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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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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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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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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8
  • [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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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3
  • [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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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8
  • [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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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인 생활용어
    2023-09-06

실시간 칼럼 기사

  • [박봉석 목사] 은메달 예찬
    약 한 달 전에 코로나로 어수선한 가운데서도 지구촌의 잔치인 도쿄 올림픽이 개최되어서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약 2주 동안 매스컴에서는 올림픽 기사가 계속 올라왔습니다. 필자는 금메달을 딴 선수의 기사보다 4위를 한 여자배구대표팀과 다이빙의 우하람 선수의 기사를 유심히 봤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노력을 칭송하는 기사에 흐뭇해했습니다. 사실 올림픽 때만 되면 필자는 매스컴에 불만을 가졌습니다. 왜냐하면 매스컴이 대부분 주목하는 것은 금메달이었기 때문입니다. 금메달을 딴 것에 대해서만 특종 기사로 다루고 신문도 대서특필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도 역시 금메달에만 주목합니다. 그러나 금메달을 딴 사람만이 아니라 은메달, 동메달을 딴 사람 또한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땀과 피를 흘리고 수고를 했을까요? 아니 아예 메달을 따지 못한 사람 또한 그들이 흘린 땀과 피는 금메달을 딴 사람보다 오히려 더 많은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그런 과정보다 결과에만 집중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참 좋으신 분이신 것은 하나님은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시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달란트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다섯 달란트를 받아서 다섯 달란트 남긴 종에게나, 두 달란트 받아서 두 달란트 남긴 종에게 똑같이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칭찬하며 상급을 선포하신 것은 하나님은 결과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맡긴 만큼 얼마나 최선을 다해서 충성했느냐 그 과정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교회를 섬기는 우리도 결과 지상주의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결과보다 하나님이 맡기시는 일에 최선을 다해 충성하고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숙한 교회를 이루어 가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결과 때문에 실망하고 실족하는 일이 없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충성이란 결과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과정으로 판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달란트 비유에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성경에는 2등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모세에게 아론은 2등이었습니다. 다윗에게 요나단은 2등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바나바는 2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2등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일이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 1등이 못하는 일을 2등이 잘 감당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1등이 아니어도 묵묵히 충성하는 2등을 기뻐하시고 쓰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바나바는 그 2등의 사명을 정말 훌륭히 감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어 보면 처음에는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의 이름을 거명할 때에 늘 “바나바와 바울”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항상 바나바의 기사를 먼저 기록하고, 뒤에 바울의 기사를 기록하고 있음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바나바와 바울의 순서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어느 시점부터는 “바울과 바나바”로 기록이 되고, 또한 바울이 중요하게 부각되어서 사도행전이 기록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제 복음과 선교사역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나바가 그에 대해서 불평과 원망을 한 흔적이 성경에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묵묵하게 바울을 조력하는 자로서 훌륭하게 자신의 사역을 감당하는 모습을 사도행전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때가 되어서 바울을 전면에 내세워서 선교사역을 이루어 가시려는 주님의 뜻을 알고 거기에 철저히 순종하며 자신이 감추어지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그렇게 숭고한 신앙과 인격을 지닌 훌륭한 2등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은메달리스트였습니다. 하늘에서는 그 누구보다 찬란한 금메달을 받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금메달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은메달 또한 중요합니다. 사람들 앞에 칭송받는 1등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2등이 되십시오. 주님의 일을 하면서 결코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내게 주신 재능과 은사를 따라 최선을 다해 충성하는 은메달리스트들이 되십시오. 그런 사람이 결국에는 저 하늘의 금메달리스트들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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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8
  • [김성수 총장] 밤은 어둡고 깊어만 가는데. . .
    세월이 참 빠르게 지나갑니다. 한 해를 시작한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가을을 맞고 있습니다. 한 해를 시작할 때마다 무언가 달라지겠지 하는 기대와 소망으로 시작하지만 실망과 후회로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하는 것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오늘날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이제는 새로운 기대와 소망을 가지는 것 자체가 사물을 잘못 보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까지 갖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과학과 과학기술의 발달이 인류를 새로운 유토피아로 인도해 줄 것으로 기대하면서 진보 그 자체에 대한 신앙도 가졌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욱 방황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발달과 문명의 진보가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해 준 점도 많이 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인류 전체가 멸망하게 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조성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인간은 스스로가 발전시킨 과학기술 앞에 벌벌 떨고 있는 무력한 모습을 보이며, 자기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현대인은 과학과 과학기술이라는 새로운 우상 앞에 노예가 되어 꼼짝하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직시하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인간의 이러한 지식과 기술이 인간의 삶의 질과 가치를 고양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저급한 욕구 충족과 도덕과 윤리의 퇴폐적 생활로 끊임없이 인도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찍이 자연주의 철학자 루소(J.J. Rousseau)는 드죵의 현상 논문을 통해서 인간의 과학과 문화의 발전이 인간 사회를 도덕적으로 고양시키기보다는 오히려 타락하게 만든다고 주장하면서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갈파하였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확실히 어두움을 향해서 계속해서 질주해 가고 있습니다. 청소년의 일탈 행동은 갈수록 폭력과 퇴폐성으로 얼룩지고 있고, 기성사회는 정신적인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언론을 통해서 보도되는 모든 사회적 현상들은 희망보다는 실망과 좌절감을 더해 주고 있습니다. 도무지 소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시대상을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날이 임박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언제 주의 날이 우리에게 임하도록 계획되어 있는지 말하지 않지만 주의 날에 관해서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 날이 밤에 도적같이 임할 것이라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이 진술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주의 날이 해가 떠 있는 낮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캄캄한 밤에 올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밤에 올 것이라고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고 있지만 그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님은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영적으로 어두운 밤에 재림할 것이라는 사실을 바울은 밤에 임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아무리 과학의 빛이 찬란하게 빛난다고 할지라도 도덕적, 영적인 눈으로 보면 이 세상의 삶은 더욱 더 어두운 밤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점점 더해져 가는 어두움이 시야를 가리우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죄와 불의가 점점 더 깊어 가는 흑암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습니다. 주님은 영적인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가 밤 12시를 치기까지 기다리시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모든 빛들이 꺼지고 죄악이 극도로 관영할 때까지 인내하면서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의 저녁 시간즈음에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두움이 점점 더 깊어가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알리는 시계가 밤 12시를 알리기까지 얼마 남아있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세상의 쾌락을 추구하는 모든 장소들, 극장과 술집, 환락가들이 사람들로 가득 차 붐비고, 인간이 만든 조명들이 찬란하게 빛날 그 때에, 사람들이 자신들이 이룩한 과학 기술 문명의 발전을 스스로 찬양하면서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말하고 있을 바로 그 때에 주님은 홀연히 재림하실 것입니다.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주의 날(DAY of the Lord)이 밤(Night)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 얼마나 놀라운 대조인가!! 하늘과 땅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위대한 날에, 어두움이 흑암을 뒤덮고 있을 그 때에 하나님은 “빛이 있어라!”고 다시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그 날에는 밤이 낮이 될 것입니다. 이제 이 날은 다시는 밤이 찾아오지 않는 영원한 낮이 될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다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뒤덮지 못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이 주의 날은 캄캄한 밤에 빛과 같이 오게 된다고 바울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빛은 어두운 모든 구석을 다 비추며, 어두운 구석에 감추어져 있던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드러나도록 만들 것입니다. 빛이 어두움을 정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게 진솔한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나의 가정과 나의 마음의 모든 구석이 어두움이 없이 낮의 광명한 빛이 찬란하게 비치고 있는가? 우리가 악의 장막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아직도 이 악의 장막에 속하고 있지는 않는가? 언약의 물로 씻음 받기는 했지만 아직도 여전히 어두움의 자녀로 남아있지는 않는가? 밤은 어둡고 깊어만 가는데 우리 주님의 은혜의 빛이 나의 삶에 드리워져 있는 죄악의 어두움을 대항해 싸워서 그 어두움을 깨뜨리도록 살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화가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이 어두운 시대에 빛의 자녀들로 살아갈 수 있기를 진심을 소원합니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 현 에반겔리아 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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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8
  • [최호숙 목사] 교만과 겸손의 상관관계
    겸손(謙遜)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낮추는 태도가 있음을 겸손이라고 한다. 유교의 경전 중 하나인 “주역(周易)”에서는 겸손을 “지산겸(地山謙)으로 풀고 있다. 이 의미는 산이 땅 위에 있어야 마땅하지만 땅 아래에 산이 겸손하게 엎드려 있음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사람으로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갖추고 있고, 세상적으로 잘난 사람이지만 못난 사람 밑에서 섬기며 사는 삶을 말한다. 겸손에 대한 헬라어 표현이 다양하지만 그중에 ‘타페이노프로쉬네’는 우리 속에 일어나는 감정을 억제하며 짓누르며 낮은 자세로 임하는 상태를 말한다. 구약 히브리어로 ‘겸손’이란 단어는 ‘아나브’이다. 이 단어의 뜻은 ‘응답하다’란 단어 ‘아나’에서 ‘아나브’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적 겸손은 우리 속에 일어나는 사악한 감정을 억누르고 주님이 부르실 때 응답하는 그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다.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라고 성경은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 우리가 아는 모세는 무능력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다혈질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세상에서 가장 ‘아나브’한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세상적 개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관적인 판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반응하는 사람이었기에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이다. 바그완 슈리 라즈니쉬(Bhagwan Shree Rajneesh)는 “겸손은 신이 사람에게 내린 최고의 덕이다.”고 하였다. 장수를 구분하면 용장(勇將)보다 지장(智將)이 낫고, 지장보다는 덕장(德將)이 위대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겸손을 소유한 덕장으로 산다는 것은 위대한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교만과 겸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살아간다. 내 속에 교만이 있음에도 교만인지를 모르고 살아가는 경우가 있다. 참다운 겸손은 인간의 의도적 행위에서 분출되는 것이 아니라 겸손의 주체이신 주님이 내 안에 계셔서 나를 통제 해야 참다운 겸손을 이룰 수가 있다. 인위적 겸손인지 판단해 보면 “저는 미천합니다.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라는 말속에 “자신의 자아와 자기 높임”이 숨어 있다면 그것은 교만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나은 달란트가 있고 장점을 발견하여 자신이 원하는 자아가 충족되지 못할 때 나오는 열등감이 교만의 극치가 될 수 있다. 타인의 뛰어남을 못마땅하게 여겨 비판하고 그 사람의 단점을 발견하여 깎아내리며 질투하는 것도 교만의 일종이다. 또한 자신의 결점이 드러나지 않으려고 보호하기 위해 변명하고 합리화하는 행위도 교만에 속한다. 이러한 내면적 모습들이 밖으로 표출되는 것을 원치 않고 두려워하여 자신의 마음 문을 열지 않는 폐쇄적인 상태도 교만이라 할 수 있다. 겸손의 주체이신 주님의 통제를 받지 않는 자는 교만한 자요, 온유하신 주님께 배워 통제를 받으면 겸손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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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며 생각하며
    2021-08-26
  • [박무열 목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자
    몇 일전 아는 지인 목사님이 교회에 방문하셨다.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어가다가 목사님 어떻게 하면 목사님처럼 후원을 받을 수 있는지 방법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다. 순간 생각이 멈춰지며 할 말을 잊어 버렸다. 내가 하는 말을 다 들으시며 내가 행동하는 모든 것을 달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목사님의 신앙의 자리가 어떠했는가를 먼저 성찰함이 선행되어져야 한다. 무엇을 구하기 전에 내 마음과 삶을 온전히 드리기를 먼저 배워야 한다. 나를 드리는 것이 믿음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살아 있는 예배다. 교회에 다니는 것은 하나님으로 부터 서비스를 받으려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나의 필요를 공급받고 삶의 위로를 얻기 위함도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이나 환경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만 무릎 꿇는 인생을 원하신다. “기도 외에는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9:29) 믿음으로 기도하고 인내하면 하나님의 때에 아름답게 이루어주시는 만남의 복을 허락하시고 그 만남을 통하여서 기도하고 간구한 일들을 이루게 하신다. 모든 일에는 준비 과정이 있고 또한 일정한 시간과 땀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그 과정이 믿음의 기도요, 인내의 수고인 것이다. 우리는 수고와 인내의 시간이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것이 세상 이치이듯이 신앙생활도 마찬가지 이다. 나는 목사님에게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도하시면 됩니다. 서로가 사는 삶의 환경과 각자의 받은 은사가 다르기 때문에 자기에게 맞는 옷을 입으려고 노력해야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데칼코마니”는 아니기 때문이다. 내게 주신 은혜와 그분 목사님에게 주시고자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분명코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왜 남의 옷을 빌려 자기의 옷으로 살려고 하는가. “아닌 것 아닌 거여, 자꾸 거시기하려고 하는 가” 정말 답답하다. 말씀 따라 가면 인생길이 시온의 대로와 같이 분명하게 펼쳐 보일 것이다. 자기를 드리지 않고서는 좋은 인생의 결과물을 얻을 수 없다. 소금이 맛을 내려면 녹아져야 하고 촛불은 자신의 녹여 불사를 때에 어두움을 물리치고 밝음을 드러내는 것처럼 하나님은 나의 희생과 헌신과 사랑이 끝까지 순수하기를 원하신다. 희생하고 헌신하면서 내게 돌아올 보상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라. 오늘을 희생하고 내일을 보장받자. 고인 물은 흘러내야 흘러들어온다. 계산적인 인생이 되지 말라. 왜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고 매사에 부정적이고 습관적인 불평을 쏟아 내는가? 그것은 자신이 희생과 헌신 없이 계산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반증이다. 가끔 힘든 현실이 펼쳐져도, 삶을 되돌아보면 죄와 허물이 많은 내게 하나님의 은혜는 늘 생각보다 풍성했다. 삶에 위기도 있었지만 그 이상의 위로가 있었음을 생각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희생적인 삶을 새롭게 다짐한다. 코로나19로 비대면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도울 동역자를 보내주셔서 마을에 섬김과 복음을 전하는 귀한 사역을 창원 산성교회를 통하여 토요일에 실시했다. 정말 곰팡이가 가득 피어있는 벽지를 교체하고 희미한 전등을 LED 등으로 교체와 동시에 낡은 전선을 교체하며 주변을 정리하는 성도님들의 수고와 한 영혼을 사랑해서 선물 꾸러미를 준비하여 호우주의보가 내려져 장대비가 내리는데 온몸을 비에 젖으면서 가가호호 방문하여 주의 복음을 전하는 성도의 열정이 주민들의 마음을 녹이며 연신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어르신의 눈가에 맺힌 이슬을 바라보게 되니 거저 감사할 뿐이다. 부족한 종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렇게 천사들을 보내 주셔서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니 감사할 뿐이다. 주일날 담임목사님과 선교팀들이 함께 예배를 드리고 전도하여 4명의 주민이 예배에 참석하는 은혜의 시간을 가졌다. 저들이 돌아간 후의 텅 빈 예배당에 홀로 앉아 십자가를 바라본다. 밀물처럼 왔다가 설 물처럼 빠져나가고 오직 하나님과 대면해 있는 내 모습은 언제나 코람데오..... 주님. 부족한 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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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26
  • [이정희 목사] 장례용어에 대한 문제 제기
    I. 김중은 교수의 성경본문에서 보는 장묘문화와 결론(4) 1. 구약 성경에서 보는 장묘문화 구약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대 전제로 하고 있다.(창3:19). 이런 전제하에 구약 성경에는 두 집단의 장례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첫째는 족장들의 장례에 관한 것이고(창25:8-10; 35:29; 49;29-32 등),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의 장례에 관한 것이다(왕상14:31; 16:28등). 또한 모세 율법에서 시체는 부정한 것으로 규정되었으며(레22:4; 민9:6-7,10; 민19:11-22 참조), 대제사장을 비롯한 제사장들은 시체에 접촉해서는 안 된다(레21:1, 11 이하)고 규정하고 있다. 2. 무덤의 종류 1) 가족묘: 아브라함의 가족묘인 헤브론의 막벨라 굴은 자연 동혈을 이용한 것으로서 중기 청동기 시대의 무덤양식이다. 또한 기드온(삿8:32), 삼손(삿16:31), 아사헬(삼하2:32), 아히도벨(삼하17:23), 기스(삼하21:14) 등의 가족묘(왕상13:22 참조)가 언급되고 있다. 2) 일반 평민의 묘: 평민들은 주로 평지에 토장했다. 예루살렘의 경우는 주로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공동묘지에 매장한(왕하23:6; 렘26:23; 쿰란의 경우 등 참조)것으로 나온다. 3)왕들의 묘: 주로 수도 성읍 안에(유다의 경우: 왕상2:10; 11:43 등; 이스라엘의 경우: 왕상16:6, 28; 22:37; 왕하10:35등; 비교, 대하 16:14; 21:20; 24:25; 28:27; 느3:16; 행2:29 등)묘실을 두었다 . 3. 무덤의 위치: 일반적으로 거주지 밖에 있었다. 예를 들면, 동굴(창23), 나무 밑(창35:8, 상수리나무 아래; 삼상 31:13, 에셀나무 아래)을 사용했으며, 성읍 내, 평지 밭(수24:30, 32), 집터 아래(삼상25:1)등에 두었다. 이사야는 바위에 새 무덤을 파놓은 셉나를 경고했는데(사22:16) 이는 장소보다는 화려한 무덤을 판 것을 책망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예수님의 무덤은 골고다 근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정원에 파 놓은 묘실이었는데(마27:60; 요19:41; 20:5, 입구는 돌을 굴려 닫는 식이었고(막15:46), 시신을 안치하는 석상(시신 대)을 설치(막16:5-6; 요20:12 등)한 것을 볼 수 있다. 4. 장례식: 죽은 자의 눈을 아들이 손으로 감겨 준(창46:4) 경우를 볼 수 있고, 야곱과 요셉의 경우는 애굽식의 미이라(창 50:1-14; 50:26)장례였으나, 나중에 야곱은 막벨라에 묻혔고, 요셉(수24:32)과 라헬(창35:20)은 각기 다른 곳에 묻혔다. 시신은 일종의 들 것 상여에 실어서 무덤으로 운반했고(삼하3:31;눅7:12),수의는 로마시대부터 사용되었기 때문에(마27:59; 요11:44; 19:40 등) 그 이전에는 평상복을 입혔다. 묘비의 경우는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석을 세운(창35:20)일과 압살롬이 죽기 전에 자신의 기념비를 세운(삼하18:18)것이나 웃시야 왕의 돌로 된 뼈 상자나 셉나의 바위 묘실에 피장자의 이름을 새기고“열지 말라”는 경고문이 새겨져있는 것 등으로 볼 수 있다. 애곡하는 일은, 가족이나 특히 여자들과 전문 애곡인이 동원 되었다(암5:16-17; 렘9:17-22 등). 또한“키나”(3+2)율에 따른 애가(조가)를 불렀다(삼하1:19-27; 3:33이하; 대하35:24-25). 애곡기간은 30일(신34:8), 7일간(삼상31:13) 등이었고, 옷을 찢음(창37:34, 상복 착용(왕하6:30), 두건과 신발 벋음(겔24:17), 수염을 가림(겔24:17), 얼굴을 가림(삼하19:5), 머리에 흙먼지를 뿌림(수7:6), 머리털과 수염을 깎음(암8:10), 자해(렘16:6), 칠일 금식(삼상31:13)을 하기도 하고, 상가 음식(렘16:7)을 따로 하기도 했다. 구약시대의 장례식은 가능한 한 임종 당일에 행해졌고, 특별한 매장 준비는 없어 보인다. 범죄자도 처형 후 장례를 허락했다. 또한 매장되지 못하는 것은 저주받은 것으로 여겼다(신28:26; 왕상21:23이하; 사34:3; 66:24; 렘7:33 등). 신약시대의 장례식은 시신을 씻었고(행9:37), 예수님의 시신은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싸고, 기름과 향유를 발랐다(요19:39이하; 눅23:52-56 등). 일반적으로 관을 사용하지는 않았고, 입관은 애굽 풍속이다(창50:26). 하지만 팔레스틴에서(특히 페니키아 지역)에서는 석관이 사용했고, 불레셋 지역은 사람 형태의 토관을 사용했으며, 어린이의 시신은 옹관묘에 매장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부터 점차 시신을 관에 넣은 경우가 증가하며, 대략 1년 후 살이 내리면 유골을 모아 석기 골함에 넣어 보관했다. II. 중략하고 맺는 말 이상의 내용은 김중은 교수의 견해를 소개하면서 약간의 수정 보완을 한 것이다. 여기까지의 내용을 보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묘문화는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인다. 이에 대해 필자는 지난 주간 장례예식에 대한 내용을 집필한 어떤 신학대학의 예배학 교수에게 이에 대한 견해를 물었더니 역시 동일한 내용으로 대답했다. 이는 앞으로도 좀 더 논하면서 독자 제위와 함께 나름대로의 결론을 맺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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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인 생활용어
    2021-08-26
  • [김현철 목사] 메타버스는, 교회와 주일학교에 기회이다.
    미래의 충격을 만난 교회 코로나가 발생하지 1년이 지난 지금의 한국기독교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2000년 이후에 한국기독교의 숫자는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이슈들과 더불어 급감하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교회를 출석은 하면서도, 한국기독교에 대하여 불편한 시각을 가졌던 이들은 비대면 예배를 구실로 교회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교회는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치명적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시설과 인력과 재정이 구비된 교회는 온라인으로 이러한 위기들에 그나마 잘 대처하였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교회에서는 온라인 디지털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다른 매체와의 경쟁력이 떨어지는 경향이 지적되고는 한다. 반면에 시설과 재정이나 인력이 구비되지 않은 교회는 무대책으로 속앓이만 하는 경우들이 많아졌다. 코로나로 인하여 비대면 사회가 본격화되면서 교회교육에서도 심각한 상황이 대두되었다. 온라인으로 교회교육을 대처하지만, 호응이 되지 않거나, 제대로 된 시도를 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나타나고는 했다. 이는 교회 교사들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아날로그 문화에 적응된 교사들은 디지털 문화에 제대로 적응을 못하면서 다양한 어려움들을 호소하였다. 아이들과 함께 기도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일은 자신이 있는데,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여 학생들과 소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디지털 기기로 어렵게 시도를 해도 디지털 마인드로 무장한 학생들과 디지털적인 소통이 잘 되지 않기에 어려움을 겼었다. 그로 인하여 부산의 한 교회에서는 총 18명의 중고등부 교사가 코로나 이후 15명이 더 이상 교사의 직을 수행할 수 없다고 하였다는 말은 이를 반증한다. 이러한 위기들이 교회와 교회학교에 정면으로 밀어 닥치지만, 교회와 교회학교는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해법으로 이 위기들을 풀어 나가야 한다 위기는 위대한 기회이다 (교회는 항상 위기를 발판으로 성장) 모든 상황은 양면을 가지고 있다. 위기는 위대한 기회이다.예루살렘 교회에 심각한 핍박이 일어났다. 이로 인하여 교회는 커다란 피해를 보게 되었지만, 오히려 이는 선교의 역사가 전 세계로 확산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이 빌립보 감옥에 투옥된 상황은 빌립보가 시작되는 특별한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신약학자인 FF브루스 박사는 “번지는 불길”이라고 표현하였다. 코로나 사태로 모든 것들이 막히지만 하나님의 길은 매이지 않는다. 코로나의 느닷없는 습격으로 인하여 교회당의 문이 닫히고, 교회당에서의 예배모임이 금지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기존의 예배에 익숙하던 이들은 당황하고 절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도리어 놀라운 복음의 확장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드렸던 예배와 교육활동이 이제는 그 어떤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장소의 제약을 받지 않고 예배의 기회는 항상 열리게 되었다 1980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교회는 시대문화를 선도하는 기능을 하였다. 하지만 과학이 급속도로 발달하고, 교육기법이 획기적인 발전을 하면서 교회는 시대에 뒤처지게 되었다. 그러나 코로나가 여기한 펜데믹 시대는 모든 것을 초기화 시키는 결과를 야기했다. 그런데, 이는 오하려 교회에는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CHANGE 는 CHANCE 로 사용될수 있다. 기독교의 모든 콘텐츠는 메타버스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유의하여 보다 효과적인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메타버스 교회교육>은 충분히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메타버스 교회학교는 무엇인가? 메타버스 교회학교는, 메타버스를 활용하여 교회학교를 운영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메타버스(Metaverse)는 가상·초월의 의미를 가진 단어인 meta와 세계와 우주를 의미하는 universe의 합성어이다. 스마트폰, 컴퓨터, 인터넷 등 디지털 미디어에 담긴 새로운 세상, 디지털화된 지구를 <메타버스>라고 부른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일상을 올리는 것이나, 온라인수업을 듣고, 베달음식을 이용하하는 것도 <메타버스>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힌다. 메타버스 교회교육은, 이미 갖추어진 모든 인프라를 총동원하여, 이를 활용한 다양한 신앙교육을 시도하고 확장하자는 것이다. 교회는 위기에 강해지는 생명체이다 250년전에 영국에서 시작된 주일학교 운동은 그 당시의 필요에 의하여 복음이 반응한 결과였다. 18세기가 되면서, 영국에는 산업혁명이 본격적으로 가동되었다. 급속히 산업화가 진행되는 도시로 몰린 하층민은 온 가족이 매일 15시간 노동을 해야만 겨우 생존할 수 있었다. 이러한 노동에 어린이도 예외가 없었다. 어린이도 어른과 똑같이 과한 노동에 시달렸으며, 교육이나 도덕적 훈련을 받을 기회는 없었다. 쉬는 날인 주일에는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도시에서 이탈 행위를 했다. 술. 담배.고 싸움은 어린이가 배운 유일한 쉼의 방식이었다. 어린이 소외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주일학교 운동을 시작한 사람은 로버트 레이크스(1736-1811)였다. 레이크스는 목사도, 교사도 아닌, 평신도 신문기자였다. 교회의 한 성도가 점차 심각해지는 어린이의 소외문제를 해결하고자 시작한 봉사가 주일학교 운동이 되었다. 교회는 모든 상황이 유리하고 안정적일때만 작동되는 조직이 아니다. 교회는 상황이 불리하고 어려울 때에 도리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생명체이다. 교회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해답을 제시하는 하나님의 기준이다. 펜데믹으로 인하여 기존의 질서가 붕괴되고 새로운 질서 (New-Norma)가 정립되는 시기에 성경적 세계관에 근거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 위기의 시대에 준비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사실은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진리이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그 어떤 것들로 하나님의 의도와 통제를 벗어나지 않는다. 하나의 문제가 발생할 때에, 그제서야 답을 찾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미 해답을 준비하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시다. 세상의 많은 문명들은 인간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 준비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로마는 제국을 통치하기 위하여 도로를 만들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메시지처럼 반란을 진압하고, 세금을 징수하며, 상업적 목적을 위하여 도로를 만들었다. 로마는 혈통과 문화와 역사 다른 이질적인 국가들을 무력으로 진압하여 덩치를 불린 제국을 지배하기 위하여 엄격한 법을 제정하였다. 로마는 헬라어를 제국의 공용어로 지정하여 제국의 전역에 공표하였다. 로마는 제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이러한 시스템들을 운용하였다. 로마는 지배국들에게 최대한의 자치권을 행사하도록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제국에는 200년간의 로마의 평화가 가득하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프라들을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사용하셨다. 군사적 상업적인 목적으로 만든 로마의 도로를 통하여 복음은 신속히 제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로마의 통치를 원활하게 하며 상업의 편리를 위하여 보급한 헬라어로 성경이 기록되어 제국의 모든 지역으로 복음이 전파되었다. 로마의 전성기인 <로마의 평화> 기간에 지역간의 전쟁은 거의 없었기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인터넷은 처음에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개발되었지만, 차츰 상업적인 용도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초창기에는 비싼 가격과 느린 속도가 문제되었지만, 지속적인 발달로 폭발적인 성장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인터넷은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엄청난 기능을 한다. 이는 메타버스도 마찬가지이다. 메타버스 역시 제대로 활용되면 엄청난 복음의 도구가 될 수 있다. 행복나눔교회가 할 수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아날로그 세계>와 <디지털 세계>를 아우르는 메타버스를 통한 교회교육을“행복나눔교회”에서는 다양하게 시도해보았다. 행복나눔교회는 코로나가 오기 전 주일 오전예배에 120명이 출석하였던 교회이다. 코로나로 인한 전통적 방식의 교회교육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모든 인프라를 이용하여 교회교육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야 했다. 비대면 온라인으로 교회학교 학생들과 소통하고, 신앙교육 프로그램들을 새로이 개발하였다. 비록 온라인을 통하지만, 교회학교 학생들과 소통하며 신앙의 양육을 위한 모든 과정을 통합하여 운영하면서 시행착오를 겪기도 하였다. 또한 오프라인에서 가능한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시행하면서 학생들이 교회와 지속적으로 연결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교회 자체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의 교회들과 연계하여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진행하였다 학생들이 교회를 올 수 없는 상황에서도 매주 주일학교 모임은 계속된다. zoom을 활용하여 주일학교를 운영한다는 뜻으로 <줌일학교>로 명명된 시간은, 불신 가정에서 나오는 학생들도 손꼽아 기다리며 참여하는 역사가 일어난다. 중고등부는 시공간을 넘어서는 영화의제목을 따라 <점퍼 타임>으로 모이는데, 자기의사를 잘 드러내지 않는 청소년들이 활발하게 서로 교제하며 신앙의 훈련을 매주일 밤에 온라인으로 경험한다. 여름성경학교를 이전처럼 교회에서 떠들썩하게 할 수 없지만, 온라인을 통해서 성경학교를 진행하면서, 이전의 소극적인 학생들도 도리어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결과를 얻게 된다. 여름 성경학교를 교회당에 학생들을 보내기만하던 가정안에서, 찬양과 말씀이 울러 퍼지며 온가족이 여름성경학교에 참여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중고등부들을 위한 온라인 수련회는 지역을 초월하여 참여한 학생들에게 거룩한 은헤와 놀라운 도전을 주었다 이는 단지 교육기관만이 아니라, 고난주간, 부활절을 비롯한 절기 행사에서 일반 장년교인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메타버스를 활용한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게다가 우리나라를 넘어서 필리핀을 중심으로 5개국의 청소년들 1,200명과 국내의 교회 청소년들 300여명이 참가한 < 온라인 글러벌 캠프>를 뜨거운 은혜중에 진행하였다. 하늘길이 막혀 선교지에 갈 수 없지만, 온라인을 타고 복음이 동시간에 온 열방에 선포되는 특별한 경험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격을 경험하게 되었다. <메타버스 교회학교> 이러한 경험들을 모아서 <메타버스 교회교육>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출간된지 3주만에 갓피플 선정 <기독교서적 판매 1위> <교회교육 분야 1위>에 오르며 많은 교회의 사역자들과 교사들에게 새로운 인사이트를 전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많은 교회에서 새롭게 메타버스를 활용하는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 책은 메타버스에 대한 이해를 도우며, 이를 적용하여 코로나와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교회학교의 적합한 대처방안을 실제로 설명하고 있다. 메타버스를 활용하여 교회학교를 운영하면, 이전의 전통적인 교회학교와는 또다른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 책에서 지면관계상 미처 다루지 못한 내용들을 심화수업을 하는 <교회, 메타버스를 탑승하다>세미나는 3주간에 걸쳐서 여러 교회들에서 진행중이다. 메타버스 시대의 특징을 이해하고, 메타버스 세대들의 특징을 살펴보며, 여기에 근거하여 교회학교의 전략을 수립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메타버스>를 타고 교회와, 교회학교는 질주한다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초유의 상황으로 현장에서의 예배는 중단되고, 교회당에서의 주일학교 교육 프로그램은 멈추어졌다. 하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결코 멈추지 않고, 다음세대들을 위한 교회학교 역시, 끝나지 않았다. 이미 현재의 기술력으로도 가동되고 있는 <메타버스>를 활용할 때에 교회와 교회학교는 놀라운 열매들을 거두게 된다. 교회당에 직접 가지는 못해도 충분히 은혜가 충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직접 학생들이 교회당에 모이지 않아도 얼마든지 활기찬 교회교육이 이루오질 수 있다. 실제로 메타버스를 활용하여 교회와 교회학교가 부흥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는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가기가 사실상 어려워졌음에도, 메타버스를 활용하여 선교지의 현지인들과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난다. 이러한 과정은 엄청난 경비와 화려한 장비, 탁월한 기술인력들이 동원되면 더욱 효과적인 구현이 가능하다.하지만, 스마트 폰 하나만 가지고서도 얼마든지 이러한 작업들을 진행할 수 있다. 그러한 전략들을 함께 나누면서 많은 교회들이 메타버스에 탑승하여 목회와 다음세대 사역을 질주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글. 김현철 목사 행복나눔교회 담임, <메타버스, 교회학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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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26
  • [김성수 총장] 상상력의 윤리성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많은 학생들이 “인간은 이성적 존재입니다”라는 대답을 합니다.아마도 학교교육을 통해서 인간존재의 독특성을 생각하는 기능에서 찾는 헬라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이런 대답을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러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단순히 이성적인 존재로만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성적 능력만을 가진 기능적인 피조물 이상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인간을 상상력과 예술적 감성이 풍부한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정말 놀랍기만 합니다.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해 주신 예술적 상상력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을 보다 더 풍요하게 만들어 갈 수 있고, 우리의 삶의 질도 더 풍요하고 아름다워지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다양한 방법으로 볼 수 있고,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을 수 있고, 상상하고, 창작하고, 여러 가지 가능성을 마음속에 그려 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하고 사유하는 은사만큼이나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은사들이 없다면 아마도 우리 삶의 대부분은 대단히 단조롭고 냉랭하고 음울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상상력과 예술적 감성을 주시지 않으셨다고 하면 우리가 저술한 대부분의 책은 딱딱한 논리와 교훈적인 말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순히 이성적인 존재로만 창조하셨다고 하면 우리가 건축하는 건물도 아마 기능적인 면만 지닌 어색한 시멘트 덩어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거주하는 주거 공간도 아마 생활에 꼭 필요한 물품들을 가장 유용하고 편리한 방법으로 배치해 놓은 냉혹한 참호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성적이며 과학적인 존재로만 지음받았다면 우리의 예배도 아마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예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우리의 삶 전체가 단순한 기능과 기술에 불과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상상력을 주셔서, 세상을 보다 풍요하게 가꾸는 예술적 삶을 영위하게 하셨고,이러한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우리 자신도 보다 더 부요한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물론 화가와 음악가, 무용수와 영화 제작자 그리고 이야기를 쓰는 작가들, 소위 전업 예술가들만 창의적이며 예술적인 삶을 살도록 부르신 것은 아닙니다. 창의적이고 풍부한 상상력을 지니라는 부르심은 예술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각 사람 모두에게 해당되는 부르심 입니다. 우리는 요리를 할 때나 옷을 입을 때, 집안 장식을 할 때나 헤어 스타일을 가꿀 때,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상상력을 사용해서 우리가 보다 더 풍요한 삶을 살도록 부르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상상력을 가지고 새로운 어떤 것을 예술적으로 만들 수 있게 된 것은,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image)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위대한 예술가입니다. 화가 피카소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최고로 위대한 예술가이시다. 하나님은 결코 똑 같은 것을 두 번 그리지 않으시는 예술가이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매일 저녁 하늘에다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분입니다. 석양의 아름다움은 바라볼 때 마다 다르고, 바라볼 때 마다 새로운 경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는 그림은 세상에 있는 모든 화랑보다도 더 많은 감상자들을 유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예술계의 거장입니다. 홍수 후에 하나님은 다시는 세상을 물로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의 징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언약을 양피지에 기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언약의 징표를 흰 종이에 검은 글씨로 써 주지도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에 하나님은 아름다운 무지개를 약속의 징표로 주셨습니다. 무지개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보존될 것이며, 그것도 풍성함과 아름다움의 장소로서 보존될 것이라는 약속을 그 자체 안에 담고 있는 아름답고 다채로운 빛의 징표입니다. 하나님은 이 풍성함을 무지개뿐만 아니라 서쪽 하늘의 노을로도 표현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상상하고 만들 수 있는 모든 예술적 솜씨들은 창조주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물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예술적 은사들을 잘 활용하여 우리 자신도 풍요롭게 살고, 우리의 이웃들도 보다 더 풍요하게 살도록 섬기는데 사용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은사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원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다양성과 조화와 아름다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예술적 상상력을 최대한 개발하여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 세계의 풍성함을 축하하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온 세상을 향해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그리고 이러한 삶 자체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또 다른 형태의 예배적 행위임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지구촌에는 부패한 정치권력들이 온갖 종류의 음모론을만들어내고 있습니다.심지어는 인간의 존엄한 생명을 담보로 잡는 음모론까지 등장하고 있습니다.우리의 사정도 마찬가지입니다.내년 3월 대선을 앞두고 우리의 상상력을 잘못되게 호도하는 온갖 치졸한 가짜 뉴스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시간이 지나고 보면 우리가 얼마나 천진난만했는가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의 어이없는 일들로 판명 난 동일한 종류의 가짜 뉴스들이 또 다시 우리의 상상력이 일탈하도록 유혹하고 있습니다.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상상력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상상력의 윤리성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며 성찰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상상력을 가지고 형제에게 상처를 주거나 남을 음해하는 일에 사용하지 않고 우리 자신의 삶은 물론, 이웃의 삶까지도 질적으로 풍요하게 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사용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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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25
  • [박봉석 목사] 용납 그리고 여백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제일 힘든 것은 더 이상 제가 실수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를 먼저 천국에 보내신 한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무슨 말일까요? 어머니는 자신이 실수해도 괜찮은 분이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실수도 너그러이 받아 주신 유일한 분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목사님의 고백을 들으면서 가장 좋은 관계가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실수해도 괜찮은 관계입니다. 내가 실수하는 것을 너그러이 용납해주는 사람과의 관계야말로 내게 가장 편안한 관계라 하겠습니다. 성경 복음서를 보면 그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종교 지도자들은 죄인이라 취급받던 사람들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벌레를 대하듯 멀리하고 정죄했습니다. 그저 자신들이 인정하는 사람들과만 교제하였습니다. 그래서 정작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다른 사람이 터부시하고 정죄하는 죄인이라 낙인찍힌 사람들을 가까이 하셨고 더불어서 식사까지 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보고 그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정죄하고 수군거리자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위대하신 용납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용납은 예수님의 특기입니다. 바로 그 예수님의 특기로 인해서 우리 같은 죄인도 예수님께로 올 수 있었고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유일하게 옷 벗고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부부입니다. 서로의 치부를 다 드러내도 아무렇지도 않고 오히려 그런 서로를 안아주는 것이 부부입니다. 그런 면에서 부부는 최고의 용납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그 용납이 육체에만 머물면 안 됩니다. 다른 모든 면에서도 부부는 서로를 가장 깊게 용납하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혹 다른 사람 앞에서 실수하면 부끄러워도 배우자 앞에서는 부끄럽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배우자의 실수에 대해서 “그럴 수도 있지, 뭐 그것 갖고 그래요.”라고 용납할 수 있는 것이 부부입니다. 내 실수와 잘못을 용납해주고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변호해 줄 수 있는 부부라면 최고의 부부입니다. 그처럼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최고의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실수해도 편안하게 말할 수 있고 그 실수를 감싸고 용납해 주는 교회가 최고의 교회입니다. 실수한 것 때문에 정죄 받는 교회라면 예수님을 닮은 예수님의 몸 된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 좋은 목회자는 무엇보다 성도의 실수를 용납하고 위로할 수 있는 목회자이고, 좋은 성도는 목회자의 실수를 덮어주고 용납하는 성도입니다. 실수 할 수 있는 인간들이 모인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해서 꼬투리를 잡고 정죄하기 시작하면 그 교회는 예수님 닮은 예수님의 몸 된 교회가 될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사람을 힘들게 하고 사람을 떠나게 만드는 교회답지 못한 교회가 됩니다. 교회 안에 완벽주의적인 성향의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이나 사람 앞에서 바른 삶을 사는 것은 참 좋은 것이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적용하여서 다른 사람을 정죄합니다. 우리가 책을 읽을 때에 여백이 없이 글만 빽빽하게 적혀 있는 책은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읽기가 힘이 듭니다. 그러나 여백이 있고 삽화도 있는 책은 술술 잘 읽혀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사람에게도 여백이 필요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연약함과 부족함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서로를 용납할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에 대하여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용납하는 자세, 바로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여백의 신앙이라 하겠습니다. 성경 전도서 7장 16에서는 말씀합니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바로 이 말씀이 다른 사람을 향해서 용납할 줄 아는 여백의 신앙을 명하는 말씀입니다. 독자 여러분, 다른 사람에게 완벽을 강요하지 않고 실수를 용납할 줄 아는 여백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되어 보십시오. 그리할 때에 다른 성도가 편안히 다가갈 수 있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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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1
  • [이정희 목사] 장례용어에 대한 문제 제기
    I. 서언(序言) 일반인이든 교인이든 가장 흔하게 접하는 일들이 장묘에 대한 일이다. 그동안 수많은 장례식에 참여하거나 예식을 인도했고, 강의를 했던 필자도 정작 본인의 가족이 상을 당했을 때는 다소 당황이 되었던 일들도 있었다. 그 많 큼 우리 기독교인의 장례예식은 형태는 있으나 신학적 조명과 정례화 된 장묘문화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이는 몇 차례 기고한 구약학의 김중은 교수도“성경 전체를 통해서 볼 때 이것이 기독교의 장묘문화라고 말할 수 있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고, 주로 각 시대의 장묘문화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한 보편적으로 공유했을 것으로 본다.”고 한 경우에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과거에 없다고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이에 올바른 신학적인 정립과 기독교적 가치에 합당한 장묘문화를 지금보다 더 정확하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 이는 본 기고의 근본 취지인 장묘 용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에 본 호에서도 앞서와 같이 장묘문화를 논하면서, 요즈음의 가장 보편적인 화장에 대한 김교수의 연구 논문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II. 김중은 교수의 시대에 따른 성경의 장묘문화 고찰(3)/ 화장과 무덤 1. 화장(火葬; cremation): 김 교수가 연구하고 발표한 화장에 관한 내용을 축약해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화장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오기 이전 시대에 게제르(Gezer, 게셀)와 예루살렘에서 나타난다. 예를 들면, 구약시대 전염병이 돌때는 비상조치로서 화장을 했을 가능성이 있었고(암 6:10),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보은하는 뜻으로 사울과 요나단의 시신을 수습할 때 살과 내장은 불태우고 그 유골만 매장한 것으로 이해된다(삼상 31:11이하). 하지만, 이러한 장례방식은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시신화장의 금지사상을 생각하게 하는 구절도 있다(암2:1). 일찍이 애굽이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화장이 행해졌으며, 셈족과 페니키아인도 일부 화장 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화장은 미개지역에서는 드물고 고도의 문화지역과 계급사회에서 성행되었다. 그리스, 로마에서도 화장과 토장이 병용되었으나, 주후 200년 경 부터는 화장제도가 폐지되었다. 화장 선호의 이유로는, 시체 부패에 따른 불쾌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함, 영혼이 시체에서 빨리 빠져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함, 영혼의 옛 거처를 파괴함으로써 다시 태어나는 일에 자극을 주기 위함 등이 거론 된다. 모세 율법의 사형 방법으로 불태워 죽이는 것이 있으며(레20:14; 비교, 참38:24; 수7:25), 죽은 자에게 분향하는 것은 화장과는 상관없다(렘34:5; 대하16:14; 21:19 등). 이스라엘 시대 팔레스틴에서는 많은 무덤들이 발굴되었으나 시신을 불에 태운 화장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로 볼 때 화장은 비 이스라엘 주민의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고는 팔레스틴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오히려 시체를 불태워 훼손하는 것은 범죄행위이며(암2:1), 제단을 훼손하는 범죄자들과(왕상13:2), 흉악한 범죄자들을 화형에 처하는 경우가 있었다(창38:24; 수7:25 등). 2. 무덤 : 성경시대 가장 일반적인 무덤은 석회암에 형성된 자연동혈이나 인조 석실묘를 사용하였고, 필요에 의해 확장이나 새로운 석실을 파서 사용하는 데로 발전했다. 이러한 동굴묘실의 무덤형태가 성경시대 전체에 걸쳐 사용되었다. 그러나 석실묘는 그 비용문제 때문에 주로 상류층에서 사용했고, 일반 평민들은 땅을 얕게 파서 묻는 평토장을 주로 했다. 무덤의 장소는 일반적으로 주거지나 성읍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떨어진 장소를 사용했다. 유해의 처리는 보통 반드시 누운 자세로 했고, 가나안과 이스라엘 시대를 일관하여 무덤에서는 부장품을 넣었던 것이 발견되었고, 여기에는 일상생활에 사용하던 모든 종류의 가재도구들이 있다(다량의 토기그릇 종류, 무기류, 인장, 부적 등). 또한 유해는 평상복을 입혀서 머리핀, 장신구 등과 함께 매장하였으며, 왕과 상류층 귀족들은 그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물품들이 발견된다. 이런 무덤의 부장품들은 내세사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III. 중략하고 맺는 말 필자의 입장에서 장묘 문화에 대한 가장 큰 관심은, 현대에 있어서 가장 많이 시행하고 있는 화장에 대한 성경적 조명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논한 김 교수의 연구에서 본대로 화장에 대한 성경적 입장의 거의 없다. 또한 무덤 속에 부장품들을 같이 매장한 것으로 보아서 이런 일들이 기독교적 입장을 충분히 대변한다고 볼 수는 없다. 이로 볼 때 성경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묘문화는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인다. 어쩌면, 사후에는 육신의 처리보다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면이 더 중요하기 때문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앞으로도 더 논하는 과정에서 나름대로의 결론을 맺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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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1
  • [오성한 목사] 복음이 영감(靈感)이다.
    복음이 영감이다. 가장 크고 정확한 영감은 복음이다. 영감을 키우려면 복음을 깨닫는 것이다. 예수만 믿었는데 모든 문제가 풀리고, 모든 것을 주신 것이 복음이다. 성도 중에 많은 분은 신앙 생활하는 것이 죄짓지 않는 것인 줄 알고 죄를 짓지 않으려는데 초점을 맞추어 살고 있다. 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는지, 안 지었는지를 먼저 살피며, 회개하며 죄짓지 않으려고 애쓰며 산다. 속지 말아야 한다. “왜 못 지킨 거니, 조금 더 노력하고 조심했으면 지킬 수 있었는데 너는 아직 멀었어.”라고 하며 죄책감과 정죄감에 빠지든지, “앞으로 조금만 더 노력한다면 너는 완벽해질 수 있어.”라는 생각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겨우겨우 지켜야 하는 나약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죄가 우리를 속이는 것이다. 죄의 말을 듣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또, 다시 로마서 5장을 바르게 묵상해야 한다. 로마서 5장은 아담과 예수님을 비교하고 있다. 아담이 큰가, 예수가 큰가? 대답해 보라. 아담과 예수를 비교라도 할 수 있는 상대인가? 아담이 지은 죄를 얼마나 완벽하게 날려 버리시려고 계획하시고 실행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알아야 한다. 아담과 예수님은 비교할 수조차 없다. 아담 때문에 죄가 왕 노릇 하지만, 예수님 때문에 의가 왕 노릇 하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아담을 키우지 말고, 예수를 가득 키워야 한다. 계명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죄가 우리를 속여서, 우리를 죽이려 하는 것이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로마서 7:11)라고 했다. 선한 것을 해 보겠다고 마음먹을수록 안 되기 때문에 결국 죄의식만 자라게 된다. 또는 위선자로 살게 만들거나, 죄인이라는 생각으로 덮여버려 아무렇게 살아버린다. 아담이 저지른 일이 아닌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에 집중해야 한다. 예수께서 하신 일을 받아들이는 생각이 믿음이다. 성경은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로마서 7:13)라고 한다. 선한 것을 하겠다고 하면. 죄가 더 드러난다는 사실을 아는 성도가 몇이나 될까? 율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마음이다. 율법은 선하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죄인 됨을 드러내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율법은 죄를 깨달으면 한다. 율법을 지킬 수 없다.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필요한 것을 깨달으라고 주신 것이다. 율법은 선하지만, 율법으로 우리는 죄인 됨만이 드러나기 때문에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로마서 7:14)라고 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마음이기에 하나님을 사랑할 때만 그 마음을 읽어 드리고, 저절로 따라 하게 된다. 죄는 매일 우리에게 죄인임을 증명하며, 우리를 사로잡아 온다. 믿음 좋은 자에게 여전히 죄의 법이 사로잡아 오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다. 정상인 줄 모르면 죄의 법이 사로잡아 올 때마다 평생 시달리고 능력의 삶을 살 수 없다. 십자가를 왜 지셨는지, 정확히 아는 것은 너무 중요하다. 다시 말해 복음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지 모른다. 바른 영감으로 행복의 삶을 살게 하기 때문이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로마서 7:23)라고 한 말을 알아들어야 한다. 율법을 지키려고 할수록 죄가 우리를 사로잡아 올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답을 제시하기 위해 탄식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5)라고 말이다. 죄의 법이 사로잡아 올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울은 죄의 법에 잡혀 있지 말고,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했으니, 영의 생각을 하라고 호소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로마서 8장에서 말한다. 영의 생각을 하는 훈련을 해라. 죄의 법에서 완전히 해방됨을 볼 것이다. 예수를 믿는 것은 내가 죄를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것을 받아들이는 영의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복음이 깨달아져야 바른 영감이 오고, 당신 안에 잠재운 성령의 능력을 복음으로 깨울 수 있다. 이제는 죄의 법이 주는 고통이 아닌 영의 생각으로 풍성해야 한다. 주님이 이루어 놓으신 것을 많이 생각할수록 주님은 기뻐하신다. 죄의 법을 이기는 지름길이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보여 주고 있다.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원하셨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주님의 십자가는 주님이 나를 얼마나 신뢰하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이 우리에게 영감을 준다. 임마누엘의 영감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준다. 주님이 주신 온전한 복음의 결론은 임마누엘이다. 임마누엘을 안다는 것은 모든 것을 가진 것을 아는 것이다. 임마누엘 안에 완전한 인도가 있다. 임마누엘의 복음의 영감을 받자. 복음이 이 땅을 능력으로 살게 하는 영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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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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