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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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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 오피니언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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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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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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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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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조희완 목사] 방황의 고통 (시107:1-9)
    미국에 있을 때 어느 날 아침에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는 길에 학교부근 도로를 지나가는데 어미오리 한 마리가 새끼 열 마리를 데리고 중앙 분리대를 따라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자동차들이 쉴 세 없이 달리는 차도에 그 오리 떼가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어미 오리는 계속해서 달려오는 자동차들 때문에 도로를 건너가지 못하고 계속 중앙 분리대를 따라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어미 오리는 잔뜩 겁에 질린 모습이었고, 영문도 모르는 새끼 오리들은 어미 오리의 뒤를 좇아서 이리저리 방황하는 모습이 나무나 안타까웠습니다. 길거리에서 달리는 자동차에 치어 죽은 짐승들 흔히 볼 수가 있는지라 그 오리 떼가 그런 변을 당하면 어떻게 하나 하고 몹시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차를 세우고 뒤에 따라오던 차가 정차를 해서 오리 떼를 안전하게 건너갈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날 아침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 오리들이 어미 오리의 판단 착오와 실수로 인하여 그 위험한 길거리를 방황하듯이, 우리가 리더를 잘 못 만나면 방황을 하게 되고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국민이 대통령을 잘 못 만나면 방황을 하고 고통을 당하게 되고, 교인이 목사를 잘 못 만나면 방황을 하고 영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 주변에 의외로 방황하는 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나안 교인’(안 나가 교인)이 약 2백만 명에 달한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옵니다. 방황하는 삶은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방황하는 모습이 없어야 합니다. 혹시 방황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이제 그 방황을 끝내셔야 합니다. 첫째는, 관계의 갈등은 방황을 초래합니다.(2,3) 둘째는, 방황하면 목이 마르고 피곤합니다.(4,5) 셋째는, 부르짖으면 방황이 끝나게 됩니다.(6,7) 이제 방황의 마침표를 찍고 안정된 신앙생활과 안정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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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07
  • [신재철 목사] 잔돈 주세요
    "잔돈 주세요" 복학했지만 형편이 나아진 것은 아니다. 생활비는 물론이고 학업에 필요한 책값을 만들기도 쉽지가 않다. 봄인데 나는 벌써 가을을 염려하고 있다. 다음 학기 등록이 늘 힘겨운 숙제다. 친구들은 방학이면 캠프 준비, 성경학교 준비, 휴가를 계획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학교 등록이 코 앞이기에 뭐든 해야만 했다. 그래서 매일 일터 정보지 ‘교차로’를 묵상한다. 어떤 분야는 미련 없이 페이지를 넘기고, 어떤 분야는 깊게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학교 다니며, 교회 사역을 섬기며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음을 확인하고는 어제처럼 오늘도 그냥 덮는다. “대리운전 해볼래?”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대리운전 아르바이트를 소개하는데 솔깃하다. 운전을 좋아하기도 하고, 사람 대하는 것에 거부감이 없으니 나쁘지 않다. 급여도 일하는 만큼이고 시간도 비교적 자유롭다. “그래, 한번 해보자!” 그렇게 대리운전 회사에 취업을 했다.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잠시 잠을 청한다. 7시가 되면 사무실에 출근해서 첫 번째 콜을 기다리며 아저씨들과 소소한 대화를 한다. 사무실 분위기도 좋고, 아저씨들도 좋다. 대부분 낮에 다른 일을 하는 분들이다. 직장생활하며 야간에 대리운전하는 것이 많이 고단하실텐데 믹스커피 한잔에 웃으며 콜을 기다리는 아저씨들을 보니 가슴 짠함이 밀려온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를 그렇게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안녕하세요. 대리 부르셨죠? 안전히 모시겠습니다.” 이제 제법 인사도, 업무도 익숙해졌다. 대전의 유명한 사거리와 아파트 이름도 외워진다. 모르는 곳은 익숙한 포인트까지만 운전하면 손님들이 친절하게 알려준다. 가끔은 대리기사가 그것도 모르냐며 핀잔을 주는 손님도 있지만, 문제없다. 재미있다. 겨울에는 길에서 대기하는 시간이 너무 춥고 힘들지만 길다방 믹스커피는 충분한 위로가 되었다. 가끔 여유 있을 때 찾는 김밥집은 천국이다. 손님이 많이 피곤해 보이고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다. 모시는 동안 말씀도 별로 없으시고 창밖 먼 곳만 본다. 조용한 음악을 들으며 도착한 곳은 허름한 빌라. 기본요금이 적용되는 거리, 1만 2천 원. 손님은 내게 만오천 원을 주며 “잔돈은 기사님 라면 한 그릇 하세요. 고생하셨어요.” 차 안에서 본 어두운 표정과 달리 밝게 인사를 건네며 엑센트 차주 손님은 낡은 빌라로 들어갔다. 조금 비틀거리는 걸음이 불안해 보여 잠시 서서 바라본다. 저분은 좋은 손님이다. 친절한 매너? 맞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거스름돈. 기본 대리비는 1만 2천 원. 대부분 손님은 1만 5천 원을 기사에게 건넨다. 그리고 짧은 정적이 흐른다. 잔돈을 받는 손님이 될지, 팁으로 주는 손님이 될지가 이 순간 결정이 된다. 물론 기사는 이때 망설이지 않고 얼른 손님에게 잔돈을 내어 드리는 것이 맞다. 하지만 나 역시 순간 멈춘다. 기대하는 것이다. 이렇게 획득한 팁은 대리기사에게 큰 힘이 된다. 김밥집에 잠시 앉아 쉬어가며 배를 채우기도 하고 자판기 커피 한잔을 동료 기사에게 대접할 여유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엑센트 아저씨는 내게 좋은 손님이다. 다음 콜. 외제차, 벤츠다! 손님은 얼굴이 밝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보니 사업도 잘되는 것 같고 삶에 여유도 있는 듯하다. 도착한 곳은 둔산동의 좋은 아파트. 몸이 힘들다며 골프가방을 좀 올려달라는 요청을 한다. 대리기사에게 그럴 의무는 없다. 주차까지만 해드리면 된다. 하지만 나는 어떤 기대로 들떠 이미 골프가방을 들고 있었다. ‘100%’ 팁이 나온다는 확신이 들었다. 잔돈 그 이상의 팁을 기대했지만 아, 만 원짜리 한장과 5천 원짜리 한 장을 주시는 손님. 2%의 아쉬움이 남지만, 내게는 아직도 3천 원의 은혜가 있다. 3천 원도 괜찮지 않은가! 그런데 손님이 돈을 주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싸늘하다’ “잔돈 주세요.” 그렇게 3천 원을 받아간 벤츠 아저씨. 외제차에 골프가방 이동 서비스. 기대한 내가 잘못일까? ‘그래, 잔돈 받아간 아저씨 잘못은 아니지.’ 혼자 그렇게 충격을 삭혀보지만 뭔가 당한 느낌이다. 오늘 만난 벤츠와 엑센트는 내게 소중한 교훈을 준다.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말자. 사람을 기대하며 기대지 말자.」 아마 오늘의 일은 목회할 때도 큰 교훈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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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07
  • [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9)
    사랑은 갈등해결의 지혜 인생의 삶은 갈등의 연속입니다. 갈등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사소한 것이 원인이 되어 갈등이 일어납니다. 갈등이 있다는 것은 고통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갈등이 해결됩니다. 사랑은 갈등해결의 지혜요 열쇠입니다. 사랑이 부족하고 미움이 있을 때 갈등이 시작되고 갈등이 커지게 됩니다. 갈등이 해결되지 않으면 관계가 깨지고 관계가 깨지면 불행해집니다. 사랑은 갈등을 치유하는 능력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갈등의 이유를 덮어버리게 됩니다. 사랑이 식어지면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것이 문제가 되어 갈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사랑은 지혜요, 능력입니다. 사랑의 능력으로 갈등이 해결됩니다. 갈등이 해결되면 화목하게 되고 좋은 관계가 유지됩니다. 삶의 기쁨과 평안은 좋은 관계에 있습니다. 사랑으로 갈등을 치유하고, 갈등을 예방하고, 갈등을 해결하는 자가 사랑의 리더입니다. 좋은 리더의 기준은 사랑의 마음으로 갈등을 해결하고 화목을 만드는 자입니다. 사랑의 마음, 사랑의 동기로 행하는 리더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의 지혜로 갈등을 해결하는 자가 행복한 리더입니다. 리더가 행복하면 리더를 따르는 자들이 행복하고 공동체가 행복해집니다. 리더는 갈등을 만들기도 하고 해결하기도 합니다. 사랑으로 갈등을 해결하는 리더가 좋은 리더입니다.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덕을 세워야 갈등이 줄어들고 해결됩니다. 믿음에 덕을 세워야 합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자는 어디에서나 덕을 세웁니다. 덕을 세우지 않는 사랑은 참사랑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사랑은 죄를 덮는다 죄, 허물이 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사랑하면 허다한 허물을 덮어 버립니다. 남의 허물, 죄를 들추어내서 문제를 만드는 자는 사랑이 없는 자입니다. 사랑은 소경이 되게 합니다. Love is Blind 인간관계에서 사랑이 있으면 사람의 단점을 안보고 장점을 보게 됩니다. 누구나 단점이 있고 장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허물과 죄를 덮어 주고, 죄를 회개하면 용서해 주시고, 기억도 안하시는 사랑의 예수님이십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선한 마음 가진 자이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사랑의 마음은 복 받을 마음입니다. 노아의 아들 가운데 셈과 야벳은 아버지 노아의 실수 허물을 보고 덮어 주었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진 좋은 자세입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죄와 허물을 덮어 준 셈과 야벳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노아의 허물과 죄를 들추어내고 폭로했던 함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리더는 남의 죄와 허물을 들추어 내지 않고 덮어 주는 사랑의 마음을 가진 자입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과 죄를 덮어 주는 자가 많지 않습니다. 미움의 마음으로 사람들의 죄, 허물을 확대하고 폭로하여 부끄럼을 당하게 하고 큰 상처를 주는 자가 있습니다. 나 자신도 죄와 허물이 많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남의 허물을 덮어 주는 포용력과 사랑의 마음을 가져 야 합니다. 말세 시대는 사랑이 식어지 시대이기에 종말의식을 가지고 뜨겁게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데 미지근하지 말고 열정, 열심, 적극적으로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사랑은 나 혼자만 사랑하는 짝사랑이 아니라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해야 관계가 좋아집니다.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삶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사랑으로 허물을 덮어 줄 때 가정과 공동체, 교회가 살아 움직이고 작은 천국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면 후회 하지 않게 됩니다. 미워하면 후회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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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07
  • [김성수 총장] 고난 앞에서 음미해 보는 하박국의 노래
    세계행복 지수 순위를 보면 미국, 영국, 독일, 스위스와 같은 소위 선진국들 보다도 방글라데시, 피지, 바누아투, 콜롬비아, 코스타리카와 같은 나라들이 너 높게 나오고 있다. 이것은 행복이라는 것이 반드시 재산과 지식을 많이 소유하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재산과 지식이 많으면 오히려 스트레스와 근심을 더해 주기도 한다. 복지시설에 있는 지적장애인들이 오히려 걱정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이들이 건강한 머리결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가진 것이 많다고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박국의 노래는 바로 이런 문제에 대해서 명쾌한 설명을 해 주고 있다. 하박국 선지자가 기원전 7세기경에 하박국서를 기록했을 당시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제 상태가 좋지 못했다.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와 감람나무에 수확이 없고, 곡식의 수확도 없었다. 양과 소도 없었다. 이런 불행의 이유는 아마도 갈대아인들의 침공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의 침공으로 모든 것을 약탈당했고, 설상가상으로 기근까지 들었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을 참기는 좀 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잘 살던 사람들이 실패해서 겪게 되는 가난은 어떤 면에서 견디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스라엘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이때 하박국은 예기치 않은 반응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하박국의 노래다. 하박국이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라고 했다. 하박국 선지자에게는 모든 것이 없어졌을지라도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기뻐했다. 원수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었지만 하나님을 빼앗아갈 수는 없었다. 하박국의 노래가 위대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의 원천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진리를 가르쳐주고 있다. 경제적으로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는 기뻐할 수 있는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없어져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이다. 하박국이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으로 바로 알았기 때문이다. 하박국은 구약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심을 알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하나님은 광야생활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환난가운데서 인도하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다. 이방민족들의 침략을 당할 때 마다 하나님은 기적적인 도움의 손길로 이들을 구원해 주셨다. 하박국 선지자가 이 노래를 지었을 때도 갈대아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몹시도 괴롭혔다. 그래도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해 주실 것을 알았다. 이와 같은 확신 때문에 하박국은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라고 노래하고 있다. 사슴은 위험한 곳에서도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동물이다. 하박국은 지금은 비록 가난해도 구원의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시면 나를 사슴과 같이 가난과 고통과 온갖 위험 속에서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실 것을 믿었다. 하나님을 구원의 여호와로 알았기 때문에 모든 재산을 다 빼앗기고 빈 털털이가 되어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찬양할 수 있었다. 오늘 우리는 하박국 선지자보다도 구원의 하나님을 더 잘 알 수 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재신 하나님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흘려 기도하시고 갈보리 산 위에서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이룩하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도 알고 있다. 하박국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울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았지만 오늘 우리는 기록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의 하나님을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구약시대의 하박국 선지자보다도 구원의 하나님을 더 찬양할 수 있어야 한다. 하박국의 노래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진정한 소망과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라는 진리다. 곡식과 가축과 재물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는 것이 성도의 참된 기쁨이라는 사실이다. 신앙 생활을 한다고 어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성도들의 생활에도 어려움이 있다. 하박국 선지자에게는 극심한 가난의 어려움이 있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남에게 다 털어놓을 수도 없는 온갖 종류의 어려움들이 산적해 있다. 자식으로 인한 문제, 남편으로 인한 문제, 질병으로 인한 문제, 가난으로 인한 문제 등 앞이 캄캄할 정도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산적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구원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 그 분이 내 곁에 계시고, 내가 이 구원의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면 하박국 선지자가 노래한 그 하나님은 언젠가 나를 사슴과 같이 가볍게 높은 곳에 다닐 수 있게 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해야 한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구원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활을 지켜주실 것을 더 확신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셔서 더 큰 축복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비록 오늘 우리의 발걸음이 무거워도 내가 구원의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나의 발을 사슴의 발과 같이 가볍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현 Evangelia University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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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07
  • [황권철 목사] 빌립(Philip's Behind Stories)-전도의 사도
    빌립(Philip's Behind Stories)-전도의 사도 빌립(Philip) 사도는 베드로와 안드레와 같이 갈릴리 바다 서쪽 해안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어촌 마을인 벳새다(Bethsaida) 출신이다(요12:21). 초대교회는 복음전도자인 그를 빌립 집사와 구별하기 위해 사도란 명칭을 덧 붙였다(행6:5). 빌립이란 ‘말(馬)을 사랑하는 자’라 한 뜻이다. 구전에 의하면 빌립은 스불론 지파 출신이라고 하며 처음에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것 같다. 공관복음서에는 단순하게 언급하고 있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네 번째로 부르심을 받은 자로 나온다(요1:43). 그는 사도로서 부름 받은 후, 지극히 이성적이고 계산적이며 소심한 인격자로 비치기도 하나 이는 그의 확실한 믿음 위에 나온 철저한 책임의식 때문이다. 이제 주님의 사역 기간 동안 발생한 몇 가지 사건들을 통해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율법을 묵상한 빌립 그는 주님의 부름을 받는 순간 결단했다. AD 27년경 주님의 공생애 개시 얼마 후에 제자로 부름을 받아 AD 1세기까지 활동한 인물이다. 빌립은 베드로, 안드레, 나다나엘의 친구로서 “나를 따르라”(요1:43)는 주님의 단도직입적인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함으로 주님께 부름 받은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다. 복음서에는 주님의 간단한 부르심과 거기에 따른 신속한 응답이 매우 단순하게 묘사되어 있다. 주님의 매우 긴 요청과 더불어 대화를 통한 빌립의 결단의 내용을 복음서 기자들은 짧고 간결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같은 압축된 소명의 현장에서 우리는 주님의 거룩하고도 위엄 있는 태도와 단순하지만 능력 있는 부르심의 말씀을 통해 빌립은 충분히 그가 메시야이심을 확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말씀으로 친구를 주께로 인도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1:45). 이 말씀은 그가 주님을 만나고 즉시로 나다나엘에게 가서 복음을 전한 사건이다. 우리는 여기서 빌립의 이면 생활을 면밀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그가 주님을 만나는 순간 메시야이심을 알아 본 것은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경건한 자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주님의 부르심에 어떤 의문도 가지지 않고 따르기로 결단했다. 이를 볼때 그는 하나님이 준비한 작정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둘째, 나다나엘을 인도한 사건이다. 나다나엘을 인도하면서 그가 율법과 선지자들의 기록한 글을 전했다. 이는 그가 날마다 율법을 묵상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말씀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셋째,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는 사실이다. 요셉의 아들로 오실 나사렛 예수이심을 알았다.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했을 때 빌립은 이미 선지자들의 글을 통해서 예언된 사실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날마다 큐티 하면서 살았다. 시편 기자는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1:2).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다윗에게 하나님이 어디로 가든지 이기게 하셨다. 요한은 하나님의 구원계시를 마무리 하면서 이렇게 말씀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날마다 말씀을 읽고 함께 모여 예배함으로 듣고 받은 말씀을 삶의 현장에서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했다. 빌립은 날마다 말씀을 큐티하고 묵상하므로 메시야를 만나고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 복음 전도자 빌립 그는 부름 받은 즉시 친구를 주께로 인도했다. 사도 빌립(Philip the apostle)은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으로 복음서에서 그의 이름은 항상 다섯 번째로 등장한다(마10:3; 막3:18; 눅6:14). 그는 주님을 만난 즉시 친구 나다나엘에게 전도했다.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1:43-45). 빌립이 예수를 만난 것은 짧은 순간이다. 주님이 갈릴리로 나가려는 참에 빌립을 만났다. 빌립은 진리에 대한 확신과 깨달음이 왔을 때 즉시로 행동에 옮겼다. 복음전도의 지름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주님을 만난 즉시 마음의 불이 식어지기 전에 전해야 한다. 그의 전도방법 역시 단순했다. 그가 친구 나다나엘에게 가서 전했을 때, 나다나엘의 반응은 전혀 예외였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요1:46). 나다나엘 역시 날마다 율법을 묵상하는 경건한 자였다. 그런데 빌립에게 들은 말씀은 전혀 뜻밖이었다. 나사렛 예수가 메시야라고 했다. 당시 보편적인 사고로서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선지자가 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때 빌립이 한 말이 명언이다. “와서 보라”(Come and See) 딱 이 한 마디이다. 구원 전도는 이론과 공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믿음으로 하는 실천적 행함에서 이루어진다. 나다나엘은 온갖 이론과 공상의 세계를 접고 빌립의 이 한 마디에 와서 주님을 만나고 사도의 반열에 참여하게 되었다. “와서 보라”이것이 전도자가 가질 메시지이다. 우리는 빌립의 전도방법을 배워야 한다. 주님은 이 같은 빌립의 행위를 참으로 기뻐했다. 빌립의 이 같은 전도방법을 위해 주님이 이 땅에 오셨다. 주님은 친히 자신이 전도하러 오셨다고 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올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오늘도 우리 주변에 서성거리는 나다나엘을 주께로 인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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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07
  • [박동철 장로]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과 한민족의 복음화
    2022년 8월 한여름에 중국을 둘러싼 따끈따끈한 몇 가지 뉴스가 있었다. 미국의 하원의장 낸시 팰로시 여사가 8월 1일부터 5일간 대만 등 아시아 5개국을 순방하면서 큼직한 뉴스들이 터져 나왔다. 첫 순방국 대만을 방문하자 중국 본토 북경에서 난리가 났다. 평소 중국은 미국이 하나의 중국으로 여기는 대만에 관심 가지는데 민감하다. 팰로시 의장이 대만에 입국하자 중국 본토에서는 전투기를 영공에 띄우고 미국 해군은 주변에 함정을 배치하기도 했다. 군사긴장 모드까지 갈 정도의 팰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이었다. 1940년생 팰로시 의장의 강단 있는 워딩(wording)이 흥미를 끌었다. 대만 방문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시진핑을 향해 ‘겁에 질린 불량배’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팰로시는 세계에 뉴스의 주인공이 되어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한국, 일본을 차례로 방문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팰로시 의장이 80세 고령의 할머니임에도 불구 다양한 정치적 캐릭터를 만들어내는데 핫한 뉴스가 됐지만 왜 중국이 대만에 대한 미국의 접근에 민감한가에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그것은 반도체 강국 대만을 두고 경제 주도권 경쟁도 있지만 중국 본연의 중화민족주의에 따른 하나의 중국론과 소수민족의 중국화, 그리고 주변국에 대한 음흉한 중화화(中華化)를 위한 계략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한반도에서 경계해야 할 정책은 이미 선포한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이다. 중국의 동북 3성 조선족 2백만이 거주하는 우리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그곳의 역사를 중국 본토의 역사에 포함하려는 흉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동안 많은 동북공정 정책이 나오고 있다. 며칠 전 유일한 조선족자치주 연변에 대해 허락된 한국어 표기를 중국어로 할 것을 규정하는 시행령을 내렸다는 뉴스가 집중 보도됐다. 중국은 그동안 신장 위구르 티베트 등 자치주에 자주 문화를 폭넓게 허용하였으나 2017년 시진핑 집권 2기부터 중화화를 시작, 2020년에 중화민족교육정책에 집중 사상의 만리장성을 쌓고 있다. 여기에 중대한 문제가 따르고 있는 것은 우리의 사명 복음전하는 길이 점차 막히고 있다는 점이다. 시진핑은 장기집권 독재의 꿈을 꾸면서 1억이 넘는 본토 기독교인을 품고 있는 교회 예배를 통제하고 있다. 정부 허락받지 않은 교회는 거센 탄압을 받고 있다고 한다. 현지 선교사들의 예배가 통제받고 선교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없는 현장으로 변해버렸다는 안타까운 소식이다. 다시 흥미로운 것은 중국의 이러한 민족 중심의 정책에 반기를 들고 있는 소수 민족 운동이 새롭게 들리고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른바 동이족(東夷族)연합체 담론이다. 일부 사가(史家)들이 알타이 족으로 보는 언어태생의 공동체 연합체를 부르짖고 있다는 소식이 한편 반갑게 들리고 있다. 한국어 일본어 몽골어 투르크어 등을 알타이어 동일성을 찾아 연합체 운동이 필요하다는 근거의 움직임이다. 이 운동이 얼마나 합일과 확장성이 있을지는 모르나 우리는 복음의 확장을 위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때 기대와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중국 15억 인구의 대국이 전체국가화 하고 있는 대서 우리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유대인이나 헬라인게나 복음은 국경이 없다. 우리에게 가깝고도 먼 역사 속 애증(愛憎)의 이웃 공산사회주의 중국을 향한 시선은 오직 복음화 전략뿐이다. 이즈음에 팰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쑤셔놓은 8월의 중국 뉴스를 계기로 한민족 복음화에 새롭게 도전하는 선교전략이 필요한 때임을 생각하게 한다. 중국 주변 한민족 복음화는 한인 디아스포라 즉, 중앙아시아 한 서린 고려인들에 복음화로 이어질 것이다. 이러한 길이 바로 북한 땅에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피어나는 예수 한국 복음통일이 이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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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01
  • [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8)
    사랑의 지혜 사랑하는 것도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인간관계가 깨집니다. 지나친 사랑은 관계를 깨뜨립니다. 관심을 주는 것은 좋은데 지나친 관심은 관계를 깨뜨립니다. 사랑하는 데도 균형이 있어야 합니다. 밀고 당기는 지혜입니다. 이중성품, 거짓 된 자, 성품이 까다로운 자를 사랑해야 하는데 힘듭니다. 거짓되고 성품이 까다로운 자를 사랑하고 미워하지 않아야 하나 너무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사랑의 지혜입니다. 너무 소외시키지는 않아야 하나 사랑의 마음으로 지혜 있게 대처해야 합니다. 진실 되고 성품 좋은 자는 조금만 사랑을 주어도 고마워하고 관계가 좋아집니다. 나쁜 사람은 문제를 만들고 좋은 사람은 문제를 덮어버리고 해결하는 자입니다. 사랑이 없고 상처 많은 자를 사랑해야 하나 지혜롭게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받지 못하고 성장한 자들, 상처 받은 자들이 피해 의식을 가지고 사랑할 줄 모르며 사랑을 주는 자들에 대해서도 오해하게 됩니다. 문제 요소가 많은 트러블 메이커(trouble maker)를 대할 때 사랑의 지혜로 대해 주어야 상처를 덜 받게 됩니다. 사랑은 상처를 회복시키는 능력입니다. 사랑하는데도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사랑을 주면 상대방도 내게 사랑을 주겠지 하는 기대감을 버리는 것이 사랑의 지혜입니다. 기대하지 않고, 사랑하고, 베풀고, 섬기는 것이 사랑의 지혜입니다. 어디에서나 나를 좋아하는 자가 있고 싫어하는 자가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고 좋아하는 자를 생각하며 스트레스 받지 않고 사랑하며 사는 삶이 사랑의 지혜입니다. 좋은 사람은 언제나 좋게 해석하고 인격, 성품을 가진 자입니다. 좋은 사람을 사랑하여 관계가 더 두텁게 하는 것이 사랑의 지혜입니다. 사랑은 지혜이고 예술입니다. 사랑하는데도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데 지나친 무관심은 버리고 지나친 사랑은 사랑받는 자가 사랑의 소중함을 잊을 수 있기에 사랑의 균형을 맞추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전화 잘 안하다가 가끔 전화하면 고마워하는데 너무 자주 전화하면 가볍게 여기고 고마움을 모르는 것이 인간입니다. 사랑은 인간을 대하는 관계인데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의 복음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사랑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신 사랑의 하나님, 사랑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해서 의롭다 하시기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전능하시다는 것을 부활하심으로서 우리에게 확신을 주시고, 내가 너를 사랑해서 부활했다고 증거를 나타내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이 되어 우리를 실망시키게 됩니다. 그러나 약속대로 부활하셔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사랑의 복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복음을 전하는 사랑의 대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사랑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을 생각할 때,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사랑의 복음, 살리는 복음입니다. 사랑은 살리고 세우는 지혜요, 능력입니다. 누가 능력 있는 자입니까? 사랑하면서 사는 자, 사랑의 복음을 전하면서 사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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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23
  • [황권철 목사] 요한(John's Behind Stories)-사랑의 사도(2)
    사랑 받은 제자 요한    그는 주님에게 최고의 사랑을 받은 자이다. 열두 제자로 부름 받은 것도 은혜인데 언제나 예수님을 그림자처럼 수행한 핵심그룹이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항상 주님과 함께 했다. 변화산상에도 같이 갔고 겟세마네 동산에도 같이 갔다. 아마 주님에게 이 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을 택하라고 하면 요한을 택했을 것이다. 주님이 십자가 지실 때 다 주를 버리고 도망갔지만 그래도 골고다 현장까지 따라 간 유일한 제자가 바로 요한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부탁하셨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 19:26-27). 주님은 구약의 모든 율법을 사랑의 계명 하나로 요약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 가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그는 사도들 중에 가장 많은 계시를 기록했다. 요한복음과 요한 일, 이, 삼서와 요한계시록 다섯 권 중에서 요한계시록에서 만 본문 가운데서 저자가 저자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외 요한복음이나 서신서들의 저자가 요한임을 의심할 여지는 없다. 요한 계시록에서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부르고 있다(계 1:1). 요한 이서와 삼서의 서두에서 기자는 자신을 장로(the elder)라고 부른다. 그는 자신을 사도라고 부르는 대신에 장로라는 권위로 기술하고 있다. 요한 일서에는 예수의 지상 사역 기간 중 자신이 개인적으로 사랑받는 동료였음을 시사하고 있다(요일 1:1-4).  그는 공동체를 더 소중히 여겼다. 여기서 언급된 우리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으나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논설자로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을 뿐이다. 요한복음에서도 기자는 자기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것을 억제했다. 마지막 21장에 가서도 세배대의 아들들이라고 했고, 디베랴 바다에 일곱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도 특별히 언급을 피했다(요 21:2). 요한복음은 아람어적 배경을 갖고 있는 헬라어를 사용한 팔레스타인의 한 유대인의 증거에 기초를 두고 있다. 기자는 요한이 주님의 목격자인 것을(요 1:14, 19:35) 적극 뒷받침해 주고 있다(요 21:24). 열두 사도 중에 형제가 부름을 받은 것은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 자신뿐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두 사람 중 이름을 밝히지 않은 사람이 요한임을 증명하는 것이다(요 1:41). 주님의 특별한 사랑받는 제자로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음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십자가 상에서(요 19:26)와 부활의 현장에서(요 20:2-10), 디베랴 바닷가와(요 21:7), 베드로에 관한 사건을 통해(요 21:20-23) 주님의 사랑받는 장본인임을 말하고 있다(요 21:24). 언약사상을 마감한 요한    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 1, 2, 3서를 기록하고 마지막으로 계시록을 기록했다. 그가 쓴 복음서는 공관복음과 전혀 다른 각도에서 기록했다. 마태와 마가와 누가는 당시 유대와 로마와 헬라라는 시대적인 정황에서 복음서를 기록했지만 요한은 전혀 다른 각도에서 기록했다. 그는 태초에서부터 언급하여 당시 유대와 지배국가 로마와 헬라 문화를 초월하여 우주적인 초자연적 복음으로 기록했다. 그러면서도 흩어진 유대의 디아스포라들에게 당시 이단자들인 영지주의 유혹에 미혹 받지 않도록 특별한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말세에 일어날 교회의 모든 환란을 이기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나아갈 천국을 소개하므로 구원역사의 언약사상을 마감한 최후의 사도였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 사상에 변함이 없었다.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으므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계 1:8-9). 그는 순교는 하지 않았으나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 순교자였다.  또한 그는 신약의 묵시록을 기록한 자이다. 신약 성경의 제일 마지막 책으로써 문학적 유형으로 보면 구약의 에스겔서, 다니엘서, 스가랴서와 대단히 흡사하다. 그 당시 기독교는 유대교와 결별한 때였고, 또 로마 제국에 의해서 독립된 운동으로 간주되었던 시기이다. 저자의 진술에 따르면 그의 이름이 요한이다.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노예)이다. 이 책의 환상들은 그리스도를 위한 신앙 때문에 유배지인 밧모섬에서 받은 것이다. 그는 아시아교회에 잘 알려진 인물이며 이미 예언자로 인정받았고(계 22:6, 9, 19), 전에도 계시적 성격을 띤 환상을 받아 왔던 사람이었다. 유스티누스(Justinus AD 150년경)는 계시록은 우리 중의 한 사람인 그리스도의 사도중 한 명인 요한에 의해 쓰여졌다고 했다. 그 외에도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AD 200년경), 오리게네스(Origenes AD 225년경) 등 2세기 중엽에서 3세기 중엽까지 요한의 저작설이 알렉산드리아를 포함한 서방교회들에 의해 대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삭줍기    유세비우스는 그가 에베소에 돌아와서 트라야누스(Trajanus)시대까지 살았다고 한다. 아폴로니우스(Apollonius)에 의하면 그는 에베소에서 어떤 죽은 사람을 살렸으며, 알렉산드리아의 클리멘스(Clemens of Alexandria)는 에베소 근교에서 한 강도를 갱생시켰다고 한다. 이레니우스(Irenaeus)에 의하면 이교도적 케린투스(Cerinthus)에게 항거했다고 한다. 제롬(Jerome)에 의하면 그가 만년에 기력이 없고 너무 쇠약하여 말하기조차 어려울 때 그는 사람들에게 받들려 기독교 집회에 매번 거듭해서 “어린 자녀들이여 서로 사랑하라”를 되풀이 했다고 한다. 요한이 에베소에 거주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결정적인 증인은 이레니우스이다. 이레니우스는 요한이 에베소 지역에서 살았으며 또 거기서 일했다는 사실을 폴리갑(Polycarp)과 파피아스(Papias)를 통해서 직접 받았다고 확실하게 주장하고 있다. 이레니우스는 그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이러한 것들을 폴리갑으로부터 전해 들었음을 상세하게 진술하고 있다. 이레니우스의 증언은 교회의 용인된 전승이 되었다. 그는 한 때 밧모섬에 유배 가서 그곳에서 본 것으로 요한계시록을 썼다. 밧모 섬은 요한이 환상을 보았던 장소이다. 그가 거기서 기록했거나 아니면 후에 에베소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다. 밧모섬은 에게 해에 있는 작은 돌섬으로 여기에는 유배지가 하나 있었다. 이곳으로 정치범을 유배시키기 위해 또는 광산에서 강제노동을 시키기 위해 보냈던 것이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다”(계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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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23
  • [박봉석 목사] 이판사판?
    현대인들은 하던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고 생각되었을 때에 ‘이판사판이다.’라는 말을 씁니다. 사실 이 말은 불교 용어로서 우리나라 조선 시대에 생성된 말이었습니다.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건국이념으로 숭유억불(崇儒抑佛)을 표방하였습니다. 고려시대에 폐단이 많았고 왕실의 타락을 조장했던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를 장려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불교는 하루아침에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그에 따라서 승려는 천민 계급으로 전락하였고 도성 출입도 금지되었습니다. 그런 위기 가운데서 승려들은 활로를 모색했는데, 그 하나는 불교의 사찰을 존속시키는 것이었고, 또 다른 다른 하나는 불법(佛法)의 맥을 잇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부 승려들은 여러 가지 잡일을 하면서 절의 운영이 유지되도록 하였는데 그런 승려들을 사판승(事判僧)이라고 불렀습니다. 반면에 또 다른 승려들은 불법(佛法)을 연구하고 전수하며 참선 등의 수행에 전념했는데 이런 승려들을 이판승(理判僧)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이판사판이라는 말은 숭유억불 정책 하에 천민으로 전락해 버린 승려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가장 최악의 상황에 이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끝장이라는 말인 것이지요. 사실 기독교가 로마 시대 때에 처음으로 전파될 때에 그리스도인들과 교회 또한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이판사판을 경험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유대인들에 의한 박해만이 아니라 다신교의 로마 사람들에 의해서도 많은 박해를 받았고, 그리고 로마의 네로 황제나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고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진짜 기독교의 이판사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점점 많아지고 교회도 점점 더 늘어났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판사판의 상황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극심한 타락한 시대를 사는 로마의 사람들이 다른 데서 경험하지 못하는 감화를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이 세상만이 아니라 기독교도 이판사판의 상황으로 몰리는 것 같지만 바로 이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은 더 뚜렷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런 시대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의연하게 주님을 닮은 거룩한 삶을 살아갈 때에 이 세상은 그런 그리스도인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주님께로 나아오는 역사가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미국의 정치가였던 벤자민 프랭클린은 자기가 살고 있는 필라델피아 시민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뭔가 선한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중에 한 가지 아이디어가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그는 자기 집 앞에 작은 선반 하나를 만들고는 거기에다가 예쁜 등을 하나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밤이 되면 그 등에 불을 켜놓았습니다. 그 모습을 본 동네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등불은 집 안에서 켜는 것인데 그렇게 집 밖에다 등불을 켜 놓는 것은 낭비라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뭔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집 밖에 등불을 켜두니 밤에 그 집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빛 가운데서 길을 잘 걸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좋게 생각한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씩 자기들도 집 밖에다 등불을 켜두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밤에도 그 지역의 길거리는 대낮처럼 환하였고 그래서 사람들은 허둥대지 않고 길을 걸을 수 있었고 범죄율도 현격하게 줄어들었습니다. 이것이 출발점이 되어서 가로등이라는 것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이 벤자민 프랭클린의 이야기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알게 해 줍니다. 죄로 인해서 점점 어두워져가는 이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주님 말씀 따라서 빛이 되어서 살아갈 때에 세상 사람들은 그 빛에 감화를 받고 빛의 근원이신 주님께로 나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더 어두워진 이판사판의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더욱더 주님을 닮아가는 거룩한 빛의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해 봅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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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23
  • [하수룡 장로] 욱 여 쌈
    '욱여쌈'이란 말은 바울이나 요셉에게 어울리는 말로 정말 헤어 나오기 어려운 상황을 맞이했을 때 사용하면 적격이다. 이 말은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는 말로 ‘안쪽으로 조금 우그러져 있다.’는 형용사‘욱다’와 ’싸다‘라는 동사와 어울려 만들어진 순수한 우리나라의 말로 물건을 안에 넣고 보이지 않게 씌어 가리거나 둘러 말다는 뜻이다. 물건이나 물체가 아닌 사람이 욱여쌈을 당한다면 포도즙을 짤 때 포도를 짓누르는 것과 같이 엄청난 고통을 당하여 사방이 캄캄하고 터질 것 같은 답답함으로 생을 포기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보통 욱여쌈을 당한 사람하면 조선시대 이 순신 장군을 떠올리게 된다. 조정은 조정대로 위태한 나라를 위해 적극 힘을 보태주지 못하여 방해꾼이 되었고 아군은 아군대로 지도자가 자기의 공을 드러내기 위해 싸움은 뒤로한 채 허위보고와 헐뜯는 일에 몰두하여 적군 아닌 적군이 되었다. 지원군인 명나라도 일본과의 약은 정치로 군대 해산과 적대 행위 종료와 귀향을 명령하여 돕는 아군이 아니라 방해하는 적군이 되어버린 것이다. 진짜 적군인 왜군은 어찌하든지 이 순신 장군을 죽이고 조선 수군을 멸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던 것이다. 돕는 이 하나 없는 이 순신 장군은 아마 온 천지가 적들에게 포위되어 욱여쌈을 당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왜군과 명군은 돌아갈 고향이 있었으나 아군은 돌아갈 고향이 없다고 탄식했던 것이 아닐까? 결국‘죽으면 살리라.’라는 담대한 마음으로 적의 종자를 멸할 것을 명령하여 왜란을 승리로 이끌게 되어 역사의 한 장을 기록한 것이다. 작금에 우리나라의 형편은 국내외적으로 욱여쌈을 당한 형국에 처해졌다. 정파는 정파대로 교파는 교파대로 편을 나누어 국론이 통일되지 못하여 유대나라처럼 온통 찢어진 상태로 분열된 느낌이다. 북한은 시간만 나면 무력으로 남한을 접수하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주위의 강대국들은 한국이 부강하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아 보이지 않게 방해 공작을 멈추지 않는다. 특히 젊은이와 믿는 백성들까지도 방황하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많은 것을 포기하려 한다. 게다가 기상이변과 코로나까지 더 심해져 어려운 형국을 맞아 일제강점기의 최악의 순간처럼 도저히 미래가 암담하다. 일자리는 줄어들어 일하고 싶어도 일할 자리가 없어 직장도 결혼도 미루거나 포기한다. 한국이 선진국에 진입했다고 축하하지만 시국적으로 현재는 어려운 시기로 개인도 국가도 욱여쌈을 당하여 어려운 상태에 처해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 순신 장군도 바울도 요셉도 욱여쌈을 당하여 도저히 인간적으로 ‘바람 앞의 등불’같이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죽기로 각오하면 살리라.’하고 상황을 대처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살려 주시고 높여 주셨다. 우리의 현실은 지금 가정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모든 분야에 욱여쌈을 당한 상태로 어려운 위기의 비상상황임을 기독교인이 먼저 절감해야 한다. 우선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내가 진정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빛이 되었는지 자성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개체인 나라는 존재는 극히 작지만 예수님은 어떤 일도 다 할 수 있는 능력 있는 분임을 믿어야 한다. 성질이 날 때 내가 나를 죽이고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도 나를 죽여야 한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고 불평과 불만의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와도 나를 죽이자. 그리하면 그 분이 내 안에 계셔서 크게 역사해 주시고 위기에서 구해 주신다. 지금은 온 세계가 코로나와 전쟁 때문에 경제 침체의 욱여쌈을 당하여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상황이다. 다른 방법이 없다.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나만 죽으면 전능자는 삽니다. 나 자신을 죽이세요. 그 분이 모든 환난을 감당하십니다.’라고 외쳐야 한다.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해도 그 분이 환난을 능히 감당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절대 필요한 때다. 위기는 또 하나의 기회임을 명심하자. 2022.08.22. 경남기독신문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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