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학교에서 배울 때 세계는 ‘5대양 6대주’로 이루어졌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5대양 7대주’라고 한다. 그 일곱 번째 대륙은 ‘사이버 대륙’ 즉 과학문명과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서 온라인 상에서 이루어지는 그 가상공간이 일곱 번째 대륙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는 컴퓨터의 발달로 전 세계를 하나로 묶을 수 있게 되었다. 온라인 주소가 ‘WWW’ 이렇게 시작을 하는데 <World Wide Web>의 약자이다.
스마트폰이 발달되면서 생긴 신조어 중에 하나가 바로 인플루언서(Influencer)이다. 인플루언서는 사회나 대중에게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2004년에 페이스북이 시작되었고, 2006년에 유튜브, 그리고 2010년에 시작된 인스타그램 등 다양한 SNS(Social Networking Service)들이 활성화 되었다. 한 사람의 파급효과는 실로 어머어마하게 커져 버렸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와 성도의 영향력이 궁금해진다. 한국교회 초창기에는 교회와 성도의 역할이 실로 대단했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민족대표 33인 중에서 16명이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 당시 기독교인이 전 국민의 1.6% 라고 한다. 그렇지만 한국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였다. 또한 만세운동 일어났던 지역의 75%가 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기독교는 실로 한국의 근대화를 이끈 일등공신이었다.
성경 속에 한 사람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사건들이 많다. (왕상18:17)에 “엘리야를 볼 때에 아합이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엘리야를 만난 아합 왕의 첫 마디이다. 가뭄의 원인을 엘리야 때문이라고 외치고 있다. 정작 가뭄의 원인은 아합의 우상숭배였지만, 아합의 생각에는 엘리야 한 사람 때문에 온 이스라엘이 괴롭다는 의미이다.
다음 구절은 더 놀랍다. (왕상18:18)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왕 앞에서 그의 잘못을 조목조목 들추는 엘리야에게 왕보다 더 큰 권세가 느껴진다.
신약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말씀이 보인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반대자들에게 고발이 되어서 벨릭스 각하 앞에 서게 된다. 이 때 바울을 향한 반대자들의 고발 내용이 이렇다. (행전24:5)에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오늘날 한국의 교회와 목회자들이 세상으로부터 이런 평가를 받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는 코로나 전염병을 겪어보았다. 지금도 전염병이 무섭지만 바이러스의 정체를 모르던 옛날에는 어떠했을까?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삽시간에 퍼지고 사람들은 공포 속에 죽어갔다. 그런데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눈에는 바울이 악성 바이러스 전파자와 다를 바 없었다.
유대인들에게는 바울을 통해 전파되는 복음이 전염병이 퍼지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 당시 바울 한 사람이 전파한 복음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짐작하게 하는 표현이다. 바울을 그냥 내버려 두면 바울이 돌아다니는 곳마다 복음이 전염병처럼 전파되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바울의 영향력에 대한 공정한 평가이다. 고발자의 입장에서는 바울은 당장 처단해야 할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의 입장에서 보면 바울은 본받아야 할 모델임에 틀림이 없다.
프랑스의 한 귀족이 영국을 여행하던 중 한 상점에서 맥주를 사려고 했다. 그러나 그 상점에서는 맥주를 팔지 않았다. 다른 상점을 찾았으나 그곳에서도 역시 맥주를 팔지 않았다. 여러 가게를 찾아다녔지만 맥주를 구할 수 없었다. 귀족은 길가에 있는 한 농부에게 물었다. “왜 이 마을에는 맥주를 팔지 않습니까?” 그러자 농부는 “100년 전 요한 웨슬리가 우리 마을에서 한 주간 부흥회를 했는데 그 이후로 지금까지 우리 마을에는 맥주를 팔지 않습니다” 라고 대답을 하였다. 이 글을 읽는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