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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7)- 관언유착(官言癒着)
언론이 독자들이나 대중들에게 주는 영향이 크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사실이 아닌 잘못된 기사나 중심을 잃은 기사는 많은 사람에게 혼란을 줍니다.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몇 해 전 우리 노회에서 모 목사를 순회 선교사로 파송한다고 기독교보에 기사가 올랐습니다. KPM 이사장과 담당자들이 파송 예배에 순서를 맡으며 파송 예배 사진까지 첨부하여 누가 봐도 총회에서, KPM에서 파송하는 선교사처럼 대문짝만하게 기사를 올렸습니다. 노회 파송 선교사도 아닌데 과장된 허위 기사를 올릴 수 있느냐고 기독교보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몇 주 후 신문 구석 어느 페이지에 짧은 한 줄로 000교회 순회 파송 선교사로 정정한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습니다. 그 기사를 본 대부분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은 KPM 파송 선교사로 알고 있습니다. 짤막한 정정 기사가 났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도 “부산서부노회 파송 선교사냐?”고 물어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선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KPM이나 노회에서 파송한 선교사처럼 위장을 하고 그것을 교단 신문인 기독교보에까지 기사화한 것은 그 저의를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디 이 한 건뿐이겠습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이 발생하여 총대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거짓된 걸음을 걷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 심히 우려됩니다. 기독교보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할 것입니다. 기독교보가 KPM 선교사로 파송하는 기본도 모른다는 것은 몰랐다고 하는 말 자체가 거짓말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의 파장도 결코 간과할 수 없지만, 신앙과 교리, 교회와 개인의 인권에 대한 의도적인 허위 기사는 고신 신앙 전체를 흔들 수 있는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문제는 고신 언론사는 총회 유지재단 이사회에서 관리하는 기관입니다. 유지재단 이사회는 총회장을 당연직 이사장으로 해서 총회 기관 중 최상위 기관으로 총회를 잘 알고, 총대들의 지지를 받아 총회 산하 교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감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유지재단 이사회가 직무유기 한 것입니다. 학원 이사들이 잘못할 때만 소환할 것이 아니라 유지재단 이사회가 잘못할 때는 그 파장은 훨씬 더 크고 중요하기에 반드시 소환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독교보가 총회 기관지인지, 유지재단 이사회 관할에 있는 기관지인지, 기독교보 자체 언론지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된다고 입을 모읍니다. 언론사 사장 얼굴이 기독교보에 빠지는 일이 없자 이 일에 대해서 총대들은 물론이요, 유지재단 이사회에서도 지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과는 마이동풍입니다. 순교 정신을 기본으로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모토로 하는 고신의 기관지인 기독교보가 본류의 신앙을 이탈한 것은 이미 옛말이고 특정 계파에 포진한 자들이 기고하는 재고 되어야 할 지나친 인문학적 논의와 신앙 고백적 정체성을 벗어난 잘못된 사상들이나 도배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고신 신앙을 가진 목회자들과 장로들, 교회들은 알게 모르게 기독교보에 대한 불신으로 불매 운동을 하고 있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입니다. 5월 2일 자 코람데오닷컴에 “교계 언론 편집 책임자의 이학규 장로 고소 건, 고검 재정 심사에서도 또다시 기각 판결”이라는 기사가 올랐습니다.(코람데오닷컴 참조) 이 사건의 실상은 전국 남전도회 임원으로 있는 모 장로님이 유지재단 이사로 출마하려고 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웠는데 그해에 언론사 사장 선거가 있어 보수 측 인사가 유지재단 이사가 되면 사장이 되는 길에 장애가 될 것 같아 코람데오닷컴의 기사대로 언론사의 직원이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운 장로를 “사퇴 종용”했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총회 산하 교회를 잘 돌아보고, 총회의 기관들을 바르게 잘 관리해야 하는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시작부터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일반 총대들은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는 계파와 개인의 이권과 자리가 그 배경이 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재미를 본 자들은 이제 총회에서 골치 아프게 투표하고 경쟁하는 것보다 아예 노회 총대를 조정하는 기가 찬 수법으로 발전했습니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계파에 표를 던질 사람을 골라서 총대라는 자리로 매관매직을 하고, 각 노회 지도급에 있는 목사 장로들을 총회 상임위의 자리로 매관매직해서 4월 노회 총대 선거가 끝나면 이미 상황이 종료되는 모양새로 발전되었습니다. 이학규 장로가 전국 남전도회 회장으로 봉직하고 있을 때 함께 임원으로 봉사하던 모 장로가 “사퇴를 종용”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항의한 것이 코람데오닷컴 에 기사 실린 것과 같은 결과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평생 법 없이도, 법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사는 목사, 장로가 이 일로 인하여 교회 생활이나 신앙생활에 방해를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경찰서와 법원으로 불려 다니며 고초를 겪고 어려움을 당했던 것에 대해서 고신 언론사를 관리하는 유지재단의 총회장과 목사, 장로 이사들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 궁금합니다. 왜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말입니다. 이학규 장로는 신앙적으로 잘 해결하고자 언론사의 불법 선거 개입 못 하게 해달라는 진정서를 총회 선관위에 제출했더니 총대가 아니라 진정서를 접수하지 못한다고 하더랍니다. 참 훌륭한 총회 선거관리 위원회이십니다. 그래서 “여기 보냈다, 저기 보냈다” 서류 핑퐁 게임을 하다가 결국 사법기관에 판단을 받기까지 하면서 이학규 장로가 당한 심적 피해, 정신적 피해, 일상 업무 손해의 피해는 누가 보상해줍니까? 고신총회가 이렇게 기본을 상실하고 무책임하게 하면 안 됩니다. 펜은 검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오보도 문제이지만, 언론이, 신문이 의도적이고 사욕에 치우쳐 고신의 정체성에 위배 되는 글이나 기사를 올리고, 무책임으로 일관할 때 고신총회 산하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미치는 파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총회 임원회와 학원이사회가 지난 총회 시 총대들을 속이고 총장선출 규정을 통과시켜 불법으로 총장을 선임했다고 신문에 기사화되어도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볼 때, 총회 임원회의 수장인 총회장이 유지재단의 당연직 이사장이기에 이 사실조차 그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게다가 현 총회장은 기독교보 발행인이 아니기에 변명하며 피해갈 수 있는 좋은 길도 열려 있습니다.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재정적인 문제는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릅니다. “반려동물을 장례식”에 대한 안건이 고신총회 신학부에서 재론되고, 어떻게 고신총회에서 “그따위 안건이 거론되느냐”는 회원들의 호통에 경남노회 모 회원이 나와 옹호 발언을 하며 “지난달에 우리 찐이(고양이)가 죽어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하늘나라로 보내줬다”고 말을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총회가 불건전하고 이단성이 있어 교류를 금지해도 전혀 문제의식 없이 그런 모임에 참여하고, 순서나 자리까지 맡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는 300M 거리를 유지해야 하지만 이전하는 것은 법에 명시가 없기에 괜찮다고 하는 고신입니다. 핑퐁 게임을 하다하다 안되면 법리해석을 문제 삼아 법제위에 해석을 요청하여 본질을 잊어버리게 하고 계파싸움 진영싸움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고신입니다. 양파도 아니고 벗겨도 벗겨도 끝이 없는 고신이여...... 언론은 “言路”를 여는 것입니다. 言路가 막히면 세상은 암흑세계나 다름없습니다. 한 마리의 개가 먼저 짖으면 온 동네 개가 때지어 짖어대듯이 기독교보가 먼저 총대를 메고 총회 여러 현안의 심각성을 알리면 동시에 총회 여러 곳에서 포문을 열고 동참할 것입니다. 언론은 여론을 집약하고 전문가들의 진단과 의견을 수렴하거나 민심을 파악한 후 사안에 따라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로 펜 끝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언론의 사명입니다. 총회 성도들을 대신해서 할 말을 하며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선도해야 합니다. 독선의 권력을 향한 비판은 언론이 지향해야 할 우선순위이자 언론 존재 이유입니다. 이 가치관이 상실되면 결국 관언유착(官言癒着)이 되기 쉽고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관제언론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사리사욕에 길들어서 소위 ‘독선과 권력’의 ‘종’이 된다면 스스로 펜을 손에서 내려놓아야 함은 불문가지입니다. 기독교보가 그렇게 길들어진 “관보(官報)”라는 비판을 듣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집을 지키기 위해 열심 짖어야 할 개가 요즘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주인 행세를 한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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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6 : 성가대와 찬양대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평생을 예배드리면서도 때로는 이 말이 옳은가 틀리는가에 대한 의문이 되는 용어들이 많다. 본 기고의 목적이 이를 바로 알고 사용하자는 취지에서 계속 기고하지만, 필자 자신도 때로는 헷갈릴 때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예배 중의 순서에서 찬양대인가 성가대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통합 측 총회에서는 찬양대라고 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수많은 교회들이 성가대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는 여기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성가대(聖歌隊)와 찬양대(讚揚隊)의 용어 차이 두 용어는 일반적으로 보면 거의 같은 말이다. 국어사전에도 성가대는 “교회 등에서 성가를 부르기 위해서 조직된 합창대”라고 했고, 찬양대도 “남녀 기독교 신자로 조직된 합창대”로 둘 다 영어로도 ‘choirs’로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같은 듯 다른 용어이다.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성가와 성가대란? : 먼저 일반적으로 성가라는 용어는 범(凡) 종교적으로 사용하는 말로서 일반적인 음악과는 다른 거룩한 음악이란 뜻이다. 그래서 성가는 범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는 ‘종교음악’으로서 세속적인 노래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의 찬불가는 불교의 성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 용어가 전혀 언급이 없다. 오직 찬양 혹은 찬송으로 표현되어 있다. 2. 찬양과 찬양대란? : 찬양이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으로서 참된 경건의 중요한 요소이다. 즉 찬양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성육신과 십자가 지심과 부활, 종말과 재림 등의 구속의 은혜를 노래하는 것이 찬양이고 또 함께 부르는 것이 찬양대인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가진 찬양은 개역성경에는 213회, 찬송은 98회, 찬미는 14회가 나온다. 하지만 성가란 말은 한 곳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찬양은 일반 종교의 성가와는 차원이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만을 높이는 노래인 것이다. 3. 성가와 성가대란 말을 교회에서 사용해 온 이유는? : 왜 성경에도 없는 이 용어를 그동안 교회에서 사용해 왔을까? 그 이유는 1976년에 나온 공동 번역 성경에서 개역성경의 “노래하는 자”, “성가대”로 12회에 걸쳐 번역을 했다. 또 하나의 성가대란 용어의 기원은 한 출판사가 흑인 영가의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곡집”이라 부른 것이 성가대의 이름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의 ‘세이까다이’(성가대 せいかたい, 일본 사람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며 노래할 때 쓰는 용어)가 직수입되면서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서 그동안 찬양대라고 했던 용어가 성가대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성가대란 말은 일본어의 잔재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가대란 말은 1958년 출판된 동아출판사 사전에도 성가대란 명칭이 없었으나 1994년 민중서관의 국어사전에서 처음 등재되었고 그 이전에는 성가대라는 말이 고정되어 사용되는 곳은 일본의 ‘세이까다이’뿐이었다. III. 결론과 제언 앞서 서론에서 밝힌 대로 성가대와 찬앙대라는 말은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동안 큰 문제 없이 사용해 왔기 때문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성경에도 없는 말이며, 일본어의 잔재라는 문제도 있다고 볼 때, 또한 타 종교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굳이 성가대란 말을 계속 사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성경에도 없는 성가나 성가대란 말보다는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사용해 왔던 찬양, 찬양대란 우리 고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올바른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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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성경의 큰 그림과 안식(1)
1)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창조되었다(창1:26~28).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일 때 가장 행복하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안식한다. 사람은 창조 되자마자 안식을 살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함께 안식하시려고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을 완벽하게 창조하셨다. 완벽이 무엇인가? 완벽하다는 말이 단순하게 세상을 좋고, 아름답게 창조했다는 말로만 보아선 안 된다. 물론 그런 뜻도 있다. 그러나 완벽하게 창조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상태를 말한다. 비 인격체인 피조물이 완벽할 수 있는 것은 인격체인 사람이 완벽할 때 완벽할 수 있다. 모든 피조물들이 사람의 손에 주어졌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하나님과 동일시 될 때 완벽하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하게 세상을 창조하셨다.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였고 완벽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로 완벽했다. 그래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 되게 하신 일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 될 때 완벽하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임마누엘을 이루시는 날 우리는 하나 되었다. 완벽 해졌다. 회복된 날이다. 하나님의 완전함 같이 우리도 완전해졌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고 하셨다. 안식을 말한다. 완전함을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임을 알 때 완전하다. 또 이것이 행복이고 안식이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 이것을 보고 안식의 삶이라고 한다. 완벽하기 때문에 더 이상 무엇을 보텔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안식은 피곤해서 안식하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어 안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고 완벽하기에 안식이다. 점이라도 하나 더 찍으면 작품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붓을 놓는 화가처럼 완벽하고 부족함이 없어 쉬시는 것이 안식이다. 사람은 창조되자말자 안식을 살았었다. 보기에 심히 좋았다. 하나님은 인간을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당연히 모든 피조물도 완전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가 하나님의 첫 번째 그림이다. 하나님의 큰 그림은 안식이었다. 2) 사단에게 속아 안식을 잃었다 사람은 사단에게 속아 합법적인 하나님과의 분리가 일어나 버렸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완전함이고, 안식인데 안식을 잃어버린 것이다. 마귀에게 속아서 신적 통치권을 빼앗겨 버렸다.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함으로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는 말씀대로 되었다. 그 결과 안식, 즉 임마누엘의 완벽함을 잃어 버렸다. 마귀도 언제나 말을 먼저 먹인다. 마지막 때도 마귀의 주된 일이 말을 먹이는 일을 한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계12:15)라고 했다. 여자인 교회를 말인 물로 떠내려 보내려 한다. 뱀인 마귀는 입에서 물을 토하는 것이다. 다른 복음을 많이 토한다. 다른 복음은 없다. 하늘의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갈1:8). 마귀는 다른 말을 토해 냄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큰 그림인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은 안식이다.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보아야하는데 보지 못하게 다른 말을 넣는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고 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의 그림인 안식이 없으면 두렵다. 안식을 보지 못하는 자의 모습이다. 안식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내가 다른 복음을 먹었습니다."라고 스스로 확증한다. 스스로 벗었다고, 두렵다고 고백한다. 그전에도 벗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누가 너에게 벗었다고 알려줬느냐"고 물으신다. “누가 그런 말을 해 주더냐”라는 뜻이다. “네가 무엇인가 스스로 입어야 한다고 누가 말 하더냐”는 질문이다. 지금도 사단은 우리가 예수 외에도 무엇을 입어야 한다고 속삭인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왜 따먹었느냐?"라고하시지 않고 "누가 벗었다는 것을 알려줬느냐?"라고 물으셨다. 말의 권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 주는 순간이다. 사단의 속임수는 다 말로부터 온다.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말을 들으면 보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큰 그림이 보인다. 사단의 말을 들으면 벌거벗음이 보이게 된다. 두려움을 보게 되고, 두려워 숨게 된다. 주님이 입혀 주신 것 외에 뭔가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엔 온전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하는가? 말이 온전하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고 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욕도 안해야하고,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욕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말이 온전하려면 복음을 말하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이다. 복음을 말하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우리도 온전할 수 있다. 온전한 말을 하면 아버지의 일인 안식을 보게 된다. 우리에게 너무나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한다. 너무 아까운 세월을, 아까운 인생을, 남의 이야기하다가 다 보낸다. 비판과 불평불만만 하다가 시간을 다 보낸다. 안식이 있을 리가 없다. 사단은 말로 우리를 속였고 속이고 있다. 안식은 우리의 믿음의 말에서 온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10:10). 마귀에게 속아 안식을 잃어버린 것은 말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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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희생
우리는 봄이 오면 마음이 들떠 어디론가 꽃구경을 가기를 원하고, 늘 가는 곳이라 할지라도 봄꽃이 핀 곳이면 가족들이 나들이하는 경우가 많다. 4월 초순에 비가 오는 산복도로를 거쳐 교회에 가는 도중에 아름답게 피어있는 벚꽃을 바라보는 순간 “아! 이렇게 아름답게 핀 꽃을 비바람이 망치면 어떻게 하지?”하는 걱정이 앞선다. 내 집 정원의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거워할 수 있는 벚꽃을 비바람 때문에 망치게 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통상 벚꽃은 일본의 나라꽃이라 생각하고 별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은데 실상은 원산지가 우리나라 제주도라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나라의 꽃이니까 더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라 믿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잎도 피우지 않고 살얼음이 언 메마른 땅속에서 뿌리를 내려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한겨울 내내 자기의 몸을 단단히 무장하여 정한 시간에 꽃을 피우는 식물이 바로 벚꽃이라는 데서 관심이 더 가고 피어있는 그 자체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가정집 정원에 있는 꽃나무들은 그래도 춥다고 싸주기도 하고 거름도 하며 옮겨주기도 하고 가지치기도 하지만 벚꽃은 차가 많이 다니는 길가나 산 중에서 전혀 무관심 속에 홀로 자립하여 이른 봄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 너무 장하고 아름다울 뿐이다. 꽃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수 있는 시간은 겨우 일주일도 안 되기에 항상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렇게 고생하여 잠간 동안을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선사하기 위해 정말 희생한 벚꽃의 수명이 좀 오래 지속 되면 얼마나 좋으랴. 게다가 벚꽃이 질 때에도 벚 눈을 내려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아무 불평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따뜻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마치 눈이 오는듯한 모습으로 꽃눈이 낙화한다. 그것이 바로 자연적인 아름다움의 자체가 아닐까? 흰 꽃잎이 떨어진 것은 분명히 하얀색인데 바람이 불어 모인 블럭 바닥은 분홍색 꽃눈으로 소복하게 쌓인다. 눈은 밟으면 ‘뽀드득’이란 소리라도 내지만 떨어진 꽃눈은 아무리 밟아도 소리를 내지 않고 인간의 발과 자동차의 바퀴에 짓밟히며 휘날릴 뿐이다. 오직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순종하여 이렇게 끝까지 희생하는 것이 바로 벚꽃이라는 것에 나는 감동을 받는다. 우리 주위에도 다른 사람의 아무런 도움이 없이 주님이 말씀하신 일들을 잘 수행하여 사회에 귀감이 된 아름다운 모습이 매스컴에 등장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분들은 오직 자기에게 주어진 미션을 좌우를 살피지 않고 오직 앞만 바라보고 나아갔기 때문에 큰일을 해내었을 것이다. 한낱 미물과 같은 식물도 말없이 자기를 희생하고 아름다움을 선물하는데 우리가 기대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지 못하면 실망하고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벚꽃은 자기의 아름다움을 봄꽃으로 인간인 우리에게 잠간 보여주기 위해 동한의 춥고 쓰라린 고통을 다 견뎌내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변함없이 희생한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믿음의 형제들과 이웃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정말 벚꽃처럼 나를 희생하고 말없이 맡겨진 일을 수행하는 데 최선을 다하면 우리가 사는 곳이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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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저축할 내용 (창41:46-57)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에 보도 된 내용에 의하면, <영국 교육과정평가원>이 새로운 아동 교육개혁 방안을 발표 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11세-16세까지 중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금융교육을 학교 정규 과목으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수학을 배우고 과학을 배우는 것처럼 이 수업을 통해서 스스로 부채를 관리하는 것을 배우고,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 연금 계획 짜는 것을 배우고, 금리를 계산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는 9월부터는 모든 <영국>의 5세 된 아동들에게는 정부로부터 250파운드가 지원 되어서 자신의 펀드를 개설하게 된다고 합니다. 일반 가정의 아동들에게는 250파운드(약$500)의 펀드 자금이 지원되고 저소득층 아동들에게는 500파운드의 펀드 자금이 지원된다고 합니다. <영국>정부가 이렇게 어린 아이들에게 조기금융교육을 실시하는 까닭은 매년 해마다 개인 파산 신청자들이 늘어나는데 대한 대처 방안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사람이 일찍 돈을 알면 좋지 않다고 해서 어린아이들에게 돈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돈을 가르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돈의 가치를 알게 해야 하고, 올바르게 돈 버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고, 올바르게 돈을 저축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보다 더 안정된 내일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안정된 내일을 사는데 있어서 저축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 가운데 꼭 저축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많이 저축할수록 보다 나은 내일을 보장해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저축해야 할 것들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물질을 저축해야 합니다.(창41:46-57) 둘째로, 기도를 저축해야 합니다.(시32:6-7) 셋째로, 선행을 저축해야 합니다.(딤전6:17-19) 필요하고 좋은 것들을 많이 저축해서 오늘 보다 내일이 더 안정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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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해녀의 욕심
‘물숨’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제주 출신의 고희영 감독이 7년 동안 제주도 우도(牛島)의 해녀들과 함께 지내면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잘 몰랐던 해녀들의 삶을 속속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해녀들에게는 계급이 있습니다. 제일 높은 계급인 상군은 가장 깊은 바다까지 들어가서 작업을 합니다. 보통 15-20미터의 바다까지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중군이고, 맨 마지막 하군은 일명 똥군이라고도 부르는데, 2미터 이하의 바다에서만 작업을 합니다. 그 해녀들의 계급은 노력과 경험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자신의 숨 길이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바로 그 숨길이로 계급이 정해진다고 합니다. 이렇듯 상군, 중군, 하군 이라는 계급에 따라 해녀들이 작업하는 바다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하지만 모든 해녀들이 바다에 들어갈 때마다 동일하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물숨’입니다. 물숨은 바다 밖에서 숨을 쉬는 것과는 달리 바다 밑에서 들이마시는 숨을 의미합니다. 이 물숨은 해녀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아주 무서운 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에 한 두 명의 해녀가 물숨을 먹고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물숨은 다른 말로 하자면 욕심입니다. 자신의 숨 길이만큼 숨을 참으면서 작업을 하던 해녀가 다시 숨을 쉬기 위해서 물 위로 올라가려 합니다. 이 때 저 밑에 큼지막한 전복이 해녀의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그 순간, 그것에 대한 욕심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전복을 따기 위하여 물 아래로 내려가는 해녀는 그 물숨을 먹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사고를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면서도 욕심을 이기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해녀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은 자신의 숨만큼만 해산물을 따서 재빨리 물 위로 나오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부질없는 욕심을 경계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러하기에 해녀들은 바다를 가리켜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다는 무서운 곳이지만, 욕심을 버리면 친정엄마처럼 다 내어 주는 곳이야!” 우리는 손안에 그 무언가를 움켜쥐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숨을 참으며 견뎌냈을까요? 우리 또한 욕심내지 않아야 할 것,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에 욕심을 내다가 물숨을 마시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장 14-15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만족하는 법을 모릅니다. 진짜 자신들에게 필요한 영적인 것에 대한 열망은 없이 사실은 지금 필요하지 않는 것들을 위해서 더 더를 외치며 욕심에 사로잡혀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에든지 욕심을 품는 순간 불행이 시작됩니다. 욕심이 많을수록 불만이 많아지고 마귀의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욕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죄에 가장 약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욕심은 하나님께도 응답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다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에 응답하시지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여서 기도 응답에 대해서 의심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야고보서 4장 3절에서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의 기도는 좋아도 너희의 욕심은 싫다, 나는 결코 너희의 욕심에는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욕심을 내고 또 내지만 사실은 욕심으로 인해서 인간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서 이미 내게 주신 것에 자족하는 데 있고, 그 자족에서 진정한 감사가 나오고, 그 감사로 인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제 헛된 욕심의 물숨을 버리고 자족과 감사의 바른 숨을 쉬면서 진정한 행복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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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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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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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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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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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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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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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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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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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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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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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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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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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리더에 대하여(7)
- 술을 즐기지 않아야 한다 술을 가까이하고 술을 많이 마시다가 실수하고 죄짓게 됩니다. 리더는 술을 멀리해야 합니다. 술을 가까이 하면 세상을 가까이 하는 증거입니다. 세상을 가까이 하면 물들게 되고 유혹에 넘어지게 됩니다. 술친구를 가까이 하면 술을 마시게 됩니다. 술취하지 않고 성령의 새 술에 취해야 합니다. 의인이었던 노아도 술에 취해 실수했습니다. 성경은 술을 가까이 하는 것을 금합니다. 리더가 술을 가까이 하여 술에 취하게 되면 죄 짓고, 실수하고, 약점이 잡히게 됩니다. 리더가 실수하고 죄지으면 신뢰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 영적 리더가 술을 가까이 하면 덕을 세우지 못합니다. 술이 주는 피해가 큽니다. 술을 많이 마시면 분별력, 판단력이 떨어집니다. 리더는 분별력, 판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술을 많이 마시게 되면 방탕하게 되기도 합니다. 많은 물질을 허비하게 됩니다. 건강에 지장을 줍니다. 술을 많이 마시다가 건강을 잃는 예가 많습니다. 리더는 건강해야 합니다. 건강해야 리더십이 세워집니다. 지혜로운 리더는 술을 멀리하며, 술을 즐기지 않습니다. 성장, 성숙해야 한다 리더는 성장하고 성숙해야 합니다. 성장하려면 겸손히 배워야 합니다. 게을러서 배우지 않으면 성장이 없습니다. 성장이 없는 리더는 무너지게 됩니다. 지적, 영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독서를 해야 하며, 세미나에 참석해 배워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연구하여 배워야 합니 다. 리더십에 대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영육이 건강해야 성장합니다. 지혜도 성장해야 합니다. 리더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부단히 노력 하고 공부하면서 성장해야 합니다. 리더의 크기 만큼 리더가 이끄는 공동체가 커집니다. 성장에서 성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성숙은 무르익은 열매입니다.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성숙해야 합니다. 인격의 성숙은 고난과 연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인간은 고난이 없으면 성숙해지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성숙한 리더로 만들기 위해 수많은 고난과 연단을 통해 훈련시키고 인격이 성숙하게 하십니다. 인격은 사람 됨됨이, 좋은 성품, 예수님 닮은 성품입니다. 리더가 인격이 성숙해야 좋은 영향을 주고 사람들이 따르게 됩니다. 인격이 성숙한 자가 좋은 리더입니다. 고난을 당하면 인간은 겸손하게 됩니다. 고난과 연단이 좋은 리더를 만듭니다. 리더였던 모세, 요셉, 다윗, 바울은 수많은 고난을 통해 인격이 성숙해 졌습니다. 고난 때문에 온유, 겸손한 리더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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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리더에 대하여(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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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미안, 용서가 안 될 것 같아
- 아파트 분리수거장. 정확히 표현하면 ‘분리수거용품 배출장’이 맞을 것이다. 이곳은 분리수거가 가능한 물품을 내어두는 공간이다. 그런데 여기를 쓰레기 버리는 곳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아니, 생각보다 많다. 관리하기 전에는 예상치 못했던 다양한 물품을 이곳에서 마주하게 된다. 회피 1순위는 위험한 물건이다. 칼, 쇠꼬챙이, 깨진 유리 등은 상당한 위협이 된다. 여러 물품에 섞여 있는 것을 모르고 치우다가는 큰일이 날 수 있다. 가볍게 몇 번 다친 적이 있어서 이제는 미지의 쓰레기 더미 속에 함부로 손을 넣거나 번쩍 들어 올리지 않는다. 왜 저런 흉기를 분리수거장에, 그것도 ‘꽁꽁’ 숨겨 두는지 모르겠다. 누구 하나 죽어보라는 걸까? 회피 2순위는 더러운 물건이다. 사용한 생리대, 사용한 기저귀, 변(똥), 배달음식 쓰레기 등 정말 토할 것 같은 녀석들이 나타난다. 불쾌하겠지만 이 글을 보시는 분도 상상을 해보시라. 아파트 공용공간에서 이런 흉물과 마주할 때 어떨 것 같은지. 다른 입주민 보기 전에 치워야 하는 사명이 내게 있지만 나 역시 회피 본능이 앞선다. 민망하게 구역질이 나오기도 한다. ‘니가 왜 거기서 나와.’ 분리수거장을 정리하다 보면 황당함에 어느 트로트 가수의 노랫말처럼 혼자 말이 터지기도 한다. 한 번은 지하 주차장 청소하다가 구석에서 발견된 변이 있었다. 사람의 것인지 동물의 것인지 모양으로는 애매했으나 발견된 위치가 구석진 것으로 봐서 사람의 소행이지 싶다. 동물이 굳이 저 장소에서 변을 누진 않을 것 같았다. 아무튼, 치우기 너무 싫고 구역질 나서 한참을 그냥 두었다. 자연적으로 말라 냄새도 줄고 말라 굳었을 때 치운 적이 있다. 열심히는 하고 있는데, 가끔은 모든 일에 주께 하듯 못하겠다. 비위가 너무 상해서. 계약된 근무는 주 5일이다. 주말에는 청소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분리수거장은 하루만 그냥 두어도 그 기능을 상실할 지경이기에 주말에도 잠시 나가 물건을 정리한다. 너무 하기 싫지만, 주일이면 오전 예배가 끝난 후 바로 아파트로 향한다. 양복바지에 작업화를 신고 3M 장갑을 낀 이상한 차림으로 신속히 정리한다. ‘아... 오늘 이건 또 뭐냐.’ 한 봉투 안에 음식물과 잡쓰레기가 사이좋게 모여 있다. ‘그냥 치울까.’ 예배 끝난 후라 넉넉한 마음이 들다가 그냥 봉투를 까 보기로 한다. 뭔가 단서가 발견되면 주인에게 돌려줘야겠다는 더욱 선한 마음이 역사한 것이다. 큰 비닐을 주차장 바닥에 깔고 봉투 안의 쓰레기를 다 쏟아낸다. 오늘 주인공은 ‘회’다. 한때 싱싱했을지 모르나 지금은 고약한 냄새가 난다. 주문하신 분은 채소를 싫어하나 보다. 함께 딸려 온 상추가 작은 비닐 안에 그대로 남겨져 있다. 섞여 있는 휴지와 플라스틱 용기를 뒤적거려 본다. 「초장을 많이 주세요.」 잔뜩 구겨진 주문서를 찾았다. 광어회 사이즈(size)와 초고추장을 추가 요청한 특이사항까지 기록되어 있었다. 심지어 주소와 연락처까지 남겨져 있다.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만, 월급이 작은 관리소장은 용감하다. 입주민에게 전화를 걸어 그간 참아왔던 분노를 터뜨린다. 어물쩡 넘어가려던 입주민이 음식 종류와 크기까지 설명하며 따지니 부인할 수가 없다. 증거가 명백한 상황에 연신 죄송하다는 말 외에 변명조차 하지 못한다. 유사한 일이 자주 발생했다. 이번에는 다행스럽게도 사과를 받았지만,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주차장에 펼쳐둔 쓰레기 사진을 찍는다. 경고문을 만들 계획이다. 물론 이번에 식겁한 입주민의 신상은 드러내지 않고 공지할 계획이다. 까칠한 목사 관리소장이라는 말이 나와도 어쩔 수가 없다. 예쁜 글꼴을 골라 큼지막하게 문서를 만들어 출력한다. 「관리소장이 요즘 시간이 많습니다. 특이한 물건이 분리수거장에 나와 있으면 하루 종일 CCTV를 돌리거나 관련 증거를 수집해 공개할 계획입니다. 서로 어려운 일 없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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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미안, 용서가 안 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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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돌담 구멍 예찬
- 이전에는 제주도를 삼다도(三多島)라고 불렀습니다. 세 가지가 많은 섬이라는 것이지요. 그 세 가지는 돌과 바람과 여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주도에 가보면 돌로 만든 담이 지금도 꽤나 많습니다. 시골 집 담을 돌담으로 만들어 놓은 경우도 있지만, 심어 놓은 농작물을 보호하기 위해서 논과 밭에 야트막하게 돌로 담을 쌓아 놓은 것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돌담을 보면 대부분 구멍이 숭숭 뚫린 담입니다. 일반적으로는 큰 돌로 담을 쌓을 때 그 사이에 작은 돌을 끼워 넣어서 담벼락을 완성하는 법인데 제주도의 담은 의외로 구멍이 많이 뚫린 모습이어서 의아하게 생각될 수 있습니다. ‘큰 돌은 많은데 작은 돌이 없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게을러서 대충 만들다 그만 둔 것일까?’ 뭐 그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렇게 담을 만든 것에는 나름대로의 뜻이 있습니다. 바람이 강한 제주도이기에 담벼락을 빈틈없이 완벽하게 만들어 두면 돌담이 그 바람을 견디지 못해서 결국은 담이 무너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바람이 지나갈 구멍을 두는 것입니다. 강한 바람이 불어오다가 그 구멍을 출구 삼아 통과하게 되고 그러면서 바람이 약해져서 돌담은 무사한 것이지요. 그것은 제주도의 땅 바닥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어느 지역보다 더 많은 집중호우가 내리지만 제주도의 땅은 대부분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비가 그렇게 억수같이 쏟아져도 금방 물이 빠져 나가버려서 비로 인한 피해가 다른 지역보다 현격하게 적다고 합니다. 우리 사람에 대입하여 봅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차곡차곡 마음에 다 담아 두는 사람도 있지만, 허허 웃으면서 쉬이 잊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 살다 보면 마음에 불쾌한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고 또 소문에 휘둘릴 때도 있습니다. 그 때 그런 말들을 차곡차곡 마음에 담아 두면 병이 될 수 있습니다. 안 좋은 이야기가 내 귀에 들릴지라도 구멍이 뚫린 담을 통해서 바람이 빠져 나가듯이 그러려니 생각하면서 흘려보내는 여유가 우리에게 있어야 하겠습니다.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말들은 제주도 바람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때 바로 내 마음을 구멍이 숭숭 뚫린 제주도 돌담으로 만드십시오. 그러면 말로 인한 상처가 내 마음에 남지 않고 그 말의 바람이 나를 쓰러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 지혜로운 말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과 반대로 할 때가 많습니다.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은혜는 내 마음에서 금방 잊어버리고, 반대로 마음에서 빨리 내어 버려야 할 내 가슴을 아프게 한 원수 같은 말들은 돌에 새기듯이 단단히 새겨 두고 기억합니다. 마음에 은혜를 새기면 사람과의 관계에서 긍정적이 되고 행복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원수 같은 말들을 새기면 그것은 내 마음에 쓴 뿌리가 되어서 사람에게 부정적이 되고 그래서 행복을 잃어버립니다. 기도하며 지금 내 마음을 들여다보십시오. 지금 내 마음 속에 새겨져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마음에 원수를 자꾸 새겨서 계속해서 쓴 뿌리가 자라고 있지 않습니까? 내 마음의 원수를 어서 지워버리십시오. 성경에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내 마음에서 원수를 지우라는 바로 그 말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으면 학생은 공부가 손에 잘 잡히지 않고 직장인은 일이 손에 잘 안 잡히고 주부는 집 안 일도 하기가 싫어집니다. 그렇게 마음이 상처를 입어서 그것을 잘 처리하지 못하면 몸도 함께 고통을 받고 또 삶이 엉망이 되는 것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참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잠언 16장 32절에서는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이제 내 마음에 돌담 구멍을 더 크게 내는 작업을 기도하는 가운데 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말의 바람이 내 마음에 머물지 않고 빨리 빨리 빠져나가게 하십시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 참 중요합니다. 마음의 돌담 구멍이 클수록 행복은 더 커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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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돌담 구멍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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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불가능한 사람들
- 11세기 베네딕트 수도회의 개혁가 피터 다미안(1007-1073)을 일컬어 사용된 표현이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교회는 타락하고 부패가 기승을 부렸다. 성직자와 교회 지도자, 일반 성도까지 도덕적으로, 신학적으로 부패했다. 이에 맞서 다미안은 성직 매매와 성직자들 사이에 용인되던 동성애와 소아성애, 남색을 강도 높게 비난하며 개혁을 촉구했다. 그는 예수님께 충성하고 복음의 진리를 지키고자 헌신한 사람이었다. 그가 모든 형태의 부패와 부도덕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좌시하지 않았던 이유는 자신 안에 있는 열정 때문이었다. 그는 어떤 방해와 반대에도 흔들리지 않고 맞섰다. 오직 예수께 헌신하고자 하는 그의 열정이 얼마나 불같았던지 그는 ‘조종 불가능한 사람’, ‘뇌물이 안 통하는 사람’,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조지 오웰의 표현대로 그는 ‘도무지 한 패거리로 끼워 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비록 소수였지만 시대마다 이런 소위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느부갓네살의 신상 앞에 아무 생각 없이 한번만 절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음에도, 산채로 불태워 죽인다는 위협에 굴하지 않고 우상 숭배를 거부했다. 다니엘은 창문 하나만 닫고 커튼만 쳐도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음에도 사자의 먹이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향을 피우는 흉내만으로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음에도, 시저를 주로 인정하기를 거부함으로 야수의 저녁 먹잇감이 되었다. 황제와 왕비와 전 제국에 맞서는 것이 터무니없는 만용으로 여겨졌음에도, 아타나시우스는 세상에 맞서 진리를 대변했고 그 신실함으로 다섯 번이나 유배 생활을 했다. 양심을 따라 전통의 합의에 맞서는 마틴 루터를 사람들은 교만하다거나 미쳤다고 말했지만, 그는 화형대에서 죽어간 얀 후스의 순교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학문이라는 미래의 중대한 일을 위해 목숨을 보존하라는 절친한 친구들의 만류에도, 디트리히 본 회퍼는 히틀러의 소굴로 다시 들어가 두려운 교수대의 위협에 맞섰다. 한상동, 주남선, 조수옥 권사도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믿음으로 모진 고문과 옥중 생황을 감내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허다한 구름 같은 증인들과 순교자들의 빛 안에 살고 있는가? 아니면 발전된 현대 세계의 안락한 분위기에 젖어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는가? 기독교 역사상 지금의 서구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부당한 취급을 당하거나 기독교 수정주의가 득세한 적이 없다. 오늘날처럼 기독교의 성경 해석이 이렇게 자의적이고, 설교가 이렇게 타협적이며, 신앙인의 행실이 이렇게 방탕한 때가 있었는가? 오늘날처럼 아무 고민 없이 세상과 타협하고 쉽게 신앙을 저버리면서도 그 수치를 모르는 이렇게 천박한 적이 또 있었는가?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시대의 도전 앞에 맥없이 굴복하고 있다. 우리의 복음 증거는 날카로운 예리함을 잃어 가고 있으며, 예수의 주되심과 권세는 배반을 당하고 있다. 이제 이 상황을 되돌려 우리 주님께 합당한 태도를 취할 때가 되었다. 온 열방의 우리형제 자매들이 믿음을 지키려고 목숨으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이때, 서구의 세대는 우리 주를 배신했다는 쓰라린 후회만을 남기지 전에 어서 서둘러야 한다. 오스기니스(Os Guinness)가 잘 설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개혁가 피터 다미안, 그는 오직 한 청중만을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쓰고 행동했다. 그 외 다른 목소리는 그를 제지할 수 없었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신실했다. 그의 믿음은 강철같이 강했다. 그는 난공불락의 사람이었다. 우리에게는 바로 이런 기독교 지도자들이 필요하다. 우리 역사 ‘불가능한 사람들’(Impossible People)이 되어야 한다. 연민으로 눈처럼 녹을 수 있는 가슴을 가졌으나 강철과 부싯돌처럼 단호한 얼굴과 의지로 어떤 압력과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고 농락당하지 않으며 뇌물이 통하지 않는 그리스도인, 그럼에도 우리 주님의 온유함과 자비와 은혜와 따뜻함을 잃지 않는 그리스도인 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보다 오직 예수께만 흔들림 없는 충성을 바쳐야 한다. “예수는 주님이시다”가 우리의 고백이자 권위이며 기준이고 인생의 법칙이 되어야 한다. 그분을 부정하는 사람이나 대상이 무엇이든 우리는 굳건히 맞서야 한다. 또 다시 오스 기니스의 표현을 빌린다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깨가 튼튼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 위해 지셨던 주님의 십자가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어야 만들어지는 어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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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불가능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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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2) (창23:1)
-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2)(창23:1) 하나님께서는 아내에 대한 역할을 창조하실 때부터 계획하셨습니다. (창2: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이 사실도 단순히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심정을 나타내는 복음입니다. 그러니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사랑에 빠지셨습니다. 성경은 어쩌면 삼위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짝사랑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그 마음을 모르고 자신이 범한 죄로 인하여 마냥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틈만 나면 자신이 편할 것 같은 세상의 음부를 향해 도망을 쳤습니다. 급기야 하나님께서는 질투하시기까지 하십니다. (출20:5)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출34:14)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다윗이 위대한 신앙인이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왕국이 파멸에 이르는데 다윗의 책임도 결코 적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스럽게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편애하시는 듯합니다. “다윗을 위하여” 집을 세우신다고 하십니다.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다윗을 위하여” 심판을 즐겨 하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신다고 하십니다. 왜 이토록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목을 매는 것처럼 보일까요? 창조 이후로 사람을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으로부터 듣고 싶으셨던 말이 있다고 한다면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시18:1)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아마도 사랑에 굶주리셨던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이 사랑 고백에 완전히 무너지셨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와를 창조하시면서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이라고 하십니다. 아담에게 과연 돕는 배필이 필요할까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된 아담에게 무슨 도움이 필요할까요? 이런 말씀 역시 윤리적으로 상식적으로 접근하면 남녀차별이라는 이상한 주장도 하게 됩니다. (창2:24-25)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완전한 남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떠나 그의 아내인 교회와 합하여 한 몸 이루어 구원이 완성될 것을 발견하게 합니다. 그러니 “돕는 배필”이란 삼위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데 동반자라는 뜻입니다. 믿음의 여인 사라는 이 사실을 잘 알았기에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잘 순종하여 남편 아브라함에게 훌륭한 돕는 배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언약의 표징으로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창17:10-11)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할례는 아브라함에게 속했다는 징표로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확증과도 같았습니다. 남편을 비롯해서 집 안에 있는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행하고 드러누워 고통스러운 진통을 앓고 있습니다. 해괴망측한 장면이 벌어졌습니다. 피범벅이 되어 신음하며 고통스러워하며 며칠이고 꼼짝을 못하고 끙끙거리고 있습니다. 난 지 8일 된 어린아이에게 할례를 행하니 그 갓난아이의 고통과 울음과 신음 소리는 또한 어떠했겠습니까? 그런데 이 모든 뒤치다꺼리는 누구의 몫이겠습니까? 성경은 참 재미있게도 하나님께서 할례를 명하신 후 사라의 이름을 바꾸어주십니다. (창17:15)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할례 언약의 당사자는 남편 아브라함이지만 그 언약을 집행함에 있어 실제로 수고와 헌신과 순종은 누구의 몫입니까? 할례 하나만 보아도 돕는 배필의 사명은 절대적입니다. 할례는 구원의 증표입니다. 남편과 한 몸을 이루어 하나님 구원을 향한 “여자의 후손이신 메시아”를 향하여 한결같이 순종했던 사라였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최소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살았던 사라에게 손자의 손자는커녕 손자 정도는 보게 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손자가 아니라면 며느리라도 보게 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왜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이 결혼하는 것도 보지 못하고 죽게 하셨을까요? 왜 성경은 그렇게 필요해 보이지 않는 사라의 나이, 사라가 죽은 나이를 기록해서 우리를 안타깝게 할까요? 3년만 더 살려 주시면 며느리라도 보고 죽을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사라에게 이러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사라에게 이렇게 잔인하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사라가 죽은 나이를 기록만 하지 않아도 안타까움이 덜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성경이 사라가 죽은 나이를 기록하여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복음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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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2) (창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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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용사여, 칼을 허리에 차고 왕의 위엄을 입으소서!(시45:3)
- 교회를 통해 각 세대마다 당신의 일을 위해 성령께서는 오순절에 교회를 탄생시키시고 시대마다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을 통해 언약 하나님의 변함 없으신 사랑을 각인시켜 주시며 이 땅의 수많은 무명의 바울들과 무명의 다윗들과 그 용사들이 지금도 묵묵히 교회를 파수하며 믿음의 계승을 이어가고 있음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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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용사여, 칼을 허리에 차고 왕의 위엄을 입으소서!(시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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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교회 정치를 교회 정치 되게 하라!
- 교회 정치는 교회 직분자 손에 맡겨진 교회의 고유 권한에 속하는 부분이지만, 철저하게 성경과 신앙고백서에 근거해야 한다(참조. WC 25, 30-31장; 고신헌법전문 3항 교회 정치). 이런 점에서 교회 문서로서의 교회 정치는 비록 교회 안에서 그 사역적 권위가 인정되어야 하지만, 언제나 성경과 신앙고백서 아래에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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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교회 정치를 교회 정치 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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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사쿠라”는 일본의 꽃이 아닌 하나님의 꽃
- 모든 꽃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 색깔과 관계없이 크기와 관계없이 예쁘고 마음을 편하게 한다. 꽃을 표현하는 영어 단어가 있는데 ‘flower’ 와 ‘blossom’이라는 단어다. 화초 식물에 피는 꽃을 ‘flower’라고 지칭하고, 과수 관목에 피는 꽃을 ‘blossom’이라고 지칭한다. 그래서 벚꽃을 영어로 ‘cherry blossom’이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봄이 오면 모든 사람이 각종 꽃향기를 기대하며 마음 설렘(exciting)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설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아름다운 설렘을 앗아가는 기상 악화 또는 병리 현상으로 인한 우울(depression)도 있다는 것이다. 2023년 올해의 봄은 한없이 기쁜 봄이요, 의미 있는 봄이다. 왜냐하면 코로나 시대를 맞아 3년의 세월 동안 봄꽃축제를 하지 못했었지만 마스크 벗도 마음껏 꽃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목회하는 통영에도 벚꽃의 명소 진해에 견줄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 소규모 벚꽃축제를 하였다. 특히 축제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통영 출신 축구선수 김민재의 인기가 올라가면서 김민재 사인(sign) 선물을 준다는 홍보로 더욱 열기가 뜨거워졌다. 그러나 일부 소수의 사람들이 벚나무 자체를 싫어하고 벚꽃축제에 대하여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벚꽃을 싫어하고 벚꽃축제를 비판하는 이유가 있다. 첫째 이유는, 벚꽃이 사쿠라 꽃이기 때문이란다. “사쿠라”라는 단어는 “사쿠라니쿠”에서 온 말로 연분홍색인 말고기에서 비롯되었다. 소고기인 줄 알고 샀더니 색깔은 비슷한데 말고기였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정치 세계에서 변절자들을 “사쿠라”라고 불렀던 시대가 있었다. 둘째 이유는, 일본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꽃이기 때문이란다. 일본이 전쟁에 승리하여 승리 기념 축제를 위하여 벚꽃축제를 하였고 그 축제 분위기를 우리가 따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벚꽃의 정체성에 대한 진위를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벚꽃 원산지가 일본이 아니라 한국 제주도가 원산지라는 것이 학자들에 의하여 밝혀졌다. 1962년 식물학자 박만규 국립과학관장은 “벚꽃은 우리나라 꽃 한라산이 원산지”라고 주장하였다. 최근에는 유전자 해독을 통해서 제주의 왕벗나무가 일본과 아무런 관계가 없음이 밝혀졌다고 한다. 고려시대 제작한 팔만대장경판 60% 이상이 벚나무로 만들어 졌음이 최근 조사에서 밝혀졌다. 정치적 이념에 따라 마음이 요동치며 벚꽃축제를 즐기면 친일몰이로 몰아가는 불편한 진실이 우리 삶 속에 내포하고 있다. 이제는 시각이 달라져야 한다. 우리 나무를 우리 나무라 말하지 못하고 우리 꽃을 우리 꽃이라 말할 수 없다면 우리 것에 대한 자긍심을 잃은 것이다. 벚꽃 하나 때문에 내 마음이 요동친다면 우리가 당당하게 주권을 가지고 살지 못하는 증거요 아직도 일본에 패배 의식, 피해의식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비굴하게 살아가는 증거이다. 이제 우리 기독교인은 시각이 조금 달라야 한다. 벚꽃은 일본의 꽃도 한국의 꽃도 아닌 하나님의 꽃이다. 하나님이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표현한 꽃을 인간의 생각으로 미워하고 제한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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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사쿠라”는 일본의 꽃이 아닌 하나님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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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말씀에 푹 빠진 믿음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현재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히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11:23). 놀랍지 않은가? “믿습니다.”와 “믿음”은 다른 것이다. “믿습니다.”라고 하면 믿음인 줄 아는데 어떤 면에서 소망이다. 진짜 믿음은 “믿습니다.”라는 말을 안 해도 믿는다. "믿습니다."라는 말을 안 해야 하느냐, 그 말은 아니다. 소망도 있어야 한다. 소망과 믿음이 같이 가야 한다. 믿는 것은 "믿습니다."라는 말보다 강하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냥 믿는 것이다. 부부가 만날 때마다 믿는다고 하지 않아도 믿는다. 우리가 어머니를 믿는다고 하지 않아도 그냥 믿는 것이다. 우리가 깊은 신앙에 들어가면 어머니를 그냥 믿듯이 주님을 소망하고 믿게 된다. 믿음은 그냥 믿고 있다. 믿음으로 출발하고 마친다. “나는 치유 받을 것을 믿습니다.”라기 보다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고 “나는 지금 치유 받은 것을 인하여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믿음으로 나온다.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라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암송해 보자. 왜 못 믿는 것일까? 무지 때문이다. 영적 무지 때문이다. 그래서 말씀을 공부해야 한다. 말씀을 암송하고 그대로 믿어야 한다. 말씀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호6:3). 모르면 알아야 한다. 아는 것이 믿음이다.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사람도 알아야 믿어진다. 여호와를 알면 주님이 나에게 임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 오감과 경험을 통해 믿으려고 하기 때문 못 믿는다. 오감은 육이다. 육은 혼에서 나온다. 혼을 어떻게 훈련시켰냐가 육이 만들어 진다. 우리의 생각이 육을 움직인다. “학교 가야지”하는 생각이 몸을 움직이게 한다. 혼이 육을 움직인다. 그런데 혼의 생각이 새로운 피조물인 영에서 나온다면 영의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육적이면 육의 영향력이 나온다. 혼이 육을 움직이다. 그래서 육적인 오감을 통해서만 느끼는 것은 믿음이 아닐 수 있다. 말씀에서 나오는 오감인지를 구별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모르기 때문에 못 믿는다. 믿음의 사람으로 완전한 데로 나아가자. 완전해 질수 있을까, 없을까? 성경에 보면 온전한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 사람의 말이 온전하면 온전하다고 했다. 말이 완전하면 완전하다. 무슨 말 말인가? 착한 말과 선한 말이 아니다. 복음을 말하면 온전한 말이다. 믿음의 말을 하는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다. 야고보서는 혀가 온 몸을 움직인다고 그랬다. 혀가 중요하다. 물론 좋은 말을 해야 한다. 좋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것은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 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히6:1-2).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4:5)라고 했다. 말씀은 주야로 묵상해야 한다. 듣고 읽고 공부하고 암송하고 묵상해야 한다. 다섯 가지다. 묵상은 주장하는 것이다. 묵상은 마음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묵상은 읊조리는 것이다. 읊조리는 사람이 있다. 읊조리는 사람은 그 세계 속에 빠져 사는 사람이다. 영적인 세계에 대해 읊조리며 살아야 한다. "주님이 나와 함께하신다." "주님은 이 일에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심으로 나는 평안함이 있고 하나님의 보호와 지키심이 있다." "내가 불 가운데로 지날지라도 괜찮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지날지라도 나를 안위하시고 보호하신다." "이 사망의 음침함이 나를 넘어뜨릴 수 없다." "어떤 어려움도 나를 넘어뜨릴 수 없다. 나는 주님 안에서 평강이 있다."고 계속 읊조린다. 말씀을 들으라. 읽으라. 공부하라. 암송하라. 묵상하라. 나는 이것을 다섯 손가락으로 비유한다. 성경책을 다섯 손가락으로 꽉 잡고 있다면 누가 쉽게 못 뺏을 것이다. 듣는 것만 하면 엄지손가락 한 개에 성경책을 올려놓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잘 올라가지도 않지만 올려놓는다고 해도 조금만 흔들리면 떨어집니다. 듣기만 하는 사람은 어쩌다 손가락에 올라가면 올라갔다고 좋아한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한다. 듣기만 하면 안 된다. 여러분이 듣기만 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아무리 믿음을 가져도 떨어지기 쉽다. 읽기까지 한다면 이제 손가락 두개로 성경책을 잡는 것과 같습니다. "야, 이제 들었다. 야, 좋다"그러는데 옆에서 쉽게 빼앗아 갈 수 있다. 공부한다는 것은 세 손가락으로 성경을 잡는다고 보면 된다. 힘이 좀 더 들어간다. 그래도 빼앗기기 쉽습니다. 암송을 한다. 암송을 하면 힘이 생긴다. 그래도 불안하다. 묵상까지 한다. 다섯 손가락으로 꽉 잡고 있는 것과 같다. 누가 쉽게 빼앗아 가지 못한다. 우리가 믿음 생활하면서 말씀을 어떻게 먹어야하는가? 듣고 읽고 공부하고 암송하고 묵상해야 한다. 서재를 만들어라. 책상을 만들어라. 공부도 하라. 암송도 하라. 자꾸 암송하고 묵상하고 주장하면 내 안에서 말씀의 역사가 나온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신6:6-9).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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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말씀에 푹 빠진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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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괜히 인사했나?
- “소장님, 혹시 교회 다니세요?” 입주민의 전화는 늘 긴장이 된다. 좋은 일로 전화 받을 일이 없다. 하지만 이번 전화의 용건은 신선했다. 나의 카톡 사진을 보았다며 신앙을 물어오셨다. 조금 쑥스럽긴 했지만, 딱히 감출 이유도 없기에 개척교회 목사임을 밝힌다. “아이고, 그러셨구나. 역시 일하시는 모습이 다르시더라.” 나의 쑥스러운 고백과 다르게 입주민께서는 아주 반가워하시며 연신 칭찬 세례를 하신다. 교회에 가봐도 되냐는 말씀이 얼마나 반갑던지. 그분은 출석과 함께 등록하셨고 매일 예배드리며 눈물을 흘리는 울보 성도가 되었다. “목사님, 손자가 피아노를 치는데 반주를 해봐도 될까요?” 개척교회 사모는 바쁘다. 식사 준비, 예배 반주, 아이들 돌봄. 그 와중에 손을 조금 다치게 되었다. 하지만 반주를 쉴 수는 없어 상처를 싸매고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시고는 울보 성도님, 아니 권사님께서 중학교 3학년 손자가 피아노를 친다며 반주자로 추천하신다. 무조건 환영이다. 어느 지역의 중형교회 출석하던 아이는 그렇게 개척교회 반주자가 되었다. 실력이 제법이다. 그전 교회에서 쟁쟁한 선배들 틈에서 반주 기회가 없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잘 왔다. 여기서 너를 사용하시나 보다. 얼마 뒤, 권사님의 세 딸과 사위 한 분이 교회에 방문하셨다. 물론 반주하는 아이의 어머니도. 어머니와 아들이 다니는 교회에 단순 방문인지 정찰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지만 내심 기대를 해본다. 우리 교회에서 함께 교회를 세워가면 좋겠다는 생각. 대부분 개척교회 목사는 방문만 해도 이런 환상을 가져보지 않을까? “목사님, 지금 다니는 교회에 정식으로 인사드리고 좋은나무교회 출석하겠습니다.” 환상이 현실이 되었다. 협소한 공간에 내놓을만한 시스템도 없는 교회. 목사 설교도 어눌하고 화려한 음악도 없는 교회에 등록하겠다는 뜻을 전하셨다. 둘 중 하나다. 교회보는 안목이 없는 초보 신앙인이거나 교회를 세우며 동역하고 싶은 열정 있는 신앙인일 것이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나는 무조건 할렐루야다. 나는 그렇게 일터 아파트에서 교회 가족들과 자주 만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허름한 작업복에 청소하는 모습 보이기가 민망했지만 오가며 나누는 반가운 인사에 이제는 불편함이 없다. 오히려 자주 볼 수 있어서 ‘진짜 목회’에 근접한 것 아닐까 싶은 느낌마저 들었다. “목사님께 인사드려야지. 뭐가 부끄러운거야?” 권사님 댁에 놀러 온 손녀. 이제는 우리 유치부 교인이 된 아이. 진짜 똘똘하고 예쁘게 생긴 아이다. 아들만 둘 있는 나에게는 더 사랑스럽게 보인다. 교회에서 만나면 살짝 와서 아는 척을 하고 자기 인형을 자랑하는 아이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아파트에서 만나면 너무 어색하다. 교회에서처럼 반갑게 인사를 건네지만 아이는 숨어버린다. 하긴, 지금 나의 행색이 좀 그렇다. 작업하는 복장에 목장갑을 끼고 있는 모습. 자꾸 몸을 숨기는 아이에게 나의 행색으로 미안한 마음이 든다. 괜히 아는 척을 했나 싶다. 어느 주일 아침. 녹화해 둔 영상을 올려두었기에 온라인 예배 준비는 끝났다. 그래서 주일 오전이지만 여유가 있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었을까? 코로나로 교회를 사용하지 않아 청소하지 않았던 공용 화장실이 떠올랐다. 코로나 이전에는 매주 직접 청소를 했는데 한참을 청소하지 않았다. 예상대로 화장실은 엉망이었고 나는 뜨거운 마음에 갑자기 화장실 청소를 시작한다. 슬리퍼에 반바지 차림. 고무장갑을 끼고 손에 청소 솔을 들고 있다. 주일 아침에 목사가 그러고 있다. “안녕하세요. 교회 가시나 봐요? 저는 여기 좋은나무교회 담임입니다.” 성경을 들고 말끔하게 차려입으신 노부부가 청소하는 앞을 지나간다. 교회 가시는 길이라 확신하고 반가움에 인사를 드린다. 그런데 어르신의 눈빛이 불편하다. 반가움은커녕 경계한다. 나를 살피는 눈빛이 호의적이지 않다. 하긴, 주일 아침에 슬리퍼 끌고 청소하는 목사가 좀 이상해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초라함이 묵상되며 묘한 감정이 밀려온다. 짧은 시간 마주했지만, 그분도 나도 어색해진 느낌이다. ‘하, 이놈의 오지랖. 괜히 인사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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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괜히 인사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