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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⑹- 장두노미(藏頭露尾)
필자는 지난 ?월 ?일 모 신문에 총장 선임의 불법성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고신총회와 고려학원 이사회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반응이 없어도 되는 걸까요? 박영호 목사님이 총회장으로 있을 때모 신문에 나온 기사를 가지고 신문에 나온 사건이기에 조사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당시 총회 임원회의 강력한 의지와 결단에 따라 총회는 격론을 벌이고 투표까지 하여 조사위원회를 만들었던 전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도 그 결정의 정신을 존중하여 총회와 관련하여 신문 기사에 난 사건에 대해서 조사위원회를 만들든지, 아니면 운영위원회에서라도 살펴야 하는 것이 공정하지 않겠습니까? 자기편이면 덮고 다른 편이면 조사위원회를 만듭니까? 총회 임원회의 결정이 이렇게 사람에 따라 수시로 바뀌어도 괜찮은 겁니까? 다시 한번 이야기해 봅시다. 고신대 총장의 논문표절문제 아무 문제가 없습니까? 개인적으로 이사장이나 총장의 두터운 신뢰와 사랑을 받는 당사자 대해 그 대학이 공정하게 심사하리라 기대하지 않습니다.하지만 결과가 너무 느립니다. 이번에도 시간 끌기로 할 것 같습니다.“오래된 일이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등으로 적당히 넘기려고 할 것 같습니다. 어쨌든 결과를 지켜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사회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이사회가 바르게 하려고조속한 결론을 내자고 회의 한 일이 한번이라도 있습니까?어쩌면 이사회는 이 일에 대한 답변이 나오지 않길 기다리고 있을 것 같습니다. 고려학원은 이사들의 개인 전유물이 아닙니다. 고신총회 산하 성도들과 총회에서 파송한 이사들로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총회와 성도들의 뜻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그런 노력도 의지도 없다면 이사회는 직무유기입니다. 알고도 문제없다고 강행한 이사회에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이사회에 속한 목사들이 자신의 교회에서 설교할 때 그렇게 가르치고, 장로들은 대표 기도할 때 그런 자세로 기도하는지 궁금합니다. “주님, 이건 불법이지만 급한 불부터 끄고 봅시다.” 과연 이런 설교와 기도에 성도들이 얼마나 공감하며 은혜받을 것인지 심히 궁금합니다. 절차위반과 위조문서 정말 이래도 괜찮은 겁니까? 총회의 ‘절차위반, 문서위조’, 이런 일들이 아무런 죄의식 없이 받아들여지다니 참 신기합니다. 노회 구역조정 문제로 시끌벅적할 때 당회도 노회도 거치지 않는 괴문서를 총회장이 운운하는가 하면, 총회 서기가 임원회의 결정과는 다른 문서를 노회에 보내는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니 이사회도 그런 불법을 보고 배운 것이 아닙니까? 지난 73회 총회에서 고려학원 이사회가 총장 인선을 위한 고려학원 정관을 개정했습니다. 총장선임을 위해 ‘1차는 3분의 2 찬성을, 2차는 과반 찬성’으로 선임할 수 있도록 개정했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듯 이런 절차가 진행되려면 이사회에서 먼저 결정하고 수정안이 총회에 상정되어야 합니다.그런데 지난해 총회가 파한 후 3개월이 지난 12월 말에가서야이사회가 총회가 결정한 정관개정을 ‘추인’하는 형식으로 개정을했다 하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입니까? 정말 이래도 괜찮습니까? 이일을 누가 주도했으며 누가 진행했습니까? 반드시 책임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이런 짓은 절대 해서는 안 되며, 고신 총회와 500여 총대를 속인 일이고, 고려학원 이사회와 고신총회 산하 모든 교회와 성도들을 기만한 일입니다. 총장은 거짓과 불법으로 세움을 받았으니 주도 세력이 시키는 대로, 하라는 대로 하수인 역할을 톡톡히 잘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고신총회 산하 모든 교회와 성도들은 논문표절, 절차위반, 부정 정관개정 등,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이렇게 선임된 총장의 지도력이 서겠습니까? 정관개정도 불법이지만 불법적 개정안을 불법으로 총회에 상정 해서 총대를 속이고 총장을 선임했습니다. 총장 모집 공고를 낼 때의 법은 분명 3분의 2 이상으로 선임해야 한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공모를 보고 지원한 지원자들은 공고한 정관대로 선임해야 한다. 그런데공모한 후에정관을 ‘과반수’로 개정해서 뽑는 것은 누가 봐도 특혜입니다. 공모가 나갔다면, 공모한 정관대로, 기준대로 선임해야 합니다. 공모한 정관과 다른 정관을 만들어서 지원자 중에 총장을 선임한 것은 누가 봐도 특혜를 주기 위한 일종의 모략에 불과합니다.처음부터 과반수 개정된 정관으로 공모를 했다면, 더 많은 지원자가 있었을 것입니다. 3분의 2보다 과반수가 훨씬 당선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특정인에게 유리하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사람 아니면 안 된다는 우스꽝스러운 일을 이사회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부당하게 일사천리로 진행했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의 이런 행위에 대해 ‘선거운동의 의미와 금지되는 범위’와 관련한 대법원의 판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법원 2016. 8. 26. 선고 2015도11812 전원합의체 판결 [공직선거법위반, 정치자금법위반]’을 예를 들어 살펴봅시다. 이때 판시사항은 ‘선거운동의 의미와 금지되는 선거운동의 범위를 판단하는 기준’이며, 판결 요지 중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선거운동은 대상인 선거가 특정되는 것이 중요한 개념표지이므로 문제 된 행위가 특정 선거를 위한 것임이 인정되어야만 선거운동에 해당하는데, 행위 당시의 상황에서 특정 선거의 실시에 대한 예측이나 확정 여부, 행위의 시기와 특정 선거일 간의 시간적 간격, 행위의 내용과 당시의 상황, 행위자와 후보자의 관계 등 여러 객관적 사정을 종합하여 선거인의 관점에서 문제 된 행위가 특정 선거를 대상으로 하였는지를 합리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 “...특정한 선거를 목표로 하여 선거에서 특정인의 당선 또는 낙선을 도모하는 목적의사가 표시된 것으로 인정되지 않는 한 선거운동이라고 볼 것은 아니다.” “...특정 선거에서 특정인의 당선 또는 낙선을 도모하는 목적의사에 따라 행해진 것이라는 점이 당해 선거인의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인정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 세 가지 판결 요지에 따르면, 고려학원 이사회가 시도한 정관 개정은, ‘행위의 시기와 특정 선거일 간의 간격, 행위의 내용과 당시의 상황’ 등을 종합해 볼 때, 분명 ‘특정인의 당선’을 도모하는 ‘목적 의사’가 분명한 ‘선거운동’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사회는 총대들을 무지하게 보는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필자는 몇 차례에 걸쳐서 바르게 하자고 강력하게 호소하는데, 이사회나 총회 임원회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답을 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까? 잘못이 없으면 없다고 밝히고, 잘못이 있다면 용서를 구하고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안에서 이것이 다루어지고 해결책이 나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렇게 글로 표현하지만, 답이 없을 땐, 똥물을 뒤집어쓸 각오로 문제를 삼아도 저의 책임이 아님을 분명히 밝힙니다. 이후의 모든 책임은 그렇게 행한 당사자들에게 있음을 알립니다.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더 얹어봅시다. 월간고신과 기독교보에 발행인은 현직유지재단 이사장, 총회장이 맡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현 총회장은 어디를 가고, 전례 없는 전 총회장이 발행인을 계속하는가?외국인이라 안된다면, 이에 관해 아무 문제 없다는 사람들이나 당사자가 답할 차례입니다. ‘장두노미’(藏頭露尾)란 말이 있습니다. 중국 원나라의 문인 장가구가 지은 <점강진·번귀거래사>에 등장하는 이 말은 쫓기는 타조가 머리를 덤불 속에 숨기지만 꼬리는 미처 숨기지 못해 쩔쩔매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장두노미(藏頭露尾)는 “진실은 감춰도 언젠가는 밝혀 진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사회는 장두노미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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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6) (민12:1-3, 마5:5)
지면을 통하여 제가 목회하는 고신교회에 대해 잠깐 예로 언급함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고신교회도 세계를 교구로 선교하는 대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370 용사는 못되더라도 37 용사는 있어야 합니다. 고신교회 목회자로서 오늘까지 우리 고신교회의 선교를 돌아보면 고신교회 성도들이 다윗의 37 용사에 버금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교회 분열의 아픔과 담임목사, 부목사들이 면직을 당하는 일 앞에서도 선교를 중단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믿음의 의리가 있는 용사들이었습니다. 코로나19 기간에도 15개 정도의 교회를 필리핀과 네팔에 건축했습니다. 순간순간 어려움이 생겼을 때 구제하고 돌아본 것은 말할 수도 없이 많습니다. 지난해 상반기만 해도 우리 교회 선교비가 1억이 더 지출되었습니다. 경상비 전체 25-30%가 선교비로 지출되고 있습니다. 일단 빚을 내서라도 선교비는 지출하고 봅니다. 돈의 액수를 떠나서 선교를 바라보는 시각과 선교를 하는 실천에 우리 고신교회와 같은 교회가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고신교회 담임목사로서 우리 교회는 세계를 교구로 선교하는 일에 전 성도가 다윗의 37 용사와 같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얼마나 성도들을 좋아하겠습니까? 잘은 몰라도 고신교단 안에서 저만큼 성도들 좋아하는 목사 없을 겁니다. 하지만 바로 이 장면에서 목회자는 매우 위험한 신호를 감지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을 자기 자신보다 사랑하고 좋아해야 합니다. 하지만 목회자는 성도들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이 부분이 목회자가 감지할 줄 알아야 하는 위험한 신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가 하나님 외에 그 어느 것도 의지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눈곱만큼이라도 하나님 의지하는 것을 성도에게로 돌리고 기대를 거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목회자에게 즉각 응징하십니다. 그러니 목회자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성도들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 사이에서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절대로 타협하거나 양보해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로 하여금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십니다. 목회자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때, 성도들은 반드시 목회자의 37 용사가 되어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를 시도 때도 없이 풀무불 앞에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를 철저히 하나님만 의지하는 온유한 자로 만드시기 위하여 풀무불에 던져 넣으십니다. (욥23:10)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그 결과 목회자는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당한다 하더라도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그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온유한 자가 되어 순금같이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온유하게 된 목회자는 정금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리암이 아론과 70장로들을 규합하여 백성들을 선동합니다. 어느 정도 새가 결집 되니 미리암은 공개적으로 모세의 통치에 비방과 반역을 시도합니다. 아직 출애굽과 홍해를 건넌 감동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때 성경은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증언합니다. 악한 무리들이 거짓된 계획을 세워 공격했습니다. 무시무시한 공격 앞에 제자들과 함께했던 무리들은 다 떠나가 버렸습니다. 부인하며 저주까지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홀로 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거나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홀로 지시기도 힘든 십자가를 지시고 묵묵하게 끝까지 골고다로 가셨습니다. 목숨까지 위협하는 거짓된 계획으로 공격했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른말, 천국 복음을 전하시며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온유한 자를 완성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온유한 자의 완성을 이루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약속하신 대로 땅을, 약속의 땅을, 교회를 주셨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교회는 하나님께서 온유한 자에게 약속하신 최고의 복입니다. 어떻습니까? 나는 교회인 것 같습니까? 온유한 사람입니다. 이미 복 받은 사람입니다. 나는 교회가 아닌 것 같습니까? 온유한 사람 아닙니다. 교회와 한 몸 되지 못하고, 교회와 거리가 있는 사람은 온유한 사람도 아니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 복음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 모든 말을 듣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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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현령비현령(5) -전관예우(前官禮遇)
두런두런 둘러앉은 장로님들의 담소 가운데 20만 원짜리 봉투 하나면 “총회에서 발언해 줄 목사들 많다” 아니 “발언 안 할 사람 거의 없다”라는 말로 폭소가 터져 나옵니다. 참 검소한 고신 교단의 목사들입니다. 상임위나 특별국의 자리 하나면 평생 다져왔던 인간관계나 의리는 배설물처럼 여기는 결단력 있는 고신 교단의 목사들입니다. 이렇게 다루기 좋은 목사 장로이니 계파나 진영의 의도를 가지고 매관매직하면 오늘날 고신에 만연되어있는 계파와 진영의 골은 더욱 깊어질 것이 자명합니다. 아니 혹자는 이미 보수는 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보수를 만들어 개혁을 견제하고 균형을 맞추자고 주장합니다. 뼛속까지 개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총회 임원으로 만들어 죽어가는 보수를 살려야 한다고 평생 개혁에서 쌓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작금의 정치행태에 발맞추어 가능한 봉투가 되는 자리를 만들고, 그곳에서 천년만년 누리고 싶어 하는 형국입니다. 20만 원짜리 봉투와 자리의 맛을 봐 버린 소위 보수라는 자들은 아예 정치적인 의리와 명분은 상실되어버렸고, 보수라는 가면만 쓰고 있을 뿐 언제든지 개혁도 되고, 진보도 되어 그동안 누리던 봉투의 자리를 놓칠까 전전긍긍하며 그 신보수라는 새 배에 올라타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최근 들어 고신교단 내에 계파와 진영의 골이 더욱 깊어지고 커진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서울의 L 목사님께서 열변을 토하신 것처럼 총회 서기 출신 카르텔입니다. 총회 부회록 서기가 되기 전에 총회 준비를 위한 총회 서기부 MT라는 명목으로 그 해 부회록 서기 후보의 물망에 오르는 사람을 부부 동반 모임에 참여시킵니다. 그러니 총회 임원에 입성하기 위해서 그 계파 사람이 아니면 시작부터 불가능합니다. 지금 총회 서기부에 포진한 분들을 보십시오. 계파 색채가 엷고, 계파를 싫어하고, 보수성향이 있는 사람도 일단은 그 진영에 몸을 기대고 양다리를 걸쳐야 시작이 됩니다. 균형 있는 총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분명한 명분으로 다리만이라도 걸치고 시작했는데, 회록 서기를 지나면서 하체가 들어가고, 부서기를 지나면서 몸통이 들어가고, 서기가 되면 총회를 손에 쥐고, 서기를 마치면서 그 영향력은 한국교회로 확대됩니다. 사욕에 치우친 사람이 총회 임원, 특히 총회장이 되어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4년 동안 총회 서기부를 거치면서는 구석구석을 너무도 잘 알게 된 서기부 임원들이 총회장단이 되었을 때, 유익한 점보다 작금의 현상처럼 위험하고 무법천지가 될 위험성이 훨씬 높습니다. 소위 서기 카르텔이라는 것을 반드시 총회적으로 다루어 이 카르텔로 인한 계파와 진영을 넘어 안하무인의 정치로 흘러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서기부를 거치지 않아도 총회장단에 오를 정도의 사람이면, 이미 노회와 목회에 상당한 경험과 식견을 가진 분들로서 충분한 자질이 검증되었고, 사무총장 이하 직원들의 훌륭한 보좌가 있기에 1-2년의 총회장단 사명은 충분히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한국교회에서의 우리 교단의 몫이 있습니다. 교단의 위상을 생각해서 대부분이 총회장을 역임하신 분들이 이사로 가십니다. 총회 서기부를 마치고는 특별국이나 상임위에는 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고 총회 임원회에서 의논이 있었다지만 관례처럼 총회 서기를 마치면 총회를 잘 안다는 빌미로 감사국에 들어갑니다.(현재 감사국원 3명은 최근 총회 서기역임) 총회 감사국인지 총회 서기 지내신 분들의 친목회인지 구분이 안 될 지경입니다. 총회 감사국이 총회 서기부의 연장선 조직입니다. 총회 감사국은 별정직처럼 그 기능상 법적 전문가, 재정 전문가, 행정 전문가 정도는 배치해야 합니다. 차라리 총회를 잘 아는 서기부 출신들로 총회를 하나 만드시지요. 총회 총대로 나올 정도가 되면 기본적인 자격과 능력을 갖춘 분들인데, 총회 서기 출신들이 꼭 해야 한다는 논리는 총대들을 얼마나 무시하는 처사인지 총대들은 알아야 합니다. 총대들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당근 하나 던져주면 입을 다무는 총대들이니 무시당하는 줄도 모를 수 있습니다. 유일하게 서기를 마치고 임원회에서 의논한 대로 그 어느 상임위도, 틀별국도, 이사도 가지 않은 분이 고 신수인 총회장이십니다. 최근 총회 서기를 지낸 분 들 중 유일하게 보수진영의 고 신수인 총회장님께서 약속을 지켰습니다. 소위 개혁진영의 서기들은 단 한 명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너무 개혁을 잘하셔서 말입니다. 처음 시작할 땐 훌륭하셔서 선출되셨습니다. 그런데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니 자연스럽게 욕심이 생긴 것입니다. 여기엔 그 어떤 사람도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총회가 훌륭한 분들로 보호해야 할 책임도 있습니다. 총회장의 사역이 끝날 무렵 고 신수인 총회장님께서는 당신의 몫인 “CBS이사”를 제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당연히 총회장님께서 가셔야 교단 권위와 위상이 서게 된다고 고사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렇게 전달하여 CBS에서는 제가 이사로 갈 것 다 알고 전화까지 왔었습니다. 물론 개혁에 몸을 담았던 총회장 출신은 선배 총회장 출신 목사님의 이사 자리를 빼앗아서라도 반드시 그 자리에 갑니다. 말 그대로 개혁 정신이 투철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난 후 고 신 총회장님께로부터 “미안하다”고 하는 전화가 왔습니다.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너무 힘들게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원래 그 자리는 제자리가 아닙니다. 총회장님 자리니 총회장님 편하신 대로 하시라”고 대답했고, 현제 이사로 있는 당시 총회 서기가 고집을 부려 그 자리로 갔습니다. 사욕에 눈이 뒤집히면 세상이 말하는 윤리도 도덕도 질서도 없습니다. 현재 우리 고신총회가 한국교회에 파송하는 이사는 CBS, 성서 공회, 찬송가 공회, CTS, 군선교 위원회입니다. 현재 이사를 하고 있는 분들은 다 총회 임원 출신이고, 목사인 경우는 다 총회 서기 출신입니다. 고 신수인 총회장님을 분기점으로 해서 그동안 관례로 총회장을 역임했던 분들이 가던 이사를 총회 서기를 마치고 가는 아주 개혁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총회를 잘 아는 것을 넘어 총회 울타리 밖에 있는 이권도 잘 알게 된 것입니다. 총회장단이 갖는 위엄과 일반 목사와 비교할 수 없는 혜택에 눈이 멀어 목사의 정년까지 희생해 가며 자리에 오르고 “내 때만 망하지 않기를 소망”하면서 그동안 꿈꾸어 왔던 즐거움을 만끽하게 됩니다. 그럴 수도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그런 세월이 가는 동안 고신의 신앙과 정신은 오물통이 되어 썩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위기가 아니라고 했다가 집권을 하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위기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이 역시 진영논리로서 총대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하는 속임수입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책임을 고신의 교회들에게 떠넘기는 기가 찬 술수이지요. 그리고 뒤에서는 몇 년 세월을 통해 달인의 경지에 오른 실력으로 소위 봉투가 되는 일에는 탁월한 안목으로 몇 수를 내다보는 행보를 하게 됩니다. 총회 서기부는 총회 서기단 활동으로 총회 임원회 자리를 끝내야 합니다. 총회장단은 시대 시대마다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바라보며 영적으로 한국교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장자 고신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을 세워야 합니다. 총회가 평안하고 태평성대일 때는 농어촌에서 목회하시는 훌륭한 목사님도 총회장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고신이 위기라고 특별기도회를 하는 상황이라면 총회장 되기 위해 몇 해 동안 수천, 수억을 쓸 것이 아니라 총회장에 된 후 수억을 총회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인물을 총회장으로 세워야 합니다. 고신이 위기라고 기도회를 하면서, 1) 눈 감고 아웅 하지 말고 2) 순수한 교회들과 성도들의 주머니를 갈취하지 말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야 합니다. 또 이미 그 자리에 오르신 분이라 해도 위기의 총회를 위하여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분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정말 고신을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전관예우(前官禮遇)’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적 의미는 장관급 이상의 고위 관직에 있었던 사람에게, 퇴임 후에도 그의 공직에 대한 헌신을 기려 예의를 갖추어 존중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관리는 개인의 행복에 우선해서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재능과 노력을 바쳤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자세로 일한 관리가 퇴직했을 때 그를 예우함은 마땅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흔히 쓰이는 전관예우라는 말의 뜻은 본래의 뜻과는 거리가 멉니다. 가장 잘못된 사례가 법조계의 전관예우입니다. 전직 판사와 검사가 퇴직 후에 변호사가 된 사람을 현직 검사나 판사가 예우해 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변론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관(前官)이라는 이유로 유리한 결과를 얻는다는 것은 공정을 생명으로 하는 법정에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제 총회 감사국은 서기부 출신의 ‘전관예우’의 자리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러니 총회 피감 기관들을 공정하게 제대로 감사할 기능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전관예우 받았으니 밥값을 해야겠지요? 한 걸음 더 나아가 고신을 대표하는 한국교회의 자리도 서기부 출신의 “전관예우”의 자리로 자리매김해 버렸습니다. 당연히 사리사욕이 목구멍까지 차오릅니다. *묻고 싶습니다. 앞서 언급한 총회를 대표하여 파송하는 이사직에 어떤 근거로, 어떤 기준으로 파송하는지, 서기 출신이 총회를 대표할 자격이 있는 것인지, 총회 임원회는 총대들이 납득 할 수 있는 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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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5 : 성경에서의 용납과 용서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지나면서 주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믿음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데 먼저 감사를 드리면서 문득 그게 용서인가 용납인가? 두 단어는 같은 말인가 다른 말인가? 라는 용어적 의미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흔히들 많은 교인들은 이 두 단어를 구분 없이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찬송가 569장 3절에도‘흠이 많고 약한 우리를 용납하여 주시고’란 가사가 있다. 하지만 엄격히 보면 같은 듯 다른 말이다. 본 호에서는 그 차이점이 어떤지를 분석하여 논하고자 한다. II. 용납(容納)과 용서(容恕)의 단어 분석 1. 용납이란? : 헬라어로는 ‘아네레스’, 한자어로는 얼굴 용(容), 바칠 납(納)이다. 민중서관의 국어대사전에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남의 말이나 행동을 받아들임’, ‘어떤 물건이나 상황을 받아들임’이라 했고, 금성사 국어대사전에는 ‘부정적인 것을 그냥 받아들이거나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했다. 국문학 교수를 역임한 최태영 장로는 ‘교회용어 이대로 좋은가?’란 그의 저서에서 ‘이 용납은 허용(許容)과 거의 같은 뜻으로 부정적인 요소, 모자라는 점이 있지만, 그것을 탓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하며 받아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이를 우리 개신교적인 의미로 보면, ‘우리의 죄는 용납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시지 이를 긍정적으로 이를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용납하시는 분은 아니시다.’라고도 했다. 이상으로 볼 때 어떤 잘못이 있을 때는 그 일에 대한 회개 기도가 필요하며,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성경에서도 용납은 죄의 개념으로 표현되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면,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고후11:1).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 구나’(고후11: 19). ‘사랑가운데 서로 용납하라’(엡4:2)고 했다. 여기에서의 용납이란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용서가 아니라 상호 인간관계 속에서 상대방을 너그럽게 보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2. 용서란? : 헬라어로는 파레시스 로서 ‘놓아줌’, ‘해산’, ‘처벌의 보류’등의 뜻이 있고, 로마서 3:25절에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하여 지은 죄를 용서함’이란 뜻으로 말씀하고 있고 수많은 용서에 대한 말씀도 거의 동일하다. 한자어로는 얼굴 용(容), 용서할 서(恕)이며, 민중서관의 국어대사전에는 ‘지은 죄나 잘못한 일을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덮어줌’이라 했다. 이상으로 볼 때 성경적 의미나 각종 사전적 의미로 볼 때도 용서의 의미는 거의 동일하다. 이렇게 볼 때 용서란,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또 스스로 죄를 해결할 방법은 없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믿고 회개 기도할 때 비로소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용서는 상호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용납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는 믿음 안에서의 회개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용서인 것이다. III. 결론과 제언 서론에서 언급한 찬송가 569장 3절에 ‘흠이 많고 약한 우리를 용납하여 주시고’란 가사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면, 용서와 용납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어서 다소의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앞에서 논한 대로 실제로는 같은듯하나 다른 의미이다. 여기서는 용납이 아니라 용서로 표현함이 옳을 것이다. 이 두 단어 외에도 관용(寬容)(사전적 뜻: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이란 용어도 있다. 어쩌면 용납과 용서를 다 포함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고민과 염려가 되는 것은 이런 문자적인 구분을 지나치게 하다 보면, 문자적 율법주의에 빠져서 본질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항상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확한 의미를 알고 사용하는 것은 더 좋은 일이기 때문에 바로 알고 바로 사용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 용어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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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삶의 현실에 대한 인간의 태도
인생의 삶을 사는데 현실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그 태도가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태도(attitude)가 고도(altitude)를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비행기가 아래로 향하느냐 위로 향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고도가 결정되듯 사람이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 방향과 높이가 결정된다는 뜻이다. 누구나 높이 오르고 싶어 하지만 아무나 높이 오르는 것은 아니다. 오를 수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히말라야 고산족들은 양을 매매할 때 가파른 산비탈에 양을 놓아두고 살 사람과 팔 사람이 함께 지켜본다고 한다. 비탈 위로 풀을 뜯으러 올라가면 값이 비싸고, 비탈 아래로 내려가면 값이 싸진다고 한다. 그 이유는 위로 올라가려는 양은 현재 힘이 들더라도 넓은 산허리에 이르게 되지만, 아래로 내려가는 양은 현재 수월하나 협곡 바닥에 이르러서는 굶주려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신앙의 삶도 마찬가지다. 항상 높이 계신 주님을 바라보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오는 자가 있는가 하면 어려움이 있을 때 예루살렘을 떠나 내려가는 자들이 있다. 어려운 시기에 갈렙은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 믿음의 태도를 가졌던 사람이다. 그는 85세의 나이에도 아직도 정복되지 않은 가나안 땅에 잔류하고 있는 아낙 사람들이 사는 산악지대를 정복하고자 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곳에는 아낙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분명 함께 하실 것이니, 내가 반드시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수 14장 12절)” 갈렙의 신앙은 능동적 신앙의 삶이었다. 45년 전에도 다른 사람들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후퇴 반응을 보였지만 갈렙은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자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벌써 85세 고령인데도 여전히 적극적인 Next Vision 성취를 지향하며 살았던 것이다. 맥도널드 햄버거를 창업하기 전 레이 크록은, 53세 나이에 겨우 밀크쉐이크와 함께 30년 동안 종이컵을 파는 세일즈맨으로 반평생을 보냈다. 그래도 그는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던 그는 30년이라는 기나긴 밤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서 성공을 한 것이다. 인도의 벵골 호랑이는 먹이 사냥에서 사냥감을 잡는데 약 스무 번의 시도 끝에 한 번 성공한다고 한다. 그는 실패 앞에 포기가 아니라 도전의 태도를 가져 그 도전이 성공을 이루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한 번 실패하면 쉽게 단념하고 한탄한다. 잃은 것 때문에 원망하지 말고 지금 있는 것이 자산이 되어 다시 도약해야 한다. 열정을 가진 사람으로 다시 일어나면 되는 것이다. 슈베르트는 가난한 음악가였다. 31세로 죽을 때까지 방 한 칸 없었고, 그토록 필요한 피아노 한 대 없는 불우한 음악가였다. 어느 날 레스토랑에 앉아 있는데 악상이 떠올랐다. 그는 오선지를 찾았다. 친구가 레스토랑 메뉴판에 오선지를 그려주었다. 그것이 유명한 아베마리아 세레나데이다. 환경에 낙심할 필요 없다. 주위 시선에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다. 폭풍이 일어도 지구는 돌고 있는 것이다. 고난 속에 신앙의 열정을 가지고 가면 길이 열린다. 신앙의 열정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능력 주시고 그 능력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나니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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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자유의 축복 (요8:31-36)
1997년 북한의 권력서열 제3위(노동당 국제담당비서)였던 <황장엽>씨가 주중 한국 대사관을 통해서 우리나라로 망명을 했습니다. 그 망명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북한에는 그의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과 가족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나라로 망명함에 따라서 그의 가족들은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고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북한 권력층의 실세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남한으로 망명을 할 경우 남아 있는 가족들이 얼마나 비참해 지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남한으로 망명을 감행한 이유는 바로 체제의 자유를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고, 너무나 잘못되어 있는 북한의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어서였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렇게 무모한 망명을 한데 대해서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의 행동이 옳았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역사가 평가를 할 것입니다. 그의 행동을 통해서 우리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을 깨달을 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유의 소중함”입니다. 체제의 자유, 정치적인 자유는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억압이 있는 나라마다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 기꺼이 몸을 던지고, 민주화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유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자유의 소중함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억압 속에 사는 사람들은 자유의 소중함을 애타게 목말라 합니다. 그렇게 소중한 정치적인 자유보다 더 필요하고 소중한 자유가 있는데 바로 영적인 자유(신앙의 자유)입니다. 그 영적인 자유에 대해서 알아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유를 취하는 방법을 알아야합니다.(요8:32,36) 둘째는, 자유를 빼앗기지 않게 지켜야합니다.(갈2:4) 셋째는, 자유를 누리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갈5:13)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소중한 자유를 잘 지키고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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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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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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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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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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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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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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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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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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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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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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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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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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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바른믿음 (1)
- T.L 오스본이 쓴 “하나님의 큰 그림”이라는 책이 있다. 하나님은 큰 그림을 가지고 계신다. 완벽한 창조의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그런데 사단에 의해 인간이 속았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속량의 그림을 가지셨다. 온전한 복음, 새로운 피조물의 복음, 회복복음으로 하나님이 가지신 큰 그림을 성취하셨다. 하나님의 큰 그림의 결론이 무엇인가? 믿는 자에게 온전한 회복의 복음으로 온전히 회복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에는 이 큰 그림이 있다. 하나님은 이 목적을 가지고 세상을 움직이고 계신다. 믿음의 핵심인 죄인이 의인이 된 것을 믿어야 한다. 믿음의 핵심이 무엇이냐? 죄인이 의인이 되었다 것이다. 그런데 의인으로 끝나면 안 된다. 의인이 된 이유는 임마누엘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이 살고 싶어서 임마누엘 하셨다. 죄인이 의인이 되었다는 것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5:10-13) 믿는 자안에는 아들이 있다. 임마누엘을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다.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는 증거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여기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들을 구원해 두었다. 내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이루어 놓았다.”고 하시는데 그 말을 안 믿으니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여기는 것이다. 여러분을 거짓말하는 자로 보는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는가?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여기니까 예수 믿지 않으면 하나님은 “네가 나를 거짓말쟁이로 여기느냐?”라고 하신다. 믿는 자에게는 증거가 있다. 믿는 자안에 아들이 있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는데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 생명이다. 결과적으로 영생이 있음을 믿게 하시려고 성경이 쓰였다. 의인으로 만드신 이유는 아들이 있으시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바른 믿음에서 우리는 출발해야 한다. 나는 전에는 성령충만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였다. 몰라서 그렇게 생각했다. 귀하고 중요한 사실은 내가 성령충만하다는 믿음의 확신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굉장히 힘든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굉장히 힘이 든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또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 성령님께서 부족하게 계신 것이 아니다. 완벽하게 계신다. 이 사실을 믿고 완벽한 성령님이 내 안에 함께 하심을 믿고 나는 성령의 사람이 되었음을 믿는 믿음에서 신앙생활이 출발해야 한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라고 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주님이 주시는 물을 마신 자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샘물이 영생하도록 솟아난다. 어떤 선행을 한 후에 샘이 솟아나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을 때, 주님이 주는 물을 마실 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은 터진 것이다. 지금도 예수를 믿는 당신 안에서는 영생하도록 샘물이 솟아오르고 있다. 이 사실을 아는 믿음에서 신앙생활을 출발해야 한다. 새벽기도를 많이 해야 어느 날 샘물이 솟아오른다고 하지 않았다. 예수를 믿은 후 수련을 닦아야 샘물이 솟아난다고 하지 않았다. 오늘도 당신 안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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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바른믿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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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12)
- 오래 참고 사랑하면 인내하게 됩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기에 오래참고 양육합니다. 사랑하기에 오래 참는 것이 힘들다고 말하지 않고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죄인인 인간을 향해 오래 참으십니다. 사랑하기에 참으십니다. 회개하고 돌아올 때까지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십니다. 사랑하면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인내가 없으면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가 성숙해질 때까지 오래 참으십니다. 만약에 하나님께 참으시지 않고 우리가 죄짓고 실수할 때마다 정죄하시고 심판하셨다면 우리가 성장하거나 성숙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적은 믿음으로 시작해서 우리의 믿음이 커질 때까지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은 죄성이 있어서 인격이 비뚤어졌고 미성숙하며 자주 넘어집니다. 우리가 약하고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 오래 참고 기다리심으로 우리의 인격이 예수님 닮는 성숙한 자가 됨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고 인격이 성숙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하나님께서 나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셨습니다. 오래 참으시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인내합니다. 부모의 자녀 사랑은 뜨겁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기에 자녀에 대해 오래 참고 기다립니다. 수십 년을 아니 평생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에 대해 오래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하기에 지루하다 느끼지 않고 참아줍니다. 사랑의 예수님은 오래 참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은 인내이며 오래 참으심 입니다. 극심한 십자가의 고통은 10분도 참기 힘든데 6시간의 극심한 고통을 십자가 위에서 오래 참으셨습니다. 인내의 사랑으로 구원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면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사람에 대하여 오래 참아줄 수 있습니다. 너무 조급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기에 사람에 대하여 오래 참고 기다려주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오래 참고 기다려주다 보면 변화된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랑은 감정을 다스리며 쉽게 화를 내지 않습니다. 오래 참는 사랑, 인내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오래 참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온유하며 사랑은 따뜻하고 부드럽습니다. 사랑이라는 말만 들어도 마음이 포근합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최고 듣기 좋은 말입니다.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가 너를 영원히 사랑한다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사는 복된 자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온유하십니다. 우리를 부드럽고 따뜻하게 대해주십니다. 사랑의 예수님은 온유하십니다. 사랑하면 온유하고 사랑받는 자도 온유해집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사랑하며 사는 자는 사납지 않고 따뜻하고 부드럽습니다. 온유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인간은 사랑을 받으면 순해지고 부드러워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는 자는 온유해집니다. 온유한 자는 다투거나 부딪치지 않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진 자는 온유함으로 좋은 관계를 만듭니다. 온유는 겸손입니다.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은 언제나 겸손합니다. 사랑으로 온유, 겸손한 자는 누구나 다 좋아합니다. 온유는 친절입니다. 사랑은 친절입니다. 사랑이 없는 자는 불친절 합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진 자는 사람을 대할 때 짜증 내지 않고 친절합니다. 친절한 삶이 사랑의 삶입니다. 사랑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을 대할 때 사랑으로 친절하게 대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위로, 돌보심, 지키심, 격려의 말씀은 사랑의 하나님의 친절입니다. 사랑하면 친절하게 됩니다. 리더는 온유하고 친절한 사랑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친절은 인간관계의 지혜입니다. 사랑하면 온유합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사랑하며 사는 삶이 복 받는 비결입니다. 시기하지 아니하며 인간은 누구나 시기 질투심이 있습니다. 시기, 질투는 자신을 망하게 만듭니다. 마음이 좁고 욕심이 많은 자가 시기, 질투심이 많습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진 자는 다른 사람이 축복받고 잘 되는 것을 시기, 질투하지 않습니다. 남이 잘 될 때 기뻐하고 축복하는 마음이 사랑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시기 질투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가 잘 될 때 기뻐하시고 잘 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 넓은 마음입니다. 좋은 리더는 사랑의 마음으로 시기, 질투 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기에 시기하지 않습니다. 형제는 형제가 잘 될 때 시기 질투합니다. 요셉이 꿈을 꾸었을 때 형제들이 시기 질투 했습니다. 시기, 질투하는 리더는 무너지고 실패합니다. 사울 임금은 시기, 질투심을 가지고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다가 망했습니다. 시기, 질투는 죄이고 어리석음입니다. 시기, 질투는 미움이고 관계를 깨뜨립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마음은 축복해 주는 선한 마음, 넓은 마음입니다. 리더는 시기, 질투 버리고 넓은 마음으로 축복해 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윗은 사랑의 마음으로 가득 차 시기, 질투 하지 않았습니다. 큰 자는 시기심이 없고 마음이 넓은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자입니다. 시기, 질투는 영육을 병들게 하고 삶을 실패로 이끌어 갑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친구 관계에서 서로 시기, 질투하면 참된 친구가 아닙니다 자랑하지 아니하며 인간은 누구나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자랑하는 것도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입니다. 상대방이 고난당하고 어려운데 내가 지나치게 자랑하면 상대방의 마음이 불편하고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인간의 죄성은 다른 사람이 좋은 일이 있어 자랑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지나치게 자랑함으로써 사람들을 낙심시키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칭찬하거나 자랑해 주면 덕이 될 수 있으나 내가 나에 대해 자랑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나의 약함을 자랑해야 합니다. 사랑의 예수님은 자랑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세계의 주인, 부요의 하나님이신데 자랑하지 않으시고 겸손하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은 자신을 드러내거나 자랑하려는 마음을 절제하고 겸손히 사랑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에 대해 자랑은 절제하나 다른 사람이 자랑 할 때는 들어주고, 기뻐해 주고, 칭찬하는 마음이 사랑의 마음을 가진 리더, 넓은 마음 가진 자입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진 자는 자신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겸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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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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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생쥐와 사투 : 내 거 먹지 마!
- “이제 일은 그만하고 사역만 집중하지 않겠니?”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나는 순종했다. 지금까지 치열하게 일하며 버텼지만, 복학 후 이제는 일하지 않고 버티기로. 어차피 버티기 인생은 매한가지다. 급할 때면 전단지 돌리기 같은 일회성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하지만 일에 묶이지 않기로 결심했다. 스물둘이라는 아주 어린 나이에 교육전도사를 시작했고 작지만 사례만으로 살아보기로 결단한 것이다. 소위 생계형 전도사가 된 것이다. 일할 때도 버거웠지만 순종은 내 삶을 더 퍽퍽하게 만들었다. 생계의 위협을 더욱 체감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대학생이 된 동생과 사는 집은 두 칸의 방이 있다. 각자의 공간을 갖게 되었으니 프라이빗(private)한 거주공간을 갖게 된 듯하다. 하지만 그야말로 허름한 옛날 집이다. 입식 부엌? 현대식 주방이라고 하던데 방문을 열고 나가면 마감이 덜 된 시멘트 바닥에 수도꼭지가 있어 머리도 감고 설거지도 한다. 여름이면 큰 대야에 물을 받아 쭈그리고 앉아 샤워도 가능하다. 작은 마당을 지나 밖으로 나가면 공용화장실을 사용한다. 그다지 나쁘지 않다. 하지만 딱히 좋지도 않다. “하나님, 이게 뭐에요.” 사역도 수업도 없는 조용한 오후. 오랜만의 여유로 빈방에 누웠다. 밖은 오지게 더운데 바닥의 서늘함이 작은 위로가 되어 바닥과 더 밀착해 본다. 나름 대학 생활 로망이 있었다. 중산층은 된다고 생각했기에 부모님이 뽑아주는 아반떼 승용차를 타고 서점에서 맘에 드는 책과 음반을 마음껏 집어 들며 살아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집은 망했고 부모님은 우리 형제를 도울 여력이 전혀 없었다. 동생은 아르바이트로 용돈 벌이를 하고 나는 온갖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신세 한탄으로 생각이 많아지던 시간, 어느새 잠이 들게 된다. 「덜그럭, 덜그럭」 “너였구나?” 작은 소리였지만 낮잠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현대식 주방에서 소리가 났다. 최근 주방 청소할 때 물과 함께 쓸려 내려오는 쥐똥. 남은 음식과 비누를 갉아 먹는 그 녀석. 나는 이놈에게 몹시 화가 나 있었다. 부족한 살림에 손을 대는 흉악한 녀석이다. 어렵게 얻어온 음식에 이 녀석이 먼저 입을 대면 나는 먹을 수가 없다. 비누는 왜 먹는 걸까? 쪼그려 앉아 세수할 때면 선명한 이빨 자국이 비누에서 보인다. ‘에잇!’ 짜증 섞인 소리를 내어보지만 아까워서 음식처럼 버리지는 못한다. 물로 대강 씻어내고 거품을 낸 후 찝찝한 세수를 마무리한다. 흔적만 있고 대면한 적 없던 그 원수가 드디어 나타났다. 내 키보다 작은 방문을 조용히 밀어 주방을 내다본다. 작은 쥐색의 생물. 생쥐다. 그간 얽힌 악연이 아니라면 뒤태가 귀엽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적’이다. 취향도 독특하지. 얼마나 맛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비누를 정신없이 갉아대고 있다. 군대용어로 기도비닉(企圖秘匿)이라 했던가. ‘살금살금’ 최선을 다해 은밀히 접근하다. 계획은 없다. 그냥 복수의 열망으로 다가간다. 나는 재빠르게 손을 뻗어 그 아이의 몸체를 집어 들었다. ‘아차!’ 잡힌 녀석은 급박한 상황에 고개를 돌려대며 내 손을 물려고 한다. 물리면 내가 더 타격이 클 수 있다는 생각에 더 큰 힘으로 움켜쥐었다. ‘찌~익’ 쥐가 고통스러운지 하늘을 향해 고함을 지른다. 막상 원수를 포획하고 나니 어찌할 줄 모르겠다. ‘묶어서 쓰레기통에 버려? 땅에 묻어?’ 길게 고민할 상황은 아니었기에 일단 밖으로 나왔다. 눈앞에 공터가 보인다. 팔을 크게 몇 바퀴 돌려 빈 공터에 던져버렸다. 땅에 내동댕이쳐진 원수는 기절했는지 잠시 움직임이 없다가 벌떡 일어나 잽싸게 도망가버린다. 살려 보낸 것이 유효했을까? 동네 쥐들에게 나의 흉폭함이 전해졌는지 알 수 없지만 더 이상 나의 식품에 손대는 불청객은 나타나지 않았다. 비누도 매끈함을 유지하게 되었다. 한낮의 소동은 그렇게 나의 승리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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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생쥐와 사투 : 내 거 먹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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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변화되는 것인가? 연기가 느는 것인가?
- 그리스도인이라 이름 하는 사람들 중에 그런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 회사에 하루 종일 일을 하는 것은 피곤하지 않고 또 하루 종일 야외에서 놀다 오는 것은 별로 피곤하지 않은데 이상하게 주일에 교회에 다녀오면 피곤합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혼신의 힘을 다해서 예배를 하고 봉사를 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라면 또 다른 이유는 없는 것일까요? 우리는 교회에 오면 절대 내 단점은 보여서는 안 되고 내가 좋은 신앙의 사람이고 거룩한 사람인 것만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오면 내 원래의 모습은 감추고 가면을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피곤합니다. 나의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 가면을 쓴 모습으로 사람을 대하려고 하니 보통 때 느끼지 못하는 피곤함과 스트레스를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변화되는 것과 연기가 느는 것을 혼동할 수 있습니다. 완벽한 가면을 쓰고 연기한 것을 변화된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것은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가장 경건하다고 자타가 공인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서 자주 “외식하는 자들아!”라고 말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외식’이라는 말의 원어는 “가면을 쓰다.”, “위선적 태도를 취하다.”의 뜻입니다. 말하자면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겉과 속이 다른 가면을 쓴 모습은 아무리 경건한 모습이라고 하더라도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심을 외식이라는 단어로 예수님은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변화란 거룩한 것처럼 연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내 중심이 새로워지고 그 중심의 변화를 따라서 내 행동과 삶이 달라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연기학원에 등록한 것이 아니고 변화의 영이신 성령님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 이제 혹시 연기하는 것과 같은 가면을 쓴 모습의 신앙생활이었다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진정으로 내 중심으로부터의 변화된 모습을 열망하며 성령의 은혜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지금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연약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부족하고 연약하기에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스스로 용납할 수 있는 것이 겸손의 시작입니다. 때로는 내가 너무 싫어서 속상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 좋은 점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향한 나의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내 스스로를 용납하지 못하면 자꾸만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보이기 싫어서 가면을 쓰게 되고 그래서 외식하는 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족함과 연약함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인 교회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주님께서 이 죄 많은 인생들을 향하여서 그러셨던 것처럼 부족함과 연약함을 용납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부족함과 연약함을 서로 서로 내어 놓을 수 있는 편안한 공동체가 되어야 하겠고, 그리고 그것을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보듬어 안고 어루만져주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내 부족함과 연약함을 솔직하게 내어 놓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그 모습 그대로 받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변화의 체험을 하게 할 것입니다. 부족함과 연약함 때문에 가면을 쓰지 마십시오.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저절로 겸손해지게 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찾게 할 것이며, 그리고 이 모습 이대로 나를 받아주시고 만나주시는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기회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성령님은 완벽한 연기자 안에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고 연약해도 내 모습 그대로 겸손히 내어놓고 은혜를 구할 줄 아는 사람 안에 역사하는 영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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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변화되는 것인가? 연기가 느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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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주님의 뜻, 무엇인가?
- 주님의 뜻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관심사가 되어야 하는 어떤 것이다. 신실한 성도들은 언제나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고, 그 뜻을 순종하는 일에 최우선권을 부여해야 한다. 그런데, 주님의 뜻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올바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뜻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있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려운 어떤 일을 당할 때 주님의 뜻을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성도들이 나그네의 삶과도 같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어떤 위기나 슬픔의 순간을 당했을 때 주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믿음을 강화시키려고 하는 노력은 전적으로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갑작스런 어떤 사고나 질병, 사업의 실패, 또는 가까운 친구나 친지의 죽음과 같은 일들을 당해서 우리는 자주 주님의 뜻을 이야기할 때가 많이 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종종 자신을 향해서나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그것은 주님의 뜻이었습니다”고 말하고 위로를 받는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뜻과 관계해서 어떤 오해를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서 모든 것이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으로 주님의 뜻을 보는 관점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어떤 책이 있는데,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악과 실망스러운 일들도 모두가 결국은 이 책에 기록된 대로 일어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잘못이다. 이런 잘못된 시각에 가장 잘 인용되는 성경 귀절이 바로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29-31)는 말씀이다. 우리는 이 말씀이 마치 하나님께서 허락해야 참새 한 마리도 죽고,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공과 실패 등 모든 것을 일일이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가르치는 것으로 잘못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참새가 날개가 부러져 죽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날개로 하늘을 훨훨 나르는 것이다. 마태복음 10장 전체의 내용을 볼 때, 우리는 이 말씀을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거기에도 하나님이 계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없이 참새 한 마리도 떨어지지 않는데 머리털까지 세실 정도로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너희와 함께 하시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누가복음은 이 내용을 더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떨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그런데,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그 곳에도 계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그 때에는 아들과 함께 하시지 않았다. 그래서 주님은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아버지,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부르짖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그것은 아들을 십자기에 죽게 하시면서까지 우리를 버리지 않고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며,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것이다. 성경은 그 어느 곳에서도 주님의 뜻을 어떤 숙명주의, 팔자소관, 또는 운명주의와 같은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주님의 뜻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릉도원과 같은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다스림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뜻대로 이 창조 세계를 다스리고 있다. 주님은 달과 별, 태양, 바위, 강, 바다, 바람과 같은 무생물의 세계를 자신의 뜻대로 다스리고 있다. 주님은 또한 동식물의 세계를 자신의 뜻대로 다스리고 있다. 만약 이 세계가 주님의 뜻대로 다스려지지 않으면 정말 문제가 생겨나게 될 것이다. 주님은 또한 우리의 가정, 학교, 교회, 직장, 국가에 대해서도 자신의 뜻을 가지고 계시며, 이 모든 사회와 문화 현상들이 주님의 뜻대로 운영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 학교, 교회, 직장, 국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고 그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게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주님의 뜻은 질서와 조화, 평강과 즐거움, 선함과 거룩함과 같은 것이지 무질서와 분쟁, 괴로움, 악함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건강하고 영원히 즐겁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 실패하고 병들고 죽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비극은 주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침입자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다시금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나라를 만드시고, 우리로 하여금 실패와 고난과 시련이 없이 건강하고 즐겁게 영원토록 사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주의 뜻이 이루어질지어다”라고 말하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현 미국 Evangelia University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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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주님의 뜻,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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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한국인보다 한글을 더욱 사랑한 제임스 게일 선교사
- 지난 10월 9일(주일)은 ‘제576돌 한글날’이었다. 다음날 월요일은 대체공휴일로 마침 맑은 가을 날씨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휴일을 즐겼다. 일부에서는 한글날을 법정 공휴일로 해야하나, 대체공휴일로 해야하나하는 소리도 있었다. 공휴일로 하는 국가적 기념일은 큰 의미가 있고 기려야할 뜻이 있다. 바로 한글날은 7천만 한민족에게 함께 쓰는 어문(글자)이 있게한 한글창제일을 기리고 기념하는 높은 뜻이 있다. 우리 역사의 영웅이신 세종대왕께서 1446년 ‘나랏 말씀이 중국과 달라 백성이 쉽게 쓰게’ 한글을 창제하시고 선포하심으로써 우리 문자가 있는 위대한 나라가 되었다. 세종대왕이 창제하신 한글은 위대한 문자이었음에도 백성은 쓰지 않았다. 어문을 쓰는 양반과 선비는 한자의 사대문화에 젖어 있었고 서민대중이 한글을 일부 배워 쓰기도 했지만 문맹의 백성이 너무 많았다. 우리의 한글은 조선의 말기 일정시대 1927년 9월 마지막 날 조선어연구회가 ‘가갸날’이란 모음순서 이름으로 한글날을 정했다. 이듬해 크고 으뜸의 뜻을 담아 ‘한글날’로 이름 지어 기념했다고 기록 돼 있다. 이 긴 역사 속에 한글이 빛을 보게 된 것은 벽안의 서양인에 의해서다. 1888년 캐나다에서 조선 땅에 파송된 복음의 전사 제임스 S. 게일 선교사가 40년 동안 조선 땅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한글을 갈고 닦아 온 백성이 쓰게 하고 세계에 전하는 위대한 일을 하셨다. 제576돌 한글날을 앞두고 지난 6일(목) 게일 선교사의 한글사랑 발자취를 찾아보는 심포지엄이 있었다. 6일 저녁, 창원극동방송에서 경남기독문화원과 창원시기독교장로총연합회가 공동으로 심포지엄의 자리를 만들고 발제와 연찬 그리고 토론의 진지한 시간을 가졌다. 발제를 맡은 부산경남기독교역사연구회 회장이신 박시영 목사는 게일 선교사의 선교 사역 중에 한글의 우수성을 찾아내고 최초로 1897년 한영사전과 신구약 번역본 완성 등 조선 땅의 한글 대중화에 엄청난 업적을 이룬 선교사의 발자취를 정리했다. 가히 놀라우리 만큼 게일의 한글사랑이 지대했다. 그래서 조선백성들이 비로소 한글로 성경을 읽고 복음의 지경이 넓혀져 왔음을 알 수 있었다. 게일은 조선 땅에 발을 딛고 먼저 한글을 깨우치고 4년 만에 한글 체계화 기초가 되는 사과지남(辭課指南)이라고 하는 한글 어문법을 완성했다. 그리고 복음을 위한 큰 사역 중 온 세계인들이 읽고 있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한글로 번역, 백성들이 읽게 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1907년 그 유명한 평양 대부흥의 주인공 길선주 목사가 게일이 번역한 천로역정을 읽는 중 불같은 성령의 뜨거움을 체험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며 장대현교회 부흥을 일게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초대교회 선교사의 성경번역은 논란이 있다. 최초 대동강을 건너고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 후 로스선교사가 최초로 중국성경을 한글로 옮겼다는 기록이 우세하다. 그러나 게일선교사가 한글을 체계화하고 신구약 완역과 각종 서양기독서적을 한글 번역했으며 우리의 민족소설 구운몽 춘향전 등 고전을 영역해서 서양에 전한 업적은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 특별한 일은 영어의 The God을 ‘하나님’으로 한글 표기한 분이 게일 선교사이다.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한글의 대부 최현배 선생은 게일 선교사야말로 가히 우리 한글을 대중화하고 세계화한 일등공신이라고 평가했다. 우리의 한글은 지금도 세계 속으로 흘러가면서 빛을 내고 있다. 인도네시아 찌아찌아 소수민족이 한글을 수입해 쓰고 있다. 우리나라 기자들과 인터뷰하면서 한글을 평가했다. 자기민족의 언어를 가장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세계 각국의 문자 중 한글이 최고였다고 했다. 또 다른 소수민족이 한글을 수입해 쓰려고 하고 있다. 한글은 세계 속의 글자다. 1997년 유네스코에 등재된 국보 70호인 한글은 지구촌 2900여 종 언어 중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다. 지금 뜨거운 세계 속 한류의 으뜸 되는 문화가 예사로 됐을까. 하나님이 예비하신 한민족의 위대한 한글이 땅 끝까지 복음전파의 수단과 큰 길이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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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한국인보다 한글을 더욱 사랑한 제임스 게일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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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11)
- 사랑이 제일이다. 성경은 ‘사랑이 제일이다. 지혜가 제일이다.’ 라고 가르쳐 줍니다. 제일이다는 의미는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삶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과 지혜입니다. 사랑하며 사는 자는 지혜자이고 지혜자는 사랑하면서 사는 자입니다. 사랑이 지혜입니다. 사랑과 지혜는 인간관계의 열쇠, 성공의 열쇠입니다. 사랑이 있고 지혜가 있으면 어디에서나 사랑받고 인정받게 됩니다. 사랑의 계명에 순종해야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 사랑의 성경 말씀입니다. 율법을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웃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입니다. 사랑이 행복의 열쇠, 건강의 비결입니다. 사랑은 회복의 능력, 치유의 능력입니다. 사랑이 있을 때 기적과 부흥 역사가 일어납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자는 지혜자입니다. 사랑하면 이해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서 이해해줍니다. 모든 문제는 사랑 부족, 이해 부족으로 오는 오해에서 시작됩니다. 사랑하면 존중해 주고 귀히 여깁니다. 차별하지 않고 인격을 귀히 여겨 줍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으면 힘이 납니다. 누군가가 나를 사랑해서 기도해 주고 격려 칭찬해 줄 때 힘이 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격려해 줄 때 다른 사람이 힘을 얻게 됩니다. 사랑하면 알면서도 어떤 때는 모르는 척 합니다. 상대방의 실수 허물을 눈감아 주고 덮어줍니다. 사랑하면 때로는 해야 할 말을 용기 있게 말합니다.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을 보면 사랑의 마음으로 단 둘이 있을 때 가르치고 충고해 줍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가르치고 충고하면 깨닫고 고마워하게 됩니다. 인간은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는지 느끼고 알게 됩니다. 사랑으로 하지 않고 미움의 마음으로 행하면 문제가 일어나고 관계가 깨집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식사하실 때 비난했지만 예수님은 죄인들까지 사랑하시고 죄인들과 식사하면서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가득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사랑이 제일입니다. 사랑이 제일인 것을 알고 사랑을 실천하는 자가 지혜자입니다. 사랑으로 행할 때 열매 맺히고 결과가 아름답게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방언을 하고, 말을 잘하고, 예언을 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식이 있고, 인물이 좋고, 설교를 잘해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교회 오래 다니고, 믿음이 좋다고 말하고 다녀도 사랑이 없으면 헛된 것입니다. 사랑이 행복이요, 성공입니다. 사랑이 없는 것은 불행이요, 실패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감동을 주지 못하고, 열매가 없게 됩니다. 사랑이 있고, 말 잘하고, 가르치기를 잘해야 의미가 있고 효과가 나타납니다. 사람은 무엇을 잘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자를 좋아합니다. 사랑이 지혜이고, 리더십입니다. 사랑이 많은 자가 영향을 많이 끼치고 사랑이 없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가르치고 설교하면 감동을 주고 능력이 나타납니다. 사랑이 최고의 기술이고 예술입니다. 사람은 영적 존재이기에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는지 미워하는지 어느 정도 압니다. 사랑하면 사랑 받게 됩니다. 사랑의 씨를 심어야 합니다. 아가페의 사랑,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최고의 사랑입니다. 사랑의 대상을 넓혀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면 사랑의 폭, 관계의 폭이 작아집니다. 만나는 사람, 아는 사람은 누구든지 사랑하는 것이 사랑의 지혜입니다. 사랑으로 행하여 원수가 생기지 않아야 합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 참 사랑의 지혜입니다. 인생의 삶에 원수가 없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자녀들을 교육해야 하며, 가정에서도 사랑이 넘쳐야 천국 같은 가정이 됩니다. 사랑이 부족한 리더는 좋은 리더가 아닙니다. 사랑이 제일이고 최고로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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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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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주 너를 지키리
- 오늘날 현대인들은 수많은 걱정과 근심에 사로 잡혀 생활하고 있다. 과학과 기술문명이 최고도로 발달한 시대에 엄청난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실상은 온갖 종류의 고민과 번민, 염려,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면서부터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심지어는 잠자리에서도 수많은 걱정거리들을 안고 단잠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돈에 대한 걱정, 인간관계에 대한 걱정, 자신의 외모에 대한 고민과 근심, 건강에 대한 걱정,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에 대한 걱정, 자녀들에 대한 걱정, 부모에 대한 걱정, 논문 지도 교수에 대한 걱정 등 이루 열거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걱정과 염려에 사로잡혀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문자 그대로 죽을 정도로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걱정하다가 걱정 속에 죽는 인생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이러한 걱정과 근심, 염려는 우리의 정신적인 질병의 원인이 되며, 육체적인 질병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미국에는 이러한 현대인의 정신적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기 위한 방법들이 많이 발달되어 있다. 명상요법에서부터 상담, 심리치료, 음악치료 등 수 많은 방법들을 동원해서 현대인들이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한다. 미국의 명문 줄리아드 음대를 졸업한 맥 퍼린(Mcfurrin)이라는 한 흑인 가수가 노래를 취입했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출·퇴근 길에 이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들으면서 아주 행복하고 기쁘게 운전하며 출퇴근을 하는 모습들을 보았다. 이 노래의 제목은 “염려하지 말고 행복해라!”(Don't Worry, Be Happy)라는 것이다. 가사가 복잡하지도 않고 계속적으로 “Don't Worry, Be Happy"라는 말이 반복되는 노래다. 이 노래의 내용을 조금 더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의 모든 삶에는 걱정거리들이 조금은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 걱정하면 오히려 그 만큼 걱정거리를 만들어 내는 꼴이 된다. 집세가 밀려도, 현찰이 없어도, 스타일이 엉망이고 여자친구가 없어도 걱정하지 말아라. 걱정은 오히려 얼굴에 주름살이 지게 만들고 다른 사람의 기분마저 침울하게 만든다. 걱정하지 말고 행복해라!” 이런 내용들이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노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이 노래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수많은 걱정거리와 근심에서부터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었다. 우리 나라에도 이러한 노래들이 많이 불리던 때가 있었다. “걱정을 모두 벗어 버리고서 스마일, 스마일 스마일...” 같은 노래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걱정과 근심, 불안과 염려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러한 염려와 걱정에 대해서 배워야 할 많은 내용들이 있다. 첫째는, 우리 인간의 통제 능력과 통제 범위를 넘어서는 어떤 일들에 대한 우리의 염려다. 사실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하는 일들 중에는 우리의 통제 능력과 범위를 넘어서는 일들이 많이 있다. 이런 일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염려하고 노력을 한다고 해도 아무런 효과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종류의 염려에 대한 해결책은 우리 스스로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단순히 수용할 줄 아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사에 있어서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빨리 단념하고 포기할 줄 아는 지혜와 기술을 배워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에서 자족하고,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아는 방법과 지혜를 배워야 한다. 둘째는, 실제로는 문제가 되지 않는 일들에 대한 우리의 염려다.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하는 일들 중에는 따지고 보면 실제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일들이 많이 있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얽혀있는 것이 아닌 데도 혼자서 온갖 걱정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우리가 염려하고 걱정하는 많은 일들 중에는 실제로는 의식주의 문제와 같이 그렇게 염려하고 걱정할 만한 가치가 없는 일들도 많이 있다. 이러한 종류의 염려거리들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먹고 입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더하여 주신다. 셋째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에 대한 우리의 염려다.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하는 일들 중에는 따지고 보면 실제로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공연스레 앞질러서 염려하고 걱정하는 일들이 많이 있다. “만약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하느냐?”하고 가정해서 하는 염려와 걱정이다. 이러한 염려와 공포에 대해서 해결책은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하루하루의 삶을 충실하고 성실하게 살아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결코 내일 일에 대해서 “될 대로 되어라”는 식의 삶을 살라는 말씀이 아니라, 오늘 하루의 삶을 신중하고 성실하게 살고 내일 일은 하나님께 의지하고 맡겨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당한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일들에 대해서 염려해야 한다. 우리의 삶에는 우리가 실제로 걱정하고 염려하는 일들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의, 식, 주와 같이 물질적인 필요와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러한 일들 마저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들은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히 돌보시고 공급해 주시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진정으로 먼저 추구하면 우리의 모든 필요들을 충족시켜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것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정신적인 것이 아니다. 단순히 머리로 생각만 하는 일도 아니고 가슴으로 느끼는 일만도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방식을 의미한다. 산상수훈에서 가르치는 삶,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는 삶, 형제를 사랑하고 화목하는 삶, 음욕을 품지 않는 삶, 헛된 맹세를 하지 않는 삶, 이웃을 사랑하는 삶, 외식하지 않는 진실된 삶, 구제하는 삶, 은밀한 중에 기도하는 삶,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는 삶, 형제를 비판하지 않는 삶, 한 마디로 말로 요약해서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의 삶을 현재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한다. 이러한 삶이 바로 우리의 인생 집을 모래위에 짓지 아니하고 반석위에 짓는 삶이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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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주 너를 지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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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삶 속에 나타나는 프레임의 법칙( The law of frame)
- 프레임의 법칙(The law of frame)이란 무슨 의미인가? 프레임의 문자적인 뜻은 액자 틀, 올가미를 뜻한다. 이것을 의미적 해석으로 인간의 사상 생각을 말한다. ‘프레임의 법칙’이란 같은 상황이라도 어떠한 사고(思考)의 틀을 가지고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사람의 행동이 달라진다는 법칙이다. 젊은 아내가 아이를 낳다가 출혈이 심해 세상을 떠났다. 다행히 아이는 목숨을 건졌고 홀로 남은 남자는 아이를 애지중지 키웠다. 남자는 아이를 돌봐 줄 유모를 구하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아서 유모 대신 훈련이 잘 된 듬직한 개에게 아이를 돌보게 했는데 개는 생각보다 똑똑했으며 남자는 안심하고 아이를 둔 채로 외출도 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남자는 여느 때처럼 개에게 아이를 맡기고 잠시 집을 비웠다가 사정이 생겨 집으로 돌아왔다. 남자는 집으로 들어서며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주인의 목소리를 들은 개가 꼬리를 흔들며 밖으로 뛰어나왔는데 개의 몸이 피범벅이었다. 불길한 생각이 들어 남자는 재빨리 방문을 열어보았다. 아이는 보이지 않았고 방바닥과 벽이 온통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순간 남자는 극도로 흥분했다. “내가 없는 사이에 개가 아들을 물어 죽였구나” 이렇게 생각한 남자는 즉시 총을 꺼내 개를 쏴 죽였는데 바로 그 순간, 방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남자가 방으로 들어가 보니 침대 구석에 쪼그려 앉은 아이가 울먹이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당황한 남자는 밖으로 뛰쳐나와 죽은 개를 살펴보니 다리에 맹수에게 물린 이빨 자국이 선명했다. 곧이어 남자는 뒤뜰에서 개한테 물려 죽은 늑대의 시체를 발견했다. “오, 맙소사!” 남자는 자신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늑대와 혈투를 벌인, 충직한 개를 자기 손으로 쏴 죽이고 만 것이다. 잘못된 프레임의 결과 때문이다. 여대생이 밤에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면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술집에서 일하는 아가씨가 낮에 학교 다니면서 공부를 열심히 한다면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 같은 상황이지만 그 사람이 가진 사고의 틀에 따라서 행동이 달라질 것이다. 선교 여행 도중에 선교를 포기하고 돌아온 마가에 대하여 바울이 생각하는 프레임과 바나바가 생각하는 프레임이 서로 달랐다. 바나바 입장은 “그래도 함께 선교 여행에 동참시키자”였고, 바울의 입장은 “절대 참여 불가”였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다음 선교 여행을 위해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다투게 되었다. 그냥 보통으로 다툰 것이 아니라 성경은 심히 다투었다고 기록한다. (행 15:39) “sharp disagreement” 날카로운 칼로 서로를 찌르듯 말로 서로를 찌르며 다툰 것이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내 독선적인 사고 때문에 여러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때가 있다. 그래도 나는 내 생각이 옳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일 수 있다. 바울은 나신의 삶을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내가 나를 판단하여 의로운 100점짜리 인생이라고 판단해도 주님의 판단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고백하기를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4) 이제부터 우리의 삶은 누구를 정죄하거나 근거 없는 프레임을 씌워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일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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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삶 속에 나타나는 프레임의 법칙( The law of fr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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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18: 한글날에 비하적인 용어들을 고찰해본다
- 기독교 용어 고찰 18: 한글날에 비하적인 용어들을 고찰해본다 I. 서언(序言) 세계에서 우리의 우수성은 자타가 모두 공인하는 바이다. 이중에서 우리의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세계 어떤 언어보다 탁월하기 때문에 한글날이 세계 국어의 날로 제정된 것은 정말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 많 큼 우리 언어는 세계 어디에서도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용어 중에는 외국인이 우리 민족을 비하하는 말들도 다수 있다. 이 사실을 모른 체 자주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오는 9일은 한글날이다. 이에 우리 스스로를 비하하는 용어들이 어떤 것이 있는지를 발췌하여 논하고자 한다. II. 비하 하는 용어들의 고찰 1. 중국인이 한국인을 비하하는 용어들 : 먼저 ‘한국인은...’으로 시작하는 말들이다. 예를 들면, ‘한국인은 셋만 모이면 배가 산으로 간다.’, ‘한국인은 공덕심(公德心)이 없다.’, ‘한국인은 단결심이 약하다.’는 등의 말은 모두 우리 한국인을 비하하는 말들이다. 물론 이런 말이 있을 정도로 우리민족에게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나라와 비교해 볼 때 그 정도의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비하적 말들은 그동안 우리나라를 지배해 왔든 중국이나 일본 등이 우리 민족이 열등하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유포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잘못된 그들의 문화 정책에서 유래된 말들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논한다면, 먼저 중국인들이 우리나라를 비하해서 한 말들 중에 ‘고린내’란 말이 있다. 뜻은 ‘발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를 말하는 것으로서 원래는 고려취(高麗臭)라고 했다. 그 유래를 보면, 과거 중국과 몽고가 우리나라를 지배하거나 국교를 맺고 있을 때, 사신들과 일행들이 중국에 도착하면, 자연히 발에는 많은 냄새가 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중국인들이 사신들의 발 냄새를 ‘고려인들의 냄새’라는 뜻의 고려취라고 했다. 문제는 이 말이 비하의 말인 줄도 모르고 ‘고린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뚱이’라는 말도 그러하다. 이 말은 옛날 중국에서 자신들의 나라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의미에서 중국, 중원, 중화라고 했고, 우리나라 같은 주변국은 이족(異族)이라 하여 무시하는 경향이 많았다. 이에 저들은 우리 민족을 동쪽에 있는 천한 이방인인 오랑케라는 의미에서 동이(東夷)라고 불렀다. 이 말이 곧 중국말로는 ‘뚱이’이다. 여기에서 파생된 말 중에 ‘뚱 친다’는 말이 있다. 이는 좀도둑이라는 말로서 사신들의 종이나 수행인으로 따라간 자들이 작은 물건들을 훔친다고 해서 비하하면서 붙인 용어이다. 반면, 우리가 중국인들을 가리켜 ‘떼 놈’이라고 할 때가 있다. 이는 우리가 중국인을 비하해서 말 할 때 하는 말이다. 하지만, 비하 같이 보이지만 오히려 높이는 말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이 비속어의 어원은 여러 가지가 있다. 두만강 북쪽의 만주족을 일컫는 말이라고도 하고, 중국인들은 떼를 지어 다니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란 견해도 있다. 또 몸을 잘 씻지 않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가장 근거 있는 유래는 우리 민족은 고대로부터 중국을 대국(大國)으로 여겼고, 또 작은 나라로서 피해도 많이 입었기 때문에 중국에 욕을 하면서도 대국의 의미를 담은 ‘대국놈’, ‘뗏놈’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2. 일본인이 한국인을 비하하는 용어들 : 대표적인 말은 먼저 ‘조센진(朝鮮人)’이라는 말이다. 한자의 뜻 그대로 본다면 ‘조선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는 일본인들이 한국인을 비하할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엽전’이란 말도 그런 말 중 하나다. 일본인들은 우리 한국인을 엽전이라고 했다. 이는 금전이니 은전 같은 가치 있는 돈이 아닌 값싸고 열등한 엽전 같은 존재가 한국인이라는 점에서 비하해서 한 말이다. 이런 이유들로 볼 때 이런 용어들은 사용해서는 안 될 말들이다. 외국인들이 우리 민족 자체를 비하해서 사용한 말들을 우리 스스로 사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3. 한국인이 외국인을 비하하는 용어들 : 대표적인 경우는 먼저 중국과 중국인을 비하하는 말들이다. 여기에는 China를 음역한 ‘지나(支那)’라고 부르는 것이나(참고: 동지나 해), 중국인들을 일컬어 화상(華商-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버는 나쁜 상인), 짱꼴라(일본에게 지배당한 청나라를 비하하는 말), 짱깨(돈의 금고만 아는 사람들이라는 의미) 등의 여러 말들이 있다. 일본인들을 비하하는 말들로는 왜놈(倭-키가 작고 못생기고 왜소하다는 뜻)이나 쪽발이(게다란 신발을 신는 일본인) 등의 용어들이 있다. III . 결 어(結語) 이상의 비하하는 용어들은 아무리 남아 있는 국민감정이 남아 있다 할지라도 삼가야 한다. 또한 그들이 우리를 비하하는 말들도 절대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특히 우리 기독교인들은 언제나 경우에 합당하고 올바른 말들을 함으로서 밝고 아름다운 언어문화를 유지 계승해 가야 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비하적인 용어나 비속어 등은 절대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10월 9일 한글날을 맞하여 다시 한 번 우리말의 소중성을 알고 계승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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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18: 한글날에 비하적인 용어들을 고찰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