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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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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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2
  • [김성수 총장]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
    모든 사람은 의식적이든지 무의식적이든지 간에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관(worldview)을 가지고 있다.세계관은 개인이 소유하지만 공동체적으로 공유하기도 한다.우리는 세계관의 틀(framework)을 통해서 사물을 바라보고 행동한다.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세계관은 삶의 양식으로 표출되는데 이것을 우리는 문화라고 부른다.그러므로 한 개인과 공동체가 어떤 세계관을 소유하고 공유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삶의 양태가 나타나고, 한 사회의 문화와 제도도 생성하고 발전하며 쇠퇴하기도 한다. 인간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의 역할은 역사를 통해서 확연히 볼 수 있다.이것은 근대 문화 형성의 근간이 되는 로마의 역사와 문화에서는 잘 나타나고 있다.기독교 세계관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일찍이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시대부터 노예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법률이 통과되었다. 영아 살해의 관습 역시 십자가형과더불어,보다 더 극적으로는 낙태와 함께 금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검투사 시합도 종말을 고했는데, 그 이유는 텔레마코스(Telemachus)라는 용감한 수도승이검투 경기에서 일어나는 잔인한 살인을 막으려고 경기장 바닥으로 내려갔고,그 과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로마 사회의 변화는 비록 점진적이긴 했지만 로마 제국 전역에서 인간 생명의 가치가 점점 더 인식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로마 제국 자체는 결국 곤경에 처해 있었다. 왜냐하면 로마 제국을 지배했떤 세속적이며 인본주의적인 세계관으로 말미암아 로마 사회는 너무 오랜 세기 동안 쾌락과 반 출생주의적인 비성경적 삶의 양태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물론,이와 같은 저 출산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소위 그들이 야만인이고 불렀던 비게르만족들을 향한 이민문호를 폭넓게 개방하기는 했지만 이민에 대한 높은 의존도가 로마 사회의 인구 격차를 메우기에 역부족이었다.여기에 행정적, 군사적 실수가 결합되어 이주하는 인근의 다른 부족들에게도 제국의 국경을 활짝 열어 놓게 되었다.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부 지역에서 로마의 권위는 자신의 무능함과 게르만 부족의 공격으로 붕괴되었다. 로마, 게르만, 그리고 기독교 전통의 궁극적인 융합은 비록 완만한 전환의 과정이긴 했지만 중세 유럽에 새로운 문화와 세계관의 출현을 가져왔다. 우리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의 역할에 대해서 한 가지 예를 더 살펴 보기로 하자.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삶을 영위하기를 소망한다.그런데 영적인 삶의 영위에 향한 우리의 소망과 삶의 양태 역시 영적인 삶에 대한 관점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예를 들어,인간의 정신은 고상하고 거룩하고 선한 반면에 육체는 저급하고 속되고 악하다고 보는 이원론적 인간관을 견지하게 되면 육체적 고행이 하나님과 더 연합하는 삶이라고 보게 되고,따라서 우리가 신앙적이고 영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될 수 있는 한 육체적인 본능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역사적으로 보면,결국 이러한 종류의 인간관에 기초한 금욕적 실천은 사람들이 '생활의 법칙'에 따라 공동체로 살아가는 수도원주의(monasticism)로 발전했다. 수도원은 일반적으로 독신 생활과 엄격한 생활 방식을 요구했다.수도승과 수녀는 체계적인 기도, 연구, 그리고 생산적인 노동의 삶을 영위하였다. 수도승과 수녀들에게는 관상기도의 기초로서 연구 활동이 특별히 중요했다. 이미 5세기 초에 카시오도루스(Cassiodorus)라는 로마 원로원 의원은 자신이 비바리움(Vivarium)에 설립한 수도원에서 기독교와 이교 사상가들에 대한 텍스트 복사와 연구를 수도원 생활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삼았다. 카시오도로스와 그의동료들은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며, 그 연구는 영적 발전의 길이라고 믿었다. 모든 초기 수도원들이 카시오도루스의 관점을 따른 것은 아니지만, 몇 세기 안에 그의 사상과 독서 목록은 수도원 영성의 중추를 제공하게 되었다. 수도승들은 기도나 연구와 같은 보다 분명한 “영적인 활동”들과 함께, 생산적인 노동에도 참여해야 했다. 로마 사회의 세계관 노동을 비하하고 노예들에게 노동을 강요했을지 모르지만 수도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비록 부분적으로는 겸비의 덕을 장려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수도승이 일해야 한다는 생각은 주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성경적 사상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그분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도 역시 일해야 한다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었다. 창세기에서 아담은 죄를 짓기 전에 동산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그러므로 일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행하도록 만들어진 한 부분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은 삶의 목적에 대한 현저하게 다른 견해로 이어지게 되었다. 세계관 변화의 이러한 특별한 요인은나중 서구의 경제적 성공과 활력의 토대를 놓았다. 저출산,도덕성의 일탈,경제 문제,환경 파괴,정치 불신과 혐오 현상,남북간의 긴장 등 이 모든 문제들의 근본 뿌리는 왜곡된 세계관이다. 2024년도 새해를 맞았다.올 한 해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형성하는 올바른 세계관의 정립 운동이 범 국민 운동으로 펼쳐지기를 소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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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9
  • [김성수 총장]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합법화(1)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합법화(1) 요즘 언론을 통해 중국의 시진핑과 러시아의 푸틴, 그리고 북한의 김정은과 같은 독재자 한 사람의 잘못된 가치관과 이로 인한 횡포로 인해 그들 자국 인민들이 겪는 불행과 고통은 물론, 예측할 수 없이 소용돌이치는 국제 정세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 번씩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를 떠 올리게 된다. 시진핑, 푸틴, 김정은과 같은 악랄한 독재자 대신 기독교 신앙에 좀 우호적인 지도자가 등장하면 자국민들도 좀 더 행복할 것이고 세계 질서도 달라질 것인데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앞으로 한 두 번 정도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황제에 대해서 잠시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주후 313년에 밀라노 칙령(the Edict of Milan)을 발표하면서 로마 제국 내에서는 기독교의 상황과 법적 지위가 획기적으로 바뀌어졌다. 일 년 전, 밀비안 다리 전투(the Battle of the Milvian Bridge) 직전에 콘스탄티누스는 하나님으로부터 환상을 보았는데 예수께서 꿈에 그에게 나타나서 그가 해야 할 일을 설명하셨다고 주장했다.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병사들에게 방패에 기독교 상징을 그리게 했고, 적의 우세한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을 때 이를 하나님의 표징으로 받아들여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 후 곧 바로 기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만드는 밀라노 칙령이 공포되었다. 이 칙령은 이교(paganism)를 불법화하거나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콘스탄틴의 개종으로 인해 확실히 기독교는 박해 받던 위치에서 선호 받는 종교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이 진짜였는지 아니면 정치적 계산의 산물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당시 기독교는 도시를 중심으로 고도의 조직성을 갖춘 성장하는 종교였다. 따라서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가 의지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을 제공할 수 있었다.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인기가 없었으며, 추산에 따르면 로마 세계의 약 10~15%에 불과했다. 이는 결코 압도적인 숫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기독교인들은 313년 이전에도 군대에 복무했다는 증거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평화주의자였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포용함으로써 실질적인 정치적 이점이 있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황제로서 콘스탄티누스의 행동은 그의 개종에 대한 많은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우선, 그는 아버지 하나님을 자신이 총애했던 “정복되지 않는 태양”(the Unconquered Sun)인 솔 인빅투스(Sol Invictus)와 구분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은 태양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세상의 빛, 또는 의의 태양 등으로 예수를 묘사하는 기독교인들의 관습에 영향을 받아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또한 자신의 "개종" 후에도 거의 한 세기 동안 자신의 주화에 이교 신들을 계속 사용했으며, 나중에 교황이 차지한 로마 이교 대제사장의 칭호인 폰티펙스막시무스(Pontifex Maximus)라는 칭호도 유지하고 있었다. 기독교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콘스탄티누스는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매우 일찍부터 개입했다. 첫 번째 도전은 도나투스파(Donatists)와 관련이 있는데, 이들은 박해 중에 굴복하고 배교했던 사제들은 박해 중에도 믿음을 지키며 신실하게 남아 있었던 주교의 승인과 용서를 받지 않는 한 진정한 사제들이 아니라고 믿었던 집단이다. 법정과 콘스탄틴은 이에 대응하여 폭동을 일으킨 도나투스파에 대해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 콘스탄티누스는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무력으로 보복했다. 그는 탄압이 효과가 없다고 보고 그 후 도나투스파에 적대적인 법령을 철회했지만, 그의 행동은 교회에 대한 국가의 간섭과 강압의 선례를 남겼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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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1
  • [김성수 총장] 복음의 능력과 문화의 변혁
    서기 303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는 당시 로마 제국에서 별로 매력적이지 못하고 변방 종교였던 기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하였다. 이 박해는 처음에는 기독교도들의 예배 처소인 교회당을 파괴하고 기독교 서적을 불태우는 것으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성직자들을 투옥하고, 고문하며, 때로는 잔혹하게 사형에 처하는 등 성직자들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평신도들에게도 이러한 공격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박해가 시작된 지 불과 10년 후인 313년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에서 이전처럼 범죄 집단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독교는 오히려 로마 제국 안에서 다수의 종교가 되었고, 결국 로마를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는 후기 로마 제국의 세계관을 형성하여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과 삶의 방식을 변화시켰다. 복음의 능력이 사람들의 세계관을 변혁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를 이렇게도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으로 나타나도록 만든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가졌던 성경적 세계관, 특별히 성경적 신관이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당시 로마 제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은 비록 소수였지만 로마제국 내에서 독특한 신관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과 로마에 있던 다른 인종 집단들이 견지하고 있었던 신관 사이의 명백한 차이점은 유대인들은 급진적인 일신론자라는 점이었다. 이들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라는 구약의 성경적 신앙을 확고하게 견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믿고 섬기며 경배하는 신이 유일신이냐 아니면 다신론이냐는 문제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섬기는 신이 어떤 본성과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믿느냐는 문제였다. 모든 이방 종교는 신 또는 신들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신의 기원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 유대교적 또는 성경적 신관은 이런 이방 종교의 신관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어떤 다른 것에서 기원한 존재가 아니라 단순히 영원부터 존재하셨고 지금도 계시고 영원히 계실 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시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존재하는”(I Am who I Am)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신과 별개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자연계의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섭리자요 주권자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연신”(nature god)이나 “자연의 힘과 관련된 신”(god associated with the forces of nature)이 아니라 오히려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하나님께 응답해야 하는 창조주시다. 이와 같은 신관은 얼핏 신 플라톤적(Neoplatonic)인 신관과 흡사해 보이기도 한다. 피상적으로 보면, 성경의 하나님이 마치 존재의 위계를 형성하는 “단일자”(One)로부터 유출된 만물의 기원이며, 초월적 존재인 “하나” 곧 단일자(One)를 신이라고 보는 신 플라톤적 개념과 다소 비슷해 보일 수도 있다. 사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와 같은 일부 유대인 사상가들은 플라톤 철학의 렌즈를 통해 유대교를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경적 신관과 신 플라톤적인 관점의 신 개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신 플라톤주의자들의 신은 의지가 없는 비인격적인 신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인격적이시며 자발적인 행위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또한 신 플라톤적인 관점의 우주는 영원하다. “단일자”(One)라는 신이 존재하는 동안 우주도 존재한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우주 만물은 비인격적인 신으로부터 유출된 것이 아니라, 역사의 특정한 시점에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말씀으로 지은 바 된 피조물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인격적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독특한 성경적 인간관을 형성해 준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시고 하나님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창조 세계를 보호하고 다스리며 감독하는 청지기적 사명을 주셨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에 죄가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 자신을 대신하여 에덴의 동산을 다스리는 사명을 인간에게 부여해 주셨다. 창조 질서에서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이와 같은 고유한 위치는 인간에게 특별하고 고귀한 가치를 부여해 주고 있다. 하나님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하나님의 섭정자인 인간을 공격하는 행위는 하나님 자신을 공격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로마 제국에 흩어져 살았던 유대인들은 당시 로마의 쾌락 문화 사회에서 공공연히 행해졌던 영아 살해 행위, 로마의 역사학자 타키투스(Tacitus)가 “불길하고 역겨운” 일이라고 묘사했던 영아 살해 행위를 단호하게 거부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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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8
  • [김성수 총장] 불가능한 사람들
    11세기 베네딕트 수도회의 개혁가 피터 다미안(1007-1073)을 일컬어 사용된 표현이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교회는 타락하고 부패가 기승을 부렸다. 성직자와 교회 지도자, 일반 성도까지 도덕적으로, 신학적으로 부패했다. 이에 맞서 다미안은 성직 매매와 성직자들 사이에 용인되던 동성애와 소아성애, 남색을 강도 높게 비난하며 개혁을 촉구했다. 그는 예수님께 충성하고 복음의 진리를 지키고자 헌신한 사람이었다. 그가 모든 형태의 부패와 부도덕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좌시하지 않았던 이유는 자신 안에 있는 열정 때문이었다. 그는 어떤 방해와 반대에도 흔들리지 않고 맞섰다. 오직 예수께 헌신하고자 하는 그의 열정이 얼마나 불같았던지 그는 ‘조종 불가능한 사람’, ‘뇌물이 안 통하는 사람’,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조지 오웰의 표현대로 그는 ‘도무지 한 패거리로 끼워 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비록 소수였지만 시대마다 이런 소위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느부갓네살의 신상 앞에 아무 생각 없이 한번만 절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음에도, 산채로 불태워 죽인다는 위협에 굴하지 않고 우상 숭배를 거부했다. 다니엘은 창문 하나만 닫고 커튼만 쳐도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음에도 사자의 먹이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향을 피우는 흉내만으로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음에도, 시저를 주로 인정하기를 거부함으로 야수의 저녁 먹잇감이 되었다. 황제와 왕비와 전 제국에 맞서는 것이 터무니없는 만용으로 여겨졌음에도, 아타나시우스는 세상에 맞서 진리를 대변했고 그 신실함으로 다섯 번이나 유배 생활을 했다. 양심을 따라 전통의 합의에 맞서는 마틴 루터를 사람들은 교만하다거나 미쳤다고 말했지만, 그는 화형대에서 죽어간 얀 후스의 순교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학문이라는 미래의 중대한 일을 위해 목숨을 보존하라는 절친한 친구들의 만류에도, 디트리히 본 회퍼는 히틀러의 소굴로 다시 들어가 두려운 교수대의 위협에 맞섰다. 한상동, 주남선, 조수옥 권사도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믿음으로 모진 고문과 옥중 생황을 감내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허다한 구름 같은 증인들과 순교자들의 빛 안에 살고 있는가? 아니면 발전된 현대 세계의 안락한 분위기에 젖어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는가? 기독교 역사상 지금의 서구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부당한 취급을 당하거나 기독교 수정주의가 득세한 적이 없다. 오늘날처럼 기독교의 성경 해석이 이렇게 자의적이고, 설교가 이렇게 타협적이며, 신앙인의 행실이 이렇게 방탕한 때가 있었는가? 오늘날처럼 아무 고민 없이 세상과 타협하고 쉽게 신앙을 저버리면서도 그 수치를 모르는 이렇게 천박한 적이 또 있었는가?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시대의 도전 앞에 맥없이 굴복하고 있다. 우리의 복음 증거는 날카로운 예리함을 잃어 가고 있으며, 예수의 주되심과 권세는 배반을 당하고 있다. 이제 이 상황을 되돌려 우리 주님께 합당한 태도를 취할 때가 되었다. 온 열방의 우리형제 자매들이 믿음을 지키려고 목숨으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이때, 서구의 세대는 우리 주를 배신했다는 쓰라린 후회만을 남기지 전에 어서 서둘러야 한다. 오스기니스(Os Guinness)가 잘 설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개혁가 피터 다미안, 그는 오직 한 청중만을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쓰고 행동했다. 그 외 다른 목소리는 그를 제지할 수 없었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신실했다. 그의 믿음은 강철같이 강했다. 그는 난공불락의 사람이었다. 우리에게는 바로 이런 기독교 지도자들이 필요하다. 우리 역사 ‘불가능한 사람들’(Impossible People)이 되어야 한다. 연민으로 눈처럼 녹을 수 있는 가슴을 가졌으나 강철과 부싯돌처럼 단호한 얼굴과 의지로 어떤 압력과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고 농락당하지 않으며 뇌물이 통하지 않는 그리스도인, 그럼에도 우리 주님의 온유함과 자비와 은혜와 따뜻함을 잃지 않는 그리스도인 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보다 오직 예수께만 흔들림 없는 충성을 바쳐야 한다. “예수는 주님이시다”가 우리의 고백이자 권위이며 기준이고 인생의 법칙이 되어야 한다. 그분을 부정하는 사람이나 대상이 무엇이든 우리는 굳건히 맞서야 한다. 또 다시 오스 기니스의 표현을 빌린다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깨가 튼튼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 위해 지셨던 주님의 십자가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어야 만들어지는 어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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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3-04-19
  • [김경헌 목사] 지팡이니이다!(출4:1-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심장부에 넣어 보호하셨습니다. 보호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위용을 갖추게 하셨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출범할 하나님의 시간이 도래했습니다. 출애굽이란 성도 개인에게는 구원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출애굽이란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는 하나님의 나라, 하늘나라의 출범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80년 전에 구체적으로 그 일을 진행하셨습니다. 성경은 모세를 “아름답다, 잘 생겼다”고 기록하면서 하나님의 소명을 나타내고 있습니다.(출2:1-2) 모세의 어머니와 누나의 치밀한 계획 하에 모세를 바로의 궁정에 침투시키게 됩니다. 4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모세는 어느 정도 완벽에 가까운 준비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출애굽이라는 거사를 실행에 옮겨야 할 상황이 되었는데 모세는 상상도 못했던 난관에 부딪히게 됩니다.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대였습니다. 불 신앙과 반역의 역사는 항상 에덴동산 안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대가 두려워 미디안으로 도망을 가게 되고, 그곳에서 또 다른 40년 동안의 준비를 마치게 됩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고, 하나님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못하겠다고 버팁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시기 위하여 보여주신 표적이 지팡이가 뱀이 되는 것과 손에 문둥병이 생긴 것입니다. 얼핏 보면 모세가 빼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 확인에, 확인을 하는 장면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지팡이가 뱀이 되고, 뱀의 꼬리를 잡으니 지팡이가 되는 표적을 보여주십니다. 애굽의 요술사들도 그들의 요술로 할 수 있는 요술이요, 마술입니다. 이스라엘을 탈출시키는, 해방시키는, 출애굽시키는, 우리의 입장에서 구원이 시작되는 장면에 하나님께서는 왜 애굽의 요술사도 할 수 있는 표적을 모세에게 보이고 있을까요? 모세의 사역 전부는 지팡이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시작부터 지팡이, 10가지 재앙도 지팡이, 출애굽할 때 홍해를 가르던 지팡이의 장관은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습니다.(출14:16) 지팡이가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지팡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지팡이가 모세의 손에서 떨어지니 뱀이 되었습니다. 구지 성경은 땅에 던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던지면 당연히 땅에 떨어질 것인데 성경이 왜 불필요하게 땅에 던졌다고 표현하고 있을까요? 땅은 뱀의 주 무대입니다.(창3:14) 자신을 지키는 지팡이가 땅에 떨어지는 순간 자신을 물고, 자신을 죽이는 뱀이 되었습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손에서 떨어져 땅으로 가는 순간 뱀이 됩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이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성도들이 목사를 잡을 때, 목사는 성도들을 물어 죽이는 뱀이 됩니다. 장로가 목사를 잡을 때 목사는 장로들을 물어 죽이는 뱀이 됩니다. 목사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삼위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시행하는 것입니다. 그런 중요한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가 될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하십니다.(출4:4) 뱀 꼬리를 잡았다가는 순식간에 물려 죽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독이 센, 가장 위험한 뱀이었던 우리의 꼬리를 잡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물려 죽으셨다. 말씀을 선포하고 목회하는 것은 목숨을 걸고 뱀꼬리를 잡는 사역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뱀이었던 성도들이 목회자의 손에 들려지면 지팡이가 됩니다. 목회자는 성도라는 지팡이, 교회라는 지팡이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목회자들을 향한 매우 무서운 경고가 있음도 잊어선 안 됩니다. 모세는 이 지팡이를 잘못 사용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심판을 받았습니다.(민20:11-13) 목회자가 손에 들려진 성도라는 지팡이를 맘대로 사용했다가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손에 죽습니다. 목회자의 손에 들려진 교회라는 지팡이를 맘대로 사용했다가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손에 죽습니다. 목회자는 주님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입니다. 모든 능력은 주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지팡이는 지팡일 뿐입니다. 주님의 손에 들려질 때 주님의 지팡이가 되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하게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의 지팡이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이루신 구원은 완전합니다. 오늘의 목회자들은, 교회를 위해 세움 받은 자들은 주님의 손에 들려진 구원의 지팡이입니까? 땅에 떨어져, 땅을 기어 다니며 성도들을 물어 죽이는 뱀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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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3-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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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수 총장] 하나님 없는 종교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잘 알려져 있고,많은 가정의 거실 벽에 결려 있기도 하지만 그 본래의 의미가 완전히 상실되어질 위험에 있는 성경 귀절들이 많이 있다.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아모스 선지자의 말씀이 그 중 하나이다.이와 같은 귀절들의 의미는 거기에 나오는 단어들의 아름다움에 가려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아모스 선지자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를 열심히 찾고 있었던 같아 보인다.벧엘에 세워졌던 성소가 그렇게 분주한 적도 없었다.아모스시대 만큼 그렇게 많은 동물들이 희생 제물로 바쳐진 적이 없었다.사람들은 여호와를 찾기 위해 벧엘에만 간 것이 아니라 더 멀리 길갈에까지 갔었다.길갈은 거기에서 할례가 행해졌기 때문에 여호수아 시대 이후로 아주 거룩한 장소로 여김을 받는 곳이었다.그런데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수많은 순례자의 무리들이 정기적으로 브엘세바로 순례를 떠나기도 했다. 이것은 북 이스라엘로부터 온 순례자들에게는드고아를 지나야 브엘세바로 갈 수 있는 여정이었다.브엘세바는 유다의 최남단에 있었기 때문에 이 여정은 이스라엘 국경 밖으로 나가는 긴 여정이었다.그러나 순례자들은 여기에 대해서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다.브엘세바는 성지가 아닌가!여호와께서 거기서 오래 전에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던가!어떤 가치있는 전통이 브엘세바와 관련되어 있지 않는가!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조망해 볼 때 이스라엘이여호와를 찾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종교적 열정,희생 제물,그리고 순례는 오히려 이들이 영적으로 건강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그러나 이 모든 행동은 “하나님 없는 종교”의 한 부분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하나님은 벧엘,길갈,그리고 브엘세바와 관계된 그 어떤 것도 원치 않으셨다.거기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아니었다.하나님은 인간들이 그들의 설계에 따라 하나님을 위해 지은 집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집에 거하셨다.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만든 종교들을 인정하기를 거절하시는 분이다.그것들은 하나님의 눈에 가증스러운 것일 뿐이다. 아모스는 가능한 한 가혹하게 심판을 알리기 위해 예리한 대조를 하고 있다: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리라.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아모스5:5). 이스라엘의 겉치레뿐인 경건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구하는 경건과는 완전히 정반대였다.그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얼굴을 돌리는 것을 의미했다.우리의 종교를 우리 자신에게 맞도록 바꾸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에 대해서 이보다 더 날카로운 비판은 없을 것이다. 벧엘,길갈, 그리고 브엘세바에서 드리는 제사는 여호와를 찾는 참된 경건의 행위가 아니라 단지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이교적 행위였을 뿐이다.의식 중심의 모든 종교는 신들의 총애를 얻기 위해서 희생 제물을 드린다는 이교적 원리에 의존해 있다.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속에 있던 생각도 바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빚을 지게 하는 것이었다.다시 말하면 여호와께 많은 헌물을 드림으로써 그들 자신의 소원의 수레에 여호와를 얽매이게 하는 것이었다.이런 생각은 여호와의 사랑을 받는 경건의 모습에 접근해 가고자 함이 아니고 단지 그분의 은사를 나누어 갖고자 함이었다.이것이 그들이 훌륭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한 종교의 모습이었다.이런 종교는 실제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다.하나님은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돌보실 것이라고그들은 믿었다.하나님은 자신에게 바쳐진 많은 희생 제물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이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중심에 하나님이 없는 종교를 개발했던 것이다. 종교적 열심과 종교는 전적으로 범주가 다른 두 가지 행위라는 사실을 성경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다.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교훈이다.예배에 단순히 참석하고 헌물을 드리며, 위계적 직분을 감당하는 행위가 여호와를 전심으로 찾는 경건의 행위와 같을 수가 없다.전자는 후자가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하다.우리 시대에 넘쳐 나는 교회당에서 우리는 실제로는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서도 교회와 교단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많은 말을 할 수가 있다.교회와 교단, 심지어는 선교지에서도 많은 종교적 활동을 하고 있지만 여호와를 찾는 모습만 가질 뿐 실제로는 이기심을 채우는 하나님 없는 종교적 행위에 몰두할 수도 있다.분주하게 희생 제물을 드리고 기도하는 열렬한 종교적 활동 가운데서 우리 모두는 여호와를 대신하여 말씀하는 아모스 선지자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벧엘을 찾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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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3
  • [김성수 총장] 고난 앞에서 음미해 보는 하박국의 노래
    세계행복 지수 순위를 보면 미국, 영국, 독일, 스위스와 같은 소위 선진국들 보다도 방글라데시, 피지, 바누아투, 콜롬비아, 코스타리카와 같은 나라들이 너 높게 나오고 있다. 이것은 행복이라는 것이 반드시 재산과 지식을 많이 소유하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재산과 지식이 많으면 오히려 스트레스와 근심을 더해 주기도 한다. 복지시설에 있는 지적장애인들이 오히려 걱정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이들이 건강한 머리결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가진 것이 많다고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박국의 노래는 바로 이런 문제에 대해서 명쾌한 설명을 해 주고 있다. 하박국 선지자가 기원전 7세기경에 하박국서를 기록했을 당시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제 상태가 좋지 못했다.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와 감람나무에 수확이 없고, 곡식의 수확도 없었다. 양과 소도 없었다. 이런 불행의 이유는 아마도 갈대아인들의 침공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의 침공으로 모든 것을 약탈당했고, 설상가상으로 기근까지 들었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을 참기는 좀 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잘 살던 사람들이 실패해서 겪게 되는 가난은 어떤 면에서 견디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스라엘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이때 하박국은 예기치 않은 반응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하박국의 노래다. 하박국이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라고 했다. 하박국 선지자에게는 모든 것이 없어졌을지라도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기뻐했다. 원수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었지만 하나님을 빼앗아갈 수는 없었다. 하박국의 노래가 위대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의 원천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진리를 가르쳐주고 있다. 경제적으로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는 기뻐할 수 있는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없어져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이다. 하박국이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으로 바로 알았기 때문이다. 하박국은 구약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심을 알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하나님은 광야생활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환난가운데서 인도하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다. 이방민족들의 침략을 당할 때 마다 하나님은 기적적인 도움의 손길로 이들을 구원해 주셨다. 하박국 선지자가 이 노래를 지었을 때도 갈대아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몹시도 괴롭혔다. 그래도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해 주실 것을 알았다. 이와 같은 확신 때문에 하박국은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라고 노래하고 있다. 사슴은 위험한 곳에서도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동물이다. 하박국은 지금은 비록 가난해도 구원의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시면 나를 사슴과 같이 가난과 고통과 온갖 위험 속에서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실 것을 믿었다. 하나님을 구원의 여호와로 알았기 때문에 모든 재산을 다 빼앗기고 빈 털털이가 되어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찬양할 수 있었다. 오늘 우리는 하박국 선지자보다도 구원의 하나님을 더 잘 알 수 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재신 하나님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흘려 기도하시고 갈보리 산 위에서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이룩하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도 알고 있다. 하박국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울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았지만 오늘 우리는 기록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의 하나님을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구약시대의 하박국 선지자보다도 구원의 하나님을 더 찬양할 수 있어야 한다. 하박국의 노래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진정한 소망과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라는 진리다. 곡식과 가축과 재물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는 것이 성도의 참된 기쁨이라는 사실이다. 신앙 생활을 한다고 어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성도들의 생활에도 어려움이 있다. 하박국 선지자에게는 극심한 가난의 어려움이 있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남에게 다 털어놓을 수도 없는 온갖 종류의 어려움들이 산적해 있다. 자식으로 인한 문제, 남편으로 인한 문제, 질병으로 인한 문제, 가난으로 인한 문제 등 앞이 캄캄할 정도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산적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구원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 그 분이 내 곁에 계시고, 내가 이 구원의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면 하박국 선지자가 노래한 그 하나님은 언젠가 나를 사슴과 같이 가볍게 높은 곳에 다닐 수 있게 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해야 한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구원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활을 지켜주실 것을 더 확신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셔서 더 큰 축복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비록 오늘 우리의 발걸음이 무거워도 내가 구원의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나의 발을 사슴의 발과 같이 가볍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현 Evangelia University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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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07
  • [김성수 총장] 하나님 앞에 기억되는 봉사
    10월 총회를 앞두고 각 교단들마다 총회에서 봉사할 주요 임원들 선거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면류관 벗어서 주 앞에 드리세”라고 찬송하면서도 자리에 오르기 위해 도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뜨겁게 달아오르는 선거 열풍을 느끼게 된다. 이 시점에서 우리 모두는 니고데모의 안경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기억되는 봉사”가 어떤 봉사인지를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호세아서 1장 1절에는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기록이 있다. 호세아 선지자는 남쪽 유다 출신이 아니라 북쪽 이스라엘 출신이다. 그가 활동했던 시대에 북쪽 이스라엘 왕국을 통치했던 왕들은 스가랴, 살룸, 므나헴, 브가히야, 베가, 호세아 등 여섯 왕들이었다. 그런데 선지자 호세아는 자신의 책을 기록하면서 자기 나라의 여섯 왕들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유다의 통치자들의 이름은 순서대로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 왕들 중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한 사람만 언급해도 충분하다고 간주하고 있다. 이들 여섯 왕들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아주 어두웠던 한 시대를 대표해 보여주고 있다. 이들 중 거의 대부분의 왕들은 한결같이 왕을 시해하는 대역죄를 범하기를 주저하지 않은 살인자들이었다. 이스라엘의 왕권은 공평과 정의가 그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왕권은 참된 왕 되신 하나님의 통치를 대표해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보좌에 대해서 아름다운 묘사를 하면서 의와 공평이 보좌의 기초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보좌를 표현할 때 항상 율법이 새겨진 두 비석이 들어있는 언약궤 위에 놓여 있는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신정국가의 왕들로서 하나님의 왕권의 옥쇄를 가지고 있는 들로 상징되는 이들 이스라엘 왕들은 완전히 반대적인 것을 대표해 보여주었는데, 이들의 보위가 모두 인간의 피로 얼룩진 기초위에 세워져 있었다. 이것이 아마도 호세아 선지자가 이들 권세 있는 왕들을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 이유였을 것이다. 호세아는 이들 왕들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이들 왕들의 행위가 하나님 나라에서는 완전히 무용지물이었기 때문이었다. 호세아 선지자가 이름을 언급하고 있는 왕들이 모두 경건한 왕들인 것은 아니다. 요담과 아하스는 불신앙으로 잘 알려져 있는 왕이었다. 호세아가 언급하고 있는 모든 왕들은 어떤 경건한 목적이든지 아니면 다른 목적으로든지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하나님을 “봉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심지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여로보암에게도 해당된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여섯 왕들은 심지어 “부정적인 방법”으로도 사용하지 않으셨다.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에게 완전히 쓸모가 없는 자들이었다. 의심할 나위 없이 이 모든 왕들은 자신들을 엄청난 위엄으로 치장한 자들이다. 이 모든 왕들은 야심에 찬 왕들이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위하여 “이름”을 내고자 노력하였으며, 이스라엘을 세계 권력의 자리에 올리고자 원했던 왕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단지 자기들 스스로를 위해서, 자기들 자신만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던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의 명성은 사라져 갔으며, 이들의 위대함도 잊혀 버린 것이다. 선지자에게 있어서 이들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그들의 통치 연대를 언급해야 할 만큼 중요하지 않았다. 이들 왕들은 아마도 자신들의 통치 시대가 역사책에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비중으로 기록되는 것을 보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 호세아는 이들을 침묵 속에 파묻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 이스라엘 왕들은 사실 언약의 백성들로서 아주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에 이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온전히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살았던 자들이었지 하나님의 봉사에 헌신하기를 결코 배우지 않은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험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존재한다. 물론 우리가 이들 여섯 왕들처럼 왕이 되기 위해 왕을 죽이거나 이들처럼 토색하는 자들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잘못 생각하기를 단지 공개적으로 인정된 악이나 죄인들만 하나님의 나라에서 제외되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지옥의 불에 알맞게 만드는 죄가 무엇인가? 그것은 “열매 없음”과 하나님 나라에 아무 “쓸모없음”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존경받는 사람들도 될 수 있고, 사람들 사이에 굉장한 명성을 즐길 수도 있다. 교회의 각 기관, 노회, 총회 활동에서 자신을 드러낼 수도 있고 인정받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목전에 이름 없는 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았는지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하며 우리 주님을 위해서 살았느냐 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은 자기 자신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관심을 갖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 자신들의 삶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내가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며 나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살고 있는지, 아니면 나 자신을 부인하며 주님을 위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성찰해 보아야 한다. 이러한 검토의 결과는 아주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위한 삶을 산다는 것은 단지 세상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불행하게도 주님을 위해서 산다고 하면서도 사실상 자신의 개인적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다. 사실상 인간의 마음보도도 더 악한 것은 없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 현 Evangelia University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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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23
  • [김성수 총장] 일상적인 삶과 그리스도인
    일상적인 삶과 그리스도인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주일 하루의 삶 또는 예배, 기도, 말씀, 전도, 구제와 같은 삶의 방식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유별난 삶이 아니라 일상적인 인간의 삶 속에서 영위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인간의 일상적인 문화와 사회적 삶으로부터 유리되거나 도피하는 삶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의 와중에서 영위되는 삶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교회와 같은 신앙 공동체 자체만의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이 영위되는 세상을 위한 삶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는 그 공동체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로 오신 것과 같이 세상을 향한 섬김과 봉사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므로 교회의 강단은 성도들로 하여금 현대 사회와 문화 속에서 신자로서의 삶을 영위해 갈 수 있도록 구비시켜 주어야 합니다. 성경은 세상을 그리스도인들이 거부하고 부정해야 할 어떤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이 세상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부정하는 죄의 광범위한 영역, 즉 “그리스도 밖에서 죄에 의해 지배되는 구원받지 못한 삶의 총체”를 의미합니다. 성경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세상은 항상 자신과는 별개의 실체로 저 멀리 바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속에도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적응적인 경향성을 보여서도 안 되지만 세상 도피적인 경향성을 추구하는 가운데 잘못된 경건성을 추구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세상 도피적인 경향성을 추구하는 것은 사회 속에서 문화적 순종의 기독교적 삶을 완전히 영위하지 못함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능하게 된 거듭난 삶은 세상 도피적인 삶이나 세상 적응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개별적인 삶을 통해서는 물론, 공동체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현재와 미래를 증거하는 증거적 삶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에는 항상 두 가지 위험성이 상존해 왔습니다. 첫째는 우상 숭배적인 세상 문화에 자신을 적응시키는 위험성이며, 둘째는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여 안락한 신앙의 삶을 살고자 시도하는 위험성입니다. 이 두 가지 시도 모두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문화 발전에 사랑과 열정과 공의를 추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문화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이와 같은 소명과 과업을 항상 복음의 조망 하에서 책임적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증거의 삶은 언어적인 복음 전도의 행위로 축소될 수 없습니다. 성경적 증거는 인간 삶의 전체 영역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그리스도인의 증거, 그리스도인의 직업과 그리스도인의 선교는모두 동일한 동전의 양면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증거는 이 세상 안에서 구현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는 기독교 신앙공동체가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공동체가 복음을 선포하고 문화적 갱신과 순종의 과업을 수용하고 수행하는 것은 세상 속의 삶과 유리된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의 삶을 통해서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인간의 일상생활과 관계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이웃을 봉사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종으로 섬겼듯이, 그의 백성들도 하나님과 동료 인간들을 봉사하고 섬기는 종들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동료들을 사랑으로 섬기면서 모든 구체적인 인간 삶의 노정에서, 그리고 오염된 인간 문명의 구조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이들은 곧 의복이 필요한 자들에게 의복을 나눠주며, 목마른 자들에게 물을 주고, 병든 자를 치료하며, 어려움을 당하는 영혼들에게 위안을 주며, 권력에 희생을 당하는 자들을 도와주며, 헛된 거짓 신들로부터 사람들을 자유케 해주며, 혼란한 세상 속에 진리의 빛을 비춰주며, 무지한 자들을 가르치며, 자유와 평강의 소망을 선포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현대사회의 그리스도들이 일상적인 삶 속에서, 그리고 일상적인 삶을 통해서 신앙을 구현하는 삶에 대한 관심은 필연적으로 사회 질서와 구조의 개혁에 대한 관심으로 인도될 수밖에 없습니다. 전통사회에서는 표본심리 메카니즘이 행위 선택의 가장 큰 결정요인인 반면에, 현대세계 체제의 동인이 작동되는 사회에서는 합리주의의 증가, 분화의 증가, 귀속주의의 감소, 가치일반화의 증가 등이 현대 사회의 미시구조의 특징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세속 사회의 구조에 더 많은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회 구조는 단순히 자연적 질서의 일부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결정에 의한 산물이며 인간의 협력과 노력에 의해서 변혁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몸담고 있는 사회질서를 개혁하기 위해 싸워야 할 책임은 제자도의 한 일면입니다. 이것은 종교 위에 부가되는 하나의 첨가물이 아니라 기독교 영성의 핵심에 있는 어떤 것임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 현 미국 Evangelia University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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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2-08-10
  • [김성수 총장] 시대정신과 기독교교육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이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탁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믿음의 용사로 양육하는 것은 모든 신자 부모들과 교사들이 소원하며 바라는 기도의 제목일 것 입니다. 언약의 자녀들을 하나님 나라의 승리하는 군사로 잘 양육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들이 어떠한 시대정신에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하고 있는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교육’은 언약의 자녀들을 온실 속에서 양육할 수가 없습니다. 이들을 세상 속으로 내어 보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 부모와 교사들은 우리의 자녀들이 자라면서 영향을 받고 있고, 또 이들이 앞으로 나아가서 살아야 할 세상이 어떤 시대 정신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는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무엇보다도 세속적 인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인본주의란 인간자율성을 절대화하고 인간의 무한정한 가능성을 강조하는 사상입니다. 인본주의는 피조물인 인간을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께 의존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독립적인 존재로 상정합니다. 인간이 인간 자신에게 스스로 법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본주의 사상은 21세기 사회에서 세속주의와 강하게 결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속주의란 기독교복음의 능력과 범위를 주변화 시키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기독교신앙은 정치나 과학, 그리고 교육과 같은 인간 삶의 핵심 영역에서는 반드시 말해야 할 어떤 메시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이 받고 있는 현대 학교교육은 철저하게 세속적이며 인본주의적인 교육입니다. 이런 교육을 통해서는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신앙 인격자로 함양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시대의 또 다른 한 사회문화적 특징은 이미 진부한 용어가 되어버린 용어이기도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로 설명 될 수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보편적 진리를 부인하며, 해체주의를 표방합니다. 해체란 무조건 파괴해 버리는 혼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이성의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는 경직되고 획일화된 사고를 반대하고, 그동안 이성에 밀려서 무시되어 왔던 감성, 비주류 등의 요소를 재조명하자는 것입니다. 이론화, 수식화에 치중하는 경향에서 벗어나서 좀 다른 요소들도 고려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양성을 찬양합니다. 이러한 사상적 흐름은 한번 유행했다가 사라져버리는 일시적 현상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 사상이 우리 시대를 어떠한 방향으로 인도해 갈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과 과학이 마치 인간을 구원하고 인간의 행복을 보장해 주는 절대적 조건인 것처럼 생각해 온 현대인들에게는 분명히 크나큰 의미와 도전을 주고 있는 사상적 흐름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결국 상대주의를 표방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세계관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관용하는 것은 상대주의라는 대가를 지불함으로서 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세계관을 순수하게 사회적인 구성물로 이해하기 때문에 모든 소리와 이야기들을 존중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진리를 주장하는 입장은 본질상 오만하며 억압적이며 타인에 대한 지배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절대적인 진리이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용납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교육의 전제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오늘의 시대 정신입니다. 이렇게 모든 가치가 상대화되어 버리고 초월적, 절대적인 가치가 사라진 자리에 가장 쉽게 자리잡을 수 있는 것은 물질주의와 쾌락주의라는 가치관입니다. 실제로 오늘 우리 사회의 문화는 물질주의와 현세적 쾌락주의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대사회는 폭력성과 퇴폐성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현대사회는 또한 정보와 지식에 의해 모든 것이 통제되는 지식정보사회입니다. 지식이 가장 중요한 자원이라는 점에서 ‘지식경제’라는 용어까지 등장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지식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정도를 넘어 지식의 폭발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비스럽게도 현대사회는 과학과 지식정보의 사회이면서도 동시에 이와 상반되는 주술적이며 신비주의적인 생활양식이 혼재하는 특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모습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과학, 그리고 진보에의 신념 등이 도전을 받기를 하지만 그렇게 쉽게 감성과 주관성 등에게 모든 자리를 양보해 버리지는 않아 보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세기는 한편으로는 과학기술의 힘이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도 동시에 신비주의적인 생활양식에 관심을 가지는 사회가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시대 정신은 전통적 가정을 중심으로 한 삶의 양식까지도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전통적 가치관이 도전을 받으면서 이전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삶의 방식들이 여기 저기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이미 그룹결혼을 포함해서 임시 “동거”, “시험결혼”, 혹은 “계약결혼”, 개방결혼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혼율이 급증하고 있으며 동성간의 “결혼”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독신주의와 딩크족의 증가, 그리고 성개방의 풍조는 불안한 가정, 병든 가정, 가정의 붕괴와 해체의 위험성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는 징조들입니다. 이러한 가정의 위기는 21세기 사회에 더욱 심각한 형태로 나타나면서 기독교교육이 직면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사고하고 행도하도록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오늘 우리 사회를 감싸고 있는 시대 정신을 분별하면서 우리의 자녀들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자녀들로 잘 양육할 수 있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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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27
  • [김성수 총장] 가치 중립적인 교육은 없다!
    교육에 관하여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교육이 본질상 가치중립적인(value-free) 활동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육이란 신앙이나 가치관과는 관계없이 중립적인(neutral) 과학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탐구하고 가르치는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학교는 객관적인 진리를 교육하는 기관이고, 교회는 영적이고 신앙적인 어떤 것을 심어주는 기관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교육한다는 것은 아동 및 청소년들을 어떤 목적을 향해 인도해 가고, 그들의 태도와 성향을 형성해 주고, 그들의 사상에 어떤 형태를 부여하는 활동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은 결코 가치중립적일 수가 없습니다. 교육이라는 활동은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우리의 관점, 교육의 대상인 인간에 대한 특정한 관점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교육은 신앙에 기초한 어떤 비전과 관점, 그리고 이러한 비전과 관점을 추구하고자 애쓰는 우리의 헌신과 노력에 이끌리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항상 종교적인 활동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라는 흥미롭고 인기 있던 영화가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학생 중심의 교육관과 내용중심의 교육관이 심각하게 충돌하고 있는 한 고등학교 학생들의 갈등을 폭로하였습니다. 이 영화에 대한 평론가들의 평가는 각자 달랐겠지만 영화를 어떻게 평가했든 간에 이 영화가 교육의 중요한 어떤 요소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는 그들 모두 한결 같이 동의하였습니다. 즉, 교육은 교육목적이나 과정을 결정하는 사람들이 가진 신념, 세계관 혹은 종교적 관점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는 그들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채 교육이 하나님이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대체하는 그 어떤 것을 경배하도록 한다는 성경적인 관점을 잘 증명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부모들까지도 그토록 신뢰하는 공립학교는 겉으로는 종교적 중립을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인간을 중심에 두어 인간이 진리와 실체의 궁극적인 결정자라고 강조하는 교육구조나 교육과정을 엄격하게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기독교인들은 공교육의 종교적 우상을 드러내면서 아테네에서의 바울처럼 교육활동의 참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공립학교 교육자들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일방적으로 공립학교교육에서 숭배하는 대상, 그리고 그들의 학생들에게 숭배하도록 할 대상을 정해 줄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경배의 대상을 선택할 권리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허락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선택의 권리를 빼앗고 개종을 강요하는 것은 각자 자신 나름대로의 도덕적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개인의 권리와 책임을 부인하는 셈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교회교육과 학교교육은 물론, 우리의 자녀들을 위한 모든 교육이 ‘하나님의 나라’의 비전과 관점에 의해서 인도되면 정말 좋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교육을 이끌어 가는 비전과 관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중심 주제가 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교육은 하나님 백성의 구원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전 창조세계를 향한 그 분의 언약이 말씀 그대로 실현되도록 하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성취하는 일에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이 되셔서 다스리시는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분이실 뿐만 아니라 정치와 문화와 사업과 교육을 포함한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다스리시는 유일하게 참된 왕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교육의 영역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해 가고자 하는 비전을 가지고 이 왕국 비전(Kingdom vision)의 구현을 위해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 분의 죽으심과 생명의 부활로 이미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 완전한 형태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은, 우리의 결점과 죄에도 불구하고 이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이미 여기에 심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교육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심어져 있지만 앞으로 온전히 성취되어질 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도록 우리의 자녀들에게 도전을 주고 이들을 준비시키는 활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기독교 학교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표지(signpost)가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 학교는 세속 사회 속에서 존재하는 그 자체로, 그리고 더 적극적으로는 모든 교육활동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증진함으로써, 하나님이 우리 삶의 주권자이시며, 그리스도께서 구속자이자 주님이심을 증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탄은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선포하는 모든 기관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보다 더 크신 능력을 가지시고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도록’ 우리 안에서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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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2-07-14
  • [김성수 총장] 교육의 삼각 받침대
    우리 자녀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들이 많이 있지만 전통적인 기관으로는 가정과 교회와 학교를 손꼽을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정은 아마도 자녀 교육의 가장 중요한 기관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녀 양육의 명령을 첫째로 부모에게 내리십니다. 사도 바울은 주의 교양과 훈계로 부모들이 자녀들을 잘 양육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엡6:4). 우리의 자녀들은 사랑과 훈육이라는 안정된 가정환경 속에 있을 때,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능력을 경험하고 발전시켜갈 수 있습니다. 부모들은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방식과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가정교육은 비형식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매일의 상호 작용과 토론, 예배, 허드렛일 분담, 함께 외출하기 등과 같은 일상적인 삶의 방식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부모가 매일의 가정생활을 꾸려가는 방식으로부터 배우게 됩니다. 기독교적 양육과 교육의 책임을 지고 있는 두 번째 기관은 교회입니다. 교회의 가르치는 사역은 사도행전에 강조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모두,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를 통해 일하시고, 또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성취하셨는가를 가르쳤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책임을 온전히 감당하는 헌신과 사역에 대해서도 가르쳐야 합니다. 교회의 교육이 회심이나 신앙고백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구성원들을 하나님 말씀의 초보적 진리로부터 더욱 깊이 있는 자리로 나아가도록 가르쳐야 하고, 계속해서 신앙적 삶의 실천으로 인도해 가야 합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자녀를 양육하라는 명령은 가정과 교회를 훨씬 넘어서는 사역입니다. 현대 사회는 대단히 복잡해서 가정과 일상적인 교회 교육 프로그램만으로는 언약의 자녀들에게 충분한 교육을 제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와 같은 제도교육은 필수적인 교육기관이 되었고 엄청난 영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가정과 교회가 사회 속에 속속들이 침투해 있는 세속적 문화에 홀로 맞서서 교육의 과업을 수행하기는 어렵습니다. 오늘날 부모님들은 학교교육에 대하여 엄청난 신뢰와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가치 있는 모든 지식은 학교교육을 통하여 획득된다고 생각하고 있고, 학교교육을 사회적 성공이라는 문을 열수 있는 황금 열쇠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학교교육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정말 엄청난 효과를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학교교육은 부모님들이 생각하고 있는 만큼 그렇게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학교교육이 많은 허상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수많은 교육학자들에 의해서 지적되어 왔습니다. 제도교육에 대한 부모들의 신뢰와 기대는 허상이며 신화일 뿐이라는 비판은 이미 60년대부터 제기되어 왔습니다. 현대 교육은 그 기초를 이루고 있는 기본적인 교육철학에 있어서 철저하게 인본주의적이며 때로는 반 기독교적이기까지 합니다. 인간의 욕구와 경험, 자유, 행복, 이성, 자율성 등이 현대 교육의 이론과 실제를 지배하고 있는 중추적인 개념들입니다. 인간의 문제는 더 이상 초월적인 절대자에게 의존함으로써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지성을 발휘하고 이성의 능력을 활용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는 철학 위에 오늘날의 학교 교육이 기초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교육철학은 절대적인 가치와 진리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현대교육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종교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동물과의 연속선상에서 행동을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현대 학습 이론은 이러한 인간관을 기본적인 전제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창조, 타락, 구속의 성경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선하고 자유롭고 자율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 현대 교육의 특징입니다. 현대의 학교교육은 심지어 반 신앙적인 경향성까지 띄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자녀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공립학교 교육에는 성경교육이 전혀 없는 상태입니다. 학교교육의 세속화는 아주 위험한 상황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교육의 세속화는 아동의 신앙 인격 형성에 막대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런 세속화된 교육을 통해서는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이 더 이상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 교사들을 필요로 하며 이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가정과 교회와 학교는 성령의 불꽃과 하나님 말씀의 기초 위에 굳게 서 있는 교육의 삼각 받침대를 구성해야 합니다. 가정과학교와 교회라는 이 세 기관은 모두 우리의 자녀들이 그리스도인답게 살도록 준비시키기 위해 함께 협조해야 합니다. 만약 이 삼각 받침대중 학교라는 받침대가 다른 기반 위에 서 있다면, 우리의 자녀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균형을 잡기가 어렵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학교는 가정이나 교회를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가정은 학교가 담당하는 공식 교육을 위해 필수적인 기초를 제공해 주는 중요한 교육기관입니다. 우리는 가정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이 화목하면서 부모님들이 기도와 말씀 생활의 모범을 보이고 언약의 자녀들을 축복의 길로 인도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또 교회가 교육적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대안교육과 기독교학교교육에 헌신하는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물질로 후원해 주어야 합니다. 가정과 교회와 학교가 하나님의 말씀에 확고한 기반을 두는 삼각 받침대를 형성하여 하나님 나라의 일꾼을 양성하는데 협력하게 되면 교육의 영역에도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고 확장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현 미국 Evangelia University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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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2-06-28
  • [김성수 총장] 문화변혁을 위한 그리스도인
    오늘 우리 사회를 거듭난 심령을 가진 니고데모의 안경을 통해 바라보면서 저는 우리 사회의 문화 전반이 우리가 믿고 전파하는 복음으로 좀 바뀌어 졌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램을 가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최근 주요 언론의 사회면에 연일 보도되고 있는 아동학대, 성폭행, 패거린 정치 행태 등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들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이 우리 사회의 어두운 구석구석을 좀 밝혀주고 바꾸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램을 갖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와 오늘을 비교해 보면 교회당 수나 교인 수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교회당 수와 교인 수의 증가에 비례하여 부정과 부패가 줄어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오히려 더 악해진 것 같고 어두움은 더 깊어만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수는 많지만 우리 삶의 정치와 경제와 교육과 문화 등 인간 삶의 핵심영역을 복음의 능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나도 소수인 것 같고 그 영향력도 아주 미미한 것 같습니다.  미국의 경우도 보면, 미국인의 절대 다수가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또 많은 사람들이 복음주의 교회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미국 사회 전반에 걸쳐 기독교 신념과 가치관은 현저하게 감소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미국의 대도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보면 하나님의 존재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텔레비전이나 영화, 신문, 잡지들을 보면 마치 복음이 전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해도 그저 낯설고 미미하게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복음의 영향력이 이렇게 미미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한 가지 이유는 문화변혁적 그리스도인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주요 대학교에서 가르치거나 텔레비전 혹은 영화 산업에서 일하거나, 주요 일간지에 글을 쓰거나, 방송 매체에 참여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의 비율은 겨우 3퍼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문화와 사회의 주요 유형들은 거의 그리스도인이 부재한 현실 속에서 형성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와 문화에 뭔가 영향력을 미치려고 하면, 다른 누군가가 이미 제안하고 만들어 놓은 것에 대해 비판하는 부정적인 반응만 하게 되는 경우가 비일 비재하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책이나 영화가 기독교 신앙을 비하시키면 우리는 그것을 비기독교적인 것이라고 비판하고 보이코트하는 운동을 펼칩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방식은 우리 자신들을 더욱더 우리만의 폐쇄적인 껍질 속으로 밀어 넣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왜 이렇게 부정적인 대응방식에 익숙해져 가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에게는 내어 놓을 만한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공동체는 우리의 사회 문화적인 현실에 대해 이제 보다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대처하고 대안을 제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어둡다고 불평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촛불을 밝힌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사회가 어둡다고 불평은 엄청나게 하면서도 촛불은 거의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흑암이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기독교 공동체 안에는 그리스도와 문화를 대립적인 관계로 인식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과업은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활동을 수행하는 것 외에는 복음을 선포하고 자비를 행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문화를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어거스틴(St. Augustine) 역시 인간은 이 변화무상한 세상으로부터 눈을 돌려서, 가능한 한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영원불변한 하나님에게만 시선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은 문화가 이방 신상 앞에 바쳐지는 방식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문화를 그리스도에게 다시금 바쳐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가장 기본적인 문화적 활동 외에는 모든 문화적 활동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분리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문화의 관계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동산을 다스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문화 명령을 무효화 시키지 않고 오히려 보완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세계 전체를 하나님의 원래 의도대로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모든 창조 세계를 다스리는 권위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구속 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문화적 과업의 전체 범위에서 하나님을 봉사하는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 우리는‘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나 ‘문화와 그리스도’가 아니라 ‘문화를 통한 그리스도’를 추구해야 합니다.  이제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대응 방식의 흐름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복음은 진정으로 생명력이 있고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변화시킬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음을 입증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저는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을 세상의 탁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문화변혁적 일꾼들로 기를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수동적으로 죄를 피하려는 데만 관심을 갖는 자녀들이 아니라, 보다 더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자녀들로 양육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이 경기 규칙을 위반하지 않으려고 안전한 플레이만 하다가, 그만 졸전을 벌이고 마는 자녀들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을 가지고 세상을 바꾸어가는 십자가 군병들로 양육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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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14
  • [김성수 총장] 나그네 인생
    우리는 종종 이 세상은 우리의 본향이 아니요, 우리는 그저 나그네 인생을 살 뿐이라는 말을 합니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라는 노래도 한 때 유행을 했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발붙이지 않고 나그네 인생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아브라함과 신앙의 열조들이 이 땅에서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히 11:9). 아브라함도 헤브론에 있는 헷 족속에게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창 23:4)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약속의 땅 가나안 아브라함의 ‘우거하는 땅’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창 17:8). 이 땅은 또한 이삭과 야곱이 우거하는 땅이기도 했습니다(창 28:4, 37:1). 우리도 이들을 모범으로 삼고 영원한 하늘나라의 상급을 생각하며 짧은 인생 나그네처럼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그네처럼 사는 삶이란 어떤 모습일까요? 이 땅은 허망한 것이니 오직 영원한 하늘 나라만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삶일까요? 나그네 삶을 살았던 아브라함과 열조들이 언제나 소위 내세의 영적인 문제에만 사로잡혀 생활 했을까요? 아브라함의 가슴을 환희와 즐거움으로 채워준 위대한 약속이 단지 하나님과 천군 천사들과 더불어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것뿐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누렸던 축복은 오히려 땅의 기름진 축복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12장에서 이 내용을 잘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은 이 지구 전체 모든 족속을 향한 큰 축복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생육하고 번창하여 큰 민족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실제로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축복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이 왜 이 땅에서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성경은 약간의 대답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창 12:6)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에 이미 거하고 있던 시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나안 족속들의 죄악과 사악함이 이미 하늘에 들렸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 땅의 거민들과는 거리를 두고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가나안 거민들은 결국 이 약속의 땅에서 물러가야 하는데 아직 그런 때가 되지 않았기에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은 그들 가운데 거하면서도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아모리 족속이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않았던 것입니다(창 15:16). 가나안 족속이 약속의 땅에 살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았다고 한다면 다윗의 시대에는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다윗이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때에 드린 그의 아름다운 기도를 생각해 봅시다: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대상 29:15). 여호수아와 사사기의 기록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하여 가나안 사람들 가운데 거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시대에도 가나안 족속들이 아직도 그 땅에 있었기 때문에 다윗은 왕으로서의 모든 권리와 축복을 누리면서도 자신을 열조와 다름없이 나그네요 우거한 자로 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아가는 이 삶이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들의 신분이어야 합니까?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이 땅은 나의 본향이 아니다”라고 노래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만을 소망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일까요? 우리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은 유혹을 받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살지 않았느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8:20)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우리도 본향을 사모하며 이 땅에서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창조 세계의 회복을 소망하고 도래할 새 예루살렘과 새 땅을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다른 질문을 해 보아야 합니다. 산업화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아직도 가나안 사람들 가운데 우거하고 있는가?”라고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제는 가나안 사람들 가운데 살지 않으니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인종적으로 가나안 사람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할까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종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또는 문화적으로 셈, 함, 야벳 족속을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세계는 지금 국제결혼과 문화적 교류, 그리고 세계화를 통해서 하나가 되는 지구촌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가나안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종적으로나 지리적인 구분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가나안 사람들에 저주가 임하도록 기도할 수 없습니다. 대신에 우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명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과업은 인종적으로 가나안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땅 끝까지 모든 민족과 방언과 모든 족속들을 향해 하나님 나라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세상 모든 족속과 민족과 방언을 향해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나그네요 우거자라는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야 합니다. 인종적으로 가나안인 민족들을 향해서 저주하거나 미워하거나 두려워하는 삶이 아니라 구원과 용서와 사랑을 주기 위한 그리스도의 초대를 선포하면서 다가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들을 이미 우리에게 임했고 앞으로 온전히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도록 초대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함께 죄악된 삶의 영역에서 본토인이 아니라 진정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면서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진정한 왕이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땅 끝까지 선포하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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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31
  • [김성수 총장]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
    성경적 세계관의 한 특징은 창조와 타락과 구속의 의미를 우주적, 포괄적, 보편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해 보면, “창조의 지평은 타락의 지평이며 그것은 곧 구속의 지평”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의 결과이며, 인간의 타락은 이 모든 것에 영향을 미쳤고, 그리스도의 구속은 이 모든 것을 새롭게 회복한다는 것입니다. 창조 세계의 그 어떤 것도 인간 타락의 범위밖에 있지 않습니다. 오염된 물이 깨끗한 연못을 오염시키듯이, 타락의 유해한 영향은 창조 세계의 모든 영역을 더럽혔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 곳에서 세상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이 아니라는 그것이니라.”(약 1:27).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벧후2:20).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그런데, 문제는 이런 성경 구절들을 잘못 이해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의 ‘세속적인’ 생활 양식에 대한 거부를 마치 ‘타계적’(他界的)인 생활 양식을 권면하는 것처럼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범주에 기본적으로 교회, 개인적 경건, 그리고 ‘거룩한 신학’으로 이루어지는 ‘성스러운’ 영역 밖에 있는 모든 것을 포함시켜서 창조 세계를 소위 ‘거룩한 영역’과 ‘세속인 영역’으로 잘못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많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세속적인’ 영역들을 세속주의적 세력에 내어 주게 만들었습니다. 월터스(Albert Wolters)의 지적과 같이 이런 ‘두 영역 이론’에 물든 교회야말로 서구의 급속한 세속화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장본인이라는 비판을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만일 정치와 산업, 예술, 언론을 본질적으로 ‘세속적’, ‘세상적’, ‘속된’ 영역으로, 또 ‘자연적 영역’의 일부로만 낙인 찍는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문화에서 인본주의의 물결을 더 이상 효과적으로 막아 내지 못하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적인 문제는 이들 성경 본문에서 말하는 세상(world)이라는 용어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세상이라는 용어는 성경에서 실제로 여러 가지의 상이한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세상은 우주(universe), 육지(earth), 사람이 거주하는 지구(inhabited earth) 또는 지구의 대부분의 사람들(most people on the earth)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부정적인 의미의 세상은 신학자 헤르만 리델보스가 말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 밖에서 죄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구속되지 못한 삶의 총체”(the totality of unredeemed life dominated by sin outside of Christ)를 의미합니다. 인간의 죄성이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굽게 하거나 비틀거나 왜곡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세상이라는 의미입니다. 부정적인 의미의 세상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에 오염되어 있는 창조 세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오염되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라는 것은 일부 크리스챤들, 예컨대 애미쉬(Amish)와 같은 일부 수도사들이 하는 것처럼 사회로부터 은둔하는 삶을 살거나 문화와 접촉을 최소화 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창조 세계를 왜곡시킨 모든 것을 인식하고 여기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저항하면서 사회를 변혁시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적 세계관은 마치 종교가 개인구원의 문제와 같이 하나님과 관련된 인간의 사적 생활에만 관계가 있고, 인간과 인간의 사회 관계와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종교와 사회 생활이 분리될 수 있다고 결코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적 관점은 개인 생활은 물론 사회 생활 전체가 하나님께 속하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임무는 사회에 완전히 속한 자로서의 삶을 살거나, 아니면 사회로부터 절연된 금욕적인 수도자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회 생활의 소용돌이 한 복판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누리고 즐기며 살아가되 그리스도의 통치권을 높이며, 복음의 변화시키는 능력이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누룩과 같이 내부로부터 나타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삶의 양태를 종교개혁자들은 한 마디로 “우리는 이 세상 속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은 아니다”(We are 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과 다른 여러 가지의 가정적 미덕들, 자신이 할 일에 충실하는 것, 우애, 충성, 검소, 정직 등과 같은 수많은 사회적 미덕들은 사실상 그리스도인들이 사회변혁적인 삶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방법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독특한 달란트를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가능한 한 최고 정도까지 개발할 소명과 특권, 책임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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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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