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Home >  오피니언
-
[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7)- 관언유착(官言癒着)
언론이 독자들이나 대중들에게 주는 영향이 크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사실이 아닌 잘못된 기사나 중심을 잃은 기사는 많은 사람에게 혼란을 줍니다.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몇 해 전 우리 노회에서 모 목사를 순회 선교사로 파송한다고 기독교보에 기사가 올랐습니다. KPM 이사장과 담당자들이 파송 예배에 순서를 맡으며 파송 예배 사진까지 첨부하여 누가 봐도 총회에서, KPM에서 파송하는 선교사처럼 대문짝만하게 기사를 올렸습니다. 노회 파송 선교사도 아닌데 과장된 허위 기사를 올릴 수 있느냐고 기독교보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몇 주 후 신문 구석 어느 페이지에 짧은 한 줄로 000교회 순회 파송 선교사로 정정한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습니다. 그 기사를 본 대부분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은 KPM 파송 선교사로 알고 있습니다. 짤막한 정정 기사가 났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도 “부산서부노회 파송 선교사냐?”고 물어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선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KPM이나 노회에서 파송한 선교사처럼 위장을 하고 그것을 교단 신문인 기독교보에까지 기사화한 것은 그 저의를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디 이 한 건뿐이겠습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이 발생하여 총대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거짓된 걸음을 걷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 심히 우려됩니다. 기독교보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할 것입니다. 기독교보가 KPM 선교사로 파송하는 기본도 모른다는 것은 몰랐다고 하는 말 자체가 거짓말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의 파장도 결코 간과할 수 없지만, 신앙과 교리, 교회와 개인의 인권에 대한 의도적인 허위 기사는 고신 신앙 전체를 흔들 수 있는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문제는 고신 언론사는 총회 유지재단 이사회에서 관리하는 기관입니다. 유지재단 이사회는 총회장을 당연직 이사장으로 해서 총회 기관 중 최상위 기관으로 총회를 잘 알고, 총대들의 지지를 받아 총회 산하 교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감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유지재단 이사회가 직무유기 한 것입니다. 학원 이사들이 잘못할 때만 소환할 것이 아니라 유지재단 이사회가 잘못할 때는 그 파장은 훨씬 더 크고 중요하기에 반드시 소환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독교보가 총회 기관지인지, 유지재단 이사회 관할에 있는 기관지인지, 기독교보 자체 언론지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된다고 입을 모읍니다. 언론사 사장 얼굴이 기독교보에 빠지는 일이 없자 이 일에 대해서 총대들은 물론이요, 유지재단 이사회에서도 지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과는 마이동풍입니다. 순교 정신을 기본으로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모토로 하는 고신의 기관지인 기독교보가 본류의 신앙을 이탈한 것은 이미 옛말이고 특정 계파에 포진한 자들이 기고하는 재고 되어야 할 지나친 인문학적 논의와 신앙 고백적 정체성을 벗어난 잘못된 사상들이나 도배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고신 신앙을 가진 목회자들과 장로들, 교회들은 알게 모르게 기독교보에 대한 불신으로 불매 운동을 하고 있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입니다. 5월 2일 자 코람데오닷컴에 “교계 언론 편집 책임자의 이학규 장로 고소 건, 고검 재정 심사에서도 또다시 기각 판결”이라는 기사가 올랐습니다.(코람데오닷컴 참조) 이 사건의 실상은 전국 남전도회 임원으로 있는 모 장로님이 유지재단 이사로 출마하려고 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웠는데 그해에 언론사 사장 선거가 있어 보수 측 인사가 유지재단 이사가 되면 사장이 되는 길에 장애가 될 것 같아 코람데오닷컴의 기사대로 언론사의 직원이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운 장로를 “사퇴 종용”했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총회 산하 교회를 잘 돌아보고, 총회의 기관들을 바르게 잘 관리해야 하는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시작부터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일반 총대들은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는 계파와 개인의 이권과 자리가 그 배경이 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재미를 본 자들은 이제 총회에서 골치 아프게 투표하고 경쟁하는 것보다 아예 노회 총대를 조정하는 기가 찬 수법으로 발전했습니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계파에 표를 던질 사람을 골라서 총대라는 자리로 매관매직을 하고, 각 노회 지도급에 있는 목사 장로들을 총회 상임위의 자리로 매관매직해서 4월 노회 총대 선거가 끝나면 이미 상황이 종료되는 모양새로 발전되었습니다. 이학규 장로가 전국 남전도회 회장으로 봉직하고 있을 때 함께 임원으로 봉사하던 모 장로가 “사퇴를 종용”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항의한 것이 코람데오닷컴 에 기사 실린 것과 같은 결과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평생 법 없이도, 법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사는 목사, 장로가 이 일로 인하여 교회 생활이나 신앙생활에 방해를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경찰서와 법원으로 불려 다니며 고초를 겪고 어려움을 당했던 것에 대해서 고신 언론사를 관리하는 유지재단의 총회장과 목사, 장로 이사들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 궁금합니다. 왜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말입니다. 이학규 장로는 신앙적으로 잘 해결하고자 언론사의 불법 선거 개입 못 하게 해달라는 진정서를 총회 선관위에 제출했더니 총대가 아니라 진정서를 접수하지 못한다고 하더랍니다. 참 훌륭한 총회 선거관리 위원회이십니다. 그래서 “여기 보냈다, 저기 보냈다” 서류 핑퐁 게임을 하다가 결국 사법기관에 판단을 받기까지 하면서 이학규 장로가 당한 심적 피해, 정신적 피해, 일상 업무 손해의 피해는 누가 보상해줍니까? 고신총회가 이렇게 기본을 상실하고 무책임하게 하면 안 됩니다. 펜은 검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오보도 문제이지만, 언론이, 신문이 의도적이고 사욕에 치우쳐 고신의 정체성에 위배 되는 글이나 기사를 올리고, 무책임으로 일관할 때 고신총회 산하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미치는 파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총회 임원회와 학원이사회가 지난 총회 시 총대들을 속이고 총장선출 규정을 통과시켜 불법으로 총장을 선임했다고 신문에 기사화되어도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볼 때, 총회 임원회의 수장인 총회장이 유지재단의 당연직 이사장이기에 이 사실조차 그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게다가 현 총회장은 기독교보 발행인이 아니기에 변명하며 피해갈 수 있는 좋은 길도 열려 있습니다.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재정적인 문제는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릅니다. “반려동물을 장례식”에 대한 안건이 고신총회 신학부에서 재론되고, 어떻게 고신총회에서 “그따위 안건이 거론되느냐”는 회원들의 호통에 경남노회 모 회원이 나와 옹호 발언을 하며 “지난달에 우리 찐이(고양이)가 죽어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하늘나라로 보내줬다”고 말을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총회가 불건전하고 이단성이 있어 교류를 금지해도 전혀 문제의식 없이 그런 모임에 참여하고, 순서나 자리까지 맡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는 300M 거리를 유지해야 하지만 이전하는 것은 법에 명시가 없기에 괜찮다고 하는 고신입니다. 핑퐁 게임을 하다하다 안되면 법리해석을 문제 삼아 법제위에 해석을 요청하여 본질을 잊어버리게 하고 계파싸움 진영싸움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고신입니다. 양파도 아니고 벗겨도 벗겨도 끝이 없는 고신이여...... 언론은 “言路”를 여는 것입니다. 言路가 막히면 세상은 암흑세계나 다름없습니다. 한 마리의 개가 먼저 짖으면 온 동네 개가 때지어 짖어대듯이 기독교보가 먼저 총대를 메고 총회 여러 현안의 심각성을 알리면 동시에 총회 여러 곳에서 포문을 열고 동참할 것입니다. 언론은 여론을 집약하고 전문가들의 진단과 의견을 수렴하거나 민심을 파악한 후 사안에 따라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로 펜 끝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언론의 사명입니다. 총회 성도들을 대신해서 할 말을 하며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선도해야 합니다. 독선의 권력을 향한 비판은 언론이 지향해야 할 우선순위이자 언론 존재 이유입니다. 이 가치관이 상실되면 결국 관언유착(官言癒着)이 되기 쉽고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관제언론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사리사욕에 길들어서 소위 ‘독선과 권력’의 ‘종’이 된다면 스스로 펜을 손에서 내려놓아야 함은 불문가지입니다. 기독교보가 그렇게 길들어진 “관보(官報)”라는 비판을 듣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집을 지키기 위해 열심 짖어야 할 개가 요즘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주인 행세를 한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6 : 성가대와 찬양대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평생을 예배드리면서도 때로는 이 말이 옳은가 틀리는가에 대한 의문이 되는 용어들이 많다. 본 기고의 목적이 이를 바로 알고 사용하자는 취지에서 계속 기고하지만, 필자 자신도 때로는 헷갈릴 때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예배 중의 순서에서 찬양대인가 성가대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통합 측 총회에서는 찬양대라고 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수많은 교회들이 성가대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는 여기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성가대(聖歌隊)와 찬양대(讚揚隊)의 용어 차이 두 용어는 일반적으로 보면 거의 같은 말이다. 국어사전에도 성가대는 “교회 등에서 성가를 부르기 위해서 조직된 합창대”라고 했고, 찬양대도 “남녀 기독교 신자로 조직된 합창대”로 둘 다 영어로도 ‘choirs’로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같은 듯 다른 용어이다.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성가와 성가대란? : 먼저 일반적으로 성가라는 용어는 범(凡) 종교적으로 사용하는 말로서 일반적인 음악과는 다른 거룩한 음악이란 뜻이다. 그래서 성가는 범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는 ‘종교음악’으로서 세속적인 노래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의 찬불가는 불교의 성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 용어가 전혀 언급이 없다. 오직 찬양 혹은 찬송으로 표현되어 있다. 2. 찬양과 찬양대란? : 찬양이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으로서 참된 경건의 중요한 요소이다. 즉 찬양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성육신과 십자가 지심과 부활, 종말과 재림 등의 구속의 은혜를 노래하는 것이 찬양이고 또 함께 부르는 것이 찬양대인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가진 찬양은 개역성경에는 213회, 찬송은 98회, 찬미는 14회가 나온다. 하지만 성가란 말은 한 곳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찬양은 일반 종교의 성가와는 차원이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만을 높이는 노래인 것이다. 3. 성가와 성가대란 말을 교회에서 사용해 온 이유는? : 왜 성경에도 없는 이 용어를 그동안 교회에서 사용해 왔을까? 그 이유는 1976년에 나온 공동 번역 성경에서 개역성경의 “노래하는 자”, “성가대”로 12회에 걸쳐 번역을 했다. 또 하나의 성가대란 용어의 기원은 한 출판사가 흑인 영가의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곡집”이라 부른 것이 성가대의 이름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의 ‘세이까다이’(성가대 せいかたい, 일본 사람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며 노래할 때 쓰는 용어)가 직수입되면서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서 그동안 찬양대라고 했던 용어가 성가대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성가대란 말은 일본어의 잔재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가대란 말은 1958년 출판된 동아출판사 사전에도 성가대란 명칭이 없었으나 1994년 민중서관의 국어사전에서 처음 등재되었고 그 이전에는 성가대라는 말이 고정되어 사용되는 곳은 일본의 ‘세이까다이’뿐이었다. III. 결론과 제언 앞서 서론에서 밝힌 대로 성가대와 찬앙대라는 말은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동안 큰 문제 없이 사용해 왔기 때문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성경에도 없는 말이며, 일본어의 잔재라는 문제도 있다고 볼 때, 또한 타 종교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굳이 성가대란 말을 계속 사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성경에도 없는 성가나 성가대란 말보다는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사용해 왔던 찬양, 찬양대란 우리 고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올바른 일인 것이다.
-
[오성한 목사] 성경의 큰 그림과 안식(1)
1)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창조되었다(창1:26~28).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일 때 가장 행복하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안식한다. 사람은 창조 되자마자 안식을 살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함께 안식하시려고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을 완벽하게 창조하셨다. 완벽이 무엇인가? 완벽하다는 말이 단순하게 세상을 좋고, 아름답게 창조했다는 말로만 보아선 안 된다. 물론 그런 뜻도 있다. 그러나 완벽하게 창조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상태를 말한다. 비 인격체인 피조물이 완벽할 수 있는 것은 인격체인 사람이 완벽할 때 완벽할 수 있다. 모든 피조물들이 사람의 손에 주어졌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하나님과 동일시 될 때 완벽하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하게 세상을 창조하셨다.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였고 완벽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로 완벽했다. 그래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 되게 하신 일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 될 때 완벽하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임마누엘을 이루시는 날 우리는 하나 되었다. 완벽 해졌다. 회복된 날이다. 하나님의 완전함 같이 우리도 완전해졌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고 하셨다. 안식을 말한다. 완전함을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임을 알 때 완전하다. 또 이것이 행복이고 안식이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 이것을 보고 안식의 삶이라고 한다. 완벽하기 때문에 더 이상 무엇을 보텔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안식은 피곤해서 안식하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어 안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고 완벽하기에 안식이다. 점이라도 하나 더 찍으면 작품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붓을 놓는 화가처럼 완벽하고 부족함이 없어 쉬시는 것이 안식이다. 사람은 창조되자말자 안식을 살았었다. 보기에 심히 좋았다. 하나님은 인간을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당연히 모든 피조물도 완전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가 하나님의 첫 번째 그림이다. 하나님의 큰 그림은 안식이었다. 2) 사단에게 속아 안식을 잃었다 사람은 사단에게 속아 합법적인 하나님과의 분리가 일어나 버렸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완전함이고, 안식인데 안식을 잃어버린 것이다. 마귀에게 속아서 신적 통치권을 빼앗겨 버렸다.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함으로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는 말씀대로 되었다. 그 결과 안식, 즉 임마누엘의 완벽함을 잃어 버렸다. 마귀도 언제나 말을 먼저 먹인다. 마지막 때도 마귀의 주된 일이 말을 먹이는 일을 한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계12:15)라고 했다. 여자인 교회를 말인 물로 떠내려 보내려 한다. 뱀인 마귀는 입에서 물을 토하는 것이다. 다른 복음을 많이 토한다. 다른 복음은 없다. 하늘의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갈1:8). 마귀는 다른 말을 토해 냄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큰 그림인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은 안식이다.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보아야하는데 보지 못하게 다른 말을 넣는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고 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의 그림인 안식이 없으면 두렵다. 안식을 보지 못하는 자의 모습이다. 안식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내가 다른 복음을 먹었습니다."라고 스스로 확증한다. 스스로 벗었다고, 두렵다고 고백한다. 그전에도 벗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누가 너에게 벗었다고 알려줬느냐"고 물으신다. “누가 그런 말을 해 주더냐”라는 뜻이다. “네가 무엇인가 스스로 입어야 한다고 누가 말 하더냐”는 질문이다. 지금도 사단은 우리가 예수 외에도 무엇을 입어야 한다고 속삭인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왜 따먹었느냐?"라고하시지 않고 "누가 벗었다는 것을 알려줬느냐?"라고 물으셨다. 말의 권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 주는 순간이다. 사단의 속임수는 다 말로부터 온다.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말을 들으면 보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큰 그림이 보인다. 사단의 말을 들으면 벌거벗음이 보이게 된다. 두려움을 보게 되고, 두려워 숨게 된다. 주님이 입혀 주신 것 외에 뭔가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엔 온전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하는가? 말이 온전하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고 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욕도 안해야하고,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욕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말이 온전하려면 복음을 말하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이다. 복음을 말하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우리도 온전할 수 있다. 온전한 말을 하면 아버지의 일인 안식을 보게 된다. 우리에게 너무나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한다. 너무 아까운 세월을, 아까운 인생을, 남의 이야기하다가 다 보낸다. 비판과 불평불만만 하다가 시간을 다 보낸다. 안식이 있을 리가 없다. 사단은 말로 우리를 속였고 속이고 있다. 안식은 우리의 믿음의 말에서 온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10:10). 마귀에게 속아 안식을 잃어버린 것은 말 때문이었다.
-
[하수룡 장로] 희생
우리는 봄이 오면 마음이 들떠 어디론가 꽃구경을 가기를 원하고, 늘 가는 곳이라 할지라도 봄꽃이 핀 곳이면 가족들이 나들이하는 경우가 많다. 4월 초순에 비가 오는 산복도로를 거쳐 교회에 가는 도중에 아름답게 피어있는 벚꽃을 바라보는 순간 “아! 이렇게 아름답게 핀 꽃을 비바람이 망치면 어떻게 하지?”하는 걱정이 앞선다. 내 집 정원의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거워할 수 있는 벚꽃을 비바람 때문에 망치게 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통상 벚꽃은 일본의 나라꽃이라 생각하고 별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은데 실상은 원산지가 우리나라 제주도라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나라의 꽃이니까 더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라 믿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잎도 피우지 않고 살얼음이 언 메마른 땅속에서 뿌리를 내려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한겨울 내내 자기의 몸을 단단히 무장하여 정한 시간에 꽃을 피우는 식물이 바로 벚꽃이라는 데서 관심이 더 가고 피어있는 그 자체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가정집 정원에 있는 꽃나무들은 그래도 춥다고 싸주기도 하고 거름도 하며 옮겨주기도 하고 가지치기도 하지만 벚꽃은 차가 많이 다니는 길가나 산 중에서 전혀 무관심 속에 홀로 자립하여 이른 봄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 너무 장하고 아름다울 뿐이다. 꽃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수 있는 시간은 겨우 일주일도 안 되기에 항상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렇게 고생하여 잠간 동안을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선사하기 위해 정말 희생한 벚꽃의 수명이 좀 오래 지속 되면 얼마나 좋으랴. 게다가 벚꽃이 질 때에도 벚 눈을 내려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아무 불평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따뜻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마치 눈이 오는듯한 모습으로 꽃눈이 낙화한다. 그것이 바로 자연적인 아름다움의 자체가 아닐까? 흰 꽃잎이 떨어진 것은 분명히 하얀색인데 바람이 불어 모인 블럭 바닥은 분홍색 꽃눈으로 소복하게 쌓인다. 눈은 밟으면 ‘뽀드득’이란 소리라도 내지만 떨어진 꽃눈은 아무리 밟아도 소리를 내지 않고 인간의 발과 자동차의 바퀴에 짓밟히며 휘날릴 뿐이다. 오직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순종하여 이렇게 끝까지 희생하는 것이 바로 벚꽃이라는 것에 나는 감동을 받는다. 우리 주위에도 다른 사람의 아무런 도움이 없이 주님이 말씀하신 일들을 잘 수행하여 사회에 귀감이 된 아름다운 모습이 매스컴에 등장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분들은 오직 자기에게 주어진 미션을 좌우를 살피지 않고 오직 앞만 바라보고 나아갔기 때문에 큰일을 해내었을 것이다. 한낱 미물과 같은 식물도 말없이 자기를 희생하고 아름다움을 선물하는데 우리가 기대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지 못하면 실망하고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벚꽃은 자기의 아름다움을 봄꽃으로 인간인 우리에게 잠간 보여주기 위해 동한의 춥고 쓰라린 고통을 다 견뎌내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변함없이 희생한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믿음의 형제들과 이웃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정말 벚꽃처럼 나를 희생하고 말없이 맡겨진 일을 수행하는 데 최선을 다하면 우리가 사는 곳이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
[조희완 목사] 저축할 내용 (창41:46-57)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에 보도 된 내용에 의하면, <영국 교육과정평가원>이 새로운 아동 교육개혁 방안을 발표 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11세-16세까지 중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금융교육을 학교 정규 과목으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수학을 배우고 과학을 배우는 것처럼 이 수업을 통해서 스스로 부채를 관리하는 것을 배우고,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 연금 계획 짜는 것을 배우고, 금리를 계산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는 9월부터는 모든 <영국>의 5세 된 아동들에게는 정부로부터 250파운드가 지원 되어서 자신의 펀드를 개설하게 된다고 합니다. 일반 가정의 아동들에게는 250파운드(약$500)의 펀드 자금이 지원되고 저소득층 아동들에게는 500파운드의 펀드 자금이 지원된다고 합니다. <영국>정부가 이렇게 어린 아이들에게 조기금융교육을 실시하는 까닭은 매년 해마다 개인 파산 신청자들이 늘어나는데 대한 대처 방안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사람이 일찍 돈을 알면 좋지 않다고 해서 어린아이들에게 돈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돈을 가르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돈의 가치를 알게 해야 하고, 올바르게 돈 버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고, 올바르게 돈을 저축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보다 더 안정된 내일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안정된 내일을 사는데 있어서 저축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 가운데 꼭 저축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많이 저축할수록 보다 나은 내일을 보장해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저축해야 할 것들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물질을 저축해야 합니다.(창41:46-57) 둘째로, 기도를 저축해야 합니다.(시32:6-7) 셋째로, 선행을 저축해야 합니다.(딤전6:17-19) 필요하고 좋은 것들을 많이 저축해서 오늘 보다 내일이 더 안정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
[박봉석 목사] 해녀의 욕심
‘물숨’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제주 출신의 고희영 감독이 7년 동안 제주도 우도(牛島)의 해녀들과 함께 지내면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잘 몰랐던 해녀들의 삶을 속속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해녀들에게는 계급이 있습니다. 제일 높은 계급인 상군은 가장 깊은 바다까지 들어가서 작업을 합니다. 보통 15-20미터의 바다까지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중군이고, 맨 마지막 하군은 일명 똥군이라고도 부르는데, 2미터 이하의 바다에서만 작업을 합니다. 그 해녀들의 계급은 노력과 경험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자신의 숨 길이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바로 그 숨길이로 계급이 정해진다고 합니다. 이렇듯 상군, 중군, 하군 이라는 계급에 따라 해녀들이 작업하는 바다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하지만 모든 해녀들이 바다에 들어갈 때마다 동일하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물숨’입니다. 물숨은 바다 밖에서 숨을 쉬는 것과는 달리 바다 밑에서 들이마시는 숨을 의미합니다. 이 물숨은 해녀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아주 무서운 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에 한 두 명의 해녀가 물숨을 먹고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물숨은 다른 말로 하자면 욕심입니다. 자신의 숨 길이만큼 숨을 참으면서 작업을 하던 해녀가 다시 숨을 쉬기 위해서 물 위로 올라가려 합니다. 이 때 저 밑에 큼지막한 전복이 해녀의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그 순간, 그것에 대한 욕심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전복을 따기 위하여 물 아래로 내려가는 해녀는 그 물숨을 먹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사고를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면서도 욕심을 이기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해녀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은 자신의 숨만큼만 해산물을 따서 재빨리 물 위로 나오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부질없는 욕심을 경계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러하기에 해녀들은 바다를 가리켜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다는 무서운 곳이지만, 욕심을 버리면 친정엄마처럼 다 내어 주는 곳이야!” 우리는 손안에 그 무언가를 움켜쥐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숨을 참으며 견뎌냈을까요? 우리 또한 욕심내지 않아야 할 것,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에 욕심을 내다가 물숨을 마시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장 14-15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만족하는 법을 모릅니다. 진짜 자신들에게 필요한 영적인 것에 대한 열망은 없이 사실은 지금 필요하지 않는 것들을 위해서 더 더를 외치며 욕심에 사로잡혀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에든지 욕심을 품는 순간 불행이 시작됩니다. 욕심이 많을수록 불만이 많아지고 마귀의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욕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죄에 가장 약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욕심은 하나님께도 응답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다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에 응답하시지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여서 기도 응답에 대해서 의심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야고보서 4장 3절에서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의 기도는 좋아도 너희의 욕심은 싫다, 나는 결코 너희의 욕심에는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욕심을 내고 또 내지만 사실은 욕심으로 인해서 인간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서 이미 내게 주신 것에 자족하는 데 있고, 그 자족에서 진정한 감사가 나오고, 그 감사로 인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제 헛된 욕심의 물숨을 버리고 자족과 감사의 바른 숨을 쉬면서 진정한 행복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
- 오피니언
- 설교/강의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
- 오피니언
- 칼럼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 오피니언
- 기고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
- 오피니언
- 성경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
- 오피니언
- 기고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
[조희완 목사] 소망의 대상 (시146:1-5)
- 영국의 유명한 화가 <조지 프레드릭 왓츠>가 그린 <소망>이라는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의 내용을 살펴보면, 지구가 있는데 그 지구 위에 한 소녀가 걸터앉아서 하프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 하프의 줄이 거의 다 끊어지고 단 한 줄만 남아 있는데 그 소녀는 마지막 남은 한 줄을 가지고 열심히 연주를 하고 있습니다. 모든 줄이 정상적으로 다 있어도 연주하기가 어려울 텐데 한 줄이 남은 것으로 연주를 하자니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 마지막 남은 한 줄의 이름이 바로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그 그림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림입니다. 그 그림에 담겨있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모든 줄이 끊어질 수가 있습니다. 건강의 줄이 끊어지고, 물질의 줄이 끊어지고, 인간관계의 줄이 다 끊어지고, 광야에 나 홀로 남은 것 같은 상황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한 가닥 소망의 줄만 있으면 우리는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고 인생을 노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강력한 메시지는 바로 소망입니다. 사자굴 속에 던져진 <다니엘>이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이 원수들에게 그렇게 쫓겨 다니면서도 낙심하지 않은 것도 바로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렇게 불같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당당했던 것도 바로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은 구원의 방법을 알려주는 구원의 책이자 소망을 불어넣어 주는 소망의 책입니다. 독일의 문호 <괴테>가 말하기를, “소망이 있으면 행복의 싹은 틀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행복의 싹을 틔우기 위해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무엇을 소망하며 살아야 할까요? 첫째로, 주님께 대한 소망으로 살아야 합니다.(시146:3-5) 둘째로, 내일에 대한 소망으로 살아야 합니다.(행27:20-25) 셋째로,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살아야 합니다.(벧전1:3-4) 불행이 닥쳐와도 소망이 있는 한 행복의 싹은 틀 수 있습니다.
-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
[조희완 목사] 소망의 대상 (시146:1-5)
-
-
[양대식 목사] 리더에 대하여(2)
- 구타하지 말아야 한다 남을 때리고 구타하는 자가 있습니다. 폭력을 행하는 자가 있습니다. 언어 폭력, 말로 사람들을 괴롭히는 자입니다. 리더는 구타하지 않아야 합니다. 구타하는 것은 사람에게 상처와 피해를 주는 자입니다. 리더는 구타하지 않고 다투거나 싸우지 않아야 합니다. 구타하는 자는 리더가 아닙니다. 리더는 상처 많은 자들을 위로해 주고 싸매어 주는 자입니다. 부드러운 마음, 부드러운 말로 약한 자들을 도와 주어야 합니다. 좋은 리더는 마음이 따뜻하고 상대방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자입니다. 구타하는 자는 지혜가 없는 자이고 악인입니다. 구타하면 관계가 깨지고 상처를 줍니다. 구타하는 행동은 좋지 않은 마음에서 나오는 결과입니다. 남을 때리고 구타하는 자가 있습니다. 폭력을 행하는 자가 있습니다. 언어 폭력, 말로 사람들을 괴롭히는 자입니다. 리더는 구타하지 않아야 합니다. 구타하는 것은 사람에게 상처와 피해를 주는 자입니다. 리더는 구타하지 않고 다투거나 싸우지 않아야 합니다. 구타하는 자는 리더가 아닙니다. 리더는 상처 많은 자들을 위로해 주고 싸매어 주는 자입니다. 부드러운 마음, 부드러운 말로 약한 자들을 도와 주어야 합니다. 좋은 리더는 마음이 따뜻하고 상대방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자입니다. 구타하는 자는 지혜가 없는 자이고 악인입니다. 구타하면 관계가 깨지고 상처를 줍니다. 구타하는 행동은 좋지 않은 마음에서 나오는 결과입니다. 돈을 사랑하지 않아야 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됩니다. 돈의 유혹이 큽니다. 리더는 돈을 사랑하지 않아야 합니다. 돈의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리더가 돈을 탐하고 돈에 대해 욕심부리다가 망하기도 합니다. 리더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돈을 가지고 절약하면서 잘 관리 해야 합니다. 돈을 함부로 사용하다가 올무에 걸리기도 합니다. 공적인 재정의 돈을 사용한 후 영수증 처리 하는 것도 리더의 지혜입니다. 돈에 대해서는 투명하고 깨끗해야 리더가 실수하지 않습니다. 리더는 무리하게 누군가에게 돈을 요구하지 않아야 합니다. 돈 거래, 돈을 꾸어주고 이자 받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리더는 뇌물을 받거나 뇌물을 주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리더가 돈 때문에 무너지고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단은 돈을 가지고 리더를 유혹하여 넘어뜨립니다. 리더가 돈을 미워하거나 돈을 벌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돈을 사랑해서 하나님 보다 돈을 더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돈은 눈을 흐리게 만듭니다. 노력하지 않거나, 불로소득을 좋아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돈을 잘 사용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절약하고 선한데는 돈을 사용하는 자가 좋은 리더입니다. 재물의 욕심을 버리고 자족해야 합니다. 재물, 돈의 유혹에 넘어지지 않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
- 오피니언
- 논문/책
-
[양대식 목사] 리더에 대하여(2)
-
-
[최호숙 목사] 뒤 끝 있는 사람과 뒤끝 없는 사람
-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모든 삶의 영역 속에 관계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 관계적 삶이 잘 되면 좋지만 잘못 될 경우 입으로 뱉어내는 말들이 있다. “밴댕이 소갈딱지” “밴댕이 소갈머리” “쫀쫀한 놈” “뒤에서 호박씨 깐다” “뒤 끝 작렬”.. 등 여러 표현들이 있다. 어떤 사건이 생겼을 때 이해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여 기분이 상하였을 때 당사자 앞에서는 말 못하고 뒤에서 구시렁대며 되씹고 반복해서 그 사람에 대해 흉을 본다거나 평가한다거나 자기주장을 피력하는 사람을 두고 “뒤 끝 작렬- (뒤끝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반대로, 뒤에서 말하지는 않지만 당사자 면전에 대고 속사포를 쏘듯 쏘아붙이며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을 퍼부어 대는 사람을 “앞 끝(?) 작렬” 이라고 한다. 보통 이런 경우 흑백 논리 이분법에 의하여 “뒤 끝 있는 사람”은 나쁜 사람, “뒤 끝 없는 사람”은 정의롭고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뒤 끝 없는 사람은 정말 좋은 사람일까? 필자가 경험한 바로는 그렇지 않다. 성도들 중에는 관계성이 원만하지 못해서 여기저기서 트러블(trouble)을 일으키며 사람 면전에 대고 독한 말을 퍼붓는 바람에 구역 식구들이 상처받아 교회를 떠나고, 그 사람 때문에 전도 회원들이 고통당하고 식사를 하는 식사 자리에서도 큰소리치고 하는 통에 사람들이 모두 그 사람만 보면 피한다. 그런데 본인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인 줄을 모른다. 목사 앞에 찾아와서 하는 말 “목사님, 제가 큰소리치고 해도 뒤 끝은 없는 사람입니다.” 면전에 상처를 주며 막말을 남발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자신은 성격이 과격해도 뒤 끝은 없는 사람이란다. 뒤 끝이 왜 없는가? 사람 면전에 대고 할 말 못할 말 다 퍼부었기 때문에 더 이상 뒤에서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본인은 뒤 끝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면 끝나겠지만 아픈 상처를 안고 할 말도 못하고 속병을 앓아야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면 뒤 끝 있는 사람과, 뒤 끝 없는 사람 중 누가 더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일까? 정답은 “오십 보 백 보”, “거기서 거기” “도긴 개긴”이다. 당신은 어떤 유형인가? 뒤 끝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반복하며 되씹어 대어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며 살아온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나 자신이 지금까지 뒤 끝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다면 나의 말 한 마디에 상처받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마하트마 간디 (Mohandas K. Gandhi)는 이런 말을 남겼다. “다른 사람을 아는 사람은 지식이 많은 사람이고,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다른 사람을 이기는 사람은 그저 힘이 센 것에 불과하지만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 우리는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 것을 아는 지혜로운 자가 되고, 타인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이기는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
- 오피니언
- 칼럼
- 살며 생각하며
-
[최호숙 목사] 뒤 끝 있는 사람과 뒤끝 없는 사람
-
-
[오태열 목사] 최종 승리를 믿는 삶
- 믿음의 사람들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고 천만인이 에워싸진을 친다 해도(시3:6)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최종 승리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은 이원론적 삶과 대비되는 삶, 삶의 여러 가지 요인들이 통합하여 승리한다는 통합의 삶, 은혜의 삶이다. 이원론적 삶은 좋은 것과 나쁜 것,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좋은 환경과 나쁜 환경으로 분리하는 삶이다. 그래서 일희일비하며 나쁜 것은 감추려 하고 좋은 것만 드러내려 하는 위장된 삶을 살게 된다. 이러한 삶은 피곤한 삶이요, 헛된 삶이다. 하나님이 없는 대다수의 사람은 이러한 삶을 살기에 삶 자체가 피곤하다. 솔로몬은 전도서 1:2절에 하나님 없는 인생의 삶을 “헛된 삶”이라 규정하면서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라고 반문하였다. 이는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고백이며 생각이다. 그리고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려고 한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 는 탕자처럼 인류의 불행은 하나님 없이 살려고 하는 데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자 A. Comte(1798-1857년)는 인간 정신발달을 세 단계로 구분하여 유아기의 신화적, 가상적 사고단계. 청소년기의 철학적, 추상적 사고단계. 성숙기의 과학적, 실증적 사고단계로 구분하여 종교란 인류가 유아기 단계에서 필요한 유물에 불과하기에 과학적 실증단계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神이 필요 없다고 하였다. F. Nietzsche(1844-1900년)는 神에 대한 철저한 부정과 함께 神과 대립된 초인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사상과 함께 과학의 발달과 산업화는 현실적인 문제 해결과 영원한 내세보다. 현실적으로 잘사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 같은 시대적 사조는 합리주의, 개인주의, 물질적 부요로 인한 탈종교적, 탈윤리적으로 神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내 마음대로 살 수 없는 것이 세상살이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내 뜻대로 되고 안 되는데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최종 승리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실패조차 인생의 낭비가 아니다. 탕자가 도시에 나가서 젊음과 돈을 낭비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과 가치를 깨닫게 되는 귀중한 경험을 하게 된다. 내가 실패한 것조차도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있음을 알게 된다. 작가가 영화나 드라마를 연출할 때, 주인공이 금수저를 물고 나와 호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내용을 연출하지 않는다. 한결같이 흙수저를 물고 나와서 어려운 고난과 시련, 위기를 넘어 최종 승리를 쟁취하는 내용을 연출한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연출가이시다. 요셉과 다윗, 욥의 일대기는 하나님께서 연출하신 한편의 드라마다. 이들과 같이 믿음의 사람들은 최종 승리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삶을 체험하게 된다. 여러분의 삶에 고난의 터널이 계속되고 눈에 눈물이 왜 그치지 않는가? 더 큰 축복과 승리의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고난은 내게 유익이라” 이 고백은 아무나 하는 고백이 아니다. 최종 승리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믿고 확신하는 사람들만이 고백할 수 있다. 고난은 끝이 아니라 승리의 과정임을 믿고, 내년 한해도 범사에 감사하며,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
[오태열 목사] 최종 승리를 믿는 삶
-
-
[신재철 목사] 저 진짜 목사인데요
- 안수받으면 슈퍼맨이 될 줄 알았다. 성령의 뜨거운 능력이 내 온몸을 감싸며 능력치가 상승할 줄 알았다. 설교의 탁월함이나 은사까지는 아니라도 무엇인가는 변화가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목사 안수 후 내 삶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교회에서는 차량운행과 교육부서 아이들 예배, 찬양 인도로 분주한 사람이었고 가정에서는 코빼기 보이지 않는 못난 남편, 아빠였다. “아, 그 문제를 어떻게 풀지?” 교회의 여러 가지 난제를 두고 고민하며 교회 물품을 사기 위해 광복동 거리를 걷는다. 교회의 사역도, 나의 진로도, 집안의 어려움도 내 힘으로 감당하기에는 어느 하나 가벼운 것이 없다. 그렇게 발걸음도 무겁게 이동할 때 누군가 말을 건넨다. “참, 덕이 많아 보이세요.” 덕은 그 사람이 더 충만해 보인다. 복장은 촌스러울 정도로 수수했지만, 목사인 나보다 더 친절한 음성과 미소를 장착했다. 자기 정체를 밝히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정해진 패턴의 이야기. 그는 현대판 도인이었다. 조상 이야기, 제사 이야기를 풀어가며 그가 내게 던진 마지막 말은 역시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도를 아세요?” “네, 도(道)를 찾는 구도자는 아니고요. 도(道)를 전하는 전도자입니다. 같은 종교인인데 저에게 너무 힘 빼지 마세요. 저는 개신교 목사입니다.” 상대가 흠칫 놀란다. 나의 친절함에 놀랐을까? 아니면 나의 정체에 놀랐을까? 그 답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그는 크게 손사래를 하며 목소리를 높인다. 도를 전할 때 보다 목소리가 더 컸다. “에이, 아무리 우리가 귀찮아도 그런 말씀 함부로 하는 거 아닙니다. 목사님 사칭하면 못 써요!” 그의 과한 손짓에 나는 공중에서 쫓겨 다니는 파리가 된 줄 알았다. 내가 목사라는 사실이 그렇게 충격적일까? 겸연쩍음에 내 복장을 살피고, 죄 없는 내 손도 본다. ‘저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도인 앞에서 목사는 몹시 당황스럽다. 나는 한동안 도(道)와 진리(眞理)가 아닌 나의 정체성을 두고 그와 옥신각신했다. ‘이게 뭐라고.’ 나도 자존심이 상했을까? 목사 신분증이 있다면 보여주고 싶을 정도였다. 끝없는 이상한 논쟁도 끝이 나고 그는 나의 자백을 듣지 못하고 한 마디 남기며 돌아섰다. “앞으로 그러지 마세요. 그러다 벌 받아요.” 내가 진 느낌이다. 당당하게 갈 길을 가는 그와 다르게 나의 목소리는 주눅이 들었다. “나 진짜 목사 맞아요......” 에필로그 지금은 어디 가면 많이 듣는 말. “전도사님이세요?” 종교인 같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벌써 목사가 된 지 10년이 넘어간다. 이제야 전도사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은 생각도 든다. 승진된 느낌이랄까?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 그 도인 앞에 평가를 받아보고 싶다. 삽화 ; 김주은
-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
[신재철 목사] 저 진짜 목사인데요
-
-
[오성한 목사] 영의 생각이 능력이다(2/2)
- 주님의 말이 영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 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영의 생각을 하려면 그래서 주님의 말씀이 있어야 한다. 주님의 말이 나의 생각이 되도록 훈련해야 한다. 이것은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묵상은 주야로 하는 것이고 기도는 부르짖어 하는 것이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생명과 평안이 넘치는 길을 탣ㄱ하라. 생명과 평안이 오늘도 넘쳐난다. 육신의 법이 사망인 이유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계속해서 나를 사로잡아 오는 죄의 법에 잡혀 살면 탄식만 나올 뿐이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2-24)라고 했다. 탄식의 삶에서 감탄의 삶으로 나가 길이 끊임없이 사로잡아 오는 죄의 법인 육신의 생각에 집중하지 않고 영의 생각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1, 7). 육신의 생각은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말씀을 받으려고 하지 않고 할 수도 없다. 영의 생각은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말씀을 감격으로 받아 탄식의 삶이 아닌 감격의 삶을 살게 한다. 우리의 죄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청산되었다. 과거의 죄가 청산되었다고 믿으면서 미래에는 우리의 힘으로 선을 이루어야 한다면 가망이 없다. 미래를 잘 못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과거 현재는 용납하셨지만 미래는 네가 하는 것에 달렸어. 네가 잘 살아야돼"라고 마귀는 속삭인다. "미래에는 우리가 죄 안 짓고 살아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의롭다고 하실 거야"라는 게 사단의 소리다.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만약 하나님께서 과거의 죄만 용서하시고 “미래에는 너의 힘으로 살라”고 하셨다면 우리는 가망 없다. 당신은 가망이 있는가? 불가능하다. 그렇지 않은가? 미래는 “네가 네 힘으로 살라”고 한다면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말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청산했다는 말이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의미는 미래의 죄까지 용서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주님의 말씀이 영이다. 영의 생각으로 이해가 되야 한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 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일3:9). 나는 예전에 이 구절이 이해가 안 돼 고민을 많이 했다. 미래의 죄까지 용서받았음이 믿어질 때 받아들일 수 있는 말씀이었다. 이 말씀이 과거, 현재, 미래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의미이다. 미래에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의미는 미래의 죄가 용서 받았다는 의미다. 과거의 죄가 흰 눈보다 더 희게 청산 된 것과 마찬가지로 미래의 죄도 흰 눈보다 더 희게 청산 되었다. 육신을 가진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의 개념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께는 시간이 없으시다.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의 미래의 삶은 아름답다. 감격의 삶 속에 언제 어디서나 능력의 사람을 살 수 있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용서의 복음은 주야로 묵상할 핵심의 말씀이다. 두 손을 들고 “할렐루야” 외치며 노래할 복음이다. 나는 이 글을 쓰다 멈추고 두 손을 들고 흔들며 춤을 추었다.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린다. “주여! 주님 감사합니다.” 신앙생활을 좀 더 잘 사는데 초점을 두는 것은 잘못 된 것이다. 죄 짓지 않는 삶에 조점을 두는 것도 잘 못 된 것이다. 실천하는 것에 초점을 두기 전에 먼저 할 일은 생각의 변화다. 영의 생각으로 충만하게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생각이 그러하면 그 사람이 그러하다. 생각은 아는 것에서 온다. 주님은 우리가 알기를 원한다고 많이 이야기 하셨다. 바울 사도가 지혜와 계시의 눈이 열리기를 기도했다(엡1:17-23). 지혜의 계시의 눈이 열리도록 케네스 헤긴 목사는 6개월을 집중 기도했다고 했다. 6개월의 기간에 특별히 2박3일을 구별하여 집중 기도하기도 했단다. 그이 책 “믿는 자의 권세”라는 책에서 기록하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여러 번 읽으면서 나도 기도했다. 처음에는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눈이 열리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나도 6개월을 기도하면 될까하는 답답함 까지 생겼다. 새번역 성경으로도 읽으며 기도했다. 과연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이 되고 계시의 문이 가장 명확하게 열리도록 한다. 나는 바울의 기도를 나의 기도록 붙잡고 성경을 읽으면서 선포하며 기도하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그렇게 많이 반복해서 읽었건만 그 날은 달랐다. 에베소서 1장 19절이었다. 이것이 지혜와 계시의 눈이 열리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했다. 새번역 성경에는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알기를 바랍니다.”(엡1:19, 새번역)라고 기록한다. 나는 이 구절을 대하면서 함성을 질렀다. “주님, 저는 알기로 결정했습니다. 저는 압니다.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고 큰지를 압니다. 제 안에 엄청난 하나님의 능력이 있음을 믿습니다.”라고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혼자 기도하는 시간이었는데 너무 기뻤다. 지혜와 계시의 눈이 열린 것이다. 이것이 지혜와 계시가 열린 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상태와 상관없이 영의 생각을 항상 하는 것이 신앙생황이다.
-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
[오성한 목사] 영의 생각이 능력이다(2/2)
-
-
[박동철 장로] 3.1절 104주년, 1919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 이야기
- 3.1절 104주년이 다가온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시작된 조선 독립만세운동의 함성은 일제 강점에서 새로 태어나는 거대한 울음이었다. 1910년 나라를 잃은 경술국치 9년 만에 한민족 독립의 함성이 터진 것이었다. 3.1독립 운동은 일제 억압에서 해방을 위한 만세운동을 넘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씨앗이 되는 민족 자결의 시작이었다. 필자는 4년 전 3.1절 100주년을 맞아 그 운동의 중심이 교회였다는 사실(史實)을 어렴풋이 알고 주체할 수 없는 감동이 일었다. 그래서 당시 경남 지역 3.1운동 사실적 이야기를 집대성하는 ‘다시 보는 경남의 3.1운동’ 역사서를 발간하는데 동참한 적이 있다. 3.1만세운동은 일제강점의 민족의 치욕과 억압에서 2천만 민족이 한마음이 되었고 곧바로 독립의 완성으로 이어가지 못했지만 전후의 역사는 오늘의 광복과 직결되는 큰 길을 연결한다. 세계 개방 물결에도 우물 안에 있던 조선은 5백년 왕조가 멸망의 길에서 결국 나라를 빼앗기고 긴 설움에 싸였다. 그러나 나라를 찾아야한다는 절박했던 3.1함성이 국내외로 확산과 함께 세계 속에 한반도의 존재를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강압이 시작되자 많은 인재들이 미국과 중국 등지로 망명과 유학의 길을 찾았다. 일찍이 미국유학중이던 이승만이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볼 수있는 3.1절 104주년의 해인 듯하다. 3.1운동 즈음 이승만은 미국 주재 유학생과 기독교 지도자들과 함께 조선 독립의 필요성을 세계에 알려야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독립신문을 창간했던 서재필 박사와 1919년 4월 14일부터 3일간 미국 펜실베이니아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자유대회를 개최한다. 이 자리에 미국 전역에서 서재필, 이승만, 유일한, 민찬호, 정한경, 노디 김, 윤병구, 조병옥과 미국인 톰킨스 목사등 160명이 참가한다. 이대회에서 제1차 한국의회를 열어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선포한다. 이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내는 격려문, 미국조야에 한국의 상황을 알리고 양식 있는 일본인에게 서한문을 보낸다. 해외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의 시작이자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씨를 심는 거대한 역사의 시간이 되었다. 오는 3월 1일부터 5일간 경남 창원특례시 KBS홀에서 한인자유대회 기록과 역사의 기억을 찾아내는 다큐멘터리 음악극이 장대하게 막을 올린다. 경남기독교총연합회와 바른가치수호경남도민연합 시민운동 헌신자들이 역사적인 3.1절에 맞춰 대형 행사를 개최한다. 우리는 창원에서 막을 올리는 1919필라델피아 다큐멘터리 음악극을 보고 오늘의 자유 대한민국의 뿌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이 어떻게 자유민주의가 되었는가 오늘날 번영의 나라가 되었는가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다소 기독교 색채가 있지만 대한민국의 해외독립운동의 흐름과 이의 바탕으로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던 근원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미 서울에서 여러 차례 공연한 바 있고 관람자들의 기쁨과 탄식으로 관전평을 쏟아냈다. 음악극을 보며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 역사하신 하나님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의 대한민국의 나라가 있게 한 1919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에 헌신하신 선각자들에게 감사를 보낸다. 젊은이들이 새롭게 꿈꾸어야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새롭게 역사적인 큰 과제를 던지는 음악극이었다. 나라를 위해서는 국가비전을 위해 결연함과 담대함이 있어야 한다는 사명을 부여해 주었다. 앞서 던져준 수많은 관람평이 보기도 전에 감동을 준다. 이 음악극은 아트플랫폼 기독 장인들이 펼치는 거대한 예술잔치가 될 것이다.
-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
[박동철 장로] 3.1절 104주년, 1919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 이야기
-
-
[박동철 장로] 추락하는 한국교회 신뢰도, 그래도 교회가 희망이다
- 한국교회 사회 신뢰도 조사가 자주 발표되고 있다. 지난해 말, 어느 조사기관이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개신교 신뢰도가 18.1%로 2년 전에 비해 13.7% 떨어졌다. 종교별 호감도는 불교 66.3%, 천주교 65.4%, 기독교 25.3% 로 나타났다. 개신교의 분포도는 17%로 신뢰도와 비슷한 수치였다. 조사 결과를 보면 개신교 인구는 아직 9백만 명에 이르지만 신뢰도는 인구대비 크게 낮다고 봐야한다. 이러한 통계가 큰 의미 없다고도 볼 수 있지만 사회 공표와 인식의 중요성을 부정할 수 없다. 문제는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우리들은 교회를 보는 사회인식에 불쾌할 수도 있다. 우리가 사명자로서 사회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은 헬라인이든 유대인이든 이웃을 섬기며 복음을 전하는 자 이어야 한다. 그래서 신학자 칼 바르튼은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성도의 자세를 정의했다. 한국 개 신교는 선교 130년을 넘기며 무지했던 백성을 깨우고 구원의 지경을 넓혀왔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 되는 소망에 온 나라가 복을 받았다. 일제 강점의 고난을 넘기고 6.25전쟁의 참상을 겪었지만 산업화로 세계 속에서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 물질 풍요 속에 따르는 영적 그늘일까. 세상이 교회를 보는 시각은 좀 심각하다. 여러 문화의 시각이 기독교를 비틀어 바라보고 있다. 영화 드라마 작가들이 기독교를 뒤집는 작품을 만들어 인기를 얻고 있다. 교회의 가장 큰 적 진보 이념의 유물론자들의 교회공격이 정도가 심해지고 있다. 예수는 좋으나 교회는 싫고, 그리스도는 좋아도 크리스천은 싫다는 담론이 세상을 덮고 있다. 한국에는 예수 없는 교회가 너무 많다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인본주의 본산 동성애 동성혼의 법제화가 위기를 맞고 있다. 세상이 교회를 보는 시각이 심각하지만 우리는 세상을 등 질 수 없다. 세상이 복음의 밭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원래 권력과 힘이 통치하는 곳이다. 그래서 교회와 세상은 적대의 관계다. 저 옛날 로마시대 초대교회, 우리의 일정시대 핍박받는 교회를 기억해 보자. 권력의 힘이 강할수록 교회를 더욱 억압했다. 권력과 인본주의 발전 이후 우리는 물질 풍요의 자유 문화를 향유하려고 한다. 그래서 교회가 싫은 사회문화가 급격히 발전한다. 세상은 빛과 소금이 되고픈 교회가 싫고 그리스도와 크리스천이 다르게 보임에 따른 공격이 더욱 일고 있다. 크리스천이 외치는 천국과 지옥, 성령과 악령의 분명함에 다원화 세상은 짜증이 나고 있다. 그래서 헬라시대 수많은 신(神)들의 담론을 즐기는 시대를 동경하며 혼합적 구원론이 각광받는 종교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단테는 명작 신곡(神曲)에서 지옥의 문패에 ‘영원히 희망이 없는 곳’이라고 적었다. 우리는 세상의 변화와 시각에 주눅 들 필요가 없다. 교회가 세속화하고 교계정치가 세상보다 못하다는 혹평도 있지만 단테가 적은 것처럼 희망이 없는 곳이 아니고, 그래도 교회가 천국을 찬양하는 유일한 희망임을 뒤집을 순 없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회개할일 많고 더욱 사명 앞으로 나아가야한다. 회개하고 또 회개하며 나아가야한다. 하나님은 왜 이 세상에 예수를 내려보내 구원의 작업을 하셨는가. 우리는 예수를 알아야 하나님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수를 알지 못하면 어떤 방법으로도 천국의 주인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세상은 예수구원의 복음을 알지 못한다. 교회가 예수 십자가의 본체임을 이해 못한다. 예수를 알아야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 수 없었던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교회만이 하나님을 즐길 수 있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성경은 말한다. 와서 보라, 와서 들어보라(요1:39)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니(마1:13), 세상의 신뢰도가 추락할지라도 우리의 사명은 오직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사랑과 구원의 키워드 말이다.
-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
[박동철 장로] 추락하는 한국교회 신뢰도, 그래도 교회가 희망이다
-
-
[박동철 장로] 교회를 넘보는 마약이 판치는 세상
- ‘마약’판치는 세상, 이를 우습게 여기는 요즘 정치권 지난해 연말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의 의정 활동 과정에서 우리 사회에 급증하고 있는 마약사범 관련 잘잘못을 따지는 가운데 볼썽사나운 모습이 있었다.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위가 열려 따가운 질의응답이 있는 중, 이태원 참사를 사전에 막지 못한 원인이 마약 단속 때문이라는 의원의 질문이 있었다. 당시 경찰이 마약단속에 대거 동원되는 통에 사고가 커졌다고 따지는 야당의원들의 발언이었다. 사고 발생 후에도 이런 발언들이 정치권에서 요란하더니 국정조사 과정에서도 불거져 나왔다. 이태원 참사의 불행했던 사정을 폄하할 수 없지만 당시 공권력이 마약 단속에 너무 쏠렸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사고조사를 접근하는 태도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 대한민국에 급격히 퍼지는 마약 실태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마약중독의 실상이 심각해졌다는 통계가 속속 발표되고 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마약상습 중독자들의 문제가 있었지만 쉽게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만에 마약 구하기가 아주 쉽고 이에 주변 마약중독자가 폭증하고 있다. 단적인 예가 최근 5년 동안 관세청에서 대마 밀수량이 500배로 늘어났다는 공식통계가 있다. 필로폰 코카인등 치명적 중독성 마약이 옛날에도 있어왔지만 구하기가 어렵고 아주 고가였다. 최근에는 이러한 마약유통이 너무 흔해졌고 세계적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유통문화가 되어버렸다. 최근 검찰청이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전국 마약 단속령을 내리면서 검찰총장이 설명하는 내용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 청소년들도 피자 한 판 값이면 쉽게 중독성 마약을 구해서 집단으로 마약을 즐긴다(?)고 했다. 그래서 마약사범 중 30%가 20대들이라는 통계를 설명했다. 그야말로 마약이 세상에 판치는 요즘이 되어버렸다. 마약의 유행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온라인 구매가 쉽고 급속도로 세계로 확산되는 이 세상의 마약 풍속도를 어떻게 해야 할까. 마약의 세상 유행은 곧 교회를 넘보게 된다. 교회가 열린 세상에서 가장 경계의 대상을 꼽는다면 동성애와 마약 등 사회악을 초래하는 원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 세상 동성애 합법화가 세계 대부분의 나라로 퍼지고 마약사범이 온 사회를 뒤덮어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교회는 이를 방어할 한계를 넘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 끔찍한 세상의 미래가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는 진단이다. 성경 창세기 30장에 야곱의 가족 레아와 라헬이 신랑 야곱을 차지하기위해 합환채라는 마약성 최음제를 두고 다툼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합환채는 당시 이롭게 쓰였는지 알 수 없지만 학자들은 최음제로 설명한다. 아무튼 이로 인해 야곱의 복잡한 가정이 분란의 씨가 되었는지 또한 알 수 없으나 야곱의 가족은 자녀들 속에 복잡한 삶의 이야기에 들어간다. 사람은 절대 주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야하는 우리의 운명에 순종하지 못하는 죄 성이 있다. 그래서 틈만 나면 타에 쉽게 의존하고자 하는 습관이 나온다. 마약이 대중화하는 데는 인간이 약물에 의존하면서 고통을 잊고자하는데 있다. 여기에 가장 빠르게 약효를 내어주는 것이 요즘 유행하는 중독성 마약이다. 이러한 마약은 극히 일부 중병의 치료에도 쓰이지만 음란한 성문란 행위에 쓰이면서 중독되고 사회 전반을 병들게 한다. 더더욱 위험한 것은 마약의 중독성은 치명적이다. 주로 폭력배 강도행각 성행위에 쓰이면서 마약이 판치는 문화가 심각하다는 데 있다. 마약이 유행하는 사회를 정화시키는 데는 국가 공권력이 강력한 행사를 해야 한다. 그리고 사회저변 치료와 치유의 기능이 살아있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가 일정 부문 복음의 대상이 되어 치유의 전파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에 홍수처럼 범람하는 마약의 사회악이 교회를 되려 넘보고 있는 세태가 너무나 무섭고 걱정이다. 마약의 형편이 한계를 잃고 있을 때 하나님이 이를 포기해버릴까 걱정이다.
-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
[박동철 장로] 교회를 넘보는 마약이 판치는 세상
-
-
[안동철 목사] 성도의 슬기로운 명절 생활
- 우리나라 최고의 명절인 설 명절입니다. 그동안 바쁘게 살면서 잊고 있었던 가족과 친척을 돌아볼 수 있는 행복한 때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탄과 그의 졸개인 귀신들이 성도와 가정을 공격하는 ‘특별부흥회’(?)로 모이는 때입니다. 많은 가정이 이런 명절을 전후에 위기를 맞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우리 가정을 깨뜨리려는 사탄의 집중적인 공격이 있을 것을 생각하고 명절을 보내야 하겠습니다. 명절을 어떻게 보낼지 몇 가지로 정리해 봅니다. 첫째, 제사에 대한 바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사를 조상의 은덕을 기리는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로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사는 중국에서 건너온 중국문화로, 유교, 특별히 성리학이 지배한 조선의 500년의 역사를 통해 이 땅에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 근본 정신을 살펴보면 거짓과 신분 상승에 대한 인간의 탐욕이 결탁된 제도입니다. 기독교는 살아계신 하나님만을 섬기고, 나아가 죽은 자가 아닌 살아 있는 부모와 어른을 공경할 것을 명령합니다(출 20:12). 제사에 대한 바른 생각을 가지고 겸손하되, 당당히 대처하십시오. 둘째, 명절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을 해야 합니다. 구약 율법의 해설서인 <미드라쉬>에 의하면 “험담은 세 사람을 죽인다. 말하는 사람, 험담의 대상이 되는 사람, 그리고 듣는 사람이다.”라고 합니다. 슬기로운 명절 생활을 위해서는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부정적인 말, 정치 이야기, 돈 이야기, 신변잡기 이야기, 결혼과 취업 등의 이야기는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 말이 우리 모두를 죽입니다. 명절에 우리가 해야 할 말은 사람을 격려하고 살리는 말입니다. 셋째, 명절 일은 함께 분담해서 해야 합니다. 명절의 많은 일들을 여성에게만 맡기고 남성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결코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지 않습니다. 성경은 남자와 여자, 주인과 종, 어른과 아이,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과 차별이 없음을 선포합니다(갈 3:28). 우리 모두는 주 안에서 하나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존재입니다(엡 2:22). 그렇기에 모든 명절 일은 분담하여 함께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연약한 성도를 돌아보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명절이 되면 더욱 외로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작은 선물을 보내거나 따뜻한 문자를 보내봅시다. 병원에 있는 분들에게 사랑의 전화를 합시다. 고향교회를 방문하여 축복하고, 헌금을 하는 것도 좋습니다. 오늘 한국의 도시교회는 시골교회의 눈물과 희생으로 세워진 것을 잊지 마십시다. 행복한 설명절, 주님 안에서 안전하고 행복하게 보내시기를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
- 오피니언
- 칼럼
- 특별 칼럼
-
[안동철 목사] 성도의 슬기로운 명절 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