의 협력기구를 만들자. 둘째, 3국이 공동은행을 설립·운영하자. 셋째, 3국이 공동연합하여 서양 침입에 공동대처하자. 넷째, 3국의 경제개발 지혜를 일본에서 배우자. 다섯째, 상호 존중하고 평화를 유지하자. 어쩌면 굴욕 같지만 일본에 대해 조선을 식민지화하지 말고 아시아를 평화의 공동지대로 만들자는 혁신적 제안이었다. 일본에 36년간 식민지 지배를 받고 해방되어 6·25를 겪으며 처참한 빈국이 되었던 나라, 이 나라가 자유민주의 자본시장경제의 기틀에서 세계 10위 내 경제 강국으로 성장했다. 성공과 부흥 끝에 다가오는 또 다른 위기인가. '경제 보물섬'이 되어버린 지금의 대한민국에 대해 눈독으로 가득 찬 주변 나라들을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한국교회가 강력한 복음운동으로 나가야 한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동아시아에 새롭게 심도록 해야 한다는 논지이다. 먼저 동아시아 복음평화운동으로 한반도의 복음통일을 이루는 데 부단한 사명 수행이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동아시아 복음평화운동에 주변 모든 나라의 교회가 연합하는 새로운 역사가 있기를 기대해 본다. 약관의 나이에 오직 식민지를 꿈꾸는 적장을 총탄으로 쓰러뜨리고 위대한 동양평화론을 주창할 수 있었을까. 젊은 영웅이 피를 토하듯 던진 이 어록(語錄)을 깊게 되새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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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22
  • [조성숙 권사] 다시 뛰게 하시는 하나님
    지금, 다시 일어서야 할 누군가에게 우리는 모두 한 번쯤, 삶의 무게에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 설명할 수 없는 억울함, 그리고 말하지 못한 상처가 마음을 짓누를 때, 어디서 다시 힘을 얻어야 할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놀랍게도, 성경은 그런 때를 겪은 사람들에게도 말을 건넵니다. 이사야서 33장은 그런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주전 8세기 말, 남유다 왕국은 앗수르 제국의 위협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당대의 앗수르는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고 조공을 강요하며 공포로 지배하던 강대국이었습니다. 남유다 또한 그들의 침공 앞에서 불안에 떨고 있었고, 때때로 생존을 위해 조공을 바쳐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그 위기의 시기에, 이사야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황충의 때 같이 사람이 너희의 노략물을 모을 것이며, 메뚜기가 뛰어오름 같이 그 위로 뛰어오르리라.”(이사야 33:4) 이 구절에서 ‘사람’은 바로 회복된 하나님의 백성, 곧 지금까지는 억눌리고 침묵했던 남유다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고난을 겪고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되찾는 주체로 바뀝니다. 반대로 ‘너희’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앗수르 제국을 지칭합니다. 그들이 강제로 빼앗고 축적한 부와 권세는 결국 하나님의 공의로 인해 무너지게 될 운명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노략질했던 것들이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회복의 선언입니다. 또한 ‘메뚜기’는 그 당시 중동에서 파괴력 있는 집단 행동의 상징이었지만, 여기서는 회복된 유다 백성의 힘찬 움직임과 생동감 있는 회복의 이미지로 사용되었습니다. 작고 연약한 메뚜기처럼 보였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제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다시 일어나는 존재로 변모합니다. 마지막으로 ‘그 위’는 앗수르가 차지하고 있었던 권세와 재물, 전리품이 놓여 있던 자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위로 뛰어오른다는 것은 단지 물리적 회복이 아니라 위치의 역전, 즉 억압에서 회복으로의 전환을 뜻하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던 자들이 결국 무너지고, 그들이 빼앗은 것들을 백성들이 되찾게 되는 회복의 약속입니다. 황충과 메뚜기, 작고 연약한 존재 같지만 그들이 몰려올 때 그 힘은 대단합니다. 하나님은 그 이미지를 사용하셔서 “나의 백성들이 마침내 일어나 다시 뛰게 될 것이다”라고 약속하십니다. 혹시 지금 억울한 일을 겪고 계신가요? 말 못 할 상처나, 기대했던 것이 무너져 침묵 속의 눈물을 흘리고 계신가요? 사람들은 몰라도, 주님은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회복시키겠다. 네가 빼앗긴 것을 다시 뛰어오르게 하겠다.” 이사야 33장 4절은 단순한 문학적 이미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와 회복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억압을 꺾으시고, 넘어진 자들을 다시 일으키십니다. 사람 눈에는 우리가 작은 메뚜기처럼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우리는 회복의 주인공이 됩니다. 오늘도 믿음으로 이렇게 고백해 봅시다. “주님, 제가 다시 일어서겠습니다. 주님이 회복하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고백을 들으시고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시 뛰는 날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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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18
  • [이정희 목사] 왜 7을 행운의 숫자로 보는가?
    1. 서언(序言) 오래전의 본지의 기고에서 동양권에서 주로 기피하는 숫자 4(四)와 서양권에서 기피하는 13과 13일의 금요일에 관하여 기술한 바 있다. 그런데 이런 기피하는 숫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행운으로 여기는 숫자도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익히 잘 아는 7이다. 본 호에서는 왜 7을 행운의 숫자로 보는지에 대한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유래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숫자 7을 왜 행운으로 여기는 유래와 의미 (1) 고대 문명과 종교에서 유래한 신성한 숫자 1) 고대 메소포타미야 문명과 이집트 문명의 7일 주기: 인류 최초의 문명으로 보는 이곳에서 7은 매우 중요한 숫자였다. 특히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은 태양과 이를 자전과 공전으로 움직이는 행성으로 미래를 예측하고 그 주기성을 통해 계절 변화와 농업에 적용했다. 이런 관계로 7행성을 신으로 여기는 동시에 하늘과 지구를 연결하는 중요한 요소로 간주했다. 또한 이 천체를 기준으로 일주일이란 시간이 나왔고, 이는 고대 이집트도 마찬가지였다. 이들도 7을 한 주간으로 삼았고, 농업과 계절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7을 좋아하고 행운의 숫자로 여긴 것이다. 2) 종교적인 상징성: 종교에서도 7은 매우 중요한 숫자였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6일간 세상을 창조하시고, 7일째 안식하셨으며, 요한계시록을 비롯한 성경 전반에서 7이 자주 나오며, 이를 신성함과 완전수로 여긴다. 불교에서도 석가모니가 태어날 때 7걸음을 걸었다는 전설과 칠각(七角) 등의 7을 중요시했다. 이슬람교는 하늘을 7층으로 믿었고, 메카를 도는 순례 의식도 7회로 했다. 이런 면에서 7은 종교 전반에 걸쳐 신성한 숫자로 여겨왔다. (2) 자연현상과 관련된 특별함 : 앞에서 고대 메소포타미야 문명과 이집트 문명에서 태양과 행성의 연관성으로 7을 중요하게 여겼다고 했는데, 이는 다른 자연현상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자연현상 속에도 7은 자주 등장한다. 예를 들면, 무지개의 7가지 색깔도 그러하고, 기본적으로 음악의 7음계도 이와 연관되었으며, 인간의 감각도 7가지로 분류했다. 이 외에도 다양한 자연의 질서나 구조에서 7을 완전함과 조화를 상징하는 숫자로 여겼다. (3)문화와 전통에서 7의 특별함 : 다양한 문화권에서도 7은 행운을 상징하는 숫자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이를 세분화해서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1) 서양 문화에서의 Lucky 7: 미국과 서양 문화에서는 7을 ‘럭키 세븐(Lucky Seven)’으로 인식하면서 7은 길흉을 결정하는 중요한 숫자로 여겼다. 슬롯머신 같은 도박에서도 777을 잭팟으로 하고 있다. 즉 7은 곧 행운과 성공의 상징으로 여기는 것이다. 2) 동양 문화의 경우: 동양에서는 숫자 8이 주로 복을 상징하지만, 7 역시 귀신을 쫓는 행운의 숫자로 여겼다. 예를 들면 중국은 7이 하늘과 땅, 인류와 자연을 연결하는 중요한 숫자로 인식하며, 인간과 우주의 조화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한국에서는 7일장을 치른다거나, 칠석(七夕)처럼 7이 들어간 풍습이 많이 있다. (4) 7의 완벽함과 심리적인 영향 : 심리학자인 조지 밀러의 ‘매직 넘버 세븐’ 이론으로, 인간은 7개의 정보를 가장 효율적인 숫자로 여겼고, 사람의 인지능력에 가장 좋은 숫자라고 했다. 피타고라스도 7을 완벽한 숫자라고 했으며, 일반적으로 7은 시각적으로는 가장 안정감을 주는 동시에 독립적이고 특별한 느낌을 준다는 심리적 요인이 있다는 분석도 했다. 3. 기독교인으로서의 관점 및 결어 이상으로 볼 때 숫자 7이 행운의 숫자로 여기는 이유는 역사적, 종교적, 문화적, 심리적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다시 말하면 고대 초기 메소포타미야 문명과 이집트 문명에서 시작된 태양계 행성의 주기가 실질적 생활에 좋은 영향을 주었고,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등 긍정적인 요인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면이 잘못된 종교와 문화적 인식으로 변하여서 오늘날에도 ‘행운’을 주는 주술적 숫자로 인식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특히 우리 기독교의 관점으로 볼 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숫자 7을 행운으로 여기는 일은 반기독교적인 사고방식이다. 오늘날과 같은 현대 문명에서 아직도 이러한 미신적 사고가 계속된다는 점이 안타깝다. 하지만 이를 바로잡아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이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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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13
  • [박동철 장로] 선교영화 ‘무명’ 에서 받은 동북아 ‘복음평화론’
    가족과 함께 선교 다큐멘터리 영화 '무명(無名)'을 관람했다. 선교방송 CGN이 제작한 기독교 다큐멘터리 영화 무명은 일제 강점기 일본 땅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와 복음을 전한 이야기다. 조선인보다 조선을 더욱 사랑했던 두 선교사의 예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영토 강점이란 원수지간의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복음으로 사랑과 용기를 보여준 선교사의 눈물 담긴 이야기다. 1863년 일본 마쓰야마에서 태어난 노리마츠 마사야스 선교사는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가 일본 공사 미우라에 의해 처참히 시해된 을미사변 사건을 보고 조선 땅에 복음을 전하기로 결심한다. 이듬해 1896년 노리마츠 선교사는 수원 땅에 들어와 조선인이 되기로 마음먹고 청년 조덕성을 만나 한글을 배우고 복음을 전했다. 지독한 핍박 속에서도 예수 사랑을 실천하며 아내 사토와 함께 경기도 수원에서 수원동신교회를 세우고 목회를 이어갔다. 얼마나 고난의 나날이었을까. 세 자녀를 낳아 키우면서 오직 조선인을 사랑하는 복음 정신으로 목회를 이어갔다. 불행히도 사모 사토는 세 자녀를 낳고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러나 노리마츠 선교사는 자녀들과 함께 조선 땅에서 한평생 선교사의 삶을 살다 1921년, 58세의 일기로 소천한다. 1896년에 조선에 입국한 오다 나라지 선교사는 불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노리마츠 선교사의 조선 선교를 보고 조선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오다 선교사는 1896년에 조선 땅에 들어와 이름을 전영복이라 바꾸고 북한 땅과 호남 지역을 돌며 복음을 전했다. 오다 선교사는 특히 일본에 반하는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라고 설파하고 복음을 전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연유로 체포되고 심한 고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정확한 연도는 모르지만 일본 땅으로 강제 추방된 것으로 추정된다. 오다 나라지 선교사는 조선인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다. 조선 청년 박중학이 오다 선교사의 영향을 받아 회심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영화에 담기도 했다. 영화 무명은 국내 전국 영화관에서 상영하고 있지만 관람은 미미하다. 그러나 기독교가 무엇인지, 하나님이 이 땅에 대해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를 알 수 있는 탁월한 다큐 영화였다는 느낌을 필자는 받았다. 일제 36년, 역사와 신앙 사이에서 숨겨져 있던 고뇌의 복음 이야기를 체험할 수 있는 관람의 은혜였다. 문화 선교와 미디어 복음에 사명을 감당하는 CGN방송이 광복 80주년, 한일 국교 정상화 60년을 맞아 제작한 작품이다. 필자는 영화를 관람하고 크고 깊은 은혜를 받았다. 오늘날 한·중·일의 동북아 지역은 갈등이 심화된 국제 정세 속에 있다. 이 갈등의 깊은 곳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일방적 힘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다. 예수 사랑의 복음만이 ‘평화’의 땅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쏴 살해했다. 그리고 감옥에 있으면서 일본에 보내는 ‘동양평화론’을 주창했다. 안중근은 서슬 퍼런 일본 제국이 침략 야욕을 버리고 아시아의 평화 공동체를 만들자고 호소했다. 영웅의 주창은 당시 많은 일본인들이 감동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일본이 이를 받아들일 리 있겠는가. 일본은 이듬해 을사늑약으로 조선을 삼키고 조선 찬탈에 성공, 36년간 압정을 했지만 결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에 의해 패망하고 말았다. 지금 동북아는 한·중·일, 그리고 북한, 미국, 러시아의 지정학적 초갈등 속에 긴장의 도는 더해 가고 있다. 날로 선교가 어려워지고 있는 일본 땅과 중국 땅에 복음의 씨를 뿌리는 데 더욱 힘을 쏟아야 하며, 우리도 오직 예수 사랑으로 일본 두 선교사의 조선 사랑을 실천했던 것처럼 우리의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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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6
  • [박동철 장로] 기독사학이 살아야 대한민국 미래가 있다
    교육강국 대한민국의 초석을 놓은 근대 선각자 세분을 꼽으라면 우남 이승만, 도산 안창호, 남강 이승훈 선생을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이승만 건국 대통령에 대해서는 붙여 얘기할 필요가 있겠는가. 치적의 하나인 토지개혁을 단행하면서 대지주들에게 땅을 사립학교 설립에 유도하고 평생 운영을 맡겼다. 바로 대한민국 인재를 양성한 사학제도이다. 한국 공교육을 폄하하지 않는다. 한데 한국 사학들이 70년대 이후 뜨거운 교육열 속에 향학의 경쟁문화를 통해 수많은 인재양성 바로 산업일꾼들을 키워냈다. 근대역사 속에 독립 운동가이자 교육자 도산 안창호 선생은 미국등지 유학을 통해 선진문화를 보고 조국의 교육진흥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후세들을 위해 배워야 만 살아갈 수 있다는 연설을 당시 후학들에게 설파했다. 자신의 호 도산(島山)을 지은 것도 태평양 바다 속 우뚝 솟은 하와이를 보고 교육을 상징하는 의미로 지었다고 한다. 신민회 조직은 물론 지금까지 이어오는 흥사단 등 독립운동과 조국의 미래를 위해 교육을 강하게 주창한 선각자이다. 남강 이승훈 선생은 유명한 오산학교를 설립했으며 3.1운동 33인의 한분으로 독립운동을 하신분이다. 거장 세분의 선각자는 모두 기독교 이념의 서구교육으로 조국 발전의 밑자락을 놓은 선각자이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학 중 광복이후에도 많은 선교사를 비롯 교회에서 기독사학을 설립했다. 그리고 건학이념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건강한 교육을 선양해왔다. 산업화 민주화과정에서도 기독사학들이 인재양성에 많은 기여를 하면서 명성 있는 사학들을 육성했다. 그리고 상시 채플시간 교목들의 복음 활동을 통해 80년대 한국기독교 부흥에 한축 기둥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최근 들어 기독사학들이 급격히 사양의 길을 걷고 있다는 분석이 모두를 안타깝게 한다. 광역단체 교육수장들이 선출직이 되면서 다양한 교육이념의 정책이 도입되고 있다. 획일적 교과서에 다양성을 도입하고 있다. 학생인권을 우선시하는 인권시대의 권리남용이 교육현장을 어지럽히고 있다는 슬픈 현실이다. 우선 교목들의 복음채플시간이 크게 줄고 있다는 최근 비공식 통계를 보면 알 수 있다. 전국 사립중은 632개, 사립고는 945개소이다. 이중 기독사학을 보면 기독사학중학교가 135개, 고등학교가 185개소이다. 이 중 교목을 둔 기독사학은 중학교 79개, 고등학교 139개 학교로 알려졌다. 기독사학들이 갈수록 교목을 두지 않거나 계속 줄여나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왜 일까. 진보정치성을 띤 교육수장들이 보이지 않게 기독사학들의 복음 활동을 억압하고 있다는 말이다. 교육청에서 지원하는 학교지원예산을 들고 직간접으로 묘한 억압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기독사학의 건학 이념에 채플참여 의무시간이 있다. 이것도 자율 선택권을 두어 채플 의무시간을 자유하게 하는 추세다. 한국 기독교가 복음의 큰 사명 앞에 슬픈 현실이 되고 있다. 그동안 사학에 투자한 많은 기독사학의 주인들이 학교를 넘기거나 포기하는 사례까지 생겨나고 있다. 조국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게 한 교육의 원천이 되었던 기독사학들이 겪는 이 아픔이 아픔이 아니다. 기독사학이 무너지면 조국의 미래를 생각할 수 없다. 기독사학이 온 세상 구원의 지경을 확장하는 역할을 했던 것만 아니다. 중고를 비롯 대학의 현장까지 젊은이들이 가져야하는 건강한 정신을 함양하는데 기독사학들이 희생해왔다. 이러한 교육원천이 조국 대한민국의 비전이자 미래이다. 그러나 한국기독사학의 사양화는 다시말해 조국의 미래를 말할 수 없게 한다는 점이다. 모두가 한 번 더 새겨보고 강구책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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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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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성한 목사] 치유와 기적의 삶
    나는 믿는 자에게 주신 기적의 능력을 믿고 이미 주신 권세를 인정하고 환영하는 기도를 많이 한다. 신바람이 나기도 한다. 뜨겁게 말씀을 인정하는 기도를 할 때, 나에게 주신 능력이 믿어지고 생생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하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5:19)고 하셨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일을 보시고 그 일을 따라 하셨다는 말이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은 분명히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보았다. 우리도 먼저 보아야 한다. 본 사람은 쉽게 따라 할 수 있고 따라 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들을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신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볼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도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께서 보셨던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쉽게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먼저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시고, 아들도 그것을 행하셨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면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곧 아버지께서 행하신 일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보기 위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열심히 성령의 도우심으로 보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 성경을 펴놓고 읽으면서 기도를 자주 한다. 특히 마가복음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생동감이 넘치는 것 같다. 그래서 누군가 마가복음을 행동 복음이라고 별명을 붙었다.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는 성격이 직설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으로 평가되어진다. 왜냐하면 다른 복음서보다 “즉시”, “곧” 등의 단어들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내가 마가복음을 더 좋아하는 이유는 복음서 중에 가장 먼저 기록한 성경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가복음을 참고해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기록했다고 본다. 제일 먼저 원천적인 강렬함이 보이기 때문에 기도할 때는 마가복음을 보면서 기도하면 더 강렬한 믿음이 생기는 것 같다. 물론 다른 성경들도 나의 기도목록들이다. 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 4명을 부르셨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형제였다. 야고보와 요한도 형제였다. 이 두 형제들을 부르실 때 그들은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따름을 볼 수 있다.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셨는데 기사와 표적이 연속적으로 일어남을 기록하고 있다. 마가복음 1장 안에 기사와 표적이 연속적으로 다섯 가지나 일어남을 볼 수 있다. 나는 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면서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이 기사와 표적이 함께 했음을 분명히 보았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심의 권세에 사람들이 놀랐다. 그뿐만 아니었다. 능력 있는 가르침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르칠 때 더러운 귀신들인 사람이 있어 소리를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경련을 일으키며 큰 소리를 지르며 나왔다(막1:26). 회당에서 나와 시몬의 장모가 집에서 열병이 들어 누워있었는데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을 즉석에서 들었다(막1:31). 저물게 되었을 때 소문을 듣고 몰려든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셨다”고 기록한다(막1:34). 밤이 되어 주무신 다음 새벽 일찍 기도하시러 한적한 곳을 찾으셨다고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아내셨다(막1:39). 연이어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끓어 엎드려 “원하시면 깨끗하게 하실 수 있으시다”고 간청을 할 때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라고 기록한다((막1:41-42). 이렇게 짧은 기록 속에 다섯 번이나 생동감 있는 표적과 기사와 함께 가르치시고 전도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신 것”이다(요5:19).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면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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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1
  • [아침묵상] 마무리를 잘 합시다.
    영국에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2019년이 끝나갑니다. 나는 오늘(28일) 올해의 마무리를 위하여 오늘 함양, 산청, 고령을 다녀왔습니다. 마무리하지 못한 일들이 있어 아침 8시에 집에서 출발하였다가 밤 11시에 돌아왔습니다. 피곤하지만 미루고 미루어 두었던 일의 마무리로 다녀오니 마음이 개운합니다. 이제 며칠 남지 않은 2019년이기에 나머지 마무리하지 못한 일들을 정리하는 데에 하루하루를 보내려 합니다. 인생살이 마지막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아지게 됩니다. 젊은 날들은 실수도 많았고 허물도 많이 범하였습니다. 그럴수록 나이 들어가면서 마무리를 잘 하게 되면 지난날의 모든 허물도 시행착오도 오히려 보석같이 빛나게 됩니다. 야구 경기에 9회 말 홈런으로 지고 있던 경기를 역전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들 인생살이를 그와 같이 9회 말 홈런으로 멋진 마무리로 마칠 수 있다면 얼마나 귀한 일이겠습니까! 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너그러움’의 소중함을 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너그러움이 인간관계에서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너그러움에 인색한 사회입니다. 그래서 서로 부딪히고 서로 상처 받으며 스트레스를 쌓아 갑니다. 한 해를 너그러움으로 마무리하도록 힘써 봅시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도 너그러워집시다. 자신이 지난날 멍청하게 살아왔던 일들에도 너그러워집시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후한 점수를 줍시다. 그러면 인생 마무리를 훨씬 더 평안하게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일입니다. 지난날들에는 그렇게 멍청한 일들을 하였으니, 이제 나이 들어 마무리를 잘하자. 내 인생 9회 말 홈런으로 마무리하자. 이런 식으로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한 해의 마무리를 깔끔하게, 멋있게 마무리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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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1
  • [신앙과 삶] 진짜 최선을 다했습니까?
    어느 집의 아이 하나가 큰 돌 하나를 마당 건너편으로 옮기느라고 진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그 아이의 아버지가 입을 열었습니다. “넌 왜 네가 가진 힘을 다 쓰지 않고 있니?” 아이는 낑낑대며 고생하는 자신을 보고 그런 말을 하는 아버지가 밉고 속이 상해서 말했습니다. “아빠, 지금 제가 온 힘을 다 쓰고 있잖아요. 제가 낑낑대고 땀을 흘리는 것을 보면서도 그렇게 말을 하세요.” 그 말을 듣고 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아니야, 너는 나보고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잖니. 그것이 힘을 다 쓰지 않은 것이야!”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는 아버지에게 전혀 도움을 구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그것이 자기 힘을 다 쓰지 않은 것이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 제대로 기도도 해보지도 않고 나는 최선을 다했노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닙니다. 미국의 노예 해방의 주역이었던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기도 외에 달리 의지할 것이 없다는 확신으로 인해 여러 번 무릎을 꿇곤 했다. 나 자신의 확신과 주변 사람들의 확신만 가지고는 하루를 살아가기에 부족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늘 무릎을 꿇으며 산다는 것, 그것이 내가 내 삶에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직장에서 갑자기 퇴출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직장에 출근해 보니 아무런 설명도 없이 책상에 해고 통보서가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은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직장과 자신의 상관들에 대한 복수심이 끓어올랐습니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함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그는 며칠간 집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방황한 후에 집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나는 죽고 싶소. 나는 정말 열심히 최선을 다했지만 그런데 아무 것도 되는 일이 없고 사람들은 다 나를 배신하는 것 같소.”그 말을 듣던 그의 아내는 그를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은 열심히 했다고 말하지만 한 가지 시도를 해보지 않았어요. 당신은 당신이 처한 이 상황과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하나님과 대화해 본 적이 없잖아요?” 그 사람은 이상하게도 아내의 그 말이 가슴에 꽂혔습니다. “그래 맞아.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나는 이 일에 대해 하나님께 제대로 기도해 본 적이 없지!” 그렇게 생각하고 그는 아내와 함께 기도의 자리를 마련하고 집중적으로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참 이상한 것은 그렇게 며칠 기도하는 동안 마음속에 있던 직장과 상사를 향한 미움과 복수의 감정이 먼저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그렇게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 속의 미움과 복수의 감정이 사라지자 머리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기 집을 담보로 은행 융자를 얻어 조그마한 건축업을 시작했습니다. 사업이 잘 되어 나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5년 만에 작지만 자신의 기업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기도에 재미를 붙여서 늘 기도하던 그는 어느 날 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제가 건축을 하면서 여기 저기 여행을 하다 보니 좋은 호텔이 없습니다. 멋진 호텔은 있지만 너무 비싸고, 작은 호텔은 너무 분위기가 안 좋습니다. 그래서 제가 새로운 호텔을 지었으면 합니다. 아주 깨끗한 호텔, 그러면서도 적절한 가격에 쉼을 제공할 수 있는 호텔을 짓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그는 하나 둘 호텔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세계적인 체인이 된 홀리데이 인 호텔(Holiday In Hotel) 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홀리데이 인 호텔의 창업자인 케몬스 윌슨이라는 사람입니다. 제대로 기도해 보지도 않고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올림픽 육상 금메달리스트 그리피스 조이너는 자신의 승리의 비결을 말하기를 “열심히 기도하고 그리고 열심히 노력하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제대로 기도하고 나서야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새해에는 진짜 최선을 다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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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1
  • [박성규 목사] 교우들에게 드리는 송년 인사
    주안에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를 최선의 길(the best way)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드립시다. 하나님은 매우 좋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용납하시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게도 하셨습니다. 어떤 경우는 한계의 벽 앞에서 인내하는 믿음을 주기도 하셨습니다. 어찌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2019년도는 정치, 경제적으로 대단히 심각한 갈등이 우리 사회에 있었습니다. 한국인으로산다는 것이 스트레스 가운데 사는 것으로 느껴지셨을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매우 큰 어려움을 겪은 성도님들도 적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성도님들께서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헌금하여 주시므로 교회는 큰 힘을 얻었습니다. 여러분 모두의 눈물겨운 헌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새해에 여러분의 믿음 생활과 건강, 자녀들의 미래와 경제생활에 큰 은총을 베풀어 주시길 축복합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지키고 헌신해 오신 모든 성도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 모두는 한 가족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 나오는 이방인교회와 유대인교회가 하나라는 말씀처럼 하나입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지켜오신 올드 타이머(Old Timer)가 계시기에 오늘의 교회가 있습니다. 또한 새로이 뉴 커머(New Comer)가 오셨기에 내일의 교회가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러셨듯이 서로를 더욱 존중하면서 미래를 향해 힘차게 나아갑시다. 연말과 연시에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송구영신예배에 온 가족이함께 나오시길 바랍니다. 한 해를 보내며, 또 한 해를 맞이하는 시간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둘째는 신년 및 특별새벽부흥회 등에 온 가족이 꼭 참석하는 것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자녀들의 손을 잡고 모두가 힘써 나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와 자녀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하는 한 해가 될 것입니다. 그 어두운 시대를 별처럼 밝혔던 에스더처럼 우리와 우리 자녀손들이 삶에서 당하는 어두운 환경을 극복하는 승리가 이번 신년 예배부터 시작될 것을 믿습니다. 아울러 가까운 성도 중에 차편이 없는 분들을 돌아보고 카풀로 섬기는 등 성도가 서로를 돌보는 아름다운 일들이 많기를 바랍니다. 새해에 하나님의 복이 여러분의 가정과 하시는 일에 가득하시길 빕니다. 또한 우리 기독교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복의 통로로 우리나라와 열방(列邦)을 위해 쓰임받기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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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1
  • [쉴만한 물가] 일곱째 날을 복 되게 하시는 하나님
    하루하루의 날을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월요일부터 주일까지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든 날이기에 하루하루가 귀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내일을 모릅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일곱째 날을 복 되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2: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일곱째 날은 하나님께서 복 되게 하신 안식일, 주일입니다. 주일은 하나님께서 복 되게 하신 날이기에 귀한 날이고, 복된 날입니다. 주일은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한 날입니다. 주일을 귀하게 여기는 자는 주일을 복 되게 한 날로 정하신 하나님을 귀히 여기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주일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시고 영육을 쉬게 하십니다. 주일을 통해 축복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일주일에 하루 주일 쉬면서 예배드리는 자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영육이 강건해 집니다. 쉬지 않고 일만 하면 지치게 되고, 병이 들기도 합니다. 주일날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드리고, 은혜 받고 재충전하여 새 힘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로 정한 날, 주일을 귀히 여기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로 지켜야 합니다. 주일을 지키라는 말씀은 십계명의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20:8-11,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주일을 복 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주일을 지키라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살 때에 믿음이 떨어지게 되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멀어지면서 죄 짓게 되고, 타락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주일을 지켜야 합니다. 주일을 지킬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지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주일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주일, 주의 날에 성령이 임하고 은혜 받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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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1
  • [조희완 목사] 관리의 책임
    우리나라의 TV 방송 프로 가운데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프로가 있습니다. 그 프로에서 오래 전 <벼락부자, 그 후 - 부자라서 행복하십니까?>라는 제목으로 방송을 했습니다. 한기수씨(가명)는 로또 복권 1등 170억 원에 당첨이 되어서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되고 인생 역전의 기회를 맞이하였습니다. 부부간에 유난히 금슬이 좋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거금(巨金)을 관리하는 문제를 가지고 부부가 서로 다투다가 9개월 만에 합의 이혼을 하고 가정에 쪼개지고 말았습니다. 충청도 한 시골 마을에서 3대째 농사를 짓고 살던 양만철씨(가명)의 경우 토지 보상금으로 120억 원의 거금을 받고 벼락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토지 보상을 받는 과정에 동네 이웃들과 관계가 멀어졌고, 그 일 때문에 우울해 하다가 어느 날 농약을 마시고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돈 때문에 자기 아버지를 잃고 좋은 이웃을 잃은 그의 아들이 말하기를 “지금보다 이전에 삶이 훨씬 더 행복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부자(富者)가 되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갑자기 큰돈이 생기고 큰 부자가 되는 것은 분명히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큰돈이 생겨서 부자가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큰 돈을 어떻게 잘 다스리고 관리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돈이 좋은 것이지만 그 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다스리지 못하면 도리어 화(禍)가 되고 재앙(災殃)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돈 뿐만 아니라 너무나 귀한 것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귀한 것들을 제대로 잘 관리하지 못하면 더 이상 귀한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귀하게 여기고 잘 관리해야 할 것들이 어떤 것일까요? 첫째로, 받은 은혜를 잘 관리해야 합니다.(갈1:6-7절) 둘째로, 주신 시간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엡5:16-18) 셋째로, 주신 물질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요6:11-12)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것을 잘 관리해서 행복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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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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