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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일상사, 세계관, 그리고 신앙의 문제
지난 호에서 문화 인류학자 마가렛트 미드(Margaret Mead)가 1959년에 제작한 영화에 나오는 인상 깊은 장면 즉, 일본과 캐나다의 아기 목욕 문화에 대해서 잠시 언급한 바 있다. 이 두 가정의 장면에서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가치관이 표현되어 아이들에게 전달된다. 영화에 나오는 일본 가정의 경우를 먼저 생각해 보자. 여기서는 의존성, 온화함, 자기 희생과 같은 가치관이 두드러지게 표출된다. 반면, 캐나다 가정의 경우는 독립성, 자기 주장 및 자신의 관심사와 유익과 같은 가치관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관들 뒤에는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종교적 신앙이 기초해 있음을 추적해 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불교, 신토주의, 그리고 유교적 신앙의 결합이 가족과 국가의 통합적 정체성에 대한 믿음을 생겨나게 한다. 개인은 집단의 충성된 구성원이 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한다. 조화는 이타심과 유순함에서 생겨난다. 이기심, 독립심, 그리고 자기 주장과 같은 가치관은 이러한 공동체의 조화를 파괴한다고 믿는다. 캐나다에서는 계몽주의적 인본주의로 물들어진 기독교를 통해 하나님은 개인을 돌보시며, 인류의 본성과 운명은 자율적인 각자 개인의 성취에 달려 있으며, 개인의 자기 유익과 관심이 이와 같은 성취를 가능하게 하는 자연스러운 수단이라고 믿는다. 일본의 할머니와 캐나다의 어머니에게 왜 그들이 자신들의 특별한 방법으로 아기를 목욕시키는지에 대해서 물어본다면 그들은 아마도 선뜩 이유를 대지 못할 것이다. 아기를 그런 방식으로 목욕시키는 것은 상식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이 아기를 목욕시키는 방식이고 지금까지 항상 그렇게 해 오고 있는 방식이라고 말할 것이다. 가치관과 그 가치관 뒤에 숨어 있는 종교적 신념은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가 암묵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어떤 것이다. 이와 같은 가치와 신념은 수년에 걸쳐 우리가 언제나 초점을 맞추는 핵심적인 인식에서 벗어나서 삶의 한 방식으로 구현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와 신념은 당대뿐만 아니라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에 걸쳐 대대로 전승되고 이어진다. 마가렛트 미드의 영화는 또한 우리가 그 신앙을 완전히 인식하든 인식하지 않든지 간에 종교적 신앙이 우리가 자녀를 양육하는 방식을 포함하여 일상생활의 가장 일상적인 활동을 어떻게 강력하게 지시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종교적으로 영감을 받은 충성심, 의존성, 소속감이라는 동일한 충동은 현대 일본의 여러 회사에서도 볼 수 있다. 여기서는 노동자와 경영진이 경쟁 권력 집단으로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관리자들은 현대 서구 사회에서는 보기 힘든 방식으로 근로자들의 개인적, 사회적, 종교적 필요를 돌보아 준다. 실제로 회사는 기업이라기보다는 확대된 대가족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의존성, 충성심, 소속감이라는 종교적 영감을 받은 가치는 자신들의 관습에 맞게 옷과 헤어스타일을 신중하게 선택하여 함께 찍는 동양 문화의 가족사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가족 구성원들 각자가 자신의 개성과 독립성을 표현하기 위해 옷과 헤어스타일을 선택하는 서양 문화의 가족사진과 대조해 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이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의 삶을 모든 면에서 아주 강력한 형성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믿음이라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종교적 신앙이란 실제로 감정적 필요의 투영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은 어린 아이일 때는 아버지가 곁에 있으면 안전하다고 느끼고, 아버지가 없으면 두려움을 느낀다. 그런데 아이가 커가면서 아이는 자신의 삶에 다가오는 불안과 두려움이 때로는 너무 커서 아버지조차도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런 다음 아이는 강력한 대리 아버지 형상을 '하늘로' 투사한다. 이처럼 아버지도 도와줄 수 없을 정도의 불안과 두려움에 대처하려면 인간은 신이 존재한다는 환상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들은 믿음을 성육신이나 삼위일체, 인간의 타락,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과 같은 특정 교리에 대한 믿음이나 지적 동의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견해에 따르면 믿음은 과학적 지식과는 대조가 된다. 과학적 지식은 우리에게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을 제공한다고 생각된다. 반면에 신앙은 의지의 행위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종교적 교리는 과학적 증거에 개방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서 이 문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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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4) (민12:11-16)
(민12:15)이에 미리암이 진영 밖에 이레 동안 갇혀 있었고 백성은 그를 다시 들어오게 하기까지 행진하지 아니하다가 미리암이 고침을 받는 동안 이스라엘의 진행이 멈추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세움 받은 자들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기록은 “미리암이 진영 밖에 이레 동안 갇혀 있었고”입니다. 진영 안에 갇힌다는 표현이 맞습니까? 진영 밖에 갇힌다는 표현이 맞습니까?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집을 떠나면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혹 성도들 가운데서도 교회를 떠나면 자유라고 생각하시는 분 없습니까? 가끔 자녀들은 부모가 출타하면 자유하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교회가 감옥처럼 여겨지는 분은 없습니까? 주일 지키는 것을 감옥 가는 것으로 생각하시는 분은 없습니까? 교회가 세상 속에 갇힌 것이 아니라 세상이 감옥입니다. 이렇게 볼 때, 주일은 6일 동안 세상에 갇혀 있다가 자유를 얻는 날입니다. 성도는 주의 날을 맞아 세상의 감옥에서 특별사면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자기 입맛에 맞는 맛집 찾는다고 정신들이 없는 것 같습니다. 수십 년, 평생을 교회 다니고 교회를 사랑한다면서도 자기 입맛에 안 맞으면 평생을 살아왔던 신앙생활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오늘날 성도들이라고 한다면 너무 과한 표현이겠습니까? 이러니 교회가 세상과 똑같아 져버렸습니다. 오늘날 교회 속에는 애굽 제국과 같은 세상 제국이 세워져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에 들어와서도 제각기 자기라는 바벨탑을 우뚝우뚝 세우고 있습니다. 자기만의 방법으로 하늘에 닿을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아니 자기만의 방법이 하늘에 닿은 유일한 길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다른 사람들을 현혹하며, 더 높이 바벨탑을 쌓자고 충동질합니다. 바벨탑에 갇히는 결과가 되지만, 더 무서운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이 임합니다. (창11:9)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습니다. 말씀을 혼잡하게 하셨습니다.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설교가 들리지 않습니다. 온갖 혼잡한 소리들만 귀에 들립니다. 이 소리에 기우뚱, 저 소리에 기우뚱 좌우로 치우치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라는 바벨탑을 쌓는 교만한 자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저주요 심판입니다. 미리암은 자기라는 감옥에 갇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까지도 망각해버렸습니다. 그런 미리암은 문둥병에 걸리게 되었고, 진영 밖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혹시 진영 밖이 자유로운 분은 없습니까? 진영 밖에 갇혀 있는데도, 진영 밖으로 풀려난 것으로 착각하시는 분은 없습니까? 교회 오면 갇히는 것 같고, 세상으로 가면 자유로운 분은 없습니까? 집에 가면 갇히는 것 같고, 집 밖으로 나가면 자유로운 분은 없습니까? 부모님이 있으면 갇히는 것 같고, 부모님이 없으면 자유로운 분은 없습니까? 무서운 저주와 심판 가운데 있는 상태입니다. 불신앙의 바벨탑을 쌓은 결과입니다. 교만이라는 바벨탑을 쌓은 결과입니다. 모세가 미리암을 고쳐달라고 기도했던 주일은 교회로 와서 예배의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문둥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하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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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믿음, 우리 모두의 궁극적 관심사
종교적 신화는 생명의 기원과 의미에 관한 이야기다. 종교적 신화는 삶에 대해서 우리 모두가 근본적으로 제기하는 ‘큰 질문’, 곧 세계관적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해 주려고 한다.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가? 잘못된 것을 치유해 줄 수 있는 해결책은 무엇인가?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와 같은 삶의 근원적인 질문과 해답이다. 예를 들어 황소 자그레우스(Zagreus)의 신화에 의하면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천상의 신들 사이의 우주적 전투의 결과로 이곳에 왔다고 말한다. 인간의 삶에서 잘못된 것은 근본적으로 악이 우리 인간 본성의 육체적 측면에 내재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철학자 플라톤이 나중에 철학적으로 정교한 것과 같이, 우리의 신성한 부분인 영혼이 신들과 함께 진정한 본향으로 돌아갈 때 곧 우리가 죽을 때까지 우리의 육체의 악한 본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의미한다. 삶에 대한 세계관적 ‘큰 질문’들에 대한 답은 그 어떠한 언어 형태로도 적절하게 답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주로 이야기 형태로 구현된다. 과학적인 언어는 이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들과 대답을 제공하기에는 확실히 부적절하다. 종교적 신화는 삶에 관한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과학적인 의미에서 진실 또는 거짓으로 검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세계의 본질을 다른 세계의 기원과 비교하기 위해 과학적 실험을 고안해 낼 수가 없다. 우리가 갖고 있는 세계는 하나뿐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어떤 특정 신화에 매력을 느끼고 끌릴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우리의 궁극적 관심사인 믿음의 행위로 그것을 거부하거나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지난호에서 생각해 본 바와 같이 삶에 대한 분열된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가 믿음의 행위로 황소 자그레우스의 신화를 받아들인다는 의미인가? 그렇지 않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모두가 종교적 신화 이야기를 앞에 두고 앉아서 그것을 믿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태어난 사회 속에서 우리가 성장하고 교육을 받는 등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을 통해 인생의 큰 질문에 대해서 종교적 신화가 제공하고 있는 해답을 흡수한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주변의 공기로부터 이러한 대답을 들이마시며 성장하고 살아가고 있다. 개인으로서 우리는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세계관의 근본적인 신화에 대해서 의식적인 신앙 헌신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의식하던 못하던 간에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사회가 우리를 대신해서 그런 일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돌이 가라앉은 후에도 오랜 시간 동안 잔물결이 계속해서 물을 가로질러 움직인다.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종교적 신화의 파문은 신화가 잊혀진 후에도 오랫동안 인류 역사를 통해 계속해서 움직인다. 자그레우스 신화의 경우, 이제는 오랫동안 잊혀진 이 고대 신화가 수많은 세대에 걸쳐 사람들이 삶을 바라보는 분열된 방식을 계속해서 형성해 왔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삶에 대해 이러한 분열된 관점을 계속해서 견지하고 있는 한, 비록 이 믿음이 현재 암묵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유지되고 있더라도,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그것을 묵인함으로써 실제로는 원래의 그 종교적인 근본 신화에 믿음을 두는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무의식적이며 암묵적으로 견지하는 믿음이 한 사회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리고 그에 따른 세계관이 어떻게 세대를 거쳐 전달되는지에 대한 놀라운 예는 인류학자 마가레 미드(Margaret Mead)가 1959년에 제작한 영화에서 잘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인도, 프랑스, 일본, 그리고 캐나다의 네 가족들이 하루를 보내는 삶에 관한 이야기고 구성되어 있다. 영화의 한 부분은 아기의 목욕 시간에 관한 내용이다. 일본 가정에서는 어머니가 할머니에게 아기를 맡긴다. 큰 욕조에 앉아 있는 할머니는 아이를 가슴에 꼭 안고 물을 떠 올려준다. 나중에 아이는 가정의 모든 아이들이 함께 소유하고 공유하는 매우 섬세한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나중에는 자장가 소리를 들으며 가족 침실에 잠자리에 든다. 이와 대조적으로 캐나다에서는 엄마가 아이 스스로 욕조에 들어가게 한다. 엄마와 아이 사이에 목욕 수건을 사용하는 작은 줄다리기 게임이 진행되다가, 아기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체계적으로 문지른다. 그 다음에 아이는 자신의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자기 침실에서 잠자리에 든다. 이제 불이 꺼지고 방문이 닫힌다. 다음 호에서는 이와 같은 두 종류의 이야기가 어떻게 서로 다른 가치관을 전수하고 세계관을 형성하며, 궁극적 관심사인 믿음의 문제로 연결되는지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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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이원론적 관점의 근원적인 뿌리
헬라의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은 인간의 본성이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요소, 즉 지성으로 식별되는 순수한 불멸의 영혼과 불순한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정했다. 그래서 그는 구원이라는 것은 육체의 죽음과 더불어 ‘육체의 사슬에서 영혼이 해방’함으로서 온다고 믿었다. 인간 본성에 대한 현대적 관점, 즉 인간의 지성을 모든 진리의 중재자의 위치로 격상시키는 세속적 관점은 플라톤의 저술이 담고 있는 한 중요한 관점이다. 플라톤은 인간의 과업은 육체로부터 영혼을 순수하게 정화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플라톤을 따라서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도 인간의 지성을 ‘신성’(divine)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여기에 깊은 영향을 받은 기독교인들도 인간의 구원을 “천국을 위해 영혼을 구원”하는 관점에서 보았다. 육체와 관련된 것들에 저항하고, ‘진리’에 대한 지적인 명상에 전념함으로써 영혼의 구원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헬라의 이교적인 관점은 너무나도 매력적이어서 성경을이와 같은 이교적인 틀에 맞추어 해석하는 ‘기독교화’된 버전이 나타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육신”과 관계되는 일을 피하고 개인적인 경건을 추구하는 데 전념함으로써 우리의 영혼을 정화하는 생활을 강조하는 비 성경적인 가르침이 교회에 침투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플라톤은 아마도 우리가 때때로 이 땅의 것들을 멸시하고, 허무하고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며 진리에 대해 사색하며 영원한 것 만을 추구하는 노래를 부를 때 아주 만족해 할 것이다. 플라톤의 견해가 아직도 여전히 기독교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는 또 다른 증거는 사도 바울이 사용한 ‘‘육체’와 ‘영’이라는 용어를 우리가 오해하는 방식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바울은 이 용어들을육체와 영혼을 분리시키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우리의 육신의 삶이 하나님의 영(성령)에 의해 지배와 영향을 받는 삶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등지는 우상의 거짓 영에 의해 지배와 영향을 받는 삶인지를 지칭하기 위해 이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심지어 어떤 영어 번역 성경까지도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육체”와 “영”을 “높은 것”(Higher)과 “낮은 것”(Lower)으로 잘못 번역하고 있다. 성경신학자 레안드캑(Leander Keck)이 말했듯이 바울이 말하고자 한 것은 이것이 아니다. 실제로 성경에서 ‘영혼’이라는 용어는 ‘자아’(self)를 의미하는 시적 용어이다. 마리아가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누가복음 1:46)라고 말할 때, ‘나, 라는 의미는 자신의 온 존재로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뜻이다. 시편 기자가 “나의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만 안식을 찾나이다…”(시 62:1)라고 말할 때 그는 “나 곧 나의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쉼을 얻는다”는 의미다. 플라톤은 실제로 삶에 대한 현대의 분열된 관점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을 그가 창안한 것은 아니다. 플라톤 당시에는 이미 삶에 대한 이와 같은 분열된 관점이 사회 전반에 팽배해 있었다. 그는 단지 여기에 철학적인 표현을 했을 뿐이다. 신약성경 신학자 조지 엘돈 래드(George Eldon Ladd)는 자신의 저서 <신약성서 진리의 패턴>(The Pattern of New Testament Truth)에서 플라톤이 오르페우스파 신학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기원전 6세기부터 이 신학은 그리스 세계와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오르페우스 신학은 황소 자그레우스(Zagreus)의 종교 신화에 구현되어 있다. 자그레우스는 위대한 신 제우스의 아들이었다. 제우스의 사악한 적인 타이탄과의 전투에서 자그레우스는 황소로 변했다. 타이탄은 그를 갈가리 찢어서 먹었다. 분노한 제우스는 하늘에서 벼락을 내려 타이탄들을 쳐서 잿더미로 만들었는데, 바로 이 잿더미 속에서 인간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그레우스의 신성한 부분인 영혼과 타이탄의 사악한 부분인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결국, 플라톤의 사상에서 그 뿌리를 찾아볼 수 있고, 또한 우리 삶에 너무나도 만연해 있는 삶에 대한 분열된 관점은 종교적 신화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음이 참으로 놀랍기도 하다. 우리는 다음 호에서 이것이 갖는 중요한 의미를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한다. 김성수 목사 (탄자니아 아프리카연합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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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왜곡된 이원론의 뿌리
오늘 우리 사회와 문화에는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고, 따라서 영적인 일과 육적인 일, 세상과 교회, 하나님의 일과 나의 일, 신앙과 이성, 종교와 과학의 영역을 잘못 분리하는 이원론적 사고가 팽배해 있다. 이와 같은 문제점을 배경으로 우리는 왜곡된 이원론이 어디에 연유해서 오늘 우리의 사회 문화 전반에 스며들어 있는지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대 철학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에이어(A.J. Ayer)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종교인들의 주장은 타당할 수도 없고, 타당하지 않을 수도 없다. 이들은 세상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이 설령 거짓된 말이나 근거가 부족한 말을 한다고 해서 정당하게 비난받을 수 없다.” 에이어는 신이 없다고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는 단순히 과학적 실험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신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를 논의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그의 관점은 사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르네 데카르트(Rene Decartes) 역시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이원론적으로 구분하였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또한 작가 칼 스턴(Karl Stern)이 ‘두려운 소외’(a fearful estrangement)라고 부르는 상황으로 이끌었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마음, 또는 영혼은 비유하자면 마치 하나의 ‘기계와 같은 거대한 세계”에 내장되어 있는 어떤 것과 같다고 보았다. 인간의 영혼은 인간의 육체라는 기계 안에 집을 지어 둥지를 틀고 자리를 잡고 있는 어떤 것으로 보았다. 칼 스턴 역시 스스럼없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연을 실험적으로 분해하고, 수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고, 또 실행할 수 있지만 모든 통일성을 상실한 하나의 거대하고 확장된 영혼 없는 기계에 불과하다고 생각해보라!” 칼 스턴은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관점에 대해서 데카르트의 개인적인 성경과 생활이 어떤 영향을 미쳤다는 흥미 있는 주장을 하고 있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신체적인 조건, 자신의 감정, 그리고 특히 여성과의 관계가 전혀 편안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지성에서 피난처를 찾도록 강요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항상 감기 때문에 대해 고생을 하고 있었고 불평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몸을 따뜻하게 유지하려고 ‘난로 곁에 앉아’ 있는 동안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지적 발견을 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데카르트는 여성과의 관계에서 결코 만족스럽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스웨덴의 크리스티나(Christina) 여왕에게 수학을 가르치던 중 폐렴으로 사망했다. 그녀는 수업을 시작하기 위해 선생이 추운 아침 시간에도 일어나도록 강요했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의 이원론적인 현대 과학의 세계관이 부분적으로 한 사람의 신경증에서 유래했을 수도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생각이다! 우리는 삶에 대한 분열된 관점이 기독교 세계와 비기독교 세계에 만연해 있음을 경험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현상을 보다 더 완전하게 이해하려면 이러한 관점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 인용문이 핵심이다. “우리의 육체는 단지 음식이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 우리에게 끝없는 문제를 야기한다. 우리의 육체는 또한 참된 존재를 추구하는 우리를 덮치고 방해하는 질병에도 걸리기 쉽게 만든다. 그것은 우리를 삶과 정욕, 두려움과 온갖 종류의 공상과 끝없는 어리석음으로 가득 채우고, 실제로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에게서 사고의 능력 자체를 전혀 앗아 간다. 전쟁과 다툼과 파벌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이 육체와 육체의 정욕이 아니고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전쟁은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발생하며, 돈은 육체를 위해,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서 획득해야 하는 어떤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장애물들 때문에 우리는 사고하는 ‘철학적 활동’에 전념할 시간이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여가 시간을 갖고 어떤 사고에 몰두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육체는 항상 우리에게 침입하여 우리의 탐구에 혼동과 혼란을 야기하고, 우리를 너무나도 놀라게 하여 진실을 볼 수 없게 만든다.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한 순수한 지식을 가지려면 육체를 떠나야 한다는 것이 경험을 통해 입증되고 있다. 대신에 이제는 영혼이 그 자체로 모든 것을 보아야 한다. 김성수 목사 (탄자니아 아프리카연합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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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0)
(출4:24)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 먼저는 모세가 많이 놀랐을 것입니다. 떨기나무에 불로 임재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이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애굽으로 갑니다. 애굽으로 가는 길에 숙소를 들리게 되는데 밑도 끝도 없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시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시려고 한 이유는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모세를 죽이시려고 하신 것에 분명 다른 목적이 있겠지만 이런 장면에서도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자들은 방심하면 안 됩니다. 착각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명을 맡겼으니 그 어느 누구도 함부로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도 함부로 못하시겠지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차 하는 순간에 목이 날아갑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맡은 자의 목은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지만 동시에 사명을 맡은 자의 목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잊어선 안 됩니다. 그래서 사명자는 다른 사람과 상황과 형편과 처지를 보기 전에 먼저 항상 하나님의 기색을 살펴야 합니다. 동시에 원수 사탄 마귀 역시 우리의 시선을 빼앗기 위해 끊임없이 집요하게 달려듭니다. (벧전5:8)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그래서 틈을 주어선 안 됩니다. (엡4:27)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틈을 주지 말라”는 것은“발 디딜 곳을 주지 마라”는 뜻입니다. 원수 사탄 마귀의 눈치를 보거나 겁내는 순간 틈을 주게 되고 이미 패배한 것입니다. 원수 사탄 마귀는 대적의 대상입니다. (벧전5:9-10)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성도는,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은 자들은 그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 항상 원수 마귀로부터 잠깐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에 하나님께서는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사명자는 반드시 승리하게 됩니다. 이 말씀에 또 하나 중요한 적용이 있습니다. 사탄은 교회와 성도의 궁극적인 대적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느 누구라도 사탄의 편에 서는 순간 그 사람은 교회와 성도의 대적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문제는 자신이 사탄의 편에 서 있으면서도 대부분이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줄 착각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불신앙에 사로잡혀 반역을 주도하는 무리들이 백성들이 고개를 끄덕일 만한 충분한 명분을 제시하여 현혹하기 때문입니다. (민12:2)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민16:3)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 그래서 교회 안에서의 분쟁과 싸움이 극렬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분쟁과 싸움을 하는 양 진영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스도와 복음과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한다고 주장합니다. 비슷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주장이 아예 극과 극, 전부가 다 반대입니다. 그런데 명분 하나만은 동일합니다. 소용돌이 속에 있는 성도들은 대부분이 한쪽에 속해 있지만 갈등합니다. 하나님과 성경과 복음과 성도를 위한다는 똑같은 명분을 주장하지만 자신들이 서 있는 위치는 극과 극 대치점입니다. 분명한 것은 한쪽은 하나님 편이고, 한쪽은 사탄 편입니다. 사람들은 그 구분이 명확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명확하고 단호하십니다. (민16:2)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 가운데에서 이름있는 지휘관 이백오십 명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르니라 성경은 모세를 반대한 자들이 잘못되었다고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꽤나 이름이 있는 지휘관들입니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라 이백오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뜻을 모았습니다. 이 정도 되면 누가 봐도 그들의 주장에 일리가 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얼마나 많은 모임과 회의를 거듭하고 수많은 연구에 연구를 거쳐 백성들이 동의하고 인정할 만한 안건을 들고나오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 당연히 많은 사람이 동조했습니다. (민16:35)여호와께로부터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오십 명을 불살랐더라 (민16:49)고라의 일로 죽은 자 외에 염병에 죽은 자가 만 사천칠백 명이었더라 그들은 모세를 거스르는 것인 줄 알았는데,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 가운데에서 이름있는 지휘관 이백오십 명을 불살라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세 치 혀에 미혹 받아 불신앙과 반역의 편에 섰던 14700명을 염병으로 죽여버리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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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2) (민12:11-16)
- 미리암은 위대한 믿음의 여인이 맞습니다. 하지만 여선지자라는 위대한 칭호를 받은 후 신앙이 제자리걸음을 했습니다. 미리암은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새로운 역사에 발맞추지 못하고 여전히 애굽에서의 사명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모세가 없는 40년 동안 여자로서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진짜 지도자인 줄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진짜 지도자인 모세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는 교만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40년 만에 나타난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기절초풍할 일들을 일으킵니다. 세계 최강의 애굽과 바로도 모세 앞에 쩔쩔맵니다. 애굽을 초토화 시켜버렸고, 애굽의 장자를 죽여 씨를 말려버렸습니다. 여호와의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임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만 대면하시고 바다까지 갈라 마른 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미리암은 40년 동안 여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을 영도해 왔지만 40년 만에 갑자기 등장한 모세의 위용 앞에서 입도 벙긋할 수가 없습니다. 같은 선지자의 위치에서 볼 때 비록 인간적으로는 누나요 동생이지만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영적 권위를 지닌 모세였기에 고개 들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교회들끼리, 특히 목회자들끼리 묘한 질투심과 경쟁심이 있습니다. 곁의 교회가, 다른 교회가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상대적인 박탈감을 갖습니다. 잘못되면 입은 안타깝다고 하면서 속은 이유 없이 고소하고 상대적인 만족을 얻습니다. 교회의 주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망각한 무서운 죄입니다. 사실 이런 현상이 교인들 사이에서도 발생합니다. 곁의 성도가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잘못되면 입은 위로하는 것 같지만, 자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상대적으로 자신의 신앙과 믿음이 좋은 것으로 위로받고 착각합니다. 아주 나쁜 모습입니다. 악한 모습입니다. 교만의 극치입니다. 어쩌면 이것보다 더한 것이 목회자들끼리의 보이지 않는 견제와 경쟁입니다. 주변의 교회가 갑자기 성장하면 상대적 박탈감을 가집니다. 사람이다 보니 비교가 안 될 수 없습니다. 특히 가까운 교회에서 독보적인 성장을 보이면 심각한 스트레스까지 받습니다. 목사 자신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교회의 중직자들이나 성도들도 자연스럽게 목회자에게 압박을 가합니다. 자신은 1년이 가도 전도 한 명 하지 않으면서 교회 부흥을 입에 올립니다. 십일조나 감사헌금은 고사하고 선교나 불우이웃이나 개척교회, 농어촌교회, 은퇴하신 목사님, 가난한 신학생들을 위해 특별헌금 한 푼도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 재정을 입에 올립니다. 더 심각한 것은 설교자들의 교만입니다. 설교하는 사람이다 보니 설교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다른 설교자의 훌륭한 설교에 은혜받기는커녕 허점과 잘못을 찾기에 바쁩니다. 그러니 설교에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현상은 모세를 대적하는 미리암의 아류들입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의 땀방울 하나, 눈불 방울 하나 다 주의 것입니다. 우리는 비교 대상도 아니요, 경쟁상대도 압니다.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한 몸을 이루며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자들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특히 목회자들은 아바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평생 잊어선 안 됩니다. 물론 아바타라 하지만 예수님의 아바타니 영광스럽습니다. 진짜 선지자, 진짜 목회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미리암은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사실 미리암은 누구보다도 이런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몰라서 범한 죄도 무섭지만, 알고도 범하는 죄는 더 무섭습니다. 미리암의 교만은 단순히 그 사람의 성향이나 기질을 나타내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미리암의 교만은 모세의 통치를 방해했고, 이스라엘의 진행을 가로막았습니다. 감히 모세의 영적 권위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감히 같은 선지자였지만 명함조차 내밀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교만은 이 모든 영적 권위 앞에서도 원망과 비방의 고개를 들게 합니다. 호시탐탐 모세의 허점과 실수를 염탐합니다. 교회도 은혜를 계산하는 성도가 있고, 실수와 잘못을 찾아내는 성도가 있습니다. 기회가 왔습니다. 구스 여자가 돌아왔습니다. 이전에 이미 정리된 문제인데도 교만에 사로잡힌 미리암은 영적분력을 상실했습니다. 미리암은 십보라가 돌아오자 속에 숨겨놓았던 원망과 불평을 표출합니다. 원망에 사로잡힌 미리암은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사실까지 망각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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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2) (민12: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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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1)
- 성경 어디에도 미디안의 제사장 딸 십보라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이는데 문제 삼은 장면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사실에 대해 그 어디에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대하는 목소리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할례를 행하여 모세를 살린 사건 때문에 미리암과 아론, 이스라엘백성들이 구스 여인 십보라를 받아들이는데 이의를 달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암과 아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통치에 십보라를 문제 삼지 못하도록 아예 입도 벙긋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아버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사명을 주셨고, 그 사명 감당하기 위해 애굽으로 오는 길에 느닷없이 모세를 죽이시려고 한 것은 구스 여인 십보라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임이 분명합니다. 분명한 이유는 할례를 행하여 모세를 살린 것에 있습니다. 이 장면은 오늘날 우리 같은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받아들이는데 이의를 달지 못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발견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시려 하셨습니다. 완전한 모세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이셨습니다. 완전히 죽이셨습니다. 그래도 십보라는 할례언약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 긴박한 순간에 할례를 행하면 남편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미디안 제사장의 딸과 비교도 되지 않는 신분입니다. 단순히 액면가로 볼 때 우리는 시아버지와 관계한 여인입니다. (마1:3)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우리는 우상의 신전에서 몸을 팔던 기생이었습니다. 우리는 과부요,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우리는 남편을 사지로 몰고 왕과 간음한 유부녀였습니다. (마1:5-6)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인인데 죄인인 줄도 모르는 죄인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답도 없으면서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제 딴에 잘 사는 줄 알지만 무익한 인생이요, 단 하나도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입니다. 혀에는 속임만 있습니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입에는 저주와 악독만 가득합니다. (롬3:10-14)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런 우리가, 그런 우리의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도 달렸고, 예수님의 부활에 나도 부활했다고 고백합니다. 사탄이 생각해도 기가 찰 노릇입니다. 이의를 제기하고 문제 삼을 것이 수두룩한 우리입니다. 아니 우리는 문제 그 자체들입니다. 그런데 삼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합니다. 십보라가 할례 언약을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십보라가 할례를 행하여 남편을 살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불가능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입으로 시인합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것은 100%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십보라가 할례언약을 아는 것과 할례를 행하는 것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그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서십니다. (마10: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눅12: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받아들이는데 그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합니다. 문제 제기도 못합니다. 입도 벙긋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의 예배 자리에, 예수님께서 친히 집례하시는 하늘의 성찬의 자리에 앉혀주십니다. (계12:22-23)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이런 은혜를 받은 성도입니다. 그래도 원망하고 비방하시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것은 완전한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할례를 시행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에 거하며, 주일마다 하늘의 성찬의 자리에 참여하는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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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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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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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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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
- 모든 사람은 의식적이든지 무의식적이든지 간에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관(worldview)을 가지고 있다.세계관은 개인이 소유하지만 공동체적으로 공유하기도 한다.우리는 세계관의 틀(framework)을 통해서 사물을 바라보고 행동한다.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세계관은 삶의 양식으로 표출되는데 이것을 우리는 문화라고 부른다.그러므로 한 개인과 공동체가 어떤 세계관을 소유하고 공유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삶의 양태가 나타나고, 한 사회의 문화와 제도도 생성하고 발전하며 쇠퇴하기도 한다. 인간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의 역할은 역사를 통해서 확연히 볼 수 있다.이것은 근대 문화 형성의 근간이 되는 로마의 역사와 문화에서는 잘 나타나고 있다.기독교 세계관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일찍이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시대부터 노예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법률이 통과되었다. 영아 살해의 관습 역시 십자가형과더불어,보다 더 극적으로는 낙태와 함께 금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검투사 시합도 종말을 고했는데, 그 이유는 텔레마코스(Telemachus)라는 용감한 수도승이검투 경기에서 일어나는 잔인한 살인을 막으려고 경기장 바닥으로 내려갔고,그 과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로마 사회의 변화는 비록 점진적이긴 했지만 로마 제국 전역에서 인간 생명의 가치가 점점 더 인식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로마 제국 자체는 결국 곤경에 처해 있었다. 왜냐하면 로마 제국을 지배했떤 세속적이며 인본주의적인 세계관으로 말미암아 로마 사회는 너무 오랜 세기 동안 쾌락과 반 출생주의적인 비성경적 삶의 양태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물론,이와 같은 저 출산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소위 그들이 야만인이고 불렀던 비게르만족들을 향한 이민문호를 폭넓게 개방하기는 했지만 이민에 대한 높은 의존도가 로마 사회의 인구 격차를 메우기에 역부족이었다.여기에 행정적, 군사적 실수가 결합되어 이주하는 인근의 다른 부족들에게도 제국의 국경을 활짝 열어 놓게 되었다.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부 지역에서 로마의 권위는 자신의 무능함과 게르만 부족의 공격으로 붕괴되었다. 로마, 게르만, 그리고 기독교 전통의 궁극적인 융합은 비록 완만한 전환의 과정이긴 했지만 중세 유럽에 새로운 문화와 세계관의 출현을 가져왔다. 우리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의 역할에 대해서 한 가지 예를 더 살펴 보기로 하자.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삶을 영위하기를 소망한다.그런데 영적인 삶의 영위에 향한 우리의 소망과 삶의 양태 역시 영적인 삶에 대한 관점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예를 들어,인간의 정신은 고상하고 거룩하고 선한 반면에 육체는 저급하고 속되고 악하다고 보는 이원론적 인간관을 견지하게 되면 육체적 고행이 하나님과 더 연합하는 삶이라고 보게 되고,따라서 우리가 신앙적이고 영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될 수 있는 한 육체적인 본능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역사적으로 보면,결국 이러한 종류의 인간관에 기초한 금욕적 실천은 사람들이 '생활의 법칙'에 따라 공동체로 살아가는 수도원주의(monasticism)로 발전했다. 수도원은 일반적으로 독신 생활과 엄격한 생활 방식을 요구했다.수도승과 수녀는 체계적인 기도, 연구, 그리고 생산적인 노동의 삶을 영위하였다. 수도승과 수녀들에게는 관상기도의 기초로서 연구 활동이 특별히 중요했다. 이미 5세기 초에 카시오도루스(Cassiodorus)라는 로마 원로원 의원은 자신이 비바리움(Vivarium)에 설립한 수도원에서 기독교와 이교 사상가들에 대한 텍스트 복사와 연구를 수도원 생활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삼았다. 카시오도로스와 그의동료들은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며, 그 연구는 영적 발전의 길이라고 믿었다. 모든 초기 수도원들이 카시오도루스의 관점을 따른 것은 아니지만, 몇 세기 안에 그의 사상과 독서 목록은 수도원 영성의 중추를 제공하게 되었다. 수도승들은 기도나 연구와 같은 보다 분명한 “영적인 활동”들과 함께, 생산적인 노동에도 참여해야 했다. 로마 사회의 세계관 노동을 비하하고 노예들에게 노동을 강요했을지 모르지만 수도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비록 부분적으로는 겸비의 덕을 장려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수도승이 일해야 한다는 생각은 주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성경적 사상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그분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도 역시 일해야 한다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었다. 창세기에서 아담은 죄를 짓기 전에 동산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그러므로 일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행하도록 만들어진 한 부분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은 삶의 목적에 대한 현저하게 다른 견해로 이어지게 되었다. 세계관 변화의 이러한 특별한 요인은나중 서구의 경제적 성공과 활력의 토대를 놓았다. 저출산,도덕성의 일탈,경제 문제,환경 파괴,정치 불신과 혐오 현상,남북간의 긴장 등 이 모든 문제들의 근본 뿌리는 왜곡된 세계관이다. 2024년도 새해를 맞았다.올 한 해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형성하는 올바른 세계관의 정립 운동이 범 국민 운동으로 펼쳐지기를 소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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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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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합법화(1)
-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합법화(1) 요즘 언론을 통해 중국의 시진핑과 러시아의 푸틴, 그리고 북한의 김정은과 같은 독재자 한 사람의 잘못된 가치관과 이로 인한 횡포로 인해 그들 자국 인민들이 겪는 불행과 고통은 물론, 예측할 수 없이 소용돌이치는 국제 정세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 번씩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를 떠 올리게 된다. 시진핑, 푸틴, 김정은과 같은 악랄한 독재자 대신 기독교 신앙에 좀 우호적인 지도자가 등장하면 자국민들도 좀 더 행복할 것이고 세계 질서도 달라질 것인데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앞으로 한 두 번 정도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황제에 대해서 잠시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주후 313년에 밀라노 칙령(the Edict of Milan)을 발표하면서 로마 제국 내에서는 기독교의 상황과 법적 지위가 획기적으로 바뀌어졌다. 일 년 전, 밀비안 다리 전투(the Battle of the Milvian Bridge) 직전에 콘스탄티누스는 하나님으로부터 환상을 보았는데 예수께서 꿈에 그에게 나타나서 그가 해야 할 일을 설명하셨다고 주장했다.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병사들에게 방패에 기독교 상징을 그리게 했고, 적의 우세한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을 때 이를 하나님의 표징으로 받아들여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 후 곧 바로 기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만드는 밀라노 칙령이 공포되었다. 이 칙령은 이교(paganism)를 불법화하거나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콘스탄틴의 개종으로 인해 확실히 기독교는 박해 받던 위치에서 선호 받는 종교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이 진짜였는지 아니면 정치적 계산의 산물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당시 기독교는 도시를 중심으로 고도의 조직성을 갖춘 성장하는 종교였다. 따라서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가 의지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을 제공할 수 있었다.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인기가 없었으며, 추산에 따르면 로마 세계의 약 10~15%에 불과했다. 이는 결코 압도적인 숫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기독교인들은 313년 이전에도 군대에 복무했다는 증거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평화주의자였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포용함으로써 실질적인 정치적 이점이 있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황제로서 콘스탄티누스의 행동은 그의 개종에 대한 많은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우선, 그는 아버지 하나님을 자신이 총애했던 “정복되지 않는 태양”(the Unconquered Sun)인 솔 인빅투스(Sol Invictus)와 구분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은 태양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세상의 빛, 또는 의의 태양 등으로 예수를 묘사하는 기독교인들의 관습에 영향을 받아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또한 자신의 "개종" 후에도 거의 한 세기 동안 자신의 주화에 이교 신들을 계속 사용했으며, 나중에 교황이 차지한 로마 이교 대제사장의 칭호인 폰티펙스막시무스(Pontifex Maximus)라는 칭호도 유지하고 있었다. 기독교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콘스탄티누스는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매우 일찍부터 개입했다. 첫 번째 도전은 도나투스파(Donatists)와 관련이 있는데, 이들은 박해 중에 굴복하고 배교했던 사제들은 박해 중에도 믿음을 지키며 신실하게 남아 있었던 주교의 승인과 용서를 받지 않는 한 진정한 사제들이 아니라고 믿었던 집단이다. 법정과 콘스탄틴은 이에 대응하여 폭동을 일으킨 도나투스파에 대해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 콘스탄티누스는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무력으로 보복했다. 그는 탄압이 효과가 없다고 보고 그 후 도나투스파에 적대적인 법령을 철회했지만, 그의 행동은 교회에 대한 국가의 간섭과 강압의 선례를 남겼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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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합법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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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복음의 능력과 문화의 변혁
- 서기 303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는 당시 로마 제국에서 별로 매력적이지 못하고 변방 종교였던 기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하였다. 이 박해는 처음에는 기독교도들의 예배 처소인 교회당을 파괴하고 기독교 서적을 불태우는 것으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성직자들을 투옥하고, 고문하며, 때로는 잔혹하게 사형에 처하는 등 성직자들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평신도들에게도 이러한 공격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박해가 시작된 지 불과 10년 후인 313년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에서 이전처럼 범죄 집단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독교는 오히려 로마 제국 안에서 다수의 종교가 되었고, 결국 로마를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는 후기 로마 제국의 세계관을 형성하여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과 삶의 방식을 변화시켰다. 복음의 능력이 사람들의 세계관을 변혁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를 이렇게도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으로 나타나도록 만든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가졌던 성경적 세계관, 특별히 성경적 신관이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당시 로마 제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은 비록 소수였지만 로마제국 내에서 독특한 신관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과 로마에 있던 다른 인종 집단들이 견지하고 있었던 신관 사이의 명백한 차이점은 유대인들은 급진적인 일신론자라는 점이었다. 이들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라는 구약의 성경적 신앙을 확고하게 견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믿고 섬기며 경배하는 신이 유일신이냐 아니면 다신론이냐는 문제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섬기는 신이 어떤 본성과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믿느냐는 문제였다. 모든 이방 종교는 신 또는 신들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신의 기원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 유대교적 또는 성경적 신관은 이런 이방 종교의 신관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어떤 다른 것에서 기원한 존재가 아니라 단순히 영원부터 존재하셨고 지금도 계시고 영원히 계실 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시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존재하는”(I Am who I Am)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신과 별개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자연계의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섭리자요 주권자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연신”(nature god)이나 “자연의 힘과 관련된 신”(god associated with the forces of nature)이 아니라 오히려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하나님께 응답해야 하는 창조주시다. 이와 같은 신관은 얼핏 신 플라톤적(Neoplatonic)인 신관과 흡사해 보이기도 한다. 피상적으로 보면, 성경의 하나님이 마치 존재의 위계를 형성하는 “단일자”(One)로부터 유출된 만물의 기원이며, 초월적 존재인 “하나” 곧 단일자(One)를 신이라고 보는 신 플라톤적 개념과 다소 비슷해 보일 수도 있다. 사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와 같은 일부 유대인 사상가들은 플라톤 철학의 렌즈를 통해 유대교를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경적 신관과 신 플라톤적인 관점의 신 개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신 플라톤주의자들의 신은 의지가 없는 비인격적인 신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인격적이시며 자발적인 행위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또한 신 플라톤적인 관점의 우주는 영원하다. “단일자”(One)라는 신이 존재하는 동안 우주도 존재한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우주 만물은 비인격적인 신으로부터 유출된 것이 아니라, 역사의 특정한 시점에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말씀으로 지은 바 된 피조물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인격적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독특한 성경적 인간관을 형성해 준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시고 하나님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창조 세계를 보호하고 다스리며 감독하는 청지기적 사명을 주셨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에 죄가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 자신을 대신하여 에덴의 동산을 다스리는 사명을 인간에게 부여해 주셨다. 창조 질서에서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이와 같은 고유한 위치는 인간에게 특별하고 고귀한 가치를 부여해 주고 있다. 하나님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하나님의 섭정자인 인간을 공격하는 행위는 하나님 자신을 공격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로마 제국에 흩어져 살았던 유대인들은 당시 로마의 쾌락 문화 사회에서 공공연히 행해졌던 영아 살해 행위, 로마의 역사학자 타키투스(Tacitus)가 “불길하고 역겨운” 일이라고 묘사했던 영아 살해 행위를 단호하게 거부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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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복음의 능력과 문화의 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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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 우리 성도들이 즐겨 부르는 복음 중에서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라는 복음 송이 있다. 분주한 생활 가운데서도 우리 모두는 한번쯤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우리 모두의 삶 속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한번쯤 묵상해 볼 필요가 있다. 특별히 우리의 삶의 여정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정말 살아계셔서 나에게 관심이나 갖고 계시는지, 내가 당하는 삶의 고통을 알기나 하시는지, 또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인지 회의가 들 때 은혜의 문제를 한번쯤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를 간절히 바랬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이삭은 형 에서에게 축복을 물려주고자 했다. 그래서 야곱은 먼저 에서에게서 장자권을 빼앗았다. 형 에서의 옷을 입고 털이 많은 사냥꾼인 척하여 눈먼 아버지를 속였다.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어떻게 그렇게 빨리 사냥감을 갖고 돌아올 수 있었느냐고 물었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기까지 하였다.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을 했다. 거짓말하고, 속이고,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등 모든 일을 했다. 그래서 야곱은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 같아 보인다. 야곱의 계획과 간교는 오히려 역효과를 내기만했다. 에서는 화가 나서 동생을 죽일 기회를 노렸다(창 27:41). 야곱은 목숨을 걸고 형 에서로부터 도망을 쳐야 했고, 결국 자신의 고향과 약속의 땅으로부터도 멀어져 갔다. 도망자 야곱은 자신이 떠나온 고향 집에서 며칠 거리에 있는 어떤 곳에 이르렀다. 사실 그곳은 그의 조부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이르러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던 곳이었다(12:8). 그러나 야곱은 이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는 그의 조부모와 부모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많이 들었지만 이 여호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지를 못했다. 야곱은 어쩌다가 이곳에 도착했다. 해가 지고 어두워서 더 이상 여행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진맥진한 야곱은 잠이 들었다. 이 밤에 그는 놀라운 꿈을 꾸었고, 하나님은 꿈에 야곱에게 나타나셨다. 야곱은 자신이 꿈에서 본 이상을 보고 두려워 죽을 지경이었을 것이다. 그는 방금 아버지를 속이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악행에 대해 자신을 벌하실 것인가? 여호와께서 자신을 저주하실 것인가? 얼마나 두려웠겠는가?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은 야곱을 벌하거나 저주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오히려 풍성한 약속으로 그에게 복을 주셨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그의 조상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신 동일한 약속을 야곱에게 주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은 약속의 땅을 떠나 위험한 여행을 떠나는 야곱에게 특별한 약속을 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17:7)고 약속하셨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도망치는 교활한 야곱을 찾아서 만나시고,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어진 이 모든 풍성한 약속이 이제 그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족장들에게 베푸신 축복을 받았다.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을 받을 만한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약속의 땅에서 도망치는 도망자가 될 뿐이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축복을 붙잡고 취할 수가 없는 존재다. 우리는 오직 믿음과 감사라는 두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갖고 하시는 일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사실 생각해 보면 내가 소유하고, 누려온 모든 것들이 당연한 것 아니라 오직 은혜였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한 없이 연약하고 부족하고 허물이 많고, 하나님 앞에 도무지 설 수도 없는 죄인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의 행위대로 갚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좋은 것들을 누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모든 것이 은혜라! 모든 것이 은혜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삶이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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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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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위대하신 하나님
- 분주한 일상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한번씩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를 생각하며 감탄할 때가 있다. 장엄한 계곡과 아름다운 자연 경관, 밤하늘의 신비한 은하계와 별들을 바라보면서 시편 기자와 함께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한다(시8편).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너무도 아름답고 신비하기에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창조 세계를 경작하고 다스리기는 커녕 오히려 자연을 숭배하기까지 하였다. 대부분의 이방종교는 자연 숭배와 관련이 있다. 도시를 밝히는 인공 조명과 심지어는 기후까지 조절할 수 있는 시대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신비한 자연의 질서에 훨씬 더 잘 적응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사 화복이 자연의 어떤 요소에 좌우된다고 생각하였다. 작물은 너무 덥거나 너무 춥거나 너무 습하거나 너무 건조하면 파괴되거나 익지 않을 수 있다. 화산, 지진, 홍수, 폭풍은 그들의 삶을 끝내거나 기아로 인해 서서히 죽음을 선고할 수도 있다. 질병은 그들이 건설하기 위해 노력한 모든 것을 낭비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자연에서 초월의 원천, 곧 그들 자신보다 더 큰 힘을 보았고, 그들이 생존하기 위해 이들을 달래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이교도 신들은 원래 자연의 힘과 연결되어 있었다. 신들의 왕인 주피터(Jupiter)도 폭풍의 신으로서 그의 경력을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그가 번개를 던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종교의 주된 기능은 신들이 사람들을 멸망시키지 않도록 신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었고, 좀 더 자비로운 신들에게는 자연계를 축복함으로써 사람들을 돕도록 격려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많은 이교 신들은 다산과 관련이 있으며, 농작물과 가축들이 잘 자라도록 독려하기 위해 숭배되었다. 따라서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신전 매춘부들이 숭배자들과 성관계를 갖고 바알(하늘의 신)이 아세라(땅의 여신)와 성관계를 갖도록 해서 땅에 비를 내려 농작물이 자랄 수 있도록 하는 숭배 형태도 있었다. 이와 같은 숭배의 기본 개념은 그리스-로마 세계에 와서는 자연 세계를 넘어 전쟁(Mars)을 포함한 인간적인 할동으로 까지 확대되었다. 그래서 구걸, 거짓말, 도적질(Mercury), 금속 세공(Vulcan), 음악과 시(Apollo) 그리고 섹스(Venus)와 같은 활동에까지 확대되었다. 신들은 본질적으로 인간 삶의 특정 영역이나 자연 세계의 최고 통치자였으며, 신들을 향한 숭배는 주로 신의 비우호적이며 적대적인 관심을 피하기 위해 그 영역에 대한 신들의 권위를 인정하는 방법으로 행해졌다. 예를 들어, 바다에 항해를 시작하기 전에 선장과 선원들은 바다에 대한 넵튠(Neptune)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에게 자신의 영역에 대한 무단 침입을 용서해 달라고 요청하는 의식의 희생 제사를 수행했다. 다르게 말하면, 압도적 다수의 숭배자들에게 있어서 신들은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의 존재였다. 그래서 심지어는 사랑의 언어가 사용된 곳에서도(예를 들어 메소포타미아에서처럼) 그것은 신들에게 감정적인 애착을 갖지 않고 신들에게 순종하는 것을 의미했다. 종교 의식은 신들을 위무하고 달래기 위해 고안되었다. 신들과의 감정적 애착은 거의 없었고 신들이 숭배자들을 파괴하지 않도록 그들을 달래려는 욕망만 있었다. 그래서 적절한 형식과 의식을 따르고, 적절한 기도와 희생 제물을 바쳐서 숭배자가 한 일이나 하지 않은 일로 인해 신들이 불쾌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전부였다. 한 가지 흥미로운 예는 집에 조상 신을 모신 사당을 두는 로마 가족의 경우다. 로마에서 아버지는 가족의 최고 통치자였기 때문에 아버지는 문자 그대로 가족 구성원의 삶과 죽음에 대한 권한까지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아버지는 다른 모든 영역에서 포괄적인 로마법이 가족법을 거의 완전히 발전되지 않은 상태로 남겨둘 정도로 많은 권한을 가졌다. 왜 그러했는가? 간단히 말하면 아버지가 집안의 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많은 가정에서 아버지는 여러 세대에 걸쳐 가족의 다른 가장들의 범신전(판테온)에 합류하고 집에 있는 조상 사당에서 향을 피워 숭배를 받았다. 집안의 최고 권위자로서 아버지(특히 세상을 떠난 아버지)는 종교 의식의 적절한 대상이었다. 이방 종교는 신봉자들에게 오직 한 신 또는 한 무리의 신들만을 숭배하도록 요구하지 않았다. 많은 이교도들은 신들이 지역적이어서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면 자연스럽게 신들을 바꿀 것이라고 믿었다. 자신들의 종교 체계에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새로운 신들을 추가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실, 이교도 세계에서 더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이것을 오히려 마음이 넓고 포용적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고결하고 덕스럽고 국제적인 것으로 여겨졌을 뿐만 아니라 실용적인 가치도 있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포용성을 로마 통치에 대한 종교적 반란을 막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의 힘의 원천으로 여겼다. 게다가 로마를 지지하는 신들은 많을수록 더 좋았다. 그러나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 한 분만이 유일하게 참되며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임을 선포하고 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영원부터 존재하셨고 지금도 계시고 영원히 계실 자존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자신과 별개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통치하는 만물의 주권자이시다. 이 위대하신 하나님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과 사랑과 경배하기에 홀로 합당한 분이시다. 이 위대하신 하나님은 아들의 목숨을 내어 주기까지 자기 백성을 사랑하고, 모든 환난에서 지키고 보호해 주는 분이시다. 오늘도 이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기는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소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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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위대하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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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보시니(창1:31)
- 창세기 1장이 창조장이라는 것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무슨 마음으로 창조하셨을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해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일의 경중을 떠나서 무슨 일이든 목적과 의도가 있는데 모든 것의 시작이 되는 창조를 접하면서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하시면서 무슨 마음으로 무엇을 목적으로 창조하셨을까?” 하는 것에는 의외로 무관심한 것 같습니다. 믿음이 좋아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으니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베소서 기자는 우리를 창세 전에 택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실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우리의 구원까지 언급합니다.(엡1:4-5) 성도라고 한다면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신 사랑의 하나님 ......”이라는 기도는 너무도 자연스럽고 익숙한 표현이요, 신앙고백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다면 창세기 1장에서 창조하시면서 이 창조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셨을까요? 창조의 결정체요, 핵심인 사람이 어떻게 될지를 모르겠을까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하신 사람, 하나님 닮은 사람이 어떻게 될지 모르고 창조하셨을까요?(창1:26, 5:1) 결혼을 해서 2세를 기다리는 부부에게 임신의 징후가 보입니다. 기다리던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에 부부뿐만 아니라 양가 가족, 친구, 이웃들까지 축하하고 기뻐합니다. 그런데 만약 임신한 여자가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는데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중병에 걸려 있고, 태어나면 죽을 것이라는 진단을 받는다면 그 아이 부모의 심정은 어떨까요?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창세기 1장에 와서 창조를 시작하십니다. 우리같이 부족한 부모도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죽는다는 진단결과 앞에서 차라리 임신하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아픔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물며 완벽한 아버지 하나님,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변함이 없으신 아버지 하나님 그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시면서 어떤 마음, 어떤 심정이셨을 것 같습니까? 자신의 형상을 따라, 자신의 모양을 한 사람이 장차 선악과를 따먹고 완전히 죽게 될 것을 다 아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의 심정이 어떠하셨을 것 같습니까? 빛을 창조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땅과 바다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채소와 과목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물고기와 생물들과 새들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땅의 짐승과 육축과 기는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정말 좋으셨을까요?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며 젖병 기저귀 속옷 겉옷 장난감을 장만하고, 모든 관심과 생각과 생활과 삶이 아이를 중심해서 달라지는데 정작 그 아이가 태어나면 죽는다고 합니다. 그 아이를 위하여 준비한 그 모든 것을 볼 때 그 부모는 좋겠습니까? 정말 하나님께서 좋으셔서 좋아하셨겠습니까? 25시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납니다. “웃어요, 더 크게 활짝 웃으라고요!”라고 하는 사진 기자의 요구에 이러지도 못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주인공 안소니 퀸의 일그러진 표정이 하나님의 얼굴과 오버랩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경은 잔인하게도 그 장면을 아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그냥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면 안 될까요? 하나님이 그 지은 모든 것들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시면 안 될까요? 보시니!!!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보셨을까요? 무엇을 보셨기에 심히 좋으셨을까요? 창세기 1장은 너무도 슬픈 하나님의 이야기, 너무도 아프신 하나님의 이야기, 어쩌면 인간의 역사가 끝날 때까지 너무도 슬프고 아프실 하나님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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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보시니(창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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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기독교적 지성과 세속화
-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사고해야 하는가?』(The Christian Mind: How Should a Christian Think?)라는 저서를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헤리 블레마이어(Harry Blamires)는 영국의 지적 풍토를 염두에 두면서 “이제 기독교적 정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탄식했다. 그는 정신(또는 지성, mind)이라는 용어를 “집단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관념과 태도의 경향”이라는 의미로 규정하면서, 세속적인 정신의 영향력과는 달리 기독교적 정신은 사회적, 정치적, 혹은 문화적 생활에 대하여 밀접하고도 현저한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오히려 세속적 정신에 굴복하거나 고갈되어 버렸다고 지적하고 있다. 기독교적 정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블레마이어의 지적은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삶을 살지 않는다거나 경건적인 삶의 실천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직도 기독교적 윤리와 기독교적인 영성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블레마이어도 인정하고 있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도덕적인 존재로서 비그리스도인과는 다른 법전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교회의 일원으로서 비그리스도인이 무시하는 책임과 의무들을 잘 감당하고 있으며, 영적인 존재로서 기도와 명상을 통해 비기독교인이 탐구하지 않은 삶의 차원을 계발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사유하는 존재로서 삶에 대한 종교적 견해 즉, 모든 지상적 사건들을 종교적 맥락에서 해석하며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인 인간의 제 문제들을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생각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엄격하게 개인적인 행위만을 주로 다루는 매우 협소한 사고의 영역 이외에는 세속적 정신에 의하여 구성된 준거틀(frame of reference)과 세속적 가치 평가를 반영하는 판단의 틀을 수용하여 정신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앙은 기껏해야 개인적 수준에서 영성과 도덕적 지침을 전달하는 도구 정도로 남아 있고, 공공의 수준에서는 감상에 빠진 연대 의식의 표현에 불과할 정도로 기독교 신앙의 지적 관련성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블레마이어는 기독교적 정신 또는 지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독교적 지성의 결여 문제는 본질상 기독교 신앙의 세속화(secularization)와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세속화란 사회와 문화에 인접한 영역들이 사회와 문화의 중심부로부터 점차로 그 외곽을 향해 종교로부터 나온 개념이나 제도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세속화란 현대 사회의 중심 영역, 즉 과학이나 산업기술이나 정부조직 등과 같은 영역에서 종교가 미칠 수 있는 사회적 문화적 중요성을 희석시켜서 종교로부터 나온 개념이 삶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약화시키고 종교에 의해 형성된 제도들이 미치는 영향을 점점 작아지게 만드는 과정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 한국사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점에서 세속화되어 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로 만나는 것은 예배하는 존재와 도덕적 존재로서 이지, 생각하는 존재로서가 아니다. 주님의 날인 주일을 주님의 집에서 보내는 것은 옳은 일이다. 또한 우리는 거짓말을 하거나 이웃을 비방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동의한다. 그러나 우리는 논쟁의 대상이 되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문제에 대하여 사고하는 그리스도인을 만나기는 무척 어렵다. 우리는 개인적인 도덕과 영성 이외의 문제에 대해서는 기독교적인 사유를 중지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적 정치적인 영역과 활동 속으로 발을 들여 놓을 때에는 우리의 기독교적 신앙이라는 옷을 벗어 던지는 습관에 젖어 왔다. 그 주제가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잘 훈련되어지고 잘 기초가 다져져 있는 우리의 기독교적인 개념들은 뒤로 두고 세속주의의 어휘들을 채택해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린다. 그런 후에 우리는 돌아가서 정치가와 정치를 이야기하고 사회 활동가들과 사회 복지를 이야기하고 노조원들과는 노동 관계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우리 머릿속에서 기독교적인 어휘와기독교적인 개념들을 비워버렸으며, 한 술 더 떠서 그 결과 우리가 그들과 완전히 접촉하게 되었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정신적으로는 세속주의에 발을 깊숙하게 들여 놓고 있다. 우리는 세속적인 일들에 대해서는 세속적으로 생각하도록 우리 자신을 훈련시켰고, 심지어 단속하기까지 하였으며 또한 아이러니 중의 아이러니인 것은 이런 일들을 양보하며 다른 사람들의 정신적 상황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기독교적인 것 이상의 어떤 것이 있었다고 우리 스스로를 애써 설득시키고자 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조우하는 제반 문제들에 대해서 기독교적으로 사고하는 기독교적 지성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기독교적 지성을 개발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노력하지 않으면 기독교적 지성은 시들고 죽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지적관련성을 갖도록 만드는 일에 소홀히 하게 되면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단지 설교와 만 관계되는 것이고, 그런 종류의 단어는 교회의 거룩한 강단에서나 하는 것이 예의라는 요청을 더 공격적으로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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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기독교적 지성과 세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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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지팡이니이다!(출4:1-4)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심장부에 넣어 보호하셨습니다. 보호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위용을 갖추게 하셨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출범할 하나님의 시간이 도래했습니다. 출애굽이란 성도 개인에게는 구원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출애굽이란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는 하나님의 나라, 하늘나라의 출범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80년 전에 구체적으로 그 일을 진행하셨습니다. 성경은 모세를 “아름답다, 잘 생겼다”고 기록하면서 하나님의 소명을 나타내고 있습니다.(출2:1-2) 모세의 어머니와 누나의 치밀한 계획 하에 모세를 바로의 궁정에 침투시키게 됩니다. 4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모세는 어느 정도 완벽에 가까운 준비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출애굽이라는 거사를 실행에 옮겨야 할 상황이 되었는데 모세는 상상도 못했던 난관에 부딪히게 됩니다.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대였습니다. 불 신앙과 반역의 역사는 항상 에덴동산 안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대가 두려워 미디안으로 도망을 가게 되고, 그곳에서 또 다른 40년 동안의 준비를 마치게 됩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고, 하나님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못하겠다고 버팁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시기 위하여 보여주신 표적이 지팡이가 뱀이 되는 것과 손에 문둥병이 생긴 것입니다. 얼핏 보면 모세가 빼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 확인에, 확인을 하는 장면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지팡이가 뱀이 되고, 뱀의 꼬리를 잡으니 지팡이가 되는 표적을 보여주십니다. 애굽의 요술사들도 그들의 요술로 할 수 있는 요술이요, 마술입니다. 이스라엘을 탈출시키는, 해방시키는, 출애굽시키는, 우리의 입장에서 구원이 시작되는 장면에 하나님께서는 왜 애굽의 요술사도 할 수 있는 표적을 모세에게 보이고 있을까요? 모세의 사역 전부는 지팡이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시작부터 지팡이, 10가지 재앙도 지팡이, 출애굽할 때 홍해를 가르던 지팡이의 장관은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습니다.(출14:16) 지팡이가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지팡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지팡이가 모세의 손에서 떨어지니 뱀이 되었습니다. 구지 성경은 땅에 던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던지면 당연히 땅에 떨어질 것인데 성경이 왜 불필요하게 땅에 던졌다고 표현하고 있을까요? 땅은 뱀의 주 무대입니다.(창3:14) 자신을 지키는 지팡이가 땅에 떨어지는 순간 자신을 물고, 자신을 죽이는 뱀이 되었습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손에서 떨어져 땅으로 가는 순간 뱀이 됩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이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성도들이 목사를 잡을 때, 목사는 성도들을 물어 죽이는 뱀이 됩니다. 장로가 목사를 잡을 때 목사는 장로들을 물어 죽이는 뱀이 됩니다. 목사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삼위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시행하는 것입니다. 그런 중요한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가 될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하십니다.(출4:4) 뱀 꼬리를 잡았다가는 순식간에 물려 죽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독이 센, 가장 위험한 뱀이었던 우리의 꼬리를 잡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물려 죽으셨다. 말씀을 선포하고 목회하는 것은 목숨을 걸고 뱀꼬리를 잡는 사역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뱀이었던 성도들이 목회자의 손에 들려지면 지팡이가 됩니다. 목회자는 성도라는 지팡이, 교회라는 지팡이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목회자들을 향한 매우 무서운 경고가 있음도 잊어선 안 됩니다. 모세는 이 지팡이를 잘못 사용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심판을 받았습니다.(민20:11-13) 목회자가 손에 들려진 성도라는 지팡이를 맘대로 사용했다가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손에 죽습니다. 목회자의 손에 들려진 교회라는 지팡이를 맘대로 사용했다가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손에 죽습니다. 목회자는 주님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입니다. 모든 능력은 주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지팡이는 지팡일 뿐입니다. 주님의 손에 들려질 때 주님의 지팡이가 되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하게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의 지팡이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이루신 구원은 완전합니다. 오늘의 목회자들은, 교회를 위해 세움 받은 자들은 주님의 손에 들려진 구원의 지팡이입니까? 땅에 떨어져, 땅을 기어 다니며 성도들을 물어 죽이는 뱀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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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지팡이니이다!(출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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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귀식 목사]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계 3:7-13)
- 서론 2023년 경남기총이 주관하는 2월 미스바 대성회를 맞이하여 하나님의 전에 나아와 예배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모든 성도들 위에 놀라운 은혜와 평강이 차고 넘치게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오늘 지금의 튀르키예 서쪽인 소아시아 지방에 흩어져 있었던 일곱 개의 교회 가운데 우리 주님으로부터 넘치는 칭찬을 받았던 빌라델비아교회의 아름다운 사역의 모습을 소개하면서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지금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하는 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시대를 마지막 종말 시대라고 말합니다. 말세지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후서 3장에서 증언하고 있는 것과 같이 종말시대의 많은 징조가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 함께 디모데후서3:1-5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교회 안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무관한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있으며 만몬이즘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예수 없는 인간 중심주의가 판을 치고 있으며 물량주의와 세속적인 의식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랑, 자기 과시가 판을 치고 있으며,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각종 현상들이 온 교계 속에 나타나고 있으며 끔찍한 사건과 사고들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18세기 계몽주의의 각종 전통과 정신은 완전히 무시되고 인간중심의 포스트모던이즘이 판을 치며 뉴에이지운동이 만연한 가운데 있습니다. 유일신 사상이 거부되며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며 절대적 선을 거부하고 상황과 환경에 따라 행동할 것을 강조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만 할까요? 이 질문에 관해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13:11-14 속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할 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야 할 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새롭게 무장하여 시대적 사명을 바로 감당할 때입니다. 그래서 시대적 사명을 잘 감당했던 교회, 우리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교회, 소아시아 지방에 있었던 빌라델비아교회를 소개하면서 이 시간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당시, 주후 95년경에 소아시아 지방에는 일곱 개의 교회가 흩어져 있었습니다. 이 일곱 개의 교회 이름이 “에베소교회, 서머나교회, 버가모교회, 두아디라교회, 사데교회, 빌라델비아교회, 라오디게아교회”입니다. 이들 일곱 개 교회가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일곱 개 교회 가운데 우리 주님의 책망이 전혀 없고 칭찬만을 받은 교회가 서머나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증거 하면서 주님께 전혀 책망이나 비판을 받지 않은 교회, 오직 칭찬만 있는 교회, 빌라델비아교회의 내면을 깊이 살펴보면서 이 시간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빌리델비아교회는 오늘날의 알라쉐히르라는 곳으로 사데지방에서 동남쪽으로 약 48Km 정도 떨어져 있는 지방에 위치한 교회로 상업이 성행한 도시요, 동방의 관문으로 불려진 도시에 위치한 교회로서 주변 산지는 포도농사를 많이 했다고 합니다. 이런 도시와 농촌이 혼재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던 빌라델비아교회의 내면을 살펴 보면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빌라델비아교회는 “열린 문을 가진 교회”입니다. 공산주의자로 삶을 살던 사람, 히틀러를 추종했던 사람, 하지만 이들의 사상과 이념에 대하여 염증을 느끼고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여 지지의 땅 뉴질랜드에 정착하고 난 이후, 우리 인류역사 속에 아주 중요한 책을 남긴 칼 포퍼(Karl. Popper.1902-1994), 그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이라는 놀라운 책을 통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주장이 과학적인 타당성을 지니려면 내 주장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고의 개방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의미있는 주장인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가 보다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해 가기 위해서는 폐쇄적인 사회가 아니라 개방적인 사회, 열린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폐쇄적인 사회가 아니라 열려 있는 사회공동체임을 들어내는 말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몇 가지를 살펴보면 KBS에서 진행하고 있는 열린 음악회를 비롯하여 교회 이름을 열린문 교회로 사용하는 교회들이 많고 교회안에 열린 예배, 열린 공간, 열린 교육, 열린 당회, 열린 학교, 심지어 몇 년 전에는 ‘열린 우리당’이 우리나라 정치의 중심에 서서 그 사명을 감당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열려 있다’고 하는 말은 ‘개방성’을 뜻하며, ‘소통’을 뜻하고 ‘긴밀한 교제와 대화’를 뜻하는 말씀으로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아주 좋게 평가하는 표현입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현대 사회에 아주 잘 맞는 모습을 취한 공동체로 앞서가고 있는 민주주의 공동체로 인식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말입니다. 본문 7-8절에 보면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 속에서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가 누구일까요? 절대 다수의 신학자들은 인류의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한 절대적 권한을 가진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구원의 예수님이 빌라델비아교회에 열린 문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델비아교회에 들어가기만 하면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체험하게 되고, 기도의 응답을 받고 구원의 기회를 얻고 수많은 사람이 몰려와 부흥의 역사가 나타나고 성도들이 축복의 기회를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빌라델비아교회가 열린 문을 가졌다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 중심에 모셨다는 말씀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되는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움직인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10:7-10속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교회의 주인이 되셔서 그 뜻대로 교회를 세워간다는 말씀입니다. 주님 중심의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의 주인이 주님이십니까? 사람입니까?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운영하고 있습니까? 힘있는 사람들의 뜻에 따라 교회가 움직이고 있습니까? 우리가 한국교회를 바르게 진단하면서 회개할 바를 회개하고 바르게 세워 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빌라델비아교회가 열린 문을 가졌다는 말씀은 기도하는 교회라는 말씀이요, 기도의 능력을 맛보는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성도들이 두손 모아 기도할 때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이 나타나고 기적이 일어나고 성령의 기름부음이 나타나는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33:2-3속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성도들이 부르짖어 기도하는 교회요,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응답이 나타나며 크고 은밀한 역사가 나타나는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7:7-11속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성도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고 있는 교회가 열린문을 가진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빌라델비아교회가 열린 문을 가졌다는 말씀은 새로운 성도들이 많이 찾아오는 교회라는 말씀이요, “활발하게 전도하며 선교하는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감당하신 세 가지 사역이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이요,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이요, 각종 병자와 연약한 사람을 고치시는 사역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마태복음9:35속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 사역을 열심히 감당하신 것처럼 빌라델비아교회가 선교하고 전도함으로 구원받는 사람이 많이 교회로 몰려온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4:1-2속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했는데 이 말씀과 같이 열심히 전도함으로 구원받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교회, 날마다 생명구원을 위해 힘쓰고 애쓰는 노력하는 교회가 열린 문을 가진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이같은 교회가 시대적 사명을 바로 감당하는 교회입니다. 경남지역의 모든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경남지역 모든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모든 성도들이 간증하기를 “나는 교회에 출석하고 난 이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나는 우리교회에 출석하고 난 이후 각종 기도의 문제가 다 해결되었습니다.” “나는 우리교회에 출석하고 난 이후 인생을 사는 삶의 의미와 보람을 갖게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간증이 넘쳐나는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 같은 놀라운 간증과 구원의 은총과 기도의 응답과 넘치는 축복이 교회를 출입하는 모든 성도들 위에 차고 넘치게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빌라델비아교회는 “주님의 칭찬을 받은 교회”입니다. 빌라델비아교회는 어떤 교회였기에 주님으로부터 책망할 것이 없는 교회였을까요? 넘치는 칭찬만 받게 된 근거가 무엇이었을까요? 그 내용을 오늘 본문 속에서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확인해 보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첫째, 작은 능력으로 우리 “주님의 말씀을 잘 지킨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속에서 말하고 있는 ‘작다’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로 ‘미크란(micran)’이라는 말로서 영어로 표현하면 마이크로(micro)가 됩니다. 바로 ‘마이크로’라는 말은 “축소된 것, 아주 작은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어로 ‘마이크로 버스(micro bus)’라는 말은 '아주 작은 버스'를 나타내는 말이요, ‘마이크로 필름’이라는 말은 '아주 작게 축소 된 필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처럼 빌라델비아교회는 ‘작은 능력’, 즉 마이크로 파워(micro power)를 가지고 있었지만 놀라운 일, 원더풀 파워를 들어낸 교회라는 말입니다. 주어진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열심히 일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힘쓴 교회였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작은 능력이라는 말은 물리적 힘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 교회 구성원인 교인들의 신분이나 지위나 재산 등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실질적인 모습을 통하여 자랑하거나 내 세울 만한 대단한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빌라델비아교회는 넘어지거나 실족하지 않고 우리 주님이 가르쳐 주신 사명을 잘 감당했다는 말씀입니다. 선교에 대한 사명과 사랑실천에 대한 명령을 잘 지켰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은 이 세상을 떠나 승천하기 직전,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마태복음28:19-20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명령하신 이 선교의 명령을 그 어떤 교회보다 잘 감당했다는 말씀이요, 사명을 열심히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요한복음13:34-35에서 말씀하신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사랑실천의 말씀, 사랑실천의 명령을 잘 지켰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빌라델비아교회는 주님이 주신 말씀과 명령에 순종했던 것으로 주경학자들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도 이들 신학자들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목사입니다. 사실 ‘빌라델비아교회’라는 명칭도 그래서 지어졌는지도 모릅니다. ‘빌라델비아’라는 말은 “형제 사랑”이라는 뜻으로 ‘필로스(philos)’라는 말과 ‘아델포스(adelpos)’라는 말이 하나로 합쳐진 합성어입니다. 바로 이름 값을 한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이 빌라델비아교회가 세워져 있는 지역은 버가모왕국에 속한 도시였습니다. 오래 전 버가모왕국을 다스린 유메네스 2세는 아주 호전적인 사람으로서 전쟁터에 나갈 때마다 정치력과 행정력에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자신의 친 동생이었던 앗탈로스 2세(Attalos Ⅱ, BC159-138)에게 국내정치를 다 맡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국민의 지지도가 높았고 인기가 많았던 그를 당시 로마정부가 이용할 목적으로 왕위에 오를 것을 충동질 했지만 앗탈로스 2세는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자신의 형에게 충성을 다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가르쳐 “앗탈로스의 형제애”라고 합니다. 이같은 아름다운 형제 사랑의 전통을 이어 오고 있었던 버가모 왕국의 국민들은 빌라델비아교회라는 이름을 지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형제들로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아껴주고 서로 신뢰하며 서로 연합하면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고자 하는 아름다운 소망을 담은 교회로 발전해 나아가기 위하여 빌라델비아교회로 명명했을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아주 의미 있는 해석인 것 같습니다. 바로 경남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세상적으로는 내 세울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고 대단한 재력가나 유명인도 없지만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연합하면서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고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모습을 세상 속에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편133:1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그랬는데 이 같은 감탄사가 경남지역 모든 교회 성도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두고 하는 표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빌라델비아교회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은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다”는 말씀이 정말 대단한 말씀입니다. 그 당시 소아시아 지방은 로마의 식민지로서 로마황제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황제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황제숭배사상을 모든 점령국 백성들에게 주입시키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유일신이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탄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고 핍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절대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로마 정부는 황제숭배 사상을 내세워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는데 그 기간이 장장 300년 정도 됩니다. 핍박과 박해가 계속되자 많은 성도들은 그 박해와 핍박이 두려워 교회를 등지기 시작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자리에서 떠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늘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은 전혀 흔들리지 아니하고 믿음을 굳게 지켜가면서 우리 주님을 배반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모습이야말로 정말 숭고한 모습이요 대단한 모습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빌라델비아교회가 직면하고 있었던 것은 정치적인 탄압과 박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교회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단들의 적극적인 도전과 유혹도 결코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무슨 말입니까? 교회 안에서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면서 유대인이 아닌 거짓된 이단들이 들어와서 교회를 어지럽히고 교회를 혼란스럽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같은 도전과 유혹 속에서 빌라델비아교회는 전혀 흔들리지 아니하고 우리 주님이 주신 말씀과 사명을 감당하며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믿음을 잘 지켰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같은 모습이 바로 존귀한 모습입니다. ♪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성도의 신앙 본받아 원수도 사랑 하겠네 인자한 언어 행실로 이 신앙 전파하리라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찬송가 336장1,3절- 경남지역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도 그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오늘 본문의 주인공이 되는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과 같은 아름다운 믿음으로 우리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으면서 아름다운 믿음의 꽃을 피우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처럼 작은 능력으로 놀라운 일을 감당한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우리 주님은 세 가지를 약속하고 있는데, 그 세 가지 약속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첫째, “내가 너를 지켜 주겠다”고 하는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시험의 때와 환란의 때에 너를 지켜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같은 약속은 구약성경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시편121:5-7에 보면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우리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 큰 시험과 환란의 때에 주어진 말씀을 잘 지키고 우리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 성도들에게는 우리 주님께서 모든 시험과 모든 환란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도록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기둥은 집을 떠 받치는 중심축입니다. 모든 건축물에서 기둥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없습니다. 바로 기둥과 같이 중요한 사람으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으로, 꼭 필요한 사람으로 사용하겠다는 우리 주님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이 경남지역의 모든 교회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나의 새 이름을 그에게 써 주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구원의 보증서를 써 준다는 말씀이요, 구원의 사람으로 인(印)을 쳐 준다는 말씀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천국시민으로 인정하고, 두 말도 하지 않고 하늘나라에 받아 주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결론 이제 오늘 말씀의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이 소개하고 있는 빌라델비아교회는 우리 주님이 극찬을 하며 인정할 수밖에 없는 교회로서 두 가지 특징을 지닌 교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첫째, “열린 문을 가진 교회”라고 말씀 드렸고, 둘째, “놀라운 칭찬을 받은 교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처럼 놀라운 칭찬을 받을 수 있었던 사실은 첫째, “작은 능력으로 우리 주님의 말씀을 잘 지킨 교회”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둘째, “우리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은 교회”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같은 자랑스러운 교회였기에 교회사에서 길이 빛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우리 경남지역의 모든 교회도 이 빌라델비아교회처럼 작은 능력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교회가 되고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 교회가 되면서 구원의 주가 되시며 축복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의 칭찬을 받는 복된 교회가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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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귀식 목사]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계 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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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신앙의 계승
- 어린 시절 초등학교(옛 국민학교) 가을 운동회는 많은 분들의 뇌리에 아직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시골 학교 가을 운동회는 전교생을 청군과 백군으로 나누어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함께 먼지 나는 운동장에서 하루를 즐기는 동네 축제였다. “보아라 이 넓은 싸움터에 청군과 백군이 싸운다. 청군과 백군이 싸우면 틀림없이 백군(자기편)이 이긴다. ……”는 응원가를 소리 높여 불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Victory! Victory! V-I-C-T-O-R-Y!” 유창한 영어 발음으로 함께 응원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이런 운동회에서 피날레는 역시 맨 나중에 펼쳐지는 계주였다. 좀 발이 빠른 주자는 바통을 받기 위해 아예 미리 좀 뒤로 나와서 힘겹게 쥐어 주는 바통을 받아 빠르게 달렸고, 비교적 빠르지 못한 주자는 앞으로 좀 나와서 발이 빠른 주자가 조금 더 달려서 넘겨주는 바통을 받아 달리는 전략을 구사하기도 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바통을 놓치지 않고 잘 넘겨주고 또한 잘 받아 완주하는 것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은 중국에서 최초로 개최된 올림픽이었다. 이 올림픽은 ‘최초’라는 수많은 수식어들이 따라 붙었는데, 가장 이상한 일 중 하나는 릴레이 계주에서 메달을 딴 미국 선수가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이라고 한다. 계주가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도입된 1928년 이후로 미국 팀은 한 번도 거스르지 않고 시상식 단상에 올랐고, 대개 금메달을 수상했다. 그러나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단 한 종목에서도 수상자가 나오지 않았다.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인가? 미국 선수들이 바통을 놓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미국 팀은 스피드와 체력이 뛰어났지만 핸드오프 기술은 서툴렀다. 개인적으로는 뛰어난 주자였고 속도가 결코 뒤처지지 않았지만, 릴레이 팀으로서는 아니었던 것이다. 바통을 잘 받아 달리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아주 중요하다. 성경은 그 특유의 솔직함으로 한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신앙을 계승하는데 실패한 극적인 사례들을 과감 없이 서술하고 있다. 엘리의 아들들이 타락한 이야기, 사무엘의 아들들의 부패, 다윗 왕의 추악한 죄악, 솔로몬의 교만과 어리석음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성경은 그 영웅들을 조금도 미화하지 않으며 그 기록에 어떤 덧칠도 하지 않는다. 성경은 이와 함께 개인에게나 이스라엘 민족에게 참으로 중요한 극적인 계승의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이스라엘이 그 고귀한 소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야훼를 향한 신앙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신실하게 전수되어야 했다. 왕들은 훌륭한 선조들처럼 여호와께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했다. 선지자의 겉옷을 또 다른 선지자가 물려받아야 했다. 횃불이 꺼지지 않고 밝은 불빛을 내며 전달되어야 했다. 바통을 떨어뜨려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바통을 잘 물려주었고 여호수아는 그의 후계자들에게, 사무엘은 사울에게, 다윗은 솔로몬에게,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바통을 잘 물려주었다. 세대 간 교체를 실감나게 경험하면서 신앙의 경주를 달려온 세대는 이제 바통을 잘 넘겨주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오스 기니스(Os Guinness)가 강조하는 세 가지 도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첫째, 횃불을 전달하는 주자들은 후임자들이 현재의 중요성을 인식하도록 도전해야 한다. 자기 유산을 공고화 하는데 목적을 두는 주자는 바통을 잘 넘겨주지 못한다. 모세는 여호수아와 백성들에게 이제 떠날 때라고 말했다. 그들은 긴 세월을 광야에게 배회하며 허비했다. 여호수아는 그 후임자들에게 약속의 땅의 정복 과업을 완수할 때라고 말했다. 둘째, 다음 세대로 횃불을 전달하는 주자들은 후임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지나온 길을 기억하도록 도전해야 한다. 성경에서의 기억은 단순히 낭만적 추억이나 향수가 아니다. 오로지 감사와 겸손, 믿음과 소망을 고취하는데 목적이 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를 실망시키신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러실 것이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해 오셨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기억은 감사와 신뢰 회복의 열쇠이다. 셋째, 다음 세대로 횃불을 전달하는 주자들은 그 후임자들이 언제나 미쁘신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를 의지하도록 도전해야 한다. 견고한 것 같아 보이는 가정, 찬란한 영광을 구가하는 시대, 강력한 부흥도 한두 세대 이상을 이어가지 못한다. 해가 지지 않는 날도, 영광이 시들지 않는 영웅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고 그분의 자비는 무궁하고, 그분의 구원과 감찰하심과 회복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다. 그분은 우리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누울 때에라도 우리 믿음을 지켜 주시는 분이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기” 때문이다(시 136). 오스 기니스의 강조점에 네 번째 한 가지를 더 추가하고자 한다. 다음 세대로 횃불을 전달하는 주자들은 신앙의 계승은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명심하도록 도전해야 한다. 한 개인, 한 가정, 한 교회, 한 교단만 신앙의 바통을 잘 넘겨준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전진하고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신앙의 경주는 지역적이면서도 세계적이며, 심지어 우주적인 경주다. 복음에 빚진 한국교회가 복음의 빚을 갚기 위해 선교지 현지 지도자 양성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금 우리는 신앙의 경주에서 바통을 잘 넘겨주지 못하는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음 세대에 무엇을 전할지는 특별히 중요하다. 언제나처럼 우리의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는 우리 주님에 대한 온전한 신실함을 유지하면서 전수할 가치가 있는 것을 개인적이며 공동체적으로 다음 세대에 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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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신앙의 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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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끝없이 고르기
-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는 인간을 자율적인 존재(autonomous being)로 규정하며, ‘자율성’을 가장 고귀한 가치로 숭상하고 있다. ‘자율’(autonomy)이라는 단어는 ‘auto’(자동/스스로)와 ‘nomus’(규범/법)라는 단어의 합성어이다. 인간이 자율적인 존재라는 말은 인간은 자기 스스로가 규범이 되고 법이 되는 존재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오늘 우리는 자신의 말이 법이고, 자신의 행동이 규범이라고 주장하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권위를 제외한 모든 형태의 권위를 허물어뜨리고, 모든 반응은 단순히 선호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런 행위를 표현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로 포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권위의 지배를 받는 존재”에서 자신이 선호하는 것을 “끝없이 고르는 존재”가 되도록 인도해 가고 있다. 기독교 신앙에는 권위의 문제가 핵심이다. 창조주 되신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권위들이 머리를 숙여야 하는 절대지고의 권위이며 세상 모든 권위의 원천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속력을 갖고 있는 권위 있는 진리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 읽던 성경에는 “가라사대”라는 표현이 있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예수님이 가라사대-”라는 말씀을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였다. 구약 레위기의 많은 교훈들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명하시되”라는 세 구절로 시작하며, 이 구절은 모든 사랑과 친근감의 어조를 띄지만 반박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위를 강조한다. 오스기니스(Os Guinness)가 말한바와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권위 아래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초월적 위대하심 앞에서 그분의 권위와 말씀의 권위를 기꺼이 인정하고 신뢰하며 그런 삶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 창조된 존재가 아니며, 따라서 자아 충족적이지 않고 스스로가 자신에게 법이 되는 자율적인 존재가 아님을 기쁘게 인정한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권위에 대한 이와 같은 시각을 경직되고 낡은 고루한 생각으로 치부해 버린다. 현대성은 교묘하지만 체계적인 수많은 방법으로 이런 시각을 도무지 인정할 수 없는 잘못인 양 만들어 버린다. 심지어는 성경의 신적 권위를 지고의 권위로 고백하며 가르쳐야 할 신학교의 교수들 중에도 “아직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느냐? 아직도 성령의 존재를 믿느냐? 성령이 있으면 한번 가져와서 보여 보아라!”고 순박한 신학생의 신앙을 송두리째 망가뜨리고 있는 패역한 시대다. 신적 권위를 비롯하여 그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자율적인 개인의 선택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추구한다. 오늘 우리가 선택해야 할 수많은 것들이 있다면 내일은 훨씬 더 많아질 것이며, 이런 사회가 바로 인류 모두가 바라는 유토피아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수많은 선택 거리는 슈퍼마켓이나 쇼핑몰에 가면 확연히 드러난다.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끝없는 선택과 쉴 새 없는 변화가 확대되고 증가해 가는 선택의 부추김은 이제 소비 시장의 담장을 뛰어넘어 광범위한 영역으로 확산되었다. 고급 레스토랑의 뷔페식단에서부터 인생의 자립을 돕는 기법과 철학들에 이르기까지 우리 앞에는 끝없는 선택이 놓여있다. 코로나 시대에는 교회에 가서 대면예배를 드리며 설교를 듣지 않아도 집에서 안락한 소파에 편하게 앉아서 소위 유명 설교자들의 설교를 취향에 따라 골라가며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하나님도 소비자의 한 선택 품목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끝없이 고르기가 미덕이고 지혜가 되는 세상에서는 한 가지 선택을 고수하는 행위는 더 이상 지적 확신의 문제가 아니라 어리석고 소심하다는 증거다. 현대인의 자유는 선택의 옳고 그름이나 어리석고 우둔함에 관계없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선택이다. 진리, 선함, 권위는 선택이라는 핵심적 행위와 아무 상관이 없다. 주권적 선택자로서 당신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선택하고 또 선택할 수 있는 주권적 권리를 자유로이 행사할 수 있다. 다원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선택하고 결단하는 행위를 한다. 누군가는 이런 선택을 하고 또 누군가는 저런 선택을 한다. 우리는 모두 다르게 선택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선택은 본질적으로 세상의 선택과는 다른 선택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선택은 주권적 선택자는 격상시키고 선택 내용은 가치절하해서 선택을 선호의 문제로 만들어 버리는 “끝없는 고르기식”의 선택이 아니다. 믿음의 걸음은 선택과 결단의 걸음이다. 그러나 결단의 행위로써 선택을 과도하게 강조하면 선택이라는 행위 자체가 전부가 된다. 그럴 경우, 믿음의 선택도 수많은 현대적 선택의 숙명처럼 구속력을 갖지 못하고 쉽게 바꾸어도 상관없는 상태로 쪼그라들 수 있다. 믿기로 선택한다는 이유로 믿음을 결단한 사람들은 반대 상황이 될 때 그만큼 쉽게 믿음을 저버릴 수 있다. 오늘날 “끝없는 고르기”식의 선택은 구속력이 없어 편리할 수 있지만 우리가 해야 하는 믿음의 선택은 다르다. 자신을 예수님께 바치는 것이므로 큰 대가를 각오해야 하는 언약적 선택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여기까지 왔고 더 이상 돌아갈 길이 없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원래 선택하는 백성(choosing people)이 아니라 선택된 백성(chosen people)이다. “끝없이 고르기”가 미덕이 되어가는 세상에서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우리를 골라 선택해 주신 그분의 대속적 선택을 생각하면서 무게 없는 우리의 경박한 선택 행위를 다시금 성찰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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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끝없이 고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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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교회를 향한 새해의 기대
- 세월은 정말 화살처럼 빨라 2022년을 시작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23년 새해를 맞았다. 비록 전도자의 가르침과 같이 하늘아래 새 것이 없고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진리를 세월과 더불어 실감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는 이렇게 한 해를 보내고 또 새로운 한 해를 맞을 때 마다 새로운 소망과 기대를 가지고 기도하면서 출발한다. 새해를 맞을 때 마다 우리 모두에게는 자신을 향한 기대와 다짐도 있고, 사랑하는 가족을 향한 기대와 다짐도 있을 것이다. 번번이 우리를 실망시키고 좌절감을 갖게 하지만 사회와 정부를 향한 기대와 소망도 있을 것이다. 2023년 새해를 맞으면서 나는 한국 교회를 향한 기대를 새롭게 가지면서 기도의 제목으로 삼고 싶은 강한 소망과 기대를 가져 본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한국 교회도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의 성장과 저력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한때는 기독교 국가라고 말할 정도로 청교도 신앙 정신을 계승하고 교육과 문화, 심지어는 정치 영역에서도 기독교적 가치관을 반영해 오던 미국 사회는 안타깝게도 이제 더 이상 기독교적 가치관을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세속화되어 버렸다. 구주 성탄을 축하하는 성탄의 계절에도 ‘Merry-Christmas’ 는 사라지고 ‘Happy Holiday’라는 단어가 대신하고 있다. 크리스마스 트리도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다. 외양만 보면 한국이 더 기독교 국가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국을 처음 방문하는 외국인들 가운데는 도심지 곳곳에 세워져 있는 교회의 십자가를 보고 마냥 놀라워한다. 붉은 네온사인의 십자가 불빛은 한국이 마치 기독교 국가라는 착각을 갖게 할 정도다. 기독교 선교 2세기를 맞는 한국 교회는 그동안 급격한 양적 성장을 하였다. 이와 같은 양적 성장과 더불어 한국사회 초창기의 교회는 문맹 퇴치와 교육, 선진 과학 기술의 보급, 의료사업을 통한 사회 봉사, 여성의 인권 고양 등 사회를 계몽하고 인도하는 사회 봉사적 기능을 잘 수행하였다. 어두운 사회 구석을 밝히며, 차원 높은 윤리 의식을 고양하는 등 그야말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였다. 그러나 언제부터 인지 모르지만 교회가 더 이상 이러한 사회 선도적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자성의 소리들이 교회 안 밖으로부터 들려오고 있다. 교회가 사회를 향해 주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기껏해야 각종 모임으로 인한 교통 혼란과 소음, 교회 인근의 집 값 하락뿐이라는 혹독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를 인식한 의식 있는 교회들은 노인대학 운영, 노숙자 보살피기, 소년소녀 가장 돕기와 같은 사회 봉사활동을 통해 주민들의 사랑을 받는 교회로 자리 매김 하려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새해에는 이런 의식 있는 교회들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청소년들을 위한 건전한 문화 행사, 독서 교실, 주차장 개방, 결혼식장 제공 등을 통해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일에 앞장서는 교회가 많아져야 한다. 잘 운영되던 노인대학 프로그램을 없애 버리고 자기들만의 폐쇄적인 예배 공간을 만들어 즐기는 것으로 만족하는 교회는 지역사회를 향해 던져줄 선지자적 메시지를 선포하지 못한다. 이런 신앙공동체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람직한 신앙공동체의 모습이 아니다. 가난하고 소외 받는 자들의 이웃이 되는 교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교회의 바람직한 모습일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이 세계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세계라는 사실을 고백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환경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식목일에 나무를 심고, 낙동강과 수영천을 살리는 일은 구청에서 관심을 갖기 전에 교회가 먼저 관심을 갖고 앞장서서 실천해야 한다. 환경을 가꾸고 보존하는 운동과,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 재활용을 위한 쓰레기 분리 수거 운동은 교인들이 솔선수범해야 할 일이다. 교회 건물을 좀더 환경 친화적인 건물로 아름답게 건축하는 일에도 이제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자신들의 사례금에서 소득세를 자진 신고하여 세금을 납부하는 목회자들이 있다면 교회는 정말 사회를 인도하는 지도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신앙의 의미를 협의적 의미의 경건 생활 또는 교회 생활에만 제한시키지 않고 정치와 사회, 경제, 교육, 예술 등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구현해야 한다는 의식의 전환이 있다면 교회는 사회를 향해 고상한 두려움을 주는 독특한 신앙 공동체가 될 것이다. 이런 교회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성장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교회는 더 이상 지역 주민들의 관심과 유리된 채 지역 사회 속의 고립된 섬처럼 존재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인들은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는 삶”(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을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을 향해 문을 열어야 한다. 폐쇄적인 교회는 자기 집단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익 단체로 전락할 뿐이다. 2023년 새해 벽두에 한국교회가 성경적 세계관을 구성원들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구현하도록 인도하는 의식 있는 신앙 공도체로 성장해 갈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 현 미국 Evangelia University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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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교회를 향한 새해의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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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평강의왕, 예수 그리스도
- 오늘날 국내외 정세를 보면 우리 모두는 마음의 진정한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갈등과 긴장, 미움과 질투, 싸움과 전쟁으로 점철된 세상에서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권력, 물질, 지식, 명예가 아니라 상처받은 마음을 다듬고 감싸주며, 우리의 존재 자체를 부요하게 해 주는 하늘의 평화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평화는 오직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제공해 줄 수 있다. 그런데 이 분이 주시는 평화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가? 단순히 긴장이 없고 전쟁이 없는 상태의 평화인가? 성경이 말하는 하늘의 평화는 무엇보다도 관계의 문제다. 평화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동료 인간과의 관계에서, 자연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자신과의 관계에서 긴장과 갈등, 막힌 것이 없고 오직 ‘누림’(enjoy)이 넘쳐나는 삶이다. 성경이 말하는 평화 또는 평강은 단순히 긴장과 적대감, 전쟁이 없는 상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평화는 관계 속에서의 ‘즐김’(enjoyment)이다. 한 국가는 주변 다른 국가와 평화로울 수는 있지만 그 속에서 가난으로 비참할 수 있다. 평화 속에 거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을 즐기는 것이며, 물리적 환경 속에 사는 것을 즐기는 것이며, 인간 동료와 함께 거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며, 자신과의 삶을 즐기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막힌 것이 없다고 해서 우리가 평안을 누리는 것이 아니다. 이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삶이 평안을 누리는 삶이다. 예배, 기도, 말씀, 선한 행위가 단순히 의무가 아니라 즐거움으로 누릴 수 있을 때 하늘의 평강이 임하게 된다. 시편 기자의 표현과 같이 평화 안에는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하감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며 사랑하는 삶이 평안을 누리는 삶이다. 평화는 또한 자연과의 올바르고 조화로운 관계와 물리적 환경 속에 거하는 기쁨을 포함한다. 평화는 우리가 노동으로 세계를 형성하고 그렇게 하는데서 성취감을 발견하고 그 결과에 기쁨을 발견할 때 찾아온다. 그래서 선지자는 평화의 날을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 백성들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종용히 쉬는 곳에 있을” 그 날(사32:18)에는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사25:6)라고 말하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조화와 풍성한 이미지를 담은 평화-짐승들 사이의 조화, 인간과 짐승 사이의 조화(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에 대해 가장 잘 알려진 구절을 인용했다. 그런데 그 구절은 다음 구절에 의해 도입된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에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 하시리니-”(사 11:1-2). 이새의 줄기란 천사가 탄생을 축하하여 노래한 “그분”이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그는 스가랴가 말한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실”(눅1:79) 분이시다. 또 시므온이“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눅2:29)고 말한 분이시다. 베드로는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화평의 복음”(행10:36)을 이스라엘에게 전파하신 분이라고 했다.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에게 말하면서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신 분”(엡 2:17)이라고 말했다. 또 이사야가 “평강의 왕”(사 9:6)이라고 부른 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평화는 이 세상 속에 일하는 하나님의 이유이며 우리 인간의 소명이다. 평화가 역사 속에 완전히 도래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 선물이지 인간이 성취해 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 속에 이따금씩 찾아드는 평화도 또한 하나님의 선물의 차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역하고,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은 바로 이 평화의 성취다. 우리는 팔짱을 끼고 주위에 둘러서서 평화가 오기만을 기다려서는 안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이유를 위한 사역자, 즉 평화를 위한 사역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명은 우리의 사명이다. 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우리의 사역은 인간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정의를 위한 헌신적 삶과, 세상을 지배하려는 계속적인 노력의 추구라는 두 가지 면을 가진다는 것이다. 평화가 더 가까이 다가오기를 원한다면 삶의 두 차원 모두가 함께 필요하다. 우리의 사명은 인류의 유익을 위해 세상을 정복하라는 문화적 명령과 함께 죄의 사슬에 결박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자유케 함과 누리게 해 주는 사역을 함께 신실하게 감당하는 것이다.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의 줄을 꺽는 것….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사 58:6-7)사역이다. 하늘의 평강을 누리게 하는 사역은 모든 그리스도의 궁극적 비전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가는 곳에는 분열보다는 화합이, 긴장보다는 편안함이, 억압보다는 풀어줌의 삶이 나타나야 한다. 구주 성탄을 맞아 축하하며 기뻐하는 계절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이시다. 평강의 왕으로 오신 그분의 오심을 축하하면서 우리 모두 평강의 사역자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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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평강의왕, 예수 그리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