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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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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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2
  • [김성수 총장]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
    모든 사람은 의식적이든지 무의식적이든지 간에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관(worldview)을 가지고 있다.세계관은 개인이 소유하지만 공동체적으로 공유하기도 한다.우리는 세계관의 틀(framework)을 통해서 사물을 바라보고 행동한다.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세계관은 삶의 양식으로 표출되는데 이것을 우리는 문화라고 부른다.그러므로 한 개인과 공동체가 어떤 세계관을 소유하고 공유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삶의 양태가 나타나고, 한 사회의 문화와 제도도 생성하고 발전하며 쇠퇴하기도 한다. 인간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의 역할은 역사를 통해서 확연히 볼 수 있다.이것은 근대 문화 형성의 근간이 되는 로마의 역사와 문화에서는 잘 나타나고 있다.기독교 세계관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일찍이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시대부터 노예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법률이 통과되었다. 영아 살해의 관습 역시 십자가형과더불어,보다 더 극적으로는 낙태와 함께 금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검투사 시합도 종말을 고했는데, 그 이유는 텔레마코스(Telemachus)라는 용감한 수도승이검투 경기에서 일어나는 잔인한 살인을 막으려고 경기장 바닥으로 내려갔고,그 과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로마 사회의 변화는 비록 점진적이긴 했지만 로마 제국 전역에서 인간 생명의 가치가 점점 더 인식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로마 제국 자체는 결국 곤경에 처해 있었다. 왜냐하면 로마 제국을 지배했떤 세속적이며 인본주의적인 세계관으로 말미암아 로마 사회는 너무 오랜 세기 동안 쾌락과 반 출생주의적인 비성경적 삶의 양태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물론,이와 같은 저 출산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소위 그들이 야만인이고 불렀던 비게르만족들을 향한 이민문호를 폭넓게 개방하기는 했지만 이민에 대한 높은 의존도가 로마 사회의 인구 격차를 메우기에 역부족이었다.여기에 행정적, 군사적 실수가 결합되어 이주하는 인근의 다른 부족들에게도 제국의 국경을 활짝 열어 놓게 되었다.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부 지역에서 로마의 권위는 자신의 무능함과 게르만 부족의 공격으로 붕괴되었다. 로마, 게르만, 그리고 기독교 전통의 궁극적인 융합은 비록 완만한 전환의 과정이긴 했지만 중세 유럽에 새로운 문화와 세계관의 출현을 가져왔다. 우리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의 역할에 대해서 한 가지 예를 더 살펴 보기로 하자.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삶을 영위하기를 소망한다.그런데 영적인 삶의 영위에 향한 우리의 소망과 삶의 양태 역시 영적인 삶에 대한 관점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예를 들어,인간의 정신은 고상하고 거룩하고 선한 반면에 육체는 저급하고 속되고 악하다고 보는 이원론적 인간관을 견지하게 되면 육체적 고행이 하나님과 더 연합하는 삶이라고 보게 되고,따라서 우리가 신앙적이고 영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될 수 있는 한 육체적인 본능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역사적으로 보면,결국 이러한 종류의 인간관에 기초한 금욕적 실천은 사람들이 '생활의 법칙'에 따라 공동체로 살아가는 수도원주의(monasticism)로 발전했다. 수도원은 일반적으로 독신 생활과 엄격한 생활 방식을 요구했다.수도승과 수녀는 체계적인 기도, 연구, 그리고 생산적인 노동의 삶을 영위하였다. 수도승과 수녀들에게는 관상기도의 기초로서 연구 활동이 특별히 중요했다. 이미 5세기 초에 카시오도루스(Cassiodorus)라는 로마 원로원 의원은 자신이 비바리움(Vivarium)에 설립한 수도원에서 기독교와 이교 사상가들에 대한 텍스트 복사와 연구를 수도원 생활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삼았다. 카시오도로스와 그의동료들은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며, 그 연구는 영적 발전의 길이라고 믿었다. 모든 초기 수도원들이 카시오도루스의 관점을 따른 것은 아니지만, 몇 세기 안에 그의 사상과 독서 목록은 수도원 영성의 중추를 제공하게 되었다. 수도승들은 기도나 연구와 같은 보다 분명한 “영적인 활동”들과 함께, 생산적인 노동에도 참여해야 했다. 로마 사회의 세계관 노동을 비하하고 노예들에게 노동을 강요했을지 모르지만 수도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비록 부분적으로는 겸비의 덕을 장려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수도승이 일해야 한다는 생각은 주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성경적 사상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그분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도 역시 일해야 한다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었다. 창세기에서 아담은 죄를 짓기 전에 동산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그러므로 일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행하도록 만들어진 한 부분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은 삶의 목적에 대한 현저하게 다른 견해로 이어지게 되었다. 세계관 변화의 이러한 특별한 요인은나중 서구의 경제적 성공과 활력의 토대를 놓았다. 저출산,도덕성의 일탈,경제 문제,환경 파괴,정치 불신과 혐오 현상,남북간의 긴장 등 이 모든 문제들의 근본 뿌리는 왜곡된 세계관이다. 2024년도 새해를 맞았다.올 한 해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형성하는 올바른 세계관의 정립 운동이 범 국민 운동으로 펼쳐지기를 소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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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9
  • [김성수 총장]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합법화(1)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합법화(1) 요즘 언론을 통해 중국의 시진핑과 러시아의 푸틴, 그리고 북한의 김정은과 같은 독재자 한 사람의 잘못된 가치관과 이로 인한 횡포로 인해 그들 자국 인민들이 겪는 불행과 고통은 물론, 예측할 수 없이 소용돌이치는 국제 정세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 번씩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를 떠 올리게 된다. 시진핑, 푸틴, 김정은과 같은 악랄한 독재자 대신 기독교 신앙에 좀 우호적인 지도자가 등장하면 자국민들도 좀 더 행복할 것이고 세계 질서도 달라질 것인데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앞으로 한 두 번 정도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황제에 대해서 잠시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주후 313년에 밀라노 칙령(the Edict of Milan)을 발표하면서 로마 제국 내에서는 기독교의 상황과 법적 지위가 획기적으로 바뀌어졌다. 일 년 전, 밀비안 다리 전투(the Battle of the Milvian Bridge) 직전에 콘스탄티누스는 하나님으로부터 환상을 보았는데 예수께서 꿈에 그에게 나타나서 그가 해야 할 일을 설명하셨다고 주장했다.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병사들에게 방패에 기독교 상징을 그리게 했고, 적의 우세한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을 때 이를 하나님의 표징으로 받아들여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 후 곧 바로 기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만드는 밀라노 칙령이 공포되었다. 이 칙령은 이교(paganism)를 불법화하거나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콘스탄틴의 개종으로 인해 확실히 기독교는 박해 받던 위치에서 선호 받는 종교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이 진짜였는지 아니면 정치적 계산의 산물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당시 기독교는 도시를 중심으로 고도의 조직성을 갖춘 성장하는 종교였다. 따라서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가 의지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을 제공할 수 있었다.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인기가 없었으며, 추산에 따르면 로마 세계의 약 10~15%에 불과했다. 이는 결코 압도적인 숫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기독교인들은 313년 이전에도 군대에 복무했다는 증거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평화주의자였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포용함으로써 실질적인 정치적 이점이 있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황제로서 콘스탄티누스의 행동은 그의 개종에 대한 많은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우선, 그는 아버지 하나님을 자신이 총애했던 “정복되지 않는 태양”(the Unconquered Sun)인 솔 인빅투스(Sol Invictus)와 구분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은 태양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세상의 빛, 또는 의의 태양 등으로 예수를 묘사하는 기독교인들의 관습에 영향을 받아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또한 자신의 "개종" 후에도 거의 한 세기 동안 자신의 주화에 이교 신들을 계속 사용했으며, 나중에 교황이 차지한 로마 이교 대제사장의 칭호인 폰티펙스막시무스(Pontifex Maximus)라는 칭호도 유지하고 있었다. 기독교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콘스탄티누스는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매우 일찍부터 개입했다. 첫 번째 도전은 도나투스파(Donatists)와 관련이 있는데, 이들은 박해 중에 굴복하고 배교했던 사제들은 박해 중에도 믿음을 지키며 신실하게 남아 있었던 주교의 승인과 용서를 받지 않는 한 진정한 사제들이 아니라고 믿었던 집단이다. 법정과 콘스탄틴은 이에 대응하여 폭동을 일으킨 도나투스파에 대해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 콘스탄티누스는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무력으로 보복했다. 그는 탄압이 효과가 없다고 보고 그 후 도나투스파에 적대적인 법령을 철회했지만, 그의 행동은 교회에 대한 국가의 간섭과 강압의 선례를 남겼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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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1
  • [김성수 총장] 복음의 능력과 문화의 변혁
    서기 303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는 당시 로마 제국에서 별로 매력적이지 못하고 변방 종교였던 기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하였다. 이 박해는 처음에는 기독교도들의 예배 처소인 교회당을 파괴하고 기독교 서적을 불태우는 것으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성직자들을 투옥하고, 고문하며, 때로는 잔혹하게 사형에 처하는 등 성직자들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평신도들에게도 이러한 공격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박해가 시작된 지 불과 10년 후인 313년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에서 이전처럼 범죄 집단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독교는 오히려 로마 제국 안에서 다수의 종교가 되었고, 결국 로마를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는 후기 로마 제국의 세계관을 형성하여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과 삶의 방식을 변화시켰다. 복음의 능력이 사람들의 세계관을 변혁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를 이렇게도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으로 나타나도록 만든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가졌던 성경적 세계관, 특별히 성경적 신관이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당시 로마 제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은 비록 소수였지만 로마제국 내에서 독특한 신관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과 로마에 있던 다른 인종 집단들이 견지하고 있었던 신관 사이의 명백한 차이점은 유대인들은 급진적인 일신론자라는 점이었다. 이들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라는 구약의 성경적 신앙을 확고하게 견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믿고 섬기며 경배하는 신이 유일신이냐 아니면 다신론이냐는 문제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섬기는 신이 어떤 본성과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믿느냐는 문제였다. 모든 이방 종교는 신 또는 신들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신의 기원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 유대교적 또는 성경적 신관은 이런 이방 종교의 신관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어떤 다른 것에서 기원한 존재가 아니라 단순히 영원부터 존재하셨고 지금도 계시고 영원히 계실 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시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존재하는”(I Am who I Am)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신과 별개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자연계의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섭리자요 주권자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연신”(nature god)이나 “자연의 힘과 관련된 신”(god associated with the forces of nature)이 아니라 오히려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하나님께 응답해야 하는 창조주시다. 이와 같은 신관은 얼핏 신 플라톤적(Neoplatonic)인 신관과 흡사해 보이기도 한다. 피상적으로 보면, 성경의 하나님이 마치 존재의 위계를 형성하는 “단일자”(One)로부터 유출된 만물의 기원이며, 초월적 존재인 “하나” 곧 단일자(One)를 신이라고 보는 신 플라톤적 개념과 다소 비슷해 보일 수도 있다. 사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와 같은 일부 유대인 사상가들은 플라톤 철학의 렌즈를 통해 유대교를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경적 신관과 신 플라톤적인 관점의 신 개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신 플라톤주의자들의 신은 의지가 없는 비인격적인 신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인격적이시며 자발적인 행위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또한 신 플라톤적인 관점의 우주는 영원하다. “단일자”(One)라는 신이 존재하는 동안 우주도 존재한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우주 만물은 비인격적인 신으로부터 유출된 것이 아니라, 역사의 특정한 시점에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말씀으로 지은 바 된 피조물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인격적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독특한 성경적 인간관을 형성해 준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시고 하나님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창조 세계를 보호하고 다스리며 감독하는 청지기적 사명을 주셨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에 죄가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 자신을 대신하여 에덴의 동산을 다스리는 사명을 인간에게 부여해 주셨다. 창조 질서에서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이와 같은 고유한 위치는 인간에게 특별하고 고귀한 가치를 부여해 주고 있다. 하나님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하나님의 섭정자인 인간을 공격하는 행위는 하나님 자신을 공격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로마 제국에 흩어져 살았던 유대인들은 당시 로마의 쾌락 문화 사회에서 공공연히 행해졌던 영아 살해 행위, 로마의 역사학자 타키투스(Tacitus)가 “불길하고 역겨운” 일이라고 묘사했던 영아 살해 행위를 단호하게 거부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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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8
  • [김성수 총장] 불가능한 사람들
    11세기 베네딕트 수도회의 개혁가 피터 다미안(1007-1073)을 일컬어 사용된 표현이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교회는 타락하고 부패가 기승을 부렸다. 성직자와 교회 지도자, 일반 성도까지 도덕적으로, 신학적으로 부패했다. 이에 맞서 다미안은 성직 매매와 성직자들 사이에 용인되던 동성애와 소아성애, 남색을 강도 높게 비난하며 개혁을 촉구했다. 그는 예수님께 충성하고 복음의 진리를 지키고자 헌신한 사람이었다. 그가 모든 형태의 부패와 부도덕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좌시하지 않았던 이유는 자신 안에 있는 열정 때문이었다. 그는 어떤 방해와 반대에도 흔들리지 않고 맞섰다. 오직 예수께 헌신하고자 하는 그의 열정이 얼마나 불같았던지 그는 ‘조종 불가능한 사람’, ‘뇌물이 안 통하는 사람’,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조지 오웰의 표현대로 그는 ‘도무지 한 패거리로 끼워 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비록 소수였지만 시대마다 이런 소위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느부갓네살의 신상 앞에 아무 생각 없이 한번만 절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음에도, 산채로 불태워 죽인다는 위협에 굴하지 않고 우상 숭배를 거부했다. 다니엘은 창문 하나만 닫고 커튼만 쳐도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음에도 사자의 먹이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향을 피우는 흉내만으로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음에도, 시저를 주로 인정하기를 거부함으로 야수의 저녁 먹잇감이 되었다. 황제와 왕비와 전 제국에 맞서는 것이 터무니없는 만용으로 여겨졌음에도, 아타나시우스는 세상에 맞서 진리를 대변했고 그 신실함으로 다섯 번이나 유배 생활을 했다. 양심을 따라 전통의 합의에 맞서는 마틴 루터를 사람들은 교만하다거나 미쳤다고 말했지만, 그는 화형대에서 죽어간 얀 후스의 순교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학문이라는 미래의 중대한 일을 위해 목숨을 보존하라는 절친한 친구들의 만류에도, 디트리히 본 회퍼는 히틀러의 소굴로 다시 들어가 두려운 교수대의 위협에 맞섰다. 한상동, 주남선, 조수옥 권사도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믿음으로 모진 고문과 옥중 생황을 감내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허다한 구름 같은 증인들과 순교자들의 빛 안에 살고 있는가? 아니면 발전된 현대 세계의 안락한 분위기에 젖어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는가? 기독교 역사상 지금의 서구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부당한 취급을 당하거나 기독교 수정주의가 득세한 적이 없다. 오늘날처럼 기독교의 성경 해석이 이렇게 자의적이고, 설교가 이렇게 타협적이며, 신앙인의 행실이 이렇게 방탕한 때가 있었는가? 오늘날처럼 아무 고민 없이 세상과 타협하고 쉽게 신앙을 저버리면서도 그 수치를 모르는 이렇게 천박한 적이 또 있었는가?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시대의 도전 앞에 맥없이 굴복하고 있다. 우리의 복음 증거는 날카로운 예리함을 잃어 가고 있으며, 예수의 주되심과 권세는 배반을 당하고 있다. 이제 이 상황을 되돌려 우리 주님께 합당한 태도를 취할 때가 되었다. 온 열방의 우리형제 자매들이 믿음을 지키려고 목숨으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이때, 서구의 세대는 우리 주를 배신했다는 쓰라린 후회만을 남기지 전에 어서 서둘러야 한다. 오스기니스(Os Guinness)가 잘 설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개혁가 피터 다미안, 그는 오직 한 청중만을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쓰고 행동했다. 그 외 다른 목소리는 그를 제지할 수 없었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신실했다. 그의 믿음은 강철같이 강했다. 그는 난공불락의 사람이었다. 우리에게는 바로 이런 기독교 지도자들이 필요하다. 우리 역사 ‘불가능한 사람들’(Impossible People)이 되어야 한다. 연민으로 눈처럼 녹을 수 있는 가슴을 가졌으나 강철과 부싯돌처럼 단호한 얼굴과 의지로 어떤 압력과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고 농락당하지 않으며 뇌물이 통하지 않는 그리스도인, 그럼에도 우리 주님의 온유함과 자비와 은혜와 따뜻함을 잃지 않는 그리스도인 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보다 오직 예수께만 흔들림 없는 충성을 바쳐야 한다. “예수는 주님이시다”가 우리의 고백이자 권위이며 기준이고 인생의 법칙이 되어야 한다. 그분을 부정하는 사람이나 대상이 무엇이든 우리는 굳건히 맞서야 한다. 또 다시 오스 기니스의 표현을 빌린다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깨가 튼튼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 위해 지셨던 주님의 십자가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어야 만들어지는 어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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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3-04-19
  • [김경헌 목사] 지팡이니이다!(출4:1-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심장부에 넣어 보호하셨습니다. 보호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위용을 갖추게 하셨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출범할 하나님의 시간이 도래했습니다. 출애굽이란 성도 개인에게는 구원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출애굽이란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는 하나님의 나라, 하늘나라의 출범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80년 전에 구체적으로 그 일을 진행하셨습니다. 성경은 모세를 “아름답다, 잘 생겼다”고 기록하면서 하나님의 소명을 나타내고 있습니다.(출2:1-2) 모세의 어머니와 누나의 치밀한 계획 하에 모세를 바로의 궁정에 침투시키게 됩니다. 4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모세는 어느 정도 완벽에 가까운 준비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출애굽이라는 거사를 실행에 옮겨야 할 상황이 되었는데 모세는 상상도 못했던 난관에 부딪히게 됩니다.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대였습니다. 불 신앙과 반역의 역사는 항상 에덴동산 안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대가 두려워 미디안으로 도망을 가게 되고, 그곳에서 또 다른 40년 동안의 준비를 마치게 됩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고, 하나님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못하겠다고 버팁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시기 위하여 보여주신 표적이 지팡이가 뱀이 되는 것과 손에 문둥병이 생긴 것입니다. 얼핏 보면 모세가 빼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 확인에, 확인을 하는 장면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지팡이가 뱀이 되고, 뱀의 꼬리를 잡으니 지팡이가 되는 표적을 보여주십니다. 애굽의 요술사들도 그들의 요술로 할 수 있는 요술이요, 마술입니다. 이스라엘을 탈출시키는, 해방시키는, 출애굽시키는, 우리의 입장에서 구원이 시작되는 장면에 하나님께서는 왜 애굽의 요술사도 할 수 있는 표적을 모세에게 보이고 있을까요? 모세의 사역 전부는 지팡이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시작부터 지팡이, 10가지 재앙도 지팡이, 출애굽할 때 홍해를 가르던 지팡이의 장관은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습니다.(출14:16) 지팡이가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지팡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지팡이가 모세의 손에서 떨어지니 뱀이 되었습니다. 구지 성경은 땅에 던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던지면 당연히 땅에 떨어질 것인데 성경이 왜 불필요하게 땅에 던졌다고 표현하고 있을까요? 땅은 뱀의 주 무대입니다.(창3:14) 자신을 지키는 지팡이가 땅에 떨어지는 순간 자신을 물고, 자신을 죽이는 뱀이 되었습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손에서 떨어져 땅으로 가는 순간 뱀이 됩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이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성도들이 목사를 잡을 때, 목사는 성도들을 물어 죽이는 뱀이 됩니다. 장로가 목사를 잡을 때 목사는 장로들을 물어 죽이는 뱀이 됩니다. 목사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삼위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시행하는 것입니다. 그런 중요한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가 될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하십니다.(출4:4) 뱀 꼬리를 잡았다가는 순식간에 물려 죽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독이 센, 가장 위험한 뱀이었던 우리의 꼬리를 잡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물려 죽으셨다. 말씀을 선포하고 목회하는 것은 목숨을 걸고 뱀꼬리를 잡는 사역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뱀이었던 성도들이 목회자의 손에 들려지면 지팡이가 됩니다. 목회자는 성도라는 지팡이, 교회라는 지팡이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목회자들을 향한 매우 무서운 경고가 있음도 잊어선 안 됩니다. 모세는 이 지팡이를 잘못 사용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심판을 받았습니다.(민20:11-13) 목회자가 손에 들려진 성도라는 지팡이를 맘대로 사용했다가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손에 죽습니다. 목회자의 손에 들려진 교회라는 지팡이를 맘대로 사용했다가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손에 죽습니다. 목회자는 주님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입니다. 모든 능력은 주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지팡이는 지팡일 뿐입니다. 주님의 손에 들려질 때 주님의 지팡이가 되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하게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의 지팡이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이루신 구원은 완전합니다. 오늘의 목회자들은, 교회를 위해 세움 받은 자들은 주님의 손에 들려진 구원의 지팡이입니까? 땅에 떨어져, 땅을 기어 다니며 성도들을 물어 죽이는 뱀입니까?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3-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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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귀식 목사]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계 3:7-13)
    서론 2023년 경남기총이 주관하는 2월 미스바 대성회를 맞이하여 하나님의 전에 나아와 예배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모든 성도들 위에 놀라운 은혜와 평강이 차고 넘치게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오늘 지금의 튀르키예 서쪽인 소아시아 지방에 흩어져 있었던 일곱 개의 교회 가운데 우리 주님으로부터 넘치는 칭찬을 받았던 빌라델비아교회의 아름다운 사역의 모습을 소개하면서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지금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하는 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시대를 마지막 종말 시대라고 말합니다. 말세지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후서 3장에서 증언하고 있는 것과 같이 종말시대의 많은 징조가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 함께 디모데후서3:1-5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교회 안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무관한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있으며 만몬이즘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예수 없는 인간 중심주의가 판을 치고 있으며 물량주의와 세속적인 의식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랑, 자기 과시가 판을 치고 있으며,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각종 현상들이 온 교계 속에 나타나고 있으며 끔찍한 사건과 사고들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18세기 계몽주의의 각종 전통과 정신은 완전히 무시되고 인간중심의 포스트모던이즘이 판을 치며 뉴에이지운동이 만연한 가운데 있습니다. 유일신 사상이 거부되며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며 절대적 선을 거부하고 상황과 환경에 따라 행동할 것을 강조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만 할까요? 이 질문에 관해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13:11-14 속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할 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야 할 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새롭게 무장하여 시대적 사명을 바로 감당할 때입니다. 그래서 시대적 사명을 잘 감당했던 교회, 우리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교회, 소아시아 지방에 있었던 빌라델비아교회를 소개하면서 이 시간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당시, 주후 95년경에 소아시아 지방에는 일곱 개의 교회가 흩어져 있었습니다. 이 일곱 개의 교회 이름이 “에베소교회, 서머나교회, 버가모교회, 두아디라교회, 사데교회, 빌라델비아교회, 라오디게아교회”입니다. 이들 일곱 개 교회가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일곱 개 교회 가운데 우리 주님의 책망이 전혀 없고 칭찬만을 받은 교회가 서머나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증거 하면서 주님께 전혀 책망이나 비판을 받지 않은 교회, 오직 칭찬만 있는 교회, 빌라델비아교회의 내면을 깊이 살펴보면서 이 시간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빌리델비아교회는 오늘날의 알라쉐히르라는 곳으로 사데지방에서 동남쪽으로 약 48Km 정도 떨어져 있는 지방에 위치한 교회로 상업이 성행한 도시요, 동방의 관문으로 불려진 도시에 위치한 교회로서 주변 산지는 포도농사를 많이 했다고 합니다. 이런 도시와 농촌이 혼재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던 빌라델비아교회의 내면을 살펴 보면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빌라델비아교회는 “열린 문을 가진 교회”입니다. 공산주의자로 삶을 살던 사람, 히틀러를 추종했던 사람, 하지만 이들의 사상과 이념에 대하여 염증을 느끼고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여 지지의 땅 뉴질랜드에 정착하고 난 이후, 우리 인류역사 속에 아주 중요한 책을 남긴 칼 포퍼(Karl. Popper.1902-1994), 그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이라는 놀라운 책을 통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주장이 과학적인 타당성을 지니려면 내 주장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고의 개방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의미있는 주장인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가 보다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해 가기 위해서는 폐쇄적인 사회가 아니라 개방적인 사회, 열린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폐쇄적인 사회가 아니라 열려 있는 사회공동체임을 들어내는 말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몇 가지를 살펴보면 KBS에서 진행하고 있는 열린 음악회를 비롯하여 교회 이름을 열린문 교회로 사용하는 교회들이 많고 교회안에 열린 예배, 열린 공간, 열린 교육, 열린 당회, 열린 학교, 심지어 몇 년 전에는 ‘열린 우리당’이 우리나라 정치의 중심에 서서 그 사명을 감당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열려 있다’고 하는 말은 ‘개방성’을 뜻하며, ‘소통’을 뜻하고 ‘긴밀한 교제와 대화’를 뜻하는 말씀으로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아주 좋게 평가하는 표현입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현대 사회에 아주 잘 맞는 모습을 취한 공동체로 앞서가고 있는 민주주의 공동체로 인식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말입니다. 본문 7-8절에 보면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 속에서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가 누구일까요? 절대 다수의 신학자들은 인류의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한 절대적 권한을 가진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구원의 예수님이 빌라델비아교회에 열린 문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델비아교회에 들어가기만 하면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체험하게 되고, 기도의 응답을 받고 구원의 기회를 얻고 수많은 사람이 몰려와 부흥의 역사가 나타나고 성도들이 축복의 기회를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빌라델비아교회가 열린 문을 가졌다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 중심에 모셨다는 말씀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되는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움직인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10:7-10속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교회의 주인이 되셔서 그 뜻대로 교회를 세워간다는 말씀입니다. 주님 중심의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의 주인이 주님이십니까? 사람입니까?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운영하고 있습니까? 힘있는 사람들의 뜻에 따라 교회가 움직이고 있습니까? 우리가 한국교회를 바르게 진단하면서 회개할 바를 회개하고 바르게 세워 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빌라델비아교회가 열린 문을 가졌다는 말씀은 기도하는 교회라는 말씀이요, 기도의 능력을 맛보는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성도들이 두손 모아 기도할 때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이 나타나고 기적이 일어나고 성령의 기름부음이 나타나는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33:2-3속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성도들이 부르짖어 기도하는 교회요,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응답이 나타나며 크고 은밀한 역사가 나타나는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7:7-11속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성도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고 있는 교회가 열린문을 가진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빌라델비아교회가 열린 문을 가졌다는 말씀은 새로운 성도들이 많이 찾아오는 교회라는 말씀이요, “활발하게 전도하며 선교하는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감당하신 세 가지 사역이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이요,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이요, 각종 병자와 연약한 사람을 고치시는 사역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마태복음9:35속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 사역을 열심히 감당하신 것처럼 빌라델비아교회가 선교하고 전도함으로 구원받는 사람이 많이 교회로 몰려온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4:1-2속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했는데 이 말씀과 같이 열심히 전도함으로 구원받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교회, 날마다 생명구원을 위해 힘쓰고 애쓰는 노력하는 교회가 열린 문을 가진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이같은 교회가 시대적 사명을 바로 감당하는 교회입니다. 경남지역의 모든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경남지역 모든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모든 성도들이 간증하기를 “나는 교회에 출석하고 난 이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나는 우리교회에 출석하고 난 이후 각종 기도의 문제가 다 해결되었습니다.” “나는 우리교회에 출석하고 난 이후 인생을 사는 삶의 의미와 보람을 갖게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간증이 넘쳐나는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 같은 놀라운 간증과 구원의 은총과 기도의 응답과 넘치는 축복이 교회를 출입하는 모든 성도들 위에 차고 넘치게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빌라델비아교회는 “주님의 칭찬을 받은 교회”입니다. 빌라델비아교회는 어떤 교회였기에 주님으로부터 책망할 것이 없는 교회였을까요? 넘치는 칭찬만 받게 된 근거가 무엇이었을까요? 그 내용을 오늘 본문 속에서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확인해 보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첫째, 작은 능력으로 우리 “주님의 말씀을 잘 지킨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속에서 말하고 있는 ‘작다’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로 ‘미크란(micran)’이라는 말로서 영어로 표현하면 마이크로(micro)가 됩니다. 바로 ‘마이크로’라는 말은 “축소된 것, 아주 작은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어로 ‘마이크로 버스(micro bus)’라는 말은 '아주 작은 버스'를 나타내는 말이요, ‘마이크로 필름’이라는 말은 '아주 작게 축소 된 필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처럼 빌라델비아교회는 ‘작은 능력’, 즉 마이크로 파워(micro power)를 가지고 있었지만 놀라운 일, 원더풀 파워를 들어낸 교회라는 말입니다. 주어진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열심히 일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힘쓴 교회였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작은 능력이라는 말은 물리적 힘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 교회 구성원인 교인들의 신분이나 지위나 재산 등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실질적인 모습을 통하여 자랑하거나 내 세울 만한 대단한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빌라델비아교회는 넘어지거나 실족하지 않고 우리 주님이 가르쳐 주신 사명을 잘 감당했다는 말씀입니다. 선교에 대한 사명과 사랑실천에 대한 명령을 잘 지켰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은 이 세상을 떠나 승천하기 직전,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마태복음28:19-20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명령하신 이 선교의 명령을 그 어떤 교회보다 잘 감당했다는 말씀이요, 사명을 열심히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요한복음13:34-35에서 말씀하신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사랑실천의 말씀, 사랑실천의 명령을 잘 지켰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빌라델비아교회는 주님이 주신 말씀과 명령에 순종했던 것으로 주경학자들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도 이들 신학자들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목사입니다. 사실 ‘빌라델비아교회’라는 명칭도 그래서 지어졌는지도 모릅니다. ‘빌라델비아’라는 말은 “형제 사랑”이라는 뜻으로 ‘필로스(philos)’라는 말과 ‘아델포스(adelpos)’라는 말이 하나로 합쳐진 합성어입니다. 바로 이름 값을 한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이 빌라델비아교회가 세워져 있는 지역은 버가모왕국에 속한 도시였습니다. 오래 전 버가모왕국을 다스린 유메네스 2세는 아주 호전적인 사람으로서 전쟁터에 나갈 때마다 정치력과 행정력에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자신의 친 동생이었던 앗탈로스 2세(Attalos Ⅱ, BC159-138)에게 국내정치를 다 맡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국민의 지지도가 높았고 인기가 많았던 그를 당시 로마정부가 이용할 목적으로 왕위에 오를 것을 충동질 했지만 앗탈로스 2세는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자신의 형에게 충성을 다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가르쳐 “앗탈로스의 형제애”라고 합니다. 이같은 아름다운 형제 사랑의 전통을 이어 오고 있었던 버가모 왕국의 국민들은 빌라델비아교회라는 이름을 지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형제들로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아껴주고 서로 신뢰하며 서로 연합하면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고자 하는 아름다운 소망을 담은 교회로 발전해 나아가기 위하여 빌라델비아교회로 명명했을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아주 의미 있는 해석인 것 같습니다. 바로 경남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세상적으로는 내 세울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고 대단한 재력가나 유명인도 없지만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연합하면서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고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모습을 세상 속에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편133:1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그랬는데 이 같은 감탄사가 경남지역 모든 교회 성도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두고 하는 표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빌라델비아교회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은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다”는 말씀이 정말 대단한 말씀입니다. 그 당시 소아시아 지방은 로마의 식민지로서 로마황제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황제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황제숭배사상을 모든 점령국 백성들에게 주입시키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유일신이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탄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고 핍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절대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로마 정부는 황제숭배 사상을 내세워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는데 그 기간이 장장 300년 정도 됩니다. 핍박과 박해가 계속되자 많은 성도들은 그 박해와 핍박이 두려워 교회를 등지기 시작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자리에서 떠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늘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은 전혀 흔들리지 아니하고 믿음을 굳게 지켜가면서 우리 주님을 배반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모습이야말로 정말 숭고한 모습이요 대단한 모습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빌라델비아교회가 직면하고 있었던 것은 정치적인 탄압과 박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교회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단들의 적극적인 도전과 유혹도 결코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무슨 말입니까? 교회 안에서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면서 유대인이 아닌 거짓된 이단들이 들어와서 교회를 어지럽히고 교회를 혼란스럽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같은 도전과 유혹 속에서 빌라델비아교회는 전혀 흔들리지 아니하고 우리 주님이 주신 말씀과 사명을 감당하며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믿음을 잘 지켰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같은 모습이 바로 존귀한 모습입니다. ♪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성도의 신앙 본받아 원수도 사랑 하겠네 인자한 언어 행실로 이 신앙 전파하리라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찬송가 336장1,3절- 경남지역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도 그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오늘 본문의 주인공이 되는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과 같은 아름다운 믿음으로 우리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으면서 아름다운 믿음의 꽃을 피우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처럼 작은 능력으로 놀라운 일을 감당한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우리 주님은 세 가지를 약속하고 있는데, 그 세 가지 약속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첫째, “내가 너를 지켜 주겠다”고 하는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시험의 때와 환란의 때에 너를 지켜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같은 약속은 구약성경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시편121:5-7에 보면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우리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 큰 시험과 환란의 때에 주어진 말씀을 잘 지키고 우리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 성도들에게는 우리 주님께서 모든 시험과 모든 환란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도록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기둥은 집을 떠 받치는 중심축입니다. 모든 건축물에서 기둥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없습니다. 바로 기둥과 같이 중요한 사람으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으로, 꼭 필요한 사람으로 사용하겠다는 우리 주님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이 경남지역의 모든 교회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나의 새 이름을 그에게 써 주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구원의 보증서를 써 준다는 말씀이요, 구원의 사람으로 인(印)을 쳐 준다는 말씀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천국시민으로 인정하고, 두 말도 하지 않고 하늘나라에 받아 주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결론 이제 오늘 말씀의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이 소개하고 있는 빌라델비아교회는 우리 주님이 극찬을 하며 인정할 수밖에 없는 교회로서 두 가지 특징을 지닌 교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첫째, “열린 문을 가진 교회”라고 말씀 드렸고, 둘째, “놀라운 칭찬을 받은 교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처럼 놀라운 칭찬을 받을 수 있었던 사실은 첫째, “작은 능력으로 우리 주님의 말씀을 잘 지킨 교회”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둘째, “우리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은 교회”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같은 자랑스러운 교회였기에 교회사에서 길이 빛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우리 경남지역의 모든 교회도 이 빌라델비아교회처럼 작은 능력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교회가 되고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 교회가 되면서 구원의 주가 되시며 축복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의 칭찬을 받는 복된 교회가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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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21
  • [김성수 총장] 신앙의 계승
    어린 시절 초등학교(옛 국민학교) 가을 운동회는 많은 분들의 뇌리에 아직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시골 학교 가을 운동회는 전교생을 청군과 백군으로 나누어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함께 먼지 나는 운동장에서 하루를 즐기는 동네 축제였다. “보아라 이 넓은 싸움터에 청군과 백군이 싸운다. 청군과 백군이 싸우면 틀림없이 백군(자기편)이 이긴다. ……”는 응원가를 소리 높여 불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Victory! Victory! V-I-C-T-O-R-Y!” 유창한 영어 발음으로 함께 응원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이런 운동회에서 피날레는 역시 맨 나중에 펼쳐지는 계주였다. 좀 발이 빠른 주자는 바통을 받기 위해 아예 미리 좀 뒤로 나와서 힘겹게 쥐어 주는 바통을 받아 빠르게 달렸고, 비교적 빠르지 못한 주자는 앞으로 좀 나와서 발이 빠른 주자가 조금 더 달려서 넘겨주는 바통을 받아 달리는 전략을 구사하기도 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바통을 놓치지 않고 잘 넘겨주고 또한 잘 받아 완주하는 것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은 중국에서 최초로 개최된 올림픽이었다. 이 올림픽은 ‘최초’라는 수많은 수식어들이 따라 붙었는데, 가장 이상한 일 중 하나는 릴레이 계주에서 메달을 딴 미국 선수가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이라고 한다. 계주가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도입된 1928년 이후로 미국 팀은 한 번도 거스르지 않고 시상식 단상에 올랐고, 대개 금메달을 수상했다. 그러나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단 한 종목에서도 수상자가 나오지 않았다.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인가? 미국 선수들이 바통을 놓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미국 팀은 스피드와 체력이 뛰어났지만 핸드오프 기술은 서툴렀다. 개인적으로는 뛰어난 주자였고 속도가 결코 뒤처지지 않았지만, 릴레이 팀으로서는 아니었던 것이다. 바통을 잘 받아 달리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아주 중요하다. 성경은 그 특유의 솔직함으로 한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신앙을 계승하는데 실패한 극적인 사례들을 과감 없이 서술하고 있다. 엘리의 아들들이 타락한 이야기, 사무엘의 아들들의 부패, 다윗 왕의 추악한 죄악, 솔로몬의 교만과 어리석음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성경은 그 영웅들을 조금도 미화하지 않으며 그 기록에 어떤 덧칠도 하지 않는다. 성경은 이와 함께 개인에게나 이스라엘 민족에게 참으로 중요한 극적인 계승의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이스라엘이 그 고귀한 소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야훼를 향한 신앙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신실하게 전수되어야 했다. 왕들은 훌륭한 선조들처럼 여호와께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했다. 선지자의 겉옷을 또 다른 선지자가 물려받아야 했다. 횃불이 꺼지지 않고 밝은 불빛을 내며 전달되어야 했다. 바통을 떨어뜨려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바통을 잘 물려주었고 여호수아는 그의 후계자들에게, 사무엘은 사울에게, 다윗은 솔로몬에게,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바통을 잘 물려주었다. 세대 간 교체를 실감나게 경험하면서 신앙의 경주를 달려온 세대는 이제 바통을 잘 넘겨주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오스 기니스(Os Guinness)가 강조하는 세 가지 도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첫째, 횃불을 전달하는 주자들은 후임자들이 현재의 중요성을 인식하도록 도전해야 한다. 자기 유산을 공고화 하는데 목적을 두는 주자는 바통을 잘 넘겨주지 못한다. 모세는 여호수아와 백성들에게 이제 떠날 때라고 말했다. 그들은 긴 세월을 광야에게 배회하며 허비했다. 여호수아는 그 후임자들에게 약속의 땅의 정복 과업을 완수할 때라고 말했다. 둘째, 다음 세대로 횃불을 전달하는 주자들은 후임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지나온 길을 기억하도록 도전해야 한다. 성경에서의 기억은 단순히 낭만적 추억이나 향수가 아니다. 오로지 감사와 겸손, 믿음과 소망을 고취하는데 목적이 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를 실망시키신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러실 것이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해 오셨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기억은 감사와 신뢰 회복의 열쇠이다. 셋째, 다음 세대로 횃불을 전달하는 주자들은 그 후임자들이 언제나 미쁘신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를 의지하도록 도전해야 한다. 견고한 것 같아 보이는 가정, 찬란한 영광을 구가하는 시대, 강력한 부흥도 한두 세대 이상을 이어가지 못한다. 해가 지지 않는 날도, 영광이 시들지 않는 영웅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고 그분의 자비는 무궁하고, 그분의 구원과 감찰하심과 회복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다. 그분은 우리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누울 때에라도 우리 믿음을 지켜 주시는 분이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기” 때문이다(시 136). 오스 기니스의 강조점에 네 번째 한 가지를 더 추가하고자 한다. 다음 세대로 횃불을 전달하는 주자들은 신앙의 계승은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명심하도록 도전해야 한다. 한 개인, 한 가정, 한 교회, 한 교단만 신앙의 바통을 잘 넘겨준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전진하고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신앙의 경주는 지역적이면서도 세계적이며, 심지어 우주적인 경주다. 복음에 빚진 한국교회가 복음의 빚을 갚기 위해 선교지 현지 지도자 양성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금 우리는 신앙의 경주에서 바통을 잘 넘겨주지 못하는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음 세대에 무엇을 전할지는 특별히 중요하다. 언제나처럼 우리의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는 우리 주님에 대한 온전한 신실함을 유지하면서 전수할 가치가 있는 것을 개인적이며 공동체적으로 다음 세대에 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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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17
  • [김성수 총장] 끝없이 고르기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는 인간을 자율적인 존재(autonomous being)로 규정하며, ‘자율성’을 가장 고귀한 가치로 숭상하고 있다. ‘자율’(autonomy)이라는 단어는 ‘auto’(자동/스스로)와 ‘nomus’(규범/법)라는 단어의 합성어이다. 인간이 자율적인 존재라는 말은 인간은 자기 스스로가 규범이 되고 법이 되는 존재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오늘 우리는 자신의 말이 법이고, 자신의 행동이 규범이라고 주장하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권위를 제외한 모든 형태의 권위를 허물어뜨리고, 모든 반응은 단순히 선호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런 행위를 표현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로 포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권위의 지배를 받는 존재”에서 자신이 선호하는 것을 “끝없이 고르는 존재”가 되도록 인도해 가고 있다. 기독교 신앙에는 권위의 문제가 핵심이다. 창조주 되신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권위들이 머리를 숙여야 하는 절대지고의 권위이며 세상 모든 권위의 원천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속력을 갖고 있는 권위 있는 진리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 읽던 성경에는 “가라사대”라는 표현이 있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예수님이 가라사대-”라는 말씀을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였다. 구약 레위기의 많은 교훈들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명하시되”라는 세 구절로 시작하며, 이 구절은 모든 사랑과 친근감의 어조를 띄지만 반박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위를 강조한다. 오스기니스(Os Guinness)가 말한바와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권위 아래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초월적 위대하심 앞에서 그분의 권위와 말씀의 권위를 기꺼이 인정하고 신뢰하며 그런 삶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 창조된 존재가 아니며, 따라서 자아 충족적이지 않고 스스로가 자신에게 법이 되는 자율적인 존재가 아님을 기쁘게 인정한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권위에 대한 이와 같은 시각을 경직되고 낡은 고루한 생각으로 치부해 버린다. 현대성은 교묘하지만 체계적인 수많은 방법으로 이런 시각을 도무지 인정할 수 없는 잘못인 양 만들어 버린다. 심지어는 성경의 신적 권위를 지고의 권위로 고백하며 가르쳐야 할 신학교의 교수들 중에도 “아직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느냐? 아직도 성령의 존재를 믿느냐? 성령이 있으면 한번 가져와서 보여 보아라!”고 순박한 신학생의 신앙을 송두리째 망가뜨리고 있는 패역한 시대다. 신적 권위를 비롯하여 그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자율적인 개인의 선택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추구한다. 오늘 우리가 선택해야 할 수많은 것들이 있다면 내일은 훨씬 더 많아질 것이며, 이런 사회가 바로 인류 모두가 바라는 유토피아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수많은 선택 거리는 슈퍼마켓이나 쇼핑몰에 가면 확연히 드러난다.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끝없는 선택과 쉴 새 없는 변화가 확대되고 증가해 가는 선택의 부추김은 이제 소비 시장의 담장을 뛰어넘어 광범위한 영역으로 확산되었다. 고급 레스토랑의 뷔페식단에서부터 인생의 자립을 돕는 기법과 철학들에 이르기까지 우리 앞에는 끝없는 선택이 놓여있다. 코로나 시대에는 교회에 가서 대면예배를 드리며 설교를 듣지 않아도 집에서 안락한 소파에 편하게 앉아서 소위 유명 설교자들의 설교를 취향에 따라 골라가며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하나님도 소비자의 한 선택 품목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끝없이 고르기가 미덕이고 지혜가 되는 세상에서는 한 가지 선택을 고수하는 행위는 더 이상 지적 확신의 문제가 아니라 어리석고 소심하다는 증거다. 현대인의 자유는 선택의 옳고 그름이나 어리석고 우둔함에 관계없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선택이다. 진리, 선함, 권위는 선택이라는 핵심적 행위와 아무 상관이 없다. 주권적 선택자로서 당신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선택하고 또 선택할 수 있는 주권적 권리를 자유로이 행사할 수 있다. 다원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선택하고 결단하는 행위를 한다. 누군가는 이런 선택을 하고 또 누군가는 저런 선택을 한다. 우리는 모두 다르게 선택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선택은 본질적으로 세상의 선택과는 다른 선택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선택은 주권적 선택자는 격상시키고 선택 내용은 가치절하해서 선택을 선호의 문제로 만들어 버리는 “끝없는 고르기식”의 선택이 아니다. 믿음의 걸음은 선택과 결단의 걸음이다. 그러나 결단의 행위로써 선택을 과도하게 강조하면 선택이라는 행위 자체가 전부가 된다. 그럴 경우, 믿음의 선택도 수많은 현대적 선택의 숙명처럼 구속력을 갖지 못하고 쉽게 바꾸어도 상관없는 상태로 쪼그라들 수 있다. 믿기로 선택한다는 이유로 믿음을 결단한 사람들은 반대 상황이 될 때 그만큼 쉽게 믿음을 저버릴 수 있다. 오늘날 “끝없는 고르기”식의 선택은 구속력이 없어 편리할 수 있지만 우리가 해야 하는 믿음의 선택은 다르다. 자신을 예수님께 바치는 것이므로 큰 대가를 각오해야 하는 언약적 선택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여기까지 왔고 더 이상 돌아갈 길이 없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원래 선택하는 백성(choosing people)이 아니라 선택된 백성(chosen people)이다. “끝없이 고르기”가 미덕이 되어가는 세상에서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우리를 골라 선택해 주신 그분의 대속적 선택을 생각하면서 무게 없는 우리의 경박한 선택 행위를 다시금 성찰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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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9
  • [김성수 총장] 교회를 향한 새해의 기대
    세월은 정말 화살처럼 빨라 2022년을 시작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23년 새해를 맞았다. 비록 전도자의 가르침과 같이 하늘아래 새 것이 없고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진리를 세월과 더불어 실감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는 이렇게 한 해를 보내고 또 새로운 한 해를 맞을 때 마다 새로운 소망과 기대를 가지고 기도하면서 출발한다. 새해를 맞을 때 마다 우리 모두에게는 자신을 향한 기대와 다짐도 있고, 사랑하는 가족을 향한 기대와 다짐도 있을 것이다. 번번이 우리를 실망시키고 좌절감을 갖게 하지만 사회와 정부를 향한 기대와 소망도 있을 것이다. 2023년 새해를 맞으면서 나는 한국 교회를 향한 기대를 새롭게 가지면서 기도의 제목으로 삼고 싶은 강한 소망과 기대를 가져 본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한국 교회도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의 성장과 저력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한때는 기독교 국가라고 말할 정도로 청교도 신앙 정신을 계승하고 교육과 문화, 심지어는 정치 영역에서도 기독교적 가치관을 반영해 오던 미국 사회는 안타깝게도 이제 더 이상 기독교적 가치관을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세속화되어 버렸다. 구주 성탄을 축하하는 성탄의 계절에도 ‘Merry-Christmas’ 는 사라지고 ‘Happy Holiday’라는 단어가 대신하고 있다. 크리스마스 트리도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다. 외양만 보면 한국이 더 기독교 국가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국을 처음 방문하는 외국인들 가운데는 도심지 곳곳에 세워져 있는 교회의 십자가를 보고 마냥 놀라워한다. 붉은 네온사인의 십자가 불빛은 한국이 마치 기독교 국가라는 착각을 갖게 할 정도다. 기독교 선교 2세기를 맞는 한국 교회는 그동안 급격한 양적 성장을 하였다. 이와 같은 양적 성장과 더불어 한국사회 초창기의 교회는 문맹 퇴치와 교육, 선진 과학 기술의 보급, 의료사업을 통한 사회 봉사, 여성의 인권 고양 등 사회를 계몽하고 인도하는 사회 봉사적 기능을 잘 수행하였다. 어두운 사회 구석을 밝히며, 차원 높은 윤리 의식을 고양하는 등 그야말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였다. 그러나 언제부터 인지 모르지만 교회가 더 이상 이러한 사회 선도적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자성의 소리들이 교회 안 밖으로부터 들려오고 있다. 교회가 사회를 향해 주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기껏해야 각종 모임으로 인한 교통 혼란과 소음, 교회 인근의 집 값 하락뿐이라는 혹독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를 인식한 의식 있는 교회들은 노인대학 운영, 노숙자 보살피기, 소년소녀 가장 돕기와 같은 사회 봉사활동을 통해 주민들의 사랑을 받는 교회로 자리 매김 하려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새해에는 이런 의식 있는 교회들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청소년들을 위한 건전한 문화 행사, 독서 교실, 주차장 개방, 결혼식장 제공 등을 통해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일에 앞장서는 교회가 많아져야 한다. 잘 운영되던 노인대학 프로그램을 없애 버리고 자기들만의 폐쇄적인 예배 공간을 만들어 즐기는 것으로 만족하는 교회는 지역사회를 향해 던져줄 선지자적 메시지를 선포하지 못한다. 이런 신앙공동체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람직한 신앙공동체의 모습이 아니다. 가난하고 소외 받는 자들의 이웃이 되는 교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교회의 바람직한 모습일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이 세계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세계라는 사실을 고백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환경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식목일에 나무를 심고, 낙동강과 수영천을 살리는 일은 구청에서 관심을 갖기 전에 교회가 먼저 관심을 갖고 앞장서서 실천해야 한다. 환경을 가꾸고 보존하는 운동과,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 재활용을 위한 쓰레기 분리 수거 운동은 교인들이 솔선수범해야 할 일이다. 교회 건물을 좀더 환경 친화적인 건물로 아름답게 건축하는 일에도 이제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자신들의 사례금에서 소득세를 자진 신고하여 세금을 납부하는 목회자들이 있다면 교회는 정말 사회를 인도하는 지도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신앙의 의미를 협의적 의미의 경건 생활 또는 교회 생활에만 제한시키지 않고 정치와 사회, 경제, 교육, 예술 등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구현해야 한다는 의식의 전환이 있다면 교회는 사회를 향해 고상한 두려움을 주는 독특한 신앙 공동체가 될 것이다. 이런 교회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성장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교회는 더 이상 지역 주민들의 관심과 유리된 채 지역 사회 속의 고립된 섬처럼 존재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인들은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는 삶”(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을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을 향해 문을 열어야 한다. 폐쇄적인 교회는 자기 집단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익 단체로 전락할 뿐이다. 2023년 새해 벽두에 한국교회가 성경적 세계관을 구성원들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구현하도록 인도하는 의식 있는 신앙 공도체로 성장해 갈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 현 미국 Evangelia University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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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9
  • [김성수 총장] 평강의왕, 예수 그리스도
    오늘날 국내외 정세를 보면 우리 모두는 마음의 진정한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갈등과 긴장, 미움과 질투, 싸움과 전쟁으로 점철된 세상에서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권력, 물질, 지식, 명예가 아니라 상처받은 마음을 다듬고 감싸주며, 우리의 존재 자체를 부요하게 해 주는 하늘의 평화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평화는 오직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제공해 줄 수 있다. 그런데 이 분이 주시는 평화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가? 단순히 긴장이 없고 전쟁이 없는 상태의 평화인가? 성경이 말하는 하늘의 평화는 무엇보다도 관계의 문제다. 평화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동료 인간과의 관계에서, 자연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자신과의 관계에서 긴장과 갈등, 막힌 것이 없고 오직 ‘누림’(enjoy)이 넘쳐나는 삶이다. 성경이 말하는 평화 또는 평강은 단순히 긴장과 적대감, 전쟁이 없는 상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평화는 관계 속에서의 ‘즐김’(enjoyment)이다. 한 국가는 주변 다른 국가와 평화로울 수는 있지만 그 속에서 가난으로 비참할 수 있다. 평화 속에 거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을 즐기는 것이며, 물리적 환경 속에 사는 것을 즐기는 것이며, 인간 동료와 함께 거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며, 자신과의 삶을 즐기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막힌 것이 없다고 해서 우리가 평안을 누리는 것이 아니다. 이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삶이 평안을 누리는 삶이다. 예배, 기도, 말씀, 선한 행위가 단순히 의무가 아니라 즐거움으로 누릴 수 있을 때 하늘의 평강이 임하게 된다. 시편 기자의 표현과 같이 평화 안에는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하감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며 사랑하는 삶이 평안을 누리는 삶이다. 평화는 또한 자연과의 올바르고 조화로운 관계와 물리적 환경 속에 거하는 기쁨을 포함한다. 평화는 우리가 노동으로 세계를 형성하고 그렇게 하는데서 성취감을 발견하고 그 결과에 기쁨을 발견할 때 찾아온다. 그래서 선지자는 평화의 날을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 백성들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종용히 쉬는 곳에 있을” 그 날(사32:18)에는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사25:6)라고 말하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조화와 풍성한 이미지를 담은 평화-짐승들 사이의 조화, 인간과 짐승 사이의 조화(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에 대해 가장 잘 알려진 구절을 인용했다. 그런데 그 구절은 다음 구절에 의해 도입된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에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 하시리니-”(사 11:1-2). 이새의 줄기란 천사가 탄생을 축하하여 노래한 “그분”이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그는 스가랴가 말한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실”(눅1:79) 분이시다. 또 시므온이“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눅2:29)고 말한 분이시다. 베드로는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화평의 복음”(행10:36)을 이스라엘에게 전파하신 분이라고 했다.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에게 말하면서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신 분”(엡 2:17)이라고 말했다. 또 이사야가 “평강의 왕”(사 9:6)이라고 부른 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평화는 이 세상 속에 일하는 하나님의 이유이며 우리 인간의 소명이다. 평화가 역사 속에 완전히 도래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 선물이지 인간이 성취해 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 속에 이따금씩 찾아드는 평화도 또한 하나님의 선물의 차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역하고,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은 바로 이 평화의 성취다. 우리는 팔짱을 끼고 주위에 둘러서서 평화가 오기만을 기다려서는 안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이유를 위한 사역자, 즉 평화를 위한 사역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명은 우리의 사명이다. 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우리의 사역은 인간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정의를 위한 헌신적 삶과, 세상을 지배하려는 계속적인 노력의 추구라는 두 가지 면을 가진다는 것이다. 평화가 더 가까이 다가오기를 원한다면 삶의 두 차원 모두가 함께 필요하다. 우리의 사명은 인류의 유익을 위해 세상을 정복하라는 문화적 명령과 함께 죄의 사슬에 결박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자유케 함과 누리게 해 주는 사역을 함께 신실하게 감당하는 것이다.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의 줄을 꺽는 것….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사 58:6-7)사역이다. 하늘의 평강을 누리게 하는 사역은 모든 그리스도의 궁극적 비전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가는 곳에는 분열보다는 화합이, 긴장보다는 편안함이, 억압보다는 풀어줌의 삶이 나타나야 한다. 구주 성탄을 맞아 축하하며 기뻐하는 계절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이시다. 평강의 왕으로 오신 그분의 오심을 축하하면서 우리 모두 평강의 사역자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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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2-12-27
  • [김성수 총장] 성탄의 계절에 ‘주는 사랑’을!
    사람들은 누구나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고 싶어 한다. 이 세상에 아름다운 말들이 많이 있지만 ‘사랑’(Love)이라는 말만큼 아름다운 말도 없을 것이다. 사랑은 결코 “눈물의 씨앗”이 아니다.그런데 우리는 사랑이 진정 무엇인지를 이해하거나 사랑을 실천하기 보다는 오히려 사랑에 관해서 말을 하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책이나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또 어떤 사람과 더불어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을 하기도 한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자기들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애국자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나라 사랑을 맹세하며 노래한다. 낭만적인 시인들도 사랑이 가득 찬 용어들을 구사하며 사랑을 노래한다. 이런 사랑들은 모두 서로 다른 종류의 사랑이다. 그러나 이 모든 종류의 사랑은 결국 따지고 보면 두 가지 종류의 사랑으로 나뉘어 진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필요에 의한 사랑’(need-love)이고, 다른 하나는 ‘주는 사랑’(gift-love)이다. 필요에 의한 사랑은 우리가 어떤 것 또는 어떤 사람이 없이는 지낼 수가 없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사랑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나의 필요를 채워주고, 나를 안전하게 해주고, 나를 행복하게 해 준다고 느낄 때 그 사람을 필요로 하고 사랑한다. 필요에 의한 사랑의 대표적인 경우는 낭만적인 사랑이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에 빠져 있을 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간 느끼는 낭만적인 사랑은 ‘필요에 의한 사랑’의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러나 ‘주는 사랑’은 이와는 거의 정반대의 사랑이다. ‘주는 사랑’은 내가 아니라 상대방을 완전하게 해 주고,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서 그 사람에게 가치 있는 어떤 것을 가져다주기를 원할 때 우리가 느끼는 종류의 사랑이다. 필요에 의한 사랑은 자기 자신의 필요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주는 사랑은 다른 사람의 필요에 관심을 갖는다. 필요에 의한 사랑은 충족되어도 결국 공허하며, 더 충족되기를 원하는 사랑이다. 그러나 주는 사랑은 넘쳐나는 사랑이며, 비어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을 채워주기를 원하는 사랑이다. 필요에 의한 사랑은 받기를 원하는 사랑이다. 그러나 주는 사랑은 계속해서 주기를 원하며, 베풀기를 원하는 사랑이다. 필요에 의한 사랑은 다른 사람을 강렬하게 갈망하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가지고 자기를 꾸며주기를 바라는 사랑이다. 그러나 주는 사랑은 다른 사람을 돌보는 능력이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꾸며주기를 원하는 사랑이다. 건전한 인간관계는 이 각각의 사랑을 모두 조금씩 가지고 있다. 사실 두 종류의 사랑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이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사람은 결코 유아독존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교제하기를 원하며,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사회적 존재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질 때, 또는 가족이나 이성을 그리워할 때, 이러한 그리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원하게 만드신 것은 무엇이나 선한 것이다. ‘주는 사랑’ 역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가도록 하셨으며, 하나님은 이러한 사랑의 본을 실제로 보여주셨다. 성탄을 기념하며 축하하는 계절을 맞고 있다.성육신하신 일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선물로 주신 ‘주는 사랑’의 가장 완전하며 대표적인 사건이다. 속죄사역 역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죄인을 위해 희생 제물로 아낌 없이 내어 주신 사랑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조금이라도 행하는 모든 ‘주는 사랑’의 원형이다. 우리의 사랑은 단지 인간적인 복사판일 뿐이다. 그러나 이 복사품과도 같은 우리의 ‘주는 사랑’도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온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이라고 요약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며, 이웃을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십계명은 바로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순종과 충성과 헌신적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공의롭게 행하는 것과 주는 사랑은 동일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빚을 지고 있다. 우리는 이것 이상으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다른 인간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하는 것 이상을 줄 수 있다. 5계명부터 마지막 10계명까지는 이것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두 가지 사실들을 의미하고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대해서 공평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그들을 돌보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을 가지고 그들을 꾸며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정한 사랑은 단순히 공평하게 대하는 정도를 한 걸음 더 넘어서 ‘주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6계명은 우리가 살인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 경우에 있어서 공의란 나의 이웃의 삶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처받은 나그네를 그냥 지나친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공의롭게 행동했다. 이들은 그 나그네를 헤치지 않았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사랑을 보여주었다. 그는 나그네를 보살펴 주었다. 그는 나그네에게 시간과 에너지와 물질을 베풀어주는 일을 하였다. 공의는 나로 하여금 도적질을 하지 않게 해 준다. 그러나 사랑은 이러한 공의를 넘어서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물질을 베풀어주는 일을 한다. 공의는 나로 하여금 거짓말을 하지 않게 지켜준다. 그러나 사랑은 공의를 넘어 나로 하여금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할 수 있게 인도해 준다. ‘필요에 의한 사랑’은 자연적으로 온다. 사람들에게 사랑에 빠지도록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그냥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주는 사랑’은 반드시 배워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법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이유이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자신의 하나 뿐인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 주신 성탄의 계절에 우리 모두 ‘주는 사랑’을 조금이라도 배우고 실천하면 우리 사회는 더욱 더 훈훈해 질 것이다.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 공동체는 ‘주는 사랑’을 실천하는 모범적인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2-12-07
  • [김성수 총장] 당신의 마음을 감사로 채우십시오
    몇 주 전에 플로리다(Florida)주에서 열린 미국 학위인증기구인 TRACS(Transnational Association of Christian Colleges and Schools) 연례 모임에 참석했을 때 칼빈대학교 커뮤니케이션 학과 교수인 쿠엔틴 슐츠(Quentin Schultz) 박사의 “섬김의 가르침”(Servant Teaching)이라는 책을 소개받고 읽으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교사와 목회자는 물론 우리 모두가 이 내용들을 깊이 묵상하고 실천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섬기는 사역이 될 수 있음을 확신하기에 우리의 일상의 사역을 성찰해 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앞으로 몇 회에 걸쳐서 슐츠 박사의 글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이번 호에서는 우리의 마음을 감사로 채워보기를 바라며 제1장의 내용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나는 학생들에게 만나서 반갑다고 말하면서 매 수업을 시작한다. 나는 그들에게 수업에 와줘서 고맙다는 말로 모든 수업을 마친다. 한 학생이 나에게 그렇게 하는 이유를 물었다. 나는 “여러분들이 수업에 올 때마다 나는 영광스럽고 축복받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 그 학생은 자신은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나 역시 섬기는 교사로서의 소명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다. 섬기는 교육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감사다. 우리의 마음이 감사로 가득 차 있을 때, 우리는 학생들과 우리의 일을 멋진 선물로 보게 된다. 우리는 학문의 세계를 감염시킬 수 있는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태도에 대한 면역성을 구축하고 있다. 감사는 기독교 교육학의 책에서 놓치고 있는 첫 번째 장이라고 생각한다. 가르치는 기술을 연마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마음을 준비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일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을 하나님의 선물로 보는 대신 우리에게 부과된 부담으로 여길 수도 있다. 우리의 일이 선물이라기보다는 의무에 가깝고, 모험이 되기보다는 매너리즘에 빠지는 일상에 가까워지고 있다. 우리로 하여금 섬길 수 있는 문을 열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또한 우리 학생들, 우리를 고용한 기관,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 우리의 능력, 우리를 도와주는 교직원들, 학위를 취득할 수 있도록 도와준 교사와 저자, 멘토, 우리를 지원하고 격려하는 동료들로 인해서 주님께 감사하자. 심지어는 실수할 수 있는 자유에 대해서도 감사하자.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다 더 큰 그림을 그려 보자. 다시 말하면, 우리를 구원하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고 있는 자들이다. 우리는 동일한 언약적 사랑에 접 붙여진 사람들을 가르치도록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우리 학생들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다. 요한은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심이라”(요일4:19)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구원의 기쁨을 잃으면 우리 자신이 기쁨이 없는 스승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학생들은 이것을 감지한다. 우리가 학생들에게 말과 비언어적으로 우리 자신을 제시하는 방식은 그들이 배우는 동작을 하는 것처럼 우리가 단순히 가르치는 동작을 하고 있음을 의미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선한 은사에 비추어 우리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새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생활 실천이 필요하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또 다른 삶의 날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나는 그날이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 생각은 다가오는 시간의 집안일과 스트레스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내 기도는 송영 없는 단순한 간구가 되어 버린다. 나는 캠퍼스 입구 표지판을 하나님의 선하심과 연관시킨다. 매일 매일 하루를 시작하면서 나는 모든 건물과 가르침과 배움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되새긴다. 나는 나의 일터 그곳에 하나님으로부터 초청 받은 사람으로 부름을 받고 준비되어 있다. 캠퍼스 간판을 보면 나의 마음은 설레어지고 봉사를 위한 준비로 고양된다. 나는 집 서재에 ‘감사 게시판’을 하나 만들었다. 코르크 판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격려의 글, 성경 말씀, 사진, 아이디어, 찬송가, 티켓, 그리고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상기 시켜 주는 다른 여러 기념 조각들을 붙여 놓는다. 그 중 한 장의 사진은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의 무덤에서 아버지의 학대를 용서하는 나를 보여주는 사진도 있다. 아버지에 대한 원한을 극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다. 나는 ‘감사 게시판’ 아래 소파에서 낮잠을 자며 게시판에 있는 것들을 음미하며 잠이 든다. 나는 서재를 나설 때마다 잘 볼 수 있는 벽에 감사 게시판을 걸어 두었다. 연구실에서 무엇을 하고 있든, 퇴근할 때는 하나님께서 나를 책임지고 계시며 내 삶을 축복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다. 결국, 감사 게시판은 내가연구실을 나설 때,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내 방을 나선다는 사실을 상기 시켜 주는 이른바 나를 향한일종의 축복 기도의 역할을 한다. 여러분과 나는 많은 선물을 받은 사랑받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이것을 더 많이 인식하면 인식할수록 우리는 학생들을 위해 봉사하는 데 더 감사하면서 우리의 삶을 바칠 수 있을 것이다. Clairvaux의 Bernard(1090-1153)는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수록 사랑에 대한 보답을 더 쉽게 찾을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감사는 쇠렌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가 배은망덕의 "질병"이라고 부르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예”라고 말하는 우리의 방법이다. 감사는 섬김의 가르침을 키워준다. 비밀 공식은 없다. 우리의 감사는 온 마음을 다하는 것이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다. (빌4:4). 구속주를 향한 우리의 태도에 감사가 부족하다면 학생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그러할 것이다. 시편 기자는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라고 묻고 있다(시116:12). 우리는 섬기는 교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포함하여, 모든 좋은 선물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써 응답한다. 감사하는 섬김의 교사가 되는 데 도움이 되는 실천 사항은 무엇이며, 당신의 감사 게시판에는 어떤 항목을 붙여 놓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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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2-11-23
  • [김성수 총장] 주님의 뜻에 대한 상반된 반응
    주님의 뜻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상반된 두 사람의 반응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엘리 제사장의 경우다. 그는 주님의 뜻 앞에서 전적으로 순복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무엘이 세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니, 그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 하니라”. 엘리는 실로의 대제사장이었는데, 그의 두 아들들도 역시 제사장들로서 봉사하였다. 이 두 아들들도 성경에 기록될 정도로 걸출한 인물들이었는데, 그것은 이들의 경건한 행동 때문이 아니라, 비할 수 없는 악행과 불경스런 행동들 때문이었다. 물론, 엘리제사장은 이들의 악한 행동에 동참하지 않았고, 이들의 행동을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아들들이 그러한 길에서 돌이키도록 단순히 훈계하는 정도의 행동을 취했을 뿐 그 행동을 중단시키려는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이제 엘리의 집을 심판하실 날을 세기 시작했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선지가가 전했을 때도 엘리는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이제 엘리 제사장이 아주 늙고 시력이 좋지 않아 잘 보지도 못할 때에 그는 성전에서 자기를 도우는 사무엘이라는 소년을 두었다. 주님은 어느 날 밤에 이 사무엘을 불러서 그를 통해 엘리에게 마지막 경고를 주었다. 엘리는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었다. “가로되 네게 무엇을 말씀하셨느냐? 청하노니 내게 숨기지 말라”(삼상 3:17).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에게 말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엘리 제사장의 가정을 영영토록 심판하시겠다는 메시지를 무거운 마음으로 전했다. 그런데 이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에 대해서 엘리 제사장은 놀라울 정도의 무감각한 반응을 보였다. 아마도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가장 무감각한 반응으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반응이었는가? “사무엘이 세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니, 그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 엘리의 이 말이 무슨 말인가? 그것은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질지어다“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일을 행하시도록 계획하시든지 간에 엘리에게는 괜찮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그것이 자신과 자기 가족의 파멸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는 태도다. 이 얼마나 감히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무관심이 아닌가? 주님의 뜻은 엘리 제사장의 가정을 파멸시키는 것이었다. 우리는 엘리의 가정의 일어난 무서운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엘리의 두 아들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엘리가 이 소식을 듣고 의자에서 넘어져서 목이 부러져 죽었다. 그의 며느리 역시 아기를 낳는 과정에서 죽었다. 그녀는 죽으면서 “이가봇”-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고 울부짖었다. 엘리 제사장이 말한 “주님의 뜻대로 될지어다”는 말은 절대로 우리가 따라야 할 경건의 본보기가 되지 못한다. 왜 그렇게 수동적인 자세를 취했는가? 왜 그는 자기 자신의 영적 상태와 자기 아들들의 영적 상태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가?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 명확하게 답변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아는 것은 엘리 제사장에게는 자기 자신이 따를 수 있었던 한 모범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엘리 제사장만이 징계와 파멸과 실망스런 메시지를 들어야 했던 유일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모세의 경우를 보면 주님의 뜻에 대한 반응에 있어서 엘리 제사장의 경우와 엄청난 대조를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는 큰 죄악에 빠졌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무서운 죄악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을 조롱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이 곧은 백성들이라고 불평하면서 모세에게 말하기를,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 32:10)고 하셨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모세는 경건하게 머리를 숙이고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고 말하지 않았다. 결코 그렇게 하지 않다. 모세는 주님께 빌었다. 주님께 사정했다. 주님께서 마음을 돌이키도록 빌었던 것이다. 모세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논증을 하면서 사정을 하였다. 모세의 이런 간청 때문에 하나님은 마침내 그 뜻을 돌이키셨다. 모세를 향한 주님의 뜻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이르렀을 때 그들을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 전에 죽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이러한 심판에 대해서 단순히 경건하게 머리 숙이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지어다”라고 하지 않았다. 모세를 향한 주님의 뜻은 쓰라린 실망이었다. 그래서 모세는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간구하고 호소하였다. 모세의 이런 완강한 간청 때문에 모세는 느보산의 꼭대기에서 약속의 땅을 바라볼 수 있었다. 모세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고 언약의 후예로서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리와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하고 호소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모세는 성경에서 위대한 선지자로 칭찬받고 있는 것이다. 주님의 뜻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기계적으로 따라야만 하는 어떤 것인가? 엘리제사장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파멸하려고 하시는 주님의 메시지를 받고, 그 앞에서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는 수동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지 않았다. 주님께 매달리고 간구하면서, 오히려 뜻을 돌려 달라고 논증하고 따지고 간청했다. 주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어떠해야 할지를 너무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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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2-11-11
  • [김성수 총장] 주님의 뜻, 무엇인가?
    주님의 뜻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관심사가 되어야 하는 어떤 것이다. 신실한 성도들은 언제나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고, 그 뜻을 순종하는 일에 최우선권을 부여해야 한다. 그런데, 주님의 뜻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올바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뜻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있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려운 어떤 일을 당할 때 주님의 뜻을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성도들이 나그네의 삶과도 같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어떤 위기나 슬픔의 순간을 당했을 때 주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믿음을 강화시키려고 하는 노력은 전적으로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갑작스런 어떤 사고나 질병, 사업의 실패, 또는 가까운 친구나 친지의 죽음과 같은 일들을 당해서 우리는 자주 주님의 뜻을 이야기할 때가 많이 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종종 자신을 향해서나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그것은 주님의 뜻이었습니다”고 말하고 위로를 받는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뜻과 관계해서 어떤 오해를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서 모든 것이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으로 주님의 뜻을 보는 관점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어떤 책이 있는데,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악과 실망스러운 일들도 모두가 결국은 이 책에 기록된 대로 일어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잘못이다. 이런 잘못된 시각에 가장 잘 인용되는 성경 귀절이 바로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29-31)는 말씀이다. 우리는 이 말씀이 마치 하나님께서 허락해야 참새 한 마리도 죽고,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공과 실패 등 모든 것을 일일이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가르치는 것으로 잘못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참새가 날개가 부러져 죽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날개로 하늘을 훨훨 나르는 것이다. 마태복음 10장 전체의 내용을 볼 때, 우리는 이 말씀을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거기에도 하나님이 계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없이 참새 한 마리도 떨어지지 않는데 머리털까지 세실 정도로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너희와 함께 하시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누가복음은 이 내용을 더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떨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그런데,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그 곳에도 계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그 때에는 아들과 함께 하시지 않았다. 그래서 주님은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아버지,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부르짖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그것은 아들을 십자기에 죽게 하시면서까지 우리를 버리지 않고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며,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것이다. 성경은 그 어느 곳에서도 주님의 뜻을 어떤 숙명주의, 팔자소관, 또는 운명주의와 같은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주님의 뜻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릉도원과 같은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다스림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뜻대로 이 창조 세계를 다스리고 있다. 주님은 달과 별, 태양, 바위, 강, 바다, 바람과 같은 무생물의 세계를 자신의 뜻대로 다스리고 있다. 주님은 또한 동식물의 세계를 자신의 뜻대로 다스리고 있다. 만약 이 세계가 주님의 뜻대로 다스려지지 않으면 정말 문제가 생겨나게 될 것이다. 주님은 또한 우리의 가정, 학교, 교회, 직장, 국가에 대해서도 자신의 뜻을 가지고 계시며, 이 모든 사회와 문화 현상들이 주님의 뜻대로 운영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 학교, 교회, 직장, 국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고 그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게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주님의 뜻은 질서와 조화, 평강과 즐거움, 선함과 거룩함과 같은 것이지 무질서와 분쟁, 괴로움, 악함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건강하고 영원히 즐겁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 실패하고 병들고 죽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비극은 주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침입자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다시금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나라를 만드시고, 우리로 하여금 실패와 고난과 시련이 없이 건강하고 즐겁게 영원토록 사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주의 뜻이 이루어질지어다”라고 말하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현 미국 Evangelia University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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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19
  • [김성수 총장] 주 너를 지키리
    오늘날 현대인들은 수많은 걱정과 근심에 사로 잡혀 생활하고 있다. 과학과 기술문명이 최고도로 발달한 시대에 엄청난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실상은 온갖 종류의 고민과 번민, 염려,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면서부터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심지어는 잠자리에서도 수많은 걱정거리들을 안고 단잠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돈에 대한 걱정, 인간관계에 대한 걱정, 자신의 외모에 대한 고민과 근심, 건강에 대한 걱정,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에 대한 걱정, 자녀들에 대한 걱정, 부모에 대한 걱정, 논문 지도 교수에 대한 걱정 등 이루 열거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걱정과 염려에 사로잡혀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문자 그대로 죽을 정도로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걱정하다가 걱정 속에 죽는 인생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이러한 걱정과 근심, 염려는 우리의 정신적인 질병의 원인이 되며, 육체적인 질병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미국에는 이러한 현대인의 정신적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기 위한 방법들이 많이 발달되어 있다. 명상요법에서부터 상담, 심리치료, 음악치료 등 수 많은 방법들을 동원해서 현대인들이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한다. 미국의 명문 줄리아드 음대를 졸업한 맥 퍼린(Mcfurrin)이라는 한 흑인 가수가 노래를 취입했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출·퇴근 길에 이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들으면서 아주 행복하고 기쁘게 운전하며 출퇴근을 하는 모습들을 보았다. 이 노래의 제목은 “염려하지 말고 행복해라!”(Don't Worry, Be Happy)라는 것이다. 가사가 복잡하지도 않고 계속적으로 “Don't Worry, Be Happy"라는 말이 반복되는 노래다. 이 노래의 내용을 조금 더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의 모든 삶에는 걱정거리들이 조금은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 걱정하면 오히려 그 만큼 걱정거리를 만들어 내는 꼴이 된다. 집세가 밀려도, 현찰이 없어도, 스타일이 엉망이고 여자친구가 없어도 걱정하지 말아라. 걱정은 오히려 얼굴에 주름살이 지게 만들고 다른 사람의 기분마저 침울하게 만든다. 걱정하지 말고 행복해라!” 이런 내용들이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노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이 노래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수많은 걱정거리와 근심에서부터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었다. 우리 나라에도 이러한 노래들이 많이 불리던 때가 있었다. “걱정을 모두 벗어 버리고서 스마일, 스마일 스마일...” 같은 노래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걱정과 근심, 불안과 염려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러한 염려와 걱정에 대해서 배워야 할 많은 내용들이 있다. 첫째는, 우리 인간의 통제 능력과 통제 범위를 넘어서는 어떤 일들에 대한 우리의 염려다. 사실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하는 일들 중에는 우리의 통제 능력과 범위를 넘어서는 일들이 많이 있다. 이런 일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염려하고 노력을 한다고 해도 아무런 효과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종류의 염려에 대한 해결책은 우리 스스로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단순히 수용할 줄 아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사에 있어서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빨리 단념하고 포기할 줄 아는 지혜와 기술을 배워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에서 자족하고,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아는 방법과 지혜를 배워야 한다. 둘째는, 실제로는 문제가 되지 않는 일들에 대한 우리의 염려다.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하는 일들 중에는 따지고 보면 실제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일들이 많이 있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얽혀있는 것이 아닌 데도 혼자서 온갖 걱정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우리가 염려하고 걱정하는 많은 일들 중에는 실제로는 의식주의 문제와 같이 그렇게 염려하고 걱정할 만한 가치가 없는 일들도 많이 있다. 이러한 종류의 염려거리들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먹고 입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더하여 주신다. 셋째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에 대한 우리의 염려다.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하는 일들 중에는 따지고 보면 실제로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공연스레 앞질러서 염려하고 걱정하는 일들이 많이 있다. “만약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하느냐?”하고 가정해서 하는 염려와 걱정이다. 이러한 염려와 공포에 대해서 해결책은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하루하루의 삶을 충실하고 성실하게 살아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결코 내일 일에 대해서 “될 대로 되어라”는 식의 삶을 살라는 말씀이 아니라, 오늘 하루의 삶을 신중하고 성실하게 살고 내일 일은 하나님께 의지하고 맡겨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당한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일들에 대해서 염려해야 한다. 우리의 삶에는 우리가 실제로 걱정하고 염려하는 일들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의, 식, 주와 같이 물질적인 필요와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러한 일들 마저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들은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히 돌보시고 공급해 주시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진정으로 먼저 추구하면 우리의 모든 필요들을 충족시켜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것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정신적인 것이 아니다. 단순히 머리로 생각만 하는 일도 아니고 가슴으로 느끼는 일만도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방식을 의미한다. 산상수훈에서 가르치는 삶,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는 삶, 형제를 사랑하고 화목하는 삶, 음욕을 품지 않는 삶, 헛된 맹세를 하지 않는 삶, 이웃을 사랑하는 삶, 외식하지 않는 진실된 삶, 구제하는 삶, 은밀한 중에 기도하는 삶,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는 삶, 형제를 비판하지 않는 삶, 한 마디로 말로 요약해서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의 삶을 현재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한다. 이러한 삶이 바로 우리의 인생 집을 모래위에 짓지 아니하고 반석위에 짓는 삶이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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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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