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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신사참배의 망령이 부활했는가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는 자들과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이사야 5:20) 지금 이 순간, 이란의 이슬람 독재 정권 아래서 10대 소녀들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자유를 외쳤다는 이유로 짐승만도 못한 만행을 당하고 있다. "처녀는 곧장 천국에 간다"는 사탄적 논리로 강간을 자행해 정조를 빼앗고 교수형에 처하는 이 광기 어린 현장 앞에 전 세계가 경악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참혹한 것은, 이 피의 정권에 동조하며 자금을 대는 대한민국 이재명 정권과, 그 주역을 거룩한 강단에 세워 '용비어천가'를 부른 한국 교계 지도자들의 영적 간음이다. 1. 국익도 국민도 없는 이재명 정권의 '해괴망측'한 독재 원조를 규탄한다! 이재명 정권은 지금 레바논에 이어 이란에까지 '인도주의'라는 허울을 쓰고 혈세를 퍼붓고 있다. 이것이 과연 누구의 돈인가? 우리 청년세대들이 짊어져야 할 빚이며 국민의 혈세다. * 배신 외교의 극치: 미국과 이란이 전쟁 중인 상황에서 적대 세력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것은 한미 동맹의 근간을 부정하는 자폭 행위다. * 독재의 군자금: 50만 달러라는 지원금이 민간인에게 갈 것이라 믿는 바보는 없다. 이는 결국 소녀들을 살해하고 시민을 탄압하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군자금이 될 뿐이다. * 주객전도의 인권: 자국민 고물가 고통과 천안함 유족의 눈물은 외면하면서, 외부 독재 정권에만 '개폼' 잡으며 생색내는 것은 국익을 팔아 자신의 사법 리스크와 정치적 폼을 사려는 비겁한 굴욕 외교다. 2. 강단을 유린한 이영훈·소강석의 '아부의 향연'과 현대판 신사참배 2026년 부활절, 거룩한 하나님의 성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 강단에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올라섰다. * 배교적 찬양: 이영훈 목사는 이란 정권을 돕고 교회 탄압의 중심에 선 이를 향해 "가장 무거운 짐을 짊어지신 분"이라며 찬양했다. 소강석 목사는 "박수 안 치는 사람 누구냐"며 성도를 협박하고, "아름답습니다"라는 망언으로 아부의 극치를 보였다. * 성도 유린: 권력자의 안위를 위해 성도의 노트북 비번을 풀게 하고 다이어리까지 뒤지는 만행은 이곳이 예배당인지 공산당 검문소인지 분간할 수 없게 했다. 이는 과거 일제 강점기 강단에 일장기를 걸고 천황에게 절하던 신사참배의 데자뷔다. 살아있는 우상에게 제사상을 차려준 이 목사들은 역사와 하나님 앞에 석고대죄해야 한다. 3. 고신 저항 정신의 파산: 김홍석 전 총회장과 '기독교보'의 비겁한 변절 일제의 칼날 앞에서도 신앙의 정조를 지켰던 고신의 저항 정신은 어디로 갔는가? * 김홍석 전 총회장의 침묵: 이 참담한 광경을 두 눈으로 지켜보면서도 손을 들어 축도한 행위는 악의 잔치에 하나님의 복을 비는 영적 배교다. * 기독교보의 궤변: 기독교보(2026.4.11)는 이 사태를 두고 "교단과 이념을 넘어", "교회의 연합과 일치"라 보도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좌파 독재 이념과 적그리스도적 행태가 '수용 가능한 이념'이 되었는가? 어찌 그리스도가 벨리알과 함께할 수 있는가? * 저항의 거세: "분열과 시대를 넘어"라는 표현은 자유민주주의와 교회를 지키기 위해 저항하는 성도들의 입을 막으려는 교묘한 술책이다. 고신의 기관지라는 기독교보가 독재 조력자를 비판하기는커녕 '은혜로운 예배'라고 미화하는 것은 고신 선배들에 대한 명백한 배신이다. 4. 자칭 '고사모'의 선택적 정의와 위선을 고발한다! 손현보 목사가 강단에서 시대를 향해 선지자적 경고를 날릴 때는 '정교분리'와 '선거법'을 들먹이며 일간지에 광고까지 내어 정죄하던 자칭 '고사모' 목사들은 지금 어디에 숨었는가? * 손현보의 회개 촉구는 징계 대상이고, 이영훈·소강석의 굴종적 아부는 연합인가? * 거짓의 아비가 부활절 강단에 서서 성도들을 유린하는데도 '입꾹닫'하고 있는 당신들의 신학은 이미 파산했다. 당신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한상동 목사를 비판하던 가결자들과 다를 바 없는 비겁한 기회주의자들일 뿐이다. 결론: 주님, 이 땅의 촛대를 옮기지 마시옵소서! 이란의 소녀들이 처참하게 도살당하는 현실을 외면한 채, 권력자에게 강단을 팔아넘기고 '회복'과 '희망'이라는 거짓 평화를 노래하는 한국 교회는 심판의 대상이다. 이재명 정권은 즉각 독재 지원을 중단하라! 이영훈, 소강석, 김홍석과 고사모는 배교 행위를 회개하라! 기독교보는 저항 정신을 회복하고 위선적 보도를 중단하라! 우리는 거룩한 곳에 선 멸망의 가증한 것들을 향해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외쳐야 한다. 그것만이 고신이 살고, 한국 교회가 다시 일어서는 유일한 길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촛대는 반드시 이 땅에서 옮겨질 것이다. "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잠언 31:8)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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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그렇게 실천은 하지 않으면서도 인용을 하려니 부끄러운 한자말이 있다. 백절불굴(百折不屈)인데 백번 꺾어도 굴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어떠한 어려움에도 결코 뜻한 바를 굽히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한국이 낳은 순교자이신 주기철목사님께서는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죽음을 던지는 굳건한 의지를 남겼다. 동음이의어가 있는데 의사(義士)와 의사(醫師)의 차이가 크다. 앞의 의사(義士)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는 꿋꿋한 사람을 뜻하며, 뒤의 의사(醫師)는 자기가 가진 의술로 타인을 살리는 사람이다. 한 사람은 자기가 죽는 길이요, 또 한 사람은 남을 살리는 길이다. 오늘날 청소년들에게 의사(義士)와 의사(醫師) 중에 어떤 인물이 되기를 원하느냐고 물으면 자기 목숨을 내 놓는 의사(義士)가 되려는 청소년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성경에도 뜻한 바를 굽히지 않는 결연한 인물들이 더러 나온다. 가나안 땅의 분배를 두고 갈렙은 팔십오 세의 나이로 헤브론 땅을 달라고 요구를 한다. (여호수아14:12)에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라고 마치 출정식과도 같은 연설을 쏟아내었다. 이처럼 자기가 믿는 바를 끝까지 지켜나가는 행동은 쉽지 않다. 군산지방에서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귀암(龜岩)노인이라는 한말의 병사가 있다. 아무도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고 그저 귀암에서 살다 자결했기로 귀암노인이라고 불렀다. 그는 1907년 8월 1일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당한 근위 제2연대 1대대 소속 하사졸(下士卒)로 당일 해산식장에 나가기를 거부하고 항일의거에 참여한 저항군졸이다. 해산식이 있기 이전에 이미 일본군은 어깨에 견장을 떼고 은사금 명목으로 80원씩 나누어 주었다. 그는 받은 은사금을 찢어버리고 다른 군졸들과 함께 무기고를 털어 당시 서소문 안에 있었던 군영을 뛰쳐나와 남대문 근처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그 길로 일본군에게 쫓겨 창의문을 거쳐 삼남지방으로 내려가 약 2년 동안 의병으로 항일운동을 했다. 1909년 전라북도 줄포싸움에서 마지막으로 패하고, 이 때의 부상으로 평생 절름발이가 된 채 숨어 살았다. 그 무렵 금강하류 군산연안에 귀암이란 마을에는 미국의 선교사들이 많이 와서 합숙을 하면서 호남지방에 선교를 하고 있었다. 쫓기던 그는 왜경들의 치외법권 지역인 이 선교사들의 숙소로 뛰어들어가 전후사정을 이야기하고 하인으로 고용해 줄 것을 애걸하였다. 이 절름발이 병사는 그날부터 여선교사들의 숙소 경호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는 군영에 있을 때 차고 다녔던 장도(長刀)를 보배처럼 항상 간직하고 있었다. 서소문 탈영이래 한시도 몸에서 뗀 적이 없는 그 장도를 뽑아 어깨에 둘러메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밤마다 숙사를 순찰했던 것이다. 귀암노인은 몸에 밴 군경 생활의 습성을 조금도 고치려 하지 않았다. 새벽 해 뜨기 전에 일어나 찬물을 끼얹고, 비록 절뚝거리지만 스스로의 구령에 따라 보조를 맞추었다. 또한 몸에 밴 군기 그대로 저녁에는 왕궁이 있는 북쪽을 향해 요배하는 것을 거르는 법이 없었다. 가까이 지내는 선교사들이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는 귀암노인이 급전이 필요하여 선교사에게 돈돔 빌려줄 것을 요청한다. 선교사는 이런 기회를 타서 몸에서 떼질 않는 장도를 저당으로 내놓기만 하면 돈을 빌려 주겠다고 하였다. 귀암노인은 한 사나흘 고민하다가 근 20여년 동안 잠시도 몸에서 뗀 적이 없는 장도를 선교사에게 맡겼다. 그 일이 있은 지 며칠 후에 귀암노인은 아무말 없이 행적을 감춘 것이었다. 그의 실종과 더불어 저당으로 잡아둔 장도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장도를 놓아두었던 자리에 한 통의 편지가 놓여있었는데 펴 보니 ‘무사로서 양인 밑에 천한 삶을 이어가는 것도 치욕인데 칼마저 몸에서 떼어놓게 되었으니 이제는 잠시도 살아갈 면목이 없어졌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그날 선교사들은 귀암강 강변에서 자기의 장도로 자기 목을 찌르고 죽은 노병의 시신을 발견한 것이다. 한국의 무사정신에 강동한 선교사들은 귀암강 둔덕에 노인을 묻어주고 십자기를 세워 이 강골병사의 영혼이 영생할 것을 빌어주었다고 한다. 한 평생 다리를 절은 이 노인은 브니엘에서 천사와 씨름을 한 이후 절었던 야곱이 떠오른다. (창세기32:31)에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라고 말씀한다. 야곱 역시 백절불굴의 기백이 있었다. (창세기32:26)에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라고 말씀한다. 백암노인이 만약 천국에 갔다면 함께 다리를 절었던 야곱과 함께 좋은 친구가 되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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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총대 파송 하지 말자 – ‘부결’
노회의 제일 중요한 사명은 목사를 양성하는 것과 그 사역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고 보호하는 데 가장 중요하고 기초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회기에 부총회장으로 세움을 받아 올해 총회장이 되어야 했던 김문훈 목사는 우리 부산서부노회에 속한 우리의 동역자입니다. 노회를 넘어 고신총회에서 현실적으로 가장 큰 일을 감당하던 포도원교회를 목회하는 우리 노회의 아들입니다. 세상에서도 내 자식이 분명히 잘못한 일이지만 부모가 일단 책임을 지고 모든 것을 안고 가는 것이 선행된 다음, 그 자녀의 잘잘못을 논합니다. 안타까웠던 것은 목사의 어머니 격인 노회도 책임을 지겠다는 생각보다는 세상 여론의 눈치를 보며 노회가 안게 될 부담부터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다 연약하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세상의 눈치를 본다는 것,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세상 눈치를 보고 세상의 인정을 받으려는 것을 마치 복음적인 사역처럼 생각하는데, 교회가 하나님의 인정보다 세상의 평가를 우선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안타까움을 넘어 참담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더럽혀지는 것과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한데, 개인의 자리 욕심과 계파의 정치 논리로 동료 목사라는 자들이 공의와 정의라는 명분으로 동료 목사의 비리를 수집하고 세상에 발설하여, 한 목사의 잘못을 빌미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기에 빠뜨렸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공의와 정의를 주장하는 것 같지만 한 꺼풀만 벗기면 철저한 자기중심적인 욕심과 세상보다 더 비열한 정치 논리가 뱀이 꽈리를 틀 듯 그 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피해를 입고 지금도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이용한 간교한 무리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며, 고신총회가 반드시 밝혀내리라 생각합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운 시대를 살며 목회하게 될 후배와 교회들을 위해서도 반드시 밝혀내어 교회를 위험에 빠뜨리는 전례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투서를 돌리고 연명하는 것조차 불법입니다. 특히 우리 고신은 세상 법정에 고발하는 문제 때문에 오랫동안 아팠던 역사가 있습니다. 교회를 정화하고 공의와 정의를 원했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성경에 기초한 교회법을 따라 정당한 절차를 밟아야 했습니다. 현재 이 문제로 가장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포도원교회일 것입니다. 김문훈 목사도 오늘의 포도원교회가 없었다면 우리가 비난하는 일을 결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목숨보다도 소중한 포도원교회를 사임한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고 교회의 부름을 받아 목회하는 목사에게는 최고의 형벌입니다. 어려움과 위기에 처해 있는 포도원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포도원교회의 처절한 노력과 수고를 조금 더 지켜보십시다. 아마 많은 분이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여러 의견이 나오고 여러 제안이 있었던 것도 모두 어머니 노회로서의 책임감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저도 우리 노회 목사회원 1번으로서 같은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앞서 말씀드린 대로 지금이라도 총회와 한국교회 앞에 우리 노회가 책임지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총회 총대로 나가고 총회에서 직분을 맡아 봉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노회의 추천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총회 총대를 추천한 노회는 총대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동시에 노회는 고신총회에 대한 책임도 있습니다. 노회가 책임을 지는데 눈 가리고 아웅하면 더 큰 웃음거리가 되고, 그렇다고 총회에 대한 책임도 회피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우리 노회는 올해 총회 회계로 수고하셔야 하는 장로님이 있고, 선출직 이사도 있으며, 특별국 국원도 있고, 총회를 운영하는 상임위원회 위원장도 있습니다. 고신총회의 장자로 자부하는 우리 부산서부노회가 총회 임원과 총회 선출직 이사, 특별국 국원과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제외하고 이번 총회 회기에는 총대를 파송하지 않는 것으로, 고신총회 앞에 최소한의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였으면 합니다. 이 안이 노회에서 받아들여진다면 저는 헌법위원회 특별국 국원이지만 총대로 가지 않겠습니다. 이상과 같이 총회 총대 선정에 대한 회의 진행 발언에 대해 정식으로 동의안을 냅니다. 이번 총회 회기에 우리 부산서부노회는 총회 임원 장로, 선출직 이사, 총회 특별국원, 총회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제외하고 총대를 파송하지 않기로 동의합니다.※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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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고7] 이만열의 이승만 대통령 비하와 김구 성역화의 위험한 이분법
서론: 건국의 아버지를 지우고 실패한 낭만을 신격화하다 지난 연재를 통해 필자는 이만열 교수가 '친일 프레임'을 어떻게 악용하여 대한민국 현대사의 거목들을 사상적으로 숙청했는지 폭로했다. 그러나 이만열 사관의 진정한 목적지는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인 이승만 대통령을 철저히 폄훼하고, 그 대척점에 서 있던 김구 선생을 신격화하여 성도들에게 그릇된 국가관을 심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는 대한민국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로 낙인찍는 자학적 사관의 핵심 동력이다. 문제는 이러한 사상적 오염이 고신 교단 내부로 깊숙이 침투했다는 점이다. 소위 '고신을 사랑하는 모임(고사모)'을 자처하는 이들이 등장하고, 수많은 목회자나 심지어 총회장까지도 제주 4.3 사건의 본질 왜곡이나 현 이재명 정권의 정교분리 오독, 차별금지법 등에 대해 침묵하거나 동조하게 만드는 비극적 결과를 초래했다. 1. 김구의 독립 투쟁과 친북적 반(反)건국 행위 사이의 엄격한 구분 이만열은 백범 김구 선생이 일제강점기에 바친 고귀한 독립 투쟁의 헌신을 이용해, 1948년 건국 반대라는 명백한 정치적 실책까지 '민족적 정의'로 포장하는 논리를 펼친다. 그는 김구가 선택한 남북협상 노선을 분단을 막기 위한 유일한 민족적 정통성을 지닌 길로 평가하며, 반대로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노선은 분단을 고착화한 행위로 비판해 왔다. 그러나 김구 선생의 애국심은 오직 독립운동의 현장까지만 인정될 수 있는 것이며, 건국 과정에서의 친북적 행보는 결코 애국으로 미화될 수 없다. 1) 이만열의 주장 요지:그는 김구의 남북협상 노선이야말로 민족 분단을 막으려 했던 정통성 있는 대안이었다고 평가하며, 대한민국의 정통성 역시 이승만의 단독정부가 아닌 김구와 김규식이 추구했던 통일 정부 수립 노력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조: 이만열, 『한국 기독교와 민족 의식』 등) 2) [비평]:김구 선생의 독립운동 시기 헌신은 존경받아 마땅하나, 1948년 건국 과정에서의 행태는 단호히 비판받아야 한다. 당시 김구는 김일성이 쳐놓은 통일전선전술의 덫에 빠져 남북협상이라는 명분 아래 대한민국 건국을 노골적으로 방해했다. 이는 소련과 김일성의 적화 야욕에 이용당한 역사적 과오였으며, 이승만 대통령이 세운 자유 민주의 기틀을 흔든 반건국적 행위에 가깝다. 이만열은 이러한 실체를 외면한 채 김구의 실패한 행보를 민족의 정통성으로 둔갑시키고 있다. 2. 제주 4.3 사건 왜곡: 공산 폭동을 ‘미군에 대한 항거’로 둔갑시키다 이만열식 사관이 낳은 가장 파괴적인 결과물은 제주 4.3 사건의 본질을 뒤바꾼 조직적 역사 공정이다. 그는 4.3을 단독 정부 수립에 저항한 민중들의 투쟁이자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국가 폭력에 의한 희생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사상은 고신 내 유력 목회자들에게까지 전염되었다. 필자는 과거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 원로)가 손봉호 교수의 영향을 받은 일부 유력 목회자들과 함께 제주 전적지를 탐방하며, "제주 4.3 사건은 미군의 말발굽 아래 희생당한 제주 도민들이 미군과 이승만 정권에 항거한 저항"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는 사실을 한 참석자로부터 직접 듣고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특히 4.3의 주동자 김달삼은 북한의 지령을 받고 1948년 4월 3일 새벽, 제주 전역의 경찰지소를 습격하며 무장 폭동을 일으켰고 수많은 경찰과 우익 인사, 양민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폭동 직후 북한으로 도주한 그는 김일성으로부터 '국기훈장 2급'을 수여받았다. 이후 6.25 전쟁 직전인 1949년 말, 다시 유격대장으로 남파되어 활동하다가 1950년 3월 20일 강원도 정선 승지골(일명 '김달삼 모가지 잘린 골')에서 광복군 출신 김관오 연대장이 이끄는 국군 제8사단에 의해 사살되었다. 김달삼이 일으킨 제주 4.3 사건이 어떻게 '민주 항쟁'인가? 이 명백한 반란 수괴를 미화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모독이다. 1) 이만열의 주장 요지:그는 제주 4.3을 통일 정부 수립을 갈망하던 민중들이 분단 노선에 저항하며 일어난 사건으로 규정하며, 그 비극의 책임을 이승만 정권과 외세인 미군에 돌린다. 또한 5.10 선거 거부를 민족 자결주의적 저항의 관점에서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조: 이만열, 『한국 현대사와 기독교』 등) 2) [비평]: 4.3의 본질은 공산 세력의 무장 반란이다. 특히 당시 공산 폭도들에 의해 자행된 '기독교 순교적 진실'을 이만열은 침묵한다. 제주 최초의 순교자 이도종 목사는 공산 폭도들에게 생매장당했고, 삼양교회 김임종 집사 등 수많은 성도가 살해되었다. 당시 제주 27개 교회 중 12개 교회가 소실된 이 참혹한 잔혹사를 외면하고 공산 반란군 주동자를 '민주 항쟁가'로 미화하는 것은 기독교 역사학자로서의 양심을 저버린 반역행위다. 이런 제주 4.3 사건을 민주항쟁이라며 전적지 순례를 한 이동원 목사 등 일부 귀가 얇은 복음주의 목회자들은 이만열식 역사왜곡에서 속히 벗어나기를 촉구한다. 3. 이승만의 통찰을 거부하는 좌파적 역사 공정 이만열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며, 이를 단순히 '정부 수립'으로 폄하한다. 그는 대한민국이 1919년 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이미 건국되었다고 주장하며 2019년을 '건국 100주년'으로 기념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쳐왔다. 그러나 이는 국제법상 국가의 3요소인 국민, 영토, 주권이 실재하지 않았던 임시정부의 한계를 무시한 감성적 민족주의에 불과하다. 만약 1919년에 이미 나라가 세워졌다면, 우리 선조들은 있지도 않은 나라를 찾기 위해 왜 그토록 피 흘려 독립운동을 했단 말인가? 건국된 나라를 되찾는 것은 '광복'이지 '독립운동'이 될 수 없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1) 이만열의 주장 요지 ①: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민족 분단을 선택한 인물이며, 친일 세력을 비호하여 건국 정통성을 훼손했다.” (출처: 『우리 역사 5000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만열의 주장 요지 ②: “대한민국은 1919년 기미독립선언과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미 건국되었다.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주장하는 것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정하고 분단을 정당화하는 반역사적 행위다.” (출처: 이만열 기고 및 ‘건국 100주년’ 관련 강연 요지) 2) [비평]:이만열의 '1919년 건국설'은 듣기엔 그럴듯하나 치명적인 논리적 파탄에 직면한다. 만약 그의 주장대로 1919년에 이미 나라가 건국되었다면, 우리 선조들은 '이미 건국된 나라'를 되찾기 위해 왜 그토록 피 흘려 독립운동을 했단 말인가? 건국이 이미 완료되었다면 독립운동은 존재할 이유가 없으며, 이는 선조들의 고귀한 투쟁을 '이미 있는 것을 찾는' 무의미한 반복으로 격하시키는 궤변이다. 국제법적으로 국가는 국민, 영토, 주권이라는 3요소가 확립되어야 한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는 말 그대로 나라를 세우기 위한 '준비 기구'였을 뿐, 실질적인 영토를 통치하거나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1948년 8월 15일 건국은 한반도 내에 실체적인 국민이 구성되고, 영토에 대한 통치권이 확립되었으며, 대외적으로 주권을 선포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실체가 완성된 기점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국가의 토대 위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세웠고, '한미동맹'과 '기독교 입국론'이라는 강력한 안전판을 구축했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이 북한의 공산 정권과 차별화되는 정통성의 근거다. 이만열은 이승만을 친일파 비호자로 매도하며 건국의 정통성을 깎아내리지만, 정작 북한 정권 핵심부에 포진했던 김영주, 강양욱, 정준택 같은 골수 친일 부역자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한다. 결국, 건국을 분단의 원죄로 몰아세우는 그의 억지는 집안에 불길이 닥칠 때 남은 가족이라도 살리려 방화문을 닫은 소방관을 향해, '왜 가족이 못 만나게 가로막느냐'며 불을 지른 방화범 대신 소방관을 꾸짖는 꼴이다. 결론: 거짓된 이분법을 깨고 건국 정신을 회복하라 이만열 교수가 쳐놓은 이승만과 김구의 거짓된 이분법, 그리고 제주 4.3 사건의 왜곡은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을 파괴하려는 사상적 덫이다. 이 덫에 걸린 상당수 복음주의 목회자들과 '자칭 고사모' 목사들은 고신의 순결한 정신을 좌경화의 도구로 전락시키고 있다. 우리는 김구 선생의 독립운동기 애국심은 존중하되, 1948년 건국 과정에서 김일성에게 철저히 이용당해 이승만의 건국을 방해한 그의 친북적 역사적 과오와는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자학 사관을 걷어내지 않는 한 고신과 한국 교회는 결코 바로 설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이승만을 통해 허락하신 자유 대한민국과 고신 교회의 정통성을 지켜내기 위해 이만열의 왜곡된 역사인식과 선전선동의 칼날을 반드시 꺾어야만 한다. 그것만이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고 개혁주의 정절을 회복하는 길이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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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고6] 이만열의 친일 프레임과 역사적 살인: 건국 주역들을 향한 사상적 테러
서론:손봉호의 윤리가 씨앗이라면, 이만열의 사관은 그 독초의 토양이다 앞선 기고(1~5번)를 통해 필자는 손봉호 교수가 기독교 윤리라는 가면을 쓰고 한국 교회를 좌경화의 늪으로 어떻게 인도했는지 파헤쳤다. 그러나 손 교수의 윤리 담론이 고신과 SFC 내부에서 독버섯처럼 번질 수 있었던 결정적인 배경에는 대한민국 현대사를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치욕의 역사로 규정한 이만열 교수의 왜곡된 역사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만열은 친일 청산이라는 도덕적 결벽증을 무기 삼아 건국의 정통성을 난도질했으며, 고신 정신의 본질인 순교 신앙을 좌파적 민족주의 투쟁으로 변질시킨 장본인이다. 1. 국가 상징과 호국 영웅을 향한 인격적 살인 이만열 교수가 주도한 『친일인명사전』은 객관적 사료에 근거한 학술적 결과물이 아니라 특정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사상적 숙청이자 정치적 낙인찍기의 산물이다. 그는 역사의 입체성을 무시하고 오직 '친일'이라는 단일한 잣대만을 휘둘러 대한민국 건국의 기틀을 닦은 거목들을 사상적으로 매장하는 데 몰두하였다. 이만열의 주장 ①:“백선엽은 간도특설대 출신으로 독립군을 때려잡은 반민족 행위자다. 그의 공로를 기리는 것은 민족 정기를 훼손하는 일이다.” (출처: 이만열, 「백선엽의 친일 행적과 국립묘지 안장 문제」, 2020년 언론 기고 및 강연 요약) 이만열의 주장 ②: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는 친일파다. 친일 잔재인 애국가를 국가로 부르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출처: 이만열, 『한국 기독교와 민족 의식』, 지식산업사, 1991) [비평]:이는 일제강점기라는 처절한 역사의 맥락을 무시한 처사이다. 6.25 전쟁에서 나라를 구한 백선엽 장군을 간도특설대 경력만으로 단죄하는 것은 국군의 정통성을 파괴하려는 시도이다. 당시 간도특설대의 주요 토벌 대상은 독립군이 아닌 중공군과 팔로군이었으며, 1930년대 중반 이후 만주의 독립군 세력은 이미 궤멸되거나 소련으로 이동한 상태였다는 역사적 사실은 철저히 묵살되었다. 또한 애국가를 공격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상징 자체를 부정하려는 고도의 사상적 테러이자 국가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한 역사 부정주의이다. 2. 근대화의 선구자들을 향한 주홍글씨와 '선택적 단죄'의 이중성 이만열은 교육, 언론, 문학 등 각 분야에서 대한민국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거인들을 모조리 친일 부역자로 매도하며 그들의 사회적 성취를 부정하였다. 그는 시대적 한계 속에서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려 했던 선구자들의 고뇌는 외면한 채 결과론적인 비판만을 쏟아냈다. 이만열의 주장 ①: “김성수, 김활란 등은 일제에 협력한 반민족 인사들이다. 그들이 세운 교육·언론 기관은 친일의 토대 위에 서 있다.” (출처: 이만열,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역사적 의의」, 민족문제연구소 강연, 2009) 이만열의 주장 ②: “민족 지성이라 불리는 최남선과 이광수 역시 결국 변절한 부역자들에 불과하다.” (출처: 이만열, 『우리 역사 5000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바다출판사, 2000) [비평]:이들이 닦아놓은 근대 문명의 토대가 없었다면 오늘날 세계가 부러워하는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었다.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이만열의 '선택적 단죄'이다. 대한민국 건국 세력의 행적은 현미경으로 파헤치면서도, 정작 북한 정권 핵심부에 포진했던 수많은 친일 인사들(김일성의 동생 김영주, 부주석 김차승 등)에 대해서는 기이할 정도로 침묵한다. 민족정기를 말하면서 북한의 노골적인 친일파 등용은 눈감아주는 그의 역사학은 공정한 학문이 아니라 특정 진영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역사를 흉기로 사용한 정치 선동일 뿐이다. 3. 순교 신앙을 민족 해방 투쟁으로 격하시킨 영적 범죄 이만열 교수의 가장 큰 해악은 고신의 자랑인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신앙적 성격을 왜곡하여 세속적 민족주의의 틀 안으로 가두어버린 데 있다. 그는 선배 목회자들이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당했던 고난을 단순한 항일 운동의 일종으로 해석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초월적 가치를 훼손하였다. 이만열의 주장 ①: “신사참배 반대 운동은 민족 정기를 지키기 위한 민족주의적 항일 투쟁의 연장선에 있다.” (출처: 이만열, 『한국 기독교와 민족 의식』, 지식산업사, 1991) 이만열의 주장 ②: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사명은 민족의 고난과 함께하며 사회를 변혁하는 데 있다.” (출처: 이만열, 「기독교 역사관의 재정립」, 기독교역사연구소 세미나 강연, 2010) [비평]:고신 선배들의 저항은 민족주의 차원의 항일 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제1계명을 지키기 위해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말씀을 수호하려 했던 거룩한 '신앙 수호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만열은 이를 세속적인 민족 해방 투쟁으로 격하시켜 신앙의 본질을 변질시켰다. 이러한 영적 왜곡은 SFC 간사들과 신학생들이 성경적 개혁주의 신학보다 좌파적 민중사관에 더 열광하게 만드는 사상적 통로가 되었다. 신앙의 선배들이 피로 지킨 제단 위에 이만열은 좌파 이데올로기의 향로를 피워 올린 것이다. 결론:고신의 심장을 겨눈 이만열의 칼을 꺾어야 한다 이만열 교수는 기독교 역사학자라는 학문적 권위를 누리며 정작 고신의 뿌리인 자유민주주의와 성경적 보수 신학의 기틀을 허무는 데 앞장서 왔다. 그의 사상은 성경이 말하는 절대 진리가 아니라 특정 정치 세력의 논리를 대변하는 변증법적 역사론에 불과하다. 손봉호의 윤리가 한국 교회의 손발을 묶었다면 이만열의 사관은 한국 교회의 머리와 심장을 좌경화로 세뇌시켰다. 이제 고신 총회와 깨어있는 성도들은 직시해야 한다. 이만열 식의 자학적 역사관을 단호히 배격하고 하나님께서 이승만 대통령을 통해 허락하신 자유 대한민국과 고신 교회의 정통성을 회복해야 한다. 이 거짓된 사슬을 끊어낼 때 비로소 고신의 순교 정신이 다시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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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부활절 연합예배에서의 이영훈, 소강석의 망언과 이에 대해 침묵하는 자칭 고사모를 강력 규탄한다"
고명길 목사 (고신애국지도자연합 전문위원장) 마태복음 24장,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하신 예수님의 경고가 오늘날 대한민국 강단에서 재현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2026년 4월 5일 부활절, 한국 교회의 심장부라 자부하는 여의도순복음교회 강단에서 우리는 거짓과 술수의 권력자가 등판하는 참담한 광경을 목도했다. 그러나 더 절망적인 것은, 평소 강단의 거룩함을 외치며 동료 목회자에게 돌을 던지던 자칭 고사모(고신을 사랑하는 성도들의 모임) 목사들의 굴욕적인 침묵이다. 1. 손현보 목사의 선지자적 외침: 고사모의 광기 어린 정죄 과거 세계로교회 손현보 목사는 강단에서 “이재명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외쳤다. 이는 특정 개인에 대한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거스르고 차별금지법 등을 통해 교회를 억압하려는 거대 세력에 대한 선지자적 경고였다. 또한 그는 예배 후 교육감 후보를 소개하며 기독교적 가치를 수호할 것을 독려했다. 당시 고사모 목사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그들은 선거법 위반과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워 강대상에서 정치적 발언을 했다고 손 목사를 총공격했다. 심지어 고신 총회 석상에서까지 나서서 손 목사를 비판하며 징계를 요구하고, 일간지에 광고를 내며 그를 신학적 타락자로 몰아세웠다. 그들에게 손현보의 워딩은 반드시 척결해야 할 정치 선동이었다. 2. 이영훈·소강석의 아부의 향연: 부활절 거룩한 성전의 참사 그렇다면 이번 부활절 연합예배 강단에서 벌어진 일은 무엇인가. 이영훈 목사와 소강석 목사는 차별금지법과 교회해체법을 주도하는 이재명을 강단에 세우고 아부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이영훈 목사는 이재명을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가장 무거운 짐을 짊어지시고 한국을 이끌고 계신 분"이라고 찬양적 소개를 했다. 소강석 목사는 “박수 안치는 사람 누구예요. 이따 좀 남으라"고 윽박질렀고, "실개천 출신이지만 결코 그 개천을 잊지 않으시며 국민화합과 실용정치에 올인하는 모습이 한국 교회 보기에도 참 아름답습니다”라는 망언을 쏟아냈다. 수많은 사법적 의혹과 교회 탄압의 중심에 있는 인물을 향해 ‘무거운 짐을 짊어 지셨다’, ‘아름답습니다’ 라는 찬사를 보낸 것은 아부를 넘어선 영적 배교다. 3. 성도를 유린한 살벌한 검문과 신사참배의 데자뷔 강단 아래의 풍경은 더욱 처참했다. 현장 성도의 증언에 따르면, 교회 입구에서 권력자의 안전을 위해 성도의 개인 노트북 비밀번호를 강제로 풀게 하고 개인 다이어리까지 뒤지는 만행이 저질러졌다. 예배의 주인인 하나님보다 권력자의 안위가 우선시된 현장은 중국 공산당 치하의 예배와 다를 바 없었다. 이 모습은 과거 일제 강점기, 강단에 일장기를 걸고 천황을 향해 절하던 신사참배의 현장과 겹쳐진다. 당시 친일 목사들은 민족의 안녕과 평화를 명분으로 내세워 우상에게 무릎 꿇었다. 오늘날 이영훈·소강석 목사가 차별금지법과 교회해체법을 획책하는 권력자에게 강단을 내어준 것은, 형태만 다를 뿐 살아있는 우상에게 제사상을 차려준 현대판 신사참배와 다를 바 없다. 4. 고사모의 선택적 침묵: 당신들의 신학은 파산했다 우리는 묻는다. 손현보 목사의 직언에는 선거법 위반이라며 총회 석상에서까지 칼을 휘두르던 고사모 목사들은 왜 이 명백한 강단 유린 사건 앞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는가. 손현보의 회개 촉구는 징계 대상이고, 이영훈·소강석의 굴종적 아부는 연합인가? 교육감 후보 소개는 강단 오염이고, 거짓의 아비 이재명의 축사는 한국 교회의 영광인가? 이재명의 실체를 경고하는 손현보의 말은 정치라며 정죄하더니, 이재명이 아름답다며 박수를 강요하는 이영훈·소강석의 말에는 침묵하는 고사모. 당신들의 정교분리는 신학적 원칙이 아니라, 자신들의 반성경적 논리를 강요했던 비겁한 고무줄 잣대였음이 만천하에 증명되었다. 당신들이야말로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한상동 목사 등을 비판한 신사참배 가결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5. 고신 정신은 권력 앞의 비겁한 침묵이 아니다 고신 정신은 신사참배라는 거대 권력 앞에 목숨을 걸고 '아니오'를 외쳤던 선배들의 피 위에 서 있다. 교회 파괴자인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느라 성도들을 유린하고 강단을 팔아넘긴 이 못된 현대판 신사참배자들을 향해 입 닫고 침묵하는 것은 고신 정신과 선배들에 대한 명백한 배신이다. 고사모 목사들에게 강력히 요구한다. 손현보 목사에게 퍼부었던 그 서슬 퍼런 비판의 잣대를 이영훈·소강석 목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하라. 즉각 성명서를 내고 그들의 배교적 행태에 대한 회개와 책임을 요구하라. 그리고 그들의 교회 앞에도 가서 정교분리를 어겼다는 당신들의 논리대로 피켓과 현수막을 들고 가서 시위도 하고 기도회도 열라. 거짓의 아비가 부활절 강단에 선 이 엄중한 사태 앞에서 끝까지 '입꾹닫'하고 침묵한다면, 당신들은 더 이상 고신이라는 거룩한 이름을 입에 담을 자격도 없는 철부지 목사들이고 장로들일 뿐이다. 부활절 강단은 권력자의 무대가 결코 아니다. 오직 부활하신 주님만이 영광받을 거룩한 곳이다. 선지자적 외침이 사라지고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강단은 더 이상 교회의 강단이 아니다. 우리는 거룩한 곳에 선 이재명과 그 무리들에 대해 “당신이 그 사람이라”, “저 여우에게 가서 이르라”는 경고의 말씀을 다 같이 강하게 외쳐야 한다. 그것만이 고신이 살고, 한국 교회가 다시 일어서는 길이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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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창원기총 이병권 목사
- ‘욜로(YOLO)’의 시대를 넘어, 부활의 참된 소망으로 요즈음 우리 사회에는 ‘욜로(YOLO)’라는 말이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You Only Live Once’의 앞 글자를 딴 이 말은 “인생은 한 번뿐이니 하고 싶은 대로 즐기며 살자”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 땅의 삶이 전부인 양, 오늘을 마음껏 소비하고 즐기라고 부추깁니다. 하지만 길어진 100세 시대라 할지라도 지나고 보면 인생은 옛 어른들의 말씀처럼 날아가는 화살과 같이 쏜살같이 흘러갑니다. 만약 이렇게 빠르게 지나가는 이 땅의 삶이 우리 인생의 전부라면 그 짧은 여정의 끝에 남는 것은 결국 지독한 허무와 공허 그리고 죽음 앞의 우울함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핵심인 ‘부활’은 이 허무한 인생의 마침표를 영원한 생명의 쉼표로 바꾸어 놓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겨울이 되어 얼어붙었던 가지에 봄이 되면 다시 잎새가 싹트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도 부활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이 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너머에 영원한 삶이 예비되어 있다는 위대한 선언입니다. 부활의 신앙은 단지 죽음 이후의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현재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는 강력한 원동력입니다. 슬픔을 사명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꿉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설립자 릴런드 스탠퍼드는 수재였던 외아들을 갑자기 잃고 극도의 슬픔 속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꿈속에서 “저는 부활하신 예수님 곁에 있으니 저 대신 세상의 청년들을 도와주세요”라는 아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그의 인생관은 완전히 바뀝니다. 아들이 천국에 살아있다는 부활의 소망을 품게 된 그는 당시 2천만 달러라는 거액을 헌납해 오늘날의 명문 스탠퍼드 대학을 세웠습니다. 부활의 믿음이 개인의 절망을 넘어 수많은 젊은이를 살리는 위대한 헌신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어느 호스피스 병동에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젊은 어머니가 어린 딸에게 남긴 편지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가, 엄마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향해 가는 문이란다. 기나긴 겨울을 이기고 봄에 피어나는 저 꽃들처럼 우리도 눈물 없는 그곳에서 반드시 다시 만날 거야." 이처럼 부활의 소망은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는 위대한 사랑과 용기를 현재의 삶 속에 불어넣습니다. 성경은 부활한 우리가 누릴 미래에 대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계 21:4)”라고 약속합니다. 부활은 눈물도 사망도 애통함도 없는 완벽하고 행복한 삶이 열리는 기적입니다. 이 땅의 쾌락만을 좇는 ‘욜로’의 허무함을 넘어 영원을 바라보며 오늘을 가치 있게 살아가는 성숙한 삶으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2026년 부활절을 맞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주는 참된 기쁨과 미래에 대한 찬란한 소망이 상처받고 지친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가득 울려 퍼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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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창원기총 이병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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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합천기연 정순철 목사
- 부활절을 맞이하는 믿음의 독자들에게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오셔서 세번의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ㅡ.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신 후 처음의 사람에게 1.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창1;28 하나님이 아닌 존재인 뱀이 처음의 사람에게 찾아와 그들의 욕구를 채우도록하고 뱀의 사상을 따르게 한 후..세상은 어둡게 변해 버렸던 사실을 알려줍니다. 2.정녕 죽으리라..ㅡ창2;17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찌니라,ㅡ창3;19 이마에 땀을 흘려야 겨우 먹고 살고, 밭은 소출을 내지 않고 행복했던 가정에 행복은 간 곳 없고, 형이 동생을 해하고 장례를 치르고 부부는 갈등을 겪고,, 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한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 세상에, 지금도 전쟁으로 고통을 당하고, 영생의 나라를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 . 3.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ㅡ 요11;25-26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시고,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려주시고 ㅡ무덤에서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고 하십니다.ㅡ요528. 죽음으로 가는 모든 이들에게 소망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ㅡ 요3;16 여기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죄의 댓가를 치르고서야 우리 믿는 자들이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ㅡ그가 찔리고 그가 상하고 그가 징계를 받고, 그가 체찍에 맞음은 우리 허물과 죄와 불안과 걱정과 공포, 병 때문인 것을 성경은 알려주고 있습니다.ㅡ사53;5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라고 하셨고. 사53;6. 예수님을 믿으면 사람들의 저주가 그를 믿음으로 물러가는 복된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갈3;13-14 이 말씀이 부활절을 맞이하는 모든 독자들에게 힘이 되고 복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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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합천기연 정순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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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하동기연 권동진 목사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베드로전서 1:3) 할렐루야!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영원한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온 마음 다해 찬양합니다. 2026년의 봄 만물이 생동하는 이 계절에 경남 지역의 모든 교회와 성도님들, 그리고 사랑하는 이웃들의 삶 위에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죽음의 권세도 이길 수 있다는 강력한 선언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는 것처럼 온 세상 가운데 전쟁으로 인한 공포와 경제적인 어려움들로 인하여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음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빈 무덤의 승리를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소망과 회복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거룩한 백성된 우리는 생명의 부활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어 이번 부활절을 시작으로 경남 지역 구석구석에 산 소망을 전하는 통로로 소외된 이웃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무너진 마음들을 일으켜 세우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사랑하는 경남 지역의 모든 교회와 성도 여러분! 부활의 아침은 어둠이 지나고 반드시 빛이 온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자 확증입니다. 비록 현실의 고난이 여전히 우리 곁에 있을지라도,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심을 신뢰하고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을 갈등이 있는 곳에 화해를 심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갑시다. 다시 한번 우리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며 이 기쁜 소식이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 그리고 우리들이 섬기는 교회 위에 충만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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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하동기연 권동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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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통영기연 곽만섭 목사
- 사랑하는 경남신문 독자들과 경남 성도들께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충만히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부활의 아침에 선 교회와 성도들이 이 놀라운 생명의 복음을 다시 붙들며, 믿음 가운데 새 힘을 얻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 가지로 어려운 시대를 지나고 있는 이때에,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며 다시 일어나는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세상의 상황은 여전히 우리를 흔들지만, 주님께서 살아계신 한 교회는 무너지지 않으며 우리의 믿음 또한 헛되지 않습니다. 부활의 신앙이 우리를 다시 일으키는 능력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모든 교회와 성도님들 위에 부활의 은혜가 충만히 임하여, 각 가정과 삶의 자리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이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특별히 우리의 일상 속에서 부활의 기쁨이 실제가 되어, 지친 마음을 회복시키고 서로를 위로하는 은혜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의 증인으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지역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흘려보내며, 말과 삶으로 복음을 드러내는 통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작은 섬김과 나눔이 모여 이웃에게는 위로가 되고, 사회에는 선한 영향력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어둠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주님의 은혜로 날마다 새 힘을 얻고, 기쁨으로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절을 맞이한 여러분을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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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통영기연 곽만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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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창녕기연 안덕수 목사
- 부활에 아침에 고백할 승리의 고백 매해 맞이하는 부활절인데 올해는 더욱더 그 의미가 깊이 다가온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 의 한말씀, 다이루었다(요19:30)는 말씀이 마음속에서 계속 울린다. 모든것을 하나님께맡기시고, 다 이루심의 완성을 이루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다.그분의 마지막은 승리와 완성의 선언이셨다. “다 이루었다.”이 한마디에는 완전한 지불의 선언이다. 예수는 단순히 죽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값을 하나하나 치르셨다. 낮은 땅에 오심, 모욕과 조롱, 가시 면류관, 십자가의 고통까지 치르시면서 그 모든 과정은 죄의 대가를 대신 지불하는 길이었다. 이때 휘장이 갈라지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장벽이 무너졌다.죄로 인해 닫혀 있던 길이 열렸고, 하나님은 더 이상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다가오시는 분이 되셨다.어쩌면 우리는 이 장면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휘장이 찢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두 팔을 벌리사 안아주신 사건이다. “이제 누구든지 내게로 오라.” 십자가는 단지 고난의 상징에서 용서와 초대의 상징이 된것이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 고백은 죽음을 앞둔 체념이 아니다.사명을 완수한 자의 평안이며, 전적인 신뢰의 표현이다. 우리는 흔히 ‘안식’을 쉼으로 이해한다.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안식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인간은 여섯 날 동안 세상을 바꾸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안식일은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날이라는 것이다.이 통찰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유효하다.우리는 끊임없이 계획하고, 통제하려 하며, 결과를 붙잡으려 한다. 그 과정에서 불안과 두려움이 커진다.그러나 예수의 마지막 고백은 우리에게 다른 길을 보여준다. “맡겨라.” 삶이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괴로움과 눈물의 시간이 찾아올 때, 심지어 과거의 상처와 실패까지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안식을 경험한다. 부활절을 맞이하면 우리는 승리의 선언을 한다. 십자가는 겉으로 보면 패배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는 죄와 죽음을 이긴 승리가 담겨 있다. 예수는 십자가를 통해 말한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따라서 믿음의 삶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삶.붙잡으려 하기보다 의탁하는 삶.그리고 그 고백은 매주 예배 속에서, 또 우리의 일상 속에서 반복되어야 한다. 내 삶을 주께 맡김을 통해 신앙은 완성되어 간다. 참된 안식과 승리를 경험하게 되기실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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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창녕기연 안덕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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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진해기연 정용기 목사
- 사랑하는 진해와 경남 지역 모든 교회와 성도 여러분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과 소망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살아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며 우리의 믿음의 핵심으로서, 절망 가운데 있는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소망입니다. 부활은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현재의 능력이며, 미래를 향한 확실한 약속입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운 것처럼, 고난과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의 부활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결코 사라지지 않는 희망을 선포합니다. 특별히 오늘의 시대는 세계 각국의 이기주의와 전쟁의 소식, 경제적 어려움과 이념의 대립, 빈부와 세대 간의 갈등, 그리고 각자의 삶에 놓인 무거운 짐들로 인해 많은 이들이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두려움 속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활의 평강이 우리의 가정과 교회, 그리고 지역사회 가운데 충만하게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또한 부활 신앙은 단순한 위로를 넘어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합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생명을 받은 우리는 절망의 자리에 희망을, 상처의 자리에 치유를, 분열의 자리에 화해를 이루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진해와 경남 지역의 모든 교회가 한마음으로 부활의 기쁨을 나누며 이 땅 가운데 생명의 복음을 더욱 힘있게 전하는 증인 공동체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26년 부활절 진해기독교연합회 회장 정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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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진해기연 정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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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빈 무덤과 사랑받는 제자(요20:1-8)
- 부활의 아침, 우리는 요한복음 20장에서 한 장면 앞에 서게 된다. 아직 해가 완전히 떠오르지 않은 이른 새벽, 누군가는 울며 달려왔고, 두 제자는 그 소식을 듣고 다시 달려간다. 숨이 차오를 만큼 급하게, 마음이 무너질 듯한 상태로, 그들은 빈 무덤을 향해 달려간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기록한 요한은 끝내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숨기고, 한 가지 이름만 남긴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이 이름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고백이다. 동시에 초대다.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의 품에 기대던 자리(요13:23), 십자가 아래에서 끝까지 떠나지 않던 자리(요19:26-27), 두려움 속에서도 빈 무덤을 향해 달려가던 자리(요 20:2-8), 그리고 부활하신 주를 가장 먼저 알아보던 자리(요 21:7). 그 모든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는 같은 이름으로 서 있다. “사랑받는 제자!” 요한은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그 자리를 비워 둔다. 그리고 우리를 그 자리에 앉힌다. 그래서 이 복음은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서게 된다. 우리가 예수의 품에 기대는 자가 되고, 우리가 십자가 아래에 서 있는 자가 되며, 우리가 눈물로 무덤을 향해 달려가는 자가 된다. 빈 무덤 앞에 도착했을 때, 사랑받는 제자는 베드로보다 먼저였다. 더 빨랐고, 더 간절했다. 그러나 그는 멈춘다. 무덤 안을 들여다보면서도, 들어가지 않는다. 숨을 고르며, 기다린다. 뒤늦게 도착한 베드로가 먼저 들어간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사랑받는 제자가 들어간다. 이 짧은 순간은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을 남긴다. 더 빨리 달려온 자가 먼저 들어가지 않는다. 더 뜨거운 마음을 가진 자가 스스로를 앞세우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열심을 내려놓고, 사도적 질서 앞에 선다. 신앙은 단순히 뜨거움이 아니다. 눈물이 많다고 해서, 더 빨리 달린다고 해서, 더 깊은 믿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종종 열심을 믿음으로 착각한다.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고 앞서 나아가는 것이 신앙의 깊이인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전혀 다른 길을 보여준다. 참된 믿음은 질서 안에 있으며, 사도들의 증언 위에 서 있다. 때로는 멈추는 것이 믿음이고,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다. 그리고 그 기다림 속에서 우리는 묻게 된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무덤은 어디에나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무덤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단 하나의 무덤만이비어 있다. 단 하나의 무덤만이생명을 품고 있다. 만일 우리가 사도들의 증언을 떠나, 교회의 고백을 떠나, 스스로의 열심만을 붙잡고 달려간다면, 우리는 다른 무덤에 도착할 수도 있다. 그곳은 여전히 죽음이 머무는 자리다. 아무리 열심히 달려갔어도, 그 끝이 죽음이라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16:18)라고 말씀하신 것은, 교회가 사도적 고백 위에 세워진 공동체임을 드러낸다. 우리의 신앙은 개인의 열심이나 감정이 아니라, 사도들의 증언과 교회의 고백 위에 세워져야 한다. 영적으로 보면, 베드로보다 먼저 무덤에 들어가는 것은 위험하다. 그것은 믿음의 열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이고 무질서한 신앙일 수 있다. 사도들의 질서를 떠나 스스로 길을 찾는다면, 우리는 잘못된 무덤에 들어갈 위험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배운다. 믿음은 속도가 아니라, 어디에 서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부활의 아침, 우리는 다시 그 질문 앞에 선다.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나는 정말 사도의 고백 위에 서 있는가? 아니면 나의 생각과 열심이 나를 다른 곳으로 이끌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회의 질서를 신뢰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것을 넘어 스스로 길을 만들고 있는가? 교회의 방법보다 나의 방법이 더 맞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혹시 나는 도리어 베드로에게 교회를 가르치려고 하는 자의 자리에 서 있지는 않은가? 믿음이 전혀 없는 것도 위험하지만, 잘못된 믿음 또한 치명적이다. 전자는 어떤 무덤에도 이르지 못하지만, 후자는 잘못된 무덤으로 이끈다. 그러나 복음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기다림 끝에, 사도적 질서 안에서, 베드로의 증언을 따라, 사랑받는 제자는 마침내 무덤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단순히 빈 공간만을 본 것이 아니다. 그는 보았고, 믿었다. 부활은 설명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부활은 믿음으로 열린다. 눈으로 확인하기 이전에,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건이다. 그 믿음이 절망을 생명으로 바꾸고, 눈물을 소망으로 바꾼다. 그래서 이 아침, 우리도 그 자리에 서게 된다. 달려왔고, 멈추었고, 기다렸고, 이제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복음은 우리에게도 같은 고백을 남긴다. 사랑받는 제자가 들어가 보고 믿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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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빈 무덤과 사랑받는 제자(요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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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강도의 소굴 (눅19:45-46)
- 고난주간, 우리는 다시 한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주님의 발걸음을 따라간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던 환호 속에서, 마태복음 21장에 기록된 그 장면은 왕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 환호의 열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그분이 마주하신 것은 찬양이 아니라 뒤틀린 예배의 모습이었다. 주님은 성전을 보시고 이렇게 선언하신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이 말씀은 단순히 성전 앞에서 장사하던 행위를 향한 도덕적 비판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이 사건을 “교회에서 장사하면 안 된다”는 교훈이나 탐심에 대한 경고로 축소시킨다. 그러나 질문은 더 깊어야 한다. 왜 그들은 성전 앞에서 장사를 했는가? 그곳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였기 때문에 장사가 잘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들은 제사를 드리기 위해 필요한 짐승과 물품을 제공함으로써 예배를 “더 쉽게”, “더 편리하게” 만들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들의 행위는 예배를 방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돕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것을 “강도의 소굴”이라 부르셨다. 왜일까? 그 이유는 예배의 본질이 인간의 편리함에 의해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점점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이동할 때, 그 예배는 더 이상 거룩한 예배가 아니다. 편리함은 어느 순간 거룩함을 대체한다. 효율은 경외를 밀어낸다. 그렇게 성전은 기도의 집에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공간으로 변질된다. 이 장면 앞에서 우리는 오늘의 교회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교회는 얼마나 “편리한 예배”를 추구하고 있는가? 예배 시간은 성도들의 일정에 맞춰지고, 예배 순서는 사람들의 취향에 따라 조정되며, 설교는 듣기 좋은 메시지로 다듬어진다. 교회의 공간과 구조 역시 성경적 상징과 신학적 의미보다는 실용성과 효율성에 의해 결정된다. 초대교회로부터 이어져 온 예배에 대한 경외와 철학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호렙산에서 모세를 부르실 때,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셨다. 대제사장조차 1년에 단 한 번만 들어갈 수 있었던 지성소의 거룩함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예배 가운데 그 거룩함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과연 영적인 신을 벗고 하나님 앞에 서고 있는가? 어쩌면 우리는 이미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놓았는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단지 상인들의 행위를 지적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방식 자체를 뒤엎으셨다. 만약 오늘 주님께서 우리의 교회를 방문하신다면 어떨까? 우리의 예배와 신앙생활을 보시고 책망하시며 우리의 삶의 방식을 뒤엎으신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자리에 남아 있을까? 아니면 많은 이들이 떠나가게 될까? 불과 며칠 전까지 “호산나”를 외치던 무리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다. 이 극적인 변화는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자처럼 살아가지 못한다. 오히려 백 데나리온을 붙들고 놓지 못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우리는 은혜를 받았지만 여전히 자기중심적이다. 모든 것이 우리 마음에 맞아야 한다. 예배조차 우리가 편해야 하며,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쉽게 외면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인가? 바로 우리가 그 “강도”이다. 그러나 고난주간의 메시지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또 다른 장면을 본다.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강도들이 달려 있었다. 그들은 분명 죄인이었고, 심판받아 마땅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중 한 강도는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고백한다.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그때 주님은 그에게 말씀하신다.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것이 은혜다. 우리가 아무리 강도와 같은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우리가 만든 예배가 아무리 왜곡되었다 할지라도, 십자가 앞에서 주님을 향해 돌아서는 자에게는 여전히 길이 열려 있다. 강도의 소굴 속에서도 은혜의 통로는 막히지 않는다. 고난주간, 우리는 묻는다. 나는 지금 호산나를 외치고 있는가, 아니면 십자가를 외치고 있는가? 나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아니면 소비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가, 아니면 나 자신을 중심에 두고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의 끝에서, 우리는 다시 십자가를 바라본다. 그곳에서 강도였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는 은혜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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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강도의 소굴 (눅19:4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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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나귀 새끼를 타고 십자가를 향해 (요21:6-9)
- 1. 종려나무 가지를 든 손, 일주일 뒤에는 무엇을 들었는가? 종려주일은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을 여는 문이다. 환호로 시작되지만, 곧 침묵과 배신, 그리고 십자가로 이어지는 주간이다. 교회는 이날을 맞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지만, 동시에 마음 한편이 무거워진다. 왜냐하면 이 환호가 오래가지 않았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던 날,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외쳤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그러나 불과 며칠 뒤, 같은 성 안에서 다른 외침이 울려 퍼진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무엇이 이토록 급격한 변화를 만들었을까. 2. 환호의 이유는 믿음이었을까, 표적이었을까?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설명하면서 한 사건을 반복해서 언급한다. 바로 나사로의 부활이다.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이미 썩고 있던 나사로를 예수님께서 살리셨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졌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 표적 때문에 많은 이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이전까지 예수님은 유대 땅에서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일이 두 번이나 있었고, 제자들조차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런데 나사로 사건 이후, 돌을 들던 손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게 된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한 이유가 그분이 누구신지에 대한 깊은 고백이었는지, 아니면 죽음까지도 뒤집는 능력에 대한 기대였는지다. 3. 사람들은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각자의 메시아를 기다렸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한 것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자기들이 상상한 메시아가 아닌 예수님을 거부했다. 그들이 기다리던 왕은 분명했다. 로마를 무너뜨릴 힘 있는 지도자, 억눌린 현실을 단숨에 바꿔 줄 정치적 구원자, 전쟁의 말을 타고 입성하는 승리의 왕. 그러나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오셨다.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처럼, 그 왕은 병거를 끊고 전쟁의 활을 꺾으며 평화를 선포하는 분이었다. 사냥꾼처럼 정복하러 오신 왕이 아니라, 사냥을 끝내기 위해 오신 왕이었다. 예수님은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길을 거부하셨다. 오히려 심판의 활을 자신에게로 돌리시며,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셨다. 4. 참된 왕은 사냥하지 않고, 사냥당하신다. 성경은 니므롯을 “용감한 사냥꾼”이라 부른다. 그는 힘으로 나라를 세웠고, 빼앗고 정복하며 다스렸다. 이것이 인간이 반복해서 꿈꿔 온 왕의 모습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반대의 길을 가신다. 그분은 빼앗지 않고 내어주셨고, 죽이지 않고 대신 죽으셨으며, 군중 위에 서지 않고 군중에 의해 버림받으셨다. 종려주일의 왕은 결국 가시관을 쓰신 왕이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십자가가 있었다. 5. 종려주일은 질문이다. 종려주일은 단순한 기념일이 아니다. 이 날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어떤 예수님을 원하고 있는가? 내가 원하는 왕이 예수님인가, 아니면 예수님이 진정 내 왕인가? 우리는 예배의 자리에서는 쉽게 “호산나”를 외친다. 그러나 삶의 자리에서도 그 고백이 유지되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주일에는 예수를 왕으로 모시지만, 월요일이 되면 다시 내가 왕이 되어 살고 있지는 않은가. 문제는 우리가 예수를 몰라서가 아니다. 예루살렘의 사람들처럼, 우리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너무나 잘 안다. 문제는 그분이 우리의 기대와 다른 방식으로 왕이 되실 때 드러난다. 6. 고난주간의 문 앞에서 종려주일은 고난주간의 문턱이다. 이제 교회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침묵과 기다림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끝에서 부활을 맞이한다. 그러나 부활은 십자가를 통과한 이들에게만 의미가 있다. 나귀를 타신 왕을 끝까지 따라간 이들에게만, 사냥당하신 어린 양을 왕으로 고백한 이들에게만. 종려주일, 우리는 다시 종려나무 가지를 든다. 그러나 그 손이 고난주간의 침묵 속에서도 주님을 놓지 않기를, 환호가 사라지고 십자가만 남는 자리에서도 여전히 순종이 남아 있기를 조용히 우리 자신에게 묻게 된다. 그리고 부활절 아침,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단지 무덤이 비어 있다는 소식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따랐는지에 대한 대답일 것이다. 나귀를 타신 왕을 끝까지 왕으로 고백한 자만이 부활의 기쁨 앞에 설 수 있기 때문이다. 나귀 새끼를 타고 시작해 십자가를 지나 부활에 이르는 이 거룩한 여정 속에서, 우리는 다시 선택의 자리에 선다. 예수님을 이용하는 신앙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 순종하는 제자의 삶으로 나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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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나귀 새끼를 타고 십자가를 향해 (요2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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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기 다 림
- 얼마 전에 Wate라는 주제의 영화를 봤는데 인간적으로 넘 감동적이었다. 주인공인 두 남녀의 아련한 첫사랑의 추억을 잊지 못하여 고뇌하는데 특히 남자의 기다림은 여성의 그것보다 훨씬 강력하여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아 영화 속에 푹 빠질 수밖에 없었다. 보통 여자가 높은 감성지수로 남자를 기다리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에서는 정반대였다. 남자가 사랑했던 여인이 자기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려 마침내 여인이 자기가 누리던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첫사랑의 남자에게 돌아오는 결말을 내리게 되는 것을 보고 가슴이 뜨겁고 뭉클함을 느꼈다. 보통 하나님을 믿는 남녀도 서로 닮은 부분이 없음에도 어떤 한 부분에 마음이 끌려 콩깍지가 씌어 지는 바람에 결혼을 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남자는 기다림에 능숙하지 못하여 상대방인 부인을 이해하고 기다리지 못하여 답답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면이 강하다. 성경에도 야곱은 자기 이익을 위해 급하고 약삭빠르게 행동했지만 타국생활에서 자기의 온 시선을 주님에 모아 기도했기 때문에 능력을 받고 큰 축복을 받은 것이다. 반대로 기드온은 용사 중의 용사이지만 천사가 나타나 축복의 약속을 했음에도 믿지 못하여 양털 솜을 땅에 내어놓고 이슬이 밤사이에 다른 땅은 그대로 두고 양털에만 내리게 해 달라고 요구하는 모습에서 큰 교훈을 얻는다. 해마다 성도가 지키는 대강절(대림절)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기간으로 희망과 설렘으로 기다림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게 된다. 주님을 기다리는 삶은 일반인들이 생각하지도 못하는 경건함을 선물을 받게 되는 것이다. 주님을 기다리는 삶이 당장에 부유함과 건강함으로 채워 주지 못한다 할지라도 득죄 하지 않고 믿음으로 경건하게 차근차근 준비하면 복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작금에 교회만 참석하는 교인이나 일반적인 사람들은 성도의 자유를 도덕적 자유에서의 해방으로 오해하여 자기만족이나 세상 즐거움이 축복이라 착각하여 그것이 정당한 것으로 여기고 자기가 스스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을 목격할 때가 있다. 오직 성도는 주님을 믿고 기다리는 것만이 경건과 축복에 이른다는 사실을 절대 잊으면 안 된다. 누구든지 일상생활에서 참지 못하여 조급함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는 데 엄밀히 따지면 이것은 죄임을 알아야 한다. 세상살이 어렵고 힘들어도 천국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우리는 그분이 언젠가는 오신다는 확실한 믿음 때문에 우린 힘을 얻고 에너지가 넘치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분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아도 지상에서 늘 동행하면서 차원이 다른 능력을 선물을 받고 살아간다. 참고 기다리면 치유의 은총을 선물로 받고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살아간다는 엄연한 사실을 잘 알면서도 왜 외면하고 세상 쪽에 마음을 빼앗겨 살아가는지 정말 안타깝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 주로 모시고 그분이 오실 것이라 확신하고 늘 기다리며 살고 있다. 세상에서의 기다림은 첫사랑을 기다리고 부인은 남편을, 남편은 부인을,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늘 기다림의 연속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 성도는 차원이 다른 믿음과 능력을 주시는 그분을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고 축복인지 깨닫고 살자. 2026.03.20. 경남기독신문 초장 컬럼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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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기 다 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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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집착의 허상 (출16:1-3)
- 미국에서 출간이 되어서 화제를 불러일으킨 <대통령을 기소하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미국의 현직 검사가 <조지 W. 부시>대통령을 법적으로 단죄해야 한다고 작심을 하고 쓴 책입니다. 그 책에서 그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일급 살인죄로 법정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이라크 전쟁을 일으켜서 4,000명이 넘는 미군 병사들과 수많은 이라크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조지 W.부시> 대통령에 대해서 또 한 가지 옳지 못한 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를 가리켜서 “휴가집착증”환자라고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조지 W.부시> 대통령은 재임기간 7년 동안 908일을 휴가로 보냈습니다. 즉 재임기간의 약 36%를 <캠프데이비드> 별장이나 <크로포트> 목장에서 휴가를 보냈는데 3일에 하루 꼴로 쉰 셈입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그렇게 수많은 날들을 휴양지에서 휴가를 지낸 것은 무책임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고, 지도자로서 실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서 “휴가집착증”환자라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격무에 시달린 나머지 휴가를 가지는 것은 필요한 일이고 유익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3일에 하루 꼴로 쉬었다는 것은 도에 지나친 것입니다. 도에 지나친 것은 좋지 않은 일입니다. - 비단 휴가뿐만 아니라 무슨 일이든지 정도에 지나쳐서 집착을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어떤 일에 집착을 하면 오직 그 한 가지 그 일만을 생각을 하기 때문에 생각의 폭이 좁아지고 분별력이 없어집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집착을 하면 안 되는지, 그리고 집착을 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지요? 첫째로, 과거에 집착하면 미래로 나아가지 못합니다.(출16:1-3) 둘째로, 재물에 집착하면 근심에 빠지게 됩니다.(마19:21-22) 셋째로, 쾌락에 집착하면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딤후3:4-5) 어지럽고 혼란한 이 시대에 성경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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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집착의 허상 (출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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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불교에서 유래된 용어들: 천사는 불교적 용어인가?
- 1. 서언(序言) “어느 목사가 ‘대자대비하신 하나님’이란 말을 T.V에서 하는 것을 듣고 눈물이 날 정도로 웃었다.” 이 말은 ‘생활 속 불교 용어’란 책을 집필한 불교 칼럼리스트인 방경일의 말이다. 그에 의하면 수많은 불교 용어가 한문을 통하여 우리말에 정착되었고, 이는 기독교 상용 용어에도 많이 포함되었으며, 심지어 불교 용어가 기독교에 빼앗길 정도로 확산되어 있다고 오히려 우려를 표하였다. 하지만 역으로 필자는 이러한 불교 용어가 기독교 용어로 정착되어도 되는가라는 측면에서 ‘대자대비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에 대해 ‘눈물이 날 정도로 울고 싶다.’는 심정이다. 이에 불교에서 유래된 용어에 대해 계속 기고하면서, 본 호에서는 앞의 불교 용어 전문가가 말한 기독교화된 용어 중에서 불교와 우리 기독교에서 동일하게 사용하는 ‘천사’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2. 천사란 말은 어디에서 왔는가? 1) 사전적 의미 : 천사(天使)는 하늘 천(天)과 부릴 사(使)로서 (1) 천자(天子)의 사자(使者), (2) 기독교에서 천국에서 인간계에 파견되어 신과 인간의 중간에서 중개를 맡고,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며 인간의 기원을 신에게 전하는 사자(使者), (3) 마음씨 곱고 선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되어 있다. 이상의 사전적 뜻을 보면 기독교계에 더 가까운 용어로 정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 불교 용어라는 주장 : 불교 사전에 의하면 천사는 산스크리트어(梵語)로 ‘데바’이며, 염마왕(閻魔王)의 사자(使者)로서 천연과 자연의 업도(業道)로 발생하여 세상을 경책하기 때문에 천사라고 했다. 구체적으로는 3천사(노, 병, 사)와 5천사(생, 노, 병, 사, 감옥)로 구분되며, 염라대왕의 사자로 생로병사와 감옥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 동시에 하늘의 사자로서 신의 뜻을 전한다. 그래서 죽음을 다루는 천사를 저승사자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불교의 용어가 한자 문화권 속에서 정착하게 된 것은 A.D. 397년 중국에서 번역된 ‘증일아함경’에서 ‘천사경’이란 표현으로 등장했다가, 그다음 해인 A.D. 398~399년경 한문으로 번역된 ‘출요경’에 처음으로 사용됨으로써 한자 문화권에서 정착되기 시작했다. 이상과 같은 배경을 가진 불교 용어인 천사가 어떻게 기독교 용어가 되었을까? 여기에 대해 앞에서 소개한 방경일은 이렇게 주장했다. “그 이유는 기독교에서는 천사가 그들의 신이 주관하는 세계인 천국에 영혼을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가장 필요로 여기는 존재로 여기지만, 불교에서는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의 영향으로 생명체가 사후 하늘나라에 태어나도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아미타불이 세운 극락정토에 태어날 것을 권한다. 이런 이유로 야마천의 심부름꾼인 천사의 존재가 크게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면서 활용하지 않았다. 반면, 기독교는 필요에 따라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기독교 용어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3) 기독교의 천사는 무엇인가? :기독교의 천사(Angelology)는 신학적 교리로 논해야 할 방대한 부분이기 때문에 본 호에서는 구체적으로 논하기는 지면의 분량상 어렵다. 단지 원어의 사전적 의미와 총론적으로 간략하게 논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천사의 단어적 정의는 히브리어로 ‘말라크’(מַלְאָךְ/Malakh)이며, 헬라어로는 ‘엥겔로스’(ἄγγελος), 영어로는 Angel이다. 뜻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메신저이자 돕는 자’로서 육체가 아닌 영적인 존재로 창조된 피조물이다. 그다음 주된 역할과 임무는 하나님의 메신저로서 인간을 보호하고 인도하며, 하나님의 군사와 예배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외에도 천사의 존재와 역할은 많은 성경적 근거와 교리로 말할 수 있으나 생략하고, 본 호에서는 ‘천사가 과연 불교적인 용어에서 온 것인가?’에 대해서만 기술하고자 한다. 3. 결론 및 제언 앞서 언급한 대로 천사의 존재에 대해서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적인 존재로서 성경과 유대 전승과 교회사 속에서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유래된 존재도 아닐 뿐 아니라 그 역할도 다르다. 단지 앞서 본 바와 같이 산스크리트어(梵語)의 ‘데바’가 한자어로 번역되면서 ‘천사’라고 했을 뿐이다. 또한 천사에 대한 불교의 존재 의미와 우리 기독교의 천사는 서로 다른 성격이지만, 번역 과정에서 같은 단어로 사용되었을 뿐이며, 불교에서 먼저 번역하여 사용했다고 해서 불교적 용어라고 하는 것은 편협한 주장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불교와 기독교 모두 같은 한자 문화권에서 용어를 사용하다 보니 각각 다른 의미임에도 함께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천사는 불교적 용어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각각 다른 의미이지만 한자 문화권 안에서는 같은 말로 얼마든지 함께 사용할 수 있으며, 근본 의미로는 천사는 우리 기독교 용어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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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불교에서 유래된 용어들: 천사는 불교적 용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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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사랑으로 행하라
- 하루는 예수님 일행이 회당 안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 안에서 한쪽 손 마른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 이 때 예수님을 향하여 악심을 품고 있는 한 사람이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라고 물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12:11-12)에서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고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병자를 향하여 손을 내 밀라 하시고 마른 손을 회복시켜 주셨다. 흔히 동양의 문명을 자율문명, 서양의 문명을 타율문명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곧 한국의 전통문화와 선비정신에서 가장 핵심은 존재와 당위였다. 타율문명의 무기인 법률이 발달하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법률 이전에 가치형성이 되어 있었기에 필요가 없었다. 한데 서양문명의 침투는 곧 한국인의 전통적 가치인 자율의 역량을 둔화시키거나 약화시켰다. 이 같은 서구적 실리주의와 합리주의에 젖은 현대인에게 우리의 전통적 선비요소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조선 태종이 집권할 때 김덕생(金德生)이라는 명사수가 있었다. 그가 명사수였기로 태종은 궁 가까이 두어 경호의 임무를 부여하였다. 어느 날 태종이 숲이 우거진 후원에 쉬고 있는데 호랑이 한 마리가 임금 가까이로 기어들고 있는 것을 김덕생이 발견하였다. 한말까지도 경복궁 뒷길엔 금호방(禁虎榜)이 붙어 있었고, 실록에도 호랑이의 궁궐침입 기사가 잦은 것으로 보아 이 후원의 호랑이 침입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김덕생은 활을 뽑아 호랑이를 명중시킴으로써 태종이 당할 호환(虎患)을 미리 막아냈던 것이다. 임금의 생명을 구한 김덕생은 다시 한 번 공신일 수가 있었다. 한데 그는 이 공로 때문에 죽음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상한 이치에 얽매이게 된다. 이 김덕생의 시호사건은 그렇게 일대 의리논쟁을 불러 일으킨다. 곧 임금을 향해 화살을 쏜다는 것은 목적여부에 떠나서 큰 잘못이며, 이 잘못은 선례에 따라 대적죄에 해당된다는 주장인 것이다. 임금을 향하여 화살을 겨냥했다는 것은 진리에의 배반인 것이다. 결국 김덕생은 대역죄로 사형을 당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선조 때에도 있었다. 군비강화의 필요성을 간파해서 훈련도감을 신설하고, 신무기인 조총과 홍이포 등을 수입해온 영의정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이 신무기의 위력을 임금일 비롯, 대신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어전방포를 하였다. 한데 이 어전방포를 두고 다시 의리논쟁이 붙었다. 임금 앞에서 살상의 흉물인 화약을 터뜨리는 것이 비리이며, 무관이 아닌 영의정이 발포했다는 것은 나라의 체면을 손상시켰다는 상소문이 날아왔던 것이다. 이 상소문의 주도한 인물이 영남선비인 박동현(朴東賢, 1544-1594)이었다. 이에 유성룡은 이 상소문이 정당하다고 판단하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정승에서 사임한 이후에 낙향함으로써 일단락이 지어졌다. 성경 안에는 수많은 율법조항과 복잡한 안식일 규례가 있다. 그 모든 것을 하나하나 다 지킬 수 없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하나의 상위법이 있다. 바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정신이다. (마태복음22:37-39)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묵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라고 말씀한다. 그리고는 위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서 요약을 하신다. (마태복음22:40)에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라고 말씀한다. 바울 역시 예수님의 계명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한다. (로마서13:10)에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라고 못을 박고 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16:14)에서도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라고 말씀한다. 613개나 되는 성경의 계명을 일일이 다 지킬 수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정신에 어긋하지 않게 산다면 그 사람은 나름 하나님 앞에 충성된 일군임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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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사랑으로 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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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노력하는 신앙’에서 ‘누리는 신앙’으로
- 복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 신앙생활을 오래 한 성도일수록 자주 던지는 질문이 있다. “하나님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질문은 매우 진지해 보이지만, 동시에 신앙을 가장 쉽게 왜곡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해야 할 것들의 목록’으로 이해한다. 더 기도해야 하고, 더 헌신해야 하고, 더 성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복음은 이 질문 자체를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는다. 성경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보다, 무엇이 이미 이루어졌는가를 먼저 보라고 말한다.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의 참뜻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종종 “더 열심히 의롭게 살아라”, “더 죄 없이 살라”는 도덕적 권면으로 오해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의’는 인간의 도덕적 성취가 아니다. 바울은 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장 요지) 성경적 의는 내가 쌓아 올리는 결과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의가 믿는 자에게 전가(轉嫁)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은 더 애써서 의로워지라는 요구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라는 초청이다. 복음은 언제나 인간의 노력보다 하나님의 선물을 먼저 말한다. 십자가는 약함의 상징이 아니라 능력의 출발점이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은 복음의 역설을 분명히 보여준다. 십자가는 세상의 눈으로 보면 패배와 무능, 실패의 상징이다. 그러나 성경은 단호하게 선언한다. 십자가는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사람은 강해져야 능력이 나온다고 믿는다. 준비가 되어야 쓰임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일하신다. 약함에서 능력이 시작되고, 가만히 있는 자리에서 구원이 드러나며, 붙잡고 있던 것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다. 복음은 언제나 인간의 자랑이 설 자리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은혜만 남겨둔다. 그래서 십자가는 미련해 보이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나는 주님과 하나 되었다”는 고백의 실제적 능력 이 복음 시리즈의 결론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나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다.” 이 고백이 교리로 머물 때와, 믿음으로 받아들여질 때의 차이는 매우 크다. 이 고백이 실제가 되면 신앙의 무게 중심이 달라진다. 신앙은 더 이상 부담이 아니라, 관계가 된다. 기도는 하나님께 잘 보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이미 함께 계신 주님과의 대화가 된다. 예배는 의무가 아니라, 임재를 누리는 기쁨이 된다. 순종도 억지가 아니라, 생명이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열매가 된다. 성경은 이런 삶을 “영으로 사는 삶”, “은혜 아래 있는 삶”이라고 부른다. 이는 나태한 신앙이 아니라, 가장 깊이 복음을 이해한 자리에서만 가능한 삶이다. 복음은 결국 ‘누리는 삶’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노력해서 그분께 도달하기를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오셨고,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를 통해 일하고 계신다. 이것이 복음의 결정적인 차별성이다. 그래서 복음의 결론은 의외로 단순하다. 하나님은 이미 앞서 행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 안에 계신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사용하고 계신다. 우리는 그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누리며 살아가면 된다. 신앙이 무거워질수록 우리는 더 노력하려 하지만, 복음은 언제나 우리를 ‘쉼’으로 초대한다. 노력하는 신앙에서 누리는 신앙으로 옮겨갈 때, 비로소 복음은 교회 안의 언어를 넘어 우리의 일상 속에서 기쁨과 능력으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것이 복음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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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노력하는 신앙’에서 ‘누리는 신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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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담대해야 한다
- 인간은 누구나 두려움 속에 살아갑니다. 두려움은 관계의 장애물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경은 두려워하지 말라 강하고 담대하라고 가르쳐 줍니다. 소심하고 겁이 많은 자는 사람을 피하고 해야 할 말을 못합니다. 해야 할 말을 너무 못하면 얻을 것이 없고 피해를 보기도 합니다.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사람들 앞에 담대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비방이나 비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의 죄성은 남을 비난합니다. 남의 말을 듣고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아야 합니다. 인간은 무슨 말을 하고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묵상해야 하고 인간의 말은 묵상하지 않아야 합니다. 두려움은 사탄이 주는 마음입니다. 전화하고 부탁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닙니다.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합니다. 죄를 짓고 약점이 잡히면 두려움이 있습니다. 죄를 멀리하고 약점 잡히지 않아야 합니다. 목회자는 언제나 담대해야 합니다. 담대히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사람을 의식하거나 사람의 눈치를 살피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때는 담대히 무엇인가 부탁하면 해결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거절당할까 하는 두려움을 멀리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오해할 때 담대히 말해야 합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언제나 담대해야 합니다. 담대함이 목회와 관계의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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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담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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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제티슨(Jettison)
- 제티슨(Jettison)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해상운송 중에 짐을 실은 배가 풍랑, 좌초, 화재 등으로 인해서 더 이상 항해를 지속할 수 없는 위기상황에 처했을 때에 짐을 버려 배를 가볍게 만드는 행위를 뜻하는 전문용어입니다. 배만이 아니라 항공기 또한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극약처방으로 승객을 제외한 아무리 값비싼 물건이라도 버리는 게 원칙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짐을 버릴 때는 무가치한 것부터 순차적으로 버린다고 합니다. 그렇게 짐을 버렸기 때문에 가벼워진 배나 비행기는 위기상황을 최대한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제티슨의 장면이 성경에도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 요나서를 보면, 요나가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을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그 배를 맹렬한 풍랑을 만나게 합니다. 그때 배의 사공들은 두려워서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하여 배의 물건들을 바다에 던집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요나 선지자가 풍랑의 원인임을 알고 그를 바다에 던져버립니다. 그 제티슨의 장면이 신약성경 사도행전에도 나옵니다. 바울이 배를 타고 로마로 압송되는 중에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났을 때에 선원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짐을 바다에 버리고, 이마저도 여의치 않자 결국에는 배의 기구까지 버립니다. 오늘날에는 그 제티슨이 사람들에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회사를 운영하는 기업의 대표는 기업이 부실해지거나 위기를 맞으면 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사원들을 해고하는 구조조정을 생각합니다. 인간 제티슨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건비 절감만큼 비용을 확실하고 손쉽게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구조조정을 할 때는 효율이나 가치를 따져서 차례로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다른 곳은 다 제티슨이 되더라도 그 제티슨이 이루어지지 않는 곳이 있는 데, 그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요한복음 6장 39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어느 누구도 짐처럼 버려지지 않습니다. 그 나라에는 구조조정도 없고 효율이나 가치를 따지지도 않습니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이라는 동일한 가치를 지닌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에 온 땅에 어둠이 임하였고,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을 향하여서 마태복음 27장 46절을 보니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입니다.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사랑하는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제티슨 당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서 대속의 제물로 버림받은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제티슨 하지 않고는 억만 죄악으로 인해서 멸망을 향해 가는 인류를 구원할 수 없었기에 그렇게 죄인인 인류를 대신하여서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버리신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대속의 제물로 제티슨 되는 것이었기에 성부 하나님을 향해서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하나님이라고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십자가에 버림받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택하신 우리 모두를 영원히 버림받지 않는 존재, 즉 영생의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로마서 8장 38-39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그 어떤 사건도, 우리를 공격하는 그 어떤 존재들도,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일이나 앞으로 경험하게 될 그 어떤 일도, 하늘 아래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사도 바울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한 번 나를 사랑하시기 시작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결코 제티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이라는 삶의 순간순간마다 경험하는 아픔과 고난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으로 이 세상을 꿋꿋하고 의연하게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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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제티슨(Jettis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