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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7)- 관언유착(官言癒着)
언론이 독자들이나 대중들에게 주는 영향이 크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사실이 아닌 잘못된 기사나 중심을 잃은 기사는 많은 사람에게 혼란을 줍니다.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몇 해 전 우리 노회에서 모 목사를 순회 선교사로 파송한다고 기독교보에 기사가 올랐습니다. KPM 이사장과 담당자들이 파송 예배에 순서를 맡으며 파송 예배 사진까지 첨부하여 누가 봐도 총회에서, KPM에서 파송하는 선교사처럼 대문짝만하게 기사를 올렸습니다. 노회 파송 선교사도 아닌데 과장된 허위 기사를 올릴 수 있느냐고 기독교보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몇 주 후 신문 구석 어느 페이지에 짧은 한 줄로 000교회 순회 파송 선교사로 정정한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습니다. 그 기사를 본 대부분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은 KPM 파송 선교사로 알고 있습니다. 짤막한 정정 기사가 났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도 “부산서부노회 파송 선교사냐?”고 물어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선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KPM이나 노회에서 파송한 선교사처럼 위장을 하고 그것을 교단 신문인 기독교보에까지 기사화한 것은 그 저의를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디 이 한 건뿐이겠습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이 발생하여 총대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거짓된 걸음을 걷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 심히 우려됩니다. 기독교보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할 것입니다. 기독교보가 KPM 선교사로 파송하는 기본도 모른다는 것은 몰랐다고 하는 말 자체가 거짓말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의 파장도 결코 간과할 수 없지만, 신앙과 교리, 교회와 개인의 인권에 대한 의도적인 허위 기사는 고신 신앙 전체를 흔들 수 있는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문제는 고신 언론사는 총회 유지재단 이사회에서 관리하는 기관입니다. 유지재단 이사회는 총회장을 당연직 이사장으로 해서 총회 기관 중 최상위 기관으로 총회를 잘 알고, 총대들의 지지를 받아 총회 산하 교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감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유지재단 이사회가 직무유기 한 것입니다. 학원 이사들이 잘못할 때만 소환할 것이 아니라 유지재단 이사회가 잘못할 때는 그 파장은 훨씬 더 크고 중요하기에 반드시 소환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독교보가 총회 기관지인지, 유지재단 이사회 관할에 있는 기관지인지, 기독교보 자체 언론지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된다고 입을 모읍니다. 언론사 사장 얼굴이 기독교보에 빠지는 일이 없자 이 일에 대해서 총대들은 물론이요, 유지재단 이사회에서도 지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과는 마이동풍입니다. 순교 정신을 기본으로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모토로 하는 고신의 기관지인 기독교보가 본류의 신앙을 이탈한 것은 이미 옛말이고 특정 계파에 포진한 자들이 기고하는 재고 되어야 할 지나친 인문학적 논의와 신앙 고백적 정체성을 벗어난 잘못된 사상들이나 도배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고신 신앙을 가진 목회자들과 장로들, 교회들은 알게 모르게 기독교보에 대한 불신으로 불매 운동을 하고 있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입니다. 5월 2일 자 코람데오닷컴에 “교계 언론 편집 책임자의 이학규 장로 고소 건, 고검 재정 심사에서도 또다시 기각 판결”이라는 기사가 올랐습니다.(코람데오닷컴 참조) 이 사건의 실상은 전국 남전도회 임원으로 있는 모 장로님이 유지재단 이사로 출마하려고 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웠는데 그해에 언론사 사장 선거가 있어 보수 측 인사가 유지재단 이사가 되면 사장이 되는 길에 장애가 될 것 같아 코람데오닷컴의 기사대로 언론사의 직원이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운 장로를 “사퇴 종용”했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총회 산하 교회를 잘 돌아보고, 총회의 기관들을 바르게 잘 관리해야 하는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시작부터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일반 총대들은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는 계파와 개인의 이권과 자리가 그 배경이 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재미를 본 자들은 이제 총회에서 골치 아프게 투표하고 경쟁하는 것보다 아예 노회 총대를 조정하는 기가 찬 수법으로 발전했습니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계파에 표를 던질 사람을 골라서 총대라는 자리로 매관매직을 하고, 각 노회 지도급에 있는 목사 장로들을 총회 상임위의 자리로 매관매직해서 4월 노회 총대 선거가 끝나면 이미 상황이 종료되는 모양새로 발전되었습니다. 이학규 장로가 전국 남전도회 회장으로 봉직하고 있을 때 함께 임원으로 봉사하던 모 장로가 “사퇴를 종용”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항의한 것이 코람데오닷컴 에 기사 실린 것과 같은 결과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평생 법 없이도, 법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사는 목사, 장로가 이 일로 인하여 교회 생활이나 신앙생활에 방해를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경찰서와 법원으로 불려 다니며 고초를 겪고 어려움을 당했던 것에 대해서 고신 언론사를 관리하는 유지재단의 총회장과 목사, 장로 이사들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 궁금합니다. 왜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말입니다. 이학규 장로는 신앙적으로 잘 해결하고자 언론사의 불법 선거 개입 못 하게 해달라는 진정서를 총회 선관위에 제출했더니 총대가 아니라 진정서를 접수하지 못한다고 하더랍니다. 참 훌륭한 총회 선거관리 위원회이십니다. 그래서 “여기 보냈다, 저기 보냈다” 서류 핑퐁 게임을 하다가 결국 사법기관에 판단을 받기까지 하면서 이학규 장로가 당한 심적 피해, 정신적 피해, 일상 업무 손해의 피해는 누가 보상해줍니까? 고신총회가 이렇게 기본을 상실하고 무책임하게 하면 안 됩니다. 펜은 검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오보도 문제이지만, 언론이, 신문이 의도적이고 사욕에 치우쳐 고신의 정체성에 위배 되는 글이나 기사를 올리고, 무책임으로 일관할 때 고신총회 산하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미치는 파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총회 임원회와 학원이사회가 지난 총회 시 총대들을 속이고 총장선출 규정을 통과시켜 불법으로 총장을 선임했다고 신문에 기사화되어도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볼 때, 총회 임원회의 수장인 총회장이 유지재단의 당연직 이사장이기에 이 사실조차 그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게다가 현 총회장은 기독교보 발행인이 아니기에 변명하며 피해갈 수 있는 좋은 길도 열려 있습니다.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재정적인 문제는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릅니다. “반려동물을 장례식”에 대한 안건이 고신총회 신학부에서 재론되고, 어떻게 고신총회에서 “그따위 안건이 거론되느냐”는 회원들의 호통에 경남노회 모 회원이 나와 옹호 발언을 하며 “지난달에 우리 찐이(고양이)가 죽어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하늘나라로 보내줬다”고 말을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총회가 불건전하고 이단성이 있어 교류를 금지해도 전혀 문제의식 없이 그런 모임에 참여하고, 순서나 자리까지 맡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는 300M 거리를 유지해야 하지만 이전하는 것은 법에 명시가 없기에 괜찮다고 하는 고신입니다. 핑퐁 게임을 하다하다 안되면 법리해석을 문제 삼아 법제위에 해석을 요청하여 본질을 잊어버리게 하고 계파싸움 진영싸움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고신입니다. 양파도 아니고 벗겨도 벗겨도 끝이 없는 고신이여...... 언론은 “言路”를 여는 것입니다. 言路가 막히면 세상은 암흑세계나 다름없습니다. 한 마리의 개가 먼저 짖으면 온 동네 개가 때지어 짖어대듯이 기독교보가 먼저 총대를 메고 총회 여러 현안의 심각성을 알리면 동시에 총회 여러 곳에서 포문을 열고 동참할 것입니다. 언론은 여론을 집약하고 전문가들의 진단과 의견을 수렴하거나 민심을 파악한 후 사안에 따라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로 펜 끝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언론의 사명입니다. 총회 성도들을 대신해서 할 말을 하며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선도해야 합니다. 독선의 권력을 향한 비판은 언론이 지향해야 할 우선순위이자 언론 존재 이유입니다. 이 가치관이 상실되면 결국 관언유착(官言癒着)이 되기 쉽고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관제언론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사리사욕에 길들어서 소위 ‘독선과 권력’의 ‘종’이 된다면 스스로 펜을 손에서 내려놓아야 함은 불문가지입니다. 기독교보가 그렇게 길들어진 “관보(官報)”라는 비판을 듣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집을 지키기 위해 열심 짖어야 할 개가 요즘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주인 행세를 한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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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6 : 성가대와 찬양대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평생을 예배드리면서도 때로는 이 말이 옳은가 틀리는가에 대한 의문이 되는 용어들이 많다. 본 기고의 목적이 이를 바로 알고 사용하자는 취지에서 계속 기고하지만, 필자 자신도 때로는 헷갈릴 때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예배 중의 순서에서 찬양대인가 성가대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통합 측 총회에서는 찬양대라고 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수많은 교회들이 성가대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는 여기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성가대(聖歌隊)와 찬양대(讚揚隊)의 용어 차이 두 용어는 일반적으로 보면 거의 같은 말이다. 국어사전에도 성가대는 “교회 등에서 성가를 부르기 위해서 조직된 합창대”라고 했고, 찬양대도 “남녀 기독교 신자로 조직된 합창대”로 둘 다 영어로도 ‘choirs’로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같은 듯 다른 용어이다.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성가와 성가대란? : 먼저 일반적으로 성가라는 용어는 범(凡) 종교적으로 사용하는 말로서 일반적인 음악과는 다른 거룩한 음악이란 뜻이다. 그래서 성가는 범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는 ‘종교음악’으로서 세속적인 노래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의 찬불가는 불교의 성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 용어가 전혀 언급이 없다. 오직 찬양 혹은 찬송으로 표현되어 있다. 2. 찬양과 찬양대란? : 찬양이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으로서 참된 경건의 중요한 요소이다. 즉 찬양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성육신과 십자가 지심과 부활, 종말과 재림 등의 구속의 은혜를 노래하는 것이 찬양이고 또 함께 부르는 것이 찬양대인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가진 찬양은 개역성경에는 213회, 찬송은 98회, 찬미는 14회가 나온다. 하지만 성가란 말은 한 곳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찬양은 일반 종교의 성가와는 차원이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만을 높이는 노래인 것이다. 3. 성가와 성가대란 말을 교회에서 사용해 온 이유는? : 왜 성경에도 없는 이 용어를 그동안 교회에서 사용해 왔을까? 그 이유는 1976년에 나온 공동 번역 성경에서 개역성경의 “노래하는 자”, “성가대”로 12회에 걸쳐 번역을 했다. 또 하나의 성가대란 용어의 기원은 한 출판사가 흑인 영가의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곡집”이라 부른 것이 성가대의 이름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의 ‘세이까다이’(성가대 せいかたい, 일본 사람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며 노래할 때 쓰는 용어)가 직수입되면서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서 그동안 찬양대라고 했던 용어가 성가대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성가대란 말은 일본어의 잔재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가대란 말은 1958년 출판된 동아출판사 사전에도 성가대란 명칭이 없었으나 1994년 민중서관의 국어사전에서 처음 등재되었고 그 이전에는 성가대라는 말이 고정되어 사용되는 곳은 일본의 ‘세이까다이’뿐이었다. III. 결론과 제언 앞서 서론에서 밝힌 대로 성가대와 찬앙대라는 말은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동안 큰 문제 없이 사용해 왔기 때문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성경에도 없는 말이며, 일본어의 잔재라는 문제도 있다고 볼 때, 또한 타 종교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굳이 성가대란 말을 계속 사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성경에도 없는 성가나 성가대란 말보다는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사용해 왔던 찬양, 찬양대란 우리 고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올바른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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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성경의 큰 그림과 안식(1)
1)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창조되었다(창1:26~28).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일 때 가장 행복하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안식한다. 사람은 창조 되자마자 안식을 살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함께 안식하시려고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을 완벽하게 창조하셨다. 완벽이 무엇인가? 완벽하다는 말이 단순하게 세상을 좋고, 아름답게 창조했다는 말로만 보아선 안 된다. 물론 그런 뜻도 있다. 그러나 완벽하게 창조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상태를 말한다. 비 인격체인 피조물이 완벽할 수 있는 것은 인격체인 사람이 완벽할 때 완벽할 수 있다. 모든 피조물들이 사람의 손에 주어졌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하나님과 동일시 될 때 완벽하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하게 세상을 창조하셨다.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였고 완벽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로 완벽했다. 그래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 되게 하신 일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 될 때 완벽하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임마누엘을 이루시는 날 우리는 하나 되었다. 완벽 해졌다. 회복된 날이다. 하나님의 완전함 같이 우리도 완전해졌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고 하셨다. 안식을 말한다. 완전함을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임을 알 때 완전하다. 또 이것이 행복이고 안식이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 이것을 보고 안식의 삶이라고 한다. 완벽하기 때문에 더 이상 무엇을 보텔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안식은 피곤해서 안식하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어 안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고 완벽하기에 안식이다. 점이라도 하나 더 찍으면 작품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붓을 놓는 화가처럼 완벽하고 부족함이 없어 쉬시는 것이 안식이다. 사람은 창조되자말자 안식을 살았었다. 보기에 심히 좋았다. 하나님은 인간을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당연히 모든 피조물도 완전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가 하나님의 첫 번째 그림이다. 하나님의 큰 그림은 안식이었다. 2) 사단에게 속아 안식을 잃었다 사람은 사단에게 속아 합법적인 하나님과의 분리가 일어나 버렸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완전함이고, 안식인데 안식을 잃어버린 것이다. 마귀에게 속아서 신적 통치권을 빼앗겨 버렸다.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함으로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는 말씀대로 되었다. 그 결과 안식, 즉 임마누엘의 완벽함을 잃어 버렸다. 마귀도 언제나 말을 먼저 먹인다. 마지막 때도 마귀의 주된 일이 말을 먹이는 일을 한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계12:15)라고 했다. 여자인 교회를 말인 물로 떠내려 보내려 한다. 뱀인 마귀는 입에서 물을 토하는 것이다. 다른 복음을 많이 토한다. 다른 복음은 없다. 하늘의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갈1:8). 마귀는 다른 말을 토해 냄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큰 그림인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은 안식이다.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보아야하는데 보지 못하게 다른 말을 넣는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고 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의 그림인 안식이 없으면 두렵다. 안식을 보지 못하는 자의 모습이다. 안식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내가 다른 복음을 먹었습니다."라고 스스로 확증한다. 스스로 벗었다고, 두렵다고 고백한다. 그전에도 벗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누가 너에게 벗었다고 알려줬느냐"고 물으신다. “누가 그런 말을 해 주더냐”라는 뜻이다. “네가 무엇인가 스스로 입어야 한다고 누가 말 하더냐”는 질문이다. 지금도 사단은 우리가 예수 외에도 무엇을 입어야 한다고 속삭인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왜 따먹었느냐?"라고하시지 않고 "누가 벗었다는 것을 알려줬느냐?"라고 물으셨다. 말의 권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 주는 순간이다. 사단의 속임수는 다 말로부터 온다.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말을 들으면 보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큰 그림이 보인다. 사단의 말을 들으면 벌거벗음이 보이게 된다. 두려움을 보게 되고, 두려워 숨게 된다. 주님이 입혀 주신 것 외에 뭔가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엔 온전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하는가? 말이 온전하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고 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욕도 안해야하고,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욕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말이 온전하려면 복음을 말하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이다. 복음을 말하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우리도 온전할 수 있다. 온전한 말을 하면 아버지의 일인 안식을 보게 된다. 우리에게 너무나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한다. 너무 아까운 세월을, 아까운 인생을, 남의 이야기하다가 다 보낸다. 비판과 불평불만만 하다가 시간을 다 보낸다. 안식이 있을 리가 없다. 사단은 말로 우리를 속였고 속이고 있다. 안식은 우리의 믿음의 말에서 온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10:10). 마귀에게 속아 안식을 잃어버린 것은 말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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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희생
우리는 봄이 오면 마음이 들떠 어디론가 꽃구경을 가기를 원하고, 늘 가는 곳이라 할지라도 봄꽃이 핀 곳이면 가족들이 나들이하는 경우가 많다. 4월 초순에 비가 오는 산복도로를 거쳐 교회에 가는 도중에 아름답게 피어있는 벚꽃을 바라보는 순간 “아! 이렇게 아름답게 핀 꽃을 비바람이 망치면 어떻게 하지?”하는 걱정이 앞선다. 내 집 정원의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거워할 수 있는 벚꽃을 비바람 때문에 망치게 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통상 벚꽃은 일본의 나라꽃이라 생각하고 별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은데 실상은 원산지가 우리나라 제주도라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나라의 꽃이니까 더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라 믿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잎도 피우지 않고 살얼음이 언 메마른 땅속에서 뿌리를 내려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한겨울 내내 자기의 몸을 단단히 무장하여 정한 시간에 꽃을 피우는 식물이 바로 벚꽃이라는 데서 관심이 더 가고 피어있는 그 자체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가정집 정원에 있는 꽃나무들은 그래도 춥다고 싸주기도 하고 거름도 하며 옮겨주기도 하고 가지치기도 하지만 벚꽃은 차가 많이 다니는 길가나 산 중에서 전혀 무관심 속에 홀로 자립하여 이른 봄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 너무 장하고 아름다울 뿐이다. 꽃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수 있는 시간은 겨우 일주일도 안 되기에 항상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렇게 고생하여 잠간 동안을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선사하기 위해 정말 희생한 벚꽃의 수명이 좀 오래 지속 되면 얼마나 좋으랴. 게다가 벚꽃이 질 때에도 벚 눈을 내려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아무 불평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따뜻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마치 눈이 오는듯한 모습으로 꽃눈이 낙화한다. 그것이 바로 자연적인 아름다움의 자체가 아닐까? 흰 꽃잎이 떨어진 것은 분명히 하얀색인데 바람이 불어 모인 블럭 바닥은 분홍색 꽃눈으로 소복하게 쌓인다. 눈은 밟으면 ‘뽀드득’이란 소리라도 내지만 떨어진 꽃눈은 아무리 밟아도 소리를 내지 않고 인간의 발과 자동차의 바퀴에 짓밟히며 휘날릴 뿐이다. 오직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순종하여 이렇게 끝까지 희생하는 것이 바로 벚꽃이라는 것에 나는 감동을 받는다. 우리 주위에도 다른 사람의 아무런 도움이 없이 주님이 말씀하신 일들을 잘 수행하여 사회에 귀감이 된 아름다운 모습이 매스컴에 등장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분들은 오직 자기에게 주어진 미션을 좌우를 살피지 않고 오직 앞만 바라보고 나아갔기 때문에 큰일을 해내었을 것이다. 한낱 미물과 같은 식물도 말없이 자기를 희생하고 아름다움을 선물하는데 우리가 기대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지 못하면 실망하고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벚꽃은 자기의 아름다움을 봄꽃으로 인간인 우리에게 잠간 보여주기 위해 동한의 춥고 쓰라린 고통을 다 견뎌내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변함없이 희생한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믿음의 형제들과 이웃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정말 벚꽃처럼 나를 희생하고 말없이 맡겨진 일을 수행하는 데 최선을 다하면 우리가 사는 곳이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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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저축할 내용 (창41:46-57)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에 보도 된 내용에 의하면, <영국 교육과정평가원>이 새로운 아동 교육개혁 방안을 발표 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11세-16세까지 중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금융교육을 학교 정규 과목으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수학을 배우고 과학을 배우는 것처럼 이 수업을 통해서 스스로 부채를 관리하는 것을 배우고,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 연금 계획 짜는 것을 배우고, 금리를 계산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는 9월부터는 모든 <영국>의 5세 된 아동들에게는 정부로부터 250파운드가 지원 되어서 자신의 펀드를 개설하게 된다고 합니다. 일반 가정의 아동들에게는 250파운드(약$500)의 펀드 자금이 지원되고 저소득층 아동들에게는 500파운드의 펀드 자금이 지원된다고 합니다. <영국>정부가 이렇게 어린 아이들에게 조기금융교육을 실시하는 까닭은 매년 해마다 개인 파산 신청자들이 늘어나는데 대한 대처 방안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사람이 일찍 돈을 알면 좋지 않다고 해서 어린아이들에게 돈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돈을 가르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돈의 가치를 알게 해야 하고, 올바르게 돈 버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고, 올바르게 돈을 저축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보다 더 안정된 내일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안정된 내일을 사는데 있어서 저축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 가운데 꼭 저축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많이 저축할수록 보다 나은 내일을 보장해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저축해야 할 것들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물질을 저축해야 합니다.(창41:46-57) 둘째로, 기도를 저축해야 합니다.(시32:6-7) 셋째로, 선행을 저축해야 합니다.(딤전6:17-19) 필요하고 좋은 것들을 많이 저축해서 오늘 보다 내일이 더 안정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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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해녀의 욕심
‘물숨’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제주 출신의 고희영 감독이 7년 동안 제주도 우도(牛島)의 해녀들과 함께 지내면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잘 몰랐던 해녀들의 삶을 속속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해녀들에게는 계급이 있습니다. 제일 높은 계급인 상군은 가장 깊은 바다까지 들어가서 작업을 합니다. 보통 15-20미터의 바다까지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중군이고, 맨 마지막 하군은 일명 똥군이라고도 부르는데, 2미터 이하의 바다에서만 작업을 합니다. 그 해녀들의 계급은 노력과 경험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자신의 숨 길이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바로 그 숨길이로 계급이 정해진다고 합니다. 이렇듯 상군, 중군, 하군 이라는 계급에 따라 해녀들이 작업하는 바다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하지만 모든 해녀들이 바다에 들어갈 때마다 동일하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물숨’입니다. 물숨은 바다 밖에서 숨을 쉬는 것과는 달리 바다 밑에서 들이마시는 숨을 의미합니다. 이 물숨은 해녀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아주 무서운 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에 한 두 명의 해녀가 물숨을 먹고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물숨은 다른 말로 하자면 욕심입니다. 자신의 숨 길이만큼 숨을 참으면서 작업을 하던 해녀가 다시 숨을 쉬기 위해서 물 위로 올라가려 합니다. 이 때 저 밑에 큼지막한 전복이 해녀의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그 순간, 그것에 대한 욕심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전복을 따기 위하여 물 아래로 내려가는 해녀는 그 물숨을 먹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사고를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면서도 욕심을 이기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해녀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은 자신의 숨만큼만 해산물을 따서 재빨리 물 위로 나오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부질없는 욕심을 경계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러하기에 해녀들은 바다를 가리켜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다는 무서운 곳이지만, 욕심을 버리면 친정엄마처럼 다 내어 주는 곳이야!” 우리는 손안에 그 무언가를 움켜쥐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숨을 참으며 견뎌냈을까요? 우리 또한 욕심내지 않아야 할 것,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에 욕심을 내다가 물숨을 마시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장 14-15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만족하는 법을 모릅니다. 진짜 자신들에게 필요한 영적인 것에 대한 열망은 없이 사실은 지금 필요하지 않는 것들을 위해서 더 더를 외치며 욕심에 사로잡혀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에든지 욕심을 품는 순간 불행이 시작됩니다. 욕심이 많을수록 불만이 많아지고 마귀의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욕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죄에 가장 약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욕심은 하나님께도 응답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다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에 응답하시지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여서 기도 응답에 대해서 의심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야고보서 4장 3절에서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의 기도는 좋아도 너희의 욕심은 싫다, 나는 결코 너희의 욕심에는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욕심을 내고 또 내지만 사실은 욕심으로 인해서 인간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서 이미 내게 주신 것에 자족하는 데 있고, 그 자족에서 진정한 감사가 나오고, 그 감사로 인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제 헛된 욕심의 물숨을 버리고 자족과 감사의 바른 숨을 쉬면서 진정한 행복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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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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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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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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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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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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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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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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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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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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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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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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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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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5)(창23:1)
- 남편을 따라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온 지 10년 세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10년 정도 기다렸으면 하나님께서 무슨 답이라도 주실만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사라에게 주어진 답은 첩이었습니다. (창16:3)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지 십 년 후였더라 세상천지에 자신의 남편에게 첩을 요구하는 여자가 있을까요? 여자로서는 불가능의 마지노선입니다. 하나님께서 남편에게 부여하신 사명 때문에 사라는 여자로서 불가능한 그 마지노선까지 넘게 됩니다. (창16:2)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 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하나님께서 남편에게 부여하신 “여자의 후손”, 아들에 대한 사명은 사실 사라에게도 주어진 사명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라의 태를 열어 아들을 보게 하여 메시아를 대망하도록 하는 것이 수순이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어디에도 사라의 원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도리어 거부하는 남편에게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근거로 강요하기까지 합니다. 믿음의 길, 신앙의 삶을 산다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발견하게 합니다. 아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합니다. 사라 할머니의 가슴 시리고 너무도 아플 것 같은 마음에 머리가 어지럽고 먹먹해집니다. 10년을 기다린 사라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남편의 사명을 위하여 믿음의 결단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사라가 하갈을 남편에게 첩으로 넣어주자마자 하갈은 임신을 합니다. 거기에다가 꼴값을 떤다고 하갈은 주제 파악도 하지 못하고 사라를 멸시합니다. (창16:4)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첩과 첩의 자식을 통해 멸시를 받고 살았던 믿음의 세월 14년, 이스마엘이 태어나고 이삭이 태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던 세월이 14년입니다. (창16:16)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그냥 14년의 세월도 만만치 않은데, 성경에서 14라는 숫자는 완전(7)의 갑절(2)을 뜻합니다. 완전의 갑절을 뜻하는 세월 14가 삼 세 번 반복되어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게 됩니다. (마1:17)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러라 이렇게 볼 때, 42(14*3)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의 영적 세월을 나타내며, 믿음의 세월을 살아야 하는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왕하2:23-24)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그가 길에서 올라갈 때에 작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조롱하여 이르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엘리사가 뒤로 돌이켜 그들을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의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 선지자를 “대머리여 올라가라”고 놀렸던 42명의 아이들이 암콤 두 마리로부터 찢겨 지는 장면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을 지나 삼위 하나님의 구원을 계승하여 완성된 메시아의 사역, 42라는 교회의 역사를 살고 있는 교회와 성도들이 찢어 죽임을 당하는 아이가 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하는 대목입니다. 성경은 사라가 아들을 얻기까지 25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표현하지 않고,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10년,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이 태어난 후 이삭을 가지기까지 세월을 14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의 기록은 메시아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있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이 됩니다. 남편과 함께 65세에 부름을 받아, 75세까지 남편과 함께 가나안 땅에 10년을 거하게 되고, 10년이 지나도 자신으로서는 하나님께서 남편에게 부여하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남편에게 첩을 넣어주는 결단을 하고, 그렇게 해서 14년의 세월이 지나 아들 이삭을 잉태하게 된 사라...... 이런 세월을 살았던 믿음의 여인 사라,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교회를 예표하는 여인 사라가 127세를 살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23:1)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 왜 성경은 사라가 죽은 나이를 기록하고 있을까요? 성경이 사라가 죽은 햇수를 기록하여 나타내고자 하는 구원의 도리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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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5)(창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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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복음실천 강한명령 받는 집회였다
- 어게인 1973년. 50년 전 ‘빌리 그래함 여의도 전도대회 50주년 기념대회’가 지난 6월 3일 서울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렸다. 그동안 우리들의 귀에 많이 들어온 여의도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 1973년 5월30일부터 6월3일까지 5일간 320만 명이 전국에서 여의도 광장에 모여 한국 기독교 부흥의 대역사를 썼다. 필자는 당시 고교를 갓 졸업했고 교회를 한두번 가봤으나 기독교를 전혀 모르는 때 뉴스를 접해도 실감을 못했다. 당시 고1 학생으로 참석했던 아내 덕에 당시의 뜨거웠던 부흥의 함성을 자주 듣곤 했다. 그동안 은혜로 크리스챤이 되고 교회 중직자가 되고 창원극동방송 운영위원으로 섬기면서 당시 통역으로 유명했던 김장환 목사님도 만나면서 당시 장면을 생생히 그려낼 수 있었다. 그로부터 50년, 한국기독교가 세계 속의 기독교 부흥 국가로 발전했다. 이 뿐이랴. 한국교회는 자부한다. 1973년의 여의도 기도 함성이 교회의 부흥과 함께 대한민국을 축복의 나라로 이끌었다. 50년 전 당시 여의도 광장은 먼지가 흩날리는 맨땅이었다. 아무 편의 시설 없이 매일 100만이 넘는 인파가 몰렸던 것은 기적이었다고 당시 참석자들이 말하고 있다. 이후 급속도로 대형 교회가 곳곳에 서게 되고 부흥의 불길은 전국으로 확산됐다. 다음세대의 선교를 이끈 CCC(대학생선교회) 맴버들의 눈물겨운 봉사활동을 필자는 많이 들은바 있다. 그리고 이후 CBMC(한국기독교실업인회)역시 여의도 집회 봉사자들이 많이 주축이 되어 조직 발전, 지금도 선교봉사활동이 왕성하다. 50년이 지난 이날 경남에서도 수십 대의 대형버스가 줄지어 서울로 향했다. 필자는 우선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은혜를 받고자 부푼 마음으로 동행했다. 집회장은 축구 경기장이지만 은혜의 찬양이 행사 초입부터 가득 차 넘쳤다. 영상에 대비되는 당시 현장의 그림과 이 시간 펼쳐지고 있는 집회 현장은 많은 회한을 그려냈다. 먼지가 바람에 흩날리는 그때 그 현장에 어떻게 저렇게 사람이 많이 몰렸을까. 그리고 우리는 50년간 어떻게 살았는가. 저마다 대비되는 그림만 보고도 숙연해지고 눈물이 났다. 모든 것이 은혜였음을 울리는 특별찬양의 가사가 모든 사람들의 심령을 울렸다. 이날 이현장에 사람들은 기껏 7만여 명, 1만 명 찬양단이 경의롭지만 50년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드디어 초청강사 프랭클린 그래함 목사의 설교가 시작되었다. 강사의 설파는 처음부터 복음이었다. 우리의 한 생명은 온 세상 보다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주인은 오직 여호와께 있습니다. 강사의 설교에서 머리를 때리고 잡힌 것이 있었다. 50년 전 아버지 빌리 그래함의 설교 또한 오직 복음이었다. 우리의 생명은 오직 여호와께 있습니다. 우리는 형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합니다.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 당시 설교 녹음을 다시 들어 보면 같은 말, 같은 뜻이었다. 집회를 마쳐가는 중 가슴을 때리는 기도 제목이 있었다. 말미에 함께 올리는 통성기도회 시간 강조된 “한국교회 촛대를 주님 옮기지 마옵소서” 우리는 뜨겁게 기도했다. 1000만 한국 기독교는 지금 임마누엘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신가. 가끔 이러한 생각이 든다. 축복의 산물 물질 풍요의 시대, 우리는 사명의 영성을 지키고 있는가. 하나님 임재의 바로미터 정결 성결의 영성이 흩날리고 있는지 눈물 흘리며 돌아보아야 한다. 이제 동성애 합법화, 마약천국, 이단미신의 미화 그리고 공산사회주의의 이념 혼돈에서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한국 교회는 변함없는 복음을 말로만 하지 말고 간절함의 순종과 행함의 주님 도움의 손길을 만나야 할 때임을 느끼게 하는 귀한 집회였다. 복음을 행하라는 강한 울림을 강하게 내리꽂는 모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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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복음실천 강한명령 받는 집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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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지 목사] 그린청지기로 살라(창 1:26-31)
- 지구는 지금 무서운 열병을 앓고 있습니다. 지구 곳곳에서 폭염과 가뭄, 홍수와 태풍 등으로 인해 수많은 생명들을 한 순간에 죽음과 고통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상이변으로 인한 인명과 재산상의 피해, 알 수 없는 질병으로 인한 고통으로 지구촌 곳곳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만이 아니라 수많은 생물들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지구온난화에 대해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지구온도가 섭씨 1.1도 상승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만약 섭씨 1.5도로 상승하면 생물종의 10%가 사라지고 섭씨 3도 이상 오르면 40-70%가 멸종된다고 보고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국제사회가 지구 온도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전 세계 195개국이 이산화탄소 감축노력이 시급하다고 경고했습니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는 지난 3월 19일에 스위스 인터라켄에서 열린 총회에서 기후 위기의 시급성을 강조한 'IPCC 제6차 평가보고서 종합보고서'를 만장일치로 승인했다고 밝혔습니다. IPCC는 “온난화를 제한하려면 이산화탄소를 포함한 온실가스 배출이 탄소제로가 되어야 한다. 2030년까지 전 세계가 온실가스 배출량을 적어도 45% 줄이고 2050년까지 탄소제로 선언을 해야 한다”고 권고한 데 따라 유럽국가들을 필두로 많은 나라들, 우리나라도 이미 2050년까지 탄소제로를 달성하겠다고 선언한 상태입니다. 문제는 현재의 화석연료 인프라를 그대로 활용할 경우 예상되는 이산화탄소 잠재 배출량은 5년 내에 깨질 확률을 98%, '1.5도 마지노선'이 뚫릴 확률을 66%로 분석했습니다. 10년안에 그냥 이대로 노력하지 않으면 1,5도가 아니라 섭씨 5도까지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원래 온실가스 누적배출량을 살펴보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국가 대부분이 선진국입니다. 그리고 최근 개발도상국의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크게 증가하면서 지구온난화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구온난화가 가속화된다면 상상하시는 것, 그 이상 더 많은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지구온난화 피해 사례에 이야기하면, 1. 녹고 있는 빙하와 만년설 빙하가 녹으면 해수면이 상승하게 됩니다. 현재 그린란드와 남극에 있는 빙하가 빠른 속도로 녹아내리며 급격한 해수면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만약 그린란드에 위치한 빙하가 다 녹아 사라지게 된다면 전 세계에 있는 해수면이 급속하게 상승하게 됩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된다면 섬나라들은 해수면의 상승으로 인해 국토 전체가 물에 잠기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10년안에 인천공항과 김포공항, 부산 같은 낮은 곳이 다 바닷물에 잠길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실제로 남태평양에 위치한 섬나라 "투발루"는 벌써 국토 전체가 물에 잠기고 있어서 다른 나라로 이주하고 있다고 합니다. 2. 질병의 증가 북극권 지역에 포함되는 알래스카와 시베리아 등의 지역의 빙하의 땅이 지구온난화로 인해 빙하가 녹으면서 지표면의 균열로 산사태가 발생하고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땅밑에 있던 시신들이 올라오면 거기에 감추어 있던 바이러스, 병원균, 세균 들이 새롭게 퍼지게 된다는 합니다. 실제로 지구온난화로 인해 지난 30년 동안 30가지 이상의 새로운 질병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코로나도 그 가운데 한 종류에 불과한 것입니다. 3. 온갖 자연 재해가 증가 가뭄과 폭염, 폭우와 홍수, 폭풍과 해일, 산불입니다. 예를 들면 영상 50도로 넘어서는 뜨거운 폭염, 작년에 인도를 비롯한 유럽에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또 미국의 테네시주의 멤피스는 영하 54도까지 급강하했습니다. 중국 역시 작년에 영하 50도로 내려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추위를 겪었습니다. 이처럼 기후변화로 인해 세계곳곳에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지난 해 파키스탄은 홍수로 나라의 3분의1이 물에 잠기는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작년에 기록적 폭우로 인해 서울 뿐 만 아니라 전국 곳곳이 물에 잠겨 고통을 겪었습니다. 방글라데시 역시 매년 홍수피해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프랑스는 8월 여름에 패딩을 입을 정도로 춥고 10월에는 여름처럼 뜨거웠다는 것입니다. 중국은 전체면적의 27%가 이미 사막화되었고 매년 서울시 면적의 3배 정도에 해당하는 면적이 사막화되고 있습니다. 내몽고지역의 마을들은 10년 전만해도 푸른 산과 초원으로 뒤덮여 있었지만 지금은 모래바람이 휘날리는 사막지역으로 바뀌었습니다. 또 그로 인해 우리나라도 그 어느 때보다도 심하게 황사로 인해 미세먼지, 초미세먼지로 마스크를 쓰고 살아야 할 정도로 공기오염이 심각하게 빈도가 늘어나고 그 강도가 세지고 있습니다. 이 황사는 온갖 오염물질을 몰고 와 오늘 우리의 생활환경과 건강에 큰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4. 오존층 파괴 지표면에서 상공 10-50km에 있는 성층권에는 오존(O₃)기체가 있습니다. 이 오존층은 태양빛 안에 있는 자외선을 흡수하여 지표면에 있는 생물들을 보호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오존층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냉장고나 에어컨 등에 사용되는 냉매용 기체인 프레온가스가 오존층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오존층이 파괴되면 지표면에 도달하는 자외선이 늘어나고, 이 자외선이 각종 생물의 세포를 파괴합니다. 자외선을 쏘인 생물체는 세포가 파괴되어서 죽거나, 기형이 됩니다. 사람의 경우에는 피부에 검버섯이 생기고, 피부암, 백혈병, 백내장 등의 질병을 일으킵니다. 오존층이 1% 감소되면 자외선이 2% 증가하고 피부암은 5-6%가 증가하여 전 세계적으로는 환자가 약 20만명이 증가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외에 식물에도 악영향을 주어서 오존층이 감소하면 수확량이 감소하고 수확물의 질도 떨어집니다. 이처럼 지구온난화는 뜨거운 재앙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지구온난화, 그 불편한 진실 앞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대로 가면 우리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세상을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놓고 말게 될 것입니다. 아니 사람뿐 아니라 그 어떤 생물체도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을 만들어놓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만드신 세상을 파괴하는 커다란 범죄인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맞서는 일입니다. 창세기 1장에 계속 반복되는 말씀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만드신 세계를 보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시고 너무 기뻐하셨습니다. 빛도 아름다웠고 땅도 바다도 아침과 저녁도 아름다웠습니다. 지으신 모든 식물과 자연들이 보기에 심히 좋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시고 그 모든 피조된 세계를 맡기시고 돌보게 하셨습니다. 창1: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잘 다스려라 잘 보살피고 돌보아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을 관리하고 보전하는 청지기의 책임을 맡기신 것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맡아서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청지기가 빠지기 쉬운 유혹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맡은 것을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즉 자신을 주인으로 여기는 착각입니다. 다른 하나는 맡은 책임을 소홀히 하는 게으름입니다. 세상과 자연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선악과는 바로 그의 상징이었습니다. 다 먹어도 이것만은 절대 먹지 말아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그런데 인간은 그것을 먹고 주인이 되고 싶어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청지기임을 쉽게 잊고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사는 지구,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병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그것이 사람들의 생명까지도 위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으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는 현재 진행중입니다. 예를 들면 지구의 허파라고 불리워지고 있는 아마존의 그 울창했던 열대우림들이 개발이라는 명분으로 점점 사라져가고 지구는 급속하게 자체 정화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일찍이 보았던 세상의 재난이 오늘 우리 앞에서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4] 내가 산들을 본즉 다 진동하며 작은 산들도 요동하며 [25]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렘 4:23-25) 무슨 말씀입니까? 땅이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산성화가 가속되었습니다. 무분별한 개간으로 수많은 밀림들이 사라지고 또한 제초제와 농약으로 땅은 병들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땅에서 생산되는 식물들도 믿고 먹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릴 적에 보았던 그 아름다운 은하수를 볼 수 없게 된 것이 꽤 오랜 옛날같습니다. 별들이 점점 사라지고 하늘이 어두워졌습니다. 공해물질로 오존층은 파괴되었고 대기오염은 심각한 지경이 되었습니다. 산들은 잘려 나가고 나무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철따라 찾아오던 새들도 이제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산과 들, 강과 바다, 어디가나 인간이 버린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오늘의 현실입니다. 오늘의 현실을 이미 오래전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미 경고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자연의 그린청지기로서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회개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회개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내가 주인되어 내 욕심을 따라 생각없이 살아왔던 모든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죄의 본질은 자기 사랑입니다. 딤후 3:1 이하에 보면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자기가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세계의 중심이 자기라고 생각하는 자기 교만, 죄성이 우리가운데는 있습니다. 이러한 자기 사랑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개는 내가 주인이 아님을 인정하고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맡겨주신 자연을 사랑하고 아끼고 지키는 그린청지기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린 청지기는 지구를 지켜야 합니다. 지구를 아끼고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린청지기입니다. *당신은 그린청지기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지구가 뜨거워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지구의 열을 내리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충성된 그린 청지기가 될 수 있습니다. 열이 올라 몸살하고 있는 지구를 식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먼저 그린 청지기로서 다이어트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생활 속에서 이산화탄소라고 하는 CO2다이어트입니다. CO2는 에너지를 사용할 때 나오는 찌꺼기를 말합니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편리하게 사용하는 모든 에너지에는 CO2가 배출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CO2는 지구의 온도를 높이는 주범입니다. 그러기에 지구를 식히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 CO2의 양을 줄여야 합니다. 생활 속 CO2다이어트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쓰지 않는 가전기기는 꼭 플러그를 빼놓습니다. 냉난방을 적절하게 해야 합니다. 항상 쓸데없이 불이 켜져 있는지를 확인하고 방을 쓰고 나갈 때는 꼭 불을 끄고 냉난방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물을 적게 쓰면 그만큼 CO2를 줄일 수 있습니다. 수돗물을 만들고 공급하는 과정에서 전력이 많이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웬만한 거리는 걷거나 자전거를 타도록 합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좋습니다. 우리 땅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먹는 것입니다. 수입하는 수송연료를 줄일 수 있고 환경제품을 사용하면 좋습니다. 환경마크가 부착된 물건을 사용하고 포장을 줄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대로 나무를 많이 심고 돌보는 것입니다. 나무 한 그루는 하루 4키로그램, 연간 1톤의 CO2를 흡수한다고 합니다. 일회용을 절제하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텀블러를 가지고 다니면서 사용하고 쓰레기를 버릴 때는 반드시 재활용할 수 있도록 분리수거를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계를 잘 돌보고 보존해야 할 책임이 있는 그린청지기들입니다. 충성된 그린 청지기가 되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지구를 아름답게 보존하고 후손들에게 좋은 환경을 물려줄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에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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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지 목사] 그린청지기로 살라(창 1: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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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기름 부음(1)
- 우리는 앞의 글에서 기름 부음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요일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기름 부음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성령님이 하게 하시는 것이다. 성령님이 오신 이유는 우리가 한 번 체험하고 기분 좋게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 마음을 뜨겁게 하는 일시적인 일을 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성령님께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오셨다. 성령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목적이 있다. 그것은 구속을 이루기 위함이다. 구원을 이루기 위함이다. 구원을 누구를 통해 이루는가? 예수님을 통해 이룬다. 구원은 복합적이다. 겨우 천국 가는 것이 구원이 아니다. 구원은 천국 가서 앞으로 누릴 것만이 구원이 아니다. 구원은 천국 가는 것 뿐 아니라 이 땅에서 믿는 자의 권세를 누리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왔다 가심으로 구원은 이루어 졌다. 구원이 천국 가서 누리는 것일까, 지금 누리는 것일까? 지금 누리는 것이다. 성경의 약속은 앞으로 우리가 죽어서 천국가면 누리는 축복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땅에서 나와 아무 상관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빨리 죽는 것이 복일 것이다. 구원은 이 땅에서도 누리는 하나님의 축복이다. 성령님이 이루어 놓으신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구속 사역을 믿게 하는 것이다. 이미 완성시켜 놓은 구속의 회복을 드러내시는 사역을 돕기 위해 오신 것이다. 기름 부음이라는 말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능력을 우리 속에 부어 주시는 것이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예수 믿는 일이다. 예수 믿는 일이 우리 힘으로 안 된다. 죽었던 우리가 살아나는 일은 생명을 주셔야 살아 날 수 있다. 사람이 생명을 만들 수 없다. 물에 빠진 사람이 자기가 스스로 머리를 잡아당긴다고 나와지는 것이 아니다. 죽음의 물에 빠진 자를 주님은 건지러 오셨다. 성령님은 가르쳐 깨닫게 하시고 생각을 바꾸시러 오셨다(요14:26).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성령님께서는 하시는 것이다.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자가 성령이 아니고는 할 수 없다고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서 말씀했다. 내가 예수님을 주로 믿는 것과 성경을 볼 때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구나"하고 믿어지는 것은 내 힘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 안에는 이미 기름 부음이 있다. 간절히 성령의 도우심을 믿으며 말씀을 본다면 기름 부음은 나타나게 되어 있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2:27)라고 하신다.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는데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자가 없다는 말이다. 성령께서만이 가르치실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말씀이다. 기름 부음으로만이 진리를 가르쳐 내신다는 말씀이다. 영적인 세계는 아무도 가르칠 자가 없다. 예수님의 말이 영이다. 성령의 기름 부음만이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치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기를 집중한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요14:26)라고 하셨다. 또 성령님은 기름 부음으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14:26)라고 하셨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기억나게 하시고, 가르쳐 주신다. 성령님은 지금도 우리 안에서 그렇게 하신다. 말씀과 기도로 성령님을 의지하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생각나게 하신다는 것을 믿어라. “성령님, 오늘도 가르쳐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성령님, 오늘도 생각나게 하셔서 사역하심을 감사드립니다.”라고 자는 자주 고백한다. 그리고 성령께서 나를 가르치시고 생각을 주심을 믿고 산다. 성령님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하신다. 믿는 일을 우리가 할 수 없다. 또 예수 이름으로 나타나는 능력들을 우리가 할 수 없다. 성령님은 예수님께 대해서 가르쳐 주신다. 예수가 믿어지는가? 그렇다면 기적이다. 어떻게 처녀의 몸에서 예수님이 태어났다는 것이 믿어지냐는 말이다. 말씀으로 천지 창조했다는 것이 믿어진다는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다. 홍해가 갈라져 물이 쌓였다고 했다. 이런 것들이 하나도 의심이 없이 믿어지는 것은 성령의 기름 부음의 역사이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서열의 기름 부음이 있다. 하나님의 활동하시는 강력한 능력이 있다(엡1:19). 오병이어의 기적이 어떻게 인간의 힘으로 믿어지겠는가? 그러니 예수 믿어지는 것은 놀라운 기적 중의 기적이다. 당신이 예수를 믿는다면 당신에겐 성령의 기름 부음이 말씀대로 거한다. 그 기름 부음이 오늘도 당신을 가르치심을 믿어라. 당신은 좋은 스승을 둔 제자다. 자부심과 당당함을 가질 수 있다. 할렐루야!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것은 성령의 기름 부음의 사역이다. 말씀과 기도로 많이 깨닫게 해 주심을 받아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는 일은 성령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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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기름 부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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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열 목사] 우리의 도피처
- 도피처란 도망하여 몸을 피하는 곳으로 매우 부정적인 말이다. 실제 도피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면 연관 검색어로 “비열한, 소심한”이 뜬다. 그래서 치열한 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요즘 사람들에게는 도피는 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앞만 보고 나가야 하는 사회 속에서 잠깐 멈추어서는 것조차 부담이 되어버린 현실이 씁쓸하다. 삶 속의 스트레스가 극심해질 때마다 우리에게도 도피처가 필요하다. 사람들 대부분은 피시방, 노래방, 술집, 산을 도피처로 삼지만, 도서관이나 서점을 도피처로 삼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책을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점 자체의 고요함과 따뜻한 분위기가 감성에 적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임경선 작가는 자신의 에세이 집에서 “카페”라는 공간을 정의하기를 불필요한 마음의 짐을 들고, 머릿속을 비워내고,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새로움의 힘을 얻어가는 곳이라 하였다. 경쟁이 치열한 현실 속에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쉬어갈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일상 속 혼자 조용히 있을 곳이라면 도피처로 족하리라 생각된다. 도피는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찬탈한 태종 이방원이 싫어 깊은 산속에 들어간 생육신들과 같은 현실 도피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도피처는 절대 소심하고 비겁한 자들이 찾는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한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에너지를 충전시킬 수 있는 곳, 불안해진 마음을 달랠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라야 한다. 구약성경에 하나님께서 부지중에 실수하여 사람을 죽인 과실 치사범의 생명을 보존시켜 주시고자 도피성 제도를 두게 하였다. 도피성이란 히브리어로 이르 미클라트라는 말로써 “받아들이는 성읍”이라는 뜻인데 살인한 사람을 받아들여 그에게 안전을 보장해주는 장소이다. 그러나 아무런 기준 없이 살인자를 다 받아주는 것이 아니라, 비고의적인 살인자 곧 과실 치사 자의 경우에만 해당 되었다. 이 도피성은 요단강을 중심으로 동쪽에 3개, 서쪽에 3개가 있었다. 이스라엘 전역에서 누구든지 사고가 나면 도피성으로 빠르게 도망할 수 있도록 잘 보이는 언덕 위에 세워져 있었고 길도 넓게 잘 정비하여 두었다. 도피성에는 유대인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 속에 거류하는 거류민과 이방인들도 들어갈 수 있었다. 이는 “구원의 포괄성”을 의미한다. 구원은 유대인들이 오해한 것처럼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혈연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열려 있었다. 내게도 도피처가 있다. 고향의 바다이다. 목회가 힘들고 어려울 때, 힘든 선택을 해야 할 때와 심한 고독이 나를 짓 누를 때에는 고향의 바다를 찾는다. 이곳은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는 곳이며 기도의 처소였다. 바닷가를 거닐며 상념에 잠길 때, 과거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고향의 바다는 삶에 지친 나의 몸과 마음을 포근히 품어주는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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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열 목사] 우리의 도피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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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세상에 묻지 않는 기도
- 한 증기선이 캐나다의 뉴펀들랜드 섬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 날은 수요일이었는데 바다에 안개가 너무 많이 끼어서 배는 거의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승객이 선장을 찾아와서 묻습니다. 죠지 뮬러 목사님이었습니다. “선장님, 저는 토요일 오후까지 퀘벡에 도착해야 합니다. 그 때까지 그 곳에 배가 도착할 수 있을까요?” 선장은 단호한 어투로 “불가능합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 대답을 들은 뮬러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저는 평생 동안 약속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습니다. 정말 불가능한가요?” 그 물음에 선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저도 도와드리고 싶습니다만 지금으로서는 도리가 없군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뮬러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선장은 이 같은 상황에서 난데없이 기도를 말하자 뮬러 목사님을 이상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지금 안개가 얼마나 짙은 지 안 보이십니까? 이런 상황에서 무슨 기도를 한다 말입니까?” 그 선장에 말에 뮬러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내 눈은 안개가 얼마나 짙은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움직이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고 있소.” 그렇게 말을 하고 목사님은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뜻에 합당하다면 이 안개를 5분 내에 걷어주십시오. 퀘백에서의 약속을 하나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그는 그 불가능하다 하는 상황에서도 담대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그가 기도를 마치자마자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교회의 집회를 위해 퀘백으로 가는 중이었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그렇게 놀랍게 응답하시고 그가 감당해야 할 사명의 길을 열어주셨던 것입니다. 필자는 기도하면 무조건 하나님이 들어 주신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뮬러 목사님의 기도는 세상에 묻지 않는 기도였습니다. 즉 세상의 상황에 구애 받는 기도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세상에 상황을 초월하여서 오직 자신에게 사명을 주신 하나님만 믿음으로 기도하였습니다. 늘 기도하는 여러분, 기도하면서 세상에 묻지 마십시오. 내가 기도하는 제목이 꼭 기도해야 할 제목이라는 확신이 들면 세상의 모든 불가능성을 초월하여서 기도하십시오. 6·25전쟁 때 국군으로 참전한 한 장로님의 간증입니다. 장로님 마을에 북한군이 들이닥쳤습니다. 당시 중학생이던 장로님은 잡히면 의용군에 끌려갈 것이니 급히 낟가리 속에 숨었습니다. 북한군은 집집마다 뒤지며 젊은이들을 끌어냈고, 장로님이 숨어있던 낟가리를 대검으로 찔렀습니다. 칼끝이 가슴 바로 앞까지 오기도 했습니다만 장로님을 찌르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죽이시지 않으면 죽지 않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나를 지키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북한군이 떠나지 않고 며칠 동안 그 집에 머무는 바람에 낟가리에서 나올 수도 없었습니다. 중학생 나이인지라 얼마나 배가 고팠겠습니까? 그러다 문득 하늘을 보니 까마귀가 날아다니는 것이 보였습니다. 장로님은 문득 교회에서 배운 성경에 나오는 한 사건을 기억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에게 까마귀가 음식을 물어다 준 것이 생각이 났던 것입니다. 장로님은 지금 세상에도 그런 일이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머뭇거리지 않고 그 즉시 기도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 아버지, 엘리야를 먹이신 것처럼 제게도 먹을 것을 좀 주세요.” 그런데 기도가 끝나자마자 까마귀가 아니라 마당에 있던 암탉이 갑자기 낟가리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낟가리 안에다가 알을 낳는 것입니다. 따끈따끈한 생달걀이었습니다. 장로님은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에 즉시 응답해 주신 것이 너무 신기해서 그 달걀을 먹으며 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암탉이 또 여기다가 알을 낳게 해주세요.”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북한군이 있는 동안 암탉은 매일 아침 낟가리로 들어와서는 신선한 달걀을 낳고 가는 것입니다. 북한군이 떠나자 장로님은 숨어있던 낟가리에서 나왔고, 그렇게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을 체험한 것이 평생의 간증이 되었다고 합니다. 기도는 세상에 묻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즉 기도는 세상의 가능성에 기대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의 모든 불가능성을 넘어서 얼마든지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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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세상에 묻지 않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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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아파트 순찰
- “소장님, 어디 공사 있나요? 너무 시끄러운 소리가 계속 나요.” 아파트 내 크고 작은 공사가 있으면 보통은 관리실에 신고한다. 공용 부분의 공사는 물론이고 세대 내 리모델링 공사를 진행하더라도 관리실에서 모를 수 없다. 그런데 공사하는 소리가 난다는 민원에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신고가 안 된 공사가 있었나? 확인해 봐야겠군.’ 어차피 늘 있던 아파트 순찰이 오후에 있던 터라 점심 식사를 서둘러 마쳤다. 승강기 12층을 눌러 가장 위에서부터 계단을 타고 내려오며 각 층을 확인한다. 1층 출입구 비밀번호를 어찌 알았는지 동네 마트 광고지가 세대마다 현관에 붙어 있다. 그냥 둬봐야 입주민에게도, 붙여둔 알바에게도 좋을 것이 없다. 내려오며 하나씩 수거. 바닥에 떨어진 마스크도 줍고. 갑자기 비가 올 수도 있으니 열어둔 창문도 닫는다. 1~2라인에는 공사 흔적이 없다. 골치 아픈 상황도 없다. 땡큐. 옆 라인을 살피기 위해 12층에 올라간다. 문이 열리며 몹시 당혹스러운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할머니 한 분이 얇은 옷 하나만 걸치고 채소를 현관에 풀어둔 채 다듬고 있다. 양도 엄청나다. 이곳은 계단과 이어지는 공용 현관인데 여기서 뭐 하는 건가 싶지만 당황하지 않은 척 안부 인사를 드린다. 당황하지 않은 표정과 다르게 총총거리며 속히 아래층으로 걸음을 옮긴다. 가득 쌓인 채소를 보니 떠오르는 엉뚱한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난다. 나도 관리인 다되었네. ‘음식 쓰레기통 금방 차겠구나.’ 몇 층 내려가지 못하고 다시 걸음이 멈춰진다. 할머니 한 분이 나를 보자 잘 만났다며 잠시 들어와 보라 하신다. 집안의 소소한 일을 자주 문의하시는 분이라 내심 긴장된다. ‘이번에는 무슨 일일까?’ 재촉하시는 소리에 따라 들어가 보니 텔레비전이 안 나온단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며 좀 봐달라고. 나라고 뭐 아나. 그냥 이리저리, 집에서 하듯이 만져본다. 셋톱박스 확인하고, 선을 다시 연결해보고. 문제를 찾지 못하며 끙끙거리다가 통신사에 전화를 걸어 겨우 해결을 한다. 휴, 일단 해결은 했다. 시원한 거 한잔하고 가라는 어르신을 뒤로한 채 얼른 집을 나선다. 더 앉아 있다가는 집안 가구를 옮겨야 할지도 모르기에. 계단을 내려오며 몇 분의 입주민, 몇 건의 민원과 더 마주한다. “요즘 계단에서 냄새가 나요.” “위층의 에어컨 물이 자꾸 떨어져요.” “건너편 고물상 못 쫓아냅니까?” 관리소장은 슈퍼맨인가? 종류도, 난이도도 다양한 일들과 매번 마주한다. 단지 12층을 내려왔을 뿐인데 진이 빠진다. 내 체력이 문제인지, 사람들과 접촉이 문제인지 모르겠다. 40세대의 크고 작은 민원을 받아내다 보면 경험치는 올라가지만, 기력은 소진된다. 태극권의 고수처럼 물 흐르듯 흘려보내야 할 텐데 아직 내게는 그만한 내공과 기술이 없다. 만신창이가 되어 관리실에 도착한다. 잠시 의자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보며 충전. 얼마지 않아 돼지국밥집을 운영하시는 입주민이 나를 큰 소리로 부르신다. 아주 밝게 웃으시지만 나는 그 미소의 의미를 경험상 이미 알고 있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보이는 나의 미소가 어쩐지 억지스럽다. “어이~ 신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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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아파트 순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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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승리의 비결 (삼상7:3-11)
- 전쟁 영화를 보다보면 항상 들을 수 있는 말이 있는데 “D-day”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곧 공격을 개시하는 “중요한 날” 혹은 “결정적인 날”이라는 뜻입니다. 세계적인 신학자 <오스카 쿨만>이 말하기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D-day와 V-day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D-day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초림하셔서 사단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준 날이고, V-day는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성도들이 완전히 승리하는 날을 가리킵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D-day와 V-day 중간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 두 Day사이에 살고 있는 우리가 힘써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선한 싸움을 잘 싸우는 사람들이 V-day에 승리의 주인공들이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성경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요한계시록에 보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싸우고 승리하는 자들에게 승리의 면류관을 씌워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신앙이 퇴보되기 딱 좋은 시대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의 취미생활이 아닙니다. 지옥과 천국이 달린 문제이고, 천국에서 영생의 복락을 누리느냐 지옥에서 고통과 형벌을 받느냐가 달린 문제로서 인생 최대의 급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믿던 안 믿던 지옥과 천국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정하던 안하던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가고 안 믿으면 지옥에 갑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은 다 소홀히 하더라도 신앙생활만큼은 절대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신앙생활을 승리해야 하겠는데 어떻게 하면 승리할 수가 있을까요? 본문 말씀에 그 승리의 비결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영적인 구별은 승리의 비결입니다.(3-4) 둘째로, 믿음의 기도는 승리의 비결입니다.(5-8) 셋째로, 믿음의 예배는 승리의 비결입니다.(9-11) 우리 모두 사탄 마귀와의 영적 전쟁을 승리하고 하나님 앞에 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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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승리의 비결 (삼상7: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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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높임말(경어), 이대로 좋은가? (3)
- I. 서언(序言) ‘목사님 한국말은 너무 어려워요’. 이 말은 필자가 시무하는 교회에 다니는 필리핀에서 온 다문화 가족 중 한 여자 성도의 말이다. 필리핀에서는 기자 생활도 했고 교육수준이 상당히 있는 엘리트이지만, 우리 한국어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말을 처음 배울 때는 어렵지 않다.‘슬기로운 사람은 아침을 마치기 전에 배울 수 있고,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는 말처럼 아주 쉽고 과학적으로 잘 되어 있다. 또한 소리로 표현되는 언어 중에 한글은 11,000개 이상이고, 일본어는 300개, 중국어는 400개 정도이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란 말대로 너무 발달되어 있다 보니 외국인이 배우기로는 아주 어렵게 느껴지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그 중에서도 외국인 가장 어려워하는 말 중 하나는 요즈음 계속 논하고 있는 높임말이다. II. 높임말이 어려운 이유 높임말이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는 지난 호에서 논한 대로 높임말의 체계와 구조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외국어 중에는 우리 국어처럼 사회계층, 지위, 연령, 성별에 따라 화법이 구분되는 언어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영어권에서는 상대방을 부를 때 남녀노소 구분 없이 2인칭인 ‘You’ 라고 한마디만 해도 거의 통한다. 하지만, 우리 한국어는 그렇지 않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부름말은 각각 다르다. 예를 들어 동료나 아랫사람에겐 ‘너’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이나 윗사람에게 영어식대로 ‘You’ 라고 했다가는 큰일 날 것이다. 이건 1인칭 ‘I’ 도 마찬가지다. 대화하는 상대방에 따라 ‘내가’, ‘나는’, ‘저는’, ‘제가’ 등 여러 용어들을 쓴다. 그러다 보니 외국인들에게는 아주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외국인 뿐 아니라, 현대 이 시대의 젊은이들도 마찬가지다. 높임말에 대한 교육을 별도로 받지 않은 이유도 있겠지만, 높임말을 사용해야 한다는 당위성과 필요성도 별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유명인은 자신의 칼럼에서“현시대에 있어서 높임말은 필요 없다. 오늘날의 국제화 시대에 계속 높임말을 강조하면 많은 소통의 문제가 생긴다. 국제 관계나 남녀노소간의 소통에도 그러하다. ‘공자가 죽어야 산다.’는 말처럼 높임말의 강조는 많은 국익의 손실을 가져올 뿐 아니라 시대착오적인 일이다.”라고 했다. 이상의 주장은 한편으로는 옳은 말이다. 실제로 높임말 때문에 소통의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높임말은 지난 호에서 언급한 대로 우리나라 고유의 미덕일 뿐 아니라, 우리말의 우수성을 세계 속에 자리매김하는 또 하나의 국가적 위상이요 한류열풍을 가져오는 수단이다. 그 하나의 증거로 지금 우리 한국어는 세계 언어 중 가장 우수한 언어로 인정받고 있다. 2013년 태국에서 개최된 ‘세계문자 올림픽’에서 우리말은 당당히 금메달을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 국어의 날을 우리나라의 한글날인 10월 9일로 정하기 도 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 한국어 사용 인구수는 세계 12위로 되어 있다. III. 결어 이상으로 볼 때 우리 한국어는 국익의 손실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언급한 대로 세계 속에서 한국의 위상을 더 높이는 자랑스러운 우리의 보물인 것이다. 하지만, 세계 속의 위상에도 불구하고 높임말은 우리 사회,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있어서도 하나의 거추장스러운 걸림돌이 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어느 사회를 불문하고, 특히 다양한 계층이 모여 있는 교회에서는 최소한의 예의는 반드시 있어야 될 것이고, 이를 잘 이행할 때 이 사회 속에서 올바른 높임말 하나로도 아름다운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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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높임말(경어), 이대로 좋은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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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하 나
- 5월이 되면 가정의 달로 5월 21일이 둘이 하나 되는 부부의 날로 이날을 잘 보내려고 애를 쓰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 주님은 몸 된 교회뿐만 아니라 가정이 분리되지 아니하고 하나 되기를 지금도 간절히 소원하고 계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통일되고 하나 되는 모체가 교회라면 개인과 가정 역시 성전 같은 교회로 하나 되는 것이 옳은 것이라 믿는다. 그러면 왜 성도인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하나? 수많은 교회나 단체가 교리나 개인의 이익과 생각 때문에 하나가 되지 못하여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예수 안에서 사랑 가운데 거하는 공동체가 되지 못하고 찢어질 때 주님은 얼마나 마음 아파하실까? 아버지 하나님께 속해 있는 우리가 하나 되지 못하여 갈등과 아픔을 겪는 것은 큰 죄를 짓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 몸 된 교회나 가정의 구성원인 지체들이 충돌하고 한뜻으로 하나가 되지 못하면 결국 자기가 자신을 상처 내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부르심에 한 소망을 갖고 사는 우리는 성령도 구속해 주신 분도 오직 예수님뿐이시고, 하나님도 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명령을 따라 하나 되는 것이 마땅하다. 어떻게 하면 하나가 될 수 있을까? 한 마디로 우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해야 한다. 부르심은 성도답게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백성은 겸손으로 무장해야 한다. 먼저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정말 내가 죄인이다.’ 하고 솔직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다음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생각과 행위가 앞서야 한다. 교회에서 조금 일을 하면 시끄러워 눈살을 찌푸릴 때가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내가 일을 하면 얼마나 할까? 자기의 무력함과 무지함을 깨닫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겸손이 얼마나 필요한데 말이다. 겸손과 가장 통하는 사촌이 되는 말이 온유인데. 온유는 정말 하나님께는 기쁘게 순복하며 사람에 대하여는 남의 약점을 흠잡지 말고 부드럽게 말하는 것으로 우리가 가져야 할 귀한 태도이다. 루터는 ‘사탄은 인간을 단번에 쓰러뜨리지 못할 때는 동일한 시험을 여러 번 가해온다고 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 있어 겸손한 가운데 인내해야 사탄의 장기적 시험을 이길 수 있다고 말했다. 겸손으로 무장하여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할 때 교회와 가정은 하나로 일치된다. 작금에 수많은 교회와 가정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문제에 우린 눈과 귀를 기울인다. 주님이 계시는 곳은 반드시 겸손함으로 하나 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기계적으로나 무력이 아니고 다양한 은혜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옳다. 분량대로 은혜를 주신 목적을 알고 신앙의 일치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면 최고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일치가 그 근본 조건이 된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성장이 없는 신앙생활은 퇴보되고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간사한 유혹에 빠지거나 교회를 해치는 사탄에게 속아 넘어가면 절대 안 된다. 신자 된 우리가 먼저 주님의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고 진실 되게 살자. 분명히 겸손으로 무장하여 살 때 오직 하나 되어 은혜로운 가정과 교회가 된다는 것을 꼭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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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하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