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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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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 오피니언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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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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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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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박동철 장로] 군선교의 대부 “손원일”을 아십니까?
    해군 모든조직에 기독교정신으로 군가 만들고 군목 제도 창설 창원시 진해구 제황산 남녘 진해 바다를 바라보는 기슭에 손원일 선교센터(다락방)라는 조그만 문패와 함께 낡은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지나가는 왠만한 사람도 알지못하는 생소한 손원일 다락방이란 건물이다. 그런데 이 건물이 안고있는 보이지 않는 내용을 알고보면 기독교인으로서는 놀랄수 밖에없는 한국 군선교의 살아있는 발자취를 만날 수 있다. 1945년 8월15일 광복과 함께 대한민국 해군이 창설되고 한국 군선교의 꿈이 이뤄져 오늘까지 이어져온 역사의 산실이기 때문이다. 바로 한국 해군의 창설자이자 군선교의 대부 손원일제독의 복음 사역의 숨결이 있는곳이다. 손원일 제독은 목회자이자 일정때 독립운동가였던 손정도목사의 장남으로서 아버지의 하나님사랑과 나라사랑은 군선교로 이뤄야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있었다. 손원일은 신앙교육과 해외유학 등 학습을 마치고 향후 나라의 미래는 해양에 있다고 판단하고 꿈을 꾸어왔다. 그래서 무역업을 시작했으며 일제말에는 실업인으로 성공한 손원일은 해방과 함께 뜻있는 사람들과 해사대를 조직하고 사재를 들여 대한 해군을 창설한다. 평소 아버지 손목사로부터 배움받은 하나님 사랑과 나라사랑의 깊은 애국정신으로 대한 해군을 창설키로 한 것이다. 당시 미 군정과 협의하여 1945년11월 해방과 함께 급속하게 추진하여 오늘의 해군 전신인 해안경비단을 창설, 단장을 맡게된다. 18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초대 해군참모총장으로 취임한 사람이 손원일 제독이다. 손원일 제독의 해군 활약상은 우리나라 군역사에 길이 남아있어 잘 알수 있다. 그러나 손원일 제독은 대한민국 해군을 창설하고 초대 참모총장이 되기까지 모든 분야분야에 기독교 정신을 담아 군조직을 하고 부인되는 홍은혜 권사와 함께 사재를 털어 군조직이 기독교정신으로 발전하도록하는데 온몸을 헌신했다. 해군조직이 취약할 때 음악을 전공한 홍은혜 권사가 기독교 정신으로 많은 군가를 작곡하여 부르게했다. 손원일 제독이 이같이 기독교바탕에서 해군을 일으키게 된 것은 아버지 독립운동가 손정도 목사로부터 철저한 신앙교육과 훈련에서 알수가 있다. 손정도 목사는 일정시대 유교의 가문에서 과거를 통한 벼슬을 꿈꾸었으나 복음을 받고 급격히 회심과 함께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를 한다. 일정시대 목회를 하는 동안 하나님 사랑은 나라사랑이라는 성경의 교훈에 따라 독립 운동에 참여,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해군의 대부가된 손정도 목사의 맏아들 손원일 제독은 해군 창설과 함께 해군사관학교를 세우고 모든 군 조직에 군목을 두고 군 선교를 제도적으로 국가가 허락하도록 하는데 초석을 낳은 인물이다. 바로 이러한 손원일 제독의 군 선교 정신을 기리고 실천하고자 지난 1974년 10여 명의 해군의 크리스찬 후배들이 기금을 모아 해군의 중심 진해 제황산 기슭에 손원일 다락방을 세우게된다. 그동안 40여년동안 손원일다락방은 먼 바다로 나가는 군함과 잠수함에 승선하는 장병들을 위해 소그룹 크리스찬 리더를 양성하는 선교 센터를 조용히 운영해왔던것이다. 최근 손원일 선교센터가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건물이 낡아 새롭게 재건축해야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구체화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고 있다. 그동안 해군 장교 후배들이 손원일 선교센터를 재단법인으로 만들고 해군 선교의 새로운 장으로 조성하고자 하는 계획이 구체화 하고 착공의 즈음까지 진척되고 있어 하나님께서 참 기뻐하실 일일 것 같다. 필자는 몇 년전 CBMC(한국기독실업인회)를 섬기던 때 재단법인 손원일선교센터 이사장 김덕수 장로(해군 예비역 소장)와 함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당시 경남CBMC연합회가 함께 기도하기로 했는데 그동안 재단법인 김 이사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은 눈물겹게 이 사업을 추진해왔다. 이제 전국 곳곳에서 크고작은 기부금을 보내와 곧 재건축의 첫 삽을 뜨게 된다는 소식이 들린다. 지난 6월 15일 오후 한국군선교회 경남지회장 이상영 목사(명곡교회)를 비롯 지역 교계 지도자들과 해군 관계자들이 모여 기존 건물 철거 예배를 하나님께 올려드렸다. 참 선하고 선한 사역임이 분명하다. 날이 갈수록 하나님의 청년들이 줄어들고 있고 군선교의 길이 막혀가고 있는 때이다. 우리는 이때야말로 우리 지역에서 펼쳐지는 해군 선교의 열정이 다시 살아나도록 군선교의 산실이 되어온 손원일선교센터가 재건축될수 있도록 힘을 합쳐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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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23
  • 바이블큐티[황권철 목사] 기도는 내 인생의 밑천이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 토마스 왓슨이라는 유명한 설교자가 이런 말을 했다. “베드로를 감옥에서 끌어낸 것은 천사의 활동이었으나 천사를 움직인 것은 교회의 간절하고도 지속적인 기도였다.” 앞서간 선진들이 가르쳐 준 또 하나의 지침서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기도의 부담을 주셨다. 신앙의 선배들은 그 부담이 떠날 때까지 기도했다.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으로 갔다. 세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기도하러 가시고 다른 제자들은 산 아래에서 쉬고 있었다. 그때 벙어리 귀신들린 자의 아버지가 찾아와서 아들을 고쳐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귀신을 좇아내지 못했고 그때 마침 주님이 기도를 마치고 내려오셨다. 그가 주님께 와서 말하기를 당신의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했으나 고치지 못했으니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라고 했다. 그때 주님은 그 아버지를 책망하면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시면서 고쳐 주셨다. 사역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갔을 때 제자들이 물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쫒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했다. 기도는 부흥의 열쇠이다. 마가복음 9장의 변화산상과 산하에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하여 기도의 능력에 대해 말씀 드리고자 한다. 목양에 기도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 기도가 능력이요 재산이다. 엿새 후에 또 오른 산 본문 2절에 “엿새 후에” 라고 했다.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누가는 “팔 일쯤 되어”라고 했다. 그러면 엿새 후와 팔일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 사건 앞에 주님은 제자들과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수련회를 가졌다. 누가는 그곳에서 출발한 날짜와 이곳에 도착한 날을 포함시켰고 마가는 제외했다. 주님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의 수련회를 마치고 한 주간이 지나갈 무렵 산으로 올라가셨다. 이 사건에서 주는 영적인 도전이 무엇인가? 첫째, “따로”라는 말이다. 주님은 이 산에 도착하여 제자들 중에 몇을 따로 세웠다. 그들이 베드로, 요한, 야고보이다. 이는 주님이 제자들을 차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큰 충성과 섬김을 위한 구별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더 큰 헌신을 하기 위해 따로 세우는 반열에 참여하도록 힘써야 한다. 안디옥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하기 위해 온 교회가 금식하고 기도할 때 성령께서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우라”고 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평생 존귀하게 쓰임을 받았다. 둘째,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라고 했다. 아홉 제자들을 산 아래 두고 세 제자를 데리고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그들에게는 남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싶었다. 높은 고지를 정복해야 만이 새로운 세계에 눈이 열리게 된다. 셋째,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라고 했다. 그들은 변화된 주님의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은 세상에서 볼 수 없는 광채, 곧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그들은 완전히 황홀경에 사로잡혀 자아와 세속적인 정욕 가치관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그래서 초막 셋을 짓고 그곳에서 살기로 작정했다. 제자들은 천국과 하나님의 영광으로 변화된 주님을 보았다. 넷째,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라고 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그때 주님은 새로운 사명을 주셨다. 왜 그들을 산상에 불러 올렸으며, 천국을 보여 주셨는지를 알게 되었다.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때 사명을 발견하게 된다. 다섯째, “오직 예수”만 보였다고 했다. 우리의 눈에는 주님만 보여야 한다. 신앙의 대상은 모세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닌 오직 예수이다. 예수만이 우리의 영원하신 목자이다. 산에서 내려올 때에 주님은 기도를 마치고 산 아래로 내려왔다. 산상에서는 천국이 임했는데 산 아래에서는 사단의 소굴이었다. 주님은 구원사역의 완성을 위해 산상에서 천국의 예고편을 보여주셨다. 그런데 산 아래에서는 사단의 지배로 악령이 득세하고 있었다. 주님은 산 아래 머물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책망했다. 첫째, 그들은 변론을 좋아하는 자들이다.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왜 서기관들이 그 많은 율법적인 지식을 가지고도 능력을 행치 못했는가? 그들은 기도하지 않고 언제나 변론을 좋아했다. 하나님의 능력은 변론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 나타난다. 아무리 많은 무리가 모여서 변론을 해도 그곳에는 아무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는 변론하기 이전에 무릎을 꿇어 기도해야 한다. 둘째, 참 믿음이 없었다. 주님은 “믿음이 없는 세대여”라고 하면서 책망했다. 이 믿음은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 역사하는 믿음이다. 주님이 한 순간만이라도 떠나 버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유아적 믿음이다. 참 믿음은 시공을 초월해서 역사를 일으키는 능력 있는 믿음이다. 셋째, 귀신들린 아들의 아버지를 책망했다. 그 아버지는 주님께 말하기를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라고 했고, 주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했다. 그때 그 아버지가 즉시로 주님 앞에 엎드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라고 간구 했을 때 주님이 귀신을 꾸짖어 추방하니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라고 했다. 그때 주님이 손을 잡고 일으키시니 온전하게 되었다. 이 때 제자들이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물었을 때 주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기 귀신들린 아들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아버지가 안고 있는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가문과 더 확대해 가면 유대민족과 온 인류의 문제가 그 속에 담겨져 있다.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외아들은 그 아비의 생명줄이요 그 가정과 가문을 이어갈 기업이요 포기할 수 없는 아들이다. 주님이 나인 성으로 들어갈 때 동네에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는 상의를 발견했다.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아들은 어머니의 생명이요 그 가문의 기업을 이어갈 생명줄이었다. 이와같은 개인과 가정의 평생 문제를 사전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믿습니다’ 한다고 치유 될 문제가 아니다. 이는 한번 받은 은혜로 목사가 되겠다고 덤비는 것과 같다. 이런 것은 기도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여기 기도는 단순히 ‘믿습니다’ 하는 일회성으로 해서 될 문제가 아니다. 이는 지속적으로 산상에 오르는 특별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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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
    2021-06-17
  • [김성수 총장] 그리스도의 주되심(Lordship)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자신의 확고한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기쁜 일이 있거나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할 때도 성도들의 입에서는 너무도 쉽게 “주여!”라는 말이 어쩌면 습관처럼 나오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향해 ‘주님’이라고 고백할 때는 아마도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담을 것입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죄 가운데서 구속해 주신 ‘구주’(savior)라는 의미와, 다른 하나는 이제는 그분이 나의 삶을 주관하시는 ‘주인’(lord)이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이와 같은 고백은 모든 신실한 교회와 성도들의 핵심적인 고백이며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의미를 지나치게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지 않는지 진지하게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11절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떤 맥락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빌립보 교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관한 가르침이라는 맥락입니다(빌2:2-4). 빌립보 교인들은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이 사랑은 공허한 감상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모양을 가지는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남의 유익을 생각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유익을 나의 유익으로 삼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삶이란 단순히 어떤 방식으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의 삶을 구체적이며 실천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그분을 향한 진정한 사랑의 마음이 작용하게 되고, 이 사랑의 마음은 곧 종의 봉사라는 구체적인 형체를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종이었던 그분이 이제 승리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종 되심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그를 높이셨습니다. 종이 주인이 되고, 노예가 주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든 무릎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하며,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도록 하여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고백하는 맥락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이 중요한 문제를 지나치게 주관적인 의미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은 그를 우리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to make him Lord in our lives)이라고 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주 분명하게 다른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이것 또는 저것을 행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주인이 되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는 주’(Christ is Lord)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인정하며 고백할 때 우리가 진정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문제에 관한 바울의 가장 분명한 생각을 우리는 그의 또 다른 서신인 에베소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1:20-23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모든 정사와 권세와 권위를 다스리게 하심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모든 것 위에 올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의 삶을 억압하는 그 어떤 구조도 더 이상 필연적인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것에도 속박당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되신다고 우리가 고백할 때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에 바울이 추가하는 것은 인간의 삶을 억압하고 하나님의 목적을 저해하는 모든 능력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교회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 즉,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그리고 그 사랑으로부터 살아가는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라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은 인간의 삶을 노예로 만드는 모든 능력이 파괴되었다는 확신 속에서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삶은 바로 주님의 몸 된 공동체인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의미를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께 주인이 되셔서 통치하시도록 우리의 문화적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의미로만 이해하는 것은 지극히 피상적인 이해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노력과 관계없이 이미 우리 삶의 주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면서도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과 봉사의 삶을 살려고 노력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는 교회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예수는 주’라고 하는 그러한 고백은 피상적인 입술의 고백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이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진정한 의미를 올바로 깨닫고 실천한다면 교회는 진정으로 어두운 세상에 빛을 밝혀주는 샬롬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칼럼의 완본은 gncnews.net 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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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09
  • [하수룡 장로] 처음과 나중
    처음 30여 년 전 1991년 5월 18일은 필자가 장로로 장립을 받은 날로 내 생애 최고의 역사적인 날이다. 이 때 이웃에 살던 예수님을 잘 모르는 형님 부부가 장로로 세움 받는 것이 귀하고 좋은 일인 줄 알고 중동에서 근무할 때 사온 비디오카메라로 나의 기념될만한 모습들을 촬영하셨다. 이 분은 고박사라 불릴 만큼 최고의 기술자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이 잘 사는 하나님을 잘 모르는 선한 이웃이다. 부인은 열심 있는 불도였지만 어릴 때 주일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이 가정을 위해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두 가정의 아이들도 학교 선후배로 잘 지냈고 주요 과목을 과외지도를 하듯이 잘 가르쳐 주곤 했다. 자녀들을 데리고 좋은 곳으로 소풍을 가기도 하고 먼 곳으로 여행하기도 했다. 부부끼리도 여러 밤을 같이 보내면서 여행의 즐거움을 맛보고 친근하게 잘 지내면서 관계를 돈독히 했다. 작은 아들의 진로도 색맹으로 원하던 사범계열을 가지 못하게 되자 차선책으로 법학을 전공하도록 권유하여 현재는 검찰 쪽 공무원으로 잘 근무하고 있다. 자녀의 결혼 때에도 먼 거리를 혼주인 형님 내외와 어른들을 내 차로 모시고 행복한 결혼식을 잘 마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것을 기억한다. 가정에 어려운 일이 있거나 힘든 일은 찾아가 위로해드리고 해결 방법도 제시하여 지금까지 좋은 관계를 잘 유지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 생각한다. 시간이 잠간 흐른 뒤 부인은 과감하게 절을 버리고 주님을 잘 섬기는 집사가 되어 기쁨으로 헌신하는 그 모습이 정말 아름다움 그 자체다. 반면 고 박사님은 좀처럼 예수를 영접하지 않은 상황에 못 된 담배 때문에 폐에 문제가 생기게 되어 온 가족이 걱정꺼리가 된 것이다. 자녀도 결혼하여 이제 손자도 보았고 부인도 건강하여 큰 걱정이 없는데 칠순이 넘어 생각지도 못한 말기 암이라는 인생의 폭풍이 이 가정에 휘몰아친 것이다. 그러나 큰 불행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나을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을 주신 것이다. 담임 목사가 간절히 안수기도하면 아멘으로 화답했고 본인도 끊임없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낫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결국 나중에는 예수님 때문에 천국 간다고 시인하였고 지금은 아버지의 집에서 안식하고 계신다. 처음 꼭 30년 전 이 가정은 나의 장로 장립식 때에는 예수를 잘 몰랐으나 사랑이라는 끈으로 묶여 살아가던 중 예수를 영접하여 많은 변화를 겪고 인생의 굴곡을 맛보게 된다. 이런 가운데 신기한 기적 같은 일이 우리들 앞에서 일어나 도저히 인간의 생각으론 이해하지 못한 일을 경험한 것이다. 개인적으론 30년 동안 장로로 섬길 수 있도록 해 주셨고 그 사이에 이웃 불신 형님 부부가 예수를 믿고 같이 모신 친정어머니도 천국백성이 된 것이다. 나중 30년 후에는 부인되는 집사님이 처음 장로 장립식 때와 똑같이 2021년 4월 25일 나의 은퇴와 원로장로 추대식에 참석하여 축하해 주는 놀라운 기적 같은 현실을 목도했다. 남편은 물론 친정어머니도 예수 믿고 천국 가심을 감사하며 집사로 살아가는 부인은 비록 혼자가 되었으나 자기 가정을 전도한 분의 마지막 직을 처음 장립 때를 회상하며 묘한 감정으로 지켜보면서 형제애로 축하한 사실은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실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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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09
  • [박봉석 목사]낙타의 하루
    사막을 오가는 상인들은 낙타를 운송 수단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낙타는 하루를 시작하고 또 마칠 때마다 주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동이 트고 하루를 시작할 때 낙타가 무릎 꿇고 기다리면 주인은 그 낙타의 등에 그날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을 얹어줍니다. 그리고 주인이 일으켜 세우면 낙타는 비로소 일어섭니다. 그리고 주인이 이끄는 대로 오랜 사막의 여정을 걸어서 목적지에 도착하면 또 다시 무릎을 꿇습니다. 등에 짊어진 짐을 주인이 내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낙타의 하루는 무릎으로 시작해서 무릎으로 마칩니다. 낙타는 압니다. 무릎을 꿇어야 짐이 오르고 내려진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주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주인도 압니다. 자신 앞에 무릎을 꿇은 낙타가 짐을 얼마나 짊어질 수 있는지를 말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자신 앞에 무릎 꿇은 낙타가 짊어질 수 있는 만큼만 짐을 얹어 줍니다. 낙타는 사막을 건널 때 홀로 걷지 않습니다. 늘 주인과 동행하며 걷습니다. 주인이 인도하는 길로만 걸어가면 됩니다. 그렇게 사막에서 주인과 낙타는 늘 하나입니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해서 낙타는 주인이 자신의 등의 짐을 내려주는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 무릎을 꿇습니다. 주인은 자신 앞에 무릎 꿇은 낙타를 수고했다고 어루만지며 그 짐을 내려 줍니다. 그 때의 낙타의 기분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리고 낙타는 안식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주인 되신 하나님 앞에서 바로 이 낙타처럼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루를 시작하며 가장 겸손함으로 기도의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리할 때에 나를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은 나의 하루의 감당할 수 있는 삶과 사명의 짐을 우리의 등에 얹어 줄 것입니다. 사막 같은 인생길이지만 늘 주인 되신 하나님과 동행하니 두렵지 않습니다. 늘 그 분의 인도하심만 따라가면 됩니다. 그리고 하루를 마치고 또 우리는 주인 되신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루의 삶을 함께 해 주신 주인에게 겸손함으로 감사를 드리는 것이지요. 그리할 때에 주인 되신 하나님은 우리를 어루만져 주시고 나의 하루의 삶과 사명의 짐을 벗기시고 편안히 안식하게 할 것입니다.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는가?”라고 네티즌들에게 물었습니다. 답변자의 55%가 “시원한 물을 마신다.”라고 대답했고, 이어서 38%가 “화장실에 간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독자 여러분은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합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하루가 시작되는 가장 첫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들이 아무리 아침에 일찍 일어나도 나보다 먼저 일어나 활동을 시작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사탄 마귀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아침에 일어나서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그 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은 나의 하루의 삶의 주재자와 인도자가 되어 주셔서 나와 동행하시고 나로 하여금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밤에 잠자리에 들 때에도 나의 하루의 삶을 지키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 또 무릎 꿇어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은 나의 모든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하시고 나에게 평안한 안식을 주실 것입니다. 삶에서 승리하는 습관 그것은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또한 한 마리의 낙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무릎 꿇는 만큼 성숙해지고, 기도한 만큼 능력의 사람이 됩니다. 늘 우리의 주인 되신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겸손한 기도의 삶, 항상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동행의 삶, 그리고 늘 마음의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감사의 삶, 그 삶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나의 주인 되신 하나님, 오늘도 하나님의 낙타로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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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09
  • [이상규 교수] 코로나 환경에서의 국가와 교회
    1. 시작하면서 2019년 11월 중국 우한(武汉)에서 발원한 바이러스(COVID19)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단지 질병의 문제이거나 집단감염 혹은 역병에 의한 치사(致死)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영향을 주고 있다. 개인은 물론이지만 국가 경제에 어려움을 더해 주고 있고, 사회적 불안이 조장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함께 어울려 사는 집단 사회구조를 비대면사회로 만들어 가고, 비대면적 구조를 새로운 정상으로 받아드리는 이른바 뉴 노멀 사회를 만들어 가고 있다. 이런 비대면 구조는 종교생활에도 영향을 주고 있어 정기적인 집회나 종교 활동이 제약을 받고 있다. 특히 모이기를 힘썼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모범이나(행2:46), “모이기를 힘쓰라”(히10:25)는 권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모이기를 자제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코로나19가 가져온 보다 심각한 문제는, 방역 혹은 집단 감염을 방지한다는 이유로 개인의 자유가 침해되고 있고 국가의 공권력이 과도하게 행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교회 집회에 대해서도 행정명령이라는 이름으로 집회를 제한하거나 금지하고 있다. 이런 오늘의 현실에서 국가권력 기관이 교회 집회에 대해 간섭하거나 집회를 제한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 되고 있다. 국가, 혹은 국가권력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는 현실이 되었다. 국가는 기원에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시민의 안녕과 복지를 해결해 주는 주체였는가 하면, 과도한 권력 행사를 통한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제한하거나 폭력의 주체이기도 했다. 일제하에서의 조선총독부나 지금의 북한 정권이 이에 해당한다. 이는 국가라는 권위에 의한 폭력이었다. 이런 현실에서, 이 글에서는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에 대하여 고찰하고 국가 권력은 종교활동을 제한하거나 금지할 수 잇는가에 대해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여기서 말하는 ‘역사적’이란 서구 기독교사회에서의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 정교분리 혹은 저항권 사상 등에 대해 교회사적인 고찰을 의미한다. 2. 문제점 제기(Problem stated): 정부기관의 집회 제한 및 대면예배 금지 조치 코로나가 확산되자 대한의사협회는 2020년 1월 26일, 중국으로부터의 감염원 차단 제안을 포함한 대정부 권고안을 발표한 바 있으나 중국인의 입국이 금지되지 않았고, 다른 요인들과 함께 확진자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2월 중순에는 이단집단인 신천지 신도들을 통해 확진자가 크게 증가되자 사회적 거리 두기가 강조되고 각종 집회에 대해서도 자제를 요청하기 시작했다. 특히 기독교회의 집회 자제를 요청하기 시작했다. 이재명 경기도 지사는 2020년 3월 17일, 일부교회에 대하여 주일예배 밀접집회 제한 행정명령을 발동했고, 또 행정명령을 준수하지 않을 경우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제80조 제7호에 따라 3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할 방침이라고 했다. 박원순 서울시장도 비슷한 조치를 취했다. 그러자 대통령은 종교집회에 대해 두 지방자치단체장이 취하고 있는 조치를 적극 지지한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정세균 총리는 3월 21일 대국민담회를 통해 집단감염 위험이 높은 종교시설 체육시설 유흥시설은 보름동안 운영을 중단해 줄 것을 강력히 권고하고, 준수 사항을 지키지 않을 경우 행정 명령을 발동하여 집회를 금지시키겠다고 했다. 총리 담화 후 첫 주일인 3월 22일부터 경찰이 동원되었는데, 전국경찰서장 255명 전원을 출근시켜 경찰관과 지자체 공무원들이 교회를 해당지역 방문하고 권고 준수 여부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이런 조치에 대해 서울과 경기도 일부 교회는 4개 항의 응대 메뉴얼을 만들어 대처했다고 한다. 교회가 방역 지침을 준수하고 바이러스 확산에 대처하려는 정부의 노력에 대해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정부의 이런 조치는 국가권력 기구가 종교 집회에 강제권을 행사하는 것은 정당한 일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여러 밀착 집회 집단 시설 중 유독 기독교교회에 대해서만 선택적으로 강제한 일은 헌법이 보장한 종교자유에 대한 침해라는 지적이 제기되는 시작이 되었다. 코로나 환경이 지속되자 국가기고나의 교회에 대한 제제조치가 보다 심화되었다. 2020년 7월 8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 참석한 정세균 총리는 사찰이나 성당 등과는 달리 기독교회에 대해서만 핵심방역 수칙을 의무화한다고 발표하고, 7월 10일부터 “교회의 정규예배 이외의 각종 모임과 행사, 식사제공이 금지되고 출입명부 관리도 의무화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예배 시에 찬송가와 통성기도를 지양하라고 했다. 이를 위반할 경우 3백만 원 이하의 벌금과 집합금지 조치가 시행될 수 있다고 했다. 교회 밖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식사하고 담소를 나누는 현실에서 교회에서 교인끼리의 식사는 금지하는 것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형평성을 잃은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초치가 기독교회에 대한 탄압이라는 비난이 일자 2주 후인 7월 22일 모인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서 국무총리는 24일부터 교회 방역강화 조치를 해제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지방자치단체별 행정조치가 가능하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경기도 구리시는 7월 13일 시장 명의로 종교시설 관리자 및 이용자가 방역수칙을 위반할 시 신고자에게 포상금을 지급하겠다는 공문을 보낸 일이 있다. 또 14일에는 순천 울산 등 다른 지자체도 포상제도, 신고제도 도입을 발표했다. 그런가 하면 전국초중고 가정통신문에 ‘코로나 예방을 위한 방역 강화 안내’를 하면서 교회만 특칭하여 집단감염집단으로 오인하도록 만들고 잠재적 가해자로 간주했다. 이 당시의 한국의 전체 확진자 1만3천293명(7월 9일자) 가운데 교회 관련 확진자는 310명으로 2.3%에 지나지 않았고, 전체 기독교 인구 970만 명에 비하면 극히 소수에 불과했으나 교회만을 지목해 포상금까지 주겠다는 발상은 교회에 대한 불만과 불신을 야기하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2020년 8월 휴가철 이후 코로나 확진자가 증가하자 그 증가가 교회의 집회와의 관련성에 대한 과학적 검토도 없이 정부는 8월 19일 0시를 기해 서울과 수도권 모든 교회는 비대면 예배만 드리도록 하면서 각종 소모임을 전면 금지했다. 종교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를 제한한 것이다. 이에, ‘정부의 교회 정규예배 이외 행사 금지를 취소해 달라’는 취지의 국민청원을 올렸고, 총 42만 7470명이 서명했으나 청와대는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불가피하게 하는 것”이라며 철회할 수 없다고 했다. 이런 와중에서 8월 23일 주일, 경남 함양군 서상면의 두 교회에서는 주일 예배에서 기도하거나 설교하는 중에 공무원이 찾아와 교회 비대면 예배전환 행정명령서를 전달하고 서명을 요구하는 등 예배를 방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8월 27일에는 청와대에서 16인의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문재인 대통령과의 간담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자리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장인 김태영 목사는 정부가 교회나 사찰, 성당 같은 종교단체를 영업장이나 사업장 취급을 하지 말아줄 것을 요청하고 종교의 자유를 너무 싶게 제한하거나 예배 중단을 명령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9월 1일에는 전 세계 57개국 266개 인권단체들이 “한국 정부가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교회를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며 문 대통령 앞으로 항의 서한을 보냈다. 이들 인권단체들은 성명에서 “최근 수개월 동안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 정부는 코로나19 확산의 원인에 대한 책임을 교회에만 돌리고 있다.”고 항의했다. 그 동안 교회당 크기와 상관없이 20명 미만만 예배당 입장이 허용되어 왔으나, 9월 20일부터 300석 이상 예배실을 보유한 경우 최대 50명까지 현장 예배참석이 가능하도록 완화되었다. 그러나 비대면 예배 해제 조치는 허락하지 않았다. 300명 미만 좌석 보유교회는 대면 예배 허용 인원은 여전히 20명 미만으로 제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은 9월 21일 발표한 논평에서, “정부는 코로나 방역 실패와 재 확산 (책임)을 방역에 협력하는 한국교회에 전가하지 말라”며 “비대면 예배를 강제한 정부의 조치는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교회에 대한 정부의 각종 규제는 코로나 바이러스 출현 1년 6개월이 지난 현제까지 계속되고 있고, 한국교회는 종교행위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현실이 국가권력의 신교행위에 대한 제한이 정당한가에 대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런 질문에 대해 답해보고자 한다. 3. 국가와 교회: 국가기관의 종교 집회 제한은 정당한가? 그렇다면 국가기관이 종교의 자유에 속하는 예배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금지할 수 있는가? 이 점을 교회사를 참고하여 검토하되, 교회와 국가 간의 양자 관계를 통해서, 그리고 정교분리론의 관점에서, 마지막으로 저항권의 관점에서 검토해 보고자 한다. 1) 국가와 교회의 관계 교회와 국가, 혹은 국가와 교회 간의 문제는 오랜 역사를 지닌 난해한 문제였다. 지난 2천년간 세속권(Regnum)과 교황권(Sacerdotium)은 타협과 제휴, 갈등과 대립을 겪으면서 고심했고 결과적으로 네 가지 형태의 교회-국가 간의 관계를 보여주었다. 첫째는 국가와 교회의 통합론(unity)인데, 국가와 교회의 경계가 허물어진 속화된 크리스텐덤(christendom)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형태는 4세기 이후의 국가와 교회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교회가 국가의 상호 결합되어 있어 교회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못했다. 이런 형태를 강력하게 반대한 그룹이 16세기 재세례파였다. 이런 형태는 교회를 속화시키고 참된 교회가 되지 못하게 하는 형태인 동시에 국가도 본래의 신적 기원에서 이탈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둘째는 교회와 국가의 배타적 분리론(total separation)인데, 교회와 국가의 완전한 분리를 주장하는 입장이다. 첫 번째의 경우와 정반대 입장인데, 초기 기독교회 혹은 16세기 재세례파의 입장이었다. 세속정부와 교회는 별개의 기원을 가지며, 세속정부가 영적인 일에, 반대로 교회가 세속적인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국가 정치에 대한 교회의 무관심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국가가 교회 문제에 개입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것은 국가 정치에 대한 교회의 무관심을 의미하며, 정치적 문제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셋째는 교회우선주의 혹은 교회 지상주의(clericalism)인데, 이것은 국가를 교회의 일부로 보고 국가에 대한 교회의 우위를 주장한다. 즉 교회가 국가 위에 군림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서 이를 교황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것이 중세교회의 입장이었고, 로마 가톨릭의 견해였다. 예수께서 첫 교황이라고 간주하는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셨음으로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은 영적인 영역만이 아니라 세속 영역에서도 통치권이 주어졌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교회가 시민사회에서도 권위(civil authority)를 행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넷째는 국가지상주의(erastianism)인데, 교회를 국가의 일부로 보고 국가가 교회를 지배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를 에라스티안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스위스의 철학자 에라스투스(Thomas Erastus, 1524-1583)의 견해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은 세속 황제가 기독교의 수장보다 상위의 권위를 가지므로 종교문제에 대해서도 국가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교황주의(皇帝敎皇主義, caesaropapism)와 같은 입장이다. 앞의 두 상반된 입장은 교회-국가 간의 거듭된 권력욕에 노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적인 제도가 아니라는 점이 인정되어 왔다. 이것은 교회에 대한 국가의 우위를 주장하며, 국가가 교회 문제에 개입하거나 간섭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영국교회(성공회)가 이런 입장을 따랐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의 4가지 유형은 국가와 교회 간의 이상적인 관계로 볼 수 없었음으로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국가와 교회에 대한 바른 관계를 규정하려고 힘썼는데, 그것은 교회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지만 국가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라고 보았다. 그 결과 개혁자들은 각기 자신의 교회-국가관을 피력했는데, 루터나 츠빙글리 그리고 칼빈 간에 작은 차이가 있지만 다 같이 인정하는 바는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교회와 국가는 하나님이 내신 기관이지만 각기 다른 기능과 역할을 감당하는 신적 기관이라는 점이었다. 둘째, 국가도 하나님이 내신 선한 기관이며, 국가 기관의 위정자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대리자로 보아 하나님이 주신 직무를 수행해야 하고, 백성들은 순복해야 한다는 점, 셋째는 국가기관의 사명 혹은 역할을 규정했는데, 국가는 참된 종교와 종교생활을 공적으로 보존하게 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 좀 더 부연하면, 루터는 두 왕국론을 말하면서 두 기관의 기능과 목적을 지나치게 구분하여 오른손 왕국은 오직 그리스도인들만 관련되고, 왼손 왕국은 오직 불신자들에게만 관련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두 왕국의 기능적 차이를 말한 것이다. 루터는 왼쪽 왕국, 곧 국가는 평화를 유지하고 죄를 벌하고 악인을 견제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보았다. 칼빈은 루터와 마찬가지로 ‘두 왕국’(duplex... regimen) 개념에 근거하여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를 이해했는데, 영적인 정부인 교회는 물론이지만 세속적인 정부인 국가도 하나님이 세우셨다고 보았다. 하나님이 세우신 세속적 정부는 두 가지 기능을 지니는데, 첫째는 참된 종교를 보호하고 하나님의 의를 증진 시키는 일이며, 둘째는 백성의 복지를 도모하고 증진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시민정부의 목적은 우리가 사람들 가운데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께 드리는 외적인 예배를 지원하고 보호하며 경건에 대한 건전한 교리와 교회의 위치를 변호하며 우리의 삶을 사람들의 사회에 적응시키며, 우리의 시민적 관습을 시민적 의에 따라서 형성하며, 우리들 서로 간에 화목하게 하며, 공공의 화평과 평안을 육성하는 데 있다” 즉 정부는 하나님에 대한 외적인 예배를 소중히 여기고 보호해 주며 경건한 교리와 교회를 방어하고 ... 평화와 안정을 진작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정부의 기능은 “참된 종교를 공적으로 보존케 하며, 인간성이 유지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인식이 17세기 이후 근대적 의미의 국가-교회 간의 관계, 곧 국가의 교회 지배권을 인정하지 않는 근대 사회개념을 형성하게 되었고,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종교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폭넓게 법제화 되었다. 종교의 자유는 시민이 권리(Bürgerrecht)이기 전에 인간의 권리(Menschenrecht)로 간주되었고, 종교의 자유라고 말할 때 이 말은 두 가지를 포괄하는데, 신앙의 자유(Glaubensfreiheit)와 종교행위의 자유(Religionsausübungsfreiheit)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신앙의 자유’란 구체적으로 어떤 종교를 신봉하거나 그 종교를 변경하거나 모든 종교를 신봉하지 않을 자유를 포함하며, 자신의 신앙을 공적으로 고백하거나 자기의 신앙에 대하여 침묵할 자유를 포함한다. 그리고 ‘종교행위의 자유’란 종교적 행사의 자유, 종교적 집회, 결사의 자유, 종교교육의 자유, 전도 혹은 선교의 자유 등으로 세분화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독일의 법학자 콘라드 헤세(Konrad Hesse, 1919-2005)는 신앙의 자유, 예배의 자유, 종교적 결사의 자유를 종교적 자유의 본질적 요소라고 말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개혁교회 전통과 서구사회의 역사에서 볼 때, 국가권력이 신교(信敎)의 자유나 신앙행위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것은 정당하다 할 수 없다. 교회의 예배나 집회는 교회의 권세에 속한 영역이고, 신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일은 국가의 권세에 속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리는 원칙에 따라 예배 모임에 대한 국가의 명령에 대해서는 복종할 의무가 없다. 그런데 국가의 권세에 속한 국민의 생명, 건강 보호의 의무와 교회의 자율권이 충돌할 경우는 어떻게 할 것이냐의 문제가 대두된다. 이런 경우 교회의 권세가 우선적으로 적용되어 원칙적으로 국가가 규제할 수 없다. 다만 사후적으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매우 제한적인 국가의 개입은 인정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국가와 가정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교육 제도를 수립하고 학교를 세우는 일은 국가의 의무라고 할 수 있지만, 국가는 부모의 자녀양육이나 가정사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가정이라는 영역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동 학대 등과 같은 특별한 사정이 발생한 경우에 한하여 국가가 개입할 수 있다. 개인 가정의 일이나 교회의 일에 대한 국가 권력의 과도한 개입은 사적 자유 혹은 종교자유에 대한 침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예배나 집회에 대해서는 국가는 규제할 수 없으며 교회가 자율적으로 결정할 문제이다. 다만 교회에서 공공의 이익이나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건이 발생한 경우에는 필요한 최소한도의 개입은 인정된다고 할 수 있다. 또 교회는 자신의 관할 영역인 예배 모임의 시행 여부를 국가의 판단에 맡겨서는 안 되며 스스로 합당하게 판단하여 이를 결정하고 실행하여야 한다. 현실적으로 국가권력기관은 현장 예배의 가치에 대한 신학적 판단을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예배 모임의 실행 여부를 결정할 자리에 있지 않다. 국가권력은 교회와 관련된 고유의 가치에 대해 결정할 권세를 위임받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권력이 종교문제에 개입하거나 침해하는 사례가 있어 17세기 이후 근대적 의미의 국가-종교(교회) 관의 관계를 규정했는데, 그것이 정교분리론이었다. 2) 정교분리 유럽인의 이민으로 이루어진 미국이라는 나라는 처음부터 정교분리론을 받아드렸다. 정교분리(政敎分離)라는 말은 미국 헌법이 만들어질 때 ‘국교’를 부인하는데서 시작되었지만 이 개념의 연원은 17세기 잉글랜드의 청교도적 배경에서 시원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종교의 자유문제는 16세기 종교개혁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오늘 우리가 말하는 ‘정교분리’는 사실상 잉글랜드의 에라스티안적인 제도에 대한 반발, 그리고 스코틀랜드에서의 언약도들(Covenanters)의 경험에서 기원하였다고 할 수 있다. 청교도 운동은 엘리자베스(Elizabeth I, 1533-1603) 치하에서 시작된 신앙 운동으로서, 영국 교회(Ecclesia Anglicana, 聖公會를 의미함)에 여전히 남아 있는 로마 가톨릭의 잔재를 제거하고 명실상부한 개혁을 추진했으나 심각한 탄압을 받았다. 교회에 대한 국가 권력의 우위를 인정하는 에라스티안적인 제도 하에서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누리지 못한 것이다. 특히 분리주의적 청교도들은 더욱 그러했다. 종교 혹은 신앙 문제에 대한 국가 권력의 과도한 침해를 경험했던 이들이 새로운 이주지 북미대륙에서 정교분리를 말하게 된 것이다. 17세기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난 ‘언약도’ 운동 또한 잉글랜드의 청교도들과 동일하게 국가권력의 과도한 종교 자유의 침해를 경험했다.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가 1603년 사망하자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James VI)는 제임스 1세라는 이름으로 잉글랜드의 왕이 되는데, 장로교적 배경에서 지낸 그가 잉글랜드의 국교회 제도를 선호하여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를 국교회 제도로 전환하기 위해 장로교회를 탄압하였다. 이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신앙 운동이 언약도들이었다. 제임스 1세(1603-1625)에 이어 그의 아들 찰스 1세(1625-1649),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1660-1685), 찰스 2세의 동생 제임스 2세(1685-1688)로 이어지는 긴 기간 동안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유린당하고, 예배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탄압받았던 경험이 바탕이 되어 새로운 대륙에서의 정교분리를 선언하게 된 것이다. 정교분리론은 역사적 추이에서 볼 때 근본적으로 국가 권력의 종교 혹은 신앙 문제 개입이나 간섭에 대한 거부에서 출발했다. 그래서 유럽인의 이민으로 이루어진 미국에서는 처음부터 정교분리를 중시했고, 새로운 정착지에서 정교분리를 통해 신교(信敎)의 자유를 누리고자 했다. 그 첫 사례가 1647년 5월 포츠머쓰에 모인 4개 처 정착지 대표들이 모여 합의한 헌법이었다. 이것이 로드아일랜드라는 단일 식민지의 기초를 놓게 되는데,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사항을 포함시켰다, 그 첫째가 양심의 자유였고, 둘째가 종교와 정치의 분리(the separation of religion and politics)였다. 침례파가 다수였던 이곳에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동시에 다른 종파에 대해서도 관용해야 한다는 결정이었다. 또 세속 권력의 종교 문제에 대한 간섭을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런 사상은 로저 윌리암스(Roger Williams, 1603-1683)의 영향인데, 그는 교회와 국가는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권위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엄격히 분리되어야 하며, 상호지배나 간섭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국가는 국민이 위임해 준 범위 안에서 지위, 명예, 위엄을 지니며 민간업무를 담당하지만, 종교와 관련된 업무에서는 교회가 국가보다 우위에 있다고 보아 신교의 자유와 국가권력의 교회 간섭을 반대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유럽인의 뉴잉글랜드 이민과 정착으로부터 약 150여 년이 지난 1776년 7월, 13개주의 식민지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이때 독립선언문을 기초했던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은 정교분리를 3가지 측면에서 이해했다. 첫째, 세속 정부는 교회를 탄압할 수 없다. 둘째, 세속 정부는 교회에 세금을 부과할 수 없다. 셋째, 세속 정부의 수장은 교회의 수장이 될 수 없다. 제퍼슨은 신앙의 완전한 자유와 함께 국가교회 형태를 거부한 것이다. 그동안 ‘국가연합’의 형태로 있었으나, 1789년에는 ‘연합헌장’(Articles of Confederation)을 수정한 헌법을 비준하고 연방 정부를 수립했다. 헌법 본문에서 미흡하게 반영된 사항은 수정조항으로 보충되었는데, 1791년 권리장전(Bill of Rights)이 헌법에 추가되었고, 또 10개의 수정 조항이 추가되었다. 그런데 1791년 12월 15일 비준된 미국의 수정헌법 제1조(First Amendment)가 정치와 종교에 대한 사항을 규정했다. “연방 의회는 어떤 종교를 국교로 정하거나 종교의 자유로운 시행을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으며 언론, 출판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국민들이 평화적으로 집회할 권리와 불만의 시정을 정부에 청원할 권리를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 우리가 말하는 ‘정교분리론’은 바로 여기서 출발했는데, 핵심은 두 가지이다. 국교를 정하거나 종교 활동의 자유를 금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단순히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법을 제정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못 박고 있다. 다시 말하면 국가 권력이 종교 문제, 곧 신교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런 법률을 제정하는 것 자체를 금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수정헌법 제1조의 정신이다. 미국에서 말하는 국교 금지는 어떤 특정 신앙이나 교파가 아니라, 여러 종교나 교파가 균등한 신앙의 자유를 향유하게 한다는 것이고, 성도나 교회는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 아니라, 국가 권력이 종교문제에 대해 간섭하거나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말한다. 이런 법률적 장치는 앞에서 지적했지만, 유럽에서 국가권력의 신앙 자유 제한이나 교회 간섭에 대한 경험적 폐해에서 나온 금지 규정이었다. 종교의 자유라고 할 때 여기에는 두 가지가 포함되는데, ‘신앙(信敎)의 자유’와 ‘종교 행위의 자유’가 그것이다. 종교 행위의 자유라고 할 때 그것이 집회의 자유, 예배의 자유, 종교 행사의 자유, 종교 교육의 자유, 소모임의 자유 등을 포함한다. 종교적 입장에서 행하는 모든 행위는 원칙적으로 종교의 자유로 보장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점을 고려해 볼 때 국가권력이 집회를 금지하거나 예배를 제한하거나 제재하는 것은 17세기 이후 근대사회에서 당연한 것으로 수용되어 왔던 정교분리의 원칙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종교의 자유에 대한 침해라고 할 수 있다. 3) 저항권 사상 국가권력이 공권력을 동원하여 성경의 가르침에 명백하게 위반되는 요구나 강요에 대해서는 저항할 수 있다는 이른바 저항권(Right of resistance) 사상은 중세 유럽 사회의 법체계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사실상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을 통해 제시되어 근대적인 개념으로 전개되어 왔다. 이와 관련하여 3가지 성경 본문이 주로 인용되어 왔는데,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22:21)는 정치와 종교의 경계를,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순종하라.”(롬13:1)는 하나님이 세우신 위정자들에게 복종하라는 가르침으로,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5:29)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백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될 경우에는 저항할 수밖에 없다는 가르침으로 이해해 왔다. 루터는 하나님의 왼손 왕국인 세속권에 대한 복종의 의무를 강조했지만 무조건적인 복종을 가르친 것은 아니었다. 세속권은 영생의 법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부가 신앙에 반하는 요구를 할 경우 저항할 수 있다는 점을 말했고, 루터파의 아우구스부르크신앙고백서 16조의 말미에도 “사람에게 복종하기보다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기” 때문에 관헌에 대한 복종은 무조건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저항권 이론은 칼빈에게 와서 보다 선명하게 제시되었는데, 그의 저항권 이론은 『기독교강요』 Ⅳ권 20장 31-32항에 기술되어 있다. 여기서 칼빈은 국가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위탁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권력자가 하나님께 반역할 경우에 한하여 저항하는 것은 정당한 일일 뿐만 아니라 의무라고 지적한다. 위정자에 대한 복종보다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우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저항, 그 자체가 권력화(權力化)되기 때문에, 저항 역시 하나님으로부터의 위탁에 근거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칼빈이 죽은 후 프랑스 개혁파 교회에서는 보다 적극적인 저항권 사상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논리를 주장하는 이들을 ‘모나르코마키’(monarchomachi), 곧 ‘군주와 싸우는 자’라고 불렀는데 모두가 프로테스탄트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대표적인 인물은 칼빈파 인물들이었다. 프랑스 개혁파의 정치적 견해가 당시 이러한 형태로 표출된 것이다. 이것은 칼빈의 저항권 사상이 변화된 정치적 상황 가운데서 새롭게 전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의 저항권 이론을 보다 적극적으로 전개한 이가 칼빈의 후계자였던 베자(Theodor de Beze, 1519-1605)였다. 베자는 『위정자의 신민에 대한 권리와, 시민의 위정자에 대한 의무에 관하여』에서 부당한 국가 권력에 대한 저항은 정당한 것으로 주장했다. 이 책은 바돌로메 날의 대학살(1572)을 경험한 이후 저술된 책인데, 이 책이 가져 올 충격을 고려하여 익명으로 출판한 것이다. 베자는 이 책에서 어디까지 복종하고 어디서 저항할 것인가는 각자 그리스도인의 ‘양심’이란 저울에 달아 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후 프랑스에서 저항권 사상은 현저한 진전을 보이는데, 스코틀랜드인 조지 부케년(J. Bucanan), 칼빈의 문하생인 존 낙스(John Knox), 모나르코마키(Monarchomachi)들과 교섭이 있었던 스코틀랜드인으로 프랑스에서 교사로도 활동했던 존 메이져(John Major 1470-1550)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렇게 볼 때 칼빈은 저항권 사상의 원류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저항권 사상은 스코틀랜드를 거쳐 장로교 전통에서 수용되는데, 그것은 17세기 스코틀랜드의 언약도들(Covenanters)의 경험이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장로교 신앙을 지키려는 이들이 국가 권력으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고 신교(信敎)의 자유를 유린당했을 때 국가권력에 대한 저항의 정당성을 숙고한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상에서 서구 교회에서 오랜 기간 동안 전개되어 온 저항권 이론을 소개했는데, 이는 근대사회에서 널리 수용되었다. 국가권력이 부당하게 종교의 자유, 신교의 자유, 혹은 예배의 자유를 침해할 경우 저항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한 한국교회의 인식이 매우 부족한 것으로 판단된다. 4) 한국에서의 정교분리론 미국연방헌법은 현행 성문법 중 가장 역사가 오랜 문서로, 정교분리 조항 등은 이후 세계적으로 일반화되어 갔다. 18세기 말부터 북미에서부터 유럽 국가들도 정교분리를 법제화하기 시작했고, 20세기에는 상당수 비서구 국가들도 이런 흐름에 동참했다. 우리나라도 1948년 7월 17일 공포된 제헌 헌법에서부터 정교분리가 명문화 되었다. 우리나라 헌법 제20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하여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제2항은 “국교는 인정되지 않으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 된다”라고 하여 국교의 부정과 정교분리를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정교분리론은 기독교 복음과 더불어 한국에 소개되었다. 북미 출신 선교사들은, 기독교를 외세에 의한 침략세력으로 규정하고 선교사들의 활동을 의심하던 조선 정부에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워 선교의 자유를 누리고자 했다. 조선의 정치문제에는 관여하지 않고 오직 복음만 전하겠다는 점에서 정교분리를 제시한 것이다. 복음전파를 위한 전략이라고 좋게 해석할 수 있지만, 이것은 정교분리라는 의미를 국가의 입장에서 받아드려 정부에 순응하겠다고 자처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정교분리의 근본정신은 그 이후에도 곡해되었다. 일제치하에서 조선총독부는 정교분리론을 앞세워 선교사들의 활동을 제한하고자 했다. 정교분리의 근본정신은 국가권력의 교회 간섭을 금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정치참여를 금지한 것으로 호도하여 외국 선교사들이나 조선인들의 정치 관여를 금기시 한 것이다. 효과적인 식민지배를 위해 정교분리론을 이용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1운동과 같은 반일 만세 운동이 일어난 것은 국가 권력의 신교(信敎)의 자유 부정과 교회 탄압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1935년부터 시작된 신사참배 강요는 국가권력의 교회 탄압이자 정교분리 원칙의 심각한 위반이었다. 국가권력이 신앙의 자유를 억압할 뿐 아니라 우상숭배를 강요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점차 저항은 약화되었고 후에는 심각한 훼절에 이르게 되지만, 이 일로 2천여 명이 투옥되고 40여 명은 옥중에서 죽음을 맞기까지 국가권력에 저항했다. 이른바 일제가 말하는 정교분리론에 저항 한 것이며, 신교의 자유에 대한 투쟁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주기철 목사였다. 1939년 8월 일제경찰이 그에게 설교 금지령을 내렸을 때, “나의 설교권은 하나님께 받은 것이니 경찰서에서 하지 말라 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설교를 그만 두지 않으면 체포한다.”고 협박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설교는 내가 할 일이고, 체포는 당신이 할 일이다.” 비록 짧은 응대였으나 국가권력의 한계를 분명하게 선언한 것이다. 국가권력은 신교의 자유, 곧 설교권을 박탈 할 권리가 없다는 점을 제시한 것이다. 국가 권력자들은 정교 분리를 교회의 정치 불관여로 간주하여 정부정책을 비판하지 말라는 의미로 받아드리지만, 미국의 수정헌법 제1조에서 말한 정교분리의 의미는 국가권력의 종교자유 침해 금지를 규정한 것이다. 맺으면서 이상에서 코로나 환경에서의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에 대해 개혁교회 전통과 서구사회 역사에 비추어 살펴보았다. 특히 정부의 방역 지침과 기독교회에 대한 집회 제한 조치에 대한 경과, 그리고 교회의 집회에 대한 국가권력의 행정명령이 정당한가에 대하여, 교회와 국가, 정교분리, 저항권의 문제를 통해 검토해 보았다. 앞에서 지적했지만, 교회는 방역 수칙을 준수하고 국민건강과 역병으로부터의 안전을 위해 협력하고 협조해야 한다. 이런 기독교회의 적극적인 조치에도 불구하고, 국가기관이 사전 협의나 양해 없이 일방적으로 특정한 기간에 대한 언급 없이 전국교회에 대하여 행정명령을 하달하는 것은 코로나환경, 혹은 방역 지침이라는 이름으로 종교의 자유와 신교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교회를 통한 감염이 미미함에도 불구하고 전국 교회에 대하여 획일적인 지침을 강제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할 수 없다. 지난 3월 27일 기준으로 볼 때 국내 감염자 중 교회를 통한 감염은 1.5% 불과하다고 한다. 98.5% 확진자는 교회와 무관한 감염경로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예배에 대해 밀접 집회 제한 행정명령을 발동하는 것은, 한국교회 언론회의 지적처럼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며 교회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고조하려는 의도”로 의심을 살 수 있다. 교회가 정부의 코로나 확산 방지를 위한 지침을 준수하고 협조하는 일은 당연한 의미이지만, 종교 집회의 자유를 제한 할 수 있는 예배금지, 교회당 폐쇄, 구상권 청구 같은 조치는 기독교에 대한 탄압일 수 있다는 점이다. 유독 기독교회의 집회에 대해서만 제한을 강제하는 것은 공정한 처사라고 할 수 없다. 또 특정 교회를 지칭하여 집회 금지를 명령하는 것은 의도적인 정치방역으로 오해될 수 있는 소지가 있다. 정부는 전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교회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한다면 교회 지도자들에게 그 필요성을 고지하고 협조를 요청할 수 있고, 교회는 자율적으로 일정 기간 집회를 제한하거나 축소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기독교계가 국가기관의 행정명령을 통한 대면예배 제한이나 금지 조치에 대해 성명서를 발표하거나 보건복지부장관과 서울시장을 상대로 ‘행정명령 집행정지’ 가처분 소송을 제기한 일은 소극적 저항권의 행사라고 할 수 있으나, 전교회적인 특별한 저항 없이 이를 받아들인 것은 방역 지침에 순응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 종교의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는 안이한 대응이자 교회의 자율권에 대한 포기라고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의 경우, 주 정부가 코로나 방역을 위해 예배를 제한하는 행정명령을 내린 바 있으나, 해당 교회는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예컨대, 2020년 5월 18일 노스캐롤라이나의 로이 쿠퍼(Roy Cooper) 주지사는 야외에서 10명 이상의 모임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교회 집회에 대해서도 예외 없이 이를 적용했다. 이에 대해 윈스턴 살렘의 베리안침례교회와 그린빌의 침례교회는 기독교 단체인 리턴 아메리카와 더불어 미국연방법원에 노스캐롤라이나주를 상대롤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제임스 데버 판사는 “미국 헌법이나 수정헌법 제1항의 종교의 자유권 보장은 전염병에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며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한 공공보건의 이유보다 종교자유 침해를 더 심각하게 여긴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저명한 법률가인 켄 스타(Ken Starr) 박사가 코로나 바이러스 전염병이 수정헌법 제1조에서 보장한 종교의 자유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말하면서 종교자유의 위기(Religious Liberty in Crisis: Exercising your faith in an age of uncertainty)라고 말한 것을 보면 국가권력에 의한 종교자유 침해는 국제적인 문제로 제기되고 있고, 우리의 성찰이 요구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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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07
  • 창원영광교회, 은퇴·임직·취임 감사예배
    예장(고신) 창원영광교회(윤희정 목사)가 지난 5월 30일(주일) 오후 3시, 항존직 은퇴·임직·취임 감사예배를 드렸다. 코로나19로 인한 거리두기와 방역수칙 준수를 위해 은퇴·임직·취임자 가독과 순서 맡은 내빈만 참석한 가운데 드려진 예배는 윤희정 목사의 집례로 시작해 창원시찰회계 김수중 장로(명곡교회)가 대표로 기도하고 안동철 목사(창원교회)가 성경봉독(엡4:11)한 후 황권철 목사(밀알교회)가 ‘영광교회 사명자’라는 제하의 말씀을 전했다. 황권철 목사는 “천사도 흠모할 만한 직분을 성도에게 주신 것은 성도로 하여금 온전케 하시기 위해 직분을 주신 것”이라며 “순종하며 주님을 따라갈 때 좋은 교회로 세우신다”라고 전했다. 설교 후 김철한 목사(창원영광교회 원로)가 축도 함으로 예배를 마치고 은퇴식에 들어갔다. 은퇴식에서는 윤희정 목사(창원영광교회)가 은퇴하는 장로 2명, 집사 2명, 권사 2명을 소개하고 은퇴사 후 축복 기도와 은퇴자 된 것을 선포하고 은퇴패를 증정했다. 이어진 임직식에서는 임직하는 장로 2명, 집사 4명, 권사 6명, 권사 취임하는 1명과 창원영광교회 교우들에게 서약을 받고 안수기도와 권사 임직·취임 기도 후 직분자 된 것을 공포 했다. 4부 축하 순서에서는 송선규 장로(창원영광교회 원로)가 은퇴자 및 임직자들에게 권면의 말을 전하고 미래로 교회 최정대 목사가 교인들에게 권면의 말을 전했다. 또 경남노회 장로회 회장 오재형 장로(명곡교회)가 격려사를 전하고 경남노회 노회장 차광진 목사(본포제일교회)가 축사를 전한 후 은퇴한 권용완 장로와 임직한 오현동 장로가 대표로 답사를 전하고 윤희정 목사가 마침기도 함으로 모든 순서를 마쳤다. 다음은 은퇴·임직·취임자 명단이다. ▲장로은퇴 : 권용완, 이순표 ▲집사은퇴 : 김종근, 장영복 ▲권사은퇴 : 이분선, 문성희 ▲장로장립 : 조명식, 오현동 ▲집사장립 : 이창곤, 신용명, 김정헌, 이강수 ▲권사임직 : 김석순, 강둘임, 송호연, 김명하, 김선량, 오지은 ▲권사취임 : 윤선현
    • 오피니언
    2021-06-01
  • [기고] 고신 총동창회의 순수성이 그대로 유지되길 바라며
    총동창회 총회가 지난 4월26일 있었다. 이미 한 달이 지나갔다. 여러 가지 논란들이 지면상으로 오갔지만, 동창회원들의 각자의 판단에 맡기고 새롭게 출발한 임원들이 총동창회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도록 힘을 실어주어야 할 시점이다. 그런데 그 날 41회 총회가 어떻게 진행 되었는지 정확한 사실과 절차 과정을 직접 보지도 않고 제삼자와 지면으로만 접한 회원이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하고 있음에 진실로 총동창회를 위한 순수한 뜻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인지 그 저의가 의심스럽다.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SNS상으로 퍼 날라 총동창회에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가 있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기에 부득이 엄중한 마음으로 총동창회의 순수성이 그대로 유지되길 바라며 당시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1. 41회 총동창회 총회는 적법한 절차에 따랐다. 총회는 상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회의 규칙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다. 그 적법한 절차에 의해서 진행되었기에 41회 총동창회는 매우 상식적이었다. 만약 총회 회의 진행상 어떤 불법이 있었다면 그 현장에서 불법성을 따져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미 끝난 총회를 장외에서 진행 과정에 대해 시비를 거는 것은 그 자체가 다분히 다른 <정치적인> 의도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갖게 만든다. 총동창회 회칙의 임원 선출 1항에 보면 ‘수석부회장은 당연직으로 추대하여 총회에서 인준을 받는다.’ 고 규정하고 있는 것은 자동으로 회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추대하여 인준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 만약 인준을 받지 못하면 회장이 될 수 없다. 그리고 41총회는 회칙의 심의와 변경 절차를 거쳐서 “임원 선출 (1)회장 1인, 부회장 10명 내외, 총무1인, 부총무 약간 명, 서기1인, 부서기 1인, 회계1인, 부회계 1인으로 한다. (2) 모든 임원은 본회에서 추천을 받아 직접 선출한다.” 로 개정되었고, 그 개정된 회칙에 따라 회장이 선출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 현장에서 전년도 총회를 존중하여 수석부회장을 회장으로 추천했지만 본인이 본회 앞에서 고사한 것이다. 결코 그 당사자를 배제하지 않았다는 점을 밝혀 둔다. 차제에 아주 중요한 원칙을 밝혀 두고자 한다. 적법하게 개정된 신법은 구법에 우선하는 것이 신법 우선원칙이고 질서의 원칙이고 상식이다. 이러한 법리를 무시하는 그 자체가 지극히 비상식이며 이를 문제 삼는 것은 법질서를 범한 것에 준하므로 자숙하기 바란다. 2. 총회에서 회칙심의와 변경은 정상적인 절차인데, 이를 문제 삼는 것이 비정상이며,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지 강한 의구심이 든다. 제41회 총회에서 회칙 제13조 (임원의 선출) 1항 회장 1인, 부회장 10명 내외, 총무1인, 부총무 약간 명, 서기1인, 부서기 1인, 회계1인, 부회계 1인으로 한다고 개정되었기 때문에 “제12조 (임원) 2항은 해당 없으므로 자동으로 삭제되는 것이다. 그 조항이 그대로 있다면 수정 과정의 오류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를 근거로 ‘선거 결과 자체를 무효로 만들 만큼 심각한’ 흠결이 있는 것처럼 적시한 것은 매우 경솔하고 과장된 주장이며, 총동창회 총회의 권위를 훼손할 수 있는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을 주지하기 바란다. 그리고 법이 개정되면 즉시 발효되는 것이 상식이다. 차기 총회부터 발효된다는 것은 결코 일반적인 것이 아니다. 이는 필시 의도하는 바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공천위원의 병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공천위원을 두는 것은 자기들만의 리그로 만들고 싶은 발상이었다고 본다. 그 대표적인 예가 수년간 실무임원으로 큰 과오 없이 헌신적인 봉사한 회원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사람을 세우기 위해 결격 사유가 없는데도 임원에서 제외했다. 이것이 바로 명백한 공천에 평형성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2012년 제32회 총동창회 이전과 제33회 총동창회 이후 임원선출회칙이 완전히 바뀌어졌다. 제32회 이전에는 총회에서 부회장을 직접 선출하고 그 중에 다 득표자가 수석부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런데 제33회부터는 전임회장단이 공천하여 총회의 인준을 받는 형식으로 변경되었다. 짐작컨대 제33회 그 당시에도 총동창회를 섬기고 싶은 마음에서 회원들의 지지를 받으려는 회원도 있었을 텐데, 회칙 수정됨으로 원천적으로 그 기회가 차단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잡음과 문제를 제기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신사적으로 수용했다는 빙거가 아닌가? 그것이 성숙한 모습이 아닌가? 그런데 왜 제41회 총회의 회칙 심의와 변경을 문제 삼는 것인가? 적법한 절차에 따라 개정된 회칙에 따라 진행된 총회의 임원 선출을 존중하고 협력하는 것이 성숙한 회원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를 제기하는 당사자는 순수한 마음이라 하더라도 이를 악용하여 본질을 호도하는 자들이 있음을 주지하시길 바라마지 않는다. 3. 이제 총동창회가 순수한 그 목적대로 그 임무를 감당하도록 협력해야 한다. 총동창회원은 각 노회 회기마다 협동총무들의 수고로 거의 대부분 회비를 납부했지만, 그 동안 총동창회에 대한 무관심으로 참석이 저조하여 임원선출에 어려움이 있어 부득불 종전의 회칙을 따라야 했던 점도 충분히 이해된다. 그리고 그간의 임원들의 노고와 헌신에 대하여 깊이 감사드리고 그 공을 인정한다. 또한 임원 선출과 배분을 부분적으로 노회와 신학교, 기수별로 안배하려고 고뇌 한 점도 높이 사고 충정을 이해해 드리고 싶다. 그렇지만 총동창회 운영상에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을 많은 회원들이 인식하고 있었지만 손댈 수 없는 성역처럼 되어 의견 개진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폐쇄적인 임원 선거 구조를 개방적인 구조로 바꾼 것은 뜻이 있는 회원들이면 누구나 능동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헌신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기 위한 자구책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번 총회에 ‘특정한 노회가 그동안 총회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은 목사들을 동원했다.’고 하면서 마치 참석할 자격이 없는 자가 한 참석 한 것처럼 호도하는 것은 유감이며 분명 선치 못하며, 설사 처음 참석한 회원이 다소 있었다 하더라도 문제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참석을 권장해야 옳지 않는지 되묻고 싶다. 이런 일련의 일을 두고 ‘동창회비 거부 운동’, ‘총회의 파행’, ‘사전모의나 편법’ 등을 운운하면서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다짐을 공적으로 선언하라는 식의 협박성 선동과 자극은 그 자체가 바로 정치꾼들이 던지는 화두가 아닌지 되물어 보고 싶다. 어떤 법이든 완벽한 것은 없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발전되고, 시정된다. 기도하면서 오늘의 부족한 것을 내일에 시정하고 보완하면 될 일이다. 차제에 당부 드리고 싶다. 총동창회가 동창회답게 회원들의 친목 도모와 모교의 발전을 위한 본래의 순수한 목적대로 움직여 가도록 현 임원진들을 응원하고 기도해 주는 것이 총동창회의 순수성을 지키는 길이니 적극 협력하자. 그리고 정확한 팩트도 아닌 것을 제기하여 여론을 호도하는 뻔히 보이는 속보이는 정치 행위를 즉각 중단하기 바란다. 끝으로 좀 더 슬기롭게, 좀 더 지혜롭게 좌우를 살펴서 의견을 개진하지 못하여 마음을 상하게 했다면, 이 점 대하여 회원의 일원으로서 유감을 표하며, 모든 동창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총동창회에 적극 협력을 잘 하는 계기가 되길 소망한다. 김일영 목사(신광교회, 서울남부노회 서기) ※ 기고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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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9
  • 그루터기 칼럼[문보민 목사] 다른 복음을 매력적으로 느끼는 기독교인들에게(2)- 진리는 결코 질리지 않는다.
    수많은 미디어를 통해 설교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 중에 비성경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자들이 수두룩하다. 이단들 말고도 교단에 속한 전통교회 목회자들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는 비성경적 메시지가 기독교인들의 분별력을 흐트러뜨리는 현상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더 염려가 되는 것은 이런 미디어를 보고 기존의 성도들이 은혜를 받는다 말하고 영상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직통계시를 주장하거나 율법주의적 구원관과 회개관, 극단적인 종말론 등을 앞세워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시킨다. 심지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대속이 구원의 완성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 이런 가르침에 격하게 공감하고 거름망 없이 자신들의 신앙에 그대로 흡수하는 교인들의 모습을 본다. 기존의 가르침에는 더 이상의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식상함마저 느끼는 것 같다. 만약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대속의 완성이 아니라면 우리는 대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우리의 행위인가? 그럼 우리는 얼마만큼의 행위로 구원의 완성의 조건을 채워야 한단 말인가? 성경에서 행위를 말하는 것은 구원 받은 백성으로써의 삶의 방향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구원이 행위에서 완성이 되는 것이라면 이것은 은혜가 아니라 대가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을 강조하는 것은 좋으나 이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해석하는 것은 대단히 염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한국교회의 문제점들을 두둔하며 값싼 복음이라고 칭하는 자들도 있다. 그럼 비싼 복음도 있는 것인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절대적인 영원한 대속과 생명의 가치를 감히 누가 비싸다 값싸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인가? 한국교회의 진짜 문제는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왜곡된 복음을 전하는 것에 있다. 구원의 확신만을 강조한다며 한국교회의 문제를 값싼 복음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도리어 확신 없는 신앙이 삶의 방종과 종교적 행위뿐인 종교인을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자들의 가르침에 아멘하며 격하게 공감하는 모습에 안타까움을 감출 수 없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가 깨달아 지는 순간, 나를 위한 절대적 사랑이 나의 가치관에 부딪치는 순간 우리의 삶의 방향은 그 분을 향해 바뀌어져 가는 것이다. 분명히 알아두자. 태초부터 지금까지 진리는 하나이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진리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 십자가의 대속의 완성을 믿는 믿음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 이 진리는 영원불변하다. 이 진리를 통해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셨다. 진리는 변함없고 한결같으나 늘 새롭다. 그래서 진리는 결코 질리지 않는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한 은혜를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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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6
  • 기독교 세계관[김성수 총장] 하나님 나라의 전담 사역자들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정말 놀라운 책입니다. 아무리 명작이라고 해도 세상의 명작이라는 책들은 한번 읽고 나면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별로 들지 않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한국어로 번역된 ‘앵무새 죽이기’(To Kill A Mockingbird)라는 명작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명작입니다. 하지만 다 읽고 난 뒤에는 더 이상 서재에 보관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많은 서적들은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해서 균형 잡힌 올바른 시각을 제공해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말 다른 책입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어떻게 이런 문제까지 이렇게도 세밀하고 심오하며 균형 잡힌 가르침을 제공해 주고 있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6-17)고 선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말 모든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책입니다. 예를 들면, 일에 대한 관점에 있어서도 그러합니다. 신약 시대의 다른 문화권의 관점과 비교해 보면 성경에 나타난 노동관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합니다. 초대교회 당시 헬라 사상은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구분하여 영혼은 귀한 것이고 육체는 천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헬라 문화권에서는 몸으로 일하는 노동자는 무엇인가를 하도록 강요받는 사람, 즉 먹고 사는 데 얽매여 있는 사람으로 경멸당했습니다. 노동자는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일종의 노예 같은 존재였으며, 실제로 거반 노예 취급을 받았습니다. 헬라의 엘리트들에게 가치 있는 유일한 삶은 우주의 이치를 논하며 여가(leisure)를 즐기는 활동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삶은 육체적인 노동에서 벗어나 정치와 철학 혹은 종교를 추구하는 삶이었습니다. 진정한 자유인은 일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헬라의 엘리트주의적 관점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사도 바울은 참된 자유는 일에서 해방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다고 믿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철학이나 종교적 활동을 육체적인 일보다 ‘더 고상한 것’으로 보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에 대한 섬김으로서 신실하게 행하기만 한다면 인간 삶의 모든 측면은 다 똑같이 경건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3:10)는 바울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재림에 강박적으로 심취해서 일하기를 거절했던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한 말씀이었습니다. 이 당시 데살로니가 교인들 중에는 자신들이 너무나도 영적이어서 육체로 하는 시시하고 일시적이며 세상적인 일에는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은 사실 날카롭게 비꼬는 것입니다. 바울은 가르치기를 그들이 너무나도 영적이어서 일할 필요조차 없다고 한다면, 먹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영적이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신랄하게 비꼬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일의 일 가운데서 그들의 손과 몸과 정신과 마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나 존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가들이 가르치고 전수하려고 했던 사상의 주요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이와 같은 성경적인 노동관을 재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종교개혁가들은 교회적 활동에만 몰두해 있거나 소위 ‘영적’ 영역에만 국한되는 삶을 훌륭한 기독교적 삶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중세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은 종종 다른 모든 종류의 삶보다 명상적인 삶을 더 높이 추켜올렸기 때문에, 수사들과 수녀들과 사제들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우월한 일급 그리스도인이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열등한 이급 그리스도인으로 여겨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종교개혁가들은 모든 신자가 제사장 곧 사제임을 강조하였습니다. 만인이 제사장이라는 것은 우리가 모두 하나님께 직접 나갈 수 있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봉사, 모든 종류의 일이 똑같이 하나님께 드리는 섬김이라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 모두는 ‘하나님 나라의 전담(full-time) 사역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형태의 일은 신앙에서 비롯될 수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봉사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새 사람의 섬김에 대해 설명하면서도 자기 손으로 정직하게 일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사람, 새로운 본성은 육신이 없는 영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새 사람은 손을 가지고 있으며, 그 손을 사용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새 사람은 하나님의 세상 가운데서 일을 해야 하며,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새로운 본성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철저하게 ‘세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종교, 정치, 사업, 언론, 교육, 예술 등 어떤 영역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일터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사장이며 선지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일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견지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신실한 일꾼들로 양육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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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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