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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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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 오피니언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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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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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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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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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오성한 목사] 바른믿음 (1)
    T.L 오스본이 쓴 “하나님의 큰 그림”이라는 책이 있다. 하나님은 큰 그림을 가지고 계신다. 완벽한 창조의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그런데 사단에 의해 인간이 속았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속량의 그림을 가지셨다. 온전한 복음, 새로운 피조물의 복음, 회복복음으로 하나님이 가지신 큰 그림을 성취하셨다. 하나님의 큰 그림의 결론이 무엇인가? 믿는 자에게 온전한 회복의 복음으로 온전히 회복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에는 이 큰 그림이 있다. 하나님은 이 목적을 가지고 세상을 움직이고 계신다. 믿음의 핵심인 죄인이 의인이 된 것을 믿어야 한다. 믿음의 핵심이 무엇이냐? 죄인이 의인이 되었다 것이다. 그런데 의인으로 끝나면 안 된다. 의인이 된 이유는 임마누엘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이 살고 싶어서 임마누엘 하셨다. 죄인이 의인이 되었다는 것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5:10-13) 믿는 자안에는 아들이 있다. 임마누엘을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다.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는 증거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여기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들을 구원해 두었다. 내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이루어 놓았다.”고 하시는데 그 말을 안 믿으니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여기는 것이다. 여러분을 거짓말하는 자로 보는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는가?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여기니까 예수 믿지 않으면 하나님은 “네가 나를 거짓말쟁이로 여기느냐?”라고 하신다. 믿는 자에게는 증거가 있다. 믿는 자안에 아들이 있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는데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 생명이다. 결과적으로 영생이 있음을 믿게 하시려고 성경이 쓰였다. 의인으로 만드신 이유는 아들이 있으시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바른 믿음에서 우리는 출발해야 한다. 나는 전에는 성령충만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였다. 몰라서 그렇게 생각했다. 귀하고 중요한 사실은 내가 성령충만하다는 믿음의 확신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굉장히 힘든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굉장히 힘이 든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또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 성령님께서 부족하게 계신 것이 아니다. 완벽하게 계신다. 이 사실을 믿고 완벽한 성령님이 내 안에 함께 하심을 믿고 나는 성령의 사람이 되었음을 믿는 믿음에서 신앙생활이 출발해야 한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라고 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주님이 주시는 물을 마신 자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샘물이 영생하도록 솟아난다. 어떤 선행을 한 후에 샘이 솟아나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을 때, 주님이 주는 물을 마실 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은 터진 것이다. 지금도 예수를 믿는 당신 안에서는 영생하도록 샘물이 솟아오르고 있다. 이 사실을 아는 믿음에서 신앙생활을 출발해야 한다. 새벽기도를 많이 해야 어느 날 샘물이 솟아오른다고 하지 않았다. 예수를 믿은 후 수련을 닦아야 샘물이 솟아난다고 하지 않았다. 오늘도 당신 안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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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19
  • [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12)
    오래 참고 사랑하면 인내하게 됩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기에 오래참고 양육합니다. 사랑하기에 오래 참는 것이 힘들다고 말하지 않고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죄인인 인간을 향해 오래 참으십니다. 사랑하기에 참으십니다. 회개하고 돌아올 때까지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십니다. 사랑하면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인내가 없으면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가 성숙해질 때까지 오래 참으십니다. 만약에 하나님께 참으시지 않고 우리가 죄짓고 실수할 때마다 정죄하시고 심판하셨다면 우리가 성장하거나 성숙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적은 믿음으로 시작해서 우리의 믿음이 커질 때까지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은 죄성이 있어서 인격이 비뚤어졌고 미성숙하며 자주 넘어집니다. 우리가 약하고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 오래 참고 기다리심으로 우리의 인격이 예수님 닮는 성숙한 자가 됨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고 인격이 성숙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하나님께서 나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셨습니다. 오래 참으시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인내합니다. 부모의 자녀 사랑은 뜨겁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기에 자녀에 대해 오래 참고 기다립니다. 수십 년을 아니 평생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에 대해 오래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하기에 지루하다 느끼지 않고 참아줍니다. 사랑의 예수님은 오래 참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은 인내이며 오래 참으심 입니다. 극심한 십자가의 고통은 10분도 참기 힘든데 6시간의 극심한 고통을 십자가 위에서 오래 참으셨습니다. 인내의 사랑으로 구원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면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사람에 대하여 오래 참아줄 수 있습니다. 너무 조급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기에 사람에 대하여 오래 참고 기다려주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오래 참고 기다려주다 보면 변화된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랑은 감정을 다스리며 쉽게 화를 내지 않습니다. 오래 참는 사랑, 인내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오래 참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온유하며 사랑은 따뜻하고 부드럽습니다. 사랑이라는 말만 들어도 마음이 포근합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최고 듣기 좋은 말입니다.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가 너를 영원히 사랑한다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사는 복된 자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온유하십니다. 우리를 부드럽고 따뜻하게 대해주십니다. 사랑의 예수님은 온유하십니다. 사랑하면 온유하고 사랑받는 자도 온유해집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사랑하며 사는 자는 사납지 않고 따뜻하고 부드럽습니다. 온유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인간은 사랑을 받으면 순해지고 부드러워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는 자는 온유해집니다. 온유한 자는 다투거나 부딪치지 않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진 자는 온유함으로 좋은 관계를 만듭니다. 온유는 겸손입니다.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은 언제나 겸손합니다. 사랑으로 온유, 겸손한 자는 누구나 다 좋아합니다. 온유는 친절입니다. 사랑은 친절입니다. 사랑이 없는 자는 불친절 합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진 자는 사람을 대할 때 짜증 내지 않고 친절합니다. 친절한 삶이 사랑의 삶입니다. 사랑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을 대할 때 사랑으로 친절하게 대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위로, 돌보심, 지키심, 격려의 말씀은 사랑의 하나님의 친절입니다. 사랑하면 친절하게 됩니다. 리더는 온유하고 친절한 사랑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친절은 인간관계의 지혜입니다. 사랑하면 온유합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사랑하며 사는 삶이 복 받는 비결입니다. 시기하지 아니하며 인간은 누구나 시기 질투심이 있습니다. 시기, 질투는 자신을 망하게 만듭니다. 마음이 좁고 욕심이 많은 자가 시기, 질투심이 많습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진 자는 다른 사람이 축복받고 잘 되는 것을 시기, 질투하지 않습니다. 남이 잘 될 때 기뻐하고 축복하는 마음이 사랑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시기 질투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가 잘 될 때 기뻐하시고 잘 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 넓은 마음입니다. 좋은 리더는 사랑의 마음으로 시기, 질투 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기에 시기하지 않습니다. 형제는 형제가 잘 될 때 시기 질투합니다. 요셉이 꿈을 꾸었을 때 형제들이 시기 질투 했습니다. 시기, 질투하는 리더는 무너지고 실패합니다. 사울 임금은 시기, 질투심을 가지고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다가 망했습니다. 시기, 질투는 죄이고 어리석음입니다. 시기, 질투는 미움이고 관계를 깨뜨립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마음은 축복해 주는 선한 마음, 넓은 마음입니다. 리더는 시기, 질투 버리고 넓은 마음으로 축복해 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윗은 사랑의 마음으로 가득 차 시기, 질투 하지 않았습니다. 큰 자는 시기심이 없고 마음이 넓은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자입니다. 시기, 질투는 영육을 병들게 하고 삶을 실패로 이끌어 갑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친구 관계에서 서로 시기, 질투하면 참된 친구가 아닙니다 자랑하지 아니하며 인간은 누구나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자랑하는 것도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입니다. 상대방이 고난당하고 어려운데 내가 지나치게 자랑하면 상대방의 마음이 불편하고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인간의 죄성은 다른 사람이 좋은 일이 있어 자랑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지나치게 자랑함으로써 사람들을 낙심시키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칭찬하거나 자랑해 주면 덕이 될 수 있으나 내가 나에 대해 자랑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나의 약함을 자랑해야 합니다. 사랑의 예수님은 자랑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세계의 주인, 부요의 하나님이신데 자랑하지 않으시고 겸손하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은 자신을 드러내거나 자랑하려는 마음을 절제하고 겸손히 사랑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에 대해 자랑은 절제하나 다른 사람이 자랑 할 때는 들어주고, 기뻐해 주고, 칭찬하는 마음이 사랑의 마음을 가진 리더, 넓은 마음 가진 자입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진 자는 자신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겸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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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문/책
    2022-10-19
  • [신재철 목사] 생쥐와 사투 : 내 거 먹지 마!
    “이제 일은 그만하고 사역만 집중하지 않겠니?”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나는 순종했다. 지금까지 치열하게 일하며 버텼지만, 복학 후 이제는 일하지 않고 버티기로. 어차피 버티기 인생은 매한가지다. 급할 때면 전단지 돌리기 같은 일회성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하지만 일에 묶이지 않기로 결심했다. 스물둘이라는 아주 어린 나이에 교육전도사를 시작했고 작지만 사례만으로 살아보기로 결단한 것이다. 소위 생계형 전도사가 된 것이다. 일할 때도 버거웠지만 순종은 내 삶을 더 퍽퍽하게 만들었다. 생계의 위협을 더욱 체감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대학생이 된 동생과 사는 집은 두 칸의 방이 있다. 각자의 공간을 갖게 되었으니 프라이빗(private)한 거주공간을 갖게 된 듯하다. 하지만 그야말로 허름한 옛날 집이다. 입식 부엌? 현대식 주방이라고 하던데 방문을 열고 나가면 마감이 덜 된 시멘트 바닥에 수도꼭지가 있어 머리도 감고 설거지도 한다. 여름이면 큰 대야에 물을 받아 쭈그리고 앉아 샤워도 가능하다. 작은 마당을 지나 밖으로 나가면 공용화장실을 사용한다. 그다지 나쁘지 않다. 하지만 딱히 좋지도 않다. “하나님, 이게 뭐에요.” 사역도 수업도 없는 조용한 오후. 오랜만의 여유로 빈방에 누웠다. 밖은 오지게 더운데 바닥의 서늘함이 작은 위로가 되어 바닥과 더 밀착해 본다. 나름 대학 생활 로망이 있었다. 중산층은 된다고 생각했기에 부모님이 뽑아주는 아반떼 승용차를 타고 서점에서 맘에 드는 책과 음반을 마음껏 집어 들며 살아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집은 망했고 부모님은 우리 형제를 도울 여력이 전혀 없었다. 동생은 아르바이트로 용돈 벌이를 하고 나는 온갖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신세 한탄으로 생각이 많아지던 시간, 어느새 잠이 들게 된다. 「덜그럭, 덜그럭」 “너였구나?” 작은 소리였지만 낮잠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현대식 주방에서 소리가 났다. 최근 주방 청소할 때 물과 함께 쓸려 내려오는 쥐똥. 남은 음식과 비누를 갉아 먹는 그 녀석. 나는 이놈에게 몹시 화가 나 있었다. 부족한 살림에 손을 대는 흉악한 녀석이다. 어렵게 얻어온 음식에 이 녀석이 먼저 입을 대면 나는 먹을 수가 없다. 비누는 왜 먹는 걸까? 쪼그려 앉아 세수할 때면 선명한 이빨 자국이 비누에서 보인다. ‘에잇!’ 짜증 섞인 소리를 내어보지만 아까워서 음식처럼 버리지는 못한다. 물로 대강 씻어내고 거품을 낸 후 찝찝한 세수를 마무리한다. 흔적만 있고 대면한 적 없던 그 원수가 드디어 나타났다. 내 키보다 작은 방문을 조용히 밀어 주방을 내다본다. 작은 쥐색의 생물. 생쥐다. 그간 얽힌 악연이 아니라면 뒤태가 귀엽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적’이다. 취향도 독특하지. 얼마나 맛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비누를 정신없이 갉아대고 있다. 군대용어로 기도비닉(企圖秘匿)이라 했던가. ‘살금살금’ 최선을 다해 은밀히 접근하다. 계획은 없다. 그냥 복수의 열망으로 다가간다. 나는 재빠르게 손을 뻗어 그 아이의 몸체를 집어 들었다. ‘아차!’ 잡힌 녀석은 급박한 상황에 고개를 돌려대며 내 손을 물려고 한다. 물리면 내가 더 타격이 클 수 있다는 생각에 더 큰 힘으로 움켜쥐었다. ‘찌~익’ 쥐가 고통스러운지 하늘을 향해 고함을 지른다. 막상 원수를 포획하고 나니 어찌할 줄 모르겠다. ‘묶어서 쓰레기통에 버려? 땅에 묻어?’ 길게 고민할 상황은 아니었기에 일단 밖으로 나왔다. 눈앞에 공터가 보인다. 팔을 크게 몇 바퀴 돌려 빈 공터에 던져버렸다. 땅에 내동댕이쳐진 원수는 기절했는지 잠시 움직임이 없다가 벌떡 일어나 잽싸게 도망가버린다. 살려 보낸 것이 유효했을까? 동네 쥐들에게 나의 흉폭함이 전해졌는지 알 수 없지만 더 이상 나의 식품에 손대는 불청객은 나타나지 않았다. 비누도 매끈함을 유지하게 되었다. 한낮의 소동은 그렇게 나의 승리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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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19
  • [박봉석 목사] 변화되는 것인가? 연기가 느는 것인가?
    그리스도인이라 이름 하는 사람들 중에 그런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 회사에 하루 종일 일을 하는 것은 피곤하지 않고 또 하루 종일 야외에서 놀다 오는 것은 별로 피곤하지 않은데 이상하게 주일에 교회에 다녀오면 피곤합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혼신의 힘을 다해서 예배를 하고 봉사를 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라면 또 다른 이유는 없는 것일까요? 우리는 교회에 오면 절대 내 단점은 보여서는 안 되고 내가 좋은 신앙의 사람이고 거룩한 사람인 것만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오면 내 원래의 모습은 감추고 가면을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피곤합니다. 나의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 가면을 쓴 모습으로 사람을 대하려고 하니 보통 때 느끼지 못하는 피곤함과 스트레스를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변화되는 것과 연기가 느는 것을 혼동할 수 있습니다. 완벽한 가면을 쓰고 연기한 것을 변화된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것은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가장 경건하다고 자타가 공인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서 자주 “외식하는 자들아!”라고 말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외식’이라는 말의 원어는 “가면을 쓰다.”, “위선적 태도를 취하다.”의 뜻입니다. 말하자면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겉과 속이 다른 가면을 쓴 모습은 아무리 경건한 모습이라고 하더라도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심을 외식이라는 단어로 예수님은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변화란 거룩한 것처럼 연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내 중심이 새로워지고 그 중심의 변화를 따라서 내 행동과 삶이 달라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연기학원에 등록한 것이 아니고 변화의 영이신 성령님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 이제 혹시 연기하는 것과 같은 가면을 쓴 모습의 신앙생활이었다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진정으로 내 중심으로부터의 변화된 모습을 열망하며 성령의 은혜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지금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연약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부족하고 연약하기에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스스로 용납할 수 있는 것이 겸손의 시작입니다. 때로는 내가 너무 싫어서 속상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 좋은 점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향한 나의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내 스스로를 용납하지 못하면 자꾸만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보이기 싫어서 가면을 쓰게 되고 그래서 외식하는 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족함과 연약함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인 교회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주님께서 이 죄 많은 인생들을 향하여서 그러셨던 것처럼 부족함과 연약함을 용납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부족함과 연약함을 서로 서로 내어 놓을 수 있는 편안한 공동체가 되어야 하겠고, 그리고 그것을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보듬어 안고 어루만져주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내 부족함과 연약함을 솔직하게 내어 놓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그 모습 그대로 받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변화의 체험을 하게 할 것입니다. 부족함과 연약함 때문에 가면을 쓰지 마십시오.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저절로 겸손해지게 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찾게 할 것이며, 그리고 이 모습 이대로 나를 받아주시고 만나주시는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기회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성령님은 완벽한 연기자 안에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고 연약해도 내 모습 그대로 겸손히 내어놓고 은혜를 구할 줄 아는 사람 안에 역사하는 영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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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19
  • [김성수 총장] 주님의 뜻, 무엇인가?
    주님의 뜻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관심사가 되어야 하는 어떤 것이다. 신실한 성도들은 언제나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고, 그 뜻을 순종하는 일에 최우선권을 부여해야 한다. 그런데, 주님의 뜻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올바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뜻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있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려운 어떤 일을 당할 때 주님의 뜻을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성도들이 나그네의 삶과도 같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어떤 위기나 슬픔의 순간을 당했을 때 주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믿음을 강화시키려고 하는 노력은 전적으로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갑작스런 어떤 사고나 질병, 사업의 실패, 또는 가까운 친구나 친지의 죽음과 같은 일들을 당해서 우리는 자주 주님의 뜻을 이야기할 때가 많이 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종종 자신을 향해서나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그것은 주님의 뜻이었습니다”고 말하고 위로를 받는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뜻과 관계해서 어떤 오해를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서 모든 것이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으로 주님의 뜻을 보는 관점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어떤 책이 있는데,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악과 실망스러운 일들도 모두가 결국은 이 책에 기록된 대로 일어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잘못이다. 이런 잘못된 시각에 가장 잘 인용되는 성경 귀절이 바로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29-31)는 말씀이다. 우리는 이 말씀이 마치 하나님께서 허락해야 참새 한 마리도 죽고,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공과 실패 등 모든 것을 일일이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가르치는 것으로 잘못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참새가 날개가 부러져 죽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날개로 하늘을 훨훨 나르는 것이다. 마태복음 10장 전체의 내용을 볼 때, 우리는 이 말씀을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거기에도 하나님이 계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없이 참새 한 마리도 떨어지지 않는데 머리털까지 세실 정도로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너희와 함께 하시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누가복음은 이 내용을 더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떨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그런데,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그 곳에도 계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그 때에는 아들과 함께 하시지 않았다. 그래서 주님은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아버지,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부르짖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그것은 아들을 십자기에 죽게 하시면서까지 우리를 버리지 않고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며,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것이다. 성경은 그 어느 곳에서도 주님의 뜻을 어떤 숙명주의, 팔자소관, 또는 운명주의와 같은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주님의 뜻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릉도원과 같은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다스림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뜻대로 이 창조 세계를 다스리고 있다. 주님은 달과 별, 태양, 바위, 강, 바다, 바람과 같은 무생물의 세계를 자신의 뜻대로 다스리고 있다. 주님은 또한 동식물의 세계를 자신의 뜻대로 다스리고 있다. 만약 이 세계가 주님의 뜻대로 다스려지지 않으면 정말 문제가 생겨나게 될 것이다. 주님은 또한 우리의 가정, 학교, 교회, 직장, 국가에 대해서도 자신의 뜻을 가지고 계시며, 이 모든 사회와 문화 현상들이 주님의 뜻대로 운영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 학교, 교회, 직장, 국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고 그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게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주님의 뜻은 질서와 조화, 평강과 즐거움, 선함과 거룩함과 같은 것이지 무질서와 분쟁, 괴로움, 악함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건강하고 영원히 즐겁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 실패하고 병들고 죽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비극은 주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침입자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다시금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나라를 만드시고, 우리로 하여금 실패와 고난과 시련이 없이 건강하고 즐겁게 영원토록 사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주의 뜻이 이루어질지어다”라고 말하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현 미국 Evangelia University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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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19
  • [박동철 장로] 한국인보다 한글을 더욱 사랑한 제임스 게일 선교사
    지난 10월 9일(주일)은 ‘제576돌 한글날’이었다. 다음날 월요일은 대체공휴일로 마침 맑은 가을 날씨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휴일을 즐겼다. 일부에서는 한글날을 법정 공휴일로 해야하나, 대체공휴일로 해야하나하는 소리도 있었다. 공휴일로 하는 국가적 기념일은 큰 의미가 있고 기려야할 뜻이 있다. 바로 한글날은 7천만 한민족에게 함께 쓰는 어문(글자)이 있게한 한글창제일을 기리고 기념하는 높은 뜻이 있다. 우리 역사의 영웅이신 세종대왕께서 1446년 ‘나랏 말씀이 중국과 달라 백성이 쉽게 쓰게’ 한글을 창제하시고 선포하심으로써 우리 문자가 있는 위대한 나라가 되었다. 세종대왕이 창제하신 한글은 위대한 문자이었음에도 백성은 쓰지 않았다. 어문을 쓰는 양반과 선비는 한자의 사대문화에 젖어 있었고 서민대중이 한글을 일부 배워 쓰기도 했지만 문맹의 백성이 너무 많았다. 우리의 한글은 조선의 말기 일정시대 1927년 9월 마지막 날 조선어연구회가 ‘가갸날’이란 모음순서 이름으로 한글날을 정했다. 이듬해 크고 으뜸의 뜻을 담아 ‘한글날’로 이름 지어 기념했다고 기록 돼 있다. 이 긴 역사 속에 한글이 빛을 보게 된 것은 벽안의 서양인에 의해서다. 1888년 캐나다에서 조선 땅에 파송된 복음의 전사 제임스 S. 게일 선교사가 40년 동안 조선 땅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한글을 갈고 닦아 온 백성이 쓰게 하고 세계에 전하는 위대한 일을 하셨다. 제576돌 한글날을 앞두고 지난 6일(목) 게일 선교사의 한글사랑 발자취를 찾아보는 심포지엄이 있었다. 6일 저녁, 창원극동방송에서 경남기독문화원과 창원시기독교장로총연합회가 공동으로 심포지엄의 자리를 만들고 발제와 연찬 그리고 토론의 진지한 시간을 가졌다. 발제를 맡은 부산경남기독교역사연구회 회장이신 박시영 목사는 게일 선교사의 선교 사역 중에 한글의 우수성을 찾아내고 최초로 1897년 한영사전과 신구약 번역본 완성 등 조선 땅의 한글 대중화에 엄청난 업적을 이룬 선교사의 발자취를 정리했다. 가히 놀라우리 만큼 게일의 한글사랑이 지대했다. 그래서 조선백성들이 비로소 한글로 성경을 읽고 복음의 지경이 넓혀져 왔음을 알 수 있었다. 게일은 조선 땅에 발을 딛고 먼저 한글을 깨우치고 4년 만에 한글 체계화 기초가 되는 사과지남(辭課指南)이라고 하는 한글 어문법을 완성했다. 그리고 복음을 위한 큰 사역 중 온 세계인들이 읽고 있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한글로 번역, 백성들이 읽게 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1907년 그 유명한 평양 대부흥의 주인공 길선주 목사가 게일이 번역한 천로역정을 읽는 중 불같은 성령의 뜨거움을 체험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며 장대현교회 부흥을 일게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초대교회 선교사의 성경번역은 논란이 있다. 최초 대동강을 건너고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 후 로스선교사가 최초로 중국성경을 한글로 옮겼다는 기록이 우세하다. 그러나 게일선교사가 한글을 체계화하고 신구약 완역과 각종 서양기독서적을 한글 번역했으며 우리의 민족소설 구운몽 춘향전 등 고전을 영역해서 서양에 전한 업적은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 특별한 일은 영어의 The God을 ‘하나님’으로 한글 표기한 분이 게일 선교사이다.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한글의 대부 최현배 선생은 게일 선교사야말로 가히 우리 한글을 대중화하고 세계화한 일등공신이라고 평가했다. 우리의 한글은 지금도 세계 속으로 흘러가면서 빛을 내고 있다. 인도네시아 찌아찌아 소수민족이 한글을 수입해 쓰고 있다. 우리나라 기자들과 인터뷰하면서 한글을 평가했다. 자기민족의 언어를 가장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세계 각국의 문자 중 한글이 최고였다고 했다. 또 다른 소수민족이 한글을 수입해 쓰려고 하고 있다. 한글은 세계 속의 글자다. 1997년 유네스코에 등재된 국보 70호인 한글은 지구촌 2900여 종 언어 중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다. 지금 뜨거운 세계 속 한류의 으뜸 되는 문화가 예사로 됐을까. 하나님이 예비하신 한민족의 위대한 한글이 땅 끝까지 복음전파의 수단과 큰 길이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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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12
  • [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11)
    사랑이 제일이다. 성경은 ‘사랑이 제일이다. 지혜가 제일이다.’ 라고 가르쳐 줍니다. 제일이다는 의미는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삶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과 지혜입니다. 사랑하며 사는 자는 지혜자이고 지혜자는 사랑하면서 사는 자입니다. 사랑이 지혜입니다. 사랑과 지혜는 인간관계의 열쇠, 성공의 열쇠입니다. 사랑이 있고 지혜가 있으면 어디에서나 사랑받고 인정받게 됩니다. 사랑의 계명에 순종해야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 사랑의 성경 말씀입니다. 율법을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웃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입니다. 사랑이 행복의 열쇠, 건강의 비결입니다. 사랑은 회복의 능력, 치유의 능력입니다. 사랑이 있을 때 기적과 부흥 역사가 일어납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자는 지혜자입니다. 사랑하면 이해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서 이해해줍니다. 모든 문제는 사랑 부족, 이해 부족으로 오는 오해에서 시작됩니다. 사랑하면 존중해 주고 귀히 여깁니다. 차별하지 않고 인격을 귀히 여겨 줍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으면 힘이 납니다. 누군가가 나를 사랑해서 기도해 주고 격려 칭찬해 줄 때 힘이 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격려해 줄 때 다른 사람이 힘을 얻게 됩니다. 사랑하면 알면서도 어떤 때는 모르는 척 합니다. 상대방의 실수 허물을 눈감아 주고 덮어줍니다. 사랑하면 때로는 해야 할 말을 용기 있게 말합니다.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을 보면 사랑의 마음으로 단 둘이 있을 때 가르치고 충고해 줍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가르치고 충고하면 깨닫고 고마워하게 됩니다. 인간은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는지 느끼고 알게 됩니다. 사랑으로 하지 않고 미움의 마음으로 행하면 문제가 일어나고 관계가 깨집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식사하실 때 비난했지만 예수님은 죄인들까지 사랑하시고 죄인들과 식사하면서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가득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사랑이 제일입니다. 사랑이 제일인 것을 알고 사랑을 실천하는 자가 지혜자입니다. 사랑으로 행할 때 열매 맺히고 결과가 아름답게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방언을 하고, 말을 잘하고, 예언을 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식이 있고, 인물이 좋고, 설교를 잘해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교회 오래 다니고, 믿음이 좋다고 말하고 다녀도 사랑이 없으면 헛된 것입니다. 사랑이 행복이요, 성공입니다. 사랑이 없는 것은 불행이요, 실패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감동을 주지 못하고, 열매가 없게 됩니다. 사랑이 있고, 말 잘하고, 가르치기를 잘해야 의미가 있고 효과가 나타납니다. 사람은 무엇을 잘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자를 좋아합니다. 사랑이 지혜이고, 리더십입니다. 사랑이 많은 자가 영향을 많이 끼치고 사랑이 없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가르치고 설교하면 감동을 주고 능력이 나타납니다. 사랑이 최고의 기술이고 예술입니다. 사람은 영적 존재이기에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는지 미워하는지 어느 정도 압니다. 사랑하면 사랑 받게 됩니다. 사랑의 씨를 심어야 합니다. 아가페의 사랑,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최고의 사랑입니다. 사랑의 대상을 넓혀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면 사랑의 폭, 관계의 폭이 작아집니다. 만나는 사람, 아는 사람은 누구든지 사랑하는 것이 사랑의 지혜입니다. 사랑으로 행하여 원수가 생기지 않아야 합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 참 사랑의 지혜입니다. 인생의 삶에 원수가 없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자녀들을 교육해야 하며, 가정에서도 사랑이 넘쳐야 천국 같은 가정이 됩니다. 사랑이 부족한 리더는 좋은 리더가 아닙니다. 사랑이 제일이고 최고로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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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문/책
    2022-10-05
  • [김성수 총장] 주 너를 지키리
    오늘날 현대인들은 수많은 걱정과 근심에 사로 잡혀 생활하고 있다. 과학과 기술문명이 최고도로 발달한 시대에 엄청난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실상은 온갖 종류의 고민과 번민, 염려,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면서부터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심지어는 잠자리에서도 수많은 걱정거리들을 안고 단잠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돈에 대한 걱정, 인간관계에 대한 걱정, 자신의 외모에 대한 고민과 근심, 건강에 대한 걱정,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에 대한 걱정, 자녀들에 대한 걱정, 부모에 대한 걱정, 논문 지도 교수에 대한 걱정 등 이루 열거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걱정과 염려에 사로잡혀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문자 그대로 죽을 정도로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걱정하다가 걱정 속에 죽는 인생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이러한 걱정과 근심, 염려는 우리의 정신적인 질병의 원인이 되며, 육체적인 질병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미국에는 이러한 현대인의 정신적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기 위한 방법들이 많이 발달되어 있다. 명상요법에서부터 상담, 심리치료, 음악치료 등 수 많은 방법들을 동원해서 현대인들이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한다. 미국의 명문 줄리아드 음대를 졸업한 맥 퍼린(Mcfurrin)이라는 한 흑인 가수가 노래를 취입했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출·퇴근 길에 이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들으면서 아주 행복하고 기쁘게 운전하며 출퇴근을 하는 모습들을 보았다. 이 노래의 제목은 “염려하지 말고 행복해라!”(Don't Worry, Be Happy)라는 것이다. 가사가 복잡하지도 않고 계속적으로 “Don't Worry, Be Happy"라는 말이 반복되는 노래다. 이 노래의 내용을 조금 더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의 모든 삶에는 걱정거리들이 조금은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 걱정하면 오히려 그 만큼 걱정거리를 만들어 내는 꼴이 된다. 집세가 밀려도, 현찰이 없어도, 스타일이 엉망이고 여자친구가 없어도 걱정하지 말아라. 걱정은 오히려 얼굴에 주름살이 지게 만들고 다른 사람의 기분마저 침울하게 만든다. 걱정하지 말고 행복해라!” 이런 내용들이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노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이 노래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수많은 걱정거리와 근심에서부터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었다. 우리 나라에도 이러한 노래들이 많이 불리던 때가 있었다. “걱정을 모두 벗어 버리고서 스마일, 스마일 스마일...” 같은 노래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걱정과 근심, 불안과 염려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러한 염려와 걱정에 대해서 배워야 할 많은 내용들이 있다. 첫째는, 우리 인간의 통제 능력과 통제 범위를 넘어서는 어떤 일들에 대한 우리의 염려다. 사실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하는 일들 중에는 우리의 통제 능력과 범위를 넘어서는 일들이 많이 있다. 이런 일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염려하고 노력을 한다고 해도 아무런 효과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종류의 염려에 대한 해결책은 우리 스스로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단순히 수용할 줄 아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사에 있어서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빨리 단념하고 포기할 줄 아는 지혜와 기술을 배워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에서 자족하고,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아는 방법과 지혜를 배워야 한다. 둘째는, 실제로는 문제가 되지 않는 일들에 대한 우리의 염려다.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하는 일들 중에는 따지고 보면 실제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일들이 많이 있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얽혀있는 것이 아닌 데도 혼자서 온갖 걱정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우리가 염려하고 걱정하는 많은 일들 중에는 실제로는 의식주의 문제와 같이 그렇게 염려하고 걱정할 만한 가치가 없는 일들도 많이 있다. 이러한 종류의 염려거리들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먹고 입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더하여 주신다. 셋째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에 대한 우리의 염려다.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하는 일들 중에는 따지고 보면 실제로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공연스레 앞질러서 염려하고 걱정하는 일들이 많이 있다. “만약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하느냐?”하고 가정해서 하는 염려와 걱정이다. 이러한 염려와 공포에 대해서 해결책은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하루하루의 삶을 충실하고 성실하게 살아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결코 내일 일에 대해서 “될 대로 되어라”는 식의 삶을 살라는 말씀이 아니라, 오늘 하루의 삶을 신중하고 성실하게 살고 내일 일은 하나님께 의지하고 맡겨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당한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일들에 대해서 염려해야 한다. 우리의 삶에는 우리가 실제로 걱정하고 염려하는 일들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의, 식, 주와 같이 물질적인 필요와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러한 일들 마저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들은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히 돌보시고 공급해 주시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진정으로 먼저 추구하면 우리의 모든 필요들을 충족시켜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것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정신적인 것이 아니다. 단순히 머리로 생각만 하는 일도 아니고 가슴으로 느끼는 일만도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방식을 의미한다. 산상수훈에서 가르치는 삶,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는 삶, 형제를 사랑하고 화목하는 삶, 음욕을 품지 않는 삶, 헛된 맹세를 하지 않는 삶, 이웃을 사랑하는 삶, 외식하지 않는 진실된 삶, 구제하는 삶, 은밀한 중에 기도하는 삶,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는 삶, 형제를 비판하지 않는 삶, 한 마디로 말로 요약해서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의 삶을 현재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한다. 이러한 삶이 바로 우리의 인생 집을 모래위에 짓지 아니하고 반석위에 짓는 삶이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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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05
  • [최호숙 목사] 삶 속에 나타나는 프레임의 법칙( The law of frame)
    프레임의 법칙(The law of frame)이란 무슨 의미인가? 프레임의 문자적인 뜻은 액자 틀, 올가미를 뜻한다. 이것을 의미적 해석으로 인간의 사상 생각을 말한다. ‘프레임의 법칙’이란 같은 상황이라도 어떠한 사고(思考)의 틀을 가지고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사람의 행동이 달라진다는 법칙이다. 젊은 아내가 아이를 낳다가 출혈이 심해 세상을 떠났다. 다행히 아이는 목숨을 건졌고 홀로 남은 남자는 아이를 애지중지 키웠다. 남자는 아이를 돌봐 줄 유모를 구하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아서 유모 대신 훈련이 잘 된 듬직한 개에게 아이를 돌보게 했는데 개는 생각보다 똑똑했으며 남자는 안심하고 아이를 둔 채로 외출도 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남자는 여느 때처럼 개에게 아이를 맡기고 잠시 집을 비웠다가 사정이 생겨 집으로 돌아왔다. 남자는 집으로 들어서며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주인의 목소리를 들은 개가 꼬리를 흔들며 밖으로 뛰어나왔는데 개의 몸이 피범벅이었다. 불길한 생각이 들어 남자는 재빨리 방문을 열어보았다. 아이는 보이지 않았고 방바닥과 벽이 온통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순간 남자는 극도로 흥분했다. “내가 없는 사이에 개가 아들을 물어 죽였구나” 이렇게 생각한 남자는 즉시 총을 꺼내 개를 쏴 죽였는데 바로 그 순간, 방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남자가 방으로 들어가 보니 침대 구석에 쪼그려 앉은 아이가 울먹이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당황한 남자는 밖으로 뛰쳐나와 죽은 개를 살펴보니 다리에 맹수에게 물린 이빨 자국이 선명했다. 곧이어 남자는 뒤뜰에서 개한테 물려 죽은 늑대의 시체를 발견했다. “오, 맙소사!” 남자는 자신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늑대와 혈투를 벌인, 충직한 개를 자기 손으로 쏴 죽이고 만 것이다. 잘못된 프레임의 결과 때문이다. 여대생이 밤에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면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술집에서 일하는 아가씨가 낮에 학교 다니면서 공부를 열심히 한다면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 같은 상황이지만 그 사람이 가진 사고의 틀에 따라서 행동이 달라질 것이다. 선교 여행 도중에 선교를 포기하고 돌아온 마가에 대하여 바울이 생각하는 프레임과 바나바가 생각하는 프레임이 서로 달랐다. 바나바 입장은 “그래도 함께 선교 여행에 동참시키자”였고, 바울의 입장은 “절대 참여 불가”였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다음 선교 여행을 위해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다투게 되었다. 그냥 보통으로 다툰 것이 아니라 성경은 심히 다투었다고 기록한다. (행 15:39) “sharp disagreement” 날카로운 칼로 서로를 찌르듯 말로 서로를 찌르며 다툰 것이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내 독선적인 사고 때문에 여러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때가 있다. 그래도 나는 내 생각이 옳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일 수 있다. 바울은 나신의 삶을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내가 나를 판단하여 의로운 100점짜리 인생이라고 판단해도 주님의 판단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고백하기를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4) 이제부터 우리의 삶은 누구를 정죄하거나 근거 없는 프레임을 씌워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일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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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살며 생각하며
    2022-10-05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18: 한글날에 비하적인 용어들을 고찰해본다
    기독교 용어 고찰 18: 한글날에 비하적인 용어들을 고찰해본다 I. 서언(序言) 세계에서 우리의 우수성은 자타가 모두 공인하는 바이다. 이중에서 우리의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세계 어떤 언어보다 탁월하기 때문에 한글날이 세계 국어의 날로 제정된 것은 정말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 많 큼 우리 언어는 세계 어디에서도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용어 중에는 외국인이 우리 민족을 비하하는 말들도 다수 있다. 이 사실을 모른 체 자주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오는 9일은 한글날이다. 이에 우리 스스로를 비하하는 용어들이 어떤 것이 있는지를 발췌하여 논하고자 한다. II. 비하 하는 용어들의 고찰 1. 중국인이 한국인을 비하하는 용어들 : 먼저 ‘한국인은...’으로 시작하는 말들이다. 예를 들면, ‘한국인은 셋만 모이면 배가 산으로 간다.’, ‘한국인은 공덕심(公德心)이 없다.’, ‘한국인은 단결심이 약하다.’는 등의 말은 모두 우리 한국인을 비하하는 말들이다. 물론 이런 말이 있을 정도로 우리민족에게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나라와 비교해 볼 때 그 정도의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비하적 말들은 그동안 우리나라를 지배해 왔든 중국이나 일본 등이 우리 민족이 열등하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유포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잘못된 그들의 문화 정책에서 유래된 말들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논한다면, 먼저 중국인들이 우리나라를 비하해서 한 말들 중에 ‘고린내’란 말이 있다. 뜻은 ‘발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를 말하는 것으로서 원래는 고려취(高麗臭)라고 했다. 그 유래를 보면, 과거 중국과 몽고가 우리나라를 지배하거나 국교를 맺고 있을 때, 사신들과 일행들이 중국에 도착하면, 자연히 발에는 많은 냄새가 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중국인들이 사신들의 발 냄새를 ‘고려인들의 냄새’라는 뜻의 고려취라고 했다. 문제는 이 말이 비하의 말인 줄도 모르고 ‘고린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뚱이’라는 말도 그러하다. 이 말은 옛날 중국에서 자신들의 나라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의미에서 중국, 중원, 중화라고 했고, 우리나라 같은 주변국은 이족(異族)이라 하여 무시하는 경향이 많았다. 이에 저들은 우리 민족을 동쪽에 있는 천한 이방인인 오랑케라는 의미에서 동이(東夷)라고 불렀다. 이 말이 곧 중국말로는 ‘뚱이’이다. 여기에서 파생된 말 중에 ‘뚱 친다’는 말이 있다. 이는 좀도둑이라는 말로서 사신들의 종이나 수행인으로 따라간 자들이 작은 물건들을 훔친다고 해서 비하하면서 붙인 용어이다. 반면, 우리가 중국인들을 가리켜 ‘떼 놈’이라고 할 때가 있다. 이는 우리가 중국인을 비하해서 말 할 때 하는 말이다. 하지만, 비하 같이 보이지만 오히려 높이는 말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이 비속어의 어원은 여러 가지가 있다. 두만강 북쪽의 만주족을 일컫는 말이라고도 하고, 중국인들은 떼를 지어 다니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란 견해도 있다. 또 몸을 잘 씻지 않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가장 근거 있는 유래는 우리 민족은 고대로부터 중국을 대국(大國)으로 여겼고, 또 작은 나라로서 피해도 많이 입었기 때문에 중국에 욕을 하면서도 대국의 의미를 담은 ‘대국놈’, ‘뗏놈’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2. 일본인이 한국인을 비하하는 용어들 : 대표적인 말은 먼저 ‘조센진(朝鮮人)’이라는 말이다. 한자의 뜻 그대로 본다면 ‘조선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는 일본인들이 한국인을 비하할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엽전’이란 말도 그런 말 중 하나다. 일본인들은 우리 한국인을 엽전이라고 했다. 이는 금전이니 은전 같은 가치 있는 돈이 아닌 값싸고 열등한 엽전 같은 존재가 한국인이라는 점에서 비하해서 한 말이다. 이런 이유들로 볼 때 이런 용어들은 사용해서는 안 될 말들이다. 외국인들이 우리 민족 자체를 비하해서 사용한 말들을 우리 스스로 사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3. 한국인이 외국인을 비하하는 용어들 : 대표적인 경우는 먼저 중국과 중국인을 비하하는 말들이다. 여기에는 China를 음역한 ‘지나(支那)’라고 부르는 것이나(참고: 동지나 해), 중국인들을 일컬어 화상(華商-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버는 나쁜 상인), 짱꼴라(일본에게 지배당한 청나라를 비하하는 말), 짱깨(돈의 금고만 아는 사람들이라는 의미) 등의 여러 말들이 있다. 일본인들을 비하하는 말들로는 왜놈(倭-키가 작고 못생기고 왜소하다는 뜻)이나 쪽발이(게다란 신발을 신는 일본인) 등의 용어들이 있다. III . 결 어(結語) 이상의 비하하는 용어들은 아무리 남아 있는 국민감정이 남아 있다 할지라도 삼가야 한다. 또한 그들이 우리를 비하하는 말들도 절대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특히 우리 기독교인들은 언제나 경우에 합당하고 올바른 말들을 함으로서 밝고 아름다운 언어문화를 유지 계승해 가야 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비하적인 용어나 비속어 등은 절대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10월 9일 한글날을 맞하여 다시 한 번 우리말의 소중성을 알고 계승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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