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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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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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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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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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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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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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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하수룡 장로] 올림픽 선수
    고대올림픽은 주전 776년에 그리스에서 제1회로 시작하여 주후 393년까지 거의 1천2백 년 동안 4년마다 개최된 체육대회가 293회에 이르렀다. 이것이 제우스 신역인 올림프스 산기슭에서 행해졌다고 해서 올림피아라 했다. 391년 로마 황제 데오도시우스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면서 올림피아를 이교인 제우스신에게 봉납하는 제전이기 때문에 금지시켜 293회를 마지막으로 고대올림픽은 막을 내렸다. 올림피아 신전은 훼파되고 제우스 신상은 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뜰로 옮겨졌다고 한다. 이렇게 고대올림픽이 1천5백 년 동안 중단되었다가 1894년에 국제올림픽위원회(IOC)를 결성하여 1896년에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서 제1회 근대올림픽 대회가 열렸다. 4년마다 세계 각 도시에서 개최되었는데 1,2차 대전 중에는 3번 중단되었으나 세계 청년들의 우호를 돈독히 하고 국제 평화를 위해 정기적으로 개최되어 세계인의 환호를 자아내고 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올림픽 선수로 참전하여 경험한 내용을 토대로 올림픽을 비유를 들었기 때문에 올림픽의 종주국인 그리스인들도 심오하기 이를 데 없는 기독교의 진리를 터득하기가 쉬웠을 것이란 결론에 도달한다. 먼저 누구든지 월계관을 받아쓰려면 올림픽 선수로 택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승리한 영광의 면류관도 쓸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이 천 년 전에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인류 문화의 기원은 고대올림픽에서 시작되었고 전 세계가 공통으로 쓰고 있는 기원은 예수가 탄생한 해로부터 잡고 있다. 그런데 예수의 조국인 이스라엘은 2천 년이 지난 현재에도 그리스도인이 전체인구의 1%도 되지 못하는데 이방인의 나라 그리스는 90%가 훨씬 넘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니 인간적으로는 정말 이해가 안 된다. 아마 신약의 절반 이상을 저술한 바울 본인이 올림픽에 직접 참가하여 승리의 영예를 누려본 경험을 올림픽과 연계하여 그 내용을 성경에 기록했기 때문에 올림픽의 종주국인 그리스인들이 기독교의 진리를 알고 어렵지 않게 예수를 받아들인 것이 틀림없다. 인간의 구원은 먼저 올림픽에서 바울처럼 선수로 선택되어야 하듯이 믿는 자 모두가 확실하게 자비하신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야 한다. 그러면 달려갈 길을 마음껏 달려가고 절제하면서 말씀으로 승리를 얻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행복한 천국의 올림픽 선수로 선택을 받았다. 선수는 푯대만 향하여 능하신 심판자인 하나님의 말씀대로 규칙을 지키며 달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격이고 모든 것이 허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린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올림픽 선수다. 월계관은 아무에게나 씌어 주지 않는다. 규칙을 어기지 않고 전력을 다해 달려가야 주어진다. 바울은 많은 비유를 들면서 올림픽 선수에게 땀과 눈물과 피의 고된 대가로 받은 금메달로만 만족하면 안 되고 내세에도 빛나는 면류관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간곡한 권면을 한다. 현재를 사는 우리는 육체의 훈련보다 더한 경건한 생활로 현세와 내세의 월계관까지 하나님에게서 확실한 약속을 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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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9
  • [박봉석 목사] 깊은 곳과 오른쪽
    신약 성경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갈릴리 바다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두 군데 나옵니다. 첫 번째는 누가복음 5장에 나오는 것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 받을 때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밤이 새도록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질을 했지만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한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그의 배를 빌려 타시고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물고기를 잡으라.”고 말씀을 하셨지요.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으로서 갈릴리 바다를 손바닥 보듯이 훤히 꿰뚫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의 그 말씀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순종하였고 그래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는 그 길로 예수님 앞에 부복하고 예수님을 따라 제자의 길로 갔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요한복음은 21장에 나오는 사건으로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만나셨을 때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난 후에 실망하여서 원래 자신들이 하던 어부의 일로 돌아갔던 베드로와 몇 명의 제자들은 밤 시간에 물고기를 잡으러 갈릴리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 밤도 그랬습니다. 갈릴리 바다에 대해서 잘 아는 전문 어부였던 베드로와 제자들은 역시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인간이란 그런 것입니다. 제 아무리 뭔가에 대해서 뛰어나고 탁월하다 해도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불완전성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의 일에 대해서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와 제자들의 그 실패의 현장에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예수님의 말씀에 역시 그대로 순종하였고 그로 인해서 그물을 들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이런 상상을 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있었던 이 사건을 곁에서 보았던 갈릴리의 다른 어부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어부는 누가복음 5장에 나오는 사건을 보고는 “나도 이제부터는 깊은 데로만 가서 그물을 내려 물고기를 잡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어부는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예수님 부활 후의 사건을 보고는 “나는 이제부터 배 오른편에만 그물을 던져서 물고기를 잡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독자 여러분, 만일에 진짜 이런 결심을 한 어부들이 있었다면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분명히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어떤 곳에 던졌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던지라는 곳에 던진 그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물고기를 잡은 것인데 오히려 그물을 던진 장소가 사람들에게 중요하게 인식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한 장소가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는 깊은 데가, 또 어떤 사람에게는 오른편이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장소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이 나라 기독교 안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경험한 신앙체험이 진리가 되어버린 경우가 있었습니다. 한 병든 사람이 어떤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여서 병이 나았더라는 소문이 나면 그 기도원은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기도를 명하신 주님 말씀에 순종하여서 나음을 얻은 것인데 오히려 기도한 장소가 마치 성지처럼 중요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십자바위(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있는 무학산의 한 바위)에 올라가서 기도해서 아들의 취업에 대한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소문이 난다면 아마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 십자바위에 올라가서 기도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뭡니까? 기도를 명하신 주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기도한 장소가 기도 응답의 통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한국 교회 역사 가운데는 그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독자 여러분, 어디서 기도한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 언제 기도했는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성경에서 가르쳐 주시는 기도의 지침과 방법을 잘 배워서 그 말씀에 순종하여 기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고, 바로 그것이 주님 약속대로 응답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체험에 의존하는 신앙생활은 위험합니다.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 말씀을 의지하여 그 말씀에 대한 순종의 길로만 가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그리스도인의 최선의 길이 있습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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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9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25: 설날의 세시풍속과 용어들의 고찰
    I. 서언(序言) ‘까치 까치설날은 어저께고요’ 올해도 벌써 우리나라 고유의 명절인 설날이 눈앞에 다가왔다. 이런 날들이 되면 어렸을 때의 설레는 마음으로 손꼽아 기다리든 그 날에 대한 추억들이 아련하게 떠오르곤 한다. 하지만, 필자의 경우는 당시 부모님들이 불신자였기 때문에 차례를 지내는 일들이나 믿음에 배치되는 세시풍속들 때문에 어린 마음에도 갈등이 있기도 했다. 이런 경우는 짝 믿음을 가진 현재의 성도들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오늘은 설날을 전후한 세시풍속과 이에 대한 용어들에 대해서 우리 기독교적인 입장에서는 어떻게 볼 것인가를 논하고자 한다. II. 설날의 유래와 어원과 뜻 1. 뜻과 어원: 설날의 사전적인 뜻은 ‘새해의 첫날’이다. 또 음력 정월 초하룻날이기 때문에 원단(元旦), 세수(歲首), 정초(正初)라고도 한다. 또한‘사린다. 사간다’에서 온 말로 ‘조심하다’란 뜻도 있다. 또 이 말은 ‘섧다. 슬프다’란 말에서 왔다고도 한다. 이러한 뜻은 다소 의외로 보여 지기도 하지만, 이는 설이란 그저 기쁜 날로 들뜨기 보다는 한 해의 첫날부터 모든 일에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첫발을 내 딛는 것이 좋다는 의미에서 설날을‘삼가고 조심하는 날’이란 뜻의 신일(愼日)이라고도 한다. 이런 뜻으로 볼 때 설날이란 말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사용해도 전혀 문제가 없는 용어이다. 2. 유래: 설날의 유래에 관하여는 시작이 언제부터인지 아직 분명하지는 않다. 하지만,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이 달의 주기로 만든 태음력(太陰曆)과 이집트인들이 지구가 태양을 회전하는 주기로 만든 태양력(太陽曆)이 사용되든 때부터 일 것으로 추측한다. 그 이유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해의 시작 일을 중요하게 여기고 기념하는 것은 거의 동일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설날을 지키는 직접적인 영향은 중국의 춘절(春節)일 것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춘절은 우리의 설날과 거의 비슷한 형태로 지켜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설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7세기경 중국의 역사서에‘신라에서 지켜진 설날에 대한 기록’이라는 데서 찾아 볼 수 있고,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고이왕(A.D 238년) 정월에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을 현대의 설날로 볼 수는 없으나 새해를 맞이하여 지냈든 제사라고 볼 때 비슷한 경우로 볼 수 있다. 이로 볼 때 설은 아주 옛날부터 이어져온 민족의 명절인 것을 알 수 있다. 근래에 와서는 처음에는 양력의 1월 1일과 구분하여 민속의 날로 정했으나, 1989년부터 본래 이름인 설날로 다시 정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III. 설날의 세시풍속과 용어들 설날에 행해지는 각종 세시풍속은 주로 차례(茶禮), 복조리 달기, 한 해 운수를 점치는 토정비결(土亭秘訣), 청참(聽讖), 설빔, 세찬(歲饌), 세주(歲酒), 세화(歲畵), 음복(飮福), 덕담, 새해 성묘 등 많은 세시풍속들과 용어들이 있다. 이 중에는 사회적인 아름다운 미풍양속으로 충분히 계승하고 장려할 일들도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설날을 전후하여 행해지는 세시풍속에는 성도들이 그대로 행하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는 일들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차례의식이다. 차례는 원래 하늘에 천신(天神)혹은 상제(上帝)의 존재를 믿고 제사를 지낸 천신제사였다가 조선시대에 와서 유교의 영향으로 죽은 조상제사(자신으로부터 4대위 조상까지)로 바뀌어졌다. 이는 같은 문화 영향권 아래 있는 중국과 일본에도 없는 극히 한국적인 제사 형식이다. 또한 차례의 어원은 원래 다례(茶禮)였다. 지금은 제사상에 술을 올려놓지만 원래는 차를 올렸다. 그래서 다례 혹은 차례라고 한 것이다. IV. 결어와 제언 이상에서 논한 설 명절에 대한 우리 기독교인의 입장은 어떠해야 할까? 먼저는 앞에서 논한 대로 설은 새 출발을 뜻하는 날이기 때문에 좋은 의미로 받아들여야 될 것이다. 또한 부모와 어른들을 섬기는 세배나 서로 덕담을 나누는 풍습은 교회 속에서도 더 계승 발전시켜나가야 할 좋은 미덕이다. 하지만 이것이 조상숭배의 모습으로 바뀌어 진 불신자의 세시풍속 많 큼은 결코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교회도 이제 선교 140주년에 가까운 역사 속에서 설날을 아름다운 기독교문화로 바꿀 필요가 있다. 그래서 명절이 성도들에게 더 이상 고민과 갈등을 주는 것이 아닌, 온전히 하나님께 감사하고 온가족과 일가친척들 간의 아름다운 화목의 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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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9
  • [오성한 목사] 영의 생각이 능력이다(1)
    우리가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은 영의 생각을하는 것이다. 로마서 8장은 생각이 믿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죄의 법이 사로잡아 오지만 사로잡으려하는 죄의 법에 묶이면 안 된다. 죄의 법이 사로잡아 올 때 그 실패의 생각을 묵상하지 말고 회개한 후 영의 생각을 더 깊게 해야 한다. 예수님의 간절한 소원은 이루어졌다.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그대로를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믿어야 한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17:21-23). 예수님은 우리로 알게 하시기를 소원하신다. 주님과 부부로 사는 그 자체가 초자연적인 삶이다. 당신은 초자연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키가 작은 사람이 키가 커지는 것만이 초자연적인 역사가 아니다. 우리는 초자연적인 삶을 살고 있다. 초자연적인 삶을 살고 있음을 믿고 살 때 초자연적인 역사도 현실로 나타난다. 믿음대로 되기 때문이다. 모든 부분이 그렇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죄라고 생각하는 죄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죄는 다르다.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다. 우리는 죄에서 벗어났다. 죄에서 벗어났다는 말은 주님을 믿는 말이다. 주님이 해 놓으신 모든 것이 내 것으로 믿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모든 문제는 해결 되었다. 믿음으로 받아 들이여야 한다. 여러분은 죄에서 벗어났다.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가 단순히 죄일 뿐이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16:9).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14:23). 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믿지 않고 행하는 모든 것은 죄다.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는 죄는 죄 일뿐이다. 죄는 동사가 아니라 명사다. 죄는 죄로 존재하는 것이다. 어두움은 어두움이다. 우리는 생각이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은 나쁜 일을 많이 해서 더 어두워진다는 착각한다. 아니다. 세상은 나쁜 일을 더 하기 때문에 더 어두워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좀 착한 일을 하면 조금 밝아지는 것도 아니다. 어두움은 어두움이다. 착한 일을 하고 세상이 도덕적인 세상이 되었다고 밝아진 세상이 아니지 않는가? 죄인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인이 될 수 있다. 거듭남으로 의인이 된다. 어떤 착한 행위로는 절대로 의로워질 수 없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세상을 대하는 경우를 본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 다른 길은 없다. 믿음은 그 사람의 생각에 있다. 믿음의 성장은 생각의 성장이라고 할 수 있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5~8). 영의 생각을 하라. 영의 생각을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신앙훈련은 생각의 훈련이다. 생각차이가 믿음 차이다. 영의 생각이 중요하다. 영의 생각을 하려면 생각 속에 말씀을 많이 집어넣어야 한다. 다른 방법이 없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해야 한다. 주야로 묵상해야 한다. 살리는 것은 주님이 이른 말씀이기 때문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 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육은 무익하다. 무익한 육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육신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는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 할 수도 없다. 나는 로마서 8장을 암송하며 선포하며 나의 것을 심는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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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9
  • [오태열 목사] 작은 자에 대한 관심
    신부이며 작가인 H. Nouwen(1932-1996년)은 현대인의 불행은 무관심과 분노에서 온다고 하였다. 어떤 목자에게 양 100마리가 있는데 한 마리의 양이 낙오가 되었다. 내버려두면 사나운 짐승의 밥이 될 수밖에 없다. 목자는 남아 있는 99마리를 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아 헤매게 된다. 이것이 길 잃은 양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이요 사랑이다. 목자의 마음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게 있었다. 99마리의 양이 있다고 위안을 삼지 않았다. 현대인들은 오히려 하나에 관심을 쏟는 것을 비판하고 분노해 버린다. 하나 때문에 전체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하나를 쉽게 포기한다. 사람은 숫자에 매인다. 긍휼이 없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불행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잃어버린 그 하나에 있었다. 이는 숫자의 개념도, 재산의 문제도 아닌 마음의 문제다. 현대인은 어느새 물질화, 물량화, 숫자화, 경영화 되어 하나를 소중히 여기려는 마음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사회가 살벌해진다. 목자는 무리를 떠난 양에게 정죄와 책망, 책임도 묻지 않았다. 사랑이란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는 조건을 거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멜로 영화의 고전인 러브스토리에서 여자주인공은 아버지를 미워하여 단절하고 있는 남자친구에게 화해를 권면하면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과 그 주변 환경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라고 충고한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이다. 한 마리의 양은 이유야 어떠하였든 목자와 무리를 떠남으로 길을 잃어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왜 그랬느냐고 물을 필요가없다. 물어서도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왜 그랬느냐? 그러면 되겠느냐며 따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조건과 까닭을 묻지 말아야 한다. 아버지의 명을 어기고 집 떠나, 유흥비로 돈을 다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는 왜냐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죽은 이내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고 기뻐하며 동네잔치를 베푼다. 이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는다. 내 모습 이대로 받으시고 사랑한다. 예수께서 세리 마태가 회개할 때 제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세관 현장에서 그 모습대로 부르셨다. 그리고 그의 집에 들어가 식사하실 때,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다고 비난하면서 죄인의 친구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죄인이 죄인과 함께하면 죄를 더 지을 수밖에 없지만, 의인과 함께하면 죄인이 의인이 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7:14절에 ‘믿지 않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않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적인 사랑이다.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데 사랑받을 수 있는 자격자로 만드시고, 사랑한다. 마태는 훗날 마태복음의 저자가 되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교만한 의인보다 겸손한 죄인을 더 사랑하신다”고 하였다. 부모는 병들어 아파하는 자식을 더 사랑하듯, 예수님은 고난 당하고 병든 영혼에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베푸신다. 사회 약자들인 고아와 과부, 지극히 작은 소자들, 이들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까지라 하였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찾아 헤매시고 찾아서 벗들과 함께 기뻐하는 목자,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다. 목사인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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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9
  • [조희완 목사] 성장의 기쁨 (벧전2:1-10)
    성경에서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시127:3) 그런데 저는 첫 번째 아이를 낳았을 때 그 말씀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이가 정상적으로 태어나지 않고 난산에다 미숙아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보통 첫 아이가 태어나면 기쁘다는데 저는 몸무게가 2kg도 채 못 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기쁨은커녕 이 아이가 과연 살 수 있을 것인가 죽을 것인가 그것이 궁금할 뿐이었습니다. 인큐베이터에 아이를 넣어야 하는데 그 당시 제가 가난한 신학생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막대한 병원비를 감당해야 하는 것이 큰 부담이었습니다. 병원 측에서 저의 형편을 알고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가서 믿음으로 키우라고 했을 때, 이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가서 과연 살 릴 수가 있을 것인지 몹시도 걱정이 되고 낙담이 되었습니다. 살고 죽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린 줄을 알고 그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정말 눈물의 기도로 키웠습니다. 우유를 먹일 때마다 혹시 이 아이가 숨이 넘어갈까봐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아이의 몸무게가 드디어 2kg을 넘어설 때 얼마나 대견하고 기쁘던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상적인 아기들은 태어날 때 몸무게가 3kg이 넘지만 우리 아이는 태어난 지 100일이 다 되어서야 드디어 몸무게가 3kg을 넘어섰을 때 얼마나 대견하고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지금은 키가 169cm나 되는 큰 아이로 자랐고, 결혼을 해서 잘 살고 있습니다. 저는 아이를 키우면서 성장의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체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그렇게 성장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성장하는 것은 대견한 것이고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믿음이 성장할 수가 있을까요? 첫째로, 버릴 것을 버려야 믿음이 성장합니다.(1) 둘째로, 먹을 것을 먹어야 믿음이 성장합니다.(2) 셋째로, 힘쓸 것을 힘써야 믿음이 성장합니다.(9)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우리의 믿음이 자라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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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9
  • [김성수 총장] 끝없이 고르기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는 인간을 자율적인 존재(autonomous being)로 규정하며, ‘자율성’을 가장 고귀한 가치로 숭상하고 있다. ‘자율’(autonomy)이라는 단어는 ‘auto’(자동/스스로)와 ‘nomus’(규범/법)라는 단어의 합성어이다. 인간이 자율적인 존재라는 말은 인간은 자기 스스로가 규범이 되고 법이 되는 존재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오늘 우리는 자신의 말이 법이고, 자신의 행동이 규범이라고 주장하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권위를 제외한 모든 형태의 권위를 허물어뜨리고, 모든 반응은 단순히 선호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런 행위를 표현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로 포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권위의 지배를 받는 존재”에서 자신이 선호하는 것을 “끝없이 고르는 존재”가 되도록 인도해 가고 있다. 기독교 신앙에는 권위의 문제가 핵심이다. 창조주 되신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권위들이 머리를 숙여야 하는 절대지고의 권위이며 세상 모든 권위의 원천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속력을 갖고 있는 권위 있는 진리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 읽던 성경에는 “가라사대”라는 표현이 있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예수님이 가라사대-”라는 말씀을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였다. 구약 레위기의 많은 교훈들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명하시되”라는 세 구절로 시작하며, 이 구절은 모든 사랑과 친근감의 어조를 띄지만 반박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위를 강조한다. 오스기니스(Os Guinness)가 말한바와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권위 아래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초월적 위대하심 앞에서 그분의 권위와 말씀의 권위를 기꺼이 인정하고 신뢰하며 그런 삶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 창조된 존재가 아니며, 따라서 자아 충족적이지 않고 스스로가 자신에게 법이 되는 자율적인 존재가 아님을 기쁘게 인정한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권위에 대한 이와 같은 시각을 경직되고 낡은 고루한 생각으로 치부해 버린다. 현대성은 교묘하지만 체계적인 수많은 방법으로 이런 시각을 도무지 인정할 수 없는 잘못인 양 만들어 버린다. 심지어는 성경의 신적 권위를 지고의 권위로 고백하며 가르쳐야 할 신학교의 교수들 중에도 “아직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느냐? 아직도 성령의 존재를 믿느냐? 성령이 있으면 한번 가져와서 보여 보아라!”고 순박한 신학생의 신앙을 송두리째 망가뜨리고 있는 패역한 시대다. 신적 권위를 비롯하여 그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자율적인 개인의 선택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추구한다. 오늘 우리가 선택해야 할 수많은 것들이 있다면 내일은 훨씬 더 많아질 것이며, 이런 사회가 바로 인류 모두가 바라는 유토피아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수많은 선택 거리는 슈퍼마켓이나 쇼핑몰에 가면 확연히 드러난다.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끝없는 선택과 쉴 새 없는 변화가 확대되고 증가해 가는 선택의 부추김은 이제 소비 시장의 담장을 뛰어넘어 광범위한 영역으로 확산되었다. 고급 레스토랑의 뷔페식단에서부터 인생의 자립을 돕는 기법과 철학들에 이르기까지 우리 앞에는 끝없는 선택이 놓여있다. 코로나 시대에는 교회에 가서 대면예배를 드리며 설교를 듣지 않아도 집에서 안락한 소파에 편하게 앉아서 소위 유명 설교자들의 설교를 취향에 따라 골라가며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하나님도 소비자의 한 선택 품목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끝없이 고르기가 미덕이고 지혜가 되는 세상에서는 한 가지 선택을 고수하는 행위는 더 이상 지적 확신의 문제가 아니라 어리석고 소심하다는 증거다. 현대인의 자유는 선택의 옳고 그름이나 어리석고 우둔함에 관계없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선택이다. 진리, 선함, 권위는 선택이라는 핵심적 행위와 아무 상관이 없다. 주권적 선택자로서 당신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선택하고 또 선택할 수 있는 주권적 권리를 자유로이 행사할 수 있다. 다원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선택하고 결단하는 행위를 한다. 누군가는 이런 선택을 하고 또 누군가는 저런 선택을 한다. 우리는 모두 다르게 선택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선택은 본질적으로 세상의 선택과는 다른 선택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선택은 주권적 선택자는 격상시키고 선택 내용은 가치절하해서 선택을 선호의 문제로 만들어 버리는 “끝없는 고르기식”의 선택이 아니다. 믿음의 걸음은 선택과 결단의 걸음이다. 그러나 결단의 행위로써 선택을 과도하게 강조하면 선택이라는 행위 자체가 전부가 된다. 그럴 경우, 믿음의 선택도 수많은 현대적 선택의 숙명처럼 구속력을 갖지 못하고 쉽게 바꾸어도 상관없는 상태로 쪼그라들 수 있다. 믿기로 선택한다는 이유로 믿음을 결단한 사람들은 반대 상황이 될 때 그만큼 쉽게 믿음을 저버릴 수 있다. 오늘날 “끝없는 고르기”식의 선택은 구속력이 없어 편리할 수 있지만 우리가 해야 하는 믿음의 선택은 다르다. 자신을 예수님께 바치는 것이므로 큰 대가를 각오해야 하는 언약적 선택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여기까지 왔고 더 이상 돌아갈 길이 없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원래 선택하는 백성(choosing people)이 아니라 선택된 백성(chosen people)이다. “끝없이 고르기”가 미덕이 되어가는 세상에서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우리를 골라 선택해 주신 그분의 대속적 선택을 생각하면서 무게 없는 우리의 경박한 선택 행위를 다시금 성찰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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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9
  • [김성수 총장] 교회를 향한 새해의 기대
    세월은 정말 화살처럼 빨라 2022년을 시작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23년 새해를 맞았다. 비록 전도자의 가르침과 같이 하늘아래 새 것이 없고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진리를 세월과 더불어 실감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는 이렇게 한 해를 보내고 또 새로운 한 해를 맞을 때 마다 새로운 소망과 기대를 가지고 기도하면서 출발한다. 새해를 맞을 때 마다 우리 모두에게는 자신을 향한 기대와 다짐도 있고, 사랑하는 가족을 향한 기대와 다짐도 있을 것이다. 번번이 우리를 실망시키고 좌절감을 갖게 하지만 사회와 정부를 향한 기대와 소망도 있을 것이다. 2023년 새해를 맞으면서 나는 한국 교회를 향한 기대를 새롭게 가지면서 기도의 제목으로 삼고 싶은 강한 소망과 기대를 가져 본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한국 교회도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의 성장과 저력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한때는 기독교 국가라고 말할 정도로 청교도 신앙 정신을 계승하고 교육과 문화, 심지어는 정치 영역에서도 기독교적 가치관을 반영해 오던 미국 사회는 안타깝게도 이제 더 이상 기독교적 가치관을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세속화되어 버렸다. 구주 성탄을 축하하는 성탄의 계절에도 ‘Merry-Christmas’ 는 사라지고 ‘Happy Holiday’라는 단어가 대신하고 있다. 크리스마스 트리도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다. 외양만 보면 한국이 더 기독교 국가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국을 처음 방문하는 외국인들 가운데는 도심지 곳곳에 세워져 있는 교회의 십자가를 보고 마냥 놀라워한다. 붉은 네온사인의 십자가 불빛은 한국이 마치 기독교 국가라는 착각을 갖게 할 정도다. 기독교 선교 2세기를 맞는 한국 교회는 그동안 급격한 양적 성장을 하였다. 이와 같은 양적 성장과 더불어 한국사회 초창기의 교회는 문맹 퇴치와 교육, 선진 과학 기술의 보급, 의료사업을 통한 사회 봉사, 여성의 인권 고양 등 사회를 계몽하고 인도하는 사회 봉사적 기능을 잘 수행하였다. 어두운 사회 구석을 밝히며, 차원 높은 윤리 의식을 고양하는 등 그야말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였다. 그러나 언제부터 인지 모르지만 교회가 더 이상 이러한 사회 선도적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자성의 소리들이 교회 안 밖으로부터 들려오고 있다. 교회가 사회를 향해 주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기껏해야 각종 모임으로 인한 교통 혼란과 소음, 교회 인근의 집 값 하락뿐이라는 혹독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를 인식한 의식 있는 교회들은 노인대학 운영, 노숙자 보살피기, 소년소녀 가장 돕기와 같은 사회 봉사활동을 통해 주민들의 사랑을 받는 교회로 자리 매김 하려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새해에는 이런 의식 있는 교회들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청소년들을 위한 건전한 문화 행사, 독서 교실, 주차장 개방, 결혼식장 제공 등을 통해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일에 앞장서는 교회가 많아져야 한다. 잘 운영되던 노인대학 프로그램을 없애 버리고 자기들만의 폐쇄적인 예배 공간을 만들어 즐기는 것으로 만족하는 교회는 지역사회를 향해 던져줄 선지자적 메시지를 선포하지 못한다. 이런 신앙공동체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람직한 신앙공동체의 모습이 아니다. 가난하고 소외 받는 자들의 이웃이 되는 교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교회의 바람직한 모습일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이 세계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세계라는 사실을 고백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환경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식목일에 나무를 심고, 낙동강과 수영천을 살리는 일은 구청에서 관심을 갖기 전에 교회가 먼저 관심을 갖고 앞장서서 실천해야 한다. 환경을 가꾸고 보존하는 운동과,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 재활용을 위한 쓰레기 분리 수거 운동은 교인들이 솔선수범해야 할 일이다. 교회 건물을 좀더 환경 친화적인 건물로 아름답게 건축하는 일에도 이제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자신들의 사례금에서 소득세를 자진 신고하여 세금을 납부하는 목회자들이 있다면 교회는 정말 사회를 인도하는 지도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신앙의 의미를 협의적 의미의 경건 생활 또는 교회 생활에만 제한시키지 않고 정치와 사회, 경제, 교육, 예술 등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구현해야 한다는 의식의 전환이 있다면 교회는 사회를 향해 고상한 두려움을 주는 독특한 신앙 공동체가 될 것이다. 이런 교회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성장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교회는 더 이상 지역 주민들의 관심과 유리된 채 지역 사회 속의 고립된 섬처럼 존재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인들은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는 삶”(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을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을 향해 문을 열어야 한다. 폐쇄적인 교회는 자기 집단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익 단체로 전락할 뿐이다. 2023년 새해 벽두에 한국교회가 성경적 세계관을 구성원들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구현하도록 인도하는 의식 있는 신앙 공도체로 성장해 갈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 현 미국 Evangelia University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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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9
  • [최호숙 목사] 주의 말씀이 삶의 원칙이 되도록 하라
    주의 말씀이 삶의 원칙이 되도록 하라 우리는 보통 연말연시(年末年始)가 되면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한해가 지나고 새해가 밝았다는 표현을 한다. 그 말이 정말로 실감이 나는 2022년 한해였다. 정치적 혼란과 교계적으로 교회들이 코로나로 인하여 위축되고 회복을 위한 몸부림으로 달려온 영적 위기의 한해였고 경제적 곤핍으로 인하여 고통 속에 달려온 한해였다. 이제는 시온의 영광이 밝아오듯 이 땅에도 시온의 영광이 밝아온 것이다. 영어에서 정월을 ‘January’라고 하는데 이 말은 로마의 쌍면신(神) ‘야누스’에서 시작된 말이다. 로마 사람들은 정월이 되면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의 신을 수문장으로 세운다. 뒤에 있는 얼굴은 지나간 해를 돌아보는 회고(回顧)의 얼굴이요, 앞에 있는 얼굴은 새해를 전망(前望)하는 계획의 얼굴이라고 한다. 인간은 과거를 돌아보는 회고와 미래를 바라보는 지혜의 눈이 필요하다. 그리고 앞을 향하여 달려가는 추진력이 필요하다. 한국 속담에 “시작이 반이다”라는 속담이 있다. 영국 속담에도“시작이 좋으면 반은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격언이 있고, 독일 격언에는 “입구에 들어서는 첫 발자국이 가장 힘들다”는 격언이 있다. 우리는 2023년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벌써 첫발을 내디뎠다. 로마인들처럼 야뉴스 신에게 내 인생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전능의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믿음이 필요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였을 때 초장에 홍해의 장애물이 놓였던 것처럼 우리 인생길에는 순탄대로만 있을 수 없다. 홍해가 있고, 광야길이 있고, 춥고 배고픔이 있고, 목마름이 있는 현실임을 직시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 뒤에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하나님이 계신 것이다. 이런 하나님을 신뢰하고 출발해야 한다. 아직도 마음과 삶에 시작이 없다면 2월이 오더라도 다시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 시작 없는 끝은 있을 수가 없다. 광야 길 출발이 있어야 가나안 도착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국을 향한 힘찬 출발이 있어야 도착이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시작할 때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히 3:14 ). 또한 우리는 한 해를 걸어가면서 성경(聖經)을 성경(聖鏡)되게 하여야 한다. 어감이 이상하지만 성경을 단순한 인생 교양을 위한 글(經)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의 영혼과 육신의 거울(鏡)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했으면 내 삶 속에서 경건의 삶을 실천하며 영성 회복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라” 했으면 기도의 줄이 끊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며, “서로 사랑하라”했으면 사랑의 폭이 넓어져 가야하고, “화 분내지 말라” 했으면 자기 절제 통제가 필요하며, “교만하지 말라” 했으면 하나님 앞에 교만을 버려야 하고, “땅끝까지 증인이 되라”고 했으면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 다윗은 고백하기를“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시119:105).”고 하였다. 삶의 원칙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뜻이다. 사도 요한은 주님의 말씀대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새해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원칙이 되는 2023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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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8
  • [박동철 장로] “죄와 벌”, 정말 양심이 움직이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고전 명작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제목이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명쾌하다. 죄에 따르는 벌과 이를 넘으려는 심리의 갈등을 그린 세계명작이다. 스토리를 논하기는 여백이 부족하여 제목이 던지는 직관적 메시지를 음미하면서 얘기를 나눠보고자 한다. 사람이 지은 모든 명작을 넘은 성경에도 ‘죄와 벌’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중에 인간에게 던진 예수의 마지막 한마디는 세상의 죄를 찢어버리는 거대한 함의가 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에 예수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면서 “다 이루었다”고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있다. 사복음서 중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예수는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하신 모든 일은 세상 구원을 위한 헌신이었다. 그리고 죗 값의 벌(罰), ‘죽음’이었다. 바로 사람의 죄로 인해 멸망해버린 세상의 죄를 ‘십자가 벌’로서 해결한 것이다. 예수는 그 긴 여정 33년의 마지막 날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철저히 처벌받은 것이다. 마지막 남긴 말씀이 ‘다 이루었다’는 거룩하고 거대한 음성이다. 창조주와 인간의 죄 사이에 있는 억만의 골을 인간이 벌로 해결할 수 없으니 당신이 스스로 벌을 받음으로써 ‘죄’가 해결되는 역사(役事)가 일어났다. 이것이 예수와 세상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위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다. 죄와 벌을 이야기할 수 있는 한 토막이 있다. 1982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1947년 사망한 미국 정치인이자 법조인 피오렐로 라과디아의 이야기다. 라과디아가 판사로서 법조인 시절 재판 과정에서 눈물겨운 아름다운 판결을 내린다. 한 할머니가 손자에게 빵 한 조각을 주기 위해 가게서 빵을 훔친다. 그리고 법정까지 오게 된 할머니에게 라과디아 판사는 할머니에게 벌금 10달러를 판결한다. 그리고 벌금 10달러는 판사인 자기가 부담하겠다고 말했다. 그 이후 따라붙는 판결이 중요하다. 라과디아 판사는 이날 할머니 벌금 판결에 참석한 검사 변호사 방청객 모두에게 벌금 50달러를 선고한다. 우리 모두는 할머니가 손자를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치는데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한 죄가 있다고 판결이유를 밝혔다. ‘죄와 벌’에 대한 양심이 주체할 수 없이 작동한 아름다운 판결이다. 이 판결은 긴 역사 동안 회자되며 죄와 벌을 해결하는 양심의 판례가 되고 있다. 죄와 벌에 우리는 누구나 자유로울 수 없다. 죄를 지을 수 있고 억울한 누명을 쓸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모든 죄를 해결한 하나님의 판례를 보고 우리는 최소한 양심의 작동을 살려내야 한다. 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세상에 살면서 말이다. 요즘 우리 사는 세상에서 죄와 벌을 위해 거대한 사회 작동이 움직이고 있다. 많은 법정이 성수기를 맞은 듯 오일장날처럼 복잡하다. 그중에서도 온 국민의 시선을 끌고 있는 한 국가지도자의 죄와 벌을 두고 국민을 피곤케 하는 다툼이 가관스럽다. 판사의 마지막 판결까지는 많은 시간이 있다. 그러나 죄와 벌을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도 작은 양심의 작동으로 나타나는 순리가 작은 아름다움이다. 검사와 판사가 공히 ‘죄 의혹’에 따른 법적인 절차를 진행하는데, “그건 조작이요”하고 진영 스크럼을 짜고 정치인 특유의 ‘국민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는 대응은 너무 가관이다. 차라리 이건 분명 사실이 아니고 이건 잘못이 있으니 공직은 내려놓겠다는 정도의 양심 작동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거대하게 보이는 듯한 정치적 방패를 만들다 썩은 동아줄처럼 국민을 위한 정당정치마저 허물어질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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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와 세상
    2023-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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