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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7)- 관언유착(官言癒着)
언론이 독자들이나 대중들에게 주는 영향이 크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사실이 아닌 잘못된 기사나 중심을 잃은 기사는 많은 사람에게 혼란을 줍니다.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몇 해 전 우리 노회에서 모 목사를 순회 선교사로 파송한다고 기독교보에 기사가 올랐습니다. KPM 이사장과 담당자들이 파송 예배에 순서를 맡으며 파송 예배 사진까지 첨부하여 누가 봐도 총회에서, KPM에서 파송하는 선교사처럼 대문짝만하게 기사를 올렸습니다. 노회 파송 선교사도 아닌데 과장된 허위 기사를 올릴 수 있느냐고 기독교보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몇 주 후 신문 구석 어느 페이지에 짧은 한 줄로 000교회 순회 파송 선교사로 정정한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습니다. 그 기사를 본 대부분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은 KPM 파송 선교사로 알고 있습니다. 짤막한 정정 기사가 났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도 “부산서부노회 파송 선교사냐?”고 물어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선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KPM이나 노회에서 파송한 선교사처럼 위장을 하고 그것을 교단 신문인 기독교보에까지 기사화한 것은 그 저의를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디 이 한 건뿐이겠습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이 발생하여 총대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거짓된 걸음을 걷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 심히 우려됩니다. 기독교보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할 것입니다. 기독교보가 KPM 선교사로 파송하는 기본도 모른다는 것은 몰랐다고 하는 말 자체가 거짓말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의 파장도 결코 간과할 수 없지만, 신앙과 교리, 교회와 개인의 인권에 대한 의도적인 허위 기사는 고신 신앙 전체를 흔들 수 있는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문제는 고신 언론사는 총회 유지재단 이사회에서 관리하는 기관입니다. 유지재단 이사회는 총회장을 당연직 이사장으로 해서 총회 기관 중 최상위 기관으로 총회를 잘 알고, 총대들의 지지를 받아 총회 산하 교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감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유지재단 이사회가 직무유기 한 것입니다. 학원 이사들이 잘못할 때만 소환할 것이 아니라 유지재단 이사회가 잘못할 때는 그 파장은 훨씬 더 크고 중요하기에 반드시 소환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독교보가 총회 기관지인지, 유지재단 이사회 관할에 있는 기관지인지, 기독교보 자체 언론지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된다고 입을 모읍니다. 언론사 사장 얼굴이 기독교보에 빠지는 일이 없자 이 일에 대해서 총대들은 물론이요, 유지재단 이사회에서도 지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과는 마이동풍입니다. 순교 정신을 기본으로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모토로 하는 고신의 기관지인 기독교보가 본류의 신앙을 이탈한 것은 이미 옛말이고 특정 계파에 포진한 자들이 기고하는 재고 되어야 할 지나친 인문학적 논의와 신앙 고백적 정체성을 벗어난 잘못된 사상들이나 도배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고신 신앙을 가진 목회자들과 장로들, 교회들은 알게 모르게 기독교보에 대한 불신으로 불매 운동을 하고 있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입니다. 5월 2일 자 코람데오닷컴에 “교계 언론 편집 책임자의 이학규 장로 고소 건, 고검 재정 심사에서도 또다시 기각 판결”이라는 기사가 올랐습니다.(코람데오닷컴 참조) 이 사건의 실상은 전국 남전도회 임원으로 있는 모 장로님이 유지재단 이사로 출마하려고 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웠는데 그해에 언론사 사장 선거가 있어 보수 측 인사가 유지재단 이사가 되면 사장이 되는 길에 장애가 될 것 같아 코람데오닷컴의 기사대로 언론사의 직원이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운 장로를 “사퇴 종용”했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총회 산하 교회를 잘 돌아보고, 총회의 기관들을 바르게 잘 관리해야 하는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시작부터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일반 총대들은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는 계파와 개인의 이권과 자리가 그 배경이 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재미를 본 자들은 이제 총회에서 골치 아프게 투표하고 경쟁하는 것보다 아예 노회 총대를 조정하는 기가 찬 수법으로 발전했습니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계파에 표를 던질 사람을 골라서 총대라는 자리로 매관매직을 하고, 각 노회 지도급에 있는 목사 장로들을 총회 상임위의 자리로 매관매직해서 4월 노회 총대 선거가 끝나면 이미 상황이 종료되는 모양새로 발전되었습니다. 이학규 장로가 전국 남전도회 회장으로 봉직하고 있을 때 함께 임원으로 봉사하던 모 장로가 “사퇴를 종용”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항의한 것이 코람데오닷컴 에 기사 실린 것과 같은 결과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평생 법 없이도, 법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사는 목사, 장로가 이 일로 인하여 교회 생활이나 신앙생활에 방해를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경찰서와 법원으로 불려 다니며 고초를 겪고 어려움을 당했던 것에 대해서 고신 언론사를 관리하는 유지재단의 총회장과 목사, 장로 이사들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 궁금합니다. 왜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말입니다. 이학규 장로는 신앙적으로 잘 해결하고자 언론사의 불법 선거 개입 못 하게 해달라는 진정서를 총회 선관위에 제출했더니 총대가 아니라 진정서를 접수하지 못한다고 하더랍니다. 참 훌륭한 총회 선거관리 위원회이십니다. 그래서 “여기 보냈다, 저기 보냈다” 서류 핑퐁 게임을 하다가 결국 사법기관에 판단을 받기까지 하면서 이학규 장로가 당한 심적 피해, 정신적 피해, 일상 업무 손해의 피해는 누가 보상해줍니까? 고신총회가 이렇게 기본을 상실하고 무책임하게 하면 안 됩니다. 펜은 검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오보도 문제이지만, 언론이, 신문이 의도적이고 사욕에 치우쳐 고신의 정체성에 위배 되는 글이나 기사를 올리고, 무책임으로 일관할 때 고신총회 산하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미치는 파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총회 임원회와 학원이사회가 지난 총회 시 총대들을 속이고 총장선출 규정을 통과시켜 불법으로 총장을 선임했다고 신문에 기사화되어도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볼 때, 총회 임원회의 수장인 총회장이 유지재단의 당연직 이사장이기에 이 사실조차 그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게다가 현 총회장은 기독교보 발행인이 아니기에 변명하며 피해갈 수 있는 좋은 길도 열려 있습니다.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재정적인 문제는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릅니다. “반려동물을 장례식”에 대한 안건이 고신총회 신학부에서 재론되고, 어떻게 고신총회에서 “그따위 안건이 거론되느냐”는 회원들의 호통에 경남노회 모 회원이 나와 옹호 발언을 하며 “지난달에 우리 찐이(고양이)가 죽어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하늘나라로 보내줬다”고 말을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총회가 불건전하고 이단성이 있어 교류를 금지해도 전혀 문제의식 없이 그런 모임에 참여하고, 순서나 자리까지 맡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는 300M 거리를 유지해야 하지만 이전하는 것은 법에 명시가 없기에 괜찮다고 하는 고신입니다. 핑퐁 게임을 하다하다 안되면 법리해석을 문제 삼아 법제위에 해석을 요청하여 본질을 잊어버리게 하고 계파싸움 진영싸움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고신입니다. 양파도 아니고 벗겨도 벗겨도 끝이 없는 고신이여...... 언론은 “言路”를 여는 것입니다. 言路가 막히면 세상은 암흑세계나 다름없습니다. 한 마리의 개가 먼저 짖으면 온 동네 개가 때지어 짖어대듯이 기독교보가 먼저 총대를 메고 총회 여러 현안의 심각성을 알리면 동시에 총회 여러 곳에서 포문을 열고 동참할 것입니다. 언론은 여론을 집약하고 전문가들의 진단과 의견을 수렴하거나 민심을 파악한 후 사안에 따라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로 펜 끝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언론의 사명입니다. 총회 성도들을 대신해서 할 말을 하며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선도해야 합니다. 독선의 권력을 향한 비판은 언론이 지향해야 할 우선순위이자 언론 존재 이유입니다. 이 가치관이 상실되면 결국 관언유착(官言癒着)이 되기 쉽고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관제언론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사리사욕에 길들어서 소위 ‘독선과 권력’의 ‘종’이 된다면 스스로 펜을 손에서 내려놓아야 함은 불문가지입니다. 기독교보가 그렇게 길들어진 “관보(官報)”라는 비판을 듣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집을 지키기 위해 열심 짖어야 할 개가 요즘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주인 행세를 한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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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6 : 성가대와 찬양대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평생을 예배드리면서도 때로는 이 말이 옳은가 틀리는가에 대한 의문이 되는 용어들이 많다. 본 기고의 목적이 이를 바로 알고 사용하자는 취지에서 계속 기고하지만, 필자 자신도 때로는 헷갈릴 때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예배 중의 순서에서 찬양대인가 성가대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통합 측 총회에서는 찬양대라고 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수많은 교회들이 성가대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는 여기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성가대(聖歌隊)와 찬양대(讚揚隊)의 용어 차이 두 용어는 일반적으로 보면 거의 같은 말이다. 국어사전에도 성가대는 “교회 등에서 성가를 부르기 위해서 조직된 합창대”라고 했고, 찬양대도 “남녀 기독교 신자로 조직된 합창대”로 둘 다 영어로도 ‘choirs’로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같은 듯 다른 용어이다.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성가와 성가대란? : 먼저 일반적으로 성가라는 용어는 범(凡) 종교적으로 사용하는 말로서 일반적인 음악과는 다른 거룩한 음악이란 뜻이다. 그래서 성가는 범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는 ‘종교음악’으로서 세속적인 노래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의 찬불가는 불교의 성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 용어가 전혀 언급이 없다. 오직 찬양 혹은 찬송으로 표현되어 있다. 2. 찬양과 찬양대란? : 찬양이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으로서 참된 경건의 중요한 요소이다. 즉 찬양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성육신과 십자가 지심과 부활, 종말과 재림 등의 구속의 은혜를 노래하는 것이 찬양이고 또 함께 부르는 것이 찬양대인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가진 찬양은 개역성경에는 213회, 찬송은 98회, 찬미는 14회가 나온다. 하지만 성가란 말은 한 곳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찬양은 일반 종교의 성가와는 차원이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만을 높이는 노래인 것이다. 3. 성가와 성가대란 말을 교회에서 사용해 온 이유는? : 왜 성경에도 없는 이 용어를 그동안 교회에서 사용해 왔을까? 그 이유는 1976년에 나온 공동 번역 성경에서 개역성경의 “노래하는 자”, “성가대”로 12회에 걸쳐 번역을 했다. 또 하나의 성가대란 용어의 기원은 한 출판사가 흑인 영가의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곡집”이라 부른 것이 성가대의 이름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의 ‘세이까다이’(성가대 せいかたい, 일본 사람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며 노래할 때 쓰는 용어)가 직수입되면서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서 그동안 찬양대라고 했던 용어가 성가대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성가대란 말은 일본어의 잔재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가대란 말은 1958년 출판된 동아출판사 사전에도 성가대란 명칭이 없었으나 1994년 민중서관의 국어사전에서 처음 등재되었고 그 이전에는 성가대라는 말이 고정되어 사용되는 곳은 일본의 ‘세이까다이’뿐이었다. III. 결론과 제언 앞서 서론에서 밝힌 대로 성가대와 찬앙대라는 말은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동안 큰 문제 없이 사용해 왔기 때문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성경에도 없는 말이며, 일본어의 잔재라는 문제도 있다고 볼 때, 또한 타 종교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굳이 성가대란 말을 계속 사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성경에도 없는 성가나 성가대란 말보다는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사용해 왔던 찬양, 찬양대란 우리 고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올바른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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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성경의 큰 그림과 안식(1)
1)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창조되었다(창1:26~28).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일 때 가장 행복하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안식한다. 사람은 창조 되자마자 안식을 살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함께 안식하시려고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을 완벽하게 창조하셨다. 완벽이 무엇인가? 완벽하다는 말이 단순하게 세상을 좋고, 아름답게 창조했다는 말로만 보아선 안 된다. 물론 그런 뜻도 있다. 그러나 완벽하게 창조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상태를 말한다. 비 인격체인 피조물이 완벽할 수 있는 것은 인격체인 사람이 완벽할 때 완벽할 수 있다. 모든 피조물들이 사람의 손에 주어졌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하나님과 동일시 될 때 완벽하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하게 세상을 창조하셨다.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였고 완벽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로 완벽했다. 그래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 되게 하신 일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 될 때 완벽하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임마누엘을 이루시는 날 우리는 하나 되었다. 완벽 해졌다. 회복된 날이다. 하나님의 완전함 같이 우리도 완전해졌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고 하셨다. 안식을 말한다. 완전함을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임을 알 때 완전하다. 또 이것이 행복이고 안식이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 이것을 보고 안식의 삶이라고 한다. 완벽하기 때문에 더 이상 무엇을 보텔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안식은 피곤해서 안식하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어 안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고 완벽하기에 안식이다. 점이라도 하나 더 찍으면 작품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붓을 놓는 화가처럼 완벽하고 부족함이 없어 쉬시는 것이 안식이다. 사람은 창조되자말자 안식을 살았었다. 보기에 심히 좋았다. 하나님은 인간을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당연히 모든 피조물도 완전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가 하나님의 첫 번째 그림이다. 하나님의 큰 그림은 안식이었다. 2) 사단에게 속아 안식을 잃었다 사람은 사단에게 속아 합법적인 하나님과의 분리가 일어나 버렸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완전함이고, 안식인데 안식을 잃어버린 것이다. 마귀에게 속아서 신적 통치권을 빼앗겨 버렸다.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함으로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는 말씀대로 되었다. 그 결과 안식, 즉 임마누엘의 완벽함을 잃어 버렸다. 마귀도 언제나 말을 먼저 먹인다. 마지막 때도 마귀의 주된 일이 말을 먹이는 일을 한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계12:15)라고 했다. 여자인 교회를 말인 물로 떠내려 보내려 한다. 뱀인 마귀는 입에서 물을 토하는 것이다. 다른 복음을 많이 토한다. 다른 복음은 없다. 하늘의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갈1:8). 마귀는 다른 말을 토해 냄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큰 그림인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은 안식이다.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보아야하는데 보지 못하게 다른 말을 넣는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고 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의 그림인 안식이 없으면 두렵다. 안식을 보지 못하는 자의 모습이다. 안식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내가 다른 복음을 먹었습니다."라고 스스로 확증한다. 스스로 벗었다고, 두렵다고 고백한다. 그전에도 벗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누가 너에게 벗었다고 알려줬느냐"고 물으신다. “누가 그런 말을 해 주더냐”라는 뜻이다. “네가 무엇인가 스스로 입어야 한다고 누가 말 하더냐”는 질문이다. 지금도 사단은 우리가 예수 외에도 무엇을 입어야 한다고 속삭인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왜 따먹었느냐?"라고하시지 않고 "누가 벗었다는 것을 알려줬느냐?"라고 물으셨다. 말의 권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 주는 순간이다. 사단의 속임수는 다 말로부터 온다.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말을 들으면 보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큰 그림이 보인다. 사단의 말을 들으면 벌거벗음이 보이게 된다. 두려움을 보게 되고, 두려워 숨게 된다. 주님이 입혀 주신 것 외에 뭔가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엔 온전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하는가? 말이 온전하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고 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욕도 안해야하고,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욕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말이 온전하려면 복음을 말하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이다. 복음을 말하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우리도 온전할 수 있다. 온전한 말을 하면 아버지의 일인 안식을 보게 된다. 우리에게 너무나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한다. 너무 아까운 세월을, 아까운 인생을, 남의 이야기하다가 다 보낸다. 비판과 불평불만만 하다가 시간을 다 보낸다. 안식이 있을 리가 없다. 사단은 말로 우리를 속였고 속이고 있다. 안식은 우리의 믿음의 말에서 온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10:10). 마귀에게 속아 안식을 잃어버린 것은 말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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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희생
우리는 봄이 오면 마음이 들떠 어디론가 꽃구경을 가기를 원하고, 늘 가는 곳이라 할지라도 봄꽃이 핀 곳이면 가족들이 나들이하는 경우가 많다. 4월 초순에 비가 오는 산복도로를 거쳐 교회에 가는 도중에 아름답게 피어있는 벚꽃을 바라보는 순간 “아! 이렇게 아름답게 핀 꽃을 비바람이 망치면 어떻게 하지?”하는 걱정이 앞선다. 내 집 정원의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거워할 수 있는 벚꽃을 비바람 때문에 망치게 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통상 벚꽃은 일본의 나라꽃이라 생각하고 별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은데 실상은 원산지가 우리나라 제주도라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나라의 꽃이니까 더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라 믿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잎도 피우지 않고 살얼음이 언 메마른 땅속에서 뿌리를 내려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한겨울 내내 자기의 몸을 단단히 무장하여 정한 시간에 꽃을 피우는 식물이 바로 벚꽃이라는 데서 관심이 더 가고 피어있는 그 자체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가정집 정원에 있는 꽃나무들은 그래도 춥다고 싸주기도 하고 거름도 하며 옮겨주기도 하고 가지치기도 하지만 벚꽃은 차가 많이 다니는 길가나 산 중에서 전혀 무관심 속에 홀로 자립하여 이른 봄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 너무 장하고 아름다울 뿐이다. 꽃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수 있는 시간은 겨우 일주일도 안 되기에 항상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렇게 고생하여 잠간 동안을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선사하기 위해 정말 희생한 벚꽃의 수명이 좀 오래 지속 되면 얼마나 좋으랴. 게다가 벚꽃이 질 때에도 벚 눈을 내려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아무 불평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따뜻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마치 눈이 오는듯한 모습으로 꽃눈이 낙화한다. 그것이 바로 자연적인 아름다움의 자체가 아닐까? 흰 꽃잎이 떨어진 것은 분명히 하얀색인데 바람이 불어 모인 블럭 바닥은 분홍색 꽃눈으로 소복하게 쌓인다. 눈은 밟으면 ‘뽀드득’이란 소리라도 내지만 떨어진 꽃눈은 아무리 밟아도 소리를 내지 않고 인간의 발과 자동차의 바퀴에 짓밟히며 휘날릴 뿐이다. 오직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순종하여 이렇게 끝까지 희생하는 것이 바로 벚꽃이라는 것에 나는 감동을 받는다. 우리 주위에도 다른 사람의 아무런 도움이 없이 주님이 말씀하신 일들을 잘 수행하여 사회에 귀감이 된 아름다운 모습이 매스컴에 등장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분들은 오직 자기에게 주어진 미션을 좌우를 살피지 않고 오직 앞만 바라보고 나아갔기 때문에 큰일을 해내었을 것이다. 한낱 미물과 같은 식물도 말없이 자기를 희생하고 아름다움을 선물하는데 우리가 기대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지 못하면 실망하고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벚꽃은 자기의 아름다움을 봄꽃으로 인간인 우리에게 잠간 보여주기 위해 동한의 춥고 쓰라린 고통을 다 견뎌내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변함없이 희생한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믿음의 형제들과 이웃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정말 벚꽃처럼 나를 희생하고 말없이 맡겨진 일을 수행하는 데 최선을 다하면 우리가 사는 곳이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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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저축할 내용 (창41:46-57)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에 보도 된 내용에 의하면, <영국 교육과정평가원>이 새로운 아동 교육개혁 방안을 발표 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11세-16세까지 중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금융교육을 학교 정규 과목으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수학을 배우고 과학을 배우는 것처럼 이 수업을 통해서 스스로 부채를 관리하는 것을 배우고,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 연금 계획 짜는 것을 배우고, 금리를 계산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는 9월부터는 모든 <영국>의 5세 된 아동들에게는 정부로부터 250파운드가 지원 되어서 자신의 펀드를 개설하게 된다고 합니다. 일반 가정의 아동들에게는 250파운드(약$500)의 펀드 자금이 지원되고 저소득층 아동들에게는 500파운드의 펀드 자금이 지원된다고 합니다. <영국>정부가 이렇게 어린 아이들에게 조기금융교육을 실시하는 까닭은 매년 해마다 개인 파산 신청자들이 늘어나는데 대한 대처 방안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사람이 일찍 돈을 알면 좋지 않다고 해서 어린아이들에게 돈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돈을 가르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돈의 가치를 알게 해야 하고, 올바르게 돈 버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고, 올바르게 돈을 저축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보다 더 안정된 내일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안정된 내일을 사는데 있어서 저축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 가운데 꼭 저축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많이 저축할수록 보다 나은 내일을 보장해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저축해야 할 것들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물질을 저축해야 합니다.(창41:46-57) 둘째로, 기도를 저축해야 합니다.(시32:6-7) 셋째로, 선행을 저축해야 합니다.(딤전6:17-19) 필요하고 좋은 것들을 많이 저축해서 오늘 보다 내일이 더 안정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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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해녀의 욕심
‘물숨’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제주 출신의 고희영 감독이 7년 동안 제주도 우도(牛島)의 해녀들과 함께 지내면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잘 몰랐던 해녀들의 삶을 속속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해녀들에게는 계급이 있습니다. 제일 높은 계급인 상군은 가장 깊은 바다까지 들어가서 작업을 합니다. 보통 15-20미터의 바다까지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중군이고, 맨 마지막 하군은 일명 똥군이라고도 부르는데, 2미터 이하의 바다에서만 작업을 합니다. 그 해녀들의 계급은 노력과 경험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자신의 숨 길이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바로 그 숨길이로 계급이 정해진다고 합니다. 이렇듯 상군, 중군, 하군 이라는 계급에 따라 해녀들이 작업하는 바다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하지만 모든 해녀들이 바다에 들어갈 때마다 동일하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물숨’입니다. 물숨은 바다 밖에서 숨을 쉬는 것과는 달리 바다 밑에서 들이마시는 숨을 의미합니다. 이 물숨은 해녀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아주 무서운 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에 한 두 명의 해녀가 물숨을 먹고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물숨은 다른 말로 하자면 욕심입니다. 자신의 숨 길이만큼 숨을 참으면서 작업을 하던 해녀가 다시 숨을 쉬기 위해서 물 위로 올라가려 합니다. 이 때 저 밑에 큼지막한 전복이 해녀의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그 순간, 그것에 대한 욕심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전복을 따기 위하여 물 아래로 내려가는 해녀는 그 물숨을 먹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사고를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면서도 욕심을 이기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해녀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은 자신의 숨만큼만 해산물을 따서 재빨리 물 위로 나오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부질없는 욕심을 경계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러하기에 해녀들은 바다를 가리켜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다는 무서운 곳이지만, 욕심을 버리면 친정엄마처럼 다 내어 주는 곳이야!” 우리는 손안에 그 무언가를 움켜쥐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숨을 참으며 견뎌냈을까요? 우리 또한 욕심내지 않아야 할 것,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에 욕심을 내다가 물숨을 마시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장 14-15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만족하는 법을 모릅니다. 진짜 자신들에게 필요한 영적인 것에 대한 열망은 없이 사실은 지금 필요하지 않는 것들을 위해서 더 더를 외치며 욕심에 사로잡혀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에든지 욕심을 품는 순간 불행이 시작됩니다. 욕심이 많을수록 불만이 많아지고 마귀의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욕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죄에 가장 약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욕심은 하나님께도 응답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다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에 응답하시지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여서 기도 응답에 대해서 의심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야고보서 4장 3절에서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의 기도는 좋아도 너희의 욕심은 싫다, 나는 결코 너희의 욕심에는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욕심을 내고 또 내지만 사실은 욕심으로 인해서 인간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서 이미 내게 주신 것에 자족하는 데 있고, 그 자족에서 진정한 감사가 나오고, 그 감사로 인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제 헛된 욕심의 물숨을 버리고 자족과 감사의 바른 숨을 쉬면서 진정한 행복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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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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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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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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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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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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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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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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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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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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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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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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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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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베스트 관계 목회(1)
- 가인과 아벨의 관계 가인과 아벨은 나쁜 관계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형제 관계인데 가인의 시기 질투 분노 때문에 아벨을 죽이는 살인사건으로 관계의 비극을 볼 수 있습니다. 가까운 가족 형제 관계도 깨질 수 있습니다. 관계의 깨짐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사탄은 관계 파괴자입니다. 성령은 하나가 되게 하고 하나님은 좋은 관계 맺기를 원하십니다. 가인과 아벨의 비극적인 관계는 가인의 시기 질투 때문입니다.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시고 가인의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았을 때 가인이 아벨을 시기하여 죽이게 되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시기 질투는 관계를 깨뜨립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관계를 세웁니다. 시기 질투를 버리고 넓은 마음으로 배려하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 시기 질투는 인간의 죄성입니다. 인간의 죄성 때문에 관계가 깨집니다. 관계의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관계가 잘 되면 행복하고 깨지면 불행해집니다. 사울은 다윗에 대해 시기 질투하고 죽이려 하다가 스스로 관계를 깨뜨리고 사울 자신이 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관계를 깨뜨립니다. 가룟유다도 사탄이 들어가니 스승인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가룟유다의 마지막은 자살로 그 인생이 끝납니다. 사탄은 관계를 깨뜨립니다. 가정과 인간관계 가정은 하나님이 만드신 축복의 센터입니다. 가정이 중요하며 가정생활에 성공해야 합니다. 사탄은 가정을 공격합니다. 가정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가정생활의 성공이 삶의 성공 목회의 성공입니다. 가정이 평안해야 목회가 안정적입니다. 가정이 흔들리면 목회가 흔들리고 가정의 위기는 목회의 위기입니다. 가까운 가정에서 신뢰 얻어야 합니다. 가족식구들과 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사탄은 가정에서의 인간관계가 깨지게 합니다. 사탄은 관계를 깨뜨리는 자이고 파괴자입니다. 가까운 관계가 깨지기 쉽습니다. 가정에서 인간관계가 깨지면 상처가 크고 고통이 큽니다. 가정의 화목은 관계의 지혜입니다. 가정에서의 인간관계가 좋으면 삶이 행복하고 목회가 행복합니다. 사탄은 계속 관계를 공격합니다. 가정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성령님은 하나되게 하십니다. 가정에서의 식구들이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충만은 인간관계의 열쇠입니다. 가정은 모든 것의 기초이고 뿌리입니다. 가정목회에 성공해야 합니다. 가정에서의 인간관계 승리는 목회의 승리입니다. 가정에서 예의 지키고 진실해야 합니다. 스트레스를 극복하고 매력을 개발하여 싫증나지 않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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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베스트 관계 목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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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개혁주의 신앙, 무엇인가?
- 개혁주의라는 용어는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단어이다. 교회 안에서는 물론 교회 밖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개혁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이 용어는 개인과 집단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이해되거나 심지어는 아주 애매하게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혹자는 단순히 수구적 보수주의에 대한 반대적 의미로 개혁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들은 수구적 보수주의를 반대하면서도 진보적 또는 급진적 혁명과는 다른 차원의 변화와 개선을 추구하는 노선을 표방하기 위해서 개혁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여기에 덧붙여 개혁주의는 형용사적이며 추상적이라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개혁주의 교회(Reformed Church), 개혁주의 전통(Reformed tradition), 개혁주의 신앙(Reformed faith), 개혁주의 신학(Reformed theology), 개혁주의 세계관(Reformed world view), 개혁주의 철학(Reformed philosophy) 등은 구체성을 갖고 있지만 ‘개혁주의’ 그 자체는 추상적이다. 개혁주의 신앙과 삶의 특성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다양한 관점들이 있다. 예를 들면, 개혁주의 신앙은 무엇보다도 정통 보수 신앙이라는 아주 평범한 관점이 있는가 하면, 교리공부에 열심이며, 주일 성수에 힘쓰고, 복음송 보다는 시편 찬송을 부르기를 강조하는 신앙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혹자는 개혁주의 신앙의 특성으로 흔히 ‘튤립’(TULIP)으로 불리는 칼빈주의 5대 교리 (인간전적부패, 부조건적 선책, 제한적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궁극적 구원)를 강조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강조는 알미니안누스주의를 반박하기 위해 확정된 도르트 총회의 결의문인 도르트 신경(1618-1619)로부터 유래한다. 개혁주의 신앙의 특성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은 “오직”(sola)의 신앙을 강조하는 관점이다. 다시 말하면, 개혁주의 신자들은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예수”(solus Christus),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 만 영광을”(soli deo gloria) 돌리는 삶을 특성으로 강조한다. 이상에서 언급한 모든 것들이 개혁주의 신앙과 삶의 특성임은 분명하다. 개혁주의 신자들은 이러한 신앙과 삶을 유지하며 영위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들이개혁주의 전통의 신앙과 삶의 특성을 포괄적으로 다 드러내 보여준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개혁주의 신앙의 특성은 무엇인가? 헤세링크(Hesselink)에 의하면, 개혁주의 신학은 “왕국 신학”(Kingdom theology)이다. “…… 그러므로 개혁주의는 인간 개인의 영적인 복지에만 적용되는 불완전한 각색된 복음이 아니라, 전체 세계에 총체적인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개혁주의 신학의 출발점이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the absolute sovereignty of God)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그 범위에 있어서 우주적이다. 그리스도는 왕 중의 왕이며, 만주의 주가 되시는 분이다 (계19:16; 17:14). 그의 나라는 무궁하다 (눅1:33). 개혁주의 신앙의 관점은 다른 형태의 기독교 신앙과 비교해 볼 때 분명한 차이점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루터교 신앙은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추구하며, 경건주의 신앙은 개인 영혼의 복지에 관심을 갖는다. 웨슬리안 전통은 개인의 거룩성에 관심을 갖지만, 개혁주의 신앙의 궁극적 관심은 개인적인 경건과 개인의 구원을 초월하며, 제도 교회의 범주를 넘어선다. 개혁주의 신앙은 국가와 문화, 자연과 우주의 보다 더 광범위한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데 있다. 이와 같은 고귀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더 포괄적인 세계관이 필요하다. 그래서 헤세링크는 개혁주의 신앙의 특성을 성경적인 개혁주의 세계관의 발전이라고 보고 있다. 인생관 세계관, 삶의 모든 영역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주권과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에 대한 비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하나님 나라의 신학,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웅대한 디자인이다.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 하나의 주제, 그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이다. ……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 지어다 아멘’ (롬 11:36).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은 분명히 고상하고 차원이 높고 성경적이다. 그러나 유의해야 할 점은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견지하고 있다고 표방하는 구성원들이 독단적이고 비판적이며 오만한 승리주의에 도취되지 않아야 한다. 모든 신학과 신앙의 전통은 나름대로의 강점과 약점을 갖고 있다. 그럼으로 우리는 다양한 신학과 신앙 전통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겸비함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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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개혁주의 신앙,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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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헤만은 찬송하는 자라(대상6:33)
- (대상6:31-32)언약궤가 평안한 곳을 얻은 후에 다윗이 이 아래의 무리를 세워 여호와의 집에서 찬송하는 일을 맡게 하매 솔로몬이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의 전을 세울 때까지 저희가 회막 앞에서 찬송하는 일을 행하되 그 반열대로 직무를 행하였더라 찬송에 대한 의미가 많이 퇴색된 시대인 것 같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 찬송해서 힘을 얻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되고 일이 잘 풀릴 때 감사의 찬송을 합니다. 우리 성도의 입에서 찬송이 사라지지 않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상 문화가 우리의 입에 할 말을 너무 많이 넣어주고, 개인적으로 너무 똑똑해지고, 트로트가 너무 많이 들려 저절로 입속에서 흥얼거리는 지경까지 되어버렸습니다. 찬송인지 트로트인지 곡만 봐서는 구별도 잘 안 되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오늘 성경은 찬송하는 일, 그 일이 직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언약궤가 평안한 곳을 얻었을 때, 언약궤가 평안한 곳을 얻은 후에” 하나님께서 평안을 얻으시기가 참 힘드셨던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쉬시기가 너무 어려우셨던 것 같습니다. (마8:20)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이런 장면을 들어 “예수님께서 검소하게 사셨다, 소유욕이 없었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요단강에도 제일 먼저 들어가야 했고, 전쟁터를 누벼야 했고, 포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진영 한복판에서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이스라엘 속으로 가만히 들어온 섞여 있는 가라지들 때문에 졸지도 주무시지도 못하셨습니다. (시121:4)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언약궤가 평안한 곳을 얻었을 때, 언약궤가 평안한 곳을 얻은 후에” 이렇게만 보아도 이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께 너무 송구스럽고, 죄송스럽고, 가슴 아픈 말씀입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전쟁이 끝나고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임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집인 성전이 건축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쉬신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백성, 그의 자녀들에게 평강과 구원이 임했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소속된 교회는 우리에게 구원이 임했다는 상징이요, 약속입니다. 그런 뜻을 담은 성전이 건축되는 동안 찬송하는 직무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니 찬송은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것처럼 “은혜받았다, 감동받았다”의 차원을 넘어 구원을 상징하는 하나님의 집, 성전을 향하여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라”하면 교회를 그리 오래 다니지 않으신 분들도 다 아실만한 사람입니다. 특히 주일을 성수하고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은 너무도 잘 아실 것 같습니다. (민16:1-2)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라엘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 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 가운데에서 이름있는 지휘관 이백오십 명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르니라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반역의 깃발을 든 주동자가 “고라”입니다. 고라와 그 무리들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부여하신 제사장직과 왕직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결정에 반기를 든 결과입니다. 세상 나라도 역린, 반역을 하면 9족을 멸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반역과 불신앙은 세상의 반역을 넘어 삼위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뻔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언약궤가 평안한 곳을 얻었을 때, 언약궤가 평안한 곳을 얻은 후에”,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구원이 임하였음을 상징하는 하나님의 집, 성전건축을 알리는 찬송하는 직무에 헤만이 등장을 한다는 말입니까? 헤만은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반역의 깃발을 든 고라(대상6:38)의 후손입니다. 시편 성경에도 고라의 찬송을 10편이나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찬송과 기도가 우리의 은혜, 우리의 감동이 목적이 되고, 그 선에서 머물러서야 되겠습니까? 우리의 입에 찬송과 기도가 있다는 사실은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여 있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찬송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어쩌면 우리는 고라의 후손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아니 고라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바로 우리가 고라입니다. 내가 고라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나에게 찬송의 직무를 맡겨 주셨습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성도의 구원을 상징하고,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향한 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9족을 멸하는 대신, 교회의 역사를 기록하는 장면에서 우리가 부르는 찬송의 고백을 10편이나 할애해 주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일을 성수하며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여 찬송할 때마다 내 입에서 나오는 찬송의 의미를 바르게 알아 삼위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가 풍성하시길 소망합니다. 죽는 그 날까지, 하나님 앞에 서는 그 순간까지 찬송이 끊어지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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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헤만은 찬송하는 자라(대상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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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가정에서의 높임말과 낮춤말 : 며느리가 시부모에게
- I. 서언(序言) 앞에서 논한 바 있지만 높임말은 우리 사회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거추장스러운 걸림돌이 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어느 사회이건 특히 다양한 계층이 모여 있는 교회에서는 최소한의 예의는 반드시 있어야 될 것이고, 이를 잘 이행할 때 이 사회 속에서 올바른 높임말과 적합한 낮춤말 하나로도 아름다운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지난 호에서는 가정에서의 호칭 중에서 시부모가 며느리에게 어떻게 호칭하며 지칭할 것인지를 논하였다. 본 호에서는 며느리가 시부모에게는 어떻게 높임말을 해야 될 것인지를 논하고자 한다. II. 며느리가 시부모에게 하는 호칭 오늘날의 높임말은 어떠한가? 여기에 대해서는 지난 번 3회에 걸쳐 논하면서 그 심각성을 소개한 바 있었다. 그것은 오늘 본 호에서 논하고자 하는 가정에서의 높임말 사용도 마찬가지이다. 한마디로 심각할 정도로 많이 변형되어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실례를 들면 요즈음 젊은 층의 다수는 ‘-어요’라는 말을 선호하면서 ‘그랬어요.’, 저랬어요.’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듣는다. 이는 며느리가 시부모에게 하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분석해보면, 낮춤말은 아니지만 격식을 차리고 시부모에게 쓰는 말도 아니다. 이런 경우는 ‘그랬습니다.’, ‘저랬습니다.’란 표현이 가장 올바른 높임말이다. 또한 잘못된 말은 ‘제가 그랬습니다.’라고 해야 되는데 ‘내가 그랬습니다.’라고 함으로서 ‘나’와 ‘제’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한 가지 실례를 더 든다면, 이제 갓 결혼한 새신부가 시아버님께 ‘아버님 식사하세요.’라고 말했다가 시어머님께 꾸중을 들은 일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때는 어떤 높임말이 좋을까? 이때는 ‘아버님, 진지 잡수십시오.’라고 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높임말이다. 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날까? 이런 높임말의 붕괴는 주로 어휘를 잘못 선택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경우가 아주 많다. 예를 들면, ‘생신’, ‘연세’, ‘진지’, ‘말씀’ 등의 높임말 대신 ‘생일’, ‘나이’, ‘밥’, ‘말’ 등의 평대어를 예사로 쓴다. 또 ‘주무시다.’, ‘말씀하시다.’, ‘잡수시다.’, ‘드리다.’ 라고 해야 되는데 ‘자다’, ‘말하다’, ‘묻다’, ‘먹다’, ‘주다’로 말을 한다. 이는 높임말의 선어말 어미인 ‘-시’를 생략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상과 같은 경우만 보더라도 오늘날 젊은 층이 시부모님이나 윗사람에게 사용하는 높임말은 호칭어이든 지칭어이든 얼마나 다양하고 일관성이 없는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런 다양성 속에서 어느 하나만을 택해서 똑같이 적용을 하는 것은 다소 무리라고 보는 전문가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가장 기초적인 공동체인 가정에서와 공동의 문화적 뿌리를 두고 살고 있는 우리의 사회 현실에서 동일하지 않는 용어들을 너무 많이 사용하는 것은 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런 일은 가장 긴밀한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 가정과 교회에서는 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정이든 교회이든 이러한 윗사람께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를 바로 사용하는 것은 교인으로서 갖출 아름다운 예의 일 것이다. 또한 건전한 사회문화를 형성해 가는 귀중한 잣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III. 결 어 우리가 가장 흔히 쓰는 가정의 호칭어, 지칭어들도 이상에서 보는 대로 바로 쓰지 못하는 경우들도 너무 많다. 하지만 이러한 원칙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간의 따뜻한 사랑의 마음이다. 예를 들면, 며느리가 친정어머니 대하듯 시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이런 원칙은 때로는 무시되어도 좋을 것이다. 문제는 상호간의 마음이다. 서로가 신뢰하고 사랑한다면, 약간의 어법에 오류가 있을지라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오늘도 오고가는 서로 존중하고 높이는 말들 속에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하루가 되기를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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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가정에서의 높임말과 낮춤말 : 며느리가 시부모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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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신앙의 경주 (히12:1-3)
- 우리나라에서 2005년도에 개봉이 되어서 많은 국민들의 마음을 감동시킨 “말아톤”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는 2급 정신지체 장애를 가지고 있는 배형진군의 삶을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배형진군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2001년도 춘천 국제마라톤 경기에서입니다. 그 당시 그의 나이가 불과 16세였으며 2급 정신지체 장애인이었는데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조목을 받았고, 그 이듬해에는 철인 3종 경기에도 출전을 해서 풀코스를 완주했습니다. 그 배형진군의 삶이 모든 장애아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줄 수 있다고 판단을 해서 “말아톤”이라는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북한의 김정일국방위원장이 알려진 바대로 영화광인데 그 영화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작년에는 배형진군이 평양 국제 마라톤 경기에 특별 초대를 받아서 경기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정상인들도 해 낼 수 없는 일을 해 냄으로서 인간 승리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가 인간 승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어머니의 눈물어린 노력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배형진군은 지능이 4살 아이 정도밖에 안되는데, 그 아이를 어떻게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할까를 생각하다가 달리기에 소질이 있음을 알고 직접 훈련을 시켰던 것입니다. 아들에게 너무 가혹한 훈련을 시키는 것 때문에 친어머니가 아니고 계모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의 헌신으로 오늘의 그가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마라톤 경주와 같습니다. 우리는 이 믿음의 경주에 반드시 승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할 수가 있을까요? 첫째는, 준비가 철저해야 합니다.(1) 둘째는, 인내를 발휘해야 합니다.(1) 셋째는,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2) 코로나19라는 어려운 상황을 맞이한 우리 모두 신앙의 경주를 완주하고 주님 앞에 승리자들로 서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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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신앙의 경주 (히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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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말씀은 주야로 묵상해야한다.
- 성경이 “말했구나.” 정도가 아니다. “주야로 묵상해.” “이 말씀을 붙잡아”, “이 말씀은 귀해”, “이 말씀을 들어라”고 하신다. 목사의 설교만 들어선 안 된다. 성령님께 직접 설교를 들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설교하신다. “하나님께서 메세지 하시구나”하는 것을 말씀을 통해 발견해야 한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들린다. 주야로 묵상하자. 자나 깨나 묵상한다는 말이다. 이 율법 책을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라고 했다.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고 했다. “행하라”를 “믿어라”로 읽어야 한다. 그리하면 어떻게 되는가? “네 길이 평판하게” 된다. “형통하게” 된다. 하나님이 말씀은 진실이다. 평탄한 길, 형통한 길이 여기 있다. 평탄하고 형통하고 싶어 노력만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윗은 말씀을 묵상하다가 실재가 되었다. 믿음으로 기름 부음을 유지할 뿐 아니라 선포를 했다.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오지만...”라고 마음에 있는 것을 읊조리고 선포를 하는 것이다. 마음에 있는 것을 선포를 하는 일을 하려면 말씀이 우리에게서 떠나지 말게 해야 한다.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라고 하신다. 묵상이란 깊이 생각하고 깨달은 것을 입으로 읊조리는 것을 말한다. 읊조리는 것, 자꾸 말해야 한다. 입을 가지고 말을 해야 한다. 말을 온전하게 하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다. 이 땅의 아무리 좋은 말도 온전한 말은 없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온전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읊조릴 때 온전한 말이다. 말씀을 말하는 사람은 온전한 자라고 성경이 말한다.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고 하셨다. “내가 온전하니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씀을 믿음으로 거룩해질 수 있다. 말씀을 말함으로 온전 해 질 수 있다. 우리는 “이 율법 책을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겠다.”라는 결단이 필요하다. 그러면 반드시 오늘 이후로부터 응답의 문이 열린다. 형통하다. 평탄하다. 문이 열린다. 형통한 길 평탄한 길이 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1:8)라고 하셨다. 놀라운 말씀이 아닌가! 말씀을 다섯 가지 방법으로 가까이하길 권한다. 읽기, 듣기, 공부하기, 암송하기, 묵상하기이다. 말씀을 읽는 시간을 꼭 정하길 권한다. 작정해 보라. 말씀이 읽어질 것이다. 읽기만 할 것이 아니라 공부하기도 해야한다. 말씀은 들음에서 믿음이 생긴다. 말씀을 듣는 일에 귀를 기울이고 관심을 가지는 것은 중요하다. 말씀을 듣는데 어떤 말씀을 듣느냐는 중요하다. 정확한 복음을 들어야 한다. 참고로 유튜브 <오복음tv>를 활용해 보라. 유튜브 <오복음tv>를 들어보라. 힘이 생길 것이고, 행복의 문이 열릴 것이다. 삶 속에 흔들 깃발이 생길 것이다. 성경 공부하기를 재미있고 쉽게 하는 방법을 소개하고 싶다. 유튜브 <오복음tv>를 활용해 보라.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장별로 복음으로 볼 수 있도록 영상으로 잘 만들어져 있다.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가능하다면 로마서를 먼저 공부한 후 창세기부터 노트에 필기도해 가면서 공부할 것을 권한다. 암송하기에도 도전해 보라. 암송은 암송할 수 있다는 생각이 중요하다. “나는 성경을 암송할 거야”라는 말을 1,000번을 해 보라. 쉽게 암송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나는 성경을 암송할 거야”라는 말을 억지로 하지 말고 그냥 수시로 그렇게 해 보라. 1,000번을 말하면 무엇이든지 쉬워진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말씀을 묵상하라. 읽고, 듣고, 공부하고, 암송한 말씀을 생각하고, 되새기고, 주장하면 마음속에서부터 올라오는 환희와 함성이 생길 것이다.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는 말씀을 만드는 일을 묵상이라고 한다. 그것이 기도하게 될 때 놀라운 능력의 삶은 나타나게 될 것이다. 다시 당부드린다. 생동감 있는 삶을 위해 유튜브 <오복음tv>를 활용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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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말씀은 주야로 묵상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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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열 목사] 강한 자와 싸우라
-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평탄한 삶을 축복이고 험악한 삶을 불행이라 생각한다. 험악한 삶에는 강한 대적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면 왜 광야로 이끄시고 강한 대적들을 만나게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다. 결론적으로 더 큰 승리를 주시기 위함이다. 약한 상대는 이기기가 쉽다. 쉽게 이기는 싸움은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강한 상대를 만나 이겼을 때, 기쁨과 영광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때부터 일약 스타가 되고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는다. 모세가 바로 왕에게 내 백성을 해방시켜 달라고 하니 바로 왕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래 모든 편이를 봐 줄 테니 데리고 가라 하였다면 얼마나 무미건조하겠는가? 바로는 착한 자가 아니라 완악한 자로서 그의 완악함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10가지 재앙의 기적을 보여주는 원인이 된다. 우리의 삶에 완악한 바로를 만나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 큰 승리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바로의 완악함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출애굽이 가능하였다. 애굽에 430년간 노예로 산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애굽화 되어버렸다. 이런 이들이 모세의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을 버리고 애굽을 떠나겠는가? 바로의 완악함이 애굽에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지긋지긋한 환경을 만들었기에 미련 없이 애굽을 떠나게 된 것이다. 나쁜 환경은 약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을 쉽게 포기하게 만든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죽을 때 병들어 고생하다가 죽는다. 천국을 사모하라는 뜻도 있지만, 본인도 가족 식구에게도 떠나게 하기 위함이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 우리 지역에 국회위원 선거가 있었다. 당시 국회위원은 정치 거물인 한나라 당 사무총장인 이○호 씨였고 맞서는 자는 이름 없는 민노당 강○갑 씨였다. 내게 지지를 부탁할 때, 나는 당신의 싸움은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다.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인지도와 조직, 선거 자금 면에서 모두가 불리한데 무엇으로 어떻게 그를 이길 것인가 라고 물으니 그는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면 이라고 한다. 나는 교만과 자만에 빠져 지역구를 잘 돌아보지 않는 그의 약점을 파고들어 유권자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라고 조언하였다. 결과는 예상을 뒤엎고 승리하여 전국의 뉴스감이 되었다. 당선 후 그는 승리의 요인 다섯 가지 중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았다면 진 선거라고 하였다. 사무엘상 17장에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나온다. 객관적으로 다윗이 골리앗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 사울 왕은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으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하였다. 결과는 다윗의 일방적 승리로 끝난다. 이때부터 다윗의 명성은 이스라엘 전역과 주변국까지도 알려지게 되어 마침내 이스라엘 2대 왕이 된다. 강한 자에게도 약점이 있기 마련이다. 자만심과 교만이다. 상대를 얕잡아보고 방심한다. 사무엘상 17:42절에 골리앗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이 약점이 다윗에게 패하게 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서도 토끼가 이길 수밖에 없는 신체적 조건을 가졌으나, 자만심과 교만으로 질 수 없는 경주에서 거북이에게 지고 말았다. 이같이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지는 이유가 바로 자만심과 교만임을 말해준다. 그래서 사도바울 고린도전서 10:12절에서 이런 자들에게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충고하면서, 자신은 약함을 자랑한다고 하였다(고후11:30). 약할 그때가 곧 강해짐을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전도서 9:11절에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였다. 이왕 싸운다면 약자와 싸울 것이 아니라 강자와 싸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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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열 목사] 강한 자와 싸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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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관리실에 에어컨이 생기다!
- 솔직히 너무 덥다. 컨테이너로 제작된 좁은 관리실은 숨이 막힐 지경이다. 한여름이지만 오히려 바람이 살랑이는 밖이 더 형편이 나았다. 그래서 전에 근무하시던 분은 여름이면 집으로 올라가셨다고 한다. 그래, 여기 있다가는 요리가 될 것 같다. 앞으로 누가 근무하든 냉난방이 전혀 안 되는 작은 컨테이너 사무실은 사람이 상주할 수 없을 것 같다. 상주는커녕 필요한 업무를 위해 잠시 머무는 것도 불가능하다. 지금 아파트의 큰 이슈는 승강기 공사다. 제법 큰 지출이 예상되었기에 몇 곳에서 견적도 보고 온라인에서 상담도 받아 본다. 아파트 관리실은 이런 문제로 언제든 시끄러울 여지가 있다. “소장이 돈을 얼마 받았다, 부실 업체를 선정했다, 업무 처리가 미흡하다.” 여러 말 듣기가 싫어 최대한 신경 쓰며 진행하게 된다. 업체 선정은 다행스럽게도 기존에 관리하던 업체에서 맡게 되었다. 우리 시설을 가장 잘 알았기에 이 업체가 했으면 싶었는데 마침 견적도 가장 낮은 가격을 제시했다. 입주민 대표도 오케이. 그렇게 공사가 진행되었다. “소장님, 공사 기간 고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사 후 건네진 봉투. 내가 고생한 것이 없는데 사례라며 봉투가 전해진다. “??” 평소보다 조금 더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던 것이 고생이라면 고생이랄까? 하지만 봉투 받을 내용은 아니다. 웃으며 거절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사장님은 조금 놀란 듯 표정을 보이셨다. 다른 아파트 소장님들도 이 정도는 다 받으니 받아도 된다는 말씀을 하시며 봉투 전달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처음에는 소장님이라 하더니 이제는 목사님이라 부르며 몇 번 설득하는데, 목사라 부르니 더 받기 어려워진다. “정직한 비용으로 꼼꼼하게 작업해 주시느라 사장님이 고생하셨죠. 저는 여기 일하며 절대 따로 봉투를 받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앞으로도 안전한 시설 되도록 잘 부탁드립니다.” 사람 사는 정이 그런 것이 아니라며 몇 번이나 나를 설득하셨지만, 이거 받는 순간 내 명예가 무너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미소는 짓되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리고 한 가지 사장님께 제안. “사장님, 저는 어차피 몇 년 후 여기 떠날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사장님은 여기 소장 바뀌어도 계속 관리 이어가셔야죠. 관리실이 여름이면 찜통입니다. 그런데 에어컨 하나 사지 못하고 있어요. 차라리 사장님 이름으로 에어컨을 기증해 주시며 어떨까요? 그럼 입주민들이 사장님을 좋게 보실 것 같은데.” 순간적인 아이디어였지만 사장님도 나도 만족스러운 대안이었다. 즉시 일은 진행되었고 제법 넉넉한 용량의 에어컨이 설치되었다. 나는 입주민들에게 은근히 소문을 냈다. 승강기 용역회사에서 관리실에 에어컨을 기증했다고. 나의 계획대로 입주민들은 승강기 사장님을 칭찬했고 사장님은 계속 아파트 업무를 이어가고 있다. 그래, 그거면 된 거다. 그렇게 설치된 에어컨 덕에 가장 신난 건 나다. 한낮 사무실 업무가 가능해진 것은 물론이고 야외 업무 후 잠시 땀을 식히기에도 그만이다. 하지만, 나도 눈치가 있지. 에어컨 실외기 돌아가는 소리에 입주민이 불편해할까 신경이 쓰인다. 에어컨 바람에 열 좀 식히고 있을 때 멀리서 누군가 다가온다. 관리실 방향이다. 큰일이다! 지금 사무실이 지나치게 시원하다. 나는 급하게 리모컨을 집어 들어 에어컨 전원을 껐다. 눈치 좀 보면 어떤가. 아무렴 에어컨 있는 사무실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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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관리실에 에어컨이 생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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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유앙겔리온
-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 중에 중요한 한 가지는 오직 한 가지 일에만 전념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세계 곳곳에 안 들어간 데가 없고 심지어 이 세상에서 가장 폐쇄된 나라인 북한에까지도 거침없이 들어간 미국의 대표적인 기업이 있습니다. 바로 코카콜라입니다. 그렇습니다. 코카콜라는 공산권이든 제3세계 국가이든 구별 없이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심지어 아프리카 칼라하리의 부시맨의 손에도 코카콜라 병이 들려있었던 것을 옛날에 부시맨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봤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 회사 사장의 불타는 집념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코카콜라의 판매를 위하여 자기의 모든 정열을 바치고, 거기에 아예 자기 목숨을 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오직 코카콜라의 판매에만 전념했기에 누구를 만나든지 무엇을 하든지 항상 코카콜라만 생각하고 코카콜라만 말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어느 때는 기자들과 만나서 자신의 기업 경영에 대하여 인터뷰를 했는데, 그 인터뷰를 마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 혈관 속에 흐르는 것은 피가 아니라 코카콜라입니다.”그는 정말 완전히 코카콜라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어떤 기업도 넘볼 수 없는 세계 제1의 기업 브랜드의 아성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위대한 아성을 쌓은 사람이 성경에 나옵니다.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쌓은 것은 위대한 복음의 아성이었습니다. 코카콜라 사장의 비유대로 하면 아마 그의 혈관에는 피가 아니라 복음이 흐르고 있다고 말해야 될 것 같습니다. 바울이 코카콜라 사장과 다른 점이 있다면 코카콜라 사장은 썩어질 것에 정열을 바치고 집중한 사람이지만 바울은 영원한 것에 헌신하고 집중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이 복음에 그렇게 자신을 불태웠을까요? 신약 성경의 언어인 헬라어로 복음을 ‘유앙겔리온’이라고 합니다. 풀이하면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 이 단어는 로마 황제와 관련된 용어였습니다. 새로운 황제가 등극할 때 또는 황제가 자신이 다스리는 식민지나 도시를 방문할 때에 백성들은 그것을 ‘유앙겔리온’이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황제가 등극하면 일반 죄수들에게 특별사면을 시행했고, 또 황제가 어느 곳에 가면 신하들과 시민들은 기념 하사품이나 선물, 특식 등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기쁜 소식 즉 유앙겔리온이었습니다. 그것을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저 옛날 일제 강점기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일본천황이 항복을 했다는 소식, 바로 그것이 유앙겔리온이었습니다. 옛날 시대를 살았던 나이 많으신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1945년 8월15일에 라디오를 통해서 침울한 일본천황의 그 항복 선언을 듣는 순간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해방이구나. 이제는 자유이구나.”하는 생각에 많은 사람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좋은 유앙겔리온 있습니다. 죄로 인해 영원한 멸망의 포로가 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소식은 온 인류가 기뻐해야 할 진정한 유앙겔리온입니다. 사람들을 마귀가 장악한 세상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 구원 하는 것은 유앙겔리온 즉 복음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복음에 자신의 생애를 바쳤던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원 받은 인생에게 가장 가치 있는 삶은 내 자신을 구원한 바로 그 복음을 전하는 유앙겔리온의 전달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건강, 지식, 지혜, 재물 등을 바로 그것을 위해서 사용할 때 우리는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게 되고 그래서 저 하늘의 상급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몸에도 사도 바울처럼 유앙겔리온의 뜨거운 피가 흐르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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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유앙겔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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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리더의 덕목에 대하여(2)
- 인내 인내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내 없이 무엇이든 되는 일이 없습니다. 리더는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내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끝까지 인내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인내로 우리가 구원 얻는 길이 열렸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힘들다고 포기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다면 구원 얻는 길이 열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인내가 있어야 인간관계가 좋아집니다. 인내의 리더십이 관계 리더십입니다. 인내가 없이는 열매를 거두지 못합니다. 사단은 빨리 빨리하며 조급하지만 예수님은 좀 더 참으라며 인내를 가르쳐주십니다. 조급함, 인내 부족이 삶을 실패로 이끌어갑니다. 사람에 대하여 기대를 적게 하고 인내로 기다려 주어야 사람을 얻게 되고 관계가 좋아집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는 분이십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야 합니다. 농부의 인내로 좋은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믿음의 경주는 인내의 경주입니다. 가정생활, 교회생활, 직장생활에서 인내가 있어야 성공합니다. 모세는 40년간의 광야생활, 연단, 인내의 시간을 잘 통과하였습니다. 요셉의 13년간의 감옥생활, 인내로 잘 견디었습니다. 인내가 없으면 관계가 깨지고 리더십이 세워지지 않습니다. 인내는 쓰나 열매는 달다는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위로 인간은 위로가 필요합니다. 인간은 고독합니다. 리더는 위로해 주는 자입니다.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서로 위로해 줄 때 관계가 잘됩니다. 위로 받을 때 힘이 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위로의 사역입니다. 슬픈 자, 병든 자, 외로운 자들을 위로해 주셨습니다. 위로의 리더십은 관계의 리더십입니다. 위로해 주는 마음은 관용의 마음, 따뜻한 마음입니다. 리더는 마음이 넓고 따뜻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마음, 따뜻한 마음으로 가득차 계신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성령님도 위로자, 보혜사가 되십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위로의 말입니다. 위로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위로해 줄 때 관계가 잘 됩니다. 예수님은 독자를 잃고 슬퍼하는 나인성 과부를 따뜻한 마음과 말로 위로 해 주셨습니다. 울지 말라고 위로하시면서 문제까지 해결해 주신 예수님이십니다. 인간은 누구나 기도제목, 고난이 있습니다. 누구나 위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위로, 인간들끼리 위로는 격려입니다. 예수님은 고통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격려해 주셨습니다. 리더는 격려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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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리더의 덕목에 대하여(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